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국민당
    2026-01-02
    검색기록 지우기
  • 이종섭
    2026-01-02
    검색기록 지우기
  • 폭격
    2026-01-02
    검색기록 지우기
  • 풍선
    2026-01-02
    검색기록 지우기
  • 잔혹
    2026-01-0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4,115
  • [시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의식부터 계몽시켜야/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시론] 북한 주민들의 인권의식부터 계몽시켜야/문순보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1927년 8월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군대에 쫓기던 마오쩌둥(毛澤東)이 연이은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한 말이다. 이 명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집단이 북한 정권이다. 그들은 억압과 폭력을 통해 주민들을 통제하며 정권을 연명하고 있다. 폭력 이외에 북한 정권이 주민을 통제하는 기제(mechanism)는 ‘세뇌’다.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된 사회에서 대중들은 ‘위’로부터의 상징조작과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권력의 미란다(miranda)와 크레덴다(credenda)를 내면화한다. 권력의 미란다는 정서적이고 비합리적인 측면을 자극하여 권력의 신비성을 조작하는 상징조작이고, 크레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측면에 호소하면서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과 존경을 끌어내는 상징조작을 일컫는다. 북한은 정권 차원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신격화하고 북한 주민들로부터 무한한 충성심을 끌어내 왔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10년이 넘은 현재까지 북한 주민들이 정권의 세뇌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삶과 견줘볼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체제에 대한 비판은 고사하고 삶의 질을 비교할 준거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교 준거점의 결여는 억압과 세뇌의 기능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든다. 북한 정권은 억압과 세뇌의 메커니즘을 통해 유례 없는 3대 세습을 진행 중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무색함을 넘어 후안무치하리만큼 북한은 폭력과 세뇌에 의존한 독재체제의 세습을 획책하고 있다. 김정은을 세 번째 마왕(魔王)으로 등극시킴으로써 북한은 김일성 일가를 신격화하려는 것이다. 개혁·개방에 대한 국제사회의 거센 압력에 굴복하면 수십 년간 주민들을 속이며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일거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이다. 지난 8일은 김정은의 생일이었다. 북한의 주장처럼 그가 1982년생인지, 김정일의 요리사 출신인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의 주장처럼 1983년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김정일의 생년 역시 그들의 계산에 따라 1941년에서 1942년으로 조작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극명히 대조되는 두 부류의 북한 인생이다. 토끼풀을 뜯어 팔며 옥수수로 연명하던 20대 ‘꽃제비’ 여성이 끝내 사망했다는 보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북한은 10여년간 만성적인 식량난뿐 아니라 재정파탄의 위기에 몰려 있으며 국가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지 오래다. 특히 2009년 11월 화폐 개혁 조치에 따른 경제혼란으로 전국 각지에서 꽃제비들이 급증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들도 적잖이 발생했다고 한다. 김정은의 생일을 맞아 북한 지배계층 내부에서는 선물을 준비하는 충성경쟁에 돌입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됨에 따라 1억 파운드(약 1734억원) 이상을 들여 평양 인근에 호화 주택을 건설하고 있고, 함경북도에도 김정은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주택이 건설 중이며 인근 철도와 도로를 닦는 데 주민들이 강제 동원됐다고 한다. 기아에 허덕이는 것도 서러운데 북한 주민들은 추운 날 노역에까지 시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은 폭력의 두려움으로 상쇄된다. 북한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말살된 전체주의 사회와 똑같다. 북한 정권은 주민들의 인권을 ‘우리식 인권’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지속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 주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의미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깨워줄 필요성이 절실하게 제기된다. 대북 풍선 날리기, 대북 방송 등과 같은 이벤트의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인권과 자유의 의미를 전파하여 그들 스스로 폭력에 저항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북한 주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며 ‘우리 민족’이기 때문이다.
  • [글로벌 시대]팍스 시니카(Pax Sinica)/전경수 서울대 인류학 교수

    [글로벌 시대]팍스 시니카(Pax Sinica)/전경수 서울대 인류학 교수

    전한과 후한을 통틀어 장구한 세월 동안 사용된 돈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오수전(五銖錢)이다. 동그란 엽전에 사각형 구멍이 나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는 ‘五’자, 왼쪽에는 ‘銖’자가 양각되어 있다. 오수전은 내륙과 도서의 동남아시아, 서역과 터키를 거쳐 로마의 경역 및 인도 고대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도 발굴되었다. 오수전은 기원 전후 강력한 힘을 자랑하였던 한제국의 국제무역용 결제화폐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국 달러와 같은 위력을 가진 셈이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자리를 굳힌 중국은 한제국을 모델로 하여 2000년 만에 세계 최강의 국가건설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미국의 견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중국대륙은 우리의 미래에 어떤 입장을 요구하는가? 지금은 중국인들이 한국으로 밀항도 하고, 조선족이 한국에서 직업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주머니를 바꾸어 차는 날이 올 것이 예견된다. 중국의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농민공’ 대신 공사판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줄을 서는 때가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400~500년 전 베이징(北京)의 동쪽 관문인 조양문(朝陽門) 밖에서 성 안의 동태를 기웃거리던 조선인 사신들의 또 다른 행색이 21세기 베이징 거리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애써 외면할 수는 없다. 거목은 그늘이 넓다. 북한은 ‘책봉’을 빌미로 이미 그늘 밑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것 같다. 이 세상에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일곱 군데다. 중국은 특별행정구역인 마카오를 앞세워 포르투갈어 사용권을 하나의 경제협력공동체로 묶어내는 회의를 개최한다. 요코하마의 아시아·태평양 회의에서 후진타오는 일련의 미팅을 했다. 또 다른 특별행정구역인 홍콩의 수장을 불러서 악수한 후 주석은 손바닥의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타이완의 국민당 최고 고문을 파트너로 불러서 환담을 했다. 소위 ‘양안관계’의 밀착이 특별행정구역의 수준까지 이르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위였다. 미국도 참여한 아·태 회의가 모두 환율에 몰입하고 있을 때, 중국은 타이완의 정치적 지위를 가늠하는 포석을 한 것이다. 댜오위다오(釣魚島·일본명 센카쿠열도) 사건으로 ‘힘’을 과시하였던 중국이 난사(南沙)·시사(西沙)군도에 관한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언행을 쏟아내는 동시에 아세안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강조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의 열기는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이어지고, 광서장족자치구의 난닝에는 아예 아세안 타운을 만들었다. 그 속에 일본과 한국의 영사관도 들어가도록 계획된 현장을 보았다.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의 고고문물연구소는 동남아고고학연구소를 병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윈난대학 민족연구원은 동남아시아 제국과의 학술교류를 강화하는 프로젝트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쿤밍시내 남부의 ‘로스완’ 상무성(商務城)은 동남아 상인들로 붐비고, 중국상품을 실은 라오스행 대형 트럭들은 꼬리를 물고 달린다. 인민해방군이 카자흐스탄 육군과 합동훈련하는 모습과 인민해방군 공군기가 카자흐스탄 기지에서 발진하는 모습이 CCTV로 반복해서 방영된다. 중국의 의료진들이 파키스탄의 전쟁피해 지역과 홍수피해 지역의 복구를 위해서 땀 흘리는 장면이 겹쳐지고 있다. 거목이 쓰러지면 주변에 피해가 크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생존전략은 일방적으로만 적용해도 곤란하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힘의 진공상태가 나타나는 순간을 능동적으로 낚아채지 않으면, 부딪치는 고래들 사이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등 터지는 새우가 된다. 새우가 살아가는 방법을 재삼 새겨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한 세기 전에 국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또다시 유사한 구렁텅이로 후손들을 몰아넣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생과 화해의 언급이 입장마다 달라지는 것은 먹고 먹히는 국제정치의 기본이다. ‘팍스 시니카’를 향한 숨가쁜 국제정세가 돌아가고 있다.
  • [부고] 김영일 전 현대백화점 대표

