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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절작가 김소진 추모특집 잇따라

    ◎한국문학,미완성 유고 단편 등 실어/도서출판 「강」,가상 통일소설 등 소개 지난 4월 34세로 요절한 소설가 김소진씨의 49제를 앞두고 추모특집과 추모집이 잇따라 나왔다. 계간 「한국문학」 여름호는 김소진 추모특집을 마련했다.김소진씨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현대문학」의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그의 미완성 유고인 단편 「내마음에 세렌게티」를 비롯해서 소설가 김성동씨 등 3인의 조사,안찬수씨 등 시인 7명의 추모시를 비롯해 서울대 영문과 후배인 조형준씨 등 5인의 추모산문이 실려있다. 정호웅씨의 「쓸쓸하고 따뜻한 비관주의」 등 문학평론가 2인의 평론도 함께 실려있다. 도서출판 「강」도 곧 김씨를 추모하는 유고 소설집 「눈사람 속에 검은 항아리」를 내놓는다. 이 유고집에는 김씨가 지난 해부터 세상을 뜨기전에 발표한 11편의 소설이 실려있다.특히 「자유공론」지에 연재되어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가상 통일소설도 실려있어 이채를 띠고있다. 미완의 소설 「내 마음…」는 150매 정도로 마무리 지을 예정이었으나 130여매로 끝나고 말았다.김씨는 죽기전 병석에서 부인에게 『마무리짓지 못하는 것이 가슴아프다』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 기행문학 거장 서하객의 강음(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8)

    ◎기인의 거룻배 드나들던 선착장엔 물이끼만/험산심곡 떠돌며 쓴 「서하객유기」 실록문학의 백미/황산자락 전쟁유물에 처절한 비명소리 들리는듯 세상에는 닮은 꼴도 많다.나라의 넓이나 지역의 대소를 막론하고 남북의 대치가 아니면 동서의 갈등이 있다.땅덩이가 클수록 그 예는 더욱 심각하다. 중국에는 양자강을 두고 강남과 강북의 차가 현저하다.같은 강소임에도 남북의 차별은 심했다.소남사람은 소북사람을 깔보며 소북사람은 소남사람을 매끄럽다 흉을 본다. 소남사람들은 자기들이 중국에서 제일 잘 산다고 뽐을 낸다.그도 그럴것이 최근의 소득조사에서 중국 최부의 농촌으로 강소의 강음과 무석이 올랐는데 그 모두가 강남이다.그중에도 강음의 화서촌은 그 소득이 전국 최고,「강남제일촌」으로 불리는데 세대당 1년 저축고가 인민폐로 10만원대(한화 1백만원상당)라고 한다. 무석에서 정북으로 한시간쯤 달렸을때 오랜만에 산이 보였다.강음박물관을 돌아보고 바로 뒷산을 올랐다.황산이란다.황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산,동쪽에 마안산,동남쪽에아산….모두가 양자강 남쪽 기슭에 물막이로 선 야산들.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오나라의 강토를 지키는 요새로서 그동안 태평천국,신해혁명,국공전쟁 등 근대사에 승패를 가름하던 격전지였다.지금도 황산의 정상에는 철근 콘크리트 9층의 망강루가 우뚝 솟았고,망강루 북녘 기슭에는 일찌기 아편전쟁때 영국함대를 노리던 포대가 남아있고,남쪽 산자락에는 국공전쟁때 홍군이 전공을 올린 기념으로 「해방군도강기념비」가 오벨리스크모양의 높다란 첨탑으로 서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필자는 망강루를 올랐다.굽이치는 양자강이 망강루를 허리삼아 휘감았다.포대 서원으로 강북의 정강을 잇는 장강대교의 공사가 한창인데 휘 한바퀴 돌아보는 안막에는 누런 황금 벌.과연 옥토 낙원으로 김이 무럭무럭한 느낌이었다.불현듯 아까 강음박물관에서 보았던 대상의 하얀 이빨,그 화석이 생각났다.2만∼3만년전의 그 화석이 글쎄 여기서 멀지않은 저쪽 청양땅에서 출토되었다니 이 땅의 속살은 얼마나 까맣게 익었을까? 나그네는 서둘러 강음을 떠났다.강음에서 다시 무석으로 돌아가는 길가 마진이란 마을이 가고 싶어서였다.겨우 20분쯤 달렸을때,왼쪽 노변에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안내판이 우람하게 서있다. 「서하객고향­마진」이라고. 또 한번 필자의 본병이 도진 것이다.그것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 병 말이다.그 사람,서하객(1587∼1641)은 필자보다 몇곱절 역마살을 타고난데다 여행기는 물론 암석·고산·하천·화산등의 자연관찰을 통한 지리학 연구에 세상이 놀랄만큼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굉조,호가 하객이다.바로 마진고을 침당하옆에 있는 남양지라는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중국문학사에서 유기의 지위는 대단했다.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선비가 여행기를 통해 정치·사회를 관찰하는가 하면 자연지리를 기록함으로써 자기의 포부를 펴거나 우주의 섭리를 터득했다.그래서 시인 묵객치고 유기 한편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평생을 두고 벼슬길에 기웃거리지 않았다.스물두살때부터 시작해서 쉰다섯살,그가 죽을 때까지 꼭 34년동안,그는 단 한개의 지팡이와 한장의 이불을 메고 강소·절강·안휘·산동은 물론 멀리 섬서·호남·광동·광서·귀주,운남 등 16개성,더구나 험산심곡을 헤맨 산새요,원숭이요,물고기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기인이었다.가만 앉아있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을만큼 넉넉한 살림임에도 그 따뜻한 집과 어진 아내를 마다한 채 한닢 거룻배를 타고 물길 닿는대로 강남과 영남을 떠돌더니 기암과 괴석에다 화산과 지진이 불시로 천지를 폭발하고 천지를 갈라버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서남지역의 험산준령을 밟았다. 우리나라 김정호 비슷하게 탐험적 떠돌이였던 그는 40여만자의 「서하객유기」를 남겼는데 아깝게도 원저는 2백만자가 훨씬 넘는 대작이었다.일기체로 기록된 그 유기는 인간의 극한을 그린 실록문학으로서 최고봉임은 물론 암석학·지질학·지도학의 기초를 닦은 과학서로도 그 의의는 파격적이다.특히 그는 유기에서 석회암의 침식현상인 캐스트(cast)를 발견했고,양자강의 원류를 곤륜산 남쪽인 금사강으로 단정한 것은 모두 지리학적인 발견으로 학술사에 기록된다. 무엇보다 그의 유기는 생동한 묘사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들 수 있다.광서·운남등지에 산재한 동굴이나 동굴속의 종유석,그 핍진한 소묘는 문학가의 상상과 과학자의 투시를 융합 성공한 것이다. 그는 동굴속의 종유석을 이렇게 기록했다. 「정측홀도수일엽,평기반공,외여당문,주적대,상하빙허,각수십장,권서현철,박제선시,엽간분개공대,야안지결지(여유일기이에서) (천장에서 갑자기 커다란 잎새 한장 거꾸로 달랑거렸다.반공에 달린 시렁이 밖으로는 문과 기둥을 마주 본 채 위 아래로 각각 수십길을 서로 기대더니 엷은 매미의 날개처럼 그렇게 널찍히 매달려 있고,잎새 사이마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은 마치 동그란 눈동자같았다.) 남양지는 들녘 복판에 있는 작은 부락.서하객의 고택은 물론 최근에 복구한 것이지만 기품이 당당했다.입 구자 네모꼴 가택이 200평은 족히 넘을 법한 민가.그는 여기서 낳고 여기서 성장했다.그의 34년에 걸친 탐험의 베이스 캠프도 바로 여기였다.그 탐험의 떠돌이는 갔지만 그의 손때가 묻고 그의 족적이 찍힌 두가지가 필자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하나는 그집 뜨락에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고 있는 한그루 나한송과 또 하나는 그 집 대문밖 동쪽 100여m쯤 침당하옆으로 지금도 고색 창연하게 남아있는 선착장과 진솔 단출한 공수식 돌다리였다.하객이 평생토록 타고 다녔던 거룻배,그 배가 정박하고 출항하던 곳이 지금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희한했다. 그 두가지는 그 집 대문 서쪽 100여m쯤에 대궐처럼 높은 까만 기와 담장에 에워싸인 그의 무덤,「명 고사하객서공지묘」라는 묘갈에 큼직한 봉분,계화의 향기로 전중 단아한 묘역보다 더욱 눈길을 끌었다.
  • 대입 과목별 가중치 확대/당정 검토

    ◎과외 필요성 줄여 사교육비 절감 정부와 신한국당은 11일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학입시에서 학교생활기록부의 특정교과목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수능영역별 가중치를 더욱 확대하는 문제를 검토키로 했다. 신한국당 함종한 제3정책조정위원장은 이날 『국문학과는 국어,생물학과는 생물과목에 높은 가중치를 두면 영어·수학 등 특정 과목에만 치중되는 과외비를 줄일수 있을뿐 아니라 전과목 과외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정은 또 서울대·고대·연대 등을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 중점 육성키로 하고 조만간 이들 대학 관계자들과 만나 대학원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에 따른 문제점과 정부 지원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 “「설공찬전」 최고 한글소설 아니다”

    ◎한국고소설학회 연구발표회서 잠정 결론/한문본 국역… 한글표기 소설로는 최고/이번 발견본은 구전된 것 일부 옮겨쓴듯 「설공찬전」은 한글로 표기된 최고의 소설이다.하지만 창작소설이 아니고 한문소설을 한글로 번역,표기한 것이기에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한글소설로 공인되고 있는 「홍길동전」보다 앞선 최고의 한글소설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국문학계는 지난 10일 대전 한남대에서 열린 한국고소설학회 37차 연구발표회를 거치면서 「설공찬전」에 대해 대체로 이러한 잠정적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최근 발견된 「설공찬전」 한글본은 이문건의 묵제일기(1535∼1567년)에 기록된 조선 중종때 채수의 작품으로 「홍길동전」(1618년)보다 100여년 앞선 것으로 밝혀져 「최고의 한글소설」이냐의 여부를 놓고 국문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설공찬전」 한글본을 독점적으로 연구해온 서경대 이복규 교수는 이날 발표회에서 「설공찬전:국문본 발견 경위와 의의」라는 주제 발표문을 통해 『「설공찬전」은 한글로 표기된 최고의 소설로서 이후 본격적인 국문소설을 등장케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국문학사에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문소설의 번역이긴 하지만 같은 시기에 한글로 번역돼 유통된 것이 조선실록에도 나오는 만큼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한글표기 소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설공찬전」과 같은 류의 국역소설이 있었기 때문에 「홍길동전」과 같은 완벽한 형태의 한글 창작소설이 등장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최고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이 너무나 완벽한 소설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 혹시 한문원본을 국역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이러한 의혹을 불식시키는 훌륭한 증거로 「설공찬전」이외에도 이번에 묵제일기에서 함께 발견된 권필의 「주생전」 그리고 「왕시봉전」 등 저자를 알 수 없는 3개의 한글표기 소설을 들고 있다. 토론자로 나선 고려대 강사 소인호 박사는 『유일한 역사기록인 중종실록에 「설공찬전이 한문으로 베끼거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됨으로써…」라고 되어있어 한문본을 국역했음이 분명하다』면서 『한글소설로 분류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한글소설은 처음부터 한글로 창작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교수도 이에 동의해 『「설공찬전」의 한글본 제목이 「셜공찬이」라고 되어있는 것은 한문원본의 제목으로 추정되는 「설공찬이」를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문원본 「설공찬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자 한문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1465∼1470)의 바로 뒤를 잇는 전기소설로 초기 고소설사의 80여년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충남대 사재동교수(국문학)는 『이번에 발견된 한글본은 내용이 너무 부분적이고 허술해 한글번역원본이라기보다는 구전되던 것을 일부 옮겨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희곡작가 이현화(이세기의 인물탐구:129)

