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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기업 업종 전문화…초일류기업으로/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 내용

    ◎환경설비산업에 금융·세제지원 강화/단순 의료행위 공정가격제 도입 검토/대중화된 물품 과세 낮추고 유류특소세 높여/사범대·교직과정학생 산업체 실습을 의무화/다주택합산과세 95년부터 시행 신경제 5개년계획지침은 새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과 추진방안에 대한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정부가 이를 제시한 것은 경제활동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창의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아울러 국민들에게 약속한 경제개혁을 치밀한 전략 아래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한 것이다.신경제는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 확충을 통해 물가상승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경제의 활력을 높여 성장과 안정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신경제 5개년계획 지침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제제도 개혁◁ ◇직접세 기능의 강화 ▲개인소득세=과세베이스를 넓혀 세수증대를 꾀한다.면세점을 조정해 근로소득 과세자비중(92년 46%)을 높인다. 양도소득세와 특별부가세의 비과세 감면대상을 대폭 줄인다.이자및 배당소득에 대한 비과세및 저과세 비중을 낮춘다. 이자·배당소득·부동산 양도소득 등의 종합과세방안을 마련한다.종합소득세의 최고 한계세율(50%)을 점차 낮춘다. ▲법인세=조세감면 대상을 줄이고 세율을 낮춰 나간다. 종합소득세액에서 공제하는 법인세액의 범위를 점차 늘린다.공공법인의 범위를 줄여 세부담의 형평을 꾀한다. ○공공법인 범위 축소 ▲상속세및 증여세=고액자산가의 자산변동 상황을 계속 관리하는 행정체계를 뿌리내린다.「공익법인 설립에 관한 법률」을 보완한다.공익법인에 출연한 재산관리를 감독관청과 국세청이 함께 한다. ▲토지세제=종합토지세의 체계와 행정체계를 단순화하고 과표기준을 공시지가로 바꾼다. 건물분 재산세와 종합토지세를 합쳐 종합재산세 체계로 만든다. 땅값과 부동산투기가 사라지면 토초세를 포함한 토지관련 세제를 취득·보유·이전 단계별로 종합적으로 개편한다. ◇간접세제의 개편 ▲부가가치세=과세특례자 대상과 면세대상을 줄여 과세대상을 넓힌다. ▲특별소비세=소비가 대중화된 물품의 과세범위와 세율은 점차낮추고 지나치게 세금이 높은 일부품목도 세율을 내린다.휘발유(1백%)·경유(10%)·액화석유가스(LPG·10%)등 유류의 특별소비세율은 높인다. 경유와 LPG 등에 대한 세율은 더 높인다. ▲자동차관련 세제의 보완=자동차의 이용시 부담을 높이는 대신 취득및 보유단계의 세부담을 낮춘다. ▲증권거래세=증권거래세를 현행 0.2%에서 0.5%로 정상화한 뒤 점차 주식양도 차익에 대해 종합과세해 나간다. ◇조세감면제도의 전면 재검토=5년단위 한시법에서 개별지원 방식으로 바꿔 적용시한을 명시한다. ◇관세제도의 개선=연구개발,환경오염방지 부문에 대한 관세감면을 계속한다.반덤핑,상계관세제도의 활용을 높인다. ◇재정지출구조의 개선=정부 부서의 총원을 동결하는 선에서 내부조정으로 인원을 충원한다.일반 행정비 등도 점차 줄인다.양곡의 과잉 재고를 줄여 농어촌 투자재원으로 쓴다. 재원은 사회간접자본시설,기술개발,인력양성,산업구조조정등에 중점적으로 쓴다. ○과세특례자를 확대 ◇재정의 역할제고와 규모의 확충=재정규모를 경제성장률보다 빠르게 증대시켜 국민총생산에서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올해20.2%)을 높인다.공공자금의 예탁과 국채발행 등을 통해 조세수입을 올리고 세외수입도 확대한다.공공자금의 여유자금을 재정자금으로 활용해 나간다. ◇예산제도의 개편=특별회계및 기금을 단순체계로 바꾼다.정책자금을 일원화한다. 재정운용을 5년간의 중장기계획 아래 일관성있게 추진한다. 대형사업 선정시 기준과 절차를 구체화하고 공개한다. ◇중앙과 지방의 역할과 책임의 조화=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중앙정부가 지원한다.지방재정 조정제도를 바꾼다. ◇예산의 생산성및 성과제고=대형 신규사업은 기존사업이 끝난뒤 착수한다.예산단가를 현실화하는 대신 집행부서에 책임과 권한을 준다. ◇금융기관의 경영자율화=자율성과 공공성이 조화되는 시중은행장 선출방안을 마련한다.금융기관을 대형화하고 부실채권을 정리한다. 정책금융을 축소하고 특수금융기관의 역할을 재조정한다.여신관리제도를 편중여신 해소와 기업의 재무구조개선 위주로 손질하고,경제력집중 완화와 부동산투기억제기능은 공정거래법으로 대체한다. ◇금리자유화 계획의 수정보완=금융시장개방계획과 금융제도개편계획과 연계,수정한다.2단계 금리자유화를 올해중에 실사하며 3단계는 94∼96년에 실시한다. ◇통화신용정책의 효율화=공개시장을 활성화하고 한은재할인을 줄이는등 간접관리방식으로 바꾼다.통화관리 지표를 바꾸고 금리와 환율과의 연계성을 높인다. ◇금융산업구조의 선진화=금융기관의 대형화및 전문화를 유도한다.금융기관의 업무영역을 조정한다.기업과 금융기관간의 소유구조를 개선한다.특수은행의 기능을 조정한다. ◇금융기관의 건전성 강화=사전적 감독기능을 강화하고 경영부실에 대한 제재강도를 높이며 감독기준을 통일한다.금융기관의 부실에 대비,예금자보호제도를 도입한다. ◇금융의 국제화 추진=외환의 자유화 및 원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며 환율변동폭을 넓힌다.대내외 직접투자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 ◇금융실명제의 실시=시행여건을 조성해 나가며 실시방안을 마련한다. ◇경제적 규제완화=개방업종에 유통업을 허용하는등 진입규제를 완화한다.중소기업의 창업과 공장입지,민간공단 설립절차를 간소화한다.특허관련,기술도입을 간소화한다. 기존의 가격규제를 대폭 줄이고 경쟁을 통해 가격안정을 꾀한다.서비스요금은 자치단체가 자율관리토록 하고 의료수가 등은 이해당사자가 협상해 결정한다. 성금과 기부금등 준조세를 점차 없앤다. ○대형사업 절차 공개 ◇사회적 규제의 합리화=환경규제를 오염물질 배출정도나 피해사실에 근거해 실시한다.단순의료행위에 대한 공정가격제를 도입한다. 사전규제를 사후규제로 바꾸되 부담금·부과료 등을 부과하는 경제적 제재를 강화한다. ◇행정절차의 정비=중복규제를 간소화한다.근거가 없는 행정지도를 철폐하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높인다.신설될 규제는 경제기획원과 사전협의한다. ◇경제행정조직의 개편=지시·통제보다 정보제공·봉사기능으로 바꾼다.부처간 유사 중복업무를 조정한다.정책조정 기능을 강화한다. 지방정부의 기능을 경제행정 중심으로 바꾼다.국제기구와의협력을 강화한다. ◇공기업의 민영화=민영화로 효율성을 높인다.민간부문에 적합한 정부기능을 민간에 이양한다. ▷경제의식 개혁◁ ◇의식개혁 세부 추진방안=민간인의 의식교육은 사회교육·학교교육·제도개혁을 통해 추진한다.경제5단체·노동단체·경실련등 시민운동단체·소비자단체 및 여성단체·YMCA등 지역사회단체·교육단체등 기존의 민간단체들이 참여,의식개혁 운동을 주도하도록 한다.교과서 내용을 수정보완하고 학교교육용 교재의 개발보급,교사에 대한 교육등을 실시한다.의식개혁의 장애가 되는 각종 경제제도를 개선하고 관련단체 및 시민의 건의를 정책담당 부서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제도를 개혁한다.공직자들은 윗물 맑기운동의 지속적 실시와 각종 교육을 실시한다. ◇추진 전담기구의 구성검토=민간 부문의 의식개혁 추진을 위해 학계·종교계·언론계·예술계·경제계 인사 20명 내외로 구성된 전담기구인 「신경제 의식개혁 추진위원회」(가칭) 설립을 검토한다.각 민간단체가 참여하는 의식개혁 추진기구인 신경제 의식개혁 추진협의회 구성을 검토한다.공직자를 대상으로 한 의식개혁 추진은 경제기획원과 총무처에서 주관한다.민간 추진기구는 7∼8월 마련하고 심층연구(8∼12월) 결과에 따라 94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성장잠재력 확충◁ 산업의 비젼과 단계별 발전목표를 제시한다.기업의 투자결정과 정부 및 금융기관의 지원 우선순위를 정하고 대기업의 업종전문화를 유도,세계 일류기업으로 키운다. 업종별 주요 2백개 기업을 선정,투자애로 등을 해결해 주는 펌 닥터제(설비투자 애로점검반)를 운용한다.수출증대를 위해 수출보험의 기금을 올해 1천억원으로 늘리고 무공에 「자기상표 제품 마케팅 지원센터」를 설치한다.민관 공동으로 다음과 같은 업종별 발전전략을 세운다. ◇자동차산업=대형 승용차와 상용차의 독자모델을 개발하고 대학의 자동차학과를 늘린다.환경규제에 대비,탈유류 자동차를 개발하고 2∼3개사의 생산규모를 국제 경쟁수준인 1백만대로 확충한다.95년까지 5백50만평의 자동차전용 공장부지를 추가 조성하고 설비자금 15조원을 차질없이 지원한다.부품표준화를 확대하고 자동변속기,에어백 등 핵심부품을 개발한다. ◇조선산업=설계와 절단,용접 등 전 생산공정의 자동화와 전산화 시스템을 조기 개발하며 카페리선,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의 설계와 건조기술을 자립화한다.초전도 선박과 자동운항시스템 등 차세대 첨단 조선기술의 기반을 조성한다.조선사 업무영역을 선박 외의 분야로 다각화하고 국산 기자재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추진한다. ◇자동화기기=자급도를 97년까지 70%까지 높이고 새로 개발된 자동화기기를 실습용으로 확대,보급한다. ○탈유류 자동차 개발 ◇환경설비산업=환경개선 부담금의 일정액을 기술개발 자금으로 활용하고 생산기술연구원에 공해방지사업 추진체를 설립,공해방지 기기의 연구개발을 유도한다.환경설비산업의 육성을 위해 환경설비 산업의 지원대상을 늘리고 금융·세제상의 지원도 강화한다. ◇반도체=메모리 반도체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키우고 2백56MD 램의 핵심 기반기술을 개발한다.반도체 장비와 재료의 국산화를 추진,95년까지 장비국산화율을 50%까지 높인다.장비·재료분야에서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한다. ◇가전=고화질 TV의 개발을 내년 6월까지 완료하고 미니 디스크,디지털 콤팩트 카세트등 신제품 기술을 공동개발한다.96년까지 스피커 콘덴서 등 2백개 부품을 표준화해 원가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유도한다. ◇컴퓨터=고속 중형컴퓨터 개발을 93년까지 마치고 산·학·연 공동으로 대형 컴퓨터 개발을 추진한다.휴대용 PC의 주기판을 공동 규격화하고 멀티미디어 관련기술을 표준화한다.관련업계 공동으로 단체표준화 추진위원회를 구성,메모리카드와 보조기억장치 등 PC 중간재의 단체표준화를 추진한다. ◇화학=CFC 대체물질을 개발하고 산업폐기물 공동처리와 환경보전을 위해 정밀화학 공업단지 3개를 조성·분양한다.국산 나프타의 구입가격을 내리고 기초원료의 관세지원을 계속한다. ◇섬유=신소재 신합섬을 개발하고 염색단지를 더 조성한다.섬유자동화 관련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보급하고 자동화 시범업체를 선정,지원한다. ◇철강=소량다품종 주문체제를 갖추고 생산원가 절감이 가능한 혁신적인 철강기술을 개발한다.동남아 지역의 수출을 늘리고 고철의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지원방안을 마련한다. ◇비철금속=에너지비용 절감을 위해 열병합발전소의 건설을 늘리고 경쟁력이 확보되는 납·아연등의 제련과 정련시설을 늘린다. ◇항공우주=50인승 중형 항공기를 90년대 중반에 개발하고 항공우주산업 사업을 종합기획할 수 있는(가칭)항공우주산업 개발기획단을 설치한다. 개인용 컴퓨터의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는등 13개 중간 핵심기술의 개발방안을 세운다.우수 기술개발자나 팀에 대한 포상제를 마련하고 미국 일본 EC 러시아 중국과의 기술협력 체제를 갖춘다. 산업의 미래경쟁력을 갖추도록 11개 핵심 선도기술의 개발을 추진하고 목표관리제를 도입,투자의 효율성을 높인다.한국과학기술원의 정원을 단계적으로 늘리고 광주과학기술원을 95년 3월에 연다. ○지방중기 세제지원 자동화 초기진단부터 완료까지 단계별로 연계지원 체제를 갖춘다.대기업의 중소기업 지분참여를 늘리고 연계보증을 통해 실질적인 동반관계가 되도록 한다. 지방으로의 이전기업,지방공단 조성 및 입주업체에 대한 세제지원을 강화하고 중소기업 고유업종의 해제예시제와 단체 수의계약의 경쟁개념 도입등 보호제도를 단계적으로 없앤다. 휴대용 정보기기,컴퓨터 주변기기 등을 중점 개발하고 고도 정보통신망,무선 위성통신망,광대역 통신망의 기술개발에 대한 추진계획을 마련한다.정보산업 관련 전문리스회사를 설립하고 정부와 공공기관의 국산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구입을 늘린다. 대규모 공공사업 투자계획 수립때 정보화관련 투자 사전심사를 할 수 있게 하고 국산기기 사용권장이나 지적재산권 보호,개인정보 보호 등을 정보화촉진기본법에 반영한다.지식산업 단지의 입지와 관련시설의 확보방안도 강구한다. 공업계 고교를 늘리고 산업현장 훈련을 제도화한다.공고의 교육과정을 기업체에서 1년까지 훈련받는 체제로 개편하고 산업인력 양성을 학교와 기업이 공동으로 담당하기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다.비공업계 실업고를 정보고교 등으로 특성화,발전시키는 방안도 강구한다. 대기업 훈련시설을 97년까지 1백개 신설하고 2백여개 기존 훈련원을 확충한다.이를 위해 4천억∼5천억원의 융자재원을 마련한다.사범대·교직과정 학생의 산업체 실습을 의무화하고 산업계 전문가를 교사로 활용한다.
  • 신경제 5개년계획 작성지침 내용

