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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 에너지·식량난 심각/주체경제 “깜깜”

    ◎이란·러시아,원유공급 중단… 중국만 유지/공장가동 40%대로 “허덕”… 수송난 이어져/무역규모 절반으로… 석유 사들일 외화 바닥 『당이 내놓은 혁명적 전략이 구현되면,모든 사람이 흰 쌀밥에 고기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려는 인민의 세기적 숙망이 빛나게 실현된다』 의·식·주 문제로 북한에서 주민소요가 잇따르자 북한 노동당은 지난 4월 6일 열린 최고 인민회의 9기 7차 회의에서 이같은 비전을 제시했다.국가 최고 의결기구인 최고 인민회의에서도 쌀밥과 고기국이 거론될 정도로 북한의 경제상황은 어렵다. 식량을 수입하려 해도 외화가 없다.에너지 부족으로 절반 이상의 공장이 문을 닫았다.외채부담은 위험수위를 넘긴지 이미 오래이다. 1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은 85∼89년 평균 5백10만t이었으나 농민들의 생산의욕 감퇴·영농자재의 부족 등으로 90년 4백81만t,91년 4백42만t,92년 4백26만t으로 해마다 줄고 있다. ○배급식량 3백50g 이를 메우기 위해 91년 1백30만t,92년 83만t을 수입했으나 절대부족량은 91년 35만t,92년 1백24만t,93년 1백50만t(추정)으로 늘고 있다.이 때문에 92년의 주민 1인당 배급량은 성인이 하루 필요로 하는 6백∼6백50g의 절반 밖에 안 되고,노약자(3백g)와 엇비슷한 3백50g에 불과했다. 동구권 붕괴 이후 무역규모가 절반으로 떨어져 외화란도 극심하다.중국과 러시아가 원유 등 주요 물자를 국제가격의 절반으로 공급하던 「우호가격」이 사라지고,경화결제를 요구하고 있어 어려움은 더욱 크다.당·정·군이 각기 외화벌이 사업을 펼치는 등 원시적인 「외화돌격대」까지 운영하고 있으나 연체된 이자마저 갚지 못한다. ○대외신용 백17위로 92년의 외채 총액은 97억달러로 국민총생산(GNP) 대비 46%에 달한다.국제기구에서 규정한 위험 수준 (40%)을 훨씬 웃돈다.따라서 대외신용도는 세계 1백19개국 중 1백17위이다.지난 84년 합영법 제정 이후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합영·합작기업을 1백여개 설립했으나 절반 정도(대부분 조총련계 투자)만 간신히 공장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2년 전 북한을 방문했던 남한의 한 기업인은 식량1억달러와 원유 1억달러어치만 있으면 북한을 당장의 위기에서 구출할 것 같다는 보고서를 관계당국에 냈었다.거꾸로 말하면 2억달러가 없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2백억 없어 위기” 에너지란도 갈수록 가중되고 있다.중국만 변함없이 북한에 매년 1백10만t의 원유를 공급하고 있을 뿐이며 이란이나 러시아로부터의 공급은 92년부터 거의 끊긴 상태이다. 원유 수입량은 90년 2백52만t에서 91년 1백89만t,92년 1백52만t으로 급격히 줄고 있다.92년에 도입된 1백52만t은 북한의 정제능력(승리화학 2백만t,봉화학공장 1백50만t) 3백50만t의 43.4%에 불과하다. 기름부족은 제한송전을 불러일으키고 또다시 공장가동률 저하(93년 40%로 추정) 및 수송난 등으로 이어져 92년 8월부터는 북한주재 외교관에게 매월 배급하는 유류를 종전 1백51ℓ에서 12.5ℓ로 줄였다. ○군사비비중 늘어나 이처럼 어려운 데도 1인당 군사비부담은 90년 2백28달러에서 91년 2백32달러,92년 2백48달러로 해마다 커진다.1인당 GNP의 26%를 군사비에 쏟아붓는 셈이다. 「주체」경제의 실상은 비참하다.
  • 인 국방부 「한국전포로 감시」 비록 입수 공개

    ◎“중공군 포로 송환 막아라”/대만공작팀 극비리 침투/반공교육후 “말 안들으면 처형” 위협/포로들 난동 잦아… 인 사령관 납치도 한국전쟁은 1953년7월27일 휴전협정조인으로 막을 내렸다.그러나 실제로 전쟁은 송환을 거부한 2만3천명 포로의 처리문제를 놓고 이른바 「총성없는 전쟁」으로 6개월간 처절하게 계속됐다.판문점일대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유엔군진영과 북부군(북한인민군·중공의용군)진영의 치열한 설득전과 이들의 심판을 맡은 인도의 철저한 중간입장고수는 2차대전후 네루중립주의 첫실험의 성공이라는 현대사적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서울신문은 한국전쟁발발 44주년을 맞아 당시 송환거부포로 설득작전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인 「주한인도관리군활동사」(History of the Custodian Force of Indiain Korea:1953∼54)를 최근 인도현지에서 입수,발췌소개한다. ▷인도군첫해외파병◁ 휴전협상이 한창 진행중이던 53년5월8일 미국이 인도측에 송환거부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군 파병가능성을 타진해왔다.이미 인도는 이들을 지휘감독할 5개 중립국송환위(NNRC)의 의장국을 맡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네루총리는 파병을 수락했다.8월5일 R K 네루외무차관,관리군사령관 토라트소장,사르다르 싱 인도적십자사무총장등 3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파견,도쿄의 유엔군사령부와 개성의 북부군사령부를 거쳐 구체적인 임무와 병력규모등을 협의했다. 인도군의 총규모는 6개 보병대대와 각종 부속대로 6천명.9월28일 제5진의 인천항 도착으로 이동을 모두 끝냈다.그러나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인도군의 한반도상륙을 금지시켰기 때문에 유엔군측은 인천에서 판문점까지 헬기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동아시아의 모든 미군헬기를 동원,5명씩 수송했는데 모두 1천3백회의 출격을 기록한 사상최대의 헬기작전에서 다행히 사고는 단 한건도 없었다. ○통정리에 텐트촌 ▷새 포로수용소◁ 통정리일대에 유엔군이 건설한 막사는 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캠프 7∼10개씩을 1개구역으로 하는 7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중공군 3개,북한군 2개,송환희망자격리수용소 1개,병원용 1개소씩으로 할당됐다.캠프는 17개의 막사와 식당·목욕탕·화장실텐트등 모두 20개의 텐트로 구성됐다.냉난방은 물론 전깃불과 온수공급이 완벽했다. 미군측은 이곳에 3만명의 식수및 생활용수공급을 위해 50만갤런상당의 물탱크를 설치했고 임진강으로부터 모두 31㎞의 대형송수관을 매설했다.전기공급을 위해 발전소 12개를 건설했으며 전체 생필품공급을 위한 대형보급창고도 세웠다.또한 설득장및 설득자대기소,송환표명포로수용을 위한 막사등 설득관련막사 10여동이 별도로 건설되었다.이들 전체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포로수에의 의문◁ 포로의 숫자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른 것으로 인도군의 입장에서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그러나 양측의 휴전협상이 처음 시작된 51년7월26일당시까지 유엔군측은 12만1천명의 북한군과 중공군포로를 억류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4만1천명이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북부군측은 6만5천명의 유엔군 생포를 주장했으며 그 가운데 5만명이 자발적으로 북한인민군과 중공의용군에 합류했다고 밝혔다.이같은 주장은 유엔군측이나 공산군측모두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우월성에 손상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가 없었다. 휴전협정조인후 33일간 양측은 포로교환을 실시,유엔군측은 7만5천8백명을,북부군측은 1만2천7백60명을 상대방측에 넘겨주었다.그리고 9월25일까지 인도군이 넘겨받은 포로는 유엔군으로부터 북한군 7천9백명과 중공군 1만4천7백4명,북부군으로부터 한국군 3백35명(여군5명 포함),미군 23명,영국군 1명등 모두 2만2천9백63명이었다. 유엔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남한정부의 6·18 반공포로석방으로 1만7천여명이 도망간 상태여서 어느정도 타당성 있는 숫자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북부군으로부터 인도받은 숫자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는 5만명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1만5천명중 유엔군측으로 송환되지 않은 수가 2천3백여명에 달하는데도 아무 설명이나 명단제시조차 없이 3백여명만 인계했던 것이다. ○총격사건 두차례 ▷포로들의 저항◁ 양측 사령부로부터 포로의 인계는 9월10일 시작돼 25일에 모두 끝났다.그들은 막사마다 리더를 선출,자치적으로 움직였으며 자체 취사를 했다.일과는 상오6시 기상하여 하오9시30분 취침에 들 때까지 대부분 운동과 오락으로 진행됐다. 첫날 중공군포로 가운데 7명이 대열을 이탈하여 송환을 요청해온 것을 비롯하여 밤에 철조망을 뚫고 번의를 요청해오는 포로들이 많았다.이같은 자발적 이탈자들의 증가로 포로측과 인도군측은 점점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설득작전은 포로 인계인수가 끝난 뒤 26일부터 시작될 계획이었다.그러나 문제는 마지막날인 25일 발생했다. 날이 밝자 각 캠프의 포로들은 인도군에게 「납치」해간 원추를 즉각 돌려보내줄 것을 요구하며 대규모시위를 벌였다.그들은 반인플래카드를 내걸고 돌을 집어던지며 강력히 저항했다.이 와중에서 토라트사령관이 포로들에게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먼저 억류된 그류왈소령의 구출협상을 벌이기 위해 캠프를 찾은 토라트사령관과 브두와르중령·싱소령등 12명이 순식간에 5백명에게 포위된 것이다. 부사령관 싱준장은 즉시 무장병력을 출동시켜 캠프전체를 에워싸고 사령관일행의 즉각석방을 요구했다.그리고 유엔군사령부에 협조를 요청하는등 순식간에 긴장이 감돌았다.그 사이 페인탈여단장은 특공대를 동원,극비의 구출계획도 세워놓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대화의 진전이 없는 가운데 마침내 토라트사령관의 기지로 포로대표를 설득,상황은 끝나게 되었다.그러나 그후에도 10월1일과 2일 두차례 총격사건이 발생,수십명의 사상자발생등 긴장상태지속으로 첫설득회는 10월15일에 가서야 가능했다.반면에 북부군측에 억류돼 있던 포로들은 규율이 잡혀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몰입해 있는 듯했다. ▷대만의 선전전◁ 탈출해온 원추는 대만정부가 단 한명의 중공군포로도 대륙으로 송환시킬 수 없다는 장개석총통의 신념에 따라 조직적으로 포로설득에 개입했음을 폭로했다. 휴전협상이 진행중인 동안 중공군포로들이 수용돼 있던 제주도수용소로 대만정부는 포로들의 교육을 위한 두개의 공작팀을 침투시켰다.각각 12명과 6명으로 조직된 공작팀은 대만의 외교부·정보부·국민당등 각처에서 엄선된 심리전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포로막사로침투해 반공강연을 했고 누구든지 대륙으로 돌아간다면 공산당이 그를 죽여 사지를 절단한 뒤 반공에 대한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그들은 어떻게 공산당의 설득을 피할 것인가를 가르쳤다.한사람의 이탈도 막기 위해 8∼9명으로 소그룹을 조직,송환의사를 나타내는 포로들을 목졸라 처치해버리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송환위대표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는 오직 『대만으로 가고 싶다』는 말만 할 것을 강조했고 포로개개인들에게 「TAIWAN」이라는 영문글자도 가르쳤다. ○88명 제3국 선택 ▷설득완료◁ 12월23일까지 90일간 주어진 설득기간중 실제설득이 이뤄진 날은 10일에 불과했다.설득받은 포로는 전체의 15%에 불과한 3천4백69명이었으며 설득후 송환을 요청한 자는 모두 1백37명,그나마 공산군측 억류포로중에는 한명도 없었다.여기에 설득을 기다리지 않고 막사탈출등으로 송환을 희망한 2백38명(공산군측 포로 8명 포함)을 더해 최종적인 송환희망자는 모두 3백75명.결국 설득작전은 양측사령부와 송환위·인도군등이 엄청난 인원과 물량을투입한 작전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90일간의 설득기간이 끝난 후에도 양측은 포로들의 추가설득을 위해 설득기간을 늘려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송환위측은 협정에 규정된대로 이 포로들은 30일간의 정리기간을 가진 뒤 54년1월22일자로 포로의 신분이 아닌 자유인의 신분으로 되돌아감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마침내 1월20일 상오8시부터 인도군은 포로들의 인계를 시작했다.다음날 새벽3시까지 모두 19시간 2만1천8백39명이 유엔군측으로,3백47명이 북부군측으로 인계됐다.이 가운데 북한군 74명,중공군 12명,남한군 2명등 88명은 제3국을 택했다.
  • 교내 곳곳 돌·각목… 흡사 “전쟁터”/남총련 격렬시위 현장