    ◎조직속에 마멸되는 소시민 아픔 고발/냉소적인 풍자로 날카로운 현실비판/겸손한 신사지만 할일과 할말은 다해 이현화는 조용한 사람이다. 모션이 크지 않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방의 심층에 스미듯 접근하여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존재로 끝까지 남는 것이 장점이다. 그러나 괴팍스러움을 과시하지 않지만 범상한 인물 또한 아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시시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책임지고 자신의 세계를 펼친다고 믿는다.그래서 그의 작품을 선택하려는 연출가들은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이현화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만 그는 연출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협의 과정에서도 연출가의 의도를 이해하여 작품을 왜곡시키거나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영합하지 않는다. 그와 많은 작품을 해온 연출가 채윤일은 『일류교육을 받은 정상적인 직업인에다 손색없는 연극인,훌륭한 가장이지만 그에게는 원만한 구석이 없어보이고 자신의 작품을 보호하는데 편집광적」이라고 했다.그러나 일단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면 배우와 연출가의 몫으로 모든 것을 돌린다. ○연극반 후배와 화촉 그는 언제봐도 겸손하고 예의바른 신사다. 어떤 일에서는 한 템포 뜸을 들이고 어눌한 편이지만 할말은 다하고 할일은 다하고야 만다.그의 작품만 봐도 알수 있다.작품속에 담긴 작의에는 임의성과 작의성이 도사리지만 그 모든 진행에는 작가의 치밀한 계산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른바 무대위에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형식을 떠나 생생하고 직접적인 실체험과 생체험으로 관객에게 접근하여 감정에 충격을 가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두 쌍의 기이한 남녀가 벌이는 「쉬­쉬­쉬­잇」이나 「누구세요?」는 언뜻 보면 일상적 삶을 사는 현대인들의 사랑의 부재를 그리고 있는것 같지만 실은 거대한 조직사회에서 마멸되어가는 소시민의 아픔을 파헤치고 있다.문제작 「0.917」역시 성인들의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에 의표를 찌르고 있지만 인간의 무의식속에 잠재된 원천적 리비도를 표출하여 그 시대를 살고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육체적 억압을 그리고있다.이른바 수면에 떠오른 민초의 존재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그속에 잠재된 무진장의 힘이 수면에 떠오를 때의 예측할수 없는 위기감과 돌발사태에 대한 경고다.0.917이란 빙산이 잠수되어있는 부분과 수면위에 나타나있는 부분의 비율이다. 「불가불가」나 「카덴짜」같은 역사극도 논리적 전개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기 이전에 「훼절을 요구하는 왕」과 「절개를 굽히지 않는 신하」의 고문을 반복적으로 감행하여 작품전체에 「가학성」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그리고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서 역사의 흐름이 잘못되게한 책임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으며 그것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자신」임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이현화는 날카롭다.「연극은 더이상 거짓되고 피상적 현실의 사실묘사일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평론가 심정순은 「그 기법과 개념이 프랑스의 앙토낭 아르토의 잔혹극과 흡사하다」고 지적한다.연극평론가 김방옥도 지난 75년이래 지속적으로 공연되어온 그의 「누구세요?」를 보고 「아직도 이만한 작품이 다시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현화에게는 다행인지 모르나 우리 연극계로서는 불행한 일」이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그의 희곡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성장과정이 기묘하게 맞물려 있음을 짐작할수 있다. 그는 먼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월남한 실향민이다.한글교육 1세대에다 초등학교 3학년때 6·25를 만났으며 중학교입시로 상급학교에 진학했고 고교 3학년때 4·19,대학 1학년때 5·16,군입대무렵에 6·3사태 등 시대의 고비고비를 가장 섬세한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맞고 있다.그래서 초기에는 냉혹한 사회구조속에서 소멸되어사는 현대인의 자아상실문제와 정체성의 불확실성에 주력하고 80년대에 접어들자 부도덕한 조직에 짓밟히는 민초의 삶,짓밟혀도 짓밟혀도 일어서는 끈질긴 생명력에 조명하고 있다. 서울 효자동에서 운수업을 하던 이문호씨의 3남2녀중 넷째.서울중학시절 누님이 권해준 「한국문학전집」속에 실린 유치진의 희곡을 읽고 「소설이나 시보다 더 재미있는 문학장르」에 반해서희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1970년」이란 어느때보다 행운의 해였다고 기억한다.그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당선했고 한국방송공사(KBS)에 입사했으며 군제대후 연세대에 복학해서 연희연극회에 영어연극반을 신설,스트린드 베리히의 「이스터(부활제)」를 연출하다가 여주인공 엘리노어역을 맡았던 후배 이영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작품의 숫자는 많지않지만 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질때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면서 수많은 상을 휩쓸게 된 것은 다양한 주제와 창작적 흥미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나 역사성보다 개인적 삶의 의미를 심층있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또 언어사용은 간결하고 함축적이면서 약간의 냉소적 풍자와 함께 운문적이고 명료한 산문적 대사를 구사하고 있다.그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 차원에서 이성적 논리에 호소하기 보다는 감각적·심리적 충격에 호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마다 숱한 화제 독창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전통연극에서 얻어낸 영감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재구성해내는 능력도 그만의 가공할 극작술과 무대의 실제를 잘 터득하고 있는 노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50대중반인 지금도 서정성과 낭만을 잃지않고 만년 소년같은 심성과 취미를 지키는 그는 새 작품을 쓸 때마다 반드시 새 만년필을 사고 그린색 잉크를 고집하여 컴퓨터나 노트북이 아닌 육필로 작품을 탄생시킨다.언젠가부터 수면속에서도 자신의 창작생활을 연장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여전히 조용하다.그러나 그의 사고는 앙칼지고 그의 실천성은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짚고 넘어갈 것은 반드시 짚어내면서 상대방의 가슴에 스미듯 접근하여 가장 진실한 정과 진리의 빛을 남겨준다.연극계의 비범한 존재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 그는 눈부신 계절에 또 하나 새롭고 신선한 충격을 위한 그 시작을 서두르고 있다. □연보 ▲1943년 황해도 재령 출신 ▲61년 서울고 졸업 ▲67년 연세대 영문과 졸업 ▲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요한을 찾습니다」 당선, 극단 광장공연(이진순 연출),KBS(한국방송공사) 입사,드라마PD ▲75∼80년 희곡 「누구세요?」 극단민중극장공연(정진수 연출) ▲1976년 중앙일보 창간10주년기념 문예작품모집에서 희곡 「쉬­쉬­쉬­잇」 입상,극단 자유극장공연(김정옥 연출),KBS 쇼PD ▲78년 희곡 「카덴짜」 극단 민중극장공연(정진수 연출) ▲78∼84년 희곡 「0.917」 극단 쎄실극장공연(채윤일 연출) ▲79년 희곡 「우리들끼리만의 한번」극단 쎄실극장공연(채윤일 연출) ▲81년 희곡 「산씻김」동랑레파토리극 극단 공연(유덕형 연출) ▲82년 KBS 교양PD,교양다큐멘터리 및 「문화가산책」 창설 ▲87년 희곡 「불가불가」 극단 쎄실극장공연(채윤일 연출),대학극 「오스트라키스모스­도편추방」(서강대 연대 등 전국대학연극부에서 공연) ▲90년 희곡 「넋시」 국립극단공연(강영걸 연출),「산씻김」(이윤택 연출) 일본공연,KBS교양국제부장 ▲91년 「카덴짜」(정진수 연출) 일본공연 ▲96년 희곡 「키리에­위대한 위증」 극단 여인극장공연(강유정 연출),KBS위성방송부장 ▲97년 「키리에」 미주지역 순회공연,현재 한국방송공사 심의위원 〈수상〉 문학사상신인작품상(77년) 영화연극상·한국연극영화예술상·서울평론가그룹상(78년) 현대문학상(79년) 대한민국문학상(84년) 대한민국연극제및 서울극평가그룹 희곡상(87년) 동아연극상작품상·백상예술대상(88년) 〈저서〉 희곡집 「누구세요?」(예문관 79년) 「0.917」(청하출판사 85년) 불어판 「Unpossible,impossible(불가불가)」(프랑스 르밀러드줄 출판사) 등
  • 진보문학단체 「기사」의 무대 송강(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7)

