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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꽂이/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외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김인숙 외 지음) 2003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를 비롯,특별상 수상작인 전상국의 ‘플라나리아’,추천 우수작인 복거일의 ‘내 얼굴에 어린 꽃’,하성란의 ‘자전소설’,전경린의 ‘부인내실의 철학’,김경욱의 ‘고양이의 사생활’ 등을 실었다.문학사상사 9000원. ●한국 현대문학사(김윤식 외 지음) 한국 현대문학 100년사를 통시적으로 조감했다.시와 소설,희곡,평론에 걸친 각 장르의 현역비평가 34명이 1900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문학의 흐름을 정리,문학 사료집으로 꾸몄다.김윤식 김우종 정현기 조남현 이동하씨 등이 집필했다.현대문학 1만 3000원. ●섬,나는 세상 끝을 산다(한창훈 지음) 지난 98년 소설 ‘홍합’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저자의 신작 장편소설.섬의 외진 곳에서 혼자 적막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변방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열 두개의 이야기를 연작형식으로 엮었다.창작과비평사 8000원. ●피아노소리(김연화 지음) 제2회 ‘문학과 경계 문학상’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경기도일산 신도시에 있는 월마트를 무대로 중산층에 편입하려는 변두리 사람들과 외국 근로자들의 고달픈 생활을 그렸다.문학과경계 8000원. ●2003 신춘문예 당선시집 대한매일 등 올해 전국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 당선 시와 시조를 수록했다.시집에는 대한매일 시 당선자인 김경주의 ‘꽃피는 공중전화’등 14명의 당선작과 신작시 각 5편,심사평,당선소감과 당선자들의 약력 등을 실었다.문학세계 8000원. ●커피이야기(줄리아 알바레스 지음,송은경 옮김) 저자가 남편과 함께 고향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나무그늘을 이용해 환경친화적으로 커피를 재배,생산하며 이 체험을 소설로 썼다. 나무심는사람 6800원.
  • 문학단신/정지용시선 일어판 출간 외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인 정지용(사진) 시인의 일어판 시집 ‘鄭芝溶 詩選(정지용 시선)’이 최근 일본에서 출간됐다.그간 일부 작품이 소개된 일은 있으나,그의 시 세계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시선집이 일본에서 번역,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시 전문 출판사인 가신샤에서 나온 시선집은 오양호(인천대) 사노 마사토(대진대) 심원섭(경기대) 하야시 다카시(일본 교토대) 교수가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문학 연구지원을 받아 3년만에 나온 작품이다. 시선집에는 1935년에 나온 ‘정지용 시집’에 실린 43편과 41년에 발간된 ‘백록담’수록시 14편 등 시 57편과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해설,연보 등을 수록했다. 심 교수는 “가장 문제가 된 점은 현재까지 그 의미가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정지용 특유의 신조어 및 방언과,그의 정교하고 창의적인 개성을 번역에 고려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심 교수를 비롯한 번역팀은 정 시인이 학창시절을 보낸 일본 교토(京都)에 시비도 세울 계획이다. ***계간문예지 ‘다층’을 발간하는 다층문학동인은 17∼18일 이틀동안 경남 진주에서 시낭송회 및 문예이론 세미나를 개최한다.전국에서 활동중인 다층문학동인 70여명과 진주지역 문인,독자들이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064)757-2265.
  • 고려대 신임교수 ‘女風’

    고려대(한승주 총장서리)는 15일 2003년도 전기 임용교수 51명 가운데 17.6%인 9명의 여성 교수가 신규 임용됐다고 밝혔다. 경영학과의 조승아(36) 미국 로커스대 교수와 조성욱(39)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정치외교학과의 이신화(38) 고대 동아시아교육연구단 교수,국문학과의 신지영(36) 음성과학회 이사 등 4명은 모두 30대 인데다 해당 학과에서 처음으로 여성교수로 임용돼 ‘우먼 파워’를 과시했다.학교측은 “지금까지 학기당 신규 임용교수 50여명 가운데 여교수가 1,2명에 그쳤던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일”이라면서 “이번에 임용된 여교수들은 국내외 저명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하는 등 연구 업적이 탁월했다.”고 밝혔다. 이세영기자 sylee@
  • 풋풋하고 담담한 ‘순수표’사랑 ‘마들렌’

    풋풋하고 담담한 ‘순수표’사랑 ‘마들렌’

    신세대 아이콘 조인성·신민아를 주인공으로 세운 영화 ‘마들렌’(제작 프리시네마·10일 개봉)은 스무살 언저리에 걸쳐있음직한 풋풋한 사랑을 그린 청춘멜로.‘몽정기’‘색즉시공’‘품행제로’등이 청춘군상의 왁자한 수다를 풀어놨다면,이 영화는 두 남녀를 구심체로 조근조근 낮은 목소리로 사랑이야기를 펼친다. 운명이라고 밖에는 설명하지 못할 극적인 만남.영화는 멜로물의 익숙한 한 전형을 빌려 시작한다.소설가를 꿈꾸는 국문학도 지석(조인성)은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학생으로 매사에 신중하다.그가 머리를 자르러간 데가 하필이면 중학교 동창 희진(신민아)의 미용실.지석과 희진은 너무 많이 다르다.만난 지 며칠만에 “한달만 사귀어보자.”며 당돌하게 제안하는 희진은 경쾌하고 개방적이다.빠르게 다가서는 희진,수줍게 멈칫거리는 지석의 사이에 영화는 지석의 첫사랑 성혜(박정아)를 밀어넣어 갈등을 만든다.첫사랑에게 지석은 새삼 이끌리고,밴드의 리드싱어로 멋진 여대생이 된 성혜에게 희진은 질투와 소외감을 느낀다. 그 어떤 자극적인 장면도,죽거나 헤어지는 강렬한 설정도 없이 영화는 그저 담담한 ‘무공해표’다.한창 주가오르는 신세대 주인공들 말고는 신세대 관객 취향을 정조준한 대목은 없어 뵌다.‘뽀송뽀송한’화면의 예쁜 영화인 것만은 틀림없다.그러나 단순한 삼각관계의 갈등에 속절없이 느린 호흡,지나치게 순진한 문어체 대사가 부담스럽다.짭짤한 조연으로 정평난 김수로가 지석의 곁에서 사랑의 용기를 북돋우는 인정많은 이웃 형으로 나온다.지난 98년 ‘퇴마록’으로 데뷔한 박광춘 감독의 두번째 작품. ●황수정기자
  • 대한매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성혁

