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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

    서울 종로구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1일 밝혔다. 김 의사의 후손, 의열단 후손, 3·1운동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구성된 서울시 ‘시민위원 310’위원 등이 참석한다. 기념식은 김 의사 의거일인 22일 대학로 36-4 인근 지역에서 펼쳐진다. 이곳은 김 의사가 생을 마감하기 전 일본 군경 1000여명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아울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회는 김 의사 의거 현장 기념 조형물 설치 구상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조형물 디자인은 김 의사가 맞은 총 11발을 상징하는 구멍 11개와 김 의사가 일본 군경들과 싸운 장면이 담긴 구본웅 화백의 시화첩 ‘허둔기’를 활용한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우리 겨레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김 의사의 행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국민들 움직임 심상치 않다고? 인터넷 끊어!”

    “국민들 움직임 심상치 않다고? 인터넷 끊어!”

    시민들이 동요하면 인터넷부터 차단하고 보는 정책이 중국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등 전세계로 확산하는 추세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 14일(현지시간)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는 정부의 휘발류 등 갑작스러운 연료 인상에 반발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뉴욕타임스는 “사흘간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과 군경이 충돌해 최소 8명이 숨지고 68명이 총에 맞았다. 당국에 폭행은 100여건 넘게 보고됐다”고 전했다.짐바브웨 정부는 시위 규모가 커지는 것을 막고자 메신저 서비스를 포함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접근을 완전 차단했다. CNN에 따르면 짐바브웨 정부의 이같은 결정은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가 대통령선거 결과와 관련 인터넷 접속을 완전히 막은지 2주 만에 일어난 일이다. CNN은 “최근 3년간 정부에 의한 인터넷 차단 빈도가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면서 “세계 각국이 온라인상의 반정부 기류를 억압하려 함에 따라 이런 정책은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지 언론관련 시민단체인 미샤짐바브웨 관계자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이 표적이 돼 차단됐고, 화요일 정오에는 모든 인터넷 연결이 끊겼다”고 밝혔다. 인터넷 자유를 지지하는 단체 ‘킵잇온’은 짐바브웨 정부에 보낸 공개 서한에서 “폐쇄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방해하고 대중이 인권 유린을 감시할 수 없게 하는 어둠의 덮개를 만든다. 언론인들은 디지털 통신 도구 없이는 정보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면서 “인터넷 폐쇄가 뉴노멀이 돼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 실제로 이제 3주 차에 접어든 2019년 짐바브웨, 수단, 방글라데시, 민주콩고, 가봉 등 5개국이 부분적 또는 완전한 인터넷 차단을 실시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인터넷은 총 185회 차단됐다. 이는 2017년 108개보다 약 56% 증가한 것이다. 이와 관련 킵잇온 관계자는 “수많은 인터넷 검열 전술과 마찬가지로 전면 차단 또한 중국에서 대중화 됐다. 이 전략은 중국 동맹국에 급속히 확산됐다”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최악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며, 인도는 2017년부터 2년 연속 최다 폐쇄의 불명예를 기록했다”고 평가했다. 인터넷 차단은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에 국한한 얘기가 아니다. 지난 2017년 카탈루냐 독립 국민투표 탕시 스페인 중앙정부는 카탈루냐 일대의 인터넷 접속을 억제하고 웹사이트를 차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도 정부에 입맛에 안 맞는 웹사이트를 폐쇄하는 정책을 채택해 왔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무죄받은 제주 4·3] “재판이 뭐야, 그냥 쏴죽일 땐데… 앞줄 15년, 뒷줄은 무기 이랬지”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대사의 ‘대학살극’이다. 2003년 발표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른 공식 희생자(사망, 행방불명 등)만 1만 4000여명이다. 추정되는 희생자는 그 두 배가 넘는다. 세상이 이승을 떠난 수많은 넋을 기리는 동안, 억울하게 전과자가 돼 몸을 낮추고 살아야 했던 불법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은 71년을 더 살아왔다. 이름도 불리지 않고 형량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전국 각지 형무소에 흩어져 청춘을 허망하게 보내버린 18명의 피해자들이다. 육체에 남은 크고 작은 흉터만큼, 이들에게 남겨진 전과기록도 수십 년 동안 끈질기게 몸과 마음을 괴롭혔다. 서울신문은 구순이 다 돼서야 공권력이 찍은 낙인을 떨치게 된 이들의 한 맺힌 삶을 들었다. 인터뷰는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16일 피해자들의 자택에서 진행됐다.●“그냥 살았는데 내란죄래… 따지지도 못했어” 4·3이 극으로 치닫던 1948년 10월. 군경 토벌대는 제주도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벌 작전으로 희생됐다. 미처 해안가로 이주하지 못해 사살된 주민들도 있었고, 뒤늦게 내려온 주민들도 ‘폭도들을 지원했던 것 아니냐’며 무차별적으로 끌려갔다.양근방(86) 할아버지도 군경 작전으로 부모님과 떨어지고 형제도 잃었다. 중산간 마을에 혼자 남아 총살될 위기에 처했던 양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자 산에서 버틸 수 없어 헌병대에 자수했다. 곧바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갔더니 인천형무소였어. 마당에 줄줄이 앉혀 놓더니 ‘이 열은 7년, 이 열은 15년, 이 열은 무기(징역)’ 이러더라고….” 6·25 전쟁이 발발해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양 할아버지는 광주까지 갔다가 다시 붙잡혀 형이 추가됐다. “광주고법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넌 북한군이 풀어줬으니 도피자다’라면서 징역 10년을 더 때리더라고. 그땐 10년인 줄도 몰랐어. 최근에 광주형무소에 신원조회해서 알았지.”부원휴(90) 할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19세 때 집에 들이닥친 계엄군에게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지금도 봉투에 싸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제주공립농업중학교 학생증’을 황급히 내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 막사에 붙잡혀 갔는데 ‘너 삐라 같은 거 안 뿌렸냐. 산사람들한테 쌀 갖다주지 않았느냐’ 하더라고. ‘학생이어서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하니까 봉으로 마구 팼어.” 전주형무소로 갔다가 인천형무소로 이감된 부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유는 ‘내란죄’라고 했다. 왜 내란죄냐고 미처 따지지도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7년, 15년 선고받았는데 ‘난 살았다’고 생각했지. 그땐 재판 없이 가두고 쏴 죽이고 아주 무법천지였어.” 