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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아인, 제주 4·3 추념식 참석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

    유아인, 제주 4·3 추념식 참석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

    배우 유아인이 3일 제주도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다짐을 낭독했다. 유아인은 KBS 2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함께 출연 중인 도올 김용옥으로부터 추념식 참석을 제안받고 전국 대표 6명의 자격으로 젊은 세대의 결의와 다짐을 낭독했다. 유아인은 “부끄럽게도 4.3을 잘 몰랐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도 몰랐고, 또 왜 우리가 몰라야 했는지도 잘 몰랐다. 그걸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라고 운을 뗐다. 유아인은 “4.3을 접하고 조금씩 알게 되면서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소환하고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역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며 “처음에는 많이 놀랐고 분노했고 슬펐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행한 일들은 어떻게 멀쩡히 살아갈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제주라는 섬이, 그 상상조차 되지 않는 상처를 어떻게 품어왔는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해야 하는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럽지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더 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는 된 것 같다. 4.3을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이들 중 청년세대가 적지 않다. 그래서 희망은 있는 것 같다”라며 “70주년을 넘어 71주년이, 앞으로 남은 날들이 그랬으면 좋겠다. 4.3의 정신을 기억하는 내일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적게는 1만4천,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좁은 섬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후유증을 극복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고 있다. 이날 추념식은 제주4·3생존 희생자와 유족 등 주요 인사 1204명을 포함해 1만여명이 자리했다. 국방부는 이날 71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국방부 71년 만 “제주 4·3 사건, 깊은 유감과 애도”

    국방부 71년 만 “제주 4·3 사건, 깊은 유감과 애도”

    무고한 시민들이 비참하게 희생됐던 제주 4·3 사건에 대해 국방부가 사건이 발생한 지 71년 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국방부는 3일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4·3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오늘 국방부의 제주4·3사건에 대한 입장 표명은 제주 4·3 사건을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 ‘제주4.3사건 특별법’ 정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서주석 차관은 이날 중 광화문 4·3사건 희생자 추모공간을 방문해 희생자에 대한 애도를 표명할 예정이다.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방미 중이다. 정부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제주 4·3사건은 1947년 3·1절 기념식 발포사건 때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통행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7개월간 군경의 진압 등 소요사태 와중에 양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적게는 1만 4000명, 많게는 3만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잠정 보고됐다. 좁은 섬에서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고 그 후유증을 극복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고 있다. 한편 국방부 관계자는 검은색 양복과 검정 넥타이를 맨 채 출입기자실을 방문해 국방부 입장문을 낭독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 사망자 1만 4256명… 23%가 아동·청소년, ‘사건’ ‘항쟁’ ‘혁명’ 논쟁에 공식 명칭 없어

    사망자 1만 4256명… 23%가 아동·청소년, ‘사건’ ‘항쟁’ ‘혁명’ 논쟁에 공식 명칭 없어

    ‘고립된 섬’ 제주에서 1948년 4월 3일부터 6년여간 발생한 학살 사건인 ‘제주4·3’은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 비극이다. 하지만 ‘전 국민 제주4·3사건 인식조사’(2017) 결과를 보면 광주민주화항쟁(162명 사망), 노근리 양민학살(135명 사망)과 비교해 사망자가 100배(1만 4256명) 많은 데도 국민적 인식도는 가장 낮았다. 2일 4·3 71주년을 맞아 들어는 봤지만 잘 알지는 못하는 이 사건에 대해 정리했다. Q. ‘제주4·3’은 왜 이름이 없을까 A. ‘제주4·3’에는 아직 공식 명칭이 없다. ‘제주4·3 사건’으로 흔히 불리지만 시민사회와 학계에선 이를 ‘사건’으로 볼지, ‘항쟁’으로 볼지, 또는 ‘혁명’으로 볼지 의견이 분분하다. 항쟁 또는 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쪽에서는 당시 시위대가 미 군정과 서북청년회의 횡포,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인한 분단에 반대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면, 미군의 발포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의 활동으로 이 사태가 커졌다는 지점에선 이념 논쟁이 불거진다. 가해자처럼 보이는 경찰·군인의 가족도 여럿 죽거나 다쳤기에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이에 전문가들은 4·3특별법을 통해 모든 조사가 마무리된 뒤 최종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는 데 대부분 동의했다. Q. 피해자들이 왜 외국에도 있을까 A.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강제노역, 유학, 항일 운동, 막일 등을 하던 6만여명의 제주도민은 해방 이후 제주로 귀환했다. 그러나 4·3은 갓 돌아온 이들을 다시 고향 밖으로 뛰쳐나가게 했다. 무장대와 토벌대 간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을 피해 수많은 도민들이 산이나 굴 등으로 피신했다.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왔던 주민들은 학살극을 피해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끝까지 한국에 오지 못하고 타국에서 사망한 사람도 많다. Q. 미국에 책임을 묻는 이유는 A. 4·3의 발단이 된 경찰 발포 사건은 미 군정기인 1947년 3·1절 행사에서 일어났다. 당시 미군 문건에는 미 군정이 4·3 초기부터 강경 진압을 고수했다는 여러 증거가 남아 있다. 1948년에는 브라운 대령이 군경 토벌대 최고지휘관으로 파견돼 제주를 싹쓸이식으로 진압하는 ‘평정 작전’을 주도했다. 이듬해엔 주한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로버츠 준장에게 지휘권이 넘어가 군경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을 격려했다는 기록도 있다. Q. 피해가 얼마나 컸나 A. 지난해 말 기준 정부가 인정한 민간인 피해자는 1만 4363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는 1만 4256명이다. ‘제주4·3사건위원회 신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중 20세 이하 아동·청소년이 23%였다. 60세 이상 고령 피해자는 6%였다. 통계에 잡히지 않는 희생자까지 합하면 피해 규모는 3만~9만명일 것으로 예측된다. 이하영 기자 hiyoung@seoul.co.kr
  • 71년 만에… 국방부·경찰 ‘제주4·3’ 유감 표명한다

