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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80대 ‘일기의 달인’

    66년째 하루도 빠짐없이… 80대 ‘일기의 달인’

    80대 노인이 66년째 일기를 쓰고 있다.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에 사는 우건석(86)씨는 19살인 1947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 오고 있다. 우씨가 그동안 써 온 일기장은 노트 66권. 라면 상자 3~4개 분량이다. 그의 일기장들은 누런 갱지로 된 공책에서부터 최고급 다이어리까지 세월의 흔적을 대변한다. 그가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서울로 혼자 유학을 가면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우씨는 상경해 낮에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일하고 밤에는 서울역 근처 야간 중학교(당시 조양중학교)에 입학해 공부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국문과 전문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6·25전쟁이 터지면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쫓기다시피 내려갔다. 전쟁 속에서도 그의 일기는 멈추지 않았다. 메모지에 적었다가 나중에 일기장에 옮겼다. 그는 전쟁 중에 인민군에게 붙잡혀 몸수색을 당하는 과정에서 이 메모지가 나와 간첩으로 오인받기도 했다고 한다. 2년간 국어 교사 생활을 했고 7년간 양잠 협동조합장 등을 지내는 등 삶의 변화가 적지 않았지만 일기장은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수십년간 일기를 쓰면서 글솜씨가 늘어 2010년 문학저널 73회 신인 문학상과 2011년 청산문학 제5기 수필부문 신인상을 받기도 했다. 우씨의 자녀들은 2005년 3월 우씨의 일기를 모아 ‘나의 육십년사’라는 제목으로 책자를 만들어 선물했다. 우씨는 “일기장에는 선거 같은 국가적으로 큰 일과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신 일 등 개인적인 것까지 모두 적혀 있어 제 인생의 복사판”이라면서 “청소년들도 일기를 쓰면서 자기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우씨는 충주시가 시민들의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마련한 ‘충주시판 기네스’에 응모해 충주 최고 기록왕에 도전한다. 충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커버스토리] 몰아치는 ‘힐링 열풍’ 빛과 그림자

    [커버스토리] 몰아치는 ‘힐링 열풍’ 빛과 그림자

    지난해 서울 K대에 입학한 이모(20·여)씨. 1년여 동안 각종 힐링(치유)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힐링 마니아’로 살았다. 정치인, 기업가, 학자, 연예인 등의 ‘힐링 강연(콘서트)’은 물론이고 멘토링이나 템플스테이 등 기관에서 운영하는 각종 프로그램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경북 출신으로 외지 생활을 해야 했던 자신을 선배나 단상 위의 강사들이 이해해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로는 잠시뿐. 매일 쏟아지는 수업 과제의 부담은 그대로이고 다른 친구들보다 뒤처지는 것 같다는 불안감도 여전했다. 이씨는 “힐링이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우병국(47) 홍보실장은 매주 토요일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산에 오른다. 벌써 10년째다. 서너 시간 땀을 빼고 오후에는 반드시 아내와 데이트를 하는 일정도 고정됐다. 업무 특성상 평일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해서 토요일 오전에는 자신만의 시간을, 오후에는 가족과의 대화를 갖기 시작했다. 그는 “유행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여건에 맞는 힐링법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행을 넘어 과잉이라는 말이 맞을 만큼 ‘힐링’을 앞세운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이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위로와 다독임을 받았는데도 왜 내 삶은 바뀌지 않을까’에 대한 사람들의 실망감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가 ‘힐링 시즌1’이었다면 좀 더 발전된 ‘힐링 시즌2’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12일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힐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의 수는 2000년 7건에서 지난해 9385건으로 급증했다. 올 들어서 6월까지만 1만 2447건으로, 월평균 기준 지난해의 2.7배에 이른다. 서적 판매나 방송 제작에서도 힐링은 필수 소재다. 대표적 힐링 도서로 꼽히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교보문고·예스24에서 올 상반기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선정됐다.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땡큐’, KBS ‘이야기쇼 두드림’, tvN ‘스타 특강쇼’ 등 관련 TV프로그램들도 인기를 누렸다. 이렇게 힐링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넘쳐 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와 개인들에 대한 치유가 시급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기업과 정치인 등에 의한 과도한 상업화의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힐링의 일종인 자기계발서나 토크콘서트에는 알맹이 없이 잠시 위로하는 말만 가득 차 있다”면서 “마치 교회 부흥회 하듯 이뤄지는 힐링 속에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데, 이것이 힐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박탈감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오영진 한양대 국문과 외래교수도 “깊이 없이 상품화된 힐링은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게 만들고, 해결 안 된 문제를 마치 해결된 것처럼 포장한다”면서 “힐링 관련 상품이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문단데뷔 40년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김문이 만난사람] 문단데뷔 40년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그의 집은 ‘와초문학뜰’이다. 뜰 바로 아래에는 조용히 출렁이는 탑정호(塔亭湖)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잔디 마당에는 조각가 류훈의 작품 ‘오늘 저녁 술 한잔 어때요’가 있다. 이 조각은 세 명의 인간형상이다. 하나는 담배를 피우며 시름에 빠진 중년의 노동자이고 나머지 둘은 서로 떠들다가 ‘술 한잔 하자’는 자세를 취하며 어른을 바라보는 젊은 노동자이다. 집 뒤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흐르고 머무니 사람이다’(流留亭)라는 문패가 그럴듯하게 걸려 있다. 그가 직접 쓴 글씨로 새겨넣었다. 얼핏 보아도 붓글씨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의 부인은 10년 동안 서예공부를 했다. 부인이 그가 쓴 ‘흐르고 머무니~’를 보더니 “10년 공부한 사람보다 더 잘쓰면 어떡하느냐”며 한동안 삐쳤다(?)고 한다. 정자 바로 앞에는 앙증맞은 작은 계곡이 있다. 물이 졸졸 흐르고 붕어새끼들이 이리저리 뛰놀기에 딱이다. 정자에서 몇 발짝 걸어가면 텃밭이 있다. 상추와 고추 등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다. 글을 쓰다가 소일거리로 잠깐씩 들러 자라는 식물과의 대화를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는 곳이다. 시간과 공간이 흐르는 곳,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홀로 가득 차고 따뜻이 비어 있는 집’이다. 이 집은 팬들을 위해 ‘행복한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1년에 봄, 가을 두 번 공개한다. 그럴 때면 전국 각지에서 200여명이 찾아온다. 글을 써서 인세로 장만한 집일까. “논산시에서 임대해 준 것이고 임대료는 내지 않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집필실은 1층과 2층에 있다. 1층은 정자가 바라보이는 곳이고 2층은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 최근 ‘와초문학뜰’에서 문단 데뷔 40년이 되는 해에 40번째 장편소설 ‘소금’을 썼다. ‘은교’ 이후 홀연히 고향 논산으로 내려간 그가 2년여의 침묵 끝에 발표한 작품이다.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와 ‘비즈니스’로 연결되면서 자본의 폭력성에 대한 ‘발언’을 모아 펴낸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거대한 자본의 세계 속에서 가족들을 위해 ‘붙박이 유랑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래서 가출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달 26일 고향에서 첫 작품을 쓴 박씨와 와초문학뜰에서 만났다. 늘 그렇듯이 편하고 허름한 옷차림이다. 마당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다 보니 정자 얘기부터 먼저 나왔다. “원래는 마음 심(心)자를 써서 ‘심유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뻥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이 머무는 적은 없어요. 그래서 흐를 유(流)자로 바꿨더니 뻥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요. 원래 붓글씨를 배워 본 적이 없는데 제가 직접 먹을 갈고 화선지에 쓰고 현판에 새겨 달아놓았습니다.” 머물고 흐르는 것이 곧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잠시 후 배도 고픈데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미리 와 있던 두 명의 손님과 함께 인근 민물고기 매운탕집으로 옮겼다. 식당 주인이 그를 단골손님처럼 반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닭도리탕’과 ‘매운탕’을 주문하고 “막걸리 두 병과 소주 한 병 주세요”라고 했다. 주종과 주량을 물었더니 “오늘은 속이 별로 안 좋아 막걸리 두어 잔만 하겠다”고 말한다.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지만 잠자기 전 소주 반 병 정도나 과실주를 주로 마신다고 했다. 2년 동안 고향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원래는 고향으로 내려올 생각을 안 했는데 하루는 40대의 젊은 시장이 ‘형님, 고향으로 오시죠’라고 해요. 그 형님 소리가 듣기 좋더라구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서 2년 동안 살면서 금강문화권을 다시 공부했습니다. 탑정호수 건너편에 황산벌이 있습니다. 계백이 깨진 곳이지요. 이 금강문화권은 또 백제와 후백제의 멸망, 그리고 동학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도 합니다. 원혼이 많아 한밤중에 귀신이 자주 나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단다. 밤에 술을 마시고 마당에 앉아 있는데 누가 절뚝거리며 다가오더라는 것. 누구냐고 했더니 ‘계백 장군 똘마니 장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왜 안 가고 그러고 있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장수는 ‘계백 장군을 버리고 갈 수 없어서’라고 했단다. 얘기를 흥미롭게 듣다가 웃으면서 패망한 군인들의 원혼과 함께 있어서 외롭지 않겠다고 했더니 “뼛골만 있어도 생명을 불어넣고 그런 것이 작가가 아니냐.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는 곳이다. 2년 동안 고향사랑을 많이 했다”고 말한다. 술 한 잔을 마시고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추억만 가지고 있어서 고향에 오기가 싫었는데 지금은 아니다”라며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40번째 장편소설 ‘소금’에 대해 얘기한다. “과거에는 어머니들이 희생했다면 요즘은 아버지들입니다. 베이비부머 시대의 아버지들이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가부장의 권위도 해체되고, 아버지는 늘 자식을 위해 과실을 따오고 30대의 장성한 자식조차 여전히 아버지 등에 빨대를 꽂아 과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거대한 소비문명이 자식들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디에서 부랑하고 있는지, 지난 반 세기동안 무엇을 얻었고 잃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들이 젊었을 때에는 자식을 위해 수시로 돈을 뺄 수 있는 통장 역할을 하고 나이 들어서는 보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 소설은 가족을 버리고 끝내 ‘가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거대한 폭력과 쓸쓸함을 비판하면서 특정한 아버지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온 ‘아버지1~아버지10’을 다루고 있다. 애당초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시작한 소설인데 정작 젊은이들에게 반발을 일으킬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며 웃는다. ‘은교’의 경우 시간의 반란을 그리기 위해 남자 주인공을 원래 77세로 설정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젊은이들이 읽지 않는다며 65세로 해달라고 했다. 겨우 타협점을 찾은 것이 70세. 뚜껑을 열었더니 예상과 달리 20대 여자들이 책을 많이 본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번에 쓴 ‘소금’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소금’은 지금까지 7만부를 찍었다. “요즘 글을 쓰는 사람은 많고 독서 인구는 그에 비해 적어요. 예를 들어 문학책이 10만부가 팔렸다고 할 때 문학을 알고 사는 사람은 2만명, 나머지 8만명은 사회적 이슈이거나 자극적인 데서 책을 구입합니다. 5만 독자를 유지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문학은 작업”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수준이 문화적으로 높아져야 잘못된 제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소설이란 마라톤과 같으며 빈틈없는 전략으로 뒤집기를 잘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요즘 작가들은 스타트는 좋으나 체력이 문제라면서 “소설이란 걸어갈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며 달의 뒷면, 어두운 면까지 가는 것이 문학”이라고 설명한다. 정신적인 끈기와 투지가 있어야 하며 작가의 뒷심이 약하면 시대를 바라보는 뒷심 또한 약한 것이라고 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정보에 의존해 쓰다 보니 이야기를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문을 잘 안 본다고 했다. 나머지 인생을 굳이 정보에 의존해서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순간 달의 뒷면을 볼 수 있는 직관력으로 살아가려고 한단다. “30대에는 사랑받고 싶어 넓이에 정체성을 두고 글을 썼고 40대를 넘기면서 깊이를 추구했습니다. 치열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글을 써오는 동안 벌써 40년 연애한 것처럼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저 자신에게 아직도 순정주의 문학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연애한다고 생각하니 행복합니다.” 그는 히말라야 등정을 15차례나 했다. 존재의 등반이다.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걷기, 초월적인 세계를 실감하기, 인간의 갈망이 있는 그곳에서 불멸과 순간, 현세적 삶과 초월적 삶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비우니 향기롭다’, ‘나마스테’, ‘촐라체’ 등이 이 같은 산악 세계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도 걷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있어 한다. 앞으로 그의 ‘문학적 걷기’는 어떻게 될까. “여기 올 때 고전소설 몇십 권을 가져왔는데 다시 틈틈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밀란 쿤데라 작품도 읽어봤고, 아마 다음은 역사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조선 후기 노론의 기반이 되는 곳이 바로 논산이거든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생활의 모토에 대해 물었더니 ‘가난한 밥상’과 ‘쓸쓸한 배회’라고 했다. 달랑 물에 만 밥과 김치를 먹으며 육체와 정신의 기름기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박범신은 누구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와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까지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단편 소설을 발표하며 문제작가로 주목받았다. 1979년 장편소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등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주요 장편소설로는 ‘불의 나라’,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은교’,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비즈니스’ 등이 있다. 김동리문학상(2001년), 만해문학상(2003년), 한무숙문학상(2005년), 대상문학상(2009년) 등을 수상했다. 현재 상명대 석좌교수로 있다.
  • [열린세상] 친구여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라/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열린세상] 친구여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라/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3년 전에 50세의 나이로 명예퇴직을 한 친구는 퇴직금으로 지방에 조그만 가게를 열고 갖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투자금을 다 날리고 말았다. 열과 성을 다해 회사 일에 매진하다 날벼락처럼 강제 퇴직을 당했을 때, 친구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를 이고 주름살이 깊게 팬 초췌한 모습의 그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쓰렸다. 젊은 시절 최루탄 가스에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돌멩이를 던지고, 대기업 임원으로 지치지 않고 일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한 외동아들이 아직 취직을 못 하고 결혼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50대는 군사독재에 맞서 1987년의 6월 항쟁을 주도한 세대이다. 이 세대로 하여금 젊은 시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거리에 나서게 한 고귀한 신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독재에 맞서 빼앗긴 자유를 되찾는 것이리라. 교정에 무장 군인과 탱크를 진주시키고, 광주를 비롯한 이 땅 곳곳에서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을 자행하는 광포한 독재 정권에 맞서, 그들은 젊은 날의 고귀한 피를 아낌없이 흘렸던 것이다.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를 보면, 더욱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면서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던 젊은 남녀가 등장한다. 이후 둘은 결혼을 해 부부가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길은 갈라진다. 남편은 점점 타락해 가는 자본주의 한국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젊은 날의 순수한 열정과 신념을 지키고자 자신을 외곬으로 몰아간다. 그런 그의 모습은 소금물에 전 날개로 냉혹한 현실의 바다를 힘겹게 건너려는 나비와 같은 존재에 비유된다. 반면 아내는 일상에 안주한 채 ‘글로벌 교육’을 위해 자식을 중국에 유학 보낸다. 50대를 맞이한 6월 항쟁 세대 대부분은 앞선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의 중간자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들 대부분은 취직을 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나가는 평범한 일상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젊은 시절 피 흘리며 추구했던 숭고한 정신을 늘 가슴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고뇌와 민주화 세대라는 자부심이 뒤섞인 채, 가정과 사회를 위해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세대가 50대이다. 그런 50대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다시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조차 버림받은 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아무런 노후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자식도 건사하지 못한 채 직장으로부터 버림받은 친구의 막다른 삶 앞에서 나는 아무런 위로도 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친구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암울하고 불행한 시대를 살아온 50대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우냐고 울먹이면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던 친구의 모습을 나는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김광규의 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에는 4·19 세대가 혁명 후 18년이 지난 뒤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 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이 시에서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의 그림자마저 잊고 속물이 되어 살아가지만, 그런 제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떨구는 4·19 세대의 자기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친구에게 꼭 이 말은 해주고 싶다. 친구여, 고개를 떨구지 마라. 우리가 고개를 떨굴 일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옛사랑의 그림자마저 망각한 상황에 대해서일 뿐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더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던 그 정신을 떠올리면서 오늘의 암담한 상황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삶에서 이런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온 우리 50대가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친구여, 고개를 들고 허리를 펴라.
  • 유심작품상 詩부문 최동호교수

