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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 李총재 예산 先塋 방문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휴일인 11일 충남 예산군 상구마을에 있는선영을 찾았다.지난 1월 10일 이후 3개월 만이다. 이총재는 먼저 조부모 산소에서 간단하게 차례를 지낸 뒤 선영을 둘러보았다.이총재는 최근 쇠말뚝이 발견된 5,7대조 할아버지 산소에 각별한 관심을보였다.이총재는 쇠말뚝을 파낸 흔적이 흉물스럽게 남아있자 친지들에게 “여기를 팠느냐” “얼마나 팠느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친지 한명이 지난 7일 뽑아낸 쇠말뚝을 보여주자 “주술을 믿는 건 아니지만 후손 때문에 선조께 폐를 끼쳐 죄송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이총재는또 “선영 앞으로 길이 난다고 하던데 언제 결정된 것이냐”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이총재는 한참동안 쇠말뚝을 뽑아낸 자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렸다. 성묘를 마친 이총재는 인근 한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친지들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이총재는 이 자리에서 “청명에 성묘를 못해 한 주 늦춰 오늘왔다”고 설명했다.쇠말뚝과 관련해서는 “후손이 부덕(不德)해 생긴 일이라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어쨌든 친지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송구한 생각이 든다”고 머리를 숙였다. 선영 입구에는 ‘이회창총재님의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100여명의 친지들이 이총재를 맞았다.이번 방문에는 양정규(梁正圭)부총재,이부영(李富榮)총무,하순봉(河舜鳳)비서실장,맹형규(孟亨奎) 조진형(趙鎭衡)의원 등이 동행했다. 앞서 이총재는 10일 오후 서울 근교 I골프장에서 미국 보스워스대사,유흥수(柳興洙) 조웅규(曺雄奎)의원과 골프를 치며 대북정책 등 정국현안을 논의했다. 예산 박준석기자 pjs@
  • YS, 6일 부산·마산 방문

    金泳三전대통령이 오는 6일 부인 孫命順여사와 함께 고향인 거제군 장목면외포리 선영을 찾아 성묘한 뒤 마산과 부산을 잇따라 방문할 계획이다.金전대통령의 부산·경남지역 방문은 퇴임 이후 처음이다. 金전대통령의 측근인 한나라당 朴鍾雄의원은 1일 “주로 동창과 친지를 만날 계획이며 정치적 행사는 갖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金전대통령은 이날 상도동 자택으로 金光一·金瑢泰전비서실장과 趙洪來전정무·文鐘洙전민정·李永來전행정·金正男전정책·愼右宰전공보·劉度在전총무수석 등 재임시절 수석비서진을 초청,만찬을 함께하며 정국현안 등을 논의했다. 박찬구
  • ‘제2공화국과 張勉’ 연재

    대한매일이 현대사 조명작업의 하나로 2월23일부터 ‘제2공화국과 張勉’을연재하고 있습니다.“제2공화국은 ‘어둠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보석이다”라고 어느 정치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장면정부는 민주주의의이상을 실현하고자 애썼습니다.당시 국민은 역사상 가장 많은 자유를 누렸고 의회·언론도 어느 때보다 활발했습니다.그러나 이 정부를 8개월여 만에 무력으로 넘어뜨린 군사정권과 이를 뒤이은 권위주의정권은 제2공화국을 ‘무능하고도 부패한 정권’이라고 폄하했습니다. 대한매일은 이제 제2공화국의 실상은 어떠했으며 우리 민주주의 발전사에어떤 공과를 남겼는지,현 시점에서 되새겨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 집중적인탐구에 나섰습니다.오늘은 2회분을 6면에 게재합니다.관련 자료를 제공하거나 증언해주실 분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전화(02)721-5252,팩스 (02)721-5266.
  • [화제의 책] 백범 김구 연구I

    백범 김구선생의 정치활동을 집중 연구한 ‘백범 김구 연구Ⅰ-정치활동과정치이념’이 최근 신지서원에서 출간됐다.부산 동의대 정경환(鄭京煥)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신지서원의 기획물 ‘한국인물총서’의 첫 권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김구’보다는 ‘정치인 김구’에 초점을 맞춰 구한말부터 해방정국까지의 전과정에 걸쳐 백범의 정치역정(歷程)을 분석하고 있다. 백범은 임시정부수립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광복군 조직·활동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백범은 중국측과 한중동맹군을 조직,일제를 타도해야한다는이른바 ‘한중연합론(韓中聯合論)’을 펴기도 했는데 당시 중국측 자료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과정에서 ‘정치인 김구’의 역할은 시대적 사명이었다. 친일파 처리·토지개혁·신탁통치·좌우합작운동 등 당시의 시국현안에 대한 백범의 인식·대응전략을 당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백범의 정치이념을 ▒민족주의론 ▒민주주의론 ▒경제평등론 ▒문화국가론등 크게 네 갈래로 나누고 있는 저자는 “백범은 소년기부터 조선조 사회의신분계급구조와 인간불평등에 강한 의문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정치활동전 과정에서 그는 독재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정치를 신봉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저자는 6월초 후속작업으로 ‘백범 김구 연구Ⅱ-정치사상의 재조명’을 출간할 계획이다.
  • 金三雄 칼럼-장면박사 출생100년