    71년 만에… 국방부·경찰 ‘제주4·3’ 유감 표명한다

    경찰청장, 광화문광장 추모 행사 참석 국가추념식 제주4·3평화공원서 개최국방부가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제주4·3’에 대해 71년 만에 유감을 표명한다. 경찰청장도 추모 행사를 찾아 직접 유감의 뜻을 밝힐 예정이다. 노재천 국방부 부대변인은 2일 국방부의 제주4·3 유감 표명과 관련해 “어떤 형식으로든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라며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현재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현재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한미 국방장관회담으로 미국에 있어 서주석 차관이 장관을 대신해 유감을 표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 차관은 3일 또는 4일 제주4·3 행사가 열리는 서울 광화문광장을 방문해 유감을 표명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국방부는 제주4·3은 군경이 투입돼 무장봉기를 진압한 사건이라며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 국방부의 유감 표명이 이뤄진다면 사건 발생 71년 만에 입장을 뒤집게 되는 것이다. 민갑룡 경찰청장도 3일 광화문광장 행사에 참석해 당시 사망자들에 대해 애도를 표하며 유감 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4·3은 경찰의 발포사건을 계기로 파업과 소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비극이다. 한편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선 ‘다시 기리는 4·3 정신, 함께 그리는 세계 평화’를 주제로 국가추념식이 열린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족, 이낙연 국무총리, 더불어민주당 이해찬·자유한국당 황교안·바른미래당 손학규·민주평화당 정동영·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주요 인사 1204명을 비롯해 1만여명이 참석해 참배한다. 서울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서울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사설] KT 황창규 회장의 ‘로비사단 의혹’ 진상 밝혀져야

    황창규 KT 회장이 취임 이후 정치인과 관료, 군경 출신 인사 14명을 경영고문으로 위촉해 자문료 명목으로 총 20억원을 지급하고, 사실상 ‘로비 사단’으로 활용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업이 외부 전문가를 고문으로 위촉해 경영 자문을 받는 일은 통상적인 기업 활동이다. 그러나 자문에 부적절한 인사들을 대거 영입해 로비스트로 활용했다면 대단히 부적절한 처사다.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KT는 2014년 1월 황 회장 취임 후 현재까지 정치권 인사, 퇴역 장성, 전직 지방경찰청장 등 유력 인사 14명을 경영고문으로 위촉해 매월 474만~1370만원의 자문료를 지급했다. KT 측은 “경영상 도움을 받기 위해 정상적으로 고문 계약을 맺고 자문을 받았다”고 해명하지만, 고문단 숫자나 자문료 규모로 볼 때 이례적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친박근혜’ 실세로 꼽히는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의 측근 3명 등 경영 고문 위촉이 집중된 2015년 전후에 유료방송 합산규제법, SK브로드밴드와 CJ헬로비전 합병, 황 회장의 국감 출석 등 KT에 민감한 현안이 많았던 점도 미심쩍다. 당시 홍 의원은 KT 등 이동통신사 소관 상임위인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로비 사단 의혹의 중심에는 황 회장이 있다. 이 의원은 어제 KT의 ‘경영고문 운영지침’과 ‘경영고문 위촉 계약서’를 공개하며 황 회장이 경영고문 위촉과 운영에 전권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KT 새 노조는 “자문위원들이 회사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회장을 위한 조직이라는 문제 제기가 꾸준히 이어졌다”면서 비자금을 조성해 자문료를 지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KT는 김성태 의원의 딸 특혜 채용 비리 의혹과 정치 후원금 쪼개기 의혹 등 여러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돼 있다. 황 회장이 직접 의혹에 대한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
  • “KT 황창규, 20억짜리 정·관·군·경 로비사단 운영”

    “KT 황창규, 20억짜리 정·관·군·경 로비사단 운영”

    홍문종 측근 3명·朴정부 靑행정관 포함 “월 수백만원씩 자문료… 임원들도 몰라” 洪의원 “자문 관여 사실 없어… 정치공세” KT “경영상 도움 위해 정상적 고문 계약”KT가 황창규 회장 취임 이후 정치권과 군경 출신 인사 14명에게 매달 수백만원의 자문료를 지급하며 20억원짜리 전방위 로비사단을 운영해 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4년 1월 황 회장 취임 후 위촉된 KT 경영고문 명단을 입수했다며 24일 언론에 공개했다. 명단에는 정치권 인사 6명, 퇴역 장성 1명, 전직 지방경찰청장 등 퇴직 경찰 2명, 행정안전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출신 고위공무원 2명, 업계 인사 2명 등이 포함됐다. 명단에 따르면 정치권에서는 19대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현 과방위)의 위원장을 맡았던 홍문종 자유한국당 의원의 측근(정책특보, 재보궐선거대책본부장, 비서관)이 3명이나 포함됐다. 그러나 홍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측근의 KT 자문 위촉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 이 의원은 지금까지 선거 조직 등 정치적으로 직간접적 인연이 있는 모든 이의 인사 사항에 개입해 왔느냐”며 “무책임한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명단에는 또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을 지낸 남모씨가 2016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고문료로 매달 620만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17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을 지낸 박성범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15년 9월부터 2016년 8월까지 매달 517만원의 고문료를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육군정보통신학교장을 지낸 남모씨는 2015년 7월부터 고문 계약을 3회 연장해 현재까지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월 1370만원을 받는 남씨는 2016년 사업비 750억원의 국방 광대역 통합망 사업 입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의원은 “당시 입찰 제안서에 등장하는 남모씨는 군 통신 분야 주요 보직을 거친 예비역 소장”이라며 “국방부 사업 심사위원장은 남씨가 거쳐 간 지휘통신참모부 간부였다”고 했다. 정·관·군·경이 모두 포함된 경영고문단은 유료방송 합산규제법 논의, 황 회장의 국감 출석 등 민감한 현안이 많았던 2015년 전후에 집중적으로 위촉됐다. 이 의원은 “KT 직원은 물론 임원조차 이들의 신원을 몰랐다”며 “정치권 줄대기를 위해 막대한 급여를 자의적으로 지급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점을 고려하면 황 회장은 업무상 배임, 로비의 대가로 정치권 인사를 ‘가장(假裝) 취업’시켜 유·무형의 이익을 제공했다면 제3자 뇌물교부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KT는 “관련 부서가 자체 판단에 따라 경영상 도움을 받기 위해 정상적으로 고문 계약을 맺고 자문을 받았다”고 해명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軍이 주민 체포 한 달 만에 ‘묻지마 처형’… 여순사건 진실 찾나

