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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바이국왕 중동지역 인적자원 개발100억弗 기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를 세계적 도시로 키워낸 셰이크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국무총리 겸 국왕이 100억달러를 기부한다. 셰이크 모하메드 국왕은 19일 요르단 세계경제포럼에서 중동지역의 인적자원 개발과 교육 제공을 위해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 재단’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BBC방송 등은 그가 재단에 기부하는 돈은 100억달러(약 10조원)라고 전했다.‘오마하의 현인’으로 세계 2위 부자에 오른 미국 버크셔 해서웨이 워런 버핏 회장이 빌 게이츠 재단에 기부키로 한 370억달러 이후 두 번째 많은 액수이다. 모하메드 국왕은 “중동이 지식기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공헌할 수 있게 돼 무척 기쁘다.”면서 “연구와 교육에 초점을 두고 지식의 산출과 활용, 서방 사회와의 지식 격차를 좁히는 데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아랍권의 과학연구 투자비는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0.02%에 불과하며 아랍권 전체가 출간하는 도서도 전 세계의 0.08%로 터키가 출간하는 도서 규모보다도 적다. 북미에서 10만권이 출판될 때, 남미 4만 2000권, 아랍권은 6500권에 머물고 있다. 모하메드 국왕의 재단은 아랍에미리트에 본부를 두고 올해부터 지원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이젠 포스트 BRICs] (12) 태국(하)

    [이젠 포스트 BRICs] (12) 태국(하)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지난달 25일 오전 8시 태국 방콕 카셋삿 국립대학 인문대 201호 강의실. “여기가 어디예요?” “청량리예요.” “집이 멀어요?” “여기서 30분 걸려요.” 태국 대학생 38명이 여름방학 교양강좌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이들은 태극기가 그려진 한국어 교재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강사 유진희(태국어학과 대학원생)씨가 읽는 문장을 어설픈 발음으로 흉내냈다. 방콕 대학들이 최근 한국어학과나 한국어 교양 강좌를 잇따라 개설하고 있다.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국어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게다가 한국어를 잘하면 월급도 1.5배 오른다. 건축과 3학년 수씨니(20)는 “그룹 ‘동방신기’와 TV 오락프로그램 ‘X맨’을 좋아한다. 한국 문화를 더 많이, 깊이 이해하고 싶어 한국어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팔미(20)는 “영어나 일본어를 잘하는 태국인은 많지만, 한국어에 능숙한 사람은 별로 없다. 한국어를 익히면 그만큼 좋은 회사에 입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한류는 태국 생활 곳곳에 침투해 있다. 태국 지상파 TV(5개 채널)에서는 매주 한국 드라마 2∼3편을 방영한다.2000년 드라마 ‘가을동화’부터 올해 ‘주몽’까지 100편이 넘는다.TV광고에서는 한국 연예인들이 한국어로 상품을 구입하라고 유혹한다.FM라디오 97.5에서는 아시아 음악을 24시간 트는데 대부분 한국 노래다. 한국 드라마·음악 열풍은 출판 영화 DVD 휴대전화 벨소리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인기드라마를 소설로 각색하고, 드라마 주요 장면을 캡처해 만화로 만든다. 한국 연예인만 다룬 잡지도 10여개나 생겼다. 영화관에서는 매주 한국 영화가 상영되고,DVD판매점에는 한국 드라마·영화 코너가 있다. 휴대전화 벨소리·통화연결음 시장도 한국 음악이 점령했다. 한국유학생 유진희씨는 “지하철이나 지상철(일명 BTS)에서 휴대전화가 울리면 절반은 한국 노래”라고 말했다. 크리륵크라이 지라파엣 상업장관은 “지난해 드라마 ‘대장금’이 인기를 누리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태국인의 관심이 높아졌다.”면서 “한국 기업이 태국에 진출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라고 강조했다. 한류만큼이나 빠르게 한국기업도 성장하고 있다. 대표주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삼성전자는 1989년 생산 법인을,1992년 판매 법인을 세우며 태국에 진출했다. 그러나 태국을 동남아시아의 소비 중심지라 판단, 집중 공략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목표는 프리미엄 시장으로 정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첨단 기술력을 갖춘 LCD TV와 PDP TV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상훈 차장은 “태국 경제가 꾸준히 성장해 프리미엄 시장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게다가 태국인들이 유행에 민감한 터라 전자제품 구입 주기도 3∼5년으로 비교적 짧다.”고 설명했다. 결과는 대성공. 시장점유율 조사기관인 GFK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LCD TV와 PDP TV, 양문형 냉장고(SBS)는 지난해 점유율 34%,30%,40%로 1위에 올랐다.LCD TV의 경우 2005년에 시장점유율 12%로 4위에 그쳤지만 1년 만에 껑충 뛰어올라 ‘부동의 1위’ 소니를 제쳤다. 지난해 매출액은 9억 6000만 달러. 태국 영자신문 내셔널뉴스의 아몽완 기자는 “소니·샤프 등 일본 전자제품에 식상해하던 태국 소비자를 삼성이 효율적으로 공략했다.”고 평가했다. LG전자는 백색 가전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세탁기(23%) 전자레인지(30%) 모니터(20%) 에어컨(18%) 등에서 시장점유율 1,2위를 다툰다. 게다가 생산제품을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을 비롯해 중남미 호주까지 수출하고 있다. 태국이 한국, 중국에 이은 제3의 생산기지로 자리한 것이다.LG전자의 지난해 매출액은 5억 3000만 달러. 이외에도 91년에 진출한 삼성전기가 현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 2004년 5월 태국 최고기업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갈 길은 아직 멀다. 우선 태국의 주요 제조업인 자동차 산업에서는 한국 업체가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2005년 태국에서 자동차 70만 3000대가 팔렸는데 그중 한국 자동차는 서너대에 불과했다. 현대자동차는 판매법인은커녕 대리점도 하나 없다. 최근 태국에 진출한다는 소문이 나돌지만 현대자동차는 “지금 할 이야기 없다.”며 답변을 꺼렸다. 한국계 은행이 방콕에 없다는 것도 태국 진출의 걸림돌이다. 산업은행 등이 방콕지점을 개설하려고 백방으로 애쓰고 있지만, 태국 금융당국이 한국을 포함한 외국계 은행의 신규 지점 설립에 반기를 들고 있다. 97년 외환위기 때 한국 금융회사들이 한꺼번에 철수해 배신감을 느낀 태국 정부가 한국 금융회사의 태국 재진출을 거부하는 것으로 현지에서는 분석했다. 당시 떠나지 않은 일본·미국·프랑스·싱가포르·네덜란드 등 11개국 17개 외국계 은행이 활동하고 있다. 노승환 삼성전기 태국 법인장은 “태국은 내수 시장(인구 6400만명)이 탄탄한 데다 주변에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 미개척 시장까지 아우르고 있다.”며 한국기업의 진출을 강력히 권했다. ejung@seoul.co.kr ■현지 한국기업 법인장들의 생존전략 ●삼성전기 노승환 태국법인장 태국 문화와 정책, 언어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철저한 현지 조사도 필요하다. 일본이 성공한 것은 태국 문화를 먼저 배우고 태국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태국 고고학자의 50%가 일본인일 정도다. 한국식 사고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말고, 한국과 태국의 장점이 어우러지도록 독려해야 한다. 삼성전기는 매년 1000개 교육 강좌를 운영한다. 우수한 현지 인력은 한국으로 보내 1년간 연수시킨다. 앞으로는 고급 인력을 활용한 기술 집약적 산업 중심으로 진출해야 성공할 수 있다. 주변 국가와 비교할 때 태국이 더 이상 인건비에서 경쟁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어서다. ●LG전자 성낙길 태국법인장 태국인은 자긍심이 높은 민족이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했고 앙코르와트에 버금가는 수많은 문화 유산을 지녔다.‘살아있는 부처’라 불리는 푸미폰 국왕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민족이다. 한국 기업은 태국의 고유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 후진국 국민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패의 지름길이다. 태국에 진출하려면 가장 먼저 태국인을 존경해야 한다. 현지인의 역량을 무시한다면 태국에서 성공할 방법이 없다. 특히 태국은 아시아의 랜드마크다. 태국에 발을 들여놓고 주변 다른 시장으로 확대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략 시장이기에 신기술, 고품질로 승부해야 한다. ●대우인터내셔널 남철순 방콕지사장 일부 태국 바이어는 일본에 의존하기 싫어한다. 일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 태국이 종속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바로 이 부분을 공략해야 한다. 자동차 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90%를 웃돈다. 일본보다 일본 자동차를 더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태국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가 진출을 망설이는 듯하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 시작해야 한다. 태국인들도 일본 자동차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미국 GM이 진출한 것도 그런 이유다. 당장 보이는 손해보다 미래에 얻을 이익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한국 자동차가 진출해야 크고 작은 협력업체도 태국에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이대로 포기하면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도 일본에 내주게 된다. ■일 무역진흥기구 방콕무역관장 인터뷰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지금이 태국에 진출할 때라고 일본 기업에 권하기 어렵습니다.” 가토 요이치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방콕무역관장은 “일본 기업들이 태국에서 사업을 확대하길 망설인다.”고 말했다. 일본의 태국 투자가 2005년 42억 6614만 달러였지만, 지난해에는 30억 3729만 달러로 28%나 줄었다. 또 지난 1월 JETRO가 국가별 투자위험 순위를 분석한 결과 태국은 말레이시아의 뒤를 이어 6위를 차지했다. 정치안정, 외환정책, 사회문제 등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태국과 120년간 수교를 맺어온 일본은 1960년대부터 태국에 진출했다. 현재 교민 30만명(한국 2만 5000명)과 기업 7000여개(한국 200개)가 이곳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지난해 쿠데타로 들어선 태국 과도정부가 외환규제책과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을 잇따라 내놓자 일본 기업들이 주춤하고 있다. 가토 방콕무역관장은 “일본과 태국은 오랜 교류 역사를 통해 좋은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이어왔다.97년 외환위기 때도 유럽이나 미국 기업은 철수했지만, 우리는 남았다. 그러나 최근 일본 기업들이 ‘태국에서 사업을 확대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고 전했다. 최근 체결한 일본·태국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의회를 통과할 때까지 투자 상황은 나아지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ejung@seoul.co.kr
  • [이젠 포스트 BRICs] (11) 태국(상)