    ◎항청투쟁 불지른 저항시인의 한맺힌 절규…/소곤산 자락끝 하윤이부자 무덤 비석 외로이/“항청복국” 부르짖던 옥중시 4백편 그날을 증언 들 넓고 물 많은 땅에 배 따뜻하면 무슨 근심이겠냐고 하지만 꼭 그런 법만은 아니다.명말때 문학의 실용성과 현실성,그리고 반만청의 혁명에 참여,장렬하게 희생당했던 「복사」나 「기사」 등의 문학단체들은 바로 상해를 중심한 남북근교,곧 태창·곤산·송강 등지의 시인이었고,뒷날 반만청과 반봉건을 주창했던 문학의 진보단체 「남사」가 또한 소주와 오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그곳들은 일망무진의 평원이라서 풍요로운 곡창이요,바다가 가까워서 근대화의 전진기지였다. 그중에도 「기사」의 성원들인 진자룡(1608∼1647),하윤이(1596∼1645),하완순(1631∼1647) 등은 모두 송강 사람이요,따라서 기사의 무대는 송강인 것이다. 상해시에서 서남쪽으로 30㎞쯤 벗어나는 곳,송강은 옛날 화정·운간·곡수·송릉·입택 등으로 불리웠는데 모두 시정이 물씬하다.상해의 근교라서 근대의 문물을 타고 중국 최초의 천문대와 중국 최대의 성당으로 사산 천주당이 있는가하면 서진때의 유명한 평론가 육기와 명나라때 서예가 동기창이 모두 여기 사람인데다 중화민국국부였던 손문이 그의 혁명단체 「동맹회」의 전국총회를 소집했던 곳도 바로 송강시내에 있는 명청대의 원림 취백지의 설해당이었다. 송강의 문단 맥락이나 산수 경개도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1934년 편찬한 「중국문학가사전」에 수록된 송강 출신의 문인이 90명이요,「중국미술가인명사전」에 수록된 미술가가 586명이라는 통계만으로도 문학예술의 맥을 알겠거니와 송강에는 봉황산,육보산,사산·소곤산 등 9봉이 있고,원림이 상기한 취백지말고 강남의 으뜸이라는 방탑원이 있다. 그럼에도 숭정초(1628∼) 이 고장에서 발족된 「기사),그 주요시인은 한결같이 장렬하게 순국했다.태창·곤산지역에서 먼저 발족된 「복사」처럼 명나라 초엽 소위 「전후7자」의 복고운동을 계승한 동인이다.그를 「기사」로 일컬음은 바로 「끊겨진 학문을 재기하는 기틀(기)」이란 뜻이었다.그러나 그들은 진보적이었다.정치의 진화를 강조하면서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다.그래서 현실을 반영하는데 문학의 족쇄를 풀었고 만청에 항거하여 순국의 시를 쓰다가 그 저항은 강희연간까지 불길을 지폈다. 「기사」의 맏형격인 하윤이는 한때 복건의 장락지현을 살았건만 기사를 창립,청병이 침노하자 울분끝에 투신 자살했고,「복사」의 후기수령인 진자룡은 「기사」를 창설 주도하고 그의 웅혼하면서도 창량한 시를 무기로 항청 투쟁에 참여했다.그는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강남 각지를 전전하면서 의병 투쟁을 벌이다 소주에서 피체,남경으로 압송 도중,하윤이처럼 강물에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하윤이의 아들 하완순은 나이 겨우 13살로 진자룡의 의병을 따르다가 청군에게 피체,열여섯 꽃같은 나이로 처형당했는데 그는 법정에서 최후까지 오랑캐들의 만행을 규탄했다. 더욱 놀랄 일은 하완순이 어린 나이임에도 영웅열사를 가송하거나 항청복국을 절규하는 옥중시를 4백편이나 남겼는데 그가 청군에게 압송될 때 그의 향리를 마지막 작별하면서 썼던 「운간을 이별하며」는 천고의 절창이다.「삼연기여객,금일우남관. 무한산하누,수언천지관. 이지천노근,욕별고향난. 의백귀래일,영기공제간.」 「3년을 타관 떠돌다가/이제는 또 한번 옥 살이. 저 산하가 모두 눈물인걸/누가 이 천지를 넓다하랴! 이제 가면 황천길이지만/고향 떠나기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이 젊음,넋으로 돌아오는 날/하늘가에 가물거릴 혼령의 깃발이여!」 참으로 장렬했다.한낱 열여섯살 소년 시인의 목숨이 이토록 아름답게 메아리 칠 줄이야. 그들 부자는 나란히 묻혔다.송강서 서북쪽 13㎞쯤 소곤산 낮은 산자락 저 끄트머리 양지쪽 탕만촌뒤에 쓸쓸히 묻혔다.비록 그 동남쪽에 수수라는 작은 시내가 굽이 돌았지만 그들의 넋을 위로할만한 여울이 들리거나 솔바람 소리조차 스쳐가지 않았다.쓸쓸한건 하윤이 부자의 무덤만 아니다.서진때의 대시인이요,대평론가였던 육기와 그 아우 육운이 여기 소곤산 양지쪽에 살았다는데 아무런 자취도 찾을 길이 없다. 진자룡의 무덤은 훨씬 화려했다.역시 송강에서 서북쪽으로 10여㎞쯤 진산 못미쳐 왼쪽으로 광부림이라는 마을,그 동쪽 평지에 동향으로 앉았는데 그는 청나라 건융때 충유라는 시호를 얻은데다 묘비에 묘전,묘정등 세가지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 「기사」의 장렬했던 시인들,그 무덤들을 순례하고 다시 송강으로 돌아왔다.그 유명한 방탑원과 취백지를 한바퀴 돌아야만 했다.어쩌면 「기사」들의 족적이 거기에 남았을지도 몰라서였다. 송강시 중산동로에 자리한 방탑원은 중국 강남에서 손꼽는 원림이다.그 안에는 북송,1068년에서 1094년 사이에 세운 높이 42.5m,누각형 9층의 전목을 함께 쓴 방탑을 비롯,명나라 홍무 3년(1370),방탑의 북쪽에 세운 도교의 부조로 새긴 조벽,그리고 방탑의 3층에 그려진 송대의 불상화와 송교 등이 있다. 필자는 무엇보다 날씬한 몸매에 펄럭이는 치마 모양의 방탑,더구나 서북쪽으로 약간 기우뚱하여 언젠가 피사의 탑을 닮을지 모를 방탑과 용의 대가리에 사자의 꼬리,소의 몸통에 사슴의 발톱에 기린의 비늘을 지닌 탐이라는 괴수가 세상의 보배를 지니고도 모자라 하늘의 해를 삼키려 쫓다가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마는 그 부조가 인상적이다.그런가하면 단 한장 널찍한 화강석으로 덮개를 삼은 송교와 찰랑하게 물이 찬 연당을 살짝 덮도록 가설된 널찍한 부석교는 고전미와 현대미를 융합했다. 청대 초엽,당시의 부호 고대신이란 사람이 백낙천을 흠모하는 뜻으로 시공했다는 또 하나의 원림인 「취백지」도 운취가 그윽했는데 이러한 경개가 시인을 기르고 「기사」를 형성했는지도 몰랐다.
  • 박태중씨 영장 요지·김희찬씨 영장 요지

    □박태중씨 영장 요지 피의자는 93년 2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 (주)심우를 설립,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는 자로 93년 3월부터 95년 12월까지 최동렬 등 9명이 심우에 근무하는 것처럼 허위서류를 꾸며 이들에게 1억9천8백59만원의 월급을 지급,이들을 사실상 고용하고 있던 김현철에게 1억5천6백여만원 상당의 재산상의 이익을 주고 심우에는 손해를 가했다. 94년 4월 심우 사무실에서 삼정건설 대표이사 이강연으로부터 『삼정건설 컨소시엄이 대전지역 민방 사업자로 선정되도록 공무원에 청탁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현금 5천만원을 받았다. 같은해 12월 라인건설 부회장 공병곤으로부터 라인건설이 북한 청진과 중국 연길간 도로공사를 추진하기 위해 필요한 북한주민접촉 승인을 통일원으로부터 빨리 받게 청탁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2천만원을 수수한데 이어 95년 5월에는 공무원들을 상대로 라인건설이 사업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해주겠다는 뜻으로 4억원을 받았다. 95년 10월 심우의 어음할인에 대한 여신한도를 2억원으로 하는 계약을 한미은행과 맺은뒤 심우가 (주)남정무역에 1억2천만원어치의 직물을 공급한 것으로 허위기재한 세금계산서를 한미은행 남역삼지점에 제시,어음할인금 1억1백만원을 받아 편취하는 등 96년 9월17일까지 10차례에 걸쳐 비슷한 수법으로 5억6천만원의 어음할인금을 편취했다. 96년 1월 서울 서초동 이강연 사무실에서 삼정건설의 관계회사인 대신기업의 고속도로 휴게소 4곳 운영권 임대기간을 연장되도록 관계공무원에 청탁해준데 대한 사례비조로 2억원을 수수했다. 96년 3월경 심우 사무실에서 (주)태양생명 대표이사 임재풍으로부터 『정보통신부 담당공무원에게 청탁해 태양생명 계열사인 (주)임광토건이 TRS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2억원을 수수한 자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음. □김희찬씨 영장 요지 피의자는 97년 3월12일경부터 디즈니여행사를 설립,경영하고 있는 자로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과는 78년 한성대 국문학과에 같이 입학한 동기동창이고 피해자인 거평그룹 기획조정실장 나선주와는 피의자의 고등학교 동기동창 하재영을 통해 소개받아 알게된 사이이다. 피의자는 93년말부터 광주·전남지역 민영방송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해 선정추진팀을 운영하던 대한중석 나선주로부터 김현철을 통해 공보처장관 등 관련 공무원에게 청탁해 대한중석이 민방사업자로 선정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은뒤 94년 3월 중순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거평그룹 기획조정실에서 나선주에게 『김현철 소장과 이야기가 되어있다.5억내지 10억원은 있어야 한다.연락사항이 있으면 나에게 하고 절대로 김소장에게 직접 연락하지 말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김현철과 사이에 모종의 약속이 있는 양 거짓말을 한뒤 즉석에서 로비자금 명목으로 5천만원을 교부받았다.같은해 3월30일 서울 중구 명동 대한중석 사무실에서 같은 명목으로 4억5천만원을 교부받은데 이어 같은해 7월 초순 그동안 받은 로비자금 5억원을 김현철에게 교부하거나 대한중석이 광주·전남지역 민영방송사업자로 선정되게 해주겠다는 언질을 받은바 없음에도 불구,『일이 급박하게 돌아간다.김소장측에서 5억원을 더 요구한다』는 등 거짓말로 나선주로부터 같은달 9일 상오 서울 중구 장충동 타워호텔 주차장에서 현금 5억원을 교부받는 등 부정한 청탁명목으로 3회에 걸쳐 10억원을 교부받은 자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긴급체포한 자로 계속 구속할 필요성이 있음.
  • 전겸익·증박의 상숙(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7)

