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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생운동’ 다시 태어나야(사설)

    지난 91년 8월 독일 베를린을 거쳐 밀입북,제2차 판문점 범민족대회에 참석해서 북한식 통일방안을 외쳤던 朴聖熙씨 등 과거 범청학련 소속 5명이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 감상적인 통일운동에 대한 반성과 함께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들은 북한의 반통일적 자세를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무작정 친북반남(親北反南)의 입장을 고수하며 폭력적인 방법에만 의존하는 한총련의 해체를 주장했다. 지난 7년동안 실정법을 어기면서 북한 통일전략전술에 앞장섰던 이들 운동권 출신의 반성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민족의 비극적 자화상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또한 새로운 학생운동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물론 우리 헌정사에서 과격한 학생운동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과격한 학생운동이 불가피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또 이러한 학생운동의 뒷받침으로 마침내 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라는 위대한 역사창조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통성과 진정한 의미의 국민주권이 확립된 지금, 특히 제2건국을 통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시점에서 학생운동은 새로운 비전과 가치체계가 요구된다. 朴씨의 증언처럼 다 허물어져 가는 사회주의 사상에 매달려 폭력투쟁을 일삼는 비민주적인 학생운동은 종식돼야한다. 더욱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차용해서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학생운동의 사상적 오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동안 한총련이 한국사회에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역할을 해 왔으며 이른바 통일전선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해 왔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특히 한총련의 과격한 폭력투쟁은 급기야 폭력살인까지 몰고 왔으며 이같은 과격한 이념투쟁은 우리 국민들의 심각한 우려와 함께 학생운동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볼때 이미 학생운동으로서의 도덕적 기능을 상실한 한총련은 마땅히 해체돼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이며 생산적인 학생운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앞으로 이땅의 학생운동은 암울했던 시대에 독재에 항거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꽃피웠던 선배들의 거룩한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있게끔 거듭나야 한다.
  • 姜萬吉 교수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 발표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 일제식민지시대 좌우익의 통일전선운동은 해방공간에서는 평화통일운동으로 전환됐으며 분단시대의 통일운동은 ‘대등통일’이어야 한다고 姜萬吉 고려대 교수(한국사)가 7일 주장했다.姜교수는 이날 광복 53주년 및 독립기념관 개관 11주년 기념 제 12회 독립운동사 학술회의 주제발표에서 이같이 주장하고 민족해방운동은 근대국가 수립 과정이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주제발표 요약이다.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당한 것은 알려진 대로 무력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였다.그러나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선이 사상적으로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은 자본주의와 국민주권주의를 배우지 못해 일제 강점후 민족해방을 독자적으로 지도할 세력을 가질 수 없었다.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은 계속 추구됐다.좌익 노선은 3·1운동 전에도 일부 형성됐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3·1운동의 실패와 좌익의 본격적인 등장 이후 우익 세력은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그러나 비타협적인 우익도 일정한 세력으로 존속됐다.주로 지주및 상층 자산계급은 타협주의 우익으로,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은 중소자산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됐다는 분석이 있으나 그 구분은 분명하지 않았다. ○노동자 농민 의식성장 우익의 일부가 타협주의 노선으로 나아간 것은 노동자와 농민계급의 의식성장으로 민족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시작되고 일본이 적극적으로 유인했기 때문이었다. 우익의 일부 세력이 타협주의로 변하고 그 때문에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약화됨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방법론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었다.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이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이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1920년대 중반에 좌익과 비타협적인 우익 세력에서 동시에 통일전선론이 일어난 것도 이때문이었다. ○협력과 분열 반복 좌우익은 시대상황에 따라 협력과 분열을 반복했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워진 1940년대 전반기에 접어들며 통일전선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으로 더욱 적극화됐다. 민족해방운동전선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38도선이 획정되고 남북에 분단국가가 성립되는 상황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이 때문에 좌우익은 해방후 미·소 양군이 남북을 분할 점령한 조건에서도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시대의 민족해방운동 과정 전체가 곧 자산계급과 노동계급의 지도층이 함께 참가한 근대민족국가 수립과정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것이 해방 후 민족분단의 위험이 높아진 상황에서는 좌우익 정치세력이 함께 참가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외국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이후 한반도에는 근대민족국가 수립운동이 꾸준히 추구됐는 데 그 운동이 좌우익으로 나뉘었던 일제시대에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통일전선운동으로 계속됐다.해방 후 민족분단시대에는 그 운동이 평화통일 그것도 대등 통일 운동으로 연결됐다고 할 수 있다.
  • 5·10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역사적 의의

    ◎봉건사회 종언… 독립정부 토대 구축/사상 첫 민주선거… 王朝국가서 국민국가로/냉전체제속 ‘반쪽선거’ 분단고착화 초래 ‘역사의 등불은 선미(船尾)만을 비추는가’-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잘못된 전철(前轍)을 밟기 마련이다.특히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시대인들에게 제헌국회 총선 50주년의 의미를 교훈으로 되살리는 작업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국민의 정부’를 맞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새김질하는 차원에서도 더욱 그렇다. ‘5·10 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보통선거다.지리적 이념적으로 ‘반쪽선거’에 그쳐 분단을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한민국건국을 위한 합법성의 기초가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정치적으로는 통치엘리트의 교체를 공식화한 의미를 갖는다.국왕을 정점으로 양반계급내에서 통치엘리트가 충원되던 봉건적 신분제 사회가 막을 내리고 시민계급이 통치행위의 전면에 부상한 계기가 된 것이다.‘5·10 선거’를 기초로 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구성되고 7월17일에는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되어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논리도 ‘5·10 선거’의 유효성에 근거한다. ‘5·10 선거’가 남한 단독선거로 치르진 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간의 치열한 패권주의적 신경전 때문이다.일제 패망이후 한반도내 민주적 임시정부의 구성 문제를 논의하던 미·소 공동위원회가 정부 구성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의 범위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미국은 47년 9월17일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미국은 유엔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실시안을 추진하지만 소련이 “인구비례에 의한 선거는 남한진영의 승리와 소련에 비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으로 연결된다”며 반대,결국 남한 단독선거로 귀결된다.국내에서도 단독선거 반대 주장이 제기됐지만 “정부수립을 더이상 늦출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를 탄다.이에 따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좌익소탕 작업을 벌이던 미군정은 48년 3월1일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를 통해 ‘선거실시’를 공식 발표하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당초 선거날짜는 일요일인 5월9일이었지만 기독교계의 변경 요청으로 하루 늦춰진다. 정치권에서는 선거 참여파와 불참파,남북협상파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세다툼이 벌어진다.李承晩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민족청년단,대동청년단,서북청년회,대한노총 등 반탁·반공의 우익세력들은 선거를 적극지지한다.특히 朴憲永계의 좌익세력 ‘조선인민공화국’에 맞서 결성된 한민당은 “선거를 반대하는 것은 소련의 앞잡이인 남로당이나 북로당의 모략에빠져 사회혼란을 초래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반면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익세력은 파업,시위,방화 등 폭력행사를 통해 선거반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의 치열한 대립 속에 金九와 金奎植 등 우익 중간파들은 “남한 단독선거는 민족분단을 영구화한다”며 남북협상을 추진한다.金九 등은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에서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절박한 심정을 토한다.우여곡절끝에 4월20일 평양을 방문한 이들은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단독선거배격운동을 촉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지만 취약한 국내 기반과 국제적 냉전체제의 가속화,협상의 전략적 실패 등으로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접고 만다.이처럼 ‘5·10선거’는 독립정부 수립이라는 긍정적 측면과 분단의 고착화라는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민주권국가로 발돋움한 토양을 마련,건국의 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5·10선거’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퇴색될 수 없다.
  • 미즈시마 아사호 와세다大 교수 아사히신문 칼럼(해외논단)