    제11회 유심작품상 시 부문에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의 시 ‘히말라야의 독수리들’이 선정됐다고 만해사상실천선양회가 27일 밝혔다. 학술 부문엔 박현수 경북대 국문과 교수의 논문 ‘십현담주해의 언어관과 한용운의 시론’이 뽑혔다. 상금은 각각 2000만원이며 시상식은 8월 만해축전 기간에 열린다.
  • [열린세상] 詩가 없는 봄날이라/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詩가 없는 봄날이라/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시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쓰느냐만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평소 조곤조곤하게 말한다. 그런 그가 이날은 핏대를 올리면서 문학에 대한 정부 정책, 특히 ‘문학나눔’ 사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해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학나눔 사업을 통해 문화 소외 지역 및 계층에 우수 문학 도서를 선정해 무상 보급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 사업 내용에 대해 문인들, 특히 시인들의 불만이 거세다. 작년에 비해 소설은 연간 116종으로 조금 늘어났지만, 시집은 40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리고 예산도 작년보다 2억 3000만원밖에 증가하지 않아, 종당 구입 호수도 전체적으로 줄어들었다. 지난해까지 소설과 시 모두 종당 2000부를 구매해 배포했는데, 올해부터는 1200부로 줄어든 것이다. 5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봄꽃이 만개했다. 철쭉꽃, 목련꽃, 모란꽃, 벚꽃 등이 천지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다. 겨우내 집안에만 계시던 팔순의 노모와 시간이 날 때마다 공원을 산책한다. 공원의 모든 이들이 봄꽃의 아름다운 자태에 탄성을 발한다. 청년은 애인에게 꽃보다 자기가 더 예쁘다고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애인은 봄 햇살 같은 환한 웃음을 터뜨린다. 향긋한 꽃 앞에서 누가 돈을 생각하고, 출세를 생각하겠는가. 꽃처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 순결한 영혼과 정신, 황홀하면서도 고귀한 사랑 등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봄꽃은 세속에 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치유해주고, 삭막한 우리네 삶을 화사한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준다. 팔순의 노모께서 공원에 핀 꽃을 보시고는 “해마다 봄이면 꽃은 저렇게 아름답게 피는데, 사람은 늙으면 다시 젊어지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신다. 봄꽃은 우리 모두를 시인으로 만드는 마력도 있는 듯하다. 많은 시인이 꽃을 시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다. 김소월은 시 ‘진달래꽃’에서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노래했다. 임에 대한 절대적 사랑을 진달래꽃에 투사해 임이 나를 버리고 떠날지라도 임이 가시는 길에 자신의 분신인 진달래꽃을 뿌려드리겠다는 것이다. 김영랑은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이라고 노래했다. 모란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한 시인, 그래서 모란이 지면 삶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하는 시인, 그런 시인에게 모란이 피고 지는 봄은 ‘찬란한 슬픔’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이 봄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와 봄꽃이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시는 본래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아닌 화해와 합일의 세계를, 물질적인 가치가 아닌 정신적 가치를 지향한다. 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영혼의 교감을 이루는 세계를 강렬히 갈망한다. 그런 시를 통해 모든 존재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황홀한 세계와 만나게 되고, 동시에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이 시대에 대해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사회가 아무리 물질적 측면에서 풍족하다 하더라도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화를, 그 문화의 정수인 시를 푸대접한다면 그 사회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에 영혼을 팔아버린 아이들에게 시집을 읽도록 해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시인 친구가 돈에 대한 욕심 없이 좋은 시를 쓰려고 애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앞장서서 시를 찬밥 대우하고 있는 현 상황은 그래서 한심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 시인 친구는 “그렇지 않아도 시집이 팔리지 않아 시집 내기가 어려운 판국인데 정부가 아예 시를 말살시키고 있다”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니 진달래꽃이 지고 있다. 떨어지는 모습마저 아름다운 저 소중한 봄꽃이 없는 봄을 상상해 보다가, 불현듯 우리 사회에서 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시가 없는 사회와 봄꽃 없는 봄은 무엇이 다를까.
  • 취업 안된다고… 국문과 잇단 폐지,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경을 칠 노릇

    취업 안된다고… 국문과 잇단 폐지,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경을 칠 노릇

    국어국문학과를 폐지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대학 위기의 시대에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문인 단체는 “문학과 예술 창작으로 모국어를 살찌우는 인재를 키우는 학과를 없애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발한다. 배재대는 8일 교무위원회를 열고 국어국문학과와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과를 ‘한국어문학과’로 통폐합했다. 내년부터 사실상 국문학과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 대학은 평소 배재학당에서 한글 연구의 개척자 주시경과 민족시인 김소월을 배출했다고 자랑해 왔고, 단과대 이름까지 ‘주시경대학’, ‘김소월대학’으로 붙여 쓰고 있다. 국문과 재학생들은 지난 6일부터 총장실 앞에서 농성에 돌입했다. 정지홍(24·3년) 국문과 학회장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원작 소설가가 우리 학과 출신이고, 신춘문예 당선자를 수없이 배출하며 요즘도 한국문학을 살찌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면서 “학교 측은 통합 학과에서 문학도 가르친다고 하지만 갈수록 비중이 줄어 좋은 문재(文才)가 나오기 어렵게 생겼다. 이름이 사라져 정체성까지 잃어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 학과 졸업생들도 성명을 내고 “국어국문학은 배재학당 설립 초기부터 핵심 과목이었고, 소설가 나도향 등을 배출한 밑거름이 됐다”면서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과와 합치는 것은 인문학의 기초인 국문과를 족보에서 지우겠다는 발상이다. 대학이 돈의 논리에 빠져 스스로 교육 사망 선언을 했다”고 거세게 비난했다. 배재대 관계자는 “대학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학률이 줄고 취업이 잘 안 되는 학과를 개편하다 보니 국문과를 통폐합했다. 문학 교육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취업률 등을 적용하는 교육부의 대학평가도 이 같은 학과 구조조정에 기름을 붓고 있다. 배재대는 올해 ‘재정지원 제한 대학’으로 지정되자 이번 학과 개편에서 국문과 등을 통폐합하고 항공운항과, 중소기업컨설팅학과, 사이버보안학과 등 실용학과를 신설했다. 대학 관계자는 “재정지원 제한 대학 지정도 이번 학과 개편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털어놨다. 국문과가 대학에서 홀대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광운대에서 국문과 폐지 논란이 일어났다가 간신히 살아남았고, 충남 논산 건양대는 수년 전 국문과를 폐지했다. 충북 청주 서원대도 지난해 국문과를 다른 학과와 통폐합했다. 이 대학은 2011년 재정지원 제한 대학으로 지정됐었다. 국문과가 ‘부실대학’ 탈피를 위한 희생양이 된 것이다. 새로 생기는 대학이나 전문대는 아예 처음부터 국문과를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 관계자는 “사립대 학과 개편은 정부가 제지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차윤옥 한국문인협회 사무처장은 “정부에서 국문과 폐지를 금지하는 강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최동호 교수의 30년 연구 결실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 발간

