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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북 文奎鉉 신부 귀국/법 위반 확인땐 사법처리

    국가안전기획부는 19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文奎鉉 신부일행 9명이 일주일간의 북한 방문을 마치고 이날 하오 귀국함에 따라 사제단측을 통해 文신부 등에게 금명간 자진출두해 줄 것을 통보했다. 안기부는 文신부 등이 방북중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가하고 金日成 묘지를 참배하는 등 종교교류에 국한된 방북승인 조건을 위반했는지 여부를 집중조사,사실로 확인되면 文신부 등을 국가보안법(고무·찬양)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로 사법처리할 방침이다. 북한방송은 최근 文신부 등이 지난 11일 평양 장충성당 축성 10주년 기념미사 집전 등을 위해 북한을 방문,13일 金日成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하고 15일에는 판문각에서 열린 북측의 통일대축전 행사에 참석했다고 보도했었다.
  • 남부 폭우… 경부선 교통대란

    ◎곳곳 산사태… 철도·고속도 덮쳐 한때 운행중단/복구반 긴급투입… 하오부터 통행재개/대구공항 항공기도 결항… 승객 큰 불편 전국을 차례로 할퀴고 있는 게릴라성 폭우가 16일 경북 중·북부와 전북,충청지역에 강타,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 운행이 한동안 중단되고 대구공항의 항공기마저 결항함으로써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교통대동맥인 경부축에 교통대란이 빚어졌다. 이날 상오 9시쯤 산사태로 무너져내린 토사가 경부선 철도 김천역∼직지사역 구간 50여m를 덮쳐 상·하행선 열차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또 추풍령역과 신암역 사이에서도 산사태로 철도가 유실됐고 상오 10시40분쯤에는 김천시 아포읍 국사리의 소하천 제방이 붕괴되면서 속칭 아야마을 입구 건널목이 유실됐다. 철도청은 보선사무소 직원 170여명을 긴급 동원,복구작업에 나서 상오 11시30분부터 상행선 부분운행을 재개한데 이어 하오 4시35분부터는 상·하행선의 운행을 정상화했다. 상오 9시40분쯤엔 김천시 아포읍 석산리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에서 산사태가 발생,차량운행이 4시간20분동안 중단됐다. 또 폭우로 서울∼대구간 여객기 4편의 운항이 중단돼 요금환불 소동이 빚어지는 등 이날 대구·부산 등 영남지역은 교통대란에 시달려야 했다. 철도와 항공편 결항으로 주말연휴를 즐기고 상경하려던 피서객들이 고속도로로 몰려 대구시 동구 신천동 고속버스터미널에는 서울로 가려는 승객들이 몰려 매표소마다 50∼100여m씩 줄을 서는 등 하루종일 큰 혼잡을 빚었고 고속도로는 상·하행선 모두 김천구간을 중심으로 10㎞이상 지체가 계속됐다. 한편 이날 폭우로 경북과 전북 일원,충북 보은 등에서는 농경지와 가옥이 침수되고 산사태로 주민이 목숨을 잃는 등 피해가 속출했다. 상오 9시20분쯤 경북 김천시 성래동 金진수씨(55)가 집을 덮친 뒷산 흙더미에 깔려 숨지는 등 하루동안 경북과 충남에서 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위천둑이 10여m 붕괴돼 위양·교촌리 주민 500여명이 긴급대피하고 농경지 80㏊가 침수됐으며 정곡면 송례저수지도 붕괴조짐을 보여 120여 주민들이 고지대로 대피했다. 평균 102㎜의비가 내린 전북지역에서는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용산저수지둑 상단 일부가 무너져 내려 주민 200여명이 긴급 대피했고 상오 9시30분쯤엔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시립도서관 축대가 무너지면서 朴규남씨(47)의 집 등 가옥 2채를 덮쳐 朴씨등 2명이 다쳤다. 한편 금강홍수통제소는 금강 하류에 내렸던 홍수주의보를 16일 상오 9시30분 홍수경보로 대체했으며 낙동강홍수통제소는 상오 10시를 기해 낙동강지역에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 白雪 무궁화/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사학자이던 호암(湖岩) 文一平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의생리를 ‘조개모락(朝開暮落)’으로 표현하고 여름부터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피는 꽃의 끈기를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 군자의 이상’에 비유한 바 있다. 영문학자 李敭河는 ‘요사라든가 망집,오만을 찾아볼 수 없이 어디까지나 점잖고 겸허하고 너그러운 대인의 인내’는 ‘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다’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그러한 무궁화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 못지않은 우여곡절과 파란이 얼룩져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첫째가 일제때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의지로 상징되는 무궁화를 뿌리째 뽑아 없앴고 국사도 배울 수 없게 하고 애국가도 부를 수 없게 했다. 그러나 황성신문을 발행하던 한서(翰西) 南宮檍이 배화여학교에 재직하면서 여학생들에게 조선지도에 무궁화를 수놓게 한 것이 전국적으로 퍼져 여염집에서도 무궁화 지도를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는 지난 56년의 ‘국화 논쟁’이다. 일부 지식층은 ‘실속없는 꽃’이라는 이유로 국화를 다른 꽃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폈으나 이미 국가의 정신적 이미지로 정착된 만큼 ‘통일이 될 때까지 그대로 두자’는 의견으로 논쟁은 매듭지어졌다. 무궁화가 국화가 된 연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애국가의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과 1920년대 도산(島山) 안창호가 청산같은 웅변을 통해 조선을 ‘무궁화 동산’으로 부른 것이 국화가 된 동기로 해지고 있다. 그동안 무궁화는 좀더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해서 수없이 개발되어왔으며 배달계로 분류된 백색만 해도 ‘옥선’‘한마음’‘한빛’‘일편단심’등 수십종에 이른다. 다만 이 무궁화들에는 백색에 붉은 단심(丹心)이 있는데 비해 광복절에 맞춰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선보인 무궁화에는 꽃 가운데 단심을 없앤 것이 특징이다. 꽃 전체가 눈부신 흰빛을 띠기 때문에 꽃이름도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설’로 명명됐다. 긴 시험과정을 거쳐 비로소 완성을 보인 이 꽃은 어쩔 수 없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한국인의 기상에 걸맞는다는 느낌이다. 언제까지나 지지 않는 동방의 꽃으로 한라에서 백두까지 줄기차게 퍼져가기를 기대해본다.
  • 親日의 군상:1­2/외국의 민족반역자 처벌(정직한 역사 되찾기)

