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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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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약하는 대학] “개인지도 엘리트 교육·인문학 강좌 차별화”

    [도약하는 대학] “개인지도 엘리트 교육·인문학 강좌 차별화”

    정병조 금강대 총장은 25일 대학의 특성화를 강조하면서 “지방에 인문학을 확산시키고, 한국 불교를 세계화하겠다.”고 밝혔다. 정 총장은 “10년 안에 재학생 수를 2000명으로 늘리고, 부설 중·고교도 세우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학생들이 우수하다. 이유가 뭔가. -개인 지도방식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이 가장 큰 요인이다. 풍부한 장학금과 전교생 기숙사 제공은 물론 외국어 교육 프로그램이 뛰어난 것도 이유다. →대학 운영에 중점을 두는 게 있나. -특성화다. 정부에서 취업률 등을 따져 평가하는데 옳지 않다. 대학이 취업자 양성소냐. 우리 대학은 불교학 중심의 인문학을 추구하고 특성화하고 있다. →취임 이후 2년간 특성화를 위해 한 활동은. -논산과 천안에서 인문학 강좌를 열었는데 예상 외로 인기가 좋았다. 지방 주민들이 고급 인문학 강좌에 목말라 있었던 것 같다. 이를 다문화 가정으로 확대하겠다. 한국어와 전통 놀이도 가르칠 생각이다. 또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고려대장경 1000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등 각종 국제행사를 많이 유치했다. 내년 5월에는 원효 등 고승들의 저서가 영어로 번역돼 미국 하버드대출판사에서 출판된다. 아마 해방 이후 처음일 것이다. →학교 규모를 키우겠다고 했는데. -10년 안에 학생수를 2000명으로 늘리겠다. 그래야 대학이 발전한다. 중국뿐 아니라 제3세계 학생도 유치할 생각이다. 내년에 불교특수대학원과 사회대학원을 개설한다. 이후 간호학과와 사범계열도 개설한다. 끝내는 평생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간호학과와 사범대는 왜 만드나. -천태종 산하에 사회복지시설이 많아 간호사가 많이 필요하다. 또 대학 부설 중·고교도 만들 계획이다. 금강대의 설립 취지를 이해하는 교사를 직접 배출해야 중·고교도 명문 학교로 키울 수 있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양사이버대 10주년 학술대회

    한양사이버대(부총장 유병태)는 23일 오전 10시 서울 성동구 행당동 캠퍼스 백남학술정보관에서 ‘사이버 교육: 지평의 확장, 삶의 변화’를 주제로 개교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제럼 글렌 유엔미래포럼 세계미래연구기구협의회장 등 이러닝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석한다. 24일 오후 3시 캠퍼스 올림픽체육관에서는 개교 기념식과 학과별 학술제 등 행사가 열린다.
  • 국립국어원 국제학술대회

    국립국어원(원장 민현식)은 20~21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세계화 시대의 자국어 진흥 정책’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언어제국주의’의 저자 로버트 필립슨(70) 덴마크 코펜하겐 경영대학원 교수가 기조연설을 하고 뉴질랜드, 헝가리 등 각국의 언어정책기관 대표들이 주제발표를 한다.
  • ‘여수엑스포 사후 활용 방안’ 한·중·일 학술대회 10일까지

    한국문화경제학회(회장 손원익)는 9~10일 이틀간 전남 여수 히든베이호텔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관계 전문가 1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여수엑스포 사후 활용방안’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한다. 국토해양부, 전남도, 여수시 등의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콘퍼런스에는 2005년 아이치엑스포를 연 일본, 2010년 중국 상하이엑스포를 연 중국의 전문가들이 참석해 엑스포 개최 이후 행사장 및 지역 문화·관광기반 시설 활용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 식물병리학회 21~30일 국제학술대회

    한국식물병리학회(회장 박은우)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오는 21~30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문화관에서 ‘세계화, 기후변화와 기술 융합:식물 병리학의 도전과 기회’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발표대회 및 워크숍을 연다.
  • 한국 古목판화 채색 없어… 中·日은 17·18세기에 발달

