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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년간 한센인의 ‘치과의사’… 내 삶의 축복”

    “33년간 한센인의 ‘치과의사’… 내 삶의 축복”

    “원래 10년만 하고 못할 줄 알았던 봉사활동이 여기까지 왔어요. 봉사할 수 있어서 감사하죠.”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서 50년 가까이 치과를 운영해 온 강대건(81) 원장은 지난 33년간 주말이면 한센병 환자들과 같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주치의’로 변신했다. 1979년 45세가 되던 해에 처음 경기도 포천 나환자촌으로 동료 치과기공사와 위생사들의 의료봉사를 따라나선 것을 계기로 지난해까지 봉사를 이어온 것이다. 경기도 의왕시 성라자로 마을부터 전라도 한센병 환자 정착촌까지 그의 치료를 받은 한센병 환자는 1만 5000명에 이른다. 그는 한센병 환자 외에도 가난한 학생이나 형편이 어려운 이웃들에게도 따뜻한 봉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자신의 일을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는 성품 탓에 연로한 나이로 치과도, 봉사도 그만둔 뒤에야 주변에 그의 오랜 선행이 알려지게 됐다. 그는 올해 교황으로부터 가톨릭 신자로서 최고영예인 십자가 훈장을 받기도 했다. 인생의 절반을 봉사에 바친 강 원장은 국민추천포상을 받게 됐지만 오히려 봉사할 수 있어 감사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부는 10일 국무회의에서 올해 국민추천포상 수상자로 33년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한 이들의 치과의사로 살아온 강 원장 등 38명을 선정했다. 내년 초 국민훈장 모란장 등 훈·포장을 수여할 예정이다. 올해로 3회째인 국민추천포상은 지난해보다 수상자가 15명 늘어나는 등 규모가 커졌다. 총 520건의 국민추천 가운데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 위원장을 맡은 국민추천포상심사위원회에서 공적심사를 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23년간 의료와 교육으로 사랑을 실천한 ‘말라위의 나이팅게일’ 백영심(51)씨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국민추천포상을 통해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는데, 현재 말라위에 거주 중인 백씨는 지난해 이태석상을 수상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과학기술 분야 기초발전을 위해 한국과학기술원에 현금 100억원을 기부한 선행 할머니 오이원(87·가명)씨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는다. 오 할머니가 내세운 가명인 ‘이원’(?園)은 턱이 치아를 단단히 받치는 것처럼 재물을 새 나가지 않게 잘 모은다는 뜻이라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콩 재배법을 전한 아프간 콩 박사 권순영(66)씨, 시장에서 장사하며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노점상 할머니 이복희(67)씨 등 6명도 국민훈장을 받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제빵인생 50년 권상범 제과명장