    軍이 주민 체포 한 달 만에 ‘묻지마 처형’… 여순사건 진실 찾나

    ‘제주 4·3’ 진압 거부한 군인 대대적 토벌 군 작전 중 반란 혐의 주민 등 1만명 희생 수사 절차·재판 관련 기록 전혀 없어1948년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된 민간인 희생자들의 재심 재판이 71년 만에 열린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의 진실이 드러날지 주목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는 21일 내란 및 국권문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모씨 등 3명의 재심 결정에 대한 재항고심에서 재심개시를 결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당시 적법한 절차 없는 군경의 민간 체포·감금이 무차별적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도 이에 부합한다”면서 “원심의 재심개시 결정에 관련 법령을 위반한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정부가 대규모로 파견한 토벌군의 진압 과정에서 1만여명이 희생된 사건이다. 장씨 등은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순천을 탈환한 국군에 체포돼 22일 만에 군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처형됐다. 어떤 절차로 수사와 재판을 받았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데다 법원 판결문에도 혐의 외에 범죄 사실조차 없다. 이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여순사건을 직권조사한 뒤 2009년 군경이 순천 지역 민간인 438명을 반군에 협조·가담했다는 혐의로 무리하게 연행해 살해했다고 결론 냈고, 장씨 등 3명의 유족들은 2013년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결정을 두고 법원에서는 당시 군과 경찰이 장씨 등을 불법으로 체포해 감금했다고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1심은 “판결문에 구체적인 범죄사실 내용과 증거 요지가 기재되지 않았고 순천 탈환 후 불과 22일 만에 사형이 선고돼 곧바로 집행된 점 등에 비춰 장씨 등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없이 체포·구속됐다고 볼 수 있다”며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다. 2심도 “장씨 등은 물론 다른 희생자들에 대한 영장발부 여부를 판단할 만한 자료가 없는 점 등을 보면 불법으로 체포·구속됐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면 검찰은 “유족의 주장과 역사적 정황만으로 불법 수사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재항고했다. 다만 이날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한 전원합의체에 참여한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4명은 재심 결정을 하면 안 된다는 반대 의견을 냈다. 조희대·이동원 대법관은 수사 과정에서 불법이 있었다는 재심 사유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박상옥·이기택 대법관은 장씨 등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재심을 반대했다. 그러나 다수 의견으로 대법원은 재심 결정을 확정 지었고, 재심 재판은 광주지법 순천지원에서 열리게 됐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국가유공자 복지 위해… 광진 보훈예우수당 지급

    서울 광진구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복지 향상에 기여하기 위해 보훈예우수당을 지원한다. 광진구에 주민등록을 두고 3개월 이상 거주하는 순국선열애국지사, 전몰전상군경, 순직공상군경, 무공보국수훈자, 참전유공자 등 국가보훈대상자 또는 유족을 대상으로 매달 25일 월 3만원씩 보훈예우수당을 지급한다. 별도 위문금을 지원하는 설과 호국보훈의 달, 추석은 제외하고 총 9회 지급한다. 광진구에 따르면 참전 명예수당 및 국가유공자 생활보조수당 지급 대상자를 제외한 1800여명이 보훈예우수당 지원을 받게 될 예정이다. 구는 국가보훈 대상자 명단을 확보해 안내문과 신청서를 우편 발송해 알리고, 상시로 보훈예우수당 신청서를 접수한다. 지원금은 신청한 달부터 적용한다. 대상자의 전출 혹은 사망 등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타구 전출자의 경우 전출일이 속한 달까지 지급하고, 사망자의 경우 사망일이 속한 달까지 지급한다. 김선갑 광진구청장은 “우리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했던 분들에게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책무이며 소임이라고 생각해 보훈예우수당을 지원하게 됐다”면서 “신규사업이므로 신청서를 접수하고 지급 결정하는 과정이 다소 번거로우실 수 있지만 넓은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왜 군화를 혀로 핥지? ‘lame suela’의 정확한 맥락 알려주세요

    왜 군화를 혀로 핥지? ‘lame suela’의 정확한 맥락 알려주세요

    19일 출근하며 서울신문 국제면을 펼쳐 보다 당혹스러웠다. 웬 여성이 벌건 대낮에 남의 군화를 혀로 핥고 있어서다. 베네수엘라 예술가 데보라 카스티요가 17일(이하 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파울리스타 거리에서 ‘라메 주엘라(Lamezuela)’란 제목의 행위예술을 선보이는 도중 경찰과 정치인, 군인으로 분한 세 명의 남성이 신고 있는 신발들에 혀를 갖다대 핥은 것이다. 라메 수엘라(lame suela·부츠를 핥는 사람)란 스페인어권 관습에다 고국인 ‘베네주엘라(Venezuela)’를 갖다붙여 살짝 비튼 것이었다. 제6회 상파울루 국제연극제에 참여한 카스티요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의 전체주의와 억압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 이날 공연의 목적이었다. 그런데 라메 수엘라의 원래 뜻, 남의 신발을 혀로 핥는 행위가 무얼 의미하고 무얼 정확히 겨냥하는지가 궁금했다. 인터넷 서핑을 해봤다. 스페인어 사전을 들춰보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지만 기자가 스페인어를 모르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영어로 부츠를 핥는 사람이란 뜻의 ‘bootlicker’를 검색하니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남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이, 둘째는 자존감 따위는 없는 것처럼 구는 사람이란 설명이다.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문화에서 이런 풍자와 조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알고 싶었지만 능력 부족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종종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를 피력하는 정치인, 심지어 조지 W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을 향해서도 신발을 투척하는 행위가 보도되지만 그에 견줘 신발이 똑같이 등장하는 이 풍자는 정반대되는 의사표현 방법으로 여겨진다. 둘째 풀이는 한나라 고조가 되는 유방의 가랑이 일화와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확장된 의미로는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 다시 말해 아첨꾼(toader)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포털 야후!를 통해 영어 문서나 뉴스 등을 검색하는 것으로는 라메 수엘라의 정확한 맥락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풍자나 조롱의 뜻이라면 구체적으로 이 행위가 시위나 저항의 의사 표현으로 기능한지를 알고 싶었다. 스페인어와 문화에 정통한 이들의 조언을 기다릴 따름이다. 한편 베네수엘라 정국은 혼돈이 걷힐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오른 사회보장청장 출신 카를로스 로톤다로 육군 장군이 콜롬비아로 망명했다고 로이터 통신이 소식통들을 인용해 18일 보도했다. 로톤다로 장군은 콜롬비아로 몰래 달아난 뒤 먼저 망명해 마두로 정권 퇴진 운동을 이끄는 루이사 오르테가 전 검찰총장 측에 합류했다고 한 소식통이 전했다. 또 콜롬비아 외교부는 지난달 이후 베네수엘라 군경 약 1000명이 탈영해 자국으로 입국했다고 밝혔다고 AP통신이 전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중국 등의 지지를 받는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이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앞세워 쿠데타를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부의 지지를 토대로 여전히 국가기관을 통제하고 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조선시대 고문, 총독부가 없앴다” 日언론의 도발