    한국 古목판화 채색 없어… 中·日은 17·18세기에 발달

    “중국은 17세기부터 채색판화가 발달했고, 중국의 채색판화를 받아들여 일본이 18세기 중엽부터 다색판화와 우키요에 등으로 가장 화려하게 발전시켰다. 반면 조선에서는 남송의 문인화 위주의 수묵화를 선호하다 보니 판화도 채색 판화가 없는 것 같다.” ‘한·중·일 목판화 특별전과 국제학술대회’를 기획한 한선학 명주사 주지이자 고판화박물관관장은 지난 8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한·중·일 3국의 판화를 이렇게 비교했다. 이런 비교 분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강원도 원주 신림면 황둔리에 있는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은 오는 12일부터 올 연말까지 ‘아시아 목판화 삽화 특별전’을 연다. 특히 12~14일 3일 동안에는 ‘제3회 원주 고판화 축제’라는 이름으로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와 ‘한·중 전통 판화시연회’ 등의 프로그램이 추가된다. 아시아 목판화 삽화 특별전은 아주 특별한 전시인데, 이 박물관이 소장한 아시아 고판화 유물 4000여점 중 목판화 원판과 삽화 200여점을 골라 선보인다. 몽골과 티베트의 목판 작품도 선보이는데, 국내에서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특별전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은 일본 에도시대 소설 삼국지와 초한지 등의 목판화 원판 각각 14점과 2점 등 모두 16점과 현대 만화의 효시가 된 목판화 화가 호쿠사이(1760∼1849)의 다색 화보 삽화 등이다. 특히 호쿠사이는 유럽에 ‘우키요에’를 널리 알리며 19세기 모네·고흐 등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일본 작가 중 하나다. 일본의 목판화 삽화를 보면 일본이 왜 디자인과 미술 쪽에서 강세를 보이는지를 잘 알 수 있단다. 일본 에도시대의 삼국지는 일본 대중들이 쉽고 재밌게 읽도록 간간이 삽화를 넣었는데, 그 섬세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목판은 금속활자판과 달리 많이 사용하면 마모되기 때문에 돌배나무나 자작나무 등과 같이 단단한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판화 원판으로 보통 책을 3000~5000부 정도 찍었다고 한다. 국내에 유일한 오륜행실도 목판도 선보인다. 이 목판은 지난 2006년 한 관장이 입수해 공개한 유물인데, 일제강점기 때 제 모습을 잃고 가운데 부분이 두 쪽으로 나뉜 채 4각의 일본 화로용 목함으로 변형된 상태다. 유물훼손의 사례로도 활용되는데 가장 아름다운 한글체가 오륜체였기 때문에 훼손됐더라고 그 가치는 유효하다. 한 관장은 “다색판화가 아닌 흑백판화는 국내에서도 19세기 중엽부터 언문반각본으로 많이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200여개의 소설을 찍었다면 소설당 50개의 목판이 필요했고, 약 1만 장의 목판 원판이 존재해야 하는데 전쟁 중에 다 소실됐는지 여성의 분곽으로 변형된 유충렬전 목판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흔히 ‘조 대비’로 널리 알려진 신정왕후(1808∼1890)의 칠순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 목판도 나온다. 한 관장은 “해인사가 고려시대 목판을 소장했다면, 명주사는 조선시대 목판과 아시아의 목판을 가지고 있다.”면서 “템플스테이까지 겸해서 역사 속으로 푹 들어가보라.”고 권유했다. 명나라 때 단색 판화로 만들어진 관세음보살과 관련한 그림도 아름답다. (033) 761-7885.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日 “中, 종전 후 센카쿠 영유권 침묵” 타이완 “美, 日에 넘길 권리 없었다”

    “우리는 미국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열도를 일본에 넘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은 입으로는 중립을 말하면서 행동은 중립적으로 하지 않는다. ” 존 차오 타이완 정치국립대 국제법 교수는 20일 타이완 타이베이 중앙연구원에서 열린 이어도연구회·타이완중앙연구원의 ‘이어도 국제학술대회’에서 댜오위다오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논평했다. 이날 이어도 분쟁 해결책보다 댜오위다오 문제가 더 뜨거운 소재로 떠올랐다. 차오 교수는 미국이 2차 대전 직후 냉전을 겨냥해 오키나와와 센카쿠 열도 일대에 군사기지를 짓는 등 행정권을 행사하다가, 1972년 오키나와에 댜오위다오까지 묶어 일본에 넘긴 행위를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이날 일본의 마사히로 미요시 아이치대학 해양법 교수가 “역사적 문제 때문에 분쟁 중인 지역이 있는데 이들의 해법은 해양법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탓이다. 그는 “2차대전 종전 후 일본은 오키나와와 함께 센카쿠를 넘겨 받았는데, 중국이 센카쿠에 대해 주권을 주장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유권에 침묵했다는 지적에 대해 가오 셩티 국립타이완 해양대 해양법 교수는 “1949년과 장제스(蔣介石)가 타이완으로 쫓겨오면서 새로운 국가를 세우느라 혼란스러워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1958년 중국과의 사이에 군사적 위기가 발생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타이완으로서는 자신들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미요시 교수는 이날 ‘독도 문제’에 대해서도 “다케시마가 과거부터 조선의 어부가 개인적으로 오갔다는 것만으로는 주권을 선언한 것으로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해, 최연홍 이어도연구소 연구위원와 차오 교수로부터 “독도와 댜오위다오가 역사적으로 각각 한국령·중국령이라는 증거를 갖고 있다.”는 반박을 받았다. 타이베이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전북 올 해외연수 공무원 257명 vs 홈페이지 공개된 보고서 2건

    전북도청 공무원들이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할 보고서를 대부분 홈페이지에 올려놓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11일 전북도에 따르면 공무원 국외여행규정은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20일 이내에 보고서를 작성해 자치단체 홈페이지에 공개토록 하고 있다. 보고서를 제때 제출하지 않거나 보고서가 부실한 공무원은 해외연수를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그러나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보고서를 외부에 공개한 전북도청 공무원은 극소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올 들어 해외 연수를 다녀온 도청 공무원은 119차례에 걸쳐 257명에 이르고 있지만 현재까지 도청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보고서는 2건에 지나지 않는다. 올 3월 이후 실시된 해외연수는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공개된 보고서는 올 1월과 2월 실시된 해외연수로 ▲일본 동북아관광학회 포럼과 국제학술대회 참석 ▲도민의 삶의 질 향상방안 연구사례수집과 국책사업 아이템 개발 등이다. 그나마 공개된 보고서도 내용이 충실하지 않아 부실한 보고서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해외연수 보고서를 보기 위해서는 자치단체 홈페이에서 행정안전부에서 운영하는 ‘국외출장연수시스템’으로 접속해 공무국외여행보고서-보고서 검색-기관선택-자치단체 선택 등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에 대해 전북도 관계자는 “해외연수를 다녀온 뒤 모든 직원들이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행안부 시스템과 연동이 안 돼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오는 10월쯤에는 상당 부분 공개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한편 국민권익위는 공무원 해외연수의 내실화를 위해 사전 계획서와 사후 보고서를 외부에 공개하도록 전북도에 권고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다른 시각과 대립적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 적으로 규정하면 안 돼”

    “다른 시각과 대립적일 수 있지만 민주주의 적으로 규정하면 안 돼”