    [이젠 포스트 BRICs] (11) 태국(상)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태국 방콕에서 동쪽으로 30㎞ 떨어진 수완나품 국제 신공항은 지난해 9월28일, 아시아 허브 공항을 꿈꾸며 문을 열었다. 터미널 내부 면적은 56만㎡로 세계에서 가장 넓고, 관제탑은 132m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지난달 22일 도착한 공항은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고압선이 뒤엉킨 천장은 머리에 닿을 듯 낮고, 회색 콘크리트 벽에는 크고 작은 금이 가득했다. 면세점이 빼곡하게 들어선 터미널 복도는 너무 좁아서 오가는 사람과 부딪치기 일쑤였다. 연간 처리 승객 수가 4500만명이라는데 화장실에 대변기칸은 3∼4개뿐이다. 어린이 화장실이나 수유실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몇 개월 만에 활주로와 유도로에 균열(100여곳)이 생겨 국내선 항공편은 40㎞ 떨어진 돈무앙 공항으로 옮겼다. 태국 국민들은 수완나품 공항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권력남용·부패의 상징”이라고 꼬집었다. ●수출·관광 등 대외부문이 성장 이끌어 인구 6423만명(세계경제 2005년)이 한반도 면적의 2.3배(51만 4000㎢)에 모여 사는 태국은 정치적·경제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9월19일 18번째 군사 쿠데타가 발생, 손티 분야랏끌린 육군 총사령관이 부정부패와 국왕 모독 혐의로 탁신을 국외로 추방했다. 경제에도 짙은 안개가 드리워졌다. 지난해 태국의 경제성장률은 5%.1분기는 6.1%로 출발이 좋았지만 5%(2분기),4.7%(3분기),4.2%(4분기)로 계속 떨어졌다. 게다가 연간 성장률도 2003년(6.7%),2004년(6.3%)에 비해 크게 둔화된 상태다. 올해는 3.8∼4.8%로 성장률이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태국의 국책연구기관인 국가경제사회개발원(NESDB)은 지난해 태국의 국내총생산(GDP)을 2061억달러,1인당 국민소득(GDP 기준)을 3179달러로 추정했다.“국내소비·투자 등 내수가 계속 부진한 상황에서 수출·관광 등 대외부문이 성장을 이끌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외국인 투자규모 38.3% 감소 시장경제에 반하는 과도정부의 외환규제조치,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도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지난해 말 수라윳 쭐라논 과도정부가 밧화의 평가절상을 막겠다며 외국자본 규제책을 발표하자 외국자본 230억달러가 한꺼번에 빠져나가 증시가 15% 폭락했다. 놀란 정부는 규제책을 두 달 만에 폐지했다. 올 초에는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을 들고 나왔다. 외국인 투자자가 태국 주요 기업의 소유 지분이나 주주총회 의결권을 50%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제한 업종은 신문 TV 쌀농사 천연자원 부동산 법률 등이다. 개정안은 태국 의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다. 코트라(KOTRA) 주덕기 태국 무역관장은 “탁신 전 총리가 통신회사인 친코퍼레이션 지분 49.6%를 싱가포르 국영투자회사(테마섹 홀딩스)에 매각하자 국민들이 자국내 기반시설을 외국에 팔아넘겼다며 분노했다.”며 개정안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결국 지난해 외국인 투자 규모는 81억 1100만달러로 전년보다 38.3% 감소했다. ●국왕 중심의 삶… 월요일마다 노란 물결 월요일이면 방콕 거리는 노란 물결로 넘실거린다. 아이들도, 직장인들도 노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붉은악마와 닮았다. 우리가 축구를 위해 붉은 옷을 입었다면, 그들은 푸미폰 아둔야뎃(80) 국왕을 위해 노란 옷을 선택했다. 지난해 즉위 60주년을 맞은 국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국왕을 존경하는 마음을 노란색에 담았다.16년간 태국에서 산 이민 1.5세대 박창수씨는 “국왕이 그려진 지폐를 꾸기지 않도록 교육받을 만큼 태국 국민은 국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한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국왕은 태국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에 국왕이 살아 있는 한 정치 불안이나 경제 둔화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경제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오히려 숨고르기가 끝나면 태국이 더 높게, 더 멀리 비상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태국투자청(BOI)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은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태국의 ‘열린 경제’ 정책은 흔들림이 없다.”면서 “호주·일본에 이어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마무리해 동남아시아 수출·생산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국은 지난달 일본과 FTA를 공식 체결해 앞으로 10년 동안 태국은 철강, 자동차부품, 전기·전자제품 등의 관세를, 일본은 농수산품 등의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특히 태국은 자동차부품에 대한 관세를 5년 이내에 없애 ‘아시아 디트로이트’의 꿈에 한 발짝 다가갈 방침이다. 태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매년 20∼25% 늘어나 180만대(세계 10위)에 육박한다. 수출이 40%를 차지, 수출액이 100억달러에 달한다.10년 전만 해도 자동차를 전혀 수출하지 못했던 이 나라가 호주, 아세안(ASEAN) 회원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자동차 수출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미국의 관세 25% 벽도 FTA 체결로 무너뜨릴 계획이다. 국가경제사회개발원 타닌 파엠 고문은 “올해는 정치 불안으로 경제가 다소 침체되겠지만, 내년부터는 자동차·정보통신·연구개발 등 고부가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jung@seoul.co.kr ■태국사람들 외국기업에 거부감 없어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태국 시장의 매력은 무엇인가. 국가경제사회개발원(NESDB) 타닌 파엠 고문과 태국투자청(BOI)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 코트라(KOTRA) 주덕기 태국 무역관장의 입을 통해 태국 시장의 특징을 살펴본다. 태국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가운데 자유무역협정(FTA) 등 시장개방과 국제교역에 가장 적극적인 나라다. 면적 450만㎢, 인구 5억 3000만명의 거대한 아세안 시장이 태국을 통해 무역개방의 길로 나가는 셈이다. 게다가 이 나라는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 미개척 시장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주덕기 무역관장은 “외국 자본 유치에 막 눈을 뜬 주변 국가들이 태국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태국어를 비즈니스 언어로 사용하고, 태국통화인 밧화로 결제한다. 주변 6개국이 참여하는 ‘메콩강 유역 개발계획(GMS)’ 프로젝트에서 태국이 중심축을 맡고 있다. 국가경제사회개발원 타닌 파엠 고문은 “베트남·인도네시아에 비해 태국은 산업 인프라를 잘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이 1860년대부터 발을 내디딘 덕택에 선진적인 공항·도로·항만·철도·통신망이 도입됐다는 설명이다. 도로 25만㎞ 가운데 국제적인 고속도로가 40%를 웃돌고 방콕과 주변 도시를 잇는 내부순환도로도 225㎞에 달한다. 항구 122곳의 연간 처리실적은 450만TEU(1TEU는 20pt짜리 컨테이너 1개)이다. 방콕의 상습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 지하철(20㎞)과 지상철(55㎞)도 놓았다. 지반이 약해 지하철 건설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 해냈다. 국제학교와 의료시설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태국은 식사할 때 포크와 숟가락을 사용한다. 손으로 음식을 먹던 태국인들이 동·서양에서 필요한 식기류를 하나씩 받아들인 것이다. 태국투자청 사팃 찬자바나쿤 청장은 “포크와 숟가락은 다른 문화를 포용하지만, 독자성을 잃지 않는 우리 문화를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1,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립을 유지한 비결이기도 하다. 다른 것에 관대한 태국인들은 외국인, 외국 기업에 거부감이 없다. 일본이 태국을 동남아 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한 이유다. 최근 프리미엄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는 것도 독특한 문화 덕분이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데도 상류층은 맘껏 소비하고 서민층은 이를 지탄하지 않는다. ejung@seoul.co.kr ■크리륵크라이 지라파엣 상업장관 “편법경영 제동일 뿐 투자 배척 아니다” |방콕(태국) 정은주특파원|“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은 태국의 뿌리를 지키려는 노력이다. 외국인 투자를 배척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지난달 24일 태국 수완나품 국제 신공항에서 만난 크리륵크라이 지라파엣 상업장관은 전쟁을 앞둔 장군처럼 결연했다. 과도정부에서 장관으로 승진한 그는 국내외 신망이 두터운 경제통이다.1990년대 후반부터 세계무역기구(WTO)와 관광부 차관, 상업부 차관을 지내며 명성을 얻었다. 그런 크리륵크라이 장관이 올해 초 외국인 기업법 개정안을 제안해 외국 투자가의 눈총을 받고 있다. 그는 “핵심은 만연한 불법행위를 바로잡는 것인데 언론이 ‘국수주의’라 호들갑을 떨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태국 외국인 기업법은 외국인 참여 영역을 3개 그룹으로 분류한다.1그룹은 치안·환경·무기매매·광고·출판·신문·부동산 거래 등이며 외국인의 지분이 50%를 넘지 못한다.2그룹은 회계사·건축사·법률업 등 16개 전문직종으로 관련 부처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3그룹은 100% 외국인 지분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관행, 편법적으로 외국인 투자가 모든 업종에서 이루어졌다. 외국인이 현지인을 고용해 기업을 설립하고 소유지분을 50% 미만으로 보유하는 대신 주주총회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을 실질적으로 경영했다. 크리륵크라이 장관이 이 편법에 칼을 들이댄 것이다. 그는 “더 이상의 불법은 허용하지 않는다.(개정안이 시행되면)소유 지분이 50%가 넘는 외국인 투자가는 1년 안에 주식을 매각해야 하고, 의결권이 50%를 넘는 외국인 투자가는 2년 안에 의결권을 그 이하로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50% 제한은 국가 안보나 천연자원, 태국 문화와 관련한 기업에만 국한된다.”면서 “이는 국제기준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개정안은 태국 의회의 심의를 거쳐 오는 12월쯤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0년간 태국은 다국적 기업과 공존해 왔다. 풍부한 노동력과 관대한 문화, 맛있는 음식이 태국 시장의 장점이다. 이 매력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eju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병자호란 다시 읽기] (17) 광해군과 누르하치, 그리고 명나라 Ⅳ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지만 국왕 광해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장 그의 친형 임해군을 처리하는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사관(査官) 엄일괴 등을 은으로 구워삶아 위기를 넘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간 뒤부터 신료들은 ‘역적’ 임해군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즉위하자마자 혈육을 손봐야 하는 난감한 상황을 맞았다. 광해군은 거부했지만 끝까지 임해군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명과의 관계 또한 꼬여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총명하고 능력 있다.’고 추켜세우더니 막상 책봉을 요청했을 때는 외면했던 명이었다. 즉위하고 나면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광해군과 명의 관계는 분명 ‘악연’에서 출발했다. ●李成梁의 병탄 음모에 놀라다 즉위한 지 5개월 남짓 된 1608년 7월, 베이징으로 가고 있던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로부터 비밀 장계가 날아들었다. 광녕총병(廣寧總兵) 이성량(李成梁)이 ‘조선을 정벌하고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직할령으로 삼자. ´는 내용으로 황제에게 주문(奏文)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엄일괴 등이 돌아간 뒤 겨우 한숨 돌리는가 싶더니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명이 조선을 직할령을 삼으려고 덤비는 것이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이성량의 혼자 생각이 아니라 도어사(都御史) 조집(趙)도 같이 상주(上奏)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형제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이성량이 누구인가. 그는 이여송(李如松)의 부친이자, 요동의 막강한 군벌(軍閥)이었다. 워낙 오랜 동안 현직에 있어 ‘리타야(李大爺)´로 불린 그의 영향력은 컸다. 요동이나 산동(山東)의 무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의 가정(家丁)이나 막객(幕客) 출신이었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의 내부 사정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광해군은 신료들에게 대책을 물었다.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성량이 조선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땅이 비옥하고 인삼과 은이 생산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정구는 그러면서 이성량과 연결되어 있는 누르하치가 더 문제라고 했다. 이성량의 본심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조선을 공격할 경우 누르하치의 군대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정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땅과 잇닿아 있는 평안도 지역의 방어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행히 이성량의 상주에 대한 명 조정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병과도급사중(兵科都給事中) 송일한(宋一韓)과 급사중(給事中) 사학천(史學遷)이 이성량의 주장을 일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이 비록 흠이 있지만, 연개소문(淵蓋蘇文)처럼 임금을 시해한 죄가 없고 명나라를 섬겨 신하의 예절이 어긋나지 않았으니, 이성량의 주청이 잘못되었다. ´는 내용이었다. 송일한은 이성량을 파직시켜 소환하라고 주장했다. 송일한 등의 반박 덕분에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광해군이 둘째라는 이유로 명나라 신료들에게 계속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성량과 연결된 누르하치에 대한 경각심 또한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통성 시비´ 잠재우려 책봉 서둘러 광해군은 ‘이성량 사건´을 계기로 요동에 대한 정탐을 강화하는 한편, 명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冊封)을 받아내기 위해 서둘렀다. 비록 임해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차단하고 국왕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명의 책봉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즉위한 지 1년이 더 지난 1609년 3월까지도 명은 광해군을 조선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았다.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는 ‘조선국 권서국사(權署國事) 광해군´이란 호칭을 썼다. ‘권서국사´란 ‘임시로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 정도의 뜻이다. 이윽고 1609년 6월, 명의 책봉사(冊封使)가 서울에 도착했다. 태감 유용(劉用)이 그였다. 태감이란 환관을 말한다. 내시(內侍), 초당(貂), 초시(貂侍), 엄인(人) 등 환관을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였다. 조선 전기에는 화자(火者)라는 호칭도 많이 썼다. 15세기 조선에 다녀간 명나라 환관들에 대한 기억은 좋지 않았다. 워낙 뇌물을 밝히고, 요구 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 출신이었다. 하지만 명나라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더 위세를 떨었다. 세종 때의 윤봉(尹鳳)과 성종 때의 정동(鄭同)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유용은 더 ‘막강한´ 인물이었다. 수천명에 이르는 명나라 환관 가운데 서열 2위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조선에 도대체 왜 왔겠는가? 광해군은 그가 의주에 도착하여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바짝 긴장했다. 유용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부터 공공연히 떠벌렸다. “조선 국경에 발을 들여 놓으면 기필코 10만냥의 은자를 얻으리라. ”라고. 그는 의주에 도착한 뒤 자신에 대한 접대는 오로지 은으로만 하라고 했다. 은만 주면 식사도 다례(茶禮)도 필요 없다고 했다. 은이 부족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거느린 수행원 중에는 한 밑천 잡으려고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 또한 이런저런 기완(嗜玩) 물품을 내놓고 강매했다. 유용은 결국 광해군을 책봉하는 황제의 칙서를 전하러 와서 6만냥의 은을 뜯어갔다. 조정의 언관들은 유용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광해군은 그를 우대하라고 지시했다. 어떻게 해서든 정식으로 책봉을 마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명의 貪風을 받아들이다 ‘오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고, 돌아가면 여기저기에 상납해야 한다. ´ 6만냥을 뜯어낸 유용이 했던 이야기다. 엄일괴와 만애민이 조선에서 한 밑천 잡은 뒤, 명의 환관들은 조선에 서로 나오려고 했다. 17세기 전반 명에서 불고 있던 탐풍(貪風)은 엄청났다. 그 배경에는 은의 유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산 생사(生絲)와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은을 싸들고 명나라로 몰려들었다. 그 은은 대개 신대륙 남미(南美)와 일본에서 채굴된 것이었다. 해마다 밀려드는 수십만 킬로그램의 은은 명나라 구석구석으로 유통되었다. 그것은 인삼이나 모피의 구입 대금으로 누르하치가 일어난 만주 땅에도 뿌려졌다. 은은 운반이 편리해 뇌물로는 그만이었다. 사실 15세기에 왔던 윤봉이나 정동도 엄청나게 뇌물을 챙겼지만 그것은 대개 토산물이었다. 호피(虎皮) 등 짐승가죽과 세모시 등 직물류, 말안장, 구리 제품 등 부피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운반하자면 엄청난 수의 궤짝이 필요했다. 뇌물 궤짝을 짊어진 행렬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초리가 좋을 리 없었다. 그것에 비하면 은을 운반하기란 너무 쉬웠다. 1610년에는 광해군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명사가 왔다. 염등(登)이란 인물로 역시 환관이었다. 그의 목표는 유용이 받아낸 액수보다 더 뜯어내는 것이었다. 개성에서 서울로 들어올 때 임진강의 다리가 홍수로 유실되자, 행차가 지체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은 1000냥을 받았다. 서울에 도착하여 보인 행태는 가관이었다. 은으로 된 사다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천교(天橋)라 불리는 그것을 타고 남대문을 넘어가 책봉례(冊封禮)를 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결국 수만냥을 챙겼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염등을 가리켜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번에도 그냥 넘어갔다. 무려 17년 동안이나 왕세자로 있었으면서도 명의 승인을 받지 못했던 자신의 전철을 되풀이하기 싫었던 것이다. 수만냥의 은을 마련하려면 엄청난 고혈(膏血)을 짜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후 명을 상대하기란 그만큼 버거웠다. 하지만 명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 명과 누르하치 사이에서 양단을 걸쳐야 하는 훨씬 더 버거운 과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 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 (16)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 Ⅲ