    “조선시대 고문, 총독부가 없앴다” 日언론의 도발

    日산케이 ‘한국 군사 정권의 고문 수사의 뿌리’“잔혹한 고문, 조선총독부가 폐지” 주장 논란 한 일본 언론이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고문제도를 없애는데 기여했다는 주장을 펼쳐 논란이 일고 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희생된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매체는 오히려 총독부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고문 수사를 폐지하는데 앞장섰다는 주장을 펼쳤다. 17일 일본 산케이신문은 ‘한국 군사 정권 고문수사의 뿌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2012년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 관람평을 언급했다. 작성자는 산케이신문 서울 특파원으로 활동했던 미즈누마 게이코 편집위원이었다. 그는 “고문 수사의 뿌리가 일본 통치시대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있다”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저서를 인용해 “‘친일 경찰을 청산하지 못한 채 출발한 한국 경찰에서 고문은 어떤 의미에서는 원죄 같은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그는 고문 수사 기법이 이미 조선시대부터 시행됐고, 마치 일제 총독부가 이런 고문을 금지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잔혹한 고문을 조선총독부가 폐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 그는 “앞선 조선 시대에 고문 수사는 일반적으로 시행됐다”며 “고문의 하나인 ‘주리’(주뢰·죄인을 고문할 대 두 다리를 묶고 그 틈에 2개의 나뭇대를 끼우고 비트는 형벌)는 일본에서도 방영된 한국 역사드라마에 자주 등장해 일본에서도 꽤 많이 알려졌다”고 전했다. 또 그는 “조선시대 초기에는 주리가 매질하는 형벌인 ‘태형’과 함께 남아 있었지만 조선총독부가 두 형벌을 폐지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친일 문학인’으로 꼽히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태형’을 거론하며 “김동인은 1919년 3월 출판법 위반으로 감옥에 수감돼 작품은 아마 그때의 옥중기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며 “태형이 폐지된 것은 1920년이었기 때문에 1919년에는 태형이 남아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역사 사료를 보면 총독부는 1912년 ‘조선태형령’을 선포했다. 즉결 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일본인에게는 구류나 과태료형을 부과하고 한국인에게는 태형을 실시한다는 차별적인 법령이었다. 이후 총독부는 1920년 대외적으로 태형을 금지시켰지만, 일제 군경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여 매질을 하는 등 잔혹한 고문을 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에게 시행한 고문 기법은 70가지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군경은 대나무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거나 뜨거운 물을 붓고 가슴에 인두를 대 지지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잔인한 행위를 이어갔다.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 남긴 말도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다”였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부산...11일 일신여학교 만세재현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부산...11일 일신여학교 만세재현

    부산지방보훈청은 11일 오전 10시 일신여학교에서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 부산 출정식’을 갖는다고 10일 밝혔다. 애국지사 유족, 부산시의회 의장, 부산시교육감, 부산보훈청장, 부산동구청장, 유관기관장, 학생, 시민 등 25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며 부산 동구와 함께 개최한다. 횃불 봉송주자 100명 중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애련 지사 등 독립유공자 유족 21명과 온라인 신청을 통해 선정된 국민주자 24명이 참여해 행사의 의미를 더한다. 동구 좌천동에 복원된 옛 일신여학교 자리에서 기념식 및 종합퍼포먼스, 횃불 인수 및 점화, 동구청까지 약 1.3km 구간에서 횃불 봉송 및 만세재현 거리퍼레이드,동구청 광장에서 화합의 한마당, 만세장터 운영 순으로 진행된다. 횃불봉송은 봉송주자 100명은 애국지사 유족, 유관 기관장, 온라인 신청 국민주자, 민간단체 등으로 구성됐다. 만세 퍼레이드는 동구 출신 독립운동가 29인의 사진과 연혁이 기록된 만장행렬 행진이 이어지며, 일본군경의 저지를 뚫고 행진하는 만세행렬을 환영하는 플래시몹도 펼쳐진다. 횃불봉송 도착 지점인 동구청 광장에서 열리는 화합의 한마당에서는 부산형무소 체험,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참가자 전원에게 주먹밥과 국을 제공한다.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후 부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3월 11일 밤 9시 교사 주경애, 박시연을 비롯, 박정수, 김응수, 이명시, 김반수, 김봉애, 김복선, 송명진, 심순의, 김난줄 등 학생들이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펼치자 일반 시민들도 함께 참여했다. 이는 부산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효시가 됐다. 한편,국가보훈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가 지난 1일 광화문 광장에서 출정식을 열고 42일 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부산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IS 박멸 난항…“허 찌르는 반격 노린다” 불안감

    IS 박멸 난항…“허 찌르는 반격 노린다” 불안감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완전 소탕이 쉽지 않을 것이며, IS가 새로운 형태의 역습을 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곳곳에서 나왔다. 한때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방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IS는 이제 모든 거점을 잃고 시리아 동부 데이르에조르 바구즈에서 최후의 항전 중이다. 그러나 조셉 보텔 미국 중부사령관은 지난 7일(현지시간) 미 의회에 출석해 IS 전투원들이 전술적 후퇴를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ABC뉴스 등에 따르면 보텔 사령관은 이날 “수천명의 IS 전투원과 그 가족이 최후 거점에서 탈출하고 있다. 이것은 항복이 아니라 조직을 재편하려고 후퇴하는 것”이라면서 “IS가 시리아민주군(SDF)과 국제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왔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조직으로서의 IS의 항복이 아니라 계산된 결정이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텔 사령관은 또 “현재 SDF가 억류하거나 보호 중인 수천명의 IS 전투원과 그 가족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지 국제사회가 결정해야 할 것”이라면서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또 다른 폭력적 극단주의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매체들은 SDF가 공세를 늦춘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IS 전투원, 민간인 등 3500명이 SDF에 투항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IS 지휘관 수십명이 터키 국경지역, 이라크 안바르주 등지로 도주했으며, 시리아인 조직원 및 추종자 다수가 사막으로 도주하거나 지역 사회로 잠입했다는 첩보가 있다. 워싱턴포스트(WP)도 7일 “칼리프(이슬람왕국)가 무너졌기 때문에 IS는 새로운 반란을 모색 중”이라고 분석했다. WP는 전문가를 인용해 “데이르에조르 일대는 무장 게릴라들에 유리한 곳이다. 세포화된 전투원이 초토화된 마을, 광활한 사막 등 군경이 추적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활동 중”이라고 전했다. WP에 따르면 이라크 정치 상황도 불안 요소다. 표면적으로 이라크 중앙정부는 IS가 장악했던 지역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부적 부정부패,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은 여전하다. 즉 일부 이라크인으로 하여금 IS를 지지하게 만든 시민과 국가권력간 불신이 여전하다는 얘기다. 미 워싱턴DC 싱크탱크 타흐리르 중동정책연구소의 하산 하산 연구원 역시 “주요 취약성 중 하나는 신뢰”라고 지적했다. 하산 연구원에 따르면 IS와 연계된 아랍 전투원 일부가 미군이 후원하는 군대에 잠입했다. 이들 IS 출신 전투원이 IS 토벌 작전 내용을 유출한 정황도 있다. WP는 SDF 전투원, 서방 외교관을 인용해 “IS 전투원 수백명이 최근 몇주간 바구즈에서 탈출했다. 이라크, 시리아 정부군 점령지에 가는 대가로 많은 돈을 냈다”고 설명했다. 최근 SDF가 IS에 가담했던 시리아인 283명을 석방한 것과 관련해서도 의혹이 일었다. 당시 SDF는 “협력, 형제애와 관용의 표시”라고 주장했지만, 익명을 요구한 시리아 관리는 “이번 거래가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북한군 묘지를 관광지로 개발, 어떻게 생각하세요

