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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 100주년- 학술대회·지면분석]

    서울신문이 국내 현존 언론 중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독립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에도 바른 보도로 공공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선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다.대한매일신보에서 시작되는 민족언론의 뿌리가 서울신문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으며,이 시대에 대한매일신보가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한 학술회의가 지난 7일 열렸다.서울신문사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내용을 주제별로 정리한다. ●정리 논설위원실 1. 창간의 역사적 의의 /정진석 외대 명예교수 대한매일신보 창간 이래 오늘날까지 100년을 이어온 발자취는 한국 현대사의 축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명암과 굴절이 많았다.이 신문이 한국의 언론사와 더불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이하고 중요하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 열강의 침탈에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창간돼 1904년부터 6년 동안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면서 강력한 항일언론을 펼쳤다.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후에는 매일신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됐다.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재출발했다가 한때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고,이제 또다시 서울신문이 됐다.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굴절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비극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가 항일 신문으로 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자 소유주였던 배설이 영국인이었고,그가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발행인 배설은 민간인 신분이었으나 영국인이었기에 대한제국의 법률로는 처벌할 수 없었으며,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도 그를 추방하거나 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수 없었다.대한매일신보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됐다. 한국의 민족진영은 이 신문을 열렬히 지지하고 성원했다.반면에 일본은 이 항일신문을 침략정책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여겼다.영국의 입장에서는 영국인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치외법권을 손상받지 않도록 하려 했다. 영국과 일본이 처음에는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 또는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결국은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하는 재판에 회부하게 됐다.대한매일신보가 발행되던 한말에 있었던 재판은 다섯 차례나 됐고,한국·영국·일본의 법관이 이를 다루었으며,재판 장소도 서울과 상하이까지 걸치게 됐다.재판은 한일병합 후까지 계속됐다. 대한매일신보사는 국채보상운동의 총합소가 되기도 했고,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은 논설로써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으로는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해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따라서 이 신문은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시대상을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대한매일신보는 한말에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신문의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국한문·한글·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처음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자주개화운동의 근본으로서 한글 사용을 주장했다.또한 지면에 실린 항일 시가(詩歌) 등은 국문학상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을 고종 또는 민족진영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나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경영한 주체는 배설이라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고종이나 민족진영의 자금지원이 있었지만,그것이 신문발간의 계기가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서울신문을 한말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과거의 역사로부터 단절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관(史觀)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그것은 언론의 역사를 민족사관(民族史觀)에서 파악하는가,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증사관(實證史觀)의 입장인가 하는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광복 후 1945년 11월23일 제호가 서울신문으로 바뀔 때에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매일신보까지의 지령을 이어받아 13738호부터 시작했다.제호는 바뀌었지만 신문의 역사는 계승한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 3월23일부터는 매일신보의 역사를 단절하고 지령을 다시 조정했다. 1998년 11월11일부터는 단절시켰던 과거 역사를 복원한다는 의미에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고 지령도 새롭게 계산했다.대한매일신보를 지령에 넣되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부분은 지령에서 뺌으로써 매일신보를 건너뛰고 역사를 계승했음을 밝혔다.2004년 1월1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다시 환원했다.이 날짜 지령은 20095호로 역시 한말 대한매일신보 지령을 합친 것이다.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역사를 이은 것이다. 2. 참여인물·언론사상/박정규 한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 발간과 운영에 참여한 인물 중 배설과 양기탁에 대해서는 완벽할 정도로 연구가 이뤄져 있다.그러나 가장 중요한 논객이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재직 기간 중 활동,지사(支社)설치 상황과 종사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또,기명이 안된 사설의 집필자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배설은 영문 논설이나 기사 외에 국한문판 신보에 직접 집필한 형식의 글들을 발표했다.그러나 이는 배설이 한국어로 쓴 기사라기보다 한국인 기자들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가진 배설의 이름을 빌려 사회문제 등에 대해 맘껏 필봉을 휘둘렀다고 보아야 한다. 박은식은 성리학자였던 만큼 전통 한문체의 글을 썼다.1907년 박은식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신채호는 가장 영향력이 컸던 논객이다.신채호는 애국사상이 담긴 특유의 선동적 문장을 통해 국민들의 국권회복 정신을 북돋우는 등 독자를 감동시켰다.양기탁의 글로 알려진 ‘학계(學界)의 화(花)’ 등 2편의 논설은 집필시점과 문체로 보아 신채호가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 경영 외에 국채보상운동과 비밀결사인 신민회 활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해 논설집필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신보는 국한문판 발행을 본격화하면서 1905년 평양,선천,장련 등 관서재방 세 곳에 최초의 지사를 설치하게 된다.장련의 지사는 백범 김구가 운영했다.1908년 평양 태극서관 지사장을 맡은 안태국은 교사이자 이 지역 신민회의 중심적 인물이었다.신보의 전국 지사 중 절반이 평안도에 집중 돼 있었던 것은 총무 양기탁이 이 지역 출신이었고 안태국과 같은 지사원의 활약에 힘입었기 때문이다.1910년 6월 전국 지사 수는 59개소,지사원은 250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신민회의 지방거점,국권회복운동가들로 추정할 수 있다.회계 임치정은 양기탁이 가장 신임한 동지였다.이완용 암살미수사건,신민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신채호와도 친밀한 관계였다. 3. 국채보상운동 주도/이연 선문대 교수 차관을 이유로 조선민중을 식민지의 올가미에 옭아 매려는 일제의 획책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이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이 운동은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현 수창초등학교 뒤 대성사 자리)에서 시작됐다.“우리나라의 국채가 현재 1300만원인데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라,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주어야 할 형편이다.우리 2000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모은다면,3개월 만에 국채를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강점하의 물산장려운동이나 해방 후 국산품 애용운동,1998년 IMF 이후의 금모으기 운동처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애국운동으로,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운동이었다.최초 발의는 상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나,한 푼 두 푼 성금을 모으는 과정에서 농민들이나 봇짐장수,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적으로 확산됐다. 이 운동을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킨 데는 무엇보다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 게 동력이 됐다.이 신문들은 기사나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의의와 당위성을 호소하면서 날마다 의연자의 명단 및 납부금액을 게재해 온 국민들의 동참을 역설했다.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나의 백 마디 말보다 신문의 한마디가 조선인을 감동케 하는 힘이 크다.”고 개탄했다고 대한매일신보가 보도했다. 조선통감부는 국채보상운동을 배일운동으로 간주하면서 갖은 탄압과 모략을 획책했다.일제는 을사 5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용구 등 친일파를 동원해 반대하는 책동을 일으키게 했다.그러나 대한매일신보 배설 사장과 양기탁 총무는 이러한 탄압과 이간책동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계속 전개했다.일제는 결국 이들의 언론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배설의 국외추방과 양기탁을 탄압해 제거하기에 이른다. 4.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논설/김덕모 호남대 교수 대한매일신보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평가된다. 제1기는 창간 때부터 1905년 3월10일 일시 휴간 때까지의 시기이다.6면중 4면은 ‘The Korea Daily News’라는 제호로 영문면을 만들고,나머지 2면은 대한매일신보라는 제호로 국문면을 만들었다. 제2기는 대한매일신보를 속간하기 시작한 1905년 8월11일부터 1907년 3월말까지의 단계다.이 시기에는 ‘을사5조약’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제3기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민회의 기관지로 전환되기 시작한 1907년 4월 초부터 대한매일신보사가 이장훈에게 팔려 양기탁 등 신민회 간부들이 대한매일신보사를 떠난 1910년 6월13일까지의 시기다. 제4기는 배설에 이어 사장직을 승계한 만함이 일제의 공작에 말려들어 회사 일체를 사원 이장훈에게 매도하고 귀국해버린 1910년 6월14일부터 일제가 한국을 완전식민지로 병합하여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켜버린 1910년 8월29일까지의 2개월 반 간의 기간이다. 제1기에는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여 국가의 안녕질서에 대한 모든 주제에 대해 공평한 변론을 전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제2기는 한국인의 문명지식을 계몽하고 세계 각국에 대한 견문을 공유하기 위한 개화의 목적에 역점이 두어졌다. 제3기 이후는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에 초점을 맞춰 항일구국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매일신보가 개화기 구국계몽운동의 선봉이 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에 광무신문지법에 의한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어왔다. 그러나 신용하 교수 등의 연구는 이러한 외적요인에 더하여 대한매일신보가 구국운동 단체인 신민회의 기관지가 된 이후 더욱 과감하게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논설 분석 결과로도 입증된다. 이 시기 논설은 민족의 자립정신,교육과 나라정신,산업진흥,친일언론과 단체에 대한 비판,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식민 지배를 감추기 위한 기만책임을 통렬히 비판하고,국채보상운동,헤이그 특사 파견,고종황제 퇴위,한일병합조약,동양척식회사 설립 등 역사적 사건을 맞을 때마다 과감하고 열렬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제 오늘의 신문들은 이러한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다. 5.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광고/안종묵 외대 연구원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게재했다.사기업인 대한매일신보는 신문의 안정적인 발행을 위해 광고가 중요했다. 창간 초기의 광고료는 1인치에 50전이었고 한달에 5원이었다.발행부수가 다른 신문의 3배 이상이어서 광고의 효과면에서 대단히 컸다.한글과 영문이 혼용된 6면이 발행된 시기에는 운수광고(16%),은행(14%),잡화점(9%) 등이 주요 광고주였다.광고주의 국적은 한국이 13%,외국이 43%,미상이 44%다. 1907년 5월23일부터 발행된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의 광고는 그해 하루 평균 5.26개이던 것이 1910년에는 10.25개로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 10대 광고업종은 약국,서적,사고광고 등이었다.약국 가운데 이응선의 종로 화평당약방과 이경봉의 남대문 제생당약방이 최대 광고주였다. 서적광고는 전체의 16.5%를 차지했다.애국계몽운동가인 이승훈이 운영하던 태극서관이라는 서점 광고가 집중적으로 등장했다.‘국한문신옥편’이라는 실용적인 서적부터 ‘서사건국지’‘애국부인전’ 등 국권회복을 자극하는 계몽적 성격의 서적들이 광고됐다. 1908년과 1909년에는 사고(社告)광고가 많이 등장하는데 명함 인쇄와 국채보상운동과 관련된 사고였다.국채보상운동 취지를 제일먼저 보도한 신문은 대한매일신보였다.흥미로운 것은 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촉구하고 있을 때 일제 담배광고가 많이 광고되었던 점이다.이는 광고가 국채보상운동과는 큰 관계없이 운영되었음을 말해준다. 6.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독자 인식/김영희 서울대 강사 대한매일신보 독자들이 투고한 기서(寄書)에서 신문에 대해 가장 자주 요구한 것은 춘추필법으로 공정하게 계도하는 엄한 스승으로서의 언론의 모습이었다.다음으로 많이 주문한 것은 다양한 분야의 광범한 지식을 제공하는 문명진보 수단으로서의 역할이었다.이 두 요인 또는 인식은 지금까지 개화기 신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에서 설명된 것으로,이 시기 신문발행에 참여한 발행 주체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 일반 신문 독자들의 인식으로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로 자주 언급된 것으로 신문이 독립자유의 감발심(感發沈)을 격동케 하고,새로운 자각을 유발시킨다는 인식이었다.이러한 인식은 신문의 춘추필법과 지식 제공으로 자극을 받아 생성되는 기쁨,감격,분노,안타까움,흐뭇함 등의 정서적 반응이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읽은 독자들이 남긴 다양한 글에서도 당시 대한매일신보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황현은 대한매일신보를 설명하면서 “각 신문사에서도 의병들을 폭도나 비류(匪類)로 칭하였지만 오직 매일신보는 의병으로 칭하며,그 논설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본인의 악행을 게재하여 들으면 들은 대로 모두 폭로하였다.그러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 신문을 구독하여 한때 품귀 상태에까지 이르렀고,1년도 못되어 매일 간행되는 신문이 7000∼8000장이나 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읽었던 김윤식은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통쾌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이러한 논의들은 신문의 공공성을 지키면서 보도와 논평 기능을 통해 환경을 감시하고,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여 국민을 개명 진보로 이끌고자 한 대한매일신보의 역할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그러한 대한매일신보의 모습을 신문의 전형으로 인식했음을 알려준다. 7. 대한매일신보 지면분석- 잡보(사회면)/채백 부산대 교수 오늘날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하는 것이 ‘잡보’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 중에서는 사실보도가 전체의 76.1%를 차지했다.반면 의견이 개입된 기사,즉 사실+해설과 해설기사를 합치면 전체의 14.2%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결과를 독립신문의 분석결과와 비교해 보면 의견기사가 줄어들고 사실보도가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정부 관련 정보였다.전체의 24.5%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는 사회문제,유명인사 동정,관의 비리와 폐해 순서로 나타났다.사회문제 기사에서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활발했던 의병 관련 기사나 교육 관련 기사가 포함됐다. 독립신문에서는 해외토픽류의 흥미 위주의 기사가 있었지만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런 기사를 찾아볼 수 없다.반면 일식이나 태풍,자살 기사 등이 ‘사고와 흥미거리’ 기사에 포함됐다. 잡보란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관련지역을 보면 한성에 대한 집중도가 매우 높아 전체의 59.6%에 이른다.그밖의 지역은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이고 있다.외국에 대해서도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특히 일본이 가장 많았다. 잡보기사의 주인공도 다양했다.잡보 기사의 주인공으로는 지식인과 단체가 26.3%로 가장 많았고,그 다음으로 왕실과 정부가 22.3%를 차지했고,일반인이 15.6%로 그 뒤를 이었다. 잡보기사의 보도태도를 긍정,중립,비판 세가지로 분류해보면 긍적적이 6.8%,중립적이 85.8%,비판적이 7.4%의 분포를 보였다.대한매일신보의 잡보에 나타난 주요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기사의 건수가 독립신문에 비해 대폭 늘었다는 점이다. 이는 지면의 판형이 커지고 단수가 늘어나는 등의 외형적 요인 외에도 신문이 정착기에 들어가면서 취재여건이 다소나마 좋아졌던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다음으로는 사실보도와 중립적 보도태도가 늘어났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이는 신문이 지향해야 할 이념으로서 중립성과 객관성을 표방하는 객관저널리즘에 좀 더 접근한 모습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사실보도 위주로 가면서 단위 기사의 분량도 점차 짧아지는 경향을 보여 주었다. 세번째로는 기사의 관련 지역이나 주인공,정보원 등에서 특정의 편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이다.지역면에서는 한성,주인공이나 정보원 측면에서는 정부나 관리에 대한 의존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겠습니다