    ◎佛,나치 협력자 15만명에 실형/대만­비밀경찰조직 軍統局서 명단 작성/중국­‘인민의 적’ 규정… 인민재판 통해 처단 2차대전 종전은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막을 고함과 동시에 준엄한 단죄의 서곡이기도 했다.종전후 승전국들은 ‘전범재판’을 통해 패전국의 전쟁지도자들을 처단했으며,일부 피지배국가들은 자국내의 민족반역자들에게 준엄한 단죄를 하였다. 유럽의 ‘뉘른베르크재판’과 일본의 ‘도쿄재판’이 전범재판이라면,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국가와 중국 대만 등이 외세협력자를 처단한 것은 반민족행위자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 국가는 종전 직후 민족반역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암울했던 피지배의 역사를 극복할 수 있었다.반면 우리는 해방후 제헌국회에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방해로 도중에 와해,친일파 척결은 ‘미완의 역사’로 기록돼 왔다.외국의 반민족행위자 단죄의 실상을 알아본다. ○150만∼200만명 연루 ▷프랑스◁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처단은 1944년 드골장군이 나치협력자 처단은 전담재판소 개설과 ‘비(非)국민제도’ 창설을 골자로 하는 훈령 발포로 본격화됐다.저항작가 장 포랑의 연구에 따르면,이 숙청조치에 관련된 사람은 모두 150만∼200만명으로 추산된다.이들중 죄상이 경미한 99만명은 1개월 이내에 풀려났으나 15만여명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원수격인 페탱을 포함,3부요인 등 고위인사를 특별심판한 최고재판소는 1960년까지 계속된 재판에서 총 108건을 처리,18명에게 사형,2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15명에게 공민권 박탈조치를 내렸다. 페탱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으나 감옥에서 자살하였다. ○지식인 대부분 중벌 일반법원은 총 취급건수 14만건중에서 4만여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하고 나머지 5만7천건을 재판하여 6,763명에게 사형,2,777명에게 종신 강제노동형,2만6,529명에게 유기 강제노동형,3,678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선고했다.사형선고를 받은 자 가운데 779명은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또 지방법원은 총 12만건을 재판에 회부,4,783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이들중 3,000여명의 사형이 집행됐다.시민법정 역시 다수의 나치협력자를 처단하였다.11만5,000여건을 취급하면서 9만5,000명에게 ‘비국민 판정’을 내렸다.비국민 판정은 선거권 박탈,공직진출자격 박탈,무기 소유·휴대 금지 등 사실상 시민의 권리를 박탈한 준 사법적 조치로,이는 반역자들을 매장하고 그들의 재부상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랑스 특유의 ‘발명품’으로 불린다. 드골정부는 특히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과 작가 등 지식인을 대부분 사형·무기징역 등 중벌로 다스렸다.나치지배하 비시정권에 협력한 원로언론인 6명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을 비롯해 저명한 작가·시인들도 예외없이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2년5개월 漢奸재판 ▷중국·대만◁ 전후 중국과 대만은 각자 친일파를 처단하였는데 처단방식에서는 서로 차이가 있었다.우선 중국은 1946년 4월부터 2년5개월에 걸친 ‘한간재판’(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름)에서 ‘인민재판’ 방식을 취했다.피의자에 대해 검찰의 조사가 끝나면 민중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민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을 진행,군중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중국공산당 정부는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들의 울분을 정화시키고 민심을 살 목적으로 이 방식을 취하였다.특히 중국공산당 정부는 친일파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간재판을 통해 봉건세력을 제거하고 동시에 혁명의 기반을 닦는 계기로 활용하였다. ○‘유전무죄’ 유행하기도 한편 蔣介石의 국민정부는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피의자를 체포·기소·재판하는 ‘규문(糾問)주의’방식을 취하였다.국민정부는 비밀경찰조직인 군통국(軍統局)이 작성한 한간 명단을 근거로 ‘한간사냥’을 진행하였는데,가정부로 위장해 근무해오던 특무요원이 그 주인을 체포한 예도 있었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관련 공무원들의 부패가 심했던데다 1심판결로 사형을 집행하는 등 감정적 처리가 빈발했었다.또 재판관중에 친일파가 포함된 사실이 밝혀져 국민정부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데다 국민정부측이 汪精衛(일제의괴뢰정부인 남경정부의 주석)의 무덤을 폭파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민중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국의 경우/친일파 청산 ‘용두사미’/반민특위 의욕적 출발… 사형선고 1명마저 석방 49년 1월 8일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의 검거를 시작으로 본격 활동에 들어간 반민특위는 8월말 업무를 마감할 때까지 8개월동안 총 682건(여자 66명 포함)을 처리하였다. 이중 반민특위는 중추원 참의 등 당연범 198건을 포함,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여 이들중 305명은 체포(자수 61명 포함)하였고 미체포자는 173명이었다.또 반민특위는 이들중 84건을 석방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하였는데 221건이 기소되었다. 기소사건 가운데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이 종결된 건수는 38건으로 이중 체형선고는 12건이었다.최고형인 사형은 일제 고등경찰 출신의 金悳基가 유일하였는데 그는 6·25 직전 감형으로 풀려났고 나머지 유죄판결자 역시 이같은 경로로 전부 풀려났다.결국 반민법 해당자로 처단된 자는 아무도 없는 셈이다. 당초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자를 7천명 정도로 잡고 왕성한 의욕을 보였으나 친일파의 방해와 인력부족,중도에 공소기간 단축으로 친일파 청산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친일 문제 반드시 청산돼야/민족통일과 연결… 새 역사 출발점으로/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일제 강점시대의 친일파들은 대부분 죽었다.따라서 아직도 친일문제가 논의되어야 하는가,친일파 문제가 과연 현실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법도 하다.그러나 친일문제는 엄연히 현실문제요,지금부터라도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문제다. 역사교육 및 사회정의 차원에서 친일파 문제는 청산돼야 하며 그것은 오늘의 현실적 과제이다.역사에서 李完用 등은 분명히 매국노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매국행위로 얻은 재산은 고스란히 후손들에게 전해져 있는 게 현실이다.그밖의 친일행위자들도 그 자신이 단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친일행위로 얻어진 정치·경제·사회적 기반이 후손들에게 전해져서 그대로 누려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국재산 버젓이 상속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역사교육이란 것이 왜 필요하며,사회정의라는 말이 왜 있어야 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반세기가 아니라 1백년이 지났다 해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불가피함을 알게 된다. 친일파 문제가 청산되지 않음으로써 친일 논리가 청산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李完用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친일파들은 그때 그때마다 저들의 친일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들을 내놓았다. 그것을 요약하면,한 시대 한 민족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그 역사를 누가 주체가 되어 움직여 가는가,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전진해 가는가 하는 문제보다 주인이야 누구든,폭압통치가 자행되건 말건,그 사회가 물량적으로 ‘풍부’해지고 경제적으로 ‘발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발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식의 논리라 할 수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그들에 의해 조작되었던 이 되지 못한 논리가 이른바 한·일 국교 재개 이후 일본 학계에서 다시 살아나더니,어느 틈에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동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된 원인의 하나는 해방 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친일파들의 자기합리화 논리를 우리가 이론적으로 극복하지 못한데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이래도 친일파 문제가 현실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친일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현실문제로 되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친일문제 청산은 일본과의 문화교류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도 중요한 문제다.지금 우리는 일본 대중문화를 개방하려 하고 있다.그런데도 일본은 아직 과거의 침략행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국주의 찬양 문화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벽을 쌓고 지낼 수는 없다.우리의 문화적 주체성을 확립하려면 그 벽을 낮추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일본문화 개방 폭을 넓히는 전제조건으로서,또 우리의 문화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일제시대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청산은 불가결하다. ○日 문화개방 전제조건 친일문제 청산이 민족통일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통일이 어느정도 전망되고 있지만,통일의 시점이 바로 민족사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 출발점에서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부각될 일이 바로 식민지 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미 교환된 남북합의서는 어느 한 쪽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우위통일이 아니라 분명 남북 대등통일을 약속하고 있다.통일이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분단시대 청산은 바로 일제시대 청산과도 연결될 것이며,이 점에서도 남북 양쪽이 대등한 조건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이렇게 보면 친일파 청산은 현실적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 親日의 군상:1­1/시리즈를 시작하며(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청산 ‘참된 역사’의 출발/日帝 앞잡이 기득권층 형성… 反통일세력화/민족자존 위해 더 미룰수 없는 ‘금세기 숙제’ 20세기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용어중 ‘친일파’만큼 불명예스런 것도 없다.‘친일파’로 한번 낙인찍히면 씻을 수 없는 오욕으로 영원히 남아 왔다. ‘친일파=매국노=반민족행위자’라는 등식으로 인식되는 친일파문제는 지금에 와서도 민감한 사안으로 남아 있다.이 문제는 그동안 쉽게 손대기가 어려웠고 학계에서조차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돼 왔다. ○‘쓰이지 않은 역사’로 방치 친일파문제는 그 죄상(罪狀)에 대해 단죄는 물론 역사적 평가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다.간헐적으로 친일논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사회에서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다는 증거다.수 년전 매국노 李完用 후손의 ‘땅찾기 소동’은 친일파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이슈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민감한 이슈를 이 시점에서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왜인가?그 이유는 해방 반세기가 지나서도 마치 ‘역사의 미라’처럼 온존해 있는 친일파문제를 금세기내에 매듭짖고 정의가 살아있는 정직한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그동안 우리 사회는 해방후 친일잔재를 척결하지 못한 탓으로 민족정기가 땅에 떨어지고 가치관의 혼란도 극심했었다.일부 친일파들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훈장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심사하기도 했다. 친일 문인의 작품이 최근까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렸는가 하면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친일 경력자가 묻혀있다.친일파연구가 고(故) 林鍾國 선생은 친일파청산의 의의를 “철저하게 짓밟혀 버린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자손만대에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했다. ○親日 논리·행적 기록 남겨야 일제 앞잡이 친일파들은 해방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아래 신생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배층으로 변신하였고 다시 군사 독재정권에 와서는 ‘영원한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았다.이들중 대다수는 극우·반공논리로 무장하여 반(反)통일세력을 형성해왔고 또 독재권력옹호자,매판자본가,어용지식인,심지어 한·일 외교무대에서 굴욕외교에 앞장서기도 했다.이런 상황에서는 통일과 민족정기를 논할 수 없다. 이제 친일파 청산문제는 더이상 다음 세기로 미룰 수 없다.이제라도 역사학계와 연구자들은 그들의 친일논리와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그러나 이같은 작업은 개인에 대한 단죄차원보다는 과거사 청산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동국대 법학과 韓相範(64) 교수는 “우리사회의 부패·모순구조는 해방후 친일파 척결을 하지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금세기가 가기전에 우리사회가 친일파 청산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친일파의 정의와 범주/매국노·식민정책 협력자 통칭/독립신문 7개 부류 첫 거론/제헌국회 反民法 구체 규정 보통명사‘친일파’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개인이나 무리’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그러나 우리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친일파’의 경우 그들이 활동한 시기와 일본과 친하게 지낸 정도 면에서 차이가 있다.후자의 경우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해방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가깝게 지내면서 매국(賣國)에 가담했거나 또는 일제강점하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한 자’들을 통칭한 것이다.따라서 이 경우 ‘친일파’는 매국노,반민족행위자,민족반역자 등과 같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20세기 전반 외세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대개 우리의 ‘친일파’와 유사한 의미의 용어를 가지고 있다.중국은 일제에 협력한 자들을 ‘한간(漢奸)’이라고 부른다.‘중국인으로서 적과 통모(通謀)하여 반역죄를 범한 매국노’라는 뜻이다.프랑스는 나치정권에 협력한 반역자를 ‘나치협력자’로 부르고 있다.이같은 용어들은 ‘민족반역자’라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담고 있는데 전쟁범죄자인 ‘전범(戰犯)’과는 의미가 다르다. ‘친일파’는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을 가리키는가.친일파의 범주에 대한 첫 거론은 1920년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칠가살(七可殺)’이다.이는 당시 독립진영에서 처단대상자로 지목했던 매국적(賣國賊)·친일관료·밀고자 등으로 7개 부류로 대단히 포괄적인 내용이었다.친일파의 범주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해방후의 일이다.미군정하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1947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을 만들면서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민족반역자와 부일협력자를 따로 구분하고 있으며 8·15 이후의 간상배까지 처벌대상으로 삼고 있다.부일협력자의 경우 악질적인 친일파는 물론 일본인과 결혼한 자,일본말을 상용한 자,또 민족반역자의 경우 만주에서 활동한 경찰관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은 친일파의 범주를 보다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규정하였다.이 법은 제1조∼5조에 걸쳐 친일파의‘죄’를 규정하고 있는데 매국노·수작자·고급관료·악질분자 등을 대상자로 규정하고 있다.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愼鏞厦) 교수는 “반민법에서 규정한 친일파는 제한된 직위와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지적했다. □제헌국회 제정 반민족행위처벌법 조 항 반민족행위자 분류 현 황 제1조 ①일본과 통모(通謀)하여 ①사형또는 무기징역 한일병합에 적극 협력한자 ②그 재산과 유산의 ②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전부 혹은 2분의1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거나 이상 몰수 모의한 자 제2조 ①일본정부로부터 작위(爵位)를 ①무기징역 또는 5년 받은자 이상의 징역 ②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된 자 ②그 재산의 전부 혹은 2분의 1이상 몰수 제3조 ①독립유공자나 그 가족을 ①사형,무기징역 또는 악의적으로 살해,박해한 자 5년 이상의 징역 ②또는 이를 지휘한 자 제4조 ①습작(襲爵)한자 ①10년 이상의 징역 ②중추원 부의장,고문 또는 참의를 ②또는 15년 이하의 지낸 자 공민권 정지 ③칙임관 이상의 관리를 지낸 자 ③그 재산의 전부 ④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혹은 일부 몰수 ⑤독립운동을 방행할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한 자 ⑥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 ⑦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 ⑧도(道),부(府)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을 지낸 자 ⑨관공리로서 직위를 이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분자 ⑩각종 친일단체의 수뇌간부를 지낸 자 ⑪친일 언론·저작활동을 한 문화계 인사 ⑫개인으로서 일제에 적극 협력한 자 제5조 ①고등관 3등급 이상,혹은 ①반민법 공소시효 훈5등급 이상을 받은 관리 결과전까지 공무원 ②헌병,헌병보,고등경찰을 지낸 자임용금지(단,기술관 은 제외) ◎‘친일의 군상’ 자문위원 12명 위촉/객관·공정성 검증… 반론권 보장합니다 서울신문사는 미래지향적 차원에서 친일파 청산을 위해 기획한 ‘친일의 군상’시리즈를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하기 위해 12명의 자문위원을 위촉했습니다. 자문위원은 역사학자·변호사·종교가·언론인 등 관계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됐습니다.모든 글은 자문위원들의 검증과 명예훼손 등 법적 검토를 거쳐 게재됩니다.자문위원은 인물 선정에도 참여하며 정기적으로 만나 시리즈의 내용을 종합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조언할 것입니다. 서울신문사는 특히 보도된 내용에 대한 반론권을 보장합니다. 자문위원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金祐銓 전 광복회 부회장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 ▲韓相範 동국대 교수(법학) ▲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 ▲朴鍾淳 충신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 ▲李泰鎭 서울대 교수(한국사) ▲姜昌一 배재대 교수(한일관계사)▲朴元淳 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 ▲朴은慶 광운대 강사(정치학) ▲林大植 외국어대 강사(한국사)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친일문제연구가) ▲崔光一 서울신문 제작이사
  • ‘지구촌시대 한국’ 심포지엄 주제발표/崔章集 고려대 교수·정치학