    1.기형도 시의 가상성 그의 죽음에서 벗어나 작품속 죽음 의미찾아 이 비평문은, 그러니까 기형도의 텍스트와 텍스트를 이어보고 만져보면서 이 가상적 구성물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을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재구성(‘시인'의 세계관이나 무의식을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하여 다시 텍스트를 짜내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우선 기형도 시의 ‘가상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이는 기형도 자신도 원하는 것일 게다. 그의 친구인 원재길은, 별로 주목된 바 없는 글이라 생각되는 10여 년 전의 글에서, “창작자와 시적 자아를 동일시하는 심리주의 비평의 어떤 그릇된 접근 방식은 시인 자신으로부터 이미 거부당하고 있다.”(대화적 울음과 극적 울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위에서 거론한 비평가들이 조야한 심리주의 비평에 빠졌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시와 기형도의 의식의 동형관계에서 벗어나 시를 문학적 텍스트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원재길은 이미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기형도의 여러 시편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 인물과 간단한 사건과 시간에 순연하는 구성이 있는 극적인 구조를 취한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기형도 시가 하나의 독특한 가상적인 구성물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하지만 그는 이에 대해 깊게 논의를 더 진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지적이 논자들에게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았다. 대개의 평문들에선 기형도 시의 등장 인물들-낯선 ‘그'로 자주 등장하는-은 대상화된 ‘나'로 취급되어 기형도의 자아를 반영하는 인물이 되어 버리곤 한다. 즉 기형도 시가 ‘극적 구조', 하나의 가상적 구성물임을 주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1)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부분 2)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한번 꽂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부분 1)에 등장하는 서기나 ‘김'을 대상화된 기형도 자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한편으론 옳고 한편으론 그르다. 옳다는 점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는 나”라고 발언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모든 허구적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시 같은 서정적 장르에서는 그 분신의 농도가 더 짙으리라. 하지만 그 등장 인물이 시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파악은 그르다. 시에서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등장 인물은 시 텍스트의 공간 내에서 자기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나'는 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게 된 텍스트 속의 ‘나'이다.시인의 자아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나'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서정시인일 것이다. 위의 시에서 서기는 시인의 대리일 뿐 아니라 카프카적 의미에서의 서기, 관료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일에 탕진하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형식의 상징으로서의 서기이다. 유리창은 그 서기를 바라보고 있는 ‘나'와 서기를 갈라놓는다. 이 유리창 때문에 ‘나'는 울고 있는 서기에게 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수 없다. 하지만 유리창 덕분으로 ‘혼자 울고' 있는 서기를 발견할 수 있다. 유리창은 타자와 소통할 수 없게 하는 칸막이면서도 또한 ‘혼자' 각각 서로를 바라보며 소통할 수 있게 한다. ‘나'와 ‘그'를 동일시하여 각자 홀로 있는 ‘나'와 ‘그'의 어긋나 있는 대위 구조를 보지 않는다면 이 시가 뿜어내고 있는 의미를 붙잡기 힘들다. 원재길의 ‘극적 구조'를 넓게 본다면 이 장면 역시 그 구조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 침묵의 극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1)의 서기의 울음을 조명하여 해명해주는 텍스트로 볼 수 있는 2) 역시, 독백의 극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와 ‘김'은 동일 인물의 분신들이다. 1)에서 시적 화자가 ‘나'라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적 화자가 담론 배후에 있고 시 표면에 등장한 ‘나'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김'의 중얼거림이 나타나 있다. 홀로 있는 ‘김' 옆에서 ‘김'을 ‘바라보는' ‘그'는 사물화된 김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김이라 할 수 있는데, 성으로만 표시되어 개성을 잃어버렸음을 표시하는 ‘김'보다 더 몰개성적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이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그와 김, 그리고 흐물흐물한 대명사가 되어 버린 ‘나', 또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극적으로 어울리게 된다. 그런데 1)에서 서기의 울음을 볼 수 있는 순간은 바로 홀로 있음의 순간, 침묵의 순간이었다. 침묵이 깨지면, 이 순간은 깨지고 말 것이다. 세계를 토막내는 언어의 세계가 침묵할 때 순수한 존재 자체가 떠오르지 않겠는가. ‘두 시', 삶이 무의미에 무너져 내리고 있는 순간을 깨달을 때의 침묵의 시간, 그 직후터뜨리는 울음의 순간에 배치되는 사물과 인간을 이 시들은 포착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극적 구성은 플롯을 시에 도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배치된 장면을 응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이 일상을 갑자기 전복시키는 시간이 정지된 순간은 기형도 시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동된다. 그는 (어느 푸른 저녁)의 시작 메모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어떤 ‘순간들'을 만난다. 그 ‘순간들'은 아주 낯선 것들이고 그 ‘낯섬'은 아주 익숙한 것 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방향으로 튕겨나갈지 모르는, 불안과 가능성의 세계가 그때 뛰어들어온다. 그 ‘순간들'은 위험하고 동시 에 위대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감각들의 심판을 받으며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며 이러한 불행한 쾌락 들이 끊임없이 시를 괴롭힌다. 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 기형도의 가상적 구성물-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순간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 순간은 시간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어떤 흐름의 불연속선들이 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어떤 연속선상을 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텅 빈 그 순간, 침묵의 순간을 말하기 위해선 우회로를 빙빙 돌아 그 순간을 간접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즉 가상적 공간, 더 나아가 환상적 공간을 구성하여 그 순간을 암시할 수밖에 없다.(어느 푸른 저녁)에서는 그 순간을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이라고 말한다. 이 저녁엔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가는 순간이 온다. 이 환상적인 순간은 어떤 예감을 통해 감지하게 된다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고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것은 무방하지 않은가/나는 그것을 본다/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을 숨기고 있는가/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움직임이 홀연히 정지”한 상태, 이 상태는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실제 상황의 묘사로는 이 상태를 그려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볼 수 없는, 예감으로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상태이면서, 예감했다고 알아차린 순간 없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시는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순간은 그러니까 현실 묘사가 아니라 환상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환상은 의미의 블랙 홀과 같은 상태다. “보이지 않은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의미는 사라지고 언어도 사라진다. 시인은 또 “이 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은 역시 순간일 뿐이다. ‘검은 외투'-죽음의 외투-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애써 외면한다. 그리고 그들의 딱딱하고 무미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본다”고 시인은 말한다.(여기서도 시적 화자는 보는 사람이며, 증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블랙 홀과 같은 어떤 순간을 느낀 순간, 나에게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그 악마는 말을 걸어온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의 인생의 의미를 모두 무화시킨다.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라고 그 악마는 속삭인다.다시 말해 모든 것이 무의미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지는 그 순간을 예감할 때 그 악마는 등장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 아마도 죽음으로 가는 삶의 법칙을 가만히 상기시킨다. 기형도 자신이 말한 ‘가능성'과 ‘불안'은 그 ‘순간'이 이 악마적인 것의 출현을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악마적인 것이 죽음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시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새로운 삶,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가능성'을 주며 ‘위대'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의 지경에 다다른 이때 투명하고 푸른 공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감추어진 ‘둥글고 빈 통로'가 열린다. 그래서 악마적인 ‘그'가 말한 숨겨져 있는 ‘법칙'은 다만 죽음의 법칙만이 아니라 환상 속의 다른 통로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형도 시의 환상은 양면적이다. 일상적 삶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되는 그의 환상은 우리의 삶을 무화시키는 블랙 홀의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시 신비롭게감추어진 희망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시는 시의 탄생과 그 탄생이 가져오는 양면성에 대한 알레고리일지도 모른다. 2.기형도 시의 이중성 파우스트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를 지옥으로 데려간다. 이때 아름다움의 순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은 일상의 권태로운 세계를 무화시킨다. 인간은 권태의 세월보다 죽음을 무릅쓴 아름다움의 세계에 닿고자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아름다움은 치명적인 유혹이라 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죽음의 세계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일상적 삶이 도리어 죽음과 같은 삶이라는 것을 드러내어 삶을 희망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파우스트의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도 늙은 파우스트가 아름다움의 순간을 찾아 나서는 데서부터이다. 물론 그는 끊임없는 생성을 젊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순간이여 ‘멈추어라'라고 만약 자신이 말한다면 자신을 지옥에 데려가도 좋다고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파우스트는 자신이 매립제에건설한 도시(악마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를 바라보며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죽음의 말을 토해내며 쓰러진다. 즉 파우스트가 산 젊음은 이 아름다운 가상에 대한 외침에 도착함으로써 끝난다. 그의 젊음과 행위는 결국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으며,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아름다움의 순간'이란 착지에서 그의 젊음과 힘은 지옥으로 넘겨진다./기형도 시가 포착하려던 그 “위험하고 동시에 위대하다”는 ‘순간'의 이중성도 아름다움에 대한 《파우스트》적 아이러니와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형도의 시가 드러내는 아이러니는 순간이 가져오는 이 이중성에 대해 팽팽한 긴장을 풀지 않음으로써 이끌려 나온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시작 노트와 을 다시 상기해보자. ‘아주 낯선 것들'이면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라는, 순간들의 이중성에 대한 긴장을 시인은 계속 놓치지 않는다. 아니 순간들의 이중성의 포착은 이 대상에 대한 긴장에 찬 예민성의 끈을 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주 낯선 것들로의 ‘둥글고 빈 통로'를 마련하는 어떤 순간은 우리가 언제나 부딪히는 일상에서의 어떤 순간이다. 그래서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그 순간이 벌려내는 환상은 우리 삶의 현장인 일상의 삶을 무화시키면서도 어떤 다른 세계로의 통로, 다른 삶의 세계를 열어 놓는다. 이 이중적인 통로의 발견을 기록하는 데서 기형도의 시는 드러나기 시작한다. 통로의 이중성은 ‘둥글고 빈'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미지화되어 있다. ‘둥근 것'은 아날로지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아날로지는 모든 개체가 전체를 비추고 전체가 개체들을 끌어안는 조화의 세계 아닌가./그 세계는 둥글다. 하지만 또한 그것이 비어 있다는 진술에서 ‘둥근 것'의 아날로지 세계는 아이러니의 상태로 변화된다./‘둥글고 빈' 통로는 아름다움에로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無에로의 통로이기도 하다. 이 둥글고 텅 빈 통로를 통과하여 다다른 어떤 다른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공기 방울의 세계이다. 저녁 노을이 지면/神들의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城 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신비로운 그 城///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그는 그 공터를 떠났다/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성에 살고 있다///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 - 성 안은 “아름답고/신비”한 세계이다. ‘시작 메모'에서 말한 ‘위대한 순간'이 형상화된 세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위대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이 세계에도 해당된다. ‘존재'가 차안의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이 세계는 신들이 사는 세계이지 않은가. 이 세계는 신들과 농부들과 작은 당나귀는 이 성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어느 하나도 빠지면 성립되지 않는 세계이다. 즉 아날로지의 세계다.시인도 ‘역시' 작은 당나귀들도 평화로운 그 성에 농부들과 살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은 공기와 같은 세계라서 “구름 혹은/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다가갈 수 없다.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지고 세계가 낯설어지며 감각이 착란될 때의 순간이 열어놓는 어떤 ‘푸른 저녁'같을 때, 사람들이 “가벼운 구름같이/서로를 통과해”갈 수 있었다. 이 ‘순간'에만 바로 ‘둥글고 텅 빈' 통로를 따라 이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성 안의 세계는 바로 그렇게 공기 방울, 구름이 된 사람들이 어우러져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이 공기 방울의 세계는 차안의 공간에 있진 않지만, 차안과 동떨어진 피안의 공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계는 차안의 공기 안에 있다. 우리가 언제나 대하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언뜻 벌려진 공기와 공기 사이의 블랙 홀을 공기가 되어 통과하면 만날 수 있는 세계이다.그러니까 이 성 안은 우리 머리 위에 떠 있는 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옆-앞에 있다. 그래서 이 세계에 들어가려는 골동품 상인-아마 차안의 세계의 속성인, 살해를 자행하는 폭력성을 보여주는 등장 인물이라 할-이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가 보았자 헛수고가 될 수밖에 없다. 골동품 상인은 차안의 세계 뒤에 있는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는 숲만 자르면 성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삼차원적 세계 인식에 머물러 있다. 그가 차안에서 아무리 폭력과 파괴를 행한다 해도 이 숲으로 된 성벽 안은 의연히 평화로운 마을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그만큼 불안하다. 우리가 이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방도는 앞에서 보았듯이 기화되는 길밖에 없다. 통로가 ‘빈' 통로여서 들어가려는 이는 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루어진 공기 세계는 어떤 무게 있는 물질성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볍게 둥둥 떠다닌다. 공중에 투사된 영상처럼 흩어졌다 모여지는 그런 세계다. 우리가 손으로 만질라치면 그 세계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릴 것이다. 이 아날로지의 세계는 그래서 희망의 저편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은 품을 수 있으나 어느전도와 착란의 순간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차안에선 이루어낼 수 없을 세계이다. 기형도가 희망에 대해 ‘어둡고 텅' 비어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숲으로 된 성벽' 자체가 비어 있고, 그 비어있는 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도 빈 희망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다시 돌아갈 수 없으리, 흘러간다/어디로 흘러가느냐,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희망을 포기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리, 흘러간다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 - (植木祭) 중에서 기형도 시에서의 ‘죽음'은 시인의 우울한 세계관이나 유년의 기억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와 선택을 통해 ‘각오'한 것이다./ 이 죽음의 각오는 ‘둥글고 빈 통로'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통로에 들어간다는 일은 다른 삶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의미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앞에서 본 바 있었다. 통로 저 편에 있을 숲으로 된 성벽에 갈 수있으리란 희망은 절망으로 전화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둥글고 빈 통로를 걸어 도달할 수 있는 희망이란 빈 희망이기에 그러하기도 하고, 숲으로 된 성벽이 아름답다고 외친 순간 그 아름다움의 덧없음이 부각되면서 죽음이 드러나기 때문에, 즉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은 어두운 희망이라 말할 수 있기에 그러하기도 하다. 그 성벽은 “침묵의 목책 속에 갇힌 먼 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란과 환상을 통해 대기에 구멍이 나는 순간을 파악하려는 기형도 시는, 아름다움에 대한 희망을 포기했을 때의 죽음으로 가는 구멍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가 점차 탁해지면서 ‘안개'로 오염되기 시작한다.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안개) 중에서 푸른 대기 속의 둥글고 빈 통로는 ‘안개의 빈 구멍'으로 전화한다. 다른 삶으로 가는 ‘순간의 통로'가 안개에 의해 막혀버리고 순간이 가지는 죽음의 성질만이 드러난다. 이 순간은 안개로 뒤덮인 환상적인 마을을 구성함으로써 나타나고, 그 죽음의 성질은 다시 일상이란 것이 얼마나 죽은 상태와 같은가를 간접적으로 포착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차안의 세계에 대한 네거티브 필름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네거티브 필름 같은 가상적 세계는, 흐리멍덩한 색깔인 안개의 색깔로 대상의 윤곽만 드러내면서, 생명 없고 답답한 무엇으로 현상한다. 