    명 조정이 왕세자로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면서부터 광해군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604년, 명나라 제독주사(提督主事) 섭운한(雲翰)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온 조선 사신들에게 극언을 퍼부었다.‘임해군이 일본군에 포로가 된 것은 너희 국왕의 책임’이며 ‘맏아들 대신 둘째아들을 왕세자로 세우려는 너희들은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는 난신적자(亂臣賊子)’라고 매도했다. 신종(神宗) 황제는 명 조정의 신료들이 워낙 강경하게 반대하자 조선에 보낸 칙서(勅書)에서, 맏아들 임해군을 왕세자로 다시 세우고, 광해군에게는 물러남으로써 윤서(倫序)를 지키라고 촉구했다. 광해군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이후, 과거보다 훨씬 대하기가 버거워진 명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명의 황제가 조선에 보낸 칙서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것의 정치적 파괴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부왕 선조가 광해군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고 있었다.1600년(선조 33) 무렵부터 특히 그러했다. ●선조, 광해군의 아침 문안조차 냉대 당시 선조는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오늘날의 덕수궁)에 거처했다. 광해군은 아침마다 선조의 처소로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지만 선조는 좀처럼 그를 방으로 불러들여 접견하려 하지 않았다. 1600년 3월30일자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선조가 워낙 엄하게 대해 광해군은 문안할 적마다 처소의 바깥문에 머물다가 돌아가곤 했다고 적혀 있다. 선조의 냉랭한 태도에 광해군이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1601년의 기록을 보면 광해군은 아침에 문안하고, 점심에도 문안하는 날이 있었다. 그것은 선조의 냉랭한 태도에서 비롯된 불안감, 그럴수록 더 인정받고 싶다는 초조함이 반영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1600년, 중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이듬해 10월, 예조(禮曹)는 중전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음을 들어 선조에게 재혼하라고 건의한다. 선조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왕세자 책봉 재건의 거부·논공행상 제외 1602년 4월, 조정 신료들은 명나라에 주청사(奏請使)를 보내 왕세자 책봉을 다시 요청하자고 건의한다. 선조는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중전의 책봉을 먼저 주청하여 국모(國母) 자리를 바르게 한 다음에 왕세자 책봉을 주청해야 인륜이 바로 선다.’는 것이 이유였다. 임진왜란 시기 무려 15번이나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던 그 ‘선조’가 아니었다.1603년, 왜란 당시 국난 극복에 노력했던 인물들을 공신(功臣)으로 책봉하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벌어졌을 때, 신료들은 광해군도 공신으로 포함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분조(分朝) 활동의 성과를 인정하자는 주장이었다. 선조는 그것도 거부했다. 선조의 태도는 분명 광해군에 대한 견제였다. 임진왜란 시기 지존의 권위에 흠집이 생긴데다, 명군 지휘부에 의해 ‘무능한 임금’이자 ‘퇴위시켜야 할 대상’으로 매도되었던 울분이 광해군에게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권력이란 분명 부자(父子) 사이에도 공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1602년 2월, 선조는 이조정랑(吏曹正郞) 김제남(金悌男)의 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았다. 광해군과 화동(和同)할 수 없는 악연을 맺었던 인목왕후(仁穆王后)였다. 다시 4년 뒤 인목왕후의 몸에서 아들(永昌大君)이 태어났다. 왕세자 광해군의 앞길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왕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것에 선조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일부 신료들은 그의 마음이 광해군에게서 이미 떠났다고 판단했다. 적자(嫡子)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아예 영창대군 앞에 드러내 놓고 ‘줄을 서는’ 신료들이 나타났다.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607년 3월부터 선조는 잔병치레를 하더니 10월에는 쓰러져 병석에 드러누웠다.10월11일, 선조는 병석에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하겠다고 했다. 여의치 않으면 섭정(攝政)이라도 맡기라고 지시했다. 유영경 등은 병석에 누운 선조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렸다.‘이 상태로도 충분히 정사를 담당하실 수 있으니 전위나 섭정의 명을 거두시라.’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선조가 내린 비망기의 내용을 숨기려고 시도했다. 광해군 또한 선조가 쓰러진 뒤부터 궐내에 머물면서 시질(侍疾-병구완)에 들어갔다. 긴장 속에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608년 1월, 전 참판 정인홍(鄭仁弘)은 선조에게 상소하여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몸조리에 전념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유영경이 정당한 전위를 방해했으니 처단하라고 촉구했다. 또 다른 돌발상황이었다. 선조는 정인홍의 상소 내용에 발끈했다. 다시 비망기를 내려 ‘명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전위하면 나중에 명에서 문제를 삼을 수도 있다.’고 했다. 쓰러진 직후에는 바로 전위하겠다고 하더니 정인홍의 상소를 접한 뒤 마음이 다시 흔들린 것이다. ●왕세자 16년… 국내외 견제 딛고 즉위 광해군은 바짝 엎드렸다. ‘변변치 못한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데 갑자기 전섭(傳攝)하라시니 죽으려 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영경이 전섭을 만류한 것은 제 뜻과 다르지 않은데 정인홍이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만들어 냈으니 그저 죽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격분한 선조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기로에 서있었다. 1608년 2월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이 즉위했다. 왕세자가 된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이윽고 2월6일,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을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삼아 베이징으로 보냈다. 선조의 승하 사실을 명 조정에 알려 시호(諡號)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광해군의 즉위도 승인받아 오는 임무를 지닌 사절이었다. 명 조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호민 일행이 4월12일, 광해군의 즉위를 승인해 달라는 주본(奏本)을 올렸을 때, 명 예부는 다시 차서(次序)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여전히 둘째아들 광해군은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황한 이호민은 “임해군은 중풍에 걸려 왕세자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따졌다. 그러자 명의 예부낭중(禮部郞中)은 임해군이 왕위를 사양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주본을 다시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 조정은 랴오양(遼陽)에 있는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시켜 조선에 들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중풍’ 운운한 것이 화근이었다. 6월15일, 명 차관(差官)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임해군을 직접 만나겠다고 우겼다. 당시 임해군은 역모 혐의를 받아 강화도 교동(喬桐)에 유배되어 있었다. ●銀 풀어 위기 넘겨 난감한 일이었다. 임해군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차하면 명에 또 다시 결정적인 약점을 잡힐 판이었다. 그럴 경우, 또 얼마나 힘들고 지루한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것인가? 광해군과 조선 조정은 이 대목에서 은(銀)을 풀었다. 엄일괴와 만애민에게 은 수만냥을 주었다.‘칙사 대접’을 받은 그들은 임해군을 면담한 뒤, 조선 신료들에게 말했다. “국왕에게 임해군을 잘 보호하여 박대하지 말라고 이르시오.” 그리고는 은 궤짝을 챙겨 귀국길에 올랐다. 어느 새 광해군은 ‘국왕’이 되어 있었다. 광해군은 정치적 곤경을 타개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은을 뇌물로 썼지만 그것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엄일괴와 만애민이 다녀간 뒤부터 요동에 있던 명나라 관리들은 입맛을 다셨다. 엄일괴 등이 조선에서 한밑천 크게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에 오는 명사(明使)들은 예외 없이 손을 벌렸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누르하치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 명사들의 ‘경제적 위협’에도 직면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할리우드에 지친 당신에게…

