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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단안보」 인식 드높인 나토기치

    ◎“이라크 응징” 다국적군 참여 안팎/신 데탕트 물결속에도 건재 과시/평화수호 명분뚜렷… 미 측면지원/EC서도 봉쇄 미흡땐 추가조치 천명 페르시아만사태에 대한 유럽 각국의 대응은 이라크가 「공동의 적」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럽국가들의 이같은 대응자세는 10일 브뤼셀에서 열린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외무장관회의와 구주공동체(EC) 외무장관회담에서 잘 나타났다. 쿠웨이트를 침공,점령하고 있는 이라크에 대한 국제적인 제재조치가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이날의 두 회의는 한결같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내용을 뒷받침 하면서 군사및 경제제재등 대이라크 제재조치에 행동을 같이하기로 결의했다. 특히 NATO 외무장관회의는 유럽국가들에 집단안보의 필요성을 다시 인식시키고 공동의 적에 대한 집단보복의 의지를 강력히 표명했다. 그동안 동ㆍ서 긴장완화로 군사동맹의 존재명분이 퇴색되면서 탈군사기구화 논의까지 대두되고 있는 NATO의 역할이 새삼 강조되었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은 만일 이라크가 NATO회원국인터키를 침공할 경우 NATO 헌장에 따라 전회원국들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어 NATO동맹군의 즉각적인 공동군사보복을 받게 될 것임을 누누이 강조했다. NAT0가 빛은 바랫지만 아직은 종이호랑이가 될 수는 없다는 다짐을 이번 기회에 내외에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심사로 등장되고 있는 「다국적군」 참여문제는 회원국들이 「개별적」으로 참여여부를 결정,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미국군및 영국군과 「공동군사작전」을 펼 수 있다는데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개별적 결정방법을 택한 것은 회원국 영토 밖에서의 군사행동을 금지한 NATO규정을 피하기 위해서이며 아울러 이번 경우 NOTO회원국들이 사우디아라비아나 걸프만에 군대를 파견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NATO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셈이다. 이날 회의는 역시 NATO회원국이며 대이라크 제재조치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결론지어진 흔적이 역력하며 미국의 행동에 대한 측면지원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적 결정을 앞세운 공동대응에 쉽게 합의될 수 있었던것은 이번 사태가 유럽각국의 이해관계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물론 이라크의 쿠웨이트침공,점령행위자체가 국제법을 어긴 처사로 비난받아 마땅하며 아울러 이같은 상황이 지속된다거나 확대될 경우 걸프만지역의 안정을 저해하며 결과적으로는 전세계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명분아래 영국이 가장 먼저 다국적군에의 파병을 결정했으며 프랑스가 그뒤를 이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서독 포르투갈은 미군기지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영국은 이번 사태와 관련,유럽국가중 가장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인 지난 2일 마거릿 대처총리는 미국으로 달려가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사태를 논의하는 기민성을 발휘했다. 영국의 이같은 태도는 NAT0의 집단안보기능에 깊은 신뢰를 보내던 평소의 소신외에 쿠웨이트와는 과거 한때 상호방위조약을 맺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다 현재 5천여명 정도의 영국인이 인질상태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묶여있는 점이 큰 작용을 한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경우는 걸프만에 항공모함을 주축으로 한 함대를 파견하면서도 「독자적인 결정」 「개별적 행동」을 앞세우고 있다. NAT0회원국이면서 군사적으로는 참여치 않고 있는 프랑스의 입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서독은 국내에서 말썽의 소지가 있는 다국적군에의 출병을 포기하는 대신 지중해 함대로 하여금 걸프만으로 이동한 미국함대의 역할을 대신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통독일정을 눈앞에 두고 있는 헬 무트 콜 총리에게 있어서 걸프만사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같이 NATO 외무장관 회의가 군사행동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EC외무장관 회의는 군사외적인 측면의 공동행동 약속으로 볼 수 있다. 이날 회의 결과는 무력분쟁저지와 사태해결을 위해 ▲추가 이니셔티브 준비 ▲아랍국가들과의 긴밀한 접촉유지 ▲군사및 정치적 대응조치 협의등 다소 모호한 단어들로 표현됐으나 EC차원에서의 실질적인 대이라크 제재조치는 이미 실천에 옮겨지고 있는 중이다. 사태발발 직후인 지난 4일 로마에서 열린 EC 정치위원회에서 이라크및 쿠웨이트 원유수입 중지와 이라크에 대한 무기 판매를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EC의 이같은 결정은 유엔 안보리의 결의로 뒷받침 됐고 국별로 별도의 추가 조치를 보태 즉각실천에 옮겨졌다. 각국은 우선 자국내의 쿠웨이트및 이라크 소유의 모든 재산을 동결시켰다. 이 조치로 아마도 사담후세인의 가장 큰 관심사인 1천억 달러의 쿠웨이트재산이 동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유럽각국은 이라크와 과학기술및 군사협력을 중지했으며 무기판매도 동결했다. 수입신용장의 발급도 중단됐고 식량수출도 금지 되었다. 이와같은 유럽각국의 경제력 옥쇄작전에 이라크가 얼맛동안이나 버텨나갈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또 이라크가 무모하게 사태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배제된 것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계평화와 질서유지라는 명분을 알세운 유럽국가들의 대이라크 제재조치는 그 명분이 충족되지 않거나 훼손될 기미가 보일 경우 더욱 고리를 죄어나갈 것이라는 점이다.
  • “무지개를 쫓는 김일성”/불지,7ㆍ20선언 계기 북한특집

    ◎못이룬 남한적화의 꿈… 아들에게 물려줘/45년 전시 체제… 남은 것은 경제 파국 프랑스의 르 휘가로지는 22일 한국의 「민족 대교류 기간」 제의와 이에대한 북한의 거부사실을 중점보도하면서 이를 계기로 개인숭배 권력세습등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다음은 「김일성,인간극성」제하의 르휘가로지 기사의 요약이다. 이미 왜소해진 「큰 지도자」 김일성은 오늘도 일곱빛깔 무지개를 잡으려 나무꼭대기에 오르고 있다. 이상한 도시 평양을 45년이나 지배하고 있는 올해 78세의 이른바 「인간북극성」 김은 결코 이즈러 질 수 없다는 몽상에 잠겨 있다. 스탈린도 죽고 모택동 티토도 사라졌으며 차우셰스쿠까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김」의 뒤는 다시 「김」이 이어받게 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아들 김정일이 「사회주의 낙원」을 넘겨받도록 계획되어 있다. 북한에서는 간단히 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거대한 김의 동상벽화 또는 터무니없는 그의 전기들과 관련한 개인숭배에 연결되어 있다. 김이 어떤 조선소를 방문했다고 하자,그가 한 노동자에게 선글라스 하나를 선물하면 이를 받은 사람은 물론 이 장면을 본 모든 사람은 「감격에 목이 메인다」. 김이 어느 공원에 나타나면 그곳에 있는 「진달래꽃은 오직 인민을 영도하시는 경애하는 수령을 위해서만 활짝 피어난다」. 또 그가 어느 학교에 들렀을 때 선생은 학생들에게 「김일성 어버이께서는 자녀를 몇명이나 두셨지요」라고 묻고 어린 학생들은 합창하듯 입맞추어 「우리는 모두 어버이 수령의 자녀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다. 북한의 선전에 의하면 김일성은 한국의 시조인 단군이 나라를 편 백두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2차대전중 김은 격렬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지만 선전으로밖에 믿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소련군 관할의 한 수용소에서였으며 그때 그는 소규모 게릴라부대 인솔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남한이 군사정권과 산업화로 비춰진 반면 북한은 저개발과 개인숭배사상으로 표징되었다. 김의 「지상낙원」은 오직 남한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북한은 항상 총력전의 구호아래 총동원체제를 갖추고 있다. 전쟁의 이름아래 토론도 있을 수 없고 반대의견의 제시는 엄두를 낼 수 없다. 이같이 숨막힐 듯한 전쟁준비는 1945년부터 계속되어온 것이며 힘에 겨워 헐떡거리면서도 지속되고 있다. 괴상한 왕국,한건의 시위도 없고 누구도 싫어하는 이 나라에서 집권자는 인민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김정일이 후계자라고 수시로 선전하고 있다. 어린시절부터 천재성을 나타냈다느니 판단능력,관찰력,재능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16살때 수천권의 책을 읽었다는등의 선전이 바로 그것이다. 김정일은 한 여배우에 빠져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한국에서 그는 테러의 지령자로 비난받고 있으며 살생을 즐기는 빗나간 독재자의 모델이 될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휴전선이 실제로 개방되는 날 남북한 주민들은 아마도 분단의 현실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도 역시 북한주민들은 『위대하신 어버이수령 김일성­』하는 노래를 불러야 될 것이다.