    시인·평론가인 최동호(65)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1982년부터 30년간 꾸준히 연구해온 시인 정지용(1902~1950) 관련 논문 15편을 모아 ‘정지용시와 비평의 고고학’(서정시학 펴냄)을 최근 펴냈다. 최 교수는 1976년 겨울 납북시인 정지용의 시집을 우연히 서울 종로구 인사동 경문서림에서 구해 읽은 뒤로 이상한 감흥에 휩싸여 그 기운으로 여기까지 몰아붙인 듯하다. 시가 무엇인가 의문이 들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유협의 ‘문심조룡’, ‘정지용시집’을 펼쳐들었다는 그는 1999년 안식년에 미국 UCLA대학 방문학자로 가서 정지용 전집을 끼고 매일 한두 편씩 정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귀국해 정지용 시어를 중심으로 한 ‘정지용 사전’(2003년)을 발간할 수 있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북학파는 더 지독한 중화주의자?

    북학파는 더 지독한 중화주의자?

    ‘중체서용’(中體西用), ‘동도서기’(東道西器), ‘화혼양재’(和魂洋才)란 일종의 비명이다. 용, 기, 재의 변화에 따라 체, 도, 혼이 따라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동도서기를 실천하기 위해 시속 150㎞ 강속구를 꽂아넣는 류현진을 불러다 그렇게 야구가 좋으면 애써 공 던지는 건 하인이나 시키고 야구의 도를 밝히는 데 정진하라고 충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중체중용, 동도동기, 화혼화재하자니 버틸 힘이 없고, 서체서용, 서도서기, 양혼양재하자니 자존심이 구겨진다. 중국, 한국, 일본 지식인들의 저 구호가 비명처럼 들리는 이유다. 세월이 흘러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이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지금은 거꾸로 작동한다. 과학을 잘하면 잘하는 대로 ‘동도’가 있으니 그 정도 하는 건 식은 죽 먹기고, 과학을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자멸적인 기계문명의 대안인 ‘동도’가 있으니 걱정없다. ‘동아시아 과학의 차이’(김영식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는 이 묘한 자기 합리화를 깨뜨린다. 과학이 잘되는 건 한국에도 고유한 과학적 전통 덕분이다. 이를 위해 우리만의 것을 찾아내는 연구가 각광받는다. 하다 못해 남에게 받은 것이라도 한국만의 독창적인 그 무엇으로 재탄생했음을 강조한다. 장기적 제도, 시스템 같은 문제보다 금속활자, 측우기처럼 딱 눈에 띄는 기물 중심의 연구가 이뤄지고, 이 기물들의 제작연대를 명확히 밝히고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는 연구가 박수받는다. 저자는 이를 조선시대 이래 내려온 과학자들의 ‘중인의식’으로 풀어내는데 따끔따끔하다. 동도가 서구 근대 문명의 대안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저자가 딱 한마디로 잘라 버린다. “아무도 역사에서 자신이 보기에 흡족한 몇몇 측면만 선택하거나 그 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존재한 초기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수십, 수백년간 쌓여온 문명과 역사라는 것은 ‘아, 이게 잘못됐네’ 깨닫는 순간 Ctrl+Alt+Delete 키를 누르고 재부팅한 뒤 다시 한번 ‘도전!’을 외칠 수 있는 프로그램 오류 같은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전통이 현대를 해결해 주리라 믿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 몰역사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런저런 비판지점들을 눈여겨보면 결국 저자의 관심은 한민족의 우수성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조절하는가라는 문제다. 그래서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서학중원론’이다. 저자는 서울대 화공과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화학으로, 프린스턴대에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래서 귀국 뒤에도 서울대 화학과 교수를 하다 동양사학과 교수를 지낸, 그리고 서울대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맡은 한국 과학사 1세대다. 이번 책은 정년 퇴임을 앞두고 그간 국제학술지에 영어로 발표한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묶어낸 것이다. 중국과학사 연구자답게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기본으로 깔고 12세기 중국 성리학과 유럽 스콜라 철학을 비교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상과 달리 동양사상 자체가 서구식 과학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주희가 제시한 성리학의 공부 방법론은 격물(格物)이다. 격물은 대상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서양 자연과학의 관찰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니 천문, 역학 등 과학적 관찰에 관련된 부분들은 주저 없이 흡수할 수 있었다. 서용, 서기, 양재 같은 표현이 나올 수 있는 근거다. 그 정도야 가져다 쓰면 된다. 저자는 여기서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를 지적한다. 유학은 불교와 도교의 무(無), 공(空) 같은 관념을 배격하고 실(實)을 추구했다. 손에도 안 잡히는 추상적 이야기 말고 현실을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반면 서구는 오히려 기독교의 교리 문제 때문에 바늘 끝에서 몇명의 천사가 존재할 수 있느냐 같은 허황된 논의를 벌였다. 그런데 그 때문에 서구에서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과학이 발달한다. 동양에서는 격물 때문에 서양과학에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동시에 격물 때문에 서양과학 같은 것이 나올 수 없었다는 얘기다. 서학중원론은 이 아이러니에 기댄다. 서학이라는 것이 예전 중화문명 황금기에 잃어버린 것이라는 얘기다. 그게 서양 오랑캐에게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게 서학이다. 심지어는 공자가 오랑캐에게도 배웠다는 좌전의 기록까지 끌어대 서양 오랑캐에게 배운다는 것을 정당화한다. 유학자들이란, 전거를 찾아 논리를 전개하는 데 천재적인 인물들 아니던가. 청나라의 강희제는 아예 서학중원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고대 중국이 잃어버린 과학을 청 황제가 되찾아 왔으니 만주족 청 황실이 고대 중국 성인들의 후계자라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북학파에 대한 재평가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 입장에서야 실학, 그것도 북학파라면 만주 오랑캐와 서양 오랑캐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는, 굉장히 개방적이고 실용적이고 개혁적이며 근대지향적인 운동으로 생각하려 든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에서는 결국 북학파도 서학중원론의 한 지류에 ‘불과’한 것이 된다. ‘열하일기’를 질주와 탈주의 프랑스 철학 버전으로 해석한 것이 인기 끌면서 연암 박지원은 재기발랄한 개혁적 선비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지독하게 보수적인 노론 중화주의자에 불과했고, 서얼 출신이라 신분제에 대해 굉장히 개혁적이었던 초정 박제가 역시 기본적으로 당괴(唐魁·중국 풍습에 미친 사람)였다는, 아주 박한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또 한명은 담헌 홍대용인데 이 부분은 박희병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쓴 ‘범애와 평등’(돌베개 펴냄)과 서로 맞춰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김영식 교수는 과학사의 입장에서 담헌 역시 중국을 통해 서학을 수용한 여러 학자 가운데 한명으로 간주한다. 연암이나 초정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쪽이다. 이에 대해 박희병 교수는 담헌이 서학뿐 아니라 정통 성리학, 양명학에다 장자, 묵자까지 광범위하게 수용해 만년의 ‘의산문답’에서는 거의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한다. 박 교수는 이 과정에서 담헌에 대한 오독이 심하고, 특히 김영식 같은 과학사 연구자들이 담헌을 너무 낮춰본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양쪽을 함께 읽어볼 만한 이유다. 1만 7000원.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73년만에 찾은 번역본 ‘테스’서 백석 詩의 향기가…