    서울신문이 2004년 7월18일로 창간 100주년을 맞습니다.창간 100주년을 맞는 신문은 한국언론 사상 서울신문이 처음입니다.우리는 이 기쁨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 지난 100년을 거울삼아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 가고자 합니다. 서울신문은 1904년 7월18일 항일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민족정론의 선봉에 선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과 지령을 승계하고 있습니다.배설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김구 등 선각자들이 신문 창간과 제작,보급에 참여한 대한매일신보는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같았던 대한제국 말기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한 구국언론이었습니다.최초의 시민운동이라 할 국채보상운동과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의 실질적인 본부 역할을 하면서 항일운동을 확산시키고 민족의 입장을 대변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로 대한매일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했다가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신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매일신보 사원들이 자치위원회를 구성해 출범한 서울신문은 창간호가 아닌 혁신속간호를 냅니다.지령도 1호가 아닌 제13738호였습니다.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을 이은 것이지만 일제의 유산인 매일신보를 청산하고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서울신문에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두분(오세창 사장,권동진 고문)과 한국역사 소설의 기념비적 걸작인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고문),어문학계의 권위자였던 그 아들 홍기문(편집국장) 등이 참여했습니다.좌우 이념대결이 첨예했던 해방공간에서 서울신문은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잡으며 공정한 보도로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 수립에 기여했습니다. 서울신문은 항상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국내 최초로 조석간제를 실시했는가 하면 1960년대 순 한글신문을 만드는 등 한글전용과 신문말 다듬기에 앞장섰고 1980년대 최초로 컴퓨터 조판 시스템을 도입해 뉴미디어 시대의 첨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서울신문의 지난 100년은 영광과 함께 오욕의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대한매일신보가 일제 치하 매일신보로 전락했듯이 서울신문의 혁신속간 정신은 독재정권 아래서 퇴색했습니다.그래서 ‘권력의 나팔수’라는 따가운 비판을 받기도 했고 4·19혁명 때 성난 시위대에 의해 사옥이 불타는 참담한 비극도 겪었습니다. 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바탕으로 1998년 서울신문은 대한매일로 이름을 바꾸고 2002년 사원들이 제1대 주주인 민영화를 이루어 냈습니다.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공정보도를 위한 각고의 노력 끝에 올해 초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하고 창간 100주년을 맞이합니다.우리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영욕의 역사를 겸허히 되돌아 보면서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100년을 준비해 나가겠습니다.100년은 한 세기를 접고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관행적 사고로는 따라잡기 힘든 질적 대전환의 시기에 놓여있습니다.서울신문은 시대정신을 이끄는 신문으로 민족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 하겠습니다.국민과 국익을 비추는 세상의 등불이 되겠습니다. 서울신문의 사시는 “바른 보도로 미래를 밝힌다. 공공 이익과 민족 화합에 앞장선다”입니다.따라서 서울신문은 무엇보다 남북 통일을 앞당기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민족 화합과 민족 공동체 회복에 더욱 앞장서면서 통일지향의 중도적 진보 노선을 유지해 가겠습니다.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한 보도로 정치개혁을 이끌고 지역·계층·세대간 갈등 해소는 물론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신장에도 힘을 쏟겠습니다.자유시장 경제를 바탕으로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하는 경제구조가 정착되도록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민생을 먼저 생각하는 신문이 될 것입니다. 서울신문은 항상 독자의 편에서,진실의 편에서 새로운 100년을 힘차게 열어가겠습니다. ˝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6)항일 논객 장도빈 주필