    ◎日 평화활동 확대할때 일본정부는 일·미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실행을 위해 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으나 지금 일본이 해야할 일은 군사활동의 확대가 아니라 평화활동의 확대라고 일본 와세다대학의 미즈시마 아사호 교수(헌법학 전공)가 주장했다.그는 군사면이 강조된 일·미 안보조약을 민주주의와 기본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우호조약’으로 바꾸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아사히신문에 실린 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입법작업의 기본원칙은 명확한 법률용어를 사용하여 오해가 없도록 해야하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정부가 일·미 방위협력지침의 실행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주변사태 법안’은(해외파병과 무력사용 등을 금지한) 헌법9조와의 저촉문제 이전에 여러가지 법률제정에 있어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日·美 방위협력지침의 문제 먼저 법안 제목인 ‘주변사태’의 개념자체가 매우 애매하다.그것은 지리적 개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태의 규모와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되는 개념이라고생각할 수 밖에 없다.일본정부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고 하는데는 특정 지역·해역을 정해 미군과의 협력의 장을 제한하는 표현을 가능한한 피하려고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정부내에는 ‘주변’을 극동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그러나 ‘적’의 범위를 분명히 하지않음르로써 그 애매함이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변사태 개념이 미국과의 군사협력 범위를 넓히는 공간적 개념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의 시간적 개념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현재의 자위대법은 유사(有事)사태를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과 그러한 위협이 있을때로 규정하고 일·미 공동작전도 일본과 주일 미군기지에 대한 무력공격이 있을때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나 새로운 법안은 상당히 빠른 단계에서 대응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일본의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태’의 단계에서 대응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한신(阪神) 대지진이후 자위대의 출동이 재해파견의 경우 빨라졌다.하지만 전투부대로서의 출동은 법적으로 제한을 받고 있다.그러나 미군에 대한후방지원이라는 간접적인 형태의 경우 출동요건이 완화됐으며 그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을 방위한다’라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위대와 그 관련법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될지 모른다.그것은 실질적으로 일본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전수방위개념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헌법의 전수방위개념 깨져 새 법안은 또 미군과의 협력에 있어서 신속성과 효율성을 우선하고 있다.국회에 대해서는 사후 보고만으로 충분하다고 규정하고 있다.‘군사적 합리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가능한한 현장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타당할지 모른다.그러나 국민주권국가에서 그러한 현장판단만을 우선하는 것은 헌법의 제약이 없는 미국과 같은 ‘보통 국가’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헌법상 외국에 대한 무력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일본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군사적 합리성’ 우선의 발상은 무기사용 규정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새 법안 2조는 무기사용 요건을 확대하여 소형무기에 한정하지않고 있다. 선박검사활동과 수색구조활동은 해상자위대의 함정과 헬기가 담당하도록돼 있는 가운데 요건만 갖추면 고성능 기관포와 속사포 등의 사용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그런 의미에서 새 법안은 일본이 자체 영역외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기본권 중시 우호협약 전환 지금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요구되는 것은 헌법에 기초한 ‘평화적 합리성’이지 ‘군사적 합리성’은 아니다.이때문에 군사적 역할의 확대를 규정하고 있는 새 법안은 폐기돼야한다.새로운 일·미 방위협력지침도 마찬가지다.군사동맹적 색채가 짙은 일·미 안보조약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민주주의와 기본적 인권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미 우호조약’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그것이 헌법이 규정한 국제협조주의의 진정한 구체화이다.
  • 김 대통령 첫각의서 “정신개혁을”/국무회의 3일

    ◎군림 아닌 봉사하는 공무원상 제시/대통령 발언요청에 JP “할말이 없다” 3일 하오 청와대에서 조각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김대중 대통령은 ‘비장한 각오’를 피력했다.요식행위로서의 국무회의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생산성있는 토론의 장을 만들겠다는 의지였다.과거 청와대비서실이나 특정기관에 눌렸지만 신정부에서는 명실상부한 국무회의로서 기능을 다 해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통령은 무엇보다 정신 개혁을 강조했다.사인여천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군림하는 자세에서 ‘봉사하는 공무원상’을 제시했다.“국민주권과 국민봉사의 정신을 새기면서 모든 것을 솔선수범 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김대통령은 또 공무원 사회를 지배하는 비능률과 부패·타성에 대한 일대‘대청소’를 주문했다.관청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만큼 ‘기업마인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리였다.이어 학·지연·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불편부당한 인사를 당부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은 말미에 김총리서리에게 “하실 말씀이 없냐”고 물은 뒤 김총리서리가 “할말이 없다”고 하자 각료들의 회의태도에 대한 이색 주문을 했다.“과거 국무회의를 하면 전부 연필을 들고 쓰고 있는 것을 봤는데 보기에도 안좋더라.필요한 것이 있으면 쓰되 필요없는 것은 쓸 필요가 없다.혹시안쓰면 대통령이 서운해 할까봐 쓸지 모르나 그럴 필요없다” 상견례를 겸한 첫 회의에 맞게 조크성 당부로 끝낸 것이다. 이날 처리된 안건은 경북 문경·예천 등 4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 및 재선거 공고안과 박춘택 공군참모총장 임명안 등 2개 안건이다.
  • “의원 세비인상 위헌” 제소

    이석연 변호사는 5일 국회의원의 4급 보좌관을 299명 증원하고 세비를 30.6% 인상하기로 한 법령에 대해 “헌법상 국민주권주의에 위배되고 재산권 등을 침해한다”며 위헌확인을 요구하는 헌법소원을 냈다. 이변호사는 청구서에서 “국회의원들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입법권을 그들의 조직을 늘리고 세비를 전격 인상하는데 행사하는 것은 국민주권주의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세금 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재산권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미국의 대통령 문화:2)

