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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책 제언] 열악한 ‘공무원 재해보상제’ 개선해야/정창률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연구분과위원장·단국대 교수

    [정책 제언] 열악한 ‘공무원 재해보상제’ 개선해야/정창률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연구분과위원장·단국대 교수

    지난해 상반기에 정부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핵심적인 개혁 어젠다로 설정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 공무원연금이 열악한 재정 속에서도 국민연금에 비해 관대한 ‘노령연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게 개혁의 명분이었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성과에 대해 이견도 있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놓친 게 있다. 열악한 공무원 재해보상제도에 대한 개선이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에서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무원연금은 과잉보장의 대상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주로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무원연금법 안에 있는 공무원 재해보상제의 경우 일반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재보험에 비해 열악한 게 사실이다. 소방관이나 경찰은 물론 검역 등 공익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다양한 업무에 공무원이 투입되고 있다. 이들이 직무 중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고를 당했을 때 적절하게 보상하는 일은 기본적인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데 공무원을 위한 ‘산재보험’인 공무원 재해보상제는 공무원으로 하여금 헌신을 유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족하다. 최근 공무수행 중 사망한 어느 공무원의 유족에게 지급된 급여액은 순직유족연금 월 91만원, 순직유족보상금 8200만원에 불과했다. 39세인 가장의 젊은 나이를 고려할 때 어린 자녀를 포함한 유족 3명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공무원이 아니라 일반 근로자였다면 유족에게는 월 200만원 이상의 연금이 지급됐을 것이라고 한다. 공무원 재해보상 급여 수준은 사망한 공무원 개인의 소득에 따라 결정되다 보니 소득 수준이 낮은 단기 재직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문제도 발생한다. 재직기간이 짧을수록 현장 근무가 많아 재해에 노출될 위험은 높은데도 보상수준은 턱없이 낮다.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도 사망한 공무원의 재직기간이 10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재직기간이 짧은 젊은 공무원일수록 일반적으로 배우자, 자녀 등 유족이 살아갈 날이 길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1960년 도입된 공무원 재해보상제도가 1964년 도입된 산재보험에 비해 현저하게 보장의 정도가 미흡한 데엔 공무원 재해보상제가 공무원연금법 내에 포함돼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공무원 재해보상제도의 근본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이를 별도 법령으로 분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두 제도의 목적이나 재원도 다르다. 20년 이상 공무원의 퇴직연금에 대한 축소 요구가 있는 상태에서 열악한 재해보상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미국, 일본, 영국 등 다른 나라도 공무원연금법과 별도로 재해보상법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 근로자의 경우에도 노후소득보장 측면에서는 국민연금이, 업무상 재해에 대한 보장 측면에선 산재보험이 맡고 있지 않은가. 올바른 사회보장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고른 보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보장성이 열악한 공무원의 재해보상을 이제 현실화할 때가 됐다.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 번뇌의 불꽃 스러지고 깨달음 얻으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 번뇌의 불꽃 스러지고 깨달음 얻으리

    적멸(寂滅)은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한다.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아래는 그래서 적멸도량이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장소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에 배례하는 공간을 뜻한다. 진신사리란 부처의 유골이니 진신사리를 모신 탑은 곧 부처의 무덤이다. 그래선지 궁(宮)은 전(殿)보다 위계가 높다. ●신라 자장법사, 당서 진신사리 가져와 5곳에 봉안 우리나라에는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절들이 있다. 영취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가 그렇다. 여기에 태백산 정암사를 더해 흔히 5대 적멸보궁이라고도 일컫는다. 정암사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통도사 것을 다시 나눈 것이라고 한다. 다른 네 곳의 적멸보궁과 달리 정암사 적멸궁만 보(寶)자를 들어내 위계를 살짝 낮춘 것도 이런 분사리(分舍利)의 역사를 인식하고 작명(作名)에 반영한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태백산 정기와 별빛이 흐르는 비밀스러운 절집 강원 정선군 정선읍에 자리잡은 정암사는 자장법사가 귀국한 정관 19년(645) 창건한 것으로 사적(寺蹟)은 전한다. 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다. 당시 이름은 석남원(石南院)이었다. 자장법사의 높은 법력(法力)에 감화한 용왕이 수마노석을 건네 탑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수마노탑이라고 불리는 정암사의 7층 모전석탑은 고려 석탑의 특징을 갖고 있다. 수마노는 붉은색, 검은색, 흰색이 섞인 석영의 일종이라지만 이 탑의 재료는 석회암이다. 정암사를 가려면 정선 사북에서 만항재를 향해 오르거나 반대편인 영월 상동에서 만항재를 넘어야 한다. 해발 1330m의 만항재는 포장도로가 놓인 고개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1573m의 함백산과 1567m의 태백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별빛이 매우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져 있다. 수도권에서 떠난다면 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을 경유하게 된다. 카지노가 있는 사북과 고한을 거쳐 414번 지방도에 접어들어 달리다 보면 왼쪽에 절이 나타난다. 적멸궁은 절 마당의 오른쪽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산 위에 보이는 수마노탑으로 가려면 적멸궁 뒤로 놓인 가파른 돌계단을 100m쯤 올라가야 한다. 진신사리를 모신 수마노탑은 곧 적멸궁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니 적멸궁에는 불상 아닌 꽃방석만 놓였다. 대신 수마노탑 쪽으로 여닫이창을 내 놓았다. 여기서 수마노탑을 향해 참배한다. 그러니 적멸궁과 수마노탑은 둘이지만 하나다. 오늘날 적멸보궁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절집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적멸보궁이라는 이름부터가 다른 나라의 불교문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정암사 적멸궁 또한 자장법사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건륭 36년(1770) 4월 기도를 시작하고 목수와 석공을 청하여 보탑, 보궁 및 여러 승당을 일시에 이룩하고자 하니 일꾼만도 수백명이었다. 산불로 모두 타버린 전각을 을미년(1775) 재물을 시주받아 중건했다’는 ‘태백산 정암사 수마노탑 중건 사적’이 가장 오랜 것이다. 여기에 ‘태백산 정암사 적멸궁 법당 중수기’와 ‘태백산 정암사 중수기’ 내용을 종합하면 적멸궁은 1770년 창건되고 곧바로 불이 나자 1775년 중건한다. 1885년 대들보를 교체했고 1919년에는 너와(木瓦) 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는 중수가 이루어졌다. 태백산맥 서쪽 줄기에 해당하는 정선은 오랫동안 오지 중의 오지였다. 절을 세우고, 너와 지붕 법당일 망정 법등(法燈)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원사·월정사·흥전리절터 잇는 ‘불교벨트’ 그런데 최근 정암사의 태백산맥 반대편 산허리라고 할 수 있는 삼척 흥전리절터에서 국통(國統)이라고 새겨진 비석 조각과 국보급 청동정병이 출토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교국가 신라에서도 매우 지위가 높은 국사(國師)나 왕사(王師)급이 머물던 사찰이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정암사는 북쪽의 평창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동쪽의 흥전리절터와 더불어 매우 중요한 ‘불교벨트’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가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정암사 일대를 추천하고 싶다. 석탄 산업의 경쟁력 약화로 어려움을 겪는 정선·태백·삼척 주민들에게도 적지 않은 격려가 될 것이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열린세상] 터키는 어떻게 우리의 혈맹이 되었나/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열린세상] 터키는 어떻게 우리의 혈맹이 되었나/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우리에게 터키는 형제의 국가로 기억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한국과 터키 간 3~4위전은 승패를 떠나 진한 감동으로 기억되는 두 나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비행기로 12시간이나 걸리는 유라시아 반대편의 터키가 피를 나눈 형제국가가 된 상황은 잘 모른다. 흔히 6·25전쟁 때 4번째로 큰 1만 4000여명이라는 대규모 원조군을 파견했던 인연을 떠올린다. 하지만 파병 16개국 중 태국, 필리핀처럼 대규모 파병을 한 이웃 나라들을 제쳐놓고 유독 터키에 그런 명칭이 붙여진 데에는 터키의 사정이 더 컸다. 원래 알타이 지역에서 기원해서 서쪽으로 이동, 정착한 터키는 19세기 후반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자신들의 기원인 유라시아를 강조한 역사관을 확립했다. 그에 따라 터키는 과거 튀르크 계통의 주민이 거주했던 모든 지역을 자신의 역사에 포함했다. 그 결과 터키 역사의 시작은 중국 북방과 몽골에 있는 흉노에서 시작된다. 흉노는 고조선과 인접해 있었고 고구려 시기에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접경했으니 한국은 그들에게 이웃한 형제 같은 나라가 된다. 나아가서 터키는 동부 시베리아 북극권에서 살고 있는 사하(야쿠티아)족까지도 자신들의 일부로 본다.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도 그들이 머나먼 동아시아를 형제의 국가로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망하기 직전의 제정 러시아였다고 해도 유럽의 제국이 동양인의 작은 나라였던 일본에 패했다는 것은 전 세계적인 충격이었다. 유럽의 변방에 있었지만 머나먼 동방인 알타이에서 기원한 터키로서는 극동에 있는 일본의 약진은 큰 위로가 되었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무너진 이후 아타튀르크(케말 파샤)가 터키를 재건하고 그들의 국가를 보존하는 데에 유라시아 사관은 큰 역할을 했고, 6·25전쟁 때 한국에 대한 대대적인 파병과 원조로 이어지면서 형제국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터키는 유라시아 대부분을 자신의 역사적인 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제삼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러시아나 칭기즈칸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한 몽골이 그런 관점에 동의할 리 없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독립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유라시아 전역을 자신의 역사로 간주하는 팽창적 사관을 도입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92년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국가의 상징으로 알마타 근처에서 발굴된 2500년 전의 유목민인 사카인의 황금유물을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현재 카자흐인들이 그들과 직접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유라시아를 자국의 역사로 바꾸려는 각국의 경쟁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속의 실크로드로 표출되고 있다. 터키의 쿠데타로 어수선하게 마무리된 2016년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회의에서는 터키의 아니(Ani) 유적은 실크로드로 공인받게 되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본다면 아니 유적에는 동서 문명교류의 증거가 별로 없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광활한 유라시아가 한민족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한반도와 유라시아는 많은 문화적 교류를 했음이 다양한 고고학적 증거로 확인되고 있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자료나 빈약한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다른 나라를 자신의 땅임을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나라의 위신을 깎아 먹을 수 있다. 예컨대 몽골이 칭기즈칸의 정복을 근거로 유럽에서 한반도를 전부 자신의 영토로 간주할 수 없으며, 오바마가 케냐계 이주민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케냐 역사에 미국사를 포함할 수 없는 이치이다. 잊힌 과거의 광활한 영토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서 자신의 역사를 밝히고 그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800년 전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과 100년 전 아시아를 정복했던 만주족이 21세기 사회에서 초라한 위치를 차지한 이유가 자신의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의 관계 때문이었다. 최근 유라시아 각국의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자국의 거대한 영토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을 보노라면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 사회를 외면하고 마치 진통제처럼 찬란했다고 생각하는 과거 역사에 의지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신임 원장으로 이기동(73) 동국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선임됐다고 21일 밝혔다. 한국 고대사 분야의 대표적 연구자인 이 신임 원장은 서울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북대와 동국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위원, 진단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비상임 국사편찬위원이다. 임기는 3년.
  • 진땀 흘린 한국사… 기본서 넘어서 ‘난도 상’