    장도빈 선생은 망명지 러시아 연해주에서 천년 가까이 잠자고 있던 발해(699∼926)를 처음으로 찾아낸 역사학자이다. 보성전문 법과에 진학한 1908년 약관의 나이에 박은식 선생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 논설기자로 발탁됐고 와병중이던 신채호 주필을 대신해 논설을 집필했다.1909년에는 단재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쓸 정도였다.그의 글로 알려진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일인하지(日人何知)’ 등은 매서운 항일 필봉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이후 신보가 일제에 의해 문을 닫기 전까지 3년 동안 단재와 ‘친동기 이상’의 친분을 쌓았고 그의 영향으로 역사에 눈을 떴다.양기탁 선생으로부터도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밀리에 신민회에 가입했고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신한촌 여관방에서 단재와 동고동락 데라우치 총독 암살모의사건인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검거열풍이 일자 1912년 국외 망명길에 올라 일단 북간도로 피신했다가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로 스며들었다.회고록에서 “신한촌에서 단재 선생을 만나 같은 여관에서 동고동락했다.”고 적고 있다.단재 선생이 주필로 있던 권업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물 설고 낯선 땅이었지만 1910년대 연해주 신한촌에는 선생을 비롯,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주역 5명중 배설(1909년 서거) 선생을 제외한 전원이 엇비슷한 시기에 드나들며 몸을 의탁했었다.마치 대한매일신보사를 연해주로 옮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천년 동안 잠자던 발해를 깨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륙 쪽으로 100여km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의 양대 성지로 꼽힌다. 선생은 이곳의 옛 지명이 쌍성자(雙城子)였던 사실에 주목,틈 날 때마다 답사했다.당시 한인들은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쌍성자(우수리스크),수청(水淸·빨치산스크),추풍(秋風·수이푼),연추(延秋·크라스키노),동개터(나홋카),지신허(地新墟·치진헤)처럼 러시아 지명을 쓰지 않고 고구려,발해 때부터 전해내려 오던 한국지명을 썼다. 선생이 성벽,해자,절터 등 유적을 찾아내 발해의 동경성터로 추정했던 곳은 현재의 크라스노야르 성이다.성안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잡고 있어 크기와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었고 성밖에는 토성이 남아 있었다.성을 감싸고 흐르는 수이푼강은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해자였다.성은 지명 그대로 남성(南城)과 서성(西城) 등 2개의 성(雙城)으로 이뤄져 있었다. 서쪽 성은 시가지에 편입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지만 남쪽 성의 절터에 방치돼 있는 4개의 현무암 주춧돌과 발해식 축성법을 보여주는 토성 일부는 아직 남아 발해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지난 1995년 우수리스크 일대를 발굴한 러시아 극동고고학연구소는 성내부의 경사면에 위치한 집터에서 온돌구조를 찾아냈다.9세기 당백자(唐白磁) 도편도 출토돼 발해시대 문화층 존재가능성이 확인됐다. ●극동대학엔 장도빈기념관이 우뚝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아데우스카야 56번지에 위치한 극동대학 동양학부는 1899년에 세워진 동양학의 산실이다.무려 10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대학 건물 옆에 한국학대학이 서있다.건물 이름은 ‘장도빈 기념관’이다.선생의 아들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이 사재를 들여 지었다. 선생의 ‘고토(古土)’ 발해에 대한 집착이 연해주를 대표하는 극동대학의 건물 이름으로 현재화한 것이다. ■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틀)=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이춘규 특파원 ●중국 및 러시아(상하이,다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노주석 이언탁 박지윤 특파원˝
  • 與·野 ‘고용없는 성장’ 한목소리 질타

    “이해찬 총리는 재래시장에 가보셨습니까.”,“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환율 방어에 너무 개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내수 촉진을 위해 2차 추경예산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13일 경제분야에 관한 대정부 질문에서 의원들은 ‘고용과 투자가 없는 성장’에 대해 우려하면서 부진한 내수만큼 정부 정책도 불황(不況)에 시달리고 있다고 질타했다.정부가 내수 촉진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 경제 양극화 과소평가”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원은 “현재 고용없는 성장은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부 계층을 위한 성장에 그치고 있다.”면서 “정부가 우리 경제의 양극화 현상을 과소평가해 경제의 순환체계를 망가뜨릴 만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 이상열 의원은 “내수경기 침체는 일시적 어려움이 아니라 구조적인 위기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정부는 종합적인 경제위기 타개책을 강구하지 않고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땜질식 단기처방에 매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그는 “신용불량자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국가가 운영하는 ‘노동은행’ 설립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헌재 부총리는 “경기전망 등에 대한 예측이 부족해 송구스럽다.”면서 “노동은행을 통해 일자리에 대한 수요·공급의 불일치가 해소된다면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최경환 의원은 “경제불안으로 대규모 자본이 해외로 유출돼 성장동력이 악화되고 빈곤의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면서 “6월 말 현재 국세 징수가 예년보다 3조∼4조원 부족하고 재정차입금도 한도를 다 끌어썼는데 세수마저 덜 걷히면 결국 추경을 편성하고 국채를 발행,후손들에게 빚만 물려줄 것”이라고 꼬집었다. ●“고환율정책 바꿔 내수 살려야” 열린우리당 최철국 의원은 “내수 활성화를 위해서는 수출경쟁력만 생각하는 고환율정책을 바꿔야 한다.”면서 “이번에 책정된 추경 1조 8000억원으로는 청년실업·중소기업에 대해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없으니 2차 추경을 통해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 부총리는 “환율정책에 정부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면서 “재정지출을 4조 5000억원으로 늘렸기 때문에 당장 2차 추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3) 초대총무 양기탁