    ◎청의 말발굽에 굴절한 목재의 회한 가슴저미고/공자의 수제자 자유·개혁주도한 증박의 숨결도 상해에서 서북쪽으로 두시간쯤 달리면 양자강 건너기 앞서 황소처럼 누워 있는 육중한 산을 만난다.제주도 모양의 그 산더미,이름하여 우산,9㎞의 길이에 260m의 높이.이만한 산도 장강 하류에서는 「지상대장군」이다. 북으로 남통,남으로 소주,서로 무석과 연접한 요충지.역사적으로 춘추때 오문화의 발상지,경제적으로 강남의 옥답.지금도 전국 10대농공단지의 하나,이름 그대로 「곡식이 늘 익는 곳(상숙)」이다. 산을 보면 신이 났다.한바퀴 돌 작정인데 웬걸 70리 순환도로는 2천500년이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상숙시는 우산 동쪽에 펼쳐 있기에 우산의 순례 코스로 먼저 우산공원을 기점 삼았다.거기서 잠시 달려 오른편을 보면 우산을 남북으로 종단하는 스카이웨이의 입구.그 입구를 지나 고개를 산쪽으로 돌리면 거기 언덕배기 파란 상록수.숲속으로 석계와 석물이 층층이 뵈는데 무덤들이 즐비했다. 그중에 공자의 제자 72인중 그중에도 열손가락에 꼽히는 십철의 한분인 자유(BC506∼443 성은 언,이름은 언)의 묘,「언자묘」로 불린다.우산 동쪽 그 반산에 있는 언자묘는 그 묘도나 묘갈,묘표,묘각 등 모두가 창연하고 숙연했다.비록 2천400년이상의 세월이 흘러 그 실체가 한가닥 바람이나 한줌의 흙이 되었을지라도 남송때부터 설단한 묘비와 그 석물들,특히 높이 4.6m,너비 9.7m의 세칸 방문,그 정면에 씌어진 「언자묘도」를 비롯,청나라 건융황제가 남순때 세운 석정이나 어서정 등 자유를 기리는 뜻이 역력했다.자유의 뛰어난 언행에 특히 예악을 강조,이 고장을 현가의 고을로 만들고 줄곧 「남방부자」로 추앙받았던 그 지체를 실감케했다. 언자묘 건너편으론 상숙서 제일 가는 우산관광호텔.그 호텔서 약간 동쪽으로 남송 건염4년(1130)에 세워진 높이 67m의 4면 누각형 9층탑­방탑이 훤칠한 용모로 하늘에 치켜 서 있다. 다시 순환도로의 남단을 돌아 북으로 한참 달리다 차를 멈추었다.오른쪽으로 우산 산정을 보면 하얀 바위들이 엎치락뒤치락 모임을 이루고 그 옆으로 추녀가 날개치는 누각이 아스라히보였다.그게 검각이요,검문기석이라 했다.전설로는 오왕 부차가 그 보검을 시험키 위해 산을 한번 쪼갠 것이 그리되었다는 것이다. 그 순환도로에서 필자를 안내하던 상숙박물관 학예관 장웨이꿔(장위국)는 도로 서켠으로 내려 서서 필자를 귤밭 건너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필자가 오랫동안 연민하던 전겸익(호 목재 1582∼1664)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언제나 그렇듯이 한 사람을 알고 그 사람을 만날 때면 살포시 흥분할 수 밖에.그는 여기서 낳아 명말청초의 시단을 이끌었던 「동남문종」이요,「우산시파」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었지만 그의 말년은 힐난과 조소로 추락의 비운을 겪었었다. 그 힐난이란 그가 명말에 예부상서의 높은 벼슬을 누린데다 「초학집」 「유학집」 등의 저서에 「두시전주」나 「열조시집」 등의 편주서를 남겼고,더구나 애국우민과 요산요수의 명시를 남겨 동남 제일의 선비였건만 청병이 남하하자 그 말굽에 눌려 그만 반년쯤 예부우시랑이란 감투를 둘러쓰므로서 굴절하고만 것이다. 그 조소란 그가 명말때 당쟁에 휘말려 잠시 은퇴,「명사」를 저술할 무렵,당시 오강」땅 명기였던 유여시(1618∼1664),글쎄 아무리 시재에 뛰어나고 미색이 수려하지만 서른여섯살 아래의 기생에게 홀딱 반해 그를 소첩으로 맞고 「백두홍분지기」의 러브스토리를 남긴 것이다. 유여시는 목재에게 자결을 권했지만 목재는 이를 듣지 않고 다만 칭병끝에 청조의 벼슬을 내던지고 물러났지만 그 굴절을 참회하면서 아프게 살았다.그 일단이 「낙엽」이란 시에 담겨 있다. 추로종산만목희, 조상총속겁진비. 부지옥로양풍급, 지도김능왕기비. 의월소아도유수, 이상청여정무의. 화림참담여사막, 만이한공일안귀. (만추의 자금산에 나무마다 우수수,영락은 본시 억겁의 순환일세. 이슬 방울이 하늬바람에 지는 까닭을 모른채,사람들은 금릉땅 왕기가 쇠진했다하네. 당나라 명황은 가더라도 달속에 소아와 계수나무만 남았고,서리 밟던 여인네는 옷조차 없구려. 궁중의 비원은 모랫벌처럼 참담한데,만리 추운 하늘로 기러기 한마리.) 필자는 그토록 아프게 참회하면서 세상을 등진 목재의 무덤앞에 한참 섰었다.우산으로부터 줄기차게 뻗은 지맥의 한자락을 잡은지라 그 품위도 당당했다.그 묘갈 또한 「명증광록대부궁보례부상서경행전공지묘」청나라의 작록은 한자도 올리지 않았다. 목재의 무덤 서남쪽 30m.열평남짓의 좁은 묘역에 잡초가 무성한 무덤.이것이 350년전,강남의 명기요 전목재시인의 소첩이었던 유여시의 묘,무덤앞 석비에는 「하동군지묘」,하동군은 그녀의 아호였다.목재옆에 나란히 누울수 없었지만 목재와 저만큼 떨어진 자리에 숨은듯 누운 작은 무덤앞에서 필자는 왠지 축축함을 느꼈다.그러나 이 고을 화원촌이란 이름은 우연치 않았다. 화원촌에서 다시 북상,십분쯤 달렸을때 바른편 산자락에 청말 4대 견책소설가의 하나로 꼽히는 증박(1872∼1935)의 무덤이 있다.그는 동아병부의 필명으로 청말의 부패사회와 관료를 폭로하고 국제경험을 썼던 장편 「얼해화」를 발표하여 봉건 타파와 정치 개혁에 공헌하였다. 증박의 무덤에서 다시 10분쯤 북상,우산의 북단쯤 길가에 우뚝 선 「원고사황대치선생묘도」란 방문,옳지! 원대 4대화가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화가 황공망의 무덤.그의 쓸쓸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를 끔찍히 좋아했던 필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수년에 걸쳐 긴긴 두루마리의 산수화 「부춘산거도」가 자꾸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 ‘국문학의 원형’ 설화문학 총서 내/김동주씨

    ◎고전 53권서 주제별 뽑아 한국문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설화문학을 집대성한 총서가 발간됐다.중견 한학자 김동주씨(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는 설화문학 고전적 53책에서 애정,우정·우애,충효·적선보은,풍수지리,일화 등 주제에 따라 이야기를 가려 뽑은 「설화문학총서」(전10권)를 기획,1차로 5권을 펴냈다. 우리 민족은 옛부터 이야기를 즐겨 많은 신화와 전설,민담 등이 전해 내려온다.이 이야기들은 구전되는 구비설화와 필전되는 문헌설화로 나뉘어지며,15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동안 적잖은 설화집들이 편찬됐다.그러나 설화문학은 일반적으로 야담이라 일컬어지며 저속한 읽을거리로만 인식돼 이에 대한 연구나 정리는 미흡했던 것이 학계의 실정. 이번에 설화집들을 분류·번역해 총서로 꾸민 김위원은 『설화문학은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사회·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며 『숨겨진 우리 문학의 발굴이야말로 새로운 민족문학의 텃밭을 일굴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총서발간의 의의를 밝혔다. 이번에 나온 5권의 책은 애정편인 제1권 「밝은 달아 수놓은 베개를 엿보지 말아다오」·제2권 「밤바람아 무슨 일로 비단 휘장을 걷느냐」·제3권 「매화는 피리소리에 취하여 향기롭구나」,우정·우애편인 제4권 「사립문 앞에서 친구를 맞아오네」,충효·적선보은편인 제5권 「남아가 한번 눈물을 훔친 뜻은」 등.대부분 권선징악을 강조한 내용으로 우리 민족의 알려지지 않은 생활상을 엿볼수 있다.이들 설화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소설과 이야기구조를 같이 하는 작품들도 꽤 많다.의리와 정절을 지킨 여성의 이야기인 「춘향전」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숱하게 발견되며 충효편에는 「심청전」과 닮은 이야기도 있다. 한국문학의 뿌리인 설화문학을 집대성한 「설화문학총서」.
  • 국내 최고 국문소설 발견/조선 성종때 호조참판 채수의「설공찬전」

    ◎「홍길동전」보다 1백년 앞선 작품 추정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원순)가 올해 세종탄신 6백주년을 맞아 한글고서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국내 최고의 한글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백년 앞선 국문소설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은 조선 성종때 호조참판을 지낸 채수(1449∼1515)가 쓴 「설공찬전」으로 충북 괴산 성주 이씨 문중 문고에서 수집된 한글고서 「묵재일기」에 적혀 있었다고 위원회측은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로 고서를 분석한 서경대 이복규 교수(국문학과)는 『「묵재일기」는 당시 승정원 승지를 지낸 이문건(1449­1515)이 쓴 생활일기로 채수의 「설공찬전」은 이 책의 낱장 속면에 「셜공찬이」란 제목의 필사본 형태로 적혀 있었다』면서 『13쪽 4천여자 분량의 이 소설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글소설임이 입증된다』고 주장했다. 소설은 당시 건국공신과 신흥사대부의 갈등이 본격화하던 정치상황에서 저승을 다녀온 설공찬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당대의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염라대왕의 평가를 전하는 형식.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는 『중종때 「조선왕조실록」「패관잡기」 등에 이 소설이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졌다는 기록만 남아있었을뿐 그간 실체와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면서 『학계의 구체적인 검증작업을 거쳐야겠지만 가장 오래 된 한글소설로 공인될 경우 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 양자강 하류지역(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5)