    73년만에 찾은 번역본 ‘테스’서 백석 詩의 향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큰 ‘힘’이 내 계획을 달리하지 못하리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당신을 위해 기도를 올릴 수 있어요?”(백석의 번역본 ‘테스’ 중)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중) 유사점이 느껴지는가? 백석(사진 오른쪽·1912~1996)은 영국 소설가 토마스 하디의 소설 ‘테스’(왼쪽)를 번역해 1940년 9월 조광사에서 펴냈다. 그 번역본에서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나타났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은 정든 사람과 장소를 떠나 방랑적인 삶을 영위해야 하는 화자의 운명을 보여주는 백석의 탁월한 시로 1948년 ‘학풍’ 10월호에 발표했다. 이에 대해 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이 발표된 시점이 1948년이지만, 백석이 이 시를 쓴 시기를 1941년 즈음으로 추정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이 신문에 1939년 12월 폐간 조치가 떨어지자, 만주로 떠났다. 그 무렵 백석의 처지는 딱한데 이미 여러 번 결혼에 실패한 데 이어 애인 김자야와도 헤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사랑과 문학을 추구하는 인간 백석은 만주국 정무원 경제부에서 일하면서 ‘토마스 하디’를 만나 그의 비극적 운명관에 심취하고 그의 소설을 닮은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분석하는 것이다. 방 교수는 “1940년대 조선의 문인들이 모두 일본 제국주의에 내면화되지 않고, 대동아주의에 포섭되지 않은 채 양심적으로 살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 ‘백석의 테스’를 읽으면 알게 된다”고 했다. 백석의 번역본 ‘테스’와 시를 텍스트로 이런 분석이 가능한 것은 1940년 조광사에서 간행된 후 사라진 백석 번역 ‘테스’를 백석전집을 간행하는 서정사학사가 최근 발굴해 학계에 소개한 덕분이다.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는 9일 기자간담회에서 “만주지역을 방랑하던 백석이 1940년 조광사에서 ‘테스’를 출간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기록은 있었지만 그 본문을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다. 역시 백석의 번역인 ‘고요한 돈1·2’를 베이징도서관에서 발굴했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에서 자료발굴을 기대했지만 구체적 성과가 없었다. 국내 고서점에서도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두웠다. 지난해 8월 서강대학교 로욜라 도서관에서 백석의 ‘테스’를 찾아냈기 때문이다”라고 감격해서 말했다. 서강대본의 첫 표지는 현재 낙장이지만 출판사명과 백석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으며 마지막 판권에 출판사명으로 조광사 1940년 9월 30일이라는 간기가 표기되어 있다. 발행인도 방응모 이름이 명기되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확실한 백석의 ‘테스’로 보인다는 것이다. 1940년 8월은 조선일보는 폐간됐지만 월간지와 단행본 사업부는 남아 있던 시기였다. 최 교수는 “이번에 복원한 ‘백석의 테스’는 백석의 문장을 살리되 오늘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판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면서 “ 백석의 번역에는 그의 시처럼 상당수의 방언이 드러난다”고 했다. ‘백석의 테스’를 직접 읽어보니 현대의 말끔한 번역소설과 달리 소박하고, 1940년대 창백한 지식인이 되어 어두운 골방에서 쪽창으로 든 빛에 의지해 책을 읽는 느낌이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열린세상] 후진국 부모, 선진국 아이/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후진국 부모, 선진국 아이/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대학 강단에 선 지 13년째다. 봄 새 학기가 시작되면 호기심 가득한 신입생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졸업할 때까지 4년 동안 적어도 1000권의 책을 읽어야 제대로 공부한 대학생의 자격이 생긴다고 힘주어 말한다. 매 학기 한 강좌를 들을 때마다 20권의 책을 읽어야 하고, 한 학기 6개 강좌를 들으면 120권, 1년 240권, 4년 약 1000권을 읽게 된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매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신입생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면서 결의를 다지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 장래 진로와 관련해 개별면담을 하면서 매번 하는 이 말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학생은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다양한 세계 문화를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학생은 네팔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국문과에 왔다고 했다. 중학교 때 부모와 네팔에 여행을 가서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생은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50대가 된 세대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장래 진로는 ‘사’자 돌림의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1960~70년대 후진국 한국에서 보릿고개 춘궁기를 경험한 세대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었다.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공직에 나가거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 그래서 부와 권력을 한꺼번에 손에 쥐는 것만이 출세한 삶으로 비춰졌다. 동네에서 누군가가 고시에 합격하면, 축하 현수막을 내걸고 마을잔치를 하면서 ‘개천에서 용났다’라고 입을 모아 칭찬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즐겁게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타인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려는 젊은이가 부쩍 늘고 있다. 더불어 이들은 한국이란 울타리를 넘어 세계 속의 한국 젊은이로서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 이들에게서 1960~70년대 가난한 한국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활동을 하던 파란 눈의 선진국 젊은이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어 참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얼마 전, 친구가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양식당으로 안내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데 주방장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주방장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바로 친구의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뒷전이고 요리사가 되겠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친구로 하여금 자식농사 망쳤다고 울분을 토하게 했던 그 녀석이었다. 아들이 대학에 가지 못했다고 고개를 들지 못하던 친구이기에 아들 소식을 더 묻지 못하고 지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어엿한 주방장이 되어 친구와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호주로 가서 요리를 배우고 왔다는 녀석이 참으로 대견해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친구는 후식을 먹는 자리에서 아들이 요리사가 된다 할 때 적극적으로 밀어 줄 걸 괜히 자기 욕심 때문에 먼 길을 걷게 했다고 후회를 했다. 친구의 자책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후진국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세대와 선진국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는 세대의 사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후진국 부모는 지금도 ‘사’자 돌림의 직업을 선진국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은 총명하다. 선진 한국사회에서 더불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 길을 자발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기성세대가 할 몫이다. 자식 세대에게 마음껏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준다면, 그들은 기성세대가 상상도 못할 일을 벌이면서 선진 한국을 세계만방에 알릴 것이다. 국문학을 가르치는 선생 입장에서, 세계 각국에 한국문화원과 한국어학원을 세워 우리 젊은이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간절히 한다. 더불어 이번 신학기에는 책을 많이 읽으라는 주문 외에 세계로 시선을 넓히고 폭넓은 견문을 쌓으라는 당부를 반드시 덧붙여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 세종대왕 익선관 발견

    세종대왕 익선관 발견

    세종대왕 때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왕이 집무할 때 쓰던 모자)을 발견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경북대 국문과 이상규(60·전 국립국어원장) 교수 연구팀은 27일 이 같은 연구 내용을 공개했다. 높이 27㎝, 둘레 57㎝의 천 소재인 익선관은 보존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이마 부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뜻의 ‘만’(卍) 자와 용, 약통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여 있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탈취당한 왕실 유물 가운데 세종대왕이 착용한 사조용(四爪龍)이 새겨진 익선관”이라며 “지난해 한 국내 컬렉터가 일본에서 구입해 들여왔다.”고 밝혔다. 또 “내피엔 ‘ㅁ’ ‘ㄹ’ ‘ㅇ’ 등 한글 자모가 적힌 훈민정음 자료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온달전’에 빠진 늦깎이 日 대학생, 韓 학사모 쓰다

    ‘온달전’에 빠진 늦깎이 日 대학생, 韓 학사모 쓰다

    “춘향전, 바보온달전이 모티프가 된 판타지 만화 ‘신(新)암행어사’를 보고 한국 고전에 푹 빠졌어요. 온달전을 좋아해서 열심히 리포트를 썼더니 교수님이 우수작으로 뽑아 학생들에게 돌려 읽히시더군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26일 서울대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쓴 일본인 오쓰카 사유리(37)는 들뜬 얼굴로 유창한 한국말을 쏟아냈다. 오쓰카는 국어국문학과 09학번. 유학생으로 동기들보다 14~15년 늦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그는 “시원섭섭한데,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면서 힘든 점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시원한 마음이 좀 더 크다”고 말했다. “똑같은 걸 읽는 데 다른 친구들보다 서너 배는 시간이 더 걸렸어요. 한국어 공부는 좋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영어 수업도 고역이었죠. 그래도 졸업이라니 신기해요.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인걸요.” 서른살이 되던 해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 데는 한 권의 만화책이 결정적이었다. 어느 날 남동생이 툭 하고 던져준 윤인환 작가의 만화 ‘신암행어사’였다. “바보온달의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어요. 지위 높은 공주가 바보 남편을 위해 헌신한다는 건 일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온달과 평강의 유대감에 감탄하면서 살아생전 이런 연애를 꼭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1시간에 3000엔(약 3만 5000원)을 주고 한국어 과외를 받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좀 더 생생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2007년 2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서강대 한국어교육원에서 시작한 한국어 공부는 서울대 입학으로 이어졌다. “서울대에 입학했을 때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전혀 연고 없는 곳에서 시작한 대학 공부는 쉽지 않았어요. 수업에서나 대화할 때 느껴지는 뿌리 깊은 반일 감정 때문에 마음 아팠던 적도 많았지요.” 그는 앞으로 한국에 머물면서 문화교류를 통해 한·일 양국의 이해를 돕는 일을 할 계획이다. “물론 나이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서울대 졸업생이라는 걸 보고 반기다가도 제 나이를 말하면 금세 조용해지거든요. 하지만 포기는 없어요.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이니까요.” 글 사진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 [부고] ‘국회 5선’ 김광수 미래엔 명예회장

    [부고] ‘국회 5선’ 김광수 미래엔 명예회장

    김광수 ㈜미래엔(옛 대한교과서) 명예회장이 지난 24일 오후 6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90세. 고인은 전북 무주 출신으로 단국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마쳤다. 대한교과서, 현대문학사, 어문각 사장과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부총재를 역임했다. 1973년 9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10, 12, 14, 15대 의원을 지냈으며 자유민주연합 부총재를 맡기도 했다. 1986년 보관문화훈장, 1988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진세영 여사와 아들 홍식(전북도시가스 대표이사), 창식(서해도시가스 대표이사), 승주(미래엔인천에너지 회장)씨, 손주 영진(미래엔 대표이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9일 오전 7시. (02)3010-2631.
  • [열린세상] 나이 오십에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나이 오십에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들/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층간 소음으로 이웃과 다투고, 길 가는 사람에게 묻지마 식의 폭력을 휘두르는 우리네 삶을 보면, 이 말은 ‘옷깃을 스치면 짜증이 난다’로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인간관계마저 상품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인간다운 소중한 인연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런데도 요즘 난 화석화되어 버린 그런 인연이 그립다. 얼마 전, 행사 차 속초에 갔다가 설악산에 잠깐 들렀다. 백설에 뒤덮인 산길을 오르다가 갑자기 내 자신이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내팽개쳐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최근 몇 달 동안 인간관계로 가슴앓이를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낸 탓이리라. 그렇게 자위하면서 무겁게 걸음을 내딛다 그만 미끄러졌다. 문득 대학 신입생 시절, 친구들과 처음으로 설악산을 오르다가 죽음의 계곡에서 길을 잃었던 때가 생각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을 길을 찾아 헤맸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을 때, 친구들은 번갈아 나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기력을 잃은 나를 번갈아 업고 넘어지고 뒹굴면서도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이 오십이 넘어 지금도 설악산을 자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처음 설악산에 와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 때 내 손을 꽉 잡아주던 친구들의 그 따뜻한 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에서 가을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며 그리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을 부르는 시인. 비선대에서 내려오는 길에 나 또한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죽마고우(竹馬故友)라 했던가.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사이에 그 무슨 이해관계가 개입하겠는가. 부산 해운대에서 새까맣게 얼굴이 타는 줄도 모르고 팬티 바람으로 헤엄을 치면서 낄낄거리던 친구들, 실연을 당해 우울해하는 놈을 위로한답시고 공부도 팽개치고 비진도로 우르르 몰려갔던 친구들. 그렇게 흉금을 터놓고 같이 울고 웃던 그 벗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나는 무심하게도 지금까지 잊고 살아 왔다. 뒤돌아보니,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만이 최고의 삶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혔던 세월이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무한질주를 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낙오자가 될 거라는 생각으로 살아오는 동안 아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 왔으리라. 과연 저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될까를 저울질하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가려 만나고, 그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살아 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진리를 망각하고 옷깃을 스치면 짜증난다는 식으로 살아 왔던 셈이다.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에는 삶의 동반자가 나온다. “먼 길에 올 제/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플라타너스/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내가 외롭고 힘들 때 나를 위로해주고 나와 같이 길을 걸어갈 동반자는 누구일까. 물론 사랑하는 내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 이외의 내 주변 사람들 중 진정한 동반자가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선뜻 자신 있게 그렇다는 말을 하기 힘들 듯하다. 그만큼 나는 지금껏 나만 생각하고 살아온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어제는 얼었던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雨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도 머지않아 봄을 맞아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것이다. 다가올 봄,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지난 삶을 저 겨울산에 벗어던지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내 어릴 적 나를 ‘실’이라 불러 주었던 그리운 내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원, 현, 중, 한, 동….
  • 힐링, 드라마엔 없다

