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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소보 분쟁 재연 조짐

    【프리스티나 AP AFP 연합】 코소보 위기 해결에 외국의 중재가 필요한지를 묻는 세르비아공화국의 국민투표 실시를 하루 앞둔 22일 세르비아 경찰과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코소보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사건과 때를 같이해 세르비아는 코소보 지역에 군경을 대폭 증강배치하고 있다.
  • 北아일랜드 新敎 최대 얼스터통일당/평화협정안 표결 승인

    【벨파스트 AFP AP 연합】 북아일랜드 최대정당인 얼스터통일당(UUP)은 18일 지난주 합의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지지동의안을 찬성 540,반대 210표로 승인했다. 신교도 최대 정파인 UUP가 평화협정안을 승인함에 따라 일부 신교도 정파의 협정 반대운동에도 영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북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 정부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을 우려하는 민주통일당(DUP),오렌지 오더당 등은 평화협정안에 대한 국민투표 부결운동을 벌이고 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안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다음달 22일 실시되는 국민투표에서 과반수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신교계 반대운동 확산

    【런던·벨파스트 AP DPA 연합】 지난 29년간 계속돼온 북아일랜드의 신·구교간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에 대한 신교계 정파의 반대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신교계 정당인 민주통일당(DUP)은 15일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에 대한 국민투표 부결 운동을 시작했다. 이안 페이슬리 DUP당수는 신교도 연합주의자들은 평화협정을 거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북아일랜드 신교도들에게 평화협정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신교계 정당인 오렌지 오더당은 이날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지난 10일 각 정파들이 합의한 평화협정안에 대해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타결 임박

    ◎남북의윈위 신설·국민투표 실시 등 최종안 마련 【벨파스트 AFP AP 연합】 북아일랜드 분쟁 관련 각 정파가 10일 최종협정안 검토작업에 들어감에 따라 거의 30년간에 걸친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역사적인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 신교도 준군사단체중 하나를 대표하는 친영(親英) 진보연합당의 데이비드어빈 당수는 “우리는 합의쪽으로 다가가고 있다”면서 “타결가능성은 90%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인 중대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베를린장벽 붕괴와 맞먹는 엄청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협상 중재자인 조지 미첼 전 미국상원의원은 영국과 아일랜드 총리의 끈질긴 중재노력에 따라 당초 협상시한인 9일 자정(한국시간 10일 상오 8시)을 넘겨가며 각 정파들과 막판 절충을 벌인 끝에 최종협상안을 마련했다. 협상안은 북아일랜드의 장래문제를 놓고 오는 5월22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에서 동시에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남북의원위원회 등을 신설,상호협력하는 것을 골자로하고 있다. 이 협상안은 최종검토를 위해 모든 협상대표들에게 제시되며 각 협상대표들은 최후 수정을 제의할 수 있다.
  • 코소보 문제 국민투표/세르비아 23일 실시

    【베를린 연합】 신(新)유고연방의 세르비아공화국 의회는 7일 서방의 비난과 추가제재 위협에도 불구하고 코소보 문제에 관한 국민투표를 오는 23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의회는 이날 ‘외국의 코소보 문제 개입 허용’에 관해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표결을 실시,199명의 의원중 193명의 찬성으로 투표 실시를 가결했다. 한편 코소보 알바니아계는 이날 세르비아 정부와의 10차 협상을 거부한 뒤 “외국의 협상중재가 허용될 때에만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 호 입헌군주제 포기할까

    ◎오늘 헌법회의 개막… 공화정 전환 여부 논의/여론조사 결과 국민 절반 이상 “공화정 지지” 【캔버라 AFP 연합】 호주는 2일 영국여왕을 국가원수로 하는 입헌군주제를 유지할 것인가, 호주인 국가수반으로 하는 공화정으로 전환할 것인가를 논의할 역사적 헌법회의를 개막한다. 정부가 임명한 76명과 지난해 12월 우편선거를 통해 선출된 76명 등 152명의 대의원으로 구성된 헌법회의는 영국 여왕의 동의 아래 10일간에 걸친 논의를 통해 ▲공화정으로의 전환 여부 ▲공화정의 형태 ▲공화정 전환 시기와 방법,세가지 문제에 대해 의견을 수렴,권고안을 채택할 예정이다. 다양한 여론조사 결과 호주인들의 절반 이상이 공화정을 지지하며 군주제 지지자는 30∼40%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다른 제도가 현행 군주제보다 낫지는 않을 것이라며 군주제를 지지해 왔으나 최근 국민들이 공화정을 원한다면 반대하지 않겠다며 완화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워드 총리 정부는 이번 헌법회의의 권고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다.공화정 열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지난 91년 노동당 당수가 된 폴 키팅 전 총리이나 집권 자유당 내에서도 존 페이 재무장관,아만다 밴스턴 법무장관,로버트 힐 상원 원내총무 등이 공화정 지지를 표명하는 등 찬성자가 늘어가고 있으며 지방정부들도 퀸즐랜드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화정을 찬성하고 있다.
  • 얼룩진 헌정(대한민국 50년:4)