이 시를 더 읽어보자. 죽음의 공기인 ‘안개'의 빈 구멍은 사람들을 빨아들여 그 속에 가두어 놓는다. ‘이 읍' 사람들의 삶은 ‘쓸쓸한 가축들'처럼 무리지어 있지만, 안개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세계 앞에서 무력하고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다. 그 읍은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일어나는 곳인데, 그것은 “한 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하기도 하고, “방죽 위에 醉客 하나가 얼어 죽”지만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같은 시에서)하기도 하는 사건이다. 겁탈당한 여직공과 얼어죽은 취객은, 윤곽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읍 안 사람들에겐 파괴당한 삶을 흐릿하게 바라보고는 쓸쓸하게 고개를 숙여보게 하는 사건 정도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들 눈앞에서 타인들은 안개 속으로 ‘지워지고' 그들은 제각기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게 된다. 안개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 없게 만드는 세계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는 그렇게 변화 없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미지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변화 없는 지속이 기억의 지속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반대이다. 이 읍에선,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이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러므로 이런 지속의 시간성은 텅 빈 시간성이다. 기억이 없이 사는 것은 텅 빈 삶이다. 그것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적인 울림이 없는 시간이고, 그래서 미래조차 가능하지 않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현재가 끊임없이 과거로 되어야만 미래가 있을 수 있어서, 과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미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개는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는 죽은 존재이다. 죽은 존재인 안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은 존재이다. 안개는 독과 같다. 그러나 그 읍 사람들은 안개를 마약처럼 마신다. 안개를 편하게 느낀다./ 안개가 끼지 않으면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내보여야만 해서 “방죽 위의 얼굴들은 모두 낯설”어지고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읍은 ‘안개의 聖域'이 된다. 안개 속의 삶이 정상적인 삶이 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 반어적 표현에는, 안개가 ‘무럭무럭' 키우는 아이들의 삶이란 그들 모두 검은 굴뚝과 폐수와 겁탈의 위험이 있는 공장으로 쓸쓸히 끌려가는 가축과 같은 삶임을 암시한다. 3.작품속 죽음의 포착 (안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가 희망의 포기를 선택했을 때 기형도 시가 발 딛고 있던 ‘순간'은 무서운 죽음의 세계-안개로 뒤덮인 읍과 같은-를 입벌려 드러낸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계-지옥에서의 형벌-는 ‘느릿느릿 새어나'와 계속 ‘미친 듯이 흘러다'((안개)중에서)녀야 한다. 앞에서 본 (식목제)의 “마음 한 자락 어느 곳 걸어두는 법 없이”, “어느 곳이든 기척 없이”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형벌은 정착이란 있을 수 없게 만든다. 기억도 없이, 미래도, 삶도 없이 흘러다녀야 한다. 오직 흘러다님의 지속만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의 읍내 사람들은 명계(冥界)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유령과 같은 존재였다. 삶을 잃어버린 이 유령의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일군의 기형도 시의 한 주제를 이룬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러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 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기형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희망을 포기했다. 그리하여 현실의 이면에 있는 죽음의 안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와 동일하게 안개에 중독된 유령들을 포착하기 위해선 희망을 억눌러야 한다. 시적 화자는 자신의 육체를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들이 머무는 정거장으로 쓰려고 한다. 불안이 죽음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을 머물게 한다는 말은 죽음들의 예감을 머물게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죽음들이 방문을 할 수 있도록 길이 자신에게 흘러들어 죽음이 그 길을 통해 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길이 흘러드는 정거장으로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려면 자신의 육체 자체가 걸어다녀야 한다. 길이 걸어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길이 흘러 온다는 말은 자신이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길을 흡수한다는 말이다. 걸으면서 길을 흡수하고 흡수한 길을 통해 불안-유령을 만나고 그 유령의 세계를 구성하는 환상으로 시가 구성되게 된다. 이 유령과의 대면을 보여주는 대목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白夜)에선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팡팡 빛나는 이 무서운 白夜” 속에서 “무슨 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천천히 걷고 있”는 한 사내를 보여준다.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내는 “문닫힌 商會 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그의 등에 “軍用 파커 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말이다. 담배 살 돈이 없을 이 사내는 아마 어린 아들과 함께 길에 쓰러져 쓸쓸히 얼어죽을 것이다. (가는 비 온다)에서는, 어느 가는 비 오는 날,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지 않는다는 시적 화자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전개하는 여러 상념들을 보여준다. 그 상념들은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나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와 같은 죽음의 여러 모습이다. 주검을 직접 보여주는 시도 있다. 가령, “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죽은 구름))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여기서 주검은 감정이 절제된 상태로 서늘하게 즉물화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우울하게 가고 있는 거리엔 주검들과 죽음에 대한 상념을 유인하는 ‘낡은 간판'들이 널려 있으며 기후마저도 그러한 상념을 피워 올리게 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사람들은 좀 있으면 죽을 운명이거나 죽어버린 이다. 또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유령들이다. 이들은 회한과 외로움에 말라죽어 가는, 행복과 거리가 먼 이들이다. 플랫폼에서 본 청년들은 “톱밥같이 쓸쓸해 보이”고((鳥致院)), 어느 카페에서 본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를 파내”면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밋빛 인생))라고 새겨 넣는다. 삶을 박탈당한 유령들의 포착은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처럼 ‘흘러다'니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가 포착하는 대상의 대부분인 흘러 다니는 사람들은 시적 화자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그 사람들의 삶이 시적 화자의 삶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다시 시적 화자의 내면 독백은 떠도는 자의 내면을 드러내게 된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 (진눈깨비) 중에서 진눈깨비 뿌리던 날, 시적 화자는 그날도 역시 거리를 걷는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도 본다. 그리고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를 듣는다.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시적 화자가 주체가 되어 추억들을 불러온다기보다는 저 진눈깨비와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기억들을 불러온다. 그 기억은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오”시기에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엄마걱정) 중에서)의 기억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가 거리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어 빈방에 혼자 훌쩍거린 기억을 감추고 있을 사람들이며, 역시 집에 들어가면(집이 있다면) 빈방에 홀로 앉아 있을 사람들일 게다. 죽어가는 이 유령들은 그런 기억을 깊이 품고 살아갈 것이며, 이는 다시 역으로 시적 화자 자신도 그 기억을 품고 쓸쓸히 죽어 가는 유령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래서 ‘죽음'을 발견하는 ‘흘러 다니기'는 점점 시적 화자 자신 안의 죽음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 되어버리게 된다. 시적 화자는 “곧 무너질 것만 그리워했”((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다고 말한다. 무너지는 것들이 결국 그의 삶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을 증언하는 시적 화자 자신이 유령과 같이 떠돈다. 그는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쭉하고 가늘은/자신의 다리를 보고 동물처럼 울부짖는다. 그렇다면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여행자) 중에서)라고 울부짖는 여행자와 같은, 떠돎을 그만둘 수 없는 유령이다. 환상적 공간의 열린 순간을 통해드러난 죽음의 세계, 그리고 그 안을 떠돌아다니는 유령적 삶의 포착은, 이렇게 자신도 유령이라고 인식하는, 안개의 구멍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도 안개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점을 인식하는 시적 화자의 등장을 통해 완성된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은 더욱 전일화되고 가공할 것으로 드러낸다. 유령의 세계를 증언하는 자신도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경악의 순간은, 바로 메두사가 페루세우스의 방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그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형도의 시는 바로 그 경악의 순간을 포착한 카르파치오의 (메두사)란 ‘그림'과 같은 것일 터, 시 텍스트는 그 경악의 순간 자체, 또는 그 순간의 재현이라기보다는 경악의 순간을 구성하여 현현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예술 텍스트가 구성되기 이전엔 그 경악의 순간을 우리는 ‘맞서게 되지' 못한다. 환상을 사용하여 순간을 포착하는 시-예술이 그 경악의 얼굴을 객관화할 때 비로소 경악의 순간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입 속의 검은 잎)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가 경악하는 순간을 객관화하는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택시 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입 속의 검은 잎) 중에서 이 시에서 등장하는 진술과 사건들이 현실의 어떤 대응물을 지시한다고 본다면 곧바로 해석의 난점이 생길 것이다. 운전기사, 장례식, 망자의 혀, 없어진 사람들, 죽은 사람, 검은 잎,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나' 등, 이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시 텍스트 안에 배치되었을 땐 이 단어들은 그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게 된다. 하나의 극적 공간 속으로 이 존재들은 새로 의미를 얻으며 움직인다. 이 움직임은 공포의 분위기에 맞추어진다. 어떤 가공할 권력에 의해 살육된 자들이라 상상할 수 있는 ‘무더기'의 실종된 자들-망자들-의 말하지 못하는 혀-잘린 혀일까?-는 유령처럼 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그 유령들은 벌써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린 사람들 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 혀들은 이제 ‘거리에 흘러넘'친다. 장례식은 살육당한 자들 중 한 명의 장례식일까? 그 죽은 이의 잘린 혀 역시 거리에 흘러 다닌다. 물론 그 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잘린 혀들이 내는어떤 철버덕거리는 소리, 성대가 잘려나간 채 바람만 빠지는 쇳소리를 내는, 꿈틀대는 소리들을, 원한들을, 슬픔들을, 저주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청 속에서 시적 화자는 자신의 혀가 ‘천천히 굳어'감을 자각한다. 그것은 시신을 실은 ‘백색의 차량 가득' 나부끼는 검은 잎 때문이다. 살육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해당한 자들의 유령이 검은 잎일까? 그 유령들-검은 잎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릴 때 혀는 굳어져오며, 이윽고 죽은 자의 혀가 된다. 그리하여 시는 죽은 자의 혀로 쓰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옥에 가 있는 이들이 지옥에서 겪는 고통을 무당처럼 대신 말해주는 이가 된다. 정리하자면, 시적 화자가 온통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 와 있음을,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세계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음을, 더 나아가 ‘죽은 사람'인 운전기사가 어딘가로 그를 데려가서 이 유령들이 시적 화자의 혀를 통해 죽음의 이 세계를 증언할 수 있도록 시적 화자에게 내리는 신들림을, 언제 살육될지 몰라 두려워하는(‘그 일이 언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이의 음산한 어조로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아득한 공포의 순간/을 객관화시키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어떤 수수께끼를 동반한 순간적 전율을 느끼게 된다. 기형도의 시가 도달한 한 극점은 바로 여기다. 앞에서 보아온, 환상적 공간이 뚫어 놓은 순간의 구멍을 통해 나타나, 죽음을 퍼뜨리는 세계와 그 속에서 떠도는 유령들이, 이 시에선 하나의 전율케 하는 장면으로 종합되어 갑작스레,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 경악의 세계는 물론 가상의 세계이고 현실 세계로 치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기형도 시의 세계가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향유 대상으로서의 단순한 가상과는 달리, 시어가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뿜어내는(메두사를 본 메두사), 자기 파열이 가져오는 전율을 우리에게 이 가상 세계는 던져주는데, 그 객관화된 전율과 맞서는 독자는 충격 속에서 새로운 현실에 부딪히며 일상적 시간의 지속이 파열되는 ‘순간'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상적 순간의 충격 속에서 일상적 시간 안에 감추어진 안개와같은 죽음의 습기를 감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포의 세계는 기형도 시가 열어 놓은 ‘순간의 통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 속의 검은 잎)의 세계는 그 반대 극점이라 할 수 있는 (숲으로 된 성벽)의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고 희망할 순 없을까. ‘순간의 통로'는 다시 저 유토피아적인 미의 세계로, 숲으로 된 아날로지의 세계, 공기 방울 같은 환상의 세계로 길을 열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물론 아날로지의 세계가 급전하여 유령들의 세계, 경악의 세계가 현현하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아 왔다. 그러나 반대로, 경악의 세계가 급전하여 다시 저 아날로지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가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두 극점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경악의 세계는 다시 희미하게 ‘숲으로 된 성벽'으로 가는 길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적 세계는 부정성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빛날 수 있다면 말이다./그렇다면 기형도의 시는 일상적 삶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부정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를 통해세계와의 화해의 열망을 담아 놓을 수 있는 용기도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세계의 연결 지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 작업은 상당한 분석과 해석을 요하는 일일 것이다. 글을 마치는 이 시점에서도 비평적 재구성은 완성되지 않았다. 아니 결코 완성될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기형도 시 텍스트는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며 몸을 벌리고 있다. (끝) ◆당선소감 영광이다.기쁘다.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진다.과연 좋은 글을 내가 계속 써나갈 수 있을지,두렵기조차 하다. 당선 통보를 받고 비평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좋은 비평을 하기 위해선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큰일이다. 지금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다.문학이 다시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정치성에 대해서,그리고 더욱 정치성이 짙은 비평에 대해서. 선거 행위만이 정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는 윤리의 문제로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윤리가 단순한 도덕의 차원이 아니라면 삶에서의 권력과 활력 문제로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문학은 권력 망을 드러내고,비판하며 그것에서 삶이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줄 수 있고,삶의 활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은가.그렇다면 문학의 윤리-정치성은 더욱 증폭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학 그리고 비평이 정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새로운 인간 관계의 가능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나에게 사랑과 기쁨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그리고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도,빈 말이 아닌 ‘고맙습니다.’란 말을 전하고 싶다. 이성혁 ●약력 67년 서울생, 한국외국어대 일어과 동 대학원(국문학), 외대강사, 99년 ‘문학과 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심사평 김용하의 ‘미적인 것의 정치성과 정치적인 것의 윤리성’,오홍진의 ‘관념으로 빚은 소설의 성채’,이성혁의 ‘경악의 얼굴-기형도론’,이은식의 ‘사물과 하나가 되기까지의 여정’,장사흠의 ‘풍경의 미학과 권력의 탐색’이 주목을 받았다. ‘미적인 것…’은 미학적 범주들과 시적 언어 사이의 조응 양상을꼼꼼히 살핀 글이지만,미적 개념들을 상호 연관시켜 긴밀한 인테리어를 꾸미는 데는 실패하였다.‘관념으로…’는 짐승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 사이에서 요동하는 정찬 소설의 권력의 역학을 집요하게 추적하였으나 스스로 논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사물과…’는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갈아타며 정현종의 시적 여정을 차분히 밟아간 글이었으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풍경의 미학…’과 ‘경악의 얼굴…’이 마지막까지 남았는데,‘풍경의…’는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개진된 권력의 내면화와 그에 대한 문학적 응전의 과정을,핵심 의미체들을 길어내며 흥미진진하게 추적한 글이고,‘경악의…’는 시인의 심리학에 치중한 종래의 평문들을 단김에 뛰어넘어 극적 구성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 글이다. 그러나‘풍경의…’는 기계적인 구성과 엉뚱한 결말이 글쓴이의 설익은 문학관을 엿보게 하였으며,‘경악의…’는 미학에서 사회학으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리멸렬해지더니 급기야 막다른 길로 뛰어들고 말아,심사자들을 경악케 하였다.하지만 패기만만한 도전과 그 패기가 창안해 낸 새로운 해석 세계는 썩 강렬한 인상을 남겨 마지막 선택의 근거가 되었다.이성혁씨의 당선을 축하하며 끈기 있게 정진하기를 당부한다. 정과리 김인환
  • KBS1 역사스페셜 조선 최초 국문학사 쓴 안확 조명

