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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국운이 상승하고 있다/김경민 한양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열린세상] 국운이 상승하고 있다/김경민 한양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국운이 상승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지나간 근대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한국전쟁이 일어나 그야말로 폐허의 밑바닥에 내동이쳐졌던 한국이었다.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겨우 기운을 차려 가던 한국이 드높은 교육열과 잘살아 보겠다는 각오가 있어 산업화를 이루고 세계 제9위의 무역대국이 되었다. 국운 상승의 증거가 되는 첫번째 쾌거는 한국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자리를 또 한번 따낸 것이다. 유엔회원국도 되지 못하던 처지에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고 이제 두 번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자리에 오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유엔안보리 진출은 15개국으로 구성된 안보리의 일원으로서 국제평화와 안보유지를 위한 유엔의 노력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북한이 무무하게 날뛰는 현실을 보다 전향적으로 견제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두번째는 녹색기후기금(GCF·Green Climate Fund) 사무국이 인천 송도에 들어 오기로 결정된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중량감 있는 국제기구를 처음으로 유치하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루었다. 한국이 세계에서도 못사는 나라로 분류될 때를 생각하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GCF 유치 성공으로 경제적 파급효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한국이 개도국과 선진국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국제사회가 인정했다는 점이 감사하고 자랑스럽다.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로 지구온난화가 지속되고 오존층의 파괴 범위가 점점 넓어져 인류의 안전한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녹색성장 정책을 주도하며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는 적극적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그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인류사회의 공통적 고민인 지구온난화와 이산화탄소 배출 억제 문제로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이 될 것이다. 세번째는 한·미 미사일 지침이 개정되어 탄두 중량 500㎏, 사거리 800㎞의 미사일 개발과 보유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안보를 지켜내기 위해 아직도 제약이 있는 결정내용이지만 우선 급한 대로 이 정도라도 개정된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촉매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 평화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미국과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쉬운 협상이 아니었다. 탄두의 무게가 늘어나면 사거리가 줄고, 탄두의 무게가 줄어들면 사거리를 늘릴 수 있는 이른바 ‘trade-off’ 제도가 적용되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해 적어도 대전에서 북한 전역까지 도달하는 탄두 중량 1t의 미사일 개발이 가능, 북한 미사일 기지 9개가 탄두 중량 1t의 사정권 안에 들게 되었다. 미사일 기술 확산이라는 국제사회의 통제가 있는 마당에 한국이 미사일로 스스로 방어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무역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한국이 유럽연합(EU)과 미국, 칠레 등 세계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나가는 것도 미래를 내다보는 중요한 발걸음들이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은 스스로 얼마나 잘난 존재가 되었는가를 잘 모른다는 것이 불가사의라는 말을 국제사회로부터 듣고 있다. 설령 한국이 국제사회로부터 잘난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도 한국의 속깊은 문화에서는 겸허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기에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국력에 걸맞게 국제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역할과 책임을 맡아야 하는 비전과 철학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때다. 2014년에 협정이 재개정되어야 하는 한·미 원자력 협정도 원자력 발전의 평화적 이용 확대를 도모해야 하고, 저농축 우라늄의 안정적 공급도 한국의 국익에 맞게 보장받아야 한다.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역동의 전환점에 서 있다. 중국과 일본이 영토문제로 충돌하고 있고 새로운 안전보장 지도가 그려지고 있다. 지나간 근대역사처럼 나라의 운명이 주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한국이 평화의 창출자로서 지도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때가 오고 있다.
  • 민주 UAE 아크부대 파병 연장 반대 논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요청으로 지난해 1월 파병돼 올해 말 시한이 만료되는 아크부대의 ‘파병 연장안’에 대해 민주통합당이 저지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여당이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민주당 간사인 안규백 의원은 “원전 수주를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파병된 아크부대는 더 이상 수행할 임무도 없기 때문에 당론으로 파병 연장을 저지할 것”이라며 “아크부대에 배정된 예산을 전액 삭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방부가 검토 의견을 내고 연장을 추진한 것이 지난 7월이고 9월에 연장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된 지가 오래인데, 지금까지 아무 소리 없다가 대선을 앞두고서야 ‘원래 당론이었다’고 반대하기에는 너무 국익을 도외시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국방부는 해외에서 평화 유지, 재건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는 부대 가운데 아이티 단비부대는 단계적으로 철수하고 레바논 동명부대, 소말리아 청해부대, UAE 아크부대 등은 파병 연장을 추진해 왔다. 새누리당 간사인 한기호 의원은 “현지 군의 훈련을 지원하는 부대를 철수하라는 얘기인데, 상대국 UAE가 요청하고, 국익도 막대해 아크부대의 파병은 연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와 국방부도 “정세가 불안한 중동지역에서 현지 근로자들도 아크부대로 인해 그만큼 안정을 느끼고 있다.”고 거들었다. 논란이 커지자 민주당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보도자료를 내고 “논의한 적도 없고, 당론을 정한 적도 없다.”면서 “추후 의총에서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지운기자 jj@seoul.co.kr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국감 하이라이트-국정원] 여 “대화록 열람해야” vs 야 “공개 부적절”

    국가정보원이 29일 국정감사에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대화록 공개를 두고 여야의 공방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새누리당은 대화록의 실체가 확인됐으니 이를 열람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특히 원세훈 국정원장이 여야 합의를 열람의 조건으로 내세우자 야당을 더욱 압박했다. 반면 민주통합당은 남북 정상 간 대화 내용을 공개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맞섰다. 국회 정보위 새누리당 간사인 윤상현 의원은 이날 오후 국감을 마친 뒤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는 만큼 당내 특위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겠다. 국민적 의혹을 푸는데 무엇이 두렵냐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화 전체를 열람하자는 게 아니라 적어도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북핵 관련 발언만 열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주당 간사인 정청래 의원은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대화록을 봤다고 한 것 자체가 국가안보와 국익상 해를 끼친 것”이라면서 “천 수석이 1급 비밀문서를 공개한 데 대해 국정원에서도 곤혹스러워했다.”고 말했다. 다만 원 원장은 천 수석이 지난 25일 국회 운영위 국감에서 대화록을 본 적이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 “천 수석이 본 것은 맞고 비밀문서를 청와대로 가져가 대통령도 봤을 것”이라면서 “업무상 목적이기 때문에 규정에 어긋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원 원장의 대화록 공개 의사에 대해 “공개를 전제로 한다면 여야 합의가 있어도 불가하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풀이했다.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가 국정원이 NLL 포기 발언 유무를 확인해 주면 된다고 요구한 것과 관련해서도 원 원장은 “야당 후보가 그렇게 얘기했다 할지라도 국정원장이 그에 따라 방침을 바꿀 수는 없다.”고 밝혔다고 정 의원은 설명했다. 그러나 윤 의원은 “여야가 합의를 한다면 그때 가서 공개를 판단하겠다.”는 발언을 전하며 원 원장이 열람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설명했다. 한편 정 의원이 원 원장에게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라는 헌법 기준으로 봤을 때 NLL은 영토선이 맞느냐.”고 묻자 원 원장은 “헌법적 기준으로는 영토선은 아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원 원장은 “헌법 기준으로 보면 압록강과 두만강이 영토선이 되는 만큼 실질적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선은 NLL이라고 볼 수 있지 않으냐.”는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앞서 새누리당은 오전 국민대토론회를 갖고 NLL은 서해 영토선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등 NLL 쟁점화에 주력했다. 오후에는 당 ‘영토포기·역사폐기 진상조사특위’ 전체회의에서 연평해전 유가족들을 내세워 야당을 압박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새누리당의 움직임을 거듭 북풍공작이라고 규정, 공식 대응하지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경제민주화 정책 대해부] 기업들 상생 위한 대안은