형무소 시설이 좁고 수형자 관리가 엉망이어서 부 할아버지가 있던 전주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돌았다. “세면장에 가면 피고름이 섞인 똥이랑 온갖 이물질이 쌓여 있었어.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질(설사병)도 걸리고 많이 죽어나갔지.” 1949년 7월 열여섯 살이던 김순화(86) 할머니도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갇혔다. 변론할 기회도 없었고, 몇 년 형인지도 몰랐다. 당시 상황을 묻는 질문에 김 할머니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이유가 뭔지. 재판도 안 받고 붙잡혀 있다가 배 타고 형무소로 갔어.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토벌대가) 부모님을 왜 죽였는지도 모르겠어.”●“전과자 낙인 찍히니 육지로 돌아다녔지” 형을 마치고 살아 나왔지만 흉터는 진하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왼쪽 팔에 있는 콩알만 하고 동그란 초록색 문신을 보여 줬다. “형무소에 같이 수감됐던 분이랑 각자 왼팔에 바늘로 이렇게 새겼지. 나중에 만나서 알아보게.” 함께 문신을 새긴 김경인(87) 할머니와는 69년 뒤 같이 재심을 청구하는 동지로 다시 만났다. 작은 문신은 71년 세월을 버텼고, 김 할머니의 아픈 기억도 마찬가지였다. “빨리 다 끝났으면 좋겠어. 피곤해. 그냥 묻어버리고 싶어. 생각만 하면 너무너무 속상해.” 양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가장 한이 맺힌 일이 있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60년 10월 출소해 고향으로 돌아오자 불과 7개월 전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 3월에 아버님이 형무소로 면회를 오셨어. 내가 나갈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니까 아버님이 ‘너를 두고 어떻게 제주로 가느냐’ 하시고, 돌아서서 막 눈물을 흘려. (나도) 감옥에 돌아가서 한참 울었어.” 양 할아버지의 부친은 제주로 돌아온 뒤 일주일 만에 숨졌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면회를 다녀온 뒤 식사를 하지 않고 줄곧 피를 쏟아내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10년 만에 육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4·3으로 10년 가까운 형을 산 양 할아버지는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 돼 있었다. 일을 해 모은 돈으로 밭을 살 때도 조총련과 연통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야 했다. 결국 연고도 없는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겨 목장 일을 하며 20년을 살았다. 그렇다고 정부의 감시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전과자가 신고도 안 하고 제주도에서 없어지니까 ‘북한으로 가려는 거 아니냐’면서 제주도로 다시 잡아가더라고. 남의 목장에서 월급 받고 산다고 말해서 하룻밤 조사받고 풀려났어.” 양 할아버지가 다시 제주로 돌아온 건 1990년이었다. 전과기록 탓에 자꾸만 찾아와 감시하는 경찰들 때문에 부 할아버지는 본적도 바꿨다. “원래 본적이 화북리였는데 이도1동으로 옮겼어. 옮겨도 얼마간은 찾아오더라고.” 부 할아버지는 이후 19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지만 전과 기록 때문에 하마터면 운명이 달라질 뻔했다. “공무원도 전과가 있어서 못할 뻔했어.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된 거야. 제주 사람들은 4·3으로 억울하게 형무소 갔다 왔다는 걸 다 아니까.” ●“만시지탄… 그래도 새로 태어난 기분” 재심이 시작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된 ‘수형인 명부’는 1999년 추미애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이 처음 발견했다. 이후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진상보고서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에 대해 직접 사과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불법재판의 피해자들이 유죄의 낙인을 지우는 데는 그로부터 15년이 더 걸렸다. 재심 당사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정기성(97) 할아버지는 치매가 악화돼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진 후부터 공판에 출석하지 못했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출석이 원칙이지만 재판부는 정 할아버지의 상태를 고려해 진단서로 대신하면서 공판을 진행했다. 부 할아버지는 인터뷰 도중 거듭 “만시지탄”이라고 되뇌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양 할아버지는 연방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험하고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 오늘에 왔어.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야.” “이제 우는 것도 귀찮다”던 김 할머니도 기뻐했다. 김 할머니는 4·3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한 채 살았다고 한다. “내가 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록만 없어졌으면, 아이들에게도 그(형무소에 갔다 왔다는) 기억만 없어졌으면 좋겠어.”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군사재판 불법 인정한 첫 사법적 판단 ‘억울한 옥살이’ 18명 재심서 명예회복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제주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사건 수형인 18명이 71년 만에 조금이나마 한을 풀게 됐다. 법원이 17일 4·3 당시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으로 이뤄진 군사재판은 불법이었다고 처음으로 판단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 제갈창)는 17일 임창의(98) 할머니 등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형사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실체를 심리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것으로, 수형인들에게 사실상 무죄가 선고된 셈이다. 재판부는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했고, 어떤 자료에서도 예심과 소장 자료를 찾을 수 없다”면서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1절부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제주4·3도민연대 등에 따르면 최소 1만 4000여명, 많게는 3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인들은 내란죄, 국가경비법 위반죄 등의 누명을 쓰고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뒤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지만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현재 생존자는 32명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김경인(87·여)·김순화(86·여)·김평국(89·여)·박내은(88·여)·박순석(91·여)·부원휴(90)·양근방(86)·양일화(90)·오계춘(94·여)·오영종(89)·오희춘(86·여)·임창의(98·여)·정기성(97)·조병태(90)·박동수(86)·한신화(97·여)·현우룡(94)·현창용(87)씨 등 18명은 2017년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지난해 9월 5일 재심을 결정했고, 네 차례의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재판부만 멍하니 바라보며 한 많은 세월을 곱씹었다.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경남 고성군, 국가보훈 명예수당 지급 대상 대폭 확대