    북한군 묘지를 관광지로 개발, 어떻게 생각하세요

    국방부, 부지 교환 조건 묘역이관 협약 관리권은 파주시로… 토지 규모는 미정 상이군경회 “혈세로 조성… 사과 먼저” 道 “남북화해시대 역사교육의 장으로”경기도와 파주시가 6·25전쟁 전후 수습한 북한군 유해를 안장한 ‘공동묘지’를 관광지로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민 감정에 맞지 않다’는 지적과 ‘평화와 화해의 시기에 의미 있다’는 반응이 엇갈린다. 대한민국상이군경회 관계자는 6일 “아무리 남북화해시대라지만 우리 부모·형제를 죽인 북한군들의 묘를 혈세를 들여 관광지로 만들려는 것은 국민 감정상 너무 이르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이희중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파주지부장도 “북한은 천안함 폭침 등 무려 8만여건의 대남 도발과 50여만건에 달하는 휴전협정을 위반했다”면서 “북한의 사과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군 묘지에는 전후 남한으로 침투했다가 사살된 무장간첩들 묘도 있다”며 목소리 높였다.북한군 묘역 부지와 경기도 부지를 맞교환하기로 한 방식에 대해서도 부정적 여론이 있다. 묘지 관리비를 부담하는 데다 교환 부지까지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에 따르면 북한군 묘역 이관은 국방부에서 먼저 제안했는데 같은 값의 대토를 국방부에 제공하는 것은 ‘불리한 협약’이라는 지적이다. 북한군 묘역은 6099㎡에 이르며 인접한 군부대를 포함해 3만 7000㎡나 돼 수억원대 대토를 넘겨줘야 한다. 이에 대해 경기도는 “북한군 묘지를 접경지역 발전을 위한 평화와 화해의 공간으로 조성해 나갈 것이며,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관련 법규·규정에 따라 시설 관리전환 및 부지교환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는 “이번 북한군 묘지 이관을 통해 평화 협력시대를 주도하는 데 뜻깊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경기도 관계자는 “국립묘지를 제외한 묘지 관리권은 지방자치단체에 있어 유지 관리는 북한군 묘지의 관광지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파주시가 하게 될 것”이라면서 “아직 토지 교환 규모 등이 확정되지 않아 정확한 예산은 추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6·25전쟁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역사교육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1억원을 들여 오는 8월 ‘북한군 묘지 기념공간 기본계획’을 수립해 안내판 및 화장실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파주 적성면 답곡리에 있는 북한군 묘지는 국방부가 1996년 조성, 관리해 오고 있다. 2014년 중국군 유해 송환 후 최근 북한군 묘지로 이름을 바꿨으며 843구가 매장돼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파키스탄에서 돌아온 조종사 수염에 반한 인도 남자들 따라하기

    파키스탄에서 돌아온 조종사 수염에 반한 인도 남자들 따라하기

    인도 남성들이 지난 1일(현지시간) 파키스탄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온 전투기 조종사의 수염 패션을 따라 하기 위해 이발소로 달려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고 미국 CNN이 4일 전했다. 인도 공군의 아비난단 바르타만 중령은 지난달 버스 테러로 인도 경찰관 40명이 희생된 뒤에 보복하기 위해 나선 공중전 끝에 파키스탄 영토에 추락해 그 나라 사람들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는 등 봉변을 당했다. 지난 1971년 카슈미르 3차 전쟁 이후 48년 만에 공중전을 벌인 터였다. 파키스탄 정보국이 배포한 구금 직후 동영상을 보면 그는 눈가리개를 한 채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나타났다. 이 동영상은 나중에 삭제됐고, 그 뒤 다시 배포한 동영상을 보면 그는 동요하지 않고 차분하게 차를 홀짝이며 관등성명을 대고 “아래 남쪽”이라고만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또 심문하는 파키스탄 사람을 향해 “왜 내가 당신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거나요” 묻는 장면도 나온다. 의연한 그의 모습은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그런데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가 바르타만 중령을 1일 와간 국경을 통해 송환하자 용기와 애국심을 상징하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날 국경에는 수많은 이들이 몰려나와 파키스탄에 맞선 용기를 찬양했다. 수도 델리를 비롯해 여러 도시들에서 그의 귀국을 환영하는 불꽃놀이가 진행됐다. 그러면서 그의 수염 패션이 따라 하기 열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사진에서 보듯 그의 수염은 특이하다. 옛날 서부 영화에 등장할 법한 총잡이의 수염에다 양갈비 모양을 뒤섞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인도에서도 수염에 대한 편견이 있어왔다. 발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이나 타락한 군경, 밀수꾼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시선이 있었는데 바르타만 중령 덕에 용기와 애국심의 상징으로 바뀌었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인도 유제품 재벌 아물은 발빠르게 조종사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수염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여학생이 입가에 남긴 우유 자국을 ‘우유 수염(milk-tache)’으로 묘사하며 끝나는 광고를 제작했다. 이 광고 동영상이 2일 올라오자 폭발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남부 방갈로르의 한 이발소는 4일 바르타만 중령처럼 수염을 깎고 싶은 남성에게 공짜 이발과 면도를 해주겠다고 광고했다. 주인 나네시 타쿠르는 “아비난단은 우리 나라를 위해 아주 많은 일을 했다. 나도 따라 해야겠다고 느껴 모든 이들의 얼굴을 그와 닮은꼴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짜 손님 중 한 명인 테하스 촌다리는 “그는 우리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해냈는데 내가 이쯤 못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日, 세계 평화주의 흐름 오판해 동아시아를 수렁에 몰아”

