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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3일 TV 하이라이트]

    ●특선 다큐멘터리(EBS 오후 9시) 고대 세계의 왕과 황제들은 일찍이 예술이 가지는 정치적 파워를 간파했다. 백성들을 설득하기 위해 최초로 이미지를 사용했던 부류도 정치 지도자들이었다. 어떻게 고대의 권력자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는 시각 테크닉을 만들어냈는가에 대해 알아본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스웨덴 정부의 강력한 생태계 보호정책이 헬기안강 하류의 습지대 1700㏊를 되살려냈다. 이 습지는 중요한 철새 도래지였고 농부들에게는 방목을 하거나 짚을 말리던 장소였다. 그러나 농업이 쇠퇴해 오염되기 시작했고, 농부들도 무관심해졌다. 국민들의 강력한 개선요구에 정부가 개입해 이곳을 회생시켰다.   ●부부일기(MBC 오전 9시55분) 173㎝의 큰 키를 타고난 은정씨. 아버지 키가 2m, 오빠도 키가 190㎝나 된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남자는 성에 차지도 않는데, 어느 날 기대도 않고 나간 미팅에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났다. 이들 부부가 키로 인해 겪는 포복절도의 사건들. 과연 그 사건의 속사정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백만장자와 결혼하기(SBS 오후 9시45분) 영훈에게 장난치지 말라며 화를 낸 은영은 진하에겐 영훈이가 자신을 탈락시키면 집으로 돌아가도 되냐고 묻는다. 짐을 챙긴 은영을 보자 출연 여성들은 벌써 돌아갈 생각을 하느냐며 비웃는다. 마침내 성에 남게 될 여성의 이름을 부를 시간이 되고, 영훈은 마지막으로 한은영을 호명한다.   ●칭기즈칸(KBS1 오후 9시30분) 서방국왕은 전세가 불리하자 왕자 챠란딘과 측근들을 데리고 신도를 탈출한다. 칭기즈칸은 저베와 수부타이를 시켜 그들의 뒤를 추격케 하고, 손쉽게 신도를 점령한다. 서방국왕은 달아나기에 급급해한다. 결국 그의 모후는 몽골군에 투항하고, 국왕 자신도 외딴 섬으로 달아나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이는데….   ●반올림#2(KBS2 오전 8시50분) 무용 시간, 상필은 자꾸 발냄새가 나는 양말을 벗어 은심의 코에 들이대며 장난을 친다. 그러더니 상필은 급기야 교실에 은심의 모습을 처키 사진과 함께 붙여 반 아이들에게 웃음거리로 만든다.“내가 뭘 어쨌길래 자꾸 날 괴롭히냐.”며 소리를 지르는 사이 둘은 학주에게 그 모습을 들켜 교무실로 불려간다.
  • 박미현 대표 스페인 문화훈장

    서울 청담동 쥴리아나갤러리의 박미현 대표는 24일 주한 스페인 대사관에서 콜로네 대사로부터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의 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쥴리아나갤러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안토니 타피에스 등 스페인 화가 작품의 국내 전시회를 기획해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 “자르카위와 관계 끊겠다”

    이라크내 알 카에다의 총책임자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의 가족들이 20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에게 알 자르카위와 영원히 관계를 끊겠다며 의절을 선언했다. 요르단에 있는 동생과 사촌을 포함한 알 자르카위의 가족 57명은 이날 현지 3개 유력지에 낸 광고를 통해 압둘라 2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알 자르카위가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모든 테러 행위를 분명한 어조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반면에 걸친 광고에서 “우리는 그와 그로부터 나온 모든 행동과 주장, 결정을 알지 못함을 선언한다.”고 강조했다.암만 AP 연합뉴스
  • [APEC] 정상 8명 ‘홀로 아리랑’

    부산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21개국 정상들이 16일부터 속속 부부동반 입국할 예정인 가운데 ‘홀로 아리랑’을 불러야 하는 정상들도 꽤 있다. 모두 8명. 결혼 4년차에 이혼한 고이즈미 일본 총리부터 지난달 부인과 사별한 압둘라 바다위 말레이시아 총리, 집안 사연이 ‘복잡해’ 혼자 온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등 사연도 가지가지다. 먼저 여성인 뉴질랜드의 헬렌 클라크(55)총리와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58)대통령은 부군을 동반하지 않는다. 아로요 대통령의 ‘영부군(first gentle man)’호세 아로요(변호사)는 필리핀내 각종 부정사건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 당초 방한한다고 해서 우리측이 별도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분주했으나, 최근 불참을 통보했다. 클라크 총리의 부군인 피터 데이비스 오클랜드대 교수는 착실하고도 적극적으로 외조하는 편. 하지만 해외 순방시엔 동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압둘라(66) 총리는 부인 엔돈 여사가 암투병 중일 때 이슬람사회 금기를 깨고 유방암에 걸린 사실을 공개하며 아픔을 함께하고 싶다고 해 국민들의 동정과 지지를 받았다. 세계적인 부호인 볼키아국왕은 지난 8월 말레이시아 TV 앵커인 아즈리나즈 마르하르 하킴(26)과 결혼했다.32살 연하. 제1 왕비인 살레하, 하킴과 결혼 전 이혼한 두번째 부인 등 영부인들의 지위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홀로 온다는 관측이다. 이밖에 태국 파푸아뉴기니 칠레 정상들이 나름의 이유로 외기러기 신세다. 방한하는 퍼스트 레이디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은 부시 미 대통령의 부인 로라 부시여사와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의 부인인 마르타 사군. 사군 여사는 ‘멕시코의 힐러리’로 불리는 인물이다. 지난 2000년 폭스 대통령 대선 캠프의 공보비서로 일했고 이혼한 상태였던 두 사람은 대통령궁에 입성한 이듬해인 2001년 7월 전격 결혼했다. 많은 구설수에 시달리면서도 대선 후보로까지 꼽히는 여성이다. 의전용 승용차(BMW 760)를 제공받는 퍼스트 레이디들은 부산 범어사와 박물관을 방문, 한국의 정서와 미를감상하는 일정을 보낸다.특별취재단
  • “요르단 추가테러” 알 자르카위 경고

    요르단 호텔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했다고 주장한 이라크 알 카에다 조직의 최고 책임자 알 자르카위가 요르단에 대해 추가공격을 벌이겠다고 경고했다. 알 자르카위는 10일(현지시간) 인터넷 성명을 내고 “공격을 받은 3개 호텔은 요르단 독재자(압둘라 2세 국왕)에 의해 적들과 유대인들, 십자군들의 뒷마당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타깃이 됐다.”면서 “미국과 이스라엘, 이집트, 사우디 등의 스파이들이 그 곳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무자헤딘을 상대로 한 음모를 꾸며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유대인을 위해 요르단 동쪽에 세운 방어벽이 지금 무자헤딘과 그들의 공격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요르단의 독재자가 알도록 하겠다.”면서 “우리의 가장 용맹스러운 전사가 요르단 암만에서 새 공격을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이라크 알 카에다는 인터넷 성명을 통해 요르단 암만 호텔 3곳에 대한 연쇄 폭탄테러는 여성 1명을 포함한 4명의 이라크인이 실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명은 “이번 공격의 계획, 준비, 실행을 맡은 그룹은 아부 카비브, 아부 무아즈, 아부 오마이라 사령관 등 3명의 남성과 존경하는 옴 오마이라 자매”라고 밝혔다. 성명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요르단 정부가 자살폭탄범 3명의 시신을 발견한데 이어, 공포영화 ‘핼러윈’ 시리즈를 감독한 무스타파 아카드가 이번 테러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함에 따라 사망자수는 모두 60명으로 늘어났다. 전국적인 테러범 검거작전에 나선 요르단 경찰은 지금까지 최소 120명을 체포했으며, 이들 대부분이 이라크인과 요르단인이라고 밝혔다.이지운기자 외신종합jj@seoul.co.kr
  • 누리마루 APEC하우스