    경남 고성군, 국가보훈 명예수당 지급 대상 대폭 확대

    경남 고성군은 4일 올해부터 명예수당 지급대상을 확대하고 참전유공자 사망위로금도 인상해 지급한다고 밝혔다.군은 나라를 위해 희생·헌신한 국가유공자들이 존중받는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해 지난해 11월 ‘고성군 국가보훈대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개정했다. 이에 따라 기존 참전유공자와 전몰군경유족에게만 지급되던 명예수당이 참전유공자와 전몰군경 유족을 비롯해 전·공상군경 및 전·공상군경 유족, 순직군경유족, 독립유공자 유족, 무공수훈자, 보국수훈자 등으로 확대된다. 군은 명예수당 지급대상자가 지난해 495명에서 올해 1360여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금액은 6·25 참전유공자 명예수당은 월 20만원, 월남 참전유공자 수당 월 15만원, 그 외 보훈명예수당은 월 5만원씩 지급한다. 군은 사망위로금도 기존 20만원에서 경남도내 최고 수준인 50만원으로 올려 지급한다고 밝혔다. 보훈대상자 명예수당은 고성군에 주소를 둔 국가보훈대상자로 연령제한은 없으며 수당이 중복되면 유리한 수당 하나만 지급된다. 신청한 달부터 지급되고 신규 지급 대상자는 오는 18일까지 읍·면사무소에 신청하면 된다. 백두현 군수는 “보훈명예수당 지급 대상자를 확대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위해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며 “앞으로도 국가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대대손손 자부심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보훈정책을 꼼꼼히 살피겠다”고 말했다. 고성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태국 골프장 실종 한국인 수색 이틀째…‘동굴소년’ 잠수사 투입

    태국 골프장 실종 한국인 수색 이틀째…‘동굴소년’ 잠수사 투입

    태국의 한 골프장에서 강물에 빠져 실종된 한국인 2명의 수색작업이 이틀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25일 오전 10시 20분 태국 중북부 피사눌룩주(州) 한국인이 임대해 운영하고 있는 한 골프장에서 A(76)씨와 B(68)씨 등 한국인 남성 2명이 강물에 빠져 실종됐다. 주태국 한국대사관 측은 사고 발생 직후 영사 인력을 현장에 파견하고 현지 경찰에 신속한 구조와 철저한 수사를 요청했다. A씨 등은 각각 배우자와 함께 전동카트 2대에 나눠 타고 골프장을 가로지르는 강물을 건너기 위해 수송선에 올랐다가 추돌사고를 당했다. 뒤따르던 카트의 추돌로 먼저 타고 있던 카트가 한 부부와 함께 강물에 빠졌고, 추돌사고를 낸 카트에 있던 남성이 이들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 부부 중 아내는 무사히 구조됐지만, 두 남성은 실종됐다. 현지 구조 당국은 군경과 공무원, 민간 구조대원 등 100여 명을 동원해 이틀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구조대원 중에는 지난 6월 태국 북부 치앙라이주(州) 탐루엉 동굴에 갇혔다가 17일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축구아카데미 소속 선수와 코치 13명의 구조작업에 참여한 잠수사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강의 폭이 200m, 최고 수심이 15m에 이르고 유속이 빨라 구조작업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아산시 예산 추가지원하기로 아산, 내년 K리그2 참가한다