    대한매일신보의 대들보인 우강 양기탁 선생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영어사전을 편찬하고 일본 나가사키상업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근무하는 등 33살 때까지의 삶은 평탄했다.능통한 영어·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정부관리(예식원 주사)와 한성전기회사 간부로 채용되는 등 출세길이 보장돼 있었다. ●배설과의 만남·20여년 망명생활 하지만 1904년 배설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34세) 이후 ‘혁명가의 길’이 주어졌다.이후 5년여 동안 대한매일신보를 통한 국채보상·신민회 운동 등을 펼쳤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제병합되자 1910년 만주로 탈출,1918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했다.1922년(52세) 임시정부 주석 등으로 활동했지만 결국 살아서 광복한 조국땅을 밟지 못했다. ●리양에서 맞은 쓸쓸한 임종 선생은 1938년 5월21일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든 중국 장쑤성 리양현 대부진 남문두 고당암에서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린 암자에서 중국인들에 둘러싸여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20여년 동안 중국 관내와 만주,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몸바친 그의 유해는 사후 60년 만인 1998년에야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봉환됐다. ●우수리스크엔 담장만 남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시간 거리인 우수리스크 자나드보롭스가야 15번지에서 그의 숨결을 만날 수 있었다.우수리스크는 러시아거주 9만여 고려인들의 절반가량이 모여사는 연해주의 여러 도시중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사료에 의하면 선생은 서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들어왔으며 고려인신문 ‘한인신보’의 편집인으로 청빙됐다.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이동휘 선생 등이 주도한 환영회가 대대적으로 열린 사실도 기록돼 있다. 1917년 5월 전 러시아 한인의 대표기구인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개최된 자나드보롭스가야에서 선생은 박은식·이동휘·최재형 선생 등과 함께 사자후를 토하며 조국의 독립투쟁 방안을 논의했다.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에 사는 한인들이 러시아혁명 이후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독립운동을 모색하려고 연 회의였다.그러나 우강은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건에 반대하고 국제유대를 통한 조국독립운동을 주장,갈라서고 말았다. 1㎞ 남짓한 이 거리에는 ‘노령정부’로 알려진 대한국민의회와 그 기관지 청구신보의 사무실 등이 세들어 있었다.부자들이 모여 산 화려한 주택가로,시장의 주택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체체리나 22번지에 학교가 들어섰고 집이 있던 거리는 운동장에 편입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취재팀을 안내한 송지나(러시아 극동대) 교수는 “길 건너편에는 100년 전에 지은 오래된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서 “도시계획에 따라 학교쪽 집을 모두 허물고 길을 넓혔다.”고 말했다. 운동장 구석 잡초 더미에서 발견된 허물다 만 오래된 집 담장이 취재팀을 상념에 빠지게 했다. ■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톨) 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 이춘규 특파원 ●중국·러시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노주석·이언탁·박지윤 특파원˝
  • [창간 100년-DMZ 51년] 대한매일신보 100주년 학술회의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서울신문사가 후원하고 한국언론학회가 주관한 이날 학술회의에서 학자들은 구한 말 항일구국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의미와 참여인물들의 역할,당시 보도 내용 등을 광범위하게 조명했다.특히 국내 현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는 서울신문의 대한매일신보 승계와 관련,계승의 불가피성과 함께 단절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했다. 채수삼 서울신문사 사장은 축사에서 “서울신문사 임직원들은 서울신문이 1904년 7월18일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구국 독립정신과 지령을 계승해온 데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강조하고 “올해 1월1일자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환원하면서 일제 아래서 매일신보를 발행한 부끄러운 역사도 100년 역사의 일부분임을 인정했다.”고 소개했다. 채 사장은 “오욕의 역사일지라도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민족 수난기 역사”라고 전제한 뒤 “서울신문은 철저한 자기반성 위에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시대가 부여한 언론의 사명도 투철히 이행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강력한 항일논조… 신민회 본거지”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역사적 의의와 그 계승 문제’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대한매일신보는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강력한 항일 논조로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한 가장 영향력있는 신문이었다.”면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자신의 수백 마디 말보다 이 신문의 기사 한줄이 한국인들에게 더 위력이 크다고 토로했을 정도”라고 밝혔다. 정 교수는 또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Korea Daily News’는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알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던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되었다.”면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다고 증언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서울신문의 100주년 계승문제와 관련,민족사관의 견지에서는 단절의 필요성을,실증사관의 견지에서는 계승의 불가피성을 제시했다.그는 일제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역사를 새롭게 태어난 서울신문의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지만,매일신보가 언론의 역사에서 단절시킬 수 없는 엄연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이를 서울신문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것은 주관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라고 말했다. 종합토론에서 이경형 서울신문 편집제작이사는 “1945년 11월22일 ‘서울신문’이라는 제호의 신문을 발행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 사장 등 당시 서울신문 주역들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신보를 ‘혁신 속간’한다고 천명했다.”고 상기시키고 “지령도 1호가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의 지령까지 더한 13,738호였다.”고 강조했다.이 이사는 서울신문은 오는 18일 창간 100주년을 맞으면서 매일신보의 지령을 합산하지는 않았지만 매일신보의 시기도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고 지난주 발간한 ‘서울신문 100년사’에도 매일신보가 독립편으로 다뤄졌다고 소개했다. 김민환 고려대 언론학부 교수는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은 민족주의,서울신문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라면서 “서울신문 종사자들은 이러한 창간정신을 내재화해야만 과거의 계승·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참여인물과 언론사상’등 8개 주제 발표 학술회의에서는 또 박정규 한남대 사회학부(정치언론국제학 전공)교수가 ‘대한매일신보의 참여인물과 언론사상’,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가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배설과 양기탁 등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가 ‘대한매일신보 사지에 대하여’를 주제로 발표했다. 또 김덕모 호남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가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내용분석’,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잡보 내용분석’,안종묵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연구소 연구원이 ‘광고 분석’,김영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사가 ‘대한매일신보 독자의 신문인식과 신문접촉 양상’을 각각 발표했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부처예산 잉여금 30%이상 국채원리금 상환 의무화

    내년부터 정부부처들은 쓰고 남은 예산의 30% 이상을 국가채무 상환 등에 의무적으로 써야 한다.또 300조원대로 추정되는 57개 기금이 정부예산 차원에서 관리되며 재정경제부 장관은 매년 국채·차입금 상환실적과 상환계획 등이 포함된 국가채무관리계획을 수립,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기획예산처는 4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국가재정법 제정안을 마련,5일부터 입법예고한 뒤 올해 안에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고 밝혔다. 제정안에 따르면 내년부터 나라 살림살이의 기본이 되는 예산회계법과 기금관리기본법이 국가재정법으로 통합되는 등 재정건전성 관리가 대폭 강화된다.각 부처는 재정지출이나 조세감면이 수반되는 법률안(의원입법 포함)을 만들 때 5년치 재정수지 자료와 재원조달 방안을 법률안에 의무적으로 첨부해 제출해야 한다. 정치권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곤 했던 추가경정예산의 편성요건도 ‘예산에 변경을 가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는 현재의 포괄적 규정에서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경기침체 ▲국민생활 안정 등 구체적인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강화됐다.아울러 정부 부처들이 한해 예산에서 쓰고 남는 자금은 추경편성과 지방교부세 정산 등을 제외하고는 잉여금의 30% 이상을 국채 원리금 상환과 국가배상,기타 채무상환 등에 우선적으로 사용토록 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건전화 조치도 마련됐다.행정자치부 장관은 매년 재경부·예산처 장관과 협의해 지방재정건전화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지자체의 재정건전화 노력을 평가해 특별교부세를 차등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정부의 결산일정도 2개월가량 당겨진다.결산제출 시한은 현재 매년 6월10일까지에서 4월20일까지로,결산검사보고서는 8월20일까지에서 6월10일까지로 단축됐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사고] ‘대한매일신보 100주년’ 학술회의