    누리마루 APEC하우스

    쪽빛 바다와 금빛 햇살에 빛나는 오륙도,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 높고 푸른 가을 하늘에 걸려 있는 한 점 조각구름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18일부터 개최되는 APEC정상회의때 21개 참가국 정상들의 2차회의 장소와 기념촬영장, 정상회의 선언문 발표장 등으로 사용될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바라다본 ‘바다 풍경’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지난달 건물 내부 비품 설치 작업과 산책로, 주변 환경정비 등 마무리 공사 등 손님들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이 건물은 부산시가 지난해 9월 착공에 들어가 1년여 만에 완공했으며 지상 3층(연면적 905평)규모의 타원형으로 티타늄 코팅, 아연강판 소재의 둥근 지붕에 외벽은 전망을 고려해 전체가 유리로 시공됐다. ●외벽 전체가 유리… 쪽빛 바다·오륙도·광안대교 한눈에 건물을 지탱하는 12개의 기둥은 우리나라 전통 정자를 본떴는데 부산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회의장 건물 옆에는 전통양식의 담으로 둘러싸인 정자와 태극문양이 그려진 쪽문, 해송과 약재식물을 위주로 한 정원이 들어서 있다. 또한 울창한 동백섬 해송 숲 사이로 각국 정상들이 거닐며 담소를 나눌 산책로에는 호랑이(한국), 판다(중국) 등 각국을 상징하는 동물 등이 새겨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건물 3층에는 정상회의장과 대기실, 휴게실 등이,2층에는 연회장 등이,1층에는 지원시설으로 꾸며졌다. 연회장 옆에는 우리 대청마루 형식의 테라스를 설치해 각국 정상들이 이곳에서 광안대교와 해운대 앞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정상회의장 내부도 우리 전통문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알리는 데 중점을 뒀다. 3층 회의장 내부 천장은 석굴암의 돔을 형상화했고 벽면은 격자문살과 청자의 전통문양을 소재로 한 실크벽지로 마감해 절제와 안정감을 추구했다. 회의장 대기실에는 훈민정음 원문으로 만든 액자가 눈길을 끈다. 특히 회의장 3층 입구 로비 벽면에설치된 ‘12장생도’는 압권이다. ●8억원 ‘12장생도´ 등 전통공예 우수성 과시 전통칠기 장인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붙여 제작한 이 작품은 정상들에게 우리 전통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굳이 금액으로 따지자면 시가로 8억원에 달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회의장 건물은 각국 정상의 안전을 위해 폐쇄회로TV와 금속탐지 검색설비, 빔센서, 내방객 추적관리 시스템 등 최첨단 보안시설을 갖추고 있다. 두께 21㎜의 복층 외벽 유리에는 방탄필름을 부착하는 등 고도의 안전장치들이 구비돼 있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이미 국내·외 인사들의 내방을 통해 역대 정상회의장 가운데 가장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1000년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동백섬과 더불어 세계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시는 역사적인 이 건물을 정상회의가 끝난 뒤 3개월가량 원형을 보존, 시민들에게 개방한 뒤 최고급 회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순수 우리말인 누리(세상, 세계)와 마루(정상, 꼭대기) 그리고 APEC 회의장을 상징하는 APEC 하우스를 조합한 이름이다.‘세계의 정상들이 모여 APEC 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부산시 관계자는 “누리마루 APEC하우스는 전통과 현대 첨단기술의 조화와 더불어 천혜의 절경이 어우러져 역대 APEC회의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1차정상회의가 열리는 해운대 벡스코(부산국제종합전시장)의 정상회의장과 각료회의장, 프레스센터, 국제방송센터 등도 최근 공사가 완료됐다. 세계 정상들이 첫 정상회의를 갖는 벡스코 컨벤션 홀은 개·보수 공사가 지난 10월 모두 끝나고 정상들이 찾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회의장 내부 벽면은 고려청자문양의 실크 벽지로 장식하고 국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다섯봉우리의 산과 물결치는 파도, 아름드리 소나무)´ 를 설치해 정상이 모여 회의하는 정상회의장임을 표현했다. 바닥은 근정전 답도의 당초문양과 구름문양 등을 사용해 조선시대 궁궐의 전통 이미지를 살렸다. 바닥 한가운데는 조선시대 부산출신 과학자 장영실이 제작한 ‘해시계복제본’을 설치해 우리나라가 정보기술(IT)강국임을 나타내도록 했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컨벤션홀 천장에는 참가 21개국을 상징하는 조명라인이 설치됐다. 이는 지구의 경선과 위선을 형상화한 빛의 선으로 부산이 21개국 정상이 모여 있는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로비에는 우리문화와 자연,IT산업 등을 홍보하는 영상물과 디지털 정원, 디지털 병풍, 디지털액자 등 IT 조형물이 설치됐다. 또 삭막함이 흐르던 벡스코 콘크리트 광장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공연장과 함께 화단이 조성된 친수공간이 손님을 맞는다. 글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사진 부산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책꽂이]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이한우 지음, 해냄 펴냄) 조선조 3대 국왕이었던 태종의 정치역량과 리더십을 다룬 연구서. 조선조 최고의 현실정치가로서의 업적을 조명하고, 열정과 냉정을 동시에 지녔던 그의 다양한 면모를 새롭게 분석한다.1만3000원.●자크 아탈리의 인간적인 길(자크 아탈리 지음, 주세열 옮김, 에디터 펴냄) 사회주의 이념이 현실에서 실패한 후 사회민주주의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정표와 인식의 틀을 제시한다.1만2000원.●아니메(수전 J. 네피어 지음, 임경희·김진용 옮김, 루비박스 펴냄) 일본 만화 즉, 아니메를 통해 일본 문화와 사회 읽기를 시도한 책.‘아키라’에서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까지 독특한 서사와 미학을 겸비한 20세기 대표작들을 통해 일본 문화의 속살을 탐색한다.1만6500원.●콩(한국콩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편, 고려대학교 출판부)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콩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담았다. 콩의 영양가, 콩의 이용 및 재배 역사, 품종과 육종, 가공 특성, 우리나라와 각국의 콩 이용음식까지 꼼꼼하게 싣고 있다.4만원.●칸의 후예들(라시드 앗 딘 지음, 김호동 역주, 사계절 펴냄) 몽골제국이 남긴 세계사 ‘집사’ 3부작중 3권. 우구데이를 시작으로 구육, 뭉케, 쿠빌라이, 티무르에 이르는 5명의 대칸을 중심으로 칭기즈칸의 다른 세 아들인 주치와 차가타이, 툴리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3만2000원.●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이야기(박덕규 편저, 일송북 펴냄) 초등학생부터 일반인들까지 방대한 중국 역사를 소설 읽듯 쉽고 재미 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한 시리즈물. 총 14권중 춘추시대∼삼국시대까지 5권이 먼저 출간됐다. 각권 7500원.
  • 나폴레옹 ‘송곳니’ 1440만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것으로 보이는 송곳니가 오는 10일 영국 윌트셔 스윈든의 도미니크윈터 경매소에 출품되며 낙찰가는 8000파운드(약 1440만원)까지 치솟을 전망이라고 영국 언론들이 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송곳니는,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1817년 주치의인 배리 오매아라가 뽑아 보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오매아라는 이 치아를 나폴리 국왕의 전시(戰時) 부관이었던 프란시스 마체로니 장군에게 바쳤으며, 마체로니 가문이 이를 300여년간 보관해 오다 1956년에 현재의 소유자에게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BBC는 보도했다. 일간 가디언도 감정 전문가인 크리스 앨버리의 말을 인용,“40대 남성의 오른쪽 위 송곳니이자 영구치로 보이며 나폴레옹의 외형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앨버리는 “나폴레옹은 1816년 치통을 앓았던 것으로 역사 문건에도 나와 있다.”면서 “나폴레옹은 당시 비타민C 결핍에 따른 괴혈병으로 입속에 심한 염증을 앓았으며 1821년 사망할 때까지 신체적으로 매우 쇠약했고 잇몸 상태도 좋지 않아 피가 나고 이가 쉽게 빠졌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설명했다.연합뉴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이유에선가 ‘정감록’은 말해와 양해에 아주 특별한 경사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한다. 보다 정확히는 ‘무학비결’에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고 했다. 이미 태종 14년(1414) 경상도 보천 출신의 파계승 김을수가 태종을 위해 조작한 예언서에도 “말해와 양해에 뜻을 이룬다(午未志上)”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따져 보면, 태종이 즉위한 해는 경진(1400)년이나 그때는 정세가 몹시 불안정했다. 왕위를 빼앗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태종 2년 임오년 또는 그 다음해 계미년이 되면 왕권이 비로소 안정됐다고 평가될 만하다. 예언가 김을수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해 말해와 양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뱀이 자라서 용이 돼야 제격 이와 전혀 다른 풀이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멀리 10세기 초부터 전해오는 한 가지 예언이 있다.‘고경참’에 “뱀해 중에 두 용이 나타날 것이다.”(於巳年中二龍見)라고 했다. 여기 언급된 두 용은 다름 아닌 태봉의 궁예 왕과 고려 태조 왕건으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용안(龍顔)’이니 ‘용상(龍床)’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 용은 임금을 위해 사용되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궁예와 왕건이란 두 영웅은 뱀해에 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뱀해에 즉위하지도 않았다. 이 경우 뱀해에 성인이 등장한다는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런 상징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어, 다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뱀이 오래 묵으면 언젠가 용(龍)이 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무리 설화라도 모든 뱀이 다 용이 되지는 못한다. 용이 되려다 실패한 뱀을 고대 한국인들은 이무기라 불렀다. 상상의 동물인 이무기는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몸통엔 4개의 발이 있다. 가슴은 붉고 등에는 푸른 무늬가 있다는데 그 옆구리와 배는 부드럽기가 비단 같다 한다. 이무기는 눈썹으로 교미하여 알을 낳는다고도 하는데, 때를 놓쳐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에 비유된다. 뱀이 큰 뜻을 품은 영웅이라면, 용은 이미 그 뜻을 이룬 왕을 가리킨다. 고대로부터 한국에 널리 퍼져 있던 상징의 법칙에 따르면, 영웅은 모름지기 뱀해에 태어나야 했다. 아마 그와 유사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중국에선 큰 인물이 되려면 용띠라야 한다는 관념이 보편적이다.21세기를 맞이하는 서기 2000년은 마침 용해였다. 그 해에 중국에선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물론 용띠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용띠보다 뱀띠를 더욱 선호한 흔적이 없지 않다. 용은 맨 처음부터 용이 아니라 뱀이 자라서 돼야 제격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왕은 뱀 또는 용해에 등극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 뒤인 말해나 양해가 되면 완전히 제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일찍이 태종 때 김을수가 말해나 양해에 뜻을 이룬다고 한 예언이나,‘무학비결’에서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라고 한 것은 다 그런 한국의 문화적 나이테 위에 쓰인 것이다.17세기 말에 유행하던 제목 미상의 어느 예언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포함돼 있었다.“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 성인(聖人)이 나와 오년(午年)과 미년(未年)에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이미 살핀 것처럼 ‘무학비결’은 조선 말엽에 저술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보다 200∼300년 전부터 그와 비슷한 구절이 각종 예언서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眞人의 四柱 조선 후기엔 이른바 진인(眞人)의 사주가 거론된 적도 있었다. 숙종 23년(1697) 이익화란 사람이 술사(術士) 이영창에게 다가올 세상의 참된 임금인 진인의 사주를 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을 듣게 됐다.“진인은 기사년(己巳年) 무진월(戊辰月) 기사일(己巳日) 무진시(戊辰時)에 태어났다.” 이때 이영창은 진인의 등극을 도울 사람으로 운부라는 이가 있는데 정묘년에 출생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조선사회에 유행한 어느 예언서에 중국 사람으로 토끼해에 태어난 장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팔도를 다 밟은 뒤에 진인이 등극한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이영창의 발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문제의 예언서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필 중국인 장수가 예언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뒤여서 그렇지 않나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진인의 사주에 기사와 무진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그의 사주엔 뱀이 자라나 용(龍)이 되는 과정이 두 번씩이나 되풀이됐다. 뱀이 용 되는 사주는 명나라의 숭정황제(崇禎皇帝)가 해당한다. 물론 두 번이나 같은 현상이 목격되지는 않았다. 뱀이 변해 용이 되는 꼴이 한 번만 사주에 나와도 드넓은 중국 천하를 다스릴 천자가 되는 형편인데, 그런 것이 두 번씩이나 연거푸 나온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세에 이상세계를 건설할 진인 왕에게나 어울리는 사주다. 세상을 뒤바꿀 것으로 기대됐던 진인의 활동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진인의 활동은 3단계로 나뉜다는데 처음에는 민간에 숨어 지낸다. 사건 관련자들의 말에 따르면, 진인은 강원도 고성에 사는 용장(勇將) 정학의 집에 머문다 했다. 간혹 운부가 거처하는 옥정암이란 암자에 들르기도 한다. 진인이 정체를 숨기고 지내는 동안 운부는 정학 등에게 명령해 신변보호에 철저를 기한다. 제2단계는 거사를 일으켜 대궐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운부는 이미 30여명가량의 승려를 서울 및 각지의 주요 사찰에 파견해 놓았다. 묘정과 일여를 비롯한 승려들이 숙종 23년 3월21일이 되기를 기다려 대궐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강계부사 신건과 상토첨사(上土僉使) 신일 및 여러 무사들도 이 사건에 공모자로 등장했다. 거사자금을 댈 사람으로 김화의 부자 지대호 등도 합세했다. 아울러 함경도의 술사(術士) 주비, 용인의 거사(居士) 조종석, 금성의 강거사 등 여러 명의 예언 전문가들이 관여했다(실록·숙종 23년 1월10일 임술). 마지막 단계는 진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한낱 미수에 그친 역모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진인의 탄생 진인의 사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진인은 세상에 출현했다. 벌써 17세기 전반부터 진인 출생설이 유행했던 것이다. 사주에 앞서 진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희한한 이야기다. 내가 ‘실록’에서 살핀 바로 인조 6년(1628)이 그 방면에선 가장 오래다. 사건은 당시 전라도 남원에 살던 송광유가 밀고한 데서 비롯됐다. 전에 좌랑 벼슬을 지낸 적이 있는 윤운구가 지인인 송광유에게 진인(眞人)이 나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운구는 조선왕조가 망할 징조라며, 어떤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는 대목이었다. 자기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윤운구는 멀리 평안도 창성(昌城)에 내린 우박까지도 들먹였다. 그 우박 모양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소문도 전했다. 윤운구는 진인의 탄생을 기정사실로 못 박기 위해 천문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말이라며, 지금 푸른 구름이 남산을 감싸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은 성스러운 왕이 태어날 조짐이었다. 윤운구는 허의란 친구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허의는 아명이 남산이라 남산의 푸른 구름과 뭔가 특수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윤운구 등은 소문으로 들려온 여러 가지 이상한 사건을 이끌어다 허씨 집안에서 왕이 태어날 징조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허의의 관상 또한 특별하긴 했다. 그는 양미간 사이에 콩알만 한 검은 점이 있었다. 마치 부처의 양미간에 있는 백호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허의는 몸집이 비대한 편이라 허리가 뚱뚱했고, 배가 불룩하니 튀어나왔다. 당시만 해도 살찐 사람들을 유복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허의의 복서골(伏犀骨·두 눈 사이에 있는 코뼈에서 이마까지 솟은 뼈 부위)이 반듯하게 서 있는 모양을 두고 영락없이 임금의 관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허의뿐만 아니라 그의 외삼촌도 외모가 남달라 귀티가 있었다. 더구나 그런 허의가 얼마 전에 천녀(天女)를 만나 신이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윤운구와 그의 동지들은 허의가 천녀와 낳았다는 아들을 진인으로 간주하고 진인왕으로 믿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역모를 꾀했다. 우선 허의와 그의 외삼촌 임게를 비롯한 여러 임씨들이 포섭됐다. 그들은 전라도 광주와 화순에서 난리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밖에 이상온과 국사효 등은 담양에서 변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거기서 가까운 남원에서는 이유가 반란을 주도하기로 했다. 남원의 경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당룡과 부용남 등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 살인계(殺人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는데, 그들도 반란에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해안지방인 고부와 부안에선 유인창과 유선창 등이 반란에 가담했고, 충청도와 접경인 여산에선 송흥길과 소신생 등이 난리를 일으키기로 했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에서도 우전과 두기문 등이 들고 일어서기로 약속됐다. 때가 되면 허의는 진인인 아들과 함께 승려로 구성된 4000∼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리산을 거쳐 일단 경상도 진주로 진출해 근거지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윤운구와 전 주부(主簿) 원두추 등은 서울과 경기 지방의 반군을 이끌고 대궐을 공략하되, 만약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충청, 전라 및 경상도를 확보해 놓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반일 감정을 감안할 때 일본에 원병을 청한다는 계획은 정말 뜻밖이다. 하여간 이 모든 진술은 사건을 조정에 밀고한 송광유의 입에서 나왔다. ●‘역적들’의 자기변명 전라도 양반들이 진인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곧 내병조(內兵曹)에 국청이 설치됐고, 관련자들이 체포돼 엄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윤운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송광유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잡아뗐다. 죽은 송광유의 아버지와는 교유관계가 있었지만, 정작 송광유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역모를 꾀할 처지가 아니란 것이었다. 송광유 일가는 이미 조정의 버림을 받은 처지였다. 송의 아버지는 광해군 말년 역모사건으로 죽은 허균과 무척 가까웠다. 정확히 말해 송광유의 서매(庶妹)는 유명한 문인이자 오늘날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첩이었다. 허균이 역모사건으로 죽게 되자 송광유의 아버지도 전라도 진도에 유배됐다가 사망했다. 윤운구는 태인에 있는 송광유의 본가에 들러 문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송광유는 이웃 고을의 관비(官婢)를 훔쳤다. 그러고는 호랑이가 물어 갔다고 거짓으로 속이려 했으나, 비밀이 탄로됐다. 송광유는 이에 윤운구가 자기의 비밀을 퍼뜨린 것이라 생각해 윤운구를 모함하게 됐다. 이것이 윤운구의 설명이었다. 전 주부 원두추 역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기 형 원두표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송광유를 잠시 사귀었지만 역적모의를 한 적은 없다고 발뺌을 했다. 당시 송광유는 남의 노비를 빼앗으려고 원두표에게 청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송광유는 원씨 일가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 뒤 송광유는 관비를 훔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두추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 때문에 송광유는 원두추를 해치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허의의 외삼촌 임게 역시 변명했다. 허의에게 특이한 아들이 있다거나, 그 어미가 천녀(天女)라고 하는 말은 억지라는 것이었다. 여러 해 전 허의는 경상도 개령을 지나다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어떤 여인과 동침을 했는데, 그 뒤 그 여인은 걸인이 되어 사방을 떠돌다 벼랑에서 실족해 죽었다. 허의는 그 소문을 듣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른 적은 있다고 했다.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 국왕 인조는 심문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에게 사건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다들 머뭇거리기만 했다. 누구도 사건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송광유가 밀고한 내용은 완전히 허구도 아니었지만, 모두 사실로 믿기도 어려웠다. 왕 역시 그 점에 동의했다. 다만 윤운구 등이 무언가 진인에 관한 말을 지어냈고, 새 세상의 도래를 이야기한 점만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혼란은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점에서 원두추 같은 이가 끼여 있다는 점은 다소 생뚱맞았다. 그의 친형 원두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제2등 공신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은 그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반정 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관해서도 불평들이 많아 이괄 같은 이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정 대신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진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예언과 여러 징조를 빙자해 조정을 원망한 것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역모에 해당해, 엄히 처벌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원두추처럼 집권층의 핵심과 가까운 인사들이 끼여 있어 함부로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경로를 통해 타협책이 마련됐다.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말고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만일 진실을 밝히겠다며 관련자들에게 고문 수사를 펼 경우, 조정의 실권자들에게까지도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관련자를 모두 무죄방면하기도 어려웠다. 인조는 이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식견이 어두워 사건의 전모를 다 알 수가 없도다. 경들이 공론에 따라 의논하여 아뢰라.” 꾀 많고 나약한 왕의 발언이었다. 대신들은 요망한 소문을 퍼뜨려 조정을 비방한 혐의가 뚜렷한 몇몇 사람만을 처벌하자고 제안했다. 윤운구, 유인창, 민안 등을 유배형에 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줄이 좋은 원두추의 경우는 딱히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으므로 풀어주자고 했다. 한편 송광유의 진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허의와 임게 등에 대해선 그 처리를 일단 왕의 의사에 맡겼다. 왕은 윤운구 등에 대해선 원안대로 유배를 명했다. 원두추 등 그 밖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무죄 방면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왕이 이 사건의 밀고자인 송광유를 풀어주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왕은 송광유의 진술이 대체로 사실에 근거했다고 판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송광유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해 연일 송광유의 처벌을 주장했고, 왕은 마지못해 그 의견을 수용했다(실록·인조 6년 12월18일 갑진). 크게 보아 윤운구 사건은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은 양반들이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민간에 퍼져 있던 예언서와 진인출현설을 이용했다. 이 단계에서 상층문화와 하층문화는 혼연일체가 됐다. 민중이 만들어낸 진인은 양반들에 의해 역사의 무대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진인은 출몰을 거듭하더니, 뱀이 용으로 변하는 사주가 만들어졌다. 진인의 사주에는 역사 속에 오래 단련된 한국의 기층문화가 숨쉰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오만의 5가지 비밀