    아산시 예산 추가지원하기로 아산, 내년 K리그2 참가한다

    해체 위기에 놓였던 프로축구 아산 구단이 아산시의 예산 지원을 더 받게 돼 내년 시즌 K리그2(2부 리그)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아직 사태가 완벽하게 매듭지어진 것은 아니다. 축구계 관계자는 20일 “아산시의회가 삭감했던 아산 구단 지원 예산을 살리기로 하면서 아산이 내년 K리그2에 정상적으로 참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산시 의회는 앞서 아산시가 축구단 운영 예산으로 신청한 19억 5000만원 가운데 5억원만 승인했다. 5억원도 구단 산하 유소년팀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청산을 위한 직원 운영비로 책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한웅수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이 오세현 아산시장을 만나 아산 구단 존속을 요청하는 등 설득 작업에 나서고, 시의회도 긍정적으로 화답하면서 삭감했던 예산을 살리기로 했다. 14억 5000만원이 추가로 구단 운영 지원에 배정될 것으로 보여 내년 시즌 아산이 K리그2에 참가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전망이다. 아산은 올해 K리그2 우승으로 1부 자동 승격 자격을 얻었지만, 경찰청의 선수 모집 중단으로 내년 최소 인원(20명)을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승격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 뒤 시민구단 전환을 통해 내년 K리그2에 참가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프로축구연맹도 지난 3일 이사회를 열어 이날까지 리그 참가 여부 결정을 유예했다. 아산은 아산시의 예산 지원에 힘입어 경찰청 소속 선수 14명을 활용하는 한편 선수를 추가로 충원해 리그 참가를 위한 최소 인원(20명)을 채운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K리그2는 내년 시즌에도 10개 구단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일단 2015년과 이듬해 11개 구단의 홀수 체제로 운영된 전례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산이 시민구단으로 전환을 확정하지 않았기에 내년에도 같은 위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불안한 대목이다. 군경 팀과 시민구단 사이 어정쩡한 절충점을 찾아 미봉했을 뿐이다. 아산시는 최근 2주 사이에 창단→해체→존속으로 계속 입장이 바뀌었다. 내년에 아산시가 시민구단 전환 대신 해체를 선언한다면 또 문제는 되풀이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 잔인한 고문에도 독립운동가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초인적인 저항 정신을 보여 준 독립운동가가 있다. 육신의 일부가 절단돼 선혈이 쏟아지는 중에도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친 윤형숙(1900~1950) 열사. 열사를 흔히 ‘남도(南道)의 유관순’이라 부른다. 전남 여천역에서 내려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78)씨를 만나 여수 이순신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둘러보았다. 2014년 건립된 기념탑 옆에는 팔이 잘린 열사의 모습이 담긴 부조물이 있다.윤씨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평생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인물”이라고 열사를 소개했다. 윤씨의 할아버지 윤자환(1896~1950·대통령 표창) 선생도 3·1 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윤씨는 10여년 동안 기록 발굴에 매달린 끝에 알려지지 않은 열사의 공적을 찾아냈다고 한다. 열사는 닥쳐올 운명을 암시하듯 혈녀(血女)라는 이명(異名)으로도 불렸다. 학적부와 판결문에는 ‘윤혈녀’로 적혀 있다. 윤씨는 윤혈녀와 호적상의 윤형숙이 동일인임을 어렵사리 확인했다.●윤 열사 조카, 10여년간 관련 공적 찾아 내 타오르는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번졌던 1919년 3월 광주에서도 민중과 학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윤 열사는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는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박애순(1896~1969·건국훈장 애족장) 교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 안팎의 사정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광주 만세운동은 3·1운동 전부터 움트고 있었다. 일본 도쿄 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2·8 독립선언을 청년들에게 알렸다.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와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례하고 서울 시위에 참가한 김철도 귀향해 남궁혁의 집에 모여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등을 밤새 만들어 장날인 8일 서울과 똑같은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아 다시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거사일을 바꾸고 학생들과 읍민들에게 참가를 독려했다. 이에 박 선생도 김복현,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통을 받고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당연히 참가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학생들은 수피아홀에 숨어 밤새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농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기독교인, 주민 등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 윤형숙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시장 안을 돌아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 앞으로 행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본정통을 돌아 경찰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헌병들은 실탄 사격을 하고 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일본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 열사의 왼팔 상단부를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잘려나간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남은 팔에서도 피가 쏟아졌고 윤 열사는 정신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열사의 몸 일부였던 팔이 땅에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은 태극기를 꼭 붙잡고 있었다. 유혈이 낭자한 몸으로 열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팔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높이 흔들었다. 그러면서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했다. 군중은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 자리에서 100여명이 구금되었다.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 열사의 행동에 일본 군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육군성에 다음날 보고됐다. 열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심문을 당했다. 일경은 굽히지 않는 열사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을 멀게 했다. 팔이 잘린 열사는 재판정에도 나가지 못했고 결석재판으로 4개월 형에다 4년 연금형을 더한 판결을 받았다.●팔 잘려 재판 못 나가… 결석재판 징역 4개월 이후 열사는 함남 원산 마르다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열사는 요양차 전북 전주로 내려가 전주기전야학교 사감으로 일하고 고창군의 한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1939년 고향 여수로 내려갔다. 왼쪽 눈의 시력마저 거의 잃었지만 열사는 봉산학원 교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던 열사에게 더 큰 비극이 닥쳤다. 열사는 평소 반공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다. 지인의 집으로 피신했던 열사는 뒤를 캔 내무서원에게 붙잡혔다.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북으로 퇴각하기 직전 북한군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열사를 총살했다. 파란만장한 20세기의 전반을 헤쳐 온 열사의 나이 50세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 손양원 목사도 함께 총살당했다. ●잘린 팔 무등산에 묻혔다 전하지만 못찾아 열사는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치홍씨와 택시를 함께 타고 30여분쯤 가니 확장 공사 중인 도로 옆 비탈에 열사의 묘소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작은 공장이 있고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쓸쓸한 모습이었다. 도로 너머로 추수를 마친 창무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창무리는 조선시대에 말을 방목해 기르던 목장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 순교자윤형숙전도사지묘’(故殉敎者尹亨淑傳道師之墓)라고만 씌어 있다. 윤씨는 이 비석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열사가 총살당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고향 친지들은 20리 길을 걸어 학살 현장을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 한쪽 팔이 없는 시신을 수습해 그날 밤 고향 뒷산에 가매장했다. 이듬해 4월 교회 사람들이 묘비를 만들어 고향 마을로 가져왔으나 마을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항일 운동에 몸바친 열사에게 단순히 ‘순교한 전도사’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석은 방치돼 소고삐를 매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가까운 친지들과 마을 유지들이 모여 묘를 이장하고 조촐한 묘비 제막식을 열어 열사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 열사의 팔은 누군가 광주 무등산 자락에 따로 묻어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팔을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는데 팔무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추모비엔 이렇게 썼다. “당신의 충령(忠靈)을 천추(千秋)에 길이 전하게 될 것이며 당신의 거룩하신 충절을 값없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부, 2004년에야 건국포장 추서 열사에게도 한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젊음은 일제에, 생의 마지막은 북한군에게 희생된 열사의 일생은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었다. 2004년 정부는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새로 만든 묘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경기 광주시 순국선열 추모식

    경기 광주시 순국선열 추모식

    경기 광주시는 지난 15일 경안근린공원 내 현충탑에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 합동 추모식’을 열었다. 이날 추모식은 보훈단체인 광복회, 전몰군경유족회, 전몰군경미망인회 합동 주관으로 열렸으며 신동헌 시장을 비롯 시의원, 보훈단체장, 안보단체장 및 보훈가족 등 120 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헌화와 분향, 추념사, 헌시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됐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추모했다. 신 시장은 “대한민국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현재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자유가 있다”며 “광주시는 국가보훈대상자에 대한 예우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일제 잔재 ‘헌병’→‘군사경찰’로 변경

    정훈→공보정훈, 육군 화학→화생방으로 헌병이 일제강점기 ‘헌병대’를 연상케 한다는 지적에 따라 창설 70년 만에 ‘군사경찰’로 명칭이 변경된다. 국방부는 12일 “병과 명칭 개정을 위한 ‘군인사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을 14일 입법예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헌병’ 병과에 대해 일제강점기에서 유래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고 업무 성격을 더 명확히 하고자 ‘군사경찰’로 병과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국방부는 헌병 이름을 군경(軍警)·군경찰(軍警察)·경무(警務) 등으로 개칭하는 것을 검토해 오다가 최근 헌병 내 의견을 고려해 군사경찰로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과거 사상과 이념무장을 강조하던 시대에 ‘정치훈련’(政治訓練)의 약어로 만들어진 ‘정훈’ 병과를 ‘공보정훈’(公報精訓)으로 변경한다. 정(政)을 정(精)으로 변경하면서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했다. 여기에도 바를 정(正)과 뜻 정(情)이 후보군으로 올랐다. 이 밖에도 육군 ‘화학’ 병과는 생물학과 핵 분야까지 모든 영역을 포함하도록 ‘화생방’ 병과로 개정하고 해·공군의 경우 시설과 부동산 관리 등 특정 분야 임무만을 대변하고 있는 ‘시설’ 병과의 명칭을 일반 공병 지원과 기동, 지형정보 등 전반적인 임무를 포괄할 수 있도록 ‘공병’ 병과로 개정했다. 또 각 군 ‘인사행정’ 병과를 ‘인사’ 병과로 변경했다. 개정안은 이달 14일부터 다음달 24일까지 입법 예고기간을 거친 다음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내년 1월 내로 입법이 완료된다. 국방부는 “이번 개정안은 시대변화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명칭을 개선하고 현재 수행 중인 병과의 임무를 정확히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포토다큐]그저 축구가 좋았습니다. 우리도 아이들도