    진땀 흘린 한국사… 기본서 넘어서 ‘난도 상’

    올해 두 번째인 경찰공무원 필기시험이 지난 3일 전국 80여개 고사장에서 일제히 치러졌다. 전 과목이 대체로 평이한 수준으로 출제됐으나, 필수 과목인 한국사 등은 다소 변별력이 있었다. 올해 상반기에 치른 경찰 필기시험과 비교하면 난도가 소폭 상승했다는 게 수험가의 반응이다. 박문각 남부경찰학원 강사진의 도움을 받아 과목별 출제경향 및 난도를 분석했다. <영어> 필수 단어·숙어 등 무난 영어는 평이한 수준이었다. 최근 기출 경찰 영어시험에 맞춰 전략적으로 공부했다면 문제를 풀어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다. 남지해 강사는 “지엽적인 내용보다는 역대 시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내용이 예상대로 출제됐다”고 말했다. 필수 단어, 숙어를 확실히 익힌 뒤 기출 문제를 중심으로 고난도 어휘를 꾸준히 챙겨온 수험생이라면 당황하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다만, 독해 영역에서는 빈칸 추론, 순서 맞추기 등 다소 까다롭게 느껴질 수 있는 지문이 일부 포함됐다. 그럼에도 대부분 독해 문제가 큰 뜻만 파악하면 정답을 고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사> 해방 후 현대사 빠져 의외 이번 경찰 시험에서 수험생이 진땀을 뺀 과목은 한국사다. 이운우 강사는 “한국사는 난도가 ‘상’에 해당할 정도로 어려웠다”며 “기본서에 나오지 않는 내용까지 추가된데다, 알고 있는 내용도 확실하게 암기하지 않았을 때 헷갈릴 만한 문제들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사 출제 경향과 유사하면서도 기본서를 넘어선 부분에서 문제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평년보다 어려웠다는 분석이다. 대부분 평이한 난도로 출제된 이번 시험에서 한국사만 유독 변별력이 있었다. 다만, 해방 이후의 현대사 부분에서 단 한 문제도 출제되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고 이 강사는 전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에서는 골고루 문제가 나왔다. 시험이 어려워질수록 기본서를 소홀히 한 수험생이 고득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기노트 요점정리에만 의존해 한국사를 공부해온 수험생은 앞으로 반드시 기본서를 정독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다. <경찰학개론> 총론·각론 균형 출제 ‘경찰학개론은 총론과 각론에서 각각 10문제씩 나와 균형을 이뤘다. 총론에서는 한국경찰의 역사와 제도 부분을 제외하고, 경찰학의 기초 2문제, 경찰과 법적 토대 6문제, 경찰관리 1문제, 경찰통제 1문제가 나왔다. 각론에서는 생활안전 3문제, 외사 2문제를 비롯해 나머지 영역에서 각각 1문제씩 출제됐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법률’의 출제 비중이 가장 높았다. 경찰법, 경찰공무원법, 경찰관직무집행법, 경찰감찰규칙, 경범죄처벌법, 실종아동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보안관찰법, 출입국관리법, 범죄인 인도법에서 각각 1문제씩 모두 12문제가 나왔다. 이론을 다룬 문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국가경찰과 자치경찰 비교, 경찰의 지역관할, 훈령, 환경설계를 통한 범죄예방(셉테드·CPTED), 계급제와 직위분류제, 개괄적 수권조항 인정 여부, 다중범죄의 정책적 치료법에서 각 1문제씩 7문제가 출제됐다. 교통판례에서도 1문제가 나왔으며 박스에서 개수를 고르는 문제 유형이 역대 기출 가운데 가장 적게 출제돼 난도가 낮아졌다는 평가다. 공병인 강사는 “이미 경찰시험에서 다뤘던 경찰관의 경찰장구·분사기·최루탄·무기 등의 사용 관련 규정, 시보임용, 계급제와 직위분류제, 즉시강제, 절대적 인도거절 사유 등이 또다시 등장했으며, 기출 내용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다뤄진 내용도 있었다”며 “전반적으로 난도가 평이했다”고 말했다. 다만, 그동안 한번도 출제되지 않았던 ‘개괄조항 인정에 관한 학설’과 ‘가정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상 임시조치’는 수험생이 까다롭게 느꼈을 내용이다. 공 강사는 “범위가 방대한 과목이지만 기출문제를 많이 차용하기 때문에 80점 정도까지는 쉽게 득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형법> 90% 지문이 판례서 나와 형법에서는 역시 판례의 출제 비중이 높았다. 김승봉 강사는 “결과적 가중범의 법조문, 위법성조각사유의 전제사실 착오 2개 지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든 지문이 판례에서 나왔다”며 “경찰 채용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법조문을 보면서 새로운 판례를 꾸준히 숙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다만, 기본 이론을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기출 문제 지문을 외우는 것은 금물이다. 지문이 변형돼 출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판례 중에서도 이번 시험에서는 최신 판례와 기본 판례, 판례와 이론, 판례와 법조문 등 다양한 지문이 혼합돼 어느 한 부분에 치중되지 않고 골고루 출제됐다. <형소법> 상소·재심 부담없는 지문 형사소송법도 적정한 수준의 난도로 전 영역에서 고루 출제됐다는 분석이다. 김승봉 강사는 “수사, 증거 부분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전 범위에서 문제를 내려고 한 출제 의도가 드러난다”며 “기본적인 문제와 최신 판례도 균형 있게 배치됐으며, 상소나 재심의 경우 무난한 지문으로 출제돼 수험생 부담이 줄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헌법의 명문규정 여부, 함정수사, 불심검문, 피의자신문, 현행범체포, 구속, 압수수색, 증거보전제도, 공소시효, 간이공판절차, 국민참여재판, 공소장 변경, 엄격한 증명,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 전문법칙에서의 피의자신문조서, 탄핵증거, 보강법칙, 동의, 재심, 즉결심판 등이 이번 시험에서 다뤄졌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여진 414회… 식판 들고 대피… 일상이 흔들리는 경주