    오만의 5가지 비밀

    아라비아반도 동남단에 위치한 오만에서는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사막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아랍족인 ‘베두인’ 후손들의 아름다운 미소가 있고, 친절함이 있다. 이라크 사태로 인해 중동 국가의 여행은 모두 위험하다는 우리의 편견과는 달리 오만은 평화롭다. 우리에게 친숙한 ‘신밧드 모험’의 주인공인 뱃사람 신밧드의 출생지 오만. 그러나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거의 찾지 않는 미지의 땅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대 유적들과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 등 다양한 이슬람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환경 국가로 ‘에코 투어’(친환경적 관광)의 명소로도 유명하다. 오만 여행이 제철을 만났다. 이슬람 금식월인 ‘라마단’이 3일 끝난다.11월에서 내년 3월까지는 30도 안팎의 온화한 기후로 무덥지 않다. 대자연에 순응하며 욕심없이 살아가는 ‘중동의 은둔자’ 오만의 매력에 빠져보자. 글 사진 무스카트(오만)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오만의 5가지 비밀 (1) 남자 화장실에는 소변기가 없다. 남자들도 발끝까지 내려오는 전통적인 치마형 복장을 입는 탓이다. (2) 택시 기사의 상당수는 경찰이다. 오만은 이중직업을 허용하고 있어 경찰들이 업무시간 외에 택시기사 일을 하고 있다. (3) 최고 기온은 49도(?). 오만은 최고 기온이 50도를 넘으면 관공서와 기업 등이 휴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여름 50도를 넘어도 공식적으로는 49도라고 발표한다. (4) 은행 대출 등이 활성화돼 있지 않다. 이슬람 율법에 이자를 받지 못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5) 오만의 한국 교민은 단지 1가족. 오만에는 대사관 직원과 상사 주재원 등 150여명이 거주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민은 원양어업을 하는 김점배 라사교역 사장 가족이 유일하다. ●검붉은 바위산과 베두인의 미소 검붉은 바위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숨을 조여온다. 두바이에서 차를 타고 하타지역 국경을 넘어 6시간을 달려 도착한 오만의 수도 무스카트는 뜨거운 태양이 내려쬔다. 거리에는 흰색 사원과 건물들로 가득했고, 차도르를 쓴 여인과 머리에 터번을 한 남자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무엇보다 국경지대부터 계속된 바위산인 하자르 산맥이 압도한다. 산 사이로 깊게 파인 ‘와디’(우기에만 흐르는 강)가 시원한 느낌을 줄 뿐이다. 처음에는 ‘이 더운 나라에 왜 왔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점차 오만의 숨은 매력에 빠져 찌는 더위는 오히려 여행의 동반자가 됐다. 무스카트는 ‘오일 달러’의 힘을 빌려 거대한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다른 걸프지역 도시와는 달리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알부스탄 팰리스 호텔. 페르시아만안협력회의(GCC) 정상회담 개최 장소용으로 지난 1985년 건립된 오만 최고급 호텔이다. 화려한 로비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궁전을 연상케 한다. 딜럭스룸 등 247개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데 최상층인 9층만은 국빈용으로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하루 숙박료는 250달러로 시내에 있는 3성급 호텔의 객실료(40달러 수준)에 비해 비싼 편이다. ●오만을 사랑한 독일여성 타하니 여행은 오만 현지 여행사인 ‘마크 투어’의 여행 가이드인 독일인 여성 타하니와 함께 시작됐다.1년 6개월전 이 곳에 정착한 30대 후반인 그녀와의 여행은 색다른 재미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찾은 곳은 ‘이티’(YITI)산. 시내에서 차를 남쪽으로 타고 30분쯤 달려 나무 한그루 없는 바위산 정상에 오르자 주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강렬한 태양이 내려쬐고 있지만 탁트인 전경 때문인지 더위가 사라진다. 비록 나무 한그루 없는 바위산이지만 그 아래로 펼쳐진 하얀 건물들과 길게 뻗은 한적한 도로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뤄냈다. 그녀는 “척박한 대자연에 순응하며 욕심없이 살아가는 베두인 족의 삶에는 배울 것이 많다. 이 곳은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낸 나에게 새 삶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10대 후반에 멕시코 선원과 결혼해 베네수엘라 등지를 떠돌며 살다 이혼하고 이 곳에 정착했다.20살 난 아들까지 뒀으나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홀로 새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시내로 들어섰다. 루이지역의 남부터미널을 지날 때 그녀가 가리킨 곳은 사람 얼굴 모양의 신기한 바위. 눈·코·입은 마치 조각을 해놓은 듯 사람의 얼굴과 똑같다. 오만 다이브센터 인근으로 차를 돌리자 이번에는 시원한 바다 풍광이 반긴다. 짙푸른 바다와 검붉은 바위산이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반다르 지사해안 등 바닷가에서는 2000년 전 사람이 산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바위산을 끼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눈길을 끌었다. 술탄의 궁전이 있는 마트라항에 들어서자 해안가 바위 봉우리마다 흙벽돌로 쌓은 원형 성채들이 이채롭다. 포르투갈 점령기인 16세기 무렵 적군의 침입을 막기위해 세워진 망루다. 오만에만 5000여개에 이르는 성채와 망루가 있다. 인근에는 잘랄리·미라니 성채가 위용을 뽐내며 항구를 지키고 있다. 모두 1580년 당시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성채에 들어가려면 잘랄리 성채에서 입장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인근의 재래시장 마트라 숙에서는 은제 수공예품과 금 가공품, 향료 등 토속미가 물씬 풍기는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다. 오만산 향수는 세계 최고급 고가 향수다.1병에 약 145달러. 이어 인근에 있는 알하자 마운틴에 오르자 아라비아해를 향해 서 있는 향로 조형물 ‘인센스 버너’가 눈에 들어왔다. 향로는 오만의 특산물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이 가져왔다는 선물이다. 이 곳은 1시간 거리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마을 뒷산으로 바위산을 걸어 오를 수 있는데 주의할 점은 한낮에는 기온이 높은 만큼 해가 뜨기전에 오르는 것이 좋다. ●화려한 모스크의 불빛에 취해 오만에는 1만 3000여개의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사원은 술탄 카부스 그랜드 모스크다. 국왕의 이름을 따 2001년 문을 연 이 사원은 1만 6000명이 동시에 참배를 할 수 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규모가 큰 모스크다. 이슬람을 상징하는 5개의 대형 첩탑은 화려함을 자랑한다. 사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카펫이 깔려 있다. 가로 60m, 세로 70m의 대형 카펫으로 600여명의 여성이 직접 사원에 들어와 4년동안 손으로 직접 짠 것이다. 무게가 21t에 이르며 58조각으로 나눠 실로 이어붙였다고 한다. 천장 중앙에는 대형 샹들리에가 빛나고, 창문을 장식한 화려한 스테인글라스가 아름답다. 오전에만 관람객들에게 개방한다. 사원안에서도 사진을 찍는데는 제한이 없다. 밤에는 모스크에 화려한 조명이 비춰져 예쁘게 빛난다. 시원한 밤거리를 걸으며 모스크의 불빛을 감상하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건물들은 대부분 흰색이다 보니 낮보다 밤에 길찾기가 오히려 편하다고 한다. 특히 오만인은 한국사람에 대해 우호적이다. 영국, 호주 등 다른나라 관광객들은 비자 수수료를 내야 하지만 한국인은 무비자다.2004년 양국간 무비자 협정이 체결된 덕이다.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과거 한국의 산업역군들이 중동지역에 수로 건설사업을 한 탓에 ‘사막에 물길을 뚫어준 나라’ 등으로 기억한다. 오만에 다니는 자동차 5대중 1대가 한국 자동차이다. 오만 관광객들의 한국 유치를 위해 이번 여행을 함께 했던 이창용 한국관광공사 두바이 지사장은 “오만은 우리에게는 원유, 가스 공급국이자 자동차, 가전제품의 수출국으로 국제 무대에서는 무척 가까운 나라지만 관광에 있어서는 교류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오만과 한국의 관광 교류가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밧드의 고향 소하르 무스카트에서 두바이 국경 방향으로 2시간쯤 차를 달리면 바티나 연안의 인구 11만명이 사는 항구도시 소하르가 나온다. 이곳이 뱃사람 신밧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소설과 영화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신밧드의 모험’의 출발지. 신밧드는 가상의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곳에서는 실제 신밧드라는 선원이 이 곳에서 인도양 건너 동남아·중국으로 이어지는 모험길에 나섰다고 믿고 있다. 신밧드와 관련된 유물·유적은 없다. 해질무렵이면 사람들이 바티나 해변으로 쏟아져 나와 축구를 즐긴다. 축구는 이곳의 국기처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스포츠다. 한때는 오만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현 부사이디 왕조의 발상지로 별궁이 소재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에서 지금은 중화학 공업단지를 만드는 곳이다. 소하르 성채는 크고 하얗게 칠해진 사각형으로 정원에 한개의 탑이 솟아 있다. 특히 오만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환경 정부다. 보호구역에는 희귀종인 아라비아 영양과 멸종 위기에 놓인 아라비아 타르(야생 거위), 아라비아 늑대 등이 살고 있다. 때문에 ‘에코 투어’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민물 호수의 수중동굴인 알후타케이브와 바다거북이 수백마리가 해변에 알 낳고 돌아가는 광경이 장관인 터틀비치, 차로 오를 수 있는 3000m급 산인 자발산 정상의 전망, 북부와 달리 나무와 풀로 덮인 산들이 이어진 남쪽의 살랄라 지역 등이 있다. 기원전부터 유향 무역이 번성했던 남부의 우바르 유적지, 살랄라 부근의 고대 도시 유적인 코르 로리와 알 발리드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이상민 주오만 대사는 “해양민족인 오만인은 흰 옷을 좋아하고 예의가 바른 민족으로 우리나라와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면서 “오만은 다른 중동국가와는 달리 여자들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으며, 여행을 하는데 안전한 나라”라고 강조했다. ■ 미리 알고 떠나세요 오만은 사막성 기후로 여름철인 4∼10월은 50도를 웃돌지만 11∼3월은 30도 안팎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로 덥지 않다. 때문에 11∼3월이 여행하기 좋다. 면적은 한반도의 1.6배, 인구는 약 250만명이며,GNP(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달러를 약간 넘는다. 환율은 1오만 리알(RO)에 2.6달러이며, 시차는 한국보다 5시간 늦다. 전기는 240볼트로 국내 가전제품을 사용할 수 있으나 소켓이 영국식 3핀형이어서 플러그 어댑터가 필요하다. 오만은 한달간 관광 목적의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휴일은 안식일인 목요일과 금요일이다. 일반 상점·식당에선 술을 팔지 않지만 호텔의 바에서만 술 판매가 허용된다. 상점의 경우 오전 9시∼오후 1시, 오후 4시30분∼오후 8시까지 영업한다. 산유국 답게 휘발값과 자동차 렌트비가 저렴해 렌터카 여행도 고려해 볼 만하다. 기름값은 ℓ당 300∼400원수준이며, 렌트비는 중형차가 하루 60∼70달러선. 오만 여행은 중동지역 전문 랜드사인 ‘디티티에스’(www.godubai.co.kr)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만으로 가는길 오만까지 직항편은 없다. 항공으로 가려면 아랍리트 두바이에서 오만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에미리트항공(www.emirates.com/korea/kr)이 매일 밤 12시30분 두바이까지 운항한다. 최근 대한항공과 코드셰어 협정을 체결, 에미레이트 항공권으로 월·수·금 오후 9시15분 출발하는 대한항공을 이용할 수도 있다. 운항시간은 10시간. 오만 무스카트 공항까지는 두바이에서 에미리트항공이 목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8시15분 출발한다. 운항 시간은 1시간. 렌터카를 이용할 경우 하타지역에 있는 국경을 통해야 하며 6시간이 걸린다. 유럽과 북미, 중동,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의 54개국,75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는 에미리트항공은 중동의 허브 항공사로 중동지역은 물론 중동을 거쳐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로 떠나는데 편리하다. 세계적인 여행 전문지 ‘비즈니스 트래블러 아시아-퍼시픽’이 발표한 중동·아프리카 지역 최고의 항공사로 2년 연속 선정되었다. 국내에는 지난 5월1일 첫 취항을 시작했기 때문에 동반자 할인 행사와 인터넷 할인, 렌터카 할인 등 파격적인 특가 프로모션을 실시하고 있다.(02)779-6999.
  • [녹색공간] ‘국민 총행복’의 기수 부탄 王/박은경 환경과 문화 연구소 소장