    ◎52년 첫 개헌… 87년까지 9차례 뜯어 고쳐/이승만 이어 박정희도 종신집권 노려 헌법손질/69년 3선 개헌­72년 유신 선포… 대통령 간선 고착/전두환 쿠데타 집권… 87년 6월 항쟁 직선제 확립 이승만은 1954년 2차개헌으로 종신집권에의 길을 텄다.그러나 이는 몰락을 재촉했다.1960년 4·19혁명은 마침내 이정권의 무한권력 추구를 좌절시켰고 6월15일 3차 개헌을 가져왔다.큰 골격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이다.그리고 헌법재판소를 설치하고 법률유보조항을 손질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폐해를 정리하는데 촛점을 맞췄다.그러나 내각제 도입으로 3·5부정선거범 등에 대한 처벌근거인 정·부통령선거법이 소멸되자 혁명 주체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다.학생들의 의사당 난입 등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집권민주당은 11월29일 이승만 정권하의 반민주행위 처벌을 위한 소급입법 근거규정을 헌법 부칙에 설치하는 4차개헌을 단행했다. 헌법의 수난은 갈수록 심화됐다.1961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군사쿠데타는 헌정파괴라는 극단적사태를 몰고왔다.국회는 즉각 해산됐다.이듬해 12월16일엔 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에 의한 5차 개헌이 단행했다.이 개헌안은 인권규정을 보강하고 미국식 사법심사제도를 도입하는 등 외견상으로는 3권분립을 강화하는 것이었다.그러나 핵심 골자는 부통령제 폐지와 정당설립 규제 등으로 대통령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6차 3선개헌 날치기 처리 박정희는 5차개헌으로 부활된 새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중임제한 규정에 부닥치자 전에 이승만이 걸었던 전철을 답습했다.영구집권의 획책한 것이다.중임제한 폐지 개헌안이 야당의 거센 반대에 부디ㅊ치자 1969년 10월21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야당의원들을 따돌린채 여당과 일부 무소속 의원들만으로 개헌안을 날치기 처리했다.3선개헌으로 불리는 6차개헌이 그것이다. 개헌뒤 실시된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는 대통령 3선에 성공했다.그러나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박정희 634만표,김대중 539만표로 나타난 개표결과는 영구집권에 대한 위기감을 증폭시켰다.그래서 영구집권을 확실하게 제도화하는 장치를 마련했다.이것이 바로 헌정 수난의 절정판인 이른바 유신헌법이다. 유신은 1972년 7월17일에 선포됐다.이날은 아침나절 약간 흐렸으나 낮부터는 전국적으로 맑았다.시민들의 생활은 평온했으며 각 관청들만 막바지에이른 국정감사로 다소 부산했다.이날 상오까지만 해도 국체변혁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그러나 물밑에서는 이를 위한 시나리오가 극비리에 착착 진행됐다.상오9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우시로쿠(후궁호랑) 주한일본대사와 만나 약 20분간 요담한데 이어 10시 15분부터는 필립 하비브 미국대사와 40분간 요담을 가졌다. 유신을 통보한 자리였지만 누구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그러나 하오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이상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서울 소공세무서에 대한 국정감사를 행하던 재무위에서는 “야당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국회가 해산될지 모른다”는 협박투의 발언이 여당의원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날 상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에서는 박정희 주재로 마지막 리허설이 진행되고 있었다.박정희는 둘러앉은 보좌관과 비서관들을 응시하다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모두 한번씩 읽어보고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시오” ‘하오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헌법 정지,국회 해산,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개헌,….’달리 의견이 있을수 없었다.너무도 엄청난 일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이어 외무장관 김용식은 하오5시 주한외교사절 23명을 불러 유신단행을 설명했다. 계엄선포 H아워를 1시간 앞둔 하오6시 청와대에서는 영문도 모른채 소집돼온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령을 의결했고 같은 시간 시내 전역의 주요 공공건물에는 계엄군이 포진하기 시작했다.중대뉴스가 예고된 하오7시,라디오에서는 헌법의 효력을 2개월간 중지시키겠다는 박정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유신이 일단 선포되자 개헌작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작업은 신직수 법무·이경호 보사·서일교 총무처장관과 유민상 법제처장,헌법학자 한태연·갈봉근 교수로 구성된 법무부 헌법심의회에서 맡았다.하지만 실상은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으로 구성된 일명 ‘기획소위’가 건네준 골자를조문화하는 것에 불과했다.이때 심의회의 역할이 어땠는지는 “이 헌법의 기본골격은 이미 고위층에서 만든 것이므로 골격 자체에는 일체 손을댈 수 없습니다”고 한 신직수의 발언이 입증하고 있다. 개헌안은 유신선포 25일만인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간선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국회의원 3분의1과 대법원장 등 전법관 임명권 보유 등 사실상 대통령 1인의 무한권력 창출이었다. 박정희에게 유신헌법은 종신집권을 담보해주는 안전판이었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종말로 향하는 단초이기도 했다.국내 상황은 팽팽한 긴장으로 치달았고 최대우방 미국과도 갈등이 깊어갔다. ○80년 8차개헌 간선제 유지 서울신문이 최근 입수한 미국 국무부의 ‘한미관계의 조사’라는 보고서는 당시 한미관계가 급속하게 악화돼 갔음을 보여준다.유신 직후인 73년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를 토대로 국무부가 작성한 이 문건에서 이미 미국이 경제원조 중단과 미군철수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압박을 가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결국 안팎으로 시련을 겪던 유신은 끝내는 1979년 박정희의 피살과 함께 또한번의 헌정중단 및 개헌을 초래했다.공백상태의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은 민심을 얻기 위해 1980년 10월27일 복지규정 보강 등으로 위장한 8차 개헌을 실시하지만 권력획득의 핵심인 대통령 간접선거는 그대로 유지했다.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 통치로 일관하다 직선제 개헌 요구로 상징되는 전국민적 저항에 굴복하고 말았다.그래서 87년 6월29일 개헌을 수용하기에 이른다.이 9차 개헌의 결과물이 현행 헌법이다. 헌정 50년을 맞는 올해는 그 5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야가 정권을 인수인계하는 뜻깊은 해다.하지만 헌법은 또다시 개정의 고비를 맞고 있다.내각제 공약을 내건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연합정권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미,73년부터 “유신철회” 압박/본사특별취재반,미 하원보고서 입수 확인/“주한미국 철수” 일방선언­‘코리아게이트’ 돌출 유신이 절정을 이뤘던 1970년대 중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급기야 1977년 3월9일 주한 미지상군의 철수를 일방선언했고 6월에는 미중앙정보국(CIA)의 청와대 도청사건이 불거졌다.한국내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한국정부의 항의가 거세자 미국은 박동선 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코리아게이트를 돌출시켜 한국정부를 더욱 옥죄었다. 모두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철회를 겨냥한 미국정부의 압박전술이었다.그런데 미국은 이처럼 유신에 대해 명백하게 거부태도를 보이기 훨씬 전부터 유신의 몰락을 예견한 교포들의 지적들을 주목했으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도 강구했었음이 최근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문건에서 확인됐다. 이 문건은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1978년 작성한 ‘한미관계의 조사’(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라는 보고서에 포함된 것으로 1973년 9월 미연방수사국(FBI)의 정보보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문건은 김대중 등 미국내에서 반한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인과 교포들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문건은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으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점차고립되는 상황이고 대미관계에서도 원조와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문건은 이어 “한국인들은 만약 미국이 일본과의 공조아래 경제원조 및 권사지원 철회로 압력을 가할 경우 박정희 정권은 급격히 붕괴할 것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이 문건이 작성된 직후부터 미국내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의 활동에 대한 FBI의 사찰이 강화됐다.이와 더불어 한미 정부간에 인권침해와 내정간섭을 놓고 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됐던 사실에 비추어 이 보고서는 미국정부의 정책결정에 큰 작용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문화부 차장 최병열 문화부 차장급 김종면 문화부 기자 박정현 문화부 기자 서정아 문화부 기자 강선임 DB부 기자
  • 국호·상징물 제정(대한민국 50년:2)

    ◎48년 7월1일 제헌국회서 ‘대한민국’ 확정/제헌국회 헌법기조위원회/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논의/이승만 의장 ‘대한민국’ 상요 대세로 1948년 7월1일 제21차 회의가 열린 제헌국회 본회의장.의원들은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놓고 2차 독회에 들어갔다.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 신익희 부의장이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항목부터 축조심의에 들어갔다.이승만 의장(독촉)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국호개정이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국호는 차차 국정이 정돈되어 가지고 거게에 민간의 의사를 들어가지고… 그러니까 국호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문제 일으키시지를 말기를 또 부탁하는 것입니다”(국회 속기록) 이에 대해 최운교 의원(무소속)이 헌법기초위에서 심의한 국호가 몇가지며 그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반대에 부딪쳤다.이어 1조를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동의를 재청·삼청까지 얻어냈다.이때 조봉암 의원(무소속)이 제동을 걸었다.조의원은 “우리민족이 다 그렇게 만족치 않을 것이니 다음에 제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다.그는 1차 독회에서도 “대한민국이란 말은 역사적 합리성으로 보거나 체제로 보거나 형식적 법통으로 보거나 천만부당하다”며 반대했었다. ○찬성 163·반대 2로 통과 이승만 의장이 다시 발언에 나서 고칠 필요가 있으면 다음에 하고,일단 원안대로 통과시키자고 무마했다.의회는 거수표결에 들어가 제1조를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 나갈 신생국의 이름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확정됐다.1948년 8월15일 정부가 출범하기에 앞서 한달 보름전 일이다. 새나라 출발에는 국호 제정이 선결과제지만 이승만의 모두 발언에서 알 수 있듯 나라이름을 짓는 데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국호가 갖는 상징성이 지대한데다,당시 좌우가 갈리고 정당·사회단체가 난립한 상태에서 각기 주장하는 바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미군정 때 장차 수립할 우리 민족의 국가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았다.좌우대결이 치열해지면서는 남한지역과 우파는 대한민국을,북한지역과 좌파는 조선을 지지하는 ‘남대한·북조선,우대한·좌조선’으로 굳어져 갔다. ‘대한’이라는 국호는 대한제국 때 처음 쓰였다.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느라 황제를 칭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었다.1919년 상해에 자리잡은 임시정부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따라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당연한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를 부인하는 세력들이 해방후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예컨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1945년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대한’이라는 국호를 부정했다.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 각 정치세력에게서 임시정부 수립대강에 관한 답신서를 받았다.이에 따르면 한민당이 결성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신익희 주축의 입법의원은 ‘대한민국’을,좌우합작위원회가 주도한 시국대책협의회는 ‘고려인민공화국’을 주장했다.민주주의민족전선은 건준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에 집착했고,건준을 부정하는 북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호를 규정했다.각 정치집단은 국호제정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다툼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구성된 뒤 헌법기초 위에서 논의한 국호로는 ‘대한민국’‘고려공화국’‘한’‘조선’ 등이 있었다.이때도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해 국호를 제정하자고 주장했다.그런데 5월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은 제헌의원들간에 대세로 자리잡았다. 국호에 관한 찬반 논의는,이승만 행정부가 1950년 1월16일 국무원 고시 제7호인 ‘국호 및 일부 지방명과 지도색 사용에 관한 건’을 법률로 제정하자 자연 소멸됐다.“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또는 한국)으로 하고,북한 괴뢰정권과의 확연한 구별을 위해 조선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45년 12월 첫 태극기 게양 국호외에 국가의 상징인 국기·국가도 제정과정에서 많은 논의를 거쳤다.태극기는 대한제국이 정식 인정해 상해임정이 이어받은 국기였다.태극기는 1945년 12월24일 처음으로 미군정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다.당시 조선성냥회사 사장인 신창균이 하지 장군의 보좌관에게 부탁해 성사시킨 것이다.미군정은 이듬해 1월14일 군정청 광장에서 태극기 게양식을 가짐으로써 국기임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무렵 만담가 신불출은 공연에서 태극기가 국기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비아냥거렸다가 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이처럼 좌파세력을 포함한 일부에서 거부하긴 했지만 민심은 태극기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다만 그 도안이 다양한 데 문제가 있었다.독립문에 새긴 것,구왕실 소장품,미군정 문교부에서 공포한 도안,우리국기보양회가 제안한 모양 등 여러가지 태극기가 뒤섞여 사용됐던 것이다.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15일 문교부고시 제2호로 공포됐다. 그리고 애국가 가사는 1910년쯤 거의 완성됐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인 현재 애국가는 1946년 5월 ‘임시 중등음악 교본’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그러나 제헌국회에서는 “국가는 적당한 시기에 남과 북 전체 민족의 의사로서 제정하자”며 논의를 유보했다.따라서 애국가는 사회관행상 국가로서 불릴뿐 아직도 법적으로는 공인받지 못한 상태이다. ◎“성조기와 함께 미군정청에 태극기 게양하자”/45년 하지 장군보좌관에 요구 성사 시킨 신창균옹 미군이 서울에 진주한지 석달여만인 1945년 12월24일 미군정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가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과연 독립을 이룰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던 그때 이는 국민에게 크나큰 위안을 준 ‘사건’이었다. 그같은 선물을 국민에게 전한 신창균옹(90)은 1940년부터 마카오에서 임시정부의 연락책으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였다.45년 4월 귀국한 그는 미군이 진주하자 9월 중순 하지 장군의 보좌관인 윌리엄스 중령을 찾아갔다.중령의 아버지는 선교사로 입국해 공주 영명고교 교장을 지냈고,그 때문에 중령은 한국땅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다.신옹은 윌리엄스 교장에게 세례를 받은 인연으로 동갑내기인 중령과 친하게 지냈다. 중령을 만난 신옹은 “미군정청에 성조기가 휘날리는데 이곳은 조선땅 아닌가.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도 함께 게양하자”고 요구했다.중령은 그의 말에 찬성하면서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했다. 12월 중순 신옹이 군정청의 연락을 받고 가보니 중령은 이미 귀국했고 후임자가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태극기를 게양하기로 결정했으니 태극기를 빨리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한국사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태극기는 미군정 당국으로부터 당당하게 국기로서 대우받게 됐다. 신옹은 이후 조선성냥공장의 사장으로 새나라 경제부흥에 힘쓰는 한편 임정 요인들이 귀국해 만든 한국독립당에서 연락부장 등을 맡으며 활약했다.1948년 김구가 남북협상차 평양을 방문할 때 수행하기도 했다.이후 일관되게 진보정치운동을 벌였으며 현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남측본부 의장을 맡고 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문화부 차장) 최병렬(문화부 차장급) 김종면(문화부 기자) 박정현(정치부 기자) 서정아(정치부 기자) 강선임(DB부 기자)
  • 정부수립부터 오늘까지/연표로 본 대한민국 50년