    ◎후퇴 경찰 쇠파이프 폭행/시민,“과격시위 너무한다” 강제로 세운 열차를 타고 상경한 「남총련」소속 대학생 가운데 4백여명이 18일 상오 7시10분쯤 홍대입구 지하철역에서 경비중이던 경찰과 전경 54명을 인질로 잡아 홍익대 안으로 들어가 본관등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이어 연행된 동료학생 20여명과 경찰관을 교환할 것을 요구하며 경찰에 맞서 극렬한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등 폭력을 휘두르며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대치. 이들이 점거한 홍익대 학생회관과 본관 주변에는 부서진 의자·돌멩이등이 어지럽게 널려있어 마치 폭격후의 폐허를 방불. ○…학생들은 상오 9시쯤 전경 10여개 중대가 인질로 붙잡힌 경찰들을 구출하기 위해 본관과 학생회관 앞으로 집결하자 본관 5·8·16층 옥상등에서 철근·철판조각·진흙덩이등을 아래로 마구 집어던져 전경 10여명이 부상. 경찰은 이에따라 상오 9시쯤 홍익대 구내로 전경·사복경찰 3천여명을 투입,학생들의 해산작전에 들어갔고 학생회관 1층에 인질로 붙잡혔던 경찰관 전원을 구출. 이때 일부학생들이 진압병력을 향해 던진 화염병이 바닥에 있던 유인물과 인화물질에 옮겨붙는 바람에 학생회관 4층 기독서클실등에 불이나 25분만에 진화됐다. 학생회관에서 빠져나간 학생들은 다시 본관과 학생회관등에 분산 집결,경찰과 대치하다 상오 11시10분쯤 경찰이 철수할 기미를 보이자 갑자기 학생 30여명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돌진,돌과 화염병등을 던지며 경찰을 공격해 양측간에 10여분동안 최루탄과 화염병을 주고받는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이때 전경 1개중대가 학생들에의해 포위당하기도. 경찰이 낮 12시50분쯤 교문밖으로 철수하자 학생들은 빼앗은 진압용방패와 투구등을 한곳에 쌓은뒤 불태우고 빼앗은 최루탄 발사기를 모두 부숴버리기도 했다. 남총련 학생들은 또 경찰이 후퇴하자 후미를 쫓아가 쇠파이프를 마구 휘둘러 전경이 운동장 스탠드 아래로 굴러떨어지는가 하면 16층 옥상에서 학생들이 던진 의자와 진흙덩이를 피하느라 경찰이 서로 엉켜 넘어지는등 아수라장. ○…이날 시위진압과정에서 발사된 최루탄때문에 하교길 국민학생과 유치원생등이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고 일부 어린이들은 아예 골목길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도. 행인들은 교문밖으로 밀려난 전경대원중 많은 대원이 부상으로 동료의 부축을 받으면서 응급차로 실려가자 안타까워하면서 『북핵문제로 그렇지않아도 어수선한 시점에 학생들이 이처럼 과격한 시위를 벌여서 되겠느냐』고 비난.
  • 백정기 의사/흑색공포단 결성…일밀정 제거 앞장(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해서 학도병 구출 등 항일투쟁/일군 회의장 폭파하려다 체포돼 『나의 구국일념은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독립투사 구파 백정기의사(1896년 1월19일∼1934년 6월5일)가 1933년 3월17일 중국 상해의 한요릿집에 모인 일제 군간부와 중국의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장한 결의로 떠나면서 남긴 유서다. 의사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요리사등으로 가장해 숨어있던 일경과 일제헌병들에게 붙잡혀 1년3개월여 옥고를 치르다 끝내 조국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이 거사는 비록 미수로 끝났으나 한국인과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의사는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던 해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글을 익힌 의사는 일찍이 소년기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23세 인 1919년 2월 상경,독립투사의 길을 믿아 나섰다. 서울에 도착한 의사는 사람들로부터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됐으며 곧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의사는 그 뒤 인천등지에서 무장독립활동을 펼치기 위한 준비를 하다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당시 북경에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신채호등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신채호가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행동강령으로 채택하고 이를 통해 독립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무지배,무권력의 민족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의사는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때 호남성 동정호부근에서 이상적 농촌사회 건설을 위해 애썼다. 의사는 다음해인 1924년 일본 조천수력공사장을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도쿄에 잠입했다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 곧바로 상해로 옮긴 의사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힌 뒤 1925년 상해에서 5·30총파업이 실시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활용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1927년 복건성 천주시에서 중국인 동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양성소인 민단훈련소를 설립,농민 3천5백여명을 모아 농민자위대를 조직했다. 의사는 1930년 상해에서 동료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제거작전을 주임무로 삼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조직은 나중 일제에 징용된 한인학도병 귀순작전과 포로구출작전,항일전쟁참가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의사는 또 이 조직등을 골간으로 1931년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자유신문」을 발행,결사항일투쟁의지를 북돋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사는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동지와 함께 파괴암살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단체 「흑색공포단」을 결성,일본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활동에 나섰다. 이 흑색공포단은 결성되자마자 일제 밀정들을 다수 처형하는등 맹활약을 펼쳐 일제를 긴장시켰다. 일제는 이처럼 비정규적인 유격전이 펼쳐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상해의 고급음식점 「육삼정」에서 군간부등이 참가한 가운데 비밀회의를 개최키로 했으며 이 정보를 흑색공포단이 입수,의사가 이 음식점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의사를 비롯한 흑색공포단원들은 이 거사를 서로 자기가 적임이라고 주장,추첨으로 의사와 동료 이강훈이 행동대원에 선정됐다. 의사등 행동대원 2명은 거사일인 1933년 3월17일 육삼정 비밀회의가 시작되기 2시간전인 하오 6시쯤 폭탄과 권총,수류탄등으로 무장을 하고 현장에 도착해 정세를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들은 변절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사전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인력거꾼·요리사등으로 변장하고 수십여명이 현장주변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해 그 자리에서 체포돼 거사는 불발로 끝났다. 의사등은 바로 일본으로 압송됐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의사는 1년3개월여 복역하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옥중에서 순국했다. 백의사의 유해는 적지 일본에 묻혔다가 광복 1년 뒤인 1946년 7월 이봉창·윤봉길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됐으며 국민장으로 천묘의식을 치른 뒤 효창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고향인 전북 영원면에는 도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순국기념비가 서 있다.
  • 야당의 인권관(외언내언)