    힐링, 드라마엔 없다

    드라마들이 다시 복수와 치정, 살인이라는 고전적인 ‘막장’을 답습하고 있다. 예능과 다큐멘터리가 ‘힐링’과 ‘가족’을 들고나와 시청자로부터 호평을 받는 가운데 시청률 무한 경쟁에 내몰린 드라마들은 오히려 뒷걸음질 치고 있다. 올해 새롭게 시작한 드라마 가운데 MBC ‘백년의 유산’, SBS ‘야왕’ ‘돈의 화신’ 등이 벌써부터 막장 논란에 휩싸였다. 자극적이고 비정상적인 설정으로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세를 타는 것과 동시에 뭇매를 맞고 있다. 주말드라마 ‘백년의 유산’은 시청률 20.5%를 찍었고, 같은 시간대 방영되는 ‘돈의 화신’도 4회 만에 시청률 10%를 넘겼다. 월화드라마 ‘야왕’은 방영 10회 만에 17.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시청자들이 욕하면서도 보는데 어떡하느냐며 은근히 시청자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서울 변두리에서 3대째 국수공장을 운영하는 가족 이야기를 다룬 ‘백년의 유산’은 따뜻한 드라마일 것이란 기대를 여지없이 저버렸다. 첫 회부터 극단적인 ‘시월드’의 모습을 과도하게 그리면서 논란을 불러왔다. 시어머니(박원숙 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며느리(유진 분)에게 폭행과 막말을 일삼는다. 시어머니는 이혼을 결심한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감금한다. 정신병원에서 탈출하던 며느리는 사고를 당해 기억까지 잃는다. 그런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불륜이란 누명을 덧씌운다. 이후 시어머니를 상대로 며느리의 복수극이 시작된다. 고부 갈등을 한 차원 넘어섰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이달 초 첫 전파를 탄 SBS ‘돈의 화신’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돈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검사 이차돈(강지환 분)을 주인공으로 독극물 살해, 불륜, 살인이 잇따르고 있다. 비리로 얼룩진 세태를 풍자한다던 제작 의도와는 한참 엇나갔다. 주인공 이차돈의 아버지 이중만(주현 분) 회장은 내연녀 은비령(오윤아 분)이 부하인 지세광(박상민 분)과 밀애를 즐기자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계획이 노출되면서 오히려 독살당한다. 이 회장의 아내는 살인 누명까지 뒤집어쓴다. 은비령과 지세광이 밀애를 즐기고 함께 샤워를 하며 키스하는 등 적나라한 노출 장면은 선정성 논란까지 불러왔다. 살인과 불륜, 치정, 복수 등 막장 코드의 집합이란 평가다. ‘돈의 화신’ 못지않게 ‘야왕’도 선정성 논란에 빠졌다. 극 초반부터 자살, 미성년자 성추행, 의붓아버지 살해 후 암매장까지 극단적인 설정이 이어졌다. 주다해(수애 분)를 공부시키고 유학까지 보내기 위해 남편인 하류(권상우 분)가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모습도 그려졌다. 지상파 TV에서 이례적으로 19세 시청 등급을 내걸고 방영됐지만 호스트바에서 오가는 노골적인 ‘은어’와 반라의 남성들이 연기하는 접대장면은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원래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부분을 뜻한다. 터무니없는 설정으로 갈 데까지 간 드라마를 부를 때 흔히 쓰인다.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배신과 복수 등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사실 막장 드라마는 한 장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명맥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는 기존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이고 비정상적인 설정이 태반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스토리의 진화 없이 선정성과 자극만 강해지는 추세”라며 “(지적받은 드라마들은) 막장의 종합세트 같다”고 평가했다. JTBC 등 종합편성채널까지 가세한 다채널 시대에 드라마 시청률 경쟁이 부른 결과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케이블, 종편과의 드라마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면 안정적으로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독한 소재’가 필요하다”면서 “시청자를 뺏기지 않으려는 지상파 방송사들의 다급함이 배어 있다”고 말했다. 유행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한 주기적 흐름이란 해석도 있다. 1~2년 간격으로 불거지는 막장 논란이 그렇다. 지난해에는 MBC ‘빛과 그림자’ ‘해를 품은 달’ ‘닥터진’, SBS ‘추적자’ ‘유령’ ‘신사의 품격’, KBS ‘각시탈’ ‘넝쿨째 굴러온 당신’ 등이 각기 다른 색깔로 ‘고퀄’(고퀄리티) 드라마 열풍을 몰고 왔다. 시대물, 로맨틱코미디, 수사물, 타임슬립 등 장르가 다양해지자 한석규, 장동건, 이범수 등 충무로 스타들의 안방 나들이도 잦아졌다. 방송가에선 “왜 욕하면서 보던 막장 드라마가 불현듯 자취를 감췄냐”는 얘기까지 돌았다. 반면 2011년에는 SBS ‘신기생뎐’ ‘당신이 잠든 사이’, MBC ‘애정만만세’ ‘천번의 입맞춤’, KBS ‘웃어라 동해야’ 등이 상식 밖의 스토리로 막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평론가 김어준은 저서 ‘닥치고 정치’에서 “세상의 모든 큰 유행(메가트렌드)은 반드시 이전 유행의 결핍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이를 설명했다. 예컨대 꽃미남이 유행하면 다음은 꽃미남이 갖지 못한 근육을 가진 짐승남, 이후에는 지적이면서 근육도 적당히 가진 차도남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김헌식 평론가는 “막장 드라마는 주기적인 패턴을 보이면서 강화되거나 주춤거리는 양상을 띤다”면서 “앞으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쑥 들어가고 새로운 패턴의 드라마들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새터민·부인 대행 알바… 절박한 일곱명의 여자들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손현주’라는 이름 석 자를 신인작가 중 첫손가락에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 2010년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의 심사위원으로 두 차례나 작가와 마주한 인연 덕분이다. 방 교수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보다 문제적인 등단작은 없을 것”이라며 작가에게 번번이 수상의 영예를 안겼다. 청소년소설 ‘불량가족 레시피’로 알려진 손현주 작가가 2010년 평사리 문학대상 수상작인 단편 ‘두 시간’을 포함해 총 7편의 단편을 실은 첫 소설집 ‘헤라클레스를 훔치다’(문학동네 펴냄)를 내놓았다. 방 교수의 머릿속에 담긴 잔상처럼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눈여겨보지 않은 소외된 자리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쉬운 연민과 희망으로 포장하지 않으면서도 담담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각기 다른 시기,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된 작품들이지만 화자가 모두 여성이고, 주인공들이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작가는 한 발을 떼기 위해 턱밑까지 차오르는 진창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그네들에게 섣부른 희망을 불어넣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식의 흔한 메시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표제작 ‘헤라클레스를 훔치다’는 북한에서 귀순한 이소향이라는 여성 새터민이 주인공이다. 남한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생계마저 막막한 주인공은 완벽한 동거를 꿈꾸다 우연히 성인용품 판매점에서 ‘헤라클레스’라는 남성 인형을 훔친다. 달콤했던 시간도 잠시, 밀린 월세 독촉에 그녀의 안락한 보금자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엄마의 알바’는 16세 어린 딸의 시선으로 가족을 다룬다. 깡통주식으로 큰 빚을 지고 집을 나간 아빠와, 아빠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엄마의 이야기다. 역할대행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나날이 변해 가던 엄마는 급기야 부인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상대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다. 상처 입은 엄마를 바라보던 딸은 아빠를 찾아 집으로 데려온다. 극적 화해는 없었지만 가족은 일상적인 아침을 맞는다. ‘콜라 버리기’는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떠나고 홀로 딸과 자폐아인 아들을 키우며 사는 여성 이야기이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재혼을 위해 회사에 등록한 훤칠한 외모의 남자에게 푹 빠진다. 아들의 존재를 숨긴 채 만남을 이어간다. 자폐를 가진 아들과 중국행 비행기를 탄 주인공은 아이를 그곳에 버려둔 채 서울로 돌아온다. 작가는 타인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도, 함부로 말할 수도 없는 이들의 절박함에 어떠한 도덕적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①교육 기부 삼성 ‘드림클래스’

    [다시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①교육 기부 삼성 ‘드림클래스’

    “제가 섬 출신이거든요. 바보 같지만 출신 지역 때문에 정말 열등감이 많았는데 이번에 다 떨쳤어요.” 드림클래스 대학생 강사로 참여했던 이해란(고려대 중문과 2학년)씨는 마음속의 짐을 덜어낸 개운한 표정이었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생 때부터 광주에서 유학생활을 했지만 왜 그런지 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도시로 나온 이후에도 도시 아이들이 누리고 산 교육환경이 늘 부러웠었나 봐요.” ‘동병상련’의 심정을 가지고 3주 동안 함께한 아이들로부터 이씨는 자신이 더 많이 배웠다고 했다. 영어 문법을 가르친 이씨는 수업 시간마다 자신감을 뜻하는 영어 ‘컨피던스’(confidence)를 수도 없이 외쳤다. 아이들도 별나다고 느낄 정도였다는데 이씨는 이 같은 되새김이 자신을 향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도서, 산간지역에서 왔지만 아이들은 의외로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아이들을 보며 이씨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털어놓았다. 연세대 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이정민씨는 “졸업 전에 가장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구조적으로 교육에서 소외돼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기쁨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며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지 큰 공부를 했다”고 덧붙였다. 드림클래스 대학생 강사들은 성적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경제적으로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이어야 한다. 부족함을 알아야 채울 수 있듯 도움을 받고 주는 관계 속에서 인생과 봉사에 대한 소양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가올 여름캠프에도 꼭 참여하고 싶다”고 벌써부터 각오를 다지는 김문진(이화여대 국문과 2학년)씨는 대학에 들어오기까지 그 흔한 학원 한번 다닌 적이 없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고 주변의 도움도 받았다. “고등학교 때 스터디그룹을 결성해서 친구들로부터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받은 걸 되돌려준다는 생각에서 캠프에 참여하게 됐죠.” 이 같은 소신에 따라 김씨는 드림클래스에 참여하기 전에도 재능을 기부해 왔다. 인천시교육청에서 실시하는 대학생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해 인천성남중학교에서 1년 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열린세상] 꿈꿀 권리, 희생할 의무/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열린세상] 꿈꿀 권리, 희생할 의무/문흥술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인이 외국에 가면 일본 아니면 중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왔노라고, 한국은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를 사용한다고 말하면, 푸른 눈의 서양인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들이 싸이의 말춤에 열광하면서 2013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텔레비전으로 그 광경을 보면서 참으로 뿌듯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보수니 진보니 하면서 편을 갈라 싸움질을 해대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것은 자유다. 문제는 자신의 의견과는 다른 의견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에 빠진 이들에 따르면, 한국사회 구성원은 ‘보수 골통’ 아니면 ‘좌파 빨갱이’뿐이다. ‘골통’과 ‘빨갱이’들이 이리 떼처럼 무리를 지어 상대방을 잡아 먹기 위해 섬뜩한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다. 정치인들은 그 싸움질을 부채질해서 이득을 얻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싸움질을 말려야 할 지식인마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개흙 밭에 뛰어들어 삿대질을 해대고 있다. 지금, 이 싸움질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과 사이비 지식인들에 의해 조장된 세대 간의 대립과 분열로 변질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50대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의 앞길을 막는 ‘보수 골통’으로 낙인찍혔다. 어느 시대든 세대 간의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생각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성 세대는 젊은 시절 70~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자유의 억압과 파행적인 산업화를 경험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피 터지게 부르면서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 외침은 전쟁으로 황폐화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당시 기성 세대의 피땀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젊은이들은 민주와 자유를 꿈꾸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애쓴 것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정보사회와 세계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가치관은 기성 세대의 가치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젊은 세대는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면서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이들이 그런 꿈을 꿀 수 있기까지는 그 밑바탕에 민주와 자유를 쟁취한 지금의 기성 세대의 고투가 깔려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이처럼 세대 간의 갈등은 늘 있지만, 그러나 그 갈등은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창조적 원동력이 되어 왔다. 세대 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젊은 세대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기성 세대의 자기희생 정신이 깔려 있다. 그런데 지금 불순한 정치적 의도로 조장된 세대 간의 갈등은 창조적 변용을 위한 갈등이 아니라, 공멸을 초래할 극한의 대립과 분열로 변질되고 있다. 그로 인해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에 화해 불가능한 간극이 자리잡으려 한다. 사회 여러 측면에서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당연히 여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성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생각을 절대화해서 그것과 부합하지 않는 생각을 무조건 ‘적’ 내지 ‘악’으로 매도하는 일이 더 이상 조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세대마다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고, 또한 같은 세대라 하더라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열린 자세로 상대방의 입장과 가치관을 존중하면서 공생할 공유 분모를 모색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루는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는 전사한 국군 아들 때문에 인민군에게 저주를 퍼붓는 외할머니, 그리고 빨치산 아들을 둔 할머니가 등장한다. 두 할머니는 자식의 처지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러다가 빨치산 아들의 혼백인 듯한 구렁이가 집에 나타나자 할머니는 혼절하고, 외할머니가 그 구렁이를 달랜다. 이 일을 계기로 두 할머니는 화해한다. 2013년 계사년의 뱀이 ‘장마’의 구렁이처럼 화해와 소통의 물꼬를 틔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2013 신춘문예-평론 당선작]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들/유인혁

