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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사회의 응집성이 걱정이다/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며칠전에 영문학을 하시는 한 선배교수께서 퇴임하셨다.전공분야도 달라서 자주 뵙지 못하던 분이었지만 퇴임식 자리에서 힘주어 말씀하시던 내용은 필자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였다.그중 한 가지는 영국에 관한 것인데 스코틀랜드,잉글랜드,웨일스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욕구수준을 갖고 있으면서도 영국은 나라를 조화롭게 경영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산술적인 총합을 넘어서는 정치경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씀이다.또한 국왕과 계급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와 평등을 절묘하게 조화시켜나가고 있다고 하셨다.반면에 우리는 단일문화,단일민족이라는 습성에 포획되어 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 반목하고 질시하는 행태가 만연하게 되었다고 가슴아파하시는 듯했다.특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요즈음의 어려운 경제에 대한 해결방법,과거사정리,국가보안법의 개정·폐지 논쟁 등을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분리주의적인 대응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불안감이 노교수의 가슴과 머리에서 정리되면서 전공하신 문학말씀 대신 사회비평을 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어수선하다고들 한다.얼마 전 아침에는 미국에 사는 친구가 최근 한인타운의 부동산시장이 활황인데 투자할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을 하더니 저녁에 만난 어느 장애인부모는 한창 일할 40대말에 아이 교육을 위하여 캐나다로 이민가기 위하여 집을 내놓았는데 팔리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어딘가 나라가 잘못되어 가도 한참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국가와 사회의 건전운행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사회의 응집성이 급격히 이완되는 것 같다.여야로 깔끔하게 나눌 수도 없을 만큼 이념과 지역이 뒤엉켜 짜여진 우리의 정당구조에서 생성되는 정치세력간의 불신과 피해의식,기업주와 노동자 그리고 정부간의 불신,인터넷세대와 기성세대간의 상호 의구심 및 불신,국내의 확실성을 버리고 외국의 불확실성을 택하면서까지 기업과 자금을 해외로 들고 나가는 이들의 현실부정 등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근저에 도사리고 있는 원인을 제대로 진단해야 할 때라는 긴박감마저 든다.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자기주장을 하는 각각의 주체 간에 소통이 단절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인터넷 광장에서 기성의 질서와 다른 ‘동굴속의 집회’를 자주 갖는 젊은이들과 그러지 못하는 분들 간의 소통단절,본원적 권력의 주체가 변한 후 언론,타 정파,사회구성의 타 세력 간에 형성된 소통단절,장애인·노인 등 소외계층이 느끼는 사회적 절벽감,기업하는 사람들이 공권력과 정책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분배론의 힘을 빼는 현실경제 앞에서 노동운동세력이 체험하는 무의미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소통의 장애가 누적되고 있다.이것이 결국은 국민 전체가 공적 공간의 사회인이라는 공유의식을 상실케 하고 있는 것 같다.개인들이 각자가 파놓은 논리적 참호에서 나와 공적 공간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는 소통의 장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이해가 서로 다른 ‘현존하는 타자’들이 한자리에서 긴장을 유지하며 어떠한 결론을 도출시켜 나가는 장들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어쩌면 국민의 대표기구인 국회에 ‘나라소통위원회’같은 것을 두고 이 나라의 힘을 빼고 있는 소통장애를 진단하고 치유를 위한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대통령산하에 각종위원회들이 활동하고 있으나,본원적 권력은 그 속성상 편안한 사람들끼리의 참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어 외부에 동업으로 비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를 위하여 사회의 어른들이 나설 때가 된 것 같다. 퇴임식장을 나가시던 노교수의 뒷모습은 마치 ‘혼자서만 거주하는 세계를 건설하려는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상실한,차라리 신과 같은 존재다.’라고 역설하고 있는 아렌트의 진지한 얼굴 같았다. 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 ‘김치 세계화 프로젝트’ 佛 르코르동블루 쿠앵트로 회장

    ‘김치 세계화 프로젝트’ 佛 르코르동블루 쿠앵트로 회장

    “요리는 단순한 먹을거리 차원을 넘어 문화입니다.한국의 대표 음식 김치를 통해 한국의 문화,더 나아가 생활양식을 세계에 전할 수 있습니다.” 30일 내한한 세계적인 요리전문 학교인 르코르동블루의 앙드레 쿠앵트로(55) 회장은 “김치를 프랑스 음식과 접목시키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며 김치의 세계화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그는 김치를 맛 본 결과 “영양학적인 측면에선 나무랄 데가 없지만 맛이 너무 강하다.”고 특징지었다. 쿠앵트로 회장은 한국·프랑스·일본의 조리사들이 김치를 이용한 퓨전 요리 20여가지를 연구,개발해 “연말쯤 영어와 불어판 김치요리 책자를 내기로 했다.”면서 외국어로 된 김치요리 책자가 나오면 김치를 이용한 퓨전 요리가 한층 다양하게 개발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같은 김치 프로젝트는 농수산물유통공사 네덜란드 지사가 2002년 르코르동블루에 먼저 제안했다가 올해 본격 추진됐다.‘프랑스 요리가 김치를 만났을 때’라는 주제의 김치 프로젝트는 프랑스 파리식품박람회와 재외공관 등을 통해 홍보할 예정이다. 김치의 세계화에 팔을 걷어붙인 쿠앵트로 회장은 주류회사인 레미 마르탱과 쿠앵트로 리퀴르 가문의 후계자로 프랑스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가 회장으로 있는 르코르동블루는 오드리 헵번이 현대판 신데렐라로 열연한 영화 ‘사브리나’(1954년)의 배경이 됐으며,1950년대 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의 대관식 오찬을 주관한 요리의 아카데미다. 한편 ‘푸른 리본’을 뜻하는 르코르동블루는 1578년 프랑스 국왕 앙리3세가 기사들에게 내린 최고의 훈장.이들 기사에겐 최고의 만찬이 제공됐는데 그 맛과 호사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1895년 파리에서 개교한 르코르동블루는 숙명여대를 비롯해 12개국 22개의 분교를 거느리고 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산 오르記]서울 인왕산

    [산 오르記]서울 인왕산

    서울 중심에서 가장 가깝고 손쉽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험한 산세를 맛볼 수 있는 산은? 등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어렵지 않게 ‘인왕산’이라고 답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히기가 그리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다. 1968년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출입이 전면 금지되었다가 지난 93년 부분적으로 개방된 산이다.인왕산(仁旺山·338.2m)은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웅장하다.동쪽 기슭이 아늑하고 풍치가 빼어나 장안 제일의 명승지였다.북쪽 자락에 있는 부암동은 무계동(武溪洞)이라 불리던 곳으로 중국의 무릉도원에 버금갈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삼각산(북한산) 남쪽으로 보현봉이 솟구치고,다시 북악에서 한 줄기는 동쪽 낙산으로,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인왕산을 빚어 놓았다.풍수 상으로 보면 조산(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에 연결되고 낙산이 좌청룡(左靑龍)이며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된다. 인왕산이란 명칭은 이 산자락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弼雲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난주말 자하문(창의문)을 기점으로 인왕산을 올라보았다.성곽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철거하다 만 청운동 시민아파트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보니 서울 중심부가 잘 보이는 곳마다 초소가 있어 등산객의 안전을 돕는다. 중간에 등산로가 성곽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넘어오는 곳에 부암동에서 오르는 길과 만난다.곧이어 옥인동 만수천에서 오르는 길과도 만났다.커다란 바위가 성곽을 대신하고 철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졌다.정상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바위가 튀어 올라 있다.바위를 오르려고 깎아 놓은 것인지,바위에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자연스레 계단이 되었는지 모를 기묘한 모습이다.네모난 탁자가 놓여 있어 좋은 휴식터가 되는 정상에서 조망은 가히 환상적이다. 서울을 한눈에 이렇게 잘 볼 수 있는 곳은 인왕산밖에 없다.세상에서 제일 높은 산인 것 같은 북한산의 보현봉이 우뚝하게 보이고 서쪽으로 이어진 비봉능선의 암봉들이 선경을 이룬다.북악산 자락의 경복궁의 기와집들이 네모의 집합으로 보이고 목멱산 꼭대기의 서울탑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도심의 고층 건물들은 마치 ‘레고’를 쌓아 놓은 조형물의 전시장 같다.그 뒤로 한강으로 나뉜 서울의 남북이 거대한 회색의 도시를 연출하고 있다.코앞에 보이는 치마바위 아래 황학정(黃鶴亭)의 과녁 세 개가 뚜렷이 보인다.그 아래가 사직단(社稷壇)이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널찍한 필운동 일대는 왕궁 터가 될 뻔한 곳이다. 조선이 한양 천도를 결정할 당시에 무학대사가 인왕산에 올랐을 것이다.산중턱에 선(禪)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과 목멱산(남산)을 좌우용호(左右龍虎)로 삼으려 했으나 정도전(鄭道傳)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무학대사가 우백호로 생각한 남산을 향해 성곽이 길게 늘어섰다.성곽을 따라 오르는 등산객의 발걸음이 느릿느릿하다.계단은 급경사를 내리 달리더니 안부에서 사거리를 만났다.동쪽이 인왕천 약수터로 가는 길이고 서쪽은 홍제동 옛 서울여상 자리로 내려가는 길이다.계단 가운데에 흰 페인트로 네모를 그려 놓은 길은 시커먼 ‘범바위’가 버티고 있는 순한 능선을 지났다. 성곽을 따라 이어진 길은 소나무 숲 사이로 간간이 빌딩숲이 내려다 보이곤 하더니 곧 도로를 만나 속세로 이어졌다.성곽에 기대서 바라보는 인왕산의 모습이 정겹다. ●볼거리 인왕산은 종로구와 서대문구의 어디에서 오르든지 30분이면 오를 수 있다.서울 성곽(사적 제10호)을 따르는 등산로가 대표적이고 조망도 뛰어나다. 청운약수·만수천약수·인왕천약수·선바위약수 등 약수터가 즐비하고 치마바위·기차바위·코끼리바위·범바위·모자바위·선바위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전시장이다. 서울시 민속자료 제4호인 선바위는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모습 같아서 선(禪)바위라 한다.선바위 밑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는데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신궁을 세우면서 남산꼭대기에 있던 것을 옮겼다.무속당(巫俗堂)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황학정은 사직단 뒤편 산기슭에 있다.원래는 대송정(大松亭)이 있었으나 1922년 일제가 헐어버린 경희궁내의 황학정을 이전한 것이다.필운동의 등과정,옥동의 등룡정,누상동의 백호정,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을 합하여 서촌 오사정(西村 五射亭)으로 일컬었다. 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태조 4년(1935)에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국토의 신을 모시는 사단(社壇)은 동쪽에,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壇)은 서쪽에 설치하고,국왕이 매년 정월과 이월 그리고 팔월에 제사를 지냈다.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 산악문학인 안재홍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14) 강진만에서 ‘경세유표’를 곱씹다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14) 강진만에서 ‘경세유표’를 곱씹다