    [포토다큐]그저 축구가 좋았습니다. 우리도 아이들도

    ·‘해체위기’ K리그2 아산 무궁화축구단 팩스로 전송된 단 1장의 문서였다. 리그 마감을 2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지난 9월 경찰학교는 더이상 아산 무궁화축구단 선수를 모집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구단에 통보했다. 이로 인해 의무경찰 선수로 이루어진 K리그2 아산 무궁화축구단은 해체 위기에 놓였다.·경찰학교, 갑작스런 선수모집 중단  2016년 창단한 아산 무궁화축구단은 상주 상무와 같은 군경 축구단으로 대한축구협회에 소속된 축구 선수들에게 군 복무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창단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며 올해는 리그 우승까지 차지해 1부리그 승격도 앞두고 있다. 구단도 2023년부터 의경제도가 폐지될 예정이라 시민구단으로의 변모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선수 모집 중단 통보로 손 쓸 겨를이 없게 됐다. ·의경선수들 창단 2년만에 우승... 내년은 기약못해  선수단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전역하는 선수들을 제외하면 내년에는 14명의 선수만 남게 된다. 이 선수들은 팀이 해체될 경우 제대할 때까지 축구경기를 할 수 없게 된다. 14명의 선수로는 아마추어 대회 참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의경 신분인 선수들은 인터뷰에 조심스러워했다. · 유소년 선수들 전학 불가능. 해체땐 미래 잃을 수도  구단과 존폐를 함께하는 것은 성인 선수뿐만이 아니다. 아산 구단은 18세 이하 유소년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학생들은 축구 하나만 보고 전국 곳곳에서 아산으로 거취를 옮겼다. 하지만 이들은 구단이 해체되면 그들의 꿈인 축구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축구를 할 수 있는 학교나 클럽으로의 전학이 시기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년 제주에서 축구 유학을 온 양군호(17)군은 “해체란 말을 떠오르기도 싫고 상상하기도 싫다. 계속 축구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아산시 이순신종합운동장에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홈경기가 열렸다. 우승을 확정 지은 후 경기였지만 선수들은 결승전을 뛰듯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경기는 드라마 같은 아산의 역전승이었다. 역전골의 주인공 임창균 선수는 “팀이나 개인적으로 침체된 분위기가 이 골로 시원하게 풀어지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선수들 혼란 속에서도 최선. 팬들은 변함없이 응원.  아직 무궁화축구단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축구계 유명인사들은 청와대 앞까지 가서 집회를 가졌고 지역사회는 토론회 등을 개최하며 다각도로 구단 존속의 방안을 찾고 있다. 그리고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팬들은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단지를 축구를 하고 싶고 보고 싶어서다. 글.사진 정연호 기자
  • [포토 다큐] 그저 축구가 좋았습니다…우리도, 아이들도

    [포토 다큐] 그저 축구가 좋았습니다…우리도, 아이들도

    팩스로 전송된 단 1장의 문서였다. 리그 마감을 2달도 채 남겨 놓지 않은 지난 9월 경찰학교는 더이상 아산 무궁화축구단 선수를 모집하지 않겠다고 구단에 통보했다. 이로 인해 의무경찰 선수로 이루어진 K리그2 아산 무궁화축구단은 해체 위기에 놓였다. ●경찰학교, 갑작스러운 선수 모집 중단 통보 2016년 창단한 아산 무궁화축구단은 상주 상무와 같은 군경 축구단으로 대한축구협회에 소속된 축구 선수들에게 군 복무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창단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며 올해는 리그 우승까지 차지해 1부리그 승격도 앞두고 있다. 구단도 2023년부터 의경제도가 폐지될 예정이라 시민구단으로의 변모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선수 모집 중단 통보로 손 쓸 겨를이 없게 됐다.●의경 선수들, 창단 2년 만에 우승… 내년은 기약 못 해 선수단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전역하는 선수들을 제외하면 내년에는 14명의 선수만 남게 된다. 이 선수들은 팀이 해체될 경우 제대할 때까지 축구경기를 할 수 없게 된다. 14명의 선수로는 아마추어 대회 참가도 어렵기 때문이다. 의경 신분인 선수들은 인터뷰에 조심스러워했다.●유소년 선수들 전학 불가능… 해체 땐 미래 잃을 수도 구단과 존폐를 함께하는 것은 성인 선수뿐만이 아니다. 아산 구단은 18세 이하 유소년 선수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학생들은 축구 하나만 보고 전국 곳곳에서 아산으로 거취를 옮겼다. 하지만 이들은 구단이 해체되면 그들의 꿈인 축구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실정이다. 축구를 할 수 있는 학교나 클럽으로의 전학이 시기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작년 제주에서 축구 유학을 온 양군호(17)군은 “해체란 말을 떠오르기도 싫고 상상하기도 싫다. 계속 축구가 하고 싶다”고 말했다.지난 4일 아산시 이순신종합운동장에서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홈경기가 열렸다. 우승을 확정 지은 후 경기였지만 선수들은 결승전을 뛰듯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다. 경기는 드라마 같은 아산의 역전승이었다. 역전골의 주인공 임창균 선수는 “팀이나 개인적으로 침체된 분위기가 이 골로 시원하게 풀어지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선수들 혼란 속에도 최선… 팬들은 변함없이 응원 아직 무궁화축구단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축구계 유명인사들은 청와대 앞까지 가서 집회를 가졌고 지역사회는 토론회 등을 개최하며 다각도로 구단 존속의 방안을 찾고 있다. 그리고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팬들은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고 있다. 단지 축구를 하고 싶고 보고 싶어서다. 글 사진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IS의 끔찍한 테러 유산 “1만 2000구 시신 매장”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점령했던 이라크 땅에서 약 1만 2000구의 시신이 있는 집단 매장지 202개가 발견됐다. 뉴욕타임스(NYT) 등은 6일 이라크주재 유엔사무소(UNAMI)를 인용해 2014년부터 3년간 IS의 근거지였던 이라크 서부 니네베 주와 북부 모술 등에서 IS가 남긴 집단 매장지 202곳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니네베에서 95개, 키르쿠크에서 37개, 살라 알딘에서 36개, 안바르에서 24개 등이 발견됐다. 보고서는 이 집단 매장지들을 ‘테러의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모술 인근의 카스파 싱크홀의 매장지 한곳에서만 6000구의 시신이 쏟아져 충격을 던졌다. 이곳에서 나온 시신에는 이라크 군경은 물론 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민간인이 다수 포함돼 있어 대량 학살이 자행됐음을 시사했다. 얀 쿠비시 UNAMI 대표는 “IS가 남긴 집단 매장지는 인간의 참혹한 죽음과 극심한 고통, 충격적인 잔혹함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한탄했다. 이번 집단 매장지들의 발견을 통해 그간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IS의 광범위한 폭력, 대량 학살,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가 속속 확보되고 있다고 NYT는 평가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한국판 신들러’ 故문형순 전 서장 흉상 세운다