    [김문이 만난사람] 제빵인생 50년 권상범 제과명장

    빵은 오래전부터 서양 사람들의 식탁에 단골로 등장한 대표적인 메뉴다. 큰 덩어리의 빵을 손으로 찢은 뒤 버터와 잼을 발라 먹는 장면은 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쌀을 주식으로 소비하는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들어 빵 중심의 식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빵집에서 만나 데이트를 하고 케이크로 파티를 하며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문화가 확산되면서 빵은 어느새 일상에서 친근한 존재가 됐다. 배고플 때 빵집 앞을 지나노라면 다양한 모양의 예쁜 빵과 막 구워낸 빵의 향기에 입 안에서 침이 절로 넘어간다. 밀가루와 발효를 통해 환상의 하모니를 빚는 대한민국 제과명장 권상범(68)씨.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50년간 빵을 만들어 와 제빵 업계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다. 단돈 2000원이라는 월급으로 제빵 인생을 시작해 지금은 연간 20억여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그가 서울 홍대 앞에서 30년 가까이 운영했던 ‘리치몬드제과점’은 여전히 ‘추억의 빵집’으로 남아 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요즘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과는 분명 다른 점이 있을 터. 지난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리치몬드제과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입구 벽에는 그의 부인이 직접 그린 ‘제빵명장’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최근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더니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보다, 다른 나라보다 뒤떨어지면 결코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빵에 관해 배울 것이 있다면 어느 나라든 가서 견학하고 연구하고, 필요하면 우리의 기술도 전수해 준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제빵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빵 분야에서는 경제 선진국 주요 7개국(G7)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요즘 들어 외국에서 우리 기술을 배우러 오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에서 온 연수생들에게 한 수 가르쳤다며 웃었다. “우리나라 제빵 수준은 1990대 이후 상당한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그만큼 소득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 수준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제과와 빵을 선호합니다. 따라서 기술도 그 입맛에 맞게 더욱 발전하게 되지요.” 제빵 업계의 미래는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미국이나 유럽, 일본과 유사한 형태로 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프랜차이즈에서 생산된 빵이 아니라 직접 손맛으로 만든 수제 빵이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게 될 거라고 장담했다. 최근 들어 기존의 빵집이 프랜차이즈에 밀리는 현상에 대해서는 “우리 제빵인들이 노력하지 않아 어느 정도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앞으로 빵의 소비가 늘어나는 것을 감안할 때 연구 개발을 통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도 제빵 분야를 ‘3D’ 업종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기능올림픽에서 한국 대학생이 빵을 주식으로 하는 유럽을 제치고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제빵 기술의 선진화를 위해 20년 전부터 제빵기술학원 학생들에게 제빵 교육을 하며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어떻게 하면 명장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제빵 업계에 20년 이상 종사해야 하며 발명특허 관련 논문, 신제품 개발, 대회 입상 경력 등이 종합적으로 반영돼 결정된다”면서 “누구나 명장에 도전할 수 있지만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각고의 노력과 정성, 꾸준한 연구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의 제빵 인생은 올해로 50년째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강원 영월군으로 이사했다. 당시 부친은 텅스텐 광산으로 유명했던 영월 상동광업소 내 국립의료원 원무과에서 일했다. 1949년 어느 날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들이 병원에 들이닥쳐 부상자 치료를 요구했다. 병원 직원들은 상황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사람들부터 살리고 보자며 부상자를 치료해 줬다. 며칠 뒤 누군가가 ‘병원에 빨갱이가 있다’고 당국에 신고하는 바람에 부친을 포함한 23명이 몰살되고 말았다. “25살의 젊은 어머니, 어머니 배 속에 있던 막내 여동생, 어린 첫째 여동생과 저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해 가며 우리 식구들을 키웠지요. 저는 종가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며 봉화초등학교를 다녔고, 졸업한 뒤에는 집안일을 돕느라 상급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오고 상점에서 점원 일 등을 하다가 16살 때 외갓집이 있는 경북 의성으로 갔다. 당시 외가는 다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방학 때마다 외가의 다과점에서 일을 거들다 보니 빵 만들기에 이미 재미를 느끼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1년쯤 외갓집에서 일을 하다 17살 때 좀 더 큰 곳에서 일을 배우고 싶어 대구 광월당에서 1년 정도 기술을 익혔다. 그런 다음 단돈 2000원을 들고 서울로 왔다.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종로 5가에 있는 성림제과에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조건으로 우선 취직을 했다. 조그마한 제과점이라 공장장과 둘이서 일을 했고 잠은 주로 작업대에서 잤다. 하지만 온갖 고생으로 신경성 위장병을 앓아 몸무게가 20㎏가량 줄어들자 무작정 제과점을 나왔고 추운 겨울날 노숙자와 마찬가지 신세가 됐다. 그래도 열심히 직장을 찾아다녔다. 보름쯤 뒤 당시 조흥은행 본점 앞에 있던 풍년제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같아요. 돈 한푼 없었고 갈 데도 없었고…. 직장을 찾아 종로에서 영등포까지 걸어다녔습니다. 배는 고픈데 날씨는 춥지요, 아마 그때 기차 탈 돈만 있었으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내려갔을 겁니다. 그때 뼈저리게 다짐한 것이 ‘옮길 직장을 잡아 놓지 않고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풍년제과에서 받은 첫 월급은 2000원이었다. 그러나 일이 끝나도 쉬지 않고 혼자 남아 열심히 청소를 하는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본 지배인이 한달 만에 월급을 3000원으로 올려 줬다. 처음에는 빵 반죽을 주로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음 단계의 기술을 전수해 줄 법도 한데 그럴 기미가 도저히 보이지 않자 눈치껏 어깨너머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나중에 돈을 벌면 꼭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고 다짐했다. 그 무렵 반죽 온도 계산법을 스스로 익혔다. 아울러 당시 대표적인 제과 기술자로 평가받았던 김충복 선생에게 케이크 데코레이션 기술을 배웠다. 이와 함께 혼자 연구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시즌 때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제과점을 돌며 케이크 사진을 찍어 오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 고생이 심했지만 나름대로의 실력을 쌓아 나갔다. 1972년 10월 김충복 선생의 소개로 풍년제과 수련 생활 7년 만에 삼선동에 있는 나폴레옹제과점 공장장으로 옮기게 된다. 당시 나폴레옹제과점은 생긴 지 2년밖에 안 된 상태였지만 직원 5명과 함께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쉬지 않고 일한 덕택에 비교적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1973년 제과학교를 수료하고 전국 빵·양과자 품평대회에 나가 6개 부문에서 1등을 휩쓸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1975년 나폴레옹제과점 사장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도쿄제과학교에는 300여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외국인은 제가 유일했어요. 낮에는 양과자, 밤에는 화과자(和菓子) 만드는 걸 배웠습니다. 현지 제과점에서 실습하는 동안 유럽 제품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인 1979년 9월 그는 아현동 마포경찰서 옆에 ‘나폴레옹제과점’이라는 상호로 가게를 내 독립하게 된다. 이때 내세운 철학이 ‘오늘 만든 빵은 오늘 팔아야 한다’였다. 팔리지 않고 남은 빵은 마포경찰서 전경들에게 간식용으로 돌렸다. 그만큼 자신감과 정성으로 ‘권상범식 빵’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1992년 상호를 ‘리치몬드제과’로 바꿔 성산동에 본점을 세웠고 이듬해 제과기술학원을 설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상범식 빵’은 우리 밀과 유기농 계란 등을 사용해 건강식품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제빵도 유행을 타기 때문에 고객의 취향을 앞서 파악하고 연구하는 노력은 필수다. 지금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빵 굽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빵의 앞날을 고민한다. 슬하에 2남 1녀를 뒀으며 두 아들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제빵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권상범 대한민국 제과명장은… 1945년 경북 봉화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 때부터 빵 굽는 일을 했다. 서울 삼선동 나폴레옹제과점 공장장(1972~1979)을 지낸 뒤 1979년 리치몬드제과 마포점 창업을 시작으로 자신만의 ‘빵 인생’ 길을 걸었다.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지만 일본 도쿄제과학교 졸업(1975년) 스위스 리치몬드 국립제과학교 수료(1993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외식산업 최고경영과정 수료(1997년) 등의 이력을 쌓았다. 주요 수상으로는 노동부 장관 표창장(2001년), 대한민국 제과명장(2002년), 대통령 표창장(2002년), 서울시장 표창장(2005년), 재정경제부 장관 표창장(2006년), 국민훈장 목련장(2006년) 등이다. 이 밖에 프랑스 리옹 세계 페이스트리컵 대회 한국대표 심사위원 3회(1997, 1999, 2001년), 사단법인 대한제과협회 중앙회 회장(2000년), 제36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제과·제빵 한국대표선수 정지도위원 및 심사위원(2001년), 대한민국 최초 프랑스 요리·제과협회 해외자문위원(2003년), 제40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제과제빵 심사위원(2005년) 등으로 활동했다.
  • “17년간 2억 저축… 한 푼 두 푼 희망을 모았죠”

    “17년간 2억 저축… 한 푼 두 푼 희망을 모았죠”