    ◎36년만의 주권 회복… 6·25 상흔 딛고 산업화 대장정/시련속에 꽃피운 민주화운동… ‘문민시대’ 열며 개혁의 길로 ▷48년 정부수립 과정◁ ◇정치 ▲1월8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방한 ▲5월10일 남한 총선거 실시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 ▲6월10일 국회의장에 이승만 박사 선출 ▲7월17일 제헌절 제정 ▲7월20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통령 이시영 선출 ◇사회·문화 ▲1월7일 의무교육제 실시 ▲4월3일 제주도 무장폭동 ▷제1공화국◁ ◆정치 ▲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미군정폐지 ▲ 〃 9월13일 행정권의 한국 정부 완전이양 ▲ 〃 11월30일 국군조직법 공포 ▲ 〃 12월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 승인 ▲50년 6월25일 6·25동란 발발 ◇경제 ▲50년 12월10일 한·미 경제원조협정 조인 ▲55년 8월8월 증권시장 개장 ◇사회·문화 ▲48년 10월20일 여수·순천 반란사건 ▲50년 6월1일 6년제 의무교육 실시 ◇체육 ▲50년 4월12일 한국,보스톤 마라톤대회 제패 ▷제2공화국◁ ◇정치 ▲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실시 ▲ 〃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성명 ▲ 〃 4월28일 과도정부 구성 ▲ 〃 8월12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 의원 선출 ▲ 〃 8월19일 초대 총리에 장면 의원 ▷제3공화국◁ ◇정치 ▲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 설치 ▲ 〃 5월20일 장도영 중장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혁명내각 출범 ▲62년 4월24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대통령권한대행 ▲62년 12월26일 헌법개정(대통령책임제) ▲63년 12월7일 제3공화국 출범(박정희 대통령 취임) ▲70년 12월23일 정부종합청사 준공 ▲72년 10월17일 박대통령,국회해산 및 계엄선포 ▲ 〃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대의원 선거 ▲ 〃 12월27일 유신헌법 공포 ▲74년 1월8일 긴급조치 1·2·3호 선포 ▲ 〃 1월15일 고위공직자 숙정 ▲ 〃 8월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망 ◇경제 ▲62년 1월5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66년 1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사회·문화 ▲68년 11월29일 서울시내 전차철거 ▲ 〃 12월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72년 4월10일 문교부,지명의 로마식 표기공표 ◇통일·외교 ▲65년 1월8일 월남파병 결정 ▲68년 1월23일 미 푸에블로호 북한에 피납 ▲68년 11월2일 울진·삼척 무장공비 출현 ▲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71년 3월27일 첫 미군 철수 ▲ 〃 9월20일 남북적십자사 이산가족찾기 첫 예비회담 개최(판문점) ▲ 〃 12월27일 국가보안법 국회 통과 ▲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발표 ▲ 〃 8월30일 남북적,본회담 평양서 개막 ▲74년 1월30일 한·일 대륙붕협정 체결 ▲ 〃 8월15일 서울지하철 개통 ▷제4공화국◁ ◇정치·행정 ▲75년 2월12일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실시(찬성률 73.11%) ▲79년 10월26일 박정희대통령 시해 ▲ 〃 1월6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 ◇사회·문화 ▲75년 6월30일 예비군 창설 ▲ 〃 9월2일 학도호국단 발단식 ▲ 〃 9월22일 민방위대 발대식 ▲76년 4월30일 매월 말일을 반상회로 지정 ▲ 〃 8월1일 양정모 몬트리올 올림픽 첫 금메달 획득 ▲77년 9월15일 한국등반대 에베레스트 정복 ▲78년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 〃 4월21일 대한항공기 소련 무르만스크강제착륙 ▲ 〃 10월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경제 ▲76년 6월18일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77년 6월19일 국내 최초 고리원자력1호 발전기 점화 ▲ 〃 7월1일 부가가치세 실시 ◇통일 외교 ▲75년 4월29일 주월 한국대사관 철수 ▲76년 8월18일 북한군 판문점에서 집단도끼만행 사건 ▲77년 11월7일 한미연합사 사령부 발족 ▷제5공화국◁ ◇정치·행정 ▲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 〃 7월9일 2급이상 고위공무원 232명 숙정 ▲ 〃 7월15일 3급이하 공무원 4천760명 숙정 ▲ 〃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 하야 ▲ 〃 8월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대통령당선 ▲83년 1월1일 공직자 윤리법 발효 ▲ 〃 7월13일 입법예고제 첫 실시 ▲ 〃 10월8일 아웅산 테러 서석준 부총리 등 고위공직자 17명 사망 ▲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대통령직선제 선언 ◇경제 ▲80년 11월8일 경제활성화대책 발표 ▲81년 8월21일 제5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85년 7월4일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0년 7월30일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 8월2일 컬러TV 시판 ▲ 〃 11월1일 사회정화위원회 발족 ▲81년 9월30일 서울올림픽 개최확정 ▲82년 1월5일 야간통금 해제 ▲83년 3월2일 중고생 복장자율화 ▲ 〃 6월30일 KBS 이산가족찾기운동 ▲ 〃 9월1일 KAL기 격추 ▲86년 1월13일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88년 2월15일 예술의 전당 개관 ◇통일·외교 ▲84년 2월1일 팀스피리트 훈련개시 ▲85년 7월23일 남북 국회회담 첫 예비접촉 ▲ 〃 9월20일 남북고향방문단 서울·평양에 도착 ▲86년 1월20일 북한,남북회담 일방연기 ▲87년 11월29일 북한,KAL기 추락 ▷제6공화국◁ ◇정치·행정 ▲88년 9월17일 제24회 서울하계 올림픽 개최 ▲ 〃 11월23일 전두환 대통령 재산헌납 발표 ◇경제 ▲91년 11월12일 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 발표 ◇사회·문화 ▲89년 1월1일 해외여행제한연령 완전철폐 ◇통일·외교 ▲90년 6월5일 한소 정상회담(샌프란시스코) ▲ 〃 9월4일 남북 첫 총리회담 개최(서울) ▲ 〃 10월16일 2차 남북총리회담(평양)▲ 〃 9월18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91년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 한반도 비핵화선언 ▲ 〃 12월31일 남북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 ▲92년 한중 수교합의 발표 ▷문민정부◁ ◇정치·행정 ▲93년 2월27일 김영삼 대통령 재산공개,국무위원 등의 재산공개 당부 ▲ 〃 8월9일 정부 공직자윤리위 가동 ▲95년 12월3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5일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97년 12월18일 15대 대통령선거,김대중 후보 당선 ◇경제 ▲93년 5월26일 신경제 5개년 계획발표 ▲ 〃 8월20일 경부고속도로 차종 TGV 확정 ▲ 〃 12월13일 쌀시장개방 합의 ▲94년 5월16일 금융실명제 실시 ▲96년 12월1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97년 12월3일 IMF자금 요청으로 ‘IMF시대’ 도래 ◇사회·문화 ▲93년 4월6일 종합유선방송 허가 발표 ▲ 〃 8월20일 제1차 대학수학 능력시험 실시 ▲94년 1월6일 대입 본고사 14년만에 부활 ▲ 〃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96년 5월31일 한·일 2002년 월드컵공동개최 결정 ◇통일·외교 ▲94년 7월2일 남북정상회담실무절차 합의 ▲95년 6월29일 대북 경수로지원 합의 ▲97년 8월19일 대북경수로 부지공사 착공
  • 올 월별 주요행사 계획/98지구촌 빅이벤트