    [경제민주화 정책 대해부] 기업들 상생 위한 대안은

    대선을 앞두고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당위성에는 제법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다만 ‘기업 때리기’를 우려하고 있는 대기업 중심의 재계도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 대안과 규제의 정도 등을 마련하는 게 관건이다.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 구조에서 빠른 경제성장의 한 축인 대기업집단(그룹)을 무분별하게 해체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왜곡된 기업 하청 구조 개선 등 상생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상공회의소 회장단은 17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현안 회의를 열고 경제민주화 선거 공약에 관해 신중한 접근을 요구했다. 회의에는 손경식(CJ그룹 대표이사 회장) 대한·서울상의 회장과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김반석 LG화학 부회장, 김억조 현대자동차 부회장,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등 14명이 참석했다. ●합리적 경쟁 여건 만들어야 회장단은 기업 환경의 양극화 해소에는 공감했다. 즉 300만 국내 기업 중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상당수가 경영난을 겪고 있고 잘나가는 일부 대기업과 점점 더 간극이 커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해법을 요구했다. 회장단은 “대기업은 투자 확대와 고용 창출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사회는 기업의 경쟁 여건을 조성해 주는 방식으로 양극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기업은 임금피크제 등을 활용해 고용을 연장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 불합리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신 정치권도 정년연장법을 유보하고 비정규직의 고용유연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비합리적인 강제 규제, 반기업 정서 조장 등에는 반대하지만 중소기업 고유 업종 지정과 노동 규정 개선, 불공정 경쟁 규제 등에 대해서는 긍정을 표시한 셈이다. 그러나 정치권이 말하는 경제민주화의 요체는 금산 분리와 함께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지주회사 규제 등이다. 이에 대해 재계가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이 창업주 일가와 대주주, 재벌적 속성 등에 관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대주주 권한 제한에는 민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특히 금산 분리(금융업·생산업 분리) 규제 강화에 반대하는 것은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할 경우 삼성전자 등 국내 대표 기업이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의 타깃이 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금산 분리 시행에 따른 비용을 내부 추산하면 삼성생명이 매각하게 될 삼정전자 지분 8.8%를 매입하는 데 드는 비용은 13조원을 훨씬 웃돈다.”면서 “이 과정에서 외국계 투자자본을 상대로 국익에 도움이 안 되는 경쟁을 벌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른 그룹의 임원은 “지금 거론되는 대로 입법이 된다면 내년 경제 위기를 돌파해야 할 새 정부는 파트너인 기업을 잃은 채 국민과 기업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한기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구조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면서 “경제성장의 혜택이 일부 재벌에게만 쏠렸고 중소기업은 고사되고 있다면 경제나 기업의 구조를 뜯어고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비합리적인 하청 구조의 개선, 고용 문제 등을 우선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했다. 현진권 한국경제연구원 사회통합센터 소장은 “모호한 개념의 정책이 대기업을 죽이면 중소기업이 다 산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면서 “결국 해법은 경제성장이 곧 상생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현 소장은 “삼성과 현대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더 나올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지, 앞서가는 기업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경제·기업구조 뜯어고쳐야”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경제민주화는 기업에서도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니까 나온 것”이라면서 “중소기업이 클 수 있는 생태계를 마련해야 한다. 우선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에 대한 감시와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희갑 아주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벌에 대한 징벌보다 중소기업의 성장을 돕는 게 중요하다.”면서 “다만 미국의 경우 독점규제법이 나오는 데 꽤 오래 사회적 논의가 있었던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오정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도 “비현실적이고 징벌 위주인 공언은 빨리 버리고 중소기업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어주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용 문제에서 경제민주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부당한 임금 격차가 해소되면 중소기업 근로자가 더 오래 근무하게 되고 숙련도 향상으로 중소기업도 해외를 상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 제대로 된 이름 불러줘야 제대로 된 꽃이 돼”

    “을사조약이 아니라 ‘을사늑약’이 맞고, 한일합방이 아니라 ‘일제의 한국강점 조약’이 올바른 용어다. 을미사변이 아니라 ‘명성황후 암살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임경석(54)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막 출간돼 따끈따끈한 ‘한국근대외교사전’(사람의무늬 펴냄)을 펴들고 지난 15일 교수회관 4층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 줘야 제대로 된 꽃(역사)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렇게 말했다. 임 교수는 “다소 뒤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외교사전이 발간돼서 다행”이라며 “한국사는 한국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시선으로 외교사건을 정리해야지, 한·일역사를 일본학계의 시선으로 정리해서는 본질적으로 맞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1876~1910년 한국 근대외교史 정보 ‘한눈에’ 임 교수는 “‘한국근대외교사전’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대한제국 멸망까지 한국 외교의 역사에 등장한 사건, 조약, 인물, 조직에 대한 정보를 담은 감히 ‘국내 최초의 외교사전’이라 자부할 수 있다.”면서 “한국사뿐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서양사를 각각 전공한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 외교사학자, 법학자 등 28명의 학자가 모여 239개 항목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임 교수와 그의 후배이자 역사학자인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이항준 서울여대 사학과 강사가 대표 편·저자이고, 주요 저자로 연갑수 서울대 교수, 조재곤·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 주진오 상명대 교수, 한철호 동국대 교수, 홍준화 고려대 연구교수 등이 참여했다. 사전에 참고문헌과 책임 저자를 명시해 기술 내용의 정확성과 객관성을 높였다. 한국근대외교사전은 원래 2007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예산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지원을 받아 3년 만인 2010년 결과물을 내놓았다. 당시에는 한중연의 ‘한국민속문화대백과’에 수록돼 있었다. 임 교수는 “여기에 2년 동안 수정·보완하고 20여개를 추가해 239개 항목으로 확대해 별도의 책으로 펴냈다.”고 말했다. ●가나다순 항목… 연구·실무자에게 최고의 길잡이 한국근대외교사전의 강점은 무엇인가.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나 역사와 외교관련 실무자들이 관련 항목을 가나다순으로 쉽게 찾아가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특히 한국 관련 근대사에 영향을 미친 외국인을 많이 발굴해서 실었다. 예를 들자면 대한제국 시절의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포타포프가 있다. 그는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도 러시아 정부와 임시정부 사이에서 외교를 통해 한국의 독립에 많은 도움을 줬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러시아가 많이 배제됐는데, 러·일전쟁에서 진 러시아는 일본에 복수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고,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유지됐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러시아 연해주에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했던 ‘권업회’나 권업회 산하의 항일무장단체였던 ‘대한광복군정부’ 등도 러시아 정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근대외교史, 한국인의 시선으로 서술해야”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을사늑약이라 쓴 역사교과서를 을사조약으로 고치라고 요구했던 것과 관련해 그는 “국사편찬위의 사고방식은 현재 한국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상당히 다르다.”며 “각국의 외교사는 국익의 충돌 속에서 존재하고 특히 한국의 근대 외교사는 외세 피침의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독자적인 시선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더 나아가 임 교수는 “국사편찬위가 현 정부의 요구에 부응하다가 우경화됐다.”고 비판했다. 임 교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과정이 조약과 같은 합법적인 외양을 띠고 있지만 이것은 형식논리”라며 “최근 ‘유럽식 근대’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 세계 외교사가 강대국 위주로 서술돼 있기 때문에 침략을 당했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강대국의 편견이 가득한 시선을 배제한 채 다시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단순히 외교사를 정리한 책이 아닌 만큼 오늘날 한국의 외교적 생존전략을 파악하고 정책수립에 도움을 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기고] 동북아의 질서 추이와 해상 각축/장공자 충북대 정치외교학 명예교수