    서울신문사는 한국언론학회와 공동으로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대한매일신보 창간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를 개최합니다. 1904년 7월18일 창간해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의 구국독립정신과 지령을 계승해온 서울신문은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과 언론사적 의미 등을 재조명하고자 합니다. 특히 국내 현존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창간 100주년을 맞는 서울신문의 창간 기념 사업의 하나로 열리는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변천해온 100년사의 계승 문제도 논의될 예정입니다.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제1부-대한매일신보의 성격과 운영 제1발표 대한매일신보 창간의 역사적 의의와 그 계승 문제(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제2발표 대한매일신보의 참여인물과 언론사상(박정규 한남대 사회학부 정치언론국제학 전공 교수) 제3발표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배설과 양기탁 등 주요인물을 중심으로(이연 선문대 언론광고학부 교수) 제4발표 대한매일신보 사지(史趾)에 대하여(오인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제2부-대한매일신보의 기사 내용과 독자 제1발표 논설 내용분석(김덕모 호남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제2발표 잡보 내용분석(채백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제3발표 광고 분석(안종묵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연구소 연구원) 제4발표 대한매일신보 독자의 신문인식과 신문접촉 양상(김영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강사) ●제3부-종합토론
  • 올 금리·환율관리 28조 투입

    올들어 정부와 한국은행이 금리 안정과 환율 방어를 위한 채권 발행에 28조원이나 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이에 따라 이자부담도 적지 않게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4일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들어 이날 현재까지 한국은행의 통화안정증권 발행 잔액은 127조 9000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22조 4000억원이 증가했다.외환시장 안정용 국채(원화채권 기준) 발행 잔액도 34조 6000억원으로 6조원이 늘었다.통안증권 발행잔액이 증가한 것은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거나 과도하게 유입된 달러를 사들이는 과정에서 한은이 과잉 유동성을 흡수,시중금리를 조절하기 위해 발행을 늘렸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서 외환시장 안정용 국채 발행잔액도 2002년 말 15조 8000억원에서 지난해 말 28조 6000억원으로 급증한데 이어 올 연말에는 정부가 설정한 한도액이 모두 소진될 경우 48조 6000억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정부는 올해 외환시장 안정용 국채 발행한도를 당초 9조원에서 20조원으로 늘린데 이어 내년에는 28조 5000억원을 증액해 달라고 기획예산처에 요청한 상태다. 이처럼 통안증권과 외환시장 안정용 국채 발행이 늘면서 연간 이자부담만 6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재경부 관계자는 “올들어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고 수출 호조로 경상수지 흑자가 커지면서 불안해질 가능성이 있는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통안증권과 외환시장 안정용 국채 발행이 증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서민·中企에 3조7000억 지원

    정부는 하반기 재정운용규모를 4조 5000억원 늘려 이 가운데 3조 7000억원을 서민 생활안정과 중소기업 지원에 사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2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민과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1조 8283억원의 추가경정예산안과 6330억원에 달하는 기금 운용계획 변경안 등 모두 2조 4000억원 규모의 재정지출 확대방안을 의결,국회에 제출키로 했다. 분야별 재정확대 규모는 ▲일자리 창출,취약계층 지원,주거안정 등 서민생활지원에 2조 2483억원 ▲신용보증기관 출연,재래시장 활성화 등 중소기업 지원에 1조 3912억원 ▲파주 LCD단지 진입도로 건설 등 경쟁력 강화에 3338억원 ▲지방교부금 정산, 일시차입 이자 5188억원 등이다. 자금조달은 일반회계 잉여금 5000억원,기금 여유자금 1조 4000억원,공기업 자체자금 7000억원 등 모두 2조 6000억원의 여유자금과 적자국채 발행 1조 3000억원,중소기업진흥 및 산업기반기금 채권 발행 6000억원 등 모두 1조 9000억원 규모의 채권발행을 통해 이뤄진다. 정부는 아울러 복권수익금 가운데 일부를 문예진흥기금,장애인촉진기금 및 직업재활기금,근로자복지기금,여성발전기금,보훈기금 등에 지원하기 위해 5개 기금운용계획 변경안도 처리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청년·서민층 일자리 5만개 창출

    추가경정예산안 의결 등을 통해 늘어난 4조 5000억원의 정부재원은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과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데 주로 투입된다.정부는 일자리 창출과 취약계층의 생활안정,중소기업 자금난 해소 등 국민들이 재정지출 확대에 따른 수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정부가 적자국채를 포함해 1조 9000억원의 빚을 내기로 해 재정건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서민·중소기업 고통 완화 청년실업자와 취약계층 5만 4816명에게 일자리가 제공되고,경로당 난방비가 30만원에서 50만원으로 현실화된다.저소득층 노인들을 위한 요양시설 15곳과 노인보호기관 10곳이 추가로 신축되고,단전·단수,건강보험료 체납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저소득 가구 5만명은 기초생활보장 대상으로 새로 편입돼 생계급여를 지원받는다.저소득층 수능공부방 150곳과 지역아동센터 256곳은 추가로 운영비를 지원받고,결식아동 급식단가가 현행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인상된다.또 공공분양주택건설자금 융자에 4700억원이 투입돼 추가적으로 1만 6000가구가량이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중소기업지원을 위해서도 1조 3912억원이 추가 투입돼 1400개 중소기업이 구조개선자금과 중소벤처창업자금을 지원받게 되며,소상공인 자금지원 대상도 3400여곳 증가하게 된다. 특히 신용보증기금과 기술신용보증기금에 5500억원이 추가 출연돼 3조원가량의 추가 보증여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재정건전성 논란 가능성 올해 추경편성으로 적자국채 1조 3000억원어치를 발행하면 적자국채 발행은 1998년 9조 7000억원,99년 10조 4000억원,2000년 3조 6000억원,2001년 2조 4000억원,2002년 1조 9000억원,지난해 3조원 등으로 외환위기 이후 7년째 계속된다.지금까지 적자국채 발행규모는 30조원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연간 이자비용도 2조원에 근접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번 재정지출 확대로 빚이 늘어남에 따라 일반회계와 기금,특별회계를 모두 포함한 통합재정수지 적자는 현행 3조 5000억원에서 7조 3000억원으로 확대되고 적자비율도 GDP대비 0.4%에서 0.9%로 높아진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꼬불꼬불 뒷골목] 대구 ‘뽕나무 골목’

    [꼬불꼬불 뒷골목] 대구 ‘뽕나무 골목’