    ◎국민연금가입 농어민까지 확대 추진/농·수산물 등 수입제한 97년 폐지검토/임금 총액기준 인상… 생산성따라 차등화 유도/남북경협 활성화 돕게 판문점에 「경제상담소」 ▷국제시장기반 확충◁ ◇대외경제관련 제도와 관행의 선진화=93년말까지 OECD 자본및 경상무역외 거래의 자유화(1백48개 항목)규정을 검토,이에 따른 계획을 마련한다.UR협상 결과를 반영하여 각종 교역관련 제도를 국제규범에 일치시킨다. ◇실효성 있는 개방정책의 추진=서비스업을 포함한 외국인투자 개방예시 5개년 계획을 세운다.농산물을 비롯한 잔존 수입제한 조치를 97년까지 폐지하거나 GATT규범에 맞도록 재조정한다.제2차 관세인하계획(89∼94)에 따라 관세율을 선진국 수준으로 인하하고 94년 예시제 종료시 현행 관세율 구조를 보완,개편한다. 수입급증으로 국내 생산기반의 붕괴가 우려되는 농산물에 대해서는 종양세를 도입한다.수입관련 각종 개별법을 전면 개편한다. ◇외국인 투자와 선진기술도입의 활성화=긴급수입제한과 관련한탄력관세 제도의 운용체계를 실효성있게 개선한다. ◇주요 교역상대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능동적으로 대처=중국과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고 저가품 수입급증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러시아 베트남 동구등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경제권에 대해 지역별 특성을 감안한 경제협력을 추진한다. ◇기업의 국제화 촉진=해외투자 관련절차를 간소화하고 모든 해외투자를 신고제로 전환한다. ◇국제기구등에서의 역할제고및 대외교섭 능력 확충=통상전문인력의 양성및 확보를 위한 종합대책을 세운다. ○해외투자 신고제로 ◇남북한 물자교류의 확대=청산계정의 설치,직교역 해로의 개설,경제상담소(판문점)설치등 직교역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외국환은행간에 환거래계약을 체결,경화결제방식으로 전환한다. ◇남북한 경제협력사업의 단계적 추진=미국 일본 중국등 제3국에 거주하는 해외동포및 국내 민간기업의 해외 현지법인을 통해 간접적인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한다.경공업분야의 합작투자,관광자원의 공동개발,공동어로작업등 시범적인 경제협력사업을 추진한다. ◇남북경제협력에 필요한 통행선 통신망의 연결및 경제관련 통계자료의 교환. ◇국제무대에서의 남북한협력의확대=GATT IBRD ADB등 국제기구에 북한이 가입할수 있도록 협조한다. ◇남북한 경제협력 관련법규및 제도의 정비=「남북 경제교류 협력 민간협의회」를 설치,운영한다. ◇남북경제공동체 형성에 필요한 재원조달=남북협력기금을 확충하고 대외경제협력기금및 수출지원 금융제도를 활용한다. 통일비용조달을 위해 조세 국채 차관등 다양한 조달방안을 검토한다. ▷국민생활여건 개선◁ ◇서민주택가격의 획기적 안정방안 마련=공영개발방식의 대규모 택지개발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민간이 참여하는 소규모 토지 구획정리 사업의 허용방안을 검토한다.주택 과다보유자에 대해 중과할수 있도록 재산세제도를 개선,95년부터 시행한다. ◇서민주택에 대한 금융지원 강화 방안 수립=주택은행을 중장기 서민주택 금융기관으로 육성한다. ◇임대주택 공급의 확대및 주택임대산업의 육성방안마련=보험회사등 금융기관의 임대주택 건설사업 참여를 촉진한다. ◇산업에너지및 개발부문에서 환경오염유발을 최소화=산업부문의 에너지 소비증가율(현재 15%수준)을 제조업의 성장률 이내로 억제한다. ◇교통수요의 효율적 관리=승용차의 이용을 억제할 수 있도록 자동차관련 세제를 개편한다.주차요금의 지역별및 시간대별 차등화로 도심 교통수요를 억제한다. ◇국민연금의 확대=현재 5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에게 적용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가입대상을 농어민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94년까지 마련한다. ◇영유아 뵤육시설 확충=▲현재 상용 여성근로자 5백인 이상 사업장으로 되어있는 직장보육시설 설치대상 사업장을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이를 강력히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한다. ○서민택지 민간개발 ◇복지사업에의 민간참여 확대 ◇소비자 보호시책의 강화=개방화및 국제화에 따른 소비자 보호시책을 발전시킨다. ◇유통부문의 자유로운 기업활동 촉진및 정부지원체계 확립=유통업에 대한 투자및 토지등의 규제를 완화한다. ◇유통단지의 체계적 조성 ◇화물유통체계의 개선및 유통정보화 촉진 ◇토지이용 규제제도의 개편=국토관리·공장용지등 관련분야별로 산재한 토지이용관련 법률을 분야별 기본법 중심으로 통합한다.국토이용관리법상 용도지역을 단순화하고 개발대상 토지내에서는 행위제한을 대폭 완화한다.개발대상토지에 대해서는 현행 허용행위 열거방식(PositiveSystem)에서 제한행위 열거방식(NegativeSystem)으로 전환,개발이 가능토록 한다. ○농산물관세 종량제 ◇농지및 산지의 효율적인 이용반안 강구=농지및 산지관련법률을 「농지기본법」및 「산림기본법」으로 각각 일원화한다.농지의 소유자격을 확대하고 농지거래의 규제를 완화한다. 보전·준보전 임지를 생산·공익·산업임지등으로 재조정,개발대상 산지를 확대한다.산업임지에 대한 행위제한을 제한행위 열거방식으로 바꾸고 전용절차도 간소화한다. ◇수도권집중억제시책의 재검토=현행 수도권 5개권역을 과밀지역과 과소지역으로 단순화한다. 동·북부등 과소지역은 토지이용규제를 완화,기능중심의 다핵분산형으로 개발한다.과밀지역에 대해서는 과밀부담금 부과등 경제적 부담을 늘린다. 지역계획 제도를 도입하고 지역발전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지역균형 개발법을 제정한다.일부 공공기관과 주요 교육기능의 지방이전 촉진방안을 마련한다. 대기업의 지방이전 때에는 자체공단및 부대시설 개발권을 부여한다. ◇개발제한구역제도의 개편방안 마련=주거·생업·생활편익에 관련된 시설물에 대해서는 신·증축 허용범위를 확대한다. 「보전이 필요한 토지」와 「이용개발이 필요한 토지」를 구분,행위규제를 차등화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토지개발및 비축체계의 정비방안 수립=토지이용수급계획을 토대로 개발사업을 추진토록 한다.실수요자들과의 합동개발,공공과 민간이 공동출자한 「제3섹터」형식의 법인을 설립하는등 개발방식을 다양화한다.토지선매제도를 적극 활용,국·공유지의 사전비축을 확대하고 토지의 채권보상을 확대한다. ◇토지관련 세제강화 방안=공시지가의21%수준인 종합토지세 과표를 96년부터 공시지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중산층 이하의 가계에 부담을 덜기 위해 세율인하 등 세율체계를 정비한다.개발부담금 부과시점을 앞당겨 용도변경으로 인한 지가 상승이익의 환수를 강화한다. 토지거래허가 및 신고구역의 범위를 축소하고 가격심사 폐지등 규제를 완화한다.말이용토지를 방치하거나 전매하는 경우 제재를 강화하거나 세금을 중과한다. ◇도로부문=96년까지 국도와 지방도의 포장을 끝내고 98년까지 기존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장한다. ◇철도부문=고속전철건설은 재원조달 방안을 현실화해서 추진계획을 보완한다. ◇항만부문=97년까지 부산항 4단계 컨테이너 부두를 건설하고 민자를 유치,96년까지 광양만 1단계 컨테이너부두 건설을 끝낸다. ◇공항부문=수도권 신공항 1단계 사업에 대한 연차별 투자 및 재원 조달계획을 보완한다.수자원 개발제도를 정비한다. ◇화물유통부문=부곡과 양산의 복합화물기지를 95년까지 완공한다. ◇안정적 재원조달 방안=유류 특소세를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위한 목적세로 바꾼다.민자 유치촉진을 위해 특례법(안)을 제정한다.고속도로 운임을 단계적으로 현실화한다. ◇노동관계법 개정=노동기본법·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노사협의회법·노동위원회법 등을 개정한다. 임금과 근로시간등 노동조건의 기준을 합리화하고 단체교섭의 대상과 한계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한다. ◇새로운 노사관행 정착=기업 경영정보의 공개를 강화하고 근로자의 경영참여를 확대한다.정부의 주요정책심의기구에 노조대표의 참여를 확대한다. ◇임금교섭관행 개선=노사 상급단체(노총·경총)에서 1차 협상하고 개별기업에서 2차 협상토록 유도한다. 유사 수당을 통·폐합하고 총액기준으로 임금체계를 단순화한다.생산성에 따라 임금이 차등 인상되도록 유도한다. ○비금융업 자율유증 ◇경제력 집중완화=전문·독립경영 체계를 유도한다.대규모 기업집단의 계열사간 채무보증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기업집단의 내부거래등 불공정 거래행위에 대한 감시를강화한다.출자 및 채무보증 한도를 재조정한다.공기업과 서비스업에 대한 시장지배적 사업자 지정을 확대한다. ◇기업경영구조의 혁신=금융기관에 의한 대규모 기업집단의 주식보유를 확대한다.소유분산 정도에 따라 출자규제,상호 채무보증 한도제도 등의 차등 적용방안을 강구하는 등 소유분산을 촉진한다. 기업집단 연결재무제표의 작성을 의무화하고 대여금과 가지급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다. 이자비용의 손비인정을 제한다.비금융업의 유상증자를 자율화한다.기업공개 자금의 일부를 차입금 상환에 사용토록 의무화하는 등 재무구조개선을 유도한다. ◇경쟁적 산업환경조성=가격 및 입찰·담합의 방지방안을 강구한다.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 및 기능을 강화했다. ◇농어촌구조개선 투자의 우선순위 조정=생산기반 정비,인력양성,기계화 및 시설·장비의 현대화에 우선 투자한다.농어촌 복지부문의 투자를 확대한다.대단위 농업개발,간척등 대형투자사업을 억제한다. ◇농지이용 효율화방안=농지매매자원은 규모화 대상 농가에 한해 지원한다.농업진흥지역 밖 농지는 농어촌 고용창출 지역으로 활용한다. ◇영농인력 육성방안=농업전문학교·농과대학 등을 주산단지별·품목별 농업기술 전문대학으로 전환한다.연근해 어선세력을 적정수준으로 감축하는 등 어업구조도 조정한다. ◇농수산지원조직 개편=농·수·축협의 일선조합을 통합,품목별조합으로 육성한다.농·수·축협의 신용부문 통합방안을 강구한다.농수산관련 단체 및 조직도 정비한다.
  • 120개 수출품 품질검사제 폐지/「행정규제완화」 부처별 내용