    동화 속의 왕 같이 빼어나게 잘 생긴 지그메 싱예 왕추크왕은 우리 일행을 따뜻이 맞아 주었다. 갈색과 겨자색이 어울린 세련된 디자인으로 단장한 부탄 왕의 집정실에서 만난 국왕은 50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30대 청년같은 젊음과 정기가 있었다. 소왕국 부탄은 중국의 티베트자치국과 인도 국경사이 히말라야 대간에 자리잡았고, 수도 팀부는 해발 2500m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작은 계곡에 위치하였다. 방콕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 6시부터 서둘러 부탄 국적기 두르크 항공 비행기를 타고, 인도의 콜카타를 거쳐 파로공항에 도착하였다. 골짜기 작은 강가에 위치한 이 공항은 100여명의 승객이 내리기에 적합하였다. 지난 10월초 유엔 환경프로그램(유네프)의 퉤퍼 사무총장과 관련인사 7명은 초청자인 왕을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예정된 30분의 시간이 1시간으로 길어진 대담시간 동안 왕추크 왕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정책적 소신을 찬찬히 밝혔다. 이미 전 지구적 관심이 된 ‘국민총생산’이 아닌 ‘국민총행복’에 대하여 왕으로부터 직접 듣는 영광의 자리였다. 특히 동·서남아시아에 대한 왕의 소상한 이해는 방문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필리핀의 환경장관 출신 하비토 교수가 자국으로 돌아가 칼럼을 쓰겠다고 하자 왕은 “당신국가 지도자가 불행해할 걸요?”라고 방문자들을 웃게 하는 재치까지 보였다. 10월4일 뉴욕타임스에 ‘행복한 작은 왕국의 새 행복척도’라는 기사가 실린 후 한국의 일간지들에도 부탄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서 부탄의 행복척도에 대하여 묻는 이가 부쩍 많아졌다.3만 8394㎢, 인구 70만명의 소국 부탄은 30여년전부터 왕추크 왕의 영도아래 국가 발전의 철학과 정책을 국민들의 행복에 맞추어 왔다.‘국민총행복’의 개념은 4개 영역을 균형되게 유지하려는 정책으로 실현되고 있다. 즉 부탄의 문화적 전통의 유지, 교육과 건강에 대한 복지, 친 환경적 노력 및 투명하고 책임있는 거버넌스를 ‘행복만들기’ 정책의 기본으로 잡고 있다. 경제적 발전보다 국민들의 정신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서 국민들의 행복을 최대화하려는 독특한 의지가 반영된 정책이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환경저명인사 7명만이 참여한 2일간의 유엔환경프로그램 정책 지역협의회는 개회식 의장 틴리 총리가 환경부장관, 문화부장관을 배석하고 스님 세명과 함께 주관하였다. 회의 개회식에 신을 부르는 부탄의 전통의례는 국민 총행복의 문화전통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여실히 증명해 주었다. 목축국가의 표상인 우유를 가득 담은 함지박을 가운데 놓고 스님들의 찬송 속에 의례 주례자가 회의장 밖에 우유를 담은 국자 같은 기구를 들고 들락거리며 정중하게 진행하였다. 한국 전통사회의 굿의례에서 첫거리에 등장하는 청신의례와 의미가 같았다. 길에 걸어다니는 부탄인은 누구나 부탄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무릎길이의 ‘고’라고 하는 남자들의 허리를 묶은 간단한 옷과 ‘기라’라고 하는 여자들의 긴치마이다. 내 평생에 길거리에서 남자들의 다양한 다리를 가장 많이 본 사흘간이었다. 반면에 여성들은 긴치마로 몸을 가리고 있다. 부탄의 모든 교육은 무상이다. 하나밖에 없는 대학까지도 무상교육으로 이루어진다. 병원비도 무료라서 우리 같은 여행객도 부탄에서는 무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하루에 한두편의 두르크항공기만으로 제한하는 정책은, 물론 파로공항의 자연적 입지로 인한 운항의 난점도 있겠지만 자신들의 환경을 인간들의 무차별관광으로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비행기 트랩을 내리는 순간 느꼈던 그 짜릿한 강한 햇살과 맑디맑은 공기 속에 순간적으로 지구가 아닌 다른 위성에 온 것 같던 느낌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감각속에 살아 있어 다시 맛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유발한다. ‘국민총행복’의 네 번째 요소인 투명하고 책임있는 거버넌스는 지난 30여년간 왕추크왕이 키워 온 국민총행복의 개념과 정책은 물론 2008년에 의회민주주의를 실현시켜서 왕의 자리를 명예직으로 바꾸려는 왕추크왕의 집념속에 잘 녹아 있다. 네 명의 여자형제를 왕비로 거느린 동화 속 왕추크왕의 모습에 알현 인사하였던 필자는 1시간의 대담 후 부탄사회의 현명한 영도자의 모습에 작별 인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박은경 환경과 문화 연구소 소장
  • 속눈썹, 달빛에 떨다

    속눈썹, 달빛에 떨다

    경·이·롭·다. 새 벽 두시, 난 홀로 일어나 아얼친산에 섰다. 그리고 경, 이, 롭, 다, 그렇게밖에 말 할 수 없는 내 표현력의 한계를 절감했다. 산이, 풀 한포기 없는 산이 있을 수 있다니, 아니, 이렇게 높을 수 있다니, 이렇게 산맥을 이룰 수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냄새도 없다. 움직임도 전혀 없다. 진공 상태가 이럴까? 쿡쿡, 크고 작은 바윗돌들만 군데군데 박혀 있을 뿐, 풀 한포기 없는 모래산이 산맥을 이루고, 그 산맥의 산 어딘가에, 그 계곡 어딘가에 우리 일행이 텐트를 치고 이렇게 있다. 장대한 산맥이 우리를 담쑥 안고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 난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 무엇에게도 잡히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없는 바람이, 바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아얼친산에 둘러싸여 나는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바람이 되어 이곳에 한동안 머물고 싶다.’고. 그들도 바람이 되었을까? 서시. 월나라인인 그녀는 적국 군왕을 유혹하는 임무를 띠고 오나라로 보내진다. 그리고 계획대로 오나라 국왕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를 파멸시킨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녀는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을까?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차를 그녀는 정말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을까? 사랑했지만 나라를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을까?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그녀는 누군가와 다시 진실한 사랑을 했을까? 아님, 바람이 되었을까? 당 현종. 그는 양귀비를 사랑해 자신의 나라와 그녀를 맞바꾸었다. 그러나 그는 양귀비 이전에 한 여자를 사랑했다. 무혜비였다. 사랑했던 그녀가 죽고 시름에 빠져 있던 그에게, 여덟째아들의 첩인 양귀비가 눈에 띠었다. 그는 아들은 변방에, 며느리는 절에 보낸다. 그리고 오년 동안 양귀비를 찾아다니며 공을 들였다. 그는 양귀비와 십여년을 꿈같이 살았다. 그러나 그후, 그는 양귀비를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폭도상태의 그들에게 양귀비를 내주고, 그녀는 목을 매어 자살한다. 만약 지하에서 그들 셋이 만난다면 당 현종은 누구를 옆에 둘까? 아님 바람이 되어 그냥 스쳐 지나갈까? 향비, 그녀는 청나라 건륭제의 비이다. 용모가 뛰어나고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몸에서 향긋한 향이 난다고해서 향비라는 이름이 붙은 그녀는, 원래 신장성 남부 어느곳의 공주, 혹은 왕비였다. 공주, 혹은 왕비의 나라는 청나라의 건륭제에게 멸망당하였고 향비는 포로가 되어 중원으로 끌려온다. 건륭제는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그녀를 거두려하지만, 그녀는 황제를 거절한다. 건륭제는 향비가 고향을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망향루를 지어주기도 하고, 위구르의 재료를 날라다 그녀만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였지만, 그녀는 결국 자결함으로써 끝끝내 황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고향에서 성녀로 추앙받았다. 어쩌면 한줄기 바람이 되어 그곳을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아얼친산에 둘러싸여 그 산을 바라보고 섰다. 달빛이 흐른다. 그리고 작은 바람이 일었다. 나는 속눈썹조차 움직이지 못한다. 산은 그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그대로인데, 바람은 일어났다 스러지곤 했다. 이 세상에는 없는, 듬직하고 아름다운 ‘그 사람’의 어깨 같은 아얼친 산에서 나는 사랑을 떠올린다. 함부로 부질없다 말 할 수 없는 사랑을. 그것은 ‘그’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아, 장대한 아얼친 산인, 그가. 8월16일 7시. 우루무치 아침 먹으러 가려는데 호텔 앞마당, 우리 차 옆에서 기웃거리는 한국인을 만났다.“아니, 여길 다 지나 오신 모양이네!” 차를 뺑뺑 돌아가며 써 놓은 우리들의 행선지를 가리키며 입을 벌린다. 인천-천진-북경-서안-난주-무위-금창-바단지린사막-주천-장예-돈황-하미-투루판-우루무치-쿠얼러-타클라마칸사막-민풍-치에머-아얼친산-거얼무-청해호-난주-은천-혹호트-북경천진-인천 “아, 예! 반 좀 지났나요?”한 보름 만에 목청 큰 한국인 아저씨를 만나니, 우리도 무척 반갑다. 김치 공장을 한다는 그 아저씨는 차 옆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김치를 한 뭉치 주고 갔다. 역시 우리는 배달민족, 한겨레다. 배급 담당은 나다.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내 손끝만 바라본다. “빨리 빨리!” 김치를 자르는 손길이 가볍게 떨렸다. 8월16일 12시 쿠얼러 가는 길 해발 0m인 사막을 지난다. 길가에 느닷없이 공룡, 말, 코끼리 모양의 조각상들이 드문드문 서 있다. 석고로 만들었을까, 모습이 희다. 가이드의 말이 그것이 예전에, 수천년 혹은 수만년 아니면 수십만년 전에 해당 지역에 그 동물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라고.‘공룡?’‘코끼리?’나는 새삼스레 끝없는 모래벌판을 둘러본다 8월17일 14시 창밖의 풍경이 반복된다. 사막에서 초지로, 초지에서 다시 사막으로. 그런데 지금 창밖의 풍경을 뭐라고 해야 할까? 사막에 아름드리 고사목이 숲을 이뤘다.3000년을 산다는 호양림이다. 중국에서는 생일날 ‘이 나무처럼 오래 살아라!’라고 덕담을 한단다. 나무의 모습이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처럼 기기묘묘하다. 혹시 팬터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면 이런 곳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직업병이다. 8월19일 15시 아얼친 산을 향해 사막 한가운데로 길이 뻥 나있다. 길 양쪽에는 풀이 조경되어 있고, 길 가에는 전봇대가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사막은 사막 그대로 놔둬야 자연보호가 아닌가요? 사막을 억지로 초지로 만들려고 하는 거, 저것도 자연 훼손이라니까요! 아, 안 그래요?” 아버지 흑기사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고 싶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우리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생각할까? 8월20일 17시 톈산산맥을 바라보며 3000,3500,3900m…. 고도가 계속 높아진다. 멀리 톈산의 만년설이 둘러섰다. 전봇대만 늘어서 있는 황량한 사막을 지나고, 소금밭을 지나고, 유전을 지나 달렸다.8월 중순인데, 춥다. 점퍼를 두 개나 껴입고 뒷좌석에서 한참을 잤다. 눈을 떠보니 고도는 여전히 3000대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우리의 백두산이 2744m인 것이 생각났다. 여기가 이 정도인데 저 톈산은 어떨까? 나는 눈을 들어 톈산을 바라보았다. 고선지 장군이 저 톈산산맥을 넘었다고? 그 옛날에?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8월21일 14시 청해호 가는 길 고도계가 고장 난 것일까? 하루 종일 달려도 고도는 3500m이다. 양을 방목하고 있는 장족 텐트를 만났다. 아줌마는 후덕하게 웃으며 자기 텐트를 열어 보인다. 유목민의 간단한 살림살이. 누가 이들을 안쓰럽다고 하는가.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우월감이다. 조심해라, 조심해라. 나는 내 자신에게 타일렀다. 8월21일 23시 청해호 도착 초대소에서 자기로 했다. 한국으로 치면 여관, 혹은 여인숙에 해당된다고 한다. 근처에 마땅한 호텔이 없기도 했고, 초대소에서도 한 번 자 보겠다는 모험심의 발로였다. 한 방에 서너개의 침대가 있고, 침대 한 개당 10위안이라는데, 전기장판까지 깔려 있었다.(성능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초대소 마당에서 캠프파이어를 했다. 나무 한 짐을 다 태우고 나자, 주인 아줌마가 말똥 말린 것을 가져다 인심을 썼다.‘말똥?’그러나 말똥은 역겨운 냄새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잘 탔다. 별은 또랑또랑 한 밤 내 반짝이고, 우리는 말린 말똥 한 자루를 다 태울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글쓴이 이윤희 교수는 동화작가, 문학박사, 어린이 문화전문지 ‘아침햇살’발행인. 인천재능대 아동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작품집으로는 ‘네가 하늘이다’‘꿈꾸는 호랑이 우화’를 비롯한 철학동화시리즈 18권이 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1) 경주이선생 가장결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1) 경주이선생 가장결