    ◎7천년의 역사·문화가 살아 숨쉰다/송·원·명·청대 거치며 걸출한 문인·묵객 대거 배출/당도·양주·항주·소주·소흥 등서 중국문학 꽃피워 지난달 12일부터 서울신문에 연재하는 「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가 5회째를 맞는다. 그동안 중국의 국민시인 이태백이 만년을 보낸 양자강 하류의 당도시와 꽃과 술과 물의 마을 양주,한말의 망명시인 김택영이 묻힌 남통,송나라 시인 진관이 공부한 고우시 등을 찾았다.이처럼 중국문학 대가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양자강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6천300㎞의 강이다. 양자강의 지리조건과 역사는 황하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장강으로 불리는 양자강,그 길다란 용틀임은 황하의 스무줄기에 상당한 수량을 유출하면서 그 겨드랑이에 중국의 쌀 수요량 10분의4를 산출하는 세칭 어미지향을 거느리고 있다. 그럼에도 인문사회의 역사는 황하보다 천년이 넘게 뒤져 있다.장강유역에 주대의 유물이 간혹 보이지만 역사의 기록은 기원전 6,7세기의 춘추시대 오 월에서 비롯된다.그마저 정치의 중심이나 번영의 시장으로 각광을 받기는 송원 양대부터임을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마저 생생하게 기록했다.항주는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다고. 물론 남송의 문화가 하루아침에 건너온 것은 아니었다.벌써 춘추전국때 오월문화를 비롯해서 육조때의 남조문화가 바탕을 닦은 것이다.그 빛과 힘은 양자강의 하류에 응집되었다.여기서 말하는 양자강 하류란 강서성 호구로 부터 안휘성 동남단과 양자강삼각주,곧 양자강 남북연안에 위치한 절강성과 강소성 상해 등 3개 시·성을 통칭하고 있다. 양자강 하류지역은 남송·원·명·청을 거쳐 민국과 신중국에 이르기까지 줄곧 상승의 기세다.비단과 도자기를 비롯 쌀·차 등 농산품의 생산과 수출로 경제의 번영을 누리면서 희곡과 미술 등의 예술로 강남문화를 일구었는가 하면 성리학과 실학의 연구로 근대화·민주화의 앞장에 섰다.거기다 근대문학의 가장 뜨거운 산지가 됨으로써 문인을 배출하는 못자리가 되었다. 필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했던 「중국고대문학사」와 「중국근대문학사」에 등장하는 문인들을 그 출생지와 활동지별로분류한 나머지 그 전체의 4할쯤이 이곳서 태어나고 이곳에 작품을 썼다는 일차적인 통계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은 물론 송대 이후 특히 명·청 양대에 집중되어 있다.따라서 시와 산문·평론등 귀족문학은 물론 시민문학으로서 그 광장을 넓혀 소설과 희곡등 다양한 꽃을 피웠다. 그러니까 황하는 열악한 지리환경을 극복한 채 정치문화의 번영을 누렸고 양자강은 풍요로운 지리환경임에도 중화문화의 종속적인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남송때에야 그 지기와 인걸을 발휘했던 것이다. 1949년,새로운 중국이 건설되고 한중관계가 단절된 뒤 중국의 고고학계에는 지각변동에 상당하는 새로운 발굴과 함께 새로운 발견,새로운 학설이 잇따라 발표되었다.그것은 1953년 섬서의 서안교외인 반파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3300년까지 존재했을 신석기 문화유적을 발견하여 북방의 문화사를 2000년이나 소급한 일이 있었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제까지 적막한 옥토로만 여겼던 장강 하류지역에서 연거푸 놀라운 문화가 햇빛을 보기 시작하 것이다. 1958년 상해 근교 청포현 숭택에서 기원전 3400년에서 4000년의 정제 석기를,1959년 절강 가흥근교인 마가빈에서 기원전 5000년에서 4000년의 신석기와 홍도를,다시 1973년과 1977년 두차례에 걸쳐 절강 여요현 나강향 하무도에서 기원전 5000년의 쌀과 목조건축·방직·축목등의 유적을 각각 발굴 연구하면서 7000년이나 숨겼던 비밀이 어렴풋 풀리게 된 것이다. 문학은 자연지리적 환경보다는 인문사회적 환경의 산물이요,중국은 황하와 장강을 중심한 남북문화지만 선후적 관계보다는 개성적 차이로 발전되었다는 1차적 결론을 얻을수 있었다.그것은 장강삼각주의 지형이 말해 준다.그 서북에 낮은 산악과 구릉이 남북으로 누워있을뿐,절대의 면적이 수로가 사통팔달하는 대평원이어서 배산임수해야 인물을 낸다는 통속적인 풍수설을 뒤엎고 있다.또한 장강 삼각주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들은 북방의 동시대 유적인 반파의 그것보다 오히려 정교한 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과 목적으로 필자는 안휘성의 동남단인 당도에서 출발,장강삼각주의 문학 유적을 전전하면서 그 현장을 확인키로 했다.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을 길러준 남경을 거쳐 「서유기」의 저자 오승은의 고향 회남과 「경화연」의 저자 이여진의 고향 연운항,송나라 문호 소동파가 최후를 마친 상주,「삼국지」를 재현시킨 북고산의 진강,원말의 영웅소설 「수호전」의 배경이요 그 저자 시내암과 청나라의 이름난 시인이자 화가인 정판교의 고향인 흥화.명말의 시인 전겸익의 고향인 상숙,역시 명말 시인 진자룡의 고향인 송강,명나라 후칠자의 수령인 왕세정의 고향 태창,역시 명말의 시인 고염무의 고향으로 지방극 곤극의 고장인 곤산,명말의 문인이자 여행가인 서하객의 고향 강음,당나라때 대시인 백거이 위응물 유우석 등이 벼슬살이했던 소주.청말의 문학평론가 왕국유의 고향인 가흥,만당의 시인 두목이 벼슬했던 호주,송나라의 거물 사객인 주방언과 청나라때 문학이론가 원매 등의 고향이요,당 송의 대시인이었던 백낙천과 소동파가 치적을 남겼던 항주.명나라때 시인이요 대사상가였던 왕양명과 역시 시인이었던 황종희의 고향 여요,한나라때의사상가였던 왕충의 고향 상우,송나라 대시인 이었던 육유와 현대문학의 비조인 노신의 고향 소흥,청나라때 희곡가 이어와 중국 현대시단의 거성인 애청의 고향인 금화 등이 앞으로 연재의 대상이 된다. 그 많은 곳을 되돌아보면 청록색의 망망대야,그 풍요로운 평원과 수향에서 중국문학사의 절반이 이룩된 것을 볼수 있었다.
  • 「시경」 한글해설판 나왔다/고려원간… 일반독자 이해쉽게 풀어써

    중국 최고의 시가집인 「시경」이 국문학자 홍성욱씨(고려대 강사)의 역해로 나왔다.도서출판 고려원에서 「동양의 지혜」시리즈의 하나로 펴낸 「시경」은 현대감각을 살려 쉽게 풀어 쓰고 원문에 토를 붙여 일반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꾸민 것이 특징.「초사」와 함께 중국의 고대시가를 대표하는 「시경」은 중국의 황하 중류 중원지방의 시들로 이뤄져 있다.수록작품은 주초부터 춘추 초기까지를 망라한 305편.원래 3천여편이었던 것을 공자가 교화에 적합한 것을 산정했다는 이른바 「공자 산시설」은 믿기 어렵다는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시경」은 풍·아·송 3부로 구성돼 있다.「풍」은 풍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민간의 노래가 채시관에 의해 수집돼 조정에서 악사에 의해 불려졌다.「아」는 공식 연회에서 사용하는 의식가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때 쓰는 악시를 말한다. 현재 전하는 「시경」의 텍스트는 진한시대의 학자 모형과 모장이 전을 단 「모시」로,각편마다 작품의 제목아래 「소서」를 달아 작품의 주제나 창작배경,작자 등을표시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 홍길동의 고향(외언내언)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의 고향을 놓고 강원 강릉시와 전남 장성군이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한다.「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의 고향이 강릉이니 홍길동은 강릉 사람이라는 것이 강릉시의 주장.한편 장성군은 『조선조 연산군때 실제 있었던 도적 홍길동이 장성 사람으로 「홍길동전」의 모델이 됐으니 홍길동의 고향은 장성』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홍길동의 고향은 어디일까.그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을듯 싶다.허균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사실.마찬가지로 허균이 「홍길동전」을 집필한 연산군 당시 장성에 홍길동이란 이름을 가진 도적이 있었다는 것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허균이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진 것은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이식의 문집에 있는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그런데 이 문집에서 「홍길동전」은 실제의 도적 이름인 홍길동으로 표기돼 있다.이는 장성군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성군이 꼭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국문학자 조동일 교수(서울대)는 홍길동의 산채가 있던 곳을 문경 새재(조령)로 추정한다.허균은 어린시절 경상감사인 아버지를 따라 상주에서 지냈는데 산세가 험준해 도둑이 많았던 새재는 서울에서 상주를 오가는 통로였다는것.따라서 홍길동전의 무대로 상정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작고한 국문학자 김동욱은 또 충남 홍성을 「홍길동전」의 무대로 보았다.허균이 홍성 출신의 이달을 사사하며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홍길동이나 허균처럼 이달도 서자였다는 것이다.게다가 홍성에서 홍가신에게 토벌당한 이몽학의 난리와 「홍길동전」의 주제가 통한다는 것이다. 허균이 전북 부안에서 세미운반 감독관을 지낸적 있고 나중 다시 이곳을 찾아 은거했다며 「홍길동전」의 집필장소를 부안으로 보는 서지학자도 있다. 이쯤되면 신출귀몰한 둔갑술을 지닌 홍길동의 고향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진다.홍길동과 관련된 곳이면 어디서나 홍길동을 관광상품화하면 되지 않을까.
  • 송나라 서정시인 진관의 고우(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4)