    여름이 끝나가는 전남 강진만의 구강포를 굽어보며 200여년 전에 살았던 한 선비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위당 정인보 선생이 말했던가.다산 정약용은 조선 사회의 총체적 연구 과제라고.바다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예외없이 우리는 다산과 만나야 한다.200여년 전 19세기 초반의 인물인 다산 정약용의 ‘불패 신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생애의 결정적 대목을 남도 바닷가의 귀양살이로 채운 이 불우한 ‘천재’의 행장(行狀)에 관하여 후인들은 깊은 경의를 표하곤 한다.그러나 그 ‘천재’가 해양정책 분야에서까지 탁월한 견해를 드러냈다는 사실은 의외로 알려져 있지 않다.해양에 주목한 그의 예지를 재론하고자 강진만까지 찾아든 것이다. ●바다까지 아우른 다산의 학문 물 비린내와 개펄 냄새가 해조음에 섞여 묘한 음색을 자아내는 강진만 하구 구강포(九江浦).아홉골 물길이 모여 만든 구강포,‘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구십포(九十浦)로 기록된 곳이다.전남 3대 강의 하나인 탐진강은 보림사가 있는 장흥 유구를 거쳐 강진 읍내를 적시며 구십포로 흘러든다.워낙 뭍으로 깊게 혀를 내민 만인 데다 간척까지 이뤄져 지금은 바다인지 강인지 경계조차 애매하다.구십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더니,송하훈(51) 강진문화원 사무국장은 거침없이 읍내 고층 아파트로 이끈다.아파트 옥상에 서니 구강포가 끄트머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거듭된 간척의 결과다. 구강포는 탐라로 가는 지름길이자 인근 대구면의 고려청자를 배로 실어내던 외길 항로였다.걸작 청자를 쏟아냈던 곳.600여년 동안 단절된 기예가 복원돼 ‘청자마을’로 기지개가 한창이다.바닷길이라는 특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왜 개성에서 천리가 넘는 궁벽진 이곳에 도요지를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칠량의 봉황마을을 찾아드니 감개가 무량하다.바닷가에 바짝 붙어 옹기점이 눈에 띈다.전국에서 바닷가에 있는 유일한 옹기점이다.‘봉황 옹기’로 불리는 이곳 옹기는 곧바로 배에 실려 제주도나 인근 도서로 팔려 나갔다.이렇듯 고려청자와 봉황옹기는 오로지 구강포를 둘러싼 바닷길과의 연관으로만 설명된다. ●‘삼면이 바다이나 국가에는 득이 없다’ 이런 사실을 구강포가 굽어보이는 곳에서 18년이나 살았던 정 다산이 모를 리 만무하다.그도 오늘날 횟집촌으로 변한 마량포구를 거닐었을 것이며,칠량의 청자마을과 만덕산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에 이르는 호젓한 오솔길,초당 아래 귤동마을도 자주 오갔을 것이다.그러면서 갇혀 산 18년 동안 겨레를 위해 땀흘리지 않았겠는가. 역사는 더러 우연의 소산이기도 하다.하필이면 다도해 연안으로 쫓겨온 덕분에 그의 바다를 읽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알려져 있듯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영암에 뿌리를 둔 월출산 아래 성전쯤에서 길이 엇갈렸다.형은 남서쪽으로 내려가 우이도를 거쳐 흑산도에 유배됐으며,동생은 남동쪽 강진만의 백련사 인근에 갇혀 살았다.형은 흑산도에서 ‘장대’라는 어부를 만나 불후의 수산서 ‘자산어보’를 남겼고,동생은 강진만을 굽어보면서 쓴 ‘경세유표’ 속에 원대한 해양방책을 녹여 넣었다. 500여권의 방대한 편질(篇帙)을 남긴 다산의 저술에서 ‘경세유표’는 단연 압권이다.1표2서(一表二書) 중의 하나로,강진 유배생활(1801∼1818)의 마지막 전해(1817)에 저술하였다.다산은 유표에서 해양에 관한 원대한 뜻을 펼쳐보이며,유원사(綏遠司)라는 해양 총괄기관의 설치를 주창한다.오죽했으면 경세유표에서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나 어염(魚鹽)에 대한 이득은 모두 사삿집에 돌아가고 국가에는 하나도 득이 없다.’고 했을까. ●조정의 해양에 대한 무관심 비판 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아는 그는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 어민과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도서의 처지를 살펴 해양경영론을 제기하며 조정의 해양에 대한 무관심과 무대책을 아프게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그는 ‘나라 땅이 편소하여 북은 2000여리,남은 1000여리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오직 서남쪽 바다 여러 섬,그중 큰 것은 둘레가 100리나 되고 작은 것도 40∼50리는 된다.’고 말한다.그의 주장은 계속된다. ‘별이나 바둑판처럼 벌려 있고,작고 큰 것이 서로 끼어 있어 수효가 대략 1000여개인데 나라의 울타리다.개벽 이래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이 강토를 다스리지 않았다.그러므로 바닷가 고을끼리 각자 자력으로 서로 부리고 붙여서,강한 자는 많이 차지하고 약한 자는 적게 얻는다.한 무더기 푸른 산이 분명 고을 앞에 있는데 그 소속을 물으면 수백리 밖의 아주 먼 고을을 말한다.또 명목은 고을에 예속되어 있으나 실상은 딴 곳에 종속되어,혹은 궁방(宮房)이 세금을 뜯어갔고,혹은 군문(軍門)이나 고을 토호가 착취했다.간사한 짓이 사방에서 나와 제멋대로 백성을 토색질한다.’ 이처럼 문란한 풍조,신라·고려 때부터 이어진 오랜 구악(舊惡)의 유래를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다산은 ‘내가 오랫동안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그 실정을 익히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18년간 어민과 호흡하며 방략 구상 유원사를 세워 온 나라의 섬을 직접 관장,민중의 질곡을 없애자는 대안까지 제시한다.섬의 세금을 직접 유원사에 바치게 해 관할 고을의 간섭과 혈세의 낭비,어민들의 질곡을 피하고자 하였다.이런 앞선 국가경영의 책략이 무능한 조정에 의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나라의 재력이 빈약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느냐.’는 반박을 짐작한 듯 이런 견해도 준비했다.‘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니 진실로 한번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고,산이 일어나듯 할 것이다.’ 그의 해양방략은 하루아침에 구상된 것이 아니라 18년여란 세월을 강진만의 어민들과 벗하면서 숙성시켜 구체화한 것이다.그가 얼마나 어민의 삶에 가까이 다가섰는가는 그가 남긴 시어(詩語)에서도 산견된다.가령 탐진어가(眈津漁歌)에 등장하는 궁선(弓船)은 활선,맥령(麥嶺)은 보릿고개,고조풍(高鳥風)은 높새바람,마아풍(馬兒風)은 마파람을 뜻하는 것들이다.한문투긴 하지만 민중의 토속언어를 끌어들였으니,당대 언어의 ‘종다원성’을 확장시켰다는 점뿐 아니라 해양방략이 민중의 삶에 근거한 이론임을 설명하는 명쾌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우리는 여기에서 탁상물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실천학문의 예증을 본다. ●다산의 정책이 받아들여졌더라면… 다산은 북방에 뒤지지 않는 변방 외번(外藩)으로서 남방의 섬을 중시했다.올바른 해양경영으로 온갖 물산이 산처럼 쌓이는 풍경을 다산은 그때 이미 예견한 것이다.그러나 옹졸한 세계관에 갇혀 살던 봉건왕조는 국방·경제·수산의 근본이 될 종합 해양정책을 망라한 다산의 해양방략을 수용하지 않았다.경세유표조차도 먼 훗날에야 일반에게 알려졌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랴. 유럽의 경우 기록적인 항해나 대규모 약탈의 이면에는 국왕이나 자본가,심지어는 왕비나 호사가 등 든든한 후원자들이 즐비했으나 내 땅의 바다라도 잘 다스리자는 이 뜻깊은 방책에는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경세유표를 쓴 1817년으로부터 불과 26년여 뒤인 1843년 중국에서는 50여권의 방대한 ‘해국도지(海國圖志)’가 출간된다.이는 1839년 아편전쟁에서 해양제국 영국에 패한 뒤 남경조약에 따라 홍콩과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하는 아픔을 겪고 나서야 제시된 대응책이다.서구 열강의 서세동점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의 본격화를 의미했으니,해양제국의 침략을 예감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영토조차 장악하지 못한 슬픈 왕조의 자화상을 경세유표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돌이켜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거니와 결국 이 땅이 일본을 위시한 해양세력에게 유린당하고서야 그를 다시 생각한다는 사실이 새삼 아프게 폐부를 저민다.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지금도 ‘그때 그의 도서경영론이 받아들여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21세기 바다경영의 지혜 배워야 지금도 민감한 국제 해양질서의 도전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가 200여년 전에 주창한 해양방략의 경륜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곱씹어야 하리라. 따지고 보면 노르웨이령 북극에 ‘다산기지’가 존재함이 우연은 아니다.해양연구원(KORDI)에서 북극 전초기지를 마련하고 해양학자를 파견해 본격적 북극탐사를 시작하면서 명명한 ‘다산’이라는 기지명은 탁월한 선택이다.혹자는 다산과 바다가 무슨 관계냐고 묻겠지만,수많은 실학자 중에서 그처럼 명료하게 해양방책을 제시한 사람이 또 누구인가. 필자는 그의 ‘미완의 해도경영론’을 21세기 바다경영의 기본 노선으로 받아들일 것을 감히 주창한다.또 ‘어제 같은 옛날’을 살았던 다산에게서 과거를 거울 삼는 감고계금(鑑古戒今)의 배움을 청한다.강진만에서 다산을 만나면서 내내 보듬고 있었던 화두는 ‘이 많은 섬들을 어찌할 것인가.’하는 고민이었다.다시 공무원들이라도 먼저 ‘경세유표’를 찬찬히 되읽어 다산으로부터 변방의 섬들이 번성해 국력의 영화로 이어질 해양방략의 지혜를 얻어야 하리라.
  • [서울광장] 과거의 반성과 화해/손성진 논설위원