    김영일 전 현대백화점 대표이사가 16일 별세했다. 67세. 고인은 서울 출생으로 1968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현대미포조선 이사, 통일국민당 사무부총장, 금강개발산업 부사장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현대백화점 대표이사를 지냈다. 유족으로 부인 장성희씨와 김성민 현대홈쇼핑 대리, 김성현 섬밋뷰 이사 등 2남이 있다. 발인 19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02)3010-2631.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장·차관 5명 사임…伊총리 연정 흔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잇단 성추문과 권력 남용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이탈리아 장·차관 5명이 사임했다. 이에 따라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 연립정권의 붕괴 가능성마저 제기되는 형국이다. 15일 이탈리아 안사(ANSA)통신에 따르면 안드레아 론치 유럽담당 장관, 아돌포 우르소 경제개발부 부장관과 2명의 차관 등 5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사퇴한 장·차관 가운데 주세페 마리아 리나 교통부 차관을 뺀 4명은 지난 2008년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함께 집권 자유국민당(PDL)을 공동 설립한 동지였으나 지난 7월 결별한 뒤 ‘이탈리아 미래와 자유(FLI)’ 그룹을 결성, 현재 총리의 최대 정적인 지안프랑코 피니 하원의장 계열에 들어갔다. 우르소 차관은 “베를루스코니는 마치 벙커 같은 자신의 궁전 속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 있다.”며 사임 배경을 밝혔다. 피니 하원의장은 지난 7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쳐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고, 중도연합(UDC)을 끌어들여 새 연정을 구성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맞서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지난 13일 상·하원 의장들에게 서한을 통해 정부에 대한 신임 투표를 양원에서 실시하기를 원한다며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피니 의장은 장·차관들의 내각 철수로 응수한 셈이다. 피니 의장은 “이탈리아 지배계급은 존엄성과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책임감을 망각했다.”며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비판했다. 이탈리아 정치전문가들은 이와 관련, “시기가 문제일 뿐 조기 총선은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냉혹한 일본의 군주 히로히토의 두 얼굴

    냉혹한 일본의 군주 히로히토의 두 얼굴

    우리에게 일왕 히로히토(裕仁·1901~1989)는 1945년 항복 선언문을 낭독하는 라디오 속의 떨리는 여자 같은 목소리로 기억된다.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은 그가 ‘유약하고 유명무실한 천황’이란 가면 속에서 아흔 살 가까이 천수를 누린 냉혹하고 잔인한 군주였을 뿐이란 사실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944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쓴 역사학자 허버트 힉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와 극동 언어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미국 빙엄턴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힉스 교수가 10년간 집필한 ‘히로히토 평전’은 2001년 퓰리처상 실화 부문을 수상했다. 일본에서도 출간된 이 책은 일본과 미국 심지어 한국 정부까지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론을 정면으로 다루어 큰 화제를 모았다. 1901년 태어난 히로히토의 이름은 중국 격언에서 유래한 ‘풍요해지면 백성이 평안하다.’란 뜻이다.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는 수백 년에 걸친 왕실 근친혼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뇌막염에 걸렸고, 끝내 황실의 낙오자로 전락했다. 생후 70일에 히로히토는 궁정을 떠나 퇴역 해군 중장인 후견인 가와무라 가에서 양육된다. 가와무라 백작은 히로히토를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줄 알며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인간으로 기르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는데 힉스 교수는 용기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히로히토의 성격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했다. 유치원 때 히로히토는 러·일전쟁 놀이를 하며 자랐고, 형을 때린 히로히토의 동생은 부모의 초상 앞에서 사과 맹세를 해야만 했다. 일곱 살이 되어 입학한 학습원의 원장은 러·일전쟁 영웅인 육군 대장 노기 마레스케였다. 노기는 히로히토의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 당일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셋푸쿠(할복) 의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절약, 인내, 품위 있는 절제와 같은 노기의 가르침은 히로히토의 몸에 배었다. 운동신경이 무뎠던 히로히토는 표본 채집과 분류 연구 등에 매료돼 민달팽이, 불가사리, 해파리 등 동식물 수집을 취미로 삼는 박물학자, 해양생물학 후원자로 성장했다.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1921년 섭정 취임한 히로히토는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피해망상적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훗날 고노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총리가 된다. ‘열강들은 인종적인 경쟁심에 사로잡혀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고노에의 견해는 히로히토뿐 아니라 엘리트, 궁정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일전쟁 동안 히로히토는 군 전체의 행위를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무대 뒤에서 전략을 정하고 전쟁을 지도하는 최고 지휘관의 역할은 용의주도하게 감추었다. 중국 국민당과 4년에 걸쳐 전쟁을 치르면서 히로히토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일본 국민의 안위에 대한 위험을 무릅썼다. 특히 히로히토는 화학무기 요원과 장비를 중국에 보내는 것을 재가했으며 독가스 사용을 허가했다. 1940년에는 중국에서 세균무기를 시험 사용하는 것을 처음 재가했다. 이는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대량 독가스를 사용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패전을 앞두고 히로히토가 걱정한 것은 신하도 백성도 아니고 ‘국체’(national polity)를 상징하는 ‘3종 신기’(神器·검, 곱은 옥, 청동거울)의 안위였으며,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한 국체는 나라의 제도나 정치 체제가 아니라 바로 황조황종(皇祖皇宗)의 후손인 자기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의 정치 지배층은 천황이 침략전쟁으로 자기 나라 인민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면서, ‘정치에 대한 책임’을 온 국민이 나눠 짊어져야 할 ‘패전 책임’으로 바꿔 놓았다. 일본 국민은 도리어 천황 앞에서 신하로서 패배의 책임을 져야 했다. 타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지위를 결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점에서 그는 근대의 군주 가운데 가장 솔직하지 못했던 인물 축에 들었다고 저자는 평가했다. 일왕은 종전 후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설파하고 다녔고 전쟁 책임론이 불거질 때마다 오히려 종전의 공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방문 때는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와 함께 웃는 모습을 연출하며 인자한 평화애호자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이토록 합당하지 않은 가면과 함께 그나마 종전 직후 일본 진보 세력에 의해 표면화되는 듯했던 전쟁 책임론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다. 3만 5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남중국해 분쟁은 230억t 석유 때문?