    ◎수출선수금 수령대상 전기업으로 확대/부가통신사업자 전용회선이용 자유화/버스·택시료 결정권 지방자치단체 위임 정부는 23일 인·허가와 검사제도등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각종 행정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경제행정규제완화 실무위원회가 마련한 부처별 규제완화 방안을 간추린다. ▷경제기획원◁ 공산품 수급동향 보고제는 폐지하되 가격동향 보고는 생필품등 최소한으로 한정한다.실효성이 적은 상업용 건물의 임대료 관리제를 없애고 개인서비스 요금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실정에 맞게 책임관리한다.공정거래법상 연간 할인특매 허용기간을 40일에서 60일로 늘리고 경품류 제공한도와 횟수제한도 완화한다. ▷재무부◁ 업체별 상업어음 할인한도를 없애고 중소기업의 신용보증한도를 늘린다.외화증권 발행요건의 기준을 「3년연속 당기순이익」에서 「3년간 누적 당기순이익」으로 낮추고 중개어음 최저한도를 1억원에서 5천만원으로 내린다.수출선수금 수령대상 범위를 「과거 1년간 수출실적 50만달러 이상」인 기업에서 모든 기업으로확대한다. 3천만달러 이상의 대규모 해외 직접투자에 대한 전문기관의 타당성평가 의무제도를 없애고 종합무역상사에 대해 해외증권 투자를 허용한다.1억달러 이상 대외거래 실적이 있는 기업에 대해 「최고 1억달러 내에서 거래실적의 10%까지」 외화의 보유를 허용하고 외부감사대상 중소기업의 범위를 상향조정한다. 법인세 중간예납 기한과 부가가치세 납부기한의 중복을 조정하고 세금계산서 연체발급시 거래사실이 확인되면 매입세액공제를 허용한다.간이정액 관세환급대상 금액을 건당 5만달러에서 10만달러로 올리고 적용대상 업체도 관세환급 실적기준 2천만원에서 5천만원으로 올린다.현금카드 1회 지급한도를 50만원에서 70만원으로 올리고 우리사주 조합원의 주식처분 시한을 현행 「퇴직시」에서 「취득후 7년경과」로,최저 의무예탁기간도 3년에서 2년으로 줄인다.일반투자자의 상장법인 주식소유제한 10%를 폐지한다. 보험금수령때 인감증명서 제출을 폐지하고 은행계좌를 통한 온라인 송부방식을 도입하며 자동차보험 수리비의 현금지급범위를 1백만원에서 2백만원으로 늘린다.보험금은 사유발생 뒤 30일이내에 지급토록 하고 30일이 넘으면 반드시 이자를 가산해 지급토록 한다.국채증권을 멸실한 경우 권리를 구제해주고 국유재산 매각대금과 변상금을 일시에 내기 어려운 영세민에게는 분할납부를 허용한다. ▷농림수산부◁ 농업관련 민간연구기관과 농업자재 생산업체등에도 농지취득을 허용하고 신규 영농참여를 돕기 위해 농지취득전 6개월 이상 거주요건의 예외를 인정한다.공장증설을 위한 농지전용은 1천평까지 신고만으로 가능하게 하고 시장·군수의 농지전용 허가범위를 「4백50평미만」에서 「3천평미만」으로 늘린다.농지전용허가 신청때 첨부서류를 7종에서 5종으로 줄이고 임야매매증명을 요하는 면적기준을 6백평에서 3천평으로 확대한다. 축산업 사육두수의 허가제를 등록제로 바꾸고 1천두까지 돼있는 상한제를 없앤다.우유 원유가격의 결정을 민간자율에 맡기고 수입쇠고기 전문판매점의 지정제한도 철폐한다.가축매매 수수료율을 축협자율에 맡기고 음식판매업자에 대한 혼식의무제를 폐지한다.양곡매매업및 도정업 제분업의 허가제를 신고제·등록제로 바꾼다. 면허어업 처분권을 시·도지사에서 시장·군수에게 넘기고 일정 수면내 양식업의 복합면허를 허용한다.수출수산물의 의무검사제,수산제조업 및 양식업의 기술자 의무고용제,생사류 수출의무검사제,보급기종 농업기계의 의무검사제,사료판매업 신고제를 폐지한다.농약제조 및 수입 허가제를 등록제로 전환하며 비영농 목적의 농지담보 대출금지를 규정한 농지담보법을 없앤다. ▷상공자원부◁ 도시형 업종의 지정기준을 지역별 업종별 특성에 따라 전면 재조정하고 기준공장면적률을 하향조정해 첨단업종의 부지난을 돕는다.임대전용 아파트형 공장의 입주자격을 완화하고 공단입주업체의 시설임대를 50%까지 허용한다. 수출품질검사 지정품목 1백20개에 대한 사전의무검사제를 없애고 같은 물건을 반복수출할 때 한번의 승인으로 일정기간 수출할 수 있게 하며 1만달러 이하 소액수출에 대해서는 수출승인을 면제한다.현행 섬유쿼터제도의 운영제도를 개선한다. 연탄판매의 지역제한을 철폐하고 에너지관리 각종 의무고용과 교육을 대폭 완화한다.에너지관련 시설공사에 중소기업의 참여폭을 넓히고 주유소허가 때 관할경찰서의 협의관행을 폐지한다.대규모 판매장의 허가면적 기준을 현행 1천㎡에서 3천㎡로 상향조정한다. ▷건설부◁ 공업단지 지정 및 개발절차를 간소화하고 공업단지 개발의 민간참여도 늘린다.여러 개의 동으로 된 공장을 건축할 때 동별 분리준공을 허용하고 공장과 주택건축시 지하층 설치의무를 해제한다. 건축허가 심사절차를 간소화하고 법적 근거가 없는 지침을 폐지하며 동일 건축물 안에 거주용 위락용 노약자시설등 복합건축 금지도 푼다. 3년마다 하던 건설업 면허발급을 매년 또는 수시로 하고 입찰참가자격 사전심사제가 적용되는 공사는 도급한도액 적용을 제외한다.해외건설업 면허제를 등록제로 바꾸고 도급한도제를 없앤다.특수건설업을 일반건설업과 전문건설업에 통합한다. 불량주택의 재개발절차를 간소화하고 근로자주택의 입주대상과 자격을 확대한다.공동주택단지 내 주차시설의 신·증축 제한을 풀고 주택단지 내 유치원등의 의무설치 기준을 없앤다. 공단의 공장용지 중 분양대금을 다 낸 토지에 대해서는 재산권행사가 가능하도록 하고 도시계획구역 내 자연녹지지역 중 자연취락지역의 건폐율을 20%에서 40%로 높인다. 개발이익환수제와 중복되는 하천수익자 부담금제를 없애고 도로변 휴게소 설치기준을 완화하며 도로점용료 산정방법을 고친다. ▷보건사회부◁ 식품 또는 첨가물제조업에 대한 품목별 허가제를 점차 없애고 식품제조·가공업 및 식품접객업의 비합리적인 영업시설 기준을 현실에 맞게 완화한다.소규모 음식점의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꾸고 술을 안 파는 휴게음식점에 대한 심야영업 제한을 완화한다.공중위생 접객업소에 대한 행정처분시 영업정지 외에 과징금을 신설하고 식품수입 관련서류와 검사제도도 간소화한다. 종합병원 신·증설시 사전승인 제도를 사후보고제로 하고 의료법인 설립허가권을 보사부에서 시·도로 넘긴다.한의사도 양방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의료용구 검사대상 품목도 대폭 줄인다. 안정성에 문제가 없는 의약부외품 및 위생용품의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꾸고 위생용품 판매업의 등록제와 약사자격 정지자의 약국재개설 금지기한(최소 6개월)을 폐지한다.한약사의 영업지역 제한을 없앤다. 전염성이 없는 결핵환자에 대한 취업제한을 풀고 외항선원에 대한 에이즈 의무검진제를 자율검진제로 전환한다. 법률상 금지된 허례허식 행위를 현실에 맞게 고치고 사설납골당에 대한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꾼다.묘지허가와 산림훼손 허가를 일원화하고 법인이 아니라도 보육 및 노후복지시설을 운용할 수 있게 한다. ▷노동부◁ 올 정기근로감독을 유보하고 수시·특별감독으로 대체한다.노사협의회 운영관련 보고를 간소화하고 근로자 기숙사 설치에 관한 규제를 없앤다.산업안전 관련 의무고용을 축소하고 작업장 환경 및 안전관리와 관련된 기업주의 부담 및 의무를 완화한다. 직업훈련 비용의 부문별 사용한도 제한을 완화하고 직업훈련 위탁때 지역제한을 없앤다.인정직업훈련원 설립승인을 재개하고 직업훈련비용을 합리적으로 산정하여 직업훈련분담금을 완화한다.산재보험금관리를 기금으로 전환하여 지급절차를 개선한다. ▷교통부◁ 시내버스와 택시요금의 결정권을 지방자치단체에 위임하고 화물자동차 운송사업의 사업구역 제한을 없앤다.전세버스와 장의차 사업구역 제한도 폐지한다.소화물 일관수송업에 전국 화물사업자의 참여를 허용한다.택시부제를 폐지하고 운송사업자 주거이전의 제한을 풀며 자동차정비사업 허가제를 등록제로 바꾼다. 선사의 영업구역 또는 항로제한을 점차 풀고 항만운송사업과 부대사업의 면허제를 단계적으로 등록제로 바꿔나간다.해운관련 외국인투자제한을 폐지하고 항공운송 주선업,항공화물 운송대리점업등을 자유화업종으로 한다.철도 소운송업 면허제를 등록제로 바꾸고 관광안내업무 종사자의 자격제한을 완화한다. ▷체신부◁ 부가통신사업자에 대한 음성·데이터 혼합서비스,무선데이터 서비스를 허용하고 등록절차를 간소화한다.전용회선의 음성·데이터 구분제도를 없애고 전용회선의 이용을 자유화한다.자가 전기통신 설비의 설치허가 대상을 줄이고 목적외 사용범위를 늘린다. 소출력 방송중계소의 허가절차를 간소화하고 단파라디오 생산 및 시판을 허용한다.형식검정을 받은 동일 모델기기 수입때 추가검정을 면제하고 전기통신 기자재의 형식승인 품목을 축소한다.전기통신 공사업의 기술자격,기기보유 기준등 허가기준을 대폭 완화하고 전화가입 청약수수료를 면제한다. ▷과기처◁ 출연연구소의 10만달러 이상 고가 연구기자재 도입심의제를 없애고 방사성 동위원소 이용기관의 안전관리 책임자의 선임기준을 완화한다.방사성 동위원소 이용기관에 대한 정기검사 주기를 1년씩 연장하고 방사성물질의 운반검사 유효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린다. 금융·세제상 지원을 받는 기업부설 연구소의 범위에 대기업 그룹의 2개 이상 기업이 연합한 종합기술연구소를 추가하고 기업의 기술개발 준비금 적립신고제를 폐지한다. ▷환경처◁ 소음과 진동시설의 기계별 허가제를 사업장별 포괄허가로 바꾸고 환경기술 감리제도를 폐지한다.비정상 가동업체가 사실대로 신고하면 배출부과금을 경감해주고 농공단지내 배출시설 허용기준상의 불공평을 개선한다.소음·진동분야는 대기 또는 수질관리인이 겸직 가능하도록 하고 대기 또는 수질관리인의 자격기준을 완화한다.폐기물 예치금제도를 예치금과 부담금으로 구분,운용하고 현행 특정 폐기물중 유해성이 없는 폐기물은 일반폐기물로 분류한다.일정규모 미만의 일반 폐기물 처리시설의 설치는 신고제로 바꾼다.연구개발 목적으로 수입되는 자동차의 환경관련 인증제를 면제해준다.배출가스 인증에 관한 주행전 차량 주요 부위 봉인제를 없앤다.
  • 국채발행금리 0.4%P 인하

    재무부는 20일 재정증권등 국채발행금리를 0.25∼0.4% 포인트 추가 인하했다. 재정증권과 양곡기금증권 1년채는 현행 연 11.25%에서 11.0%로 0.25%포인트가 인하됐고 외국환평형기금채권·농어촌발전채권·농지채권 3년채는 현행 11.40%에서 11.0%로 0.40%포인트가 내렸다.
  • 실명제 공포심 없애는 일부터(최택만/경제평론)

    지난주 한국프레스센터 주최로 『경제개혁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다.학계·경제연구단체·언론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토론회에서 한 토론자는 김융실명제에 대해 『농민들까지 불안해 하고 있다』고 밝혔다.대전문화방송 보도국장 강효섭씨는 그런 사실을 중앙정부에 전해달라고 필자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날 토론회에서 『경제개혁이 왜 필요한가.개혁의 성공조건,경제개혁의 핵심은 금융실명제와 경제규제완화이다』라는 내용의 주제를 발표했다.주제 발표에 이은 토론자의 질문 내지는 지적사항이 공교롭게 김융실명제로 집중되었다.3시간 동안 토론회의 2시간 30분 동안이 금융실명제에 관한 토의로 할애될만큼 열띤 토론이 있었다. 이날 토론 내용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토론 참가자 18명 전원이 금융실명제실시에 찬성했다는 사실이다.강보도국장의 발언도 금융실명제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의 계도가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토론자 대부분이 필자가 주제발표에서 제시한 3단계의 점진적인 김융실명제 시행방법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세계일보 김영호 논설위원은 단계적인 실시가 아닌 조기의 전면적인 실시를 주장했다.6공 정부와 같이 무기연기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김위원은 덧붙였다.연세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이영선교수는 실명화된 예금에 대해 자금 출처조사가 있어야 조세상의 형평원칙에 부합된다고 강조했다. 금융실명제는 최근 경제계는 물론이고 근로자와 농민 등 전 국민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만큼 정부당국은 물론 언론들이 심층적으로 계도하는 게 시급하다는 사실을 이번 토론회를 통해서 절감할 수 있었다.주제 발표자인 필자는 『당국자는 아니지만 김융실명제실시로 근로소득자와 농민들이 손해를 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오히려 부유층으로 부터 세금이 더 많이 걷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근로자나 농민들은 세부담이 적어질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했다. 금융실명제는 2가지 접근방법이 있을 수가 있다.그 하나는 전면적인 실시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단계적인 실시방법이다.필자는 주제발표에서 3단계의 단계적 시행방안을 제시했다.그 첫단계는 모든 금융기관 예금을 실명화하는 것이다.현재 실명으로 예금된 것은 이자소득에 20%의 세금이 부과되고 있다.반면에 비실명화된 예금은 60%의 세금이 과세되고 있다. 60%의 세금을 물고도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대고 김융거래를 하라는 것 자체만도 엄청난 개혁이다.김융실명제의 경우 그 실시를 위한 법률(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이 지난 82년 제정되었는데 지금까지 시행되지 못한 이유를 우리 모두가 잘알고 있는 일이다.그래서 1단계로 실명화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실명화된 예금에 대해서는 세무조사를 하지 않는 대신 장기 저리의 가칭 「기술개발」 국채를 발행해서 구입토록 하자는 것을 제의한 것이다.그렇게 되면 연세대 이교수가 지적한 형평의 원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였다.비실명화하고 있는 사람들이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예금을 인출하는 사태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2단계로는 일정액이상(고액)의 이자소득은종합과세하고 근로자나 농민들이 예금한 소액의 이자에 대해서는 현행대로 분리과세 하는 것이다.그렇게 하면 금융실명제실시로 농민이나 근로자가 아무 피해를 입지 않는다.3단계로는 주식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문제이다.이 문제은 아주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할 부분임을 강조했다. 현재 김융실명제에 대해 갖가지 풍문이 나돌고 있다.농민들까지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당국이 알아야 할 것이다.개혁의 성공을 원하고 있는 일반국민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지금부터라도 경제부처는 물론이고 전 금융기관이 김융실명제에 대한 시민의 「공포」(?)를 제거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바란다.구체적인 방안이 짜여지지 않았다 해도 원칙론에 입각해서 대국민 계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 재무·건설부문 행정규제완화 내용