    [서울광장] 과거의 반성과 화해/손성진 논설위원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유신에 대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화해하고 용서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김 전 대통령은 유신의 최대 피해자 아닌가.박 대표가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지만 먼저 화해의 손짓을 한 쪽은 사실 김 전 대통령이었다.재임중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위한 예산을 책정한 것이다.사후 20년 동안 잠잠하던 박정희의 공과(功過)에 대한 시비가 촉발된 것은 그때였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반성을 거쳐 앞으로 나아간다.대결과 화해의 반복으로 발전하는 것이다.이런 변증법적 절차로 역사가 진보하려면 진정한 반성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어제가 없이 내일이 찾아올 수 없듯 과거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다.진정한 반성이 없으면 대립에서 벗어날 수 없고 화해도 없다.과오를 인정하지 않을 때 역사는 정체되고 만다.6·25전쟁에 개입해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은 최대의 적이었던 중국이 지금은 수교와 화해로 최대의 교역국이 됐다.그러나 중국은 고구려사 왜곡을 시도함으로써 한·중 관계를 뒷걸음질치게 만들고 있다.일본은 어떤가.제국주의의 망령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의 반성없는 태도로 한국과 일본은 수십년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감정적 대립 상황에 놓여 있다.그것은 양국의 동반자적 관계를 해쳐서 상호 발전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더 먼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볼 후세에 올바른 과거를 정립해서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친일 문제가 그렇고 박정희와 유신이 그렇다.과거의 진실은 여전히 부정되고 있다.박정희는 일본군 소속이 아니라 만주군이었다는 한나라당 김모 의원의 주장은 해괴하다.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여덟글자를 혈서로 써내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진충보국이란 물론 일본국왕에 대한 충성다짐이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그는 이렇게 선서를 했다.“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죽겠습니다.”나구모 주이치 당시 일본 육사교장은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면에서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답다고 박정희를 평가했다.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던 박정희는 더 일본인다워지려고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최상천의 ‘알몸 박정희’)만주군 제8단에 배치된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작전에 들어간다고만 하면 ‘요오시(좋다),토벌이다!’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고 한다.(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만주군은 일본의 군대였고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일본군 장교였다.일제 치하에서 태어나 자란 박정희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정말 일본인인양 착각했는지 모른다. 박정희의 경제적 치적은 무시될 수 없다.그러나 실정(失政)과 과오가 묻혀서는 안 된다.경제 업적에 대한 평가도 양면적이다.개발독재의 폐해는 아직도 앙금이 남아 발목을 잡고 있다.정경유착,빈부격차,경제력 집중 등 독버섯 같은 요소들은 개발독재의 산물이다.치적만 부각하는 박정희 기념관을,그것도 국가 예산으로 건립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잘못도 함께 보여주는 ‘박정희 역사관’을 만든다면 모를까.역사를 오도할 수 있는 기념관 건립보다는 참모습을 규명해서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친일 경력의 왜곡이 시도되듯 시간이 흐르면 협박,사생활 추적,세무조사,고문,날조 등 그가 동원한 온갖 불법수단도 부정되고 미화될 것이다.지금도 막걸리를 마시며 농민들과 담소하는 박정희의 웃는 모습만 기억하는 국민들이 많지 않은가.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시아누크/이목희 논설위원

    며칠전 평양에서 타전된 한 장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북한 리더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캄보디아 최고훈장을 수여한 뒤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었다.시아누크 국왕은 고(故) 김일성 주석과 절친한 사이였다.김 주석 자리에 김 위원장이 들어간 셈이다. 시아누크 국왕 부부는 지난 4월부터 넉달이나 평양에 머물렀다.국왕 일행은 엊그제 북한측의 대대적 환송을 받으며 고국으로 돌아갔다.시아누크 국왕은 올해 82세.18세에 왕위에 오른 뒤 국가원수,망명정부 수반,대통령에 이어 다시 왕으로 복위하는 등 파란만장한 생을 살고 있다.197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우파 쿠데타에 이어 좌파 크메르루주 독재기간 평양과 베이징을 오가며 망명생활을 했다. 김일성은 생존 당시 시아누크 국왕을 특별하게 아꼈다.평양에 호화로운 저택을 제공하고,캄보디아 복귀 후에도 북한 경호원을 붙여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시아누크 국왕도 힘든 일만 있으면 평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이번 평양 장기체류도 캄보디아의 실권자 훈센 총리와의 불화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시아누크를 극진히 대접하는 데는 ‘부친의 친구’라는 의식이 깔려 있다.‘김일성 유훈통치’가 일국의 국왕이 다른 나라에 4개월이나 머무는 상식 밖의 외교의전을 만들었다.시아누크 국왕은 지난달 “조만간 왕위를 포기하고 북한에 체류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함께 최근 탈북자들의 ‘남방 탈출로’로 애용되고 있다.훈센 총리는 시아누크 국왕과 달리 남한에 호의적이다.훈센-시아누크-김정일로 이어지는 삼각관계를 잘 이용하면 남북관계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시아누크 국왕의 예에서 나타나듯,공산국가나 독재국가 지도자들은 ‘옛 친구’를 존중하는 편이다.제도와 관계없이 움직이므로 현직이건,물러났건 간에 환영을 받는다.근래 남북관계가 꼬이고 있다.김대중 전 대통령,임동원·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까지 김 위원장이 호감을 가진 인사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강구해 볼 만하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요르단 “이라크 파병 긍정 검토”

    최근 사우디 아라비아가 제안한 아랍권의 이라크 파병 방안이 아랍국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의문시되는 가운데 사우디와 더불어 중동의 친미 성향 국가인 요르단이 파병을 긍정 검토할 뜻을 밝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이 3일(현지시간) 아랍계 위성방송 알아라비야와의 인터뷰에서 이라크의 공식 요청이 있을 경우 파병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중동 언론 ‘미들 이스트 온라인’ 인터넷판이 보도했다.압둘라 국왕은 “우리는 이라크에 있는 미군 탱크를 요르단 탱크로 바꾸길 원하지 않지만,우리의 이라크 형제들이 아랍 군대의 참여를 요청할 경우 면밀히 살펴보고 적합한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지난 28일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사우디는 “이라크에 있는 다국적군을 대체하기 위해 이슬람 군대를 보낼 수 있다.”며 아랍권의 파병을 제안했지만 주위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지난 1일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도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은 현재 이라크 파병을 원하지 않는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라크에서 파병국 국민을 상대로 한 인질극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요르단의 이번 입장 표명에 아랍과 이슬람권이 동조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와 관련,존 케리 미국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는 3일 “당선되면 유럽과 아랍권의 협조를 얻어 이라크 주둔 미군을 거의 외국군으로 교체할 것”이라고 밝혀 아랍국의 이라크 파병을 적극 이끌어낼 뜻을 밝혔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뉴스플러스] 우리당 386, 요르단국왕 면담

    열린우리당 386세대 의원들의 모임인 ‘새로운 모색’ 소속 의원 20여명이 오는 25일 노무현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하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 비공개 면담을 갖는다.면담에서는 한·중동 외교 강화 방안 등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우상호 의원은 “압둘라 2세 국왕과 친분이 있는 386 경제인의 주선으로 만남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 아랍국 “이라크 요청땐 파병”

    아랍국들이 신생 이라크 임시정부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제의를 하고 있다.이라크 임정은 큰 도움은 되지 않을 이들의 제의에 그다지 반갑지 않은 눈초리다. 다만 미국은 국제사회가 이라크 지원에 나섰다는 상징 차원에서 만족하는 분위기다. 바레인의 셰이크 하마드 국왕은 3일 이라크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바레인 해군을 보내 이라크 해역 방위를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국영 BNA통신이 보도했다.이에 앞서 지난 1일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은 중동 국가로는 처음으로 이라크 정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이라크에 파병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지난 2일 파병 의사를 밝힌 예멘은 미군 주도 연합군이 이라크를 떠나고 유엔 다국적군에 가담하는 형태로만 이뤄져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호시야르 지바리 이라크 외무장관은 “접경국이 아니며 유엔의 이름하에 군대를 보낼 경우 아랍국의 지원을 고려해보겠다.”고 대응했다.접경국이자 종족 및 종파 문제로 미묘한 관계인 터키와 이란의 군대를 받아,이들이 이라크 내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은 원치 않음을 간접 시사한 셈이다. 이라크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요청으로 1만명을 파병키로 했던 터키 정부의 결정에 적극 반대,파병을 무산시킨 바 있다.시아파 신정(神政)국가인 이란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란은 정보원 확대,이라크 내 시아파 성직자 지원 등으로 영향력을 늘리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가 4일 보도했다. 13만 8000명의 미군을 포함,이라크에 주둔 중인 외국군은 16만명 수준이다.4일 현재 파병을 제의한 요르단,예멘,바레인의 현역 군인을 합친 숫자와 거의 비슷해 이 세 국가가 파병을 한다 해도 큰 도움이 안될 전망이다.각각 현역이 10만·5만 4000·1만 1000명 수준이다. 바레인은 미 해군 제5함대 기지가 있지만 자체 해군 병력은 취약하다.해군의 가장 큰 배는 97년 미국이 준,지대지미사일을 나르는 프리깃함이다.90년 독립한 뒤 94년 내전을 겪은 예멘은 현재 자국 내 급진 이슬람 저항단체를 소탕하는 데도 어려움에 처해있다. 요르단은 이미 국내에서 이라크 군경훈련을 지원하고 있다. 마르완 무아시르 요르단 외무장관은 요르단이 파병을 선언한 것이 아니라 바그다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이경기의 스크린1인치] 영화속 영원한 전설 ‘아더왕’