    “자기의 명성이 자기의 진실보다 더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다”―인도시인 타고르의 말을 올해 출생 100주년을 맞는 제2공화국 張勉총리에게 드리는 헌사로 삼으면 어떨까. 격동의 현대사에서 장면박사처럼 잘못 평가된 정치지도자도 흔치 않다. 그가 이끈 야당과 시민 학생에 의해 타도된 독재자나 합법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한 군사독재자가 ‘존경받는 인물’의 상위를 차지하는 반면 인격적이고도덕적인 품성과 자질로써 ‘단군 이래의 자유’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동시적으로 추진하다 좌절한 민주지도자는 망각되고 있다. 이것은 5·16이래 거듭된 군사쿠데타와 그 아류 정권에 의한 ‘승자의 기록’의 결과이지만, 진실을 탐구하고 가르치는 학자·교사·언론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4월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정권은, 프랑스대혁명이 입헌군주주의자와 시민계급, 온건파와 과격파싸움으로 나폴레옹쿠데타를 불러오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자유로운’사회를 구현한다면서 극좌·극우싸움의 혼돈끝에 히틀러 나치스를 맞았듯이, 집권8개월만에 박정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인간 장면의 인품] 역사상 대부분의 시민혁명이나 개혁이 쿠데타나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된 것처럼 장면정권 역시 5·16쿠데타를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그는 무능과부패의 상징으로 낙인찍혔으며, 독재자들이 역사인물로 격상되는 가치전도현상이 나타났다. 우리 현대사나 국민정신면에서 대단히 부끄러운 모습이다. 장면박사는 인격적으로 매우 훌륭한 분으로 평가된다. 한없이 온후하고 어진 분으로서 인자하면서도 강직하며 사려깊은 분이었다. 외유내강의 독실한신앙인이고 지식인이었다. 그는 ‘각하’의 호칭보다 ‘장박사’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집권 8개월 동안‘단군 이래의 자유’로 불릴만큼 민주주의를 허용했다. 물론 무질서와 정치사회적 혼란이 따르기도 했지만 오랜 억압구조에서 시달리던 국민에게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반민주행위자와 부정축재자의 처단등 4·19혁명과업을 수행하는 데 너무 미온적이었다는 비판도 따른다. 그러나 독재정권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정권으로서의 시대적 한계와, 민주정치 제도에서 가장 운영이 어렵고 높은 민도와 양식있는 국회의원들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에 발이 묶여서 과단성있는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제도적 한계도 따랐다. 여기에 야당의 사사건건 발목잡기와 이상주의적 조급성에 기운 혁신계와 일부 지식인·학생들의 급진적 통일론도 장면정권 좌절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재평가와 교훈찾아야] 장면은 비록 군인들에게 탈권당한 비운의 정치인이지만 그가 한국현대사에남긴 족적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제3차 유엔총회 한국수석대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합법정부로 유엔의 승인을 받는데 기여한 일이다. 또 6·25전란 당시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참전을 위해 발휘한 역량도 큰 업적이다. 특히 민주당을 결성하여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암살 저격까지 받으면서 끝까지 반독재투쟁을 벌인 것이나, 집권기 혼란속에서도 일관되게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경제개발계획을 착실히 마련한 것등은 큰 업적이다. 그러나 교과서적 민주주의나 미온적인 시국 대처는 프랑스혁명기와 독일 바이마르공화정 시기처럼 반동세력에게 기회를 주게 되고 결국 역사를 후퇴시킨 행위로서오늘의 김대중정부에도 교훈으로 남는다. 곧 시작될 대한매일의 ‘제2공화국과 장면’연재는 장면박사의 재평가를 통해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제2공화국 좌절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자는데 있다.
  • 金대통령 국민과의 대화 21일 갖기로

    金大中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계기로 오는 21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국민과의 TV대화’를 갖고 올 국정운영 방향과 4대 개혁 마무리를 통한 경제재건 비전,실업대책,정치개혁과 지역갈등 해소책 등을 밝힐 예정이다. 또 24일에는 내·외신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집권 2차연도 국정 구상과 주요 정국현안 대처방안을 설명한다. 金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지난해 1월과 취임 후인 지난해 5월 ‘국민과의TV대화’를 가진 바 있다.
  • 지역감정 확산방지책 논의