    ◎근본적·전면적 개혁 필요/IMF 해결 관치금융·부패 고리 청산부터 행정자치부와 한국행정연구원은 건국 50주년을 맞아 11,12일 양일간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지구촌시대의 한국’이라는 주제의 학술심포지움을 갖는다. 다음은 崔章集 고려대 교수(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가 발표한 주제논문 ‘한 어려운 결합,민주주의와 시장경제:金大中의 도전’의 요약. ◇민주적 시장경제의 개념과 의미=민주적 시장경제는 자유주의 이념에 입각한 공정한 시장경쟁원리의 작동을 기본개념으로 한다.하지만 정부가 시장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해야 한다.이것은 전후 독일 기민당 정부의 사회적 시장경제나 1910년대 영국 자유당 정부의 사회협력주의 전통과 비교할 수 있다. ◇민주,시장경제 병행발전의 이론측면=민주화가 오늘의 경제위기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나온다.朴正熙에 대한 향수도 이같은 인식에서 나왔다. 60년대에는 경제발전에 비례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내용의 립셋의 초기 근대화이론이 주류였다.이런 낙관론은 70년대 경제발전이 오히려 권위주의를 강화한다는 오도넬의 관료권위주의론으로 세대교체됐다.이 이론도 80년대 들어서는 1인당 국민소득이 6천달러가 넘으면 민주주의가 붕괴되지 않는다는 쉐보르스키의 신근대화이론으로 대체됐다.따라서 한국사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심화시키지 않고는 경제발전도 이룰 수 없는 과도기에 도달했으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을 병행해야 한다는 金大中 대통령의 기본노선은 현실적,이론적으로 타당하다. ◇민주적 시장경제론 한국적용의 문제점=朴正熙정권의 권위주의적 경제발전 모델은 민주화와 세계화를 부르짖는 金泳三정권에서 답습됐다.다시 말해 민주정권이었으면서도 민주와 경제발전을 병립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이 과거 한 세대동안 압축적으로 고도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개발독재 때문이 아니라 당시 세계경제질서가 요구하는 필수조건,즉 세계에의 개방이라는 발전전략이 토지개혁,높은 문자 해득률이라는 내부적 요소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이런 조건 하에서 우리가 왜 IMF 위기를 맞게 됐는가 하는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외적으로는 고수익을 추구하는 외국자본의 대량유입,무역수지 적자의 확대,국제 가격경쟁력 약화 등을 들 수 있다.내적 요인으로는 정경유착에 의한 대기업에 대한 대규모 금융융자와 관치금융,‘대마불사(大馬不死)’신화에 사로잡힌 방만한 기업확장 등이라고 볼 수 있다.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방후 미군정 하에 이뤄졌던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일본이나 독일이 미군정 하에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해 수행했던 개혁,1930년대 미국의 뉴딜정책과 같은 근본적 치유책이 필요하다. 개혁의 핵심은 정경유착을 단절하고 재벌을 개혁하며 관치금융과 부정부패를 청산하고 노동을 이익의 분배와 고통분담의 생산자 주체의 하나로 인정해 정책수행의 파트너로서 체제내로 포용하는 일이다.경제 구조조정이 본격화 하면서 복지체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됐다.정부가 시장이 아닌 정치적 방법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한 실효성 있는 실업대책이나복지정책은 어렵다. ◇노동문제에 대한 민주적 시장경제의 적용=노동문제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고 하는 국정이념의 성패를 가르는 시금석이다.노사정위가 진정한 협의기구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실업을 유발하는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순응을 얻어내고 노동에게 정치영역을 개방하고 조직력을 강화할수 있는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 경제분야­토론내용(제2의 건국선언 무엇을 담나:Ⅱ)