    ◎절제·조화의 지도력 후세의 귀감/3연임 사양 민주주의 초석 다져… 국부 추앙/고향 마운트버논서 매년 귀향 환영연 재현 “여러분은 오늘 저녁 장군님의 추수감사절 만찬에 초대되셨습니다.칠면조를 즐기시고 장군님과 함께멋진 촛불 잔치로 결실의 기쁨을 감사하십시요” 안내원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들어선 다이닝 룸의 대형식탁 위에는 잘 쪄낸 통통한 칠면조를 중심으로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져 있다.벽 주위 창가에는 촛불들이 환하게 켜져 있다. 200여년전 미 독립전쟁 영웅 조지 워싱턴 장군의 두차례에 걸친 역사적인 귀향을 맞이하던 때처럼 마운트 버논에서는 지금도 매년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까지 밤마다 촛불 향연이 펼쳐진다. 조지 워싱턴의 첫번째 귀향은 1783년 12월.8년 동안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총사령관이었던 그는 왕으로 추대하려는 자기 부하들의 간청과 합중국의 새정부를 이끌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대륙회의에 군통수권을 반납하고 고향인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온다.원칙에 투철했던 그에게 총사령관 임명 당시 “전쟁이 끝나면 돌아가리라”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물론 정치인보다 농부로서의 삶을 더 갈구한 그의 본성도 작용했다. 두번째 귀향은 1797년 3월.8년의 대통령 두 임기를 마친 직후였다.혼신의 열정으로 불안했던 신생 미합중국을 확실한 독립국가로 기틀을 잡아놓아 변함없이 국민적 영웅으로 열광을 받는 그는 온국민들로부터 계속 재임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다시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왔다.이처럼 마운트 버논은 워싱턴에게는 신비스런 힘의 원천이면서도 늘 회귀본능을 자극해왔다. 국민들과의 아쉬움속에서의 작별은 워싱턴을 국부로 추앙케 했다.또한 그의 강렬한 시민민주주의 정신은 미국의 기본정신이 되었고 그가 남긴 절제의 지혜와 조화의 지도력은 후세 미 정치지도자들에게 훌륭한 귀감으로 자리매김 해왔던 것이다. 1732년 워싱턴DC 남쪽 포프스 크리크라는 곳의 담배농장주 아들로 태어난 워싱턴은 11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농장과 다섯 동생을 돌봐야 했다.정규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는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수학을 좋아했고 16살부터는 측량기사로 취직생활을 했다.군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세때 버지니아 민병대에 가담,영국군의 프렌치-인디언 전투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6년간의 민병대 생활을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그는 버지니아 시민의회 의원,대륙회의 의원 등으로 활약하다 영국과의 사태가 악화되면서 75년 대륙회의에 의해 대륙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이후 그는 엄청난 열세의 군대를 이끌고 강인한 인내와 탁월한 지도력으로 막강한 영국군을 끝내 물리치고 전쟁영웅으로 부상한다.그러나 그는 명예로운 은퇴를 택했으며 그로부터 6년후인 1789년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추대된다. 이무렵 미국땅에 타오른 국민주권주의 불길은 그해 말 전제정치의 억압에 신음하던 프랑스로 번져나가 프랑스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마운트버논 맨션 현관에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감옥의 열쇠가 기증돼 벽에 걸려 있어 미국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이 혁명을 주도한 파리 국민군사령관 라파예트 장군은 이듬해 이 열쇠와 바스티유 함락도를 워싱턴대통령에게 선사하면서 편지를 동봉했다.“친애하는 장군님,제가 함락을 명했던 바스티유의 파괴된 그림과 그 열쇠를 기증합니다.이것들은 제가 장군님께 빚진 덕에 얻어진 것입니다” 당시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 페인은 “미국의 원리와 원칙들이 유럽에 이식되어 거둔 첫열매가 프랑스혁명 입니다.그것들이 바로 바스티유감옥을 열리게 했습니다.그러므로 이 열쇠는 있어야 할 제자리로 온 것입니다”라고 후에 기록했다. 워싱턴은 이같이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이는 신생 미합중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또한 그의 두번 임기 정신은 2차대전중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4선 연임을 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의 대통령들에게 불문율의 전통으로 남게 됐다.미국 대통령은 1789년 초대 조지 원싱턴의 취임을 시발로 현재의 42대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208년 동안 모두 41명.대수와 명수가 틀린 것은 22대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한 임기를뛰어 24대 대통령을 또 역임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은 이들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국부로 떠받들여져온 워싱턴은 대통령랭킹 조사에서 에이브러햄 링컨,프랭크린 루즈벨트와 함께 빅3로 불린다.어떤 조사던 상위 셋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올봄 719명의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지도력 ▲업적및 위기관리능력 ▲통치기술 ▲인재등용 ▲퍼스낼리티 등 5개분야로 나누어 점수를 매기고 종합점수를 산출한 라이딩스&매키버 조사에 따르면 1위는 링컨(16대),2위는 루즈벨트(32대),3위가 워싱턴으로 돼있다. 4위는 토마스 제퍼슨(3대),5위 테어도어 루즈벨트(26대),6위 우드로우 윌슨(28대),7위 해리 트루만(33대),8위 앤드류 잭슨(7대),9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10위 제임스 매디슨(4대) 순으로 나타나 있다. 97년의 또 다른 조사인 위팔드의 조사와 96년 슐레진저 조사에는 10위까지에 매디슨 대신 제임스 폴크(11대)가,95년 닐의 조사에는 로널드 레이건(40대)이 포함되는 등 약간의 차이가 있을뿐 각 조사가 대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이딩스 & 매키버 조사에서 워싱턴의 랭킹을 분야별로 보면 인재등용에서만 1위를 기록했고 퍼스낼리티 2위,지도력과 업적및 위기관리 3위,통치기술 7위를 보이고 있다.역사가들은 워싱턴의 토마스 제퍼슨 국무장관,알렉산더 해밀턴 재무장관,존 제이 대법원장 등 선택을 가장 환상적인 인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당선 당시 국민적 성원을 한몸에 안고 취임했던 이들 대통령들에 대한 재임 4년후 혹은 8년후 국민들의 반응은 천차만별로 나타났다.워싱턴,프랭클린 루즈벨트와 같이 재임을 강요받을 만큼 성원을 받은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각료들의 부정부패로 손가락질을 받은 워렌 하딩(29대)이 있고,무능한 대통령의 대표로 꼽히는 프랭클린 피어스(14대)는 고향주민들로부터 귀향 환영식조차 거부당할 정도로 배척된 대통령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업적,능력,평판에 관계없이 미국의 대통령들 모두는 당대 역사의 주인공으로 한결같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그들의 생가와기념관,도서관 등에 생애 모든 자료들을 집대성 해둔채 잘 보존하고 있으며,미래의 교훈으로 훌륭히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하이오대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역대 대통령 행태 분석 필요”/순위매김 바람직한 상정립에 무의미 미국의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오하이오대학 역사학 교수 데이비드 스테베니는 대통령랭킹 조사에 대해 회의를 표시했다. ­대통령들에 대한 순위조사는 언제부터 행해졌는가. ▲1948년 트루만 대통령의 첫임기가 끝날 무렵,아서 슐레진저 교수가 55명의 탁월한 역사학 교수들을 선정,그들에게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요구한데서 시작됐다.당시 슐레진저는 취임후 수개월내에 사망한 윌리엄 헨리 해리슨(9대)과 제임스 가필드(20대)를 제외한 30명에 대해 훌륭함,보통훌륭함,평균,평균이하,그리고 실패 등으로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이같은 순위조사의 신뢰도는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대통령 자신의 능력과 시대적 상황,또한 업적 등에 대한 측정 기준이 모호한 가운데 순위를 매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또한 조사대상에 따라서도 차이가 심하다.한예로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할 때 많은 차이가 난다.존 F.케네디(35대)나 레이건의 경우 학자들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데 시민들의 평가는 매우 높다. ­대통령들의 평가 순위가 변하는 이유는. ▲근본적인 큰 변화는 없지만 퇴임 이후의 업적이나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늘 유동적이다.허버트 후버(31대)의 경우는 대공황의 여파로 초기에는 낮은 평가를 받았으나 퇴직후 32년동안 생존하면서 국제구호단체를 통한업적 때문에 평가가 좋아졌다. ­국부로 추앙받는 워싱턴이 링컨에게 순위에서 항상 밀리는 이유는. ▲그것은 응답자들이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려 있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워싱턴의 건국 자체보다는 링컨의 국가 분열을 막은 업적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순위조사의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순위 자체의 의미보다 바람직한 대통령상의 정립을 위해 과거 대통령들의 행태를 비교분석하는 일은필요한 일이다.
  • 외국인 관리직공무원 선발거부/일 도쿄고법,부분위헌 판결