    [2013 신춘문예-평론 당선작]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들/유인혁

    1 이야기의 끝, 혹은 끝없는 이야기 이집트의 영조(靈鳥) 피닉스는 수명이 다하면 헬리오폴리스에 있는 태양의 신전으로 날아가 스스로 불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피닉스는, 이윽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이 영조는 불사조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보르헤스는 불 속에서 파괴되며 재생하는 이 영원한 순환을 묘사한 적이 있다. ‘원형의 폐허들’의 주인공은 ‘불의 신전’에서 한 소년을 만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소년의 폐동맥과 심장, 뼈대, 눈꺼풀, 셀 수 없이 많은 머리카락 등을 눈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생생하게 떠올렸다. 정교한 상상 속에서, 소년은 마침내 실체가 되어 현신했다. 그런데 이 창조자는 소년이 언젠가 자신이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라 걱정했다. 불의 신전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비밀을 누설하는 것은 결국 불이 될 것이다. 환영은 불에 탈 리가 없으므로, 언젠가 소년은 불에 닿았을 때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고민으로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노심초사하다가 불타는 신전으로 뛰어들었다. 이 기나긴 고민을 끝내줄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불타는 폐허 안에서, 그는 자신이 불에 타지 않음을, 그러니까 자신도 누군가의 환영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소년 또한 먼 훗날 환영을 만들 것이다. 이 과정은 영원히 반복 되리라…. 피닉스와 보르헤스의 환영은 모두 반복을 통해 영원을 성취한다. 그것은 끝없이 뻗어나가는 직선이 아니라, 영구히 되돌아오는 원환이다. 그러니까 끝이 무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는 뜻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메시지는 바로 반복이다. 끝에 도달했을 때, 모든 것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끝과 무한(無限). 최근 소설쓰기 자체를 주제로 삼은 일련의 메타픽션 속에서 발견되는 문제는 참으로 이렇다. 한유주는 “내가 쓰고 싶었던 문장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다. 나는 읽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베끼고 또 베낀다”(한유주, ‘농담’,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30쪽)고 말한다. 이때 새로운 글쓰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대홍수가 인간의 문명을 송두리째 박살낸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의 세계에서, 창작의 가능성은 이 세상과 함께 종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유주는 끈질기게 자신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끼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한유주는 자기 글쓰기의 한 조건으로 ‘이야기의 끝’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이야기는 오래전에 모두 매진되” (한유주, ‘죽음의 푸가’, “달로”, 문학과지성사, 2006, 48쪽)어서 그 어떤 처녀작도 새로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최제훈은 끝없는 이야기의 모델을 보여준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충만한 자유를 제공한다. ‘괴물을 위한 변명’에서 “프랑켄슈타인”을,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흡혈귀 전설을, ‘셜록 홈스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셜록 홈스의 이야기를 솜씨 있게 패러디했던 그는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애거사 크리스티, 에도가와 란포, 오스카 와일드, 스티븐 킹, 로베르트 비네 등을 종횡무진 누빈다. 기성의 작품이 많으면 많을수록, 최제훈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한유주에게 제약이었던 것이 그에게는 기회요,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최제훈은 바로 이러한 조건 아래서 “완성되는 순간 사라지고, 사라지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영원한 이야기” (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82쪽)를 상상했다. 2 플롯 없는 소설들 왜 차라리 ‘소설의 끝’이 아니라 ‘이야기의 끝’인가.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에서 진실로 끝나버린 것은 바로 플롯이다. 바꿔 말해 시작과 끝을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서사가 부재하고 있다. 한유주의 소설에서 내용이 짐작 가능한 이야기는 드물게 출현한다. 한유주의 소설은 대부분 그녀의 의식을 (불)투명하게 묘사하는 데 진력할 뿐이다. 무엇인가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그 진위는 참으로 모호하다. ‘흑백사진사’에서 ‘아이’는 유괴당한 지 일주일 만에 목이 졸려 살해됐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소설의 화자는 납치된 지 나흘 째 되는 날 풀려났고 중학생이 되어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이 의도적인 교란은 화자의 모든 진술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때 이야기는 진술들의 나열일 뿐이지 통일되고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하지 못한다. 심지어 한유주의 소설에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위로서의 사건(event)도 없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사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한유주는 어떤 행위를 묘사하거나 진술한 다음, 곧바로 그것을 부정한다. 누군가 담배를 피웠는데 “연기는 나지” 않고 “재는 떨어지지”(한유주, ‘재의 수요일’, “얼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9, 208쪽) 않는다는 식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소설 속의 내용이 사실 허구(虛構)라는 점을 계속해서 인식시킨다. 이것은 부정문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허구0’에서 한유주 본인으로 짐작되는 화자는 현재진행형 시제의 문장을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 행동, 계획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허구0’이라는 제목은 이 모든 진술들이, 그러니까 가장 투명하게 작가의 머릿속을 베껴낸 이 문장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암시한다. ‘불가능한 동화’ 역시 같은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부정문, 혹은 명명(命名)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이제 소설의 형식 자체를 통해 실천된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우선 앞에서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소녀의 테러리즘을 다룬다. 이 소녀는 반 급우들의 일기에 “나도 죽여보고 싶다”, “바늘 끝은 뾰족하다”, “불은 뜨겁다” 따위의 문장들을 몰래 적어 넣었다. 선생님은 이 테러의 진의를 알 수 없다. 그는 아이들에게 성을 내지만, 이것이 왜 나쁜 행동인지는 좀처럼 설명할 수 없다. 이 교실에는 “없어진 것도, 사라진 것도 없”으므로. 그저 “의미도 불분명하고 출처도 없는 문장들이 있을 뿐”이므로(한유주, ‘불가능한 동화’, “문학과 사회” 2011년 겨울호, 165쪽) 이것은 타인의 문장에 가해진 목적이 불분명한 테러인 것이다. ‘불가능한 동화’는 이렇듯 모호한 폭력을 가한 소녀를 중심으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발아시킨다. 이름이 주어지지 않으므로 소녀의 정체는 미스터리이다. 그녀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도 알 수 없다. 한편 소녀는 미아라는 급우가 자신의 범행을 알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소녀는 미아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이제 우리는 미스터리의 해결(소녀는 누구인가)과 서스펜스의 지속(소녀는 잡힐 것인가)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한유주는 어느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한 여성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수업 도중 강의실 뒤편에서 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 아이는 바로 ‘소녀’. 자기 소설의 주인공이었다. 아이는 마치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왜 자신을 끔찍한 모습으로 창조했는지 따져 묻는다. 이제 한유주는 앞선 이야기가 모두 허구였음을 고백하고, 허구란 대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한유주 소설의 시그니처와 같은 부정문은 형식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녀는 말한 다음, 바로 부정한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를 제시한 다음 그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노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마치 만다라와 같은 작업이다. 형형색색의 모래를 뿌려 만들어지는 이 신성한 그림은, 완성과 동시에 물에 씻겨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유주가 가지고 있는 언어에 대한 회의 때문에 생겨났다. 그녀는 언어가 현실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이는 사전에 대한 불신 속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K에게’에서 사전은 “모두 다섯 권이었지만, 첫 번째 사전부터 마지막 사전까지 합친 두께가 손바닥 한 뼘을 넘지 않”는 “무성의한 생일 선물”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야한 방식으로 선별된 하나의 작은 세계”를 펼쳐 놓고, “수수께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낼 뿐 아무런 해답도 내어놓지 않는”다. 그래서 한유주는 “백과사전이라는 이름은 틀린 것”이라고 진술한다(한유주, ‘K에게’, “얼음의 책”, 문학과 지성사, 2009, 72~73쪽). 사전이 결코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언어는 현실을 투명하게 재현할 수 없다.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문학은 세계를 열등하게 모사한 것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문학에서 삶과 현실을 찾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한유주는 자신의 글이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한유주, ‘허구0’, “얼음의 책”, 문학과 지성사, 2009, 19쪽)라고 선언한다. 언어는 그런 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유주의 해답은 바로 메타픽션이다.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다. 언어는 결코 현실을 적절히 재현할 수 없으므로 차라리 언어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유주에게 ‘이야기의 끝’이란 단순히 모든 이야기가 이미 쓰였다는 인식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야기가 현실을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때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도대체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 의심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한유주 소설의 특징은 좀처럼 요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오이디푸스왕’을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몇몇 사건들을 중심으로 요약할 수 있다. 라이오스왕의 죽음, 이오카스테와의 결혼, 모호하면서도 분명한 신탁…. 하지만 한유주의 소설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수고롭게 그러한 작업을 한다고 해도 그녀 소설의 특징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요약할 수 없다는 것은, 최제훈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최제훈이 한유주처럼 사건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최제훈의 소설에서 사건은 너무 많이 일어난다. 다만 그것들은 좀처럼 결말을 향해 회수되지 않는다. 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장편소설’로 소개되고 있지만, 실은 ‘여섯번째 꿈’, ‘복수의 공식’, ‘π’, ‘일곱 개의 고양이 눈’ 네 편의 소설이 느슨하게 연결된 연작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섯번째 꿈’에 나오는 민규, 현숙, 세나, 연우, 영수, 태식 등의 인물들은 뒤의 세 작품 안에서 조금씩 설정과 역할을 달리하여 변주된다. 예를 들어 ‘여섯번째 꿈’의 연우와 ‘π’의 M은 동일인물로 보인다. 연우와 M은 모두 번역가인데, 자기가 번역을 맡은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운명을 바꾼 일이 있다. 비중이 거의 없는 인물을 슬그머니 죽은 것으로 오역했던 것이다. 하지만 연우가 스페인어 번역가인 데 반하여 M은 일본어 소설을 번역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죽음을 맞는다. 연우가 눈이 오는 산장에 고립되어 수수께끼의 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면, M은 소설을 쓰다가 탈진해 쓰러졌다.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려는 탐욕스러운 셰헤라자드에게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58쪽). 한 편의 장편소설에서 인물이 복수(複數)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사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은 인간의 삶을 재현한 것이고 어떠한 인간도 두 번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죽음은 삶의 의미를 확정하는 사건이다.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는데,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삶의 의미는 오로지 그들의 죽음에 의해서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얘기꾼과 소설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1983, 185쪽). 많은 소설들이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적과 흑”은 줄리앙 소렐의 죽음으로 끝나며, “레미제라블”은 장 발장의 죽음으로 끝나고, “보바리 부인”은 엠마 보바리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들의 죽음이 삶과 소설의 의미를 확정짓는 것이다. 하지만 최제훈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여러 겹의 삶을 살아가고, 복수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연극이다. 예컨대 햄릿의 죽음은 연출가의 각색에 따라 매번 달라지지 않는가. 이러한 최제훈 소설의 특징은 그가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기법에 의해 촉발되었다. 바로 패스티시다. 한유주 소설이 부정문의 특징을 형식적 차원에까지 확장한 결과라면, 최제훈은 패스티시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활용하여 “일곱개의 고양이 눈”을 쓴다. 