    ◎민주주의·시장경제 발전 총력/관치금융·정경유착 근절에 시간 필요/국민도 정부 의지 믿고 기다려 주어야/‘미래형 산업’ 발굴을 목표로/교육개혁 통해 개개인 생산성 높일 때/시장규제 최소화… 정부 역할 달라져야 □참석자 金有培 성균관대 교수·경제발전론 金兌基 단국대 교수·노동경제 柳莊熙 이대국제대학원장·국제경제 金仲秀 경희대 국제대학원장·거시경제학 ▲金有培 교수=국제규범을 받아들여 지구촌 시대에 걸맞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제2의 건국의 중요한 요체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도 최근에 자주 언급되는 세계주의와 연계된 것이다.과거의 관행을 바꿔서 새 것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아직 우리사회는 편파적이고 닫힌 민주주의의 요소가 있다.보편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제주체들 사고 바꿔야 ▲金仲秀 원장=제2건국은 과거의 행태와의 차별화가 아니라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경제운영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병행발전은 독일식이니,영미식이니 하는 것이 모델이 될 수 없다.세계의 변화에 맞춰 이를 잘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경제운영방식에 있어 우리 틀,우리방식을 고집하면 안된다.정부수립 50년을 계기로 국민에 대한 메시지 전달이 필요하다면 그 내용은 모든 경제 주체들의 사고방식과 양태를 바꾸는 일이 되어야 한다. ▲柳莊熙 원장=요즘 우리는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매달리느라 5∼10년 이후를 내다보는 일이 소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예를 들어 집을 지어도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설계하듯 제2의 건국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도 미래를 보고 나라를 건설하는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金兌基 교수=우리에게는 알게 모르게 변화에 대한 저항심리가 강하게 깔려 있다.아까 지적한 대로 교육체계의 구조적인 취약성 때문이다.이를테면 노사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사회는 채용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퇴직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더 든다는 불합리성이 실존한다.다른 선진국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관행이다.또 모 대기업에서 이미 정리해고된 근로자가 회사안에 들어와 버젓이 농성하는 행위도 법과 현실 사이에 놓인 괴리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노동문제등 제반 경제개혁은 국민적 컨센서스를 얻어야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은 우리가 떨쳐야할 과제임에 틀림없지만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그런 방향을 잡고 있으므로 국민들은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개방된 세계시장 공략 ▲金有培 교수=그렇다면 우리가 미래 사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우선 신종 산업이 개발돼야 한다.우리는 너무 안으로만 눈을 돌리는게 아닌가 싶다.우리 기술을 아프리카나 동유럽,러시아 등 밖으로 가져가 팔아먹을 수 없을까.일본은 사양산업을 한국과 동남아에 팔고 애프터서비스를 통해 부가가치를 향유한다.세계시장에 우리가 개방만 할 것이 아니고 개방된 세계시장을 파고들어야 한다. ▲金 원장=우리 사회는 너무 내부지향적이다.제도와 규범을 바꾸기 전에는 환골탈태가 어렵다.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 재벌들이 동유럽 시장을공략하는데 치중했다.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져 제3세계의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다.재벌들의 출장 횟수를 조사해 봐도 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그 결과는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정부차원에서 사양 산업을 수출하라고 독려하지 않더라도 기업은 돈 될 곳을 찾아간다.정부는 G7,G3와의 경쟁력 강화에 신경을 써야한다. ○기업들 국익 극대화 노력 ▲柳원장=지금 세계경제구조는 놀랍게 변하고 있다.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정보산업과 통신산업,교통체계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오늘날의 선진 사회에서는 산업간의 칸막이가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산업 분류 체계도 의미가 없다.이런 상황에서 어떤 산업이 부가가치가 높을 것인가를 미리 예측,새로운 신종산업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기업의 경영방식도 크게 변하고 있다.개별기업 단위로 이윤을 산출하고 경영실적을 판단하는 것은 구식이다.회사가 국경을 초월해 연계망 즉 네트워킹의 단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연계망 단위의 실적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우리 기업들도 연계망속에서 어떻게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익을 극대화하는 하는 방안을 챙겨야 한다.경영주들도 회사내부일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기회를 찾고 새로운 파트너를 발굴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제 2건국의 청사진은 바로 미래형 산업을 발굴해서 범세계적 연계망속에서 이익을 내는데 전력투구하는 방안을 담아야 한다. ○기업인은 세계를 무대로 ▲金有培 교수=교육개혁 프로그램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우리 교육은 워낙 전략 위주라 목표를 정하고 그것만 집중 공략한다.선진국 치고 몇 사람이 지배하는 나라는 없다.국민 개개인이 다 교양 있고 생산성이 높다.선진국은 경제만 강한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문화적이다.서울대나 연·고대만 들어가기 위한 교육이 되서는 안된다.개개인의 경쟁력을 향상할 수 있는 교육이 돼야 한다.과거에는 특정 부분의 생산성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전반적인 생산성을 갖춰야 한다. ▲金원장=세계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교육에서도 우리라는 개념이 없어졌다.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고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국제화된 교육 및 산업이 필요하다.한국기업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한국사람이 밖으로 나가는 것만이 세계화가 아니다. 세계와 함께 사는 지혜와 그에 말맞는 제도가 곧 세계화다.재고 상품을 파는 것이 나라의 근간을 이룰 수는 없다.OECD는 한마디로 기업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만들려졌다.이는 다국적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다국적 기업의 생산량은 세계 전체 생산량의 30%,기술이전의 80%를 담당하고 있다.다국적 기업이 한국에 우글우글해야 한다. ▲柳원장=선진국에서는 각급학교의 교육 내용이 대폭 바뀌고 있다.시대의 변화를 보면서 젊은이들이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5∼10년후의 경제구조를 미리 예측해 내용을 조정하는 것이다.먼저 너무 세분된 전공을 없애고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는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다행히 최근 우리 교육부에서도 이같은 움직움을 보이고 있어 다행이다. 오는 2010년쯤 되면 베이비 붐 세대가 은퇴하는 시기이다.노동력 부족 현상이 나타나 인력의 고기술화,고정보화,.다용도화가 불가피하다.여기에 대비해 여성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5∼10년뒤 예측해야 ▲金兌基 교수=IMF사태를 맞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의 지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교육은 사회적 적응력을 배양시키는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주입식,임기위주의 우리 교육은 그 같은 능력을 기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고학력은 실업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보험적 성격이 있는데도 우리의 경우 대졸 실업자가 넘쳐나는 것도 바로 교육의 취약성을 말해 주고 있다. 청소년 실업률이 높은 것도 똑같은 이유로 볼 수 있다. 또 평생교육 체계도 미흡하다.기술은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데 학습수준은 기껏해야 대학시절에서 멈춰서 있다.이렇게 되면 실업난속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금융구조 새 틀 형성 ▲金有培 교수=기본적으로 정부의 역할은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쟁에 탈락하는 기업은 다 버릴 것인가.사양산업은 방치할 것인가.이같은 의문에 대한 대한 정부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한다.물론 시장의 원리를 유지하는 것은 좋다.그러나 과거의 선례를 살펴보면 정부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갈 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자원이 집중되고 은행자금도 소수의 기업에 몰렸다.독식하면 살고,못하면 죽는 것이 당연했다.그런 구조 자체를 교정해 공정한 경쟁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과도기에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할 수 밖에 없다. 은행의 부실은 도려내고 건전한 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야 한다. 책임과 보상이 함께 하는 형태로 가는 것이 제2의 건국이다.각자가 효율성 있게 뛰어야 사회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金원장=제2건국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정부에서 해야할 일이 대단히 많기 때문이다.글로벌 경제체제 아래선 국제규범을 쫓아가야 한다.선진국도 고쳐야할 것이 많지만 우리는 더 많다.모든 것은 대체할 수 있다.대학교수도 ‘수입’할 수 있다.그러나 공무원은 수입,대체할 수 없다.국가 경쟁력 강화는 결국 공무원의 경쟁력에 달려 있다.강력한 정부가 나타나야 한다.다시 말해 정부 기능의 변화는 허약한 정부를 말한 것이 아니다.시장규제는 없어져야 하지만 이것이 정부의 약화로 이어져선 안된다.결론적으로 정부는 도덕성과 정통성을 바탕으로 강해져야 한다. ▲柳원장=선진국에서는 정부의 역할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정부 서비스가 민간에 넘어가는 추세다.교육,의료,교통,전화,우편 심지어는 교도소 운영까지 민간이 담당한다.이제는 민간과 정부가 국가를 공동으로 운영해 가는 체제다.이제 5∼10년을 내다보는 우리나라의 중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누가이같은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봐야 한다.공무원으로는 어렵다.우리나라에는 각분야에 최고급 두뇌를 거느린 연구소가 많다.통폐합해서 없앨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 2건국’의 밑그림을 그리도록 활용해야 한다. ○공직 진입장벽 재검토 ▲金兌基 교수=현 상태에서 실업과 노동문제의 해결이 과연 가능할까 의문스럽다.정부와 관료체제가 먼저 개선돼야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부처간에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고질적인 문제다.부처간공무원의 자질 차이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특히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의 경우 더욱 그렇다.중앙정부는 지자체로 권한과 더불어 인력도 대폭 이양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무원 사회의 진입장벽이 고시제도도 차제에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DJ 노믹스’에 담긴 뜻/통일시대 대비 남북 공동 번영/물가안정 속 복지공동체 구축 金大中 대통령의 경제운용 철학인 ‘DJ노믹스’의 비전은 분명하다.다가오는 21세기의 중심에 설 새로운 모범국가 건설이다.활기찬 경제와 풍요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안정된 물가 위에 복지공동체를 구축하고,통일시대에 대비해 남북 공동번영의 기반을 다진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50년동안 지속된 관치(官治)금융과 정경유착의 부패고리를 끊고,경직된 구조를 새롭게 고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경제주체들의 피눈물 나는 고통분담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과제들이다. 기업,금융,노동시장 등 경제구조의 전면적인 개혁은 늘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DJ노믹스’가 노·사·정 3자를 주축으로 움직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DJ 노믹스의 비전 21세기 모범국가 건설 기본철학: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 │ ▲활기찬 경제와 풍요로운 사회실현 ­물가안정 ­무역흑자기반 구축 ­지식·정보화산업 ­중소·벤처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토지공급의 효율성 제고 ­선진농업과 해양산업 육성 ­복지공동체 구축 ­효율적인 보건서비스의 제공 ­‘그린경제’ 구축 ­남북 공동 번영의 기반 구축 ▲경제구조의 전면적 개혁 ­효율적인 정부 ­경쟁력있는 금융 ­기업의 투명성 확보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 ­개방경제
  • 기존 보험계약 모두 보호/생보사 4곳 퇴출 이후