    KBS1 역사스페셜(오후 8시)은‘조선사 되살렸다.국학자 안확’편을 통해 조선의 국학자 안확에 대해 알아본다.조선 최초의 국문학사 ‘조선문학사’의저자인 안확은 ‘조선인명사서’‘조선사강좌’‘조선무사영웅전’ ‘조선문학사’‘조선문명사’등의 저술 뿐만 아니라 교사,역사학자,독립투사 등으로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이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역사스페셜 제작진은 안확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 식민사관에 대항하다가 학계로부터 매장당했다고 주장한다.‘조선은 당쟁 때문에 멸망했다.’는 식민사관과 조선시대를 역사의 퇴보로 정의했던 당시 민족주의 사가들에게,조선시대 당쟁을 주체적·발전적으로 인식했던 안확은 이단아였다는 것이다.역사스페셜은 또 안확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에도 주목한다.대구 중심의 비밀결사조직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이었던 안확은 지역 인사들과 연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항일무장조직을 지원했다. 또 우당 이회영을 주축으로 추진된 고종 망명 계획에도 참여했고,8년간 마산 창신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시절에는 수업 시작전 항상 ‘대한제국만세’를 외쳤다고 한다.잊혀진 조선의 국학자 안확을 살려내 그의 다양한 면모를 들여다볼수 있는 기회다. 채수범기자 lokavid@
  • ‘1월의 문화인물’ 안확 선생