    2004년 할리우드 경향중 하나는 신화나 설화를 소재로 한 대작의 봇물이다.브래드 피트의 남성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 ‘트로이’는 지금 우리 영화가를 강타중이다.올리버 스톤 감독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군사 지도자로 꼽히는 마케토니아 제왕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극화한 ‘알렉산더’를 공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이런 틈바구니에 ‘킹 아더’가 도전장을 내민다.‘아마게돈’ ‘진주만’ ‘캐리비안의 해적’ 등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야심작이다. 6세기 실존했던 영국의 아더 왕은 영화계의 단골 소재다.숀 코너리,리처드 기어,줄리아 오먼드 주연의 ‘카멜롯의 전설’(First Knight·1995년)은 기사 랜슬롯이 왕비인 기네비아와 통정(通情)한 사연을 주제로 하고 있다.또 ‘킹 아더와 원탁의 기사’(King Arthur and the Square Knights of the Round Table)는 영화,뮤지컬,연극 심지어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졌다.영국에 이어 스칸디나비아,프랑스,로마까지도 점령했던 아더왕은 수하에 있는 뛰어난 기사(騎士)들을 공평하게 대접하기 위해 둥근 테이블을 만들어 격의없는 대화를 시도했다.현대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원탁의 기사’제도의 출발이다. 브리튼 왕의 서자(庶子)로 출생한 아더는 선대왕이 바위에 꽂아 놓았다는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내 하늘이 점지한 왕으로 추앙 받으면서 유럽 각국으로 정벌하는 공적을 세운다.그가 합법적인 국왕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게 되는 보검 엑스칼리버를 얻게 되는 일화는 존 부어맨 감독이 니겔 테리를 기용해 ‘엑스칼리버’(Excalibur·1981년)로 공개된 바 있다. 아더 설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시대 감각에 맞는 변종된 사연을 첨부시킨 작품도 다수 공개됐다.제임스 헤드 감독의 ‘엑스칼리버 키드’(The Excalibur Kid·1999년)는 평범한 젊은이가 아더 왕이 살고 있는 중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아더가 통치하는 왕국을 사사건건 곤경에 빠트리는 마녀와 마법사 멀린의 음모를 제거하고 아더 왕국의 평온을 되찾아 준다는 동화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러스 메이베리 감독의 ‘우주인과 킹 아더’(The Spaceman and King Arthur·1979년)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인이 역시 시간 여행을 통해 중세로 날아가 아더를 쫓아내려는 악당 노르드레드 기사의 음모를 제압하고 왕국의 평온을 되찾아 준다는 줄거리다. ‘브라질’ ‘바론 남자의 모험’으로 유명한 테리 길리엄 감독의 ‘몬티 페이튼과 성배(聖杯)’(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1975년)도 화제작이었다.예수가 마지막 성찬(Christ at the Last Supper)에 사용한 ‘성배’를 되찾기 위해 아더 왕이 충직스러운 심복 랜슬롯,베데브르 등과 모험 여행을 떠난다. 그는 로마 정벌을 위해 조카 모드레드에게 왕국과 왕비를 맡기고 출정했지만 모드레드가 반역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급거 귀국해 그를 처치했지만 결투 중에 치명상을 입고 신비의 섬 아발론으로 은둔해 말년을 보냈다. 이후 ‘아발론’은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등과 함께 인간이 갈망하는 지상의 낙원과 같은 존재로 각인된다. 아더 왕은 이처럼 여러 이야기를 파생시키면서 영화계의 이야기 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이경기의 스크린1인치] 영화속 영원한 전설 ‘아더왕’

    2004년 할리우드 경향중 하나는 신화나 설화를 소재로 한 대작의 봇물이다.브래드 피트의 남성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한 ‘트로이’는 지금 우리 영화가를 강타중이다.올리버 스톤 감독은 인류 역사상 위대한 군사 지도자로 꼽히는 마케토니아 제왕 알렉산더의 일대기를 극화한 ‘알렉산더’를 공개할 채비를 하고 있다. 이런 틈바구니에 ‘킹 아더’가 도전장을 내민다.‘아마게돈’ ‘진주만’ ‘캐리비안의 해적’ 등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의 야심작이다. 6세기 실존했던 영국의 아더 왕은 영화계의 단골 소재다.숀 코너리,리처드 기어,줄리아 오먼드 주연의 ‘카멜롯의 전설’(First Knight·1995년)은 기사 랜슬롯이 왕비인 기네비아와 통정(通情)한 사연을 주제로 하고 있다.또 ‘킹 아더와 원탁의 기사’(King Arthur and the Square Knights of the Round Table)는 영화,뮤지컬,연극 심지어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졌다.영국에 이어 스칸디나비아,프랑스,로마까지도 점령했던 아더왕은 수하에 있는 뛰어난 기사(騎士)들을 공평하게 대접하기 위해 둥근 테이블을 만들어 격의없는 대화를 시도했다.현대 민주주의를 태동시킨 ‘원탁의 기사’제도의 출발이다. 브리튼 왕의 서자(庶子)로 출생한 아더는 선대왕이 바위에 꽂아 놓았다는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내 하늘이 점지한 왕으로 추앙 받으면서 유럽 각국으로 정벌하는 공적을 세운다.그가 합법적인 국왕임을 만천하에 선언하게 되는 보검 엑스칼리버를 얻게 되는 일화는 존 부어맨 감독이 니겔 테리를 기용해 ‘엑스칼리버’(Excalibur·1981년)로 공개된 바 있다. 아더 설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시대 감각에 맞는 변종된 사연을 첨부시킨 작품도 다수 공개됐다.제임스 헤드 감독의 ‘엑스칼리버 키드’(The Excalibur Kid·1999년)는 평범한 젊은이가 아더 왕이 살고 있는 중세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 아더가 통치하는 왕국을 사사건건 곤경에 빠트리는 마녀와 마법사 멀린의 음모를 제거하고 아더 왕국의 평온을 되찾아 준다는 동화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러스 메이베리 감독의 ‘우주인과 킹 아더’(The Spaceman and King Arthur·1979년)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인이 역시 시간 여행을 통해 중세로 날아가 아더를 쫓아내려는 악당 노르드레드 기사의 음모를 제압하고 왕국의 평온을 되찾아 준다는 줄거리다. ‘브라질’ ‘바론 남자의 모험’으로 유명한 테리 길리엄 감독의 ‘몬티 페이튼과 성배(聖杯)’(Monty Python and the Holy Grail·1975년)도 화제작이었다.예수가 마지막 성찬(Christ at the Last Supper)에 사용한 ‘성배’를 되찾기 위해 아더 왕이 충직스러운 심복 랜슬롯,베데브르 등과 모험 여행을 떠난다. 그는 로마 정벌을 위해 조카 모드레드에게 왕국과 왕비를 맡기고 출정했지만 모드레드가 반역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는다.급거 귀국해 그를 처치했지만 결투 중에 치명상을 입고 신비의 섬 아발론으로 은둔해 말년을 보냈다. 이후 ‘아발론’은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등과 함께 인간이 갈망하는 지상의 낙원과 같은 존재로 각인된다. 아더 왕은 이처럼 여러 이야기를 파생시키면서 영화계의 이야기 주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 러·日·몽골 “중국 고구려사 편입 난센스”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가 28일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개막됐다.새달 7일까지 계속될 이 총회에서는 북한과 중국이 함께 심의를 요청한 ‘고구려 유적’이 동시에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될 것이 확실시된다.세계유산위 총회 개막일에 맞춰 한국JC(중앙회장 박상용)와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 서경대교수)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고구려의 정체성’이란 주제의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한국 일본 미국 러시아 몽골 터키의 학자 81명이 참가해 30일까지 진행하는 이 학술회의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의 허구성을 비판하고,고구려뿐 아니라 중국 인접 민족과 국가의 학자들의 발제문과 토론을 통해 ‘동북공정’ 프로젝트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자리여서 각별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중국과 제3국 학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요약한다. ■ 중국의 입장과 반론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당초 3명의 중국 학자가 참가해 고구려사를 놓고 한국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됐지만 중국 정부가 세계유산회의 기간 중 학자들에게 금족령을 내려 불발에 그쳤다.대신 중국학자들은 논문을 보내와 ‘고구려는 동북지역의 고대민족이며,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일제히 반발하며 그 허구성을 지적했다. 우선 쑨진지(孫進己) 중국 선양동아연구중심 주임은 “고구려를 고려,오늘의 조선인으로 보는 선입견을 배제해야 하며 역사귀속과 현실의 계승을 분명히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구려와 중·한의 관계 및 귀속’이란 발제문을 통해 “왕씨 고려가 고구려의 3분의1의 토지와 4분의1의 인민을 계승했기 때문에 왕씨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보지만 고구려의 다른 3분의2의 토지와 4분의3의 인민은 중국이 계승하였기 때문에 고구려가 단지 조선(한국)인의 선인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특히 “고구려가 건립 초기 한(漢) 현토군 관할하의 한개의 후국이었고 후에 왕국으로 승진했으므로 고구려의 전기에는 조선(한국)역사상의 정권의 관할에 속할 수 없었고 후기에 고구려가 비록 중국의 중원의 전란을 틈타 중국의 많은 군현을 점령하였지만 고구려는 시종 중국의 역대 정부가 책봉한 고구려왕의 직을 접수하고 조공했을 뿐만 아니라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못박았다. 이에 대해 최광식 고려대 교수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등에 고구려가 고조선 부여 신라 백제 등과 함께 기재되어 있고 조선시대 편찬된 동사강목,동국통감 등에도 고구려가 기재되어 있음을 들어 그것은 선입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박했다.최 교수는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은 것을 문제삼아 두나라가 중앙정권과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공책봉관계는 남북조시대 중원왕조와 주변 제국의 군장들 사이에 책봉을 통한 외교적 관계에 불과하다.”며 “역사적 계승관계는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후대에 누가 계승의식을 가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응대했다. 장잉(張英) 지린성 사회과학원 조선한국연구소장은 ‘고구려 귀속문제에 대한 중국학자의 관점’에서 “중국학자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점은 일관되게 ‘중국 역사상의 소수민족 정권’이란 점이며 일부 ‘일사양용론’(一史兩容論),혹은 고구려가 고대조선(한국)의 국가임을 주장했던 학자들도 최근 모두 고구려사의 중국사임를 강조하고 있다.”며 그 근거로 고구려는 중국 영토에 건립됐고 줄곧 중원왕조의 신복으로 책봉받았음을 들었다. 이에 대해 장보영 경북대 교수는 “고구려가 동북지역에 있었다고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동북지역이 항상 중국민족의 영역인가.”라고 묻고 “중국역사상 여진의 금,거란의 요,만주의 청 등은 비중국민족으로 동북지역에서 발흥하여 중국을 지배했지만 중국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유의 문화와 통치방식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들이 후에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해서 이들을 중국인이라 부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제3국 학자들 입장 ●1세기에서 7세기에 걸친 왜(倭)와 중국의 조공·책봉 관계의 성격에 대해(후루하타 도루·일본 金澤大學) 고구려가 존재한 시대의 왜(倭)와 중국왕조의 조공·책봉 관계를 검토하면 일본은 ‘외(外)’,즉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의 밖의 존재로서 자리매김됐다.고구려·백제·신라에서는 중국왕조가 설정하는 협의의 천하와 ‘외’의 이중성이 나타난다.이것은 한(漢)무제(武帝)가 조선사군(朝鮮四郡)을 설치해 ‘내’에 편재한 것과 관계돼 있다.중국왕조로서는 직접 통치할 수 없어도 그 땅까지 황제의 지배가 미친다고 이해한 것이다.그렇더라도 고구려와 백제·신라가 분리,취급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당대 사료에 보이는 ‘해동삼국(海東三國)’용어는 삼국을 일체의 지역으로 인식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현재의 중국이 고구려만을 분리해서 ‘고구려는 중국사(史)상의 변경지역민족정권’으로 주장함이 얼마나 비역사적인 것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 ●몽골과 한국의 관계에 대하여(A 오치르·몽골국립역사박물관장) 고구려의 대부분 영토는 오늘날 한국인이 사는 지방 이외의 땅으로 분리되어 나갔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만들고 국가정책을 세우고 정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은 한국인이다.어떤 지역사회의 역사는 국가역사의 한 부분이다.그 국가를 최초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해 정책을 만들어 통치해가는 과정을 추적하면 어느 민족의 정권임이 명확히 드러난다.고구려를 만든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며 고구려 역사도 한국의 역사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고대 한국인과 사얀-알타이 민족들 간의 민족 문화적 관계에 대하여(아바예프 N 비아체스라보비치·러시아 투바대학) 원(原) 몽골인들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고대 한국민족의 기원과 함께 사얀-알타이 민족그룹의 이동,주변 민족들 간의 영향력 행사 등과 맞물려 중요한 주제다.사얀-알타이 지역의 지명·인명이나 한국 고대문화의 주몽신화와 단군신화도 사얀-알타이민족과 고대 한국인들과의 민족문화사에서의 유사성을 보여준다.그러나 이 민족형성그룹들은 고대 중국,특히 중원에 사는 사람들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정치권력은 비록 후대에 들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주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았다.반대로 남만주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흉노에 의해 중국 본토로 들어가 흉노,쌍비,고대 투르크,고대 몽골인들처럼 중국인들이 인종적·민족적 원류를 갖추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
  • 사우디, 알카에다에 최후통첩