    태평양을 건너온 낯익은 거미인간, 해적, 그리고 한국의 짠한 아버지들….5월 극장가는 이렇게 짜여진다. 미국 개봉일보다 3일 앞선 5월1일 국내에 상륙하는 ‘스파이더맨3’은 약 500개의 스크린을 잡아놨다. 뒤를 잇는 ‘캐리비안의 해적3:세상의 끝에서’ 또한 그에 못지않은 세를 과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대작들의 틈바구니 속에 오히려 작은 영화들이 빛을 발하기도 한다. 블록버스터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획일화된 멀티플렉스에 거리를 두는 관객들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나만의 취향’을 찾는 이들에게 서울 광화문과 종로에 포진해 있는 ‘시네큐브’ ‘스폰지 하우스’ ‘필름 포럼’ 등의 작은 극장들은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이다. ●알렝 레네와 윈터바텀을 만나다 평소 영화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거장들의 작품을 소개해온 스폰지의 ‘씨네휴 오케스트라(www.cinehue.co.kr)’가 새달 10일부터 23일까지 종로(10∼16일)·압구정(17∼23일)에 위치한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다. 소개되는 작품은 총 5편이다. 프랑스의 거장 알랭 레네의 최근작 ‘마음’이 상영목록에 올라 있다. 연극적인 요소를 영화에 접목시킨 작품으로 파리지엔 여섯명의 복잡한 마음이 어떻게 통하게 되는지를 묘사했다.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인디스월드’로 2002년 베를린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마이클 윈터바텀의 ‘관타나모로 가는 길’도 첫선을 보인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가던 세명의 아랍계 영국인들이 테러리스트로 몰린 실화를 찍은 작품이다. 윈터바텀은 이 영화로 ‘제2의 켄 로치’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밖에 프랑스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소립자’와 ‘리틀 미스 선샤인’을 연상시키는 영화로 선댄스 영화제를 놀라게 한 신인감독의 작품 ‘달콤한 열여섯’, 이혼과 결혼에 대한 의미를 묻는 ‘퍼펙트 커플’ 등도 소개된다. 관람료는 편당 7000원. ●심기일전하는 독립영화 축제 올해로 12번째를 맞는 ‘인디포럼 신작전’이 새달 10일부터 16일까지 종로구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그렇다면, 심기일전’이란 슬로건에서 보듯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2년 만에 재개됐다. 신작 59편과 초청작 2편 등 총 61편의 독립영화가 소개된다. 초청작 중 노동석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이번에 관객과 처음 만난다. 지난 2월 공모를 통해 접수된 498편 가운데 극영화 38편, 다큐멘터리 10편, 애니메이션 10편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정됐다. 개막작은 실험적 성격이 강한 극영화 ‘유령소나타’와 고국에 돌아온 트렌스젠더 해외 입양아의 정체성 고민을 담은 다큐멘터리 ‘Un/going home’이다. 이번에는 영화인으로서 자의식이 투영된 작품들이 많은데 폐막작 ‘아스라이’ 또한 그렇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실험영화 감독의 독백을 담았다. 관객과의 좀더 활발한 소통을 위해 후원회원도 모집한다. 홈페이지(www.indieforum.co.kr)를 통해 신청할 수 있으며 회원에겐 자료집과 무료관람권, 독립영화 DVD세트 등을 제공한다. ●유머와 풍자의 거장 이리 멘젤 체코가 낳은 세계적 거장 이리 멘젤 감독. 그가 오는 26일 개막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아 한국을 방문한다. 영화제에서는 그의 특별전을 마련해 놓고 있다. 하지만 굳이 전주에 내려가지 않아도 그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5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그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상영된다.‘가까이서 본 기차(10일)’ ‘줄 위의 종달새(24일)’ ‘거지의 오페라(31일)’ 등 3편이다. 공산주의 치하의 체코를 떠나지 않고 꿋꿋하게 영화작업을 해온 그의 철학은 삶이 잔혹하고 슬프다고 영화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늘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고 눈물 대신 웃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웃음 속에 통렬한 비판과 아픔을 담고 있어 시대의 비극을 더욱 극명하게 전달해 준다. 그가 28살 때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한 ‘가까이서 본 기차’가 대표적이다. 전쟁 중인데도 오로지 사랑에만 몰두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독일 지배하에 있는 체코의 정치적 무능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내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일흔의 나이에도 영화 만들기 몰두하고 있는 그는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로 올해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이번 방문에서 관객과의 만남도 가질 예정이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메가박스 다양한 영화 시리즈 ‘쉬즈 더 맨’ 다른 의미에서 작은 영화를 소개하려는 움직임은 또 있다. 메가박스에서 다양한 영화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5월부터 선보이는 ‘무비 온스타일’이 그것이다.2030 여성들을 겨냥, 사랑에 관한 로맨틱 코미디·멜로 영화들을 단독 수입·소개하는 브랜드다.‘무비 온스타일’의 첫 테이프를 끊는 작품은 ‘쉬즈더맨’.‘그녀는 남자’라는 제목처럼 축구 때문에 남자 행세를 하는 말괄량이 여고생 바이올라(아만다 바인즈)가 주인공인 청춘영화다.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딱 여성 취향이다. 바이올라는 학교에서 여자 축구팀을 해체하자 분개한다. 마침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이 런던 뮤직 페스티벌에 간답시고 학교를 무단결석한다. 바이올라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남장을 하고 세바스찬의 학교에 들어간다. 그녀가 세바스찬 행세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축구부에 들어가 자신의 학교 축구팀과 전 남자친구에게 앙갚음을 해주는 것. 세바스찬이 된 그녀는 룸메이트이자 같은 축구부원인 듀크(채닝 테이텀)에게 점점 끌린다. 그러나 남자의 모습으로 그를 사랑하기란 힘든 일. 게다가 그의 맘엔 오로지 ‘퀸카’ 올리비아(로라 램지)뿐이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다른 남자와 사뭇 다른 세바스찬 모습의 바이올라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가운데 진짜 세바스찬이 예고 없이 학교로 돌아오고 일은 점점 더 꼬이기 시작한다. 사실 이런 영화의 결말은 너무도 뻔하다. 바이올라가 축구는 물론 사랑에도 ‘골인’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것쯤은 안봐도 비디오다. 또 남자 기숙사에 들어간 남장 여학생은 닳고 닳은 소재. 리얼리티가 떨어지고 유치하다고? 하지만 이 영화, 꽤 웃기고 재밌다.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가며 소동을 벌이는 아만다와 그런 그녀에게 헷갈리는 친구들, 박진감 넘치는 축구경기 등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신나는 음악에 버무려 상큼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이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짝사랑하는 상대의 곁에 있게 된다면, 그래서 그의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한번쯤이라도 해본 적이 있다면 바이올라로부터 느낄 대리만족의 기쁨은 더욱 클 듯하다. 양성적 매력을 물씬 풍긴 바이올라 역의 아만다 바인즈는 ‘아만다쇼’라는 단독쇼가 있을 정도로 주가 급상승 중인 신세대 여배우다. 듀크 역의 채닝 테이텀은 국내에 댄스 영화 ‘스텝업’으로 낯익은 얼굴.‘석호필’ 웬트워스 밀러를 연상시키는 외모에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수줍음을 타는 귀여운 ‘터프 가이’로 나와 여심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새달 3일 개봉,12세 관람가.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5)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Ⅱ

