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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김정은, 와락 달려드는 女공군 팔짱 끼고

    北김정은, 와락 달려드는 女공군 팔짱 끼고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오중흡7연대칭호를 받은 항공 및 반항공군 제2620군부대의 비행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일 보도했다. 여기에는 최근 감금설이 나왔던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비롯해 장정남 인민무력부장, 윤동현 인민무력부 부부장, 리병철 항공 및 반항공군 사령관, 박정천 포병사령관, 한광상 노동당 재정경리부장, 황병서·홍영칠·마원춘 당 부부장이 수행했다. 김 제1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사회주의 조국의 신성한 영공을 금성철벽으로 지켜가는 미더운 비행사들이 있기에 조국의 하늘은 언제나 맑고 푸를 것”이라며 비행훈련 강화 방안을 알려줬다고 통신은 전했다. 김 제1위원장은 “훈련에 참가한 비행사들의 모두 여성들인데 불리한 기상조건 속에서도 전투동작들을 훌륭히 수행했다”며 병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여성 비행사의 노래’를 창작해 부르도록 했다. 이어 군부대 시찰에 나선 김 제1위원장은 비행사들의 침실, 식당, 부식물 창고 등을 돌아봤다. 김 제1위원장은 “비행사들을 비롯한 군인들이 생활을 잘 돌봐주는 것은 지휘관들의 신성한 의무이며 부대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며 “군부대를 군인들의 정든 집, 따뜻한 보금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부 비행사들을 만나 “조국보위가 신성한 의무로, 최대의 애국으로 되는 우리나라에서만 부부 전투비행사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국가 블랙리스트로 재취업 피해” 청계노조원 7명에 손해배상 판결

    1980년대 정부의 노동조합 정화 지침에 따른 강제 해고와 중앙정보부 등 국가기관에 의한 ‘블랙리스트’ 작성 및 배포로 취업을 하지 못했던 50대 여성 노조원들이 뒤늦게 국가 배상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0부(부장 고영구)는 원풍모방(옛 한국모방) 전 노조원 이모(54)씨 등 7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씨 등 3명에게 각 1000만원, 나머지 4명에게 2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고 25일 밝혔다. 재판부는 “정부가 위법한 공권력을 행사해 노동기본권과 직업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한 만큼 불법 행위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이 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받았더라도 블랙리스트 작성 및 배포에 대한 피해까지 배상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동일방적 노조 등과 함께 ‘청계피복노조’로 불리던 원풍모방 노조는 1970년대 일당 320원의 저임금, 상여금 미지급, 10분 지각에 특근 1시간 공제 등에 맞서면서 한국 노동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80년 당시 최고통치기구였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노동계 정화 조치’를 발표하고 대표적인 민주노조로 꼽힌 원풍모방, 청계피복, 반도상사 등의 노조 임원들을 해임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 국가기관은 당시 노조원 이름이 기재된 ‘블랙리스트’를 작성·배포하고 지속적으로 이들의 동향을 감시했고, 이씨 등 노조원은 다른 곳에도 취업할 수 없었다. 이들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해 이를 인정받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씨줄날줄] 과외금지/곽태헌 논설위원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는 대학입시 본고사를 없애고, 예비고사(현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과 고교 내신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하는 내용이 포함된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했다. 본고사를 대비해 왔던 당시 고3 수험생과 재수생들은 황당해했고, 대입에 반영되지 않았던 탓에 내신에 신경쓰지 않았던 수험생과 재수생들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불과 대입이 몇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하룻밤 사이에 입시제도를 뜯어고친 것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혼란을 준 무모한 ‘졸작’이었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12·12를 거치며 실권을 장악한 서슬퍼런 사실상의 군사정권 시절이니 이런 무지막지한 정책이 가능했다. 당시는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 시절이었지만 ‘명목상’이었고, 최고실력자인 육군 중장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상식과 합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었지만, 당시 어느 언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서민과 중산층의 환영을 받은 대책은 ‘과외금지’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많은 욕을 먹지만, 지금도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게 ‘과외금지’다. 요즘보다야 덜했지만 그때에도 학원이나 과외는 성행했다. 국보위는 국영기업체 임직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의사, 변호사 등 사회지도급 인사들에게 어떤 형태의 과외공부도 자녀에게 시키지 말도록 했다. 모든 교수와 교사의 과외수업 행위도 금지하고, 중·고등학생들이 사설학원에서 수강할 수 없도록 했다. 전두환 위원장의 말이 곧 법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이런 게 가능했다. 민주통합당 정세균 상임고문이 최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개헌을 해서라도 사교육을 전면 폐지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요즘 많은 학부모들은 “전두환(전 대통령)이 다시 나와서 과외를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과외에 대한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과외를 해야 하는 자녀들도 안쓰럽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입시 제도가 갈수록 재력가와 사회지도층 자녀에게 유리하게 바뀌고 있다. 수능과외는 물론이고, 내신·논술과외도 해야 한다. 입학사정관제다 뭐다 해서 각종 스펙도 쌓아야 한다. 점점 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어려운 사회가 되고 있다. 과외가 금지되면 보통시민의 자녀들도 기득권층의 자녀와 겨뤄볼 만하다. 신분 상승의 걸림돌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나라, 사회라면 희망은 없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한나라 용퇴논쟁] ‘경계’에 선 박근혜