    ◎우리사주 취득 7년후 처분가능/분실·도난된 국채증권 권리구제/수도권내 판매시설 신·증축 허용/녹지안 취락지역 건폐율 40%로 ▷재무부◁ ◇세제 △법인세 중간예납기한 조정=매년 7월에 법인세 중간예납과 부가가치세납부가 집중되고 있어 법인세 중간예납기한을 8∼9월로 조정해 내년부터 시행. △결혼·상속때 1가구1주택 비과세요건 강화=미혼때 각각 1주택을 소유한 남녀가 결혼후 1년이내에 주택을 처분하면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적용.여러명의 상속인이 1주택을 공동으로 상속받을 경우 소유지분이 가장 큰 상속인이 소유한 것으로 간주. △세금계산서 지연발급시 매입세액 불공제제도 개선=물건을 거래한 뒤 다음달 10일까지 세금계산서를 작성하면 10%의 매입세액 공제인정. △전세버스업·콘도미니업·대중사우나등 공중목욕탕업,소비성 서비스업에서 제외. ◇국고 △한국은행의 과오납금 반환시 인감증명서 징구제 개선=과오납자가 주민등록증등으로 본인여부 확인되면 인감증명서제출 생략. △국채증권 멸실시 권리구제=소실·분실·도난등으로 국채증권을 멸실한 경우 권리구제를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민법 관련조항 삭제,내년부터 적용. ◇이재 △금융거래시 서류및 절차 간소화=금융거래때 제출하는 인감증명·주민등록표등 각종 서류 축소.인감대신 서명날인 허용. △금융기관 대출관행 개선=중소기업이 할인받은 상업어음이 부도가 나는 경우 해당 업체가 발행한 다른 어음에 대해 어음기일에 할인의뢰,중소기업이 변제할 수 있도록 은행내규 개정. △가계금융및 저축제도 개선=가계대출한도 3천만원 폐지.가계우대정기적금 예치한도 1천만원 상반기중 폐지. ◇증권 △무보증회사채 발행한도제한 폐지 △중개어음 발행최저금액 인하 및 취급기관 확대=중개어음 발행최저금액을 1억원에서 5천만원으로.지방단자사(종금사 포함)에 중개어음업무 취급 허용. △우리사주 조합원의 주식처분 제한 완화=우리사주를 취득한지 7년 지나면 처분 허용.주택구입·의료·장례·결혼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경우 취득 2년 지나면 처분 허용. △상품권발행 허용추진=원칙적으로 상품권 발행을 허용하되 소비자보호장치 강구. ◇보험 △보험금 지급절차 개선=인감증명서 징주제 폐지.보험수익자로부터 보험금 청구시 은행구좌를 확인해 보험금 지급 결정되면 즉시 송금. △사고보험금 지급 창구를 영업총국 및 영업국단위까지 확대. ◇국제금융 △외화증권 발행절차 개선=신고제로 통일하고 구비서류도 현행 6종에서 1종으로 축소. ◇관세 △이사물품 국산승용차에 대한 1년내 전매제한기간 폐지. △견품에 대한 과세 완화=중소기업의 수출물품 제조용 견본으로 반입하는 과세가격 10만원 이하의 물품에 대해 송품장에 견본표시가 있으면 면세 및 신속 통관. ▷건설부◁ ◇토지이용및 거래 △현재 10개로 분류돼 있는 국토의 용도지역을 4개로 통폐합하고 개발목적의 용도지역을 확대. △농업진흥지역이 아닌 경지,준보전임지인 산림보전 지역에서 3만㎡미만의 주택지,특정유해물질을 배출하지않는 공장등은 용도지역변경없이 허용. △토지거래 허가제의 가격심사제를 폐지하고 농업진흥지역등은 허가대상에서 제외. △토개공의 비축토지매입의 경우 토지거래허가제 대상에서 제외. ◇건축 △공장및 주택에 대한 지하층 설치의무를 면제. △공장건축물에 대한 동별 준공검사허용. △소규모 공장허가 간소화(공업지역내 2층이하 5백㎡이하인 소규모공장은 신고대상으로 지정. △현재 건축법규상 5백㎡까지만 인정되는 슈퍼마켓등 산매점의 면적기준을 자치단체에 위임,대형점포 설치 허용. ◇주택 △ 주택수급상황 택지여건등을 고려해 여건이 성숙된 지역부터 분양가 자율화를 단계적으로 추진. △근로자주택 입주대상을 제조업,운송업등으로 확대하고 부양가족이 있는 미혼 무주택 세대주에게도 입주자격 확대. △공동주택단지내 복지시설의 용도변경은 시·도지사의 허가대신 신고로 변경. ◇수도권정비 △지금까지 물리적으로 규제해오던 수도권내 대형·업무·판매시설의 신·증축 억제를 폐지하고 과밀부담금을 부과하는 경제적 규제방식으로 전환. △경기도 동·북부지역의 개발규제를 완화,택지및 관광위락시설은 15만㎡까지 허용. △수도권 변두리지역의 공장허용범위를 개발유도권역등으로 확대,도시형 공장의 자유입지 허용. ◇도시계획 △도시계획으로 지정된 녹지와 공원지역내의 기존건축물및 공작물의 개축·재건축허용. 녹지지역내 취락지역의 건폐율 한도를 현재의 20%에서 40%로 상향조정. ◇기타 △부동산 중개법인에 대해서는 부동산 관리대행·이용·개발상담등의 겸업을 허용하고 도로변 휴게소의 배치간격을 현재의 최소 20㎞이상에서 10㎞이상으로 축소.
  • 국채발행금리 또 인하/「공용지보상」 등 최고 0.6%P

    국채발행금리가 0.25∼0.65%포인트 인하됐다. 12일 재무부에 따르면 지난 4일 국채발행금리를 0.25%포인트 인하조정한데 이어 이날 또다시 발행금리를 조정했다.국채발행금리는 올들어 모두 6차례 인하조정돼 연초대비 1.45∼1.6%포인트가 떨어졌다. 1년채인 재정증권과 양곡기금증권은 종전 연 11·5%에서 11·25%로 0.25%포인트가 인하됐고 3년채인 외국환평형기금채권,농어촌발전채권,농지채권은 11.65%에서 11.40%로 0.25%포인트,역시 3년채인 공공용지보상채권은 11.65%에서 11.0%로 0.65%포인트가 각각 내렸다. 인하시행일은 원칙적으로 12일이나 양곡기금증권,농어촌발전채권,농지채권은농림수산부장관과,그리고 공공용지보상채권은 건설부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친날로 부터 시행된다. 국채발행금리를 이같이 인하한 것은 최근 시장실세금리가 지속적으로 하락,통화채(1년)와 회사채(3년)의유통수익률이 각각 11.40%,11.60%수준에서 형성되고 있고 앞으로도 시장금리의 하향안정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됨에 따른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9)

    ◎64일간의 대립/“양기택 석방하라” 영,대일압력/배설 추방 실패… 일제,양 총무 전격구속/대영보복 간주… 총영사 강력항의/양국 외교관 경질요청으로 비화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의 통감정치 5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야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던 시기였다.매국적 친일인사들로 들어찬 대한제국정부는 이미 꼭두각시로 전락돼 있었다.국제적으로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무적의 상황을 맞은 일제는 기고만장했다.이무렵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가로막는 유일한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병합 걸림돌” 한국병합이 착착 진행돼가고 있던 시점에서 의표를 찌르는 신보의 예리한 보도와 논설은 일제를 당황케 만들었다.또 국채보상운동을 비롯해 의병운동,교육구국운동,민족산업육성등 신보가 앞장선 일련의 항일구국계몽운동은 일제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까지 받아들여졌다. 일제가 신보에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은 침략정책상 당연한 것이었다.그러나 일제의 신보탄압정책은 엉뚱하게 영국과 일본간의 외교분쟁으로 비화되었다.당시 영국과 일본은 두차례의 영 일동맹(1902·1905)을 통해 중국에서의 영국의 배타적 권리와 한국에서의 일본의 배타적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등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그럼에도 일제의 신보탄압을 위한 양기탁총무의 구속사건에서 비화된 양국간의 외교마찰은 전시에나 가능한 외교관대표 사이의 「통신기피」 단계에 까지 이를정도로 악화되었다. 1906년 2월 정식으로 발족된 통감부는 적극적으로 배일논조를 펴온 신보의 발행을 금지시키기 위해 2단계 공작을 폈다.첫단계로는 사장 배설의 추방을 시도,일본과의 관계를 의식한 영국측이 그에게 두차례의 근신형과 3주의 금고형등을 가했다.그러나 배설은 상해에서 형을 복역한뒤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신보는 폐간은 커녕 오히려 배일논조를 더욱 강화시켰다.더욱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의 총본산이 되어 이운동을 진두지휘했다.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다음 단계로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양기탁이 경시청의 와타나베경부에 의해 전격 연행된 것은 1908년7월12일밤 회사안에서 였다.국채보상운동수집금 일부를 횡령했다는 혐의내용이다.급보에 접한 당시 신보사장 만함(A W Marnham·그해 5월27일 부임)은 이를 곧 헨리 콕번 영국총영사에게 알렸다.이 사건을 배설의 영구추방에 실패한 일제의 영국에 대한 보복행위로 간주한 콕번총영사는 통감부 외사과장에게 즉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내는 동시에 화이트서기관을 직접 보내 다음날인 13일 하오7시까지 석방할것을 통보하는등 강력하게 항의했다. ○약속 위반에 분노 콕번이 양총무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할수 있었던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불과 27일전에 열렸던 배설재판에서 재판장이었던 자신이 통감부 외무부장 나베시마로부터 확약을 받아낸 사항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배설의 증인으로 출두한 어떤 한국인도 대한제국정부나 통감부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확약을 일제가 파기했던 것이다. 통감부는 영국측의 뜻밖의 강경태도에 당황,본국에는 양기탁이 자진출두한 것이라고 허위보고하고 경시청으로 하여금 양의 기소를 서두르게 했다.이에따라 경찰은 18일 양을 정식기소,황급히 경성재판소에 송치했다.영국정부는 이같은 일본측의 행위에 항의,다음날인 19일 도쿄의 맥도날드대사를 데라우치외상에게 보내 공판 전이라도 양기탁을 바로 보석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양기탁구속사건이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휴가차 본국에 와있던 통감 이등박문은 22일 부통감 소네에게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도록 지시하기에 이른다. 영·일양국간에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종로서 유치장에 수감중이던 양기탁을 면회한 만함이 감방의 위생불량과 양기탁의 쇠약을 콕번총영사에게 호소했다.콕번은 8월1일 경성이사청의 미우라이사관에게 감방 상황및 양기탁의 건강상태를 공문으로 조회하면서 인도적 입장에서 즉각 보석허가를 요청하고 나섰다.도쿄의 맥도날드대사도 이등박문에게 이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양기탁의 보석을 요구했다. 마침내 이등박문은 만약의 경우 양기탁이 사망할 경우를 우려,입원치료 허락 뜻을 밝혔다.그러나 미우라이사관이나 소네부통감등 한성의 보고는 한결같이 『감방상태도 많이 좋아졌으며 양기탁의 건강도 전과 다름없으므로 보석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결국 이등박문이 단안을 내려 8월10일 양기탁의 입원을 긴급지시,11일 하오5시 양기탁은 대한의원에 입원하기 위해 종로서에서 일단 풀려났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 발생되었다.양기탁이 호송경찰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그길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피신했던 것이다.발칵뒤집힌 통감부와 경성이사청은 만함 사장과 콕번 총영사에게 양총무의 인도를 정식으로 요구했다.그러나 콕번은 본국정부의 훈령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고 15일로 예정돼 있던 양의 공판을 연기해달라고 미우라와 맞섰다. 그 유명한 콕번과 미우라 사이의 이른바 「미우라기피사건」은 이때 양기탁의 인도를 둘러싼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됐다.미우라는 콕번에게는 공판연기 불가를 밝혔으나 막상 사건을 담당한 검사장에게는 공판연기를 청구해놓았던 것이다.이때문에 15일 하오영국정부로부터 훈령이 도착,콕번이 양기탁 인도를 미우라에게 통고했을때는 이미 공판은 연기된 뒤였다. 여기서 콕번은 미우라가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라고 규정한뒤 당일인 8월15일부터 그와의 통신을 일체 기피했다.또 17일에는 통감부로 공한을 보내 대화상대를 교체해줄 것도 요청했다.그러자 통감부는 즉각 반발에 나섰고 일본의 언론들도 영국총영사에 대한 신임장을 취소해야 한다는등 여론을 일으켰다.통감부는 21일자 보고서에서 『미우라이사관의 행동에는 비난할 점을 발견치 못했기 때문에 미우라의 경질을 요구하는 영국측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콕번의 경질을 영국측에 요구할 것』을 건의했다. ○두달뒤 무죄선고 그러나 당시 군사동맹을 맺고 있던 양국간에는 이같은 문제로 인한 긴장관계 발생을 서로 원치않고 있었다.결국 영국정부가 한발 양보,콕번총영사에게 양기탁의 공판에 협조토록 훈령을 내림으로써 양은 21일 대한의원에 입원케 됐다.그는 이 병원에서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고 27일 경찰서로 다시 이감되었으며 8월31일 첫공판이 개정되었다.그후 다섯차례의 심리가 더있은후 9월29일 양기탁은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선고를 받았다.이로써 양기탁 구속으로 말미암은 영·일 양국간의 64일간의 숨 막히는 드라마는 끝을 맺게 되었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일제의 문화침탈사」(한기언외·민중서관 1970)
  • 기은,국민은 공개 검토/지방중기 조세감면·신보지원 확대