    항일기의 국학자 안확(安廓·1886∼1946)선생이 2003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안확 선생은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뒤 지식인들이 서구문명 우월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여,민족문화의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곧 독립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1914년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1916년 돌아온 뒤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으로 3·1운동의 마산시위를 주동했다. 1921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조선청년회 기관지 ‘아성’(我聲)의 편집인으로 일했으며,1928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에서 촉탁으로 일하며음악 및 국문학 관계의 방대한 왕실 소장 자료들을 연구했다. 선생은 이런 연구 활동의 결과 ‘조선문법’(1917)과 ‘조선무사영웅전’(1919),‘자각론’(1920),‘조선문학사’(1922),‘조선문명사’(1923),‘시조시학’(1940) 등의 저서와 ‘조선어의 가치’(1915) 등 140여편의 논문·논설을 남겼다. 문화관광부는 안확 선생의 문화인물 선정을 기념하여 내년 1월24일 오후 2시 대우학술재단과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에서 학술대회를 여는 등 기념행사를 펼친다. 서동철기자 dcsuh@
  • 국내 첫 재소자 독학학사 탄생

    경북 청송 제2보호감호소에 복역중인 한 재소자가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시험에 합격,국내 감호소 개소(1981년) 이래 첫 학사가 배출됐다. 22일 청송보호감호소에 따르면 재소자인 김모(43)씨가 최근 독학으로 학위취득시험(국어국문학) 최종 단계인 4차에서 평균 86.42점을 얻어 독학학위검정 통지서를 받는 영광을 안았다. 강도죄로 징역 5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아 93년부터 감호소에 수감중인 김씨는 95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97년 고졸 검정고시에서는 경북 수석까지 차지했다. 김씨는 “출소 후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려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청송 제2보호감호소는 올해 검정고시에서 중입 8명,고입 및 고졸 44명과 학사고시 단계별로 41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청송 김상화기자 shkim@
  • 한국문학상 수상자 4명 선정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신세훈)가 제정한 제39회 한국문학상 수상자로 시인박재릉(65)·소설가 안영(62)·아동문학가 유경환(66)·문학평론가 이유식(64)씨 등이 선정됐다.수상작은 박씨의 시집 ‘삭발하고 분바르고’,안씨의 소설집 ‘겨울 나그네’,유씨의 동시집 ‘꽃씨 안이 궁금해’와 이씨의 평론집 ‘한국문학의 전망과 새로운 세기’등이다.시상식은 30일 오후5시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열린다.
  • 이견 못좁혀 뿔뿔이 투표 개표후엔 “새정치” 한마음

    “부모님·할아버지와 의견이 달랐지만 새 대통령이 세대 화합을 위해 노력해 주길 바랍니다.” “지난 52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 한번도빠짐없이 대선에 참여했지만 이번만큼 심사숙고한 적은 없었습니다.” 21세기 첫 대통령을 뽑은 19일 한 지붕에서 3대가 함께 사는 박래훈(朴來勳·76·사업·서울 보광동 168의32)씨 일가족 5명은 아주 긴 하루를 보냈다. 반세기 동안 줄곧 대선 투표에 참여했던 박씨와 부인 나상남(羅相南·75)씨,유신시대 투표권을 얻었던 아들 박장희(朴長羲·50·효창종합사회복지관장)·이상란(李相蘭·47)씨 부부,대선을 처음 치른 손자 박성범(朴城範·22·B대 경제학과)씨는 밤늦게까지 개표과정을 지켜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노무현(盧武鉉)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손자 성범씨는 환호를 질렀지만,박씨 부부와 아들 내외는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들은 이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투표소인 보광동사무소에서 나란히소중한 한 표를 던졌다.이번 대선에서 세대간 대립이 첨예했던 만큼 이들‘한지붕 3세대’ 가족도 좀처럼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이날 하루동안 이들은 무엇보다 보혁논란에서 팽팽하게 맞섰다.박씨 부부와 아들 내외는 “사회 안정을 위해 보수 성향의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고주장했다.반면 20대 손자는 “진보와 개혁 성향을 띤 후보가 낫다.”고 강조했다. 손자의 거리낌 없는 의사 표시에 기성세대 가족은 반론을 폈지만 논리와 가치관을 앞세운 젊은 손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광화문 촛불시위를 둘러싼 의견 차이도 그대로 드러났다.아들 장희씨 부부는 촛불시위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젊은 세대를 겨냥,우방국가로서 극단적인 반미를 자제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성범씨는 “기성세대가 충고하는 이유와 속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가 왜 행동에 나서는지 이해해 달라.”고 호소했다.“노 당선자가 전국에서 고른 득표율을 올린 것도 바로 젊은 세대의 허심탄회한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들 ‘한지붕 3세대’는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고 노당선자에게 지지를 보낼 것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손자 성범씨는 “새 대통령에게모두 힘을 실어줘야 한국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씨는 “손자의 의견을 무리하게 우리 세대와 일치시키려는 생각 자체가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무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아들 장희씨 부부는 “새 세대가 사회 전반에 나섬으로써 지역감정이 많이 해소된 것은 환영할일”이라고 피력했다. 때마침 집을 방문한 박씨의 사위 김일병(金鎰炳·55·K대 국문학과 교수)씨는 “새 대통령이 젊은 층에게 도덕과 예의의 중요성을 일깨워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아들 장희씨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가훈을 소개하며 가족부터 화합해야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장희씨는 유신시절 군대에서 부하들에게 투표하는 방법을 시범하다 야당쪽에 기표한 자신의 투표용지를 엉겁결에 내보이는 바람에 기합을 받았다며 성범씨의 두손을 꼭 잡았다. 성범씨는 “앞으로 ‘한지붕 4대’가 대통령을 뽑는 날까지할아버지·할머니가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고 활짝 웃었다. 이영표기자 tomcat@
  • 문학동네 소설상 이해경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전혀 다른 지향을 드러내는 두 편의 소설이 눈길을 끈다.한 편은 현실에 발을 담그고 사는 지식인의 고뇌를 다루고 있고,다른 한 편은 무력한 한 개인의 소설쓰기를 그리고 있다.바로 중견작가 김영현의 ‘폭설’과 올해 문단에 이름을 내민 ‘늙다리 신예’ 이해경의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가 그것이다.외견상 전혀 상관없는 두 작품이 그러나 꼭 다른 것만은 아니다. 이 두 작품은 각각 80년대 리얼리즘의 복원과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대척점에 선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기억에 대한 문제,소설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80년대 리얼리즘에 대한 회의랄까 문제의식이 예전부터 제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 이해경(39)에게 제8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안겨준 작품은 ‘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문학동네)이다.‘소설쓰기를 다룬 소설’이랄 수 있는 ‘그녀는…’은 직장을 그만 둔 ‘그’가 아내의 강권에 못이겨 어거지로 소설쓰기를 시작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소설쓰기’라는 다소 이색적인 주제라얼핏 무거움을 느낄지 모르지만 주인공의 행태도 소시민적이고,곳곳에 위트와 해학이 섞여 발랄하고 경쾌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런 가벼움이 결코 작품의 무게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오히려 전편을 통해 치밀한 의도가 짜임새있게 구성돼 있어 적당한 중량감을 담보하고 있다.‘그’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늘상 이런 식이다. 회사의 사규를 존중해 매일 오후 6시면 어김없이 퇴근하다 상사에게 찍히고,그런 상사의 눈초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모두 퇴근한 뒤까지 남아 야근하다 동료들에게 찍히는 어리숙한 숙맥,그 자체다.결국 사표를 내고서도 며칠은유예기간이 있을 것이라 믿는 그에게 주어진 것은 ‘지체없는 사표 수리’였다.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아 들었던 문학평론가 김윤식씨는 ‘그녀는…’을이렇게 평했다.“위기에 놓인 한 남자의 얘기,이 남자를 위기로 몰아넣은 건 구도도 비밀결사의 절대정신도 아닌 ‘소설’이라는 괴물이었다.말을 바꾸면 소설이 바로 절대정신이며 비밀결사이며 구도 자체”라며 “확실한 작품이다.아마 작가의 통제력덕분일 것이다.”라고. 이해경은 간단치 않은 경력을 가진 신예다.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는가 하면 이내 때려치우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영화를 전공,영화평을 몇편 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반듯한 직장으로 자리를옮겼다.그러다가 강신(降神)이라도 한 듯 다시 소설판으로 돌아온 그다.그는 “직장생활에서는 도저히 성취감을 가질 수 없어 결국 스스로 문학으로 도망쳤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품에서 소설가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작가의 고뇌가 자리잡아야 할곳에는 작가가 되려는 한 소시민의 비루한 모습이 투영되고 이런 와중에 만난 ‘그녀’는 결국 그의 인생의 변수가 된다. 소설가 오정희는 이해경에 대해 “작품의 긴 호흡과 끈덕진 근성,건강한 해학성과 따뜻하고 넉넉한 시선이 저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은희경,전경린,윤애순,김영래로 이어지다가 6·7회 수상자를 내지못해 건너뛴 뒤 8회째 문학동네 소설상의 계보를 잇게 된 그가 어떤 색깔,어떤 목소리를 낼지 자못 기대된다. 심재억기자 jeshim@
  • 책꽂이/창조된 고전 外