    [기고] 동북아의 질서 추이와 해상 각축/장공자 충북대 정치외교학 명예교수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제2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2025년쯤이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현재 동북아의 질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 같은 질서 추이에 대해 지난 5월에 있었던 미·중 전략 및 경제 대화에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양국 간 ‘신형(新型) 대국 관계’ 구성이 새로운 질서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처럼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은 종전과 다른 자신을 설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하려는 무리수를 뒀다. 2010년 센카쿠에서 일본 순시선과 중국 어선이 충돌한 사건이 발생하자 중국은 희토류의 일본 수출을 전면 단절시킴으로써 일본으로부터 백기 항복을 받아냈다. 이 같은 굴복은 일본은 이미 중국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현재 중국은 남중국해에서도 주변국들과 해상의 영유권 문제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들 해상의 영유권이 국익의 핵심이라는 인식과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은 일본과는 독도를 놓고 지루한 싸움을 해야 하고, 중국과는 이어도를 가지고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이중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실정이다. 이어도가 한국의 관할권에 속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객관적 사실과 국제법에 근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중국은 이어도 관할권을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무인항공기 감시 대상에도 포함된다고 하더니, 지난달 25일에는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을 이 해역에 실전 배치시켰다. 이 해역은 한국의 생명선과도 같은 해상 교통로다. 이어도가 포함된 제주 남방 해역은 남한 면적의 16배다. 이 제주 남방해역을 통해 우리나라 수출입 물동량의 61.9%가 통과하고 있다. 특히 원유는 100%, 에너지는 97%, 식량은 70%가 들어오고 있다. 한국의 무역의존도가 국내총생산(GDP)의 82%에 이른다는 점에서 제주 남방해역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또 제주 서남방 대륙붕에는 230년 동안 사용 가능한 72억t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고, 원유 1000억 배럴을 포함한 230여종의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는가 하면, 어족자원 또한 풍부하다. 이 지역의 해상 항로와 해저 자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 증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국의 세계적 국제정치학자인 E H 카가 지적한 대로 군사력이야말로 국가 활동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이며,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필요에서 제주 해군기지는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야말로 이 지역에서의 해양 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자 주장이다. 물론 군사력 증강만이 최선책이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남방 해역에서 국익을 수호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데도 불구하고 그간 일부 주민과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혀 건설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놓여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동북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질서의 추이와 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축을 고려할 때,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이 최선책인지에 대해 온 국민이 지혜를 모으고 총화를 이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 균형재정에 무게…SOC ‘팍팍’ 일자리 ‘인색’

    균형재정에 무게…SOC ‘팍팍’ 일자리 ‘인색’

    25일 정부가 발표한 내년 나라살림의 두 가지 키워드는 ‘균형 재정’과 ‘경제 활성화’다. 경기를 살리면서도 재정 건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경기 부양보다는 균형 재정 쪽으로 좀 더 기울어져 있다. 국내외 경기 하강세를 감안할 때 적자 규모가 다소 커지더라도 재정이 좀 더 경기를 떠받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내년 총수입을 올해보다 8.6% 증가한 373조 1000억원으로 전망했다. 이에 근거해 총지출을 올해보다 5.3% 증가한 342조 5000억원으로 편성했다. 총수입 증가율은 올해(9.3%)보다 낮지만 총지출 증가율은 같다. 정부가 직접 돈을 빌려주지 않고 이자를 지원해 주는 방식(이차보전)을 적용하면 실질적인 지출 증가율은 7.3%로 올라간다. 이렇게 되면 나라살림의 실질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인 재정수지(지출을 뺀 정부수입에서 사회보험료 등을 뺀 수지)는 내년에 4조 8000억원 적자에 그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0.3% 수준이다. 지난해 세운 ‘2011~2015 재정운용계획’의 2000억원 흑자보다는 후퇴했지만 올해(-1.1% 전망)보다는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다. 유럽연합(EU) 등에서는 재정수지 비율이 GDP 대비 ±0.3%이면 ‘균형’으로 본다.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올해 전망치(34.0%)보다 개선된 33.2%로 떨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김동연 기획재정부 2차관은 “균형 재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재정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면서 “경기 활성화를 첫 번째, 균형 재정을 두 번째, 일자리를 세 번째 목표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이영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정부가 향후 경기에 대해 과도한 낙관론에 빠진 것 같다.”면서 “올해보다 내년 경기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상당한 만큼 재정수지를 -1%까지 늘리더라도 좀 더 적극적인 지출을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재정 투입을 통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부족하다는 우려다. 분야별로는 보건·복지·노동 분야가 올해보다 4.8% 늘어난 97조 1000억원으로 100조원에 육박했다. ▲교육 49조 1000억원(7.9%) ▲일반공공행정 57조 3000억원(4.0%) ▲사회간접자본(SOC) 23조 9000억원(3.6%) ▲연구개발(R&D) 16조 9000억원(5.3%) 등도 대부분 증액됐다. 재정 지원 일자리를 올해보다 2만 5000개 많은 58만 9000개 만들고, 청년 친화적 일자리 10만개를 만드는 데는 10조 8000억원을 투입한다. 저임금 근로자에 대한 국민연금·고용보험료 지원 대상을 월 평균임금 125만원에서 130만원 이하로 확대, 해당 예산을 2654억원에서 4797억원으로 늘렸다. 주거비 부담을 덜고자 전세자금과 생애 최초 주택구입자금도 총 4조원 증액했다. 독도 등 영토주권 수호와 국제법을 통한 국익 증진에도 54억원을 편성했다. SOC 예산이 3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선 점도 눈에 띈다. 표면적으로는 23조 9000억원이 책정돼 올해(23조 1000억원)보다 3.6% 상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올해 책정치가 전년보다 5.5% 뒷걸음질쳤던 점을 감안하면 실제 증가율은 9.1%나 된다. 4대강 사업이 올해로 끝나면서 당초 재정부는 국토해양부에 19조 9000억원만 SOC에 배정하겠다고 통보했으나 실제 예산안에는 3조 2000억원이 더 늘었다. 4대강 등 하천(1744억원), 고속철도(2800억원), 도로(9100억원) 등 일부 대형 토목회사에 과실이 돌아가는 사업 중심으로 예산이 늘었다. 4대강 유지보수비로는 올해 1997억원보다 많은 2013억원을 편성했다. 4대강이 ‘돈 먹는 하마’가 될 것이라는 시민단체 등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건설·토목의 경우 일자리 창출 능력이 서비스업보다 떨어진다. 재정부 측은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SOC 예산 증액이 불가피했다.”고 해명했다.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일자리 예산은 올해보다 9000억원 늘어난 8.6% 증가율을 나타냈다. 총지출 증가율(5.3%)보다 높지만 전체 예산 증가분(30조 6000억원)의 3%도 안 된다. 직접 일자리 창출 예산은 2조 5081억원에서 2조 6722억원으로 고작 1641억원(6.5%) 늘었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베이비붐 세대를 위한 일자리를 2만 5000개 확충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수준”이라면서 “향후 경기 침체를 감안하면 자영업자의 사업 실패를 줄일 수 있는 금융 지원이나 소상공인 정책금융 등의 규모를 더 늘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두걸·김양진기자 douzirl@seoul.co.kr
  • [시론] 동맹의 그늘 - 응답하라 한·미동맹 2012/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시론] 동맹의 그늘 - 응답하라 한·미동맹 2012/최종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취임 직후인 2008년 봄, 이명박 대통령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캠프 데이비드에서 첫 정상회담을 마치며 “더욱 강력한 동맹 구축에 합의했다.”고 선언했다. 이에 주요 언론들은 우리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의 ‘골프카트 1호’를 손수 운전하는 사진을 첨부하며 한·미동맹이 복원되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것이 4년 반 전의 일이다. 그후 후임인 버락 오바마는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경기 침체와 분투하며 이라크와의 전쟁 와중에도 자국 경제를 회복시켜야 하는 3년 반을 보냈다. 그는 이제 재선의 기로에 서 있고, 우리 역시 이미 대선일정에 돌입한 지 오래다. 국제정치 이슈가 더 이상 대선의 승자와 패자를 결정짓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북한을 억지함과 동시에 포용도 해야 하는 우리에게 안보협력국으로서 동맹인 미국이 갖는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부상하는 만큼 거칠어지는 중국, 경제 등 여러 분야의 침체를 맞아 우익화되고 있는 일본 사이에서 한층 의미 있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대상 역시 미국이다. 그렇기에 동맹국인 우리로서는 이를 객관적이고도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국익을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닐까. 현재 미국의 경제 침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큰 족쇄로 작용한다. 2011년 미국 연방정부가 사용한 예산의 48%가 외국에서 빌려온 자금이었다. 즉, 1달러 중 48센트는 갚아야 할 빚이라는 의미다. 국가신용도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는 곧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의 신용도 하락을 의미하며, 미국 중앙은행(FRB)이 정부채권의 61%를 인수해야 하는 ‘재정의 화폐화’(Monetization)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더욱 참담한 것은 올 6월 말 현재 18~24세의 미국 청년 중 54%가 실업자라는 사실이며, 이는 1948년 이후 최악의 고용지표다. 따라서 ‘별일’이 없는 한 미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에 이르는 재정감축을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미국이 지난 6월 동아시아로 돌아오겠다고 선언했다. 분명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국방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미국은 많이 허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는 ‘복원된 동맹관계’ 속에 안락한 안보를 누리려던 한국에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이다. 결국 미국으로서는 동맹국 한국에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먼저 현재 비행 시험평가가 진행되고 있는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 미국 기종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외교적 압력이다. 향후 20년간 한·미동맹의 지속을 위해 한국이 미국 전투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거나, 한국형 전투기를 생산하고자 하는 항공업계의 자생적 노력을 ‘기술민족주의’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과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며 우리 정부의 미사일 사거리 확대 노력에 난색을 표하면서도, 중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자국 주도형 미사일 방어(MD)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이 2014년부터 5년간 소요될 주한미군 방위비(인건비를 제외한 주둔비용)의 한국 측 부담률을 42%에서 50%로 높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미국은 자국 무기의 해외 판매량 가운데 43%를 한국에 수출하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은 미국의 ‘봉’이 되어 버린 셈이다. 동맹은 계약이다. 미국의 요구에 안보와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양보만 하던 시대는 끝내야 하며 미국과의 각종 협상에 당당히 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필요로 하는 만큼 중국이 부상한 이 시대에 우리도 미국에 필요한 존재다. 상호이익을 확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미동맹은 우리에게 이익만큼 비용도 가져다 주는 계약관계다. 따라서 ‘가치동맹’을 위해 이 관계를 호혜적으로 진화시켜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동맹의 잘못된 그늘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박영효vs유길준(상)