    광해군은 성공적인 분조 활동을 통해 정치적 위상이 높아졌지만, 동시에 위기를 맞았다. 부왕 선조의 견제 때문이었다. 왜란 초반,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의주까지 파천하기에 급급했던 선조는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더욱이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매듭지으려 했던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 즉위’를 들먹이며 선조를 계속 압박했다. 위기에 처한 선조는 왜란을 치르는 동안 모두 15번이나 양위(讓位)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진심이 아니었다. 명의 압박에 맞서고, 광해군과 신료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아내기 위한 정치적 몸짓이었다. 명의 이중적 태도도 광해군을 괴롭혔다. 명 조정은 광해군이 유능하다고 칭찬하면서도, 정작 그를 왕세자로 승인해 달라는 요청은 거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광해군은 안팎 곱사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1593년 1월 벽제전투에서 패한 직후, 명군의 최고책임자인 병부상서 석성은 심복 심유경(沈惟敬)을 서울의 일본군 진영으로 보냈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협상 끝에 일본군이 남쪽으로 철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강화협상에서 드러난 명의 본심 이후에도 4년이나 더 계속된 강화협상에서 양측이 내세웠던 요구조건은 복잡했다. 고니시는 ‘명나라 황녀(皇女)를 천황의 후궁으로 주고, 조선 영토 가운데 4도를 떼어주고, 무역을 허락하고,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야만’ 조선에서 철수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심유경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해야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 도저히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의 차이였다. 하지만 명군 지휘부는, 벽제전투 패전과 갈수록 불어나는 전비(戰費) 부담에 대한 명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했다.’는 가시적 성과가 필요했다. 일본군 또한 일단 남해안 지역으로 물러나 숨을 고르면서 명의 태도를 지켜볼 심산이었다. 일본군의 서울 철수는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일시적 성과’였다. 이윽고 1593년 4월20일, 한강변에서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남쪽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보호하기 위해’ 명군 장졸들이 조선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을 추격하던 조선 장수 변양준(邊良俊)을 붙잡아 목을 쇠사슬로 묶은 뒤 난타했다.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추격전을 지휘하던 전라감사 권율(權慄)은 이여송에게 소환되었다. 명군 지휘부의 지침을 어기고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추격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명군의 ‘에스코트’ 아래 서울을 무사히 빠져나온 일본군은 남해안에 머물면서 철수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명군도 삼남의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일본군을 견제하려 했을 뿐 전의(戰意)를 보이지 않았다. 전쟁은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광해군, 무군사를 이끌며 민심을 파악 그것은 석성을 비롯한 명군 지휘부에게도 수렁이었다. 황제에게는 ‘심유경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이 곧 물러나고, 전쟁이 끝나 동정군(東征軍)이 개선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일본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삼남에 주둔해 있는 명군 지휘관들은 군량과 군수물자가 모자란다고 아우성이었다. 그 와중에 죽어나는 것은 조선 민중이었다. 싸울 의지는 없이 그저 장기 주둔에 들어간 명군의 민폐가 극심했다. 곳곳에서 군기가 풀어진 명군 장졸들에 의해 약탈과 강간이 자행되었다. 한편에서는 일본군에게 시달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군에게 곤욕을 치러야 했다.‘우리 편’으로 여겼던 명군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민중들 사이에서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명군 주둔지역의 민심은 불온해졌다. 지방에 주둔한 명군들이, 조선의 지원이 미흡하다고 하자 명군 지휘부는 선조와 조선 조정을 쪼아대기 시작했다.1593년 10월, 명군 지휘부는 광해군에게 삼남으로 내려가 명군에 대한 접대업무를 총괄하라고 요구했다. 요구의 배경에는 ‘무능한 선조는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이 깔려 있었다.1593년 윤 11월, 광해군은 다시 남행길에 올랐다. 그는 1594년 8월,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곳곳을 순행했다. 특히 1593년 12월, 전주에서 왕자 시절 사부(師傅)였던 박광전(朴光前)으로부터 전라도 지역의 전황(戰況)과 민심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박광전은 광해군에게 위기에 처한 전라도의 실상을 알렸다. 일본군이 비록 거제도 일대에 주둔해 있지만 진해와 고성을 거쳐 섬진강으로 진입할 경우, 전라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박광전이 특히 강조했던 것은 ‘민심 수습’이었다. 그는 당시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대부분 전라도에서 징발하고 있던 현실, 각종 세금과 노역 때문에 도망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던 상황을 알린 뒤, 포악한 지방관들을 처벌하여 지역 민심을 위로하라고 촉구했다. 비록 명군 지휘부에 떠밀려 이루어졌지만,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민초들의 참상을 직접 보았던 것은 광해군에게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가 즉위 이후 명과 누르하치 사이의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려 노력했던 것은 분명 그 같은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명, 광해군을 흔들다 무군사 활동을 통해 왕세자로서 광해군의 위상은 확고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 조정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1594년부터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고 명 조정에 주청(奏請)했다. 광해군이 전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워, 온 백성들이 그를 추대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명 조정은 조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광해군이 맏이가 아니라 둘째이므로 그를 책봉하면 ‘장유(長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자 선조는 다시 보낸 주문에서 ‘맏아들 임해군은 자질이 평범한 데다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이후 놀라는 증세가 생겨 왕 노릇을 하기 어렵다.’는 정황을 들어 광해군을 승인해 달라고 호소했다. 명은 다시 거부했다.1604년까지 모두 다섯 차례나 주청사(奏請使)가 베이징에 갔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명 예부(禮部)는 조선에 보낸 답신에서 ‘광해군은 현명하다. 현명한 사람은 차례를 뛰어넘는 참월(僭越)한 행위를 하지 않는 법’이라고 운운하며 광해군에게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촉구했다. 명 조정이 광해군을 거부했던 데에는 물론 속사정이 있었다. 당시 명의 신종이 정귀비(鄭貴妃)와의 사이에서 난 주상순(朱常洵)을 염두에 두고 맏아들 주상락(朱常洛)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미루고 있던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 명 예부는 차자 광해군을 섣불리 승인해 줄 경우 신종이 맏아들을 밀어내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명분을 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명의 태도는 조선을 흔들기 위한 ‘의도된 것’이기도 했다. 이미 1418년 태종이 맏아들 양녕대군을 밀어내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뒤의 세종)으로 왕세자를 교체했을 때 명은 군말 없이 그것을 승인했었다. 충녕대군의 전례를 볼 때 명의 태도는 분명 이중적이었다. 조선의 요청대로 따라주는 것이 관행이었던 ‘왕세자 책봉’ 문제에서도 ‘상국(上國) 행세’를 톡톡히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승인 요청을 계속 거부해 광해군의 애간장을 녹일 대로 녹인 뒤, 큰 은혜나 베푸는 것처럼 책봉을 허락하여 생색을 내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군대를 보내 조선을 ‘구원’해 주고,‘자격도 안 되는’ 광해군을 인정해 준 자신들의 ‘은혜’를 강조하여 조선을 길들이려는 속셈이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이후 명이 조선에 과거보다 훨씬 버거운 존재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실제 누르하치의 도전이 거세짐에 따라 ‘길들여진’ 조선을 이용하고픈 명의 유혹도 커져만 갔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중동지역 핵개발 ‘도미노’