    남중국해 분쟁은 230억t 석유 때문?

    “남중국해는 ‘제2의 페르시아만이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등의 국제분쟁은 석유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남중국해에 천문학적인 양의 석유가 매장돼 있어 주변국가들이 충돌위험을 무릅쓰고 권리 주장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 연구총원의 리쉬쉬안(李緖宣) 연구원은 남중국해는 ‘제2의 페르시아만’이라며 석유 매장량 추정치가 230억t이라는 견해를 밝혔다고 양자만보가 4일 인터넷판에서 보도했다. 이 추정치는 현재 중국 전체 원유 매장량과 맞먹는 양이다. 이런 주장은 리 연구원이 양자만보에 중국의 해양석유개발 현황과 중국 내륙과 주변 해역의 추정 매장량, 그리고 장기적인 해양 에너지 개발 전략 등을 설명하면서 나왔다. 그는 남중국해가 중국 해역 면적의 4분의3에 달하며 둥팡(東方), 야청(崖城), 원창(文昌), 후이저우(惠州), 류화(流花), 루펑(陸豊), 시장(西江) 유전 등을 포함해 여러 유전군이 산재해 있으며 개발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그는 보하이(渤海)가 상대적으로 석유 매장량이 많다면 남중국해는 가스 매장량이 우위라고 덧붙였다. 동중국해의 경우 석유 매장이 확인된 곳은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부근의 춘샤오(春曉) 가스전과 핑후(平湖)유전 등이라고 덧붙였다. 리 연구원은 그러면서 2008년에 발표된 중국 정부의 제3차 전국석유자원 평가결과를 소개했다. 이 결과에 따르면 중국 내 석유 매장 총량은 246억t에 달했다. 한편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은 중국, 일본, 타이완 등이 댜오위다오에서 분쟁을 벌이는 진정한 이유는 대량의 석유 매장 가능성 때문이라고 밝혔다고 관영 중앙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그는 3일 국민당 5대 시장 선거 세계 타이완기업 후원 총회에 참석해 “최근 댜오위다오 분쟁이 다시 벌어졌으며 이 문제는 비록 주권과 영토 분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원인은 아시아 동해가 대량의 석유를 매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남중국해는 난사군도(南沙群島)와 시사군도(西沙群島)를 두고 중국과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등의 주변국이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지역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은 이들 아세안국가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지난 7월 베트남 아세안지역 안보포럼(ARF)에서 남중국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미국 국익과 직결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아세안과의 정상회담에서 “태평양 국가의 하나인 미국은 아시아 지역민과 미래에 ‘상당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中·타이완 ECFA 발효

    중국과 타이완 간의 포괄적 경제협정인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이 12일부터 정식 발효, 중국과 타이완을 아우르는 ‘차이완(Chiwan)’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중국 상무부의 야오젠(姚堅) 대변인은 “양측이 각자의 준비 절차를 순조롭게 마무리한 데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면서 “이 협정으로 양안 경제는 공동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수백 종의 제품과 서비스에 부과하는 관세를 줄여 궁극적으로 이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양안 간 ECFA는 지난 6월29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체결됐으며, 타이완 입법원은 지난 17일 집권 국민당 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베이징 박홍환특파원 stinger@seoul.co.kr
  • 한국전쟁 속 만주 조선인

    한국전쟁은 북한의 인민군과 남한의 국군이 각각 중국과 미국을 등에 업고 벌인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이 전쟁에 뛰어든 또다른 한국인이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사라진 만주 조선인이 그들이다. ‘또 하나의 한국전쟁’(염인호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사의 일부가 된 만주 조선인들의 삶과 투쟁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옌볜, 지린, 무단장시 등 현지에서 발행된 한글신문들, 중국 당국의 문서 자료 등을 통해 만주 조선인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만주 조선인들은 일제 시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 강한 조국애와 민족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해방 전 중국 관내 지방과 소련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동북항일련군 출신의 조선인 지도자들은 해방과 함께 만주로 들어와 조선인사회를 이끌었다. 이들은 만주를 조국통일 역량의 산실로 키우자며 만주 기지론을 주창했다. 국공내전을 통해 청년들을 단련시켰고, 북한과 옌볜 각지에 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해 혁명간부를 양성했다. 이렇게 단련된 만주 조선인부대는 1949년 7월부터 순차적으로 입북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남진한 북한 인민군 21개 연대 가운데 10개 연대는 만주 조선인 부대였다. 이들의 입북을 중공의 파병으로 간주해온 기존 견해와 달리 저자는 조선인의 귀환이라고 주장한다. 전쟁 초반 북한 인민군에게 유리했던 전세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되고, 이어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만주 조선인사회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국공내전을 지원한 대가로 중국으로부터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았던 만주 조선인의 위치가 흔들리면서 중국 내 여타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중국 일반 사회에 흡수됐다. 한편 재중 한국독립당의 우익세력도 만주 조선인에 대해 북한과 비슷한 맥락의 통일전략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과 합작해 민주세력을 마련해놓고 남한과 호응해 북한의 공산세력을 몰아낸다는 전략이었다. 만주의 국민당 점령지역 곳곳에서 한독당은 조선인 사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했다. 그러나 1947년 공산당의 하계 공세 이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결정적인 수세에 몰리자 한독당의 활동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48년 고립된 채 중공군에게 포위된 선양시 인근 국민당 지구 조선인들은 대탈출을 감행했다. 1만여명의 탈출자들은 톈진에서 배를 타고 남한으로 귀국했고, 남겨진 민주자위군 대원들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3만 8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新 차이나 리포트] “정권 바뀌어도 관계악화는 안될 것 괴리감 사라지면 10년 뒤도 통일”

    [新 차이나 리포트] “정권 바뀌어도 관계악화는 안될 것 괴리감 사라지면 10년 뒤도 통일”