    박영효(1861~1939·왼쪽)와 유길준(1856~1914·오른쪽). 두 사람은 19세기 말 조선을 대표하는 개화파였다. 두 사람은 모두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주도한 핵심적 인물이었으며 이미 갑오개혁 이전에 구체적이며 명확한 개혁안을 담은 ‘상소문’과 ‘서유견문’을 각각 집필했다. 당시 조선 내의 권력 지형에서 개화관료들은 소수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갑오개혁 기간 내내 협력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대립했다. 왜 그들은 협력이 아닌 대립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1883년 보빙사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남아 유학생활을 하던 유길준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유길준이 포도대장이던 한규설의 집과 민영익의 별장에서 유폐생활을 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민영익이 유길준을 청과 조선의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에 가깝다. 유길준은 당시 왕실의 비밀창구로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규설의 숨은 자문역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집필에 전념하여 1889년에 ‘서유견문’을 탈고, 한규설을 통해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하였고 몇몇 외교문서를 대신 작성해 주기도 했다. 이후 유길준은 1894년 6월 당시 민씨 척족을 대표하던 민영준에 의해 ‘일본당’을 대표하여 외아문의 주사로 발탁됐다. 민영준은 일본당을 등용하여 일본 측과의 관계를 개선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유길준은 일본 공사관 측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한편, 공식적으로는 외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의 개혁 요구와 속방론 철폐에 대해 강경하게 반대하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공사관 측에서는 그가 일부러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려 했다고 파악했다. ●군국기무처를 주도한 유길준 1894년 7월 23일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불법 점령,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군국기무처를 수립했다. 이때부터 유길준은 갑오개혁의 핵심 브레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격적으로 군국기무처 의원으로 발탁된 그는 총리대신 김홍집을 직속으로 보좌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본 측에서는 당시 유길준이 군국기무처를 실질적으로 주도해 간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찡그린 얼굴, 냉소적인 말, 기염 높은 논의, 대담하면서도 침착한 태도’로 ‘내정의 신법’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7월부터 10월까지 군국기무처가 진행한 개혁안은 190개에 달했다. 대외적으로는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저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군사교관을 초빙하는 한편 일본의 화폐 유통권을 허가하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동학 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를 초기에는 일정 정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농민군이 2차 봉기의 움직임을 보이자 10월 중순부터는 무력탄압에 들어가게 됐다. 그 밖에도 궁내부를 설치하여 왕실과 정부를 분리시켜 왕권을 약화시켰으며 의정부에 권한을 집중시켰다. 사실 이 모두를 유길준이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시 군국기무처 내에 유길준만큼 근대국가를 직접 체험했거나 체계적인 저술을 남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를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유길준은 이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대원군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길준은 10월 일본에 파견되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의 파견 및 차관 제공을 요청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무쓰 무네미쓰 외상을 만나 ‘세 가지 수치(三恥論)’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스스로 개혁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혁이 진행됨으로써 조선 국민, 세계 만국 그리고 후대에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는 독립을 보전하고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개혁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박영효의 귀환 갑신정변 실패 후 박영효는 10년간 일본 망명생활을 하다가 1894년 8월 23일 서울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은 박영효를 귀국시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던 대원군 세력과 개화관료 세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길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박영효는 개화세력의 대표인물이면서 부마라는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 왕실과도 일정한 소통이 가능했고, 망명 중 대원군과도 수차례 접촉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박영효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 후 고종을 알현하여 자신에게 개혁의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원로 대신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이 일본 공사관 측에 항의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단 제물포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메이지 유신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를 공사로 파견하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는 10월 27일 부임하자마자 대원군 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하고 조선 왕실의 고문관 또는 ‘외신’(外臣)으로까지 불리며 왕실과 손을 잡았다. 이와 함께 박영효의 기용을 요청했고 결국 12월 17일 김홍집-박영효 연립정부가 출범하게 됐다. 이때 박영효는 내무대신에 임명됐다. 박영효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의 조선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박영효는 이 시기 개혁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추구한 것은 동학 농민군에 대한 확고한 진압과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의 추진이었다. 박영효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의 처형에 결정적으로 관여했다. 그리고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확고하게 하려고 종속관계의 상징물을 파괴하고 태극기를 사용하며 공문서에 한글을 사용하게 했고 독립기념일을 제정했다. 그는 이때 내무대신 직권으로 ‘자주독립을 방해하는 자를 역적으로 처벌하는 건’을 ‘내무대신령’ 1호를 통해 발표했다. 또한, 그는 지방제도 개편에 심혈을 기울여,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와 331개의 군으로 개편했다. 아울러 경무청관제를 발표하여 무장경찰을 육성하고 상비군을 육성하려 했다. 그런데 박영효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일본 측의 기대와는 달리 김홍집을 ‘줏대 없는 소인배’라며 내각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리대신이 될 생각으로 권력투쟁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박영효는 자신의 세력을 지방관은 물론, 군부와 경찰의 요직에 임명했다. 더욱이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에 맞서 일정하게 조선의 국익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박영효는 김홍집을 5월 17일에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총리대신의 자리는 박정양에게 돌아갔다. 다만, 박영효는 내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들은 왜 대립하였을까? 박영효와 유길준. 어찌 보면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당연해 보일 법한 이들은 실제로는 처음부터 첨예하게 대립했다. 윤치호의 당시 일기에 보면, 유길준은 철저하게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과 함께 세력을 형성하여 박영효와 전면적인 대립을 선택했다고 분석했다. 그 사상적 이유는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에서 찾을 수 있다. 유길준은 ‘개화의 등급’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을 ‘허명의 개화’를 주장하는 자들로 비판하면서 ‘실상개화’를 제시한다. 그는 허명개화를 “사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남이 잘된 모습을 보면 부러워서 혹은 두려워서 덮어놓고 시행하자고 주장하여 비용은 많이 들이면서 실용성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아무런 분별 없이 외국의 것이라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외국을 칭찬하는 나머지 자기 나라를 업신여기는 폐단까지 있는데 이들을 개화당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개화의 죄인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개화하는 데 있어서 폐해는 지나친 것이 모자란 자보다 더욱 심하다고 말하면서 “개화라는 헛바람에 날려서 마음속에 주견도 없는 개화의 병신”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둘 사이의 정치적 차이도 존재했다. 유길준은 민영익과 동문수학한 사이였고 그를 보빙사의 수행원으로 데려가 미국에 유학까지 시켜 준 사람 또한 민영익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민영익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길준 자신이 갑신정변 후 미국에서 보낸 편지 안에서도 그는 “그들이 군왕에게 충성하고 국가에 진실할 때에는 내 친구들이었으나 그들은 역적이고 나라에 큰 해를 끼쳤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큰 원수”라고 써서 보냄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유길준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1894년 박영효가 다시 등장했을 때 그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유길준이 박영효 세력을 ‘개화의 병신’으로 비판한 부분은 1889년에는 없던 내용으로 6년 뒤인 1895년 출간 당시에 새로 써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보았을 때, 유길준은 박영효가 개혁을 주도하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개혁관료들의 결집이 절실하던 시절에 치열하게 대립함으로써 결국 모두 몰락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 [시론] 한·일관계 복원의 실마리/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시론] 한·일관계 복원의 실마리/이원덕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8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친 뒤 한·일 두 정상은 짧은 만남을 통해 한·일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도 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을 만나 영토문제에 대해 한·일 양국이 온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로써 지난달 10일 이후 독도, 과거사 문제에 대해 날 선 공방을 펼치면서 진흙탕 싸움으로 비화되었던 양국 관계는 고비를 넘겨 숨 고르기 국면으로 들어간 듯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본 측의 강한 반발로 촉발된 갈등과 마찰은 양국 국민감정을 상당히 손상시켰고 그 과정에서 양국의 국익은 적지 않게 훼손되었다. 이번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대립으로 치닫게 된 데는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대한 일본 반발이 워낙 컸다는 점도 있지만 혼미 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일본 국내정치 상황이 큰 몫을 했다. 민주당 대표 선거와 자민당 총재 선거가 9월에 겹쳐 있는 데다 조기총선을 코 앞에 두고 정권을 차지하려는 정파 간 경쟁이 과열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때마침 불거진 영토, 역사 문제를 두고 정치인들의 과격한 발언이 여과 없이 표출됨으로써 사태가 악화되었다. 한·일외교 갈등과 동시진행된 중·일 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는 또 하나의 촉매제로 작용했다는 점도 주목된다. 중국의 강성 행보와 미국의 동아시아로의 회귀는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의 유동성을 높이고 있다. 이 속에서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일본이 전에 없는 초조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잃어 버린 20년으로 일컬어지는 장기불황에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을 엄습한 3·11 대지진에 따른 사회심리적인 동요는 일부 지도자들의 무분별한 언행을 부채질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독도 영유권 갈등으로 표면화된 양국 간 충돌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작년 8월 헌법재판소의 부작위 위헌 판결과 일본 대사관 앞 1000회 수요 집회, 위안부문제 해결을 촉구한 교토 정상회담 등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답보상태에 놓여 있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외교 현안이기 이전에 국제사회의 인류 보편적 이슈임과 동시에 전시 여성의 인권 문제로 봐야 함에도 마치 양국의 외교 갈등 사안으로 다뤄지는 것은 유감이다. 영토 주권과 연관된 독도 문제와 위안부 문제는 차원을 달리하는 별개의 사안으로, 이 두 주제는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독도, 과거사 문제는 한·일관계의 최대 장애물인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격한 감정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휘발성이 높은 쟁점이다.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속시원한 해법이나 묘안이 당장 나오기도 어렵다. 이번 경우처럼 역사문제에서 초래된 갈등이 문화교류나 금융협력 및 다자외교 영역으로까지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차제에 일본은 2010년 센카쿠 갈등 시 중국의 희토류 대일 금수조치가 초래했던 충격을 상기하여 역사 마찰이 불필요하게 다른 영역으로 확대 재생산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한·일 우호협력 관계의 확립은 양국의 국익증진에 부합할 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추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최근 동아시아 국제정치는 아시아로의 전략적 복귀를 추구하는 미국과, 경제성장과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점차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미·중 양강 구도’로 점차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속에서 한·일 양국은 하루빨리 역사 화해를 통한 신뢰 구축을 바탕으로 하여 정치, 안보, 경제는 물론이고 점차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문화, 지식정보, 기술, 생태환경의 각 분야에서도 전면적 협력 체제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방향으로 신시대의 미래 비전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 [열린세상]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국제정치/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열린세상]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국제정치/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