    ◎재무부,국회보고 정부는 중소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사양업종을 유망업종으로 전환하거나 지방에서 중소기업을 창업할 경우 조세감면혜택을 주기로 했다. 또 중소기업의 담보력 부족에 따른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정부출연 등을 통해 올해 신용보증기금 등의 신용보증 지원규모를 10조4천억원으로 늘리고 주식시장 여건을 감안해 중소기업은행과 국민은행의 공개를 검토키로 했다. 이와함께 금융실명제의 실시시기를 앞당길 수 있도록 세제·세정·금융 등 각 분야에서 구체적 방안을 강구하기로 했다. 이밖에 대기업주의 상속·증여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등 경제력 집중을 완화해 나가기로 했다. 재무부는 17일 국회 재무위원회에 제출한 업무보고를 통해 올해 정책과제를 이같이 밝혔다. 이 업무보고는 또 건전재정을 유지하고 통화관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국채 판매방식을 강제배정에서 입찰방식으로 전환하고 국채전문 딜러를 육성하며 유휴 국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국유지개발신탁제를 도입키로 했다. 신용거래의 정착화를 위해서는 신용카드업법을 개정,선불카드 뿐 아니라 직불카드의 발행을 가능토록 할 방침이다. 선불카드란 대금을 미리 지급한 카드이며 직불카드는 카드를 사용하면 그 즉시에 카드보유자의 계좌에서 가맹점의 계좌로 대금이 자동이체되는 제도이다. 또 토지에 대한 과세표준의 현실화,양도소득세 감면축소,토지초과이득세의 과세기준 보완 등 부동산관련 세제와 세정을 개선하기로 했으며 특별소비세제·부가가치세제의 개편작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7)

    ◎항일투쟁의식 고취/고정란 두고 의병활동 집중 보도/일제탄압속 「의병형세」 「처처의병」 상설/13도창의군 서울진격땐 격문도 게재/군대해산조치 항쟁에 “일정책 잘못” 통렬 비난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진행될 무렵인 1907년 4월,양기탁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결성되었다.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당시 축멸왜이(축멸위이)의 기치 아래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의병활동을 낱낱이 보도하고 지원하는 새로운 사명을 스스로 짊어졌다. ○「축멸왜이」 앞세워 일찍이 날카로운 논조와 고발기사등을 통해 일제 통감정치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해오던 신보는 신민회와 깊은 연관을 맺는다.총무 양기탁을 비롯,주필 박은식,기자 장도빈 옥관빈,영업국장 임치정등 대부분의 사원들이 신민회에 가입한 것이다.이에따라 자연스레 신민회 대변지로서 의병운동·신교육구국운동·계몽강연운동·민족산업운동등 사회 각분야에서 태동되기 시작한 애국계몽운동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 저항은 1907년 8월1일을 기점으로 강하게 표출되었다.신보는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에 돌입하자 전국각지에서 궐기한 의병의 활동상을 상세히 보도,국민들의 애국심에 불을 댕겼다.이른바 제3차 의병전쟁(제1차는 1895년 민비시해이후,제2차는 1905년 을사조약이후)으로 분류되는 군대해산 이후의 의병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펼쳐졌다.이무렵 신보의 적극적 보도는 이같은 의병활동이 한일합방후 독립군에 의한 독립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신보가 역사적 변화를 가져온 징검다리로써의 소임을 다했다고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군대해산에 반대한 최초의 항일봉기인 구한국군의 항쟁은 해산 당일 서울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의 죽음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번 죽어도 아까울것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자 대한제국 군대의 의분이 폭발했던것이다. 신보는 이날 일본군과 한국군 사이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낸 서소문과 정동 일대의 전투의 처참상을 2일자에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한국내에서 우리 한인의 살육당함은 일본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논책함이 옳도다.서소문에 있는 병영에서 무장해제 칙령을 들은 박승환대장이 곧 자살한지라 그날 상오8시반에 소요가 시작되어 거의 정오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격심한 전투가 끝난후에 병영내가 시체로 즐비하였으며 은밀한 구석에도 시체와 무기가 흩어져 있었으니 추측컨대 무기가 다하도록 싸우다가 일본 기관포의 잔인한 발포에 혼비백산하여 숨을곳을 찾다가 일인의 탄환과 총칼에 죽음을 당하니 땅위에 피냇가를 이룬 것이라』 그리고 「한병해산」이라는 8월4일자 논설에서 일제 군대해산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한인들의 분연한 의거를 칭송하고 나섰다.『이와같이 커다란 인명손실의 직접동기가 된 한병해산의 권고를 강경 논책하며 겸하여 이 모든 사태를 한탄하거니와 동시에 믿음직한 것은 한인의 합당하고 옳은 의거로 세계신문들이 왜곡했던 한인의 게으름이란 것이 도리에 어긋났음을 일인과 세계안목에 드러내 보이도다』 의병활동이 국민적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고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가자 신보는 산발적인 보도가 아니라 「의병형세」「처처의병」「지방소식」등 고정난을 서둘러 만들었다.의병의 활약상을 상시 보도하면서 국민들의 적극적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이같은 신보의 열성적 의병활동 지원보도는 대한제국정부의 친일내각이나 일제 통감부에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이는 이완용내각의 내부경무국장 송정무가 통감부 외무부장 와도계차낭에게 보낸 1908년 6월4일자 보고문서 「대한매일신보와 폭도」(「주한일본공사관기록」경비발 제786호)에 잘 나타난다.이 사무보고 문서는 신보가 의병활동을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그 실례로 1907년 12월,13도창의군이 서울을 진격했을때 그들의 격문을 신보가 보도함으로써 그로인해 의병대의 지원자가 크게 증가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9년 말의 사무보고에 따르면 한햇동안 「폭도 선동」(의병운동 관련)등 치안방해를 이유로 압수된 신문 1백41건 2만9백47부 가운데 대한매일신보가 14건 1만6천3백14부를 차지했다.압수된 신문의 대부분이 신보임을 고려하면 이신문이 일제에 얼마 만큼 저항했는가를 알수 있다. 이같은 신보의 적극적인 의병활동 보도는 1909년 5월 사장 배설이 죽은 후에도 지속되었다.이듬해 5월 통감부에 의해 사실상 회사가 접수되기 직전까지도 필봉을 늦추지 않았다.신보의 일관된 태도는 1909년 10월26일 당시 의병참모중장의 신분으로 통감 이등박문을 암살,이듬해 3월 여순감옥에서 처형된 안중근의사의 거사및 체포·재판과정등의 보도에서도 나타났다.그가 거사후 일제검찰에 제시한 이등박문을 살해한 이유 15가지를 신보는 11월21일자에 상세히 보도,국민들에게 안중근의사의 큰뜻을 널리 알렸다. ○14차례 압수당해 신보는 안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직전에 국민들에게 보내는 유언까지 게재함으로써 한국민족의 국권수호열망을 만방에 과시했다.『▦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손로숙하다가 그 목적을 도달하지 못하고 타지에서 사하노니 유아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분발하야 학문을 면려하고 실업을 진흥하며 아의 유지를 계하여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사자무감이라』(3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저항은 외길이 아니었다.보이지 않는 무형의 저항으로도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은 교육구국이었다.민족의 각성과 지도자의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깨달은 신보의 편집진은 민족교육기관의 설립을 찬양하면서 부추기는 논조로 일관했다.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한국신문사연구」(이해창,성문각 1983)
  • 양곡기금증권 등 국채 0.2∼0.6%P 인하

    재무부는 5일 양곡기금증권등 국채발행금리를 0.2∼0.6%포인트 인하했다. 인하내용을 보면 1년짜리 재정및 양곡기금증권이 현행 연 12.5%에서 12.25%로 0.25포인트 낮아졌고 3년짜리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농어촌발전 채권·농지채권은 현행 12.6%에서 12.4%로 조정됐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6)

    ◎대한매신의 애국계몽/“축채 갚자” 전국적 담배끊기 전개/의연금 기탁자 명단·사연 연일 보도/「반지빼기」계기 여성동참 적극 유도/“통곡으로 실업가에 고한다” 사설로 참여 촉구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제는 이듬해 통감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기 시작했다.이에따라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국권수호운동이 활발히 전개됐다. ○신민회 충실 대변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는 일제가 민족의 목을 죌수록 배일논조를 통해 항일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었다.그것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등을 주도한 민족지도자들과 국민들간의 의사소통수단으로 나타났다.또 국채보상운동과 같이 직접적인 대국민캠페인을 통해 국민운동을 주도해나가기도 했다.특히 1907년 양기탁주필을 총감독으로한 민족지도자들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창립되었을때 신보는 역할 하나를 더맡았다.신민회 주관 각종 국민운동의 충실한 대변지로서 신민회 활동을 날카로운구국언론활동을 통해 뒷받침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설립,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김광제 서상돈등 10여명이 주도하고 나서는 것으로 불을 댕겼다.1907년 1월31일 당시 일본에 빚지고 있던 국채 1천3백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운동이 그것이었다.「국채 1천3백만원 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한데서 발단한 이 운동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빚을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구국운동 이기도 했다. 그 하나로 2천만동포들이 배를 끊자는 방안이 제시됐다.한사람이 한달 담뱃값 20전을 3개월만 모으면 1천3백만원의 차관을 무난히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이는 전국민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모아 마침내 20여일만인 2월22일 한성에 중앙총괄기구인 국채보상기성회를 결성시켰다.국채보상서도의성회·국채보상부인회·국채보상경남찬성회·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대구국채담보회·제주의성회·황해도재령군보성소등 전국적으로 지역별뿐 아니라 직능별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결성됐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어느 신문보다도 앞장서서 국채보상운동을 다뤘다.의연금 기탁자의 명단을 보도함은 물론 기탁에 얽힌 사연들도 소개했다.이들 보도 가운데는 어려운 노동자들까지도 동참하는데 정부관리나 부유층들이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도 있었다.『국채보상을 위해 3개월씩만 단연하자는 서상돈의 발기에 한성안의 병문(길가)노동인이 충분소격에 연초대금을 서로 다투어가면서 모으고 있다는데 현금 정부대신은 노동자 보기가 어떠할 것인가』(1907년 2월24일자). 이 운동이 단시일내 전국적으로 확산될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문들의 이같은 적극적인 보도에 힘입어서였다.그러나 신보는 초기에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드는 의연금을 여러 곳에서 다룸으로써 혼선이 빚어질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그래서 의연금을 한곳으로 모을수 있는 중앙수합처가 결정되기 전에는 수전소 역할을 맡을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그러면서도 3월1일자에는 「한인충애」 표제의 사설로 이 운동을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로 규정하고 나섰다.이 큰일의 성취를 돕는 것은 신문이 할수 있는 즐거운 일이라고 적극적인 지지를 밝혔다. 대한매일신보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 동기는 3월31일자에 특별사고로 다루었다.「이제까지와는 달리 국채보상 의연금을 동사에서 직접 수령키로 했다」는 뜻을 분명히하고 나선 것이다.이에따라 신보는 일부 유지들을 규합,4월1일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그 사무소를 사내에 설치했다.간부진용으로는 양기탁총무를 회계로 하고 윤웅렬소장,김종한부회장,박용규재무등이 추대됐다.전국각지에서 작게는 5전부터 10전·1환·10환,크게는 1백환 이상에 이르기까지 성금이 답지했다.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2월말부터 4월말까지 불과 두달 사이에 4만명이 넘게 참여하는등 큰 호응을 얻었다.신보를 비롯,각 언론기관들도 이들 명단게재및 보도에 호외를 발행하는등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남자들을 위주로한 단연운동으로 시작했던 국채보사운동은 5월들어 신보에 의해 시작된 반지빼기운동등 여자들의 참여로 확산돼 나갔다.신보는「국채보상에 나선 여인의 대열」이라는 반지빼기모임 취지문의 논조는 사뭇 흥미롭다.「우리 2천만중 여자가 1천만이요,1천만중 반지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반지 한쌍 2원씩만 셈하면 1천만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할수 있다.이 운동에 동참을 계기로 남녀동권을 찾자」(4월22일자). 통감부는 이 운동 초기에는 흡연을 즐기는 한국인들에게 단연운동이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대수롭지않게 비웃었다.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점차 고조되자 통감부는 3월 들어서면서 영문판 기관지인 「서울프레스」를 비롯한 친일지들을 동원,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맞섰다.「빚진 사람이 압제하는 채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는 논조를 폈다.또 3월24일자 「통곡고대한실업가」 표제의 사설에서는 소극적인 자세로 있던 실업가들에게 자극을 주면서 동참을 촉구했다. 통감부는 급기야 공안을 해친다는 이유로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을 영국총영사에게 제소한데 이어 1908년 7월12일에는 의연금 3만환 횡령의누명을 씌워 양기탁을 구속하였다.영국측은 전날 배설 공판때 통감부 외무부장이 영국인피고의 증인으로 출두했던 어떤 한국인도 한제국및 통감부로부터 방해 내지는 탄압을 받지 않는다고 확약한 사실을 내세웠다.그러면서 양기탁의 즉각 석방을 요청,영국과 일본 양국간의 외교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2백여만원 모금 양기탁은 이른바 국채보상금사기취재사건의 다섯차례 공판끝에 9월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 되었다.그러나 그의 구속과 이후 법정공방으로 비화된 보상금 횡령사건등으로 모금활동은 더이상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결국 1년반 가까이 계속된 모금운동에서 걷힌 돈은 모두 2백31만9백89원13전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그러나 이 액수는 애당초 목표로 했던 국채 1천3백만원에는 먼 액수였다. *참고문헌:「한국신문사론고」(최준,일조각 197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한국민주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을유문화사 1985) 「대일민주선언」(홍이섭,일우문고 1972)
  • 국채 0.2∼0.4%P