    ●창조된 고전(하루오 시라네·스즈키 도미 엮음,왕숙영 옮김,소명출판 펴냄) 일본의 고전 ‘고사기’ ‘일본서기’ ‘만요슈’ ‘겐지 이야기’ ‘헤이케 이야기’ 등은 언제,어떻게 ‘고전(canon·정전)’이 되었을까.이 책은오늘날 일반적으로 일본의 고전문학이라 불리는 텍스트들이 처음부터 보편적인 가치가 부여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근대 이후,국민국가 형성과정에서 새로운 일본 내셔널리즘의 상징으로 구축 또는 재구축된 것임을 보여준다.국민국가로서의 통합을 위해 ‘국어’ ‘국문학’ ‘국문학사’가 요구됐고,나아가 그것들에 의해 국민국가의 정체성이 창출됐다는 것이다.‘정전’ 혹은 ‘정전형성’은 1980년대 이후 영미학계에서 중요한 비평용어로 사용되고 있다.1만 9000원. ●지구별 여행자(류시화 지음,김영사 펴냄)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이후 5년만에 낸 저자의 산문집.인도대륙을 여행하면서 얻은 삶의 교훈과 깨달음을 적었다.“내 정신은 여행길 위에서 망고 열매처럼 익어갔다.”고 고백하는 저자에게 삶은 곧 배움의 과정이고 세상은 학교다.도망간 새를 기다리는새점치는 남자,반딧불이를 잡는 집시 처녀,닭의 머리에 색칠을 해 희귀조로팔려는 어처구니없는 사내 등 저자가 여행 중에 만난 이들은 이 세상 모든사람들의 원형적 모델이다.부록으로 탁발 고행승인 사두들의 어록이 실렸다.9900원. ●퓰리처(데니스 브라이언 지음,김승욱 옮김,작가정신 펴냄) ‘현대 저널리즘의 창시자’ 조지프 퓰리처(1847∼1911)의 일대기.파나마 운하 스캔들에연루된 자들을 비호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구속 협박에 맞서 언론자유를 지켜낸 것,설치비용 문제로 프랑스로 되돌아갈 운명에 처했던 자유의 여신상을 결국 뉴욕 맨해튼 리버티섬에 세운 것 등이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1890년대에 이미 상업주의 언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황색 언론’이란 용어는그가 라이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벌인 판매부수 경쟁에서 비롯됐다.3만원. ●영재의 감성사진(유영재·황미희 지음,들린아침 펴냄) 아스라이 잊혀져가는 추억의 글감 100가지를 골랐다.알전구,쥐꼬리채집,달고나,호마이카상,동동 구리무와 포마드,수구레,명랑화운동,칭찬도장 등.저자가 진행한 CBS ‘유영재의 가요속으로’에서 방송된 내용들을 묶었다.8000원. ●권력과 책임(베른하르트 그림 지음,박규호 옮김,청년정신 펴냄) 권력은 그 자체로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소크라테스의 말대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좋은 것이 되려면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의미요법(logotherapy) 전문가인 저자는 최고의 리더십은 ‘반(反)마키아벨리즘’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1만 2000원. ●아직도 가야 할 길(M.스캇 펙 지음,신승철 등 옮김,열음사 펴냄) 하루에 600여권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미국에서 10년 이상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책.에리히 프롬 이래 가장 신선하게 사랑의 방법과 기술을 전해준다는 평을 듣는 저자는 삶의 길목에서 방황하는 우리에게 인생이란 영혼의 성숙을향한 머나먼 길임을 일러준다.9500원. ●영어로 경영하는 시대(요시하라 히데키 등 지음,박명섭 등 옮김,우용출판사 펴냄) 국제경영에 있어서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실용서.스미다 코퍼레이션 등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일본기업의 높은 언어비용 문제를 살폈다.1만원.
  • “한국문학 세계화행사에 초청돼 기뻐요”서울 심포지엄 참가 입양아출신 스웨덴 소설가 트로치

    “입양아 출신이어서 그런지 고국의 이런 행사에 초청돼 무척 기쁘다.특히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행사라서 더 뜻깊다.”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한 ‘2002 문학과 번역 서울심포지엄’에 초청돼 고국을 찾은 입양아 출신의 스웨덴 소설가 아스트리드 트로치(32)는 이렇게말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스웨덴으로 입양돼 또다른 입양아인 언니·오빠와 줄곧 스톡홀름에서 생활해 온 그는 외견상 누가 보아도 한국인이었다.그러나 인터뷰 전에 그는 입양과 관련된 사생활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자신의 상처에 또다른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여겨졌다.오른손에 양어머니로부터 받았다는 태극 문양의 메탈 반지를 낀 그는 시종 진지하고 조용하게 말을 이어갔다. 지난 95년에도 혼자서 한국을 찾아 20여일 동안 부산 등지를 여행했다는 트로치는 96년 소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소설을 출간해 스웨덴에서 주목을 끌었다.얼핏 고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담았을 것으로 생각됐으나 그는 “내용중 부산을 거론한 부분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이라면서 “이 작품을 쓸 때까지 한국의 혈연의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소개했다.그는 이 책이 출간된 뒤 유명 출판사에서 출판 제의를받으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톡홀름대학에서 문학과 연극을 전공한 그는 “노동자 출신으로 지난 76년 노벨상을 수상한 스웨덴 작가 에이빈트 존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헤밍웨이와 사르트르의 작품을 통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문체를 찾아냈다.”고 작가수업 과정을 전하기도 했다.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글은 화가가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듯 나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나의 경우 가장 자신있는 일이 글쓰기였고 지금까지는 주로 ‘존재’의 문제를 다뤄왔다.”고 스스로의 작품세계를 전했다. 트로치는 “부끄럽게도 아직 한국 문학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며 “현지에서는 번역된 한국소설을 볼 수가 없었으며,이번에 귀국해서야 번역원에서몇편의 번역작품을 받아 기뻤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의 인상을 묻자 “스웨덴보다 덜 춥고 낮이 길어서 좋다.”고 말하고 “스웨덴은 오후 4시 무렵이면 해가 질 만큼 겨울의 낮이 짧다.”고 말했다. 기회가 오면 가족들과 다시 한국을 찾고 싶다는 그는 “한국문학이 세계에알려지기 위해서는 번역의 중요성을 되새겨야 하며,지금보다 더 많은 나라와 교류하고 문학의 실상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한국계 러 작가 아나톨리 김 한국문단에 ‘쓴소리’