    대통령은 ‘나라 안’의 국내정치와 ‘나라 밖’의 국제정치 두 영역에서 책무를 수행한다. 국제정치는 국가를 대표해 국익을 잣대로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대내적으로 한국 영토를 시찰했기에 단순한 통치 행위고,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영유권 주장 때문에 국제정치 차원의 외교 행위이기도 하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한국은 독도가 역사적·국제법적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이고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에 일본의 주장을 무력화하기 위해 ‘조용한 외교’로 무시 전략을, 일본은 ‘확성기 외교’로 분쟁화 전략을 취해 왔다. 우리는 일본이 포기하지 않는 한 분쟁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불씨가 자동 소멸하기를 기대해 왔다. 한편 일본은 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독도의 날을 제정하고 방위백서,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면서 분쟁화 수위를 조금씩 높여 왔다. 이런 정책 판단과 조용한 외교가 그간 정부·여당의 입장이었다. 보수 언론도 이러한 보도 성향을 보여 왔다. 반면 야당과 진보 언론은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같은 보다 강경 대응을 주문해 왔다. 이번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국민 정서와 야당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과거사에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에 대한 ‘단호한 조치’로서 시도됐다고 본다. 결과는 국내정치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국민 80%가 지지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는 사정이 달라 보인다. 일본의 태도가 변한 것이 없고, 오히려 불씨를 살려 화재를 내려 하고 있다. 일본은 그간 자제하고 있던 국회 결의안을 채택하고 총리가 ‘다케시마 상륙’이라고 명문화한 서한을 대통령 앞으로 보내 왔다. 독도 문제 논의를 과거의 실무급 수준에서 단번에 국가 정상과 국회 차원으로 격상시켜 분쟁 지역임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다. 다른 한편 국제사법재판소에 단독 제소하겠다고 국내외에 알리면서 성사되지도 않을 재판을 국제 분쟁화에 이용하고 있다. 일본 총리도 재빨리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총리 서한을 반송하던 날, 일본 외무성 앞은 마치 한국이 확성기 외교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독도 문제와는 별개로 한 나라의 총리 서한을 반송하는 것은 외교 관례에 벗어난 것이다. 앞으로 일본도 한국의 문서를 반송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외교는 흔히 ‘계속되는 소통의 과정’이라고 한다. 전쟁 중에도 백기를 들고 나타난 적국의 사절은 만나 준다. 국제사회의 신사협정, 즉 외교 관행이다. 일본 총리의 서한을 접수한다고 해서 서한의 내용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묵살해도 좋고, 필요하면 정부의 관계 차관이나 국장 수준에서 일본 주장의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해 답신했더라면 차선의 선택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결과적으로 국내정치가 우선되고 외교는 뒷전으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국내정치를 우선하는 사례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신사참배를 고집해 한국과의 외교를 희생시켰다. 국가 지도자는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국내정치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우선 우리가 먼저 일본을 자극해 불씨 살리기의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도발과 망발을 해오면 그때마다 우리는 독도 관리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 조치를 취하면서 과거사에 반성 없는 일본의 후안무치에 대해 수위를 높여 가면서 국제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국내정치의 분열 현상이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에 오히려 여야와 보수·진보 언론의 보도 경향이 반대로 바뀐 것 같다. 대선을 앞두고 국내 정서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앞에서 우리가 분열해서야 되겠는가. 독도는 영토주권 문제로 사활적 국가 이익에 속한다. 독도를 수호하는 데 여야와 진보·보수가 있을 수 없다. 국제정치와 외교에 관한 한 ‘대중은 항상 옳은가’의 문제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 [기고] 독도 문제와 한국의 국익/유찬열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고] 독도 문제와 한국의 국익/유찬열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며칠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처음 찾고,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에 대한 진실된 사과가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한·일 외교 관계에 커다란 파장이 일고 있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들 영토라는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동시에 신성한 일왕을 모독했다고 하면서 강경 대응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독도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도가 안보와 경제적 이익이 걸린 현안인 동시에 국민적 자존심이 걸린,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역사적 사안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의 처신에 관한 간결한 입장 표명은 한국인으로서는 통쾌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심리적·현실적 이익을 안겨 주었고, 먼 미래의 한·일 관계에서도 독도가 우리 땅임을 입증하고 우리의 입장을 유추시키는 데 유용한 사료로 사용될 것이다.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0년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북방 4개섬을 방문하고 최근 러시아가 이 지역에 항만과 공항시설 개발을 본격화하는 것, 또 센카쿠 열도 문제나 난징 대학살 등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 중국이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은 모두 비슷한 이유에서 비롯됐다.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오늘날과 미래의 동아시아 안보 정세에 비추어 더 이상의 한·일 양국 관계 악화를 자제하는 것이다. 반인륜적 위안부 문제에 묵묵부답이고 걸핏하면 우리 영토를 탐내는 일본의 야욕에 대한 ‘강력한 경고’ 이후 필요한 것은 현실과 미래 공통 이익으로의 복귀이다. 냉전 이후 미·중 관계에서 나타나듯 국가 간 관계는 견제와 협력을 병행하게 돼 있고, 경직됐던 관계도 새로운 변수가 나타나고 협력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정상화되는 것이 상례이다. 오늘날의 동아시아는 많은 불확실성에 휩싸여 있다. 북한의 핵무장과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간과할 수 없는 우려의 대상이다. 중국은 국내총생산 7조 달러를 상회하고 급성장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토대로 전략무기 및 해·공군력 제고를 서두르면서, 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북한을 지원한다. 자원 부국인 러시아도 강화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국 및 몇몇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상하이협력기구(SCO)를 구축하고 북한을 지원하면서 반미 강대국으로 동아시아에 개입한다. 반면 미국은 강력한 아·태 국가로 존재할 것이라는 원칙과 의지를 계속 표명하지만, 국제 질서는 다극화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동아시아의 균형자인 미국은 새로이 구성되는 북·중·러 안보 협력에 대응해 미·일 동맹과 한·미 양자 동맹을 강화하면서, 이것이 유기적인 한·미·일 안보협력으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 한국은 일본과의 안보협력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과거 역사 문제로 인해 양국 협력에 다소 소극적인 한편, 역사적 관계나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G2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과의 관계 증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아시아 안보의 미래, 한·미 관계, 또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한·일 갈등의 무제한적 확산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도 과거의 잘못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현명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 [기고] 해외파병은 국가안보의 초석이다/윤영미 평택대 교수