    “우리는 모두 쇄신의 주체가 될 수 있고, 쇄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29일 하루 종일 쇄신 주체와 객체를 정의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비대위에서 정치·공천개혁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상돈 중앙대 법대 교수가 전날 공개적으로 정권실세였던 이상득·이재오 의원과 당 대표로서 설화를 겪었던 안상수·홍준표 의원, 친박(친박근혜)계 중진 의원들을 물갈이 대상으로 지목한 것에 대한 박 위원장의 반응이기도 했다. 이 비대위원이 섣불리 문제를 제기한 측면이 있지만, 결국은 맞서야 할 ‘뜨거운 감자’이기에 논란은 심화됐다. 박 위원장은 일단 진화에 주력했다. 그는 이날 의원총회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이 비대위원의)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말했다. 의총에서도 “쇄신 과정에서 누구는 쇄신 주체이고, 누구는 대상이 돼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이 비대위원의 개인 의견이 비대위의 전체 의견이 될 수 없고, 공정한 기준을 마련해 ‘시스템 공천’을 하면 기준에 미달하는 이가 자연스럽게 쇄신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 위원장은 그동안 줄곧 “인위적 공천을 하지 않겠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계속 ‘시스템 공천’만 얘기할 수는 없다. 공천 기준은 결국 비대위가 만들고, 이 비대위원이 박 위원장과 함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 위원장도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친이계가 이날 “비대위가 5공 국보위냐.”며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이 교수 개인 의견이 아닐 것”이라면서 “비대위가 이명박 대통령을 완전 부정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박정희 전 대통령도 부정돼야 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쇄신의 칼날을 가만히 앉아서 맞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친이계의 반발에 비대위는 완강했다. 김종인(전 청와대 경제수석) 비대위원은 이날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이 비대위원이 제대로 쇄신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개인적인 소신을 피력했는데, 일부 의원들이 어른스럽지 못하게 대응하고 있다.”면서 “정치인이 자기 확신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비대위원이 친이계가 의심하는 것처럼 박 위원장과의 ‘교감’ 속에서 인적 물갈이를 주장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하지만 문제 의식 자체에 공감하는 이들은 많다. 정치평론가인 고성국 박사는 “당 지도부 일원인 이 비대위원이 어설프게 발언을 했다.”면서도 “박 위원장이 이 비대위원의 거친 방법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다 인정하는 문제인 만큼 방향은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평론가인 김종배씨도 “이상득·이재오 의원 얘기를 너무 빨리 꺼낸 측면이 있지만, 언젠가는 얘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면서 “결국 속도와 강약은 ‘경계’에 선 박 위원장이 조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한나라 용퇴논쟁] 親李 “5공 국보위냐”·親朴 “두고보자”·쇄신파 “올 것이 왔다”

    [한나라 용퇴논쟁] 親李 “5공 국보위냐”·親朴 “두고보자”·쇄신파 “올 것이 왔다”