    1980년 설립된 샤먼(廈門)대 타이완 연구소(TWRI)는 중국 정부의 타이완 정책에 대한 영향력에 있어 손꼽히는 싱크탱크다. 중국 교육부와 푸젠(福建)성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타이완 정치, 경제, 역사, 문학, 양안관계 등 5개 분야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이곳을 이끌고 있는 류궈선(劉國深) 소장으로부터 양안관계의 오늘과 내일을 들어봤다. →2004년 서울신문의 첫 ‘차이나리포트’ 취재 당시 전문가들은 양국 관계를 낙관하기 어렵다고 했다. -2003년 민진당 집권 이후, 독립을 선포하려 하는 타이완의 일련의 행동과 정책 및 조치들로 대륙(중국)이 많이 긴장한 상태여서 그런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2008년 국민당이 재집권하면서, 긴장관계를 해결하려는 여러 움직임이 있었고 현재는 일종의 화해 모드가 조성돼 있다. 대륙과 민진당의 관계를 보더라도 국민당에 버금가는 여러 가지 교류 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양안 관계는 과거처럼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나. -그렇지 않다. 첫째, 양안간 교류가 밀접한 상태에 있고, 이는 양안 국민과 국제사회 지지를 받고 있다. 둘째, 기술 관료들의 정책 조율과 자문이 안정돼 있어, 누가 집권하든 타이완의 이해관계에 따를 것이다. 민진당 내부에서도 평화적인 교류를 털어버릴 만큼 극단적인 세력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또 정치적 영향력면에서 볼 때 아직까지 민진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크지 않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중 한 축이 타이완에 대한 무기 수출 문제인데. -지금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평화 교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 무역, 민간 생활, 사회 분야에 대한 완전한 교류·평화적 발전 단계에 도달하면 최고위 정책결정 차원에서 정치적인 접근이 필요한 사안이다. →실질적으로 양안 관계가 좋아졌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고 있나. -정치인 사이에서야 투쟁이나 반대 의견도 존재하지만 민간은 실제로는 거리낌이나, 적대 의식 없이 교류하고 있다. 나 역시 민진당 인사들이 대륙에 오면 함께 술을 먹기도 하고 개인적 교분을 쌓는다. 또 섬과 대륙의 범죄 집단이 손을 잡고 자기들만의 사업을 진행시키기도 한다. →통일이 언제쯤 될 것으로 예상하나. -2030년 혹은 2050년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통일의 시점은 큰 의미가 없다. 통일에 대한 관념, 지향점이 시시각각 변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양안 국민들이 서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고 격리감·괴리감 없는 상태를 통일로 본다면 2020년도 충분히 가능하다. 샤먼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타이완 ‘공수처’ 추진

    최근 최악의 법조비리가 발생한 타이완이 공직자 부패 전담기구 설치를 추진하는 등 강도 높은 사정기관 개혁에 착수했다. 최근 ‘스폰서 검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지난 정권부터 이어져 온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여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한국과 대조를 이룬다. 18일 중국 신화통신과 타이완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잉주 타이완 총통은 공무원 부패 척결 전담 정부 기구인 ‘염정서(廉政署)’ 설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20일 관련 부서 고위 관리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하기로 했다. 뤄즈창 총통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 “최근 법관들이 집단으로 뇌물을 받아 사법 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가 매우 높다.”면서 “총통도 이 문제를 상당히 중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 총통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염정서 설치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우둔이 행정원장과 쩡융푸 법무부장 등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우 행정원장은 고위 회의에서 염정서 설치가 결정되면 법무부 조직법을 개정해 입법원으로 넘길 방침이다. 행정원은 홍콩이 1974년 설립한 독립기구 염정공서(廉政公署)와 싱가포르의 부패조사국을 참고해 600~800명 규모의 염정서 설치를 추진 중이다. 하지만 집권여당 국민당의 일부 의원들과 제1야당인 민진당은 이미 관리들의 부패를 조사하는 ‘법무부 조사국’이 있는 만큼 염정서 설치는 필요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타이완 뒤흔든 법조계 뇌물수수

    타이완에서 엄정한 법 질서 확립과 집행을 담당해야 할 법원과 검찰이 결탁, 뇌물을 받고 무죄 판결을 내린 최악의 법조 부패사건이 드러나면서 현지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14일 타이완 뉴스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한국의 대검찰청에 해당하는 최고검찰서 특별수사팀이 7년 전 타이베이 지방법원에서 징역 19년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법원 판사와 검사가 올해 5월 고등법원 재판에서 해당 피고인을 무죄로 만든 법조계 집단 비리 사건을 적발, 비리 법조인 등 6명을 구속했다. 이날 구속된 법조인은 고등법원의 리춘디·천룽허·차이광즈 등 3명의 판사와 반차오 지검의 추마오룽 검사 1명 등 4명이다. 이들 외에도 뇌물을 전달한 허즈후이 전 입법위원의 비서와 차이광즈 판사의 지인도 증거 인멸과 서로 말을 맞출것을 우려해 구속했다. 특별수사팀은 영장 청구에 앞서 13일 오전 5시30분부터 고등법원 판사 4명의 사무실과 반차오 지검 검사 사무실, 뇌물 제공자인 국민당 출신 허즈후이 전 위원의 자택 등 34곳을 압수 수색했고, 이날 하루에만 모두 20명을 수사했다. 타이완 고등법원이 압수 수색되기는 사상 처음이며 법원과 검찰이 함께 뇌물을 받고 무죄 판결을 공모한 것으로 드러나자 사법계는 물론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라이잉자오 타이완 사법원장은 이날 밤 깊은 유감을 표명하면서 각급 법원장 등으로 구성된 사건 대책팀을 조직해 2개월 내로 법조계 질서를 개선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허즈우이 전 위원은 북서부 먀오리(苗栗)현의 입법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신주(新竹)과학단지 먀오리 퉁뤄 과학지구 개발에 관여, 1억대만달러(약 37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19년형을 선고받자 고법 판사들과 수사 검사에게 뇌물을 주고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마잉주 양안 속내 전달 후진타오 경제협력 화답

    마잉주(馬英九) 타이완 총통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에게 양안관계에 대한 자신의 원칙을 밝히면서 ‘구동존이’(求同存異)’란 표현을 사용해 눈길을 끌고 있다. 구동존이는 ‘차이점은 제쳐 두고 공동기반을 추구하자.’는 의미다. 때문에 2년 전 취임식에선 뜻은 같으면서도 다른 표현을 사용했던 마 총통이 이번엔 중국 공산당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양안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피력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사실상 마 총통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우보슝(吳伯雄) 국민당 명예주석이 12일 베이징에서 후 주석을 만나 마 총통이 전한 ‘현실을 직시하고 상호신뢰를 누적하며, 차이점은 제쳐 두고 공동기반을 추구하여 상호 이익을 창조하자.’(正視現實, 積互信, 求同存異, 續創雙贏)는 ‘16자 방침’을 전달했다. 신화통신은 이 자리에서 후 주석이 “최근 중국과 타이완이 체결한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은 양안 협력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며 앞으로 양안 관계의 정상화와 제도화를 추진해 평화 발전의 기초를 닦게 되길 희망한다고 화답했다고 보도했다. ‘구동존이’라는 표현은 1955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가 1955년 반둥회의에서 강조한 것으로 중국 공산당이 내세우는 핵심 외교원칙이다. 마 총통은 2008년에도 대중국 관계와 관련, 비슷한 맥락에서 16자 방침을 밝혔는데 그 당시엔 ‘구동존이’와 뜻은 같지만 ‘각치쟁의’(擱置爭議)란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후 주석과 우 명예주석의 회동은 중국 공산당과 타이완 국민당 등 양안의 두 집권당이 지도부 차원에서 만나는 것이 아직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양당 영수회담을 사실상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중화경제공동체 ‘차이완 시대’ 열렸다