  • 한반도 군축 이렇게/3국 대표의 시각

    3일간의 회의를 마치고 7일 폐막된 미 스탠퍼드대 주최 한반도군축 학술회의에 대해 3국의 대표들은 『첫 만남이라는데 의의가 있으며 서로의 입장을 타진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데서 성과가 컸었다』(한국 정종욱 서울대 국제문제 연구소장),『결과적으로 이번 회의는 유익했다고 생각하며 남측도 또 미국도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회의를 계속해 서로 이해를 넓혀야 신뢰를 가지고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한 이형철 평화군축 연구소 연구실장),『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앞으로 진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모두가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존 루이스 미 스탠퍼드대 국제전략군축 연구소장)고 말하고 있다. 회의가 끝난후 가진 3국 대표들의 뉴스 브리핑 내용을 간추려 본다. ◎정종욱 한국대표/“「정치관계 정상화」등 접근방법 달라/북한측 「미군 단계철수」등 종래 입장보다 유연”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이 이뤄진후 실제 군축을 실시할 경우 어떤 대상을 우선적으로 감축할 것인지 북한측이 구체적 얘기를 한것이 있는가. ▲구체적 얘기는 없었다. 우리는 공세적 무기의 우선 감축을 얘기했지만 북한은 여기에 대한 언급없이 전체로서의 기본적 틀을 강조했다. ­북한이 제시한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을 그 개념상으로만 보면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는것 같은데 다만 그속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가 들어있고 여기엔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수락할수 없는 것인지. ▲그런 문제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이 5가지 기본틀 안에 정치적관계 정상화를 우선시킨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얘기하면 무조건 분단의 고착화를 들고나와 대화가 엇갈리곤 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주장한 내용과 북한의 5월31일 평화안을 비교하면 공통점도 상당히 있는데. ▲신뢰구축의 중요성이 조금 부각되고 군사력 감축에서도 남북한간에 합의가 된후 3단계에 걸쳐 3∼4년내에 무력을 감축키로 한점,검증얘기,미군철수가 남북한간 무력감축과 상응해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 등이 다소 융통성을 보인 대목이며 이것이 어느정도 의견접근을 보일 수 있었던 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 조치보다 군축에의 철학적 접근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의 기본적 방침은 역시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의이후 다시 이같은 회의가 열린다면 그 전망은. ▲이번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이 앞으로 북한의 정책결정에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회의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남북한간의 정치관계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을 들수 있는가. ▲북한은 점점 고립되고 있는데,지난 2년간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비쳐볼때 이같은 고립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도 서로 쓰는 용어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고 이의 조정을 위해서도 서로 만나 배울 필요가 있고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야 한다. 또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북한도 우리 입장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입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라 할수 있다. ­북한학자들의 태도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는가. ▲공격적이 아니었고 대화를 하려는 자세를 엿볼수 있었다. ◎이형철 북한대표/“남한서 미 핵 철수해야 핵 개발 중단/「통일합의 없는 신뢰구축」 분단 고착화 의도” ­북한은 불가침선언은 남북한간에,평화협정 체결은 미국과 북한간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서 굳이 3자회담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기본입장은 3자회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측이 3자회담을 구실로 대화를 거부하므로 하루빨리 대화를 재개할 생각에서 남북이 먼저 회담을 갖자는 것이며 그러다보면 미국문제가 제기돼 결국은 3자회담이 될 것이다. 두 갈래의 쌍무회담제기는 대화교착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라 할수 있다. ­북한은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에 대해 먼저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주장하는데,그러면 이같은 합의가 어떤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가. 가령 고위 당국자 회담인지 아니면 남북정상회담인지. ▲기본입장은 남북한과 미국의 3자가 만나서 얘기하면 군사 당국자간의 직통전화 개설ㆍ운영 같은 것은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무력감축이나 전면개방 같은 문제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축이라하면 좁은 의미에서의 군비감축과 넓은 의미에서 군비통제와 군비감축을 모두 합친 포괄적 군축의 2가지 의미가 있다. 북한이 얘기하는 군축은 어떤 의미인가. ▲실질적인 군비감축,영어로는 disarmament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느낀 것은 남측은 정치적 신뢰구축을 강조하고 있는데 남북한의 불신은 분열에서 생기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로 나간다는 원칙에 합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군사적으로 서로 대결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통일에 합의하지 않고 신뢰 구축조치만을 논의하자는 것은 결국 분단을 고착화 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6월15일 한국의 재야 각계 인사들은한반도군축과 평화통일 선언에서 북한에 대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고 핵안전 협정에 조인하라고 요구했는데. ▲가령 남조선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받아들여 진다면 우리도 그런 요구를 못받아 들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전제 조건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제 조건이 이뤄지지 않으면 핵안전 협정도 체결되지 않는가. ▲현재로선 그것이 조건이다. ◎존 루이스 미 대표/“다음회의 개최 합의… 성급한 기대 금물/한국ㆍ유럽 현실달라 유럽식 모델 적용 의문” ­이번 회의에서 남북한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했는데,접근한 내용이 있었는가. ▲학자적인 입장에서 같은 이슈를 놓고 이야기 한것은 사실이지만 의견이 서로 달랐으며 합의 된 것도 없었다. 학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뿐이며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모두가 앞으로 진전을 이룰 기회를 가질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같은 회의를 다시 개최하기로 합의를 했다는데. ▲다음에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기회를 열기로 한것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 ­한국 대표단은 한반도에서도 유럽식 군축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로서는 유럽식 모델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겠고 유럽에서는 그쪽 나름대로의 현지사정이 있고 한국은 유럽과는 다르기 때문에 유럽모델이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되려는지는 모르겠다. 예컨대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간에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분명히 남북한간에 전쟁을 겪었었다. ­북한은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회담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번 회의는 비록 학술회의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3자회담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가. ▲이번 회의는 각국의 학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며 이들이 대표의 자격을 띤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번 회의를 놓고 3자회담 운운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남북한간에 2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3자회담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할것도 없다. ­이번 회의의 과정과 결과를 보고 군비통제에 있어 남북한이 장단기적으로 보아 협력과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는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군비통제와 안보등의 어려운 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해결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자유인 김현희 서울신문과 첫 단독인터뷰

    ◎“시장서 쇼핑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 없어요”/김일성 기만 깨닫고 증오감 느껴 자백/남해안 바닷가ㆍ제주도 가보는 게 소원/성경ㆍ이야기국사 등 읽으며 사회적응 노력/통일 앞당겨져 부모ㆍ형제 빨리 만나봤으면… 김현희는 역시 예뻤다. 그녀에 대해서는 두가지 측면에서의 관찰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의 선발된 특수공작원으로서 1백여명이 넘는 무고한 KAL기 승객과 승무원을 무참하게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점. 또 하나는 만일 그녀가 이같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던들 그녀 또한 양가의 맏며느리로서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아내이며 주부로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한 여인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유족들에 용서빌어 따라서 「테러리스트」와 「미녀」를 동시에 만나 『당신은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무차별 질문공세를 펴야만 하는 기자의 심정은 착잡했다. 『저는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고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을 살려준 것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대한민국과 인민들이 살려주신 의미를 바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김현희는 지금 용서를 빌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구하며 유족들의 용서를 바란다. 그러나 그 용서는 힘든 것임을 그녀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성서를 읽지 않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왜 나만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기구한 운명을 비관하고 생의 의욕을 잃고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와서 하나님을 알고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이런 시련속에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다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흰 칼라를 받친 보라색 투피스에 머리를 묶은 김현희는 화장기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분만 가볍게 바른 얼굴이었다. 특별회견이 진행되는 2시간30분 동안 그녀는 때로는 입술을 깨물며,때로는 미소짓는 여유를 보이며 최근의 일과 신앙생활,앞으로의 생활계획과 소망,자신의 의식변화,북한에서의 공작원선발과정 및 훈련내용,김일성체제에 관한 인식,북한의 체제변화예상 등에 관해 또박또박 답변했다. 회견도중 어느 대목에서는 긴장이 되는 듯 심호흡을 하기도 했으며 대담하는 기자를 바라보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눈을 약간 아래로 깔고 깜박거렸다. 현재 김현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에의 적응문제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사면은 됐으나 저지른 죄는 가셔지지 않았으며 유가족의 슬픔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직업선택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또 그럴 상황도 아니다. 『지금 생활면에서 불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북에서 성장했으며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인민들이 어떻게 받아주실지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면에서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는 역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어휘의 문제이다. 김현희의 말씨가 이북 사투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기 위해 새벽에 남대문ㆍ동대문시장에 가 본 일이 있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는 창발성을 발휘하는 사회』,또는 『저도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된장국ㆍ김치를 좋아한다』라는 등 때때로 튀어나오는 생경하거나 북한전용의 어휘는 얼마간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날 김현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5번,「조선」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썼다. ○수영장 아직 못가봐 김현희는 아직 지방까지는 돌아보지 못했으나 서울근교는 거의 다 구경했다. 민족역사에 관심이 많아 덕수궁ㆍ창경궁ㆍ비원은 물론,독립기념관ㆍ현충사도 둘러보았다. 그녀가 시장ㆍ백화점 등에 외출할 때 처음에는 『아,김현희가 아닌가』라고 알아볼까봐 겁이 났었으나 특별히 변장은 하지 않았다. 『여기는 남에게 신경쓰는 일이 없는지 물건파는 사람이 한번도 알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김현희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남해안 바닷가와 제주도이다. 『북한사람의 소망은 거의 그렇지만 저 역시 남해안과 제주도에 가보는 것이 꿈입니다. 제주도에 가는 것은 「언니들」과 의논해 본 일이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했으며,남해안에서는 수영을 하기보다 그곳 경치를 보고싶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수영실력은 공작원훈련을 통해 2㎞까지 헤엄칠 수 있는 정도지만 남한에서는 아직 수영해 본 일이 없다. 김현희의 사회적응에 있어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의식의 순화이다. 그녀는 아직도 명곡보다는 행진곡을 더 좋아한다. 