    “저축은 한 푼 두 푼 쌓일 때마다 보이는 희망입니다.” 2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50회 저축의 날 시상식에서 국민포장을 받은 정종길(50)씨는 신용협동조합에서 17년째 저축을 해 2억원 이상을 모았다. 정씨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기도 하다. 그는 주차 대행, 식당 청소 등을 하며 어렵게 살다가 일하던 식당 사장의 도움으로 동생과 함께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해장국집을 열면서 삶의 전환기를 맞았다. 정씨는 “사장님 도움으로 가게를 열었지만 가게를 운영해서 수익을 내기까지 고생한 것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라면서 “꾸준히 저축하다 보니 희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한 달 수입의 절반가량을 저축한다. 주식투자 같은 다른 재테크 방법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정씨는 “다른 사람들은 수입의 15%를 저축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돈이 있으면 무조건 모으는 버릇이 있어 어떻게든 최대한 쓰는 돈을 줄이고 모으려고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을 위한 기부는 예외다. 그는 매월 자신이 운영하는 해장국집에 장애인과 노인들을 초청해 식사를 제공하고 인근 복지시설에 기부금을 틈틈이 전달한다. 그는 “나도 장애와 가난으로 어렵게 살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아 베풀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딛고 중소기업 사장이 된 오춘길(69)씨는 34년간 모은 돈 대부분을 적금으로 부어 저축왕으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오씨는 사장이 된 이후에도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해 회사에서 네 가지를 없앴다. 청소직원을 두지 않고, 사장실도 따로 만들지 않았으며, 회사 내 비정규직을 없애고, 정년도 폐지했다. 그는 사내 복지기금에 3억원을 보태 직원들의 생활안정자금을 지원하고 다문화 가정과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기부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노점상을 하면서도 수입 대부분을 저축해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룬 김남심(56·여)씨, 어려운 형편에도 7년간 저소득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한 김완순(59·여)씨도 국민포장을 받았다. 연예인 가운데는 배우 현빈과 한혜진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프로야구선수 이대호, 가수 구하라가 국무총리 표창을, 가수 이적과 이문세, 빅뱅의 탑도 금융위원장 표창을 받는 등 모두 99명이 저축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역대 정부, A급 전범 아베 외조부 등에 훈장”

    우리나라 역대 정부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A급 전범과 망언 인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지적이 제기돼 논란이 예상된다. 국회 외교통일위 소속 인재근 민주당 의원은 9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난 8월까지 ‘외국인 훈장 수훈자’를 분석한 결과 태평양전쟁 A급 전범 3명, 독도 영유권 주장 등 망언 인사 5명, 야스쿠니 신사 참배자 3명, 731부대 관련자 1명 등 모두 12명의 부적격 일본인이 우리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A급 전범 3명은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와 고다마 요시오, 사사카와 료이치다. 독도 망언 인사로는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기시 전 총리의 동생), 시나 에쓰사부로(기시 전 총리의 핵심 참모), 다카스기 신이치, 아베 신타로 전 외무대신(아베 총리의 부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가 훈장을 받았다. 인 의원은 “사토 전 총리는 1965년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에 의심이 없다’고 했고, 시나는 ‘조선 병합은 영광스러운 제국주의’라는 망언을 했다”고 설명했다. 12명 중 731부대 관련자인 가토 가쓰야는 ‘국민훈장 동백장’, 나머지 11명은 모두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 때 7명으로 가장 많고 전두환 정부 3명, 김영삼 정부 1명, 이명박 정부가 1명씩 훈장을 수여했다. 인 의원은 “이들은 모두 일본의 우경화나 군국주의를 꾀하고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부정하는 등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쳐 온 인물들로 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부고] ‘도산 사상 전파’ 안병욱 前이사장

    [부고] ‘도산 사상 전파’ 안병욱 前이사장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이당 안병욱 전 흥사단 이사장이 7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 93세. 평남 용강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와세다대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59~1985년 숭실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흥사단 이사장과 도산아카데미 고문,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 심오하고 어려운 이론철학을 생활철학, 행동철학으로 대중화하는 사회 계몽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중학 시절인 16세 때 춘원 이광수의 ‘무정’과 ‘흙’을 읽고 감명을 받아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춘원과 인연을 맺은 고인은 춘원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에 가입해 청년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안창호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고인은 또한 1958년부터 1964년까지 월간 ‘사상계’ 주간을 맡아 자유언론 투쟁에도 기여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인제인성대상, 유일한상 등을 받았고 ‘현대사상’, ‘철학노트’, ‘사색인의 향연’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유족은 부인 김광심씨와 딸 정남씨, 아들 동명(위스텍 사장), 동일(세계보건기구 아시아태평양지역 대표), 동규(한림대 경영대학원장)씨, 사위 강홍빈(서울역사박물관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10일 오전 9시다. (02)2072-2091.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항공사 직원 폭행 물의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 항공사 직원 폭행 물의

    국내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의류업체 대표가 공항에서 항공사 직원을 때려 물의를 빚고 있다. 30일 경찰과 아시아나항공에 따르면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 회장 강태선(64) 회장이 지난 27일 오후 3시쯤 서울 강서구 김포공항 탑승구에서 탑승 수속 중 항공사 협력업체 직원을 신문지 등으로 폭행했다. 오후 3시 10분쯤 여수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던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은 공항에 늦게 도착해 탑승이 어려워지자 무리하게 탑승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은 탑승권 확인작업을 하던 협력업체 직원을 때렸다. 경찰이 오후 3시 30분쯤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만 도중에 신고가 취소돼 발길을 돌려 현장에 가지 않았다. 강태선 회장은 나무심기 등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지난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바 있다. 최근에는 본인의 이름을 내 건 사회공익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이른바 ‘왕상무 라면 폭행사건’을 거론하며 강 회장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트위터 이용자 ‘wns****’는 “돈 많으면 비행기를 사든지 방송국을 사든지 해야지 공무보는 사람을 왜 때리나”라고 꼬집었고 ‘budweis****’는 “이륙을 멈추려고 하다니…아예 그냥 전용기를 한 대 사라. 돈 좀 벌고 그러면 사람 치고 해당 비행기 탄 승객들 기다리게 해도 되는 건가”라고 비판했다. 블랙야크 측은 “들고 있던 신문지로 어깨를 살짝 친 정도였고 현장에서 바로 사과했다”면서 “과정이 어찌됐든 불미스러운 사건을 일으켜 죄송하다”고 해명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신문지 회장님’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에 네티즌들 비난 봇물

    ‘신문지 회장님’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에 네티즌들 비난 봇물

    항공사 직원 폭행 논란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강태선(65) 블랙야크 회장에 대해 네티즌들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강 회장은 지난 27일 오후 3시쯤 김포공항 탑승구에서 항공사 용역 직원을 향해 욕설을 하며 신문지로 몸을 때렸다는 내용의 신고가 112에 접수됐다. 당시 전남 여수에서 열리는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참석하려던 강 회장 일행은 비행기 출발 시간이 임박한 상황에서 공항에 도착해 탑승 시각에 늦어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되자 이같은 소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 회장 측은 “내가 신문을 던졌다. 들고 있다가…. 야, 그렇게 하면 되느냐고 신문을 막 던졌다”면서 소동을 일으킨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고의로 때린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강 회장의 폭행 논란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의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강 회장이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국민훈장을 받았고 사건 전에도 나눔재단을 설립하는 등 선행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은 “토종 아웃도어 브랜드라고 해서 블랙야크를 선호했었는데 매우 실망이다”, “라면 상무에 이어 신문지 회장님이라니, ‘갑’들의 횡포 너무하다”, “사회 지도층 답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으면”라는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항공사 용역 직원 폭행 논란…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은 누구