    “캐나다 정치인 가운데는 영국 여왕에 대해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다. 퀘벡주에서는 캐나다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원이나 시민들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들은 좋은 의원이고 시민이지만 캐나다 납세자들의 돈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현재의 시스템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이들 중에는 외부에서 정치자금을 받아서 정치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만 국가소요를 일으키지 않는 정치자금이어야 한다.” 러시아 출신의 영국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평전 저자로, 한국에서 책을 출판한 기념으로 방한한 마이클 이그나티예프(65) 토론토대학 교수는 14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국회 제명 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하원의원으로 2008~2011년 캐나다 자유당을 창당해 당수를 맡았던 이그나티예프는 자신의 정치경험을 털어놓은 것이라며 “캐나다 전체 국민과 퀘벡 주민들이 이렇게 다르다.”고 덧붙였다. 이그나티예프는 아산정책연구원이 기획한 ‘아산 냉전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첫 번째 행사로 지난 13일 열린 ‘이사야 벌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강연회에서 1시간 남짓 벌린은 누구인가에 대한 대중 강연을 한 뒤 전문가들의 일문일답을 받았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그는 강연에 앞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보면 한국은 아주 중요한 나라이고 앞으로 경제발전을 꿈꾸는 국가이거나 자유민주주의를 꿈꾸는 나라가 있다면 한국이 그 모범이 될 것”이라면서 “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북한에서는 이런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자유주의자인 벌린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벌린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맥을 들여다봐야 한다. 벌린은 추상적인 상태에서 자유주의의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10대에는 러시아 차르의 폭정과 억압을 지켜봤고, 20대에는 목재상을 하는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던 러시아를 피해 영국으로 도피한 뒤 그곳에서 부르주아적인 자유와 삶을 즐겼다. 대공황시대를 관통하던 30대에는 영국의 좌파 지식인들이 소련으로 전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비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적 좌파들과 갈등하며 자유주의를 형성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워싱턴에서 미국의 냉전주의자들과 만나고 매카시즘 등을 보면서 냉전시대의 자유주의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친미주의자이기도 했던 벌린은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연한 뒤 만찬을 하며 소련의 의도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벌린은 운좋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 폴란드와 체코·헝가리가 자유를 얻는 것, 민주주의가 러시아로 가는 것도 목격했다.” 자유주의자이기는 했으나 벌린은 1960년대 반핵운동에 반대하며,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력을 믿었다고 했다. 미국의 매카시즘을 목도한 그는 반(反)공산주의가 탄압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다원주의적 관점을 확립해 나간다. 자유주의가 반(反)자유주의가 되는 상황, 다수가 민주주의를 악용해 탄압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것을 본 뒤, 벌린은 소수에 대한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벌린이 인권보호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된 배경이다. 이그나티예프는 “자유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을 파괴한다는 입장이지만, 정치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필요한 야당과 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면서 “시민이나 국민 전체가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며 이견이나 다른 태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대립적일 수는 있지만, 적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면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일사불란한 정당정치 지향하는 사회에 지적성찰 줄 것”

    “일사불란한 정당정치 지향하는 사회에 지적성찰 줄 것”

    “1989년 전세계적으로 냉전이 종식됐지만, 2012년 한국은 여전히 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여야 하는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의 냉전을 끝내는 방안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1949~89년 냉전 속에서 서구의 정치사상가들은 이를 끝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를 학문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함재봉(54)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은 10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연구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오는 14일부터 ‘아산 냉전자유주의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국제학술대회를 내년 6월까지 6차례에 걸쳐 진행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함 원장은 “냉전시대를 관통해 온 서구의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낯설게 느낄 수도 있지만, 개개인의 이성의 힘과 자유에 대한 무한한 믿음이 민주주의를 위협해 온 전체주의를 깼다는 점에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철학이 어렵기 때문에 그 인물의 전생애를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에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덧붙였다. 냉전자유주의 프로젝트는 14일 오전 10시 러시아 출신의 영국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 평전을 쓴 마이클 이그나티예프의 강연회부터 시작된다. 2개월 간격으로 영국의 마이클 오크숏,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 칼 포퍼,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 일본의 마루야마 마사오 등의 사상을 소개할 예정이다. 함 원장은 “1948년 건국을 했으나 자유주의의 맛을 한번도 보지 못했고, 여전히 일사불란한 정당정치를 지향하는 한국사회에 새로운 지적 충격을 안겨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아·태보험학회 국제학술대회

    아시아·태평양보험학회(조직위원장 정홍주)는 오는 22~25일 성균관대 인문사회과학캠퍼스 조병두국제홀에서 ‘보험의 국제화와 사회경제발전’을 주제로 제16회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 [Weekend inside] 올해만 20여명… 노벨상 수상자 방한 급증 논란