    ‘한국판 신들러’ 故문형순 전 서장 흉상 세운다

    ‘예비검속’ 명령 거부, 주민 200여명 구해 제주지방경찰청은 다음달 1일 청사 안에서 ‘한국판 신들러’로 불리는 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을 추모하는 흉상 제막식 행사를 갖는다고 28일 밝혔다.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문 전 서장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에 가입, 중앙호위대장을 맡아 조선혁명군 지원을 통해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펼쳤다. 광복 이후에는 경찰 신분으로 서울을 거쳐 제주에 내려왔고, 1947년 7월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시작으로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모슬포서장 당시인 1949년 1월 군경이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100여명의 명단을 압수, 다수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의 자수를 권유하기도 했다. 관련자들은 자수한 데 이어 전원 훈방됐다. 특히 같은 해 11월 성산포서장으로 일하면서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이 시작됐지만 상부의 총살 명령에 ‘부당하므로 불이행’이라고 맞서 주민 200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문 전 서장은 1953년 9월 경찰 퇴직 이후 제주에서 극장 매표원 등으로 일하다 1966년 6월 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후손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2005년 7월 대정읍 마을주민들은 대정읍 동일삼거리 짐개동산에 문 전 서장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문 전 서장 흉상 제막식에는 서귀포시 성산·대정읍 주민뿐 아니라 퇴직 경찰관 모임인 경우회, 4·3 관련 단체 관계자 등도 참석할 예정이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여순사건 70주년] 3살 때 국군이 철도 기관사 부친 총살… 모친 “이승만이 죽였다”

    [여순사건 70주년] 3살 때 국군이 철도 기관사 부친 총살… 모친 “이승만이 죽였다”

    여수 14연대, 제주4·3 진압 거부하고 봉기 “얘기 한 번 들어봅시다” 한마디 꺼낸 부친, 순천 장악한 국군에 체포된 뒤 29세 사살 지역사령관 계엄령에 민간인 1만명 학살 장씨 “연좌제 낙인 고통… 진실 규명돼야”“철도 기관사였던 아버지는 70년이 지나도록 아직 퇴근을 못 했습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 4·3 진압을 위한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다. ‘여순사건’의 시작이다. 장경자(73)씨는 그때 3살이었다. 14연대는 10월 20일 순천을 장악했고, 3일 후 국군이 순천을 되찾았다. 며칠 후 국군으로부터 출근 명령을 받은 장씨의 아버지는 평소대로 순천 철도국으로 출근했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군은 아버지를 철도국 창고에 가뒀다. 14연대가 순천을 장악했을 때 아버지가 동료들에게 “14연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봅시다”라고 얘기했고, 국군이 다시 순천에 들어왔을 때 누군가가 14연대를 옹호했다고 아버지를 밀고했다. 군경의 날카로운 의심은 곧장 아버지를 향했다. 장씨의 어머니는 창고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옷을 빨아 달라며 전달한 속옷의 고무줄에 ‘군기병을 잡으시오’라고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군인 한 명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해 달라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군인 중에 지인이나 친척은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해 11월 30일 29세의 나이로 순천 이수중학교에서 사살됐다. 장씨는 “여기서 학살당한 사람만 102명이었다”면서 “계엄법도 없었는데 지역사령관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람을 죽였다”고 억울해했다. 여순사건 1년 후인 1949년 10월 전남 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민간인 희생자가 여수·순천을 포함해 전남 동부 지역에서만 1만 1131명에 달했다.장씨는 60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정확히 어떻게 사망했는지 모르고 살았다. 여순사건 과정에서 돌아가셨다는 얘기 정도만 들었다. 환갑이 넘어서야 국군에게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장씨에게 말해 주는 사람도, 묻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철로 근처에 살았던 어머니는 열차 기적이 울릴 때마다 “저 소리가 무섭다. 이승만이 너희 아버지를 죽였다”는 말을 되뇌었다. 장씨는 “어머니가 욕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학교, 경찰서, 면사무소 등 가는 곳마다 걸려 있어 혼란스러웠다”고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장씨의 시아버지는 여수에서 희생됐다. 10월 19일 여수를 장악한 14연대는 군청의 양곡창고를 개방해 시민들에게 배급했다. 여수 군청에서 근무하던 시아버지는 14연대의 지시대로 쌀을 배급한 것이 죄가 됐다. 대구형무소로 끌려간 시아버지는 1950년 7월 7일 대구 경산면에서 처형됐다. 장씨와 그의 남편은 아버지의 부재와 연좌제로 고통을 받았다. 남편은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원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 장씨는 국방부에서 6년간 경리로 일했다. 장씨는 “아버지가 누구한테 죽은지도 모르고 일을 했다”면서 “국군이 아버지를 죽였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독신 생활을 이어 가던 장씨는 2010년 여순사건의 진실을 찾던 중 ‘동병상련’을 앓던 남편과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진실 규명이 이뤄지는 걸 보지 못하고 지난해 사망했다. “이부형제인 남편의 동생도 우리 부부를 ‘빨갱이’ 자식들이라고 욕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겠습니까.” 담담하게 가족의 비극사를 이어 오던 장씨는 남편 얘기를 하면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글 사진 여수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 [단독] 살인범도 반성만 하면 다시 국가유공자 되는 세상