    金大中대통령은 1일 오후 金鍾泌국무총리와 단독으로 만나 한나라당의 마산-구미 집회로 확산될 우려가 있는 지역감정 해소대책 등 정국현안을 협의했다. 金총리는 이날 주례보고에서 지난달 30일 대구 방문을 통해 수렴한 현지 여론을 金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지역감정 확산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金대통령과 金총리는 또 내각제 추진 시기와 형태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한편,총리실 관계자는 金대통령이 자민련 지도부와 사적으로 내각제에 대한 협의를 했다는 보도와 관련,“金총리는 지금까지 그런얘기를 구체적으로 한 적이 없다”고 공식부인했다.그러나 자민련 朴泰俊총재는 이날 당 월례조회에서 “金대통령과 金총리가 내각제에 대해 말씀이 있었다는 감(感)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새달부터 주2회 새 시리즈 연재‘제2공화국과 張勉’

    대한매일이 2월부터 ‘제2공화국과 張勉’시리즈를 주 2회 연재합니다. “제2공화국은 ‘어둠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빛나는 작은 보석이다”라고어느 정치학자가 표현한 것처럼,張勉정부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애쓴 민주정권이었습니다.당시 국민은 역사상 가장 자유로웠고 의회·언론도어느 때보다 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민주정부를 8개월여만에 무력으로 넘어뜨린 군사정권과 이를 뒤이은 권위주의 정권들은 오랜 세월 제2공화국을 ‘무능하고도 부패한 정권’이라고 폄하했습니다.따라서 국민 일반에게도 그같은 인상이 막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제2공화국의 실상과 우리 민주주의 발전사에서의 공과는 무엇인지,그시대가 가진 역사적 한계는 어떠한지,현재 시점에서 제2공화국을 돌아보며되새겨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아울러 그 시대를 알려줄 자료를 제공하고 증언해주실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전화 (02)721-5252, FAX(02)721-5266.
  • 崔章集교수 조선일보訴 취하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고려대 崔章集교수측은 19일 ‘월간조선 11월호’가 崔교수의 한국현대사 연구를 왜곡보도했다며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낸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취하했다고 밝혔다. 崔교수측은 “조선일보사와 합의는 되지 않았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손배소취하는 물론 정정보도 청구 소송과 반론보도 신청사건에 대한 소송도 모두취하했다”고 말했다.姜忠植 chungsik@
  • 청와대, 정국현안 입장밝혀

    청와대가 11일 직접 내각제,정계개편,국민회의와 자민련간 합당론 등 정국현안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다.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내각제에 대한 논의는 잘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지난 5일 金大中대통령과 金鍾泌총리간 ‘독대’이후 잘 풀려가고 있다는 얘기다.그는 또 민주대연합 등 동서화합을겨냥한 정계개편 논의도 정치개혁과 함께 두분이 심도있게 다루어나갈 것이라고 부연했다.일각의 의혹처럼 국민회의 중심의 정계개편이나 자민련과의합당은 논의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의 얘기를 종합하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엄연한 공동정권으로 어느 한쪽을 배제한 정계개편이나 내각제 개헌 유보 움직임은 있을 수도 없고,추진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이는 자민련이 갖고있는 오해를 불식하고국민회의 내부의 물밑 행보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어떤 경우에도 함께 가야 한다”는 그의 언급은 이를 단적으로 압축한표현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金대통령과 金총리간 지난 5일 논의의 핵심은 ‘내각제 개헌유보’를 위한 빅딜이 아니라 공동정권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서로 상대에 대한 의심을 떨쳐버리는 계기가 됐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다른 관계자도 “자민련내에는 국민회의가 원내 제1당을 추진하는 등 일련의 움직임을 합의사항인 내각제 개헌을 연기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하다”고 전했다.이러한 양당간 불협화음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정국안정을 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부와 여권은 당분간 정치·사회적인 불안요소를 제거하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공동정권의 대주주들의 공통인식인 만큼 정치변혁이나 정치권 지각변동 논의는 수그러들 공산이 크다.난마처럼 얽힌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정치구조나 체제를 바꾸기가 여의치않다는 현실인식의 발로다.梁承賢 yangbak@
  • 한국현대문학 집대성 CD-롬 출시