    [Weekend inside] 올해만 20여명… 노벨상 수상자 방한 급증 논란

    세계 최고의 석학인 노벨상 수상자들의 한국행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고 있다. 올 들어 한국을 찾았거나 7월 방한이 확정된 수상자는 18명에 달했다. 지난 3월 200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존 번 델라웨어대 교수를 시작으로 이달 말까지 평균 일주일에 한 명 이상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한 해 평균 3~5명의 수상자들이 찾았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다. 하반기에도 문학상 수상자 3명이 방한할 예정이다. 올해만 20명 이상의 수상자를 국내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수상자들의 잦은 방한은 각종 학회 및 심포지엄 등에서 앞다퉈 초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회 및 심포지엄 등 행사 주최 측에서는 “행사의 ‘품격’을 높이는 동시에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석학들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경쟁적인 섭외 탓에 수천만원대의 비싼 비용을 지출하는 데다 한 해에 두세 차례씩 한국을 찾는 수상자들도 등장, ‘식상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방한한 수상자들은 물리학상·화학상·의학생리학상뿐만 아니라 문학상·평화상·경제학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학회나 엑스포, 심포지엄 등의 기조연설자 자격으로 입국, 특별 강연회를 갖는다. 생화학분자생물학회는 지난달 연례국제학술대회에 2006년 의학생리학상을 받은 앤드루 파이어 미 스탠퍼드대 교수와 2008년 화학상 수상자 마틴 챌피 컬럼비아대 교수를 초청했다. 학회 측은 “노벨상 수상자의 참석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면서 “반응도 호평 일색이었다.”고 말했다. 행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다. 수상자들의 방한은 한국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도 직결돼 있다. 섭외가 그만큼 쉬워진 것이다. 대한화학회의 한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에 와 달라고 하면 일본을 가는 길에 거쳐 가거나 사양하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한국 과학의 수준이 높아진 데다 대중 강연의 반응이 좋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먼저 접촉해 오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높은 ‘몸값’, 초청 비용이다. 학문 분야와 수상 연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상자들은 대체로 한 차례 강연에 최소 2000만원 이상을 받는다. 1등석 왕복 비행기표와 특급호텔 숙식 등 체재비는 별도다. 배우자 동반에 따른 비용도 초청자 측의 몫이다. 최근 수상자일수록,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분야일수록, 경제학상 수상자일수록 초청 비용이 비싸진다. 이들의 경우 강연비용만 5000만원을 훌쩍 넘는 사례도 흔하다. 이 때문에 몇몇 수상자는 일년에 두세 번씩 찾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행사 주최 측이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학회를 준비하는 한 관계자는 “윗사람들이 꼭 수상자를 섭외해야 한다고 해서 20~30년 전 수상자까지 찾아보고 있다.”면서 “학문적 흐름과도 상관없고, 매번 똑같은 강연만 해 기피 대상이 된 수상자라도 데려오라는 식”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노벨상 수상자를 초청했던 한 학회장은 “노벨상에 대한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연구에 대한 집념이나 아이디어 등을 본받을 수 있을 만한 인물인지 등을 충분히 따져 초청하면 비용이 아깝지 않다.”면서 “경쟁적인 초청은 노벨상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상법 제정 50주년 국제학술대회

    한국상사법학회(회장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6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국제회의장에서 ‘상장회사 규제의 주요 쟁점과 개선방안’이라는 주제로 상법제정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 “日정부, 청구권 완료 주장은 억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은 당시 적용된 국제법 기준으로 볼 때 조약체결의 형식과 절차상 전권위임장이 없거나 비준서가 없어 이미 하자가 발생한 무효이자 불법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이 합법이라는 전제로 미국과 일본이 체결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이나, 이 조약의 영향을 받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의 배상 책임이 완료됐다는 주장은 억지다.” 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22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한일협정체제와 식민지 책임의 재조명’에서 ‘위안부’와 ‘강제징용’에 대한 청구권이 완료됐다는 일본의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도 연구위원은 ‘식민지 책임의 관점에서 본 대일강화조약과 한일협정’이란 논문에서 “2006년 유엔 국제법위원회(ILC)가 국가 간 우호적 관계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외교보호 초안을 내놓았다.”면서 “따라서 일본정부는 대일 개인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하지 말고, 국제법 관례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한국을 배제하고 맺은 배상조약이라는 한계가 있고, 또한 미국이 아시아에서 냉전체제 구축을 위해 일본의 전후배상을 최소화하는 등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지적했다. 도 연구위원은 “강화조약의 2조에서 독도가 한국영토에서 누락됐다는 이유로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이 조약의 23조에서 ‘본 조약에 서명한 나라에 의해 비준된다.’고 했기 때문에 조약 당사국이 아닌 한국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 연구위원의 이런 주장은 지난 5월 24일 대법원이 일제강제징용 피해배상 소송에서 “불법인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합법으로 보는 일본 판결은 우리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그 효력을 승인할 수 없다.”고 내린 판결과 맥이 닿는다. 이와 관련, 오오타 오사무 도시샤대 교수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로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단체나 학자들이 상당히 고무됐다.”고 밝혔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노동자 등의 대일 청구권이 모두 소멸했다는 일본 정부의 입지는 최근 크게 좁아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영돈 인천대 법학과 교수는 “한국학자들이 한일병합의 불법성에 대한 연구를 강화해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성실한 사과와 손해배상을 받아야만 한다.”면서“그렇지 않다면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강조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병일 사람과 향기] 임진전쟁 7주갑에 조선 선비들 생각한다