    “지난 60년은 그만두고 양류목운(楊柳木運)의 해에는 갑자기 군대가 소요를 일으켜 여(女)군주가 도망을 칠 것이다. 만일 동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나그네가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하게 되리라. 나라의 태공은 푸른 바다에 외로운 그림자가 되어 신세가 처량해질 것이나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백성들은 달아나 숨기 바쁘니, 삼강오륜이 끊어지도다. 하늘 재앙 혹독해 벌레의 독을 무어라 형언하랴. 부자가 먼저 죽나니 후회해도 소용없도다.”(경주이선생 가장결)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경주이선생’의 첫 대목이다. 정치적 격변을 알리는 끔찍한 예언이 쏟아져 나온다. 그 내용을 일일이 살피기에 앞서 우선 거기에 보이는 연도 표기방식이 특이해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양류목운’이라고 했다.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임오년과 계미년의 운세를 말한 것이다.‘경주이선생’은 조선 후기에 정착된 편년체 예언이 분명한데, 특히나 음양오행설로 육십갑자를 푼 셈이다. ●한국의 운세를 나무에 빗대는 이유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한국이란 나라의 운세는 나무 운세(木運)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그랬다. 다들 우리나라를 나무(木)로 상정했다. 그 기원은 지금부터 약 650년 전인 고려 공민왕 6년(135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음양오행에 달통해 사천소감 벼슬에 있던 우천흥이란 일관(日官)이 있었다. 그는 공민왕에게 올린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도선국사가 지은 ‘옥룡기’(玉龍記)란 예언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지맥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 지세가 물(북쪽)은 뿌리요, 나무(남쪽)는 줄기가 됩니다.” 우천흥은 도선이 한 말이라며 자신의 견해에 권위를 부여하려 애쓴다. 과연 이 주장이 도선에게서 비롯됐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지만,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는 백두산을 뿌리로 삼아 지리산까지 줄기가 뻗친 한 그루의 나무로 이해된 사실만은 틀림없다. 역사 기록을 좀 더 살펴보면 그보다 200년쯤 앞서 고려 인종 때도 비슷한 인식이 존재했음이 증명된다. 알다시피 묘청은 도읍을 서경으로 옮기자고 주장했는데, 그 역시 고려란 나라를 한 그루 나무로 보았다. 묘청이 서경에 새 궁궐터로 잡은 곳이 ‘대화세’(大華勢), 즉 큰 꽃봉오리 형상의 명당이었다. 그는 나라 전체를 커다란 나무로 인식했고, 그 중에서 지세가 강한 여러 명당을 꽃으로 간주했다. 대화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꽃 즉, 최고의 길지를 뜻했다. 한국이 음양오행으로 보면 나무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된 듯하다. 한반도는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하는데, 나무가 바로 동쪽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먼 옛날부터 중국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동국(東國)’ 또는 ‘진단(震檀)’이라 불렀다. 동쪽 나라를 뜻하는 ‘동국’이야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진단’의 진(震) 역시 팔괘의 하나로 동쪽을 가리킨다. 단(檀)은 우리나라의 시조가 단군이라서 덧붙여진 것이다. 우리나라를 동쪽 나라라 하고 그래서 나무 운세로 보는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표현된 것이다. 지구가 둥근데 하필 우리나라를 동쪽으로 볼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약용이나 홍대용과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마침내 지구가 둥글다든가 자전하는 줄을 알게 돼 중국적 세계관에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동쪽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인습의 뿌리는 정말 끈질기다. 빠뜨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역시 ‘고려사’에 실려 전한다. 한국 고대 풍수지리의 아버지라 할 도선국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할 때의 전설이다. 그 때도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 왕륭과 함께 곡령 고갯 마루에 올라 지맥을 두루 살폈다. 위로 천문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곳 지맥은 임방(壬方:북쪽)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물을 어머니(水母)로 삼은 나무(동쪽)가 줄기인데, 말머리 명당에 이르러 멈춰선 형세입니다. 공 역시 물의 운명이오니 마땅히 물의 대수(大數·물의 수는 1과 6으로 6이 대수다)에 따라 집을 지어야 합니다. 대수인 6에 6을 곱하면 36구가 되는데 이것이 천지의 대수에 부응합니다. 제 말대로 하시면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미래의 임금)을 낳게 될 것이오니 이름을 부디 왕건이라 하십시오.”(고려사 세계 7) 도선은 태조 왕건의 운세를 나무로 보고, 그 아버지는 나무를 살리는 물이라 여겼다. 마찬가지로 송악 명당이 있게 한 뿌리는 백두산인데 북쪽의 임방에 위치하므로, 오행으로 풀이해 물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비해 송악 명당을 낳은 금강산과 태백산 등 백두대간은 송악에서 바라보면 동쪽에 위치해 나무로 간주됐다. 따지고 보면 송악 역시 그 나무의 꽃 또는 열매에 해당해 근본적으로는 나무로 파악됐다. 도선의 머릿속에서 송악과 고려 태조 왕건은 나무로 동일시되었다. 나무인 왕건이 태어나서 자랄 집은 당연히 물이라야 하므로 대수 36구가 길하다는 결론이 나왔으며, 송악에는 푸른 소나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 도선의 처방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의 운세는 늘 나무로 파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壬午와 癸未가 楊柳木이 되는 이유 오행상생설로 보면 나무를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닌 물(水), 죽이는 것은 불(火)이다. 따라서 나무인 한국에게 물의 해는 길하고 불의 해는 흉하다는 식의 운세 풀이가 나오게 된다. 흉한 해 즉, 불(火)로 정의되는 해는 말(午)의 해요, 그 뒤를 이은 양(未)의 해도 좋지 않은 것으로 점쳐진다. 그런데 한국의 운세는 말과 양 등 십이간지(十二干支)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육십갑자를 구성하는 열 개의 천간(天干)이 또 있어서다. 나무에 해로운 불은 병정(丙丁) 둘이며, 이로운 물이 또 두 가지이다. 임(壬)과 계(癸)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임과 계년이라면 나라 운세가 보통은 아주 좋다. 하지만 십이간지인 말과 양의 해가 나무와 상극인 관계로 임오년과 갑신년의 운세는 상생과 상극이 맞부딪쳐 어정쩡해진다. 비유하자면 어린 나무(柔木)다. 역술가들은 임오년과 계미년의 국운을 흔히 양류목(버드나무) 운세라 부른다.‘경주이선생’도 예외가 아니어서 버드나무 운세라는 말로 두 해의 운세풀이를 시작한다. 하고 많은 나무 가운데서 버드나무란 또 무엇일까? 옛 사람들은 버드나무라면 으레 생명력이 끈질기다고 생각했다. 조선의 명유(名儒) 하서 김인후는 귀양 가는 친구에게 뜰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기도 했는데, 버드나무가 정든 임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버드나무는 가늘고 긴 가지가 특별하다. 축 늘어진 모양은 마치 미인이 긴 머리를 풀어헤친 듯도 하려니와 하늘하늘한 여인의 허리를 연상케 한다. 낙락장송의 꼿꼿한 기개는 아닐지라도 유려함과 생명의 활기가 느껴지는 나무다. 버드나무는 봄이 오면 가장 먼저 물이 올라 푸르름을 선사하기도 한다. 부드러움 속에 강인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양류목’ 운세는 다소 불리한 가운데도 끝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날 가능성을 가진다. 말과 양의 해라면 나무가 죽을 수이고, 특히 큰나무가 해를 많이 입을 운이다. 다행히 임과 계년이라서 다 죽지는 않는다. 산불 때 그렇듯 큰 나무는 힘없이 쓰러지되 작은 나무는 도리어 살아남을 운세다. ●임오군란과 양류목운 다시 맨 앞에서 인용한 ‘경주이선생’의 첫 대목을 상기해보자. 고종19년(1882) 임오년의 정세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참 많다. 첫째, 군대의 소요가 일어난다는 예언이 있는데 그 해에는 실제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정국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가 개화파와 대립하는 형세였다. 개화파는 사실상 국왕 고종과 명성황후가 손수 이끌다시피 했다. 왕이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개화파 관료가 점차 조정에 많이 임용되었다. 고종18년(1881)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까지 창설되었는데, 소외감을 느낀 구식 군인들은 그것을 왜별기(倭別技)라 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과거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절만 해도 구식 군인들에 대한 대우는 좋았다. 하지만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사정이 많이 달라져 그들은 봉급이 13개월치나 밀리는 등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다. 재정을 담당하는 선혜청 당상이자 병조판서였던 민겸호야말로 이런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 구식 군인들의 믿음이었다. 마침 그해 6월, 전라도에서 올라온 세미(稅米)가 서울에 도착하자 구식 군인들에게도 1개월분의 급료가 지불되었다. 그런데 선혜청 담당 관리들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이 지급되자 구식 군인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평소 불신하던 민겸호의 집에 난입했고, 장차 민씨 일파의 보복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반대파인 대원군에게 의지했다. 대원군은 몰래 심복을 보내 구식 군인들을 통솔했고 이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자신의 재집권을 꾀했다. 그 바람에 구식 군인들의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군인들은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한 뒤 명성황후의 측근들과 개화파 주요 관리들의 집을 차례로 습격했다. 대원군의 밀명에 의해 그들은 친왕적이고 개화정책에 우호적이던 대신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했다.“부자가 먼저 목숨을 잃는다.”는 ‘경주이선생’의 예언처럼 부와 권세를 부리던 사람들이 상해를 입었다. 개화파의 군사적 기반인 별기군 병영도 무사하지 못했다. 구식 군인들은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를 살해했고, 일본 대사관에도 침입해 13명의 일본인 목숨을 빼앗았다. 둘째, 예언서 ‘경주이선생’에는 여 군주가 도망친다고 돼 있는데, 실제로 실권을 행사하던 명성황후가 충주로 도피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구식 군인들은 돈화문을 통해 창덕궁 궐내로 난입했다. 그들은 개화파의 우두머리라며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수구파의 우두머리인 대원군의 조종을 받은 것이었다. 목숨이 위급해진 왕후는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을 얻어 충주 장호원에 있던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셋째, 국태공이 납치된다는 예언도 적중해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되었다. 국왕인 고종은 임오군란으로 벌어진 정치적 난맥상을 진정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일단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대원군은 왕의 의지에 상반된 조치를 연달아 취했다. 대원군은 그동안 실시돼온 개화정책을 거의 모두 파기했다. 별기군을 혁파하고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복구하였으며, 신식 정부기관인 통리기무아문을 없애고 3군부를 설치했다. 대원군은 최대의 정적인 명성황후의 실종을 서둘러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상을 치렀다. 개화파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자 개화파는 톈진(天津)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청나라에 군사적 후원을 부탁했다. 청나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오장경(吳長慶)이 이끈 청나라 군대 4500명이 서울로 급파됐다. 그는 군대를 앞세워 한국의 내정에 직·간접으로 간섭하였고, 자신을 찾아온 대원군을 불법 체포해 톈진으로 압송했다. 한국 내에서 청나라의 입지를 강화시킬 방안에서였다. 이로써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하던 ‘호랑이’ 대원군은 권좌에서 영원히 축출되었다. 예언대로 되고 만 것이다. 이밖에도 ‘양류목운’의 예언은 적중했다.“손님이 주인행세를 할 것”이라 했는데 과연 오장경이 지휘하는 청나라 군대가 멋대로 주인행세를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한마디로, 임오년은 ‘경주이선생’이 말하듯 숱한 사건이 터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나라가 아주 망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충주로 피난한 명성황후도 무사했고, 불시에 청나라로 붙잡혀간 대원군도 다시 귀환할 수 있게 된다. ●갑신정변까지 ‘경주이선생’에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경주이선생’에는 고종21년(1884)에 일어난 갑신정변도 정확히 예측돼 있다.“정중수운(井中水運)은 자미(북두성) 자리에 저녁 무지개가 뜬 형국이다. 그러다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리라.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 죽음이 참혹하구나. 남북 군사들이 부딪쳐 화가 점차 심한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이다.”자미성이라면 천자 또는 임금을 가리킨다. 그 자리에 무지개가 뜨는 것은 무척 흉하다. 무지개는 하늘에 보이는 벌레로 해석되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난다는 예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고 한 것도 불길하며, 변란의 주체가 동쪽으로 달아난다고 한 것도 심상치 않다. 더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남과 북의 세력이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대립한다고도 했으므로 후환이 두렵다. 이 예언대로 한 해가 흘러갔다 해도 지나침이 없다.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파 청년 인사들이 그 해 10월17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들의 정변은 일단 성공했으나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탓에 정권이 오래 가지 못했다. 겨우 사흘밖에 집권하지 못해 ‘삼일천하’란 다소 비웃는 듯한 표현까지 등장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한국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위로부터의 근대적인 개혁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김옥균 등 정변의 주체세력은 그들 스스로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양반 출신이었지만, 오랜 사회적 악습으로 남아 있던 문벌 타파를 실천하고자 했다. 개화당 인사들은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하자며 평등권을 부르짖었다. 아쉽게도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후유증도 심각했다. 서울에 와 있던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의 무력 공세에 밀린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후일을 기약하며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 이후 한국은 일본과 청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다. 청·일 양국은 그 이듬해인 1885년 4월 18일, 톈진조약을 체결해 장차 한국에서 중대 사건이 발생할 경우 두 나라가 동시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약속하기에 이른다. 과연 갑신정변이 일어 난지 정확히 10년 뒤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청·일 두 나라는 톈진조약에 의거해 한국에 동시 출병했고, 마침내 한국을 독점하기 위해 청·일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써 일본은 장차 한국을 병합할 기초를 다진다. 불행의 씨앗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맞는 ‘경주이선생’ 갑신정변을 분기점으로 잘 맞아 들어가던 ‘경주이선생’도 틀리기 시작해, 고종 23년(1886) 이후의 예언은 완전히 빗나간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는 무척 간단하다. 맞고 틀리고는 ‘경주이선생’이 저술된 시기와 직접 관계가 있다. 나는 이 예언서가 1884년 갑신정변이 끝나자마자 쓰였다고 본다. 이미 다 알고 쓴 것이라서 1880년대 초반의 일은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는다.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1886년 이후를 무슨 수로 맞히겠는가? 맞는 예언서는 이미 예언서가 아니다. 그것은 술사를 비롯한 민중의 역사적 인식이 기록된 일종의 역사서일 뿐이다. 그 때 있었던 모든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주된 관심사만을 한데 주워 담은 역사 말이다. 예언은 사실 미래를 대상으로 한 것인데, 뜻밖에도 거기에 민중의 역사적 기억이 집적돼 있다.‘경주이선생’에는 특히 민중이 바라본 정치와 경제 이야기가 많다.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도 우리는 밥상머리에서 권력과 돈의 향방을 따진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예언서 ‘정감록’을 한 채의 기와집에 비유하면, 정면 기둥은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아닐까 한다. 