    [단독] 살인범도 반성만 하면 다시 국가유공자 되는 세상

    최근 5년간 흉악범죄자 16명 자격 회복 20일간 국감 돌입…선동열 등 증인 출석살인, 강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국가유공자가 자격을 박탈당해도 반성만 하면 자격을 되찾는 사례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10일 국가보훈처로부터 2013년부터 올 8월까지 5년간 국가유공자 자격을 상실했다가 다시 자격을 회복한 유공자 현황 자료를 살펴본 결과 모두 62명이었다. 이 중 범죄를 저지른 후 유공자로 다시 인정된 사례는 모두 26명이었다. 특히 살인, 강간, 강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16명에 달했다. 흉악 범죄로 유공자 자격이 박탈됐다가 다시 인정된 사례를 구체적으로 집계해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참전유공자 A씨는 살인을 저질러 1970년대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후 국가유공자 자격이 박탈됐다. 그러나 2016년 국가유공자 재등록을 신청했고 그해 자격을 인정받았다. 전상 군경 B씨와 무공수훈자 C씨는 강간치상으로 1970년대 각각 3년을 복역한 뒤 모두 2015년 국가유공자 자격을 되찾았다. 이처럼 흉악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국가유공자 자격을 되찾을 수 있는 데는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안이한 법 해석이 원인으로 보인다. 현행 국가유공자법은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으면 자격이 정지된다. 그러나 ‘뉘우친 정도가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등록신청을 받아 이 법의 적용 대상자로 결정해 보상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보훈심사위원회는 뉘우친 정도가 현저하다고 인정하는 판단으로 복역 시 모범수였거나 특별한 사고를 저지르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김 의원은 “대상자 기준을 엄격하게 심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국회는 이날부터 20일간의 문재인 정부 들어 두 번째 국정감사에 돌입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감에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수 선발 논란과 관련해 선동열 대표팀 감독이 증인으로 출석해 주목받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단독] 살인범도 반성만 하면 다시 국가유공자 되는 세상

    [단독] 살인범도 반성만 하면 다시 국가유공자 되는 세상

    살인, 강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국가유공자가 자격을 박탈당해도 반성만 하면 자격을 되찾는 사례가 상당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10일 국가보훈처로부터 2013년부터 올 8월까지 5년간 국가유공자 자격을 상실했다가 다시 자격을 회복한 유공자 현황 자료를 살펴본 결과 모두 62명이었다. 이 중 범죄를 저지른 후 유공자로 다시 인정된 사례는 모두 26명이었다. 특히 살인, 강간, 강도 등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례도 16명에 달했다. 흉악 범죄로 유공자 자격이 박탈됐다가 다시 인정된 사례를 구체적으로 집계해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참전유공자 A씨는 살인을 저질러 1970년대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후 국가유공자 자격이 박탈됐다. 그러나 2016년 국가유공자 재등록을 신청했고 그해 자격을 인정받았다. 전상 군경 B씨와 무공수훈자 C씨는 강간치상으로 1970년대 각각 3년을 복역한 뒤 모두 2015년 국가유공자 자격을 되찾았다. 고엽제 후유의증으로 국가유공자가 된 D씨는 살인미수로 10여년 전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2013년 국가유공자로 다시 인정됐다. 이처럼 흉악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국가유공자 자격을 되찾을 수 있는 데는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의 안이한 법 해석이 원인으로 보인다. 현행 국가유공자법은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으면 자격이 정지된다. 그러나 ‘뉘우친 정도가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만 등록신청을 받아 이 법의 적용 대상자로 결정해 보상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1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보훈심사위원회는 뉘우친 정도가 현저하다고 인정하는 판단으로 복역 시 모범수였거나 특별한 사고를 저지르지 않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김 의원은 “대상자 기준을 엄격하게 심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국회는 이날부터 20일간의 문재인 정부 들어 두 번째 국정감사에 돌입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국감에는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수 선발 논란과 관련해 선동열 대표팀 감독이 증인으로 출석해 주목받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단독] ‘직무유기’로 檢 수사받던 박승춘…올 6월 ‘무혐의 처분’ 받았다