    ◎원심 파기… “재일교포에 40만엔 배상하라” 【도쿄 연합】 외국인에 대한 관리직 선발시험 인정 거부가 법앞의 평등을 규정한 헌법에 위반된다며 재일한국인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일본 법원이 26일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도쿄고등재판소는 이날 도쿄도의 보건부로 근무하는 재일한국인 정향균씨(47·여)가 도쿄도를 상대로 낸 관리직 수험자격 인정과 2백만엔 손해배상청구소송의 항소심에서 청구를 기각한 1심 결정을 뒤엎고 도쿄도에 40만엔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외국적의 직원에 대해 승진시험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과장급 관리직에의 승진 기회를 봉쇄하는 것으로 법앞의 평등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에도 위반된다”며 판결이유를 밝혔다.재판부는 또 “모든관리직에 대해 국민주권의 원칙에 의거,외국인의 임용을 일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직무의 내용과 권한 등에 따라 외국인의 임용이 허용되는 관리직도 있다”고 덧붙였다.
  • 내각제 반대 서명운동/여 초선의원 25명

    ◎여야의원 100명 동참 목표 이우재 홍준표 김문수 이국헌 의원 등 신한국당 초선의원 25명으로 구성된 ‘국민주권 빼앗는 양김야합 내각제 음모 분쇄 투쟁위원회’소속 의원 11명은 5일 낮 국회에서 만나 오는 8일까지 여야 의원 100명을 상대로 내각제 개헌 반대 서명을 받기로 했다. 의원들은 이날 회동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내각제 개헌 기도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내각제를 반대하는 여야 의원들의 결집이 시급하다고 판단,개헌저지선인 의원 100명을 상대로 8일까지 서명을 받은뒤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 이날까지 내각제 반대 서명에 참여한 의원은 권철현 김광원 김길환 김무성 김문수 김영선 유흥수 맹형규 박세환 박시균 박종웅 서석재 서한샘 송훈석 안상수 오양순 유용태 이국헌 이신범 이우재 이원복 이재오 임인배 전석홍 정의화 정형근 허대범 황규선 홍문종 홍준표 황학수 의원 등 31명이다.
  • 미는「과소비추방」간섭말라/적자국 시민운동 막겠다는건 횡포(사설)

    우리나라 민간단체가 벌이고 있는 과소비추방운동을 미국관리가 조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의 분노가 증폭되고 있다.미 무역대표부 션 머피 아시아·태평양지역담당관은 지난 10일부터 14일까지 이른바 「과소비조사」를 편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13일 끝난 통상협상에서도 정보통신서비스와 기기구매에 대해 외국기업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고 우리정부에 요청한 바 있다.미측은 한술 더 떠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통신기기기업체의 자재를 우리기업이 구매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정부가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미측은 오는 7월까지 그같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역보복조치를 하겠다는 엄포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민적 분노 불러일으켜 미국은 그같은 통상횡포에도 모자람이 있는지 민간단체가 벌이고 있는 과소비추방운동까지 통상압력카드로 이용하기 위해 한국민의 소비행태를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한국은 막대한 무역적자와 외채누적으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경제가 추락하자 민간단체가 『경제만은살리자』며 소비절약운동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해 미국과의 무역에서 무려 1백16억달러,올들어 1월 한달동안 10억7천만달러의 적자를 낸 바 있다.올해 한국의 대미적자는 작년수준을 훨씬 넘을 것이 분명하다.미국은 이처럼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는 나라에 와서 「과소비조사」를 폄으로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미국은 과연 연간 1백16억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는 한국에 무엇을 얼마나 더 팔겠다는 것인가. 한국은 올들어 2달동안 무역적자가 무려 55억달러에 달하고 있다.무역수지에 비상이 걸리자 시민단체가 미국제품뿐 아니라 고가외제품구매를 자제할 것을 시민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경제를 살리기 위해 「소비절약운동」을 벌이는 것까지 미국이 조사를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내정간섭차원을 넘어 외국의 시민운동(결사의 자유)을 규제하려는 초국제적·초법적 행위로 보인다.미국정부는 자국기업이나 시민이 벌이고 있는 수입반대운동을 막을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소비절약은 자구의 노력미국은 걸핏하면 민간의 수입반대운동에 편승하여 반덤핑관세를 부과하거나 긴급수입제한 등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높이고 있고 미 통상법 301조를 내세워 보복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그런 나라가 막대한 무역적자와 외채위기에서 헤어나기 위해 국민 스스로 벌이고 있는 소비절약운동까지 간섭하고 압력을 넣는 것은 중상주의시대 포함외교보다 더 심한 「경제침략행위」가 아닌가. 한국은 지난 95년 미국과의 자동차협상에서 조세주권을 침해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자동차세 세율을 인하했고 통상주권도 수차례나 양보한 것을 우리국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정부는 앞으로 국가주권을 훼손하는 미국의 통상압력을 과감히 배척해야 할 것이다.정부는 외국기업을 내국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거나 민간기업의 자율적인 구매행동을 금지시키는 일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으므로 더이상 미국에 끌려다니는 통상외교를 해서는 안된다. ○저자세 통상외교 안된다 특히 미국의 이번 「과소비조사」는 한국에 대한 통상주권이나 조세주권을 넘어선 「국민주권」의 침해라고 생각한다.이번 조사는 정부간 협상을 넘어선 한국국민을 상대로 하는 압력이나 다름이 없다.미국이 절약운동시비를 계속한다면 국민 모두가 미국상품 불매운동을 펴는 것이 민족의 긍지를 살리는 길이다.
  • 이한동 의원의 새 정치 역설(오늘의 인물)

    신한국당 이한동의원은 원내 총무를 세번이나 지냈다.그래서 현 정치권 내에서는 내로라 하는 「국회 해결사」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17일 난항속의 개원정국에 대해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고 나섰다.고려대 산업대학원 초청으로 「15대 총선과 한국정치의 발전과제」라는 주제아래 가진 강연에서다. 이의원은 먼저 개원국회가 열리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소회부터 밝혔다.그리고는 「타협과 인내의 원칙」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강조했다.평범한 진리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해법이라는 지론을 폈다. 이어 대여강공을 펴고 있는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를 겨냥 했다.그가 차기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나선 터여서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진다.김총재와 같은 반열에 끼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는 김총재의 「지역정권교체론」에 대해 『신성한 국민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또 『영남정권,호남의 한을 호남정권,영남의 한으로 바꾸자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규정했다.이런 지역주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힘주었다. 이러한 그의 새정치 비전제시는 「안정속의 성장과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국민화합 개혁」으로 이어졌다.그러면서 『만연한 갈등과 대립을 뛰어넘는 용서와 화합,그리고 포용의 정치를 통한 희망과 신뢰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박대출 기자〉
  • 허화평 피고의 소신과 독설

    ◎“5·6공에 충성한 검찰 단죄권한 없다”/“5·18특별법 제정 배후에 운동권 움모 숨어” 허화평피고인이 17일 공판에서도 예의 소신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이른바 극우보수 논리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지나친 독설이 두드러졌다. 허피고인은 5·17 계엄확대 조치는 최규하 대통령이 시국수습을 위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라고 주장했다.당시 재야정치인들과 일부 학생들이 최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물리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쓰러뜨린다는 과격한 투쟁전략과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특히 투쟁세력들은 기존 세력을 제거하고 「빠리꼬뮨」과 같은 민중정권을 세우려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5·17조치는 일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무한 대권경쟁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며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3김씨」를 간접 비난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세력이 분열되고 과격한 민중전술을 동원하는 바람에 5공 정권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검찰이 12·12사건을 6공 때는 무혐의 처리하고 94년에는 불기소 처분했다가 이번에 기소한 데 대해 수긍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피고인은 『내란·반란죄로 기소된 사람들이 주축이 된 5·6공하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검찰 수뇌부들에게는 피고인들을 단죄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부여돼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또 민정계가 주축이 된 민자당과 그 당명만을 바꾼 신한국당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0년 2월9일의 민자당 창당선언문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한다」는 대목을 예로 들기도 했다. 5·18특별법 제정의 배후에는 운동권 세력의 음모가 숨어있다고 주장했다.요소요소에 진출한 운동권이 민주·진보세력 등으로 위장,보수우익 세력을 반민주·반통일·외세의존주의자로 매도,타격을 가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논리다. 그는 『지난번 총선때 옥중당선된 것은 지역구민이 나의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승인한 것』이라며 『현역의원을 구속해 정당활동을 봉쇄하는 것은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고 말했다.〈박선화 기자〉
  • 야,장외투쟁 돌입/여 “길거리정치” 비난… 대화시도