이날 회견에 앞서 서울신문사의 협조에 의해 동석하게 된 일본도쿄(동경)신문과 아사히(조일)신문 기자들이 강아지 인형들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감사합니다』라며 기쁜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28살이라는 그녀의 나이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통일을 저해하는 88올림픽을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습니다. 그것은 전투임무였으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중앙당을 위해,통일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테러의식이 순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침상의 베갯머리가 썩도록 눈물을 흘리고 참회해야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엄청난 결과를 빚은 KAL기 격추범행에 대해 비록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장을 목격했다거나 시체의 참상을 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었다. 『제가 실제로 격추현장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고한 동족을 죽이는 잔인한 행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형제가 잘못될까봐 두려워 자백도 안했으나 진상이라도 바로 알려드려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다시는 지구상에 이같은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백하게 되었습니다』­그녀는 바레인에서 검거된 후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또 법정에서 유족들에게 매도당했을 때도 『왜 그때 바레인에서 죽지 못했는가』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레인에서의 자살생각은 검거에 따른 「공작실패」가 그 원인이었으며 사실상 기회가 없어 실행을 못했던 것 뿐이었고 법정에서의 괴로움은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판정해 주신다』고 목사님이 많이 위로해 주어 견딜 수 있었다. 김현희의 하루 일과는 대개 아침 6시30분 기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면 성경을 공부하고 청소ㆍ식사준비를 한다. 체조도 거르지 않는다. 8시부터는 식사,9시부터의 오전시간에는 수사기관 또는 다른 곳에서 의뢰하는 북한실태에 관한 원고를 쓴다. 오후에는 사회적응을 위해 역사소설ㆍ간증소설ㆍ교과서 등을 읽는다. 요즘 읽고있는 책은 간증소설과 김동길교수의 「너와나의 사랑을 위하여」이며,시리즈로 된 「이야기 국사」도 본다. 오후에는 지난날을 반성하는 수기를 쓰고 있으며 TV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 가끔 외출도 하지만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오늘(6일)아침 읽은 성경구절은 잠언 3장 5ㆍ6절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녀가 매일 읽고 있는 성경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야고보서 제1장 2절로부터 4절까지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려 함이라』 ○부모생존 위해 기도 김현희의 신앙생활은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되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수사관들이 성경과 불교서적 등을 갖다주며 읽어보도록 권고했다. 성명말씀은 처음 대해본 것이었는데,잠언중에 좋은 구절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모르는 단어가 많던 차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목사님을 소개받게 되고 지정된 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날 회견에서 잠시 입술을 깨물다 대답한 대목은 이런 질문 때문이었다. ­혹시 꿈에 부모형제나 고향산천을 보는 일은 없습니까. 『그거야 뭐,누구나 다 부모형제 그리워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꿈속에서 자주 봅니다. 범행을 자백하기 전에는 부모형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지금은 수용소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만 기도로써 남북통일이 되어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때까지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바입니다』 김일성에 대한 김현희의 인식은 「위대한 수령」으로부터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그에 대한 인식은 검거 후 8일만에 자백할 때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자백하게 된 동기는 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미국의 식민지」이며 「군사파쇼정권」이라고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아니며 김일성이지금까지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자백을 하고 나서는 한때 김정일의 지시를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혹은 한국의 일면만 보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도 했었으나 날이 가면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또 「미제」는 조선전쟁을 일으켰고 남한을 강점했으며 통일을 방해하는 철천지 원수라고 교육받았고,「일제」도 36년간 조선을 강점하고 학살ㆍ강탈을 일삼은 원수라고 해서 적대감정을 가졌으나 여기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고 서로 하나가 되어 도와가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8살 때 공작원으로 18살 때 공작원으로 선발됐던 김현희는 「통일을 위해 중앙당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라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 각오했다.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많은 단련을 받았다. 그녀를 감상적으로 「미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산이다. 위장된 일본공작원화 훈련을 위해 81년과 82년 1년6개월에 걸쳐 일본인화교육을 받았으며,중국인화 교육도 받은 전문테러리스트였다. 그녀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선생과 생활하면서 언어 뿐만 아니라 일본생활ㆍ풍습ㆍ지리ㆍ역사를 익혔다. 태이프를 통해 야마구치 모모에,가토 도키코,시마쿠라지요코의 노래를 배웠으며 지도를 놓고 신주쿠(신숙)의 이세탄(이세단)백화점은 어떻고,유락조(유락정)는 젊은이들의 영화관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따라서 선생 「이은혜」로부터는 거의 일본인처럼 되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신문과 「문예춘추」같은 잡지도 술술 읽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은혜」를 일본에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으로 생각하는데에는 근거가 있다. 은혜 자신이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했고,조총련계 학생들이 까만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은 것을 보고 부러워 어릴 때 그것을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더니 『그것은 조선사람만이 입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은혜는 「조선사람」의 흉을 많이 보았다. 『조선사람은 밥먹고 물로 울럭울럭하며 입가심을 하지않나,국에 밥을 말아 훌훌 먹는다. 또 크기를 표시하는데도 일본사람들은 동그렇게 표시하는데도 조선사람들은 팔뚝을 내밀고 길이로 나타낸다』고 흉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일본여인이라고 단정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엄격한 통제로 인해,그뒤 공작원이 되어서부터는 사회와 동떨어진 생활을 해와 이성교제의 기회가 없었다는 김현희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와 악수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으나 감춰진 힘이 느껴졌다. 역시 그녀는 웃어서는 안되는 테러집단의 예쁜 인형의 그림자였다.
  • 헛도는 국회 3일째… 여야의 입장과 전망

    ◎여의도서 안걷히는 「예산전용」 난기류/사실규명보다 “정치공세 목적” 판단/정공법 자제,진상조사로 우회 반격태세 민자/3역회담 등 유리한 고지 선점 작전/지자제법처리 민자속셈 파악하려는 듯 평민 국회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돌출한 87년 서울시 예산전용시비로 냉각된 정국이 어떻게 풀려 나갈지 정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야는 지난 28ㆍ29일에 이어 주말인 30일에도 국회의 공전이 거듭됐으나 별다른 접촉도 갖지 못한채 각자의 입장들만 거듭 확인,냉각기류는 당분간 더 지속될 전망이다. 민자ㆍ평민 양당은 일요일인 1일과 주초에 총무와 당3역 등이 잇따라 접촉하는 등 대화체널을 통해 국회정상화를 모색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울시 예산전용시비와 관련,이미 양측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내놓았다가 접점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극적인 합의점 도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특히 평민당측은 회담초반부터 교착상태에 빠진 민자ㆍ평민 3역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키위해 이 문제를 적극활용하고 있는만큼 민자당측으로부터 지자제법안ㆍ안기부ㆍ국가보안법 등 쟁점법안에 대한 일정선의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 한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태세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이번 기회를 통해 향후 당의 입지확대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지자제법안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민자당의 속셈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국회 공전이 장기화될 우려마저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정부와 민자당은 이번 사태를 유도한 평민당의 「태도」에서 확인했듯 사실규명등 정상적인 의정활동보다는 정치공세 및 위력시위에 그들의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정공법보다는 대국민설득등 우회적으로 반격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즉 여권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조차 주지 않고 무조건 사과ㆍ시인하라며 윽박지르고 파행운영으로 몰고 가는 판깨기식의 돌격에 대해 정면대결을 자제하면서 정부의 철저한 진상조사 및 발표 등을 통해 진위여부를 국민들에게 알려 정치공세의 허구성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이 30일 상오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ㆍ김종필최고위원과 청와대에서 긴급 회동,이번 국회사태와 관련,▲어떤 사안이든 사실을 확인하고 온당한 처리방안이 이뤄져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국회가 파행적으로 운영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도 국회운영을 방해하는 야당에게 더이상 끌려가지 않고 정상적인 국회운영을 해 나가겠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날 회동에서 국회운영방침의 기본방향과 함께 추경예산ㆍ국군조직법ㆍ부동산관계법 등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거듭 확인함으로써 거대 여당의 책임성을 다시한번 인식시킨 셈이다. 따라서 서울시 예산전용시비가 빌미가 돼 공전되고 있는 국회는 각종 현안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어느 수준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정상화 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2일로 예정된 민자ㆍ평민 양당 3역회담에서 회담의제 및 일정 등 기본사안에 대한 접근점을 찾고 서로 상대의 입장을 어느정도 살려주는 선에서 타협을 해 나가기로 인식을 공유할 경우 급랭된 여야 구조는 다소 풀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평민당은 이미 여권이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국회보고를 약속한 예산전용시비를 더이상 물고 늘어질 경우 국회파행의 책임을 자신들이 떠맡을 수밖에 없어 최소한의 양보선을 확인할 경우 국회운영정상화에는 동참해야 할 입장이다. 더욱이 정부의 사정활동과정에서 서울 영등포 민자역사의 상가분양등과 관련,평민당 일부 의원들이 특혜분양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등의 보도가 나오자 국회에서 평민당이 여권의 도덕성 흠집잡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경우 반격을 하기 위한 경고라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상위활동과정에서 이와관련,파상공세를 펼 기회가 더 있는 만큼 국회를 벼랑끝으로 모는 파행운영은 이 정도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주장이 평민당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측 답변준비기간중 행정위ㆍ내무위ㆍ법사위 등에서 공세를 이어 나가면서 국정조사권 공동발의등의 주장을 계속 펴 나갈 심산이다.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30일 『국회보이콧등 강경투쟁으로 계속 나갈지 일단 국회운영에 참여해 시시비비를 가려나갈지는 2일 총재단회의및 의총에서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29일의 입장에서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평민당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하더라도 순조롭게 국회가 운영돼 나갈 지는 미지수다. 민자당으로서도 지난 여야 총재회담에서 확인됐듯 여권이 현안처리와 관련,더이상 평민당측에 내놓을 「선물」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간의 심각한 견해차,경제사회적인 어려움 등을 감안,내심 연내에 지자제실시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민자당은 최근 평민당이 새로운 돌파구 모색을 위해 지자제조기실시에 체중을 싣는 듯한 모습을 보여 야권이 적극공세로 나갈 것에 대비한 대응논리개발에 부심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자당의 한 당직자는 단지 부동산투기억제 특별법등 민생관련법안을 여야 공동제의 법안으로 처리하고 광주보상법안의 경우 평민당의 주장을 다소 수용하는 선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점치고 있다. 결국 이같은 양자의 입장을 고려할 때 주초 여야의 신경전을 거쳐 외견상 국회는 정상화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지만 각 현안마다 격돌의 파고는 여느 국회 때보다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 민자당이 이번 국회에서 처리해야 될 법안은 반드시 처리해 13대초반 국회의 짐이 됐던 5공문제정리및 개혁법안완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평민당은 강격저지 등으로 선명성을 부각,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자당은 평민당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더라도 3일부터 상위활동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평민당은 그동안 국회공전으로 소화하지 못한 경제2ㆍ사회ㆍ문화분야의 대정부질문일정을 새롭게 조정하자고 주장하고 있어 또한차례 파란이 예상된다. 집권여당으로서 그동안 약속해 온 각종 법안을 처리,책임정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정치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민자당의 고민이라면 국회초반 장을 주도했던 기세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 투쟁의 수위선택문제가 평민당의 숙제라 할 수 있다.