    중화경제공동체 ‘차이완 시대’ 열렸다

    중국과 타이완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는 중화 경제공동체 시대가 열렸다. 중국과 타이완은 29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제5차 양안회담을 열어 관세 철폐와 서비스 시장 개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에 서명했다. 양안 사이에 사실상의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된 것이다. 외신들은 ‘차이완(CHIWAN: 차이나와 타이완의 합성어) 시대’가 열렸다고 타전했다. ●108개 품목은 발효직후 무관세 양안 관계를 전담해 온 천윈린(陳雲林)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 회장과 장빙쿤(江丙坤) 타이완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은 이날 양측 정부를 대신해 ECFA 문서에 서명했다. 협정은 타이완산 539개 품목과 중국의 267개 품목에 대한 상호 무관세(단계적 관세 철폐) 혜택과 20개 업종에 대한 시장 개방을 핵심 내용으로 했다. 이들 조기수확 대상 품목들은 즉시 관세 폐지 또는 감면 등 단계적 철폐를 거쳐 2년 내에 관세를 없애게 된다. 타이완의 539개 조기수확 품목 가운데 108개는 ECFA 발효 직후 무관세 혜택을, 나머지는 2년 동안 3단계를 거쳐 무관세 혜택을 누리게 된다. 서비스 분야에서 중국은 은행, 증권, 보험, 회계, 컴퓨터 서비스, 연구·개발, 컨벤션, 전문설계, 수입영화쿼터, 병원, 민용항공기 수리 등 11개 업종을 우선 개방한다. 반면 타이완은 연구·개발, 컨벤션, 전시, 특제품 설계, 수입영화쿼터액, 위탁판매, 엔터테인먼트, 항공위치추적서비스, 은행 등 9개 업종을 개방한다. 타이완계 은행들은 중국에 지점을 설립한 뒤 2년 뒤부터 위안화로 여·수신 업무를 볼 수 있게 돼 중국 진출 타이완 기업들의 재무 상황 호전이 예상된다. 협정은 이밖에도 지적재산권 보호 협정도 포함했다. 분야별로 보면 타이완의 조기수확 품목에는 농산품 18개, 석유화학 88개, 기계 107개, 방직 136개, 운수공구(자동차부품포함) 50개, 은행·보험·증권 등 금융서비스업 3개, 비금융서비스업 8개 항목이 포함됐다. 중국의 조기수확 대상 품목은 석유화학 42개, 기계 69개, 방직 22개, 운수 공구 17개 등이다. ‘양안 FTA’로 불리는 ECFA 타결로 국내총생산(GDP) 기준, 일본시장을 넘어서는 5조 3000억달러(약 6444조원) 규모의 중-타이완의 단일 거대시장이 구체화되게 됐다. 중국 자본과 노동력, 타이완 자본과 기술이 합쳐져 이미 중국에 편입된 홍콩, 마카오까지 연결하는 ‘대중화 경제공동체’의 비약적인 발전도 예상된다. ●타이완은 경제·중국은 정치이득 타이완은 무관세 혜택에 힘 입어 세계 최대 소비시장으로 성장한 중국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정보통신분야 등 고부가 가치산업에서 한국과 일본 추격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타이완은 2020년까지 최소 5.3%의 추가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이번 협정으로 중국에 비해 타이완이 더 큰 경제 이익을 거둘 수 있게 됐다. 상품무역의 조기 수확 품목에 있어서 타이완의 품목이 중국보다 배나 많을 정도로 중국 당국이 양보했다. 이는 경제적 요인보다 타이완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통일에 대비한 정치적 계산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으로서도 홍콩, 마카오에 이어 타이완까지 포함시킨 중화경제권 형성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실리가 적지 않다. 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의 이봉걸 연구위원은 “타이완 집권 국민당은 오는 7월달 안으로 협정을 비준할 것이 확실하다.”면서 “중국과 타이완은 연말까지 협정 이행의 파급효과를 본 뒤 내년부터 관세 폐지 품목과 서비스시장 개방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한편 협정 체결에 따른 후유증도 예상된다. 당장 타이완 제1 야당인 민진당과 중소기업 및 노동계에서 ECFA 체결에 반발하고 나섰다. 민진당은 28일 “타이완은 결국 중국 경제에 예속될 것”이라며 비준 거부의사를 명백히 했다. 협상 발효를 위한 의회 비준 과정에서 진통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60년 지나도 여전한 ‘끝이 없는 전쟁’

    한국전쟁의 그림자는 여전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수시로 한국전쟁의 여파에 휩싸이며, 미국과 유엔 동맹국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한국전쟁은 관련국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전쟁은 1948년 제주와 여수·순천반란에서부터 시작됐다. 반란의 뿌리는 1919년 3월 일본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만세운동에 있다. 3·1만세운동이 실패하면서 일부는 중국으로 피해 국민당과 공산당의 보호 아래 들어갔다. 다른 이들은 한국 내에서 은신처를 찾아 숨었고, 일군의 무리는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했다. 또 다른 이들은 소련에 의탁했다. 독립된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던 이들은 1945년 광복을 맞자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물밀듯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는 희생의 경험이 주를 이룬다. 1945~1948년 미국과 소련 군정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에서 일본과 이들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한(對韓) 정책의 지향점은 같았지만 달성하고자 하는 바는 너무도 달랐다. 소련은 1904~1905년 러·일전쟁 참패에 대한 인적·물적 배상을 북한에 물어 2차대전의 피해를 충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 잔존 인물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경제·사회적 개혁을 순탄하게 진행시키길 바랐다. 이처럼 한반도에 들어서는 과도정부는 다양한 목적에 부합돼야 했고, 결국 서로 다른 후원국들에 의해 남북한에 들어선 정부가 서로의 적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과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모두 흡수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미국과 소련간의 차이점은 미국은(물론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을 위해 싸울 준비가 돼 있었지만, 소련은 직접 관여하기보다 북한과 중국을 앞세워 싸웠다. 한국전쟁이 국제적인 분쟁으로 확대된 1950~1953년은 남북한 상호간에 뿌리깊은 증오를 낳았고, 이같은 적개심을 오늘날 한국의 젊은 세대들과 세계는 이해하지 못한다. 남북한간 증오는 전선을 넘어 광범위하게 자행된 잔혹성에 근거한다. 한국전쟁은 유럽의 30년전쟁(1618~1648) 당시 공포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한국군 전사자수를 능가했다. 기근과 질병, 유엔군의 무자비한 폭격, 남북한군에 의한 인질과 포로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에 패배한 북한은 수많은 양민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해 학살했다. 수천명이 집단농장으로 끌려가 행방불명됐다. 전쟁의 정당성과 김일성의 ‘신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됐다. 남한의 사정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비무장지대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공산주의 게릴라들과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산당 잔당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남한의 인구는 급격히 줄었다.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은 잔혹했던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김일성은 1953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휴전할 생각이 없었다.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경제적 재건과 군사적 안보의 열쇠를 쥐고 있었기에 결국 김일성은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길 거부했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과의 상호안보조약체결과 10억달러 원조, 한국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한국·일본에 주둔하는 미군이 한국을 방위한다는 약속을 얻어낸 뒤에야 휴전을 받아들였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전쟁 목적을 양보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지불했고, 현재도 지불하고 있다. 3년간의 전쟁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민간인과 군인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2차대전에서 입은 인명피해와 맞먹는다. 이 밖에 교전국 인명피해는 50만명에 이르며, 이중 90%가 중국인이다. 휴전협정은 순식간에 한국인들로 하여금 정복이 아닌 전복을 위한 전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미국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핵전쟁이나 재래식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억지한다는 데 암묵적 합의를 도출해 냈다. 그렇다면 남북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남북한은 계속해서 주변국들과 미국의 우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국이 태평양의 주요 국가로 발전해 나가지 않는 한, 역사와 지정학적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의 미래는 다른 여타 포스트모던 시장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밝다. 반면 북한은 이미 실패한 국가이지만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독재체제는 3대를 넘기지 못한다. 다음에 닥쳐올 ‘제국’의 몰락을 국제사회는 준비 없이 맞아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렇게 열망하는 새로운 통일된 국가를 전쟁 없이 세울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實錄, 한국전쟁] (4)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상이몽