    『러시아벌목장은 지옥입니다.그러나 북한인민들은 그래도 우리를 부러워합니다』­최근 월간지에 소개된 한 탈출노동자의 말이다.그래서 뇌물을 주거나 「빽」을 쓰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한다.중국 국경을 넘어 북한을 탈출하는 북한동포들이 붙잡혀 송환되면 화형 또는 공개 처형된다는 보도들도 잇따라 나오고 있다. 알고 보면 유독 이들만 그런 처형을 당하는게 아니다.북한형법에는 사형을 규정한 조항이 47개나 되고 반역,국가재산손실죄 뿐아니라 교통법규만 위반해도 사형에 처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전체인구의 약1%인 15만내지 20만명의 정치범과 그 가족들이 12개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거대한 감옥에 비유되는 세계최악의 인권탄압국이 북한이다. 탈북난민문제가 여론의 관심을 모으자 정부는 벌목장인부들의 망명을 수용키로 했다.민주당이 대변인의 환영논평을 낸 것은 당연한 일이지 이상할게 없다.그런데 정말이지 이상한 것은 그 내용이다.『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족을 반드시 구출하는 동시에 북한당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적절한외교기술을 발휘해줄 것을 바란다』고 되어 있다. 북한은 망명의 수용을 납치로 간주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그런데 자극하지 말고 구출하는 기술을 보이라니 발을 땅에 붙이지 말고 걸으라는 얘긴가.환영이 아니라 발을 걸고 있는 것이다.인권탄압을 내세워 국가보안법의 폐지까지 주장하고 있는 민주당이 북한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비호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인권에 대한 이중잣대다.북한동포들은 고문을 받아도 아프지 않고 우리국민들은 탄압받지 않아도 아프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김일성주석면담」을 추진하고 있는 대표가 불바다협박 후에도 북한은 남침의사가 없다고 대변한 일이 있다.북한동포들의 참혹한 인권상황엔 일언반구도 없으니 우리야당의 눈엔 그것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단 말인가.
  • 야 “UR거리투쟁” 시동/「혼미 정국」 예고

    ◎민주당 「비준저지위」 결정/6월까지 규탄대회 등 장외집회에 총력/재야·타야당과 연대,대여 압박공세 모색 민주당이 재야세력과 함께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의 국회비준을 저지하기 위해 본격적인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나섬으로써 문민정부 출범 1년남짓만에 정치권이 최대의 진통을 겪게 됐다. 민주당은 특히 조계사폭력사태로 돌출된 상무대공사금 부정유출의혹과 김대중씨에 대한 정치사찰시비,잇따른 사전선거운동문제등에 대해 당력을 총동원해 강경대응해 나간다는 방침이어서 자칫 정국이 혼미상태로 치달을 가능성마저 없지 않다. ○…민주당은 8일 상오 마포당사에서 「UR비준저지투쟁위원회」의 출범식과 현판식을 갖고 UR비준저지를 위해 장외투쟁에 나설 것임을 공식선언. 민주당은 이날 출범식에서 옥외규탄대회등 모든 방법을 통해 UR비준을 저지할 것임을 결의하고 국회청문회의 개최와 김영삼대통령의 사과를 요구. 민주당은 이날 출범식을 시작으로 다음주까지 각 시도지부와 지구당에 「UR투쟁위」를 구성한 뒤 오는 6월까지 본격적인 장외집회를 전개할 계획.이에 따라 오는 15일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열리는 UR각료의정서 서명이후 중앙당과 지구당 차원에서 군중집회를 잇따라 열고 범국민서명운동도 병행할 방침.특히 효과적인 대여투쟁을 위해 재야세력과도 적극 손을 잡는다는 방침아래 우선 9일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가 전국에서 일제히 여는 UR비준반대 군중집회에 소속의원들을 보낼 예정. ○…민주당의 「UR투위」출범식에 이어 민주·국민·새한국·신정당등 야4당과 「우리농업지키기 범국민운동본부」측은 국회귀빈식당에서 대표모임을 갖고 공동투쟁에 앞서 서로의 견해를 조율. 이 자리에서 김동길대표를 대신해 참석한 한영수국민당최고위원은 『정부가 「5·6공」의 권위주의를 답습하지 않고 농민의 목소리에 조금이라고 귀를 기울였다면 UR협상에서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성토. 이종찬새한국당대표는 『야4당의 의석수만으로는 국회비준을 저지하기 어려우므로 민자당의 비판세력을 결집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를 위해 민자당의원들이 자유로운 투표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분석. 국민운동본부측 집행위원장인 장원석교수(단국대)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95년 기구출범후 2년안에 각료급협정 형식을 통해 가능하다』면서 『따라서 국회비준이 거부되면 WTO가입이 불가능하다는 정부측 설명은 거짓』이라고 주장. ◎민자당의 시각과 대응전략/“대안없이 장외투쟁에만 집착” 비난/후속대책 마련에 주력… 대야 대화 노력 민주당과 재야세력의 장외연대투쟁 돌입에 대해 민자당은 두가지 상반된 시각을 보이고 있다. 우선 농민이나 재야의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 대한 반발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다.어차피 UR문제는 충격의 여과가 필요한 만큼 한두차례 진통은 불가피하리라는 판단에서다.그래서인지 8일까지 나온 민자당의 공식논평이나 관계자들의 언급속에는 농민이나 재야·학생들에 대한 비난이 일체 없다. 그러나 민주당의 개입부분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개탄을 금치 못하겠다는 태도다. 민자당이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아주 못마땅해 하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우선 농민이나 재야와 달리 민주당은 사안을 알만큼 알만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또 UR문제는 이미 주무장관의 해임과 국무총리의 대국민담화 등으로 야당의 요구가 90%이상 수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그런데도 민주당이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장외투쟁에만 집착하는데는 다른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민자당은 민주당을 강력비난하는 일면 곤혹스러운 표정도 역력하다. 그렇지만 민자당은 민주당이나 재야등의 장외투쟁에 정면으로 대응하지는 않을 방침이다.사사건건 대응하기보다 현안 전반에 대해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여권 전체의 정국수습방안 기본틀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이미 결론이 난 UR문제는 농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후속대책을 마련하는데 주력하고 대국민홍보를 강화,야당의 정치공세를 차단하겠다는 생각이다.이같은 맥락에서 민자당은 원래 6월말까지 마련하기로 돼있는 농어촌투자계획을 앞당겨 성안하고 당정협의의 강화를 정부에 촉구하는 한편 당 홍보위원회를 8일 서둘러 발족시켰다. 민주당이 끈질기게 물고늘어지고 있는 상무대공사비 정치권유입설과 불·정유착문제에 대해서는 당국이 수사를 통해 규명할 사안이라는 이유로 국정조사권 발동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는 한편 민자당은 장외투쟁의 경색정국 속에서도 야당을 장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물밑대화 노력은 계속해나간다는 방침이다.이와 관련,민자당에서는 민주당이 장외투쟁의 과정에서 국면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자충수를 두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도 보이고 있다.
  • “올해는 꼭 내힘으로 걷겠어요”/아시아나기사고 김성희씨의 재기다짐