    ◎그라운드 화합축제속 경제­환경 대전 예고 올해에도 정치·경제·환경·문화·체육 등 각분야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가 지구촌 곳곳에서 예정돼 있다. 세계의 스포츠팬들을 열광시킬 월드컵이 오는 6월 프랑스에서 열리며 2월에는 일본의 나가노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오염 문제를 다룰 국제환경회의가 11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리고 유렵의 통화통합을 위한 유럽중앙은행도 올해 발족된다. 아시아가 심각한 외환위기에 빠져있는 가운데 단행될 유럽의 통화통합은 우리경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그밖에 올해 열릴지구촌의 주요 행사들을 알아본다. ◇1월=▲12일:벨파스트에서 제정당들이 참여한 가운데 북아일랜드의 장래를 논의할 회담 개최 ▲19∼24일:싱가포르에서 세계인터넷 박람회 및 회의 개최 ▲19∼27:제네바에서 제 1차 군축회의 개최 ▲19∼28일:제네바에서세계보건기구(WHO)연례회의 개최 ▲21∼25일:교황 요한 바오로2세 쿠바 방문 ▲26일:런던에서 북아일랜드 장래에 관한 회담 개최▲27일:클린턴 미대통령연두교서 발표,스위스 다보스서 세계 기업 및 정부지도자 연례경제 포럼개최 ◇2월=▲7∼22일:일본 나가노에서 동계올림픽 개최 ▲18일:더블린에서 북아일랜드 장래에 관한 회담 개최 ▲24∼3월5일:싱가포르에서 ‘98 아시아에어쇼’개최 ◇3월=▲15일:프랑스 지방선거 1차 투표 실시 ▲16일:4자회담 본회담 2차회담 개최 ▲16∼4월24일:제네바에서 유엔 인권 위원회 개최 ▲22일:프랑스지방선거 2차 투표 실시 ▲31일:일본 고베에서 제51차 국제신문발행인연맹 총회및 제5차 국제신문편집인 포럼 개최 ◇4월=▲12∼15일:싱가포르에서 세계요리경연대회 개최 ▲13∼17일:워싱턴에서 세계은행(IBRO) 및 국제통화기금(IMF) 춘계회의 개최 ▲18∼19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아메리카 정상회담 ◇5월=▲10일:에콰도르 대선 및 총선,파라과이 애선 실시 ▲11∼6월26일:제네바에서 2차 군축회의 개최 ▲15∼17일:영 버밍햄에서 선진 8개국(G­8)정상회담 개최 ▲18일:제네바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창설 50주년 기념식 ▲22∼9월30일:포르투갈 리스본에서 ‘98 세계무역박람회’개최 ◇6월=▲10∼7월12일 프랑스 월드컵 ▲15∼16일:영 카디프에서 유럽연합(EU)정상회담 개최 ◇7월=▲12일:에콰도르 대선 및 총선 결선투표 실시 ▲25일:일본 참의원 회기 만료 ▲27일:제네바에서 3차 군축회의 개최 ◇9월=1∼5일: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남극에 관한 국제과학자 회의개최 ◇10월=▲6∼8일:워싱턴에서 IBRD·IMF추계회의 개최 ▲12∼14일:싱카포르에서 동아시아 경제정상회담 개최 ◇11월=▲3일:미 하원의원 선거 ◇12월=▲6일:베네수엘라 총선 ◎프랑스월드컵 6월 개막/4년만에 다시보는 꿈의 제전/생드니 등 10개 경기장 단장 마무리/입장권 210만장 완전매진 진기록 나올듯/출전국 민속공연… 축구·예술의 한마당 【파리=김병헌 특파원】 ‘준비완료,남은게 있다면 프랑스의 우승 뿐.’ 지난 4일 조 추첨을 끝낸 98년프랑스월드컵 대회 조직위원회의 대회 준비는 그날로 상황끝. 경기장,입장권예매,마케팅 안전 부대행사 등 대회운영에 필요한 준비작업을 완전 마무리했다. 대회가 치러질 10개 경기장신·개축도 완료상태. 개막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파리 근료 생드니의 프랑스 스타디움은 지난 95년 여름 기공식을 가진 뒤2년반만에 공사를 끝내고 지난 11월 개장했다. 총공사비는 27억프랑(6천억원). 최대 8만명의 관중을 수용할수 있는 시설로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조절해가며 운영이 가능한 ‘탄력성을 갗춘 조립식 경기장’이다. 대회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입장권예매는 총2백10만장중 60여만장 가량인 외국인분을 제외하고 지난 11월에 매진됐다. 역대 대회에 비추어 외국인분도 다팔리는 전례롤 볼때 대회사상 처음으로 전경기 매진기록을 세울 전망이다. 전체수입의 40%를 입장권 수입에 조달한다는 계획도 성공적으로 완수된 셈이다. 조직위의 기발한 아이디어 덕택이다. 인기·비인기경기 모든 경기에서 열기를 돋우기 위해 입장권을 몇장식 묶어 패키지로 파는 대신, 가격을 저렴하게 했다. 공식후원업체도 선정도 우리나라의 LG전자를 비롯,아디다스·캐논·마스터카드·맥도널드·코카콜라 등 세계 유수 47개 기업으로 마무리됐다. 후원금 총규모는 4천억여원. 조직위는 또 지구촌 가족이 즐기는 축구와 문화예술의 만남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 대회를 전후해 각종행사도 준비중이다. 가장신경쓰는 프로그램은 6월 9일 에펠탑옆 상 드 막스공원에서 펼쳐질 전야제. 루치아노 파바로티,호세 카레라스,폴라시도 도밍고 등 세계 3대 테너가수가 합동공연을 펼친다. 동시에 10개경기장에스는 출전 32개국의 민속공연을 펼친다. 동시에 10개 경기장에서는 출전 32개국의 민곡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 5월 출범/국제통화체계 ‘빅뱅’의 첫걸음/EU11개국 참여 내년 단일화폐 도입/2002년 7월 각국 통화 완전 폐지/외거래 급감… 경제블록화 심화 예상 새해에 경제분야의 빅 이벤트로 유럽 중앙은행의 발족을 꼽을 수 있다. 99년 1월부터 시행되는 유럽통화통합(EMU)에 따른 조치로 우리경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어서 관심의 대상이다. 유럽중앙은행은 오는 5월 열릴 유럽연합(EU) 각료회의 의결을 거쳐 발족된다. 지금은 유럽통화기구(EMI)가 유럽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준비업무를 맡고있다.유럽중앙은행은 99년 1월부터 EMU 제도가 도입되면서 유럽지역 통화가 유로(EURO)화로 단일화되는 데 따른 통화정책을 수립하는 등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EMU 제도에 참여하는 국가들의 개별 중앙은행은 유럽중앙은행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는 하부기구가 된다. 유럽중앙은행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두는 것이 확정적인 상태다.독일의 경제규모가 감안된 것으로 전해진다. EU 회원국 가운데 EMU 제도에 참여해 통화정책 등에서 유럽중앙은행의 통제를 받게 되는 나라는 11개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델란드 벨기에 스페인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핀란드 등이다. 영국 스웨덴 덴마크 그리스 등은 경제규모나 국민의 반대,준비부족 등의 이유로 최초 참가국에서는 빠지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덴마크는 그러나 오는 5월 국민투표를 실시해 참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유럽중앙은행이 설립되고 99년 1월부터 유로화로 통화가 단일화되더라도 2002년 6월 30일까지는 유로화와 기존의 각국 통화는 혼용된다. 그러나 2002년7월부터는 기존 통화는 모두 회수되고 유로화만 통용된다. EU 지역 통화가 유로화로 단일화되면 EU 지역에서의 환리스크는 없어진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EU의 역내(역내) 거래는 늘어나는 반면 역외거래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며 “참여국간 통화를 거래하는 외환시장도 없어지게 되며 금융기관간 경쟁은 극도로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지에 진출해 있는 국내 금융기관들의 경영환경도 악화돼 대응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4차기후협약 11월 개최/환경보전­산업보호 한판 승부/서방,온실가스 평균 5% 감축 이미 합의/중·G­77 반강제적 참여 공방 예상/한국 ‘차등감축’ 전략으로 대응을 98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국제환경회의는 오는 11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협약 제4차 당사국 총회이다. 오는 11월 2∼13일까지 기후변화협약에 서명한 168개 국가대표들이 참가한가운데 열리는 이번 회의는 제3차 총회의 합의를 토대로 선진국들의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구체적인 시행방법등에 관한 국제사회의 합의도출을 우선목표로 하고 있다. 즉 미국 등 38개 선진국들은 지난 해 12월 1∼11일 일본 교토(경도)에서 개최된 기후변화협약 제3차 당사국 총회에서 일정을 하루 연기하면서까지 2008∼2012년간 온실가스 배출총량을 1990년에 대비해 전체 평균 5%,국가별로는 -8%에서 +10%까지 차등 감축한다는 등 큰 원칙에 합의한 뒤 이에 따른 구체적인 시행방안 등에 대한 논의는 제4차 총회로 넘겼다. 선진국들은 그러나 제3차 총회에서 주요 쟁점의 하나였던 개도국의 참여조항과 관련,중국 인도 등의 강력한 반발에다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아예 삭제키로 물러섰다. 개도국의 의미있는 참여등을 교토의정서 채택의 전제로 내걸었던 미국의 ‘패배’였다. 이에 따라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이번 총회에서 중국 및 G­77그룹 등 개발도상국들의 자발적 또는 반강제적 동참방안 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세찬 파상공세를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이번 총회에서는 선진국 리스트 개정안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계획이어서 우리나라와 멕시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들과 중국 인도 등을 대상으로 한 의무감축 선진국 가입문제등을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간 치열한 공방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윤여준 환경부장관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도국의 온실가스 감축 참여문제는 더이상 피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면서 “국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특히 ‘말싸움장’인 국제회의에서 언어전달력이 중요한 만큼 이에 대해 철저히 대비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뉴딜정책 기수 프랭클린 루즈벨트:하(미국의 대통령 문화:5)