    ◎정과 한 사무친 사랑의 노래 고우호에 흐르고…/문우들과 담시논문했던 문유대에 소유의 동상 외로이/사랑한 가기 못잊은듯 한쌍의 탑대위에 애절한 몸짓이 꽃과 술,그리고 물이 넘치는 양주에서 북쪽으로 한시간 남짓.가슴이 후련하다.왼쪽으로는 장장 20㎞가 넘는 길쭉한 소백호.그러니까 호반을 따라 직선으로 뻗은 공로,그 바른 편에는 물논과 양어장.수향임에 틀림없다.더구나 소백호가 끝나면 광활한 고우호,양자강,하류의 지평선을 떠도는 나그네는 두멧사람이어서 인지 날마다 산을 볼 수 없을 때는 고아처럼 갑자기 외로웠다. 고우를 찾아가는 차창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필자가 대만 유학때 유독 못살게 굴던 교수 한분의 고향이 여기라는 생각,그보다는 송대 4대 사객으로 꼽히면서도 평생 불우하게 살면서 아름답도록 슬픈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시인 진관(1049∼1100)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어서 이다. 진관의 자는 소유,호는 회해.그의 불행은 어려서 싹 텄다.씻은듯 가난한 데다 열다섯살에 아버지를 잃었다.스물아홉살때,서주에서당시 천하에 이름을 떨치던 소동파를 만났다.그로부터 동파의 제자로 이른바 「소문4학사」의 하나가 되었지만 벼슬길이 늦어 서른일곱에야 진사 급제했다.동파의 추천으로 정해의 주부와 채주의 훈장을 살고,끝내는 서울로 진출,비서성과 국사원 등에서 문서직을 지냈으나 아뿔사 그의 스승이 구당으로 몰려 유배당하자 진관 또한 거기에 연루,6년동안 처주·침주·횡주·뇌주등지,그러니까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나 척박한 고을로 귀양살이 했다.막상 사면되어 환고향할때,그는 아까운 나이 52세로 등주,지금 광서성 오주땅에 객사했다.벼슬살이 겨우 15년,그나마 6년은 먼 벽지에서 찬밥에 가시밭길.그의 문학은 울지않을수 없었다. 그뒤 천장했으나 고향에는 오지 못한채 무석 혜산에 묻혔지만 그의 유산은 풍부하고 작품은 개성적이어서 완약파의 으뜸으로 추대받았다.시·사·문을 합쳐 46권의 「회해집」,그속에는 스승 동파의 황하 치수를 찬미한 「황루부」나 백성의 질곡을 반영한 「전거」시 등 애국애민적인 글도 있지만 역시 자연스런 묘사에 애수적인 정서의 사,아침 햇살에 순결한 연꽃의 빛과 새벽 바람에 으시시 떨리는 버드나무같은 그러한 사가 100편쯤 남았다. 그는 벼슬에도 연연했지만 척박한 땅에서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미관말직의 한을 쏟았고,그보다는 정이 헤퍼서 가는 곳마다 목청 좋고 가냘픈 가기를 사랑했다.그래서 사는 정과 한이 사무치게 배여 있다.그가 호남땅 침주서 귀양살이할때 명작으로 남긴 「여몽령」에는 그 죽음같은 생활이 보인다. 요야심심여수, 풍긴역정심폐. 몽파서규등,상송효한침피. 무매,무매, 문외마시인기. (긴밤,물속처럼 깊을때/바람이 찰깍 역사의 문짝을 친다. 잠이 깨자 쥐는 호롱불을 노리고/서릿발 새벽 바람이 이불을 쑤신다. 엎치락 뒤치락/문밖엔 울부짖는 말,사람이 일어났나보다) 그러나 진관의 명구는 이별의 한을 그린 「만정방」이 가장 회자된다.그는 찬 가마귀 두어마리 날고,하나 둘 등불 켜질때 청루서 만난 여인과 헤어지는데 그때 침통했던 황혼을 「산은 꽃구름을 바르고,하늘은 마른 풀을 어루만진다(산말미운,천점애초)」고 그렸다.그보일듯 말듯 아련한 노을의 묘사는 명귀로 평가된다.오죽해야 소동파는 「산말미운진학사」로 부르지 않았던가? 차는 이윽고 고우시가의 남쪽을 들어서고 있었다.진관이 태어났고 진관이 자랐던 곳은 어딜까? 문화원을 찾아 그 뿌리를 찾았지만 고증할 길이 없다고 한다. 오직 진관이 공부하던 곳은 고증이 되었으며 그 곳은 다름아닌 문유대안에 있다는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문유대를 모를 까닭은 없다.그것은 고우의 동북쪽 동산에 있는 북송 원풍(1078∼1085)무렵,그의 스승 소동파가 이곳에 유람할 때 손각 왕공 등과 함께 화전놀이하면서 담시논문했던 곳.당초 작은 정각이었던 것을 누각으로 증축한 데다 소동파의 생신축수도나 소동파화상을 석각해서 당대 문호의 기념관으로 승격발전한 곳이다. 문유대는 지금 양주의 평산당을 방불하게 발전했다.대문을 들어서면 우뚝 서있는 진관의 동상.그 동상을 지나 정북으로 계단을 오르면 육중한 지붕에 단촐하게 꾸민 사현사 곧 위의 네사람을 기념하는 사당이 있다.다시 사당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당시 네사람이 노닐던 커다란 전당,앞뒤의 뜰에 그림의 담도 세워져 있다.다시 내려 서서 꼬불꼬불 하얀 담장을 끼고 돌면 작은 다락.이곳이 바로 진관이 공부하던 곳.한참 발을 멈추었지만 진관의 사에 자주 나오는 처량한 분위기는 갈데 없다. 문유대를 나와 아쉽게 이 옛고을을 서성거렸다.가는 곳마다 지방의 특산을 알리는 광고가 도로 연변에 붙어있다.천하에 절품이라는 「일단쌍황」.그 뜻을 몰라 물어 보았다.달걀 하나에 노란 자위가 두개라고 한다.노란 자위가 많으면 지방이 많아서 좋지만,대신 콜레스테롤이 많아서 나같은 나이만 되어도 먹기에 겁이 나는데…. 한참 걷자 서남쪽에 탑 두개가 보였다.하나는 논밭속에 버려진듯 세워졌고,하나는 길가에 귀물인듯 단장되어 있었다.논밭에 선 것은 정토사탑으로 소박하면서도 훤칠한 키의 남성미요,길가에 선 것은 규루로 탑대위로 곱게 단장한 아담한 여성미를 보였다.그것들은 모두 명대에 세워져 200∼300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진관의 문학에 절절한 사랑의 몸짓은 차라리 여기서 체현되는 느낌이다.텁텁한 더벅머리의 7층탑과 하얀 저고리에 까만 머리를 철렁하게 땋아내린 3층 누각,그들의 조화가 좋았다. 그렇게 아쉽게 고우를 훌쩍 떠나는데 필자의 머리속에는 두사람의 또 다른 고우사람이 떠올랐다.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산곡만을 썼던 왕반(1470?∼1530?)과 성운학과 훈고학에 뛰어났던 청나라때 왕렴손 그들이.
  • 우리 말 정보화사업 본격화

    ◎국민 어문생활의 질 향상 위해 「21세기 세종계획」 추진/국어 기초조사·소프트웨어 개발·소설 등 전자사전화 21세기에 대비,실용적인 우리 말 생활을 위한 정보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된다. 문화체육부는 내년부터 2007년까지 140억원을 들여 국민 어문생활의 질 향상을 위한 「21세기 세종계획」을 추진키로 결정,사전작업으로 오는 9월까지 연구용역을 실시한다.「21세기 세종계획」은 21세기 우리말을 바탕으로 하는 정보사회 건설의 기초적인 사업으로 과학기술처 등이 실시중인 국어정보처리기반 구축사업과 맞물려 추진될 예정.주로 국어에 대한 기초조사(음절·단어·음소)와 소프트웨어 개발(어절색인프로그램·변환프로그램),문화생활에 필요한 자료보급을 목표로 소설·시·수필 등의 전자사전화와 각종 학위논문 시디롬 개발,모든 컴퓨터에 한글관련 소프트웨어를 탑재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오는 98년부터 2007년까지 3단계로 나누어 과제발굴 작업을 벌일 문체부는 국어의 실용적인 발전을 위한 연구과제와 제도·법 정비,교육활동 개선 등을중점과제로 택해 관련 전문가와 유관부처 등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연구결과의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이 객관성 확보를 위해 전문가 심층토론과 설문조사,국내외 실증사례수집 분석,공청회를 통한 일반 의견수렴을 거치게 된다. 문체부는 이를 위한 전담기획단을 구성했으며 홍윤표(단국대 국어학) 김흥규(고려대 국문학) 이균하(인하대 전산학) 김병선(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박세영(한국통신기술협회) 박동인(시스템공학연구소)연구원 등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남통에 묻힌 두시인 김택영·낙빈왕(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3)

    ◎한많은 일생 만년을 떠돌다 낭산에 흙이되어…/한말 망명시인 김택영­붓끝으로 토해낸 망국의 설움… 문집 「소호당집」 남겨/당대 「초당4걸」 낙빈왕­측천무후에 맞서다 투옥∼사면∼반란∼객사 파란의 삶 1만5천리를 도도하게 굽이치던 양자강이 황해 5백리를 앞두고는 강인지 바다인지 분간키 어렵게 넓어진다.바다같은 양자강 북쪽에 항구처럼 떠있는 부두가 있다.남통.상해에서 서북쪽으로 상숙을 거쳐 호포까지 거의 두시간.다시 호포에서 북안의 남통까지 페리로 양자강을 건너는데 꼭 한시간이 걸렸다. 옛날에는 아득한 모랫벌이었다.오대 후주때부터 마을을 이루고 행정의 구역을 이루었으니 고작 1천년의 역사를 가졌다.그 1천년의 역사도 소조하기 짝이 없다.서쪽으로는 양자강으로부터 밀려오는 모래,동쪽으로는 황하,바다는 바다로되 누우런 바다,하지만 5대양 6대주로 떠나는 무역선이 남통까지 부산하다. 남통은 양자강에서 떠내려온 모래와 황해에서 밀려온 모래로 이룩된 삼각주.하지만 삼각주에는 이름도 사나운 낭오산이 있다.그것은 남통시에서 남쪽으로 8㎞지점,거기에 주봉인 해발 107m의 낭산,그 동쪽 한참 떨어진 곳에 나직한 군산,검산,그 서쪽 가까운 곳에 마안산,황이산,그것들은 황해를 향해 ㄴ자형으로 늘어서 있다. 낭산은 남통의 머리요 가슴이다.그 머리에는 북송 태평흥국(976∼983) 연간에 지은 광교사의 지운탑이 35m 5층의 훤칠한 키로 서서 장강과 황해를 멀리 조망하고 있다.그 가슴에는 비록 시대와 혈족은 다르지만 만년을 떠돌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친 네사람의 나그네가 묻혀 있다.그중에 두 사람의 시인이 있어 남통을 차마 근대방직공업의 집산지로만 기록하지 못하게 한다. 그 하나는 당나라때 「초당4걸」로 추앙받았던 낙빈왕(638?∼684?)이요,또 하나는 우리나라 한말 마지막 망명시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이다.낙빈왕이 오직 그 무덤만을 남겼음에도 우리겨레 김창강은 그의 고택과 함께 유택이 남통시시청문화재당국의 보호하에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낙빈왕은 절강의 의오사람.그는 왕발과 함께 신동으로 불리울만큼 총명한 시인이었지만 일찌기 아버지를 여윈뒤가난과 의협으로 떠돌다가 심지어 노름꾼을 따라다니기도 했다.한때 몇군데의 지방관을 지내면서 뜻을 얻지 못하다가 설상가상 당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의 섭정에 분개,상소를 올리다 투옥당했다. 가까스로 사면당한 낙빈왕은 절강 임해의 현령으로 잠시 봉직했지만 무측천이 국호를 「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때마침 광택1년(684),당시 유주 사마로 유배당했던 이경업(?∼684)이 양주에서 반무동란을 일으키자 낙빈왕은 유명한 「이경업과 함께 무후와 싸울 것을 천하에 고함」(대이경업전격천하문)이란 격문을 쓰고 결연히 그 싸움에 투신했다. 이경업이 죽고 전열이 흐트러지자 빈왕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위의 격문에서 「한겹의 흙이 미처 마르지 않았거늘 육척의 어린 왕손은 어디 갔는가?」고.(일배지토미건,육척지고안재?). 그러니까 선제가 죽은지 이제 며칠인데 어느새 찬탈이 웬말이냐는 충직한 두마디에 무후조차 숙연하더라는 이야기다.가위 왕발의 「등왕각서」에 견줄만한 명문이었다.그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느니 장강에 몸을 던져 자진했다는 등 전설속에 충직의 말로는 참담한 채 객사,결국 아무 연때도 없는 남통에 묻혔고,그의 고향에는 따로 의관총을 만들었다. 창강 김택영은 한말 순국시인인 매천 황현(1855∼1910)과 한말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매천은 벼슬에 매달리지 않고 숨어서 애국시를 쓰다가 일제의 강점에 자결로 맞섰고,창강은 통정대부로 학부편찬을 지내다가 을사보호조약 그 직전,고국을 떠나 망명의 길에 올랐다. 1905년 9월 9일,56세의 창강은 먼저 상해로 상륙했다.망연한 이역에서 먼저 그가 흠모하던 청말의 시인 유월을 찾아 소주로 갔으나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하는수 없이 옛날 면식이 있던 남통의 거부요 교육가·정치가였던 장건(1853∼1926)을 찾아 청원하자,방직과 조선으로 사업이 번창했던 장건은 창강의 시재를 아낀 나머지 우선 그를 남통의 한묵림 출판사에 편교로 초빙,생활을 보장해 주었다.또 그가 중국 최초로 건립한 남통박물원 부근인 서남영촌 29호에 세칸짜리 집을 마련해 주었다. 남통 22년동안,허가항에 이어 세번째 이사온 이 집을 「차수정」이라 했다.그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의 그늘을 빌려 시원하게 산다는 자조적인 말인데 창강의 타국살이를 암유키도 한다. 그는 여기서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붓과 머리로 조국의 문학에 공헌했고 그 스스로의 문학을 중국에 남겼다.그는 우선 「매천시집」을 비롯,신자하집」·「여한십가문초」·「역사집략」·「교정삼국사기」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시집이나 역사전적을 간행한 이외에 자신의 문집인 「소호당집」을 정리 출판했으니 나라잃은 한을 나라의 정신문화 정리간행으로 풀다가 그는 끝내 남통의 거류민증을 손에 든채 표박을 마쳤다.그는 경술국치때 그 비보를 듣고 친상을 당한 죄인인양 소복을 입고 망명문학의 절정으로 평가할 수 있는 「오호부」를 표효했는데 한국인으로 그의 목숨은 그때로 끝났던 것이다. 「오호라!하늘 아래 동서남북,땅 아닌 곳이 없는데,나는 왜 이 땅에 태었을까? 고왕금래,세월은 영원한데,나는 왜 이 때를 만났을까? 하늘을 불러 애타게 여쭈어도 하늘은 입을 다문채 말이없네. 오호라!하늘을 불러도 끝내 대답이 없거늘,나 옷깃 풀고 외치옵니다.(후략)」 마침 올해가 창강 70주기라서 남통시문화국과 남통박물관은 기념행사 준비에 한창이다.창강의 묘는 낭산 동남쪽에 남통시청문화재로 보호받고 있고 그 묘포는 「조선시인김창강지묘」로 적혀 있다.거기서 20∼30m 내려오면 낙빈왕의 무덤,한과 한의 시인이 위 아로 누워있다.
  • 도서출판 「해냄」 5개장르 압축 「한국문학총서」내