    ◎좌절 딛고 눈물겨운 홀로서기 연습 『새해에는 꼭 혼자 일어나 걸을 자신이 있어요』 지난해 7월 아시아나 여객기 추락사고때 군헬기에 극적으로 구출되는 모습이 TV와 신문에 보도되면서 온 국민의 가슴을 조리게 했던 김성희씨(29·서울 강동구 암사동). 김씨는 7·8·9번 척추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에 의지하며 재기의 의지를 태우고 있다.그녀는 5개월여동안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재활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피나는 노력끝에 혼자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곧 걷을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병원측에서는 현재 기립과 균형훈련을 받고 있는 김씨의 의욕이 남다른 만큼 2월쯤이면 몇 걸음정도는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꽝」하는 순간 무릎에 앉은 아들을 껴안고 정신을 잃었죠.깨어보니 전남대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더군요』 김씨는 아직도 감각이 없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5개월전의 참혹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걷지 못하게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믿어지지가 않았지요.밤에 잠자리에 들면서영영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 벌을 받아야하는지 몰라 수천번을 울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함께 비행기에 탔던 3살짜리 아들 승호군이 머리끝 하나 다치지않고 무사한데서 삶의 용기를 얻었다.어떻게 해서라도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엄마 사랑해요』라며 목을 껴안고 재롱을 피우는 아들을 위해 살아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지난해 8월26일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전기자극에 의한 하반신 치료를 받았다. 아침 7시30분에 일어나 밤10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홀로서기」위해 보여준 김씨의 의지는 놀라웠다. 아침 8시30분부터 10시까지 상체운동을 위한 작업치료를 시작으로 11시10분부터 초음파 치료 그리고 점심식사후 3시부터 20분동안의 물리치료,4시30분부터 5시까지의 전기자극에 의한 치료로 이어지는 힘든 과정을 참고 견디었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단순한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다.너무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그러나 김씨는 『물리치료에는환자 자신이 일어서고 걷겠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사들의 충고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운동을 하지않을 때는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드디어 지난해 12월13일 김씨는 휠체어에서 일어서는데 성공했다.치료효과가 그렇게 빨리 나타날 줄은 담당의사들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반신의 부자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마비가 저를 더 괴롭혔지요. 그러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재기하는 것만이 저를 구해준 마천마을 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달랬지요』 그녀는 『하루빨리 몸이 완쾌되어 어머니·아내·며느리로서 되돌아가고 싶다』면서 병실 창문틀에 놓여있는 아들의 사진첩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집념과 투지로 절망을 물리치고 있는 병실에는 새해 아침의 햇살이 축복처럼 밝게 빛났다.
  • 페루:상/후지모리 혁신에 국가역동성 회복(세계의 개혁현장:48)

    ◎“기득권 집착” 의회·사법부 작년 해산/게릴라 소탕하자 「개혁독재」 의심 사라져 남미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는 페루다. 집권 3년만에 일약 남미의 영웅으로 떠오른 야심찬 일본계 2세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정치·경제·사회등 전 분야에 걸쳐 추진하고 있는 강력한 개혁정책에 2천2백만 페루국민들이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늪에서 페루를 구출해 내야겠다는 열정만으로 정치일선에 뛰어든 국립농과대학장 출신의 대통령과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국민이 하나로 뭉쳐져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같다. 지난 30여년동안 보호무역주의등 폐쇄경제체제를 고수해온 페루의 독재정권이 국가경제의 파탄을 초래했고 국민들은 비탄과 절망의 수렁에서 참혹한 생활을 해야 했다. 후리모리 대통령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80년대 말 페루의 비참한 현실이 그를 대통령선거에 나서도록 했다고 밝혔다.그 무렵 농학자로서 전국을 답사하는 기회를 통해 조국의 현실을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체 국민의 10%에 불과한 백인계가 입법·사법·행정·군부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국민의 50%에 이르는 극빈자를 포함,90%의 국민들은 최저생계비조차 벌지못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마지막 잉카의 후예를 자칭하는 MRTA와 모택동주의파인 「빛나는 길」(SENDERO LUMENOS)로 대표되는 좌익게릴라들의 무차별 테러와 살인행위가 나라전체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대학에서의 강의와 행정책임자로 일한 경험밖에 없는 후지모리교수는 대통령선거 6개월전인 지난 89년말 출마를 결심하고 「90년 개혁당」(CAMBIO 90)을 결성,90년4월 선거에 나서 당당히 당선됐다. 절대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출범한 후지모리 정부였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모든 권력과 부를 쥐고 있는 기득권층의 반발과 도전이 끊임없이 계속됐다.개혁입법을 시도하면 의회가 거부하고 테러리스트를 잡아 넣으면 판사들이 재판과정에서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풀어 줬다.경찰과 군·국세청등은 마약조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마약 밀매자금을 뇌물로 공공연히 받는등 어는 곳 하나 썩지 않은 데가 없었다. 후지모리는 급기야 지난해 4월5일 의회를 해산하고 좌익게릴라를 소탕하는 등의 국가비상재건조치(AUTO GOLPE)를 단행했다. 군부를 장악하고 단행한 이 조치는 「친위 쿠데타」라는 비난속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로부터도 원조중단 위협과 함께 헌정복귀를 요구한 압력을 받는등 대내외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의회는 막시모 산 로망 제1부통령을 대통령으로 뽑아 페루에는 당시 4명의 대통령이 있을만큼 극도로 혼란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국가비상재건회의를 구성,입법·사법·행정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등 초법적인 개혁조치를 하나하나 취해 나갔다. 가장 극적인 조치는 좌익게릴라들이 무법천지를 이루고 있는 「카스트로 카스트로」감옥의 진압이었다. 아비마엘 구스만을 대통령으로 뽑아 별도의 「국가조직」을 구성,정부의 통제가 전혀 안 먹히는 「카스트로 카스트로」감옥에 군병력을 투입,1백여명의 사망자와 2천여명의 중경상자를 낸 전쟁을 방불케하는 진압작전을 성공시킨 것이다.후지모리는 진압작전후 현장에 직접 나가 TV 생중계방송으로 작전의 배경과 경위등을 국민들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국민들 사이에 「개혁독재」가 아니냐는 의심이 일기도 했으나 이 작전이후 후지모리를 다시 신뢰하게 됐다. 후지모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대법원 판사 13명을 비롯,수십명의 판사를 해임한데 이어 국회 사무처 직원을 3천명에서 4백명으로,상공부 직원 2천6백명을 1백70명으로 줄이고 그동안 마약·테러조직과 결탁되어 있던 군과 경찰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했다.그동안 역시 손델 엄두조차 못내던 외무부에 대한 기구축소도 단행,외교관을 포함한 직원 1백17명을 자르고 해외 공관도 여러곳 폐쇄했다. 이같은 조치후 페루국민들은 판사해임등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온상인 사법부의 개혁에 대해서는 95%,의회 개혁에는 85%가 찬성하는등 70%이상이 후지모리의 개혁정책에 지지를 보낸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는 밝히고 있다.국민들은 또 최근 실시된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통해 후지모리의 연임과 사형제도의 도입을 허용했다. 대통령이 이끌고 2천2백만 국민들이 동참하고 있는 이 나라의 개혁은 분명 희망의 21세기를 향해 페루를 힘차게 밀어 올리고 있다.
  • 우리교민 어디에 얼마나 살고 있나

    ◎미에 1백53만명… 영향력 급신장/중에 최다 1백92만 「동질성」 간직/71만 일교민 안정단계… 중동·가주엔 70년대초 진출 아라이 쇼케이(신정 장경)의원­.그는 일본의 「정치1번지」인 도쿄도의 자민당 소속 중의원이다.동경대 경제학부를 졸업한뒤 대장성관리로 들어가 와타나베 미치오전대장상 시절,그의 비서로 발탁돼 일했다.이를 계기로 능력을 인정받아 자민당의 공천을 얻었고 도쿄도에서 출마,연거푸 당선된 개혁성향의 정치인이다. 그는 부모가 대구출신인데도 불구,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았다.지금은 그가 한국인 2세라는 사실을 선거구민들이 알고있고 그도 이제 한국인 2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그런데도 선거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비록 상징적인 얘기지만,정부관계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결국 우리가 바라는 교민상이라고 말한다.이들은 우리가 너무 교민사회를 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다.LA교민사회가 한때 성금배분 문제로 이견을 보이고,중국이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한민족축제」때 연변 동포들의 참가를 불허한 일들을 우리의정적인 대응이 몰고온 문제의 예로 들고있다.따라서 그 사회 구성원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훌륭한 위상을 정립할수 있도록 보이지않게 돕는게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인 「존경받는 한인사회」,그러기엔 우리 교민역사가 너무 짧다.중국의 화교·유태인·일본의 교민역사는 길게는 몇천년,짧게는 몇백년에 이른다.아직 해당국가에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미미한 것도 결국은 일천한 정착 역사 때문이다. 『재일교포의 경우는 안정단계에,재미교포등 다른 국가의 교포사회는 「활주로를 달리다 이제 막 이륙」하는 단계로 볼수 있다』고 외무부 이주흠재외국민 1과장은 설명한다.특히 재일교포 2세의 경우는 매년 5천∼6천명이 귀화하고 있고 90% 이상이 일본인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있다고 했다. 이과장은 그러나 미·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뒤떨어지긴 하지만 『중국·러시아 교민의 경우는 비교적 민족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그 나라 소수 민족사회 가운데 생활및 교육 수준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인다. 이처럼 대부분 교민사회가 지금은 우선 그 사회에 발붙이고 사는게 시급한 문제이다.그러기위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하고,또 그렇게 하고 있다.그러다보니 깨끗하고 보람있는 일보다는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장소에서 세탁소·식품점·옷가게·노동등 비교적 궂은 분야에 종사한다.개중엔 내로라하게 자리를 잡아 정계·재계·법조계에서 맹활약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표적인 곳이 미국 교민사회.LA의 「한·흑갈등」도 어찌보면 이같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파생하고 있다고 볼수있다. 지난해 중국(1백92만7천2백78명)과의 수교로 최대규모의 지위를 중국에 넘겨줬으나 미국 교민사회(1백53만3천5백77명)는 영향력,구성동기,고국과의 관계,문제점등에서 교민사회의 표본으로 자리하고 있다.중국 연변지역이 비록 최대 규모이긴 하나 자발적인 이주라기 보다는 역사적 강제에 의해 구성된 타율적 사회이다.3·4위인 일본(71만2천5백19명)·러시아(45만8천9백23명)도 마찬가지.그런 점에서 미국 교민사회는 여전히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규모로 볼때 10만명 미만으로 이들 4국 교민사회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나 캐나다(7만7백18명),브라질(4만3천7백69명),호주(3만9천5백72명),아르헨티나(3만4백75명),독일(2만8천10명)등이 10위권 내에 드는 교민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92년 12월 말 현재 우리의 교민이 나가있는 국가는 1백29개국,총 4백94만3천5백90명에 이른다.해마다 많게는 15%에서 적게는 1.9%정도 늘고있다.아프리카의 부룬디·말리 적도기니·잠비아·루안다와 중동의 카타르 이스라엘에는 살고있는 교민이 불과 1∼2명 뿐이다.체육및 선교활동을 위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크게 보면 미국의 교민역사는 우리의 교민사라 해도 별로 틀리지않는다.남미로 이민을 가는 교민들도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전 준비인 경우가 허다할 정도로 미국은 우리 교민사회를 집대성한 곳이라 할수 있다.미국의 첫 이민은 구한말인 1902년 12월.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개발을 위해 1백21명의 취업이민이 발을 내디디면서 시작됐다.그뒤 3년만에 7천명으로 불었고 이중 2천여명이 본토로 이주했다.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다 60년대부터 지역을 캐나다등 북미 지역과 독일등 유럽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70년대초 들어서는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한때 이민붐이 일기도 했다. 중동·남미·아프리카등지로 진출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제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면서 우리의 교민사회도 웬만큼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시기이다.국내 정치상황도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호전돼 과거와 같은 정치적 문제가 크게 해소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다만 일부 교민사회가 아직 현지사회와 「물과 기름」처럼 괴리되어 있고 2세부터는 모국어를 모르는 숫자가 점차 늘어 대책이 시급한 현실이다.
  • 불,미에 「영화전쟁」 선포/에밀졸라 원작 「제르미날」 영상화…개봉