얼핏 눈에 잘 띄진 않으나 집의 뒷면에도 기둥은 있는 법이다. 천문과 역법이 그에 해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풍수와 미륵에 대해선 그동안 제법 자주 이야기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천문과 역법에 관해선 따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니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천문사상이 ‘정감록’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았으면 한다.‘정감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수로 들어간 뒤 다시 자미(紫微)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았다가, 두성(斗星)을 거쳐 남두(南斗)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면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가 일시에 멸망하리라.”(감결) 이것은 정감의 예언이다. 그는 여러 별자리에 괴변이 일어나면 중국(대중화)과 한국(소중화)이 동시에 망한다고 했다. 요모조모 ‘정감록’을 잘 뒤져보면 비슷한 내용이 자꾸 눈에 띈다.“진성(軫星) 머리에서 혜성이 나와 몇 달 동안 없어지지 않네. 그 뒤 별들이 남극(南極)에서 싸우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네. 하늘 길이 한번 트이니 하늘 북이 두 번 울리네.”(삼도봉시) 조선건국의 주역 정도전이 지었다는 예언시의 일절이다. 실제로는 위작이 분명한데 이 시에 등장하는 천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더 새겨봐야겠다. 비록 그렇다 해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경주이선생가장결) 역시 천문을 살펴 자미성에 이상한 징후가 일어날 경우 나라에 변괴가 있다고 예언하였다.‘정감록’에서 이와 엇비슷한 예언을 찾아내 일일이 언급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과 혜성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은 28수(宿)를 중시했다. 이것은 황도(皇道)에 가까운 별자리들이었다. 황도란 지구에서 태양의 운행괘도를 일년간 연속적으로 관찰할 때 하늘에 그려지는 하나의 원이다.28수는 황도의 동서남북에 각기 7개씩 배치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관심을 표했던 별자리는 기성(箕星·궁수좌), 벽성(壁星·페가수스좌), 익성(翼星·바다뱀좌) 그리고 진성(軫星·까마귀좌)의 4개였다. 특히 진성에 대한 관심은 아주 유별났다. 이 별자리를 이른바 “청구칠성”이라 하여 청구 또는 한반도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정감록’에서도 진성의 머리에서 혜성이 나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예언한 것은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뿌리를 캐 보면 진성은 신라의 국운을 담당하는 별자리였다. 헌덕왕 7년(815)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그 해 서쪽 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러자 도적 떼가 연달아 일어나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변고를 예언케 하는 천문 현상이 있었고 문제의 별이 등장한다.“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타나 서쪽을 향해 뻗어 갔다. 그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두 치나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별은 혜성이다. 만일 아니라면 별의 길이와 너비가 그처럼 컸을 턱이 없다. 혜성이 서쪽으로 움직여 가자 천문을 담당하는 신라의 관리들은 반란의 진원지가 서쪽임을 알게 되었다. 하필 혜성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두 별자리가 28수 가운데 서로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익성과 진성은 이른바 남방주작(南方朱雀)에 해당한다. 황도의 남쪽에 있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방금 말한 두 개의 별자리 말고도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의 다섯 별자리가 더 있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진성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고구려의 운명은 서쪽 하늘의 별들이 맡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측의 역사기록에 나와 있다.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4월, 필(畢)과 묘(昴) 사이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다. 그러자 허경종(許敬宗)이 보고하기를,“혜성이 거기 나타난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입니다.”(‘삼국사기’, 권 22)라고 하여 당 태종을 기쁘게 하였다. 허경종은 천문에 능한 당나라 관리였다. 그 역시 ‘정감록’이나 ‘삼국사기’와 똑같은 방식을 써서 고구려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했다. 필성과 묘성은 모두 황도 서쪽의 별자리들이다. 묘성(황소자리)은 누(婁) 및 위(胃)와 더불어 호랑이 새끼 3마리로 여겨졌고, 필성(오리온자리)은 호랑이의 입으로 이해되었다.‘정감록’을 전파한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되도록이면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그런 그들도 고구려의 별인 백호를 저버리고 주작(진성)을 국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통일신라 이후 천년 동안 내리 지속돼 온 전통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미, 남북두성, 그리고 남극성에 숨은 뜻 변란을 알리는 혜성은 ‘정감록’에 객성(客星) 또는 요성(妖星)으로 나온다. 혜성은 때로 자미를 침범하거나 북두칠성, 남두육성도 쳐들어간다. 심지어 남극성을 유린하기까지도 한다. 이들 별자리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자미는 이른바 북쪽 하늘을 셋으로 쪼갰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태미(太微), 천시(賤視) 및 자미를 삼원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자미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위치한 별로 천자 또는 임금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일찌감치 백제 기루왕 9년(85) 4월에 이미 객성이 자미를 침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라는 예언이었다.‘정감록’은 18세기에야 등장했다고 할 때, 최소한 그보다 1600년이나 앞서 반역에 관한 천문예언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밤하늘을 수놓은 숱한 별자리 가운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아는 것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그 반대편인 남쪽 하늘엔 남두육성(南斗六星·궁수좌)이 있다. 이 별들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7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로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섬겨왔다. 그에 비해 6성은 삶의 세계를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6성은 서양식 명칭으로는 궁수좌인데,28수의 하나인 기성과 중복되기도 한다.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별자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그랬다. 지금까지 모두 22개나 되는 고분에서 다양한 별자리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19개의 고분에 등장하고 있으며, 남두육성 역시 최소한 10군데서 확인되었다.6성이 발견된 고분벽화에는 7성이 어김없이 짝을 이뤄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두 별자리를 함께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요컨대, 생과 사를 주관하는 별자리가 6성과 7성이었다. 그런데 혜성이 그 별들을 모두 침입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전란,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조짐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정감록’은 한국 고대의 천문 전통에서 이런 예언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기성(箕星)이 희어질 무렵 피가 흘러 절구공이가 떠내려가고, 천리가 한 책상이 되니 갑옷에 두 뿔이 나는구나.”(정북창비결)라는 구절이 있다. 남두육성으로 볼 수도 있는 기성은 태풍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풍해를 막아준다며 받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남부지방을 강타한 허리케인도 기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가 강물을 이뤄 민가의 절구공이가 떠내려갈 지경이라면 단순히 자연재해로 간주하기 어렵다. 전란의 피해로 봐야 옳을 것도 같다. 인용문의 뒷부분에 갑옷이 등장한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흉조라는 점에선 남극성(노인성이라고도 함)을 당해낼 별이 없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도 남극성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경순왕 8년(934) 9월 그 별이 나타나자 왕은 고심했고, 이듬해 10월 마침내 항복문서를 바쳤다.(‘삼국사기’ 권 12) 때로 남극성은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남극성이 빛을 발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감록’에서 보듯 혜성이 남극성을 침범하는 경우라면 기성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예언으로 풀이된다. 혜성뿐만 아니라 무지개가 별을 꿰뚫을 경우도 흉조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해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국왕이 바뀔 징조로 여겨졌다. 예컨대 고려 현종 5년(1013)에도 “흰 무지개가 관일(貫日)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정감록’에도 유사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오성의 변괴 이밖에도 ‘정감록’엔 오성 즉,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및 토성의 변화에 대한 언급이 제법 많다. 물론 국가의 운명이 그와 직결된다는 전제 아래 끔찍한 예언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보면 오성은 사실 고대로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고구려 차대왕 4년(149) 5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오성이 동쪽하늘에 모였다. 목성(세성 歲星), 화성(형혹 熒惑), 금성(태백 太白), 수성(진성 辰星) 및 토성(진성 鎭星)이 한자리에 늘어선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실상 흉조였다. 그러나 담당관리인 일자(日者)는 왕이 화낼까 걱정돼 거짓말로 둘러댔다.“이는 임금님의 덕이요, 나라의 복을 뜻합니다.” 왕은 그 말에 만족하였다.(‘삼국사기’ 권 15) 고구려는 일찍부터 천문이 발달한 나라였다. 고분벽화마다 별자리를 그려놓을 정도였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국초부터 조정에 천문을 담당하는 특수 직책이 설치돼, 별을 보고 국운을 점치는 관리가 존재했다. 오성에 관한 예화에서 보듯 가끔은 담당관리가 국왕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예언이라면 고려나 조선시대처럼 풍수가 아니라 천문이 근간을 이뤘다. 그런데 오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길조로 해석될 때도 있었다. 고려 인종 10년(1132) 11월 동짓날, 오성은 물론 해와 달까지, 그러니까 칠요(七曜)가 정북방향에 모여들었다. 인종은 이 같은 길조가 예언서에 이미 예고돼 있다며, 국정을 일신할 중요한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려사’ 권 16) 칠요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신라 때부터도 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은 칠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을 뜻하는 점이 있었다 한다. 영웅이 될 기상을 가진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삼국유사’) 본래 칠요란 개념은 서양 고대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의 신들이 인간세상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성신(星辰) 신앙이라고 할 만하다. 별의 신들은 전쟁, 흉년, 지진, 가뭄과 홍수를 마음대로 하며, 모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어졌다. 특히 행성인 오성과 해와 달을 합한 칠요는 더욱 중요시 됐다. 칠요의 신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사를 맡아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칠요신앙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에도 전파된 것 같다. 김유신이 태어난 7세기에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국 고대에 칠요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오성의 신들이 열렬한 신앙대상이 돼 있었다는 점은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봉의 발풍사란 사찰에는 석가여래상 앞쪽에 토성(塡星 또는 鎭星)의 신을 새긴 조각이 봉안돼 있었다 한다.(‘고려사’ 권 1) 궁예 왕은 토성의 신을 예언서 ‘고경참’의 저자로 믿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오성과 칠요의 신은 한국 민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영은 ‘정감록’에 여전히 남아 있다.“계축년에 세성(歲星·목성)이 바다에 잠기니 왕자가 섬으로 도망친다.”(오백론사)라고 했다. 목성은 천문학상 매우 중요한 별이다. 그 공전궤도를 12등분해 목성이 처한 위치에 따라 한 해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 정도다. 이를 세성기년법(歲星紀年法)이라 하는데, 목성에 일어난 자그만 변화도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징조로 이해됐다. 화성의 변화도 중요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 때 달이 형혹성(熒惑星·화성)을 침범하자 일관(日官)은 “귀인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풀이하였다. 최근 발견된 ‘송하비결’에도 화성에 관한 예언이 실려 있다.“형혹성이 기성을 범하리니 북쪽 문에서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런 용이 여의주를 얻으리라.” 혹자는 화성이 목성을 침범했으므로 한반도엔 전쟁에 버금갈 만한 큰 변고가 일어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화성은 화란 또는 전쟁의 징후를 알려주는 별이고, 목성은 가득차거나 이지러지거나 또는 변화가 멈춘 현상을 보여주는 별이라서 그렇다 한다. 목성은 나라의 명운을 예고하기에 적합한 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성을 화성이 쳐들어갔다는 것은 나라에 병란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정감록’엔 금성과 수성에 관계되는 흉한 예언도 많은 편이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역사에는 오성의 길조가 꽤 많이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복성이란 존재 ‘정감록’에도 천문에 관한 예언이 길조로 나타난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산의 동쪽과 삼남(三南)에 복성(福星)이 두루 비친다.”(서계이선생가장결)라고 한 대목이다. 복성은 녹성(祿星) 및 수성(壽星)과 더불어 삼성이라 일컬어진다. 보통은 북두칠성의 왕별인 무곡성을 복성으로 믿고 있다. 조선후기의 유명한 고소설인 ‘토끼전’에선 복덕성(福德星)으로 간주해 목성으로 본다. 복성에 관해 한 가지 재밌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변도탄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천문에 밝았다.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일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천기를 보았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역력했다. 그는 국난에 대비해야 된다고 상소했으나, 인심을 흉하게 만든다며 도리어 관직만 빼앗겼다. 변 선비는 낙향을 결심했는데 어느 날 밤 복성(福星)이 남쪽으로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소 저장했던 양식을 소달구지에 싣고 복성의 빛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한 골짜기에 도착했다. 복성의 인도를 따른 것이다. 과연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침입해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변 선비가 터를 잡은 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미리 앞을 내다 본 변 선비의 뛰어난 지혜와 충성심에 감탄해 상을 내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복성(福星)마을을 이루게 됐다 한다. 복성을 따라 피난처를 구했다는 전설이나 복성을 보고 길지를 찾을 수 있다 한 ‘정감록’ 예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들 역시 별빛의 인도로 먼 길을 걸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할 수 있었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하늘에선 더 이상 별빛을 보기 어렵다. 별을 봤댔자 어느 별이 어느 별인지 구별도 못할 만큼 현대인들은 천문에서 멀어졌다. 별은 더 이상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스와질 13번째 왕비 17살 여고생 간택