    한나라당 내에 29일 용퇴 논란으로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는 이상돈 중앙대 교수의 입을 통해 친이(친이명박)계 핵심 인사들은 ‘정권 실세 용퇴론’에 직면했고, 친박(친박근혜)계 중진 의원들은 ‘염색한 노인네’로 폄훼당했다. 잇단 설화가 당 분위기를 흙탕물처럼 흐려놓는 미꾸라지 역할을 할지, 당 쇄신을 이끌어내는 메기 역할을 할지 지켜볼 대목이다. 용퇴론의 타깃이 된 정몽준 전 대표는 이날 본회의 참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사랑의 매라고 생각한다.”면서 “나의 대답은 소이부답(笑而不答·웃을 뿐 대답하지 않는다).”이라고 밝혔다. 이재오 의원도 “오늘은 할 말이 없다.”면서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앞서 이 비대위원은 전날 “현 정권의 공신이나 당 대표를 지낸 사람들이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도의가 아니다. 그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쇄신을 하면 누가 믿겠나.”라고 지적했다. 이상득·이재오 의원과 현 정부에서 당 대표를 지낸 박희태 국회의장, 정몽준·안상수·홍준표 의원을 싸잡아 겨냥한 것이다. 그러나 친이계 내부에서는 격앙된 반응도 서슴없이 나온다. 장제원 의원은 “한 분의 교수가 당에 들어와 칼을 휘두르면서 공천 운운하는 모습에 한나라당이 휘청거린다. 이게 개혁이냐.”고 반발했다. 또 다른 의원은 “비대위가 무슨 5공화국 국보위냐.”면서 “쇄신을 하더라도 질서 있게 해야지 난장판을 만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홍 전 대표는 “우리가 조용환 헌법재판관 내정자를 부정하는 이유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한 부정적 입장) 때문인데 그걸 부정하는 사람을 당 비대위원으로 둬서 되겠느냐.”면서 이 비대위원을 비판했다. 이 비대위원은 과거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칼럼에서 천안함 사건의 원인과 관련, 과잉 무장에 따른 선체 피로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계는 공개적인 대응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자칫 ‘집안 싸움’으로 비쳐질 수 있는 데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주도하는 쇄신·화합의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 의원 대부분은 “이 비대위원의 개인 의견일 뿐”이라고 선을 긋거나 “두고 보자.”, “당을 위해서는 그렇게 가야 하는 것 아니냐.”와 같은 신중한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나 친박계 영남 고령·다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대대적 물갈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분위기도 감지됐다. 이 비대위원은 전날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 위원장에게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왜 주변에 낡은 생각을 가진 ‘염색한 노인’만 있느냐는 것”이라면서 “박 위원장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진정 아낀다면 먼저 사라져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4선의 친박계 의원은 “스스로 물러나는 거야 본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면서 “공천은 제도적으로 하면 되는데 벌써 그런 걱정이냐.”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영남권 친박계 한 의원도 “이런 식으로 파문이 확산되면 대상자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비대위가 제대로 활동을 하기도 전에 자칫 당이 부서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소장·쇄신파 의원들은 이 비대위원의 발언에 대해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식의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원희룡 의원은 “방향을 잘 잡았다. 점령군 소리까지 나오게 해야 한다.”면서 “(비대위 활동을) 거침없이 해줬으면 한다. 당이 기득권과 계파에 연연해서는 파괴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원 의원은 “다만 정치력이 얼마나 뒷받침될지가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홍정욱 의원은 “쇄신파가 그동안 계속 생각해 왔던 것을 외부에서 말해 주니 감사하다.”면서 “초선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는데 중진 의원들의 화답이 없다.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개혁 성향 초선의원 모임인 민본21 소속 김성태 의원도 “엄중한 사명감에 비해 적절한 언어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면서도 “마음은 한결같이 한나라당이 변하길 바라는 뜻일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장세훈·허백윤기자 shjang@seoul.co.kr
  • [‘鐵의신화’ 박태준 별세] 박대통령 제철소 특명 받아… YS와 악연으로 정치시련 겪어

    [‘鐵의신화’ 박태준 별세] 박대통령 제철소 특명 받아… YS와 악연으로 정치시련 겪어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철의 사나이’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도 병마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이 우리 근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세웠다. 당시 모두가 ‘무리수’라고 비난했지만 오로지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냈다. 이런 고인의 노력을 바탕으로 현재 포스코는 연산 3700만t 규모의 조강 생산을 기록하는 세계 4위권 철강사로 성장했다. 포스코가 현재와 같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와 국민의 성원도 있었지만 ‘박태준 명예회장’의 리더십이 보태지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철강산업과 전혀 관련이 없던 박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으로 철강 왕국의 꿈을 품게 된다.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이때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쌓았다. 이것이 훗날 이 땅에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다. 1969년 박 명예회장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특명을 받았다. 당시 박 명예회장의 좌우명은 ‘제철보국’과 ‘우향우(右向右)정신’. 이 땅에 일관제철소를 건설,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국가와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제철보국’. 또 ‘우향우정신’은 선조의 피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공기업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또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1977년 3기 설비의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가 80% 진행된 상태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구조물을 부수고 다시 짓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박 명예회장은 일찍부터 연구·개발의 중요성을 인식해 1986년 포항공대(포스텍)를, 1987년에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을 설립함으로써 포스코-포항공대-포항산업과학연구원 3개를 축으로 하는 산학연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정치인으로서도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1981년 11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13∼15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민정당 대표위원, 민자당 최고위원, 자민련 총재에 이어 제3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경제계에서와는 달리 그의 정치 역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박 명예회장은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 정권과 연을 맺은 데 이어 이듬해 11대 민정당 전국구(현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포스코 회장을 유지하면서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으며 집권여당인 민정당 대표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며칠 만에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이 합당하면서 정치적 시련을 맞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악연 때문이었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더 큰 난관에 직면했다. 같은 해 3월 포철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은 데 이어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되는 등 혹독한 정치 보복을 당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5월 경북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고, 같은 해 7월 포항 북구 보선에서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정치적 영욕의 세월을 거친 박 명예회장은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1월 ‘21세기 첫 총리’로 발탁되면서 의욕을 불태웠지만, 불과 4개월 만에 낙마해야 했다.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다시 한번 불명예 퇴진을 감수해야 했다. 전광삼·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청계피복’ 故 이소선여사 30년만에 국가배상 판결