    휴전협상을 앞두고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일 년째 접어들자 기력이 쇠한 중국은 휴전을 꾀했다. 김일성도 정전을 원했지만,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유엔에 휴전을 발의하는 한편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 등 적극적인 군사 반격을 재촉했다. ●“스탈린, 끝없는 마오요구에 짜증” 베이징은 휴전교섭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달라고 모스크바에 요구했다. 모스크바는 오히려 한 발을 뺐다. 마오쩌둥이 휴전을 주도하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토르쿠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총장은 “소련이 전쟁의 주체자가 아님을 보여주려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휴전협정 문제가 처음 거론된 1951년 6월5일부터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교섭을 제안한 6월23일까지 모스크바와 베이징 그리고 평양 간 비밀문서의 교환이 급증했다. 마오쩌둥의 정전제안에 대해 스탈린의 첫 반응은 신통찮았지만, 김일성과 가오강 중국 동북성 서기를 만나고 나서 태도가 달라졌다. 스탈린은 6월13일 마오쩌둥에게 “정전이 현시점에서 타당하다고 판단했다.”고 긍정적인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두 공산 거목이 주고받은 서신의 형식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모스크바 주재 대사나 베이징 주재 대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고받았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지’ 같은 서두는 생략됐고,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마오쩌둥’이라고 꼬박꼬박 썼던 마무리도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석 자를 적는 것으로 끝냈다. 내용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자기주장이 강해졌다. 휴전협정 장소가 개성으로 정해진 것은 마오쩌둥의 아이디어였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6월30일자 친서에서 “다음 몇 가지 문제에 관해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면서 “회담 장소로 미국 리지웨이(유엔군 총사령관)는 원산항을 제안했지만, 북한 해군의 요새기지인 원산항에 적의 함정을 상륙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38선 부근의 개성이 적당하다고 본다. 회담개시는 7월15일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같은 날 스탈린은 “한반도에서의 군사행동 중지와 휴전을 포함한 모든 평화적 제안에 우리는 동의한다. 회담장소는 38선 인근의 개성지구를 제안한다. 귀하가 동의한다면 7월10일부터 15일 사이에 귀측 대표단과 만날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엔군에 보내는 회답문을 직접 작성해 마오쩌둥에게 보낸 친서에 동봉했다. 마오쩌둥의 의견을 100% 받아들였다. 스탈린은 또 이 친서에서 “모스크바가 휴전교섭을 지시해야 한다는 제안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럴 필요조차 없다. 교섭을 지휘할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 귀하 자신이다. 우리는 개별 문제에 대해 조언할 뿐이다. 우리는 김일성과 접촉할 수 없다. 귀하가 직접 김일성과 접촉해야 한다.”고 썼다. 스탈린은 휴전교섭 책임의 배턴을 마오쩌둥에게 넘겨버렸다. 이후 스탈린은 중국이 요청한 군사고문 파견과 6억루블의 군사차관에는 동의했지만, 추가 고문파견과 장비공급은 거부했다.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 사이에 오간 1951년부터 1953년까지의 기밀문서를 분석한 토르쿠노프 총장은 “휴전교섭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끊임없는 지원요구에 짜증을 냈고, 분노마저 느끼는 듯했다.”고 말했다. 휴전교섭의 열쇠는 마오쩌둥이 쥐고 있었다. 스탈린에게 정기적으로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충고도 받았지만 형식적이었다. 김일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박헌영은 “북한 인구의 10%가 기아상태에 있다.”면서 조기정전을 요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도 ‘유엔군 측의 요구를 다 수용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탈린은 불리한 전쟁종결을 원치 않았다. 나약한 보습을 보여 정치적 불이익을 가져왔다고 김일성을 나무랐다. ●마오, 스탈린에 협상상황 형식적 보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1951년 7월20일자 전문에서 “휴전제안에 동의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전쟁종결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 같은 견해는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3월까지 유지됐다. 3월5일 독재자가 죽자 소련 내각회의는 전쟁을 종결짓는 쪽으로 한반도정책을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에도 휴전협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월18일 반공포로 2만 7000명을 석방하는 초강수를 뒀지만, 전쟁을 종식하고자 하는 중국과 미국의 의사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타이완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영어권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잊혀진 전쟁’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서점에서 베트남전쟁에 관한 책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한국전쟁에 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콜디스트 윈터’를 쓴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책을 저술하던 2004년 미국 플로리다의 한 도서관 서가에 베트남전 관련 책은 88권이나 꽂혀 있었지만 한국전쟁 관련 서적은 4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도 그랬다. 미국이 만든 전쟁영화의 무대는 대개 베트남 정글이거나 사이공 거리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인기를 끈 작품은 ‘M.A.S.H’ 정도에 불과했다. 그나마 80년대 이후에는 사라졌다. 한국전쟁에서 3만 3000명의 미군이 희생됐고, 10만 명이 넘는 상이군인이 발생했지만, 미국의 영광은 별것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낳은 최고의 전쟁영웅 맥아더를 추락시킨 것도 한국전쟁이었다. 그래서 잊고 싶은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을 총지휘한 스탈린의 나라, 옛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2차 대전 종식과 함께 38선 이북을 점령해 공산 이데올로기를 수혈시켰다. 항일무장 게릴라 지휘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둔갑시켰다.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전쟁은 무승부로 종결됐다.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부동항을 가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 뼈아팠다. ●타이완 ‘戰禍’ 모면… 또 다른 수혜국 굳이 한국전쟁의 승자를 따지자면 중국을 거론할 수 있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마오쩌둥이었다. 냉전체제 아래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내전으로 축소했고, 마오쩌둥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성을 부인했다. 80년대 말까지 무려 40년 동안 감췄다. 중국과 마오쩌둥의 역할은 9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의 비밀문서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한반도를 무대로 치른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한때 130만명의 대군을 일시에 참전시켰다. 3년간 연인원 500만명을 동원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이다. 갓 태어난 신생 사회주의국가 중국은 비록 미국을 이기지는 못했지만, 지옥을 보여줬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계획했던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미국의 전쟁사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됐다.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국은 일본이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참전해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고 분석했다. 전쟁 기간 중 일본은 군사기지 역할을 했으며,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미군 전차상륙함(LST)은 대부분 일본인 승무원에 의해 조정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미국의 전후 복구자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다. 한국경제는 일본 예속형으로 변했다. 일본의 경제부흥에는 한국전쟁의 공이 지대했다. 타이완도 수혜국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한국전쟁을 대체하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마오쩌둥과 중국은 한반도보다 타이완 점령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3년 동안 발이 묶였고,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6월27일 7함대를 출동시켜 타이완해협을 봉쇄한 것도 중국 참전의 한 요인이었다. 해군력과 공군력이 없다시피 한 중국의 처지에서는 불리한 양안(兩岸)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보병으로 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미국은 1941년부터 1949년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워싱턴에는 중국의 공산화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차이나 로비’였다. 워싱턴 정가에 영향을 미치는 외국단체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존재감은 중국보다 워싱턴에서 오히려 더 클 정도였다. 장제스의 희망은 미국의 지원을 얻어 공산당을 밀어내고 본토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해 중국과 싸우겠다고 큰소리쳤다. 한국전쟁 덕분에 타이완은 호전적인 마오쩌둥과의 전화(戰禍)를 피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공산 측 두 주역,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같은 전쟁을 치르면서 다른 꿈을 꿨다. 상호 의견교환이 별로 없던 두 지도자 사이에서 한국전쟁이라는 공통관심사가 생기면서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목적은 달랐다. 스탈린은 전지전능한 영향력의 유지를 원했지만, 마오쩌둥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으로부터 가해지는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신생 조국을 지켜내고 싶었다. 연합군의 파상공세로 궁지에 몰린 북한이 9월28일 노동당 중앙정치국 긴급회의를 열어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0월1일 아침,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긴급 메시지를 타전했다. 김일성에게는 “중국의 동지와 협의하라.”고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는 “조선의 동지들이 절망적인 곤경에 빠졌다. 지원군을 보낼 수 있다면 속히 38선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이 건에 관하여 나는 조선의 동지에게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전할 생각이 없다.”라고 썼다. ●中 참전번복… 체면 구긴 스탈린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는 ‘마오쩌둥에게 말하지 않겠지만’이라고 했고, 마오쩌둥에게는 ‘김일성에게 알리지 않겠지만’이라고 전했다. 도요가쿠엔 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중국과 북한을 분리시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군을 출병시킨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결정이 두 번, 세 번 번복되면서 스탈린의 체면이 구겨진 것도 사실이다. 10월12일부터 14일까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내용이 ‘중국이 참전한다.’ ‘참전을 거부했다.’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는 식으로 계속 변경됐다. 비록 목적과 계산법은 달랐지만, 약속을 지킨 쪽은 마오쩌둥이었다. 독자적 참전 결단에 따라 스탈린은 중국과 마오쩌둥을 다시 보게 됐다. 중국은 공산주의국가의 ‘둘째 형’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했다. 소련은 중국에 공군 사단을 배치해 본토방위에 대한 염려를 놓게 했다.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1차 5개년 계획에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부고] 김광일 전 의원