    ◎“여소야대 훼손” 헌소 청구도 야권이 22일 신한국당의 과반수 의석확보에 강력히 반발하며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여야간 대치정국이 더욱 경색되고 있다. 국민회의,자민련,민주당 등 야3당은 이날 중앙당과 전국 지구당사에 신한국당의 과반수 의석확보를 규탄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차량 스티커를 붙이는등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했다.〈관련기사 4면〉 야권은 또 신한국당이 4·11총선 결과인 여소야대를 뒤집은 것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주권주의」와 「국회구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신한국당 총재인 김영삼대통령을 피청구인으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야권은 이와 함께 26일 보라매공원에서의 집회를 기점으로 인위적인 과반수 확보와 4·11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범국민 서명운동도 함께 펴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헌법소원에서 야권은 헌법 제41조 1항에 규정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국회구성권」은 단순히 국회의원을 선출한다는 차원을 넘어 정당간 의석분포,즉 국회의 구도를 결정짓는 권리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야권은 25일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자민련 김종필 총재,민주당 김원기 공동대표 등 각 지도부가 시내 15곳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합동당보」를 배포한 뒤 별도 회동,향후 정국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백문일 기자〉 ◎이대표,야방문 추진 신한국당은 야3당이 22일부터 장외투쟁에 돌입한데 대해 「길거리정치」청산을 촉구하며 강력히 비난하는 한편 15대 국회의 원만한 원구성을 위한 대화국면 조성에도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신한국당은 이날 이홍구 대표위원 주재로 열린 고위당직자 회의에서 이대표의 첫 기자회견을 통해 경색정국 타개를 위한 대화를 정식 제의하고 이대표의 야당총재 방문도 적극 추진키로 의견을 모았다.〈김경홍 기자〉
  • 「과반의석 확보」 헌소/여·야 법리논쟁(정가초점)

    ◎“정당선택은 개인 자유… 헌소대상 아니다” 여/“인위적인 여대야소로 국회구성권 침해” 야 야권이 21일 신한국당의 과반수 의석확보가 위헌인지를 묻는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에 내기로 하면서 무소속 당선자의 영입을 둘러싼 여야간 법리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신한국당◁ 이날 고위당직자회의에서 『정치인의 영입문제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소원 대상이 『공권력의 행사나 불행사로 국민주권이 침해되는 경우』로 한정돼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영입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덕룡 정무장관은 『정치적 판단으로 정당의 문제를 사법기관으로 가져가는 것은 정치인 스스로 자존심을 훼손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영입 자체는 헌법소원의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지도부는 또 『원칙적으로 정치인의 정당선택은 개인의 자유소관』이라는 태도를 거듭 확인했다.무소속 당선자의 영입을 『국민의 국회구성권을 침해한 행위』라며 불법시 하는 야권의 주장은 『정치공세에 불과하며 필요하면 우리당도법률적인 검토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서청원 원내총무는 『국회구성권이란 기본권은 헌법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적시했다.『국회의원과 국민의 관계는 자유위임의 원칙에 입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회의원이 어느 정당을 택할 지는 개개인의 자유』라는 논리를 폈다.〈박찬구 기자〉 ▷야권◁ 선거를 통해 국회를 정당별로 구성할 권리,즉 국민의 「국회구성권」이 침해했다는 입장이다.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이 정부·여당의 인위적인 과반수 확보로 침해된 것은 당연히 헌법소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한국당 입당이 당선자들의 1백% 「자발적」 의지에 따른 것이라면 문제 삼을 것이 없으나 「회유」와 「설득」이 가미됐다면 기본권 침해는 명백하다는 논리다.야3당은 이와 관련,『신한국당이 당선자를 영입하기 위해 회유와 협박을 한 증거자료를 충분히 확보했다』고 자신한다. 헌법소원이 「공권력 행사로 인해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됐는지의 여부」를 가리는 만큼 신한국당의 당선자 영입을 공권력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야권은 『신한국당의 총재인 대통령은 사실상 모든 권력의 중심』이라는 논리로 반박하고 있다. 국민회의 박상천 총무는 『국민주권주의는 국민의 정부선택권(대선)과 국회구성권(총선)을 통해 민의를 표출하는 것』이라며 『헌법 1조2항에 규정된 국민주권주의의 요소인 선거권을 인위적으로 뒤집는 것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백문일 기자〉
  • “등원연계”­“개원강행”정국 심상찮다/양김회동 이후 여야의 입장

    ◎“원구성 거부 협박… 법치주의 도전” 신한국/“여소야대 파괴는 국민뜻과 달라” 국민회의·자민련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의 4일 회담 이후 15대 원구성을 둘러싼 여야의 신경전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야권이 부정선거와 표적수사를 규탄하며 등원연계 투쟁을 제기하자 여권은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강경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신한국당◁ ○…양당총재의 주장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양당총재의 주장을 고난도의 정치공세로 규정,조기에 쐐기를 박는다는 전략이다.무소속 영입을 계속 밀고 나가 다음달 5일 개원전까지 당초 목표였던 과반수 의석을 확보,국회법에 따라 개원을 강행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일부 사안별 공조를 통해 두 김총재의 공조를 와해시키는 전략도 함께 구사할 전망이다. 손학규 대변인은 양당총재의 회담직후 논평을 내고 『세상이 어느 때인데 「부정선거 운운」하며 국민을 속여 선거패배를 호도하느냐』면서 『표적수사주장은 자신들의 선거부정에 대한 처벌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최고 야당지도자들이 국회법에 명시돼 있는 법절차를 무시하고 원구성을 거부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며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공격했다.무소속 당선자 영입작업에 대해서는 『당선자들이 안정적인 개혁을 바라는 국민 여망을 받아들여 동참한 것으로 야당이 문제삼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손대변인은 『두김총재의 협박에 기가 막힌다』면서 『노욕때문에 정치를 어지럽히는 추한 모습을 더이상 보이지 말라』고 근래 보기드문 어조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국민회의·자민련◁ ○…김대중·김종필 총재는 확고한 야권공조를 통한 강력한 대여투쟁으로 가닥을 잡았다.이들은 편파수사 등 선거부정의 시인과 「여소야대 파괴」 중지 등 7개항의 요구를 내걸며 원구성 등 개원협상과의 연계방침을 분명히 했다.두총재의 핵심들은 『청와대와 여당의 태도에 변화가 없다면 여론이 악화돼도 등원거부를 결행할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부정선거문제는 이들의 정치생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내년 대선을 「권력참여」의 마지막 기회로 보는 양김은 공정성 확보없이 목표달성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여소야대 파괴」와 관련,양김은 『국민주권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여소야대가 지속돼야 정국의 고삐를 쥘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치적 위기에 몰린 양김의 야권공조는 일단 외견상으로 「완벽한 모양새」를 갖췄지만 앞으로 어느 선까지 발전할지는 분명치 않다.양김의 태생적 불화합성이나 양당의 노선차이로 지속성을 갖기가 어렵다는 분석도 많다. 그러나 내달 5일 개원까지 김대통령에 대한 양김의 「협박성 시위」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김대통령의 대응여부에 따라 투쟁의 강도와 방향이 변화될 가능성이 크다.〈박찬구·오일만 기자〉 □양김 합의문 요지 ▲총제적 부정선거 시인 및 책임자 색출­처벌을 위한 수사요구.검찰의 표적수사의 즉각중단. ▲과반수 확보공작의 즉각중단 및 입당 당선자의 전원복귀. ▲선거부정 방지를 위한 확고한 제도마련. ▲이상의 요구가 실현되지 못할 경우 국회 원구성 거부 등 중대결단. ▲대화정치 이뤄지면 정국운영 협력. ▲앞으로 필요할 경우 회동 지속. ▲전체 야권의 공동보조 추진.
  • 「민족통일과 국가주권」 위르겐 하버마스 강연