    뽕나무만큼 사람에게 유용한 나무도 드물다.잎은 누에의 먹이가 되고 열매는 ‘오디’라 하여 한약재로 쓰이며,뿌리는 ‘상두’라 해서 기침을 그치게 하는 진해제나 이뇨제로 쓰인다. ‘집터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살 먹은 사람이 명주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맹자의 말도 있다.조상들은 뽕나무가 잘자라야 나라의 태평성대가 이뤄진다고 믿고 곳곳에 뽕나무를 심곤 했다.뽕나무 골목은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에서 동아쇼핑 사이의 좁은 골목이다. 이 골목의 역사는 조선 선조 때로 올라간다.임진왜란 원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명나라 무장 두사충에게 선조는 이 일대 4000여평의 땅을 주었다.두사충은 이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며 살았다. 그때 다니던 길이 세월이 흘러 골목으로 변하게 되었고,사람들은 이 골목을 뽕나무 골목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옛날 이 일대가 뽕나무 밭이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뽕나무 한 그루 없다. 인근 한약방 직원에게 “뽕나무 골목을 아느냐?”고 물었다.자신은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모른다.”고 말했다.40여년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효성슈퍼 주인(72)은 “젊은 사람들 중 뽕나무 골목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이상화 시인이 이곳에 살아서인지 몰라도 주민 중에 문인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며 삭막해진 세태를 원망했다.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은 뽕나무 골목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그가 타계한 1943년까지 2년6개월 정도 이곳에서 살았다.이 집에서 시조 ‘기미년’과 수필 ‘나의 어머니’,시 ‘서러운 해조’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1970년대 들어 서울 문인들이 찾아오면서 이상화 고택임이 알려졌다.지금까지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간직돼 있다. 그러나 최근 대구 중구청이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키로 해 헐릴 위기에 처했다.이 때문에 문화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가 출범해 시민 50여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보존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 장군의 옛집도 뽕나무 골목을 지키고 있다.이상정 장군은 1921년부터 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다. 뽕나무 골목 입구에는 중장비 소리로 어수선하다.옛 고려예식장 자리에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이 건립되고 있다.고려예식장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문으로 한때 지역 예식업계를 평정했으나 대형예식장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경쟁에서 밀려 결국 문을 닫았다. 고려예식장 부지에는 서병조 대륜재단 초대이사장의 집이 있었다.집이 운치가 있어 6·25직후 지역 요인들과 미군장교들의 가든파티장소로 이용되었다.고려예식장 업주 우씨는 예식장 건축과정에서 나온 홍송과 돌,목재 등이 너무 좋아 현재 달서구 월곡공원 옆 단양 우씨 재실인 ‘낙동서원’ 부속재로 사용했다. 주상복합건물 건립으로 서상돈 선생의 옛집이 사라졌다.민족운동가인 서상돈선생은 1907년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장해서 전국운동으로 승화시켰다. 건설업체는 건물 건립과정에 파손 등이 우려돼 불가피하게 서상돈 선생의 집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철거된 집의 자재는 현재 컨테이너 2개에 넣어져 공사장 한쪽에 보관돼 있다.건물이 준공된 후 서상돈 선생의 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건설업체의 구상이다.최근 주상복합건물 시행사가 이상화 고택을 매입,대구시에 기부채납할 뜻을 비쳤다.기부채납이 이뤄지면 대구를 상징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대구시의 입장이다. 이상화,이상정,서상돈 고택이 있는 뽕나무 골목이 대구의 근·현대 역사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날이 멀지 않았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꼬불꼬불 뒷골목] 대구 ‘뽕나무 골목’

    뽕나무만큼 사람에게 유용한 나무도 드물다.잎은 누에의 먹이가 되고 열매는 ‘오디’라 하여 한약재로 쓰이며,뿌리는 ‘상두’라 해서 기침을 그치게 하는 진해제나 이뇨제로 쓰인다. ‘집터에 뽕나무를 심으면 50살 먹은 사람이 명주 옷을 입을 수 있다.’는 맹자의 말도 있다.조상들은 뽕나무가 잘자라야 나라의 태평성대가 이뤄진다고 믿고 곳곳에 뽕나무를 심곤 했다.뽕나무 골목은 대구시 중구 계산성당에서 동아쇼핑 사이의 좁은 골목이다. 이 골목의 역사는 조선 선조 때로 올라간다.임진왜란 원군으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명나라 무장 두사충에게 선조는 이 일대 4000여평의 땅을 주었다.두사충은 이 땅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며 살았다. 그때 다니던 길이 세월이 흘러 골목으로 변하게 되었고,사람들은 이 골목을 뽕나무 골목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옛날 이 일대가 뽕나무 밭이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뽕나무 한 그루 없다. 인근 한약방 직원에게 “뽕나무 골목을 아느냐?”고 물었다.자신은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모른다.”고 말했다.40여년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효성슈퍼 주인(72)은 “젊은 사람들 중 뽕나무 골목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이상화 시인이 이곳에 살아서인지 몰라도 주민 중에 문인들이 많았다.”며 “지금은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며 삭막해진 세태를 원망했다.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은 뽕나무 골목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그가 타계한 1943년까지 2년6개월 정도 이곳에서 살았다.이 집에서 시조 ‘기미년’과 수필 ‘나의 어머니’,시 ‘서러운 해조’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1970년대 들어 서울 문인들이 찾아오면서 이상화 고택임이 알려졌다.지금까지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간직돼 있다. 그러나 최근 대구 중구청이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를 개설키로 해 헐릴 위기에 처했다.이 때문에 문화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보존운동본부’가 출범해 시민 50여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보존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 장군의 옛집도 뽕나무 골목을 지키고 있다.이상정 장군은 1921년부터 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다. 뽕나무 골목 입구에는 중장비 소리로 어수선하다.옛 고려예식장 자리에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이 건립되고 있다.고려예식장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문으로 한때 지역 예식업계를 평정했으나 대형예식장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경쟁에서 밀려 결국 문을 닫았다. 고려예식장 부지에는 서병조 대륜재단 초대이사장의 집이 있었다.집이 운치가 있어 6·25직후 지역 요인들과 미군장교들의 가든파티장소로 이용되었다.고려예식장 업주 우씨는 예식장 건축과정에서 나온 홍송과 돌,목재 등이 너무 좋아 현재 달서구 월곡공원 옆 단양 우씨 재실인 ‘낙동서원’ 부속재로 사용했다. 주상복합건물 건립으로 서상돈 선생의 옛집이 사라졌다.민족운동가인 서상돈선생은 1907년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장해서 전국운동으로 승화시켰다. 건설업체는 건물 건립과정에 파손 등이 우려돼 불가피하게 서상돈 선생의 집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철거된 집의 자재는 현재 컨테이너 2개에 넣어져 공사장 한쪽에 보관돼 있다.건물이 준공된 후 서상돈 선생의 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건설업체의 구상이다.최근 주상복합건물 시행사가 이상화 고택을 매입,대구시에 기부채납할 뜻을 비쳤다.기부채납이 이뤄지면 대구를 상징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대구시의 입장이다. 이상화,이상정,서상돈 고택이 있는 뽕나무 골목이 대구의 근·현대 역사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날이 멀지 않았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5년간 年5~6%성장…재정규모 6~7%씩 확대

    정부가 오는 2008년까지의 ‘국가재정운용계획’ 시안을 마련,중기적 관점의 나라살림 규모를 제시했다.실질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매년 5∼6%의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전제 아래 재정규모를 매년 6∼7%씩 늘린다는 것이 골자다.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말인 2008년부터는 균형재정을 달성한다는 ‘야심찬’ 계획도 내놓았다.그러나 이같은 정부의 기대와 의지에도 불구하고 성장률 전망 등 현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예상된다. ●나라살림 어떻게 짜였나 27일 기획예산처가 발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190조원에 이르는 재정규모를 내년부터 2008년까지 해마다 6∼7% 늘리기로 했다.10%대를 웃돌았던 과거 재정규모 증가율에 비춰 현격히 낮아진 수치다.예산처는 이에 대해 “국가적 우선순위를 감안한 전략적 재원배분을 통해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라고 밝혔다.조세부담률은 2003년 수준(GDP대비 20.5%)에서 묶되 대신 재정건전성은 조기에 달성한다는 복안이다.예산처 진영곤 재정기획총괄심의관은 “2008년부터 균형재정을 실현해 재정적자 보전 차원에서 발행한 (매년 3조원 규모의)국채발행도 중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재정운용의 각론도 얼개가 잡혔다.교육·복지·환경 등 9개 분야로 나눠 ▲4세 이하 영아의 보육료·노인요양시설의 예산지원을 현재보다 두 배 이상 확대 ▲올해 1만명 수준인 이공계 장학금 지원을 2만여명으로 확대 및 대학생 28만명에게 학자금 융자 실시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불안한 밑그림,논란 예상 그러나 나라 살림살이가 정부 기대처럼 진행될지는 불투명하다.무엇보다 재정운용계획 수립의 바탕이 되는 경제성장률 전망이 정부 내에서조차 불안한 등락을 거듭하고 있어서다.재정운용계획은 ‘2008년까지 매년 8%(명목GDP) 안팎 성장’을 전제로 짜여졌다.물가요인을 감안한 실질GDP로 환산하면 해마다 5∼6%씩 성장한다는 얘기다.이는 지난 7일 국회개원 연설에서 “(내년부터)임기 동안 매년 6% 이상 성장할 것”이란 노 대통령의 발언과는 다른 것으로,정부 스스로 ‘기대치’를 낮추었다고 볼 수 있다.예산처는 28일 민간전문가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뒤 당정협의와 국무회의 등을 거쳐 이르면 다음달중 정부안을 확정할 예정이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서울~대구 고속철 투어상품 판매