    항공사 용역 직원 폭행 논란…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은 누구

    김포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용역 직원을 폭행한 사실이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는 강태선(65) 블랙야크 회장에 대한 네티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은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 건실한 기업인으로 부각됐지만 이번 사건으로 회사는 물론 개인적인 이미지에도 치명타를 입게 됐다. 유명 등산용품 기업인 블랙야크 대표인 강 회장은 1973년 24살의 젊은 나이에 서울에서 작은 공장과 매장을 운영해 기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5년 블랙야크를 론칭한 뒤 지난해 6000억원대 매출을 올리며 기염을 토했다. 특히 강 회장은 지난해 12월 통일기반 조성 및 자연보호 활동 등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지난 7월 국내 순수 기술로 등산의류 및 용품을 생산하고 제주도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주대에서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 비영리 사회 공헌 공익 재단인 ‘블랙야크 강태선 나눔재단’과 ‘블랙야크 강태선 장학재단’을 공식 출범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27일 오후 3시 김포공항 탑승구에서 항공사 용역직원에게 욕을 하며 신문지로 얼굴을 때렸다는 신고가 접수되면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강 회장은 당시 비행기 탑승 시각보다 늦게 도착해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되자 이 같은 소동을 벌인 것으로 전해졌다. 강 회장은 30일 언론 보도로 논란이 확산되자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사회를 위해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매진하겠다”고 공식 사과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고]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

    수많은 국보·보물급 고서문화재를 수집한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1922년 경기 평택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양공업전문대학 건축공학과를 수료하고, 1962년 대원산업㈜을 설립한 기업인이다. 1971~1974년 청명 임창순이 운영하던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고서에 관심을 갖고 수집을 시작했으며 1974년 성암고서박물관을 설립했다. 수집품 가운데는 조선시대 최초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찍은 북사상절(北史詳節, 국보 제149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주본(周本) 권6(제203호)과 권36(제204호) 등 국보 3점과 고려 말 복각본으로 추정되는 현존 삼국사기 인쇄본의 최고본인 삼국사기 권44-50(보물 722호) 등 보물 17점이 포함돼있다. 국민훈장 목련장(1981), 한국출판문화상(1985), 제8회 애서가상(1999), 동숭학술 공로상(2002) 등을 수상했고, 2005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족으로는 아들 동기(태성개발주식회사 대표이사)·영기(성암고서박물관 상임이사)·왕기(조왕기내과 병원장)씨와 장녀 성은, 사위 이규완(우리들병원 명예원장)씨가 있다. 발인은 7일 오전 7시,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02)2258-5940.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유공 김원모·박보균 모란장 서훈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유공 김원모·박보균 모란장 서훈

    문화재청은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환수 1주년을 맞아 20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유공자들에게 서훈과 포상을 수여했다. 서훈자는 2명으로 공사관의 잊힌 사연을 처음 알린 김원모(왼쪽·79) 단국대 명예교수와 공사관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재정립한 박보균(오른쪽·59) 중앙일보 대기자가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김 교수는 1983년 워싱턴 등기소에서 조선공사관 부동산 문건을 발견하고 ‘주미조선공사관을 되찾자’라는 사설을 단국대 교내 신문에 게재했다. 일본이 이를 대한제국으로부터 단돈 5달러를 주고 빼앗아 갔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박 대기자는 공사관 환수와 관련해 여론 형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000년 이후 20여 차례 현장을 방문해 기사와 칼럼을 작성했다. 이 밖에 공사관 환수 주체인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대통령 표창을, 공사관 환수를 위해 협상을 지원한 현대카드주식회사는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미국 현지 협상과 종합조사 등을 수행한 씨비알이코리아주식회사와 강임산(4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활용지원팀장은 문화재청장상을 각각 받았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1889년 ‘대조선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주차’는 ‘주재’, ‘화성돈’은 ‘워싱턴’의 당시 한자 표기)으로 개관해 대사관의 역할을 맡았다. 지난달 워싱턴DC 로건서클 역사지구 내 문화재 탐방로로 지정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은 옛 공사관을 2015년 이후 문화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MC 데뷔 40년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김문이 만난사람] MC 데뷔 40년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