    프랑스에서는 요즘 유럽과 미국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영화전쟁」이 불붙고 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의 유럽 상륙에 맞서 프랑스 거장 클로드 베리 감독이 만든 영화 「제르미날」의 맞불작전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제작비 1억6천5백만 프랑,상영시간 2시간 40분,예상 관객 5백만…』 프랑스 전역에 나붙은 「제르미날」선전 포스터의 현란한 문구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오귀스트 드잘레는 「제르미날」을 일컬어 『현대판 「레미제라블」』이자 『인간조건의 대로망』,『비참한 생활속에서 형제애를 다져가는 노동자의 생활 서사시』라고 평하고 있다.유럽 언론들은 요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과 「제르미날」간의 대결을 『공룡과 광부,비인간성과 인간성,야만과 문명의 싸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운명 공동체의 씨앗」이란 뜻을 담고 있는 「제르미날」은 19세기말 프랑스 북부 광산촌 노동자들의 삶과 고뇌를 다룬 작품.같은 이름의 에밀 졸라의 소설을 영상화한 것으로 일찍이 앙드레 지드는 「제르미날」을 졸라의 최고 걸작이자 프랑스 10대 걸작소설의 하나로 꼽은 바 있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는 「마농의 샘」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드파르디외(에티엔느 랑티에 반). 영화는 실직한 에티엔느가 프랑스 북부 한 광산의 광부로 변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에티엔느는 마유 일가를 비롯한 광산촌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에 분노,그들을 의식화시켜 파업을 일으킨다.그러나 산업공황의 물결에 밀린 회사측은 촌보도 물러서지를 않는다.흥분한 광부들은 점차 폭도화하여 이곳저곳의 탄광을 습격한다.회사는 마침내 군대를 끌어들여 파업을 진압한다.1천99명의 사망자를 남긴채…. 광부측이 무참하게 꺾이고 있을 무렵 때마침 그곳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출신의 한 아나키스트가 지하탄광의 방수벽을 무너뜨리고 갱내에 물을 처넣어 탄광을 파괴해 버린다.에티엔느는 애인 카트린과 갱도속에 갇혔다가 10일만에 구출되는데 이미 애인은 숨을 거둔 뒤였다. 「제르미날」에 부어지고 있는 관심은 비단 영화인과 언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제르미날」의 무대였던 프랑스 북부산업도시 릴에서 최근 개최됐던 이 영화 시사회에는 이례적으로 미테랑 대통령과 발라뒤르 총리를 비롯,1천6백여명의 프랑스 정치인과 지식인,기업인들이 참석했다.「제르미날」을 프랑스의 국민영화로 승화시켜 우루과이라운드(UR)에 맞서게 하자는 뜻에서였다. 근래들어 미국영화의 물량공세로 고전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정은 유럽 전체 영화계도 마찬가지다.미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59%에 이르고 있는 프랑스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이탈리아는 68%,독일 77%,스페인 75%,포르투갈 90%,그리고 영국은 93%를 점유,그야말로 미국영화가 유럽의 영화산업을 철저히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반면 미국내 영화시장은 자국산이 99%를 차지,영화산업에 관한한 미국이 일방적인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게 요즘의 실정이다. 이때문에 프랑스의 영화 종사자들은 「쥬라기 공원」이 개봉되자 『신대륙 공룡이 구대륙을 집어삼키려 한다』고 아우성을 치며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 민자 문제의원 징계 “폭풍전야”/여권 출당·경고 등 강경조치 안팎

    ◎검찰총장 사퇴로 “여론표적 된다” 의식/윤리성 중점… 의원직 박탈까진 않을듯 민자당에 또 재산공개파문의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민자당은 14일 고위당직자 회의와 사무총장 주재의 당4역회의,사무총장 주재의 「심사회의」등을 잇달아 열어 재산공개로 물의를 일으킨 의원들에 대해 이번 주안에 징계조치를 모두 내리기로 당 방침을 정리했다. ○…이날 민자당은 물의를 빚은 의원들을 3단계로 분류,죄질이 가장 무거운 사람에 대해서는 자진탈당을 권유하되 응하지 않을 경우 당기위를 열어 제명(출당)조치를 취하고,그 다음에 해당되는 대상자는 6개월에서 1년정도의 당원권정지 처분을 내리기로 했다. 당원권이 정지되면 지구당위원장직을 수석부위원장이 대리하며 당직은 자동 박탈된다.또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사망선고에 준한다고 볼수 있는 중징계다.또 죄질이 가장 가벼운 경우에는 총재 명의의 경고처분이 내려진다. 자진탈당 권유대상은 박박식·이학원 두 의원. 당원권정지 대상에는 조진형·김동권의원이 확정적이고 정호용의원이 당권정지처분을 받게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김의원의 경우 당초에는 출당대상으로 분류됐으나 정상이 참작돼 감1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고에는 김영광·이명박·김진재·남평우의원등이 거명되고 있다. 민자당은 자진 탈당을 권유하는 박·이의원을 비롯해 10명 안팎의 의원을 징계하면 일단 국민여론이 진정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민자당의 분위기가 징계불가피론으로 급속 선회하게 된 데에는 지난 12일 김덕주대법원장의 사퇴와 13일의 박종철검찰총장의 사퇴가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대법원장이 사퇴하자 자연스럽게 정치권의 상응하는 조치여부에 눈길이 쏠렸고 박총장의 사퇴는 신속한 조치가 없이는 여론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청와대는 당이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곤란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 당의 발걸음을 채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재산공개 뒷처리 과정에서는 여권의 권력구조와 관련,몇가지 재미있는 점들이 노출됐다. 우선 민자당안에서 누구도파문 수습을 주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청와대의 눈짓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김종필대표는 이미 주요 당직자와 청와대 사이에 교감이 이뤄지고 있었던 시점인 지난 13일 아침에도 『윤리위가 있는데 당 차원의 조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해 「결정적인 정보공유권」 밖에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산공개 파문이 이번 조치로 완전 정리될 것인지 아니면 다시 불거져 나올 것인지에 대한 전망은 현시점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듯하다. 황총장은 14일 『의원들이 계속 희생돼 안타깝다』며 더 이상의 확대를 바라지 않는 심정을 밝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번 조치는 1차조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뇌관이 터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자당내 한 관계자는 『출당당한 의원의 경우에도 최종목표는 의원직 사퇴』라고 못박고 『본인들이 알아서 처신해 주길 바랄 뿐』이라고 말해 강력한 조치가 아직도 남아 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또 『윤리위의 실사과정과 금융실명화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사안별로 조치해 나갈 것』이라고 말해 킬링필드처럼 더 많은 의원들이 쓰러져 나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날 고위당직자 회의에 이어 황명수사무총장 주재로 당4역,제1·2부총장 연석회의를 갖는 등 문제의원의 징계에 대한 막판 수위조절에 고심하는 분위기. 황총장은 이어 권해옥,조부영부총장과 백남치기조실장 등 실무자들을 불러 「도마위」에 오른 의원 36명을 대상으로 최종 선별작업에 착수.이날 작업에는 자체 조사자료,1·2차 재산등록 관련서류,신문 스크랩 등이 참고자료로 준비됐고 청와대측이 작성한 문제의원 관련자료도 활용. 황총장은 그동안 백기조실장에게 1차 신고때 보다 10억원 이상 차이난 의원 36명과 언론보도에서 문제가 드러난 10여명에 대해 정밀조사를 지시했으며 며칠간의 밤샘작업 끝에 징계대상은 10여명 선으로 압축. 황총장은 이날 선정작업에 앞서 심사기준과 관련,『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재산을 왜 빠뜨렸는지,돈을 어떻게 벌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설명.이어 『이들에 대해 의원직을 박탈하거나 국회 윤리위에 따로 제소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당차원의 징계조치로 수습할 것임을 거듭 강조. 이날 심사대상자 가운데 1차 공개때 부동산을 무려 54건이나 누락시킨 박규식의원과 이번에 경기 광명시의 땅 4필지를 숨긴 이학원의원은 출당조치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이 두 의원은 일단 완강히 버티고 있으나 출당보다는 자진탈당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유력.이의원의 경우 13일 김종필대표를 만나 결백을 호소하고 저녁에는 부부가 황총장 집을 방문,읍소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 1백억원의 공장을 1차때 누락시킨 김동권의원의 경우 막판까지 출당대상으로 거론돼 처리에 진통.『거의 알려진 대구의 공장을 누락시켰으니 「극약처방」만은 면해주자』는 의견과 『은닉 규모가 막대하고 최근에는 사생활마저 문제가 되고 있으니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 난상토론. 이들외에 남평우 조진형 윤태균 정호용 노인환 김채겸 이영문 이환의의원등도 이날 심사대상에 포함. 정호용의원은 군 재직시 땅을 매입했고 2차공개를 앞두고땅을 처분,중징계 대상으로 거론됐으나 대구출신이고 김영삼대통령이 직접 영입한 점이 감안되고 있다는 것. ○…문제 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해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민주계 주도로 입당한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민정·공화계의 시선이 곱지않은 분위기. 박규식의원의 경우 지난해 11월 대통령선거전 중부권 강화전략으로 민주당을 탈당하자 영입했고,국민당 출신인 이학원의원은 1차 공개 이후 당 내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계의 거센 입김때문에 들어온 것.
  • 막장의 생과 사(외언내언)