    사우디 아라비아가 23일(현지시간)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최후통첩을 발표했다.한 달안에 자수하면 사면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대규모 소탕작전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파드 국왕이 국영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알카에다의 사우디 총책 압둘 아지즈 알 무크린을 사살,사우디의 알카에다 조직이 약화됐다고 판단한 사우디 정부가 여세를 몰아가자는 계산에서다.그러나 알카에다 하부 조직원들에게나 먹힐 것이라고 BBC방송은 분석했다. 미국도 이날 사우디 당국의 척결 의지에도 사우디가 안전하지 않다며 미국인들에게 사우디에 가지 말며 사우디에 체류중인 미국인들은 즉각 떠나라고 재차 경고했다.지난 17일 경고에 이어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미 국무부는 특히 외국인 거주지역인 리야드가 목표가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이곳은 지난해 5월 차량 3대를 이용한 자살폭탄테러로 23명이 숨진 이후부터 크고 작은 테러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지역이다. 사우디 당국은 근 1년 동안 자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알카에다의 테러를 막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또 알카에다에 대한 대응책에 있어서도 지배층간에 의견이 나뉘고 있다.파드 국왕이 와병중이라 사실상 제1인자인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왕세자나 나이프 내무장관은 알카에다에 이끌린 젊은이들을 계도할 수 있다는 타협적인 입장이다. 반면 주미대사인 반다르 왕자는 얼마전 “현 상태는 야만을 의미하는 전쟁”이라며 알카에다에 대한 전면전을 요구했다.그는 압둘 아지즈 왕세자의 정적인 술탄 국방장관의 아들이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사우디 ‘피의 보복’ 비상

    이라크 전쟁의 불똥이 사우디 아라비아로 튀고 있다.18일(현지시간) ‘아라비아반도의 알카에다’라는 이슬람 저항세력이 사우디 거주 미국인 인질 폴 존슨을 참수하는 등 최근 들어서 세계 최대 산유국이자 대표적인 친미(親美) 국가 사우디에서 테러가 빈발하고 있다. 사우디 정부가 19일과 20일 존슨을 살해한 세력의 수뇌부 4명을 사살하고 조직원들을 체포하자 저항세력 역시 보복을 다짐하고 있어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으로 우려된다. ●“저항세력 즉각 보복 우려” 존슨의 참수에 대한 반격으로 19일 사우디 정부가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펼쳐 사우디 내 알카에다 우두머리인 압둘 아지즈 알 무크린을 사살했지만 저항세력은 웹사이트를 통해 테러 공격을 계속할 것임을 밝혔다.특히 사우디 전문가들과 서방 외교관들은 우두머리를 잃은 이들 세력이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즉각적인 보복 공격에 나설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1일 보도했다. 저항세력이 존슨을 납치하면서 경찰복과 차량을 사우디의 경찰들로부터 지원받았다고 웹사이트를 통해 밝히면서 경찰 내부가 동요하는 것과 관련,NYT는 ‘사우디에서 경찰복을 구하기가 쉽고,테러 때 위장된 경찰 차량이 종종 등장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심리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사우디경찰 저항세력 잔당·시신 수색 사우디에서는 지난 12일과 8일에도 수도 리야드 주택가에서 미국인 2명이 알카에다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총격에 숨졌다. 지난달에는 동부의 석유도시 알 호바르에서 인질극이 발생,외국인 등 22명의 인질이 숨지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하는 등 세계경제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다. 사우디 경찰은 20일 리야드 인근의 3개 지역을 수 시간 동안 봉쇄하고 장갑차량과 헬기까지 동원해 저항세력 잔당과 존슨의 시신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시신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잔당 체포 여부도 공개되지 않았다. 파드 국왕은 이날 국회격인 슈라협의회의 연례 개막연설에서 “우리는 비뚤어진 사고를 가진 이 파괴집단이 국가의 안보와 안정을 해치도록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테러 소탕 의지를 분명히 했다. 사우디 정부는 앞서 12일 존슨을 납치한 세력들이 “사우디 감옥에 갇혀 있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을 석방하지 않으면 존슨을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때도 강경 입장을 고수했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영조대왕 오순잔치 ‘어연례’ 처음 재현

    1743년 창경궁 영화당에서는 이전 궁중에서 볼 수 없던 큰 연회가 벌어졌다.이른바 영조대왕의 50회 생일을 맞이해 열린 어연례(御宴禮).왕비와 후궁,고관대작들의 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내연의례는 흔했지만 임금과 신하등 남성들만의 궁중연회인 외연례는 이때부터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이 어연례를 처음으로 재현한다.‘국조속오례의’를 근거로 재현하는 어연례는 13일부터 7월4일까지 매주 일요일 4회에 걸쳐 처음 모습을 선보이며 오는 9∼10월 4회에 걸쳐 더 공개할 예정이다. 어연례는 신하가 임금에게 음식과 술을 올리고 임금은 답례로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어 국왕의 만수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던 국가의례.사료에 따르면 1743년 영조대왕 오순잔치가 그 시초로 문무관료와 종친,백성들이 함께한 잔치로 기록되고 있다.이날 행해졌던 연회는 국왕행차,진작·진찬(아악에 맞춰 국왕에게 잔을 올리는 의식) 및 아악,궁중정재가 연희(演戱)되었으며,특히 흥미로운 것은 현재 전승이 단절된 향발무(響舞·향발이라는 악기를 들고 추는 춤)와 공자 등 성현들의 제사에 추었던 일무(佾舞)를 추었다는 것이다. 이번 행사는 실제 연회가 펼쳐진 창덕궁 영화당에서 창경궁 명정전으로 옮겨 열고 출연인원도 당시 행해졌던 1732명에서 270명으로 축소해 구성했다.하지만 출연자들의 복식이나 의물은 가능한 한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살렸다. 어연례는 시위군사 및 장군들이 행사장에 배치되는 초엄부터 시작해 왕세자 및 문무관료가 대기하는 이엄,문무관료와 임금·왕세자가 입장하는 삼엄에 이어 국왕에 대한 배례인 여민락,진작,아악·향발무·일무·처용무·무고 등으로 꾸며지는 궁중정재,그리고 왕이 다시 환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개관 10돌 맞은 김석원 전쟁기념관장