    낙천적이다. 언제나 웃음을 선사한다. 온갖 역경을 이겨 낸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시금치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랬다. 원조 뽀빠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1929년 1월 ‘골무극장’(Thimble Theater)이라는 잡지 만화의 조연으로 처음 나온 캐릭터였다. 이후 뽀빠이는 플라이셔 스튜디오를 통해 파라마운트의 애니메이션 ‘베티 붑의 대나무 섬’(Betty Boop’s Bamboo Isle)에 등장해 인기를 누린다. 뽀빠이 덕분에 1930년대 미국에서는 시금치 소비량이 30%나 증가했을 정도였다. 이에 감격한 텍사스주의 시금치 재배 농부들은 뽀빠이 동상까지 세워 주기도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영원한 뽀빠이 이상용씨. 우리 나이로 올해 70세. 방송 프로그램 ‘우정의 무대’를 진행하며 인기 MC로 각인된 그가 방송을 통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한 지 올해로 꼭 40년이다. 그동안 어수선한 세월을 겪어 왔음에도 여전히 ‘젊은 뽀빠이’로 살고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겠다. 송해씨가 1925년생, 김동건씨가 1939년생, 그다음 세 번째 ‘장수만세’ 하는 방송인은 아마 이씨가 아닐까 싶다. 이씨는 요즘 매주 일요일 아침 ‘늘 푸른 인생’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전국 오지라는 오지는 죄다 돌아다닌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를 만나도 ‘어머니’라는 표현을 정감 어리게 한다. 물론 ‘아버지’라는 표현도 그렇다. 8월의 더위가 시작되던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그의 비밀 아지트(?)에서 만났다. 66㎡(약 20평) 정도 공간의 바닥에는 운동기구가 있고 벽에는 김수환 추기경, 요한 바오로 2세, 법정 스님 등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만나자마자 그는 “20분 뒤 밀양 가야 돼 빨리 (인터뷰) 하자고”라면서 바쁜 일정을 얘기한다. 이어 “지난 7월에도 강연을 100번이나 했어. 나 무척 바쁜 사람이야. 강연할 때 처음부터 두 시간 동안 배꼽 잡게 하지. 야한 얘기도 섞어 가면서. 그러면 다들 아주 웃겨 죽겠대”라고 한다. 얼른 야한 얘기 한 토막 들려 달라고 했다. “가만 있어 보자. 신문에 나올 수 있는 걸로 할까. 응 그래, 하나 들려줄께. 고급 아파트 단지에 가서 바자회를 열었어. 경비실에서 ‘주민 여러분, 안 쓰는 물건이 있으면 갖고 나오세요’라고 했지. 그랬더니 아줌마들이 남편을 데리고 나오는 거야(웃음).” 그의 강연 제목은 항상 ‘인생은 아름다워라’이다. “나는 말이야. 강연 소재가 3만 3000가지야. 왜냐구. 한 달에 책을 70권 읽어. 닥치는 대로. 주로 새벽에 읽어. 외국 갈 때는 책을 20권 갖고 가. 비행기, 버스, 기차만 탔다 하면 책을 읽어, 그러니까 강연 소재가 풍부하지.” ‘에구, 그러니까 영원한 뽀빠인가부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말을 잇는다. “나는 말이야. 키 작지, 얼굴 까맣고 못생겼지, 돈도 없지. 이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독서밖에 없어. 잘생기고 키 큰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잖아. 머리를 비우면 바람 소리가 나. 이 나이에 매일 운동하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지. 하하하, 어때 얘기 되지 않아. 스스로 당당하게 살면 되는 거야.” 거침이 없다. 묻지 않아도 시원시원하게 말을 한다. 인생을 그렇게 ‘건강하게’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건강 얘기가 나오자 일화 하나를 들려준다. 어느 날 실업자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저는 건강한데 왜 돈을 못 벌죠? 어쩌면 되나요?”(실업자) “자네 우측 팔 하나 자르고 1억 주면 될라나?” “아뇨, 미쳤어요.”(실업자) “그럼 80 먹은 노인네 만들어 주고 10억 줄까?” “안 해요, 미쳤어요? 나, 갈래요.”(실업자)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 11억원을 갖고 있는 셈이네.” 이러한 예를 들면서 건강에 관해 강연을 할 때 “여러분 팔다리, 두 눈, 입. 멀쩡하다면 불평 말고 열심히 사세요”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어제 죽은 재벌은 오늘 아침 라면도 못 먹어. 살아 감사야. 튀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고 건강하게 열심히 사는 거야. 인생 뭐 별거 있어.” 그는 ‘늘 푸른 인생’을 60살부터 10년째, 운동은 60년째 꾸준히 해 오면서 ‘푸르고 건강한 인생’을 살고 있다. 데뷔 40년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기분이 40살이야. 이렇게 (보람되게) 살 줄은 몰랐어. 여섯 살 때 생각하면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왜 ‘여섯 살 때’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는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어머니는 나를 뱃속에 넣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백두산까지 걸어갔다가 아버지를 못 만나고 친정인 부여에 오셔서 날 낳으셨지. 병 덩어리 그 자체였고 못 먹어서 거의 시체이다시피 했지. 주위 친척 식구들이 이런 나를 보고 평생 걱정거리에다 어머니는 시집도 못 가는 신세를 만든다고 땅에 묻어 버린 거야. 이를 본 이모님이 묻은 나를 꺼내 솜에 싸서 뒷산으로 도망갔다가 이틀 만에 나를 데리고 내려왔고, 이후 6년을 누워서 살았어.” 결국 6살 때 걸음마를 시작해서 12살까지 온갖 병치레를 하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13살부터 아령을 시작해 18살에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에 뽑혔다. 1966년에는 미스터 고려대와 응원단장을 지낸 뒤 ROTC 기갑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번데기 장수, 북어 장수, 다시마 장수 등 22가지 외판원을 하다가 28살 때 TV에 나와 뽀빠이가 됐고, 그때부터 ‘덤 인생’을 살아왔던 것. 태어날 적 아버지는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친일을 했다는 이유로 눈총을 받아 백두산과 회령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고 이씨는 회고한다. “세상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나 가장 건강한 뽀빠이가 됐으니 더 바랄 게 있나? 세상 어디에나 무엇에나 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신감이지. 자신만만하게 사는 게 제일이야. 덕분에 나는 아직도 바쁘게 일하고 있잖아”라고 대답한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5시 30분까지 독서를 하고 두 시간가량 아령과 역기로 건강을 다진다. 지금도 팔뚝 근육은 젊은 헬스 선수 못지않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술과 커피,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고 식혜나 수정과 등을 주로 마신다. 그가 인생을 살면서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때 여당 측으로부터 대전 지역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씨는 “국회의원은 4년밖에 못 한다. 나는 영원한 뽀빠이가 되겠다”며 거절했다. 얼마 후 KBS ‘추적 60분’ 프로그램에서 ‘뽀빠이 이상용 심장병 어린이 돕기 성금 유용 의혹’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런 여파로 MBC ‘우정의 무대’ 등 모든 방송에서 중도 하차했다. “그때가 1996년 11월인가 그랬어. 화천에서 우정의 무대를 녹화하던 중 프로그램이 없어졌다는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지. 참 어이가 없어서. 심장병 어린이 600명을 도와 동백장 훈장을 받았고 군 위문만 3000번을 해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람이야. 나를 조사하던 강남경찰서 경찰관이 ‘선생님, 너무 깨끗합니다. 오히려 훈장을 더 주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더군. 결국 4개월 뒤 무혐의 처분을 받았어. 그런데 언론에서는 그 사실을 안 다뤄 주는 거야. 오히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같은 분은 ‘하늘이 (이씨를) 크게 쓰려고 그런다’며 위로해 주더군.” 이씨는 당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관광버스 안내원 생활을 2년 동안 하면서 분노를 삼켜야 했다. 관광버스 안내는 주로 미국에 오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 죽고 싶어도 진실한 국민들의 격려로 참고 살아왔더니 지금 이렇게 사랑받고 살고 있다고 술회한다. 그는 정치 얘기가 나오자 “개그맨들은 국민을 즐겁게 하지만 정치인들은 국민을 아프게 한다”면서 “남자의 코털과 국회의원의 공통점은 뽑을 때 잘 뽑아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는 파란만장(1만원권 만장)이다”라는 말로 꼬집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그동안 전국 오지란 곳은 다 다녀 봤다. 오로지 농민을 아끼는 생각밖에 없다. 버스 한 대 사서 ‘고향 어르신 곁으로 뽀빠이가 갑니다’라는 행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버스에 가수, 악단, 의료봉사단 등을 태워서 오지를 찾아가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고 비상약을 전달하는 것이란다. 또 장날 막걸리 파티라도 열어 주면 어르신들이 아주 좋아할 것이라면서 1, 2년 안에 그 뜻을 꼭 펼치겠다고 다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상용은 누구 ‘유쾌한 청백전’으로 방송 데뷔… ‘우정의 무대’ 통해 국민 MC로 1944년 충남 부여에서 미숙아로 태어나 서천에서 자랐다. 여섯 살 때 걸음마를 시작했다. 책가방을 들 힘이 없을 정도로 유약하게 자라면서 12살 때까지 여덟 가지 병을 앓았다. 13살 때부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령을 들기 시작했다. 18살 때 미스터 대전고와 미스터 충남에 뽑혔다. 고려대 농대에 진학해 미스터 고려대에 선발됐고 응원단장을 지냈다. ROTC 기갑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에는 취직을 하지 못해 번데기와 북어 장수 등 22가지 물건을 파는 외판원 생활을 했다. 1973년 MBC의 ‘유쾌한 청백전’으로 방송에 데뷔해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1989년부터 장교로 군 복무한 점이 인정돼 MBC ‘우정의 무대’의 MC로 발탁되면서 군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심장병 어린이 돕기 등 많은 선행과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주요 수상으로는 국민훈장 동백장(1987년), 대한민국 5·5문화상(1995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 선행연예인(1998년), 제5회 대한민국 환경문화대상 MC상(2007년) 등이 있다.
  • [부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조선휘 명예교수