    1970년대 대표적 노조탄압 사례인 ‘청계피복 사건’의 피해자인 전태일 열사 어머니 고(故) 이소선 여사 등이 30여년 만에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이원중 판사는 29일 이 여사 등 청계피복 노조 조합원 7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는 망인인 이 여사에게 1000만원을, 조합원 임모씨와 이모씨에게는 1500만원을, 민모씨 등 3명에게는 1000만원을, 또 다른 이모씨에게 500만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청계피복 노동조합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인 노조로, 1970년대 결성돼 노동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1980년 8월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는 ‘노동계 정화조치’를 발표하며 대표적 민주노조로 꼽힌 원풍모방, 청계피복, 반도상사 등의 임원들을 해임조치했다. 국보위는 노조 간부들을 불법구금하고 폭행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2006년 청계피복과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11개 사업장 해고자들은 노조탄압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신청을 했고,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여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앞서 같은 법원은 지난 6월과 10월 원풍모방과 동일방직 사건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도 국가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씨줄날줄] 고인이 된 저승사자/박대출 논설위원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부고] 노태우 오른팔이자 5·6공 ‘특급소방수’ 이춘구 전 의원 별세

    [부고] 노태우 오른팔이자 5·6공 ‘특급소방수’ 이춘구 전 의원 별세

    제11∼14대 국회의원과 옛 민자당 대표를 지낸 지낸 이춘구 전 의원이 20일 별세했다. 78세. 대한민국 헌정회는 이 전 의원이 이날 새벽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직접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고인은 군사정권인 5공화국과 6공화국은 물론 김영삼 문민정부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인이다. 육사 14기 출신으로 준장으로 예편한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직후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신군부 세력에 합류, 사회정화위원장을 지냈다. 11대 국회 때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고향인 충북 제천에서 내리 당선돼 4선의 관록을 쌓았다. 고인은 특히 5공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차관으로 일하면서 빈틈없는 업무수행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를 계기로 5공 말 노 전 대통령의 천거로 민정당 사무총장에 전격 기용되면서 여권 실세로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의 오른팔로 1987년 대선에서는 민정당의 선대본부장을 맡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이후 5공 청산과 ‘정호용 의원직 사퇴’ 등 정치적 고비 때마다 전면에 등장해 ‘특급소방수’로 불리기도 했다. 고인은 ‘6공 황태자’라고 불린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두고 노 전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를 한 유일한 여권 인사로, 박 전 장관 처리 문제에 불만을 품고 노 전 대통령 초청 모임에 불참하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1990년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 간 3당 합당에 대해서는 “성급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14대 대선에서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해 김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다. 이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은 1994년에 예상을 깨고 군 출신에다 5·6공 핵심 인사인 고인을 국회부의장에 중용했다. 1995년 민자당 대표, 1996년 신한국당 대표 등을 역임하며 YS 정권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춘자씨와 아들 재용(개인사업), 딸 서영, 사위 권기연(에스에스모터스 대표이사) 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21호. 발인은 22일. (02)2258-5971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고인이 된 저승사자 이춘구

    고인이 된 저승사자 이춘구

     그는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얼굴부터 창백했다.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 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연상케 했다. 성격이 불같았다. 일에는 관용이 없었다. 한번은 승용차에 함께 타고 가던 비서를 내쫓았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비서들은 늘 긴장했다. 운전 비서는 더했다.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불호령이 떨어졌다. 뒤를 돌아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해프닝도 가끔 벌어졌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을 때다. 화장실에 가려고 승용차에서 내렸다. 바람이 세다 보니 문이 닫혀 버렸다. 운전 비서는 ‘쌩’ 하고 출발했다. 골프장에서도 난감한 상황이 재연됐다. 도어맨이 차문을 열어 줬다. 그런데 주인이 탈 준비가 안 됐다. 도어맨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운전 비서는 소리만 듣고 출발해 버렸다.  주인공은 이춘구 전 의원. 고인이 됐다. 향년 78세. 육사 14기로 4선 의원을 지냈다. 하나회 출신이면서도 12·12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군내 신망이 두터웠기에 국보위에 차출됐다.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신임은 각별했다. 김영삼 정권은 하나회를 척결했다. 5·6공 인사도 몰아냈다. 고인만은 예외였다. 신한국당 대표로 중용했다. 그는 전·노 구속 이후 정계를 떠났다. 인간 도리를 내세우며.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청렴, 강직, 직언, 원칙, 소신.  인자무적(仁者無敵). 인자한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둔필승총(鈍筆勝聰)이라는 말도 있다. 서투른 글이 총명함보다 낫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전 대표는 인자하지도 않다. 꼬장꼬장하고 다혈질이다. 마냥 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적이 없다. 사사로움을 멀리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마무리도 깔끔하다. 판공비를 반납한 일화는 많다. 정계 은퇴 후 후원금 사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엔 애도의 글이 넘쳐난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띈다. 미국 시애틀 교민이 올린 글이다. 사령관 시절 부하 장교라고 한다. 회상이 담겨 있다. 훈련 후 자축 회식 때 얘기였다. 내용은 이렇다. “막걸리를 대접으로 마셨다. 배가 불러 더 마실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사령관은 전투복 상의 안으로 쏟아부었다.” 입이 아닌 몸으로 지휘하던 사령관이라는 회고도 곁들였다. ‘충성!’이란 말로 끝맺는다.  또 다른 뉴스와 오버랩된다. 위장 전입. 언제부턴가 귀에 익숙해진 말이다. 아예 고위층의 단골 메뉴다. 이젠 일반 국민들도 늘었다. 5년 새 4배로 급증했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도 그러한가. 고인이 새삼 크게 보인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이춘구 전 민자당 대표 별세