    이란의 핵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인근 국가들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 프로그램 착수 지원을 요청하는 등 중동 지역에 핵에너지 개발 붐이 일고 있다. 요르단을 방문 중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은 15일 요르단 압둘라 국왕과 면담에서 요르단의 평화적 핵 에너지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IAEA회원국이자 핵확산금지조약 협약국인 요르단은 “핵 에너지를 평화적으로 활용하는 모범을 보이겠다.”는 의욕을 나타냈다.IAEA는 다음주중 요르단에 연구팀을 파견할 계획이다. 압둘라 국왕은 지난 1월 처음으로 핵시설의 평화적 활용 계획을 공표했다. 요르단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이집트, 터키 등 인근 중동 국가들이 원자력 계약과 핵물질 구입, 원자로 지원시설 건설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NYT) 인터넷판이 이날 보도했다. 이들 중동 국가는 핵에너지 생산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지만 미국과 민간 전문가들은 중동지역의 핵개발 경쟁이 이란의 핵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세계 석유 매장량의 절반 이상을 보유한 국가들이 고비용과 까다로운 규정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왜 집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중동 지역에서 핵 개발 경쟁이 촉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40년전 핵무기를 구입했을 때 일부 국가들이 핵개발로 맞불 작전을 놓은 적이 있다.이순녀기자 연합뉴스 coral@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4)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4) 광해군과 누르하치,그리고 명나라Ⅰ

    누르하치를 치는 데 동참하라는 격문을 받았을 때 광해군(光海君)이 보인 반응은 신중했다. 아니 냉정했다. 그는 누르하치가 ‘천하의 강적’이기 때문에 미약한 조선군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왕가수가 격문을 보낸 것은 조선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명의 요구를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의 주장은 달랐다. 그들은 격문에서 대의(大義)를 내세워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하라고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적어도 7000명 정도의 병력은 보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자 광해군이 일갈했다.‘곧 장마철이 다가오는데 대병을 동원하여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모험을 벌이려는 명군 지휘부의 수준을 알 만하다.’는 것이었다. 파병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광해군 정권의 존폐, 나아가 조선의 운명에 영향을 줄 만큼 격심한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한반도에 강대국 입김 커질때마다 ‘부활´ 몇해 전, 모 방송사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우리 역사에서 다시 평가해야 할 인물들을 꼽아보라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교사들은 ‘다시 평가해야 할 대상’으로 광해군을 가장 많이 거론했다. 광해군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폐위된 뒤 ‘폭군(暴君·포악한 군주)’ ‘혼군(昏君·어리석은 군주)’ 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것을 고려하면 뜻밖의 일이었다. 광해군(1575∼1641)은 16세기 말엽과 17세기 초반을 살다간 인물이지만 오늘날 그는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외교문제와 관련된 현안들이 불거질 적마다 그는 ‘부활’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이라크에 파병하는 여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었을 때도 반대론자들은 그를 불러낸 바 있다. 한반도에 미치는 강대국의 입김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에 대한 관심 또한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정비(正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들과의 사이에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빈(恭嬪) 김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왕자가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이다. 선조는 54세 때인 1606년, 늘그막에 새로 맞이한 정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다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었다. 하지만 선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들 가운데는 비명횡사하는 왕자들이 속출한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역모 혐의를 받아 죽었다. 광해군은 인빈(仁嬪) 김씨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정원군의 아들, 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인조대에는 인성군(仁城君)이 역모죄에 걸려 죽었고, 이괄(李适)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던 흥안군(興安君)도 반란 실패후 비명횡사했다. 선조는 과연 이같은 상황을 예측했을까? 여하튼 첩자(妾子)이자 차자(次子)인 광해군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왕은 물론 왕세자가 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료들 가운데는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에 힘쓴다.’고 유년 시절의 그를 칭찬하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총명’과 ‘면학’ 만으로 적자(嫡子)도 장자(長子)도 아닌 그의 태생적인 한계가 극복될 수는 없었다. ●“총명하고 학문 좋아해 세자 책봉” 광해군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임진왜란이었다.1592년 4월28일,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군과 맞섰던 신립(申砬) 휘하의 조선군이 참패했다는 소식이 서울로 날아들었다. 일본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란 소문에 도성의 분위기는 공황 상태에 빠졌고, 조정 신료들은 선조에게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뾰족한 대책이 없었던 선조는 건의를 받아들였다. 파천하기로 결정한 직후 우부승지 신잡(申)은 선조에게 빨리 왕세자를 책봉하여 민심을 수습하라고 건의했다. 그는 충주에서 전사한 신립의 형이었다. 선조는 대신들을 선정전(宣政殿)으로 불러모았다. 선조가 ‘왕세자로 누가 좋겠냐?’고 물었을 때 대신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그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선조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대신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신하된 처지에 ‘미래의 주군(主君)’을 선택하거나 추천하는 것은 엄청난 불충(不忠)이기 때문이다. 선조의 고민과 대신들의 침묵은 낮부터 한밤까지 이어졌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지쳤는지 자리를 피하려 하자, 신잡이 ‘오늘 끝장을 봐야 한다.’고 잡아끌었다. “광해군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세자로 삼고 싶은 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선조의 이 한마디에 대신들은 “종묘 사직과 생민들의 복입니다.”라고 외쳤다. 광해군이 엉겁결에 왕세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4월30일, 선조와 광해군은 북으로 파천 길에 올랐다. 이윽고 조정이 평양에 머물고 있던 5월, 선조는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아 함경도로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북상을 막아낼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선조는 최악의 경우, 의주(義州)를 거쳐 명나라로 귀순할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선조는 더 이상 ‘조선의 왕’일 수 없었다. 분조란 바로 그같은 상황에 대비,‘조정을 쪼개’ 광해군에게 넘기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왕세자가 되자마자 ‘나눠진 조정’을 이끄는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전쟁으로 지친 민심을 위무(慰撫)하고, 근왕병을 모집하여 전란을 수습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조명연합군 승리뒤 明의 힘 통감 광해군의 분조 활동은 1592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2월까지 평안도·함경도·강원도·황해도 등지를 옮겨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했다. 그가 순행(巡行)했던 지역의 주변에는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어 경호 문제가 심각했다. 때로는 험준한 산악과 고개를 넘거나 노숙을 하는 것도 피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분조 활동이 남긴 성과는 컸다. 국왕 선조가 궁벽한 국경 도시 의주에 머무는 한, 황해도 이남의 사서(士庶)들에게 조정의 존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 당시 의주의 조정은 강화도를 매개로 서해(西海)를 통해 삼남지방과 겨우 연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이 할퀴고 간 내륙지역의 백성들 가운데는 나라가 이미 망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그때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나타나 조정이 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광해군의 출현은 백성들에게 ‘충성을 바칠 대상’이 아직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592년 12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원군이 들어오고 이듬해 1월, 평양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다. 전세가 역전되고 일본군이 후퇴하자 전쟁이 곧 끝날 것이란 기대가 넘쳐났다. 하지만 명군이 벽제(碧蹄) 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하면서 상황은 다시 꼬이기 시작했다. 패전 이후 명군 지휘부는 입장을 바꾸었다. 일본군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조선을 위해 피를 흘릴 수는 없다고 했다. 지루한 강화(講和)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 시작 이후 명군 지휘부는 조선 조정에 대해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강요했다. 일본군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명군 지휘부는 자신들의 명령을 어기고 일본군을 공격한 조선군 장수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기도 했다. 조선군의 작전통제권은 명군 지휘부에 의해 박탈되었다. 선조가 명군 지휘부의 방침에 격렬히 반발하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국왕을 교체하겠다는 협박이 흘러나왔다. ‘무능한 선조를 퇴위시키고 유능한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것이다.‘광해군 카드’로써 선조를 길들여 자신들의 강화 방침을 관철시키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에 선조는 ‘광해군에게 양위(讓位)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광해군의 위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을 통해 명나라의 실체와 권력의 속성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석의 Let’s Wine] 보르도가 최고인 까닭