예를 들어 ‘여섯번째 꿈’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쥐덫’,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인용하고 있다. ‘여섯번째 꿈’에서 민규, 현숙, 세나, 연우, 영수, 태식 등은 연쇄 살인범의 세계를 탐구하는 ‘실버 해머’라는 인터넷 동호회의 회원들이다. 이들은 어느 겨울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회장의 초대장을 받고 산장에 모였다. 그런데 정작 ‘악마’는 나타나지 않고, 회원들은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살해당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악마’가 숨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판사, 사업가, 의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열 명의 사람이 외딴섬에 모인다. 그들은 어느 사업가에게 초대 받았다. 그런데 ‘여섯번째 꿈’과 마찬가지로 초대장의 주인은 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의 노랫말에 맞추어 한 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한편 ‘쥐덫’에서도 사람들은 밀실에 갇혀 있다. 이들은 ‘여섯번째 꿈’과 마찬가지로 폭설이 내리는 산장에 고립된 것이다. 그리고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에서 ‘붉은 방 클럽’은 ‘실버 해머’처럼 극단적이고 파격적인 취미에 빠진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때 ‘여섯번째 꿈’은 애거사 크리스티와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인용하고, 수정하는 가운데 쓰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여섯번째 꿈’은, 그리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다른 소설을 재현하는 글쓰기이다. 소설의 인물이 두 개의 죽음을 경험하는 이유는, 그들이 각각 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제훈의 소설에는 이야기만 있을 뿐 그 이야기가 재현하는 인간의 삶이 없다. 그런 것은 도무지 중요하지가 않다. 이야기가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인물들이 선택되는 것이다. 이때 소설에서 인간적 삶의 내용은 사라지고 주인공은 그저 한 기능으로 퇴락한다. 그러니까 “돈키호테”에서 이 우스꽝스러운 기사는 다만 “무관한 일화와 에피소드의 모음으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에 통일을 주기 위해”(프레드릭 제임슨, 윤지관 옮김, “언어의 감옥”, 까치, 1977, 61쪽) 고안되었다는 식이 된다. 소설은 한 인간의 삶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 재료들의 짜깁기가 되는 것이다. 3 전문가로서의 작가 그래서 패스티시의 소설은 반인간적이다. 소설 속의 인간에게 고유한 삶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스티시는 소설 바깥의 인간에게서도 존엄성을 빼앗는다. 그러니까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에게서 창조주의 권위를 앗아간다. ‘π’에서 M은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직업은 소설가가 아니라 번역가이다. 즉, 그는 타인의 언어를 거쳐야 비로소 무엇인가를 쓸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M이 결코 글쓰기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M은 어느 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밤마다 M에게 으스스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M이 쓰고 있는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이 된다. 그러니까 그녀는 M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셰헤라자드이자, M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뮤즈이기도 하다. 그런데 셰헤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소설이 되기 위해서, M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는 맵시벌의 다큐멘터리에서 우의적인 방식으로 설명된다. 맵시벌은 거미의 몸에 알을 깐다. 세월이 흘러 다 자란 “유충은 쓸모없어진 거미의 몸을 뚫고 밖으로” 나간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 숙주의 목숨이 희생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M은 “맵시벌 다큐멘터리를 전에도 본 것 같았다”(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244쪽). 채널을 돌려도 화면에는 계속 맵시벌만 나타났다. 여기서 M은 사실 환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다. 그의 배역은 다름 아닌 거미인데, 이야기가 완성되자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은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M의 운명은 롤랑 바르트가 ‘저자의 죽음’이라고 지칭했던 현상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바르트가 주장한 바, 근대적 글쓰기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7, 32쪽)이다. 이때 작가는 작품의 유일하고도 온전한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마치 신이 인간을 창조하듯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다른 소설을 베끼는 필경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자의 죽음은 단지 M의 운명을 통해 우의적으로 표현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문학론은 실제 ‘π’의, 그리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작법(作法)을 통해 실현된다. ‘π’는 그 자체로 “인용들의 짜임”이다. 우선 우리는 “천일야화‘의 이야기꾼인 셰헤라자드의 흔적을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의 영향을 감지하게 된다. ‘π’의 액자 속 주인공 하루는 어느 터널에 49일이나 갇혀 있었고, 결국 미쳐버렸다. 그는 이제 정신병원에 있다. 그리고 정신병원의 의사, 간호사, 동료 환자들을 상상 속에서 변형시키며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에 로베르토 비네가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프란시스는 박람회에서 칼리가리 박사의 상자를 보게 된다. 그 상자에는 체사레라는 몽유병 환자가 누워 있다. 체사레는 프란시스의 약혼녀인 제인의 죽음을 예언하는데, 칼리가리 박사는 이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상의 이야기는 매우 기이하다. 비현실적이며 악몽을 닮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수감된 프란시스가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칼리가리 박사는 정신병원의 원장이며, 체사레는 병원의 직원이다. 제인은 프란시스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앓는 환자였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망상 속에서 이들 인물을 변주하여 이야기를 자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미 대중문화 안에서 여러 번 변주된 바 있다. 최근에는 리들리 스콧의 ‘토탈 리콜’(1990)이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1997),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마틴 스코세이지의 ‘셔터 아일랜드’(2010)에서 활용되었다. 요컨대 이미 널리 알려진 수법이라는 뜻이다. 그런 만큼 최제훈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넌지시 인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단 한 편의 완벽한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작가의 역할은 사실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작가는 이제 독창적인 트릭을 고안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트릭에 의존한다. 다만 그 트릭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붉은 방’을…. 이때 최제훈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창조자라 할 수는 없다. 그는 저자가 아니다. 자기 작품의 “유일하고 동일한 목소리”(롤랑 바르트,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1997, 28쪽)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언어와 아이디어를 활용하고 있으므로 자기 작품에 대해 독점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돈키호테가 서로 다른 우스꽝스러운 사건에 통일을 부여하는 기능인 것처럼 그는 서로 다른 이야기의 묶음에 통일을 부여하는 기능이다. 이제 소설의 인물과 작가는 모두 하나의 기능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최제훈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 창조는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조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노동일까? 그는 문화산업의 많은 ‘크리에이터’(creator)들이 하고 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불가사리’(1962)가 ‘고질라’(1956)를 참조하고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지상 최후의 사나이’(1964)를 차용하는 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다만 진귀한 구경거리(spectacle)를 생산하고 있는 것인가? 반쯤은 옳다. 그는 창조하기보다 생산한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부품을 조립하여 완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할만한 것이다. 아마 “안에서부터 파먹”혀 “거죽만 남”아버린 M의 모습은 초과노동에 시달리는 어느 현대 노동자의 비유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지 않는가. 하지만 최제훈은 뒤샹이 예술가인 만큼은 예술가이다. 레디메이드를 활용하더라도 그것을 조합하는 방식은 자유에 맡겨진다. 아무리 풍부한 재료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그것에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뉴욕의 어느 배관공이 ‘샘’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정말이지 없다. 뒤샹 스스로 인정했듯이, “당신의 가능성은 나의 가능성과 같지 않은 것이다”(“Your chance is not the same as my chance.” (Calvin Tomkins, The Bride and the Bachelors: Five Masters of the Avant-Garde, Penguin, 1968, p.33)). 여기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전문가(specialist)로서의 작가이다. 무엇인가 짜깁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재료를 많이 구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재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짜깁기의 예술은 풍성해질 수 있다. 이것은 규칙을 잘 알고 있는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는 게임이다. 그래서 최제훈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노동자로 볼 수 없다. 자기가 조작하는 이야기의 관습을 썩 훌륭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유주는 이러한 점을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한유주는 ‘저자의 죽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문학적 조건으로 뼈아프게 인식하고 있다. 이미 “문장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당신들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심지어 미리 “읽어본 적이 없는 문장”들을 적을 때도 그것은 베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유주는 “모든 사물들은, 혹은 모든 사물화 된 문장들은, 일종의 자연사 박물관에 귀속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에 따르면 도서관의 어느 서가에 진열된 책들은 모두 일종의 “전시된 죽음들”이며, “검은 플라스틱판에, 흰 글씨로 이름을” 새겨 넣은 명패가 달린 박제이다(한유주, ‘자연사 박물관’,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87쪽). 한유주는 이러한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를 참조하고 있는지, 도대체 누구를 ‘베끼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렵다.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컨대 ‘허구0’이라는 제목은 “픽션들”이라고 하는 보르헤스의 단편집 표제를, 그리고 “얼음의 책”이라고 하는 표제는 ‘모래의 책’이라고 하는 보르헤스 단편의 제목을 떠올리게 만든다. 허구의 영점(零點)과 허구의 복수형은 분명한 대비를 형성한다. 거기에 만들어지자마자 모두 녹아 사라지는 얼음의 책과, 영원히 모래처럼 변화하며 두 번 다시 같은 페이지를 펼칠 수 없는 모래의 책은 모두 의미가 고정되지 않거나, 아예 사라지는 책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추측에 지나지 않으며, 그녀는 주의 깊게도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이것은 한유주 스스로 어떤 작품을 베끼고 있다고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한유주는 ‘자연사 박물관’,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인력이거나, 척력이거나’ 세 편의 작품을 통해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상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것은 오히려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와 달라지려 하는 한유주의 부단한 노력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는 연극에 대해 논문을 쓰려는 한 사내가 어느 광인을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이 광인은 자신이 22년 전에 살해한 여성의 옷과 구두를 몸에 걸치고 있다. 한유주는 ‘자연사 박물관’에서 이 짤막한 이야기의 틈을 헤집고 억지로 자신의 언어를 밀어 넣는다. 한유주는 이 사내와 광인을 각각 트리스탄과 햄릿이라 명명하고, 그들의 조우에 복잡한 운명을 부여한다. 그런데 아마 한유주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의 흔적을 알아챘을 것이다.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이란 시간을 물어보는 행위, 다리 위에서의 대화 등 몇몇 지점에서 눈치채기 어려운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아무리 주의 깊은 독자라도 이 정도의 단서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그림자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흔적을 알아채는 것은 훨씬 어려워진다. 주인공 하령은 대재앙이 닥쳐 대륙의 절반이 물에 잠기고, 인구의 절반이 죽어버린 세계에서 소설을 쓰고 있다. 그녀는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를 베껴서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를 쓰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베끼려고 하는 소설은 책장에 없거나, 아니면 물에 젖어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무엇인가 베끼는 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189쪽). 하령은 무엇인가 참조할 때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결말과는 다른” 페이지들을 마주하게 된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203쪽). 