    이춘구 전 민자당 대표 별세

    제 11∼14대 국회의원과 옛 민자당 대표를 지낸 지낸 이춘구 전 의원이 20일 별세했다. 78세. 대한민국 헌정회는 이 전 의원이 이날 새벽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직접 사인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알려졌다. 충북 청원 출신의 고인은 육사 14기로, 준장 예편한 뒤 5·17 직후 국보위 재무위원으로 신군부 세력에 합류, 사회정화위원장을 거친 뒤 1981년 제11대 총선에서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고인은 5공과 6공을 거치며 충북 제천에서 4선을 하며 민정계의 실세로 활동했다. 특히 5공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장관을 역임하던 시절 내무차관으로 보필하며 신임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86년 민정당 사무총장에 기용됐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평가됐던 그는 1987년 13대 대선 선거대책본부장에 이어 이듬해 노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을 맡는 등 6공의 정권인수 작업을 지휘했고 6공이 출범하면서 내무장관에 기용됐다. 고인은 1992년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14대 대선 당시에도 김영삼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그 공로로 국회부의장과 민자당 대표를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춘자씨와 아들 재용(개인사업), 딸 서영, 사위 권기연(에스에스모터스 대표이사) 등이 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21호. 발인은 22일이다. (02) 2258-5971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서울광장] 개헌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곽태헌 논설위원

    [서울광장] 개헌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곽태헌 논설위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필요하다면 개헌도 국회에서 논의할 것”이라는 원론적 수준의 개헌론을 꺼냈다. 2009년 8·15 경축사에서는 “선거 횟수를 줄이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개헌론을 제기했지만 후속 조치는 없었다.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한 개헌론이 연초부터 다시 흘러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는 어제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회에 개헌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대표도 개헌에는 긍정적이다.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5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현 헌법(9차개헌)은 1987년 서슬 퍼런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론’에 맞선 ‘피플파워’의 소중한 결과물이다. 정부 출범 뒤 개헌은 발췌개헌(1차), 사사오입개헌(2차), 3선개헌(6차), 유신개헌(7차), 국보위개헌(8차) 등 오욕으로 가득찼으나 9차개헌은 평화적인 방법과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이뤄졌다. 현 헌법은 최장수인 23년의 수명을 자랑하고 있지만 경제·사회적인 상황이 변화하면서 새로 담을 내용도 생겨났다. 21세기에 맞는, 통일을 염두에 둔 헌법 개정이 필요하지만 개헌을 한다면 정부형태와 대통령의 연임 여부 등이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 내 개헌은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이 합의만 한다면 올 상반기에 개헌을 끝내는 게 어렵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 해인 2007년 1월 9일 대(對)국민담화를 통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르자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다.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줄이되 1회에 한해 연임이 가능하도록 바꾸자는 게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이었으나, 대선이 1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정략적인 제안으로 몰리면서 실패했다. 요즘 나오는 개헌론과 관련, 제기 시점보다 중요한 건 내용이다. 안상수·이회창 대표는 현재의 제 왕적 대통령제에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대통령은 국방·외교·통일에 관한 권한을 행사하고 나머지는 총리가 행사하는 권력구조 개편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 최강인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국방과 외교분야에 전념하고, 부통령(혹은 총리)이 경제·사회 등 나머지 분야를 맡아도 괜찮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위상은 그렇지 않다. 국방과 외교·통일분야의 일이 별로 없다. 또 이런 분야와 경제·사회분야가 맞물린 상황에서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을 칼로 두부모 자르듯 할 수도 없다. 할일이 많지 않은 대통령은 국민이 뽑고, 실제로 파워가 있는 총리는 국회에서 선출한다면 사실상 의원내각제와 다를 게 없다. 북한과 대치한 상황에서는, 언제 급박한 일이 터질 줄 모르는 상황에서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낫다. 그리고 현재의 헌법 조문으로만 보면 대통령은 제왕적이지도 않다. 입법·사법·행정부 등 3권 분립이 이뤄진 데다 총리는 행정부의 2인자로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는 등 권한이 상당하다. 문제는 운용에 달려 있다. 개헌을 하려면 이원집정부제로 바꾸려는 논의보다는 대선과 총선 시기를 맞추는 쪽으로 하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을까. 대선·총선·지방선거 등 잦은 선거의 폐해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다. 대선과 총선을 같이하면 여소야대 국회가 될 가능성은 낮다. 진보든 보수든 대통령과 국회를 특정한 세력에 아예 같이 넘겨주는 게 낫다. 잘못했으면 4년 뒤 혹독한 책임을 묻고 정권을 심판하면 된다. 대선·총선 동시선거 2년 뒤 치르는 지방선거를 중간평가의 기회로 활용하면 된다. 미국식의 선거제도와 비슷하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과 12월로 예정된 대선의 중간쯤에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르는 게 절충안으로는 괜찮다. 그동안의 헌법사를 보면 개헌에 부정적인 것도 이해는 되지만 시대는 바뀌었다. 집권세력 마음대로 헌법을 바꿀 수도 없다. 집권 연장이나 손쉬운 집권을 위해 개헌을 했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절도 아니다. 개헌을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tiger@seoul.co.kr
  • 김정일父子 군 장악력 대내외 과시