    [기고] 해외파병은 국가안보의 초석이다/윤영미 평택대 교수

    탈냉전기 전 세계는 내전·테러·국가 간 분쟁·난민 발생·인권유린·자연재해 등 다양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런 국제사회의 분쟁해결과 인도적 지원을 위해 유엔은 유엔평화유지군(PKO) 활동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내년은 한국이 1991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PKO 활동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한국군은 1993년 소말리아 상록수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평화와 재건, 군과 민간인과 협력해 수행하는 민사(民事)작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한국군의 우수성, 기강, 현지 활동 등 운용 측면에서 최고수준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유엔과 국제사회로부터 큰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62년 전 6·25전쟁 당시 한국에 5만 달러의 물자지원을 제공했던 레바논에서 동명부대가 활동하고 있다. 2007년 7월 파병됨에 따라 한국군 최장기 파병기록을 세우고 있다. 동명부대는 한국에서 8000㎞ 떨어진 이역만리 땅에서 현지인들로부터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 지역 재건과 민사작전 수행 등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정부합동평가단원으로 아프가니스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바레인 등을 파병부대의 현지 활동과 정세파악을 위해 방문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장병들이 한국군 특유의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현지 문화를 존중하면서 활발한 민사활동을 전개, 국가 위상과 한국 붐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희망의 전도사’로 불리는 350여명의 오쉬노부대가 지난 2년 동안 지방재건지원팀(PRT)의 보건진료와 학교 건립 활동 등을 경호하고 지역 안정화에 힘쓰고 있었다. UAE의 아크부대는 UAE 특전부대의 교육훈련을 지원하고, 연합연습 등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UAE군의 정예화 및 작전수행능력 향상을 이끌었다. 더불어 사막 및 고온의 환경에서 한국군의 전투수행 능력도 높아졌다. UAE 총참모부는 한국군을 미국·영국·프랑스·호주보다 더 신뢰, ‘한 팀’(One Team)으로 간주했다. 심지어 ‘아크 열풍’은 한국어 배움과 K팝 등으로도 잘 표출되고 있었다. ‘아덴만의 영웅’인 청해부대는 소말리아 해역과 주변에서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연합해군과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 그 명성 역시 자자했다. 비록 짧은 방문 기간이었지만 현지인들이 한국군의 활약에 대한 찬사와 높은 평가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혹독한 사막의 날씨와 테러위험 속에서도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국익과 한국군의 국제적 명성을 드높이는 장병들의 헌신과 열정에 감사와 찬사를 다시 한 번 보낸다. 한국은 6·25전쟁 당시 유엔으로부터 16개국의 전투병 파병과 5개국의 의료지원, 42개국의 물자지원을 받았다. 현재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성장했으며, 세계 각국에 도움을 주는 나라로 변모했다. PKO 활동의 참여는 군사외교이자 보은외교의 일환이며, 유사시 국제사회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정부와 군은 더 활발하게 국가적 및 군사적 역량을 발휘해야 하며, 한국군의 선진화와 국제화에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다.
  • [한·일 독도 갈등 해법 없나] “의원 외교 등 비공식 채널 복원 시급 차기 정권 이후에나 관계 개선될 듯”

    독도와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외교 갈등이 3주째로 접어든 가운데 한·일 관계가 1965년 수교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지난 10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일왕 사과 발언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서한 반송 문제, 경제 보복 조치 언급 등이 외교적 관례를 벗어나 감정싸움으로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한 한·일 관계의 향후 전망과 해법에 관심이 쏠린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 건넌셈” 전문가들은 역사 갈등이나 영토 마찰이 비정치적 부문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관리와 조절을 하되, 한·일 간 의원 외교 등 비공식 채널의 실질적 복원이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이원덕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는 “양국은 영토 문제나 역사 갈등이 문화·경제적 측면으로 격화되지 않고 정경 분리라는 암묵적 합의를 지키도록 감정적 대응을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이 계속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김종필씨나 박태준씨 같이 한·일 간에 정책 파이프라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인물이 없는 것도 오해와 불신을 키웠다.”고 지적했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민간 교류를 담당하는 ‘한·일 포럼’ 개최가 취소됐듯이 비공식적 채널이 무너진 것은 문제”라면서 “한·일 의원연맹 등이 제 역할을 못 하는 등 정치권에서 중재할 수 있는 원로도 없다.”고 말해 네트워크 복원이 시급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체로 정권 교체를 앞두고 있는 양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최소 4개월에서 6개월간의 냉각기를 거쳐 새 정부 출범 이후에나 관계 복원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송석원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일 양국은 현재 양쪽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써 버린 국면으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라며 “이 대통령 임기 내에서는 해결 전망이 없고 일본도 10~11월쯤에 총선을 치르게 된다면 독도 등은 영토 문제로서 선거 쟁점으로 부상할 것이기에 어느 정당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진단했다. 문정인 교수도 “한·일 양국에서 각각 새로운 지도자들이 집권해야 문제가 풀릴 것”이라며 “현재 우리 정부는 일본이 공세적으로 나오는 데 대해 방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며 마땅한 해결책이 없음을 지적했다. ●“자민당 1당 되면 더 강경” 진창수 센터장은 “일본은 그동안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약간 배려하는 특수 관계를 인정했으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다 정권이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쓴 것 같다.”면서 “한국의 국력이 예전보다 커져 미국이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지 못하고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대립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이 제1당이 되면 노다 정부보다 더 강경하게 나갈 것이기 때문에 관계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종훈기자 artg@seoul.co.kr
  • [기고] 한중일 영토분쟁과 한중 수교 20주년/이주형 창원대 중국학과 교수