    1967년 9월6일 청양 구봉광산에서는 인간의지의 승리가 드러매틱하게 연출되고 있었다.지하 1백25m의 갱속에 갇혔던 광원 양창선씨(당시 37세)가 15일8시간,정확히 3백68시간35분만에 구출되는 순간이었다.갱목과 흙더미에 묻힌채 양씨는 칠흑같은 갱속에서 갱목 껍질과 지하수로 연명하면서 그 긴 기간동안 사투를 벌였다.인간이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견딜수 있는 한계는 얼마나 될까.물도 안마시면 10일이내,물만 마시면 50∼60일까지도 버틴다는 게 의학계의 학설이다.시간이 지날수록 허기에 지친 양씨는 외부와 연결된 통화에서 『참기 어렵다.차라리 폭파해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생명에 대한 초인적 집념으로 기적같이 살아남아 구조되었다.매스컴과 온 국민들은 그를 「인간의지의 화신」,「초인」으로 영웅대접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광산사고가 잦아 해마다 많은 인명을 빼앗기고 있다.갱도가 무너지거나 가스폭발이 주원인이다.79년10월 문경 은성광업소 사고때는 갱내 화재로 42명이 사망하는 대형참사를 기록했다.탄광의 경우 석탄 1백만t 생산당 사망근로자는 우리나라가 4.9명(91년),미국의 0.1명,독일의 0.2명 등에 비하면 25배,50배나 높은 수준이다.안전시설의 미비때문이라고 한다.안타까운 일이다. 6명의 광원이 매몰되어 구조작업을 벌였던 태백시 한보에너지 통보광업소 사고는 단 한사람의 생존자만 구출되고 나머지 5명은 시체로 발견되었다.나흘동안 밤낮없이 계속된 구조작업을 지켜보던 국민들과 가족들의 애타는 염원이 허무하게 무너진 느낌이다.그러나 유일한 생존자 여종업씨(32)의 극적 구출은 감동적이다.지하 6백m의 막장 깜깜한 어둠속에서 혼자 남은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오줌과 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면서 구조반이 도착하기까지 91시간을 버텨낸 것이다.『나는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계속 되뇌었다』라고 구조된 여씨는 말한다.생에 대한 강렬한 의지가 그를 살려낸것 같다.
  • 8·12보선/“밀릴수 없다”/총력전 양상

    ◎본격 득표전 돌입… 여야의 필승전략/“개혁지지 표로 연결” 대구쪽 중점공략/민자/혹서선거 공세속 야권공조로 세몰이/민주 대구동을과 춘천지역 보선 후보등록이 28일 마감됨에 따라 8·12 투표일을 향한 뜨거운 선거전이 본격화됐다. 새정부들어 3번째인 이번 보선의 경쟁률은 대구동을이 4대1,춘천이 5대1. 여야는 선거과열을 막기위해 중앙당 차원의 지원을 자제하기로 이미 합의해 논 상태이다.그러나 두지역 모두 팽팽한 접전이 예상되는데다 선거 결과가 향후 정국구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총력전 양상의 대결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민자당은 이번 선거에서도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지지를 득표로 연결시키겠다는 입장이다.그러나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무소속 후보들은 개혁의 형평성등을 문제삼아 반민자당 분위기를 확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민자◁ ○…두지역 가운데 한곳이라도 놓치면 지난번 명주·양양 보선에서의 패배 못지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정기국회를 앞둔 상황이니만큼 반드시 야당의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위기이다.그만큼 당지도부가 느끼는 강박관념이 클 수 밖에 없다.자칫 잘못되면 당직개편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는 철저히 지역선거로 치르겠다는 방침을 강조하고 있다.지난번 보선에서도 나타났듯이 지나치게 정치적 의미를 강조해 봐야 여당으로서는 좋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이에따라 김종필대표와 황명수총장등 지도부는 정당연설회에만 참석하고 별도의 지원활동은 일체 삼갈 예정. 당직자들의 전망은 대구동을이 「고전예상」,춘천은 「조심스런 낙관」이다.지역정서상 대구는 새정부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지만 춘천은 친여성향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자체 여론조사결과를 토대로 대구는 노동일민자당후보와 무소속 김용하,서훈후보의 3파전 양상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노후보가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내세우면서도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하지 못하는 분위기.지도부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대구출신의원들이 현지에서 암암리에 뛰고 있다. 춘천지역은 야당·무소속 후보들에 비해 유종수후보가 시간이 지날수록 우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설명.한때 우려됐던 유후보경력에 대한 현지의 비판적 시각도 거의 해소됐다는 점에 안도하고 있다. ▷민주◁ ○…민주당도 이번 보선에 민자당 못지않게 부담이 크다. 지난 명주·양양보선의 승리로 우쭐했던 기분을 되살리기 위해서나 정부의 개혁에 대한 비판론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는 한지역에서라도 승리를 낚아야 하는데 현지 분위기는 그렇게 탐탁치 않기 때문이다. 보선참여여부에 대한 당론결정과정에서 진통을 겪은점이나 선거결과에 대한 당지도부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될 것에 대한 우려도 부담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일단 이번보선을 김영삼정부의 개혁에 대한 중간평가의 장으로 활용하고 보선일자의 일방적 결정,선별적인 사정,국정조사활동지연등을 정치쟁점화시켜 득표전에 임한다면 승산도 있다는 판단이다. 현재 대구및 춘천에서 민자당지지가 그렇게 높지 않은 점이나 국민당과 새한국당의 야권공조 도움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대구동을의 안택수후보는 현재 후보인지도에서는 3위로 뒤졌으나 점차 민자당의 독주와 야권공조등의 홍보로 상승세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서 4위를 한 춘천의 유남선후보도 지난선거에서의 경쟁자들이 사라진데다 공무원층의 불만이 높은 지역현실등이 상승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중앙당은 이에따라 선거초반에는 정부의 개혁정책을 비판하고 소외된 지역정서에 호소하는 득표전략에 치중하고 후반에 이르러서는 김동길국민·이종찬새한국당대표가 나서 지원하는 이벤트식 행사도 곁들인다는 다단계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 “인명구조 감동의 미담”/신한국인의 덕목으로 계승돼야