    [김병일 사람과 향기] 임진전쟁 7주갑에 조선 선비들 생각한다

    올해는 임진전쟁이 발발한 지 7주갑(420년)이 되는 해이다. 동양은 예로부터 간지(干支)로 연, 월, 일을 계산했기 때문에 7주갑은 오늘날로 말하면 400주년이나 500주년처럼 뜻깊은 해이다. 이에 따라 7주갑을 기념하여 임진전쟁의 의미를 기억하고자 하는 많은 행사들이 경향 각지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2일 안동에서 동시에 열린 서애 류성룡 선생 사제사(賜祭祀:나라에서 내리는 제사)와 7주갑 기념식을 필두로 19일에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임진전쟁 7주갑, 그리고 420년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개최됐다. 29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임진전쟁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적극적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세를 얻는 느낌이어서 한편으로 반갑다. 사실 임진전쟁을 조선이 일본군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명나라의 구원으로 겨우 명맥을 부지하고, 이어 어렵게 강화에 이르러 운좋게 국체를 보존한 전쟁으로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쟁에 관여한 3국 가운데 전후 국체를 보존한 나라가 조선뿐이라는 것은 역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힘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무엇보다도 조선 선비들의 역할을 꼽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국난 자체를 초래한 책임을 물어 당시 선비들의 역할을 깎아내리지만, 이는 원론적인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전쟁과 같은 국가적 재난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한 시대 사회적 지도층의 역사적 책무를 평가하는 데 있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불가피하게 국난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어떤 자세들을 보였는가 하는 점이다. 임진전쟁 당시 많은 조선의 선비들은 국난을 초래한 책임을 통감하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조야(朝野)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특히 선비들이 이끈 의병의 활약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활동한 의병의 수는 2만 3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붓 대신 칼을 든 이들은 일본군의 진격을 지체시키거나 퇴로를 차단하는 활동을 펼쳤다. 개전 초기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막아 조선의 곡창지대를 지켜낸 정암진 전투를 비롯하여 당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이들은 관군을 대신하거나 관군과 협력하면서 전세 반전의 발판을 만들어 나갔다. 금산의 칠백의총(七百義塚)이나 민·관 3000여명이 옥쇄(玉碎)한 남원성 전투 등의 예에서 보듯이,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조선 선비들의 활약은 의병활동에서만 두드러졌던 것이 아니다. 류성룡 선생처럼 선조의 명나라 망명을 반대하고 전황을 몸소 점검하며 이순신과 같은 인재를 발탁하여 미래를 대비한 이들도 조선의 선비들이다. 조선 선비들의 이러한 행동들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왜 개인적 안위를 돌보지 않고 몸을 던졌을까? 여러 가지로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공동체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기꺼이 목숨을 던져 이를 구하는 데 앞장섰던 ‘견위수명’(見危授命)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이 핵심이 아닐까 한다. 임진전쟁 당시 개인의 안전보다 공동체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조선 선비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요청되는 사회적 덕목이다. 이 점에서 임진전쟁 7주갑이 전쟁을 실질적인 승리로 이끌었던 조선 선비들의 그런 삶의 자세를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는 곧 ‘해석의 역사’라고들 한다. 억지해석에 토대를 둔 견강부회도 곤란하겠지만 필요 이상의 자학적 역사인식도 문제이다. 부정적인 유산은 반드시 버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옥석(玉石)을 구분하는 혜안마저 잃어 버려서는 발전이 없다. 임진전쟁 7주갑 해에 맞는 호국의 달을 보내며 조선의 선비들을 다시 생각하는 이유이다. 한국국학진흥원장
  • “간화선 공안은 1700개 아닌 2720개”

    “간화선 공안은 1700개 아닌 2720개”