  • 남북 물자ㆍ기술교류 전면개방/「대 사회주의국가 경협기금」 설치

    ◎저소득층 「세금공제제」 꼭 마련/부동산거래 실명화 법률 제정/노대통령 「6ㆍ29」 3돌 국민과의 대화 노태우대통령은 29일 『남북한간의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북한을 통해 들어오는 항공기와 선박등 운송수단과 물자의 반입을 무제한 허용하겠다』고 말하고 『북한을 포함한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공동번영을 위해 경제협력기금을 설치,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상호비교우위에 있는 생산요소를 결합,제3국에 대한 합작진출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이날 6ㆍ29선언 3주년을 맞아 청와대 영빈관에서 각계대표 1백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민과의 대화」에서 「발전과 국민통합의 90년대를 향하여」라는 제목의 서두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90년대의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을 위한 정부의 정책방향을 제시하면서 조영황변호사등 대표토론자 12명과 국민관심사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우리는 민족성원 모두의 행복과 번영을 이룰 수 있는 경제력을 키워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제분야는 정치성을 초월해 남북한간에 서로가 필요로 하는 물자ㆍ기술ㆍ자본을 교류하고 경제협력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국민 각계층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오는 가을 세제개혁을 통해 집이 없는 저소득근로자에 대한 특별공제제도를 마련,전ㆍ월세값 인상에 따른 근로자의 부담을 덜고 의료공제비 혜택을 넓혀 서민의 의료비부담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영세농ㆍ어가의 복지확충을 위해 농외 취업 직업훈련 확대와 함께 추곡등 정부수매를 이들 농어가에 대해 우선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제도화하며 92년까지 사회복지분야 대학졸업자 등 전문요원 4천명을 채용,저소득층 밀집지역 읍ㆍ면ㆍ동에 배치해 가구별로 자립책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노대통령은 또 병실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민간병원의 신ㆍ증설을 금융ㆍ세제를 통해 지원해 향후 3년간 2만개의 병실을 늘리도록 하고 응급환자가 언제 어디서나 즉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내년까지 응급치료체제를 완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또 『부동산투기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근절되도록 하겠다』고 거듭 강조하고 부동산거래를 실명화하는 등기의무화등의 관계법률을 제정해 투기행위를 제도적으로 봉쇄하겠다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민주주의와 번영,그리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일이 바로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는 바탕』이라고 강조하고 번영과 국민화합을 위해 ▲통일에 대비한 경제체제완비 ▲모든 경제주체에 대한 역할분담 ▲국민의 삶의 질향상 ▲계층간ㆍ부문간 갈등해소 ▲국민이 안심하는 사회조성 등 5가지 과제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은 약 2시간30분동안 일문일답식으로 진행됐으며 TV와 라디오로 전국에 동시에 중계됐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외언내언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집이 절로 되고/앞으로 가고 뒤로도 달리는데 발이 많구나/평생을 한 웅큼 샘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나니/강호에 물이 얼마이건 물어 무엇 하리요』(원문 생략) ◆퇴계 이황이 15살때 게(해)를 보며 지은 시. 그 나이에 이미 철학이 섰음을 알게 한다. 그의 인간적인 생애는 이 시와 같았다고 할 수도 있다. 억지로 내리는 벼슬때문에 평생 네번 서울에 올라갔지만 번번이 낙향해 버리는 사람. 한 웅큼 샘물로 족했으니 강호에 물이 얼마가 됐건 그건 그에게 상관없는 일 아니었던가. 오직 학문의 경지를 깊게 인품의 경지를 높게 하다가 70세 생애를 닫은 성인이었다. ◆이퇴계와 남명 조식과의 이른바 「도의지교」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두 사람은 1501년생으로 동갑. 같은 경상도이지만 퇴계는 좌도에 남명은 우도에 자리잡고 환로에는 뜻이 없는 채 학문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렇건만 죽는 날까지 만나지는 못하고 다섯차례 편지만 주고 받으며 상경한다. 퇴계가 타계하자 슬퍼했던 남명은 2년후 타계한다. 두 스승에게 사사했던 한강 정구는 말한다. 『남명은 천길 절벽같아 길을 찾아들기 어렵고 퇴계는 쪽곧은 길같아 길을 따라들기 쉽다』. ◆길을 따라들기 쉬웠음일까,퇴계의 학문ㆍ사상은 일본학계에 영향을 끼치고 근대의 개화에 기여한다. 우선 일본 유학의 개조라 할 후지와라(등원성와)부터 퇴계의 「천명도설」을 읽고 이기철학을 깨우친다. 그 사상을 이은 야마자키(산기암재),오쓰카(대총퇴야) 등이 명치유신의 사상적 근간을 잡고 그 학통을 잇는 메이지왕의 시강 모토다(본전동부)는 명문으로 유명한 「교육칙어」를 지어 근대교육의 철학을 정립하는 것 아닌가. ◆오는 8월에는 모스크바에서 12회 퇴계학학술회의가 열린다. 지난 11회까지 동양 3국뿐 아니라 미국ㆍ유럽의 수많은 학자가 참석해온 학술회의. 퇴계학은 세계적 학문이다. 다른 선인들의 학문세계도 널리 알려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 천안문사건 1주년 계기로 본 오늘의 위상(뉴스 추적)

    ◎외교고립속 경제난… 내우외환의 중국/서방국가들,차관동결ㆍ기술이전 중단/1천6백만 기업 도산… 실업자 1천만/공업생산 연증가율 21%서 8%로… GNPㆍ수출도 줄어 민주화 요구의 함성을 총칼로 잠재우고 드넓은 광장 곳곳을 붉은 피로 물들게 했던 「6ㆍ4천안문사건」. 중국당국은 1년전 세계를 경악케 만든 미증유의 이 대사건이 국내외에 준 충격과 상처를 될 수 있는 한 작게 줄이려는 노력과 함께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등 갖가지 처방을 다하고 있으나 사건이 남긴 깊은 흉터는 좀처럼 없어질 것 같지 않다. 중국은 6ㆍ4사건으로 말미암아 외교적 고립과 개방ㆍ개혁의 후퇴를 겪어야 했고 서방세계는 민주화 요구시위를 무차별 진압한 폭거에 항의,대중국 경제제재의 고삐를 좀처럼 풀려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또 중국권력구조의 강성화와 사회주의 재무장의 계기가 됐으나 권력투쟁과 새로운 사회불안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한중교류에도 적잖은 마이너스 영향을 주었다. 이밖에도 비록 중국안에서는 민주화의 싹을 무참히 밟아버린 사건이었지만 동구 소련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개혁에는 촉매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6ㆍ4사건이 지난 1년동안 중국 안팎의 정세에 미친 충격파와 이에 따른 변화 및 전망 등을 부문별로 살펴본다. ▷국제정세와 6ㆍ4◁ 중국은 천안문사건이란 큰 희생을 동구변혁의 밑거름으로 제공했다.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서는 지난 78년부터 가장 먼저 개방ㆍ개혁을 추진했지만 시위군중을 무력진압한 유혈사태 이후 사회주의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동구각국 지도자들은 6ㆍ4사건으로 중국의 이미지가 크게 악화됐을뿐 아니라 외교적으로 따돌림을 받고 경제가 파탄국면에 놓이는등 최악의 결과가 파생됐음을 깊이 인식,자국내의 민주개혁요구를 폭넓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게 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특히 중국당국의 무력진압에 찬성의 뜻을 나타냈고 지난 연말 교석당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일행을 맞아 강경사회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다짐을 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국민의 손에 처형당한 사실은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공산당 일당독재포기의 계기로 작용했을 것 같다. 6ㆍ4사건은 무력으로 민의를 짓밟는데 대한 대가가 엄청난 국익손실이란 점을 세계에 알렸으며 전반적인 민주화추세를 가속화한 것으로 지적된다. 