    ◎김대통령,추락기 현장등 방문 【목포=김영만기자】 김영삼대통령은 28일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때 헌신적인 구조활동을 편 전남 해남군 마천부락 주민들의 이야기는 후세에 길이 미담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마천부락 하원동국민학교를 방문,김진석이장등 주민 2백여명과 만난 자리에서 『누가 시켜서나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불쌍하고 애절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편 여러분들에게 대통령으로서,또 국민을 대표해 감사한다』고 말하고 『여러분들이 보여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노력은 온국민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국민모두가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고 치하했다. 김대통령은 이날의 즉석연설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용기』라고 전제하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불행한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신한국을 건설해나가자』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어 인명구조에 큰 공을 세운 공군6전대와 육군 31사단에 전화를 걸어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김대통령은 전화통화에서 『이번 조난에서 생존자가 많았던 것은 모두 군의 노력덕분』이라고 말했다.
  • 마을주민 희생정신 역사에 남을것/여객기참사현장 찾은 김 대통령

    ◎“극한상황속 상부상조… 온국민의 자랑”/부상자 손 잡아주며 “용기 가져라” 당부 김영삼대통령이 28일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참사의 현장을 직접 찾았다. 여객기 참사에 침통한 마음을 가라 앉히지 못한 김대통령은 이날 참모들을 재촉,잔뜩 찌푸린 날씨속에 사고현장을 방문해 사망자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을 격려했으며 부상자 구출에 온힘을 쏟은 부락주민들에게는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김대통령은 이날 하오 이해구내무,이계익교통부장관및 관계비서관등과 함께 공군전용기와 헬기를 번갈아 타고 목포에 도착,곧바로 부상자 12명이 입원해 있고 사망자 3명이 안치된 목포시내 한국병원에 들러 부상자와 희생자 유가족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 김대통령은 먼저 이 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정유순씨(여·36 서울시 은평구)등의 빈소에 들러 분향.김대통령은 가족들의 울부짖음에 가슴이 아픈듯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김대통령은 특히 두아들과 함께 사고기에 탑승했다가 아들 하나를 잃어버린 박복례씨(여·35 경기도 하남시)에게 『마음이아프겠지만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한뒤 의료진들에게 부상자들의 용태를 물어보고 치료에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김대통령은 목포시청 상황실에 마련된 사고수습대책본부에 들러 이균범전남지사로부터 수습대책에 대한 보고를 받고 『예기치 못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전남도민과 행정기관,그리고 군·경및 목포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희생자를 최소화 했다』며 노고를 치하. 김대통령은 특히 『마천부락 주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44명의 생존자도 없었을 것』이라면서 『마천주민들의 희생정신은 이 지역 뿐만아니라 온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후세에 전해질 미담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김대통령은 또 『앞으로 이같은 불행한 사고가 다시는 없어야 하겠지만 이번 사고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면서 『대책본부 관계자들은 사고수습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당부. ○…마천부락 주민 2백여명이 미리 나와 환영하는 가운데 헬기편으로 이 부락 하원동국민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김대통령은 마을주민들과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격려. 김대통령은 사고소식을 듣고 마을 앰프방송을 통해 마을주민들에게 구조에 나설 것을 호소한 김진석이장등 마을지도자와 구조에 나섰던 제8539부대 장병들의 노고를 여러차례 치하. 김대통령은 이어 즉석 연설을 통해 『김이장을 비롯한 이 마을 주민들의 아름답고 희생적인 정신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면서 『온 국민은 결코 마천부락 주민들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또 『누가 시켜서나 강요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편 여러분들에게 대통령으로서 또 국민을 대표해 고맙게 생각한다』며 감사의 뜻을 전달. 김대통령은 『여러분들이 해낸일은 여러분만의 자랑이 아니라 온국민의 자랑』이라고 말하고 『마천부락의 숙원사업을 반드시 해결토록 하겠다』면서 마을진입로 확·포장 사업등 이 마을 숙원사업을 곧 조치토록 하겠다고 즉석에서 약속. 마천부락 주민들은 김대통령이 마을 숙원사업 해결을 약속하자 박수와 환호를 보냈으며 이어 김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마천부락을 떠날때까지 내내 손을 흔들며 전송.
  • 헬기 구출여인 3시간 수술/친정 가던길 사고… 하반신 마비 회복세

    구조 헬기 로프줄에 한 여인이 매달려 구출되는 극적인 장면이 27일 밤 TV로 방영되자 시청자들은 이 여인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가슴죄었다. 온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은 여인은 윤진현씨(31·서울 강동구 암사1동 463의 10)의 처 김성희씨(29)로 휴가를 맞아 남편에 앞서 아들 승호(3)와 함께 친정집에 다니러 가기위해 사고기에 탑승했다. 『쿵하는 충격과 함께 누군가 내 아들을 빼앗아 가는것 같아 「내아들 윤승호요」하고 외친 기억밖에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요』 김씨는 27일 하오 7시부터 수술실에 들어가기 앞서 악몽같던 사고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추락당시 뇌와 흉부에 큰 충격을 받고 하반신 마비가 오는 중상을 입은 김씨는 목포 성콜롬반병원에서 광주 전남대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원측은 수술이 끝난후 김씨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밝혀 늦어도 4∼5주 입원치료를 받으면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인 김씨는 같이 후송되어 온 아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더욱 감사해 했다. 김씨는 자신의 구조 모습이 TV화면에 잡혀 전 국민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줄은 몰랐다면서 자신을 비롯해 사고여객기 탑승객들을 구조해 준 해남 마을 주민들과 군·경부대 장병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수술실 앞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과 시아버지·친정어머니 등 10여명의 가족들이 김씨의 회복을 빌고 있었고 부상이 심하지 않은 승호군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팔에 링게르 주사를 꽂은채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놀고 있었다.
  • 여야,대구·춘천 보선채비 박차

    ◎여 “또 질순없다”·야 재야지지 기대/춘천/엷어진 TK정제 향배가 변수로/대구 여야는 임시국회가 끝남에 따라 이제 얼마남지 않은 춘천과 대구동을 보선채비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특히 TK의 총본산이라는 정치적 무게가 실린 대구동을은 새정부출범이후 치러지는 보선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어느쪽이 승리하는냐에 따라 정국의 풍향계가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수 없다. ○…민자당은 명주·양양 패배를 거울삼아 다시는 그런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위해 절치부심하고있다. 춘천은「지역기반우선」기준에 입각,유종수후보가 선택된만큼 한때 출마의지를 불태웠던 이상용·한석용전지사측의 협조만 잘 이뤄진다면 무난한 승리를 거둘 것으로 판단한다.그리고 이 두사람이 유후보의 당선을 위해 힘껏 돕겠다고 당지도부에 약속했다는 한 당직자의 귀띔까지 덧붙이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대구동을은 아직까지 지역정서가 썩 우호적이지는 않지만 다른당의 출마예상자들중 이곳의 반민자당분위기를 결집할만한 능력을 갖춘 인사가 드물어 조심스럽게 승리를 점치고있다. 여기에다 무소속후보까지 합치면 출사표를 던질 인사들이 무려 10명에 달하는 것도 조직기반이 상대적으로 탄탄한 민자당측에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그리고 이곳에서 대선·총선등 다섯번이나 선거를 치른 박준규전의장에 대한 동정표도 그가 TK제거차원에서 희생된게 아니라 순수하게 재산형성과정상의 부도덕성 때문이라는 점을 설득하면 어느정도 돌아설 것으로 기대하고있다.그러나 대구의 정치적 비중을 감안할때 전국적인 선거로 비화시킨다면 민자당측이 승리할 공산은 점점 엷어지는만큼 대구출신의원들이 선봉장이 돼 선거지원활동을 펴는 철저한 지역선거로 치른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민주당은 영남지역의 교두보 마련이 절실한 탓에 춘천보다는 대구동을에 더 신경을 쓰는 듯한 인상이다. 대구동을의 경우 TK의 이반심리를 잘 이용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분석이다.월계수회와 새한국당대변인을 지낸 안택수씨를 공천한 이유도 안씨의 이같은 전력이 득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인 것같다. 안씨는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인 박영조 대구대교수와 경합을 벌였으나 비슷한 연배의 고교및 대학동창 20여명이 회의를 열어 민주당을 노크하는 TK를 안씨로 단일화하기로 결정,공천을 따냈다. 춘천에 대해서는 지난 6·11 명주·양양 보선 승리로 강원지역의 민주당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고 그 여파가 태백산맥을 넘어 밀려오지 않겠느냐는 기대섞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또 손승덕씨 사망후 국민당기반이 와해돼 야당성향의 유권자들에게는 민주당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다는 점에 고무돼 있다. 후보로 내정된 유남선현위원장은 춘천고와 강원농대의 전신인 춘천농대 출신으로 고종사촌간인 정성헌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장과 최 열 공해추방운동연합의장의 사촌동생인 최 윤씨등 출마가 예상됐던 재야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되고 있다.
  • 위로부터의 개혁·아래로부터의 개혁(최택만/경제논평)