    여진 414회… 식판 들고 대피… 일상이 흔들리는 경주

    길게는 몇 달까지 이어질 수도… 재난 문자 경주 6분·대구 10분 지난 19일 규모 4.5에 이어 21일에도 규모 3.5의 여진이 발생하자 경북 경주 시민들은 등교나 출근 등의 일상생활도 버거워하고 있다. 이날 경주시 구정동 불국사초등학교 학생 300여명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다 운동장으로 대피했다. 지난 12일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한 이후 414차례의 여진이 이어졌다. 여진은 지진 발생 첫날 93회, 다음날인 13일에는 195회로 절정을 이뤘다가 줄어드는 추세였다. 14일 26회로 급격히 줄어든 데 이어 15일 11회, 16일 16회, 17일 10회, 18일 13회 등으로 점차 안정기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여진의 규모도 14일 최고 3.0에서 17일 최고 2.1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19일 4.5 규모의 여진이 발생한 뒤로 여진의 횟수가 증가세로 돌아섰다. 19일 이어진 여진만 24회였고 20일에는 17회 발생했다. 21일 오후 9시 현재 9회다. 상당한 규모의 여진이 지속되자 경주 시민들은 공포 등 심각한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다. 누워 있는데도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 멀미를 하거나 가벼운 진동에도 화들짝 놀란다. 김모(72·여)씨는 “밤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는 데다 차멀미하듯 속이 메스꺼워 밥 한 숟가락 먹지 못하고 있다”면서 “언제 여진이 멈출지 몰라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이모군은 “여진에 익숙해지지 않아 발생할 때마다 무섭다”고 밝혔다. 홍태경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는 “본진 규모를 생각했을 때 여진이 많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앞으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까지도 여진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안전처는 이번에도 여진 발생 후 6분이 지난 오전 11시 59분 경주 시민에게 경고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대구 등 인근 지역에는 10분이 지난 낮 12시 3분에야 문자메시지가 발송됐다. 경주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지진여파로 운동장에서 점심

    지진여파로 운동장에서 점심

    21일 오전 경북 경주 남남서쪽 10㎞에서 규모 3.5의 지진이 발생하자 경주시 구정동 불국사초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이 사진들을 본 네티즌들은 “어디 안전한 대피소라도 없는건가? 우리 애들만 고생하네,,,맛있게 먹고 튼튼하게 자라라.”라고 격려했다. 또 “애들아 그 아래 인조잔디 아니니? 발암물질 검사는 한 곳인가?”라며 건강을 염려하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지진, 경주 관광산업 강타... 붕괴 위기

    “세월호, 메르스 사태에서 겨우 회복되나 했는데 지진 때문에 관광객이 뚝 끊겼습니다.”-경북 경주 숙박업주 A씨 경주에 규모 5.8 강진에 이어 여진이 계속되면서 수학여행 등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예년 이맘때면 학생들로 붐벼야 할 유스호스텔 객실은 21일 텅텅 비어 있었다. 주차장에서는 학생들을 수송하는 버스를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최대 관광단지 가운데 하나인 경주 보문관광단지 주요 호텔과 콘도도 예약 취소가 속출하고 있다. 경주시와 불국사숙박협회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수학여행을 예약 학교 가운데 90% 정도가 해약했다. 300여 개 학교에서 4만 5000명이 경주행을 포기했다. 지난 19일 규모 4.5 여진이 발생한 직후에는 경주에 있던 수학여행단 100여 명이 긴급히 귀가했다. 불국사 인근의 한 유스호스텔에는 올가을 4600여 명의 수학여행단이 올 예정이었으나 4000명이 이미 해약했다. 유스호스텔 업주는 “나머지 600여 명도 취소될 게 뻔하다”며 “교육지원청에서 각급 학교에 지진 발생 인근 지역으로의 체험학습을 자제하라는 공문까지 보낸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에는 수학여행단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수학여행단을 주로 유치하는 숙박 업주들은 “경주시에서 지진으로 인한 숙박업 손해는 피해 보상에도 들어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며 “세월호,메르스 사태로 수학여행단이 크게 줄었다가 올해 겨우 회복세를 보였는데 이번 지진으로 다시 침체될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일반 관광객의 발길도 끊겼다. 경주 보문단지 주요 호텔과 콘도 16곳의 9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예약 취소 객실과 인원은 4081실에 1만1160여명이다. 업계는 피해 금액을 5억1000만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경주시 관계자는 “지진으로 재산 피해도 크지만, 관광업 피해도 막대하다”며 “당분간 관광산업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주 지진 피해로 훼손된 문화재 복구비는? 경주시 “최소 46억” 주장