이는 또 사회주의국가들이 더이상 마르크스주의만으로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준 것이기도 하다. 한편 중국지도층은 지난 2월 소련의 공산당 일당독재포기선언 이후 외교적 고립감이 가중되자 동병상련의 입장인 북한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제3세계국가 순방에 나서는 등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정립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북한을 크게 의식하는 북경당국의 태도는 한국의 대중국진출에 큰 장애가 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등 서방국가들이 중국과 크게 거리를 두고 있는 한 중국의 순방외교도 실효를 거두기 힘들며 대만의 탄성외교가 오히려 빛을 보고있는 실정이다. 대만은 6ㆍ4사건 때문에 중국의 대외적 이미지가 손상되자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과 외교관계에 있는 국가들과도 수교를 추진,적잖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대중국경제제재◁ 6ㆍ4사건으로 중국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서방세계의 경제제재조치이다. 중국은 세계은행(IBRD)및 서방국가들이 종전에 제공했던 각종 공공차관을 동결하고 기술이전을 중지하는 등 갖가지 경제제재를 가함에 따라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다. 게다가 조자양(전당총서기)등 개혁파가 실각함에 따라 중앙통제식 경제운용이 강화된 터여서 주름살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해의 경제성장률은 88년 11.2%의 절반이하 수준인 3.9%에 머물렀고 1인당 국민소득은 인민폐의 평가절하와 인구증가 등의 요인이 겹쳐 오히려 40달러 줄어든 3백달러선에 그쳤다. 긴축시책으로 무려 1천6백만개의 개인기업이 도산했고 국영기업도 2만개나 조업을 중단했다. 전국적으로 1천만명이 넘는 완전실업자들이 북경 상해 광주 심수 등지로 몰려 다니며 일자리를 구하는 맹류현상이 두드러져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공업생산증가율은 21%에서 8%선으로 급격히 둔화됐다. 중국이 현 시점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미국이 그들에 대한최혜국대우(MFNㆍMost Favoured­Nation Status)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MFN은 한마디로 어떤 특정국가에 대해 제3국보다 불리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보통 제3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 제시된다. 종전에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MFN을 적용해 왔지만 이를 폐지할 경우 미에 수출되는 중국상품의 관세는 하루 아침에 10∼20%에서 60∼1백10%로 껑충 뛰게 된다. 그 결과 연간 1백20억달러의 대미수출은 30억∼50억달러로 줄어들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해 60억 달러,올해 90억달러에 이를 중국의 대미무역수지 흑자를 감안하면 MFN의 폐기는 중국경제의 숨통을 죄는 것과 같다. 지난달 24일 부시 미대통령은 오는 3일 만료되는 중국에 대한 이같은 최혜국대우를 1년 연장한다고 밝혔다. 비록 중국의 인권탄압이 심하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상호교류를 안 할 수 없는 데다 홍콩ㆍ한국ㆍ일본 등 주변 국가들도 피해를 본다는 이유에서 였다. 특히 홍콩은 중국의 대미수출 물량가운데 70%를 중개하기 때문에 가장 큰 선의의 피해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밖의 주변국들도 중국경제의 구매력이 낮아짐에 따라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의회는 중국의 민주화 및 인권문제가 개선된다는 보장이 없는 한 부시대통령의 결정을 번복시키거나 1년의 적용기간을 6개월 혹은 9개월로 줄이는 등 조건부의 대우조치를 취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중국의 미소작전과 향후전망◁ 6ㆍ4사건 1주년을 맞이하면서 북경당국은 대내외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많이 쓰는 것 같다. 지난달 1일엔 북경과 티베트라사에 대한 계엄령을 해제한데이어 10일에는 비록 주동자를 제외시키긴 했지만 천안문시위관련자 2백11명을 전격 석방했다. 또 얼마전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실권자 등소평은 서독전총리 슈미트에게 『지난해 사건발생의 책임을 학생들에게만 돌릴 수 없다. 중국의 지도층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강택민총서기도 미ABC­TV 앵커 바버라 월터스와의 회견에서 똑같은 말을 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달 23일 과거에는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던 천안문시위를 「정치 풍파」로 표현하고 그동안 탄압대상이 됐던 지식인들의 사회활동참여를 촉구했다. 6ㆍ4사건은 자산계급 자유화를 추종하는 반혁명 분자들이 사회주의 중국을 전복시키려 했기 때문에 충성스런 인민해방군이 이에 맞서 싸워 당과 조국을 구한 것이라던 종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북경당국의 이러한 미소작전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같다. 인권탄압을 비난해온 서방국가들을 무마시켜 경제제재가 완전히 풀리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혜국대우 문제 외에도 중국은 세계은행 차관을 계속 얻어야 하며 일본으로부터 50억달러의 장기저리차관을 들여와야만 90년이후 5개년개발 계획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다. 세계은행은 29일 이사회에서 대중국제재문제를 논의했으나 겨우 3억달러의 조림용 차관공여를 허용했을뿐 나머지 차관은 계속 동결시키기로 했다. 차관외에도 과학기술도입ㆍ군사협력 등 중국이 서방세계의 신세를 져야 할 사항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미소작전은 치열한 권력투쟁의 잠재성을 가진것 같다. 지난달 27일 주해경제특구를 시찰한 중공당정치국상임위원 이서환은 『6ㆍ4사건책임이 지도층에게도 있다는 등소평과 강택민동지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 시위학생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이붕총리의 태도는 틀린 것이다』라고 공언,현지도층의 내분을 가시화시켰다. 한편 이붕과 함께 강경보수파로 알려진 양상곤국가주석은 『천안문 시위무력진압은 중국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취해진 정당한 행위』라고 남미순방길에서 밝혔다. 결국 겉으로 드러난 대로라면 등소평ㆍ강택민ㆍ이서환등 비교적 개방지향의 인사들이 같은 편이고 이붕ㆍ양상곤과 이들 보수세력의 대부격인 진운 당중앙위고문이 등을 돌리고 있는 셈이다. 등은 오랜 라이벌인 진이 지난 4월말쯤 자신에게 천안문사건 최종 책임의 화살을 겨누자 이를 피하는 것은 물론 서방세계의 제재도 종식시키고 대내적으로도 불만이 큰 지식계층을 무마하는 등 다목적의 전략을 택한 것 같다. 그러나 『고위층에도 책임이 있다』는 말은 결과적으로 강경보수파를 지목하는 것이어서 앞으로 중국의 권력투쟁은 가열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 같다. 한편 모두 80대 중반을 넘어선 등이나 진이 사망할 경우 앞으로 중국의 정국은 예측하기 힘든 변화의 길을 걸을 것이며 만약 지난해 천안문시위에 동조했다가 실각,현재 심장병을 앓고 있는 조자양이 죽게 되는 날이면 제2의 6ㆍ4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을 것 같다. 민주개혁을 주장했던 조에게 지식인ㆍ학생 등 중국인들이 거는 기대가 매우 큰데다 지난해 천안문시위도 조와 같은 노선을 취했던 호요방(전당총서기)의 사망을 계기로 점화됐던 것이다.