    양곡기금증권등 국채의 발행금리가 0.2∼0.4%포인트 인하됐다. 재무부는 27일 최근 공금리인하에 따라 시장실세금리가 하향화추세를 보이자 이같이 국채발행금리를 조정했다. 재정·양곡기금증권등 1년짜리는 현행 12.7%에서 12.5%로 0.2%포인트,외국환평형기금채권·농어촌발전채권·농지채권 등 3년짜리는 13.0%에서 12.6%로 0.4%포인트 각각 인하했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5)

    ◎매신의 수난과 저항/배설 상해투옥에도 항일필봉 건재/일제,영국과 손잡고 공작… 유죄 판결/양기택 등 민족언론투사들이 맥이어/정간 2회·압수 45회 맞서 고종퇴위 기도 등 폭로 일제의 탄압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신문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민족지를 짓밟기 위한 술책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대한제국으로 하여금 신문조례를 만들도록 하는 외교적 강압으로 나타났다.특히 을사보호조약 체결뒤의 언론탄압은 더욱 심한 양상을 띠었다.한반도 침략정책에 방해가되는 기사나 그 부당성을 비판하는 글을 결코 방관하지 않았다.그래서 신문을 압수하거나 정간시키는 동시에 편집인 문책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편집인 문책 일쑤 이 시기에 일제의 민족지에 대한 탄압은 황성신문의 정간및 주필 장지연의 구속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수 있다.그러나 민족언론탄압에 서슬 퍼런 칼을 갈았던 일제도 배설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해서는 손을 쓸수가 없었다.치외법권의 보호가 늘 걸리적 거렸던 것이다.따라서 일제의 사전검열없이 발행되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유일한 신문으로 남게 되었다.그 논조는 말할나위도 없이 반일로 일관된 예봉이기도 했다. 핍박과 강압을 외면한채 강경한 논조를 굽히지 않는 신보.그 존재는 마침내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의 대상이 되고만다.신보를 무력화 시키려는 일제의 탄압은 외교경로를 통한 배설의 추방공작으로부터 시작 되었다.배설에 대한 추방공작은 이미 1905년 9월에 제기 되었으나 통감부가 본국정부에 정식으로 요청하기는 이듬해 7월부터이다.이에따라 일제는 본국외무성을 통해 동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배설을 추방하거나 신보를 폐간토록 요구하고 나섰다. 일제의 끈질긴 요구에 따라 영국측은 1904년에 제정된 「청국및 한국에 대한 추밀원령」을 적용키로 했다.그러나 배설을 제재하기에는 그 근거가 미약했다.그래서 제5조를 개정하여 1907년 2월1일 이를 공포하기에 이른다.개정된 내용의 골자는 『영국국민과 본령시행구역내에 있는 영국과 친선국의 소요 혹은 그 국민과의 사이,그리고 청국정부와 그 국민 또는 한국정부와 그 국민 사이에 불화를 도발하려하는 사항은 본조에 규정하는 선동적인 사항으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배설과 신보를 제재하려는 일제의 책동에 영국이 동조한 것이다.그러나 배설은 일제의 억압에 결코 굴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일제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그의 선언은 신보의 한글판 7월17일자 1면 머리에 『일본이 황제를 퇴위시키고 황제를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케 하려한다』는 폭로기사로 반영됐다. 이어서 이튿날짜 신보는 논설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황실을 강핍하고 대신을 종으로 부리며 백성을 짐승으로 여기는 행동이 극도에 달했다』고 통렬히 비난하고 나섰다.날이 갈수록 강도 높은 논조로 맞서는 신보의 자세에 통감부는 급기야 1907년 10월 서울주제 영국총영사 헨리 코번에게 배설의 처벌을 요구하는 소장을 제출,외교적 탄압을 본격화 한다. 배설은 10월14일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 설치된 영사 재판정에 출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재판이 열린 다음날 코번은 배설의 유죄판결을 선고했다.신보의 논설이 추밀원령 제83조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항에 해당된다 하여 6개월간의 근신에 처한 것이다. 배설에 대한 일제의 책동은 이같은 결과를 가져왔으나 사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특히 배설의 근신기간이 만료된 직후부터 신보는 더욱 강경한 논조로 돌아섰다.민족주의운동을 탄압했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이등박문에 비유한 「백매특날이 불족이압 일이태리」며 「정부당국자의 기량」등의 글로 일제를 규탄하고 통감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대한제국의 내각을 신랄히 비판했다. 이렇게 되자 통감부는 또 다른 탄압의 칼을 빼어들었다.1908년 4월29일 이완용내각으로 하여금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 발행되는 외국인의 신문까지도 발매·반포금지 또는 압수할수 있도록 한것이다.광무신문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신문지법(1907년 7월제정)은 신문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벌칙이 골자로서 민족지를 탄압하는데 적용된 악법이라 할수 있다.법이 처음 제정 공포된 때에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해외에서 교포들이 발행하는신문에 대한 규제조항이 없어 이를 새롭게 보완한 것이다. 신문지법을 이처럼 개정토록 한데에는 신보탄압이 근본목적이었으나 반일논조의 해외교포신문들이 국내에 유입되는것을 막자는 계략도 포함됐다. ○이완용내각 통박 통감부는 신문지법이 개정된 직후 곧바로 행동을 개시,신보를 압수하기 시작했다.5월1일자 논설 「불필랑경」을 비롯,5월13일자「한국내의 일본」,5월16일자「학계의화」가 통감부 기휘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신보는 잇따라 압수됐다.당시 일제가 집계한 신보압수건수를 보면 1908년 한해동안만도 국한문판 8회,국문판 7회에 이른다.일제는 이같은 신문압수방법외 신보의 구독을 방해하는 행적적 탄압도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통감부 기관지 서울프레스를 동원하여 신보의 기사와 논설을 비난하는등 다각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그러나 신보의 논조는 좀체 수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일제는 배설에 대해 어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기 위해 치밀한 사전공작을 벌였다.그리고 영국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펴기 시작했다.이른바 양동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영국은 마침내 배설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해결키로 하고 배설을 재판에 회부한다는데 동의했다.이렇게 해서 배설의 2차재판은 1908년6월15일부터 3일동안 서울의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리게 됐다.재판을 진행하기위해 상해고등법원의 판사 본과 검사 윌킨슨이 서울에까지 왔다.이는 한·영·일 3국이 관련된 동양역사상 처음 있는 특이한 재판이었다. 이 재판에서 판사는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형과 6개월간의 근신을 언도했다.유죄판결을 받은 배설은 잠시 한국을 떠나 상해에서 복역하게 됐다. 그러나 배설이 신보를 떠나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안에도 이 신문의 항일논조는 변함없이 이어졌다.양기탁을 비롯한 민족언론 투사들이 본래부터 신보의 제작을 주도해온 때문이었다. 배설의 재판직후 통감부의 신보에 대한 감시와 탄압 또한 집요하게 지속됐다.7월2일자 논설 「확실한 언론」을 치안방해로 규정,이날자 신보를 발매금지 처분하는 한편 또 다른 탄압계획을 실행했다.신보사의 총무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혐의로 전격 구속한 것이다. 신보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신보의 제작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전국 규모의 민족운동이던 국제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을 와해시키려는 2중효과의 탄압책략이었다.궁국적으로는 신보를 중심으로한 항일민족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일제의 신보에 대한 탄압은 이 신문이 한일합방 직후 통감부에 매수되기까지 줄곧 이어져 국한문판 24차례,국문판 21차례의 압수와 2차례의 정간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록돼있다 항일구국지 대한매일신보는 이처럼 끝없는 수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역사를 살았다. 정진석저)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4)

    ◎매신의 항일논조/을사조약 다음날 즉각 “무효” 보도/일진회의 합병주장 사흘에 걸쳐 통박/“매국의 자유는 없다”… 친일지 정면비판/황성신문과 공동보조… 민족지의 방향 주도 20세기 초반의 국운은 풍전등화 그것이었다.일제의 만행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침묵」만이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이하 신보)가 깨어있는 언론으로 날카로운 배일논조를 통해 사라져가는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다.또 다투어 일제 찬양에 앞장서고 있던 친일지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논조뿐 아니라 기사는 물론 연재소설까지 총체적으로 일본침략에 맞섰기 때문에 친일적 사회분위기에 늘 경종을 울렸다. ○타지의 논조 감시 1904년 발발한 노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제는 이 땅에 배타적 지배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이듬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초대 총감에 앉혔다.그리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몰수하고 민족의 분열을 획책하는등 조선을 합병키위한 온갖 탄압통치를 자행하고 나섰다.이같은 상황에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민족 단합의 기치를 올렸다.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등 민족지들은 이에 동조했지만 국민신보 대한신문등 친일지들은 통감부에 추파를 던지면서 아부까지 일삼았다.민족혼을 일깨우는 일방 친일지들의 논조와 태도를 감시하는것 또한 민족지들의 중요한 임무가 될수밖에 없었다. 신보는 민족지들 가운데 통감정치에 대한 대항과 친일지들을 비판하는데 선봉장 이었다.주필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황희민등 논설기자를 주축으로한 당시 신보의 필진은 신랄한 필봉으로 통감부및 대한제국의 친일내각 정부를 규탄했다.그래서 신보의 논조는 일제침략의 두려움과 조정의 무능에 실망을 느끼고 있던 국민들에게 각성제가 되었다.결국 환영받는 신문으로 다투어 구독함으로써 당시 다른 신문들의 발행부수가 2천부내외에 불과했던 것과는 달리 신보는 1만부를 돌파하기에 이른다. 1905년 11월17일 을사조약의 체결은 대한매일신보로 하여금 배일논조의 강도를 더높이게 하는계기가 됐다.조약체결 바로 다음날인 11월18일자를 보면,이 조약의 무효를 공공연히 제기한다.『한국황제께옵서는 한국 독립을 중념하사 정대한 의리로써 거절하시고 칙어로써 불윤하셨다』는 대목이 그것이다①. 이어 신보 21일자는 황성신문 20일자에 장지연사장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과 을사조약이 강제로 맺어진 경위를 폭로한 기사인 「오건조약청체전말」등의 게재로 벌어진 황성신문사태를 보도한다.이 기사는 황성신문이 일군의 검열을 받지않고 배포함으로써 사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사원이 체포되고 무기정간 당한 사실등을 상세히 보도했다.또 23일자에는 장지연에 대한 수사 속보와 함께 「황성긍지」 제하의 사설에서 황성신문의 매국적들에 대한 규탄을 찬동하면서 일제의 언론탄압과 친일지들의 침묵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이같은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통감부가 보면 눈의 가시처럼 여겨졌으나 사장 배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섣불리 손을 댈수도 없었다.2년후인 1907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과정에서 신보의 논조는 국민들의항일구국의지에 또한차례 불을 댕겼다.이 문제를 사설로 처음 다룬것은 이해3월1일자 「한인충애」란 표제의 글이다.여기서 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으로부터 면탈하려는 인민의 제의이다.이를 성취시켜야겠다는 것과 신문이 이러한 가찬할만할 일을 돕는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라고 일제의 비위를 긁어버린다.이는 결과적으로 이 운동에 국민들이 적극 동참,애국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다한다②.일제는 점차 두려움을 느껴 이 운동에는 배일사상이 개재돼 있으며 미국이 이를 배후조정하는 것이라고 공격하면서 탄압을 가중해오거나 회유책을 쓰는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그러나 신보는 이에 정면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일제회유책 거부 1909년12월4일 한일합병을 주장해온 일진회가 소위 「일진회합병성명서」를 발표하자 당시 민족지는 물론 일반국민들의 격분은 극에 달했다.이때 신보는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이라는 반박사설을 연3일에 걸쳐 실을 정도로 강력히 항의했다. 대한매일신보는 또 1906년 1월 국민신보에 이어 이듬해대한신문,1909년 9월 시사신문등 친일지들이 잇달아 창간되자 그 필봉을 더욱 날카롭게 갈았다.그들의 매국적 보도태도를 감시하고 지적하는데 한시도 눈을 팔지 않았다.1907년 12월17일자에 보도된 「위국민대한양신문초혼」 제하의 사설은 친일지들의 신보 비판에 대한 답신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당시 친일지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고 있는 의병을 「폭도」라고 보도하는데 대한 김정익이라는 독자의 반박문을 신보가 게재했다.그러자 친일지들은 「대마두매일보」「대화태매일보」등 사설로 일제히 신보를 비판했던 것이다.장문의 이 신보의 사설은 『공격도 자유고 비판도 자유다.그러나 매국하는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논지를 펴며 조목조목 친일지들의 반성을 촉구했다③. 이어 1910년 4월1일자의 「고·시사신문」제하의 사설은 시사신문이 일제에 아부하는 비천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대해 서슴없이 경고한다.특히 시사신문이 사내에 관광계를 설치하여 일본관광단을 모집하고 있는데 대해 강력한 비난을 퍼부었다.『일본관광의 목적이 선진실업을 수입하여 실업개발을 이룩하자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한국인을 일본인화 시키려는 일제의 획책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면서 관광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것을 촉구했다.그밖의 경고성 사설들을 보면 「본보의 우인과 적혐자」(07·5·11)「부국민신보」(7·18)「대한신문마기자아일람」(12·8)「국민보마기자아」(09·5·21)「국민대한양마두상각일봉」(5·23)「파외파의 담계」(6·6)등 수를 헤아릴수 없이 많다. 대한매일신보의 배일은 논조나 기사를 통해서만 나타난것이 아니라 해학과 풍자가 가득한 신문소설을 통해서도 나타난다.대표적인것으로는 「소경과 앉은뱅이 문답」(1905년 11월17일부터 12월13일까지 연재)이 있다④.무기명으로된 이 작품은 미신타파와 단발령선포등 사회개혁으로 생활기반을 상실당한 소경 점쟁이와 앉은뱅이 망건쟁이의 대화형식을 빌려 구성한 것이다.수구파와 개화파로 갈라지는 신구세력의 대립,외세의 가열한 침투,무능한 정부의 외세의존,자유주의사상 전래등 급격한 변혁으로 인한 현실비판이 주요골격이다.이들의 대화중에는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도 있고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분강개도 나온다.또 「이태리국 아마치전」에서는 이탈리아의 건국영웅 아마치의 구국투쟁 편력을 서술함으로써 은연중에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적극적 배일 태도는 1909년 5월 사장 배설이 죽고 만함(Marnham)이 사장직을 이어받은 후에도 1년여간 계속되었다.그러나 1910년 6월 이장훈에게 양도된 이후 그 예리한 필봉이 비운을 맞는다.그래서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①정진석,일제하한국언론투쟁사(정음사 1975)PP26∼32◎최준,한국신문사론고(일조각 1976)PP113∼117 ②이해창,한국신문사연구(성문각 1983)PP405∼406 ③이재선,한말의 신문소설(한국일보 1975)PP40∼47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3)