    한국계 작가로 러시아의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지성이자 소설가인 아나톨리김이 문학적 고뇌없이 대중의 취향에만 영합하는 이른바 ‘시장문학’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국이라는 특정 지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그의 이런 언급이 한국문학번역원 주최로 오는 1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2002 문학과 번역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할 발제문에 포함돼 있어 예사롭지가 않다. 아나톨리 김은 ‘20세기 인류역사와 세계문학의 흐름’이라는 자신의 발제문을 통해 “누구를 비난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쏟아져 나오는 책 가운데 양서는 드물고,해를 끼치는 나쁜 책들이 넘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이런 시장문학은 고객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양을 떠는 매춘부와 다를 바 없다.”고 단언했다. “문학의 주요 수용자인 소시민 등이 20세기의 이른바 ‘아방가르드문학’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결국 주는 것만 받아 들였으며,이들이 얻은 것은 쓰레기와 배설물뿐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돈의 가치가 으뜸인 세상에서진정한 사랑을 다룬 문학은 드물었고,있다손 치더라도 한물 간 주지주의,혹은 심리분석의 자기만족적 유희에 빠지거나 조악한 프로이트주의의 운용에 불과했다.”며 시장문학이 주도한 20세기 문학을 평가절하했다. “이런 점에서 인본주의적 문학도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적 전체주의에 맞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는 못했다.”는 그는 “작품을 통해 경험해야 하는 전율과 카타르시스는 정확히 계산된 정량의 약품처럼 포장된 상품이 되었다.재미있어야 한다는 시장의 논리에 따라,진정한 공포가 패러디 혹은 장난기있는 두려움으로 변질됐다.”고 시장문학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곳에는 베스트셀러로 큰 부자가 됐다고 우쭐거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말로 문학을 앞세운 센세이셔널리즘을 경계한 아나톨리 김은 “가슴이 창조의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한,그리고 펜끝에서 가늘고 선명한 영감의 스파크가 지속되는 한,구멍난 신발을 신고 사는 배고픈 삶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바로 문학인”이라며 진정한 문학에 몰두하는 문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충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존 한국문학 번역이 대부분 학자들에 의해 이뤄져 문학작품을 문자 그대로 소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런 번역이 안타깝게도 한국문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를테면 탁월한 서정성이나 영혼의 순수함,한국인 특유의 온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최근 한국의 단편소설 7편과 춘향전 등을 러시아의 예술텍스트로 번역했다고 소개한 아나톨리 김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다른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의 언어로 글을 쓰는 한국계 작가들에게 의뢰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며 “한국인의 복잡하고 섬세한 정신세계를 가장 잘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한국인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번역 우선순위에 대한 일부의 혼란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그는 “한국 문학시장에서 성공을 거뒀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작품을 먼저번역해야 할 필요는 없다.어느 나라에 가든 그와 유사한 작품은 흔하다.”면서 “오늘날 베스트셀러라는 것들이 대부분 비슷한 처방전을 토대로 쓰여지기 때문에 번역작품을 선정할 때 이런 책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한국계 3세로,크루핀,마카닌 등과 함께 현대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아나톨리 김은 우리에게 ‘켄타우로스의 마을’(문학사상사)로 잘 알려져 있으며,동양의 정신세계를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잘 표현해 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한국문학번역원(원장 박환덕)은 오는 11일부터 이틀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한국계 작가로 러시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아나톨리 김 등 국내외 한국문학 번역가,해외 동포작가,국내외 언론·출판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02 문학과 번역 서울심포지엄’을 개최한다. 행사에는 이밖에도 재일교포 작가 현월,스웨덴의 한국입양아 출신 소설가아스트로치 트롯찌,중국 시인 김학천과 남영전,카자흐스탄 소설가 알렉산드르 강과 시인 스타니슬라브 리,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한국문학 담당 브루스 풀턴 교수 등이 참석해 한국문학의 번역문제를비롯,한국문학의 해외 수용현황,한국문학의 특성과 해외 소개정책 방향 등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된다. 심재억기자 jeshim@
  • 최초 문예동인지 ‘新靑年’ 발견/’창조’보다 열흘 먼저 출간

    근대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로 추정되는 잡지 ‘新靑年’(신청년)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잡지는 고서(古書)를 전문으로 수집해 온 서지학자 오영식(47·서울 보성고등학교 교사)씨가 최근 이 책 3호를 발굴해 서지학 잡지인 ‘불암통신’ 10호에 관련 글을 올린 것을 계기로 존재 사실이 확인됐다. 불암통신에 이같은 사실이 게재된 후 개인 장서가가 설치한 아단문고에 이잡지 제1·2호(복사본)와 4·6호가 소장돼 있는 사실이 이 문고의 하영휘 학예연구실장에 의해 확인됐다. 발행일이 창간호는 1919년 1월20일,2호는 1919년 12월8일,3호는 1920년 8월1일,4호는 1921년 1월1일,6호는 1921년 7월15일(5호는 미확인)로 부정기 반년간 형태를 보인 이 잡지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동인지로 1919년 2월1일 창간된 ‘창조’보다 열흘 가량 앞서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6호까지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이 잡지에는 만해 한용운의 산문 ‘처음에’를 비롯,방정환의 소설 ‘금시계(金時計)’와 ‘암야(闇夜)’,심훈(본명 심대섭)의 소설 ‘찬미가(讚美歌)에 쌓인 원혼(怨魂)’,나도향의 소설‘나의 과거’,박영희의 평론 ‘시인 바이론의 생애’등 아직까지 알려지지않은 작품이 다수 게재돼 있다. ‘신청년’이 발견됨에 따라 앞으로 문학계에서 이 잡지의 성격과 가치를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성균관대 한기형(국문학) 교수는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 잡지가 새로발견됨에 따라 우리 문학사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심재억기자
  • 오피니언 중계석/김동택교수 ‘역사비평’기고 - 국내외 한국학 의견소통 시급

    월드컵 개최 이후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외국인들은,한국이 일본이나 중국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고 있다.심지어는 한글이 중국 한자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있다.이는 한국이 경제발전에 치중한 나머지 한국학을 세계에 알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이같은 상황에서 김동택 성균관대 연구교수(정치학)가 계간지 ‘역사비평’겨울호에서 ‘세계와 소통하는 한국학을 위하여’란 주제의 글을 통해 한국학이 처한 객관적 상황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향후 나아갈 방향을 진단해 주목된다.다음은 논문의 요지다. 다문화·다문명 시대에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한국학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사보다는 국사,한국어보다는 국어가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그러나 한국학이라는 것은 국학을 뛰어넘는 의미를 지닌다.한국학은 세계 구성원의 한 부분으로서 한국을 자리매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지구촌시대를 맞아 사람들의 문화접촉이 빈번하다.그러나사회적 관계에 따라 사람들간의 접촉은 불평등하게 나타나는 양상을 띤다.한국학도 마찬가지이다.세계의 모든 문화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한국이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비해 한국학은 저평가되고 있다. 국내 한국학 연구의 문제점은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해 오래 전부터 지적됐다.대학원을나와도 마땅하게 취직할 곳이 없어,서울대 인문학 박사과정도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국내 연구자의해외진출 모색이다.그러나 한국학 연구자들의 낮은 외국어 구사력 탓에 해외학계와 소통할 기회가 매우 부족하다.따라서 한국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야 하는 아이러니가 속출하게 되고,한국학계는 고사상태에 빠지게 됐다.그러나 아직 대학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내 대학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의사소통이 자유로운 인재를 키워야 한다.이를 위해 국내 학자들에게 적합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우선 연구자들에게는 교육과정을 지원해주어야 하며,대학은 외국어로 된 학술저널을 출판할 수 있도록 번역제도를 마련해야 한다.외국의다양한 학회에 참가하여 연구성과를 발표하는 것도 장려해야 한다.국내로 유학오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특히 교민이나 입양아들에게 학국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순수 외국인의 경우 장학금이나연구비를 적극 지급해야 한다. 한국학에 대한 해외의 관심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한국학에 대한 외부의 관심은 한국전쟁기 이후 높아지다가 현재 수그러든 상태다.게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경제발전상에만 치중돼 있는 양상을 띤다.한국학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외국의 대학은 일본 120개,미국 101개,유럽 47개,동남아 25개 순으로 모두 388개.적지 않은 수준이지만 이들 대학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무엇을 지원할지 파악조차 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도 많다.예를 들어 워싱턴 대학에서 한국학 교수직을 없애겠다고 공언하자 현지 교민들은 반대서명운동을 펼쳤다.이에 국제교류재단에서는 한국학 교수에 대한 재정적인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진정으로 국제교류재단에서 해야 할 일은 서명운동을 펼치는 교민들을 돕는 것이다.워싱턴 대학이 돈이 없어서 한국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파급효과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그보다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에 기본 교육시설을 구축할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현재 한국학의 위기는 폐쇄적인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세계 속의 한국학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한국학과 해외 한국학이 제도적으로 소통해야 한다.이를 위한 전문가들의 참여와 논의가 절실한 것이다. 정리 이송하기자 songha@
  • 주기도문·사도신경 재번역 추진/원문과 차이 .문법 오류 지적 .예장통합,내년까지 마무리