    경주 지진 피해로 훼손된 문화재 복구비는? 경주시 “최소 46억” 주장

    경북 경주에 ‘9·12 지진’으로 훼손된 문화재를 복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최소 46억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21일 경주시에 따르면 지진으로 발생한 문화재 피해는 국가지정 32곳, 도지정 22곳, 비지정 1곳 등 모두 55곳이다. 첨성대(국보 제31호)는 북쪽으로 2㎝ 기울고 상부 정자석 모서리가 5㎝ 더 벌어졌다. 다보탑(국보 제20호)은 상층부 난간석이 내려앉았고 불국사 대웅전 지붕과 용마루 등이 일부 파손했다. 단석산 마애불(국보 제199호)의 보호각 지지대 하부에 균열이 생겼고 이견대(사적 제159호)와 오릉(사적 제172호) 기와가 훼손됐다. 전문가는 문화재는 일반 건축물과 성격이 달라 복구비가 좀 더 많이 든다고 설명한다. 일일이 정밀안전진단을 거쳐서 얼마나 훼손됐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석조문화재는 보통 정밀안전진단에만 3000만∼5000만 원이 든다.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의 경우는 해체 수리에 40억 원이 들었다. 파손된 기와도 단순히 기와만 새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와 아래에 있는 흙, 나무 등 부재를 들어내서 피해 정도를 파악해야 한다. 이같이 문화재 복구에 큰 비용이 들다가 보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복구비 산정을 놓고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경주시는 정밀안전진단과 긴급 복구에 드는 비용만 추산해 46억 원이라고 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해체 수리 비용이 빠져 정확하게 얼마나 들어갈지 알 수 없다. 경주시 관계자는 “만약 해체해 복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경주 문화재 복구에는 100억 원 이상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주 또 3.5 여진…대구·경북 주민들 공포, 학생들 운동장 대피(종합)

    경주 또 3.5 여진…대구·경북 주민들 공포, 학생들 운동장 대피(종합)

    21일 오전 11시 53분쯤 경북 경주에서 또다시 규모 3.5의 여진이 발생했다. 계속되는 여진으로 대구·경북 지역 주민들의 불안감이 더 커지고 있다. 기상청은 규모 5.8 본진 탓에 일어난 지진이라고 분석했다. 대구 수성구와 경산 압량면 주민들은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흔들렸다고 전했다. 경주 주민 이소순(82)씨는 “우르르 우르르 세 번 울리고 재난 대피 문자가 왔다”고 말했다. 또 이우순(76)씨는 “가다가도 땅에 주저앉게 된다”며 공포감을 드러냈다. 경주 불국사초등학교 학생 300여명은 교실에서 나와 운동장으로 대피했다. 점심시간 직전 발생한 지진에 전 학년 학생들이 급식실이 아닌 운동장에서 밥을 먹고 있다. 3학년 김승철군은 “책상 밑으로 숨거나 운동장으로 대피하라고 배워서 먼저 책상 아래로 피했다가 지진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5학년 이장호군은 “자주 겪고 있지만 익숙하지 않아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나왔다”며 “책상 밑에 숨어 있다가 방송을 들으며 나왔다”며 불안해했다. 한 여교사는 “원전은 괜찮은가 걱정이다”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지진에 대한 막연한 예측도 주민들을 공포로 몰고 있다. 경주 한 주민은 “이달 말에 대지진이 온다는 괴소문이 돈다”고 전했다. 임신부나 노약자 등 당분간 다른 도시 친인척 집으로 피신하는 주민이 있다고 전하는 주민도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주 3.5 여진 또 발생…주민들 공포, 점심 먹다가 대피

    경주 3.5 여진 또 발생…주민들 공포, 점심 먹다가 대피

    21일 경북 경주에서 규모 3.5 여진이 발생했다. 이날 지진은 울산 곳곳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등 진동이 느껴질 만큼 컸다. 계속된 여진으로 경주 지역 주민들은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지진이 나자 경주 불국사초등학교 교사와 학생 300명은 즉시 운동장으로 대피했다. 이 학교는 점심시간이지만 급식실에 가는 일이 불안하다고 판단해 운동장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3학년 학생 김승철군은 “지진이 나면 책상 밑으로 숨거나 운동장으로 대피하라고 배웠다”며 “책상에 먼저 숨었다가 진동이 끝난 뒤 밖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5학년 학생 이장호군은 “자주 겪었지만 익숙하지 않고 깜짝 놀랐다”며 “비명을 지르는 친구도 있었다”고 전했다. 불국사 인근 주민 이소순(77·여)씨는 “‘우르르’하는 소리와 진동이 세 번 났다”며 “가다가도 땅에 푹 주저앉게 된다”고 말했다. 경주와 포항 주민은 점심시간 무렵에 여진이 나자 허둥지둥 대피했다. 또 경북도소방본부와 대구시소방본부에도 지진을 느꼈다는 신고가 수백건 들어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본지 정연호 기자 보도사진상

    본지 정연호 기자 보도사진상

    20일 한국사진기자협회(회장 이동희)는 전국 신문ㆍ통신사 소속 회원 500여명의 8월 취재. 보도 사진을 심사한 결과 164회 ‘이달의 보도사진상’ 생활스토리부문 최우수상에 본지 정연호 기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가장 빠른 손’을 선정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가장 빠른 손’은 국회 속기사의 일상을 심층적으로 기록한 스토리사진이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용산팔경 명성 품은 물 마른 7.7㎞ 물길 역사가 대신 흘렀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용산팔경 명성 품은 물 마른 7.7㎞ 물길 역사가 대신 흘렀다