    김정일父子 군 장악력 대내외 과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4일 자신의 군 최고사령관 추대 19주년을 맞아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기념연회에 후계자인 셋째 아들 김정은과 함께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5일 보도했다. 김 위위원장이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연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으로, 군 장악력을 과시하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환호하는 참석자들에게 답례하면서 당의 선군혁명영도를 높이 받들고 조국보위와 사회주의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해 한몸 바쳐 투쟁하고 있는 그들을 열렬히 축하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김 위원장의 최고사령관 추대를 기념하는 중앙보고대회는 매년 열렸으나, 기념연회가 열린 것은 추대 10주년이었던 지난 2001년 인민무력부 주최로 개최된 이후 두번째다. 소위 ‘꺾어지는 해’가 아닌데도 연회가 열린 것은 이례적이다. 첫번째 기념연회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김 위원장이 이번에 김정은과 함께 등장한 것은, 후계과정 공고화와 동시에 연평도 도발 이후 군의 사기를 높이고 군에 대한 장악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김 위원장의 연회 참석은 한반도의 군사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북한군의 내부 단결을 보여 주고 최고사령관으로서 김 위원장이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며 “군 행사를 통해 후계자 김정은에 대한 충성과 김정은 중심의 결집을 유도하는 것도 연회의 목적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데스크 시각] 곽승준 위원장의 ‘불발 쿠데타’ /곽태헌 정치부장

    [데스크 시각] 곽승준 위원장의 ‘불발 쿠데타’ /곽태헌 정치부장

    1980년 7월30일. 정부는 ‘무시무시한’ 대책을 내놓았다. 중·고등학교 학생의 과외 및 학원수강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국영기업체 임직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와 기업인, 의사, 변호사 등 사회 지도급 인사들은 자녀에 대한 어떤 형태의 과외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기는 공직자는 사회정화차원에서 제재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공직자가 아닌 지도급 인사에게는 ‘적절한 조치’를 내린다는 것도 담고 있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에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1인자였던 전두환 중장이었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은 8월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선출돼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됐다. 또 예비고사(현재 수학능력시험)가 몇 개월 남지도 않았지만 유예기간도 없이 당시 고교 3학년생부터 본고사를 없애고 예비고사와 내신(학교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해야 한다는 강제조항도 대책에 넣었다. 서슬이 퍼런 때라 이같은 강압적인 밀어붙이기식 정책에 불만을 터뜨릴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독재로 비판받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학부모들이 요즘 늘고 있다. 만만치 않은 사교육비 때문이다. 29년 전 사실상의 군사정부가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했던 것도 사교육비에 대한 국민들의 부담 때문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이후에도 대부분의 정부에서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고심했으나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지난달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총대를 멨다. ‘밤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를 법제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곽 위원장의 대책을 놓고도 비판이 적지 않았다. 밤 10시 이후 학원교습을 금지하면 은밀한 고액 입주과외는 늘어난다. 그렇게 되면 ‘부익부 빈익빈’이 될 수 있다. 곽 위원장이 내놓은 대책을 각론으로 들어가 뜯어보면 문제도 있지만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지나친 사교육비로 중산층이 무너질 수도 있고, 중산층 진입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지난 18일 교육과학기술부와 한나라당은 곽 위원장의 핵심 대책을 무력화시켰다. 대신 교과부는 새로운 안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사교육비 경감으로 들고 나온 대책의 번지수는 틀렸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다. 부작용이 없는 정책도 찾을 수 없다. 진정 사교육비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겠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고교 입시와 대학 입시에서 내신비중을 줄이면 된다. 내신에 반영되는 과목도 줄이면 된다. 음악시간에는 즐겁게 노래부르고 미술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체육시간에는 힘차게 뛰어놀면 된다. 예체능 과목도 내신에 반영이 되니 농구 슛 과외를 하는 게 현실이다. 예체능 과목을 내신에 반영한다고 전인교육이 되는 게 아니다. 부모의 부담만 늘어난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는 음악시간에 악기를 하나씩 제대로 가르쳐 주지만 한국에서 그런 공립학교를 찾는 것은 힘들다. 사교육비를 줄이는 방안으로 공교육을 강화하고 싶다면 경쟁시스템을 도입하면 된다. 학교에 우수한 교사들이 많지만 경쟁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아 교사들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는다. 또 학원에서 실력에 따라 반편성을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학교의 우열반 편성에는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 것도 난센스다. 교사가 수준이 제각각인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할 수는 없다. 사교육비를 줄이려면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정책을 펴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교육과학기술부 관리들에게 수요자에 맞는 대책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기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곽태헌 정치부장 tiger@seoul.co.kr
  • “軍정훈교육 유신당시 박정희 우상화”