    스와질랜드 국왕 음스와티 3세(37)가 17살난 고등학교 여학생을 13번째 부인으로 선택했다고 AFP 통신이 25일 보도했다. 음스와티 국왕은 지난달 4000여명의 처녀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춤을 춘 ‘갈대 춤 축제’에서 핀딜레 은캄불레(17)를 신부로 뽑았다.은캄불레는 스와질랜드 전통에 따라 앞으로 국왕의 자식을 임신하면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아프리카 남부에 위치한 인구 120만명의 작은 국가인 스와질랜드는 대부분의 국민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으며, 식량부족과 높은 에이즈 감염률에 시달리고 있다. 모두 27명의 자녀를 둔 음스와티 국왕은 파티와 부인들의 선물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 호화로운 생활로 끊임없는 비판을 받고 있다.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7) ‘고구려비기’ 에서 만난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7) ‘고구려비기’ 에서 만난 ‘정감록’

    ‘정감록’의 일부인 ‘감결’에는 역대 왕조의 수명을 논한 대목이 있다.“곤륜산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오백 년 도읍할 땅이나, 요승(妖僧)과 궁녀가 난을 꾸미는 바람에 지기(地氣)가 쇠하고 천운이 막혀 운은 다시 한양으로 옮길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읍은 평양 천년, 개성(송악) 오백년을 거쳐 한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정감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구절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아스러운 점이 있다. 한양은 조선의 수도, 개성은 고려 때 도읍지였다. 고려 이전의 도읍이라면 당연히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가 논의돼야 한다. 그러나 ‘감결’엔 경주가 빠져 있다. 그 대신 평양이 맨 먼저 언급돼 있다. 그것도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진 곤륜산의 정기가 백두산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 지기가 더욱 왕성해진 형상이라 했다. ●술사들에겐 고구려가 중요했다 범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전국에 ‘감결’따위의 ‘정감록’을 유행시킨 술사들은 왜 평양을 중시했는가? 술사들의 역사인식이 관계되는 부분이다. 나는 위에 인용한 몇 줄의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조선 후기 술사들의 정신적 계보를 추적해보려 한다. 그들에겐 고구려가 신라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한나라 이후 역대 중국 왕조와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의 기상을 그리워했다. 술사들은 당나라라고 하는 외세를 불러들여 갖은 술수와 모략으로 고구려를 거꾸러뜨린 신라가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정감록’을 퍼뜨린 술사들이 대체로 함경도, 평안도 및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고구려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졌던 이유를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더욱이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이기도 했다. 단군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나라의 터를 잡았다는 곳, 동방에 중국의 유교문명을 도입했다는 기자가 뒤를 이었다는 곳도 역시 평양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자가 평양에서 실시했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토지를 아홉으로 쪼개 가운데 한 개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공동경작하고 나머지는 농부들이 공평하게 나눠 경작한다는 제도)의 유적이 발견되었단 말도 있었다. 술사들은 그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같은 고대국가라 해도 한강 이남에 세워진 삼한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서 갈라져 나온 백제와 신라와 가야의 역사도 상관없었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였지만 신라는 그들에게 무의미한 나라였다. 술사들이 보기에 신라란 국가는 그저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를 이어주는 단순한 이음매에 불과했다. 역사상 존재 의미가 있는 나라는 고조선, 고구려, 고려 및 조선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선 조선도 불필요한 나라였다. 조선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일 때만 논의 대상에 가까스로 포함되었다. ●미래는 다시 개성의 시대 ‘감결’은 조선이 망하고 들어설 미래의 왕조도 차례로 언급하였다.“금강산으로 옮겨진 내맥(來脈)의 운이 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씨가 팔백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 후 원맥(元脈)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가 천년 도읍할 땅이로다. 전주는 범씨가 육백년 도읍할 땅이요, 송악으로 말하면 왕씨가 다시 일어나는 땅인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정감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강 다 아는 이야기다. 일단 왕기가 한양으로 옮은 다음 꽤 오랫동안 남부지방이 한국역사의 주무대가 된다는 예언이다. 충청도(계룡산), 경상도(가야산) 그리고 전라도(전주)가 한 번씩 돌아가며 권력을 쥐게 돼 있다고 했다. 집권기간은 경상도가 천 년으로 최장기간이고, 다음은 충청도(800년), 전라도(600년) 순이라 했다. 집권기간에 차이는 있으나 하삼도(下三道)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집권자가 배출된다는 말이 흥미롭다. 광복 후 역대 정권의 위세를 내 나름으로 어림짐작해 보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순이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경상도에 비해 전라도 출신들의 정치적 비중은 잘해야 6할이 될까 말까 하다. 이런 해석을 근거로 ‘정감록’ 예언이 적중했다고 환호성을 지를 사람도 있겠지만, 한낱 우연이라고 생각해도 그만이다. ‘정감록’에 담긴 놀라운 이야기는 미래에 관한 예언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또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떠오른다고 했다. 지금 한창 개발 중인 개성공단이며 개성관광을 지렛대 삼아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고, 통일한국의 수도는 서울과 평양의 중간 지점인 개성으로 낙착된다는 예언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가 사실상 한국사의 정통을 잇는다고 조선 후기의 술사들이 믿었다는 점이다. 서북 출신이었던 그들은 궁극적으로 고구려의 부활을 바랐다. ●고구려의 수명은 구백년이라는 예언 위에서 보았듯,‘정감록’은 어느 왕조의 수명은 몇 백 년이라는 식으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리 역사상 이런 방식의 예언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新唐書)’를 보았더니 고구려에 그런 예언이 존재했다 한다. 그렇다면 ‘정감록’은 고구려의 예언서를 본떠 왕조의 수명을 몇 백 년이라고 논했다는 이야긴가? 고구려가 망하던 해, 고구려 보장왕 27년(688)으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당나라 군대는 한창 고구려와 전쟁 중이었다. 당나라의 고종 황제는 시어사(侍御史)인 가언충(賈言忠)을 전쟁터에 보내 전황을 점검하게 했다. 가언충은 이 전쟁이 당나라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며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란 예언서를 인용해 당 고종을 안심시켰다. 예언서에 따르면, 고구려는 건국된 지 “구백 년이 못 되어 80대장이 있어 멸망하게 된다.”고 했다(‘중국정사조선전’,‘신당서’). 가언충이 인용한 예언의 내용이 무슨 뜻인가? 다행히도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사정이 좀더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그 해 2월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부여성(農安 근처)을 함락시켰고, 전세는 고구려에 무척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다. 가언충은 자국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당 고종 앞에서 문제의 예언을 이렇게 풀이했다고 전한다. “고구려는 한나라 때 건국됐으므로, 이제 약 구백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당나라의 원정군 사령관인 이적 장군의 나이가 바로 80입니다. 지금 고구려는 흉년이 연달아 드는 바람에 백성들이 서로 물건을 약탈해 팔아먹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도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더지가 성문에 구멍을 뚫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인심은 무척 사납습니다.”(‘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비기’는 시어사 가언충이 조작했을 것 ‘신당서’와 ‘삼국사기’를 종합해 보면,7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한 ‘고구려비기’란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저술됐는지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 그러나 이 예언서의 저작에 관해 검토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다. 우선 고구려의 종말을 논의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지배세력이 조작에 직접 개입했다고 간주하기 어렵다. 예언서의 내용이 당나라에 유리하다는 점은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게다가 이 예언서는 최초로 중국의 역사서에 언급되었다. 더욱이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방식도 자세히 따져보면 한국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백제의 멸망에 관한 6세기 후반의 예언기록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고구려비기’는 당나라가 조작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들은 적국인 고구려 백성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예언서를 날조해 고구려에 널리 퍼뜨렸다고 짐작된다. 알다시피 당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왕조에 고구려는 힘겨운 상대였다. 무엇인가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설사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해도 승산이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막강한 적수였다. 이런 관계로 당나라의 입장에선 요샛말로 대민(對民) 심리전술까지 동원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비기’가 등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비기에 관해 당 고종에게 자세히 보고한 시어사 가언충은 ‘고구려비기’의 조작에 가장 깊숙이 간여했다는 가정도 성립한다. 본래 시어사란 벼슬은 글을 다루는 데 능숙한 문인에게 주어졌다. 당 고종이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격렬한 싸움터에 문사인 가언충을 파견한 것은, 한낱 그날그날의 전과를 보고하란 뜻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워낙 심리전에 능통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피어린 전쟁터에서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최대한 북돋우고, 고구려의 민심이 이반될 계기를 마련하란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닐까? ‘고구려비기’를 해석할 때 가언충이 장차 고구려를 멸망시킬 ‘80대장’을 당나라 군대의 수뇌인 이적으로 해석한 것이 눈길을 끈다. 하필 이적이 고령이란 점에 주목한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보통은 그와 같이 늙은 장수는 원거리 출정에 동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나라는 상례를 뒤엎고 수많은 젊은 장수를 물리치고 자력으로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노인을 머나먼 전쟁터로 보냈다. 적임자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80노인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사기가 저하될 염려가 컸다. 당 고종은 이점을 가장 염려했고, 그래서 평소 머리 좋기로 소문난 가언충을 전쟁터로 함께 보낸 것이 아닐까? 가언충은 당나라 군대의 약점을 강점으로 둔갑시켜야 될 사명을 띠었을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기상천외한 방법을 발견해냈다. 이적과 같은 고령의 대장이 앞장선다면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도 이젠 끝장나고 만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고구려의 민심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668년 고구려는 거듭된 내우외환으로 지쳐 있었다. 이를 틈타 당나라는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자신만만해진 가언충은 서둘러 조정에 복귀한다. 그는 전황을 궁금해하는 고종에게 의기양양해하며 자신과 당나라 군대의 눈부신 전과를 알린다. 이것은 물론 논리적인 추측에 토대를 둔 일개 시나리오다. 비록 이런 짐작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고구려비기’는 당나라 측이 날조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역사적 사실은 그렇건만, 후대 조선의 술사들은 ‘고구려비기’에 나타난 예언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중심축으로 생각한 그들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면 무조건 따랐다. 엄밀한 의미로, 평양 천년, 송악 오백년 하는 식의 ‘정감록’ 예언은 술사들의 착시가 빚어낸 현상이었다. ●그럼 전형적인 한국 고대의 예언방식은? 한국 고대에는 왕조의 멸망을 예언할 때 ‘고구려비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일례로, 신라의 명유(名儒) 최치원은 고려 태조가 건국할 무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한다.“계림은 누런 이파리요, 곡령은 푸른 소나무입니다(鷄林黃葉 鵠嶺靑松).” 계림은 신라의 수도 경주, 곡령은 고려왕조의 발상지 개성을 가리킨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신라는 시든 이파리와 같아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으나, 고려는 푸른 소나무라 장래가 무궁하다는 예언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왕건이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뒷날 왕건의 손자로 왕위에 오른 고려 현종은 최치원이 예언을 통해 태조의 사업을 은밀하게 도왔다며 칭송했다. 왕은 그에게 내사령(內史令)이란 높은 벼슬을 추증하고 문창후란 시호도 내려주었다.(‘삼국사기’ 권 46)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고, 관직에 나아가 출세가도를 달렸다.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런 최치원이었지만 고국에 돌아와서는 골품제(骨品制·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희생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불우한 재사는 끝내 가야산으로 숨어 들어가 고목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있다. 최치원은 과연 고려의 융성을 예언하는 편지를 왕건에게 보냈을까? 문자 그대로 믿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런 편지를 썼다면 그는 신라를 등진 셈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지성인 최치원에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그가 만일 신생국가인 고려를 추종할 뜻이 있었다면 왜 가야산에 머물렀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치원이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예언이 깃든 편지를 왕건에게 보낸 까닭에 신라 국왕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결국 신라왕실의 박해를 피해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숨어 지내다 거기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최치원의 해인사 은거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예언에서 찾으려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다. 그렇게 숨어 죽기까지 할 바에야 왕건을 쫓아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치원이 문제의 예언시를 썼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누런 잎과 푸른 소나무를 대조해 신라와 고려왕조의 엇갈린 미래 운명을 점쳤다는 역사적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예언방식은 “고구려 구백년”이라고 하는 ‘고구려비기’식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백제의 멸망을 알리는 예언도 비유법 알고 보면 백제가 멸망할 때도 비슷한 방식의 예언이 있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6월의 일이었다.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며 큰 소리로 외치더니 땅속 깊이 들어가 버렸다. 왕은 몹시 놀라 그 자리를 파헤치라고 명령하였다. 삼척가량 땅을 팠을 때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그 거북이 등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백제는 둥근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왕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무자(巫者)에게 물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그런데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앞으로 점점 찰 것입니다.” 의자왕은 화가 치밀어 무자를 죽이고 말았다.(‘삼국사기’, 권 28) 귀신이 나왔다든가, 거북의 등에 예언이 적혀 있었다는 말은 사실로 간주하기 어렵다. 누군가 조작한 이야기로 짐작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백제를 둥근달에 비유하고 신라를 초승달로 보아 양국의 운명을 대비시킨 점은 앞에서 살핀 신라와 고려의 비유와 동일하다. 대상이 되는 나라, 비교를 위한 사물이 다를 뿐 예언의 방식은 완전히 일치한다. 한국 고대에 존재한 국운에 관한 예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고구려비기’라든가 후대의 ‘정감록’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한마디로,‘고구려비기’는 서로 대비되는 사물을 비교함으로써 국운을 예언하는 한국 고대의 오랜 전통과 결별을 선언한 셈이었다.‘정감록’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의 예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만,‘고구려비기’에서 비롯된 예언의 새 전통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술사들의 일시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역시 큰 의미가 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한가위 ‘방콕’ 아서요