    흔히 불교에서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라고 한다. 서산대사의 일갈로도 유명한 이 경계는 불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제이다. 하지만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간화선이 근간을 이루는 한국불교에서 이 명제는 무시되곤 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내세우는 간화선의 영역에서 말·글로써 논리를 세워 이치를 설명하는 교학은 배척되기 일쑤인 것이다. 그러면 이 선(禪)과 교(敎)는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의 영역일까. ●6개국 32명 학자 참가… 논문 12편 발표 동국대 국제선센터(선원장 수불 스님)와 동국대 불교학술원 산하 종학연구소(소장 종호 스님)가 23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간화선과 불교교학’을 주제로 마련하는 국제학술대회는 간화선과 교학과의 관계를 정색하고 짚어보는 첫 자리여서 눈길을 끈다. 2010년 간화선의 등장 배경과 전개과정, 2011년 간화선의 수행원리와 구조를 살핀 데 이어 세번째로 열리는 올해 학술대회에는 한국과 미국, 태국, 호주, 일본 등 6개국 32명의 학자가 간화선과 교학의 관계를 집중 조명한다. 23, 24일 이틀간 동국대 중강당에서 발표될 논문은 모두 12편. 이 가운데 미국 모레이비엔 대학교 제니퍼 에이흐먼 교수와, 태국 마하출라랑콘라자위달라야 대학교 프라마하 노파돌 사수타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새로운 사실을 발표할 예정이어서 벌써부터 불교계의 관심을 모은다. 이들은 각각 ‘지금의 1700공안(화두)을 마냥 답습할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주장과 ‘초기 경전에도 공안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다.’는 이론을 내놓는다. 먼저 에이흐먼 교수는 1714년 72책으로 편찬된 공안집 ‘종감법림’에 무려 2720개의 공안이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불교에서 변함 없이 주장되는 1700공안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대덕들 어록 전파 안되는 건 큰 손실” 에이흐먼 교수는 1700공안이란 문구는 송대 후기 중국 선과 17세기 일본의 불교정책에서 고착된 개념일 뿐 중국 공안을 완전히 대변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중국 선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가 주로 송대 공안집에 맞춘 탓에 후속 세대에서 발견되고 집대성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에이흐먼 교수는 따라서 “심산유곡의 존경받는 대덕들의 어록이 더 이상 세상에 전파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손실이며 단순히 기존 공안을 기계적으로 외우거나 전통적인 공안집에서 깨달음을 드러내며 과시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국 사수타 교수의 주장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사수타 교수는 “‘팔리 경전’에 공안이며 간화선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공안을 의미하는 수행법은 있었다.”고 주장한다. 공안은 붓다 이후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사용해온 방법 중 한 가지로, 비록 공안수행법이라 불리진 않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 팔리 삼장구조나 주석에서 이런 개념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수타 교수는 “태국 현대 공안 가르침 역시 수행자들을 고무시키기 위해 유명한 스님들이 항상 사용해 왔다.”며 실제로 태국에서 간화선을 수행하는 6명의 수행자를 소개할 예정이다. ●간화선 참선 수행 체험·선지식 대담 종호 스님은 이와 관련, “공안이 1700개가 아닌 2720개였고, 간화선을 실참하는 남방불교 수행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다.”며 특히 “간화선 수행자는 교학을 통해 수행에 바탕이 되는 불교의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학술대회가 끝난 뒤 25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해외 학자와 국내 스님 등 75명은 공주 마곡사에서 수불 스님 지도 아래 간화선 참선 수행을 체험하며 7월 2, 3일에는 문경 봉암사, 봉화 축서사, 충주 석종사에서 국내 선지식과의 대담도 마련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日여대생, ‘명성황후 시해’ 강의 듣다가 갑자기…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김문이 만난사람] 한국역사 연구 40년 ‘새韓國史’ 펴낸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만약 헝클어졌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또한 역사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누가? 여기 한 역사학자의 열정을 잠시 살펴본다. 2004년 6월 24일 일본 도쿄대학 고마바 캠퍼스 총합문화학과 강의실. 한국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하는 날이었다. 강의실에는 이 대학 대학원생 20명 안팎이 자리했다. 교수 4~5명도 참석했다. 한국 교수의 근대사 강의, 특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 한일병합 등에 관련한 집중 강의여서 그런지 분위기가 매우 진지했다. 강의가 끝나자 학생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한 학생은 제출한 리포트에서 ‘메이지(明治)시대 때 국가 운영체계를 존경했는데 그 지도자들이 한국에 대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역사상이 흔들린다.’면서 한·일 관계사를 새롭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왕비 시해사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도 있었다. 어떤 교수는 “이 강의가 씨앗이 되어 훗날 큰 나무로 자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매우 감명 깊어했다. 이 한국인 교수는 이후 7월 15일까지 집중강의와 특별강연 등으로 일본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앞서 이 교수는 2003년 9월부터 1월까지 한 학기 동안 하버드대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로 강의를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버드대 동아시아 언어문화학과 대학원에서 ‘조선왕조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적 연구’라는 두 과목 강의를 했던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1988년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던 시절, 규장각 소개책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에 결정적 근거가 된 ‘반출경위 문건’을 찾아낸 역사적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 지휘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한 건물에 5000여권의 책이 있는데 그중 우리 국립도서관에 소장할 340여 책은 싣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고 간다.’라고 적은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20년 동안 노력 끝에 프랑스로부터 도서반환이란 큰 결실을 얻게 된다. 이 같은 역사 바로잡기 외에도 1910년 ‘한일병합’이 순종 황제의 서명 없이 불법적으로 자행된 근거를 밝혀냈다. 이어 일본 도쿄국립공문서관에서 이를 입증할 ‘일본측 한일병합 조서’ 등 여러 불법 증거물을 찾아낸 끝에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 역사학자 500명이 서명한 ‘한일병합은 불법’이라는 성명서 발표를 주도했다.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70) 국사편찬위원장. 이러한 일련의 업적은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찾으려는 이 위원장의 일관된 열정과 뚝심에서 비롯됐다. 그는 최근에 또 하나의 역작 ‘새韓國史-선사시대에서 조선후기까지’를 펴냈다. 