    [김석의 Let’s Wine] 보르도가 최고인 까닭

    아무리 프랑스 와인의 시대가 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프랑스 와인은 역사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보르도’가 프랑스라는 이유만으도로 그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여러나라 와인들의 공략에도 불구하고 보르도 와인은 여전히 건재하다. 훌륭한 빈티지의 값비싼 와인들은 출시되기도 전에 와인 투자가들에 의해 ‘솔드아웃’된다. 그렇다면 질문하나. 보르도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이 된 걸까? 12세기의 유럽, 그 역사의 중심에는 프랑스 왕국, 아키텐(Aquitaine) 공국(公國), 잉글랜드 왕국이 등장한다. 프랑스 왕국이 쇠퇴일로에 있었던 반면, 아키텐은 윌리엄 10세의 나라였다. 윌리엄 10세는 공작의 신분이지만 그가 소유한 아키텐의 면적이 당시 프랑스 왕국 국토의 3배를 넘을 정도로 부유했으며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윌리엄 공작에게는 아주 아름다운 딸, 엘레아노르가 있었다. 엘레아노르가 15세 되던 해에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꽃다운 나이에 따분한 파리생활과 사랑없는 결혼은 결국 이혼으로 끝을 맺었다. 얼마후 재혼을 하는데, 상대는 훗날 영국 왕실의 대를 잇게 되는 열한 살 연하의 헨리2세였던 것. 엘레아노르는 헨리 2세와의 결혼으로 인해 프랑스 왕비에 이어 영국의 왕비가 된다. 이 결혼은 훗날 ‘백년전쟁’의 원인을 제공하는 중세 최대의 결혼 스캔들이 되지만, 보르도 와인의 역사에 있어서는 보르도 와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당시 영국 국민들은 와인의 명산지로 불리던 아키텐 출신의 프랑스에서 시집온 왕비를 환영했다. 당시의 결혼 관습은 신부의 재산을 모두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엘레아노르의 전재산은 영국 왕실의 소유가 되었고, 풍요로운 보르도 땅 전체가 하루 아침에 영국의 재산이 됐다. 당시 영국에서는 지하수가 오염되어 있었기에 음료수 공급을 위해 보르도,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와인을 수입해서 사먹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보르도가 영국에 병합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보르도는 수자원이 풍부한 땅. 또한 보르도 항구에서 배를 띄우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로 가는 뱃길이 짧아 운송비가 적게 드는 이점이 있었다. 보르도 와인은 영국인들에게 영국 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령인 보르도 와인에는 더 이상 관세를 부과하지 않아 가격 또한 싸졌다. 이러한 지원 정책에 힘입어 보르도 와인은 런던항의 와인 하역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와인은 경쟁에서 밀려나게 됐고 나중에 주정강화 와인으로 수출 상품을 변경하게 된다. 자랑스러운 왕비, 영국의 우대정책 등으로 한층 고무된 보르도 사람들은 점점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런던으로 보내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차츰 그 결과가 와인의 품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보르도 와인은 ‘여왕의 와인’ 혹은 ‘와인의 여왕’이라 불리며 지금까지도 세계 와인 시장에 군림하고 있다. 한국주류수입협회 부회장(금양인터내셔널 전무)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조선 세조(1417∼1468)는 불교대호왕(佛敎大護王)으로 불릴 만큼 전무후무한 불교 후원자였습니다. 양주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 양평 수종사,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건봉사·표훈사·유점사, 양양 낙산사, 영암 도갑사, 합천 해인사 등 방방곡곡의 수많은 절을 창건하거나 중수했지요. 세조는 온몸의 종창으로 크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왕위에 오르고자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니 자업자득이라고 수군거렸지요. 불교에 의지한 것도 업보(業報)를 씻기 위해서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불교 중흥에 힘쓴 가장 큰 이유는 왕권을 제약할 만큼 성장한 신흥사대부를 견제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어린 단종이 집권한 뒤 유신(儒臣) 세력이 부각되면서 왕권과 신권(臣權)의 균형이 무너지자 ‘국정의 원상회복’을 외치며 반기를 들었던 이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입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제2호 원각사터10층석탑은 이처럼 세조가 중심에 선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이 벌인 주도권 다툼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소재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원각사의 창건과 10층석탑의 조성은 세조가 국왕의 권위를 보여주려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조가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할 수 있을 만한 권위의 상징물을 만들고 싶은 의도를 원각사로 구현시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교국가의 도성 한복판에, 그것도 주변 어디서나 바라보였을 12m짜리 고층불탑이 세조 13년(1467년) 완성됐을 때 신진사대부들의 굴욕감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인가 석탑의 8∼10층이 땅에 끌어내려진 뒤 1946년 미군공병대의 크레인이 동원되어서야 제 모습을 찾은 것도 유신들이 가졌던 불쾌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13세에 불과한 성종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사림정치의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성종 5년(1474년) 불상은 회암사로 옮겨지고, 승려들도 내보내 원각사는 절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조광조 등이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며 도학정치를 부르짖던 중종시대에 원각사터는 아예 택지로 분양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시대 잇따라 큰 불이 나고,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면서 원각사터에는 다시 10층석탑과 탑비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년) 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원각사터는 왕실과 유신들의 상호견제 속에서 빈터로 남아 있게 됩니다. 원각사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워진 라마불교의 영향이 짙은 원나라풍의 경천사10층석탑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대리석탑이지만, 조선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 미술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미술사적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가치까지 부여했을 때 원각사탑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가능해질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사우디 美와 거리두기?

    대표적인 친미 아랍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중동 분쟁과 관련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미국과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압둘라 사우디 국왕은 28일(현지시간) 리야드에서 개막한 아랍연맹(AL) 정상회담 기조연설에서 미군의 이라크 주둔에 대해 “불법적인 점령”이라며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 서방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금융 봉쇄를 즉각 해제하라고 촉구했다.“아랍 국가들이 종파주의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외세의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경고도 덧붙였다. 압둘라 국왕의 이러한 발언은 사우디가 지난달 팔레스타인 양대 정파간의 공동내각 구성 원칙을 담은 ‘메카 선언’을 중재하는 등 아랍권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주목을 끌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이날 보도했다. 압둘라 국왕은 이달 초 레바논 분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을 리야드로 초청하기도 했다. 미국의 불편한 심기에 아랑곳 없이 이란과의 협상에 기꺼이 나설 수 있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무스타파 하마르네 요르단대학 전략연구소장은 압둘라 국왕의 이같은 독자 행보에 대해 “사우디가 언제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편을 들기보다 동맹 국가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 정부에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아랍연맹 정상들은 이날 회의에서 2002년 베이루트 회의 때 채택했던 평화안을 다시 추진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사우디가 당시 제안한 이 평화안은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점령한 땅을 모두 반환할 경우 모든 아랍 국가가 이스라엘을 인정해 수교한다는 내용이다. 평화안의 수정을 원하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하는 미국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결정이다. 한편 아랍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해 이라크, 레바논, 수단 다르푸르 사태 등 지역 현안들에 대한 공통의 입장을 정리해 29일 발표하고 이틀간의 회의를 마칠 예정이다. 압둘라 국왕을 비롯한 친미 아랍 국가들의 행보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외교부 엉터리 보고 대통령 ‘망신살’

    중동을 국빈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6일 사우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사우디 국왕과의 정상회담은 양국 수교 이후 처음”이라고 언급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같은 내용을 잘못 보고한 청와대와 외교부가 눈총을 받고 있다. 외교부 조희용 대변인은 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사우디 국왕과의 정상회담이 처음이라는 취지로 하신 말씀은 외교부가 사실 관계를 잘못 보고했고 이를 근거해 하신 것”이라며 “1980년 5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쿠웨이트 방문에서 정상회담을 예정대로 마치셨다.”고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중동지역을 담당하는 아중동국의 직원들이 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과거 정상회담 관련 내용을 찾지 못하고 청와대에 부실한 자료를 보고한 것으로 파악됐다. 청와대도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사우디 및 한·쿠웨이트 정상회담이 수교 이후 처음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한편 노 대통령이 28일 처음으로 국빈 방문한 카타르에서 현지 영자신문인 ‘카타르 트리뷴’이 ‘노 대통령’을 ‘고 대통령’(President Koh)라고 표기하는 ‘중대한 실수’를 범해 해당 신문이 사과문을 게재키로 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노대통령 “北지도부에 진심 전해달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입니다.”(허종 쿠웨이트 주재 북한대사) “진심으로 합니다.”(노무현 대통령) 쿠웨이트를 국빈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27일(한국시간) 사바 알 아흐메드 쿠웨이트 국왕이 주최한 국빈만찬 시작 전 허종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와 조우했다.이 자리에는 아시아 지역 대사들이 초청됐고 노 대통령은 만찬 시작 한 시간 전쯤에 허 대사의 참석을 보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허 대사가 먼저 자신을 소개하자 노 대통령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시거든 전해주세요. 진심으로 합니다.”라고 말했다. 허 대사는 노 대통령의 두 손을 잡은 채 “성과를 바란다.”고 화답하고 자리를 떴다. 청와대 대변인인 윤승용 홍보수석은 노 대통령의 이같은 의미심장한 언급에 대해 “우리가 진심으로 남북관계와 대북정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에 전해달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마지막 방문국인 카타르에 도착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관계를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동반자 관계로 확대하기로 했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허종은 누구인가 허 대사는 2004년 3월 쿠웨이트에 부임했으며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공사와 유엔주재 차석 대사를 역임한 한반도통 외교관. 그는 광복 후 월북, 북한최고인민회의 초대의장을 지내다 지난 51년 사망한 허헌의 아들이라는 전언이다.
  • “아내가 전당포에 보석 맡기고 연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작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백년동안의 고독’은 생계난으로 아내가 전당포에 보석을 맡기고, 편집자가 우편요금까지 부담하면서 나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백년동안의 고독’ 작가인 마르케스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그는 26일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과 8명의 전·현직 대통령 등 1200여명 앞에서 작품의 일화를 소개했다. 마르케스는 이날 콜롬비아 휴양도시 카르타헤나에서 개막된 제4회 스페인어 로열아카데미에 참석해 13분동안 연설했다. 주최측은 ‘백년동안의 고독’ 특별판을 발행해 노작가를 기렸다. 최근 80세 생일을 맞은 노작가는 평소 성격대로 소박하고 진솔된 자세로 ‘백년동안의 고독’을 집필하던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당시 전당포에 보석을 판 돈으로 생활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또 집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에 있는 편집자에게 원고를 보내면서 우편요금이 모자라 원고뭉치를 절반으로 나눈 일화도 소개했다. 실수로 뒷부분을 먼저 보냈다가 편집자가 열심히 읽고는 우편료를 부담해가며 전반부를 보내달라고 해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1967년에 출간된 ‘백년동안의 고독’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멕시코 연합뉴스
  • 노대통령 “이라크파병 최선의 선택”