    ◎“한반도 통일 「독일식 급속통합」 답습말라”/전쟁겪은 남·북한은 동서독의 대립과 비교안돼/상호기대치 논의없는 통독의 후유증 교훈 삼길 20세기 최고의 석학중 한사람으로 평가되는 위르겐 하버마스박사(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가 처음으로 방한,30일 하오 2시 서울대 문화관 대강당에서 강연회를 가졌다.하버마스박사는 이날 「민족통일과 국민주권」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동서독과 남북한 사이에는 커다란 상황차가 존재한다』면서 『한국은 조급하게 통일의 수순을 밟았던 독일의 통일방식을 사려깊게 점검해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다음은 강연요지이다. 남북한간과 동서독 사이의 유사성을 볼때 한국인들이 독일통일의 예에서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에 대해 충분히 동의한다.독일민족과 한민족의 분열은 2차 세계대전 종식후 명백하게 드러난,미국과 소련 사이에 형성된 적대관계의 산물이다.두 나라에서는 양 진영 사이의 이념적,군사적 대립이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는데 독일에서는 냉전으로 머무르던 상황이 한반도에서는 전쟁이라는군사적 대립으로 비화됐다.이 전쟁의 충격때문에 남한에서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그 정도의 심각성은 독일의 경우 반공주의 때문에 동독의 실력자들과의 관계가 냉각된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세계적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대결이 막을 내린 이후 민족통일에 관한한 얼핏 보기에 한국에서도 동서독간과 유사한 정세가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양극적인 세계질서가 초래한 두 나라의 2차대전 이후의 운명에서 드러나는 여러가지 유사성들에 현혹돼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차이점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점들 때문에 우리는 독일에서의 경험을 너무 성급하게 한국의 경우에 확대 적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북한과 이전의 동독을 비교해보자.동독에는 전체 독일 인구의 약 5분의 1밖에 살고 있지 않았던 반면,북한의 특징은 (동독에 비해) 인구가 많다.또 북한은 정치적 자주성을 견지하고 있었다.동독이 소련의 위성국가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북한은 주체사상에기초해 중국및 러시아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 및 정치에서 나름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다.소련이 지배권을 상실한후 동독에서는 관료주의적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자신이 존재해야 할 정당성을 상실한 반면,북한은 89·90년 이후에도 중국이 견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노선과 더불어 서구의 발전모델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북한은 이러한 입장을 앞으로도 계속 견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사실 때문에 북한은 비록 절박한 어려움에 처해있긴 하지만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북한정권이 특별히 안정적인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지만 내부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자체 붕괴될 확률은 동독의 경우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북한이 폭력의 사용없이 변신하거나 해체될 전망은 일차적으로 남한에서의 경제적 성공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및 정치적 자유등이 북한 주민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는가에 달려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들이 제국주의적 세력경쟁의 결과 두 쪽으로 분열되고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두 집단에 귀속됐을 경우 민족통일의 완성이란 논의의 여지없이 전적으로 정당한 목표라 할 수 있다.이 부분에서 나는 민주주의가 동일한 민족의 혈통적 유대감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는 종족적인 민족이념의 전제가 경험적으로 볼때 틀린 주장이며,정치적으로 볼때도 위험한 것이라고 본다.장기간에 걸쳐서 볼때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민족주의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존립을 위하여 더이상 민족주의가 지닌 결속력에 의지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국민의 지위에 편입시킴으로써 법을 통해 매개된 새로운 차원의 유대성이 생겨났기 때문이다.민족국가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독일 통일과정을 뒤돌아보면서 거기서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됐다. 동서독의 주민들이 서로 상대방에 대해 기대하는게 무엇이냐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서독에서는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쌓여 있으며 동독에서는 다소 원한이번져 나가고 있다.이와 관련해 나는 세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싶다.콜 총리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동서독 사이에 짚고 넘어갔어야 할 부담조정 문제를 꼭 다루어야만 했을 시점에도 논의하지 않은채 지나갔다.또 동독의 국가주도 기업들을 처분해 6천억 마르크의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신탁협회의 사유화 전략은 엄청난 부채만을 남겨놓았고,한때 고도로 산업화됐던 동독의 지역들이 탈산업화돼가는 경향조차도 차단하지 못했다.경제,법,행정부터 대학,대중매체,군사조직까지 서독의 기존구조는 전문가들의 지도하에 동독의 모든 생활영역 및 조직속에 인수돼 동서독 주민의 태도 및 심성 차이가 더 예리하게 드러났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누구도 남한과 북한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제쯤 운좋게 통일을 맞게 될지 예견할 수 없다.앞으로 오게 될지도 모를 그날,빠른 길과 느린 길 사이의 선택이 문제가 될 경우가 있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독일인들이 조급하게 걸어간 짧은 길이 남기고 간,긴 그림자를 사려깊게 되돌아보도록 권하고 싶다.〈정리=김성호 기자〉
  • 20세기 대표적 사상가 하버마스 교수 내한

    ◎「칸트의 영구 평화론」등 주제로 강연·심포지엄 20세기 대표적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독일 프랑크푸르트대 철학과)가 서울대 초청으로 28일 방한,15일간 머물면서 서울,대구,광주등에서 강연회와 심포지엄을 잇따라 갖는다. 하버마스 교수는 철학적 사유와 현실사회의 구체적 분석을 위한 사회과학적 분석력을 종합하는 비판이론적 문제의식을 중요시하며 현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해온 석학.자본주의의 합리화 과정에서 생성된 기존 인문사회과학의 분절화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를 갖고있으며 60년대 대학의 역할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에서부터 신보수주의의 만연에 대한 경고에 이르기까지 실천적 정치활동을 병행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이론과 실천」「사회과학의 논리」「의사소통이론」「새로운 불투명성」등이 국내에 번역 출판됐다. 하버마스 교수의 이번 방한은 그의 보편주의적 이념과 가치,학문적 업적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방한일정은 다음과 같다.▲30일 서울대 문화관 대강당=공개강연(민족통일과 국민주권) ▲5월1일 서울대 경영대 국제회의실=콜로퀴엄(유럽 국민국가에 대한 성찰) ▲5월2일 고려대 인촌기념관=심포지엄(정보화사회와 시민사회) ▲5월6일 계명대 바우어관 시청각실=강의(칸트의 영구평화론) ▲5월8일 전남대 인문대 시청각실=강의(민주주의와 인권문제) ▲5월11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세미나(현대사회에 있어서 철학의 역할).
  • 선거연령 20세 위헌소원 제출