    [기고] 한중일 영토분쟁과 한중 수교 20주년/이주형 창원대 중국학과 교수

    최근 한·중·일 3국 간 역사와 영토문제에 대한 상이한 인식과 정책으로 동북아 지역에서 우리의 국익을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영토 분쟁이 진행 중인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해 실효지배하고 있는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국제분쟁지역화를 막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고유 영토 독도에 대해서는 국제분쟁지역으로 몰아 가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일본과의 영토분쟁에서 그들의 높아진 국력을 무기로 목청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동시에 한국에 대해서도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있는 이어도를 올해부터 중국의 해양감시 선박과 항공기의 정기순찰 대상에 공식 포함시키면서 영유권 주장 강도를 높이고 있다. 향후 중국이나 일본은 그들의 국력을 무기로 역사인식과 영토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자국 중심적인 시각에서 국익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올해는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동안 양국은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급부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기존의 ‘4강 구도’에서 미·중의 ‘G2 구도’로 재편되었고, 중국의 정치·경제·안보 전략이 한반도 정세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현재 양국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북핵 문제, 향후 남북통일 문제 등 서로 협력해야 할 사안이 산재해 있다. 특히 한·중 FTA는 한국 전체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경제 문제임과 동시에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봤을 때 정치외교 문제이기도 할 만큼 중대 사안이다. 문제는 지난 20년 동안 양국 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체결할 만큼 발전하였지만 상호 신뢰 부족과 미래 비전에 대한 구체적 논의와 공감대 형성 미비로 인해 ‘외화내빈’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영환씨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은 우리 국민에게 비인권적 고문행위를 가했다. 하지만 중국이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를 들어줄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러므로 우리 입장에서는 보다 근원적인 재발방지 대책을 찾아야 하는데, 10년 전부터 추진해 왔지만 이견이 많아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 양국 간 영사협정 체결이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는 감정적인 대응보다는 양국 간의 각종 현안에 대한 협정 체결 등 보다 제도화된 방향으로 관계를 설정해 나가야 한다. 향후 중국은 국력을 무기로 한·중 양국의 각종 문제를 철저하게 자국 중심적인 시각에서 국익을 도모할 가능성이 크다. 외교정책의 궁극적 목적은 자국 이익의 극대화이다. 중국 정부가 국제적 규범이나 원칙보다는 대국주의와 자국이기주의로 향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중 외교는 형식과 체면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중 간 정치·안보·경제 부문의 분야별·수준별 전략 대화 확대가 필요하며, 다양한 의제를 발굴하여 대화의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위기관리 능력을 높여야 한다. 정부와 국민의식이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작금의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며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 [시론] 한국외교의 구조적 비관론과 신뢰 회복/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시론] 한국외교의 구조적 비관론과 신뢰 회복/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이어진 2011년 한국 외교의 화두는 북한과 중국을 한 축으로 하고 한국-일본-미국을 다른 축으로 하는 한반도 ‘신냉전’ 시대의 도래였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방한 불필요’ 발언, 일본 민주당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으로 이어진 2012년의 화두는 ‘신냉전’ 체제의 내부 균열이라 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한·미·일 간의 공고한 안보공조체제가 요구되지만 극단으로 치닫는 최근의 동북아 상황은 한국외교의 비전 부재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감소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입장과 이익을 주장하고 이해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한국 외교에 대한 구조적 비관론을 경계해야 한다. 구조적 비관론의 핵심은 한국 외교의 태생적 한계론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이 한국 외교의 발목을 잡아 한국이 국제정치에서 독창적이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한국 외교의 기본전제는 자국 이익 추구임을 잊지 말자는 타당한 조언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한국 외교에 대한 소극적· 폐쇄적 태도는 장기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외교가 국제정치의 구조적 변화라는 큰 파도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 변화의 파도를 적절히 타고 넘느냐는 외교력은 정부의 능력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교의 구조적 비관론이 위험한 이유는 일단 자국 외교에 대한 무기력증이 퍼지기 시작하면 외교는 더이상 국익의 대외적 추구 수단이 아니라 국내 정치용 도구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치사를 돌아보면 정권 말기에 시도한 ‘충격외교’는 정권의 정통성을 회복하거나 대중의 지지도를 높이는 기대효과를 달성하기보다 공들여 구축했던 대외협력관계만 틀어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많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장담했던 김영삼 정부는 이후 일본 하시모토 정권과 어업협정 개정 샅바싸움에서 어선납포외교에 당하고 아시아 통화위기 때에는 일본 측에 지원을 요청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에도 국민의 정책 지지가 정권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독도 방문 다음 날 아산정책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3.6%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 국정운영 지지도는 6월 31.4%, 7월 28.2%로 떨어지다가 8월 16일 31.5%로 약간 회복했다. 하지만 58% 이상은 여전히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최근 한·일 간 ‘외교전쟁’은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가장 효과적인 외교는 기본에 충실한 외교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켰다. 외교는 내치의 수단이 아니라 바깥세상(外)과 사귀는(交) 일이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사귐이 깊어지고 지속되는 데 있어 가장 큰 자산은 신뢰다. 이명박 정부는 그간 견지해 왔던 보편주의의 언어로 설명하던 외교정책 기조를 임기 말 들어 한국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급선회해 한국 외교에 대한 신뢰와 정체성의 상실을 초래했다. 한·미동맹을 대북 억지력에 기초한 군사동맹에서 범세계안보에 기여하는 가치동맹으로 격상하고, 북한 인권문제를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인권의 보편적 틀에서 논의했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 원리에 입각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며 ‘글로벌 코리아’ 외교를 주창해온 이명박 정부는 최근 노무현 정부의 신일본독트린과 비슷한 주권외교로 선회했다. 결국 한국 외교의 지속성과 신뢰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2월 대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하건 새 정부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편주의에 입각한 한국 외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노력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선택! 역사를 갈랐다] (24)흥선대원군 ‘척화’ vs 명성황후 ‘친러’ (상)

    19세기 후반 세계는 해양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조선을 변화시켰다.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바탕으로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상호 연대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측의 대응도 있었다. 외압에 대응해 조선 역시 열강과 외교라는 수단을 통해 국권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는 극동지역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하나의 축이자 조선과 국경을 맞댄 나라였다. 조선은 러시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일본, 청국은 자국의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려는 전략으로 공러(恐)의식을 조작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원군과 명성황후도 민감하게 반응했고 대응책을 마련하려고 노력했다. ●대원군, 러 견제위해 佛신부와 접촉도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섭정 초기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을미사변의 주역인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국제 정세만 정확히 파악하면 동양의 뛰어난 외교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1860~1870년대 서구열강과의 접촉에서 외세의 영향력을 직접 경험했고, 러시아 또는 미국 등 서구열강 일국에 편중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그 배경에는 흥선대원군이 외교관계의 미묘한 변화와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沿海州)를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다. 거기에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E. J. Oppert, 吳拜)가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南延君)묘를 도굴한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서양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켰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 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은 임오군란에서는 청나라와, 갑오개혁 때는 일본과 각각 대립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고종으로부터 사태수습을 위한 전권을 위임받고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납치되었고 1885년 겨우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대의 ‘경복궁침입사건’ 당시 흥선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와 함께 참여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에 의해 정계 은퇴를 강요당했다. ●1895년 개국기원절 日인사 초청 놓고 반일친러 분위기 형성 명성황후는 외교 분야의 현안에 간접적으로 개입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록(行錄)을 살펴보면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나를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했다.” 등이 기록되었다. 1895년 9월 4일 왕실은 조선왕조 504년 건국 기념일인 ‘개국기원절’ 행사를 준비했다. 이날 행사의 준비위원회에서는 외국인 중 궁내부 고문관(宮內府 顧問官) 러젠드르 장군,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부인의 자매이자 궁내부에 소속된 손탁 여사, 그리고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친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러젠드르 장군은 사무장(事務長)이라는 명예위원으로 외국인들을 접대하였고, 손탁 여사는 음식과 식탁 준비를 담당했으며, 사바친은 식장의 장식 부분을 총괄했다. 당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조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손탁을 궁내부에 고용하도록 추천했다. 독일 엘자스(Elsass) 출신인 손탁은 궁궐에서 유럽식 향연을 준비하면서 명성황후를 자주 만나 2~3시간씩 연속으로 황후와 대화했다. 이날 회의에서 행사와 관련된 한 명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식탁 시중을 위해서 일본 급사를 초청하는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손탁 여사는 얼굴을 찡그렸고, 일본인들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심지어 침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러젠드르 장군은 마치 귀부인에게 시중드는 유명한 기사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손탁 여사는 왕실로부터 자신의 개인 집을 짓기 위해 약 1만 달러를 받았고, 그녀의 지도 아래 조선 여인들이 다양한 수공예를 배울 수 있는 학교 설립을 약속받았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에서 사바친은 일본공사관의 외교관 및 일본과 연대하고 있는 조선 관료들의 명성황후를 향한 적개심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때 사바친은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별일 아닌 작은 사건 같지만, 이와 비슷한 작은 사건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어떤 음모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손탁과의 관계 속에서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지원을 예상하고 평소의 신중한 태도를 버리고 반일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명성황후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둘러싸고 일본이 외교적으로 패배하자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시 명성황후 주변의 미국인도 자국의 이권과 특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만일 황후가 유럽인들로부터 보호를 기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준비했을 것이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유럽인들의 약속을 받았고, 유럽인들이 궁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신뢰했다. 신은 조심하는 자를 보살필 뿐이었다. ●명성황후, 왕실 日세력 제거… 日 ‘친러’ 비판하며 을미사변 개국기원절 행사 이후 왕실은 1895년 9월 재정, 법률, 내각, 군대 등에 대한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공사관과 연대하는 정치 세력을 점차 제거했다. 주한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스기무라도 공사 이노우에 공사가 9월 17일 귀국길에 오르자 왕실이 갑오개혁 이후 설치된 “신제도와 신군대의 파괴에 착수했다.”고 분노했다. 왕실은 1895년 9월 20일 기존 법률과 칙령 번호를 무시하고 새롭게 칙령 1호를 발표했다. 왕실은 궁내부의 핵심인물인 이범진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하면서, 반대세력인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을 파면하고 내무협판 유길준을 의주관찰사로 전출시켰다. 무엇보다도 왕실은 일본 장교에 의해 교육받은 훈련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왕실의 신임을 받고 있는 홍계훈을 훈련대의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명성황후는 훈련대를 해산, 김홍집 내각을 약화시켜 갑오개혁 이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공사는 히로시마재판소에서 1895년 9월 1일 주한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후 “궁중에 온전한 권세가 날로 심하여, 망령되게 나라 정사를 간섭했다.”며 왕실의 권력 장악을 비난했다. 그는 “훈련대를 흩어지게 하며 그 사관을 내치고자 하는 무리가 일본을 박대했다.”며 궁중의 일본 ‘박대론’을 주장했다. 그는 “독립의 실상을 실행하는 내각 관원들을 내치고, 혹 살육하여 정권을 궁중에 거두고자 하는 계교가 있었다.”며 궁중이 김홍집 내각을 제거하려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우리나라도 해를 받음이 적지 아니하니, 일본의 위엄과 믿음을 보존할 것을 생각했다.”며 일본의 ‘국익’을 위한 정변 실행을 결심했다. 그는 ‘박대’와 ‘계교’라는 용어를 쓰면서 궁중을 비난하고 일본의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었다고 강변했다. 미우라 공사는 황후의 ‘친러정책’에서 일본의 ‘국익 보존’으로 을미사변 원인에 관한 초점을 옮겼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친러정책’을 언급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을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국익 보존이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국제세력에 맞서 왕실 보호를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상층부 두 인물의 핵심 세력은 각각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로 갈렸다. 하지만 들판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는 법이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김상연 특파원 워싱턴 저널] 구경만 하던 日특파원들 독도문제 질문공세 ‘눈살’