    ◎상고시대∼1990년대 대표적 문학유산 상고시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우리의 대표적인 문학유산을 장르별로 압축한 「한국문학총서」가 도서출판 해냄에서 출간됐다. 「고전시가」「고전소설」「구비문학」「현대시」「현대소설」 등 모두 5권으로 이뤄진 이 총서는 각 영역별로 문학적 갈래의 특성과 역사적 전개양상을 살피고 원문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붙인 것이 특징.특히 우리 고전소설에 대한 유형분류와 해제는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이 총서에서는 한국 고전소설을 10개의 유형으로 분류한다.판소리계 소설,영웅·군담류 소설,가정윤리소설,몽자류소설,염정소설,우화소설,송사소설,여류소설,장편대하소설,한문소설 등이 그것이다.소개된 작품은 「춘향전」「유충렬전」「금방울전」「창선감의록」「양산백전」「서동지전」「두껍전」「화산중봉기」「완월회맹연」「이생규장전」 등 18편.서울대 권영민 교수(국문과)·미국 하와이대 마샬 필 교수(동아시아어문학과,96년 작고) 등 10명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이 총서는 올해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으로도 출간돼 한국문학 전공 학생들의 교재 및 외국인들의 한국문학 입문서로 활용될 예정이다.
  • 꽃­술­물의 마을 양주(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2)

    ◎화려·넉넉함에 시를 낳고 시인을 모으고…/일망무진 기름진땅에 삼월이면 꽃들의 함성/이백·백거이 등 시인목객 찾아와 절경을 찬양 지금쯤 중국의 예향 양주땅은 꽃들의 아우성이 시작될 것이다.거기 십리호수를 끼고 늘어진 능수버들에 복사꽃,살구꽃들은 가위 안개요 연기였다.오죽하면 당나라 시선 이태백은 그의 친구 맹호연을 양주로 보내면서 「연화삼월하양주」라는 천하의 명귀를 남겼고,그 명귀를 따라 양주는 천하의 꽃마을로 올라서지 않았던가?꽃이 난만해서 차라리 연기처럼 자욱했던 양주땅 삼월이라 했다. 양주는 꽃만으로 이름을 얻지 않았다.역시 만당때 풍류시인이던 두목(803∼853)의 명시 「견회」에 적힌대로 거기엔 「초요섬세장중경」의 기생들이 득실거리는 곳,그러니까 손바닥위에 올려 놓은듯 가느다란 허리의 아가씨가 많은 곳,그래서 청나라 초엽,중국현대화풍의 선구였던 석도(1630∼?)가 양주에 정착한 뒤,청대 건륭연간에는 정판교를 비롯 금농·나빙 등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전위화가들,소위 「양주팔괴」가 그 천재와 낭만을겨루던 곳이다. 양주에 이토록 시인 묵객에 환쟁이,거기다 굿쟁이·놀이패가 몰려든 까닭은 자명하다.무엇보다 일망무진의 기름진 옥토­,강소평원 그 한복판에 자리한 어미지향이다.그래서인지 기원 486년,춘추때 오왕부차는 중원을 쟁탈하는 기지로 한구와 한성을 여기다 개축했고,605년 수나라 양제는 북경을 연결하는 운하를 개통하고 양주라 부르다가,결국 양제는 양주에 묻히고 말았다. 운하가 사통팔달되면서 양주에는 돈이 굴러들었다.당·송때에는 중국의 대외무역 거점으로 거상들이 운집했고,명·청때에는 제염이 흥성한 데다 돈많은 소금장수들로 흥청망청,주지육림에 노랫소리가 높았다. 양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당나라때 길이 13.65m,너비 75㎝의 긴 외나무배는 바로 그때 소금을 나르고 비단과 차를 유통하는데 쓰였을 터이니 그때의 부유함을 짐작할 만하다.그뿐만 아니었다.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양주의 산수와 문화에 심취,끝내 양주의 관리로 3년(1282∼1284)이나 살았는데 그의 「동방견문록」에는 당시의 양주를 경제번영의 무역항으로 소개하면서 지폐의 사용을 특기한 바 있다. 아름다운 경관에 넉넉한 물산.거기에 기름진 옥토에 바둑판같은 물길.이만하면 시인을 기르고 시인을 불러모으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양주에서 태를 얻은 시인으로는 단연 장약허(660∼720?)를 첫손에 꼽는다.월주의 하지장·소주의 장욱 등과 함께 「오중사사」로 불렸던 장약허는 곤주의 병조를 지냈는데 육조의 염려한 시풍에 힘입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그린 「춘강화월야」란 명작 한편을 남겨 당당하게 당시를 압도했다. 「춘강화월야」는 양주의 자연경관을 상징적으로 그려내는데 성공했다.제목처럼 봄·강·꽃·달·밤등 다섯가지 소재의 이미지를 조합해서 몽롱한듯 수채화 한폭을 그려낸 것이다. 춘강조수련해평, 해상명월공조생. 염염수파천만이, 하처춘강무월명. 강유완전요방전, 월조화림개사산. 공이유상부각비, 정상백사간부견. 강천일색무섬진, 교교공중고월윤.(후략) 「봄가의 밀물,바다로 이었거늘 바다의 명월,밀물과 함께 돋는다.물결따라 출렁출렁 천만리 뻗거늘 봄강넘치는 물에 곳곳마다 달빛.구비치는 강줄기,성밖을 에워싸고,달빛 쌓인 꽃숲엔 싸락눈이 내렸나?빈 하늘에 서릿발,없는듯 날고 모래섬에 흰 모래,보일듯 보이지 않는다.봄강·봄하늘 한빛으로 한점 티끌없이 교교한 하늘 복판에 외로운 달바퀴.」 이는 들넓고 물많은 양주의 자연지리와 꽃을 사랑하는 풍속문화의 만남이지만 이태백이 칭송했던 「연화삼월」과 분위기를 함께 한다. 그러나 양주를 문학의 고향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맹호연이나 이백·백거이·유우석처럼 양주가 좋아 양주를 노닐던 시인나그네를 비롯 고적이나 두목·구양수·소식·마르코 폴로·사가법 등 벼슬아치로 양주에 살았던 사람,그리고 「홍루몽」 저자 조설근이나 「유림외사」의 저자 오경재·현대산문의 거장 주자청 등 가족을 따라 양주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찬미와 기록들이다. 결국 당·송이래 이름을 떨친 시인 묵객치고 양주를 스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그중에도 쇄탈하면서도 호방한 기인적 기질의 이태백에게는 안성맞춤인 고을이었다.평생 다섯번이나 양주를 찾았던 그는「가을날,서령사에 올라」나 「양주땅에 병 들어」같은 명작을 남겼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화도 남겼다. 그가 처음으로 양주에 발을 디딘 스물여섯살 적,제 아무리 부호의 후예라지만 일년도 안돼 돈 30여만금을 탕진하면서 곤드레만드레 지냈다는 그의 회고담이 뒷날 누구엔가 보낸 편지에 보인다.그때 쌀 한말에 10전,그러니까 3천석에 상당한 돈을 모래처럼 뿌리고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양주에 얽힌 문인들의 행적과 사연은 끝이 없다.두목은 일년동안 절도추관을 지내며 청루에 헤픈 정을 뿌린 시편들을 남겼고,구양수는 양주태수로 재임중 「평산당」이란 누각을 지어 시인들의 집회에 제공했다.오경재는 양주에 기식하면서 관료의 부패와 귀족의 횡포를 관찰,그 면모를 「유림외사」의 소재로 충당했고,조설근은 그의 조부가 양주서 염무감찰사로 공직했던 땅인만큼 그 살림을 찾아 출입했고,「홍루몽」의 주연 임대옥이 그 아버지를 따라 살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양주는 화려하고 넉넉하다.남경과 소주의 중간에 위치해서 소득도 높거니와 문창각을중심한 시가가 활달하고 아담하다.
  •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 1차 7권 나와