    한국 현대문학 100년을 집대성한 CD-롬 시제품이 나왔다.서울대 인문대 부설 인문정보연구소가 문화관광부의 연구비 지원과 전산 전문업체인 W3K의 기술지원을 받아 완성했다. CD-롬에는 1895년부터 1994년까지 활동했던 4,000여명의 문인에 대한 자료와 12만여건의 관련자료,5,000여점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또 우리 문학사에비중이 있는 시 1,000여편,소설 200여편의 원전이 실려 있으며 한국 현대문학 100년에 대한 해설과 함께 중요 사건이 연표 형식으로 정리돼 있다. 문화부는 이 달말 최종 완성품을 만들어 전국의 공공 도서관과 각급 학교,문화기관 등 2,000여곳에 배포할 방침이다.또 올해중 영문판도 만들어 해외유관기관에 배포할 계획도 갖고 있다. 한편 문인 관련 통계를 보면 문인들의 출생지는 경북이 261명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258명),경남(249명) 등의 순이었다.해방전 최다 작품 발표문인은시집은 김소월(77권),윤동주(43권),한용운(40권),소설은 박영준(186편),염상섭(156편),이무영(132편)의 순이었다.해방이후는 시집은 조병화(88권),고은(38권),김남조(34권),소설은 오유권(213편),정한숙(154편),최상규(135편),소설집은 정을병(67권),이병주(66권),박계형(62권)의 분포였다.
  • 김중태씨 93년판 ‘해적’ 재구성 출간

    70∼80년대 광기의 시대사를 다룬 김중태씨(52)의 소설 ‘해적’(전10권,청목출판사)이 새롭게 재구성돼 나왔다. 작가는 93년에 발표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썼다.93년판이 7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를 다룬데 비해 이번에 출간된 ‘해적’은 70년대 중반김대중씨 납치사건부터 문민정부 탄생 초까지로 시대 영역을 넓혔다.또 등장인물과 줄거리도 크게 바꿨으며,분량도 3,000여장의 원고를 추가해 소설의서사성을 높였다. 천박한 지식기사(知識技師)들과 권력의 주구들이 독판으로 군림하고 천민자본주의가 전염병처럼 만연하던 시절,살아 남고자하는 젊은 떨꺼둥이들의 생존 몸부림이 소설의 줄기를 이룬다. 소설의 배경은 여수 앞 청정해역인 가막만.이 해역의 깡패조직은 속칭 개구리배를 타고 어장과 양식장에 난입,어민들의 생존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는다.또 서울 등지로 진출,정·재계와 손잡으면서 파행적 사회구조를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 점에서 ‘해적’은 정치·경제와 폭력의 상관관계를파헤침으로써 한국현대사의 명암을 뿌리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고할 수 있다.金鍾冕
  • 대한광장-200년만의 도약

    힘겨운 1998년은 가고 1999년의 새해가 밝았다.새해는 20세기를 마감하는 해이다.그리고 민주화의 개혁을 정착시켜야 하는 해이다.지난해에는 경제파탄을 수습하느라고 민주화 개혁은 문제 제기나 부분적인 것에 그쳤다.이제는농업협동조합을 농민에게 돌린다든지,유신체제의 산물들을 개폐한다든지,본질적으로 인간주의를 고양할 민주화 개혁을 정말 구조적으로 정착시킬 차례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인간을 발견하고 인간을 위한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18세기 조선후기의 개혁에서 비롯되었다.그때 사회경제적 변동이나 실학이 대두했듯이 괄목할 변화와 개혁이 추진되었다.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정확히 말해서 1801년부터 보수적 반동인 세도정치가 등장하여 봉쇄 당하고 말았다.그후 각종 개혁운동 및 계몽운동으로 새롭게 시도되었으나 결국에는 일제의 침략으로 짓밟히고 말았다.독립운동을 통하여 다시 근대화를 일으켜 역량을 성장시키기는 했으나 자갈길의 달구지처럼 한계가 많았다. 독립운동을 계승한 해방후의 개혁운동은 미·소의 군사점령과남북분단,그리고 6·25남북전쟁으로 난도질 당하고 그 위에 남북 공히 왕조시대를 방불할 독재정권을 맞아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남한에서 4·19혁명으로 극적인 전환을 보는듯 하였으나 군사정권의 엄습으로 또 파탄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하지만 민주화의 물줄기는 흩어지는가 하면 모이고,숨는가 하면 솟아올라 대하(大河)를 이루는 법,사라질수는 없었다. 4·19정신이 운명을 다한 것 같았지만 다시 솟아올라 60년대의 6·3항쟁과3선개헌 반대투쟁,70년대의 유신 반대투쟁과 부마민중항쟁,80년대의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으로 발전하면서 이 땅에 민주주의의 줄기찬 전통을 심었다.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아래로부터 민주화를 달성한 전통인 것이다.그것은 처절한 희생의 대가였지만,처절하고 숨막히는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오늘의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위로부터 민주화를 이룩한 이웃나라들에 비하면얼마나 자랑스러운 한국현대사인가? 그렇게 보면 1801년부터 지금까지,200년래의 과제였던 개혁을 오늘 우리가달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그것은 21세기를 맞는 세계인의 자세이고 21세기우리의 최대과제인 통일을 준비하는 채비이다.다만 공동정부로 말미암아 보수화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어 마음에 걸린다.민주화의 용광로를 믿는다.98정권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불을 지펴라.국민이 93년에 김영삼을 택하고 98년에 김대중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의 독단과 카리스마적 매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혁의 창조자로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93정권은 가시적 개혁을 이루고도 군사정권의 핵심적 독버섯을 도려내지 못하여 그 독에 감염돼 경제파탄에 이르고 말았다.그 독버섯이란 정경유착과 군사독재를 비호하던 권위조직들의 발호였다.그렇다면 98정권은 정경유착을 분쇄하면서 모든 사회조직을 점검하여 교수들의 모임도,의사·변호사·세무사·관료·농민들의 모임도 뒤집을 것은 뒤집어라.부정부패의 온상도거기에 있다.바로 그러한 개혁이 1999년의 정의이다.앞을 가로막고 있는 통일의 길도 더욱 훤하게 열어 젖히면서 말이다.기묘년의 토끼처럼 민첩하게뛰자.그리하여 ‘200년만의 도약’이란 영광을 안지 않으려는가?
  • 趙 대행 모처럼 지역구 나들이