    미국에 나와 있는 일본 기자들은 평소 어떤 브리핑에서든 거의 질문을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일본 기자들이 13일(현지시간) 국무부 정례 브리핑에서는 ‘광적으로’ 질문 공세를 폈다. 브리핑 초반 프랑스 AFP통신 특파원이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과 분쟁 중인 섬(독도)을 방문한 이후 양국 정부와 접촉이 있었느냐.”고 묻자 빅토리아 뉼런드 대변인은 “말할 수 없다.”며 답변을 피했고 바로 다른 이슈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브리핑이 끝날 무렵 한 일본 기자가 소심한 목소리로 “한국 대통령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명칭) 방문 계획을 미국 정부가 사전에 통보받았느냐.”고 물었다. 뉼런드는 “사전 통보를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에 일본 기자는 “미국 정부는 당연히 사전에 알았던 게 아니냐.”고 물었고 뉼런드는 짜증스러운 투로 “그 부분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피했다. 하지만 곧이어 다른 일본 기자가 “일본의 국경은 한국의 이해와 상당히 다르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종이에 적어 온 질문을 더듬더듬 읽었다. 뉼런드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영토 분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도 없다. 이만 끝내자.”면서 서둘러 브리핑을 마쳤다. 평소 질문의 품위와 금도를 지켜 온 다른 나라 기자들은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지는 일본 기자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정부 당국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기자들이 독도 문제를 이슈화하기 위해 사전에 작당을 하고 브리핑에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carlos@seoul.co.kr
  • 美 “日 재무장, 한·일 양국이 해결할 문제”

    미국이 26일(현지시간)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및 재무장 우려와 관련, 한·일 양국이 해결하라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따라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수수방관 내지 부추긴다는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마이크 해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이날 워싱턴의 외신기자클럽(FPC)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와 관련한 질문에 “때때로 양국이 일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공통의 가치와 원칙을 공유하고 있어 함께 노력하면 대화를 통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는 분명히 두 나라(한국과 일본)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못박은 뒤 “미국의 입장에서는 양국과 여러 중요한 문제에 있어 긴밀한 공조를 통해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며, 양국과의 동맹에 대한 전망도 밝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은 아시아의 매우 강력한 동맹인 한국과 일본이 역내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 많은 문제를 놓고 일본과 협의하고 있고, 한국과도 북한 문제 등에 대해 꾸준히 접촉하고 있다.”면서 “이는 우리가 높은 가치와 강력한 강조점을 부여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이 최상의 동맹을 꾸준히 향상시킨다면 미국의 이익과 3국의 이익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해머 차관보의 발언은 전체적으로 한·일 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과거사 문제는 감안하지 않은 채 무작정 한·일 양국이 미국의 동맹으로서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다. 실제 미 정부는 최근 일본의 원자력기본법 개정과 평화헌법 확대 해석 등 군사적 우경화에 대한 한국 정부의 우려에 대해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 외교소식통이 전했다. 소식통은 “미국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민감하지만 주변적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한국 국민의 대일(對日) 감정과 일본의 오랜 침략 근성은 도외시한 채 미국의 국익에만 중점을 두고 한·미·일 동맹을 추구한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남중국해 분쟁’ 무력충돌 위기 고조

    중국이 필리핀, 베트남 등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남중국해에 싼사(三沙)시를 설립한 데 이어 인민해방군을 배치해 군비를 강화하자 주변국의 반발이 격해지고 있다. 당사국 간 무력 충돌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 23일 상하 양원 합동회의 국정연설에서 중국과 영토분쟁 중인 스카보러섬(중국명 황옌다오)에 대한 영유권 존중을 요구하는 한편 ‘평화수호’를 명목으로 18억 달러(약 2조 700억원) 상당의 무기를 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美, 필리핀에 군비 3000만弗 지원 또 미국이 필리핀의 군비를 지원하기 위해 3000만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으며, 미국 해안경비대가 사용하는 초대형 선박도 조만간 필리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주장했다. 군사력에서 중국에 열세인 상황에서 미국과 연대해 연일 거세지는 중국의 남중국해 장악 시도를 저지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실제 미국은 영유권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겠다면서도 남중국해 분쟁이 미국의 국익과 직결돼 있다며 중국을 압박하는 분위기다. 미국은 남중국해와 가까운 호주 북부에 기지를 설립하기로 한 데다 일본·인도와의 3각 방위동맹으로 중국 포위전략을 현실화하고 있다. 이에 맞서 중국도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도로 싼사시에 사단급인 경비구 설치를 승인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국방안보권을 강화하고 있다. 전체 인구가 1000명 남짓에 불과한 곳에 상주 인구보다 많은 군인을 배치한 것은 필리핀 등과의 영토 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국 상해정법학원 국방정책연구소 니러슝(倪樂雄) 소장은 “중국이 싼사시에 경비구를 설치하는 것은 싼사시를 사실상 남중국해를 지키는 중국의 군사 기지로 삼겠다는 의미로 남중국해 분쟁에 대한 중국의 강경한 태도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도 싼사시 군 파견 강력 반발 그러자 베트남 외교부는 싼사시에 군부대를 파견하는 것은 “국제해양법 위반”이라며 중국에 항의했다. 베트남과 중국은 스프래틀리 제도(중국명 난사군도·베트남명 쯔엉사군도), 파라셀 제도(중국명 시사군도·베트남명 호앙사군도) 등을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한편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싱크탱크인 국제위기그룹(ICG)은 최근 보고서에서 남중국해의 영유권 분쟁 당사국들이 각각 군비증강에 나서는 등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분쟁이 자칫 무력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최선의 해결책은 분쟁 당사국들이 문제 해역의 천연자원을 공유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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