    ◎당국 회수억제불구 대출상환 요구할수도/8월들어 맺은 계약은 2,000만원만 보장 보험 구조조정은 퇴출 생보사의 수만큼 보잘 것 없었다는 평이다.33개 생보사 가운데 외국사나 합작사 7개를 제외하면 26개 생보사 가운데 22개가 여전히 경쟁하는 셈이다. 정부가 생보사 부실의 원인으로 ‘과당경쟁’을 첫번째로 꼽았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이를 방치했다. 지급여력과 경영효율성 등을 퇴출 기준으로 내세웠으나 살아남은 생보사의 부실은 퇴출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이들을 한꺼번에 퇴출시킬 경우 재정상 부담을 우려했는지 모르지만 ‘속빈 강정’이라는 지적을 모면할 수가 없다.앞으로 시장원리에 따라 부실사를 정리하겠다고 밝혔으나 보험사 도산이 가져올 충격을 감안하면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기존 보험계약은 모두 보호된다=예금자보호법에 따라 모든 계약은 보장된다.기존 계약은 우량 보험사에 고스란히 이전되므로 보험금을 못 받거나 이미 낸 보험료를 뗄 위험도 없다.중도에 해지하면 원금을 찾지 못하는 등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다만 인수생보사가 정해질 때까지 보험금과 해약환급금 지급,신규 보험계약과 투융자 업무는 중단되고 8월1일 이후 맺은 보험계약은 2천만원 한도내에서만 보장된다.그러나 ▲보험료 수납 ▲보험금 청구접수 ▲기존계약 사항의 확인 및 제증명서 발급 ▲대출 원리금 회수(지로,자동이체 가능) 등의 업무는 종전처럼 허용된다. ■기업이나 개인은 대출금 상환요구를 받을 위험이 있다=퇴출 생보사들은 보험계약자가 낸 보험료의 45% 정도를 기업과 개인에게 빌려 줬다.문제는 인수 생보사들이 퇴출 생보사의 대출금을 회수하느냐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대출도 만기가 있으므로 중도에 상환을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그러나 해약이 늘어 인수 생보사의 유동성이 부족해지거나 대출받은 기업과 개인이 중복돼 대출한도를 넘었을 경우에는 상환을 요구할 수도 있다.금감위는 인수 생보사의 대출금 회수를 억제토록 지도하겠다고 하지만 사업전망이 불투명하거나 담보여력이 부족한 기업 등은 상환압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임직원과 주주는 어떻게 되나=인수 생보사들이임직원을 떠안을 의무는 없다.따라서 4개 퇴출 생보사 임·직원 2,100여명 가운데 70% 이상은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전산직원과 8,600명에 달하는 보험 설계사는 대분분 채용될 전망이다.주식은 모두 휴지조각이 되므로 주주는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
  • 내일 離任 張庭延 주한 中 대사 인터뷰

    ◎“장쩌민 주석 등 중 지도자들 한반도 안정에 각별한 관심”/‘11월 김 대통령 방중’ 21C 양국관계 기틀마련/경제수역 확정·어업협정 체결 등 쉽게 해결될것/재임중 북핵해결 틀 마련·4자회담 시작돼 보람 장팅옌(張庭延·62) 초대 주한 중국대사가 6년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12일 중국으로 돌아간다.한국 근무를 끝으로 40년동안의 외교관 생활을 마무리하는 그는 “두나라가 최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장 대사는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자들이 한·중 관계발전과 한반도 안정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장주석을 비롯,후진타오(胡錦濤) 부주석,리펑(李鵬) 전 총리 겸 현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등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한국을 방문했고 한국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명동 중국대사관 대사 집무실의 한 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휘호도 한·중관계 발전을 보여준다는 설명도 이어졌다.95년 11월16일 한국 방문중이던 장쩌민 국가주석이 ‘방문이 성공적이었다’며 흥에겨워 마지막 방문지 제주도에서 써 준 것이란다. 장 대사는 오는 11월로 예정된 金大中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이 두나라 관계를 한단계 끌어 올리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金 대통령의 방문은 21세기 두나라 관계의 방향과 기틀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장쩌민 국가주석,주롱지(朱鎔基) 총리 등 최고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와 폭넓은 현안 논의 등 이해를 더욱 깊게 할 것입니다” 그는 金 대통령과의 여러차례의 만남이 한국생활을 더욱 기억나게 한다고 말했다.야당 시절 사무실을 방문하고 경기도 일산의 자택에 초대받았던 일화도 소개했다. “金 대통령은 중국 역사와 문화에 정통하고 세계 정세에도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는데다 야당시절 중국을 세번이나 방문,중국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어 두 나라 관계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읍니다” 이어 “金 대통령이 중국에선 지식인뿐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야당시절부터 TV와 신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고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특히 대사 자신이 가장존경하는 한국인이 金 대통령이라고 털어놓았다. 92년 8월 수교이후 두 나라가 6차례의 정상회담과 28차례의 외무장관 회담을 가졌고 서로 3번째 교역국으로 성장하는 급속한 관계발전을 이룩한 것이 대사로서 기쁨이란다. 대사 부임때만해도 한국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에 대해 걱정스럽고 불안했었다고 회고했다.“두나라 사이엔 역사상 불행한 시기도 있었고 수교후 6년동안 어려운 문제도 있었습니다.” 재임기간동안 남북한과 중국,미국이 참가하는 4자회담이 시작되고 북한 핵문제도 해결의 틀을 마련하는 등 한반도정세가 완화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보람이라고 했다. “특정 사안과 관련,한국 정부가 북한에 ‘강력한 요구’를 부탁할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결국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는 중국의 원칙이 수용될 수 있었고 결과도 좋았다고 봅니다.” 63년부터 3차례에 걸쳐 15년동안 북한에서 근무한 장대사는 남북관계를 풀어가는데는 “무엇보다 신뢰회복이 시급하다”는 충고도 잊지않았다.“중국은 한반도 남북의 문제해결을 위해측면지원을 할 수도 있고 대화를 위한 환경 조성에도 도움을 줄 수도 있읍니다.그러나 문제해결의 주체는 남북한이란 점을 잊어선 않될 것입니다” 북한에서 15년,한국생활 6년.한반도에서만 21년을 산 그는 한국인들은 성질 급한 것 빼놓고는 다 좋은 것 같다고 빙긋이 웃는다.“성실하고 정력적으로 일에 몰두하는 자세야 말로 남북한 똑같은 한민족의 장점”고 평했다. 북한 핵위기 등 남북문제와 관련,주한 미국대사 등과도 적잖은 ‘의견교환’을 나누었다는 그는 “경제수역 획정문제,어업협정의 체결 등이 현안이지만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베이징(北京)토박이인 장대사는 베이징대학에서 ‘조선어’를 전공한 뒤 58년부터 외교부에 근무해 온 중국내 제1의 한반도 전문가.서울 사람과 구분않될 정도의 유려한 우리말을 구사한다. 퇴임후 계획과 관련,“한반도와 관계된 일을 할 생각”이라며 21세기의 한·중관계의 발전을 위해 옛 시각이 아닌 새로운 눈으로 중국을 바라봐 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 단재·백범 그리고 안기부(金三雄 칼럼)

    “이성(理性) 말고는 어떠한 주인도 인정하지 않는 자유인의 세계에만 태양이 빛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폭군과 노예,성직자들과 그들의 우둔하고 위선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교의 신자들은 역사 속이나 무대 위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진보를 위해 프랑스 혁명에 참가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한 수학자이며 계몽사상가,그리고 혁명 사상가인 콩도르세는 ‘인간정신진보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콩도르세가 처형되고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체적으로 인류사는 이성과 진보의 과정을 거쳐왔지만 프랑스혁명이 반혁명과 나폴레옹 독재의 반동기를 겪었듯이 인류는 몽매와 압제에 시달려왔다. 우리 역시 이성과 진보의 과정보다 몽매와 압제의 기나긴 터널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중세의 어둠 속에서 프랑스혁명의 횃불이 근세의 여명을 열었듯이 우리도 광주항쟁,6월항쟁,그리고 새정권의 출범과 함께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변화의 시대를 열고 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변화의 가닥에는 안기부도 포함된다. 군사정권의 모태에서 태어난 안기부(중앙정보부)가 새로운 역할,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반가운 일이다. 비록 ‘국가정보원’으로 개명을 해놓고도 국회파행으로 개명신고조차 하지 못한 과정에서 추구하는 변화이지만 과거 어두웠던 시절 원부(怨府)의 이미지를 씻고 새롭게 환골탈태하려는 노력은 값지다. 안기부는 힘과 권력을 상징했던 조형물을 철거하고 내곡동 청사 진입로에 시야를 널리 해외로 돌리자는 뜻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원형의 크기대로 세워 8·15광복절에 제막식을 갖는다고 한다. 안기부의 변화는 조형물의 교체만이 아니라 단재 신채호,백범 김구 선생의 존영을 이종찬 부장 집무실에 걸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는 상징성의 큰 변화를 의미한다. 흔히 안기부의 연원을 일제시대 고등계경찰이나 건국 직후 악명을 떨친 육군특무대를 연상하는 잘못을 씻고,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인 단재의 의혈단이나 백범의 한인애국단에서 뿌리를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재의‘조선혁명선언’으로 잘 알려진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다. 창단 직후‘공약 10조’와 뒤에‘5파괴’‘7가살(可殺)’이란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했다. ①천하의 정의의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등 10개조와,파괴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등 일제식민지 통치기관을 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이 한인애국단을 창설한 것은 1926년 12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지도부는 중국인의 악감(惡感)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전개하기 위해 일제에 대한 파괴와 암살을 계획했다. 한인애국단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비밀리에 결성되고 이봉창 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의거,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의거 등이 감행되었다. 항일무장투쟁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이 망국기 국권회복원동의 첨병이었다면 제2국난기로 불리는 오늘 안기부는 그 정신을 이어서‘정보는 국력이다’란 부훈에 걸맞는,21세기 정보화시대를 뒷받침하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단재·백범 정신으로 건국 반세기동안 이승만과 군사정권에 의해 단재와 백범정신이 굴절되었다. 이 분들의 애국사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다. 안기부가 구태를 벗고 이들의 애국정신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서고자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문제는 실천이다. 아무리 외양이 바뀌고 구호가 요란해도 본질이 바뀌지 않고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나는 우리나라의 청년 남녀가 모두 과거의 조그맣고 좁으라운 생각을 버리고 우리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제 마음을 닦고 제 힘을 기르기로 낙을 삼기 바란다”(백범일지) 기왕에 백범과 단재의 정신을 안기부의 정신으로 받들기로 했다니 과거의 ‘좁으라운’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큰 사명’에 눈을 떠서 분발할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를 열어가자.
  • 姜萬吉 교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 발표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 일제식민지시대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은 해방공간에서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됐으며 분단시대의 통일운동은 ‘대등통일’이어야 한다고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가 7일 주장했다.姜교수는 이날 광복 53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1주년 기념 제 12회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약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본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배우지 못해 일제 강점후 민족해방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세력을 가질 수 없었다.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은 계속 추구됐다.좌익 노선은 3·1운동 전에도 일부 형성됐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3·1운동의 실패와 좌익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우익 세력은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비타협적인 우익도 일정한 세력으로 존속됐다.주로 지주및 상층 자산계급은 타협주의 우익으로,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은 중소자산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분석이 있으나 그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의식성장 우익의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의식성장으로 민족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시작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의 일부 세력이 타협주의로 변하고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1920년대 중반에 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에서 동시에 통일전선론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협력과 분열 반복 좌우익은 시대상황에 따라 협력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며 통일전선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으로 더욱 적극화됐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38도선이 획정되고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좌우익은 해방후 미·소 양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조건에서도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가 곧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의 지도층이 함께 참가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이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함께 참가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후 한반도에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이 꾸준히 추구됐는 데 그 운동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던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으로 계속됐다.해방 후 민족분단시대에는 그 운동이 평화통일 그것도 대등 통일 운동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 KAL機 괌추락 참사 1년­현지 추모행사 표정