    개신교계에서 예배 등 의식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새로 번역하는 작업이 추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총회(총회장 최병곤 목사)는 최근 임원회를 열어 현재 개신교가 쓰고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원뜻과 다르며 우리 문법상에서도 오류가 많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내년 총회까지 새 번역 작업을 마무리할 것을 결정했다. 예장통합 측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재번역은 한 교단의 자체적인사업이지만 총회에서 이를 채택할 경우 다른 교단 등으로의 파급 등 한국 교회와 신자들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지난 98년 대한성서공회가 펴낸 성경 개역개정판은 오래 전부터 개신교계에서 지적해온 이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의 부분적인 오류를 바로잡았으나 현재 대부분의 교회와 신자들은 여전히 개정되지 않은 것을 쓰는 실정이다. 예장통합 총회는 이같은 상황에서 교단 전문가들이 지속적으로 요청해온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개정 요구를 받아들여 전문 번역위원회를 구성,앞으로 1년 동안 연구하기로 함에 따라 사실상 본격적인 개정작업에 돌입한상태다. 번역위원회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한 연구와 헬라어·라틴어원문,개역개정판의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에 대한 번역상·원문상의의미,국문학적 의미 등을 검토해 개정판을 완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서원석 대한성서공회 국장은 “교회와 신자들이 성경의 잘못된 내용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외우거나 암송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원 방향에서도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는 만큼 예장통합 측의 새 번역작업은 개신교계에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성호기자
  • 문학단신/대산문화재단 창립10주년 전시회.시와시학상 작품상 나태주씨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은 새달 2일부터 닷새동안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1층 로비에서 ‘재단 창립 10주년 기념전시회’를 연다.전시회에는역대 대산문학상 수상작을 비롯해 한국문학 번역지원 사업으로 발간된 번역서,대산 세계문학총서,김춘수 박경리 박완서 고은 차범석씨 등 원로문인 13명의 축하메시지 육필원고 등을 전시한다. -제7회 시와시학상 작품상에 시인 나태주씨,평론상에 인하대 윤영천 교수,젊은 시인상에 시인 전윤호씨가 각각 선정됐다.수상작은 나씨의 시집 ‘산촌엽서’,윤 교수의 비평집 ‘서정적 진실과 시의 힘’,전씨의 시집 ‘순수의 시대’ 등이며 시상식은 새달 10일 출판문화회관에서 있다.
  • 문학평론가 최성실씨 계간 ‘문학·판’서 비판

    왜 한국문학에서는 성적 상상력이 빈곤한가? 문학에서 포르노·에로티시즘·섹슈얼리티는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가.문학평론가 최성실(35·인하대 강사)이 이런 의문에 진지한 답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최씨는 최근 발간된 계간 문학전문지 ‘문학·판’ 겨울호에 실린 특집 ‘한국문학과 성적 상상력’에서 “한국문학이 성 정체성과 섹슈얼리티,에로티시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문학적 엄숙주의가 작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성적 상상력과 섹슈얼리티 문제에 천착해 온 소설가 장정일·전경린·윤대녕을 거론하며,한국소설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포르노적 상상력과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극단적이고 가학적인 나르시시즘,완전한 파멸과 죽음을 담보하지 못하는 성적 상상력과 현실환원주의,여성의 원형적 이미지를 신비화하고 강조하려는 인식 등을 들었다. 최씨는 장정일의 소설 ‘보트하우스’에 대해 “에로티시즘의 미학이나 포르노가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성적 기제에 대한자의식없이,반복적 일탈과소모적 일상을 되풀이하는 인물들의 성행위”만 그렸을 뿐이라며 “여성의성적 욕망이 어떤 측면에서 왜곡된 형태로 역이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평했다. 전경린의 최근작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녀의 멈추어버린 성장’에 대해 “정체성의 문제를 섹슈얼리티가 가진 다양한 기제로 전이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고비판했다. ‘상춘곡’과 ‘에스키모 왕자’를 쓴 윤대녕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섹스행위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갈등과 고통이라기보다 지극히 존재론적인 것이며 합일에 이르는 어떤 것”이라며 “(윤대녕의 경우)세련된 문장과 수사에도 불구하고 섹슈얼리티 차원에서는 아직도 조용하고 다소곳하며,희고 순결한 여인에의 환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그는 “한국문학은 아직도 가부장적 논리와 계몽주의적인 서사틀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가.”라고 반문하고 “‘포르노 속의 여성이 남성 관객의 쾌락을 담보로 하는 성적 대상일 뿐이며,여성의 성적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은 스스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공박했다. 최씨는 포르노그래피가 ‘창녀’라는 특징적이고 상징적 대상을 염두에 둔용어여서 적어도 포르노그래피의 범주에서는 성행위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것이 당연하다면서 “일부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대상을 성적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도 제기하나 실상 포르노 본래의 취지에서 본다면 전혀 문제될 게없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의 견해도 함께 소개했다.“창녀이기 때문에 아니,창녀라는 탈을 썼기 때문에 여성은 오히려 자신의 성적 욕망을 노출하고 노골적으로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해석을 거론한 그는 “포르노는 주로 여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촬영되는데,이때 여성은 어느 순간도 성적 불능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이는 여성이 성을 스스로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남성은 그것이 발기해 있건 수그러져 있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하찮은 역할만을 맡을 뿐이다.발기한 남근이 변화시킨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한 보드리야르의 발언을 거듭 환기했다. 최씨는 “한국문학에서의 섹슈얼리티나 에로티시즘의 문제는 푸코의 지적처럼 ‘가장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것’일 뿐”이라며 “최근 들어 성 정체성,섹슈얼리티의 문제,에로티시즘에 대한 재해석,포르노의 새로운 평가가 본격화하고 있으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논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심재억기자 jeshim@
  • [발언대]전통문화 가꿔 국가이미지 높이자

    지난 2000년 5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세계 각국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가졌을때의 일이다.영화가 시작되고 판소리 해설이 흘러나오자 객석 이곳저곳에서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영화사 관계자들은 물론 한국의 보도진은 당황했다.아니,장엄하게 분위기를 잡는 대목인데,웃음이 터지다니.그 이유는 관객들이 그 이상한 소리를 듣고 이 영화를 코미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우리의 전통문화는 아직 세계인들에게 낯설다.게다가 아직도 한국은 ‘김치’와 ‘불고기’의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지난 6월 개최된 ‘2002년한·일월드컵’은 한국의 역동적 이미지를 세계 곳곳에 알렸고,국가 브랜드도 그만큼 높아졌다고 한다. 정부는 월드컵이 끝나자 국가 이미지를 ‘다이내믹 코리아’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그 실행 과정도 궁금하거니와,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 근본적인 의식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국가이미지위원회와 국정홍보처가 지난달 발표한 ‘국가 이미지 조사’ 결과를 한번 살펴보자.이번 아시안게임 기간 동안 한국을 찾은 해외 언론인 및 선수 임원단 총 13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7%가 ‘한국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 ‘김치’와 ‘불고기’를 꼽아 이 부문 으뜸을 차지했다.응답자들은 또 ‘가장 인상 깊었던 한국문화’로 ‘음식,요리,음식점’(45.1%)을 꼽았다.정작 우리가 알려야 할 ‘전통문화예술공연’은 29.7%에 불과했다.특정 인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지만 문제는 종전의 ‘국가 이미지 조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김치와 불고기 그리고 한국의 음식문화는 우리의 자랑거리다.문제는이런 ‘음식문화’가 여행자나 방문객들이 가지게 되는 ‘가장 1차적인 이미지’라는 것이다.이 조사에서 ‘태권도’나 ‘한글’‘한복’ 등이 ‘한국의 이미지’로 나타나긴 했지만 우리의 전통 문화예술 공연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우리는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을 떠올릴 때,그 나라의 음식과더불어 자연스럽게 가부키(歌舞伎)와 경극(京劇)을연상하게 한다.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판소리에 연극 형식을 도입한 우리 고유의 공연예술 창극(唱劇)이 올해 탄생 100년을 맞았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게다가 우리고유의 전통 연희인 탈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를 맞아 외국인 관광객들의 문화체험 욕구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특산품도 유명 브랜드가 되면 세계 그 어느 곳에서나 구입할 수 있게 된 만큼 현지문화 체험욕구가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영화 ‘패왕별희’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는 이미 외국인 관광객의문화체험 단골메뉴이자 국가 이미지를 알리는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김치와 불고기 등 먹거리 수준을 뛰어넘는 국가 브랜드 창출이 시급하다.사소한 예가 되겠지만,아리랑TV는 우리 국악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사운드 앤 모션’,한국문학 작품과 그 배경을 다룬 ‘영상으로 만나는 한국문학’ 등의 프로그램을 제작,지구촌 곳곳에 내보내고 있다. 21세기형 국가 브랜드를 구축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정부는 지난 7월국가 이미지 제고 대책으로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와 각국 사전,교과서 등의 한국 관련 오류 바로잡기 ▲60만여명의 국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강좌 개설 ▲외국 대학의 한국학과 신설 및 한국학 연구활동 지원 ▲태극문양과 ‘IT 코리아’의 상징물 개발 등의 계획을 발표했다.이같은 외형적구호도 필요하겠지만 문화적 소프트웨어 지원이 더욱 시급하다.현수막은 시간이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져 퇴색하지만 문화적 토양은 국가 이미지 창출의 밑거름이 돼 해마다,철마다 꽃을 피운다. 김충일 아리랑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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