    한가위 ‘방콕’ 아서요

    민족이 대이동하는 한가위라지만 서울 토박이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올 추석은 연휴기간이 짧아 고향에서 부모님이 올라오는 집들도 상당수다. 서울시내 고궁 박물관 등에서는 ‘나홀로 서울족’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호젓한 고궁 나들이 연휴기간 한복을 입은 관람객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에 입장료를 내지않고 들어갈 수 있다. 고궁에서는 윷놀이, 제기차기, 투호, 널뛰기, 팽이치기 등의 ‘전통 놀이마당’이 펼쳐진다. 고궁관리사무소 관계자는 “추석 연휴 기간에는 방문객이 늘어날 수 있으니 일찍 방문하면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고궁의 호젓함을 만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보존이 잘된 창덕궁은 개별관람은 할 수 없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매시간 15분·35분(한국어 설명)마다 1시간20분 동안 둘러볼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왕실 가족들의 휴식공간일 뿐 아니라 왕·왕자들의 학문연마소로 활용됐던 궁중문화의 산실이다. 산자락 아래 놓인 정자, 연못, 수목 등에서 조선시대의 향취를 맡을 수 있다. 단, 왕과 신하들이 개울에 술을 띄워놓고 마셨다는 옥류천 일대는 추석기간 개방하지 않는다.(02)762-0648.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에서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관으로 ‘조선시대 수문장 교대의식 및 광화문 개문의식’을 벌인다. 연휴기간 오전 10시와 오후 1,3시에 각각 열린다. 배경은 수문장 제도가 정비되는 15세기 조선전기다. 출연군사들의 갑옷을 비롯해 환도, 등장, 방패 등 무기류와 단령, 철릭, 액주름, 방령 등 조선전기 옛 복식과 소품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 오전 11시30분·오후 1시30분에는 국왕행차인 ‘왕가의 산책’도 열린다. 왕이 군사·신하들과 함께 침전인 강녕전에서 편전인 사정전까지 행차에서 사정전에서 국정을 보고 받는 모습이다. 행사 중간중간 이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된다.(02)732-1931. ●조선시대 영의정 되어볼까 국립민속박물관은 연휴기간 내내 방문객이 조각칼로 나무를 다듬어 솟대를 깎고 손수건에 한가위 관련 민화를 그리는 등의 전통체험행사를 연다. 특히 승경도놀이는 조선시대 서당에 다니던 아이들이 넓은 종이에 적힌 벼슬 이름, 즉 최하관등인 참봉에서 최고관등인 영의정까지 올라가보는 놀이다. 어린이들이 놀이를 하면서 조선시대의 관직체계도 배워볼 수 있다. 17일 낮 12시∼오후 2시 가을 햇곡식을 거둬 만든 술·떡으로 상을 차린 ‘추석맞이 천신굿’이 열린다. 박수무당의 신나는 굿거리를 통해 소원을 기원할 수 있는 기회다.18일에는 오후 2∼4시 조선 정조시대에 완성된 병장무술인 ‘한국전통무예 18기’ ‘풍물마당을,19일에는 황해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오던 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인 강령탈춤과 ‘강원도 아라리’ 등의 퓨전국악공연(오후 3∼5시)을 볼 수 있다.19일 오전 10시∼오후 3시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전통공예품 만들기, 추석음식 시식, 전통민요 배우기, 전통놀이 체험 등을 경험할 수 있는 민속교실도 열린다.(02)3704-3114. ●달밤에 국악, 어깨춤 더덩실 국립국악원은 18일 오후 7시부터 8시30분까지 국립국악원 별맞이터에서 국악공연인 ‘한가위날 달바라기’ 행사를 연다. 우리음악·외국의 민속음악과 재외 동포음악, 한국음악이 어우러지는 공연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무용단, 정악단 등 100여명이 참여한다. 중국 연변동포로 구성된 음악그룹인 ‘아리랑 낭낭’이 연주하는 국악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이 연주하는 21현 가야금, 젓대(대금), 개량 양금, 개량 해금 등 북한식 악기도 볼거리다. 또 에콰도르인으로 구성된 ‘시사이 코리아’가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안데스 노래·잉카전통음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외국의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우리 민속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산포냐 등 외국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우리 민요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으로 기대된다.(02)580-3333. 시청앞 서울광장에서는 18일(오후 4∼9시)·19일(〃) 한국창극원 주관으로 ‘한가위 국악축제’가 열린다. 궁중무용, 서울굿, 홍보가, 살풀이, 경기소리 등 풍성한 공연이 마련됐다. 행사는 시민들이 다같이 잔디밭에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모두 하나가 되어 경제문제 등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자는 의미다.(02)742-7278. ●민속주 시음해봐요 남산골 한옥마을에서는 연휴기간 내내 동춘서커스, 강령탈춤, 두드락, 경기민요 등의 공연이 펼쳐진다. 또 닥종이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보고 양반복식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는 코너도 있다. 문배주, 안동소주, 한주, 추성주, 홍주, 백일주 등 전통 민속주 시음행사도 열린다.(02)2266-6923. 서울역사박물관은 18일 오후 6∼7시 박물관앞 광장에서 깃발만들기, 만장만들기 등 전통 체험행사가 열리고 오후 7시부터 9시30분까지는 전통그룹의 타악퍼포먼스, 강강술래, 대동놀이 등의 공연이 열린다.(02)724-0114.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이스라엘·이슬람권 외교관계 ‘훈풍’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철수한 뒤 이스라엘과 이슬람권의 외교관계가 급속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실반 샬롬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쿠르시드 카수리 파키스탄 외무장관은 1일 터키 수도 이스탄불에서 공식 회담을 갖고 외교 정상화 방안을 논의했다. 양국의 장관급 고위인사가 공식 회담을 가진 것은 사상 처음이다. 두 장관은 전날에는 비공식 회담을 가졌다. AP통신은 “가자지구 철수가 이스라엘·이슬람 외교관계 회복의 돌파구를 열었다.”고 평가했다. 현재 이스라엘과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슬람 국가는 터키, 요르단, 이집트, 모리타니 등 4개에 불과하다. 회담이 끝난 뒤 샬롬 장관은 “역사적인 만남”이라면서 “모든 이슬람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이어 “이번 회담이 양국의 완전한 외교관계 정상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며, 모든 이슬람 국가들과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카수리 장관도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인도와의 경쟁관계 속에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를 희망하고 있는 파키스탄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철수 이후 미국의 절친한 우방인 이스라엘에 호의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해왔다.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최근 알자지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위대한 군인이자 용감한 지도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무샤라프는 이달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하는 길에 세계유대인회의(WJC)가 주도하는 다종교 모임에 참가, 연설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요르단 압둘라 국왕도 이르면 다음주 중 이스라엘을 방문, 샤론 총리와 회담을 갖게 될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이 외교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스라엘 외교부 대변인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방문이 성사된다면 양국 관계 증진은 물론 중동평화협상에 탄력이 붙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스라엘 일간 마리브는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을 협의하기 위한 예비회담이 최근 열렸다고 전했다.무바라크 대통령의 방문이 성사된다면 1995년 암살된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의 장례식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장택동기자 외신 taeck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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