    [부고]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조선휘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조선휘 서울대 명예교수가 13일 별세했다. 85세. 고인은 서울대 공과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 공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대한기계학회 회장, 오산전문대학 학장 등을 지냈다. 1990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2003년 5·16 민족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신제 기계제도’, ‘기구학’, ‘기계공학개론’ 등이 있다. 유족은 부인 한순애씨와 딸 성혜·성은·성숙씨, 사위 홍태기(사업)·이상헌(미국거주 공무원)·신유훈(회사원)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오전 8시 30분. (02)3010-2291.
  •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첫 여성 전투비행사 김경오씨,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전투비행사가 국민훈장을 받는다. 2일 제18회 여성주간 기념식에서 김경오(84) 극동지역 여성항공연맹 총재가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건국 이후 여성으로서는 처음 조종간을 잡은 김 총재는 한국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공훈을 세웠다. 1956년 전역 후에도 국제여류비행사협회, 국제항공연맹을 통한 민간외교와 국위 선양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깨는 데 기여했다. 특히 정부에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여성 생도 입교 허용을 건의해 실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대한민국항공회 명예총재, 한국여성항공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향토기업 특선] “벨벳 기술 IT분야에도 접목”

    [향토기업 특선] “벨벳 기술 IT분야에도 접목”

    “수출 확대를 위해 주력 상품을 원단에서 고부가가치 완제품 위주로 과감히 전환해 나갈 작정입니다.” ㈜영도벨벳 류병선(73) 회장(대표이사)은 2일 “원단 단일 품목으론 수출 5000만 달러 달성에 한계가 있다”면서 “고품질 완제품 생산으로 파고를 넘겠다”고 각오를 보였다. 영도는 2010년 30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이듬해 451억원 매출을 올렸으나 지난해엔 수출 둔화 등으로 크게 감소했다. 중국 기업이 덤핑 수출 등을 하며 시장을 잠식하고, 국내외 아웃도어 열풍이 확산되고 있어서다. 류 회장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벨벳 원단을 활용한 레인코트와 우산, 가방, 스카프, 벽지, 쇼파 등 다양한 일상용품을 예술화한 완제품 생산을 시도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한 해외시장 공략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완제품의 내수시장 마케팅도 활발히 전개할 계획이다. 우선 지난해부터 대구 중구에 벨벳에 관한 모든 제품을 테마별로 전시한 ‘영도다움’ 운영에 들어갔다. 류 회장은 “영도다움은 세계 최초의 벨벳 전문 복합문화공간이다”면서 “방문객들은 벨벳의 다양한 쓰임새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벨벳은 어느 상품에나 접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벨벳 분야의 독보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LCD 러빙포 등 IT 분야에도 공격적이면서 유연하게 대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류 회장은 “영도가 만든 완제품이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수출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디자인 개발이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으로서 어려움이 많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난해 경북도와 대구시에 세계 유명 디자이너를 초청해 지역 기업이 생산한 원단으로 패션 제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갖는 방안을 건의했으나 지금까지 성사되지 않고 있다”면서 자치단체들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여성 전문경영인인 류 회장은 남편인 창업주 이원화 회장이 2004년 지병으로 숨지자 회사 경영 일선에 나서 세계에서 벨벳 생산 및 수출 1위 기업으로 당당히 키워 냈다. 구미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 대구시체육회 부회장, 한국·캄보디아교류협회 회장, 한국·폴란드교류협회 부회장, 구미시오페라단 후원회장, 법무부 보호공단 대구지부 구미출장소 후원회장 등을 지내는 등 사회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여성기업인 대통령상과 대구시민상, 국민훈장 석류장, 경북 중소기업대상 등을 받았다. 구미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쌀을 떡·술·관광에 활용하는 것이 창조농업… 전통주 감세해야”

    “쌀을 떡·술·관광에 활용하는 것이 창조농업… 전통주 감세해야”