    ◎2차대전 적극 개입… 1천만 실업자 구제/전후 평화 정착 기대속 4선 당선 영광/대통령 문화 요람 도서관 시스템 도입/부인 일리노어 적극적 사회 활동/헌신·박애정신 국민 마음속 각인/동상 선 세계 최초 퍼스트 레이디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대공황의 질곡에서 미 국민을 구출할 희망의 상징으로 32대 대통령에 취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애칭 FDR)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강력한 뉴딜정책을 추진했다.테네시강 개발사업,국가부흥청 설립,농업조정법 제정,사회보장제도 도입,노동조합 활성화 등 100일 입법을 통한 새행정부의 의욕적인 정책추진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던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딜정책 평가를 위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FDR은 선거인단수 523대 8의 미 역사상 최대의 표차로 재선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활기찬 뉴딜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요원했다.36년 다소 회복되는 듯 하던 경기는 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으며 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천만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초부터 실험적 성격이 강했던 뉴딜정책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사방에서 FDR에 대한 비난의 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뜻하지 않은 방향에서의 해결책이 마련됐다. FDR의 대통령 취임과 같은 해인 33년 독일의 권력을 장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국제연맹을 탈퇴,인접국들에게 과거 독일영토의 반환을 요구하며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마침내 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침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이로 인해 군수산업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미국의 경제상황은 대공황에서 탈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전후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전쟁이 미국을 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던 40년,미 대통령선거의 최대쟁점은 참전문제였다.초기 FDR은 재선한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퇴진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전쟁에 직면한 위기상황에서 민주당은 전폭적으로 그를 또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참전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으나 미국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미 국민은 그를 미 역사상 최초의 3선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쟁 초기 FDR은 곤경에 처한 영국을 도우려 했지만 고립주의자들로 가득찬 미 의회의 거부로 소규모 제한적인 원조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의 거대한 무기고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며 의회와 국민을 설득,마침내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켜 본격적인 지원에 나설 수 있었다.39년 10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핵폭탄에 관한 서신에 접한 FDR이 즉시 비밀계획팀을 만들어 연구에 착수,마침내 원자탄을 만들어내게 한 것도 이같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던 중 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계기가 됐다.참전은 모든 미국 경제를 전시경제로 돌아서게 했고 미 전역의 공장들로부터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1천만에 달하던 실업자가 방위산업 증강에 따른 구인수요와 군입대로 사라지게 됐다.또한 FDR의 활발한 전시외교는 그를 자연스레 국제지도자로 부상시켰다. 44년 11월,아이젠하워 장군 지휘하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독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미국은 다음 대통령선거를 치렀는데,FDR은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를 물리치고 4선 대통령에 당선됐다.전쟁의 마무리 뿐 아니라 전후평화에 있어서도 미 국민은 그의 영도력에 큰기대를 걸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취임 3개월도 못된 4월12일 조지아주 웜스프링 휴양지에서 뇌출혈로 숨졌다.그의 나이 63세. 라이딩스의 대통령 순위에 따르면 FDR은 지도력과 정치력에서 각각 1위,업적 및 위기관리와 용인술에서는 각각 2위,성격 및 집중도에서는 15위를 기록해 전체 순위에서는 링컨에 이어 2위로 나타나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의 일화는 그의 지도력 및 용인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첫대통령 취임 직후 FDR의 군예산 대폭 삭감계획에 불만을 품은 맥아더 육군참모총장이 조지 던 전쟁장관과 함께 백악관을 방문했다.대통령과 부딪히는 것을 꺼리고 있던 던 장관을 제치고 맥아더가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FDR은 빈정거리는 투로 평화시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답했다.두사람 사이에는 다소 설전이 오갔다. 마침내 맥아더가 자제력을 잃고 “만일 다음 전쟁에서 미국이 져 미국 병사들이 적의 군화발에 짓밟힌다면 그들은 맥아더가 아닌 루즈벨트를 원망할 것입니다”라고 대들었다.그러자 FDR 역시 화를 버럭내며 “당신이 대통령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며 고함을 질렀다.잠시 침묵이 흘렀다.맥아더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 없었다.군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은 군법회의 감이었다.그는 사과를 한 후 총장직 사의를 표하고 뒤돌아 나왔다. 맥아더가 막 집무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뒤에서 대통령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더글라스,어리석은 짓 말게.여기 당신의 목과 예산안을 함께 가져 가게” FDR의 정치생애에서 가장 주목을 받아야할 사람은 부인일리노어 여사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그녀는 남편의 투병중 세심한 간호는 물론 그가 주민들로부터 잊혀지지 않도록 정치활동을 대신,남편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케 했다.또 퍼스트 레디가 된 후에도 신문에 ‘마이 데이’라는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며 적극적인 사회활동으로 현대적 퍼스트 레디상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DR이 죽은후 그녀는 남편 생가의 옆동네인 바킬의 고향집에서 17년을 더 살았으며 트루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년간 유엔총회 미국대표단장을 역임하는 등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62년 78세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국민들 마음에 헌신적이고도 박애적인 영원한 퍼스트 레디로 깊이 각인됐으며 지난 여름에는 워싱턴에 동상이 선 첫 퍼스트 레디가 됐다. FDR의 업적 가운데 주목받는 것으로는 대통령도서관 시스템의 도입이 있다.역사기록의 중요성과 대통령직 수행 자체가 국민의 위임에 의한 것임을 자각했던 그는 1기 임기가 끝났을 때 자신의 모든 자료들과 하이드파크의 생가를 국가에 기증,대통령도서관을 만들어 국민들이 언제라도 편하게 접할 수 있게 했다.현재 미국내 존재하는 대통령도서관은 모두 11개로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의 관할 아래 제31대 후버 대통령부터 41대 부시 대통령까지 주로 생가에 건립돼 있으며 미 대통령문화의 요람이 되고 있다. ◎수잔 쿠퍼 미 국립문서보관소 대통령도서관 담당/“대통령직 관련 자료 보존·열람 FDR 투철한 역사의식서 시작”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수잔 쿠퍼 대통령도서관 담당관은 “미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통령직 수행과 관련된 자료들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열람시키는 전통을 수립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의식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도서관의 설립 동기는. ▲1939년 두번째 임기중이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하이드파크의 생가일부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들을 연방정부에 기증하고 그 관리를 의뢰하면서부터 시작됐다.도서관 건물은 이듬해인 40년 후원회에서 건립후 국가에 헌납했다.1955년 ‘대통령도서관법’이 제정돼 도서관의 건립은 대통령후원회 등 개인이 맡고 관리만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하도록 돼 있다. ­이전에는 대통령문서가 어떻게 보존돼 왔나. ▲대통령마다 의회도서관 또는 출신대학,거주지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혹은 후손에 남기는 등 가지각색이었다.그래서 팔려나간 경우도 있고,훼손·분실되는 일도 많았으며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재 대통령도서관 현황은. ▲최근 텍사스 A&M유니버시티 내에 개관한 부시도서관을 포함 모두 11개이다.루즈벨트에 이어 트루만(미주리 인디펜던스),후버(아이오와 웨스트브렌치),아이젠하워(캔자스 애빌린),케네디(매사추세츠 보스톤),존슨(텍사스 오스틴),포드(미시간 앤아버),카터(조지아 애틀란타),레이건(캘리포니아 시미 밸리)도서관 등이 있다.워터게이트로 물러난 닉슨의 도서관은 캘리포니아 요루바린다에 있으나 의회명령으로 방대한 양의 워터게이트사건 관련 문서들은 아직 국립문서보관소의 닉슨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대통령 도서관에 전시되는 자료들의 내용은. ▲대통령이나 비서진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문서,국내외로부터 받은 문서 및 서신,취임전후의 자료,사진·필름 등 각종 오디오 비디오 자료,유품 등 개인소장물품과 공식선물 등이다.
  • TV합동토론회­기습 질문·답변