    [부고] 김광일 전 의원

    재야 변호사 출신으로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광일 전 의원이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71세. 고인은 지난 88년 13대 총선 당시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를 통해 정치권에 입문했고, 13대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맹활약하며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대표적 ‘YS 맨’으로 불렸던 고인은 90년 3당 합당 때 민자당 합류를 거부한 데 이어 14대 대선을 앞두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이끈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한동안 YS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어 정주영 전 회장과 결별선언을 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가 문민정부 출범 이후 YS의 배려로 94년 국민고충처리위원장에 전격 발탁됐으며, 무리 없는 직무 수행으로 YS의 재신임을 얻어 95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1년2개월간 YS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최근까지 부산에서 변호사 활동에 전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수미씨와 아들 성완(동부산정형외과 원장), 성우(수원지방법원 판사)씨 등 2남이 있다. 빈소는 부산 좋은강안병원이며, 발인은 26일 오전 10시. (051)610-9677.
  • 아키노 의원, 대선 중간개표 득표율 40%이상 압도적 ‘당선’

    ‘깨끗한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아키노를 선택했다.’ 10일 실시된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50·자유당) 상원의원이 사실상 당선됐다.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는 11일 대선 중간개표 결과 아키노 의원이 40%를 넘는 득표율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빈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조지프 에스트라다(73·국민의 힘) 전 대통령과 마누엘 비야르(61·국민당) 상원의원이 뒤를 이었다. ●부패·무능 아로요 정부에 대한 심판 현지 TV 방송인 GMA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오전 8시(현지시간) 현재 79% 개표 상황에서 아키노 의원은 1223만여표를 얻어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775만여표)과 비야르 상원의원(433만여표)을 압도했다. 아키노 의원의 승리는 부패하고 무능한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 정부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크다. 집권 ‘여당 연합’인 라카스-캄피-CMD의 대선후보인 길베르토 테오도르(45) 전(前) 국방장관이 4위에 그친 것만 봐도 필리핀 국민이 집권여당에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아키노 의원은 40% 이상의 득표율 당선이라는 필리핀 정치풍토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부정부패 척결, 빈부 격차 해소라는 힘겨운 과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경륜과 능력, 기반에 의한 승리가 아니라 집권여당의 실정에다, 어머니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추모 열풍을 탄 승리라는 점도 아키노 상원의원의 약점을 보여준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키노 의원의 러닝메이트인 자유당의 마누엘 마르 로하스 후보 대신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제휴한 비나이 후보가 당선될 정도로 아키노 의원의 정치적 기반은 취약하다. ●가문정치·빈부격차 해소 등 험로 예상 과거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시절부터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가문정치’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과제도 만만치 않다. 각 지역에 똬리를 뜬 채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는 정치 족벌 가문들의 협력을 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쉽지 않다. 지지율을 어떻게 정책 수행의 추진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자동검표 시스템이 도입돼 대선 당선인이 조기에 결정됐고 정치혼란 가능성이 줄게 됐다. 7000여개의 섬으로 구성돼 있는 필리핀 역대 대선은 개표가 수작업으로 진행돼 당선인 결정까지 선거 뒤 1∼2주에서, 길게는 한 달 가량 걸렸다. 한편 아로요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하원의원에 출마, 내각제 개편 의혹을 받고 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파키스탄 美영사관 테러