    ◎매신의 인걸들/선각자들 결집… 「국권회복」 구심체로/영국인… 일제탄압에 울타리역할/배설/총무 맡아 항일논조 사실상 주도/양기탁/박은식·신채호는 주필로 민족자부심·독립정신 고취 대한매일신보가 민족의 대변지로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 신문에 관련 또는 종사했던 사람들의 면면인데 국적과 신분을 뛰어넘어 매우 다채로운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영국인 사장 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논객이자 사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국내 인사들로 돼있다.배설(Ernest T Bethell)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시 북부 애쉴리에서 태어났다.극동상대의 무역상이던 토머스 헨콕과 전도사의 딸인 마서 제인 홀름의 다섯 남매중 장남으로 브리스톨의 머천트 벤처러스스쿨을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뒤 열다섯살 때인 1888년 일본에 건너와 1904년초까지 16년동안 고베(신호)에 살면서 무역업에 종사했다.1899년에는 동생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무역상을설립했다.이 회사는 지금도 런던에 있다.어떻든 배설은 한때 돈을 많이 벌어 러그(rug·깔개)공장을 차리기까지 한것을 보면 사업수완이 대단했던 인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인들의 방해로 실패,재산을 모두 날렸다.졸지에 삶의 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대로 늘 활달한 쾌남아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수영 크리켓등 스포츠를 좋아했으며 특히 음악에는 타고난 감수성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체계적인 음악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청중들 앞에서 곧잘 노래를 부를만큼 빼어난 가창력도 지녔다. ○늘 활달한 쾌남아 서양장기를 잘 두었으며 술과 담배 또한 즐기는 편이었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문장력도 여간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학력은 비록 고졸에 그쳤으나 이처럼 다채로운 그의 재능과 기질은 언론인으로서 훌륭한 잠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이윤추구가 최대의 목표인 무역업보다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고 창의성을 발휘,정치 사회에 직접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업인 신문발행이그에게는 적격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그가 언론과 인연을 맺은 것은 러그사업에 실패한 직후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특별통신원이 되어 한국에 온 것이 계기가 됐다.그리고 그는 불과 4개월 1주일만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할 수 있었다.배설의 언론입문은 그의 자질이나 성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당시 한국의 실정 역시 배설과 같은 언론인을 절실히 필요로 한 시대이기도 했다. 그가 양기탁을 만나 대한매일신보의 견본판 「양자신문」을 만들기는 1904년 6월29일이었으며 실제로 신문을 창간하기는 20일 뒤인 7월18일이었다.그로부터 1909년 이 땅에 뼈를 묻히기까지 줄곧 한국인의 편에서 일제에 맞선 항일언론의 선봉장으로 또 신보를 이끌고 지킨 울타리 역할을 다 해냈다. 배설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양기탁은 신보를 떠받친 기둥이요 대들보로 비유해도 좋다.그는 신보사의 전무와 주필 그리고 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인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일논조를 사실상 주도한 신보의 분신이었다. 양기탁은 호가우강으로 1871년 4월2일 평양태생이다.배설보다는 1년7개월 먼저 태어난 셈이다.부친은 한학자로 그 지방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양시영이었다.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사람됨이 매우 총명하여 보기드문 소년 문장가로 꼽힐 정도였다. 그가 서울에 오기는 배설이 일본에 갔던 같은 나이인 15살 때였다.상경직후 동학및 유림의 명망가이자 우국지사인 나현태를 알게 됐다.이후부터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게 되었고 동학당과도 관계하면서 견문과 사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던 국내외 정세에 영향을 받은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반년동안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따라서 그의 지식과 사상은 어려서 배운 한학의 토대위에 양학문과 기독교 정신이 접목된 것이 아닌가 한다.또 동학과도 관계함으로써 민족주의 사상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일제의 가슴에 예리한 비수를 들이대는 듯 했던 신보의 반일논설 필봉은 그의 이런 사상과 학식에 바탕한 것이다. 그는 한때 부친과 함께 캐나다의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했다.이 한영사전은 1897년 6월에 출판됐는데 인쇄소는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합자회사였고 발행소는 서울야소교서회로 되어 있다. 그는 신보를 이끈 항일지사형 언론인의 전형적 인물이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그 총감독으로 활동한 바도 있으며 나라를 빼앗긴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일제에 대항케한 열혈투사이기도 했다.여러차례의 옥고끝에 만주로 도피한 그는 상해에서 광복운동에 종사하던중 1933년 김구에 의해 법무담당 국무위원에 임명,1년4개월간 재임했다.강소성 담양현에서 그 파란의 삶을 마쳤는데 그 해가 1938년이다. 백암 박은식은 황해도 황주태생의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본래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이 신문이 정간된 뒤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겨 정력적인 항일언론 활동에 나섰다. ○신민회에도 참여 신민회가 결성되자 그 원로회원으로서 교육 및 출판부문을 담당하기도 한 그는 신보를 통해 주로 애국계몽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신교육구국사상·사회관습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 애국계몽사상을 설파,국권회복운동을 적극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한일합방뒤에는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에 나서는 한편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많은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박은식의 뒤를 이어 신보의 주필로 활동한 단재 신채호는 충남 대덕출생으로 명성 높은 사가였다.역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다가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됐다.민중계몽 및 정부편달 중심의 시론과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그는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3대충노」「이십세기 신국민」「서호문답」「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등의 논설과 「독사신론」「수군 제일위인 이순신전」등 역사관계 논문및 시론등을 연재,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신민회조직에 참여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가담했다.한마디로 그는 신보의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주역의 한사람으로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구축하고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사람이었다. 이밖에 대한매일신보를 이끌어온 사람들로는 임기정 이교담 옥관빈 강문수등이 있다.이들은 주로 업무분야 종사자들로 신보의 조직을 통해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2)

    ◎매신의 구국활동/국채보상운동 주도… 항일 선봉에/「황무지 개간」반대·의병항거 대서특필/일제탄압불복… 식민정책 부당성 고발/박은식·신채호 등 반일언론인 포진… 절대적 국민신뢰 확보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은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독점적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이다.바로 이러한 격동기에 발행되어 항일구국의 최선봉에 섰던 가장 대표적인 신문이 있다면 대한매일신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문의 소유자이자 발행인은 영국인 배설(ErnestThomasBethell)이었으나 신문발간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양기탁이었다.배설은 노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왔던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의 통신원이었으며 양기탁은 당대의 언론을 이끌던 논객이자 우국지사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민족의 대변지 대한매일신보는 이들의 혈기와 의기가 합쳐져 1904년 7월18일에 창간됐다.영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와 함께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당초 한호 6면으로 이중 2면은 한글 전용이었고 4면은 영문판으로 할애했다. ○장지연사건 실어 파문 이 무렵은 일본의 한국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반대하는 국민운동이 전국에서 분출되던 때이기도 했다.당시 한국과 일본의 신문들은 제각기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비판하거나 옹호하고 나섰다.이런 시기에 더구나 민족진영이 가세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가 이를 좌시할리 만무였다.논조는 당연히 반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황무지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그 부당성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첫 포문을 열었다.이를 시발로 「장삼씨의 문뎨 □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일본 시사신보의 개간권 옹호론을 예리한 필치로 찔러버렸다. 창간초부터 반일논조의 중심에 서서 항일민족운동을 고취하는데 앞장에 나선 것이다.그러나 이 신문은 창간시 미비했던 시설을 갖추느라 5개월의 휴면기간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다시 속간되기는 이듬해 8월11일이었다.속간하면서 한글전용을 국한문 혼용판으로 바꾸는 한편 영문판을 분리해 2종을 발행했다. 새모습으로 재출발한 대한매일신보의 반일언론은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고 이를 눈의 가시로 여긴 일본은 외교적 탄압으로 배설추방공작을 폈다.일본인들이 발간하던 한성신보·대동신보·대한일보등이 대한매일신보를 비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반일논조는 더욱 뜨거워져 황성신문이 정간당한 사실과 장지연의 구속을 대서특필하는등 일관된 자세를 고수했다.이러한 항일논조에 대해 고종도 은밀히 격려,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906년 2월10일 고종은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로 신문급 통신에 전권자로 특히 위임할 사」라는 친필 특허장을 내리는 한편 매월 1천원을 신문사 운영비로 보조해준 것이다. 용기백배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또다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런던 트리뷴지에 실렸던 고종의 밀서사진을 전재,밀서가 근거없다고 주장해온 일본의 허위를 폭로(1907년 1월16일자)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그 직후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어 구국운동의 새지평을 연 신문이기도 했다.이 운동은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빌린 돈 1천3백만원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거두어 갚자는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의 취지는 많은 국채를 나라의 재정으로는 상환할 길이 없으니 장차 한국의 강토가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국민의 성금으로 이를 갚자는 것이었다. 그 취지서를 크게 실어 전국적인 호응을 얻게 한것이다.고종도 호응하여 담배를 끊었다는 보도를 낸뒤부터는 여기에 자극받은 지도급 인사는 물론 부녀자들까지 참여,반지와 패물을 다투어 성금으로 내는등 적극적인 성원을 이끌어 냈다. 당초 이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체를 가지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각처에서 거두는 성금을 통합된 조직으로 일원화해 적립해야한다는 논의가 일게 됐고 그결과 결성된 것이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였다.1907년 3월에 설립된 이 총합소는 임시사무소를 신보사에 두기로 했으며 양기탁이 재무를 맡아 대한매일신보사는 이 운동의 실질적인 본부가 되었다. 이 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의 일대 각성이었으며 그 역량의 과시였다.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면서 사세를 크게 신장하게된 대한매일신보는 이해 5월23일 한글전용판을 다시 발간,기존의 국한문판·영문판과 함께 3종의 신문을 발행하게 되어 미상불 영향력있는 최대의 민족지로 성장했다. 이때의 발행부수는 3종을 합쳐 1만부를 넘어섰다.이는 한국언론사상 기록적인 최고의 부수였으며 이해 하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더욱 늘어나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 전체의 발행부수를 앞지를 정도였다. 사세가 이처럼 커지면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의 대한정책을 더욱 날카롭게 비판,헤이그 밀사사건과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고종이 퇴위한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이어서 고종퇴위 직후의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의 항거운동을 낱낱이 보도했다.이같은 보도는 전국의 많은 의병들에게 무장항쟁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고종퇴위·군해산 보도 일본의 입장에서 대한매일신보의 이러한 끈질긴 항일언론이야말로 한반도 식민지화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특히 이 신문의 필진이 지닌 칼날같으면서도 설득력 짙은 필봉은 일본인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갖는 국민적 신뢰도는 거의 절대적이었으며 인기 또한 높아 한부의 신문을 여러사람이 돌려가며 읽을만큼 사회적 영향력은 막강했다. 『한국내 신문이 가진 권력이란 비상한 것이라 이등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인을 감동케하는 힘이 매우 크다.그중에도 지금 한국에서 발간하는 일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확증이 있는 일본의 제반 악정을 반대하여 한인을 선동함이 연일 부절하니 이에 관하여는 통감이 책임을 질밖에 없다』 이렇게 개탄한 초대 통감 이등박문의 말을 재음미하면 대한매일신보 지면 한장한장마다에는 모두가 민족의 독립함성이 응고 되었음을 익히 알수 있다.일본의 강압속에서도 대한매일신보가 항일논조와 구국운동의 구심점이 될수 있었던데는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린 탓도 물론 있다.그러나 신문제작을 총괄했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등 민족사상에 투철했던 항일언론투사들이이 신문을 그렇게 이끌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89년:1)