    4·11총선에서 연령미달로 투표를 못하는 대학 1∼2학년생과 직장인 등 15명이 선거연령을 만 20세이상으로 규정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제15조가 위헌이라며 12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다. 이들은 소장에서 『혼인,유해한 작업장에서의 근로,병역의무,공무원자격 및 운전면허취득자격 등의 기준은 만 18세인 데 비해 선거권은 20세로 규정돼 형평에 어긋난다』며 『이는 헌법 제1조 2항의 국민주권,헌법 제11조 1항의 국민의 평등,헌법 제24조의 선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두환­노태우 군사반란죄 공소장 전문

    피고인 전두환은 1955.9 육군사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1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제1사단장등을 거쳐 1979.3부터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하던 중 10·26 중앙정보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세칭 「10·26사건」(이하 「10·26사건」이라한다)이 발생함에 따라 10·27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부소속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라한다) 본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1980.4.14부터 7.17까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고 5.31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으로 근무하다가 8·6 최규하 대통령의 사임으로 8·27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9.1,취임하고 다시 1981.2.25 개정헌법에 따라 새로 구성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되어 3.3 취임한후 1988.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 자, 같은 노태우는 위 전두환과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으로서 1955·9 육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제9공수여단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거쳐 「10·26사건」당시에는 제9사단장으로 근무하였으며 그후 수도경비사령관,국군보안사령관을 거쳐 1981·7 육군대장으로 전역한후 정무제2장관,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등을 역임하고 1985.2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및 총재로 재직하다가 1987·12·16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2·25 취임한후 1993·2·24까지 대통령직에 있던자로서 1995·12·5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으로 서울지방법원에 구속기소되어 현재 재판계속 중에 있는자 등인바, 「10·26 사건」이후 국내정치상황은 유신헌법을 개정하여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1979·11·8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개정을 통한 정치발전을 약속하고 11·21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질서의 창출이 모색되는 가운데 12·8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행위를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가 해체되어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군 내부에서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비롯한 군수뇌부가 계엄의 성격과 목적을 「10·26사건」이후 발생한 사회혼란을 수습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국한함으로써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등 정국이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피고인 전두환이 계엄업무 수행과정에서 「10·26사건」과 관련하여 직무유기혐의로 구속된 이재전 대통령경호실 차장의 석방,청와대에서 발견된 금원의 처리,부정축재자의 처리 및 재산몰수,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출국허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승화 총장과의 사이에 잦은 의견대립으로 인해 마찰을 빚어 오던중,11월 중순경에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육사 출신들이 군요직에 배치되고 정규육사 출신의 피고인등이 중심이 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이 배제되자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고 12월 초순경 군 일각에 피고인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곧 실권이 없는 한직으로 인사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총장이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피고인 전두환의 인사조치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지자,피고인등은 위 전두환에 대한 인사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소속 장교들의 군내입지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정승화총장이 「10·26 사건」당시 박대통령 시해 현장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이하「육본」이라한다)로 동행한 사실로 인한 일부 군인들 사이에 정승화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을 기화로 이미 그동안의 수사과정에서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정승화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강제연행하여 그 지휘권을 박탈하는 한편,군의 정식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압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12·7경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한다)에서 서로 만나 정승화총장의 연행.조사 문제를 논의한 끝에 그 연행일을 12·12로 결정하고 피고인 전두환이 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육군중령 이학봉에게 연행장소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여 그 검토결과를 토대로 12·8경 육군참모총장 공관(이하 「총장공관」이라 한다)을 연행장소로 결정한후 12·9경 위 이학봉,보안사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 육군대령 허삼수,육본 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겸합수부 수사2국장 육군대령 우경윤 등에게 구체적인 연행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정승화총장의 연행에 대응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특수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수도경비사령관 육군소장 장태완,육본 헌병감 육군준장 김진기 등을 12·12 당일 만찬 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 차단키로 하고 피고인 노태우 등 소위 「하나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지역 주요부대 지휘관들은 그날 저녁 경복궁 구내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라 한다)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필요시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기로 하고 국방부 군수차관보 육군중장 유학성,제1군단장 육군중장 황영시,수도군단장육군중장 차규헌,제20사단장 육군소장 박준병,제71훈련단장 육군준장 백운택,제1공수여단장 육군준장 박희도,제3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최세창,제5공수여단장 육군준장 장기오,수경사 제30경비단장 육군대령 장세동,수경사 제33경비단장 육군대령금진영,국군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대령 허화평,위 이학봉·허삼수,보안사 정보처장 육군대령 권정달,위 우경윤,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육군대령 성환옥,수경사 제33헌병대장 육군중령 최석립,육본 헌병대장 육군중령 이종민,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 육군준장 정동호,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 육군대령 고명승,수경사 헌병단장 육군대령 조홍,수경사 헌병단부단장 육군중령 신윤희,보안사 보안처장 육군대령 정도영,제30사단장 육군소장 박희모,제30사단 제90연대장 육군대령 송응섭,제2기갑여단장 육군준장 이상규,제9사단 참모장 육군대령 구창회,제9사단 제29연대장 육군대령 이필섭,제9사단 작전참모 육군중령 안병호,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 육군중령 서수열,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 육군중령 박덕화,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 육군중령 박종규등과 순차로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는 사전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박준병·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장세동·김진영 등과 함께 12·12 18·00경부터 19·00까지 사이에 위 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유사시 자신들의 병력을 신속히 동원할 수 있는 지휘부를 결성하는 한편,위 허화평·권정달·정도영 등은 보안사 상황실을 거점으로 하여 각급부대 지휘관의 전화를 도청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대동향과 병력이동 상황을 파악,수시로 위 지휘부에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고, ○위 조홍은 미리 계획한대로 12·초경 계엄업무로 수고하는 수도권 주요지휘관들을 보안사령관이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위 장태완·정병주·김진기등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12·12 18·30경 약속장소인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 상호불상 한정식집에 오게하여 유인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오전 국군보안사령관 사무실에서 현직 육군 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하려면 그 중대성에 비추어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사전승인을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절차를 무시한채 총기와 실탄을 준비하여 강제적인 방법으로 연행하라고 위 허삼수등에게 지시하고 이에 따라 허삼수·우경윤·성환옥·최석립·이종민등은 같은날 18·00경 합수부수사관 7명,경복궁 구내 주둔 수경사 제33헌병대 3개 제대 병력 60여명을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소재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집결시켜 총장공관 경비병등을 제압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권총과 엠(M)16 소총으로 무장케 한 다음 18·50경 정당한 이유없이 위 부대를 인솔하고 수소를 이탈하여 서울 용산구 한남동 소재 총장공관에 도착,각자 분담한 임무에 따라 무장한 합수부 수사관들을 총장공관 부관실,공관입구 헌병초소,공관현관등을 제압하고 제33헌병대 병력은 퇴로를 확보하고 19:10경 허삼수·우경윤이 총장공관 응접실로 들어가 정승화 총장에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진술을 받아야 하겠으니 녹음준비가 되어 있는 곳으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라고 요구하였으나 정승화 총장이 이를거부하면서 수행부관 육군소령 이재천에게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재가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하여 동인이 부관실에서 전화를 걸려고 하자 합수부 수사관 육군소령 김대균,육군소령 한길성,육군상사 박원철등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권총을 난사하여 상관인 이재천과 경호장교 육군대위 김인선등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그들의 머리와 허리 등에 총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 무렵 허삼수·우경윤은 정승화 총장을 끌고 나오던 중 우경윤이 성명불상자로부터 총격을 받고 쓰러지자 부관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길성이 허삼수를 도와 정승화 총장의 양팔을 붙잡고 박원철은 엠(M)16소총 개머리판으로 응접실 대형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정승화 총장을 위협하면서 함께 끌고 나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태워 19·30경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연행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18·20경 위 이학봉,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 정동렬과 함께 서울 종로구 삼청동소재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총장이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은 새로운 혐의 사실이 발견되어 연행.