    파키스탄 북서쪽인 페샤와르에 위치한 미국 영사관이 5일(현지시간) 테러범들의 공격을 받았다. 또 인근 지역에서는 정당의 대규모 집회를 겨냥한 테러가 발생, 41명이 죽고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페샤와르 주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미국 영사관 앞 초소에 차량 2대에 나눠탄 6명의 테러범들이 들이닥쳤다.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테러범들은 경찰관들의 제지를 받자 서너 차례에 걸쳐 폭탄을 터뜨리고 경찰관들에게 총을 쏘기도 했다. 총격전 과정에서 테러범 4명이 숨지는 한편 보안요원과 사설 경호업체 직원, 민간인 등 모두 3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영사관 직원 가운데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파키스탄 정부당국자들이 전했다. 주파키스탄 미 대사관의 애리얼 하워드 대변인은 “페샤와르 미국 영사관이 공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나 공격 당시 상황과 피해 규모, 사상자 발생 여부 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로버트 깁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날 이와 관련,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뒤 “폭력을 강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파키스탄 탈레반운동(TTP)의 대변인 아잠 타리크는 AFP 통신 등 주요외신과의 전화통화에서 “미 영사관 공격은 우리가 했다. 우리는 미국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공격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2800~3000명의 자살폭탄 공격대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미 영사관 테러에 앞서 부근 로워 디르 지구의 티메르가르에서 열린 퍄슈툰계 이슬람정당인 아오미국민당(ANP)의 행사장에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이 일어났다. 현지 병원장인 와킬 아메드 박사는 “41구의 시신이 도착했다. 100여명의 부상자는 대부분 위중한 상태다. 아직도 구급차가 부상자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고 밝혀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당시 ANP는 당원과 주민들을 상대로 북서변경주의 명칭을 ‘카이버·파크툰크와’로 바꾸는 개헌안에 대한 설명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테러 작전이 강화된 가운데 파키스탄 정부군이 북서부 국경지대의 탈레반과 알카에다 소탕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파키스탄의 주요 도시에서는 무장세력의 보복성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3년간 보복성 테러에 따른 사망자는 3000명을 넘어섰다. 한편 유럽연합(EU) 외교수장인 캐서린 애슈턴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테러에 대한 성명을 통해 “테러공격을 규탄하며 파키스탄과 주변 지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려 한 이번 사건에 개탄한다.”면서 “파키스탄 정부에 대해서도 EU의 유대감을 표시한다.”고 강조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씨줄날줄]인도 女權 혁명/박대출 논설위원

    승당(承堂) 임영신은 여성 장관 1호다. 초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승당은 대한여자국민당 창당을 주도했다. 최초의 여성 정당이다. 광복 첫해인 1945년 10월3일 창당됐다. 승당은 또 여성 국회의원 1호다.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경북 안동 보궐선거를 통해 등원했다. 여성 당수(黨首) 1호는 박순천 여사다. 1965년 민주당 때다. 임시정부로 거슬러 올라가면 방순희 여사가 있다. 그는 1938년 임시정부 의정원 한남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사실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인 셈이다. 반세기를 넘어 여풍(女風) 의 시대다. 정치권도 상승세다. 선두그룹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있다. 박 전 대표는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합쳐서 보면 부녀 당수 1호다. 한나라당 조윤선 의원은 최초의 여성 대변인이다. 이후로 여성 대변인 시대가 열렸다. 조 의원은 두번째 대변인을 그만둘 때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 그 기록은 지난달부터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이 이어가고 있다. 17대 총선 때부터 여성 대변인 트로이카 체제가 구축됐다. 이제 정당 여성 대변인은 최소한 절반이다. 양적으로 살펴보자. 15대 국회까지 여성 의원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했다. 제헌 의회부터 합쳐봐야 85명. 전체 의원의 2.3%에 그쳤다. 16대 들어 16명으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에 올랐다. 17대는 39명으로 배가됐다. 이번 18대는 41명이다. 전체 의원의 13.7%로 늘었다. 그래도 수적으로 열세다. 인도 상원이 최근 파격 법안을 가결했다. 연방·지방의회 의석 중 3분의1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게 골자다. 14년 표류하다 성사됐다. 다음 주 하원 표결도 무난하다고 한다. 여성 차별이 심한 인도 현실에서 가히 혁명 수준이다. 여성 비율은 연방 하원 10.8%, 상원 8.8%, 지방의원 8.8%에 불과하다. 우리 국회도 최근 공직선거법을 바꿨다. 지방의원 정수의 2분의1 이상을 공천하는 지역에선 여성을 1명 이상 공천해야 한다. 현재 광역의원 12%, 기초 의원 15%가 여성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개정안대로 하면 여성 의원이 8~10%포인트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얼핏 보면 인도에 근접한다. 그런데 허울만 그럴듯하다. 지방선거만 해당된다. 국회의원과는 무관하다. 남성 위주의 국회는 요지부동이다. 하나 더 있다. 여성 후보난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등록한 여성 예비후보는 한 자릿수에 그친다. 광역단체장 4.5%, 기초단체장 3.3%, 광역의원 3.3%, 교육감 6.3%. 여야의 영입 노력이 아쉽다. 물론 더 채우는 건 여성들의 몫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동물변호사 필요 없다”…스위스 국민투표 부결

    “동물변호사 필요 없다”…스위스 국민투표 부결

    학대받는 동물에게 변호사를 통해 법적대응(?)을 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동물들로서는 섭섭한 결정을 내린 건 스위스 국민이다. 7일 스위스에서 이색적인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학대받는 동물들에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동물) 권리를 확대하자는 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동물보호에 극성인 스위스 취리히 칸톤(주를 의미)에선 이미 1992년부터 이런 제도가 실시되고 있지만 다른 칸톤에선 동물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해 학대를 받아도 적절한 법적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취리히에서 실시되고 있는 제도를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자는 제안이었지만 스위스 국민은 10명 중 7명 꼴로 이번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졌다. 국민투표를 밀어붙인 동물보호단체 쪽에선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정치권에선 당연한 결과가 나왔다는 반응이다. 스위스 기독국민당 관계자는 “이번 투표에서 국민들은 지금의 법으로도 동물을 보호하는 데 충분하며 동물 변호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실제로 2년 전 개정된 스위스 동물보호에 관한 법은 세계에서도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돼지, 금붕어 등을 혼자 방치해선 안 되며 말과 소는 마굿간이나 외양간 밖에서 운동을 시켜야 한다는 규정 등을 포함하고 있다. 동물보호단체 쪽에선 그러나 “동물 변호사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빠짐 없이 처벌을 받게 된다.”면서 국민투표를 지지해왔다. 취리히의 한 동물학대사건 전문변호사는 “연간 (취리히에서 동물학대사건) 15만200건 사건을 맡고 있지만 다른 주에선 소송으로 가는 사건이 손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해외통신원 손영식 voniss@naver.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