    ◎이회창­이인제 후보 곧 사퇴…안타깝다/김대중­내각제개헌 국민 반대하면 못해/이인제­아들병역문제 이 후보 사퇴해야 세 후보는 경제현안을 묻는 질문에도 틈만 나면 정치적 이슈와 연결지으려는 모습을 보였다.모두발언부터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문제를 걸어 이후보의 사퇴를 기습 촉구했다.이에 이회창 후보는 허를 찔린 듯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이인제후보가 곧 사퇴할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맞받아쳤다. 다음으론 이른바 ‘DJ비자금’ 문제도 자주 거론됐다.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의 부도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문제의 쟁점화를 주도했고 김대중 후보도 사안의 불법성을 여러번 강조했다.특히 이인제후보는 미국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사건을 들어 “그보다 더 엄중한 사건”이라면서 “미국 같으면 이후보는 여기에 계시지 못한다”고 힐난했다.이에 이회창 후보는 “제보된 자료가 적법한 절차에 따른 것인지 수사해줄 것을 검찰에 의뢰했다”면서 “그러나 검찰은 대선 후로 유보했다”고 밝혔다.또 “워터게이트 사건은 사실을 숨겨 문제가 됐다”며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청와대 2백억원 신당지원설과 관련,김대중 후보는 “이인제 후보에게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고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김후보는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응하지 않으면 될 수 없으며 국민투표에서도 국민들이 반대하면 내각제 개헌은 어렵다”면서 “서로의 약속이지 우리가 결정할 권한은 없다”고 말했다.
  • DJP 내각제는 ‘허수’(김호준 정치평론)

    DJP의 내각제 개헌공약은 과연 실현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응답자의 43.8%가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불과 28.3%만이 “이루어질 것”으로 답변했다.최근의 한 여론조사가 전한 내용이다.내각제 개헌의 성사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DJP가 집권하면 국회의 판세는 여소야대가 된다.총의석 299석의 국회에서 국민회의(78석)와 자민련(46석)의 의석을 모두 합쳐봐야 과반수에도 훨씬 미달하는 124석에 불과하다.그런 소수파가 재적 3분의 2,즉 200석 이상의 지지가 필요한 개헌을 하겠다니 믿음이 갈 리가 없을 것이다. 물론 DJP 집권시 정계개편이 진행되면 국민회의·자민련의 세확대와 일부 야당의 동조로 개헌선 확보의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내각제가 되면 대통령이 299명으로 늘어난다는 우스갯 소리가 시사하듯이 내각제처럼 국회의원의 위상을 높여주는 권력구조도 없다.내각제에 대해 의원들이 갖는 그런 매력과 내각제 선거를 이용한 DJP퇴진,즉 정권교체 가능성을 내다보는 야당의 전략등이 개헌동조로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안이 마지막 관문인 국민투표를 통과한다는 보장은 없다.대선에 승리할 경우 DJP는 국민의 내각제 지지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국민 생각은 다를 것이다.아직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제를 지지하는 여론이 우세한 편이며 DJP가 국민투표 실시를 예정하고 있는 99년말까지도 이런 정서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15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빼앗겼다가 지난 87년 6·10항쟁을 통해 되찾은 것이 대통령직선제다.그런 국민의 투혼이 서려있는 대통령직선제를 DJP가 여론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폐기하려는 처사는 국민의 거부감을 살 것이 틀림없다.특히 DJP의 내각제 연대가 백년대계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단지 집권을 위한 정략적 방편이라는 사실은 평소 내각제를 지지하던 사람까지 등을 돌리게 할지 모른다.앞으로 연립정부에서 드러날 집권세력간 갈등과 여소야대 구도속의 무리한 개헌추진에 따른 정치적 혼란도 내각제 개헌의 반대세력을 키울 요인들이다. DJP집권시 내각제를 반대하는 소리는 호남지역을 비롯한 친DJ세력으로부터 먼저 터져나올 가능성이 있다.DJ가 대권에 처음 도전했던 지난 71년이래 26년간 온갖 역경속에 4수를 시켜 어렵사리 대통령을 만들어놨더니 5년임기의 반도 못채우고 대권을 내놓는다면 그들의 상실감은 이만저만 크지 않을 것이다.내각제 아래서는 국회의원만이 장관직을 가질수 있기 때문에 장관직 진출을 봉쇄당하는 관료사회등 인재집단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개헌이 계획대로 추진돼 내각제를 출범시키기 위한 16대선거가 2000년 4월에 실시되더라도 이 선거에서 DJP가 이겨 재집권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지금의 지역세로 본다면 DJP보다는 반DJP가 오히려 강한 편이다.따라서 TK와 PK를 주축으로 한 반DJP지역연합이나 강경야당이 다수파로 부상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그렇게 되면 DJP는 2년4개월만에 정권을 내놓는 어이없는 사태를 맞게된다. ○개헌 실패땐 정권 내놔야 내각제 개헌이 실패했을때도 문제다.DJP가 정권을 내놔야지 대통령직과 총리직에 그냥 눌러앉아 있기가 어려울 것이다.집권도중의 국민투표는 정권의 신임을 묻는 중간평가와 같은 것이어서 국민투표 패배는 곧 정권 불신임으로 간주돼 정권퇴진으로 이어지는 것이 상례다.지난 69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지방제도와 상원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패배하자 즉각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일이 이를 잘 말해준다. DJP연합은 사상논쟁에 시달려 온 DJ에게는 색깔을 희석시킬수 있는,독자적 대권달성이 무망한 JP에게는 살아남을수 있는 기회를 각각 제공한 권력분점 구도다.그러나 내용을 뜯어 보면 ‘불평등조약’이다.여론조사에서 국민지지도가 5%안팎을 맴돈 JP에게 총리직과 각료직의 절반을 내주기로 한 것도 그렇거니와 내각제 개헌후 권력의 핵심인 총리직에 대한 선택권을 자민련에 주기로 한 것 역시 국민회의로서는 ‘배 내주고 속 빌어먹는 격’이 아닐수 없다.그런 불평등조약에 대해 폐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DJP연합 ‘불평등 조약’ 내각제 실현 가능성에 무엇보다도 깊은 의문을 갖게하는 것은 집권시 DJP 자신의 현실적 이해관계다.대통령제 그대로 가면 DJ는 대통령으로,JP는 ‘강력한 총리’로 장장 5년간을 배 튕기며 지낼수 있다.그런데 도중하차의 위험성이 있는 개헌 모험을 강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DJP합의문 발표후에도 DJ는 “나는 지금도 대통령제를 선호하며 내각제는 정권교체를 위한 차선책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있다.대수롭게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내각제 공약은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는 운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애초부터 내각제는 이질적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에게 연대의 고리를 제공한 허수에 불과하다.정치9단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꿰뚫었을 것이다.그들의 노련한 파워게임에 국민만 속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논설주간〉
  • 민주 “DJP 권력욕 연대” 맹공