    ◎성탄절 맞아 교회 방문… 주민들과 담소/산적한 정국현안 잠시 잊고 머리 식혀 국민회의 趙世衡 총재권한대행이 25일 모처럼 지역구(광명을)를 찾았다.성탄절을 빌미로 지역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그는 광명 철산2동 중앙교회를 방문,지역 주민들을 만났다.잠시나마 골치아픈 정국현안을 잊었다. 趙대행의 어깨는 그러나 연말 들어 더욱 무겁다.정국이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규제개혁 법안의 연내 처리와 경제청문회,정치인 사정문제 등 풀어야 할 현안이 켜켜이 쌓여 있다.내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趙대행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정국해법’ 능력의 시험대다.그런 만큼 부담이 크다. 趙대행은 그동안 ‘당권’을 향해 조심스러운 행보를 해왔다는 지적이다.대학 강연을 통해 ‘개혁 전도사’ 역할을 하기도 했고 휴일에는 연극무대 등을 찾아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데 공을 들여왔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지역행사에 참석할 경우 따로 그 지역 인사 등을 만나며 기반을 다져왔다.측근들도 “내년에는 대행이라는 꼬리표를 떼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권 도전의사를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최근 趙대행 표정이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동교동계 좌장격인 權魯甲 전 부총재가 곧 일본에서 귀국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호사가들의 온갖 추측성 발언 및 분석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趙대행이나 權전부총재 등 당사자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주위에서 ‘마음고생’을 시킨다는 얘기도 들린다.趙대행은 權전부총재의 귀국이 갖는 ‘미묘함’ 때문에 애써 말을 아낀다. 權전부총재의 역할 등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정치인이니까 정치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원칙론적 반응이 고작이다.
  • 국민회의 다시 ‘몸집 불리기’