    내가 지금 사는 집도 서울미래유산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기준에 적합하면 가능하다. 미래유산은 시민 손으로 발굴하는 것을 가장 큰 가치로 삼는다. 선정 과정은 시민 손으로 발굴한 미래유산에서 보전가치를 파악하고 그 가치를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일련의 여정이다. 미래유산은 발굴·신청, 조사·심의, 선정·발표 단계로 지정된다. 최종 확정된 미래유산에는 인증서가 교부되고 5년마다 재발급 여부를 결정한다. 미래유산 시민제안은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에서 누구나 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 같은 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서울신문·문화지평과 공동주관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만초천(蔓草川). 무악재(길마재)에서 발원해 서대문사거리, 서울역, 서부역, 청파로, 원효로를 따라 흐르다 원효대교 밑에서 한강에 합수되는 물줄기다. 만초는 넝쿨이 무성한 풀을 말한다. 천변에 풀이 덩굴째로 무성히 자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일명 넝쿨내라고도 부른다. 폭염이 한풀 꺾인 지난달 27일 일곱 번째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는 만초천 물길을 따라 걸었다. 하늘이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모였다. 물줄기 원천인 안산과 인왕산이 청명한 대기 때문에 한결 가깝게 보였다. 만초천 길라잡이는 전상봉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맡았다. 서울시민연대 대표이기도 한 전 해설사는 ‘전상봉의 서울 이야기’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등 서울시민의 인문학 소양을 높이는 데 힘쓰고 있다. 순국정신 깃든 ‘서대문독립공원’…떡 도매하던 영천시장 옥바라지의 흔적 서대문독립공원은 지금은 역사관으로 바뀐 서대문형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이 밖에 순국선열추념탑, 서재필 선생 동상, 독립관(순국선열 위패봉안소), 3·1 독립선언 기념탑,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이진아 기념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을 1996년 복원해 내부에 순국선열 위패 2327위를 모셨다. 그래서인지 독립관이란 현판 앞에 별도로 현충사란 현판을 걸고 있다. 전 해설사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면서 해설이 시작됐다. 그가 펼쳐든 것은 수선전도(首善全圖) 실사출력물이다. 수선은 서울을 뜻한다. 수선전도는 서울시 지도인 셈이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지도다. 최근 답사에서 보충 교재가 자주 등장한다. 앞서 박광규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노트북을 이용해서 잘 보이지 않는 서울미래유산을 설명했고, 배건욱 해설사도 파일에 옛 사진을 담아 나와 해설에 입체감을 더했다. 전 해설사도 사진파일은 물론 실사출력 지도를 준비해 와 이해를 도왔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어서 수선전도를 세 명이 붙잡아야 했다. 안테나형 지시봉까지 챙겨 온 전 해설사는 지도에서 만초천 위치를 짚어가며 특유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쏟아냈다. 전 해설사는 “만초천은 총길이 7.7㎞로 1967년 이후 복개가 시작돼 지금은 물줄기를 구경하기 힘들다”며 “청계천만큼 인지도는 없지만 과거에는 용산팔경 중 하나로 매우 경치가 아름다웠다는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답사팀에 뭉쳐 다니는 한 무리 ‘아줌마 부대’가 있다. 답사 전 화장실도 우르르 함께 몰려갔다 오는 의리(?)를 보여준 이들은 도봉구에 사는 김남숙(52)씨가 신청하고 친구들을 데려온 것이다. 함께 온 강혜린(52)씨는 “평소 한국사,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따라 나섰다”며 “여태껏 모르던 서울의 역사를 알게 되는 기쁨이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서울미래유산을 알고 있었다”며 “주변에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자꾸 사라져서 안타까웠는데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서 보호한다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영천시장에 들어서자 아줌마부대를 비롯해 중년 여성들의 두리번거림이 심해졌다. 시장은 여성, 특히 중년 이상 아줌마들의 안마당 같은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 들어서면 자연스레 몸이 반응한다. 영천시장은 1960년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됐다. 아마도 개천변에 있던 조그만 노점이나 점포가 복개 이후 물길 위에 시장을 형성한 게 아닐까 추측된다. 2011년 7월 전통시장으로 등록됐고 원래는 떡 도매시장으로 유명했지만 지금은 일반시장과 다름없다. 떡이 많이 팔린 이유는 서대문형무소 옥바라지 때문이었다는 속설이 타당하게 들렸다. 1916년 원형 그대로 ‘석교교회’…첨두아치 디테일 뛰어난 고딕양식 눈길 영천시장을 통과해 조금만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외관이 멋들어진 교회가 나온다. 1916년 세워진 석교교회로 서울미래유산이다. 지정 이유는 강당식 평면형식을 가진 고딕양식 건축물이 건립 당시 모습을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1층 회당 입구 첨두아치(Pointed Arch)에서 우수한 조적 디테일을 보여준다. 전 해설사는 “처음엔 한옥을 예배당으로 개조해 사용하다가 신도가 늘어나자 예배당 건립이 필요하게 됐다. 하지만 가난한 성 밖 주민들이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며 “기적적으로 미국에서 헌금이 모아져 벽돌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석교교회는 감리교인데 우리나라에 이 교단이 들어온 것은 1884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있던 해이고 최초 교회는 1987년 문을 연 정동교회 벧엘예배당이다. 아펜젤러가 대표적 감리교 선교사로 배재학당을 만들었다. ‘정거장호텔’ 흔적 지킨 회화나무…경인선 기차시발역이었던 서대문정거장 농협중앙회와 이화여자외국어고 사이에 표지석 하나가 있다. 서대문 정거장이 있던 자리를 표시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중국과의 관계가 현재 한·미관계만큼 중요했다. 한양에서 중국을 가기 위한 교통의 요지가 바로 서대문과 의주로였다. 중국 사신이 들어오던 영은문이 서대문독립공원에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서대문 정거장은 경인선 철도가 처음 개통됐을 때 시발역이 됐다. 역전에는 여행객을 위한 숙소가 있기 마련. 서대문 정거장 앞에도 정거장호텔(스테이션호텔)이 1901년 문을 열었다. 주인이 영국인 엠벌리에서 프랑스인 마르텡으로 바뀌면서 애스터하우스(Astor House)로 거듭났다. 전 해설사는 “정거장호텔 개업 직후 한 미국인 사진작가가 호텔을 방문해 찍은 사진을 보면 기와집 뒤쪽에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며 “그 나무가 지금 이화여자외국어고 정문 앞에 있는 회화나무”라고 말했다. “5분간 휴식하겠습니다.”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늦더위 기승은 여전했다. 전 해설사는 지친 답사팀을 그늘지고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답사팀을 자리에 앉히고 전 해설사는 가방에서 파일을 열어들고 정거장호텔과 회화나무 사진을 보여주면서 조금 전 해설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은 곧게 흐르지 않는다. 만초천도 구불구불 완만한 물길을 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위에 지어진 집들의 위치와 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서소문아파트는 오목렌즈처럼 곡선 형태로 지어졌다. 물길을 복개하고 그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마치 하얏트호텔을 축소해 놓은 느낌이다. 오목렌즈 같은 ‘서소문아파트’…하천 위에 지어져 대지지분 없어 “서소문아파트는 하천 위에 지어져서 대지지분이 없는 게 특징입니다.” 전 해설사는 “1972년 지어진 서소문아파트가 이런 이유로 재개발, 재건축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파트 거래가 실종된 것은 물론이다. 2013년 서울시가 이 아파트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추진했으나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아 무산됐다. 한 참석자는 “소유주 입장에서는 재산권이 제한되고 집값도 안 올라 펄쩍 뛰겠지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저로서는 지금의 모습이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서울에서는 홍제천 위에 지어진 유진상가, 도로 위에 올린 낙원상가 등이 대지지분이 없는 대표적인 대형 건물들이다. 신유년, 기해년, 병인년 박해 때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서소문 역사공원은 사방이 펜스로 둘러싸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이 있는 이곳은 바티칸 교황으로부터 천주교 성지로 인정받았다. 천주교인을 박해하기 이전 조선 초기부터 죄인을 참수하는 형장으로 사용됐던 곳이기도 하다. 전 해설사는 “서대문 일대는 조선시대 풍수설에 따라 숙살지기(肅殺之氣)가 있다고 해 죄인 처형장으로 이용되고 감옥이 설치되기도 했다”면서 “성삼문, 허균 등이 이 언저리에서 처형됐고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김개남, 안교선, 최재호 등이 효시된 곳”이라고 말했다. 전 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표정들이 편치 않다. 그리 오래지 않았던 시대에 단지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참히 참수당한 이들이 있었던 참혹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90년 역사 지닌 ‘염천교 구두거리’…50년대부터 1층 상점·2층 공장의 형태 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염천교 고가도로 한편은 수제화를 만드는 구두거리다. 전 해설사는 “이른바 ‘염천교 구두거리’로, 일제강점기부터 형성된 90여년 역사를 가진 구두 전문 거리”라며 “한국 구두산업의 산 역사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어서 미래유산에 지정됐다”고 설명했다. 이곳은 1925년 경성역이 생기고 피혁 밀거래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레 구두점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중고 전투화를 수선하고 개조하는 점포들이 생겨나다가 1950년대부터 1층은 상점, 2층은 공장 형태의 구두거리가 형성됐다. 2000년대부터 쇠락의 길로 접어들다가 서울역 일대 재개발 계획과 맞물려 변화를 맞을 전망이다. 답사팀 일원인 최일원(63)씨가 “나도 저곳에서 옛날에 구두를 사 신은 적이 있다”며 “싸다고 다 비지떡이지 않고 내구성이 좋아 오래 신었다”고 말했다. 드디어 서울역 광장에 도착했다. 이번 답사의 종착역이자 해산지다. 일제강점기 사이토 총독 저격사건, 1980년도 서울의 봄, 1987년 6·26국민평화대행진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배태한 공간이다. 서울역 고가도로는 서울시내에서 가장 교통이 혼잡했던 서울역 주변 교통을 완화하기 위해 1970년 8월15일 완공한 고가차도다. 1970년 5월 마포대교 완공과 함께 퇴계로와 만리재, 마포대교를 잇는 고가도로로 개설됐다. 노후화에 따른 안전 문제로 지난해 12월 폐쇄됐다. 서울시는 뉴욕 고가 철도를 공원으로 재생한 ‘하이 라인 파크’(High line Park)를 벤치마킹해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원화하고 있다. 답사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이경수(53)씨는 “평소 주말답사를 취미로 삼고 안 다녀본 데가 거의 없을 정도로 아내와 함께 다닌다”며 “서울미래유산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는데 관심의 영역을 넓혀줘서 고마운 프로그램”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경주 또 지진…조윤선, 경주 찾아 다보탑 등 문화재 피해 상황 점검