    ◎솔출판사,삼국유사·다산문선·열하일기 등 6종류 실어 한국학 관련 고전 국역작업을 꾸준히 벌여온 솔출판사가 우리 조상들의 지적 유산을 압축한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전97권) 1차분 7권을 펴냈다.98년 완간 예정인 이 총서는 한글세대의 언어감각에 맞게 한문투와 고어체의 표현을 되도록 피했으며 여러 권의 책을 단권화한 것이 특징.이번에 선보인 것은 「삼국유사」(전2권)「다산문선」「열하일기」「성호사설」「용재총화」「산림경제」 등 6종이다. 그동안 한글판이 많이 나왔지만 정본이 없었던 「삼국유사」는 우리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는 신화서이자 역사서.우리나라 최고의 국문학 연구자료로 꼽히는 「삼국유사」의 향가 14수와 「균여전」의 11수를 부록으로 실었다.「다산문선」은 기,전,원,소,기사 등 80편의 글이 담긴 다산문학의 결정체.다산의 문학사상이 무르녹아 있는 「다산문선」에는 특히 유배생활의 외로움과 가족을 기리는 애틋한 그리움이 배어 있으면서도 실학자적인 면모가 솔직담백하게 드러나 있다.기행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중국의 성경,북경,열하 등지를 살피고 돌아와 엮은 일종의 비교문화론이다.이번 국역본에서는 총 26편중에서 「압록강을 건너며」와 「성경잡지」「역마를 달리며 적은 수필」등 3편만 뽑아 수록했다.「성호사설」은 조선후기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탁월한 정책대안이 담긴 성호 이익의 경세론.이밖에 「용재총화」는 조선초기 문신이자 학자인 성현의 필기잡록류이며,「산림경제」는 산림에 묻혀 살면서 지켜야할 생활규범과 농촌생활을 해나가는 지혜를 적은 책으로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증보해 엮은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 가운데 「집안 건사하기」「대 잇기」「아이 키우기」 등 3편의 글이 실렸다.박찬수 민족문화추진회 사무국장,송기호 서울대 교수,신승운 성균관대 교수,정민 한양대 교수,한문학자 조수익씨 등 5명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 이태백의 당도시(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

    ◎취라산 강변공원 곳곳에 시선기린 유적이…/달 잡으러 몸던진 채석강물에 태백의 환상 어리고/청산아래 외로운 무덤 묘포엔 「시인」아닌 「명현」으로 새 기획연재물 허세욱 교수(고려대 중국문학)의 「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가 오늘부터 매주 수요일 서울신문을 통해 독자들을 만난다.이 시리즈는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만년을 보내고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송나라 문호 소동파,「수호전」의 저자 시내암,송나라 시인 백낙천,중국현대문학의 비조 노신 등이 태어나고 작품활동을 벌인 위대한 중국문학의 산실인 양자강 하류의 어제와 오늘을 필자의 깊이있는 시각으로 새롭게 조명해나게 된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의 동요처럼 당나라 시선 이태백은 살아서 달에 놀았지만 죽어서 땅에 묻혔다.그 묻힌 땅을 찾아서 가는 길이다. 그는 천재시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심지어 한국의 어린이조차 남의 나라 시인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친숙했던 시인이건만 낳아서 묻힐 때까지 기구한 구름나그네였다. 이태백은 기원 701년,무역상이던 아버지를 따라 서역의 쇄엽,그러니까 지금의 키르기스공화국 토크마크부근에서 출생,다섯살때 고향인 사천성 강유현 청련향으로 귀국했다.고향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뒤 출향관,중국의 강남·강북 많은 땅을 떠돌다가 예순한살되던 761년 섣달,당도의 현령으로 있던 족숙 이양빙 집에 기식하다가 이듬해 11월,끝내 늑막염으로 병사했다.당도의 동북교외에 위치한 용산 동록에 매장됐다 다시 58년 뒤인 기원 820년,역시 용산 건너편 청산의 서쪽 산자락에 이장,오늘에 이른 것이다. 혈통에 대한 이설도 분분했다.부조의 오랜 외유때문에 혼혈일 가능성 외에도,심지어 이족으로 보는 호인설도 있지만 그의 자작시나 행장·묘비의 기록에 따라 한족,그것도 장상의 후예로 보인다. 이백과 당도의 인연은 깊었다.중·만년에 방랑점으로 삼은 선성·금릉(지금의 남경)·광릉(지금의 양주)등지를 연결하는 중간점인 데다 그가 숭모하던 남조의 시인 사조(464∼499)가 태수를 지낸 곳,그래서 한동안 선성서 살면서도 일곱번이나 당도를 출입했다.지금 태백이 영구지지로 묻힌 곳도 사조의 고택이 있던 청산 그 산자락이었다. 당도시에서 북쪽으로 10㎞도 안되는 마안산시,서남쪽에 양자강 강줄기를 치마처럼 휘감고 우뚝 선 해발 130m의 취라산은 전체가 이태백기념관이랄 만큼 그를 기리는 유적으로 널려 있다.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시주화월에 미쳐서 강호를 떠돌던 이태백은 인생이 몽땅 저물어버린 기원 756년,나이 56세에 당나라 현종의 열여섯째 아들인 영왕이 형인 숙종과 벌인 친위쿠데타에 연루,심양에서의 옥고과와 야랑으로의 유배를 겪다가 나이 59세에 석방된다.그러니까 그의 만년 6년은 반란에 옥고,가난에 병고,끝없는 시련에 꺾이고 만 것이다.그가 친위쿠데타에 끼어든 것은 당시 장안을 협공한 안록산의 반군,그 무도한 발굽에 무력해진 정부군을 돕겠다는 비분강개 때문이었다. 과연 그의 절필로 알려진 「임종의 노래(임종가)」엔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이 서려 있다. 「대붕이 난다,사방을 떨치며, 중천서 날개를 꺾이자 건널 힘이 없어라. 바람에 사무치고,저 해솟는 나무에 노닐었지만 옷소매가 걸렸어라. 뒷날 누가 알랴! 공자가 가버린 뒤라 슬퍼할 이 없거늘」 대붕비혜진팔예 중천추혜력부제 여풍격혜만세 유결상혜괘좌결 중니망혜수위출체 필자는 이 절필이 씌어진 현장에서 이를 암송하면서 이태백 최후의 땅을 밟았다.그의 문학을 사랑한 지 40여년,그가 객사한지 1천2백34년만에. 남경에서 서남쪽으로 한시간남짓,마안산 시계에 접어들자 하늘을 뚫는 굴뚝에 까만 연기.마안산 속스러운 거리를 뚫고 계속 남하했다.이윽고 오른편에 신록의 작은 산이 보였다.그 모양이 파란 고동 같다 하여 「취라산」.하지만 우리에겐 「채석산」이 다정하여라.작은 돌다리를 지나 「채석진」이란 방문을 지나자 채석산 강변공원의 경내에 들어섰다.신록이 옹알대는 오솔길을 걷자 뜻밖에 누런 기와의 대웅전이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바로 「태백루」다.그 지붕,그 기둥,그 처마.과연 건물의 웅장함에 표일한 이태백의 기상이 넘쳐 흘렀다.당나라 원화연간에 창건했지만 여러번 병화에 소진,지금 이 3층누각은 청나라 광서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간 양쪽에 웅크리고 있는 돌사자로부터 정루앞의 굽이굽이 병풍,정루 2∼3층마다 바람인 듯 표표하게 유랑하는 이태백의 유람도에 쇠탈한 조각상,거기다 그를 기리는 비명들.과연 「태백루」는 저 동정호의 「악양루」,무창의 「황학루」와 함께 중국 3대누각으로 칠 만했다. 하지만 필자는 어서 이 엄숙한 전당을 벗어나고 싶었다.저 산꼭지에는 비록 전설이지만 이태백의 최후를 증언하는 현장이 지금도 채석강 맞바람에 천리장강을 굽어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거기서 엉망진창으로 취한채 저 채석강의 달을 잡으려 풍덩 투신해버리는 그 미치광이의 환상을 잡고 싶어서였다. 채석산 정상은 과연 가슴이 후련했다.장강이 아찔하게 굽어뵈는 벼랑위로 넓은 반석위에 「연벽대」란 큼직한 글씨.그러니까 옥을 꿰어놓은 관망대라는 뜻이지만 어디 천년전부터 전설로 불리던 「착월대」만큼 친숙하랴! 착월대서 조망하는 장강의 도도함이나 착월대서 굽어보는 천인단애의 「채석기」는 분명 절경이었다.그래서 이태백은 여기서 「우저에 배를 매고 (야박우저회고)」란 명시를 썼고,송나라 시인 매요신은 이태백의 투강설화를 시에 옮겼다.그뿐만 아니었다.현대의 요절시인 주상(1904∼1933)은 이태백이 투신했다는 채석기 밑에서 1933년12월5일 새벽,상해서 남경으로 가는 연락선에서 투신자살했다.지금은 착월대옆에 붕조처럼 두팔을 활짝 벌리고 훨훨 비상하는 이태백조상을 세웠고,그 위로는 이태백의 투강자살을 기념하는 의관총이 있다. 채석산을 내려와 당도시 동남쪽 청산 아래 당도현 하동향 태백촌에 있는 이태백의 무덤으로 발을 옮겼다.말하자면 전설의 현장에서 사실의 현장으로. 청산은 해발 200m에 가까운 낮은 산.하지만 평지에 있는 이태백의 묘는 초행자가 인가로 알고 지나치기 일쑤다. 건너편 용산에서 이장한 이 묘는 그의 고향 사천 강유로부턴 만리타관이었다.이태백 생전의 친구이던 범작의 아들 범전정이 이 지방 관찰사로 있을때 이태백의 두 손녀 청에 따라 이장을 결정한 것이다. 묘역은 상당히 넓었다.공원을 방불케 다양한 관상수,초입엔 장중한 「태백사」,당나라 헌종때 세웠다지만 여러 차례 중건한 듯새로웠고,열몇개의 비,그중에 「임종의 노래」가 새겨져 가슴을 뭉클케 했다. 무덤은 묘각안에 있었다.다섯겹의 두레석에 둘러싸인 무덤,2m높이의 운석 묘표엔 「당명현이태백지묘」가 이국나그네를 어리둥절케 했다.그의 호방한 일생에 비추어 한낱 시인으로 묘비를 달지 않고,하필이면 그가 혐오하던 도덕군자인 명현으로 받들었을까. 이태백 스스로는 어이없게 찡그리고 있을지 몰랐다.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시인 이태백」을 찾고 있는데 말이다.당나라의 명시인 가도는 여기 이백묘를 참배타가 객사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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