    ◎‘數의 횡포’에 밀려 민생법안 등 차질 판단/천 국방 해임건의안 표결때 자극 받아/원내 제1당 목표… 지도부 대상의원 접촉 국민회의가 한동한 뜸했던 야당의원 영입을 재개할 움직임이다. 지난 21일 국회본회의에서 있은 千容宅 국방장관 해임건의안 표결 결과가 ‘자극제’가 됐다는 후문이다.당시 국민회의는 공동여당의 한 축인 자민련의 이탈표를 막지 못했고 이 ‘수난’이 당 지도부의 의원영입 재개 결심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입은 엄밀히 말하면 재개되는 것은 아니다.내년 5월 ‘전국정당화’를 목표로 정권교체후 꾸준히 ‘영입’을 추진해왔으며 그 활동을 다시 강화하겠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 ‘영입활동’을 강화하는 데는 1차적으로 민생·개협법안 처리가 별다른 이유없이 지연되고 이에 따라 정치개혁과 경제청문회 등 개혁일정들이 크게 차질을 빚고 있는데 더 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수의 논리’에 밀려 정국현안 처리가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판단이다. ‘의원영입’은 ‘원내 제1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경제회생을 위해 개혁작업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제1당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여권 지도부의 확고한 생각이다.그렇게 되면 공동여당이 상임위를 완전하게 ‘장악’한다는 의미도 있다. 국민회의는 정권교체 후 87석에서 시작,100석(개헌저지선),105석(현재),122석(원내 제1당)의 과정을 밟고 있다.산술적으로 105석인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137석 가운데 17석을 확보하면 제1당 위치로 나서게 된다. 국민회의의 의원영입 작업은 새해 본격 전개될 자민련의 내각제 논의개시를 겨냥한 것이란 지적도 있다.자민련은 내년 3월을 내각제 협상착수 시점으로 잡고 있고,내년 12월 말까지 DJP 합의대로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렇다면 국민회의는 내년 상반기중 개헌작업을 끝내야 한다는 자민련의 주장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국민회의의 의원영입 방침은 이래서 정계개편을 앞둔 포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당내 韓和甲 총무,鄭均桓 사무총장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趙世衡 총재대행측도 “영입대상 의원들과 이미 접촉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의원영입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서울의 P·L,경기지역의 L·L,인천지역의 L의원 등이 ‘영입가시권’에 접어들고 있고 부산·경남(PK)지역과 대구·경북(TK)지역 의원들에게 특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후문이다.
  • 국민훈장 받은 李敦明 변호사/세계인권선언 50주년

    ◎“현정권 인권보호 진일보 환영”/‘정부가 주는 賞’에 세상 변화 실감/인권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약자들 위해 정부가 끝까지 노력해야 “인권을 지키는 것은 법조인의 기본 사명입니다.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상까지 받게 돼 쑥스럽습니다” ‘인권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李敦明 변호사(76)는 1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세계 인권선언 50돌 기념식에서 인권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데 대해 “앞으로도 흔들림없이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겠다”고 소감을 말했다. 35년동안 변호사로 재직하면서 한국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인권침해 사건의 변론을 도맡았던 李변호사는 스스로 말하듯 꿈도 꾸지 않았던 ‘정부가 주는 상’에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같은 사회진보에 작게나마 역할을 했음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다고 그는 덧붙였다. 52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법조계에 투신한 그는 54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10년동안 법관을 지냈다. 지방판사여서 정치적 사건을 맡을 기회는 없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구속적부심을 적용,피의자를 석방해 ‘인권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대통령 비방으로 구속된 한 야당 정치인을 적부심으로 풀어 준 것이다. 63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도 법률신문 기고를 통해 “변호사로 성공과 실패의 판단기준은 돈을 많이 벌어 큰 집을 사고 자가용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실천했느냐로 따져야 한다”는 올 곧은 법조인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72년 10월유신 선포는 그가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였다. 그는 “유신이 선포되던 날 정부가 입법 및 사법권을 독점하고 무엇보다 국민에게서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간데 대해 분노하며 밤잠을 설쳤다”면서 “이 때문에 인권운동에 앞장 서겠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金芝河씨 사건 변론 李변호사가 인권운동차원서 첫 변론을 맡은 사건은 지난 75년 시인 金芝河씨의 반공법 위반사건이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사건,朴正熙 대통령 시해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삼민투 사건,權仁淑양 성고문사건,金槿泰씨 고문사건 등 한국 인권운동사의 한가운데에 늘 자리했다. 金大中 대통령이 연루된 76년 명동성당 3·1 구국선언사건의 변론도 그의 몫이었다. 동아일보 광고해약사태 땐 동료 변호사들의 협조를 얻어 광고게재운동을 주도했었다. ○5共때까지 암흑시대 그는 “유신이후 全斗煥 정권때까지 인권의 암흑시대라고 할만큼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극심했다”면서 “당시만 해도 인권변호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여서 힘들기도 했지만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부지런히 뛰었지만 법관이 용기있는 판결을 내리지 않아 항상 졌다”면서 “나중엔 법관을 보고 변론하는 것이 아니라 방청객을 향해 변론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李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인권변호사 그룹은 80년대 이르러 그 趙永來씨. 李相洙 국민회의 의원 등 소장변호사들의 합류로 세를 불려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조직했으며 李 변호사는 초대 고문을 맡았다. 87년에는 5·3 인천사태로 수배중이던 李富榮 현 한나라당의원을 숨겨준 죄로 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그는 “정치보복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처단하는 마지막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유명한 최후진술을 남겼다. 88년 모교인 조선대의 총장직을 제의받고 적임자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학교측에서 수십 번을 찾아와 부탁해 할 수 없이 승낙했다.어차피 정부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승인이 나 총장을 맡게 됐고 재직중 李哲揆군 변사사건,어용교수 해직 등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92년부터 한동안 변호사 업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운동에만 전념했다. 현재 덕수합동법무법인에 적은 둔 李변호사는 건강문제로 사건 변호는 맡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고문과 지난달 발족한 ‘인혁당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도 맡는 등 인권운동에 관한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던 인권변호사가 이젠 인권 신장에 관심을 갖는 후배들이 많아 든든합니다” 천주교 신자인 李변호사의 세례명은 ‘유토피아’의 저자 이름과 같은 토머스 모어. 성인(聖人) 이름을 쓰는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은 정의를 위해 단두대에 선 용기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인권은 곧 민주주의라는 신념이다. 李변호사는 “현 정권이 전 정권보다 인권에 관한 한 진일보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환영한다”면서 “아직도 그늘 속에 있는 약자들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은 만큼 정부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기대했다.
  • 국내 중소건설업체 중국 건자재시장 진출