  • 「노대통령의 날」 선포…상항엔 환영물결(노대통령 정상회담 여로)

    ◎호텔 정문엔 한ㆍ미ㆍ소기 나란히/북가주 10만 교포,환영위 구성/30국 기자 1천명 운집… 세계의 관심 입증 노태우대통령은 12시간의 장거리 여행끝에 태평양을 건너 3일 상오 10시(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도착,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바쁜 일정에 들어갔다. ○교민1백명 태극기 마중 ○…노대통령이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에는 부시 미대통령의 특별지시를 받은 조제프 리드백악관의전장과 아트 아그노스 샌프란시스코시장등이 나와 노대통령일행을 영접. 이날 상오 공항에는 교민1백여명이 「환영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쓰인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일행을 환영. 노대통령은 장거리 여행에도 불구하고 시종 미소를 띤 얼굴로 교민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며 환영에 답례. 노대통령의 이번 미 국방문은 업무성격의 방문이기 때문에 미 정부차원의 특별한 공항 환영의전행사는 생략. 노대통령은 공항에서 미정부가 제공한 차량에 탑승,숙소인 시내 페어몬트호텔로 직행. 페어몬트호텔은 지난 48년 유엔창립총회가 열린 유서깊은 곳으로 호텔측은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기념하기 위해 2일부터 정문에 태극기와 성조기ㆍ소련국기를 내걸었고 그랜드볼룸에 프렌스센터를 설치. ○…샌프란시스코시는 시의회의 결의로 노대통령이 도착하는 3일을 「노태우대통령의 날」로 공식선포하여 노대통령을 환영. 아트 아그노스 샌프란시스코시장은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대통령을 영접하는 자리에서 노대통령에게 행운의 열쇠를 증정하면서 「노태우대통령의 날」 선포문을 함께 전달. ○스위트룸에 투숙 예정 ○…노대통령이 유숙할 페어몬트호텔의 방은 정식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샤론 아놀드 호텔홍보담당관은 『통상적으로 외국정상들이 이용하는 렌트하우스는 이미 계약이 끝난 상태이므로 부득이 62개 스위트룸 가운데 1개를 노대통령이 사용할 것』이라고 코멘트. 그는 『한소 정상회담이 페어몬트호텔 어느곳에서 열리게 될 예정이냐』는 보도진의 질문에 대해서도 『호텔측으로서는 아직까지 아는 바 없다』며 함구.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북가주지역 10만 교포들은 이번 한소 정상회담 개최소식이 알려지면서 「노대통령 한소 정상회담 북가주 교포환영위원회」를 구성해 열렬히 환영. 교포들의 이같은 환영채비는 과거 대통령의 방미때와는 달리 순수한 범교포적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 특징. 한편 샌프란시스코에는 지난 1일부터 세계 30여개국 기자 1천여명이 속속 몰려들어 이번 한소 정상회담에 대한 세계적 관심도를 반영. 이중 미국의 3대 TV네트워크도 샌프란시스코에 톱앵커맨등을 파견키로 했는데 NBC의 톰 브로커,ABC의 피터 제닝스,CBS의 댄 래더 등이 4일 저녁뉴스를 전국에 생방송할 예정. ○…노대통령은 3일 하오 3시 성남 서울공항에서 박준규국회의장ㆍ이일규대법원장ㆍ강영훈국무총리 등 3부요인과 전각료,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과 김종필ㆍ박태준최고위원 등 당간부,청와대수석비서관,3군총장 등 1백여명의 환송을 받으며 특별기편으로 출국. 노대통령은 이날 하오 2시40분 헬기편으로 공항에 도착,환송식장인 청사 2층 옥내행사장으로 가 군악대의 팡파프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강총리와 이연택총무처장관의 안내를 받아 중앙연단에 올라가 출국인사. 노대통령은 이어 화동 정미숙양(10ㆍ서울사대부국 4년)으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환송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 이에앞서 노대통령은 이날 하오 청와대를 떠나면서 부인 김옥숙여사ㆍ아들 등 가족들의 배웅을 받는 자리에서 외손녀 윤정양(2)을 안고 『네가 컸을 때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 분단이나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옥숙여사 동행 안해 ○…이날 노대통령이 타고간 특별기는 대한항공에서 임대한 보잉 747기로 태극기와 대통령 휘장기를 비행기 앞 양쪽에 게양했고 서울공항 청사건물에는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환송 노태우대통령 미소 정상과의 회담을 위한 미국 방문」이라고 쓴 현판을 부착. 이번 노대통령의 방미는 「공식방문」이 아닌 「업무여행」(WORKING VISIT)인 관계로 환송행사는 옥내행사로 간소하게 치러졌으며 소련과 아직 수교가 되지 않았음을 감안,소련국기는 물론 태극기와 미국국기도 연도에 걸지 않았다고. 또 대통령 부인김옥숙여사가 동행치 않아 이날 공항행사에도 3부요인등이 동부인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도 각료로는 최호중외무부장관만 수행했으며 관계비서관등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구성. ○「통일로 가는 길」 소개도 ○…미국의 AP통신은 3일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회담과 관련,『한국인들은 이번 한소 정상회담을 남북통일로 가는 단계로 보고 있다』고 샌프란시스코발로 보도. 이 통신은 노대통령이 지난 88년 7월 한반도의 평화를 증진시키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북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고 소개. AP통신은 『한국교포들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역사적인 회담에 깜짝 놀랐으며 만일 고르바초프가 남북한간의 통일을 원한다면 그는 북한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재미교포 한국언론인의 말을 인용 보도하기도. ○소 영사관에 하루 묵어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1박2일간 머무를 예정인 소련영사관일대는 사복경찰과 기관원들이 삼엄한 경비망을 구축,행인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약3만명의 소련계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고르바초프를 맞아 환영행사를 계획하고 있지 않아 들뜬 한인사회와 대조적인 모습. 한편 독립을 선언한 발트 3국 출신인들은 4일 대대적 반소시위를 계획하고 있기도.
  • 안개정국속 「이등휘호」출범/대만총통 취임과 「항해기상도」

    ◎국민의 민주화 욕구 수렴등 과제 산적/당내 파벌싸움도 심각… 전도 불투명 장경국총통의 사망으로 지난 88년 이후 그의 잔여임기를 물려받았던 이등휘총통이 대만 안팎의 정세가 그 어느때보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20일 정식으로 임기 6년의 제8대 총통에 취임한다. 이총통은 최근들어 부쩍 고조되고 있는 대만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와 집권당인 국민당 내부의 파벌싸움,야당의 강력한 도전 등으로 그의 정치여정이 매우 순탄치 않을 것이란 평을 받고 있다. 또 사회ㆍ경제적인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중국의 압력도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대만의 안정과 번영을 꾀하기 위해 그가 풀어야 할 난제는 너무 많은 것 같다. 그가 당면하고 있는 시련가운데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은 집안 싸움을 종식시키는 일로 지적되고 있다. 대만 국민당 내부의 권력투쟁은 지난 3월 8대 정ㆍ부총통선거를 둘러싸고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현재 3개 계파로 나뉘어 첨예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3월 이총통이 러닝메이트로 그의 비서실장 이원족을 지명한데대해 이환 행정원장을 대표로 하는 원로보수인사들이 기득권 상실을 우려해 크게 반발,비주류파를 만들어 별도의 후보를 내세우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총통의 설득으로 당시 소동은 가라앉았으나 최근엔 군부실력자 학백촌 국방장관(4성장군출신)이 차기 행정원장으로 지명됨에 따라 대만주민들은 『군의 정치개입이 민주화에 역행한다』며 날마다 거센 항의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게다가 이총통에 대항했던 이환이 행정원장직에서 해임되는 것은 명백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하는 비주류파측에선 이러한 주민시위에 편승,이총통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주류ㆍ비주류 외에 얼마전 국민당의 젊은 혁신파인사들은 별도로 신국민당련선을 결정했으며 대북시 출신 입법위원으로 최다득표당선 경력을 자랑하는 조소강(41)이 이 단체를 이끌며 이총통에 도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40년 동안 일사불란했던 국민당이 이처럼 분열된 모습을 보이는데 대해 관측통들은 민주화 과정에서 치러야 할 진통으로 보기도 하지만 농학박사로 학자출신인 이총통의정국운용능력이 충분치 못한 것 같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ㆍ경제적 측면에서도 대만은 적잖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 같다. 지난 87년 계엄령해제 이후 범죄발생건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으며 TV에선 권총등 불법무기류 신고에 관한 프로를 고정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인ㆍ기업인에 대한 범죄단체의 협박ㆍ폭행사건도 적잖이 발생하고 있다. 이같은 정치적 불안과 치안문제이외에 임금을 비롯한 원가상승 등으로 경제가 받고 있는 타격도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지적된다. 한편 이총통은 이러한 상황들에 대처하기 위해 오는 6월중 국정회의(비상시국대책회의)를 소집,각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 종신직 대륙원로들을 3년이내에 모두 퇴진시키는 등 정치민주화를 가속화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각계각층 보수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빠른 시일안에 실효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얼마전 이총통은 중국에 대해 정부대정부의 대화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 북경당국은 대만을중국의 일부로 보거나 지방정부로 취급하려 하지말고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논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측은 이러한 「1국2정부」제의는 대만이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높이고 두개의 중국을 만들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라며 즉각 거절했다. 대만의 대 중국투자는 통일문제와 큰 관계가 있다. 대만측은 7백억달러에 가까운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대륙안에 경제력을 과시,앞으로의 통일논의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가려는 속셈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중국은 언젠가는 대만이 본토에 귀속될 것이므로 투자를 환영하는 입장이다. 이에 맞서 대만의 대륙정책도 장기적인 것 같다. 국제정세의 변화를 감안하더라도 중국의 민주화는 필연적이며 제2의 천안문사건이 발생,강경보수적인 현 중국 지도층이 물러나고 대륙전체가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인식하게 될 때 통일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대북=우홍제특파원〉
  • 추락하는 아버지의 권위/황산성변호사(서울시론)