    “프랑스 와인, 독일 맥주는 세금이 하나도 안 붙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문배주, 안동소주는 세금이 115%까지 됩니다. 전통주 관련 규제 개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세금입니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쌀로 떡과 술을 만들고 이것을 관광에 활용하는 것이 바로 6차 산업, 창조경제로서의 농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과거와 달리 주세가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기 때문에 전통주에 대한 세금 감면 등을 과감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장관과의 일문일답. →전통주 연구에 공을 들여 왔는데 향후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정책 방향은. -우리나라에는 지역마다 특색 있고 좋은 전통주가 많다. 하지만 규제가 많고 소비자들이 전통주를 접할 통로가 부족해 산업 자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김포농협에서 인삼 맥주를 만들어 팔고 있지만 생산한 농협 밖에서는 팔 수가 없다. 전북 고창에 가면 복분자 맥주를 마시고, 경북 문경에 가면 오미자 맥주를 마신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현행 법령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 협업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 문화·관광 연계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전통주 용기 디자인 개선은 산업통상자원부와 함께 해 나가겠다. →이달 말에 유통구조 개편안을 발표하는데. -유통구조 개편은 가장 큰 현안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단기 가격 등락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도록 가격안정대를 설정해 운용할 계획이다. 지난 정부에서는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물가 안정 차원에서 정부가 개입했는데 이것은 맞지 않는다. 농산물 특성상 계절에 따라 비싼 품목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점이 고려되지 않았다. 생산 원가, 유통 비용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시로 제공해야 소비자도 믿을 수 있다고 본다. →농업에도 ‘창조경제’ 패러다임 접목이 필요할 텐데. -농업을 진정한 ‘6차 산업’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1~3차 산업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곱하는 것이다. 산림청에서 삼림욕 등 ‘힐링’(치유) 상품을 개발하고 농촌진흥청에서 약용작물의 효능을 연구해 연계하고,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농촌 봉사활동을 결합하는 방식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도 많이 시도했던 개념 아닌가. -융복합 연대 협력이 다른 점이다. 새로운 정책을 만들기보다 관련 부처, 지자체 등과 연계 협력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기존에는 각각이 따로 만들어 분산적이었지만 지금은 연구 개발, 경영, 기술, 지도, 홍보 이런 것들을 모아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농업 생산자, 각 법인을 모아 시너지효과를 내고 성공 사례도 만들어내고 일자리도 창출한다는 것이 콘셉트다. →농업에도 복지를 접목시킬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전에는 규모화된 농가 중심 농정이었다. 이제는 농업, 농촌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살리는 것이 농정의 핵심이다. 농촌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업농뿐 아니라 100만명 정도 되는 영세 고령농을 위해서는 기초생활보장 등 사회안전망을 좀 더 촘촘히 할 것이다. 또 겸업농은 마을 단위로 묶어 규모화하고 공동 경영하면서 농업 외에 다른 일자리도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6차 산업이 된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도시농업이 붐인데 지원책은 없나. -2011년에 도시농업육성법이 제정됐지만 아직까지 국내 도시농업에 대한 전반적인 인프라가 충분하지 못하다. 2011~2012년 도시농업 인구는 37만 3000명에서 76만 9000명으로 106.1% 늘었지만 텃밭은 15.1%(485→558㏊) 늘어나는 데 그쳤다. 도시공원 내에 텃밭 조성이 필요한 이유다. 연말까지 도시공원 내 경작, 농업시설 설치가 가능하도록 법령이 개정될 예정이다. →농협 신용·경제가 분리된 지 1년이 됐는데 문제점도 나타나는 것 같다. -농협 구조 개편은 판매농협 실현을 위해 농협이 농민인 조합원을 위한 조직으로 거듭나려는 것이다. 농협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틀에서 신·경 분리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효율성, 수익성도 이 부분과 같이 봐야 한다. 농협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농업 문제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고민했는지 되물어 봐야 한다고 본다. →소고기 등급제는 바꾸나. -현재 지방이 적당히 포함된 소고기에 높은 등급을 주고 있다. 하지만 사료값이 올라 축산농가의 부담이 가중되고 지방 과다 섭취가 국민 건강에도 안 좋다는 이유로 이런 등급제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기를 통해 섭취하는 지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적기 때문에 괜찮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아직 없다. 그래서 이달 중으로 소비자단체들과 함께 연구용역을 실시한다. 7~8개월 정도 걸리는데 결과를 일단 보고 등급제를 다시 논의할 것이다. 대담 김태균 경제부장 정리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이동필 장관은… ▲1955년 8월 경북 의성 출생 ▲1978년 영남대 축산경영학과 졸업 ▲1991년 미국 미주리대 농업경제학 박사 ▲2004~2012년 농림부·농림수산식품부 규제심사위원장 ▲2011~2013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2대 원장 ▲1999년 국민포장 ▲2011년 국민훈장 동백장
  • “남덕우 前총리, 5000년 가난 벗어나는 데 큰 발자취 남겨”

    “남덕우 前총리, 5000년 가난 벗어나는 데 큰 발자취 남겨”

    박근혜 대통령은 20일 고(故)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박 대통령은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직후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을 찾았다고 김행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박 대통령은 빈소에서 조문한 뒤 고인의 영정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박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신 총리이고, 또 5000년 가난을 벗었다고 그러는데 남기신 발자취가 너무 크다”고 남 전 총리의 업적을 치하한 뒤 “또 한 번 ‘제2의 한강의 기적’을 곧 이루겠다 마음먹고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그래야 (고인이) 하늘나라에서도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위로했다. 박 대통령은 조문록에 “조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총리님의 영전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적었다. 김 대변인은 이날 조문과 관련, “박 대통령은 유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비공개로 다녀왔으며 총 15분가량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허태열 비서실장과 박흥렬 경호실장, 이정현 정무·조원동 경제·주철기 외교안보수석, 김 대변인이 조문에 동행했다. 한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오후에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김경한 전 법무부 장관, 하금열 전 대통령실장 등과 함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강창희 국회의장과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윤상직 산업통산자원부 장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인 허창수 GS 회장 등 정·관·재계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기렸다. 고인은 22일 영결식 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오일만 기자 oilman@seoul.co.kr
  • 이 땅의 딸들에 인권 남기고 떠난 ‘대모’

    이 땅의 딸들에 인권 남기고 떠난 ‘대모’

    ‘여성운동계의 대모’인 박영숙(81) 전 평화민주당 총재 권한대행이 암투병 끝에 17일 오전 4시 50분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별세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박 전 대행은 해방의 혼란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47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광주에 정착했다. 전남여고와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공적인 어머니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YWCA연합회 간사를 시작으로 YWCA 총무,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등을 거치며 국내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여성 인권 유린사건이었던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 여성단체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는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9년에는 우리나라 시민사회의 첫 공익재단인 ‘한국여성재단’을 만들어 이후 아름다운재단과 환경재단 등 국내 공익재단이 줄지어 등장하는 데 기틀을 마련했다. 재야에 있던 박 전 대행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만든 평민당의 전국구 1번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정치권의 격랑 속에서 정치력을 발휘하며 평민당 부총재와 총재 권한대행, 민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늘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따끔한 충언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평민당 부총재 시절 DJ에게 쓴소리하는 역할을 자주하자, DJ가 “박 부총재는 어떻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소리만 하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한동안 정치권과 거리를 뒀다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3월까지 안철수재단(현 동그라미 재단) 이사장을 맡아 지난 대선 당시 안철수 예비후보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일찍이 환경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이사장을 맡았다. 또 여성재단 이사장 시절에는 ‘100인 기부릴레이’를 주도하는 등 기부문화의 전도사로 활동했다. 빈곤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아시아 위민 브릿지 두런두런’을 창립했으며 장학재단 ‘살림이’ 이사장을 맡는 등 사회공헌에도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비롯해 국민훈장 모란장,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올해의 환경인상’, ‘올해의 여성상’ 등을 수상했다. 1996년 별세한 민중신학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안병무 전 한국신학대 교수가 배우자였다. 여러 자리를 거치며 역할을 다했던 박 전 대행은 평소 주변에 “어떤 일이든 첫사랑을 하듯 빠져들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행의 빈소는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02-2227-7550)에 마련됐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 장지는 마석 모란공원. 유족으로 외아들인 안재권(45·번역가)씨가 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부고] 진폐증 석탄광부 돌본, 예방의학 권위자 조규상 교수