    ◎정권장악 위한 내각제… 정국 혼란 올것 반DJP연대를 기치로 이회창·조순·이인제 3자연대를 추진하고 있는 민주당이 내각제를 고리로 한 DJP연대를 맹비난하고 나섰다.민주당 대선기획단은 4일 ‘DJP내각제 야합은 왜 분쇄되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10쪽짜리 홍보유인물을 제작,DJP연대의 허와 실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민주당은 우선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정당연합 자체는 긍정 평가했다.“다당제 정치에서 실용화될 수 있는 새로운 정치모형으로,불법이 아닌 한 대선승리를 위한 정당연합은 비난할 일이 아니다”고 평했다.민주당은 그러나 DJP연합이 내각제 개헌추진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우리 정치에서의 필요성과 관계없이 단지 선거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내각제를 수용한데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민주당은 “양당의 내각제 합의는 김대중·김종필씨의 권력욕의 산물에 불과하며 내각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국민을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발상”이라고 비난했다.민주당은 “특히 국가의 권력구조를 일부 정치세력의거래와 흥정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국민적 비판을 면키 어렵다”고 주장했다.민주당은 이어 “DJP가 집권하면 2년3개월짜리 한시적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레임덕에 빠지고,두 김씨의 끝없는 갈등으로 6공때의 중간평가 정국이 보인 국가적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이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 대DJP 공세를 통해 ‘호헌정당’의 선명성을 강화,향후 대선정국에서 반DJP연대의 주도권을 잡아 나간다는 방침이다.
  • “어떤 비밀도 없다” 이면합의설 부인/김대중·김종필 총재 문답

    ◎DJ­여권 내각제지지자와 협력 요의/JP­DJ 결단으로 쉽게 합의에 도달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통령후보 단일화 서명식을 마친뒤 단상에서 나란히 앉아 기자회견을 가졌다.두사람은 “어떠한 비밀도 없다”고 이면합의설을 부인했다.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반(반)DJP에 대해. ▲(김대중 총재)단일화가 무서운 위력을 발휘할 것 같으니 초조감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냐고 본다.우리는 도외시하고 소신대로 추진하겠다. ­대선에서 득표활동 계획은. ▲(김종필 총재)대선에서 선거를 총지휘하는 일을 맡게 될 것이다.많은 선거를 겪어본 경험을 토대로 최선을 다하겠다. ­양당 의석이 내각제 개헌 정족수에 못미치고 국민들도 내각제 의견이 갈려 있는데. ▲(김대중 총재)신한국당에도 내각제를 지지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내각제만 이뤄지면 협력 다짐한 바 있다.우리는 그런 분들과 손잡고 추진하겠다.국민들은 대선에서 병행해 내각책임제 찬성 반대 기회가 있고,99년 말 개헌할 때 국민투표를 해야한다. ­양당간에 신뢰성 문제는 해결됐나.이면 합의서 존재 여부는. ▲(김종필 총재)양당간에 발표한 이외 어떠한 비밀도 없다.믿지 못하면 이런 일을 못한다. ­박태준 의원의 향후 역할과 내각제 지지 신한국당 의원들의 입당여부는. ▲(김종필 총재)박의원은 근일중 저희 당에 들어와 우리 세사람이 만나게 될 것이다. ▲(김대중 총재)박의원 입당과 더불어 여당 내각제 지지분들의 입당문제는 현재로서 없다.시간이 더 필요하다. ­협상 위기의 순간과 집권시 소수당으로서 총리 국회인준 방법은. ▲(김종필 총재)김대중 총재도 힘을 합치면 이긴다는 소신때문에 그전에 생각하고 있던 것 정리해주시고 과단성 있는 결론내려 주셨기 때문에 합의에 어려움 없었다. ­양심수 석방에 관한 언급과 앞으로 이견부분 조율은 어떻게 하나. ▲(김대중 총재)김대중 총재가 설명한 것으로 안다.법을 어긴 사람은 법대로 처리하고 참작해줘야할 사람이 있다면 너그러이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범주에서 한 얘기로 생각한다.
  • DJP 대선 이겨도 앞길 험난

    ◎기준모호… 공동정부 구성 불협화 소지/벌써부터 핵심각료직 줄다리기 후문 3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공식 서명할 대통령후보 단일화 공동합의문은 공동정부의 내각제 개헌일정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물론 공동정부가 출범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단일후보의 대선승리가 전제되어야 한다.그러나 대선승리를 가정하더라도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합의문에 따르면 오는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단일후보가 당선되면 두 당은 내년 2월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식과 함께 공동정부를 구성한다.또 공동정부가 구성되면 곧바로 ‘공동정부 운영협의회’와 ‘내각제개헌추진위원회’를 설치·운영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정부는 구성단계에서부터 두 당 사이에 불협화를 노출시킬 가능성이 크다.합의문은 공동정부의 국무위원을 두 당이 동등한 비율로 임명토록 하고 있으나 부처별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명시하고 있지 않다.벌써부터 안기부장과 외무·법무·국방 등 핵심 각료직에는 치열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있다는 후문이다. 내년 5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앞서 3∼4월에는 공천협의기구도 구성해야 한다.그러나 합의서에는 단체장 공천권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국무위원직과 지자체 단체장 후보 문제는 두 당 사이의 이면합의가 없는한 배분과정에서 상당한 잡음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1999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논의해야 한다.합의문에 명시한데로 99년이 가기전에 내각제 개헌을 이루려면 물리적으로 8∼9월에는 개헌안을 확정,정기국회 회기안에 처리해야 연내 국민투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부 대선후보 진영에서는 ‘DJP연합이 집권하면 즉각 대통령제 수호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벌써부터 공언하고 있다.현실적으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의석이 개헌선에 못미치는 것도 정계개편과 새로운 연대를 모색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크다.무엇보다 ‘김대중 대통령’이후 ‘대통령제 유지’를 최대현안으로 삼을 국민회의가 이를 ‘구실’로 삼기에 충분하다.
  • DJP연대 합의내용 과연 가능할까