    ◎세태 탓하기전 「가장의 소임」다해야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기초단위인 가정에서의 규범이 파괴되고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심심찮게 표출되고 있다. 한 마디로 아버지의 위치가 흔들리고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 가정을 보호ㆍ지도하는 아버지의 존재와 역할이 신뢰를 상실하고 자녀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시대가 변천하여 전통적 유교문화에 대한 절대복종규범이 통하지 않는 세태임을 아직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가 많다는 사실이다. ○사회기초단위마저 흔들 작년 10월 어느날의 사건이다. 두 아들을 둔 40대 부부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왔고 아들들도 부모에 만족하며 모범 학생들이었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돈 많은 과부와 놀아나면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겠다는 출세의 야욕에 눈이 어두워 가정을 저버렸다. 아버지는 두 아들만은 탐이 나서 같이 사냥을 다니며 그 여자를 새엄마라고 소개하였다. 큰아들이 어머니에게 아버지한테 여자친구 생겼으니 조심하라는 귀띔을 했다. 그래도 워낙 단란했던 가정이었기에 어머니는 그말을 예사로이 넘겼다. 아버지는 바람난지 6개월후부터 아예 집을 나가버렸고,아내에게 이혼을 폭력으로 요구하였고,이에 응하지 않자 가정법원에 이혼 심판청구를 제기해 놓고 수시로 집에 와서 아내를 구타하였다. 큰아들은 의협심이 강해 어머니를 때리지 못하도록 아버지를 만류하였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고하여 고아원에 보내겠다,탄광촌에 보내겠다는 막말을 퍼부었다. 사건당일 아버지는 또 나타나서 가재도구를 다 때려부수고 아내를 구타하자 격분한 큰아들은 부엌으로 달려가서 칼을 들고 나와 아버지를 찔렀다. 아버지는 사망하였고 모범생 아들은 응분의 형사처벌을 받는 죄인이 되었다. 엊그제 술주정이 심한 아버지가 평소에 어머니를 자주 구타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차라리 없으면 좋겠다,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해 오던 차에 야구방망이로 어머니를 구타하자 중2(여),중1(여),국4(남)3남매가 부엌칼 도마 프라이팬 등으로 벌떼 덤비듯 아버지를 때려 사망에 이르게 했다. ○「가치없는 부권」에반항 형사적 책임이 면제되는 14세 미만의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포악하고 무분별하며 존경할만한 가치가 없는 부권에 대한 아이들의 분노와 도전이었다. 그렇게도 허물허물한 아버지에게 방종의 무대를 마련하는 움직임이 있다. 간통죄 폐지론이다. 간통행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세계적인 입법추세이고 헌법상의 행복추구권 및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형사법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손해배상 또는 위자료청구로 해결할 문제이며 간통자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사회적 기반이 상실되고 충효를 교육의 기본으로 한 자녀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염려와 가진자와 못가진자 구별에 따른 불평등적 운영과 위자료를 받기 위한 협박 또는 공갈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간통을 저지르는 여성이 늘어남에 따라 오히려 여성에게 불리한 법이라는 등의 이유로 간통죄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우리 헌법에는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보장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분명히 오늘의 우리 가정은 일부일처제를 적법한 가족관계로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하는 경우에는 2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봉함된 편지나 문서 또는 도화를 개파하여 비밀을 침해한 행위가 3년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형법규정과 비교해 볼 때 위 두 죄가 고소가 있어야 논하는 바 깊은 사려 끝에 내리는 결론인 간통죄가 큰 무리라고 볼 수 없다. 미국 판례법상 간통죄가 폐지된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지위향상과 성개방문화로 인하여 단지 사문화되어 있다. 아직 민법상 아내의 위자료청구나 자녀들에 대한 보호대책이 선진국과 같이 보장되어 있지않는 현행 제도하에서 비록 공갈 또는 협박의 수단으로 활용되더라도 간통죄는 필요한 최후의 수단이다. ○「작은천국」 소중히 지켜야 간통죄가 폐지되면 아직도 살아 있는 세대가 부첩제도의 특권을 누렸던 경험에 비추어 우리 사회에서 일부일처제는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한편 아내와 자녀들을 천사처럼 착하고소중하게 여기던 아버지가 가장노릇이 힘들다고 하여 동반자살을 하였다. 부권을 절대권이 인정한다 하여도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생명박탈권까지 부여받지는 않았다. 자녀들은 가장의 전유물 내지 소유물로 착각하는 오만도 버려야 한다. 아버지들이여 작은 천국에 비유되는 가정에서 아버지다운 전인적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거꾸로 자녀들의 징벌에 의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란다.
  • 사립교 노조금지/간통죄 처벌규정/“합헌”ㆍ“위헌”뜨거운 논쟁

    ◎헌재심판대에 오른 쟁점법 지상중계 「전교조」와 관련,그동안 많은 논란을 벌여온 교원의 노동운동을 금지한 사립학교법 제55조 및 제58조1항4호의 위헌법률심판사건과 형법제241조의 간통죄는 헌법상 행복추구권등에 위배된다는 헌법소원사건에 대한 변론이 16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렸다. 이날 변론에는 정원식문교부장관등 관계ㆍ학계ㆍ법조계인사 10여명이 참가,열띤 찬반공방을 벌였다. 헌법재판소가 사립학교법 제55조 등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릴 경우 이 조항에 의해 해직된 사립학교 교사들이 모두 복직되고 교원노조의 합법성 여부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돼 각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조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각급 법원에서 모두 88건이나 위헌법률심판을 해주도록 제청하고 있으나 서울민사지법 합의42부(박용상 부장판사)는 최근 이 조항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위헌제청신청 자체를 기각,법원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실정이다. 간통죄의 경우도 여성계ㆍ학계ㆍ법조계에서 그동안 끊임없는 논란을 벌여온데다 헌법재판소의 결정과는 별도로 법무부가 폐지를 추진하고 있어 이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결정이 주목되고 있다. 이날 변론에서 공방을 벌인 이들 두 문제에 대한 합헌ㆍ위헌 양론을 간추려 소개한다. ◎사립학교법/「집단목적」위한 학생이용은 부당 합헌론/노동권 부정은 기본권의 본질 침해 위헌론 ▷합헌론◁ ▲정원식 문교부장관=사립학교는 국ㆍ공립학교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감독권아래 있으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보통교육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공교육기관이다. 이법 55조는 사립학교교원의 법적지위를 공립학교교원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위한 조문이다. 사립학교교원의 자격 및 직무가 국ㆍ공립교원과 같으므로 이들에게 노동권을 인정하는 것은 헌법 제11조(평등권)에 어긋난다. ▲강린제 동북고교장=「교원노조」는 목표달성을 위해 학생을 선동ㆍ의식화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등 나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주장하는 「참교육」의 실체는 「민중교육론」을 바탕으로 한 편향된 의식화교육일 뿐이다. 학교는 선동ㆍ선전의 장소가 되어서도 안되며 사회운동이나 정치운동의 장소도 아니다. 학생들에게 보편타당성이 없는 편견이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제자를 병들게 하는 것일 뿐이다. ▲김상철 변호사=우리나라 중등교육에서 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45.3%나 되는 등 사학의 공교육적기능의 원활한 수행이 강조되고 있다. 사립학교교원도 임용주체만 다를뿐 임무ㆍ자격ㆍ보수ㆍ신분보장의 면에서 헌법상의 공무원에 해당한다. 교원의 교육의 자유는 공교육체계와 국가입법에 의한 교육제도 및 정책의 틀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상규 변호사=경제적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국ㆍ공립학교 교원과 같도록 규정하는 55조만을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립학교교원의 권익보장의 기초가 사회적 책무의 효과적 수행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사립학교 교원에게 노동기본권을 인정하는 것은 국ㆍ공립학교 교원 및 학생들에게 차별을 받게하는 것으로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위헌론◁ ▲양건 한양대교수=58조의 「노동운동」이라는 규정자체가 교원면직사유로서는 지나치게 막연하기 때문에 위헌이다. 헌법 제33조는 근로자의 노동3권 제한은 「공무원」과 「주요방위산업체종사자」에 대해서만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밖에 다른 근로자는 제한할 수 없다고 봐야 한다. 교원의 단체행동권 제한은 이론이 있을수 있으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을 위해 자유롭게 단결할 권리조차 침해하는 것은 명백히 위헌이다. ▲임종률 숭실대교수=헌법 제37조3항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음에도 사립학교법은 노동3권자체를 전면부인하고 있어 헌법에 어긋난다. 직무의 공공성을 근거로 단결권까지 부정할 수 있다면 지하철공사 근로자의 단결권까지 부정할 수 있는 것처럼 사립학교 교원의 직무가 공익성을 띠고 있다는 이유로 단결권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근로자가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해서는 안되고 재산권보호에 부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근로자의 노동3권을 전면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사립학교 교원이 국민의 교육을 받을 권리에 부응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노동3권을 부정할 수 없다. ▲이수호 「교원노조」 부위원장=교사를 새로 임용할 때 기부금을 받는 행위,결혼을 앞둔 여교사에게 사표를 강요하는 행위등 사립학교 교사의 신분을 위협하는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교원에게 노동3권을 부여해야 한다. 사립학교 교원은 의무는 공무원과 같으면서도 피고용자로서의 권리는 더 많이 박탈당해 이를 위해서도 노동3권은 인정돼야 한다. ◎형법 간통죄/일부일처제의 건전혼인생활 보호 합헌론/예민한 사생활…국가통제는 안될말 위헌론 ▷합헌론◁ ◇박윤흔 경희대교수=간통죄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하나 헌법규정은 자유스러운 성적행동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보장한 것이지 간통에 있어서의 성적행위까지 보장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간통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이 세계적 추세와 국민의 의식변화에 따라야 한다고 하나 아직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간통을 비범죄행위로 받아들일 만큼 의식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간통죄가 위헌이 아니라고 해서 계속 존치시켜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입법론이나 형사정책적으로 존치여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간통죄가 헌법 제12조(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은 간통죄를 형법에 규정하고 있는 것이 헌법상의 다른 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다. ◇박정근 중앙대교수=헌법 제10조에서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이 보장된다면 「자기결정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혼인을 자기결정으로 한 배우자들은 성적성실의무도 부담한 것으로 해석해야하므로 이를 서로 지켜야 할 것이다. 간통죄는 국가가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참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게 하는 것이며 참된 성적인 행복을 추구하도록 보장한 것이다. 간통행위는 실제로 축첩ㆍ중혼하는 것으로 일부일처제를 침해하는 것이다. 국가가 간통죄를 처벌하는 것은 바로 일부일처제를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보장을 규정한 헌법 제36조에도 합치된다. ▷위헌론◁ ◇용태영 변호사=혼인은 이성사이의 동거계약과 자녀생산계약이 혼합된 일종의 복합계약이므로 형법이 아닌 다른 법률로 다스릴 수 있다. 간통은 개인적인 혼인감정에 의해 처리되는 당사자처분주의에 속하는 것이어서 국가의 형벌권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전광석 한림대교수=형벌의 목적과 그 객관성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 사회윤리의 유지자체가 형벌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간통행위가 사회윤리에 반하는 것은 사실이나 사회질서가 심각한 위위기에 빠질 정도는 아니며 개인의 성적생활의 한 단면이 될 뿐이다. 따라서 간통은 형법이 아닌 개인관계를 규율하는 민법상의 혼인관계규정에 의해 규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민법상 간통행위를 이혼의 사유로 하고 손해배상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박은정 이화여대교수=간통죄는 형법이라는 최후수단이 고소인 개인의 사적인 감정에 좌우되는 점,간통죄의 추적수사 및 소송절차에서 피고인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 인격적인 손상을 주는등 피해를 준다고 볼 때 부분적으로 위헌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성적자유추구권은 그것에 피해를 입는 다른 가치가 있는 이상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제한됨이 마땅하며 따라서 간통죄가 전체적으로는 헌법정신에 위반된다고 볼 수 없다. 사생활영역의 자유권은 정치ㆍ사회ㆍ경제의 전반적인 자유와 보조가 맞아야 하므로 성적자유와 권리만이 유달리 보호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간통죄의 위헌성은 더 커질 것이며 지금 이를 무효화시키기에는 현실적인 저항이 너무 크다할 것이다.