    예방의학 분야의 권위자인 조규상 가톨릭대 명예교수가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7세. 서울대 의과대학을 나온 고인은 1958년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를 시작으로 가톨릭중앙의료원 의무원장, 가톨릭대 의과대학장을 거쳤다. 진폐증으로 고통받는 석탄광부들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재해병원을 건립, 산업의학의 기초를 세웠다. 대한의학협회 예방의학회장, 국제산업의학협회 한국대표, 세계보건기구(WHO) 산업보건 자문위원, 아세아 산업보건협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국제 키비탄 한국지부 총재, 가톨릭 맹인선교회 후원회장 등으로 활동해 로마교황청 그레고리오 은성 대훈장을 받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하윤자 여사와 아들 용현(여의도성모병원 비뇨기과 교수), 딸 영자·미자·혜자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영결식은 16일 오전 9시 가톨릭대 의생명산업연구원에서 가톨릭대 의과대학장으로 열린다. (02)2258-5940.
  • [부고] 의료계 ‘거목’ 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부고] 의료계 ‘거목’ 박영하 을지재단 설립자

    우리나라 의료 인재양성에 헌신한 범석(凡石) 박영하 을지재단 명예회장이 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87세. 평양 제3중학을 거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고인은 1956년 서울 을지로에 ‘박영하 산부인과의원’을 개원하면서 을지의료재단의 초석을 놓았다. 1967년 ‘재단법인 을지병원 유지재단’을 세워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병원의 공익화를 이끌었다. 1994년엔 일본에서 투병 중이던 프로레슬러 김일 선생을 모셔 2006년 임종 때까지 무료로 진료하기도 했다. 또 1997년 사재 1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학술연구비를 지원하고 있다. 을지의료원은 4개 병원(을지병원·을지대학병원·금산을지병원·강남을지병원)과 2곳의 대학캠퍼스를 가진 교육·의료 재단으로 성장했다. 1999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8년 무궁화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전증희 여사와 아들 준영(을지대 총장), 딸 준숙(범석학술장학재단 이사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 분향소는 대전 을지대병원에 마련됐으며, 8일 오후부터 조문을 받는다. 발인은 10일 오전 8시다. 장의집행위 (02)970-8400.
  • 아이를 수개월 독방에 가두고, 각목으로 때리고… ‘제천판 도가니’

    아이를 수개월 독방에 가두고, 각목으로 때리고… ‘제천판 도가니’

    설립 50년을 맞은 충북 제천의 아동양육시설에서 여러 해 동안 감금과 폭행 등 심각한 가혹 행위가 자행된 사실이 드러나 국가인권위원회가 원장과 교사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시설을 설립하고 지난해 12월까지 원장을 맡았던 미국인 여성 선교사는 아동 보호에 대한 공로가 인정돼 국민훈장과 지방자치단체의 시민상 등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제천판 도가니’라고 할 만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지도·감독의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은 손을 놓고 있었다. 인권위는 2일 시설 아동들을 감금, 학대한 혐의로 제천 J아동양육시설 박모(51·여) 원장 등 2명을 검찰에 고발하고 제천 시장과 충북 도지사에게 시설장 교체와 지도점검 강화 등을 권고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이 시설에는 총 79명의 보호아동이 있으며 설립 이후 1232명의 아동이 시설을 거쳐 갔다. 이 시설에서는 2000년 이후 지속적인 가혹 행위가 벌어졌다. 전임 사무국장으로 지난해 시설장이 된 박 원장은 아동들을 각목이나 몽둥이로 직접 때리거나 생활교사 등에게 폭행을 지시했다. 아동들의 도둑질이나 욕설을 막겠다며 억지로 생마늘이나 청양고추를 먹이기도 했다. 부원장의 며느리인 이모(42) 교사는 몽둥이로 아동들의 머리를 때리거나 ‘오줌을 싼다’는 이유로 베란다 난간에 아동들을 세워 뒀다. 다른 교사 6명도 일부러 밥을 굶기거나 대걸레 등으로 폭행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겨울에 아동들을 찬물로 씻게 하고 베개 등 생필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이른바 ‘타임아웃방’이라는 독방을 만들어 아동들을 가둬 둔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건물 3층 원장실 옆에 타임아웃방을 만들어 놓고 통제를 따르지 않는 아동들을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몇 달씩 감금했다. 피해 아동들은 “3개월 동안 벽만 바라보고 지내 자살까지 생각했다”거나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해 식사 시간까지 소변을 참았다”고 진술했다. 갇혀 지낸 아동들은 이 방 책상 서랍에 독방 수용에 대한 불만이나 욕설을 빼곡히 적어 놓은 것으로 조사됐으나 박 원장은 “훈육에 좋은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인권위는 전임 원장인 미국인 H(77·여)도 이런 인권 유린 행위를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수년간 가혹 행위가 이어졌지만 감독 기관인 제천시는 일부 가혹 행위를 확인하고도 별다른 재발 방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또 시설 점검을 맡았던 충북 지역 상급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아동학대 상담팀장은 해당 시설에서 2006년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독방 수용과 마늘을 먹이는 행위 등에 대해 오히려 “인권 침해가 아니다”라고 변호했다. 인권위 관계자는 “반복되는 아동보호시설의 인권 침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와 아동위원 등이 참여해 지자체가 실질적인 지도점검을 벌이도록 해야 한다”면서 “회계처리 감독을 강화하고 아동 치유 프로그램 등을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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