    ◎不歸의 넋 위로… 위령제 준비 분주/오늘 유족 352명 참가 추모비 제막/사고뒤 심야노선 폐지… 관광객 격감 6일은 대한항공 801편이 괌에 추락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희생자 229명의 유족 대부분은 아직도 당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괌 현지에서는 5일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린다. 유족들의 지난 1년과 보상 문제,지금까지 드러난 사고 원인과 문제점 등을 짚어본다. 대한항공기 괌 추락사고 1주기 추모위령제가 5일 상오 괌 현지에서 열린다. 추모식에서는 희생자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비 제막식도 갖는다. 추모비는 괌 한인회가 괌 주정부의 일부 지원을 받아 모두 19만달러를 들여 건립했다. 추모비에는 희생자와 부상자 명단,추모시,추모비 제작에 기부한 괌 한인회의 기부자 명단 등이 새겨졌다. 추모식은 추모사에 이어 기독교,불교,천주교식의 종교 행사와 함께 헌화 및 분향 순서로 진행된다. 이에 앞서 4일 하오 유족 352명과 건설교통부 관계자,대한항공 직원 등 승객 396명을 태운 대한항공 특별기가 괌 현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2박3일간의 행사를 마치고 6일 하오 서울로 돌아온다. 한편 지난해 8월6일 사고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대한항공측은 세계 70개 취약 공항을 집중 점검,이 가운데 심야에 도착하는 항공노선을 폐지했다. 괌의 아가나 공항을 비롯,중국 삼아(三亞) 공항,몽고 울란바토르 공항,튀니지 제르바 공항,마카오 공항 등 심야에 도착하는 5곳이다. 또 미국 연방항공국(FAA)의 기준에 따라 조종사들의 야간 비행에 따른 업무 부담도 대폭 줄였다. 대한항공은 또 현재 A­300,F­100 두 기종에만 적용하던 비행분석관리시스템(AIMS)을 연말까지 B­747을 비롯한 전 기종으로 확대,안전도를 높일 계획이다. 사고 항공기처럼 기령이 20년 이상된 항공기 12대의 매각도 추진중이다. 사고 이후 괌으로 떠나는 관광객도 크게 줄었다. 괌정부 관광청 한국사무소에 따르면 사고 전 한달 평균 1만5,000∼2만명에 달하던 여행객이 사고 이후 90% 이상 줄었다. 이에 따라 괌현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운영됐던 50여개의 여행사도 3∼4개로 줄어든 것으로알려졌다.
  • 어느 교육자의 태극기사랑/李炫熙 성신여대 교수·한국사(서울광장)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국기를 바라보며…조국은 잃었으나,너만은 잃지 않고 광복의 앞날을 위하여 나의 애국지성을 바치겠다고 되새겨 다짐하였다’. 어느 저명한 교육자가 약관일때 국권이 피탈되자 태극기를 땅속에 묻을 생각을 굳히고 이러한 애국적 의지를 표했다.그는 ‘나는 남몰래 널빤지와 못을 얻어 손수 만든 조그마한 나무상자에 고이고이 접어서 넣은 국기를 장롱속에 깊숙이 간직하였다.기회있을 때마다 장롱속을 엿보던 나의 가슴에는 항상 뜨거운 조국애의 그리움이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30대 초반으로 손수 설립한 동원(동덕)여학교의 교장이었다.사회저명인사가 된 그 분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 장롱속에 숨겨둔 국기가 발각될까 염려하여 장독대 밑을 파고 국기상자를 달밤에 은닉하였다.얼마뒤 묻어 둔 국기상자를 파내 보니 나무상자는 퇴색하고 뒤틀려서 국기만 꺼내 다시 정성스레 함 속에 보관하였다. ○국기만 지닌채 피난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함 속의 국기를 꺼냈다.햇빛을 못본 국기는 좀이 먹어구멍이 뚫렸으나 형체는 그대로였다.‘나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국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아래 엎드렸다’고 그는 소감을 피력하였다.그리하여 곧 학교로 달려가 태극기를 게양대에 올리고 독립만세를 서울이 떠나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남북분단 속에서 6·25 전쟁이 일어났다.서울이 남침 3일만에 붉은 군대에 짓밟히자,그는 다시 국기를 숨겨야 했다.국기를 옷속에 넣어 꿰맨 후 괴나리봇짐 속에 넣어 생명같이 모시고 어루만지며 9·28 수복을 기다렸다.1·4후퇴(1951)때는 가재도구 속에 국기만 넣어 부산으로 피난갔다. 이 태극기는 1908년 춘강 조동식(1887∼1969)이란 교육자가 손수 제작해서 눈물겨운 정성을 쏟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금년 그 국기의 나이는 90인 것이다.약 1세기 가까운 긴 세월 속에 천도 낡고 좀먹은 구멍도 있는 그 국기는 헝겊으로 꿰매져서 지금은 동덕여대 박물관에 액자로 모셔져 있다. 이 국기야말로 고난·역경과 애국의 상징으로,춘강이 서거한 지 30년이 가까워지는 요즘도 위용과 광채를 발하고있다.이 태극기는 가로 174㎝,세로 160㎝ 규모의 견직으로 제작되었는데,국권피탈 이전(1908)에 제작되어 국가 상징물로서,그리고 한 애국인사의 지성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사랑 강인한 집념 마침 소장자쪽에서 그 국기를 국가지정 문화재로 검토해줄 것을 문화재관리국에 요청하여 문화재전문위원인 필자가 그 곳을 방문,조사한 일이 있었다.그 국기를 보고 너무나 감격적이었다. 춘강의 태극기는 태극이 청색이 아니고 검정색이며 건곤감리의 순서도 지금의 표준형과는 다른 양상이다.그렇지만 교육자 춘강의 숨은 애국의지,독립정신,나라사랑의 강한 집념을 읽어볼 수 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춘강의 국기는 국가상징물로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겠다.대한민국 건국 50주년의 아름다운 나라사랑의 삽화인 것이다.
  • 金氏의 뿌리/강준식 지음(화제의 책)

    ◎김씨 5,000년 역사 소설로 풀이 가야(김해)김씨와 신라(경주)김씨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700∼800여년 전에 씌어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러나 이보다 500여년 앞서 제작된 신라 문무왕릉 비문은 김씨의 유래를 자세히 밝히고 있지만 그러한 난생설화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신 진(秦)나라 사람들이 신라 김씨의 조상이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진나라 사람과 신라 김씨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 책은 1,600만명에 이르는 한반도 김씨 일족의 5,000년 역사를 소설형식으로 다룬다. 범우사 전3권 각권 7,000원.
  • 홍콩 경영자 81% “IMF 스트레스”

    ◎홍콩조사기관 아시아 10개국 3,000명 조사/한국 경영자 50% “일 통해 성취감 느낀다” 【홍콩 AFP 연합】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아시아에서는 홍콩사람들이 가장 많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홍콩의 여론조사기관인 마켓비해비어사가 한국,일본,홍콩,타이완,태국,싱가포르,인도네시아,호주 등 아시아 10개국의 경영인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해 31일 발표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경제문제와 관련,스트레스에 시달리느냐는 질문에 홍콩사람들은 무려 81%가 ‘그렇다’고 답했다. 다음은 한국사람들. 78%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가장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국가는 인도네시아로 58%였다. 한편 한국의 응답자 가운데 50%는 어려움속에서도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성취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타이완(75%) 다음으로 높았다. 한국의 경영인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사생활에서는 개인적인 가치를 지켜야 한다고 답하고 덕목으로는 정직(77%)과 자기 단련(77%)을 꼽았다. 다음은 조화(70%),학문존중(67%)이었다.
  • 진진의 사랑·하드록 카페/여성국극 VS 록