    경주 또 지진…조윤선, 경주 찾아 다보탑 등 문화재 피해 상황 점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일 잇단 지진이 발생한 경주를 찾아 다보탑 등 피해를 입은 문화재 상황을 점검했다. 경주에서는 12일 규모 5.1과 5.8의 지진에 이어 19일 규모 4.5의 여진이 발생했다. 조 장관은 이날 오후 첨성대, 불국사, 다보탑 등 국보·보물급 문화재의 피해 현장을 차례로 둘러본 뒤 “경주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어 이른 시일 내에 회복될 수 있도록 관계 부처 등과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첨성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김덕문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으로부터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우리는 지진에 대해 축적된 경험이 적은 만큼 지진 연구와 경험이 풍부한 해외 전문가들의 얘기를 잘 들어 앞으로 예상되는 여진에 경주를 비롯한 문화재 밀집지역의 문화재들이 손상되지 않고 잘 보전될 수 있도록 근본적이고 중장기적인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당부했다. 김덕문 실장은 피해 상황 보고에서 “지난 12일 규모 5.8 지진에서는 첨성대 중심축이 북쪽으로 2㎝ 정도 더 기울어졌고, 상단에 있는 정자석 오른쪽 맞춤 부위가 5㎝가량 틈새가 더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또 19일 규모 4.5 여진과 관련해 “지난 12일 동쪽에서 서쪽으로 밀리면서 틈새가 5㎝가량 벌어졌던 정자석이 3.8㎝ 정도 북쪽으로 이동했다”고 밝히면서도 “(12일 때와 달리) 중심축의 변동은 전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현대 초고층 건물에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사용되는 추가 첨성대 중심에 매달려 있어 첨성대는 진동이 있더라고 중심을 잡아주는 복원력을 갖추고 있다”면서 “첨성대 축이 규모 5.8 지진에서 움직였으나 규모 4.5 지진에서는 움직이지 않은 점으로 미뤄볼 때 4.5 정도 까지는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불국사에 도착한 조 장관은 사찰 곳곳의 피해 현장을 꼼꼼히 살펴봤다. 이번 지진으로 불국사에서는 사찰 내 다보탑(국보 제20호)이 일제강점기에 파손돼 접합했던 상층부 난간석이 내려앉는 피해를 입었고, 대웅전(보물 제1744호)의 지붕과 용마루, 담장 기와도 일부 파손됐다. 관음전 담장 기와와 회랑 기와도 부서졌다. 조 장관은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왕의 위패를 모신 숭덕전에 들러 파손된 담장 기와를 수리하는 문화재돌보미 및 기와공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지진 피해 문화재 현장 점검을 마친 조 장관은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2회 세계한글작가대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가시오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학생들을 체포하려면, 나를 밟고 가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연행하려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군부의 힘과 시민의 힘이 맞서고 있던 1987년 6월 13일 밤이었다. 성당 내부에 경찰력 투입을 통보하러 온 경찰 고위 관계자에게 건넨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온화한 경고는 결국 가장 강력한 정치적 카리스마가 되어 명동의 신화를 만들게 된다. 결국 경찰은 병력 1500여명을 철수하게 되고 1987년 6월 15일 오전 11시, 시위대는 해산한다. 이로써 6월 10일부터 이어진 명동성당 농성은 6월 항쟁의 신호탄을 명동에서 청와대로 쏘아 올린 기폭제가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종루(鐘樓)의 역할을 하던 명동성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당 앞뜰과 언덕을 숨 가쁘게 뛰어 오르던 낯빛 붉은, 꽃병(화염병) 쥔 청년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DUTY FREE' 로고 한 가득, 흰 비닐가방 서너 개 든 외국인 관광객의 셀카봉에 명동성당 첨탑 십자가는 그윽한 서울의 배경으로 내려 앉았다. 삼일대로와 서울로얄호텔에서 명동성당 앞까지 밀려오던 사복경찰(일명 백골단)들이 즐겨 입던 청재킷은 어느덧 4만9000원 가격표를 달고 매장 앞 옷걸이에 ‘가을 신상’으로 걸려 있다. 1980년대 한국 민주화 중심에서, 2016년 서울 투어의 중심이 되었다. 명동성당이다. ●1898년 5월 29일 축성, 봉헌된 고딕 양식의 성당 2016년 9월, 명동은 24시간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지극히도 붐비는 곳이자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바로 이 곳,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2가에 자리 잡은 명동성당(明洞聖堂)은 현재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이자, 한국 최초의 본당 성당이며 고딕 양식의 기독교 교회당이라는 역사적 의미 역시 깊은 곳이다. 성당은 높이가 23m, 종탑의 높이는 46.7m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순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성당 내부에는 아치형 복도, 스테인드 글라스 등으로 공간의 미를 최대한 살렸다. 이런 종교적, 건축적 의미들로 인해 1977년 11월 22일에 대한민국의 사적 제258호로 지정된 문화 유산이기도 하니 처음부터 명동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인 곳이었다. 우선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처음으로 형성된 시기는 1784년 명례방 종교 집회였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천주교 박해가 풀리고 1883년 조선 교구는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집과 땅을 사들여 1887년에 성당 건립을 위한 땅다지기 공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성당의 터가 종현(鐘峴·진고개) 지역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있어서 왕궁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저택 역시 고종이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이에 고종은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고 결국 후일 금교령까지 내려진다. 하지만 천주교회측은 공사를 강행하여 1898년 5월 29일 작업을 완료하고 성당의 축성식을 연다. 그리고 성당 이름은 지역 명을 따서 종현성당(鐘峴聖堂)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후 이 곳에는 기해박해, 병인박해 때 순교한 분들의 일부 유해를 모시게 되었고, 현재까지 지하성당에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일제 침탈 시기인 1930년대의 명동 성당의 역사에는 전시총동원(戰時總動員) 협력이라는 아픈 기록도 분명히 남기고 있다. 중일전쟁 발발 여드레 만인 1937년 8월 15일의 성모승천축일에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는 등의 일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당시 천주교 선교의 도움을 받고자 한 이런 비정치적 행동이 결국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천주교회가 협력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여 지금까지도 명동성당 기억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겨져 있다.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아 종현성당(鐘峴聖堂)이라는 이름은 명동대성당으로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1970, 80년대 근현대사 격동기의 중심으로 명동성당이 한국 근현대사 정치의 중심으로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1960년대였다. 성당 측은 4·19 학생혁명에 대한 적극적 지지의 자세를 드러내었고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에 대한 애정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후 5·16 쿠데타에 의한 장면 정권의 교체는 명동 성당으로서 뼈아픈 일이었다. 이 시기 서울 대교구와 성당측은 적지 않은 재정적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경향신문을 군사정권에 탈취당하는 등 힘겨운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서 본격적으로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성당측은 가지게 된다. 드디어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산파 역할을 담당하는 역량을 키우게 된 것이다. 1980년 6월 25일 김수환 추기경은 시국관련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후 19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피의자들이 원주교구에 피신을 요청하게 되고, 최기식 신부가 이를 받아들여 구속된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은 1982년 4월 7일 강론을 통해 ‘가톨릭 사제로서 정당하고 합당한 행동’이라고 인정한다. 이제 군부정권은 뜻하지 않게, 조선시대 이후 역사의 ‘산전수전'(?) 다 겪은 명동성당이라는 지독한 상대를 만나는 불운(?)을 겪기 시작한다. 이후 명동성당 본당 사목회 산하 ‘사회정의위원회’가 신설되고, ‘청년연합회’의 활발한 정치적 활동, ‘카톨릭 민속연구회’의 창설 등 민주화 운동을 향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난다. 결국 1987년 6월 10일부터 15일까지 이루어진 ‘명동농성’을 통해 시위대, 정의구현사제단과 수녀단, 명동성당의 평신도들의 삼각협력은 한국 민주화 운동에서 그 빛을 발한다. 당시 시위대의 안전한 귀가와 그 어떤 문책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군부정권으로부터 받아냄으로써 명동성당은 어느 순간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정치참여 활동은 순수한 종교적 구원을 추구하는 일반 신도들에게는 또 다른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 아고라(Agora)의 위상 유지와 순수 가톨릭 정신의 구현이라는 본래의 역할 수행이라는 내부 갈등을 겪으면서 1990년대를 맞이한다. 이후 현재까지 명동성당은 한국사회의 변동이라는 상황 속에서 또 다른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의 적절한 역할을 향해 끈임없이 고심중이다. 현재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 속에서 80년대와 다른 표정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명동성당의 풍경은 항상 역사적으로 남아있음은 분명하다. <명동성당에 대한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장소인가? -당연하다. 굳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입장이어도,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방문의 가치는 충분하다. 경건한 종교 시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이 공간을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은? -명동을 방문할 일이 있는 누구에게나. 쇼핑으로 무겁고 힘든 짐을 진 자들부터 성지순례를 원하는 가톨릭 신자까지 누구나 열려 있다. 3. 건축학적인 의미는 어떠한가? -고딕 양식으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본당 성당으로 전주의 전동성당, 대구의 계산성당의 원형이 되는 곳이다. 4. 시간은 많이 걸리나? -그리 넓지는 않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본당에 앉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5. 명동성당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하는 공간은? -성당 내부 곳곳에 있는 성화와 성상, 스테인드 글라스의 유리화. 6.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mdsd.or.kr/ 7. 미사시간은? -평일미사는 오전 6시 30분, 오후 6시, 7시. 주일미사(일요일)는 오전 7시, 9시(영어미사), 10시, 11시, 12시(교중미사), 오후 4시, 5시, 6시, 7시(청년미사), 9시/ 자세한 시간은 홈페이지 참조 8. 성당에 가 볼만한 다른 공간도 있을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박물관, 평화화랑-1898 아케이드 9. 이곳에서 꼭 추천하고픈 공간은? -지하성당. 엄숙한 종교적 공간이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기타정보 -명동성당은 결코 관광지는 아니지만, 의미있는 여행지임에는 분명하다. 바티칸의 거대함보다 우리 삶의 현장에 있는 명동성당의 가치를 느껴보는 것도 종교를 떠나 가치있는 일이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사내연애 했어? 그럼, 여자만 해고!’ …중국사회 논란