이 책은 40여년간 연구생활 끝에 상재하게 된 한국통사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이 책은 일국사(一國史)의 틀을 벗어나 동아시아로 시야를 넓히면서 한국사에서의 ‘외계충격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외계충격설’도 궁금했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중국의 ‘신만리장성 발표’ 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만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어렵고도 지난한 우리 역사를 올곧게 연구해오면서 꼬인 결을 바로잡는 작업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먼저 최근 펴낸 ‘새韓國史’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외계충격설’이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외계충격설은 우리의 전 역사에 흐르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부터 조선시대 중기의 전란과 민생 피폐로 인해 혼란했던 역사의 원인을 밝혀 보는 일을 해 왔습니다. 그 원인이 됐던 장기 재난현상의 발생에 대해 연구하던 중 외계충격설(Theory of Terrestrial Impact)을 접하게 됐지요. 외계충격이란 소행성과 혜성 등의 지구 근접물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서 공중폭발하거나 지구표면에 충돌하는 것을 말하지요. 과학자들에 따르면 화성과 목성 사이에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바윗덩어리들이 떠돌고 있는 소행성 벨트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생대-중생대-신생대로 바뀐 이유가 초대형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과학자들은 입증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역사속에 생긴 장기 재난도 바로 이런 외계충격현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남쪽 농경지대로 이동해 동아시아 전체가 격동속에 놓이게 되며 그 동요속에 한민족은 어떻게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하는 것들이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이 같은 흔적과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단다. “조선 중기사회의 동요와 혼란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의 ‘실록’에서 조선왕조 470년간 있었던 자연의 이상현상들에 관한 기록들을 모두 발췌해 분석, 정리한 적이 있지요. 이때 조선 중기 270여년간 대량의 유성이 지구 대기권에 돌입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위원장은 이번 책을 통해 새로운 역사 학설, 즉 ‘외계충격설에 의한 장기 자연재난 현상 연구’를 처음 공식적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에 대해 그는 “너무 성급하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논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회의적인 의견이 나올 수 있다.”고 하면서 “하지만 만약 서구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실록’과 같은 자연재난에 관한 장기 기록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미 학설로 굳어졌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지난 4월 우리 ‘실록’에 기록된 외계충격 현상을 토대로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때 참석한 외국 학자들이 ‘실록’은 참으로 대단한 것인데 왜 지금까지 서양에 알리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화제를 돌렸다. 중국의 만리장성 길이 발표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중국은 대중화주의 차원에서 현재의 영토 안에 들어온 것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이 갖고 있던 개별적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현재 중국에서 장성이라고 할 때 두 가지 용어를 씁니다. 명대의 만리장성과 그외 각 지역에 있는 성곽(장성)을 말하지요. 이번 중국의 발표를 볼 때 새로 조사한 장성들을 명대의 것과 확실히 구별해야 하는데 (발표문이)애매하게 돼 있어 오해를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만리장성 길이가 총 2만 1196.18㎞에 달한다는 중국 측 발표내용은 일선으로 쭉 이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만리장성과 역대 수축된 장성의 길이를 모두 합산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야 한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중국 측이 장성 보존정책을 펴기 위해 장성의 실태를 파악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나 발해지역에 있는 각 산성들은 중국의 장성과 달리 고유한 형태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계속 밝혀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가 조사한 것을 가지고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꾸준히 세계에 알리면서 학술적으로 단단하게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거듭 역설했다. 이 위원장은 오는 9월이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업적이 많다.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조선왕조실록 영문번역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제가 국사편찬위원장에 취임할 때 조선왕조실록의 영문번역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예산 확보를 끝내고 2033년 완역을 목표로 지난 1월부터 영역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현재 기초 조사를 하면서 번역인원 등을 확보하고 있지요. 또 기본적으로 용어정리 및 용어통일의 문제 등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앞으로는 ‘실록학’도 새롭게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영일에서 자랐다. 초등학생때의 꿈은 화가였다. 그러던 그가 고 3때 역사공부를 하라는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면서 꾸준히 역사연구에 천착, 오늘날 국사학계의 거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는 요즘 ‘새韓國史’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미지 중심의 외계충격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책을 곧 펴내는 일이다. 이왕 시작한 김에 ‘외계충격설’을 새로운 학설로 정립하겠다는 의욕이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이태진 위원장은 2003년 하버드大 첫 한국어 강의…한국교수로 도쿄大 한국사 첫 수업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거쳐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 교양과정부 및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를 했다. 1977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를 2009년까지 역임했다. 1988년부터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을 당시 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과정을 밝혀내고 환수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003년 하버드대에서 사상 첫 한국어로 강의했으며 2004년에는 도쿄대에서 한국 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사를 강의했다. 그동안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및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학술원회원,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재임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사회사연구’(월봉저작상), ‘조선유교사회사론’(치암학술상),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백상출판저작상), ‘한국 병합의 불법성연구’(공저),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메이지 일본의 한국침략사’, ‘조약으로 본 한국병합-불법성의 증거들’(동북아재단) 등이 있다. 이 밖에 다수의 공저와 180편의 논문이 있다.
  • 대구, 통합의료 중심지 변신