    ◎금용그룹,장쑤성에 전시장 착공/샤오캉 주택사업 참여도 추진/고급빌라 5만가구 공급 계획 【상하이 朴性泰 특파원】 국내의 한 중소건설업체가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형 건자재 백화점(전시장)을 건설,중국 건자재 유통시장에 본격 진출한다.이 건설업체는 또 중국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중인 샤오캉(小康)주택사업에도 참여를 추진 중이어서 경영난을 겪고 있는 국내 전문건설업체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베이징(北京)에 본사를 둔 이 건설업체는 금용종합건설 유한공사(金龍綜合建設 有限公司)와 금용건축장식 공정 유한공사(金龍建築裝蝕 工程 有限公司)를 갖고 있는 금용그룹(金龍集團)으로 지난 91년 중국에 진출한 업체. 1일 금용그룹에 따르면 장쑤성(江蘇省) 장인(江陰)시에 3,700평 규모의 현대식 자재전시장을 건설,창호·바닥재·벽지·변기·욕조 등 국내산 건자재를 전시 판매하기로 하고 현재 골조공사가 한창이다.이 전시장은 내년 3월28일 문을 열 예정이다. 장쑤성 장인시는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를 잇는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최근 들어 중국 화동(華東)지역의 교통 물류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지역으로 현재 미국,일본,스웨덴,독일 등 세계 유수의 건자재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이들 나라의 건자재를 취급하는 건자재상들만 100여곳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한편 금용은 샤오캉 주택사업의 시발지역이 되는 상하이권역인 저장성(浙江省),장쑤성일대 각 시에서 내년부터 10년동안 매년 65∼75평형 고급빌라 5,000가구씩 모두 5만가구를 공급키로 하고 중국 주택재개발사업의 주사업자인 마치그룹(美旗集團)과 연합해 사업 수주를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샤오캉 주택사업은 시장경제 도입과 동시 지난 7월부터 주택사유화 정책을 실시중인 중국이 전역에 걸쳐 오는 2005년까지 총 6,100만가구의 주택(아파트,빌라)를 건설한다는 야심찬 계획. 금용은 우선 첫번째 사업으로 상하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인 저장성 원링(溫嶺)시에 75평형 고급빌라 300가구를 짓기로 하고 지난달 15일 모델하우스를 오픈하고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금용은 앞으로 10년간 진행될 주택건설공사와 자재전시장 개장에 대비,건설 자재납품 30여개 국내업체 대표를 대상으로 지난달 25일부터 28일까지 중국현장에서 사업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 日 노무라증권 주무른 30代 큰손(뉴스 인사이드)

    ◎부동산증권 개발 4년간 10억弗 수익/금융위기로 가치 급락… 몽땅 날려/퇴직금 432억원만 챙기고 ‘딴살림’ 【도쿄 黃性淇 특파원】 일본 노무라(野村)증권 미국 현지법인의 이산 페너(37).흔해 빠진 경영학 석사학위(MBA)도 없이 벼락출세,수십억달러를 주무르다 노무라증권에 10억달러의 손해를 입히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일본의 주간 아에라 최신호는 노무라증권이 이 겁없는 풍운아 덕분에 웃다가 울게 된 기막힌 사연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뉴욕대학 출신인 무명의 페너가 노무라증권 미국 현지법인에 입사한 것은 93년 4월.입사하자마자 부동산담보증권(CMBS)이라는 신 상품을 개발,4년간 노무라증권에 10억달러의 이익을 안겨줬다. CMBS가 히트를 한 것은 미국 부동산경기가 회복되는 시점과 맞물리면서.부동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자금을 조성한 뒤 운용자금에 목말라하던 부동산업자에게 고금리로 빌려주는 사업은 크게 성공했다.불티나게 CMBS는 팔려나갔고 페너는 435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지난 8월 러시아 금융위기는 페너의 운명을 바꿔놨다.CMBS의 가치가 급락,노무라 미국현지법인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CMBS에 치중한 게 화근이었다.후발 증권사가 CMBS에 3억달러 가량밖에 투자하지 않은 데 비해 페너는 ‘위험분산의 원칙’을 무시하고 무려 70억달러까지 사업규모를 늘렸다. 노무라증권은 지난달 미국 현지법인 등의 손실로 국내외 직원 2,000명을 정리해고한다고 발표했다. 풍비박산의 와중에 페너는 슬그머니 회사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에 사무실을 열어 ‘재기’를 꿈꾸고 있다.무려 3,600만달러(약 432억원)의 퇴직금을 챙긴 채.
  • 韓·美 기자의 시각차/한­양국현안에 초점 양쪽정상에 번갈아 질문