    ◎여명기의 민족지/“항일구국” 염원안고 대한매일신보 탄생/국운 기울어 암울했던 1904년 창간/주권수호 앞장서며 숱한 고난/해방직후 서울신문으로 속간/초대사장에 오세창 취임… 권동진·홍명희 고문에 영입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그 시대는 고난으로 점철되었다.1904년 국운이 기울어가는 암담한 나라 운명속에서 한가닥 빛으로 창강된 대한매일신보.그 항일구국지가 1945년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기까지는 파란만장한 우리 근·현대사를 함께 살았다.당시 민족의 생존이 그렇듯 일제의 모질고 간교한 탄압에 쓰러진 대한매일신보의 맥락은 서울신문이 잇고있다.일제 강점기 사이에 변화도 없지 않았으나 서울신문의 뿌리는 분명히 대한매일신보에 두었다.그 위대한 항일구국지 창간 1세기를 불과 1년 앞둔 오늘,그 역사를 조명하여 서울신문의 연륜을 다시 헤아리고자 한다. 「대한매일신보」는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항일언론의 최선봉에서 민족주권 수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가히 전설적인 신문이었다.근대 언론사에서 「다시 없는민족의 대변기관」으로 평가 받는 이 신문은 나라 안팎이 매우 복잡한 시기에 발행됐다.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일본이 한국의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아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던 때이기도 했다.그리고 국내정세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반대하는 민족운동이 불길처럼 치솟던 시기였다. 특히 나라안에서는 일본의 한국 황무지 개간권을 막으려는 민중운동과 함께 의병 무장투쟁,국채보상운동,애국계몽운동등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창간되어 항일구국의 가시밭길을 걸었다.창간한 사람은 영국인 배설(Ernest Thomas Bethell·1702∼1909년)이다. 러·일전쟁때 취재차 한국에 왔던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 특별통신원인 그가 한글전용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날짜는 89년전인 1904년7월18일로 돼있다.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도 동시에 창간했다. 창간에 참여한 인사들의 면모를 보아도 쟁쟁하다.당대의 언론을 주도했던 논객이자 우국지사였던 양기탁을 비롯,박은식·신채호·옥관빈등이 그 주역들. 나중에는 안창호·이갑등 구국운동조직인 서북학회의 인사들도 뛰어들었다. 창간호(타블로이드판)는 한호의 지면이 6면으로 4면은 영문,2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다.그러나 이듬해 8월에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를 분리,2종을 발행했다.1907년5월에는 한글전용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3종의 신문을 한꺼번에 펴 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다. 황실(고종)의 은밀한 재정적 뒷받침과 민족진영의 도움을 받았다.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대한매일신보의 논조는 처음부터 반일구국일수밖에 없었다.그 첫 지탄공격은 황무지 개간권 요구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시작됐다.이를 시발로 황성신문의 「시일야방성대곡」전재,샌프란시스코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사건보도,영국의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밀서사진 전재등 기사와 논설로 항일언론의 횃불을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 신문의 강력한 반일논조야말로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저해요인이었다. 일본은 이에 대응,「경성일보」(일어)「Seoul Press」(영어)등 통감부의 기관지를 직접 발행하여 언론대응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또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외교적 압력과 사법적인 탄압을 가했다.외교적 압력은 영국측에 대해 배설의 추방요구로,사법적 탄압은 통감부의 신문압수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항일언론 자세는 좀체 꺾이지 않아 국한문판 24차례,한글판 21차례의 압수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지속됐다.민족진영의 언론보루로서 이처럼 항일언론을 펼칠수 있었던 것은 이 신문이 영국인 소유여서 치외법권을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신문에 몸담고 있던 항일언론투사들의 민족사상과 구국정신이 그같은 논조를 주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매일신보」가 남긴 족적중 또한 특기할만한 것은 이 신문이 주동이 되어 벌인 국채보상운동이었다.이는 을사보호조약이후 일본으로부터 얻은 나라의 빚 1천3백만원을 국민의 성금으로 갚아 일본의예속에서 벗어나려는 일대 구국운동이라 할 수 있다. ○우국지사 대거 참여 대한매일신보는 이 운동의 중심기관이 되던 시기에 사세를 크게 신장,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어섰다(1907년 9월3일 기준 국한문 8천,한글3천부).이같은 발행부수는 그때까지 한국언론사상 최고의 기록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경한 논조를 터뜨리던 이 신문은 일본 통감부의 집요한 탄압끝에 배설의 상해옥살이와 양기탁의 구속으로 물이 꺾이기 시작했다.그후 배설이 숨지면서 이 신문은 더욱 기울어졌으며 영국인 만성(Alfred Marnham)이 사장직을 인수받았다.그러나 영·일간의 외교문제를 꺼리던 주한 영국총영사 보나르(Bonar)와 통감부의 회유및 압력을 받아 1910년 5월21일 결국 통감부에 팔리고 만다.국권수호의 상징적 존재였던 「대한매일신보」가 마침내 비극적인 종언을 고한것이다.그때의 지령은 제1461호(국한문판)였다. 그리하여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병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부터 제호가운데 국가를 상징했던 두글자 「대한」을 빼앗겨 버린다.「대한」이 없어진 「매일신보」는 결국 통감부의 기관지로 전락하는 것이다.그러면서도 「매일신보」는 그러나 「대한매일신보」의 국한문판 종간호인 제1461호(1910년 8월28일)의 지령을 계승,제1462호부터 국한문판을 발간했다.(한글판은 제939호부터) 이 날짜의 사설제목은 「동화의 주의」로 나온다.제국주의 36년간의 일본 전위역할을 이렇게 상징하고 일제 선전기관으로 얼굴을 바꾼 매일신보는 이틀만인 9월1일 대한제국의 기관지 성격이던 한양신문(전대한신문)까지 합병한다.국한문판과 한글판의 두가지 신문을 발행하는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었지만 한국인이 만드는 한국의 소리는 담기지 않았다.이는 「일선융화와 세도인심의 감화유도」를 내건 일제의 어용언론활동의 전주곡이었다. 경영의 측면에서 경성일보사에 흡수통합,경일편집국의 한부서로서 철저하게 총독부기관지 역할을 수행한 매신은 그후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무단정치가 표면상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1920년 독립된 편집국으로 확대 승격됐다.그리고 1929년에는 한국인 편집국장이 임명된데 이어 1930년 한국인 부사장이 처음 기용되어 다소 편집제작의 재량권이 이루어지는듯 했다. 그러나 매신은 철저하게 일제의 입장에서 만들어져 편집방향은 「내선일체」를 고수했다.이러한 목적을 위해 총독정치의 선전과 홍보를 위주로 했으나 민족민간지들의 논조를 반박하거나 민족진영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의 비호속에 이같은 논조로 일관하던 매신은 기구를 확대,경성일보사에서 분리하게 됐다.1938년 4월16일 독립된 언론기관으로서 제호를 매일 「신」보로 고쳐 새로 출발한 것이다. 매신이 경일과 맞붙은 지금의 프레스센터 자리에 4층 콘크리트 사옥을 짓고 들어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하지만 경일은 매신의 주식 45%를 소유한 대주주로 남았고 여기에 총독부 소유의 주를 포함한다면 매신의 경일예속은 이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셈이었다.매신의 일제옹호논조 또한 해방직전까지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는 패망했다.1945년 8월15일 마침내 조국광복을 맞았다.매신은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해방조선의 대변기관」으로서의「서울신문」으로 거듭나기위해 대대적인 개편수술을 받게됐다.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청이 그해 10월2일 매신을 접수,매신 한인주주총회를 열어 새중역진을 구성토록 종용했다.이에따라 10월25일 주총이 열려 「서울신문」이라는 새로운 제호와 오세창을 사장으로하는 간부진용이 결정됐다.이 무렵은 사장 이성근이 지난날의 과오를 전사원에게 사과하고 자퇴한뒤 사원자치위원회에 의해 신문이 발행되던 때였다. 경영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을 만들어오던 6백명의 자치위는 그러나 주총의 간부진용결정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주총결정은 자치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라는게 그 표면적 이유였으나 실상은 간부진용에 우익인사가 너무 많은데 불만을 품은 때문이었다. 그동안 비교적 관망상태에 있던 미군정당국은 11월10일 재산조사를 이유로 매신에 정간명령을 내렸다.매신이 정간되던날 자치위는 「3천만 민중의 정당한 공기」로서 신문이 새롭게 출현해야 한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 한뒤 일단 한발 물러섰고 이를 계기로 개편실무진과 자취위 사이에 얽혔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했다. ○한때 총독부 기관지로 미군정당국으로부터 매신개편의 대업을 새로 위임받은 이관구와 하경덕은 재원확보문제와 함께 내외에서 모두 수긍할수 있는 권위있는 인사들로 경영·편집진을 구성하는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했다. 초대사장에 위창 오세창이 추대됐다.근대 신문계의 선구자이자 지조높은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지닌 사회적·정치적 덕망은 새롭게 등장하는 서울신문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었다.위창과 함께 역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권동진과 당시 문단의 원로격인 홍명희가 고문에 영입됐다. 서울신문 탄생의 산파역을 맡은 저명교육자 하경덕이 부사장에,그리고 사려 깊은 논조를 감당할 주필에는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던 이관구가 선임됐다. 이러한 일사천리의 준비작업은 21일 5층 옥상에서 가진 오세창사장의 취임식으로 그 결실을 보게됐다.해방의 감격과 함께 독립한 이 민족의 진실된 언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서울신문이 마침내 그 첫 지면을 이 땅에 선보인 것이다. 이날이 1945년11월22일이었는데 신문은 11월23일자로 발행됐다. 이때의 서울신문 지령은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매일신보를 그대로 계승,제13738호를 기록하기에 이른다.그 고난의 역사를 마감하고 또 다른 시련의 역사를 향해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었다. □연보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 ▲1904년 7월18일 창간 ▲편집겸 발행인 배설,총무 양기탁취임 ▲1910년 5월21일 통감부가 매수 ▲1910년 8월28일 국한문판 1461호,한글판 938호로 종간 ◇매일신보(1910·8·30∼1938·4·28) ▲경성일보에 흡수 통합,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대한매신을 계승) ▲경성일보사장 길야태좌위문 취임(매일신보사장 겸임) ▲1912년 3월1일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한글전용으로 합간 ▲1938년 4월28일 매신의 제호로 최종발행(지령11 012호) ◇매일신보(1938·4·29∼1945·11·10) ▲경일에서 분리독립,제호를 매일신보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취임 ▲1945년 11월10일미군정에 의해 정간 ◇서울신문(1945·11·23∼현재) ▲1945년 11월23일 매신을 서울신문으로 개제발행(지령은 매신을 계승) ▲초대사장 오세창,고문 권동진 홍명희,부사장 하경덕,전무 김동준,주필 이관구취임
  • 감식의 날 82돌 맞아 알아본 실태

    ◎잉크없이 지문 채취… 15분내 식별/금속·섬유·가죽엔 레이저 쏴 검출/유관순 등 4천2백만명분 보관 범죄수사에서 감식기법을 활용하기 시작한지 11일로 82돌을 맞는다. 우리나라 감식제도는 1910년 조선총독부 법무국 행형과에 지문계를 설치하고 형무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지문을 채취,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 효시이다.그해 11월11일 「투구상인율」위반(폭행치사)사건으로 2년 6개월동안 복역하다 출소한 전남 고창군 천봉면 사람 강갑득씨의 지문을 처음으로 채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부수립후에는 유관순열사와 이봉창의사,도산 안창호선생등 독립운동가와 순국열사의 지문과 사진카드등 2만5천여점의 자료가 보관돼 정부의 독립유공자기록정리에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는 국사편찬위원회로 넘겨져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64년 국제감식협회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11월11일을 감식의 날로 정해 감식유공자들을 표창하는 행사를 매년 실시하고 있다. 오랜 감식역사와 더불어 감식기법도 발전을 거듭해 각종 첨단과학장비들이 감식에 활용되고 있다. 현재 잉크를 묻히지 않고 지문을 자동채취하는 첨단지문채취기 4대와 가스를 이용해 범행현장에서 지문을 재생하는 지문현출기 3백4대를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또 지문형태를 전산입력해 기계로 지문을 분류,확인할 수 있는 지문자동분류검색시스템 30대를 설치,육안으로 30일이 걸리던 식별작업이 2∼15분대로 단축됐다. 어디서나 지문을 송·수신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지문전송기 30대와 금속,섬유,가죽 등에 레이저광선을 쏴 지문을 검출하는 획기적 방법도 도입돼 있으며 발자국채취기와 범행현장을 재생하는 입체사진기,몽타지합성기등 경찰이 보유한 첨단감식장비는 13종 5천8백38점에 이른다. 이밖에도 전국 어디로나 용의자의 모습을 전송해 목격자가 확인하거나 수사에 활용할 수 있는 영상전산시스템 등의 설치예산 33억원이 확보됐고 앞으로도 7개년계획으로 2백20억원을 들여 14종 6백16종의 첨단과학장비도 들여올 계획이다. 현재 경찰청 감식과에는 전과자지문등 4천2백여만건의 감식자료가 있으며 이를 이용해 올해에는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한 범법자 9백6명을 색출하고 살인 44건,강도·강간 68건등 2백83건의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내년 국채 14조 발행/각의의결/올해보다 3조원 늘려

    ◎양곡기금은 1조4천억 증액 내년의 국채발행 한도가 올해의 10조5천6백50억원보다 3조5천1백59억원(33·3%)이 늘어난 14조8백9억원으로 정해졌다.국무회의는 15일 양곡기금증권등 6개 채권의 발행동의안을 이같이 의결,국회에 동의를 요청하기로 했다. 국채발행 한도가 크게 늘어난 것은 통화관리를 위해 외국환평형기금채권과 추곡수매를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양곡기금증권의 발행한도를 각각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재무부 관계자는 그러나 내년에 상환기일이 되는 차환용을 제외한 순증 기준으로는 93년말 국채발행 잔액은 25조4천3백97억원으로 금년말 예상잔액 21조6천8백37억원에 비해 17·2%가 늘어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채별 한도를 보면 양곡기금증권은 금년보다 1조4천4백억원(39·6%)이 늘어난 5조8백억원,시중의 과잉유동성을 흡수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재정증권은 2조5천억원으로 금년과 같은 수준이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은 금년보다 2조원(2백%)이 늘어난 3조원이 책정됐는데 이는 모두 차환용이다.또 농어촌발전채권은 1천5백59억원(35·4%)이 증가한 5천9백59억원,농지채권은 50억원 감소한 2천1백50억원으로 각각 책정됐다. 국민주택채권의 경우 1종이 1조6천억원,2종이 8천억원으로 모두 금년과 같은 수준이며 국민주택기금채권은 3백억원이 늘어난 1천5백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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