    ‘인간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권력을 위해,때론 영광이나 명예를 위해,또 한 때에는 사랑을 위해….’ 얼마전 개봉된 영화 ‘트로이’의 도입 부분 내레이션이다.‘트로이전쟁’은 10년간 계속됐던 기원전 최대의 전쟁으로 예술과 문학사에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트로이’는 저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배경이 되고 있다.실재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인간 상상력의 극치다.3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트로이 목마’가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류는 역사 이전의 시대부터 숱한 전쟁을 치르고,또 기억하면서 살아왔다.‘전쟁’이 현대인들에게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지 1·2차 세계대전,6·25전쟁,베트남전쟁 등에서 실증적으로 경험했다.이라크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그래서 전쟁은 기억하고 싶던 아니던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기념’될 수밖에 없다고 학자들은 얘기한다. ●1년에 100만명 관람… 분단의 상징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민족분단의 ‘상징’이다.해마다 이맘때쯤 가장 붐빈다.‘보훈의 달’이라는 이름아래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올 6월은 더욱 의미가 깊다.10일로 개관 10돌을 맞았기 때문이다. 전쟁기념관은 예상보다 찾는 이가 많다.연평균 100만명이 이곳을 들른다.이에 10년을 곱하면 그동안 1000여만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계산이다. 며칠전 김석원(64) 전쟁기념관장을 만나기 위해 기념관 ‘전사자명비’ 앞을 막 지나는 순간이었다.백발의 두 노병이 눈에 들어왔다.둘은 손가락을 짚어가며 돋보기를 들이대며 전사자명비를 열심히 살폈다. “연대장님,여기 있네요.이놈이 틀림없어요.” “백마고지,그 김 중사 맞아?” “그렇습니다.연대장님.” 이윽고 둘은 ‘김○○’이라고 적힌 이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놈 참 용감했어.그때 고집만 안 부렸어도 살았을 텐데….” “연대장님,그래도 김 중사가 아니었으면 우리 연대본부는 아마 몰살당했을 겁니다.” “하긴,그래.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가로막힌 남북은 그대로야.이놈은 죽어서 우리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말야.살아 있다는 게 덧없을 뿐이야.” “…….” 잠시 침묵이 흘렀다.두 노병의 눈가는 이미 젖어 있었다.시인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스물다섯 젊은 나이에,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려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때마침 견학온 유치원생 100여명이 그 앞을 시끄럽게 지나가는 바람에 더 이상의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전쟁기념관의 이운세 홍보부장은 “6월이어서 옛 전우의 이름이라도 찾으려는 노병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작전통으로 이름날린 36년 ‘군인의 삶’ “전쟁기념관은 한마디로 전쟁을 단일주제로 5000년 민족사를 조망하고 있지요.그 교훈을 마음으로 새기고 두번 다시 전쟁의 참극을 겪어서는 안되겠다는 실천적 결의를 다지는 호국의 전당입니다.” 김 관장은 예비역 중장이다.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제5군단장,군수사령관 등을 지냈다.군 안팎에서는 소문난 ‘작전통’이다.지난 5월10일 관장으로 부임했다.그는 부임한 지 한달밖에 안됐다고 강조했지만 베트남전 참전과 36년 동안 군에 몸담아서인지 전쟁기념관의 중요성과 역할,그리고 나아갈 길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반적인 박물관과는 다르죠.추모의 기능이 있습니다.20만여명의 전사자명비가 있어 추모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전쟁기념관은 우리 민족이 겪은 전쟁사가 살아 숨쉬는 국내 최대의 군사박물관이자 아시아 최고의 기념관으로 우뚝 섰습니다.” 김 관장의 목소리가 더욱 빨라졌다.전쟁기념관은 도심속의 시민문화공간이라고 했다.3만 5000여평의 너른 부지위에 연못,분수,녹지공간이 그렇단다.매년 나라사랑 그림그리기 대회,평화사랑 글짓기 대회,청소년 문화교실,호국추모 꽃꽂이 전시회,6·25음식먹기 행사,열린음악회,영화시사회,패션쇼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이용하기에 따라 정말로 유익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뿐만이 아니다.어린이연극,청소년연극,도자기체험교실,과학체험교실,호신무예교실,전통예절교실 등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한 체험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98년 발해건국 1300주년을 맞아 ‘발해를 찾아서’나,2000년의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2002년의 DMZ특별기획전 ‘갈 수 없는 땅,그러나 가야만 하는 곳’ 등은 관람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고 했다. 김 관장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대부분 전쟁기념관을 찾을 정도로 중요한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면서 “그동안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영국의 앤드루 왕자,헬렌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고(故) 살라후딘 말레이시아 국왕,피델 라모스 전 필리핀 대통령 등 30여개국의 VIP들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용산 박물관벨트 중심으로 도약할 것 전쟁기념관에 보유중인 유물만 해도 3만여점에 이른다.김 관장은 “지난 4월 세계적 군사박물관인 프랑스의 앵발리드 박물관과 ‘양해 및 교류협약서’를 맺는 등 앞으로 스페인·영국 등 외국의 박물관과 교류협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2005년 국립박물관의 용산이전이 완료되면 기념관 일대는 새로운 박물관벨트로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로 한단계 도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관 10주년에 맞춰 국내 최초로 ‘우리나라 전통무기’ 특별기획전이 열립니다.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전통무기를 총망라했지요.국보급·보물급도 많이 선보일 예정입니다.” 김 관장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소탈하면서도 업무추진력만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오자복 현 성우회장과는 각별한 인연을 쌓고 있다.김 관장이 15사단 39연대 작전주임때 오 회장은 39연대장이었다.이후 김 관장은 오 회장의 ‘수제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1940년 경북 영주 출생인 그는 가난한 농가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61년 6월 사병으로 군입대했으나 장교가 멋있어 62년 6월 소위(갑종166기)로 임관했다.이후 위관급때에는 15사단에서,영관급때에는 28사단에서만 근무하게 되는 인연을 맺었다.28사단 81연대 2대대장 시절에는 임동원 전 국정원장이 연대장,김동진 전 국방장관이 인근 3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5사단은 젊은 시절 대부분을 보내 제 마음의 고향입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세조실록의 일본 승려 준초 등에 관한 기록은 1464년 2월 17일의 일이다.여기서 ‘전년(前年)’이라면 1463년이 된다. 그렇다면 일본 기록에서 1463년 7월 14일 준초 등이 조선을 방문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만약 이 두 기록의 내용이 동일한 사건을 적은 것이라면 문제는 보다 쉽게 풀려질 수 있다.즉 일본 사신 준초 등 승려 일행은 1463년 7월 14일에 조선의 세조임금과 대신들을 만났다.며칠 뒤 이들은 세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등포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는데,마침 계절이 여름인데다 태풍이 불어서 출국이 늦어지게 되었다. ●태풍 때문에 못 떠나게 된 日승려들 이 무렵 일본 외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올 때 타는 배는 돛배였다.돛배는 폭풍우나 태풍에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가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뱃길인 현해탄은 평소에도 파도가 거칠기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항해는 위험했다.돛배에는 비바람이나 추위를 제대로 막아줄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이 없어서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늦은 봄 사이에 현해탄을 건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객관적 사정을 참고해 보면 1463년 여름이 끝나기 전 어느날 일본 사신들은 귀국길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잠시 머물렀다.그런데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가을철로 접어 들었고,바다는 이미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항해는 매우 위험했다.그럴 경우 대개는 다음해 늦은 봄까지 조선에 머무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다.그렇게 겨울을 조선에서 보낸 그들에게 세조 임금이 위로의 인사를 보낸 것이 1464년 2월 17일이었다.그동안 그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일본사람 많던 웅천왜관서 머물러 일본은 조선의 세 항구에다 왜관(倭館)을 열었다.부산,웅천,울산 등 이른바 삼포(三浦)였다.당시 일본의 외교관 대부분은 승려들이었다.승려들이 무사들을 제치고 외교관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자를 아는 계층들이었기 때문이다.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1423년 무렵부터 삼포왜관으로 인해 왜관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던 1560년까지 약 137년 동안 일본 승려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한 횟수는 140여 차례에 달한다.그들은 10여 명일 때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40여 명이 넘기도 했다. 137년 동안 조선을 방문한 승려들은 약 2500여 명이었는데,그들 대부분은 주로 웅천왜관을 이용하여 드나들거나 머물렀다.웅천에는 여러 대를 이어서 사는 일본인들도 있었고,조선 여자와 결혼하거나 조선에서 무역상을 하거나,돈놀이를 하기도 하고,조선 사기장들을 고용하여 조선 흙으로 그릇을 구워 일본으로 실어가는 자도 많았다.조선말과 풍속에 능통하여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는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염탐하여 일본에 알려주거나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배워 일본에 전파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준초 일행이 1463년 가을부터 1464년 늦봄까지 머문 것도 웅천이었다.웅천에는 조선말에 능통한 일본인이 많아서 일본 외교관이나 무역상들은 조선말 잘하는 일본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발하게 행동했다. ●1460년대 일본엔 사치스러운 차문화 유행 1460년 무렵의 일본사회는 사치와 호화스러운 차문화가 커다란 병폐로 자라나 일본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송나라의 차문화인 서원차(書院茶)가 무분별하게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의 지도자들과 상업자본가들은 거대한 차실을 금으로 칠해 놓고 일년 내내 호화스러운 차회(茶會)로 시간과 재산을 탕진했다. 금각사라는 건물이 그 당시에 지어진 대표적인 것이다.무로마치 시대는 더욱 더 사치에 몰입했다.사치와 부패는 무사들을 타락시켰고,협잡과 음모로 일본사회는 극도의 분열에 시달렸다.차문화에서 시작된 깊은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문화가 필요했다.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글자를 아는 유식한 계층인 승려들은 위기에 빠진 일본을 건져내기 위해 규모가 웅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서원차를 대신할 수 있는 차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더 이상 중국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그리하여 관심을 돌린 것이 조선이었다.그 때 조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뿐이었다. ●머리 잘린 삼륜대불상에 할 말 잃고… 일본의 불교 지도자들은 조선에 파견되는 승려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조선의 자연 경관,취락 구조,지식인들의 생활 문화,불교 수행자들의 생활과 철학,특히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눈여겨 보거나 그림으로 그려 올 것을 지시했다.이같은 정세 아래서 조선으로 파견된 준초 등에 대한 일본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필자는 삼층석탑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 삼륜대불상(三輪臺佛像)으로 자리를 옮겼다.이 불상은 원형3층탑 위에 불상을 모신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이 불상을 미륵불이라 했는데,이것과 비슷한 형식과 구성을 보이는 것이 화순 운주사에도 있다. 정오 가까운 시간이 되자 맞은편 계곡에서 종 치는 소리와 함께 목탁 소리도 들린다.어느 절에선가 사시예불을 올리는 모양이다.원형 3층탑 위의 불상은 목 부분이 잘린 채 머리가 없이 몸체 부분만 남아서 세상을 향하고 있다.조선시대 유생들의 불교 탄압의 가혹한 증거로 보인다.경주 남산 곳곳에는 유생들에 의하여 목이 잘리거나 얼굴에 금이 가고 전신이 파괴괸 불상들이 널려 있다가,경주 박물관 뜨락이나 전시실로 옮겨져 유생들의 종교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던지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日 승려들 겨울 나는 동안 김시습 찾았을 것 머리가 잘려나간 불상 앞에서 김시습과 일본 차문화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기 위하여 다시 생각에 잠겼다.일본 기록에는 일본 국왕사인 승려 준초,범고 등이 조선에 파견되었는데,그들은 천룡선사(天龍禪寺) 승려들로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열어 죽은자들의 영혼을 천도하는데 필요한 의식 절차를 묻고,천룡선사 법당을 짓는데 드는 건축 자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되어 있다.그들은 방문 목적을 다 이룬 뒤 태풍에 막혀 조선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조선 여러 곳을 여행했으며,이듬해 봄에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가장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는 김시습이란 인물을 만나 보기 위해 통역을 데리고 용장사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김시습은 산중까지 그를 찾아온 일본 승려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특유의 질문과 해학으로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일본 승려들은 이 날의 만남을 계기로 그 후 여러 차례 용장사를 방문하게 되었던 듯하다. 김시습이 쓴 소설 ‘금오신화’ 목판본이 1653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이것을 다시 간행한 것이 우리나라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임을 보면,그의 소설 원본이 일본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소박한 초암차는 오늘날 일본의 초석 일본 승려들은 김시습의 차생활과 집의 구조,경주 남산의 자연풍광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일본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방바닥을 파 내고 묻는 화로는 김시습의 방 안에 있던 그 지로(地爐)와 흡사하다. 서원차 문화를 혁파하기 위해 고안해 낸 초암차(草庵茶)는 조선 농민들이 사는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모체로 한 것인데,초암차 문화의 핵심 내용들과 김시습의 차시(茶詩)들은 매우 닮았다.소박함,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초암차의 특징은 서원차가 지닌 병폐를 말끔하게 치유시켜 오늘날 저 일본의 초석이 되어 왔다. 기이한 인물로만 아는 김시습의 천재성과 열린 정신에서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체적 대안을 발견해 간 일본 승려들의 지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이다.돌아서는 내 눈에 다시 목이 잘려나간 불상이 들어온다.우리는 기껏 불상의 목이나 잘랐을 뿐인가….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5)김시습과 일본의 차문화(下)