    ‘사내연애 했어? 그럼, 여자만 해고!’ …중국사회 논란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한 이유가 사내연애를 했다는 것인데, 입사 첫 날 작성한 사규 목록에도 없는 사내연애금지를 이유로 한 사규 위반 통보라니요” 최근 장쑤성(江苏省)에 자리한 모 회사에서 ‘사내연애금지’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여직원 1명을 해고한 것이 알려져 논란이다. 해고 대상자로 지목된 샤오위(小玉)는 90년대 출생한 이른바 '지우링호우'(90後) 세대로, 출근 첫 날 회사 선배로부터 구두로 통보받았던 ‘입사 후 3년간 사내에서의 연애 금지’ 규칙 위반 사유로 불법해고 당했다고 지난 15일 금릉만보(金陵晚报)는 보도했다. 사내 연애 등 사내에서의 남녀의 교제 규정을 명문화 하는 행위는 중화인민공화국 노동합동법(劳动合同法) 규정에 의해 불법 행위로 규제하고 있다. 때문에 문제가 된 회사에는 문서상의 사규 목록을 관리하는 방법 대신 사내연애금지 항목만큼은 ‘구두’로 통보하는 불법적인 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지난 2010년 광저우의 한 IT 기업에서 총 5개의 항목으로 구성된 사내연애금지 규정을 사규에 포함시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당시 중국 정부는 노동합동법 규정 신설을 통해 이 같은 명문화된 사내 규칙 운영을 불법화 시켰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는 문서가 아닌 구두로 통보된 사내 연애 금지 규칙이 실상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 샤오위가 불법 해고를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셈이다. 실제로 현재 중국 내 상당수 기업에서 이 같은 사내 연애 등을 사내규칙을 통해 해고 사유로 규정, 현지 언론 집계에 따르면 약 45%의 기업에서 해당 규정을 구두로 통보해오고 있으며, 약 14%의 업체에서는 문서화 된 사내연애금지 규정을 불법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이번 사건에서 샤오위의 연애 상대자로 지목된 남성은 해고 대상자에서 제외됐으며, 샤오위만 불법해고 되며 유독 여직원에게만 가혹한 사내 규칙 기준을 강요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중국 정부는 취업촉진법(就业促进法)에 여성의 결혼, 임신 등 심신상의 사유로 인해 노동행위를 제한할 수 없도록 한 규정을 명문화한 바 다. 하지만, 문제가 된 해당 회사에서는 과거에도 수 차례 해당 규정을 사유로 한 불법해고를 자행한 사실이 적발됐으며, 당시에도 여직원을 우선 불법 해고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법률 전문가 딩(丁)씨는 “회사의 불법해고는 중국 노동계약법에 위배되는 사유로 무효이며, 불법해고를 자행한 해당 회사는 샤오위에 대해 경제보상금을 지급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자료사진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경주 5.8 지진 이후] 여진 공포·폭우… ‘엎친 데 덮친’ 경주