    ◎색다른 맛깔 뮤지컬 두편 새달 무대에/진진의 사랑­연극 판소리 무용계 원로·소장 호흡 맞춰/하드록 카페­황인뢰 연출에 최정원 등 호화 캐스팅 뮤지컬은 대사에 노래를 섞어 짠 극이다. 여기서 성공의 열쇠를 쥔 쪽은 보통 노래다. 대사 전개에 포인트와 표정을 주고 클라이막스에 올려놓는 등 극에 볼륨 넣기를 도맡는 노래는 말하자면 비빔냉면의 고추장 소스같은 존재다. 8월 나란히 막을 올리는 두편의 뮤지컬이 서로 판이한 ‘소스’를 쳤다고 해서 화제다. 학전이 만드는 ‘진진의 사랑’이 푹 곤 엿기름 맛 판소리를 고갱이로 한 ‘여성국극’이라면 서울뮤지컬컴퍼니 ‘하드록 카페’는 메탈 음악이 핫소스처럼 톡쏘는 ‘록뮤지컬’이다. ‘지하철 1호선’이 일으킨 상쾌한 창작뮤지컬 바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학전이 여성국극을 하겠다고 나섰다는 소식은 다소 뜻밖. 하지만 학전측은 여성국극이야말로 한국적 뮤지컬의 원형이라는 반응이다. 판소리,한국무용 등 전통 연희 골자를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대중성이 풍부한게 매력이란 것. ‘진진의 사랑’은 여성국극 1세대 배우 김진진을 주인공으로,내용 자체가 현재까지 여성국극 일생을 돌아보게끔 돼 있다. 진진은 최초의 국극배우 판소리꾼 임춘앵을 이모로 둔 인연에 국극의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그 삶이 가시밭길의 국극과 부침을 같이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원로배우 김진진씨가 직접 늙은 진진으로 출연하며 어린시절 여성국극을 보고 연기자 꿈을 키워온 배우 이정섭씨가 대본·연출을 맡았다. 연극·판소리·한국무용계에서 활약하는 젊은 세대들의 다수 출연한다. 학전측은 이 공연이 빛바랜 여성국극을 회춘시킬 계기르르 마련해주길 바라고 있다. 8월4일∼9월13일 학전 블루. 화∼금 하오 7시30분,토 하오 4시·7시,일 하오 3시·6시.763­8233.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저항음악,비주류음악의 대명사처럼 돼버린 록. ‘하드록 카페’는 윤도현 밴드가 실명을 걸고 출연,한국에서 록이 뿌리내린 과정을 보여준다. 동두천에서 태어나 록 바를 전전하며 자란 도현. 대마초를 피우는 그곳 타잔 아저씨가 그에게 전기 기타를 전수한다.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밥을 벌고 댄스그룹 위세에 밀려 떠도는 윤도현 밴드의 신세는 그대로 이땅에서 록이 굴러다닌 자취다. 이 뮤지컬은 막강 제작진으로 인해 또 다른 화력을 내뿜는다. 뮤지컬 배우 임선애,최정원 등 출연진부터 스타급. 헤비메탈 밴드 H2O 리드싱어였던 김준원이 음악을 담당하고 타잔아저씨로 연기도 한다. 연출은 80년대 ‘영상의 마술사’소리를 들으며 TV를 수놓던 PD출신 황인뢰씨. ‘다시 한번’,‘먼훗날’(윤도현 밴드),‘방황의 모습은’(H2O) 등 앨범 수록곡을 가져와 ‘금속성’을 한껏 높였다. 8월22일∼10월6일 동숭홀. 화∼금 하오 7시30분,토 하오 4시·7시30분,일·공 하오 3시·6시30분,금요 심야 하오 11시.765­3978.
  • 北間島 개척(秘錄 南柯夢:19)

    ◎“간도 개간해 영유권 회복” 은밀히 제의/관직 물러난 심선택,부국강병책으로 진언/고종,“뜻은 거창하나 재정연구뒤 착수” 지시/심,“삼도 어사삼으면 수령출척 충당” 아뢰니 “흉년에 민폐 끼칠라…” 물리치자 없던 일로 두만강 건너 이북의 땅을 북간도(北間島)라 한다. 지금 연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이곳이 고조선과 고구려,그리고 발해의 옛 강역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인데,그토록 귀한 땅이 대륙의 이민족에게 넘어간 것은 고려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그때 간도땅을 차지한 민족을 만주족,일명 여진족이라 하는데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워 중원을 정복하는데 성공한 민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사학자 가운데는 여진족이 이민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금과 청의 역사를 중국사에서 떼어내 한국사의 일부로 끌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가 만일 계속 간도땅을 영유하고 있었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맛보지도 않았을 것이요,일제로부터 침략당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중요한 간도에 고종황제가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어느날 심선택(沈善澤)이 나(정환덕)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전 동부승지 의평(宜平)의 아들이다. 지난해 엄귀인(嚴貴人:엄비)의 여동생에게 장가들어 외척이 되더니 그 인연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자리를 얻어 나갔다. 그러나 겨우 일년이 지나 어머니 상(喪)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돌아왔다. 상를 마친 뒤 아무 직업도 없이 있다가 드디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말하기를 “매우 좋은 일이 있소이다. 영감께서 황상께 아뢰어 꼭 성취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국가를 위한 일이요,창업공신과도 맞먹는 일이니 생각이 어떠하십니까”라는 것이었다. 심선택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고 싶은것은 북간도 개척문제였다. 그래서 정환덕은 “순서대로 조용히 말씀해보시오”라고 말했다. “북간도는 원래는 조선 땅으로 사방이 4천리나 됩니다. 남이(南怡) 장군이 당시에 백두산의 북쪽인 중국 동부지역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고 여기가 조선 땅이라는 것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보면 그 지역이텅비어 있고 관할하는 사람도 없으니 그곳에 공사관(公使館)이나 영사관(領事館)을 설치해 중국과 조선이 서로 무역을 하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으면 부국강병책이 스스로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영감께서는 이 사업을 각별히 힘써서 주선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북간도의 지도 한장과 북간도에 관한 사실을 조사한 서류 한 점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세종때 남이장군이 세웠다는 백두산정계비는 백두산보다 훨씬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며,목격자도 많은데 일제가 폭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뒤 18세기초에 다시 청나라가 강요하여 정계비를 백두산 남쪽에 새로 세우게 되어 백두산 천지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문제된 강이 토문강인데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두만강이 아니라 해란강이라고 주장했다. 심선택은 이같이 간도땅의 역사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에게 건의하여 간도땅을 되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데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은 거창한데 재정이 어려워 섣불리 착수할 수가 없다. 아직은 보류하고 재정을 연구한 뒤 착수하기로 하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심선택에게 상감의 교시가 이와같다는 뜻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감의 교시가 비록 그와같다 해도 좋은 방도가 있으니 상감께서 우리일가 심상훈(沈相薰)을 불러 “북간도의 일을 심선택과 상의하여 보라고 처분을 내리시면 방도가 나올 것이니 다시 그렇게 아뢰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아뢰었더니 상감께서 심상훈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북간도 일은 심선택과 함께 상의해 처리하라”고 교시하시었다. 심상훈은 대한제국의 공신으로 고종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심선택이 심상훈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심선택의 말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심상훈이 심선택에게 “상감께서 북간도 일을 어른(심선택)과 상의해보라는 교시를 내리셨는데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감께서 잘 여쭈시어 나를 북쪽 삼도(三島) 어사(御史)로 삼아 옛 식대로 마패(馬牌)를 가지고 현지 수령들을 출척(黜陟)하는 권한을 갖게 해주신다면 일년도 되기 전에 쉽사리 몇천만원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북간도에 들어가 시설을 하면 재정의 부족은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국고(國庫)의 돈으로써 경비를 낭비하는 일이 있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농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는 많이 이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역경을 딛고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나라의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 문화와 의복을 지켰다. 청나라의 관리들은 한국농민들에게 머리를 깎고 청나라 옷으로 갈아입으면 토지소유권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백의민족으로서 긍지를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우리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범윤(李範允)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로 임명,파견하였다. 이 때문에 심상훈과 심선택은 의견충돌이 일어나 각자 화를 내고 헤어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심선택은 국가의 일에는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그 뒤 심상훈이나를 찾아와 “북간도의 일은 다시 여쭈지 말라”고 단단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심상훈이 황상께 입대해서 아뢰기를 “신(臣)이 저의 일가 심선택의 말을 들어보니 북쪽 삼도(三島)백성의 재산을 거두어서 북간도를 개척하자고 하기 때문에 ‘민간의 재정이 고갈돼 있고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한데 이러한 때를 당해 저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일이 성취되지 않을뿐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서로 관계하고 싶지않다’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황송한 마음은 모두 여쭈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감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었다. 이에 심선택이 나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저 일가 사람 심상훈이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이와같이 반대하고 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라고 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상감께서 처음부터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요,심상훈이 반대한 것이 아니니 차차 일의 형편을 보아가며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 심선택은 물러가고 말았다. 독도는 우리땅이라 했듯간도도 우리땅이었다. 우리 농민들이 개척한 땅이어서 이름을 간도(墾島)라 불렀던 것인데 일제가 ‘사이 간’자로 바꿔 간도(間島)라 명명했고 1909년에 마침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어 땅을 중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 “노사정委에 복귀” 노총·민노총 선언/經總도 特委 참석키로