    세조실록의 일본 승려 준초 등에 관한 기록은 1464년 2월 17일의 일이다.여기서 ‘전년(前年)’이라면 1463년이 된다. 그렇다면 일본 기록에서 1463년 7월 14일 준초 등이 조선을 방문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만약 이 두 기록의 내용이 동일한 사건을 적은 것이라면 문제는 보다 쉽게 풀려질 수 있다.즉 일본 사신 준초 등 승려 일행은 1463년 7월 14일에 조선의 세조임금과 대신들을 만났다.며칠 뒤 이들은 세조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영등포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는데,마침 계절이 여름인데다 태풍이 불어서 출국이 늦어지게 되었다. ●태풍 때문에 못 떠나게 된 日승려들 이 무렵 일본 외교 사신들이 조선으로 올 때 타는 배는 돛배였다.돛배는 폭풍우나 태풍에는 매우 위험하여 항해가 불가능하다.또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뱃길인 현해탄은 평소에도 파도가 거칠기 때문에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항해는 위험했다.돛배에는 비바람이나 추위를 제대로 막아줄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이 없어서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늦은 봄 사이에 현해탄을 건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객관적 사정을 참고해 보면 1463년 여름이 끝나기 전 어느날 일본 사신들은 귀국길에 나섰지만 태풍으로 잠시 머물렀다.그런데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아 하루 이틀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가을철로 접어 들었고,바다는 이미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항해는 매우 위험했다.그럴 경우 대개는 다음해 늦은 봄까지 조선에 머무는 게 통상적인 일이었다.그렇게 겨울을 조선에서 보낸 그들에게 세조 임금이 위로의 인사를 보낸 것이 1464년 2월 17일이었다.그동안 그들은 어디서 머물렀을까? ●일본사람 많던 웅천왜관서 머물러 일본은 조선의 세 항구에다 왜관(倭館)을 열었다.부산,웅천,울산 등 이른바 삼포(三浦)였다.당시 일본의 외교관 대부분은 승려들이었다.승려들이 무사들을 제치고 외교관으로 선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자를 아는 계층들이었기 때문이다.삼포에 왜관이 설치된 1423년 무렵부터 삼포왜관으로 인해 왜관 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던 1560년까지 약 137년 동안 일본 승려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한 횟수는 140여 차례에 달한다.그들은 10여 명일 때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40여 명이 넘기도 했다. 137년 동안 조선을 방문한 승려들은 약 2500여 명이었는데,그들 대부분은 주로 웅천왜관을 이용하여 드나들거나 머물렀다.웅천에는 여러 대를 이어서 사는 일본인들도 있었고,조선 여자와 결혼하거나 조선에서 무역상을 하거나,돈놀이를 하기도 하고,조선 사기장들을 고용하여 조선 흙으로 그릇을 구워 일본으로 실어가는 자도 많았다.조선말과 풍속에 능통하여 조선옷을 입고 상투를 틀고는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선의 비밀스러운 것들을 염탐하여 일본에 알려주거나 조선의 우수한 문물을 배워 일본에 전파하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준초 일행이 1463년 가을부터 1464년 늦봄까지 머문 것도 웅천이었다.웅천에는 조선말에 능통한 일본인이 많아서 일본 외교관이나 무역상들은 조선말 잘하는 일본인을 데리고 다니면서 활발하게 행동했다. ●1460년대 일본엔 사치스러운 차문화 유행 1460년 무렵의 일본사회는 사치와 호화스러운 차문화가 커다란 병폐로 자라나 일본을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가마쿠라 시대부터 시작된 중국 송나라의 차문화인 서원차(書院茶)가 무분별하게 유행하면서 일본 사회의 지도자들과 상업자본가들은 거대한 차실을 금으로 칠해 놓고 일년 내내 호화스러운 차회(茶會)로 시간과 재산을 탕진했다. 금각사라는 건물이 그 당시에 지어진 대표적인 것이다.무로마치 시대는 더욱 더 사치에 몰입했다.사치와 부패는 무사들을 타락시켰고,협잡과 음모로 일본사회는 극도의 분열에 시달렸다.차문화에서 시작된 깊은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차문화가 필요했다. 여전히 일본 사회에서 글자를 아는 유식한 계층인 승려들은 위기에 빠진 일본을 건져내기 위해 규모가 웅장하고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서원차를 대신할 수 있는 차문화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더 이상 중국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그리하여 관심을 돌린 것이 조선이었다.그 때 조선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승려들뿐이었다. ●머리 잘린 삼륜대불상에 할 말 잃고… 일본의 불교 지도자들은 조선에 파견되는 승려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조선의 자연 경관,취락 구조,지식인들의 생활 문화,불교 수행자들의 생활과 철학,특히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눈여겨 보거나 그림으로 그려 올 것을 지시했다.이같은 정세 아래서 조선으로 파견된 준초 등에 대한 일본 기록은 매우 구체적이다. 필자는 삼층석탑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 삼륜대불상(三輪臺佛像)으로 자리를 옮겼다.이 불상은 원형3층탑 위에 불상을 모신 것이다.삼국유사에서는 이 불상을 미륵불이라 했는데,이것과 비슷한 형식과 구성을 보이는 것이 화순 운주사에도 있다. 정오 가까운 시간이 되자 맞은편 계곡에서 종 치는 소리와 함께 목탁 소리도 들린다.어느 절에선가 사시예불을 올리는 모양이다.원형 3층탑 위의 불상은 목 부분이 잘린 채 머리가 없이 몸체 부분만 남아서 세상을 향하고 있다.조선시대 유생들의 불교 탄압의 가혹한 증거로 보인다.경주 남산 곳곳에는 유생들에 의하여 목이 잘리거나 얼굴에 금이 가고 전신이 파괴괸 불상들이 널려 있다가,경주 박물관 뜨락이나 전시실로 옮겨져 유생들의 종교탄압이 얼마나 잔혹했던지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日 승려들 겨울 나는 동안 김시습 찾았을 것 머리가 잘려나간 불상 앞에서 김시습과 일본 차문화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기 위하여 다시 생각에 잠겼다.일본 기록에는 일본 국왕사인 승려 준초,범고 등이 조선에 파견되었는데,그들은 천룡선사(天龍禪寺) 승려들로서 수륙대재(水陸大齋)를 열어 죽은자들의 영혼을 천도하는데 필요한 의식 절차를 묻고,천룡선사 법당을 짓는데 드는 건축 자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고 되어 있다.그들은 방문 목적을 다 이룬 뒤 태풍에 막혀 조선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조선 여러 곳을 여행했으며,이듬해 봄에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가장 무성한 소문을 낳고 있는 김시습이란 인물을 만나 보기 위해 통역을 데리고 용장사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김시습은 산중까지 그를 찾아온 일본 승려들에게 차를 대접하면서 특유의 질문과 해학으로 마치 오랜 친구 사이처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일본 승려들은 이 날의 만남을 계기로 그 후 여러 차례 용장사를 방문하게 되었던 듯하다. 김시습이 쓴 소설 ‘금오신화’ 목판본이 1653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되었는데,이것을 다시 간행한 것이 우리나라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임을 보면,그의 소설 원본이 일본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흘러나간 것으로 보여진다. ●소박한 초암차는 오늘날 일본의 초석 일본 승려들은 김시습의 차생활과 집의 구조,경주 남산의 자연풍광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일본 다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인 방바닥을 파 내고 묻는 화로는 김시습의 방 안에 있던 그 지로(地爐)와 흡사하다. 서원차 문화를 혁파하기 위해 고안해 낸 초암차(草庵茶)는 조선 농민들이 사는 작고 소박한 초가집을 모체로 한 것인데,초암차 문화의 핵심 내용들과 김시습의 차시(茶詩)들은 매우 닮았다.소박함,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초암차의 특징은 서원차가 지닌 병폐를 말끔하게 치유시켜 오늘날 저 일본의 초석이 되어 왔다. 기이한 인물로만 아는 김시습의 천재성과 열린 정신에서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구체적 대안을 발견해 간 일본 승려들의 지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충격이다.돌아서는 내 눈에 다시 목이 잘려나간 불상이 들어온다.우리는 기껏 불상의 목이나 잘랐을 뿐인가….˝
  • [시론] 국민연금에 대한 저항의 의미/이덕일 역사평론가·명예논설위원