    최근 각 부정·부패사건과 관련,메스컴에 오르내리는 인물을 보면 정치인·법률인·기업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다.지난주에는 검찰 고위인사가 슬롯 머신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언론에 연일 「축소수사」의 의문이 제기되었고 마침내 김영삼대통령의 「성역없는 수사」지시로 사정기관 역시 수사대상이 되고 있다. 사정기관의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검찰내부에서도 검찰의 정화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이와 때를 같이하여 시민단체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정사협)를 결성,정부의 개혁을 민간차원의 의식개혁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로 했다.개혁이 성공하려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다. 정부의 부정·부패척결과 각종 제도개혁이 개혁의 정지작업이라면 시민의 참여는 개혁의 이육단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역사적으로 성공한 개혁을 보면 위대한 정치지도자나 엘리트들이 개혁을 주도했다.개혁은 일반시민들의 지지를 받게 되고 마침내는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우리의개혁작업 역시 그와 같은 궤도를 걷고 있는 것 같다.개혁의 현단계는 지도자가 강력한 의지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고 각계 각층이 개혁을 지지하고 있으며 시민운동이 막 출범하고 있는 때이다.36개 온건한 시민운동단체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의식개혁운동을 전개하려 하고 있다. 개혁의 이륙단계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현재 언론에 많이 오르 내리고 있는 법률인·정치인·기업인·교육계 인사 등의 의식개혁을 이끌어갈 참신한 인사의 출현이다.부정·부패척결이 없이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이 지적한 「도금의 사회」 또는 「위기의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상황인식에 철저한 인사들의 개혁추진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이 비판한 19세기 미국의 황금만능주의와 부패· 타락 그리고 이로인한 사회적·경제적 갈등과 혼란을 우드로 윌슨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선견지명이 있는 정치지도자와 엘리트집단이 과감히 개혁을 추진,미국을 구출한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역사적으로 성공한 개혁은 모두 위대한 지도자나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피터 대제와 알렉산더 2세에 의한 러시아의 개혁과 18세기및 19세기 영국의 대개혁을 비롯하여 비스마르크(독일),앤드루 잭슨(미국),프랑코(스페인),메이지유신(일본),등소평(중국)등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와 엘리트들이 역사인식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개혁을 강력하고 일관성있게 추진한데 있다.엘리트는 바꿔말해 사회지도층인사를 말한다.정사협의 발족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정사협의 운동이 우리 역사에 「위대한 개혁」으로 평가되려면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개혁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무장을 해야한다.요즘 지상에 많이 오르내리고 있는 공직사회·정치계·교육계·기업계 등의 인사가운데 참신한 인사들의 대폭적인 참여가 절실히 필요하다.의식개혁은 그 어느 집단보다도 이들 집단에서 활발히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유교문화권의 폐습을 과감히 타파하는 일대 의식개혁운동을 펼치기 바란다.권력만 가지면 부와 명예 등 사회적 가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미분화된 인습을 버려야 할 것이다.공직자들은 의식과 행동에 있어서 민주적 의식,사명감,경비관념,코스트 의식을 견지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기업인들의 자정노력이 없이는 개혁은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슬롯머신사건에서 말썽이 되고 있는 수회행위는 기업인이 수회를 유혹한데서 비롯되고 있다.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적인 기업인이 있기 때문에 전체 기업인이 사회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다.기업인들은 기업은 어느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고 국가나 사회로부터 운영을 위탁 받은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은 물리적인 혁명과는 다르다.그래서 위로부터 개혁과 밑으로부터 개혁간에 교호작용이 필요한 것이다.정사협의 의식개혁운동은 바로 밑으로 부터 개혁이다.밑으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밑으로부터 개혁이 성공할 때 신한국의 개혁은 결실을 맺게 될 것이다.
  • 김 대통령 「5·18문제」 담화에 담긴뜻

    ◎“「광주」 연장선상의 문민정부” 천명/과감한 용서로 범민주화운동 승화/“진상규명 훗날에”… 「신한국」동참 호소 김영삼대통령이 13일 발표한 광주문제해결을 위한 특별담화는 국민의 「평균정서」를 해결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광주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히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반대로 그외지역이나 다른 사건 관련자 입장에서 보면 지나치게 광주만을 우대한다는 시각도 병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대통령은 이같은 불만족과 시각차를 「용서」「화해」같은 종교적 어휘를 빌려 위로하면서 「신한국창조를 위한 참여」로 광주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열어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광주해법」은 역사는 올바르게 기록하되 그것이 미래로의 전진을 붙드는 족쇄여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때문에 구체적인 상처치유도 성역화·기념공원조성·전과말소 등의 명예회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피해자에 대한 배상요구는 추가보상기회 제공으로 매듭지으려 하고 있다.광주측의 핵심요구사항의 하나인 진상규명과책임자 처벌은 역사적 평가에 맡길 것을 제의,그것이 동서화합과 신한국창조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광주해법은 이날 상오 발표한 12·12에 대한 해법과 같은 논리 체계를 있어 이러한 방식이 과거사에 대한 새정부의 일관된 처리방침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날 상오 이경재청와대대변인은 12·12에 대해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사건」으로 규정,역사회복에 대한 분명한 의지를 보이면서도 이 문제로 인한 추가논쟁의 발생은 원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하오에 발표한 광주해법역시 명예회복을 통한 「역사 복원」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진상규명과 같은 국력소모는 분명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부는 광주방정식을 푸는 과정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한과정에 편입시킴으로써 적극적인 동서화합을 통한 「광주의 구출」이 보다 바람직하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김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80년 5월에서 문민정부 탄생까지 복잡다기하게 이어지는 「한국민주화운동」의 한봉우리이면서과정으로 해석했다. 이 바탕위에서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정부』라고 밝힌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용어는 이미 지난88년 6공정부의 「민화위」에서 처음 제기돼 통용돼왔다. 새정부 출범이후 광주지역에서는 이를 「의거」로 격상시켜 달라는 주문도 있었다.그러나 이는 광주문제를 다른 민주화운동과 격리시키게 됨으로써 오히려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하고 광주를 결과적으로 더욱 고립시킬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국민주화운동」의 한과정으로 편입시키고 이름도 「민주화운동」이 더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김대통령은 담화문에서 『광주의 민주 정신을 전국적으로 승화시키는 방향에서 그리고 광주시민이 원하고,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못밖았다. 그 정신을 전국적으로 승화시키는 방향과,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안이 기본원칙임을 스스로 천명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당시 야당총재로서 맨처음 군부정권당국에 정면으로 항의한 또하나의 당사자 위치에 있다. 당사자이되 가해자의 위치가 아님으로해서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방안」이 광주문제에 제시할 수 있는 정부의 한계임을 솔직히 밝히고 또 그 범위내가 바람직하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대통령은 광주문제가 결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되거나,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이는 야당의 일부 세력이나 광주현지의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국민의 「평균정서」를 무시하고 해결을 방해할 가능성을 미리 경고한 것이라 할수 있다. 정부는 망월동 묘역 성역화에 82억원,도청이전과 기념공원조성등에 1천억원을 각각 지원할 예정이다. 이같은 재정지원과 명예회복을 받아들여 광주가 이름처럼 밝은 도시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이는 정부가 동서화합을 위해 호남측에 제시한 조건으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 검은돈과 권세 연결고리 끊으라(사설)

    검찰이 슬롯머신(일명 빠찡꼬)업계 대부 정덕진씨의 특가법위반사건 수사와 관련,정씨와 정·관계의 유착부분에 대해 수사하고 있다.아직은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정씨 비호세력의 실체가 얼마만큼 드러날지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으로도 정·관계유착내용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마치 우리사회의 이른바 총체적 비리구조를 한눈에 보는 느낌이다. 정씨의 범죄혐의 사실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내용들이다.폭력으로 빠찡꼬업계를 장악한 뒤 승률을 조작해 고객의 주머니를 털었으며,탈세로 모은 검은 돈을 정치권및 권력기관에 마구 뿌려 비호세력을 만들었다.지금까지 알려진 비호세력만 검·경등 권력기관의 고위공직자와 거물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자그마치 3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오랜기간 폭력과 김역 그리고 권세일부가 유착돼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같은 일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말인가.많은 국민들이 땀흘려 일하고 있는 동안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면서 벌어들인 떼돈으로는 정·관계에 비호세력을 만들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법한 일인지.지금도 정씨를 구출하기 위해 1백억원의 현상금을 걸었다느니 수사검사들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말이 나돌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빠찡꼬업소로 인해 빚어진 물의는 한두번이 아니다.폭력배끼리의 주도권 다툼이라든가 승률조작시비,내국인 출입문제등이 원인이었다.그러나 어떻게된 일인지 그때마다 이들 문제는 흐지부지 되기가 일쑤였다.특히 정씨의 경우는 65년 이후 11차례나 폭력등 혐의로 조사를 받았으나 단 한차례도 실형을 살지않았고 구류나 벌금만 내는 것으로 일단락됐었다.또 정씨는 81년 7월 상습도박 혐의로 검거됐으나 벌금 1백50만원을 내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으며 90년 「범죄와의 전쟁」때도 거액의 세금을 포탈했음이 드러났으나 기껏 세금추징선에서 끝났다.이것만 봐도 정씨의 배후에는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변화와 개혁은 바로 이같은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그 위에 신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일부 권력기관과 정치권이 이러한 구조적 부패와 유착되어 있었음을 알면서도 손을 대지못했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정당국은 이 사건을 개혁사정 차원에서 철저히 파헤쳐 응징함으로써 검은 돈과 권세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아울러 비리의 온상이 돼 버린 빠찡꼬의 존폐여부도 차제에 신중히 검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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