    대구시는 수도권 주민이 고속철도를 이용해 대구시를 관광하는 상품 2개를 개발,다음달부터 판매한다고 20일 밝혔다. ‘팔공산 갓바위 투어’는 용산역-동대구역-갓바위 등산-중식-동화사-신숭겸장군 유적지-동대구역-용산역 등의 코스로 매일 출발한다.여행 비용은 주중에 6만 9500원(초교생 5만 5000원),주말은 7만 7000원이며,㈜그랜드관광(053-475-1008)에서 접수한다. 또 ‘대구근교 투어’는 서울역-동대구역-경주(안동,영주,합천,포항 등 선택)코스로 화·목·토·일요일에 출발한다. 여행 비용은 화·목요일은 7만 9500원(초교생 6만 5600원),토·일요일은 8만 6500원(초교생 6만 5600원)이며,㈜삼성여행사(053-431-3000)에서 접수한다. 이밖에 지난 5월부터 ‘대구시티 투어’상품을 판매 중으로,서울역-동대구역-옻골 최씨종가-동화사-신숭겸장군 유적지-약령시-국채보상운동공원-동대구역-서울역의 코스에 여행 비용은 6만5000원이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병원…택시…금속까지…249곳서 동시파업

    병원 파업 일주일째인 16일 민주택시노조와 금속노조까지 파업에 가세,노동계의 하투(夏鬪)가 총력투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병원 노사는 이날 오후 4시부터 고려대의료원에서 협상에 나섰지만 주5일근무제 등 주요 쟁점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병원측은 이날 교섭에서 1일 8시간,주 40시간 근무에 토요일 외래진료유지 등을 담은 두 가지의 최종안을 노조측에 통보하며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고 밝힌 뒤 오후 8시30분쯤 퇴장했다. 병원측이 제시한 최종안 중 첫 번째는 ▲1일 8시간 주 40시간 근무 ▲병원은 필요한 경우 토요일 외래진료 유지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수 있으며 노조는 이에 협조할 것 ▲생리휴가 무급화에 따른 월정액 수당 신설 ▲연차휴가 25일 초과분 금전보상 및 월차휴가 폐지 등이며,두 번째는 ▲1일 8시간 주 40시간 근무 ▲토요일 진료기능의 50%를 유지할 것 ▲생리휴가 무급화에 따른 보전방안 해당지부와 협의 등이다. 노조측은 협상안을 거부했으나 “교섭을 계속하면서 요구안을 조정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편 파업 장기화로 인해 일선병원에서 급식차질과 수술 축소 등으로 이날도 환자들이 큰 고충을 겪었다.일부 환자들은 “환자는 뒷전인 채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며 노사를 싸잡아 비난한 뒤 “신속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다. 병원파업에 이어 민주노총 산하 전국민주택시노조연맹도 ‘유류 부가가치세 환급분 전액지급’과 ‘택시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며 이날 오전 4시부터 총파업에 들어갔다.택시노조는 그러나 이날 오후 9시20분쯤 건교부와의 교섭에서 진전된 내용이 있다며 파업을 일시 중지키로 했으나 서울 일부 택시회사와 광주·강릉지역에서는 계속 파업을 벌이고 있다. 택시노조는 ▲택시요금 인상계획 백지화 ▲유류비 사업자 전액부담 법제화 ▲사납금 폐지를 위한 전액관리제 강화입법 등을 요구하고 있다. 금속산업연맹 산하 금속노조도 ▲손배·가압류 금지 ▲최저임금 76만 6140원 보장 ▲구조조정시 노사합의 ▲임금인상(기본급 12만 5000원) 등을 요구하며 이날 오후 1차 4시간 경고파업을 벌였다. 노동부 관계자는 “이날 택시파업 90개 사업장 4568명을 포함,249곳 2만 6000여명이 전면 또는 부분파업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파업을 벌이고 있는 병원노조와 민주택시,금속노조가 속해 있는 민주노총은 이날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국회 앞과 부산역,대구 국채보상공원 등에서 전국 동시다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민주노총은 현재 진행 중인 파업 외에도 ▲23일 화학섬유연맹 ▲29일 금속산업노조연맹 등 2차연대파업을 선언한 상태다.여의도 집회에는 1주일째 파업중인 의료보건노조 3500여명을 비롯해 민주택시노조연맹 1500명,금속노조 500여명의 조합원 등이 참가했다. 유진상 유영규기자 jsr@seoul.co.kr˝
  • [국민연금 무엇이 문제인가] ⑨연금투자 제대로 하고있나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증시부양’ 명목으로 돈을 빼다가 넣었는데,그러다 원금마저 다 까먹으면 나중에 연금공단이 책임지나요?” “몇년전에 연금에서 주식투자로 큰 손해를 봤다는데 내가 부은 돈 다 날리면 늙어서 연금받을 수 있는 겁니까?” 국민연금 보험료로 거둔 돈을 정부나 연금공단이 제대로 굴리고 있는지에 대한 가입자들의 불신도 크다.쌓인 돈이 100조원(내년에 165조원 전망)이 훨씬 넘기는 했다지만,곧 고갈될 것이라는 얘기에 걱정부터 앞선다.보건복지부는 기금을 잘못 운용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우리 국민연금이 ‘적게 내고 많이 받아가는’ 기형적인 구조로 처음에 잘못 출발한데다,급속한 노령화 등으로 연금수급자가 단기간에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며,운용을 잘못해서 기금이 고갈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반박이다.1988년 제도 도입 이후 지난 3월말까지 연금보험료 및 운용수익금으로 137조원이 쌓였고,이 가운데 3분의 1인 39조원은 순수하게 운용수익금이라는 점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연금기금 운용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이는 상당부분 정부가 부추긴 측면도 있다.주가가 빠질 때면 경제부처는 ‘전가의 보도’처럼 국민연금 카드를 꺼내든 게 사실이고,큰 손실을 본 적도 있다.주식은 당연히 수익성은 높지만 그만큼 위험성도 높기 때문에 연금에서 섣불리 주식투자를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이 거센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2000년에는 주식투자로 -50.85%의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2조 747억원을 까먹었다. 보건복지부 배병준 연금재정과장은 “전체 시장상황에 따른 평가손실일 뿐이며,연금의 주식투자는 연간 베이스가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가입자들이 걱정하는 것과 달리 누적기준으로 연금에서 주식투자는 손실을 보고 있지는 않다.주식투자 이후 수익은 지난해 12월말 현재 3조 6701억원으로 연평균 누적수익률은 12.89%에 달한다.8%에 그치고 있는 채권수익률에 비하면 4%포인트 이상 높다. 복지부는 이에 따라 주식투자 비중을 점차 높여나갈 계획이다.올해 4조원에서 내년에는 5조원으로 이미 1조원을 늘리기로 했다.다만 위험분산 차원에서 장기적으로는 미국채를 비롯한 해외채권 매입을 꾸준히 늘리는 쪽으로 기금운용 계획을 짜두고 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日 초저금리시대는 옛말?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도 초저금리시대에 종언을 고하는가.도쿄채권시장에서 8일 장기금리의 대표적 지표인 10년만기 신국채 금리가 3년7개월 만에 1.7%대를 기록한 뒤 9일에도 장중 최고 1.780%까지 치솟는 등 연일 급등세다. 도쿄채권시장 전문가들은 금리의 급등세는 일단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필요한 조치(금리인상)를 준비하고 있다.”는 전날 발언의 영향으로 풀이하고 있지만,추세적 금리상승기에 돌입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세계 최저의 초저금리 국가인 일본에서 금리의 추세적 상승조짐이 보이자 일본의 금융전문가들은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 선행적 금리상승”이라는 진단이 많은 가운데 “실질 경제력 이상의 급격한 금리상승은 주택모기지론 이용 가계나 부채가 과다한 기업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다케나카 금융·경제재정상 등 정부관계자들도 일련의 금리상승이 긍정적 면과 함께 부정적 면도 있다는 신중론을 펴고 있다.일본은행도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움직임”이란 진단을 하면서도 이상징후가 보일 때는 즉각 대응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내부에 적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 6월 세계 금융사상 최저기록인 0.43%까지 금리가 내려갔던 일본에서 앞으로의 금리 전망에 대해 “1.7%대 전후에서 움직일 것”이란 전망과 “세계적인 금리인상 추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며 급격한 상승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taein@seoul.co.kr˝
  • [기로의 한국경제] ② 돈을 돌게 하자