    국민연금에 대한 저항이 거세다.국민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다.한 네티즌이 ‘국민연금의 비밀’이란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지난 29일에는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까지 있었다.국민연금관리공단 측은 오해라며 나름대로 설명하지만 공단 측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아 보인다. 국민연금의 실체적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이번 사태가 실체적 진실 이상의 화두를 우리 사회에 던진 화두는 분명하다.그것은 시민들이 국가의 권력행사 자체에 집단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이는 전혀 새로운 사태로서,현 정권에 대한 호불호의 차원을 뛰어넘는 집단행위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국가 권력에 집단적으로 저항할 때는 국가권력 자체를 불신할 때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민란이 집단으로 발생한 때는 순조 때였다.정조 때까지는 백성들이 민란으로 억울한 사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임금님이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알기만 하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고,그래서 민란 대신 국왕이 행차하는 길목을 지키다 징을 두드렸다.이를 격쟁(擊錚)이라 하는데,왕조국가 시절 힘없는 신민의 합법적인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나 정조 사후 순조의 즉위와 함께 노론 벽파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백성들은 징의 채 대신 죽창을 잡기 시작했다.이는 분노를 뛰어넘는 절망의 표출이었다.물론 조선 후기의 민란과 국민연금에 대한 저항은 다르다.그러나 백성들이 문제를 직접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은 같고 이는 중대한 상황의 변화이다. 그런데도 우리 정치권은 여전히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7일 연세대 특강에서 ‘진보는 더불어 살자는 것’이고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란 특유의 편가르기를 다시 시도했고,6·5 재·보선 올인,김혁규 총리지명 강행 등 구태의연한 과거의 화두에 매진했다. 지난 29일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우리당 당선자들과 여러차례 활짝 웃으며 포옹했다.그날 청와대에는 1980년대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부르던 ‘산자여 따르라’가 울려퍼졌다.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힘없는 일반 국민의 처지에서 바뀐 것은 우리 정치권의 주류일 뿐이지 세상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비슷한 시각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가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치인들이 또다시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정치문제에 올인하는 동안 ‘국민연금 비정규직의 양심고백’이란 글이 우리사회의 비도덕적 구조를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자신을 비정규직 국민연금 상담요원이라고 밝힌 글쓴이는 지난 5년동안 정규직원 초봉의 3분의1도 안 되는 월 55만∼65만원의 기본급을 받았는데,쉬운 일은 정규직이 맡고 어려운 일은 비정규직이 맡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고백했다. “끝으로 지난 5년동안 국민연금에서 단돈 55만∼60만원에 눈이 멀어 영세 사업주들과 지역가입자들에게 사기를 친 죄! 용서를 빌겠습니다.저를 비롯하여 대표로 사과드립니다.”라는 그의 글은 우리를 한없이 답답하게 한다. 지난 월드컵 때 붉은악마의 함성이 우리 사회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을 주었듯이 이는 우리 사회가 ‘국민 직접행동’이란 충격적인 사태에 직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바라바 대신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은 다름아닌,그 예수가 구세주라고 열광하던 대중이었다.˝
  •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7)-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나는 효종이 직접 쓴 ‘심곡서원’의 현판을 우러러 보았다.검은 색 바탕의 흰 글씨로 양각된 효종의 어필은 능숙한 솜씨의 달필은 아니었으나 한 자 한 자 정자체로 공들여 쓴 필치였다. 일찍이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 갔다가 즉위한 뒤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북벌계획을 세웠던 강골답게 글자 하나하나에는 혼이 깃들어 있었다.31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친청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고,송시열과 같은 반청파를 등용한다.또한 오랫동안 역적으로 몰려 있던 조광조에 대한 사액을 내린 것을 보면 얼마나 효종이 자주정신에 투철하였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효종은 ‘심곡서원’이란 사액을 직접 내렸을 뿐 아니라 예조좌랑 채지연(蔡之沇)을 직접 이곳까지 보내어 조광조의 영령 앞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다.이 제문을 지은 사람은 이시해(李時楷). 이시해는 선왕이었던 인조의 실록을 편찬한 당대 제일의 문장가로서 효종이 형 소현 세자와 더불어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갈 때 호종하였던 인연으로 효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던 문신이었다. 효종은 이시해로 하여금 치제문(致祭文)을 지어 올리도록 하는 한편 채지연을 보내어 조광조의 신위 앞에서 이를 낭독하도록 하였다. 이 기록이 치제문 서두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국왕은 예조좌랑 채지연을 보내어 선정신(先正臣)인 문정공 조광조의 영령(英靈)에 제를 드리노라(國王遣臣禮曹佐郞蔡之沇 諭祭于先正臣文正公趙光祖之靈).” 치제문의 내용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이시해의 작품답게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경의 기상(氣象)은/산악(山嶽)의 정신(精神)인 듯 북두(北斗)의 결정(結晶)인 듯/영봉(靈鳳) 같은 상서(祥瑞)며 금옥같이 윤택(潤澤)하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개연(慨然)히 분발하여 대도(大道)를 탐구(探究)했네.역법(曆法)은 하정(夏正)쓰고 면류관(冕旒冠)은 주(周)의 제도/일찍부터 지닌 포부 왕좌지재(王佐之才) 그 아닌가? 이 나라 동녘 땅에 문화가 싹튼 것은/기자(箕子)가 우리 땅에 오면서 시작됐네. 그 덕화(德化) 그 교훈이 그 뒤로 침체되어/신라(新羅) 고려(高麗) 지나면서 큰 발전 없었도다. 두절된 그 학문을 문경공이 창시하고/경 또한 분발하여 정통(正統)을 받았도다. 방향을 제시하고 앞길을 알려주니/문왕(文王)이 아니어도 그침 없이 분기(奮起)한다. 흉중(胸中)에 쌓인 지식 자연히 대도(大道)와 부합되며/언어와 동작은 법도에 어김없다. 조용히 생각하고 밤낮으로 신칙(申飭)하여/엄연(儼然)하고 숙연(肅然)한 그 위의 어긋남이 없었도다. 굳건하고 엄밀하게 다듬고 갈고하여/영화가 밖으로 발하여/선명한 그 광채가 옥(玉) 같고 물과 같네. 법도(法度) 있는 품위는 일거일동(一擧一動)에 나타나고 고고한 학의 맑은 울음 구천(九天)까지 들려주어 임금께 신임(信任)받아 천재일우(千載一遇) 되었도다.” 나는 내삼문의 협문을 거쳐 사우 앞으로 들어가 보았다.사당은 장대석으로 만든 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두르고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었는데,문은 닫혀 있었다.어쨌든 서원 경내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으므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따로 관리인을 불러 안내를 받을 처지가 못 되었으므로 나는 그냥 문을 열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정면으로 붉은 커튼이 가려진 조광조의 영정이 보였다.나는 그 커튼을 젖혀 보았다. 검은 관모에 양손을 소매 속으로 찔러 넣고,흰색 관복을 입은 조광조의 영정은 이미 지난 가을 능주의 적중거가에서 본 그대로의 동일한 전신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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