    노무현 대통령은 26일 쿠웨이트 주둔 다이만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결정에 대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내린 최선의 판단”이라고 규정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선택이 역사적으로 결코 비난받거나 잘못된 선택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또 이날 사바 알 아흐메드 쿠웨이트 국왕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 우호협력 관계를 다양한 분야에서 포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호혜적인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특히 한국이 쿠웨이트의 주요 에너지 자원 수입국이란 점을 중시,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비롯해 에너지 분야에서 장기적 협력의 틀을 수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상호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쿠웨이트를 국빈방문한 노 대통령은 공항 환영행사를 마친 직후 쿠웨이트 알리 알 살렘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공군 수송부대인 다이만부대를 방문했다.노 대통령이 해외파병 주둔부대를 방문한 것은 2004년 12월 이라크 아르빌 주둔 자이툰부대를 방문한 이후 두 번째. 노 대통령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전쟁에 대해 많은 찬반 논란이 있고 한국군의 파병에 대해서도 많은 찬반 논란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여러분이 군인의 신분으로 파병된 이상 여러분의 일은 국가의 결정을 따른 일인 만큼 자부심과 보람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뒷날 어떤 역사적 평가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그 시기의 대통령과 정치지도자들이 책임을 질 일”이라면서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결코 부끄럽지 않은 선택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오찬이 끝난 뒤 부대에서 마련한 대형 브로마이드에 “장병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여러분의 땀은 국가발전의 밑거름입니다.”라고 서명했다.1시간30여분 동안의 방문을 마친 노 대통령 일행이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부대원들이 애국가를 제창했다. 노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는 당황하면서도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여 장내가 숙연해졌다. 앞서 노 대통령은 26일(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의 알파이잘리아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대한민국이 살려면 친미도 하고 친북도 해야 한다.”며 대북 지원이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모리타니 대통령 압달라히 당선

    25일 실시된 아프리카 모리타니 대통령 선거에서 시디 울드 셰이크 압달라히(69) 후보가 5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고 AP·AFP통신 등 외신들이 26일 보도했다. 압달라히 후보는 2005년 8월 군부의 쿠데타로 축출된 마우이 울드 타야 전 대통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으며, 의회내 다수정치 세력인 18개 정당연합의 지지를 받아 당선이 유력시됐었다. 이번 대선은 모리타니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선거로 평가되고 있다.타야 전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 장례식에 참석하러 간 사이 쿠데타를 일으킨 엘리 울드 모하메드 발 대령은 당시 2년 이내에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공약했다.발 대령을 포함한 쿠데타 세력은 이 약속에 따라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선거관리 업무만을 맡았다. 인구는 300만명에 불과하지만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5배 크기인 모리타니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집권 세력의 부정선거와 잦은 쿠데타를 겪어왔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韓 - 사우디 정상회담 “걸프협력회의와 FTA 추진”

    사우디아라비아를 공식 방문 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사우디 의회에 해당하는 국왕자문회의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중동 경제협력확대의 틀로 한국과 걸프협력회의(GCC)간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자 한다.”면서 “올해 안에 GCC측과 협상개시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밝힌 ‘한-GCC FTA 체결방침’은 ‘21세기 한·중동 미래협력구상’의 하나라고 청와대측은 설명했다. 지난 1981년 구성된 GCC는 걸프협력회의(Gulf Cooperation Council)의 약자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 연합, 바레인 등 걸프지역 6개 국가들이 역내 정치·경제·사회 부문의 통합을 위한 지역협의체이다. 청와대는 한-GCC FTA 추진배경에 대해 “우리나라는 GCC 역내 국가들로부터 원유 수입의 68%와 LNG 수입의 47%를 도입하고 있어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하다.”면서 “중동의 플랜트 발주 규모가 2005년 1000억달러 규모를 뛰어넘는 등 증가 추세라 플랜트 설비 조달선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FTA 추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앞서 노 대통령은 24일 저녁 (한국시간 25일 새벽)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 국왕과 정상회담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기고] 카타르,중동의 새로운 중심/김종용 주 카타르 대사

    노무현 대통령이 27일 중동 3개국 순방 마지막 나라로 아라비아반도 서쪽 끝 카타르를 찾는다. 1974년 양국 수교 이래 우리나라 정상의 방문은 처음으로, 최근 수년간 양국 관계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카타르는 경기도 정도의 크기로 작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가진 나라다. 세계무역기구(WTO) 도하 라운드가 이곳에서 출범했고, 지난해 아시안게임을 성공리에 치름으로써 국가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바탕으로 대이라크 전쟁을 지휘하는 미국의 중부군사령부도 카타르에 있다. 무엇보다 카타르의 국가적 파워는 바다 건너 이란과의 사이에 있는 세계 최대 천연가스전 북부가스지대에서 비롯된다. 카타르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러시아와 이란에 이어 세계 3위. 우리나라가 900년을 쓰고도 남을 양이 매장돼 있다고 한다. 생산량도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자원부국 카타르를 새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 리더십이 천연자원에서 창출되는 국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재창출하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위한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막대한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한국 등 해외의 기업과 자본 유치에도 열정적이다. 국가 전체를 개조해 카타르를 중동의 중심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야심찬 비전을 제시한다. 카타르의 경제발전 속도는 경이로운 수준이다. 최근 수년간 평균 성장률이 30%에 이르며 1인당 국민소득도 6만 7000달러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다. 카타르 정부는 2012년까지 13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자본을 신도시와 신공항, 도시기반시설, 항공기 및 LNG선 구입에 투자하겠다는 마스터플랜을 추진 중이다. 카타르 국민들도 2012년 이후 인근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걸프 지역의 허브가 될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다. 카타르가 우리나라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일반의 상상을 넘는다. 카타르는 한국의 입장에서 제1위 천연가스 공급국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천연액화가스(LNG) 소비량의 30%를 이 나라에 의존하고 있고, 원유도 전체 수입의 6% 이상을 의존한다. 각종 인프라사업 수주도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이어 카타르의 해외건설 수주액이 3위다. 카타르에 LNG를 의존하지만, 카타르서 생산된 LNG의 거의 전량을 우리의 조선사가 제작한 LNG 운반선이 전 세계로 운송한다. 카타르는 2012년까지 80척의 LNG 운반선을 확보할 계획인데 거의 대부분을 우리나라 조선사들이 수주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보완적 교역이야말로 국가간 ‘윈-윈’ 협력의 표본이다. 카타르가 짧은 기간에 최대한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는 만큼 이보다 앞서 독보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과의 협력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인천과 도하를 오가는 주 4회 직항편 전좌석이 거의 매진될 정도로 양국간 교류가 갈수록 늘고 있다. 카타르의 가스가 없으면 당장 우리나라는 겨울을 나기 어렵다. 반대로 카타르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냉방제품은 한국산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카타르 방문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동반자라는 점을 양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양국 관계를 실질적으로 격상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종용 주 카타르 대사
  • [어린이책꽂이]

    ●100년 전 우리나라에 가다!(이돈수 지음, 서울문화사 펴냄) 지금의 서울 충무로 거리는 예부터 ‘진고개’라 불렸다. 그러나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들어서자 일본인들은 ‘혼마치’라고 부르면서 일본인 마을을 만들었다. 수표교는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청계천의 다리로 1420년(세종2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는 마밭이 있어 ‘마전교’라고 했지만, 훗날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다리 옆에 수표석을 세운 다음부터는 ‘수표교’라 불렸다. 옛날 희귀 사진을 곁들인 어린이 역사문화기행서.1만원. ●도도는 왜 동물원에 없을까?(프레드 얼리치 지음, 이예미 옮김, 바다어린이 펴냄) 도도는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는 오리만한 새다. 모리셔스 섬에 살던 이 새는 지금부터 약 300년 전에 멸종됐다. 이 책에서는 도도 외에 매머드, 검치호랑이, 티라노사우루스, 모아새, 콰가얼룩말 등 멸종된 동물들을 만날 수 있다. 어떤 동물이 보통 50년 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멸종된 것으로 간주된다. 실러캔스, 매너티, 아메리카흰두루미, 피리물떼새 등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8000원. ●레오나르도 다빈치(브리지트 라베 등 지음, 신혜정 옮김, 다섯수레 펴냄)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그릴 때 당시 이탈리아 화가들이 즐겨 쓰던 에그 템페라, 즉 물감에 달걀 노른자와 물을 섞어 갠 것을 쓰지 않았다. 대신 북유럽 네덜란드 화가들이 쓰던 유채물감을 썼다. 이렇게 해서 여러 겹으로 덧칠된 섬세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이끈 천재 이야기.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1세는 이 세상에서 레오나르도보다 학식을 더 많이 쌓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9000원. ●달은 어디에 떠 있나?(정창훈 지음, 웅진주니어 펴냄) 우리 속담에 “그믐달 보려고 초저녁부터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을 너무 서두른다는 뜻이다. 어떤 달이 언제 뜨는지 모르면 그믐달을 보려고 초저녁부터 기다렸다가 허탕을 치게 될지도 모른다. 책은 달과 지구, 태양과의 관계를 밝힌다.8500원. ●암행어사 호랑이(김향수 지음, 한솔수북 펴냄) 바람무늬 휘날리며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호랑이 이야기. 글을 읽다 보면 절로 어깨춤이 들썩이고,‘얼쑤’‘그렇고 말고’ 등의 추임새가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흥을 안겨준다. 까치가 소나무에 앉아 있고, 소나무 아래 호랑이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까치를 바라보고 있는 민화풍 그림이 이야기의 실감을 더해 준다.8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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