    진보적 언론으로서도 이례적 보도 평가 아베 개헌 추진·군비 확장에 경종 의미 “조선 전역서 비폭력으로 日군경에 맞서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 마이니치신문도 “日에 저항한 독립운동”‘3·1운동에 대한 일본 군경의 탄압은 극도로 가혹했다. 강덕상(재일사학자)의 ‘현대사 자료 조선2편’에 따르면 ‘3분간 사격에 51명 즉사’라는 내용이 군 보고서에 적히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27일 1개면을 할애해 100년 전 한국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역사와 의미, 당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등을 다룬 특집기사를 실었다. 아사히는 ‘기로의 1919년…동아시아 100년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획기사를 통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딛고 세계에는 평화주의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 흐름을 잘못 파악해 오판을 함으로써 동아시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고 지적했다. 아사히가 상대적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일본 언론으로서는 이례적인 보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개헌을 추진하고 막대한 방위비를 지출하며 군비 확장을 꾀하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던 100년 전을 상기시킴으로써 아베 정권에 반성과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 민중은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빼앗긴 채 헌병의 감시 아래 침묵을 강요당했다”며 “이에 1919년 3월 1일 서울 중심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수십만명이 거리에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전했다. 이어 “독립운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됐고 민중들은 비폭력 정신을 내걸고 일본 군경에 맞섰다”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희생자는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에 달했다고 박은식 선생의 ‘조선독립운동지혈사’를 인용해 전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를 일본 정치인과 학자에게 보낸 독립운동가 임규(1867~1948) 선생에 대해서도 다뤘다. 임규 선생은 3·1운동 당일 밤 자신이 일본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들고 도쿄역에 도착한 뒤 이를 200통 복사해 당시 총리 등 정치인, 학자, 언론사, 대학 등에 보냈다. 아사히는 독립선언서 내용 중 ‘2000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는 대목을 들며 “독립선언서는 아시아의 미래도 통찰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아사히는 “그러나 조선의 이런 외침이 일본 사회에 퍼지지는 못했다”며 ‘역사평론’이라는 잡지가 독립선언서를 게재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알린 것은 패전 후인 1948년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사히는 동아시아를 전화에 빠뜨린 일본의 책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고양되고 ‘부전(不戰)조약에 의해 전쟁을 불법화하려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신조류를 잘못 읽었고 결국 그것이 동아시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썼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문답형 기사를 통해 “한국의 3·1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 저항해 전국적으로 퍼진 독립운동”이라고 설명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3·1운동 100년] 평화행진 첫날부터 발포한 日, 만행·사망자 조직적 은폐·축소

    “서울에서 발생한 일이다. 어린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자 일본 헌병이 칼로 그의 오른손을 잘랐다. 오른손이 잘린 학생은 다시 왼손에 국기를 들고 더욱 높은 소리로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그의 왼손마저 잘랐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한 서양인이 사진을 찍어 남기려다가 헌병에게 끌려갔다.”(1919년 4월 12일자 중국 국민공보) “체포된 한인들은 밤낮으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한다. 한인 가운데 죽은 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서울에서 50마일(약 80㎞) 이내 무수한 촌락이 불탔다.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1919년 5월 19일자 국민공보)●시위 확산 3월 말부터 조준 발포… 희생 급증 일제는 3·1운동에 나선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했다. 그들의 눈에 태극기를 든 시위대는 식민지 체제를 전복하고자 선량한 조선인들을 선동하는 폭도에 불과했다. 만행과 학살이 일상이 됐다. 총을 든 일본군과 경찰, 시위 주동자에게 다가가 몸에 색분필을 발라두는 조선인 밀정까지 뒤섞이면서 만세운동은 시작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곤 했다. “파리채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단호한 처치만 필요할 뿐”이라던 한 일본 경찰의 외침 속에 3·1운동을 대하는 일제의 태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26일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참가 인원 가운데 사망자는 최대 934명으로 집계된다. 일제가 파악한 사망자 553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놓은 7483명, 박은식(1859~1925)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분석한 7509명에는 크게 못 미친다. 이와 관련해 국편 측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망자수가 최소 934명이라는 것”이라며 “자료의 오류 수정과 추가 발굴 등의 연구가 진행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사망자수에서도 알 수 있듯 일제의 만행은 도를 넘었다. 3·1운동 첫날인 1919년 3월 1일부터 발포가 이뤄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드러났다. 만세운동이 격화된 3월 말~4월 초 사이에 사망자가 집중됐다는 사실도 재확인됐다. 실제로 3월 1일 평양에서 주민 5000여명이 참가한 시위를 기록한 외국인 자료에는 “총상 환자 5명이 병원에서 숨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같은 날 평북 선천에서도 시위 중 체포된 11명의 학생 가운데 3명이 사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들은 가혹한 태형으로 중상을 입고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첫날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가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아무래도 서울 시내는 외국인이나 선교사 등 보는 눈이 많아서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도 발포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라면서도 “(더는 서양인의 눈치를 보지 않기로 결심한) 3월 말부터 사람을 직접 조준 발포가 잦아졌다”고 말했다. 국편이 파악한 3·1운동 관련 사망자 934명 가운데 47.6%(445명)가 3월 28일~4월 6일 사이에 몰려 있다. 서울에서는 사망 추정자가 3명에 불과하지만 외국인이 거의 없던 평안도에서는 423명이나 됐다.●日軍 4만여명 준계엄체제… 2만 6713명 검거 3·1운동이 대부분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진행됐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수가 늘어난 것은 시위가 사그러들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총독부가 강경 대응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수시로 총독 명의의 유고(諭告·담화문)를 발표했다. 3월 7일에는 “허튼소리로 인심을 흔드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4월 10일에는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중앙정부에 군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화를 입지 말도록 하라”고 최후통첩성 발언을 내놨다. 일본 군경의 총기 사용을 용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일본측 발포가 없는 날은 7~8일에 그쳤다. 이양희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1919년 3월 11일쯤 일본 육군성 차관이 만세운동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조선총독을 질책했다”면서 “무력 탄압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내각의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3·1운동 기간 중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제암리 학살 사건’도 일본의 강경 진압이 최고조에 달한 1919년 4월 15일 발생했다. 보병 79연대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화성 발안장 만세운동의 주동자를 검거한다”며 제암리 마을에 들이닥쳤다.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일본 군경은 아이마저 찔러죽였다. 일제는 만행의 증거를 없애고자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으로 제암리에서만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인근 지역 참살까지 포함하면 사망자가 30명을 넘는다. 고주리에서는 일가족 6명의 목을 쳐서 죽인 뒤 시신을 토막 내 짚가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조선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던 우쓰노미야 다로가 쓴 일기에는 “일본군이 약 30명을 가두고 학살과 방화를 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히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이렇게 되면 학살을 자인하는 꼴이 돼 제국의 입장에서 불이익이 크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고 학살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스스로도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국제 여론이 나빠지자 사건을 일으킨 아리타 중위는 재판에 회부됐지만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다. 4월 초 일본에서 조선으로 추가 파견된 ‘임시조선파견보병대대’도 조선 민중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3·1운동 확산의 원인 가운데 하나를 병력 부족으로 본 일본 내각과 조선총독부의 이해가 맞물린 것으로, 6개 대대 4200명 규모였다. 3·1운동 발발 당시 일본군 2개 사단이 상주해 3만~4만명가량 군이 있었던 점을 감안해보면 1919년 4월 일본군은 최대 4만 5000명까지 늘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임시파견대대는 1905년에 개발된 근접 전투용 무기인 ‘38년식보병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양희 연구원은 “임시파견대대는 시장에서 무장을 한 채 훈련을 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려는 조선인들에게 겁을 주는 행동이 잦았다”며 “일제가 3·1운동에 대해 준계엄 체제로 대응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내부 자료를 보면 3·1운동 시작부터 4월 30일까지 약 두 달간 검거된 조선인은 2만 6713명이었다. ●3·1운동 약화 유화책 펼쳐… 단속·감시 체계화 일제는 3·1운동을 약화시키고자 무력 진압 외에도 의료선전 활동, 시장 개시(開市) 독려 등 유화책을 썼다.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할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서울시내 유력 상인 40여명을 설득해 상점을 다시 열게 하는 등 조선인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로는 경비인력을 늘리면서 3·1운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이어갔다. 3·1운동 이전 1만 3230명 수준이었던 경찰 수는 1921년 2만명을 넘어섰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가 더욱 체계화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용철 기자 cyc0305@seoul.co.kr
  •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3·1운동 100년] 100년 전 촛불혁명… 평범한 민초들이 독립만세 외쳤다