    [경주 5.8 지진 이후] 여진 공포·폭우… ‘엎친 데 덮친’ 경주

    피해복구 늦어져 경제 휘청 영남지역 문화재 60건 피해 경북 경주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한 지 일주일째인 18일 시민들은 여전히 여진의 공포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추석 연휴 150㎜ 이상의 폭우가 내려 지진 복구작업이 늦어지면서 지역 주민의 불편이 커지고 있다. 기상청 관계자는 “일주일 째 여진만 350여 차례에 이르고 있지만 언제 완전히 멈출지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18일에도 오후 4시 27분쯤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10㎞ 지역에서 규모 2.4의 여진이 발생했다. 김모(34·경주시 황성동)씨는 “엄마들끼리 만나면 불안해서 앞으로 경주에서 계속 살 수 있겠느냐고 걱정한다”면서 “전에 없이 고층 아파트를 꺼리는 분위기도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관광지도 타격이 작지 않았다. 보문단지와 교촌마을, 안압지 등 주요 관광지에는 황금연휴인데도 지진에 집중호우까지 겹치는 바람에 평소보다 찾는 사람이 줄었다. 경주의 호텔과 리조트 등은 예약 취소가 잇따랐다. 경주시 관계자는 “지진에 폭우까지 겹쳐 예약이 꽉 찼던 호텔과 리조트에 빈방이 많았다”면서 “피해 복구가 늦어져 지역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지진으로 경주 지역에서는 담장 파손과 벽체 균열 등 재산피해가 4438건에 이르고 인명피해는 경주 31명, 포항 17명 등 경북에서만 48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또 이날 오전까지 응급조치 실적은 56.1%로 집계됐다. 경북도는 경주 지진피해 복구를 위해 국민안전처로부터 재난특별교부세 27억원을 확보했다. 재난특별교부세는 피해시설물 복구와 시설물 위험도 평가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안병윤 경북도 기획조정실장은 “경주 지진 피해의 신속한 복구를 위해 중앙정부의 행·재정적인 지원책을 이끌어 내고, 경북도 차원의 지원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번 지진으로 영남 지역 문화재 60건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고 이날 밝혔다. 지진 직후 집계한 23건보다 크게 늘었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국보 20호)과 첨성대(국보 31호), 경북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국보 109호)을 비롯한 국보·보물·사적 등 국가지정문화재 36건이 포함됐다. 경주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결혼한 여성이 더 행복하다. 단 60세까지만” (연구)

    “결혼한 여성이 더 행복하다. 단 60세까지만” (연구)

    기혼자가 미혼자에 비해 삶의 행복도가 더욱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단 성별과 연령에 따라 다소 차이가 존재했다. 미국 오하이오 볼링그린주립대학교 연구진이 미국 내 성인 5만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혼 남녀가 미혼 남녀보다 행복도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지난 38년간 이어져 온 종합사회조사(GSS, General Social Survey, 미국 시카고대가 1972년부터 주관해 온 조사)의 데이터를 분석한 것으로, 행복도의 단계는 ‘매우 행복’, ‘비교적 행복’, ‘별로 행복하지 않음’ 등으로 나뉘어졌다. 데이터 분석 결과 결혼을 한 사람들은 이혼했거나, 사별했거나 혹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삶의 행복도가 더욱 높았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 연령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타났다. 여성 중 기혼의 경우 60세를 전후로 행복도에서 ‘반전’이 나타났는데, 60세 이후 여성의 경우 결혼하지 않은 여성과 결혼한 여성의 행복도가 거의 유사했다는 것. 즉 미혼 여성은 60세 이전에는 행복도가 다소 떨어졌지만 60세 이후로는 행복도가 오르는 경향이 짙은 반면, 기혼 여성은 60세 이후 행복도가 다소 떨어지면서 둘 사이의 간극이 좁아졌다는 뜻이다. 연구를 이끈 볼링그린주립대학의 그레이 랄프 리 교수는 “결혼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행복도가 높았지만 여기에는 성별과 연령에 따라 차이가 존재했다”면서 “여성이 나이가 든 이후 ‘예외’가 발생하는 정확한 이유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커리어와 친구, 가족 등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도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이러한 특징은 남성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연구진에 따르면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의 경우 결혼한 남성에 비해 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지속됐으며, 여성과 달리 남성은 나이가 들어서도 이 같은 현상이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한 연구결과는 지난 8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미국사회학회(American Sociological Association) 연례회의에서 발표됐으며, 관련 저널 게재를 앞두고 있다. 사진=포토리아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 ‘혼술남녀’ 하석진 박하선, 훈훈한 셀카 공개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다정 케미

    ‘혼술남녀’ 하석진 박하선, 훈훈한 셀카 공개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다정 케미

    ‘혼술남녀’ 하석진과 박하선의 다정한 셀카가 공개됐다. 하석진은 지난 1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사진 퀄리티는 떨어지지만 박하나(박하선 분) 교수와 함께”라는 글과 한 장의 사진을 올렸다. 공개된 사진 속 하석진과 박하선은 차량 안에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두 사람의 다정한 케미가 사진에서도 물씬 드러나 보는 이들을 미소 짓게 했다. 한편, 두 사람이 출연하는 tvN ‘혼술남녀’에서 하석진은 하석진은 항상 ‘퀄리티’를 강조하며 인성 빼고 모든 것이 완벽한 한국사 1타 강사 진정석 역을, 박하선은 노량진에 갓 입성한 강사 박하나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매주 월, 화요일 오후 11시 방송. 사진=하석진 인스타그램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씨줄날줄] 경주 지진의 역사/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경주 지진의 역사/서동철 논설위원

    2007년 경주 남산의 열암곡 석불좌상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마애여래입상이 하나 발견됐다. 마애여래입상이란 커다란 바위 표면에 서 있는 모습의 부처를 돋을새김한 조각을 말한다. 무게 70t, 높이 6.2m의 바윗덩어리에 뛰어난 솜씨로 조각된 마애불은 얼굴을 땅 쪽으로 향한 채 넘어진 상태였다. 미술사학계는 이 마애불이 8세기 후반 양식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부경대 환경지질학과 팀은 열암곡 마애불이 지금의 위치에서 12m 남짓한 경사면 위쪽의 자연 암반에서 떨어져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마애불과 자연 암반에 나 있는 미세한 균열의 양상을 확인해 공통점을 확인한 결과이다. 애초 대형 암반에 새긴 마애불이 매우 강한 외부적 원인으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미술사학계와 지질학계는 ‘삼국사기’의 신라 혜공왕 15년(779) 기록으로 눈길을 돌렸다. ‘봄 3월 경주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는 내용이다. 마애불은 풍우에 의한 훼손이 크지 않아 얼마 전 조각한 것처럼 매끈하다. 조성 불사(佛事) 직후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마애불이 새겨진 자연 암반의 일부가 모암(母岩)에서 탈락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상청이 2011년 펴낸 ‘삼국사기·삼국유사로 본 기상·천문·지진 기록’에 따르면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의 지진 기록은 모두 91차례에 이른다. 지증왕 11년(510)에는 ‘여름 5월에 지진이 나서 백성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문무왕 4년(664)에도 ‘8월 14일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졌다. 남쪽 지방은 더욱 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진은 고려시대에도 이어졌다. 불국사 석가탑은 현종 15년(1024)과 정종 4년(1038) 잇따라 해체 수리했다. 지동(地動), 곧 지진 때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석가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발견한 중수기(重修記)와 중수형지기(重修形止記)를 판독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고려사’도 현종 4년(1013)과 정종 2년(1036) 강도 높은 지진의 내습을 기록했다. 잇따른 석가탑 중수의 이유였을 것이다. 당시 불국사의 청운교나 백운교 가운데 하나가 무너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경주의 지진은 모두 20차례에 가깝다. 특히 인조 21년(1643년) 6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경상도의 대구·안동·김해·영덕에도 지진이 있어 연대(烟臺)와 성첩(城堞)이 많이 무너졌다. 울산에서는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다’는 내용이다. 경주는 진앙에서 멀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엊그제 지진의 진앙인 경주시 내남면도 울산광역시 울주군과의 경계 지역에 해당한다. 진도(震度)는 인조시대 것이 강한 듯하지만, 두 지진의 양상은 서로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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