    한국노총 朴仁相 위원장과 민주노총 李甲用 위원장은 27일 하오 서울 여의도 노사정위 사무실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노사정위원회의 복귀를 선언했다. 이 자리에는 金元基 노사정위원회 위원장도 참석했다. 양대 노총 위원장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총체적 한국사회 개혁과 공정한 고통분담을 위해 노사정위원회의 복귀를 선언한다”면서 “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모든 현안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동계 의지의 표현”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최근 사용자들이 약속한 정리해고 자제가 제대로 이행되기를 바란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노사정위원회의 위상강화에 대한 정부당국의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동안 논의해온 10개 합의사항 중 2가지 미결과제인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자제에 관해 金 위원장이 성실히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해 노사정위의 복귀를 선언한 것”이라고 밝히고 “28일 발표될 2차 공공부문 구조조정안도 연기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근로자 정리해고 문제에대해서는 “노사정위원회에서 제일 먼저 다루게 될 것이며 단위 사업장 문제이므로 합의서는 따로 발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두 위원장은 그러나 “정부가 또다시 노사정위원회를 기왕에 결정된 정책을 통보내지 협의하는 기구쯤으로 전락시킨다면 노사정위원회의 완전탈퇴는 물론 생존권사수 총력투쟁을 불사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노·정합의에 불만을 표시하며 노사정위 불참을 선언했던 재계도 노사정위 산하 특별위원회에 부분참여할 뜻을 밝혔다. 金昌星 경총회장은 이날 상오 경총회관 8층에서 金 위원장과 긴급회동을 갖고 “노사정위 참여여부는 조만간 회장단회의를 열어 최종 결정하되 27∼28일 이틀동안 열리는 공공부문 구조조정특위에는 사안의 시급성을 감안해 실무자를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부분참여하겠다”고 밝혔다.
  • “칠갑산 황폐화” 사실과 달라

    지난 11일자 24면 ‘칠갑산 황폐화된다’제하의 기사에서 칠갑산 도립공원이 청양군 尹모의원에 의해 도벌과 남벌로 황폐화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의 내용중 청양군이 벌채허가한 국사봉은 운곡면 신대리에 위치한 차령산맥의 한 고지로서 도립공원 칠갑산과는 무관하며 청양군의 조사결과 허가지역외의 벌채에 대해서는 산림법 위반혐의로 벌채 행위자를 사법처리하는 등 행정조치를 취한 상태다. 또 尹의원이 허가량보다 많은 양의 나무를 벌채한 사실이 없으며,타인소유의 임야를 침범하여 무마조로 500만원을 줬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며,700m의 운재로에 대해서도 신고절차에 의거 정식허가된 것으로 밝혀졌다.
  • 制憲 50돌을 돌아본다:5·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거듭나야할 법조/“권력이익이 우선” 탈법 방조/악법운용에 직간접 연관 고문 등 양심수주장 외면/최근에 검은돈에도 연루 ‘최후의 인권보루’ 요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법을 순진하게 잘 지키는 사람만 손해본다” 우리사회에 그동안 유행돼온 법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말들이다.이는 법이 결코 대다수 국민들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인식의 결과이다. 이런 법치문화의 위기는 법을 악용하고 조작한 독재권력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나 법조인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악법과 법 운용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법부와 검찰은 왜곡된 과거를 반성하고 국민의 법조로 거듭나고 있는 것일까.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상실과 그 역할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상태입니다. 특히 1987년 이래 폭발적으로 분출해온 온 국민의 민주화열기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 오늘날 사법부가 직면한 위기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88년 6월15일 서울지역의 판사 59명이 발표한 ‘새로운 대법원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란 성명서 내용의 일부다. 이 성명사태는 전국 법원으로 확산됐고,마침내 金容喆 대법원장의 퇴임과 李一珪 대법원장 취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와 움직임은 없었다. 수많은 양심수를 양산해내고 고문 주장에 얼굴을 돌렸던 부당한 재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도,사죄 한마디도 없었다. 수색영장 남발,고문주장 사건의 증거 인용 등 탈법적인 수사활동을 조장·방조하는 일이 이어졌다. 검찰은 행정부에 소속된 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검사들은 업무의 특성상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받도록 준사법관으로서 법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이 성역없는 법 적용을 통해 추상같은 검찰권을 세워야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검찰은 그동안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88년 金淇春 검찰총장의 취임사는 국민들이 검찰의 변신에 대한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국민에 준법을 선도하고 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검찰부터 수사상의 적법절차를 엄히 지키고…,우리 검찰권이 중립성과 독립성이 존중되어야하는 국가공권력임을 잠시라도 잊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임사로 끝났다. 사법부와 검찰의 부끄러운 자화상은 아직도 씻겨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올들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온 법조인들의 돈과 관련된 비리사건들은 우리 법과 법조인의 왜곡됨이 그 한계에 다다른 느낌마져 주고 있다. 법치주의는 국민들이 법을 집행하고 결정하는 법조인들을 신뢰하고 존경할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은 수백만달러의 연봉이 보장된 변호사를 포기하고,수십만달러를 받는 봉급장이 공무원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미국 국민들이 있고,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의 결정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다. 우리 법조인들이 깊이 되새겨보아야할 점이다. ◎시국사건판결 50년명암/권력에 맞선 소신 판사 줄줄이 해임/반공법사범 석방하자 뇌물사건 엮어 보복/대법원장이 “현실을 직시하라” 훈시하기도 격동의 반세기 속에서 많은 판사들이 권력의 편에 섰다. 굴욕을 거부하고 용기있게 권력에 맞선 법조인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굴욕을 감수하면 살아남고,이에 맞서면 옷을 벗어야 했다. 정의의 실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법조계의 반세기도 이같이 굴절된 어두운 역사로 얼룩져 있다. 1958년 7월 서울지법 유병진(재판장)·이병용·배기호 판사는 진보당 사건으로 기소된 조봉암 진보당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위반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적제거를 위해 사건을 조작한 이승만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조용순 대법원장은 사법감독관회의를 열어 “법관이라 하여 국가목적을 위한 숭고한 정신을 망각하고 주관적인 견해만을 고집한다면 국가이념에 배치됨이 이보다 심함이 없을 것”이라고 훈시했다. 사법부의 수장 스스로 정치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어 서울고법 김용진(재판장)·최보현·조규대 판사는 항소심에서 조봉암에 사형을 선고했고,다음해 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7월 사형이 집행됐다.1심 재판장이었던 유병진판사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법관 연임이 거부됐다. 판사가 권력에 맞서 소신판결을 내리면 즉각 권력의 반격이 뒤따랐다. 대법원은 71년 국가재정 형편을 이유로 군인과 군속이 손해배상청구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에 대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때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판사 9명은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2년후 모두 의원면직됐다. 또 비슷한 시기에 신민당사에 들어간 서울대생들과 월간 ‘다리’지 사건에 연관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임중빈씨 등에 대한 무죄가 선고됐다. 이는 사법부에 대한 보복을 불러,반공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 판사들이 제주도에 출장가면서 항공료 등 9만3,000원의 뇌물을 받았다며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영장 기각과 재청구,재기각 사태가 벌어졌고,급기야 전체 법관의 3분의 1인 153명이 사표를 내는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유신시대는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던 때이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주장에 대해 합헌이라고 판결,독재정권의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의 저항권 자체도 부인하는 판결을 내렸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75년 법원장회의에서 “현실을 직시하라. 무엇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최선이고 사법부의 권위를 앙양시키는 길인가를 생각하라”고 훈시했다. 이때 판사들은 대다수의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朴禹東 변호사 인터뷰/“법조인들 나약해 법치주의 위협받아”/통치권자 사면권도 남용되면 곤란/오판위험 줄이게 피고·원고 모두 연구를 “법조 50년에 대한 평가요? 법조인치고 우리 법과 법조인이 제역량을 해냈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朴禹東 변호사(64)의 우리 법조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인색하다. 그 자신 33년간 판사생활을 했고 지금도 재야법조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그의 비판은 사정이 없다. 법치가 외면받고 위협받아온 가장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법조인들의 나약함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군사독재정권에 과감히 맞서 싸운 법조인이 많았다면 독재정권이 오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고만 있어도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요. 법치주의가 서려면 지금이라도 법조인들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합니다.” 대법관,법원행정처장 등에 임명될 때 마다 ‘학구파’,‘선비형’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朴변호사. 그는 후배 판사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몇 안되는 법조인 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지금은 판사시절을 돌이켜보며 “왜 좀더 깊이 검토하지 못했을까. 변호사로서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만큼,원고와 피고 양쪽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했던 것일까”라고 반문해보곤 한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에게 “50%가 아닌 100%의 연구와 검토를 양쪽 모두에게 쏟으라고 주문한다고. 그래야만 오판의 위험을 막을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법조가 일부 판사와 변호사들의 비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에 대해 朴변호사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99.9%의 판사는 깨끗하고,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 변호사들의 수임 관련 비리도 대한변협의 적극적인 자체정화 노력으로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내다 봤다.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한 새내기 변호사들은 수임이 어려워 비리의 유혹을 받기 쉬운 만큼 개업보다는 법인에 취업하기를 권했다. 사법개혁 차원에서 사법시험 합격자를 양산하는 것에 대해 그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법조인 수를 늘리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과 사법시험 체제에서 합격자만 늘리는 것은 법조인의 질을 떨어뜨릴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전에 외국의 로스쿨 같은 폭넓은 시각을 갖춘 법조인을 양성할 수 있는 전문교육기관을 설립해 정착시켜야 한다고 했다. 朴변호사는 법치문화 정착을 위해서는 통치권자의 사면권 남용도 지양돼야 한다고 본다. 全斗煥·盧泰愚 전 대통령이 무기징역과 17년 형을 대법원에서 확정받고,해도 넘기기 전에 풀려나는것을 보면서 국민들이 무엇을 생각했겠느냐고 했다. 그는 “앞으로 대통령은 과거와 같은 ‘고유권한적·자의적 사면권 행사’라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특집기획팀 ▲李昌淳 팀장 ▲許南周·李穆熙 차장 ▲金聖昊·任昌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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