    “우리는 지금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이라는 점을 선언한다.”(3·1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손병희(1861~1922)와 이승훈(1864~1930), 한용운(1879~1944) 등 29명이 경성(서울)의 유명 요리집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으로 모였다. 이갑성(1889~1981)은 조선총독부에 사람을 보내 조선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했다. 이종일(1858~1925)은 참석자들에게 독립선언서 100여장을 펼쳐 보였다. 한용운이 만세 삼창을 하고 독립선언을 마치자 출동한 경찰들이 민족대표들을 모두 체포했다. 이처럼 3·1운동은 대부분 민족대표 33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들이 조선 독립 혁명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3월 1일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수개월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동자와 학생, 기생 등 평범한 조선의 민초들에게 이념이나 귀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이들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서울 만세시위 3만명 참가… 평양서도 수천명 “만인이 죽더라도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불사하겠소.”(만세열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인쇄소 직원 인종익이 경찰 조사에서 한 말이다. 이처럼 독립선언서를 전국에 배포하고 3월 1일 만세 시위를 알린 것은 인종익과 같은 민중이었다. 독립선언서는 2월 11일 기초가 완성돼 20일부터 이종일이 운영하던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2월 28일부터 함경남도 원산, 전라북도 군산,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개성 등 전국 각지로 보내졌다. 3월 1일 새벽 경성에는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벽보가 거리 곳곳에 붙었다. 중학생들은 시위가 예정된 오후 2시에 맞춰 학교에서 파고다공원으로 모였다. 이들은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행인에게도 배포했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을 하고 있을 때 인근 파고다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통(중구 남대문로)과 의주통(종로구 의주로)을 거쳐 미국영사관, 대한문으로 거리 행진을 했다. 당시 일제 헌병 자료에는 “시위에 모인 사람이 3000~4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판결문 등에는 “파고다공원 앞 군중 5000”이라는 표현이 나온다.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시위는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시위대는 파고다공원 앞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졌다. 한쪽은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가 만세를 외치고 독립 연설을 시작했다. 다른 시위대는 미국총영사관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경성우편국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의주통에 있는 프랑스영사관에서는 영사관 직원에게 조선 독립이 가능한지를 묻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방향으로 가던 3000명 정도의 시위대는 본정통(중구 충무로)에서 행진이 막혔다. 일제가 보병 3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6시 30분쯤 마포 전차 종점 시위를 마지막으로 서울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는 잠잠해졌다. 질서 정연하게 행진한 평화 시위였다. 경찰서나 각국 영사관 앞에 멈춰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날 서울의 만세 시위에 약 3만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3월 1일 서울 시위 참가자 규모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일제 군경의 개람표에는 4000명, 일람표에는 1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헌병대에서 작성한 문서에는 “종로의 3000~4000명의 학생에 군중이 함께해 수만에 이르렀다”고 기술돼 있고, “이날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와 있던 사람들이 십만에 달한다”고도 적혀 있다. 일제는 이날 시위에 참가하거나 인쇄물을 배포한 주동자 134명을 체포했다.이날 만세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 데이터베이스(DB)에 따르면 3월 1일 하루에만 전국에서 22건의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이 있었다. 함경남도 원산과 평안북도 선천, 평안남도 평양·안주·진남포, 경기도 개성 등에서 5만 2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평양에서는 2000~5000명이 만세 시위에 참석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총에 맞아 부상당한 이들 가운데 최소 5명이 병원에서 숨졌지만 일제의 명령으로 사인을 총상으로 기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시위대는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를 불렀다. 일제 소방대원들은 시위대에 물을 쏘고 갈고리를 휘둘렀다. 부상자가 나오자 분노한 시민들이 돌을 던졌다. 평양에서만 112명이 검거됐다. ●수개월 1700여건 단체행동에 103만여명 3·1운동은 단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민중은 단체행동(시위·휴학·휴교·파업)을 이어 갔다. 2일에도 전국적으로 13건이 발생했고, 3일(42건), 4일(23건)에도 계속됐다. 3월 4일 늦은 밤. 서울 시내 각지에 ‘경고 이천만 동포’라는 문서가 붙었다. 5일 남대문 부근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5일 오전 8시 남대문역 앞에서 학생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1만여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학생과 시민은 붉은 수건을 팔에 두르거나 구한국기(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남대문시장과 조선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행진했다. 대한문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수백명이 체포됐다. 부상자도 속출했다. 저항의 방법은 시위만이 아니었다. 3월 1일부터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 관립, 공립, 사립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다수가 학교에 출석하지 않고 동맹휴교에 나섰다. 또 서울의 전차 차장과 운전수는 3월 8일 오후부터 3월 10일 자정까지 동맹파업을 했다. 학생들은 휴학이나 휴교로,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일제의 폭거에 맞섰다. 3월 한 달(3월 1일 제외)간 민중의 단체행동 1025건, 참여 인원 66만 1311명이었다. 4월에도 저항은 이어졌다. 4월 한 달간 651건의 단체행동에 모두 31만 4778명이 참여했다. 3·1운동 기간 전체로 보면 시위·휴학·휴교·파업 1732건에 모두 103만여명이 참여했다. “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3월 5일 서울에서 벌어진 학생 주도의 만세 시위에 참여한 보성법률상업학교(현 고려대) 학생 강기덕(1886~?)은 왜 독립 운동을 하려고 했는지를 묻는 검사의 심문에 이렇게 답했다. 민중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 역시 강기덕과 다르지 않았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학과 교수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 운동 관련 판결문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농민과 학생, 노동자”라고 설명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지도 세력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바로 민초 자신들”이라며 “몇 달간 1000회가 넘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름 없는 이들의 헌신 덕분”이라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박승춘 전 보훈처장 국가유공자 결정…월 152만원 지급