    돈이 안 돈다.은행 등 금융기관에서도,주식 등 자본시장에서도 좀체 돈의 흐름이 감지되지 않는다.그렇다고 고질병이던 부동산 투기로 돈이 몰리는 것도 아니다.기업-가계-시장을 관통하는 자금의 수요·공급 고리가 끊어진 탓이다.시중에는 온통 부동(浮動)자금과 부동(不動)자금뿐이라는 말까지 나돈다.대안으로 검토되고 있는 사모펀드 활성화 등도 당장 깨어진 수급기반을 수습하는데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다. ●“시장의 자금중개 기능 극도로 약화” 한국은행 관계자는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를 맞아 은행예금도 매력이 없고,주식시장은 너무 위험하고,회사채 시장은 신뢰도가 떨어지고,간접투자는 정착이 안돼 있고,부동산시장은 불안한 상황”이라면서 “모든 부문에서 안정성이 떨어지다 보니 자금중개의 기반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다.”고 말했다. 외국인에 의존해 겨우 지탱되고 있는 주식시장은 개인들의 이탈에 더해 중국 쇼크,유가 상승 등 국내외 변수가 너무 많아 수시로 요동치고 있다.회사채 시장은 최근 순상환(발행보다 상환이 더 많은 것)에서 순발행 기조로 전환되기는 했지만 활성화될 기미가 없다. 과도한 빚과 소비냉각으로 가계대출 수요도 좀체 일어나지 않고 있다.기업들도 투자위축 등으로 은행이나 주식·채권시장을 찾지 않는다.지난 4월 국내은행의 기업대출은 2조 5000억원에 그쳤다.경영난을 겪는 중소기업들이 주로 자금을 찾지만 이쪽에는 금융기관들이 대출을 꺼린다.한은 관계자는 “수요와 공급이 모두 부진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그러나 경기가 살아나 자금수요가 많아지는데 공급이 지금처럼 부진하면 자금경색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그나마 활발한 부문은 국채,통안증권 등 이른바 ‘무위험 채권’ 시장뿐이다.최근 지표금리(국고채 3년물 수익률)는 4.2% 안팎으로 1개월새 0.3%포인트가량 빠졌다.수요가 많아지면서 채권값이 큰 폭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다.채권값이 오르면 수익률은 떨어진다.시장 관계자는 “최근 국채 수익률이 내려가는 것은 경기회복이 늦어질 것이라는 우려감 때문에 안전자산으로 돈이 몰리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권에 맡긴 돈 절반이 부동자금 이에따라 시중자금의 안정성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언제든지 돈되는 곳으로 옮겨갈 계획인 ‘대기성 자금’만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한은에 따르면 올 1·4분기 금융권의 6개월 미만 단기수신 잔액은 387조 6000억원으로 금융권 총수신의 49.0%에 달했다.1년 전(376조 1000억원)에 비해 금액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총수신 비중은 47.5%에서 큰 폭으로 확대됐다. 또 지난달 말 현재 8개 시중은행의 머니마켓펀드(MMF) 잔액은 15조 4088억원으로 한달 전 14조 7366억원보다 6722억원(4.6%)이 늘었다.반면 안정적으로 묻어두는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193조 1545억원에서 193조 3207억원으로 0.09% 증가하는 데 그쳤다.MMF는 투신사가 고객의 돈을 모아 단기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단기수신이다.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기예금 금리인하와 주식·부동산시장의 불안정으로 목돈을 굴리는 고객들이 아무 때나 돈을 찾을 수 있는 MMF 등 단기상품으로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총유동성 증가율 사상 최저수준 돈이 제대로 안 돌면서 돈의 순환을 나타내는 지표도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올 1분기 국내 총유동성(M3)의 전년대비 증가율은 5.1%에 그쳤다.M3 증가율은 지난해 1분기만 해도 12.4%에 달했으나 2분기 9.6%,3분기 8.1%로 떨어지다 4분기에 5.4%로 급락했다.M3는 돈이 얼마나 활발하게 돌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통상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합한 것을 적정 증가율로 친다.올해 경제성장률은 5%대,물가상승률은 3% 안팎으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8%는 돼야 한다는 얘기다. 반면 정책당국의 대응여지는 극히 좁은 상황이다.한국금융연구원 이명활 연구위원은 “자금이 안 도는 상황만을 고려한다면 금리를 올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방법을 쓰기에는 경기가 너무 안좋다.”면서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기도 힘들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더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사설] 추경, 단기부양책 돼선 안된다

    추가경정예산 편성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양상이다.열린우리당의 추경 편성 요구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정부가 엊그제 청와대에서 열린 비공개 경제장관 회의에서 추경 편성이 불가피한 쪽으로 가닥을 잡는 등 한나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경 편성은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정부는 열린우리당이 제시한 5조원 안팎의 추경 규모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하고 있어 조만간 공식 입장이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우선 추경 편성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한쪽에서는 경제 위기설을 일축하면서 추경 편성을 하겠다고 하면 국민들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여당의 성화 때문에 추경을 편성하는 것으로 의심할 여지도 있다.더욱이 국제 유가 폭등세로 국내 경제성장률 하락이 우려되는 등 추경 편성의 경기 진작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추경 편성의 목적은 단기적인 부양책이어서는 안 된다.우리는 외환 위기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추경을 투입했으나 경기침체를 고착화한 부작용을 빚었던 예를 잘 알고 있다.추경 재원의 일부는 국채 발행으로 조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그 때문에 추경 편성으로 경기회복 효과는 보지 못하고 국민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역효과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경제가 위기상황은 아니지만 경기 활성화나 민생 경제 회복을 위해 추경 편성이 불가피하다면 그 쓰임새가 관건이다.먼저 추경은 고용 흡수력이 높은 중소기업에 집중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연체율이 치솟는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보증기금 등의 보증 여력을 키워 안정적인 경영을 할 수 있게 하면 결국 내수 회복 효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실업기금 확충이나 인력을 채용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직업 훈련 등 고용 확대나 일자리 창출 부문에 집중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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