조사하여야 하겠으니 재가하여 주십시오』라고 요구하였다가 현직 계엄사령관을 연행.조사하는 것은 중대한 사안이므로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듣지 않고서는 재가를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20:20경 위 정동호·고명승에게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여 출입을 통제하라고 지시하고 정동호·고명승 등은 그시경 대통령의 승인이나 대통령 비서실과의 협의 없이 청와대 경비업무를 담당하는 제55경비대대 부대대장 육군소령 권중원 및 5분대기조 24명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출동하여 20·40경 대통령 특별경호대장 육군중령 구정길과 그 대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후 그곳 막사에 억류하고 위 제55경비대대 2개 제대 병력 64명을 추가로 출동시켜 그 일대에 배치함으로써 국무총리공관을 장악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1·30경 위 유학성·황영시·차규헌·백운택·박희도등과 함께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하고 그무렵 육군 정식지휘계통에서 정승화 총장의 원상복귀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피고인등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진압할 움직임을 보이자 피고인등은 계엄지역에서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사전승인을 받지 아니하거나 명시적인 병력출동 금지명령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지휘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선제공격하기로 하고 그 사실을 숨긴채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지시에 따라 출동할 가능성이 있는 제9공수여단,제26사단,수도기계화사단등에 전화를 걸어 그 부대장이나 참모들에게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아 달라고 회유하여 각 부대의 출동을 사전에 저지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12·12 23·00경 위 박희도에게 제1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고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해오라고 지시하고 위 조홍에게는 수경사 헌병단 병력을 출동시켜 수경사에 있는 육본 지휘부와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위 최세창에게는 특전사령관을 체포한후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으로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24·00경 위 장기오에게는 제5공수여단 병력을 출동시켜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라고 지시하고 피고인 노태우는 12·12 24·00경 위 구창회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황영시는 12·13 00·30경 위이상규에게 중앙청으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01·10경 위 박희도에게 고려대학교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0·05경 서울 강서구 공항동소재 제1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 1,2,5,6대대 병력 1천5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행주대교·능곡·수색을 거쳐 01·3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한후 제1,2대대 병력은 육본 정문에 근무중인 헌병등을 무력으로 제압한후 무장을 해제시키고 안으로 진입하여 육본 건물을 점령하고 제5,6대대 병력은 국방부정문에 근무중인 헌병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국방부 청사를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제5대대 제15지역대 소속 성명불상 장병들이 국방부 초소에 근무하는 초병 육군병장정선엽에게 총격을 가하여 살해하고 02·40경 국방부장관실에 난입하여 합동참모의장육군대장 김종환등 장성 8명의 무장을 해제시킨 다음 국방부 청사를 수색한 끝에 03·50경 지하 1층 상황실 입구에서 국방부장관 노재현을 발견하여 보안사로 연행하고, ○위 최세창은 12·12 23·30경 특전사령부(이하 「특전사」라 한다) 제3공수여단 육군중령 박종규에게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육군소장 정병주를 체포하라고 지시하고 박종규는 24·00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특전사에서 제3공수여단 제15대대 소속 1개 지역대 병력 38명으로 하여금 사령부 외곽을 포위케 한 다음,육군대위 김흥열,육군대위 나영조,육군중사 신현수,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과 함께 안으로진입하여 위 정병주와 비서실장 육군소령 김오랑이 집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육군하사 성명불상 6명이 이들에게 엠(M)16 소총으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제1수장골무지우부개방성분쇄골절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최세창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12·13 02·00경서울 송파구 거여동 소재 제3공수여단 연병장에서 2개 대대 병력 6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천호대교·강북로·한남동을 거쳐 03·00경 경복궁으로 진주하고, ○위 장기오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5공수여단 제23대대장육군중령 정낙준과 제26대대장 육군중령 장용주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정낙준·장용주 등은 12·13 02·00경 인천 북구 부평동 소재 제5공수여단 연병장에서 제23대대 및 제26대대 병력 4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경인고속도로,제1한강교를 거쳐 03·25경 용산 삼각지에 도착하였으나 국방부와 육본이 제1공수여단에 의해 이미 점령되어 있어 효창운동장으로 이동하여 진주하고, ○위 조홍은 12·12 23·30경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에게 당시 서울 중구 필동 소재 수경사에 모여 있던 위 장태완·윤성민,육본 작전 참모부장 육군소장 하소곤,합동참모본부장 육군중장 문홍구 등 육본측 장성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하고,신윤희는 12·13 03·00경 헌병단 소속 육군대위 임대식·윤태이 등으로 하여금 헌병 55명을 지휘하여 사령부 외곽과 1,2층 복도를 포위케 한 후 03·40경 육군대위 한영수,육군대위 이재우,헌병단 정보과장 군무원 최순호,성명불상 헌병 5명과 함께 사령관실로 진입하여 장태완·윤성민·하소곤·문홍구 등을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한영수가 엠(M)16 소총 1발을 발사하여 상관인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좌흉부관통상을 입히는데 그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위 이필섭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구창회의 지시를 받아 12·13 02·20경 경기 고양군 벽제읍 소재 제29연대 연병장에서 제29,30연대 병력 1천3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구파발·홍은동을 거쳐 03·30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이상규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제16전차대대 대대장 육군중령 김호영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김호영은 12·13 02·30경 경기 파주군 금촌읍 아동리 소재 제2기갑여단 연병장에서 제16전차대대 전차 35대와 병력 1백80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통일로·구파발·서대문 등을 거쳐 03·25경 중앙청으로 진주하고, ○위 박희도는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명령에 위반하여 위 송응섭에게 병력출동을 지시하고 송응섭은 12·13 03·30경 고양시 신도읍 삼송리에 집결한 제90연대 병력 1천1백여명을 인솔하고 정당한 이유없이 수소를 이탈하여 홍은동·세검정을 거쳐 06·20경 고려대학교 운동장으로 진주함으로써 계엄지역에서 각 지휘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없이 부대를 각 진퇴시키고 정당한 이유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각 수소를 이탈하고 상관인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이재천·김인선·정병주·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각 미수에 그치고 초병인 정선엽을 살해함과 동시에 피고인 전두환은 수괴로서,같은 노태우는 중요업무종사자로서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한 것이다.
  • 일교조,국기·국가 인정/새 노선 채택/현학교 운영체계도 수용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은 3일 일본국기인 히노마루의 게양과 일본국가 기미가요의 제창에 반대했던 그간의 입장을 사실상 철회하는 것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새 운동노선을 정식 채택했다. 이같은 새 노선 채택은 일교조가 40년 이상 계속돼온 문부성과의 대립관계를 청산,화해관계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날 폐막된 올해 일교조 정기총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가결된 신운동노선의 주요골자는 히노마루및 기미가요 반대 철회를 비롯 교육과 학교 운영의 자주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대해온 문부성의 학습지도요령과 교육위원회의 수용 등이다. 일교조는 그동안 기미가요에 대해 『역사적 역할과 가사가 국민주권의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어,히노마루는 『학습지도요령 등으로 학교교육에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들어 반대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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