    박승춘 전 보훈처장 국가유공자 결정…월 152만원 지급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 국가유공자로 결정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30일 보훈심사위원회를 열고 박 전 처장에 대한 심의를 통해 ‘공상 군경’에 해당한다고 의결했다고 31일 밝혔다. 박 전 처장은 앞으로 매달 152만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게 된다. 앞서 박 전 처장은 1971년 전방부대 소대장 근무 당시 고엽제 살포로 인한 후유증으로 전립선암이 발생했다며 작년 7월 서울 북부보훈지청에 보훈대상 신청을 했다. 박 전 처장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보훈처장을 지냈다. 박 전 처장은 작년 7월 서울 북부보훈지청에 보훈대상 신청을 했고 같은 해 9월 중앙보훈병원 신체검사를 거쳐 11월 보훈심사위원회 분과회의에서 상이 5등급을 받아 보훈대상자로 분류됐다. 그러나 보훈처는 전·현직 보훈처 공무원은 보훈심사위 분과회의가 아닌 외부 심사위원도 참여하는 보훈심사위 본회의를 열어 심의해야 한다는 ‘보훈심사위원회 운영세칙’에 따라 박 전 처장의 보훈대상 선정을 일단 보류한 바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충주시 새 보훈회관 짓는다

    충주시 새 보훈회관 짓는다

    충북 충주시가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다. 시는 보훈단체 회원들의 숙원사업인 충주보훈회관 건립이 추진된다고 25일 밝혔다. 지난해 이종배 국회의원이 확보한 국비 5억원과 지방비 등 총 38억원이 투입돼 지상 3층, 연면적 990㎡ 규모로 지현동에 건립될 예정이다. 위치는 노인복지관 근처가 좋다는 의견에 따라 결정됐다. 시는 올해 6월까지 건축설계용역을 완료하고 8월 착공한다는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사용중인 보훈회관이 낡아 새 부지에 신축하는 것”이라며 “8개 보훈단체 사무실과 회의실, 헬스장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말했다.보훈예우수당 지급 대상자도 확대된다. 시는 이번에 공상군경 유족 중 배우자(65세이상), 특수임무 유공자, 보국수훈자(65세 이상)를 대상에 추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근거가 상반기에 마련되면 하반기부터 매월 5만원의 수당이 지급된다. 그동안 공상군경의 경우 본인만 수당을 받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원들의 중국 상해임시정부 현지 방문도 추진된다. 4월에는 신니면민 만세운동 기념행사와 독립의 횃불 전국 릴레이행사 재현에 동참한다. 동락전승지 조경공사 및 무공수훈자 공적비 개보수 등 현충시설을 정비하고 현충일 추념식, 6.25전쟁 첫 전승 기념행사 등도 열린다. 충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박건승 칼럼] ‘전두환 골프’ 실종 사건

    [박건승 칼럼] ‘전두환 골프’ 실종 사건

    골프는 ‘멘탈게임’이라고 한다. 그만치 심리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골프는 90% 심리 게임이다’라거나 ‘골프는 과학이다´와 같은 책이 인기를 모으고, ‘마인드 골프´나 ‘골프 심리´란 용어가 자연스럽게 회자하는 것을 보면 골프는 정신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운동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서울대병원이 제공하는 ‘의학정보´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환자는 기억력 쇠퇴 말고도 전형적으로 인지기능 장애와 시공간 파악 능력 저하, 운동력 장애, 판단력 저하 증세를 보인다. 중증 알츠하이머와 골프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란 얘기다. ‘손혜원 투기 의혹’에 묻혀 묵과한 것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른바 ‘알츠하이머 골프’ 사건이다. 2013년 이후 6년째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전씨가 광주 재판을 앞두고 지난해 두 차례(8월, 12월) 부인 이순자씨 등과 골프를 쳤다는 것이다. 전씨 측근도 부인하지 않은 데다 골프장 종사원들의 다양한 증언을 토대로 운동한 날짜까지 확인된 사안이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해서 골프를 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2~3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해 하루에 열 차례씩 양치질을 한다는 사람이 멀쩡히 필드에 나가 골프를 쳤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골프 스코어를 손수 계산할 정도로 정신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세계 의학계에 기적의 사례로 보고해야 할 일이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전씨는 2년여 전에 펴낸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표현한 혐의(사자 명예훼손)로 재판에 회부돼 있는 상황이다. 광주지법은 2017년 8월 27일 첫 재판을 열었으나 그는 알츠하이머를 이유로 불출석했으며 지난 7일에도 독감과 고열 등을 내세워 나오지 않았다. 물론 운동 삼아 골프를 칠 수는 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증세가 워낙 심해 재판에도 못 나갔다는 사람이 멀쩡한 정신으로 라운딩했다는 사실 앞에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부질없는 소리지만 김영삼 정권이 좀더 사려가 깊었더라면 1997년 12월에 전씨를 사면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풀어 주더라도 구속집행정지 조처를 택했더라면 전씨가 이처럼 함부로 국민을 기만하거나 사법체계를 비웃지는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그는 지금까지도 광주 시민에게 제대로 사죄한 적이 없다.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다음 광주 재판은 3월 11일 열린다. 그때 가서 또 무슨 핑계를 댈지 알 수 없지만, 3월 재판은 역사가 전씨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괴이한 일들이 잇따르는 것은 허투루 볼 일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유일하게 ‘전씨 골프’에 대해 논평 한 줄 내지 않았다. 아무리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은근슬쩍 전씨를 비호하는 듯한 냄새를 풍겨서는 곤란하다. 이 당은 ‘알츠하이머 골프’ 사건 직전에는 보란 듯이 극우적 성향의 인사를 ‘5·18 진상조사위원’으로 추천했다. 그 가운데는 “계엄군은 시위대를 조준 사격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시위대가 군경을 위협했다”고 언죽번죽 말하는 사람도 있고 “5·18은 시민들이 선동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오죽했으면 “진상조사위원에 ‘조사 대상´을 추천했다”는 말이 나올까. 이들이 왜곡되거나 은폐된 5·18의 진실을 균형되고 객관적으로 규명해 국민 통합에 기여할 적임자들이라는 제1 야당의 평가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부와 여당에도 책임이 없진 않다. 반역사적인 일들이 공공연히 펼쳐지고 있는데도 그때마다 논평 하나 달랑 내놓고 할 일 다했다는 식의 안일함과 무기력증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전씨가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았다’는 부인 이순자씨의 코미디 같은 말을 듣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많은 사람은 이런 것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문재인 정권에 대한 젊은층의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청산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기 때문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모차 부대나 젊은이들이 광장에 뛰쳐나와 소리 높여 외친 것은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인 찌꺼기를 걷어 내자는 요구였다. 누가 뭐래도 촛불정신은 이 시대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가치다. 역사가 전씨의 ‘놀이터’가 되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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