    대구가 통합의료 중심지로 변신한다. 통합의료는 양의와 한의, 보완대체 의학(명상, 바이오요법) 등을 한데 아우르는 것으로 특정 의료의 한계를 뛰어넘어 환자의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하고자 하는 미래형 의료를 말한다. 미국의 세계적 암 치료 전문병원인 앰디앤더슨과 하버드 부속 데이나파버 암 연구소 및 독일, 프랑스에서도 동서 의학 전문병원을 설립해 시도하고 있다. 대구시는 최근 한국과 중국이 국가 차원에서 통합의료의 공조체계를 갖추기 위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고 21일 밝혔다. 학술대회에는 중국의 4대 병원으로 꼽히는 광둥, 슈광, 장슈, 푸단 암센터 등 핵심 연구진 25명이 참석했다. 국가 차원에서 보다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통합의료의 치료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오는 10월에는 대구에서 미국과 중국 연구진이 참가하는 통합의료 국제학술대회가 다시 열린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각 나라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학술지 발간과 치료수단 개발도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할 계획이다. 시는 이미 지난 2008년 대구가톨릭의료원과 대구한의대의료원을 기반으로 통합의료진흥원을 설립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정약용 탄생 250주년 맞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김문이 만난사람] 정약용 탄생 250주년 맞은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누구나 출생의 비밀은 있다. 이름을 빛낸 위인의 경우에는 더욱 관심이 쏠린다. 그 비밀의 문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250년 전인 음력 6월 16일, 아버지 하석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아버지는 대과에 급제하지 않았지만 영조 임금의 특별한 지시로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군수 등 고을 수령을 지냈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호조좌랑과 한성서윤을 지내고, 다시 수령으로 나가 울산부사를 거쳐 진주 목사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고산(孤山) 윤선도의 후손이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손녀였다.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한국 회화사에 유명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세 부인 사이에 모두 5남 5녀, 그러니까 10남매가 있었다. 첫 부인은 24세로 요절한 의령 남씨. 소생으로 큰아들 약현(若鉉)이 있다. 둘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若銓), 약종(若鍾), 약용(若鏞) 3형제와 딸을 두었다. 딸은 나중에 조선 최초의 영세교인인 만천(蔓川) 이승훈에게 시집간다. 다산 정약용의 나이 9세 때 어머니 해남 윤씨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12살 때 서울에서 20세의 김씨(1754~1813)를 데려왔다. 어린 다산을 친자식처럼 돌봐준 그가 바로 서모(庶母) 김씨다. 서모 김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의택(金宜澤)의 딸로 슬하에 3녀 1남(약횡)을 두었다. 다산의 작은형 약종은 형제보다 뒤늦게 천주교를 접했지만 그 믿음이 독실하여 신유사옥 때(1801) 희생됐다. 전도에 힘쓰다가 책롱사건(册籠事件)으로 마흔 둘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형 약전과 막내(다산)가 믿음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제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했다. 엄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약종의 아들 철상(哲祥), 하상(夏祥), 딸 정혜(貞惠) 역시 천주교로 인해 요절했다. 형 약전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다.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의 인연뿐만 아니라 다산의 학문을 알아주는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1801년 11월 하순 함께 귀양길에 올라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로 헤어진 후 16년 동안 서로 한번도 보지 못했다. 약전은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떴다.(다산연구소 자료 참조) 올해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 다산의 생애와 학문, 사상을 재조명하는 행사가 풍성하게 열린다. 국립박물관과 실학박물관의 전시회, 음악제, 국제학술대회 등이 잇따른다. 지난 3월부터 올 12월까지 계속된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다산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판소리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다산연구소 주최로 열리는 이 행사는 오는 9월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해석 명창에 의해 1시간 20분동안 진행된다. 창본은 김세종씨. 특히 영문판 CD까지 제작, 세계 각국에 보급할 예정이다. 그동안 부분적으로 다산을 기리는 판소리 무대는 있었지만 75년 생애를 오롯이 담기는 처음이다. 이 밖에 다산이 직접 쓴 글씨와 그림을 전시하는 ‘한국 서예사 특별전-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전’이 다음 달 9일부터 7월 23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다. 또 다산 기념 음악회가 8월 24일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열린다. 다산연구소의 박석무(69) 이사장. 그는 요즘 이 같은 행사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는 올해로 다산 연구에 몰두한 지 40년째가 된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순화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이사장은 연구소 설립 이후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편지를 지금까지 700여회 쓰고 있다. 자리에 앉으면서 최근에 쓴 편지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대군(大君)이다, 멘토다, 실세 중의 실세다라는 사람들의 감옥행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딱하고 국가 체면도 구겨질 대로 구겨져 버렸습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큰소리치면서, 그들을 그런 직위에 임명했던 임명권자의 입장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중략)화려했던 권력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제 부와 권세를 놓치고 감옥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분들, 그런 기회에 목민심서라도 읽으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요.’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감옥행을 보면서 다산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 또 있다. ‘정약전·약용 형제는 세상에 없는 지기지우인 동포 형제였습니다. 두 분이 주고 받은 편지나 학문적 토론의 글들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는 사이였습니다.(중략)오늘의 세상에야 사촌이 남이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친형제조차도 재산 싸움에 남보다 더 원수지간이 되고 있음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재벌가의 왕자난이나 쟁송(爭訟)의 보도를 읽다보면 다산 형제의 우애가 세상을 바로잡을 청량제로 여겨집니다. 오늘에도 그런 형제애를 복원할 수는 없을까요.’ 이런 편지의 내용은 전국 35만 4000여명에게 이메일로 보내진다. 일주일에 주말을 제외한 4~5차례 꼬박꼬박 쓴다. 어리석은 질문 하나, 박 이사장은 목민심서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몇 번 읽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 현상을 보면서 문득문득 목민심서나 논어를 다산적으로 해석한 글들을 생각날 때마다 다시 뒤적이고 그 뜻을 가슴에 담지요. 수시로 읽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편지 쓸 때에도 다산의 눈으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대학이나 단체 등에 강의 나갈 때도 다시 목민심서를 읽고 가지요. 성균관대에서 ‘다산과 21세기’라는 교양과목 강의를 하고 있는데 아주 명품강좌로 소문났다지요(웃음).” 지금도 틈 날 때마다 다산을 연구한다는 그는 대학 시절부터 ‘반계수록’ 등 실학에 관심을 두었으며 1971년 대학원 때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석사 학위논문을 쓴 것을 계기로 다산 연구와 인연을 맺었다. 1973년 유신에 항거하다 투옥됐을 때에 다산의 책을 여러 차례 읽었고 이후 8개월 수배 생활 동안에도 다산을 공부했다. 1982년 3월 복권됐을 때 비로소 7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해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편역,발간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50여쇄나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인기를 끄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다산은 학문의 깊이가 끝이 없는 최고의 학자이자 사상가입니다. 다산은 52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통해 정치, 행정, 법학, 경제, 지리, 의학, 공학 등을 아우르면서 인간존중 사상, 개혁정신, 실사구시의 철학 등을 펼쳐 시대정신으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학자로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안목과 방대한 지식을 섭렵하고 있지요. 특히 유배지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인간성과 철학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다산이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같은 한 줄기의 민중적 의지로 75년동안 치열하게 살다 간 역사적 인물이지요.” 가난에 찌들어 굶어 죽어가는 이웃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공동 경작에 의해 공동분배하도록 하자고 혁명적인 전론(田論)을 주장하기도 했고 부정부패와 착취를 일삼는 관리들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생각으로 돌아서게 할 수 있을까 해서, 관리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 그리고 시를 통해서 백성들을 일깨워 보고자 했던 그의 생애는 250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르고 연구하려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다산은 22세때 진사과에 합격했는데 정조임금이 답안지를 직접 읽고 휼륭한 인재임을 알고는 근처에 있도록 하면서 자주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시문행사때마다 항상 1등을 차지하는 다산을 늘 아꼈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정조는 다산을 통해서 사실상 정치를 바로 할 수 있었고 그런 다산은 정책 보고서를 임금에게 직접 올리게 됩니다.” 박 이사장은 가정의 달을 맞아 “요즘처럼 가족윤리가 무너지고 사제 간의 의리도 깡그리 파괴된 때, 우리는 다산의 사상과 철학을 통해 가족의 중요함과 사제간의 정다운 의리를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다산의 효제(孝悌)사상을 새삼 강조했다. 다산의 탄신일과 관련해서는 “1762년 6월 16일에 태어났는데 그날이 양력으로 8월 5일이어서 생일 기념은 매년 8월 5일에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도 그날에 회혼례, 산신제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석무 이사장은 1942년 전남 무안에서 4대째 한학을 공부해온 집안에서 자랐다. 전남대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 운동에 투신, 4차례 옥고를 치렀다. 1971년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면서 다산 연구에 집중했다.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 동안 복역하면서 감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의 시간을 가졌다. 출옥후에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발간했다. 지금까지 50쇄나 찍을 정도로 꾸준히 읽히고 있는 명저가 됐다. 1980년 광주항쟁 때는 관련 주모자로 몰려 오랜 수배생활 끝에 붙잡혀 1년 3개월여를 또다시 복역했다. 1988년 13대 국회에 진출한 후 14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회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 간사를 맡아 활동을 펼쳤다.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과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연세대학교 초빙교수, 전남대학교 초빙교수와 단국대학교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석좌초빙교수이자 (사)다산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술로는 ‘다산기행’, ‘우리 교육을 살리자’,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1,2’,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가 있으며, 편역서로는 ‘흠흠신서’, ‘애절양’, ‘다산산문선’,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및 ‘다산 논설선집’, ‘다산 문학선집’(공편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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