    ◎내각제개헌 두당 의석 합쳐도 불가/정치사 유례없는 사례… “밀실야합” 비판/“JP 총리내정 국민·당원 무시” 목소리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내각제를 연대로 하여 후보단일화를 이룩한 것은 세계 정치사를 통틀어서도 보기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원내 의석수가 다른 두 당이 50대 50 동일지분으로 참여할 공동정권 창출에 나섰기 때문만은 아니다.무엇보다 노선상의 이질적 요소를 갖고 있는 양측이 ‘밀실 협상’을 통해 손을 잡았다는 점에서다. 때문에 차차기 내각제 정권 출범을 연결고리로 한 김대중 총재와 김종필 총재의 2인3각체제의 앞날에 관심이 모아진다.아울러 이 ‘정치실험’이 정당성과 그 이행가능성에 대해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우선 다음 정권에서 한 사람이 대통령을,다른 한 사람이 총리를 맡겠다는 합의가 온당한가 하는 점이다.그러한 권력 나눠먹기는 벌써부터 국민의 선택권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두 당은 이같은 일부 비판론에 대해 펄쩍 뛰고 있다.대선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게 왜 밀실흥정이냐는 항변이다. 그럼에도 불구,DJP단일화의 정략적인 측면에 대해 곱지 않는 시선도 많다.이를테면 “그 동기나 내용이 한국정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선거를 목전에 둔 결정”(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이라는 지적이다. 신한국당·민주당·국민신당 타정파의 시각은 더욱 부정적이다.오로지 DJ의 대선승리 의지와 JP의 정치생명 연장 의도가 ‘단일후보 DJ,차차기 내각제정부 출범’이라는 최대공약수를 낳았을 뿐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차차기 내각제 정권에서 ‘JP총리’를 보장하는데 대해서는 더 강한 거부감이 표출되고 있다.국민회의 비주류격인 정대철 부총재는 “DJ 이후를 JP에게 보장하는 합의문은 합의할 수 없는 것을 합의한 망발”이라고 규정했다.DJ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JP를 차기총리로 임명하는 것은 모르되 (제1당이 어디가 될지도 모르는) 내각제하에서의 총리를 미리 내정하는 것은 국민과 당원의 뜻을 무시한 처사라는 얘기였다. 내각제 약속이 과연 지켜질 것인가 하는 것도 관전포인트다.국민회의(79석)와 자민련(45석) 의석을 합쳐도 개헌정족수(2백석)를 턱없이 밑돈다.최근 여론조사상 우위인 대통령제 선호도를 차기정권에서 내각제 지지로 돌릴수 있을 것인지도 의문이다.개헌은 국민투표를 반드시 거쳐야 된다. 자민련측은 DJP의 승리로 정치상황이 바뀌면 야당의원을 대거 끌어들여 개헌정족수를 채워 15대 국회의원 임기내 개헌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그러나 이 경우 국민회의측이 그토록 폄하해온 ‘3당야합’식 정계개편 전철을 밟아야 하고,국민여론이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도 미지수다. 그래서 내각제 약속은 어차피 지킬수 없는,DJ의 JP에 대한 선심쓰기라는 관측도 없지 않다.결국 내각제 이행여부는 양김 총재의 신뢰지수와 무관치 않은 셈이다. JP는 이와 관련,29일 기자회견에 “세상일은 믿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고 밝혔다.그러나 국민회의측이 내각제 추진을 성실히 이행하는 ‘모양새’를 갖췄음에도 국회의결이나 국민투표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상황논리로 내각제 약속이 ‘포기되는’ 경우에 대해선양당의 누구도 명쾌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내각제를 매개로 한 양김의 제휴가 성공사례로 평가될지 또 다른 이별의 전주곡이 될지는 궁극적으로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 국민적 합의 없이는 절대 불가/개헌 가능할까

    ◎의석 부족·3김청산론 확산이 큰짐 내각제개헌은 ‘DJ(김대중) 단일후보’와 함께 ‘DJP합의서’를 이루는 두 축이다.DJ를 대선후보로 하는 것은 합의 그 자체만으로 가능한 일이다.그러나 DJ가 JP(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약속을 지킬 것인지의 문제를 뒤로 미루더라도 개헌에 이르기까지는 곳곳에서 고산준봉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DJP합의는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의 부재’라는 비판에 부딪치고 있다.이에 대해 두 당은 DJ가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당선된다면 합의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논리를 편다.그러나 현재의 4자구도가 맞대결로 좁혀지지 않는한 누가 승리한다고 해도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따라서 두 당의 논리를 수용한다해도 승리가 개헌에 대한 ‘상당수의 공감대’는 얻은 것으로 볼 수 있을지언정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하기에는 불충분한 형편이다. 개헌은 또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현재 국회의원 총수가 299명인 만큼 20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셈이다.그러나 의석분포는 현재 신한국당이 157석,국민회의가 78석,자민련이 45석,무소속이 19석이다.국민회의와 자민련을 합쳐도 123석에 불과하고,무소속에서 박태준 의원 등이 가세한다고 해도 대세는 달라지지 않는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 해도 국민투표라는 마지막 절차가 남는다.그러나 헌법개정은 곧 YS(김영삼 대통령)·DJ대통령에 이은 JP총리라는 ‘3김의 권력독점’을 의미한다.‘3김시대 청산론’에 대한 반향이 시간이 흐를수록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 국회의원 선거권자의 과반수 투표에,과반수 찬성이 필요한 국민투표가 상당한 짐이 될 수도 있다.
  • 누구를 위한 내각제인가(사설)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DJP연합,즉 두 당의 후보단일화 협상에 매듭을 짓고 공동집권과 내각제 개헌을 골자로 한 합의사항을 곧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보도된 합의문에 따르면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가 두 당의 연합 대통령후보가 되고 집권시 김종필(JP)자민련총재가 총리를 맡으며 각료는 50대 50으로 균분토록 돼있다.또 99년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고 내각제하의 첫 대통령과 총리에 대한 선택권은 자민련측이 갖는 것으로 돼있다.결론부터 말해 두 야당이 정권교체와 내각제를 구실로 권력나눠먹기 담합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는 처사에 아연할 따름이다. 이 합의문대로라면 이번 15대 대선은 헌법에 보장된 임기 5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아니라 내각제 개헌을 위한 과도정부를 이끌 임기 2년여의 임시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된다.이렇게 헌법을 왜곡하는 중차대한 문제를 소수당 멋대로 결정하여 박두한 대선의 성격을 변질시켜도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DJ대통령’ 다음에 사실상 ‘JP총리’시대를 설정한 합의도 새로운 리더십을 바라는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고 낡은 3김정치의 연장을 노린 신판 ‘권력세습’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정권선택은 국민의 몫이지 결코 두 김씨의 담합으로 좌지우지할 사안이 아니다. ○2년 임기대통령 뽑자는 것 물론 대통령제니 내각제니 하는 권력구조 개편문제가 불가촉의 성역일 수는 없다.하지만 그쯤 되는 국가대사라면 적어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와 관련된 비전으로서 거론하고 추진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예컨대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민족통일을 추구하는데 있어 현행 대통령중심제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해 권력구조를 언급한다면 누가 나무라겠는가.그런 차원이 아니고 권력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써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우선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개헌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된다.국민적 컨센서스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내각제 개헌이라는 이야기다.지금 국민이 대통령제보다도 내각제를 더 선호한다는 어떠한 명백한 증거도 우리는발견할 수 없다.국민들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국력결집이나 정치부패추방에 오히려 내각제가 비효율적이라고 믿고 있는 형편이다. ○국민적 컨센서스도 없다 내각제 추진은 불과 1년반전 대통령중심제 표방 정당들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4·11총선의 민의에도 반하는 것이다.당시 국민회의 김대중총재가 내각제 개헌음모를 저지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했던 일을 국민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정치권의 현 판세를 놓고 본다면 DJP가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여소야대 국회에 직면할 전망이다.대선후 또 한차례 정계개편이 이루어져도 두 야당이 개헌에 필요한 3분의2 의석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또 ‘DJ대통령’이 내각제 실현을 위해 과연 도중하차의 약속을 지킬지도 의문이다.그런 상황에서 국민적 컨센서스조차 없는 내각제 개헌을 추진한다는 것은 국론분열과 정치혼란만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그럼에도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그들의 이성적 판단을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면 이제 남은건 12월 대선에서의국민의 현명한 심판뿐이다.
  • “비자금 대선후 법대로 처리”/고 총리 답변/국회 대정부 질의

    ◎여야 검찰 수사유보 싸고 격돌 고건 국무총리는 24일 “경제활력의 회복을 위해 현 내각이 많은 노력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겠다”고 밝혀 현 경제각료를 경질할 계획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고총리는 이날 하오 국회 본회의에 출석,여야의원들의 대정부 정치분야 질의에 대한 답변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내각제개헌 여부는 물론이고 92년 대선자금이나 국민회의 김대중총재 비자금의혹과 관련한 국민투표 실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고총리는 검찰의 김대중총재 비자금의혹 수사유보 결정에 대해 “내각은 충분한 내부의견 수렴절차를 거친 검찰의 결정을 수용하는게 온당하다”면서 “대선이 끝나면 법 절차에 따라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고총리는 신한국당의 비자금 자료 입수경위 수사와 관련,“이번 국회에서 실명제를 보완할 필요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월북한 오익제씨가 국민회의 후원회비를 일부 낸 것으로 확인됐으나 북한의 공작금 여부 등 자금출처는 확인되지 않아 계속 추적을 하고 있다”고말했다. 앞서 정치분야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국당 이규택 정형근 민주당 권오을 의원은 “검찰은 3김정치,부패정치를 청산하는 마지막 수사가 되도록 수사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반면 국민회의 이해찬 자민련 함석재 의원은 “신한국당 이회창 의원과 그 주변 인사들은 지난 2년동안 40여명의 개인예금구좌를 뒤졌다”며 비자금 자료 입수과정의 불법성에 대한 수사를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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