    “(박정희 대통령은) 5000만 겨레의 염원인 조국통일 대업을 위해 유신(維新)의 횃불을 밝히신 전략가이며 개척자”(1973년 국방부 기본정훈교재 중),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께서 원대한 경륜과 포부, 철학과 신념을 가지시고…새 영도자로 추대”(1984년 국방부 간부교재 ‘선진국군’ 중). 국군 정훈교육이 정권교체 때마다 통치권자의 의도에 따라 정치교육의 일환으로 활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내용은 장영주 예비역 대령이 광복군부터 참여정부까지 각 시대별 군(軍) 정훈교육을 분석한 경남대 박사학위 논문 ‘한국군 정훈교육 변화에 관한 연구’에서 드러났다. 장 예비역 대령은 4일 “정권 교체와 통치이념은 정훈교육 교재의 개편주기 및 내용 변화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정훈 교재 내용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개편됐다. 박정희 정부 때는 5·16쿠데타와 1972년 10월 유신을 기점으로 정훈교육이 바뀌었다. 특히 유신체제에선 박 대통령 우상화 경향도 나타났다. 국방부가 1973년 발간한 기본정훈교재는 유신 헌법과 체제의 당위성 등 정치교육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북관에 변화가 온 것은 김영삼(YS) 정부 때였다. 1993년 YS 정부 출범 초 제작된 국군정신교육교본에서 북한을 지칭한 ‘우리의 적’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삭제됐다. YS 때에는 북한 비판에 유화적이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김대중(DJ) 정부 집권 후인 1998년 제작된 국군정신교육교본에는 북한을 주적으로 한 뚜렷한 대적관이 부활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후 개편된 2003년판 정신교육교재에서 ‘우리의 적’, ‘통일안보’ 등 기존 용어가 모두 삭제됐다. 장 예비역 대령은 “정훈교육의 이론적 배경과 전문성이 낮아 정권교체 때마다 해바라기성 정훈교육이 되풀이된 경향이 있다.”면서 “통치이념의 주입보다는 정신전력 강화라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데스크시각] 거꾸로 가는 사교육대책/김성수 사회부 차장

    [데스크시각] 거꾸로 가는 사교육대책/김성수 사회부 차장

    1980년 여름, 과외가 전면 금지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화였다. 중·고등학교 재학생들이 입시학원에 다니는 것도 금지됐다. 이른바 ‘7·30교육개혁조치’다. 전두환씨가 주축이 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내놓은 ‘깜짝카드’였다. 초헌법적인 조치라 뒷말도 많았다. 그래도 사회분위기는 찬성하는 쪽이 우세했다.‘과외망국론’은 당시에도 넓게 퍼져 있었다. 기자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과외금지 조치라는 뜻밖의 행운(?)을 톡톡히 누렸다. 이후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과외를 한번도 안 받았다. 학원도 다닐 필요가 없었다. 국가가 나서서 강제로 사교육시장과 격리해 준 덕분이었다. 과외금지 조치는 1989년 대학생에 한해 과외교습을 허용하는 식으로 완화된다.2000년 4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린다.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신군부의 극약처방이 나온 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다. 한국사회에서 사교육비는 여전히 불치병으로 남아 있다. 뿌리가 너무 깊어 손을 대기조차 어렵다. 사교육시장은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다. 지난해 기준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시장의 규모만 20조원이 훌쩍 넘는다. 그만큼 서민들은 아이들 과외비, 학원비 대느라 헉헉댔다. 때문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개혁은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도 그랬다. 본고사를 없애고, 수능을 등급제로 바꾸는 식으로 대입제도에도 손을 댔다. 하지만 사교육은 곧바로 변화에 맞춰 다시 기승을 부렸다. 이명박 대통령도 ‘교육만족 두 배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교육공약을 내걸었다. 평준화 정책을 버리고 수월성(엘리트)교육으로 돌아섰다. 역시 현재까지 결과는 실망스럽다. 새 정부 들어 가계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늘었다. 최근엔 경기까지 바닥이다. 다른 지출은 줄여도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학부모들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이 대통령도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지난 9월23일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를 꺼냈다.“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사교육비 절감 종합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불과 한달여 뒤인 10월28일 교육과학기술부, 법무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경찰청 등이 합동으로 ‘해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진단과 처방이 거꾸로 간다는 의구심이 든다. 학업성취도 평가(일제고사) 시행, 자율형사립고 추진, 학교정보공시제 등을 사교육비 경감대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 대책들은 명백한 사교육 확대정책이다. 자율형 사립고만 봐도 ‘제2의 특목고’로 여겨진다. 또 다른 입학경쟁을 불러온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국적으로 일제고사가 보편화하면 학원을 찾는 학생은 더 많아진다. 이미 온라인 교육업체는 물론 시중 오프라인 학원에는 일제고사 대비 프로그램이 성업중이다.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밀어붙인 서울의 국제중 설립이나 외국인학교 입학기준 완화도 사교육 수요를 새롭게 유발하는 조치다. 대학자율화의 부작용으로 사교육시장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지난달 고려대의 수시모집 1차 합격자 발표를 보면 알 수 있다. 학교측은 내신이 상대적으로 저조한 특목고생을 많이 뽑기 위해, 비교과성적에 가중치를 두는 편법을 썼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고려대에 가려면 일단 외고에 들어가야 유리하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준 셈이다. 외고대비 입시 학원에 줄을 서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번 경제위기로 적어도 2,3년은 더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처지에 사교육비 부담까지 가중된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다. 김성수 사회부 차장 sskim@seoul.co.kr
  • 진실위 “신군부가 동명목재 강탈”