    ◎미­인니사태 등 국제이슈로 클린턴에게만 물어 21일 金大中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후에 열린 내외신 공동기자회견 모습은 우리 국민의 눈에는 다소 생소하고 당황스럽게 비쳐졌을지 모른다. 우리 기자들은 한·미간 현안에 초점을 맞춰 양쪽 정상에게 번갈아가며 질문을 던졌다. 반면 미국 기자들은 클린턴 대통령에게만 일방적으로 질문을 퍼부었다.“인도네시아 시위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는데 과잉진압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AP)”,“유엔이 이라크 무기 사찰단에 전제조건을 달았는데 무조건 협력하겠다고 한 것과 배치되지 않느냐”,“대통령이 탄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느냐(CNN)”는 등 한·미 정상회담과는 관련이 없는 질문들이었다. 언뜻 보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그러나 내막을 알고 보면 이는 우리 기자와 미국 기자의 시각의 차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외교 당국자들의 설명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열린 기자회견 자리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미국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현안을 묻는 것이 미국측 기자들의 논리이다. 이는 미국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언론의 생리일지 모른다.하지만 미국을 방문,정상외교를 펼치는 나라의 국민이나 반대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한 나라의 국민에게는 다소 개운치 못한 뒷맛을 줄 수도 있는 행태이다.특히 그 나라가 ‘예의’와 ‘질서’를 지켜야 하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주류를 이룰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 ‘崔章集 파문’ 월간조선 販禁/법원,가처분신청 수용

    ◎“허위보도로 명예 침해”/조선일보선 “이의신청” 서울지법 민사합의 51부(재판장 申暎澈 부장판사)는 11일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崔章集 교수(고려대 정외과)가 자신의 한국현대사 연구를 왜곡보도했다며 조선일보사를 상대로 낸 ‘월간조선 11월호’의 판매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김홍도 목사 보도’와 관련,방송사 프로그램 방영이 금지된 적은 있지만 중앙언론사가 발행하는 월간지의 판매 및 배포가 금지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따라 조선일보측은 월간조선 11월호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는 발행,판매 또는 배포할 수 없다.또 이 부분을 담은 단행본 일간지 주간지 등 정기간행물은 물론 보도자료 광고지 등의 인쇄물을 배포할 수 없고 인터넷 등에도 관련 내용을 게시할 수 없다.그러나 이미 팔렸거나 서점에 배포된 월간조선 11월호는 회수하지 않아도 된다. 재판부가 월간조선 기사에서 명예훼손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부분은 ‘6·25는 金日成의 역사적 결단’ ‘개전 초기의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38도선 이북으로의 북진은 가공할 사태이며,중공군 개입을 정당화하였다’등 10군데이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역사적 결단’이라는 문구는 흔히 사용하는 ‘역사에 남을 훌륭한 결단’의 뜻이 아니라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줄 선택’ 정도의 가치 중립적 표현이 분명한 데도 월간조선은 이를 큰 제목으로 부각시켜 崔교수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부여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밝혔다. 이어 “崔교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용어를 ‘북한 당국자들이 생각했던 한국전쟁의 성격’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이 명백함에도 월간조선은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용어가 崔교수의 생각 그 자체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읽혀지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가공할 사태’ 대목에 대해서는 “崔교수의 글에서 ‘가공할 사태’란 3차대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설령 3차대전이 38도선 이상의 북진으로 인하여 야기될 수 있는 뜻으로 해석되더라도 기사에서처럼 북진 자체가 가공할 사태라는 의미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밝혔다.崔교수측의 소송대리인인 安相云 변호사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할 계획은 없으나 이번주 안으로 언론중재위원회에 반론보도 심판청구와 정정보도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재판부가 명예훼손과 관련,가처분 범위를 너무 넓게 해석했다”면서 법원의 가처분 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내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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