    [단독] ‘직무유기’로 檢 수사받던 박승춘…올 6월 ‘무혐의 처분’ 받았다

    보훈단체 횡령·수익사업 비리 방치 등 보훈처, 작년 12월 검찰에 수사 의뢰 檢 “증거 불충분” 보훈처 “납득 안가” 朴 사법처리로 적폐청산 하려던 보훈처 재조사 때 새 비위 발견… 檢 고발 계획‘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박승춘(71) 전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6월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입수한 박 전 처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 의뢰 통보 결과문에 따르면 서울북부지검 형사6부는 지난 6월 박 전 처장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앞서 지난해 12월 보훈처는 자체 감사 결과 ‘나라사랑 공제회’ 설립 과정의 비위 및 축소 감사, 재단법인 ‘함께하는 나라사랑’의 불법행위 묵인, 정보화사업 비위 행위 방치, 보훈단체 횡령 및 수익사업 비리 방치 등 직무유기 혐의가 있다며 박 전 처장을 수사 의뢰했다. 구체적으로 박 전 처장 재임 시기인 2011년 만들어진 나라사랑 공제회가 담당 공무원이 설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훈처와 관련된 5개 업체에 특혜를 주면서 그 대가로 1억 4000만원의 출연금과 3억 5000만원의 수익금을 내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박 전 처장이 승인하는 등 철저하게 감독하지 않은 혐의가 제기됐다. 고엽제전우회가 보훈처장 명의의 추천서를 받아 한국토지주택공사(LH)로부터 불법으로 위례신도시 등 택지를 분양받고 상이군경회가 보훈처 승인 없이 각종 수익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박 전 처장이 이를 방치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5월 박 전 처장을 소환 조사했고 참고인 10명을 조사하는 등 진실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자체 감사 결과 위법 의혹이 상당히 짙었다는 판단에서다. 보훈처로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최장수 보훈처장이자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첫 번째로 경질됐던 박 전 처장에 대한 사법처리로 보훈처 개혁을 가속화하려는 의도가 검찰의 제동으로 다소 어그러진 셈이다. 하지만 적폐청산 작업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보훈처는 지난 8월 ‘위법·부당행위 재발방지위원회’를 출범시켜 박 전 처장 비위 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현재 박 전 처장 재임 당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건과 ‘함께하는 나라사랑’의 정치 편향 건에 대해 박 전 처장의 새로운 비위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는 새로 발견한 비위 건 등을 종합해 다시 한번 수사 의뢰를 하거나 직접 검찰에 고발할 것을 검토할 계획이다. 전 의원은 “적법한 조치가 취해져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며 “보훈처의 재조사와 그에 따른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단독]검찰, 박승춘 전 보훈처장 `직무유기‘ 무혐의 처분

    [단독]검찰, 박승춘 전 보훈처장 `직무유기‘ 무혐의 처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6월 무혐의 처분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입수한 박 전 처장에 대한 검찰의 수사 의뢰 통보 결과문에 따르면 서울북부지검 형사6부는 지난 6월 박 전 처장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앞서 지난해 12월 보훈처는 자체 감사 결과 ‘나라사랑 공제회’ 설립 과정의 비위 및 비위 행위에 대한 축소 감사, 재단법인 ‘함께하는 나라사랑’의 불법행위 묵인, 정보화사업 비위 행위 방치, 보훈단체 횡령 및 수익사업 비리 방치 등 직무유기 혐의가 있다며 박 전 처장을 수사 의뢰했다. 구체적으로 박 전 처장 재임 시기인 2011년 만들어진 나라사랑 공제회가 담당 공무원이 설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훈처와 관련된 5개 업체에 특혜를 주면서 그 대가로 1억 4000만원의 출연금과 3억 5000만원의 수익금을 내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박 전 처장이 승인하는 등 철저하게 감독하지 않은 혐의가 제기됐다. 고엽제전우회가 보훈처장 명의의 추천서를 받아 LH공사로부터 불법으로 위례신도시 등 택지를 분양받고 상이군경회가 보훈처 승인 없이 각종 수익사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박 전 처장이 이를 방치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5월 박 전 처장을 소환 조사했고 참고인 10명을 조사하는 등 진실 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보훈처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자체 감사 결과 위법 의혹이 상당히 짙었다는 판단에서다. 어쨌든 보훈처로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최장수 보훈처장이었던 박 전 처장에 대한 사법처리로 보훈처 개혁을 가속화하려는 의도가 다소 어그러진 셈이다. 하지만 적폐청산 작업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보훈처는 지난 8월 ‘위법·부당행위 재발방지위원회’를 출범시켜 박 전 처장 비위 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현재 박 전 처장 재임 당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건과 ‘함께하는 나라사랑’의 정치 편향 건에 대해 박 전 처장의 새로운 비위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는 새로 발견한 비위 건 등을 종합해 다시 한번 수사 의뢰를 하거나 직접 검찰에 고발할 것을 검토할 계획이다. 전 의원은 “적법한 조치가 취해져야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며 “보훈처의 재조사와 그에 따른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규모 7.5 강진 뒤 3m 쓰나미 덮치는 순간(영상)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규모 7.5 강진 뒤 3m 쓰나미 덮치는 순간(영상)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섬 북부에 규모 7.5 강진이 발생, 몇 시간 뒤에는 3m 높이의 쓰나미가 닥쳤다. 현재 구체적인 인명·재산 피해 상황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날이 밝는 대로 재난당국이 현장 상황을 파악하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재난관리 당국은 28일(현지시간) 밤 술라웨시 섬 주도 팔루와 인근 어촌 동갈라 일대에서 높이 1.5~2m의 쓰나미가 발생했다고 29일 밝혔다. 그러나 지역TV는 쓰나미의 높이가 3m에 달했다고 보도하며, 높은 파도가 팔루 해안가에 있는 주택과 사원 등을 덮치는 스마트폰 영상을 전했다. 팔루와 동갈라 일대에는 약 6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팔루는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과 해양 스포츠가 유명해 관광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곳이다.당국은 현장 피해 상황에 나섰지만 밤인데다 정전과 통신 장애가 발생해 구체적인 피해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팔루 공항도 지진의 여파로 폐쇄된 상태다. 이러한 가운데 쓰나미가 덮친 지역의 일부 주택이 떠내려가고, 일가족 5명이 실종됐다는 보고가 접수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토포 푸르워 누그로호 인도네시아 국가재난방지청(BNPB) 대변인은 “지진과 쓰나미로 몇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면서도 “사상자 수를 포함한 전체 피해 상황은 아직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재난당국은 현장에 군경을 비롯해 대형 선박과 헬리콥터를 급파해 구조작업에 나섰다. 276개 전기 공급 시설에서 복구작업도 벌이고 있다. 기상청 당국자는 “주민들이 거리에서 내달리고 있고, 건물도 무너지는 등 혼란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앞서 기상당국은 전날 오후 6시쯤 발생한 지진의 규모를 7.7로 측정하고 쓰나미 경보를 발령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초기에 지진의 규모를 7.7로 발표했다가 7.5로 내려 잡았다. 앞서 2004년 12월에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 섬에서 난 규모 9.1의 강진으로 쓰나미가 발생, 인근 13개국에서 22만 6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도네시아에서만 12만 명이 숨졌다. 인도네시아는 ‘불의 고리’로 불리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있어 지진과 화산 분화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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