    1980년 신군부가 세계적인 목재회사였던 동명목재의 전 재산을 강탈하고서도 ‘재산헌납’으로 위장했다는 의혹이 28년 만에 사실로 밝혀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2일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의한 ‘동명목재 재산헌납’ 사건을 조사한 결과 국보위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동명목재 재산을 강제로 헌납받은 사실을 밝혀 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에 따르면 1980년 8월쯤 국보위와 합수부는 동명목재 재산을 빼앗으려고 강석진씨 등 사주들을 부정축재를 일삼는 악덕기업인으로 몰아 합수부 부산지부(501보안부대)에 이들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다. 수사관들은 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강석진씨 일가와 회사 임원들을 영장없이 연행한 뒤 15일∼2개월 간 불법 구금하고 폭언, 폭행, 전기고문 위협 등의 가혹행위를 가했다. 또 강씨에게 전 재산을 헌납할 것을 집요하게 강요하는 한편 아들 정남씨를 “재산 포기각서에 날인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위험할 수 있다.”고 협박, 끝내 위임각서와 승낙서를 받아 냈다. 당시 빼앗긴 재산은 토지 317만 3045㎡를 비롯해 부산투자금융㈜과 부산은행의 주식 약 700만주, 사주 일가의 은행 예금액 16억여 원 등으로 피해자들은 “당시 시가로 4000억∼5000억원, 현재 가치로 1조원이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산은 모두 헌납 형태로 부산시와 한국토지개발공사에 매각·증여됐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민주 오락가락

    통합민주당은 한승수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준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 안건으로 올라간 26일 당일까지도 끝내 결정을 못내리고 29일로 처리를 미뤘다. 이날 오전만 해도 당초 검토됐던 ‘권고적 당론’에서 자유투표로 방향을 선회하려는 기류가 강했지만 두 차례 의원총회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손학규 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와 오후 의원총회에서 한승수 총리가 부적격자인 이유를 설명하는 데 무려 15분가량을 할애했다. 손 대표는 한 후보자의 국보위 경력, 재산 누락, 자신과 아들의 병역 특혜에 대해 조목조목 따졌다. 하지만 발언의 마지막을 “의원 여러분은 한분 한분 독립적 헌법 기관”이라고 언급, 자유투표를 시사했다. 그럼에도 이날 오후 의총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해 저녁에 한 차례 의총을 또 열었지만 역시 결론을 얻는 데 실패했다. 회의를 거듭할 수록 당내 강경론이 힘을 얻었다. 충청권 의원들과 김진표 의원 등 관료 출신 의원들은 대체로 인준에 동의해주자는 의견이었던 반면 초선과 호남 의원들은 “이대로 호락호락 넘겨주면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강경파중에는 “한 총리 후보자가 도대체 인준 해줄 수 없는 사람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원칙론자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일부 의원들은 총리 인준 동의안이 통과된 후 이명박 대통령이 남주홍 통일부·박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자 임명을 철회하는 상황을 걱정했다. 이 경우 더 이상 총선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이슈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는 장관 청문회를 지켜보고 연계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BBK 사건’과 관련, 고소·고발을 당한 정봉주 의원 등도 고소·고발 취하를 약속받지 못하면 부결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강력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의총에 참석한 의원이 80여명에 불과한 점도 표결 연기를 결정한 계기가 됐다. 민주당은 의총 참석자들이 그대로 표결에 임할 경우 총리 인준을 동의해줄 수밖에 없어 본회의 연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한승수 총리후보 국보위훈장 반납

    한승수 국무총리 후보자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재무위원으로 활동한 뒤 받은 보국훈장 천수장을 정부에 반납했다. 한 후보자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국민과 국회에 약속한 대로 훈장을 반납했다.”고 밝혔다. 한 후보자는 지난 21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보위에 참여해 받은 훈장을 반납할 용의가 있느냐.”는 통합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질문에 “반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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