  • KBS사태 진통 거듭/정규방송 3일째 차질/연행자 모두 풀려나

    ◎노조 대화거부…국장단선 중재 나서 제작거부·농성 등 사실상의 파업 3일째를 맞고 있는 KBS사태는 14일 상오 당초 구속처리될 것으로 보았던 안동수 노조위원장등 노조간부 6명이 서기원사장의 선처요청으로 풀려나고 본관 6층에 남아있던 경찰 2백여명이 노조측의 요구로 철수함에 따라 다소 호전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노조원 가운데 지방에서 상경한 직원 1천여명은 이날 하오 모두 내려갔으며 본사직원 5백여명은 본관2층 중앙홀에서 소속 사무실로 돌아가 철야농성을 했다. 그러나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직무대행 이임호41)는 이날 하오까지 『서사장의 퇴진을 전제로 하지 않은 회사측의 어떠한 대화제의도 거부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아직까지는 사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는 상태여서 극적인 전환이 없는 한 파업사태가 계속될 전망이다. 비상대책위는 이날 상오9시45분쯤 서사장과 영등포경찰서에 공문을 보내 『본관6층에 남아있는 경찰 2백여명을 이날 정오까지 전원 철수시킬것』을 요구,경찰은 서사장의 요청에 따라 낮12시15분쯤 본관안의 경찰병력을 모두 철수시켰다. 회사측은 이날 상오9시30분쯤 서사장의 주재로 본관6층 제2회의실에서 부장급이상 간부 2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를 열었으나 뚜렷한 수습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서사장은 이 자리에서 『현재와 같은 불법사태에 굴복해 물러날수는 없다』고 밝히고 『국·실장단이 집단행동을 자제해줄것』을 당부했다. 회의을 마친뒤 국·실장급간부 40여명은 상오10시쯤 다시 모여 『국장들이 이 사태에 중재역할을 해야한다』면서 노조와 대화를 가질 대표로 박준영 TV편성국장,이무기 기획보도실장,이계복 관리국장 등 4명을 선출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연행된 노조원 1백17명을 조사해 온 서울지검 남부지청은 이날 노조위원장 안동수씨(42)등 9명을 업무방해및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입건하고 연행자전원을 풀어주었다. 한편 노조원들의 제작거부로 이날도 TV는 생방송을 전혀 내보내지 못했고 대신 녹화프로그램을 방송했다. 하오2시로 예정됐던 1TV의 프로야구중계는 단막극의 재방송으로 메워졌고 하오5시10분부터 시작된 전국장사씨름대회 중계만은 정상적으로 방송됐다. K­1TV 밤9시뉴스는 45분간의 방송을 15분만에 끝내고 자막으로 대국민사과문을 내보낸 뒤 곧이어 특집드라마 「밤기차」를 방송했다. 또 「생방송 심야토론,전화를 받습니다」(하오11시10분) 대신에 「격동의 40년」재방송을 내보낸 뒤 15일 상오1시에 종영했다.
  • 한ㆍ소 경협의 진전과 과제/정식수교와 투자보장이 관건이다(사설)

    한소간 경제협력이 가시적 단계를 넘어서 실질적 협력단계로 접어들도 있다. 지난 89년 12월 두나라가 서울과 모스크바에 상주영사처를 교환 설치키로 함으로써 경협의 정치적 교량이 부설되었고 앞으로 정식 국교관계가 수립되면 경제교류의 장애요인이 제거되게 된다. 정식 국교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경협의 전제조건인 투자와 이중과세방지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양국간 경협은 한계점을 벗어 날 수가 없다. 방소중인 김영삼 민자당최고위원이 제의한 것으로 알려진 한소 양국간의 총영사관 교환설치는 투자에 따른 보장을 비롯하여 경협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것이다. 앞으로 소련정부의 태도여하에 따라 양국간의 경협의 진전속도와 협력의 형태에 폭넓은 변화가 예상된다.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과 그나라 소비재 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와 협력을 크게 희망하고 있어 정식 수교문제가 멀지 않아 타결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인 것 같다. 소련과의 협력템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리는 대소협력의 실상과 허상을 냉엄하게 분석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하겠다. 또 그 분석을 토대로 대소 경제협력에 대한 기준과 원칙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와 소련과의 경협은 단순한 경제교류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학적 역학관계를 비롯하여 분단국으로서의 특수성,그리고 경제적 분업관계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이 바로 대소협력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한소간의 경제교류가 북한을 고립화시키지 않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두나라간 경협이 남북간 긴장완화와 관계개선에 능동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우리 기업들이 깊이 염두에 두고 대소 접촉에 임해 주기 바란다. 최소한 소련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기업의 사익보다는 국익을 우선하는 사고와 자세를 요구하고 싶다. 다음으로 우리 정부와 민간기업 모두가 대소 협력관계에서 서방과의 관계를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미국은 우리와 가장 경협관계가 깊은 나라이다. 한미간 우호적인 협력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내에서 대소협력이 모색되고 진전되어야 할 것이다. 소련의 톨보스크석유화학단지건설에 미국기업체와 공동으로 참여하는 방식은 그런 점에서 볼때 매우 고무적인 대소 진출방안이라고 본다. 그러한 정치적 문제이외에 경제적 현안과제들에 대해서도 정부와 민간업계가 종합적인 시스템체계를 구축하여 내실있는 대소진출이 가능토록 하는 게 바람직스럽다. 우리 정부는 민간업계가 안심하고 진출할 수 있도록 투자보장과 이중과세 방지협정을 체결하는 데 경제외교의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이런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 하더라도 소련의 외환사정으로 보아 과실송금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서방기업들이 그동안 소련에 직접 투자를 꺼리고 탐색전을 펴 왔던 것은 다름이 아니고 과실송금의 불투명에 기인되었다. 소련의 외화사정이 급격히 호전될 조짐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국내 기업은 진출에 앞서 어떤 형태로든 과실회수의 방법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겠다. 또 대소 투자진출은 투자규모가 크지 않고 외화획득에 큰 문제가 없는 소비재 산업이 유리할 것이다. 소련진출에서 가장 큰 애로점은 루블화의 교환성 결여에 따른 투자위험과 과실회수의 어려움인데 이를 피하려면 수출이나 수입대체가 가능한 소비재산업이 유리하다. 반면에 시베리아 자원개발사업은 그 사업자체가 위험성이 높고 소련이 언젠가는 수출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원자재를 비롯한 1차 산품의 수출제한조치를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런 위험성을 감안하여 대소 자원개발투자는 제3국과 공동진출하는 선에서 추진되어야 한다. 더구나 경제성이 의문시되는 대소 프로젝트를 놓고 국내업계끼리 과당경쟁을 벌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 전 전대통령 특위제출 서면 답변내용

    ◎“「광주」발포 당시엔 보고 못받았다”/미 정부도 「5ㆍ17」 불가피성 이해했다/사북사태ㆍ학원소요가 계엄확대 원인 ▷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면으로 특위에 제출한 답변내용이다.◁ 본인이 당시 도청 앞 상황과 관련한 발포 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회의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는 이희성계엄사령관,윤흥정 전교사령관 등이 「발포 사실조차도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보고받지 못했다」라는 증언내용에 비추어볼 때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건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청 앞에서의 이러한 발포사태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 통상적인 정보보고를 통해 본인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본인은 즉각 이를 최규하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이미 계엄사령부를 통해 보고되었다고 하기에 중단한 바 있습니다. ▷미 정부역할◁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무성이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 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 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성은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 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의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라도 정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 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 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 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속에서 원유 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 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문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 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 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 투쟁태세를 굳히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 비상계엄확대 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 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동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 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덧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경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 하여 조속하게 사회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 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 전국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가 국보위설치로써 나타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 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 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행정부 요원ㆍ학자 및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 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 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 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가져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 날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임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 있는 행정ㆍ사법 사무에 대한 기획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 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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