그래서 하령의 베끼기는 계속해서 원작과 달라진다. 이것은 굉장히 수고로운 작업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이야기와 언어의 관습들을 익혀야 한다. 이미 모든 이야기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기록되었으므로, 잠깐의 방심은 ‘베끼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표절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든 멜로디를 검토하는 작곡가나, 신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기존의 특허를 검토하는 기술자의 태도에 비견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한유주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한유주는 담담하게 토로하고 있는데, “언어는 진화하지 않고, 문학은 진보하지 않”는다. 그저 베끼는 와중에 조금씩 변화할 뿐이다. 그것은 진화의 개념이 사라진 돌연변이와 같다. 대재앙 이후의 세계에서 호랑이는 아가미를 발달시켰다. 물에 잠긴 세계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이 “진화인가 퇴화인가” 말할 수 없다(한유주,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문학과지성사, 2012, 201쪽). 한유주의 소설 역시 ‘자연사 박물관’에 박제된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제시된다. 그녀의 ‘베끼기’가 박제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문학을 ‘진보’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다만 돌연변이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그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끝’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의 세계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은 인류와 함께 절멸했다. 이 ‘끝’에서 문학은, 그리고 글쓰기는 과거의 박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창조의 엿새는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으므로. 4 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 ‘이야기의 끝’이거나 ‘끝없는 이야기’이거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새로움’의 쇠퇴이다. 이제 작가는 매우 제한적인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으며, 다만 기왕의 설계도를 다소 변형시키는 선에서 만족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한유주와 최제훈의 작품이 새롭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타자의 언어를 베끼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그들의 작품은 전에 없이 독특하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펼친 페이지에서도 한유주의 문체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부정문을 사용하는 방식은 참으로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최제훈은 기성의 관습들을 짜깁기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마치 괴물처럼 낯설다. 이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예술가들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창조적이라는 아이러니와 무관하지 않다. 존 케이지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4분33초’를 만들었으며,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 속의 이미지를 조합해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 여기서 예술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새로운 것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파천황의 것이며 예술의 경계를 도전적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움은 공허한 것이다. 마치 ‘4분33초’처럼 덧없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하지만 그 다음은? ‘4분33초’는 결코 녹음되거나 재연(再演)될 수 없다.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의미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앤디 워홀의 작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워홀의 유명한 병뚜껑, 혹은 메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바라보며 이것이 어째서 예술인지 질문하고, 대체 예술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이 새로움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걸지 않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공허함을 다음과 같이 간파했다. “앤디 워홀의 ‘다이아몬드 가루 신발’은 반 고흐의 신발이 가진 직접성을 전적으로 결여한 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정말이지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떤 말도 걸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프레드릭 제임슨, 강내희 옮김, ‘포스트모더니즘 ―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 정정호·강내희 편, “포스트모더니즘론”, 문화과학사, 1989, 150쪽)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분명 새롭다. 그들은 우리에게 소설이란 무엇인지, 소설쓰기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설은 “아무것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한유주, ‘허구0’, “얼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9, 19쪽)기 때문이다. 이때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모든 책무로부터 자유롭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한 형식이 된다. 즉, 자족적인 동시에 자기폐쇄적인 형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유주와 최제훈 소설의 공간들이 감옥을 닮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사 박물관은 모든 생명들이 박제되어 진열된 공간이며, ‘인력입니까, 척력입니까’에서 사람들은 온통 물에 잠겨버린 건물에서 고립되어 살아간다. ‘불가능한 동화’에서 선생님은 마치 취조실의 형사처럼 아이들을 겁주고 추궁한다. 최제훈을 살펴보면, M은 맵시벌의 둥지에 갇혔고, 하루는 동굴 속에 갇혔으며, 영수는 산장 안에 갇혔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액자 속의 미미는 스토커에게 납치당해 갇혔고, 액자 바깥의 ‘나’는 망막박리에 걸려 눈이 먼 채 병실에 갇혔다. 모두가 갇혀 있다.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은 메타픽션이며, 이들은 모두 알레고리 속의 인물이다. 이들을 가두고 있는 감옥은 사실 상징적인 방식으로 글쓰기 자체를 가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언어의 감옥이다. 한유주와 최제훈의 글쓰기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타인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치 모든 발화가 랑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역시 글쓰기의 관습이나 전통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흉내 내며 말을 배운다. 소설이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은, 소설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폐쇄적인 형식이 된다는 뜻이다. 이때 언어는 자기를 가리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동어반복과 다름없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이며, 작가란 발언을 하는 사람(parleur)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요구하기 위해, 혹은 불만을 토로하기 위해, 심지어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글을 쓴다(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8, 27쪽).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향해 말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책무가 다만 다른 소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되었을 때, 글쓰기는 베끼기가 된다. 이때 독서란 소설 안에 존재하는 다른 소설의 흔적을 찾는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이라는 것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수 없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수용 옮김, “파우스트” 1부, 책세상, 2006, 78쪽). 오직 언어로 이루어진 곳을 헤매는 것이 독서라면, 그것은 언어로 이루어진 테마파크를 유람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그렇다면 언어의 감옥에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나 지나야 그곳이 감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그러니까 “폐쇄된 미로에 갇힌 사람은, 얼마나 헤매야 그 미로가 폐쇄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까?”(최제훈,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자음과모음, 2011, 179쪽). 그리고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파우스트는 평생에 걸쳐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신학까지 열성을 다하여 연구”한 끝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탄식했다. 그가 마술의 세계에 몸을 맡기기로 결심했던 것은, 정통한 지식들이 세계에 대해 조금도 알려주지 않는 “부질없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김수용 옮김, “파우스트” 1부, 책세상, 2006, 31~33쪽). 그가 악마와 계약하여 처녀를 희롱하고, 신화 속의 전쟁에 뛰어들고, 바다를 메우는 개간사업을 시작했던 것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는 세계관을 거부하고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고 선언한 후였다. 가장 열심히 말의 세계를 믿었던 자가, 행동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아마 파우스트와 같은 모험이 필요할 것이다. 파우스트가 자신의 서재를 벗어나 시공을 뒤집는 모험에 나섰던 것처럼, 한유주와 최제훈도 이야기의 끝, 혹은 끝없는 이야기라는 감옥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때 소설 역시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엄을 되찾을 것이다. ■당선소감 책은 끝없는 미로… 내 모든 단어 빚지고 있어 아직 더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은데 덜컥 당선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더듬더듬 잘 모르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문득 어지럽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길은 앞이 명확했던 적이 없었다. 책을 한 권 읽으면, 세상은 그만큼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권의 책을 숙제로 남겼다. 그러니까 이 길은 목적지가 분명한 대로가 아니라,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미로이다. 이 미로를 열심히 헤매고 싶다. 고마운 사람이 너무 많다. 사실 나는 그들이 전해준 것을 비로소 적었을 뿐이다. 나는 모든 단어들을 빚지고 있다. 그래서 당선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는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우선 나는 박광현 선생님에게 글쓰기의 모든 것을 배웠다. 내가 지키고 있는 규칙들은 전부 선생님에게 받은 것이다. 황종연 선생님은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보여주셨다. 한만수 선생님은 어떻게 학문이 정의로워질 수 있는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김춘식 선생님께는 글쓰기의 즐거움을 배웠다. 더불어 오랫동안 함께 공부한 ‘책읽기의 즐거움’의 멤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허병식 선생님, 복도훈 선생님, 서희원 선생님, 조형래 선배, 김민선, 박진솔, 임세화, 전호성, 한정현, 홍덕구 등 모두들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들에게 동의하거나, 혹은 반박하면서 비로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내 글을 가장 먼저, 그리고 아마도 가장 즐겁게 읽어준 경연에게 감사한다. 너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고집 센 아들의 선택을 지금까지 지지해주신 부모님께는 가장 큰 감사를 올린다. 마지막으로 많이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두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 싶다. ●약력 ▲1983년생 ▲ 2002년 동국대 국문과 입학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심사평 균형적 함의 도출 … 평론가로서의 앞날 기대 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17편이었다. 심사위원 두 사람은 이들 작품을 통독하고 그 가운데 최종 논의 대상으로 4편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다시 이를 정독한 후 장시간의 논의를 거쳐 당선작을 확정하였다. 심사기준으로는 응모 평론이 기본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잘 부각시키고 이를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가에 두었으며, 글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비평적 견식을 담보할 수 있는 문장력도 면밀히 살펴보았다. 대체로 올해의 평론 응모작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으며, 그 성향에 있어서도 여전히 세부적 탐색과 분석에 치중하고 동시대 사회 속에서 해당 작품이 가진 의미를 구명하는 데는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평론이 단순하게 한 작품의 성과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배태하고 산출한 환경과 문학사적 친연성 등을 두루 고찰하고 있을 때 객관적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 터이다.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4편의 평론 가운데 이은이의 ‘희미해져가는 인간다움에 대하여’는 유연한 상상력과 감각적인 문장이 뛰어났다. 하지만 보다 정치한 시각과 정론적 방식으로 대상 작품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정영의 ‘비린내, 혼종의 정체성에 저항하는 존재성’은 후각적 관점을 중심으로 작품을 규정하는 독창성이 참신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독창적 사유가 총괄적 해석력을 확보하는 데 미흡했고 비린내와 혼종성의 상관관계도, 좀 더 명료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만영의 ‘유령의 서사, 열림의 정치’는 시종일관 무난하고 균형성 있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분석 대상이 된 두 작품의 저변을 보다 치열하게 드러내고 그 상관성에 대해서도 입체적 조명이 있었으면 하는 후감이 있었다. 당선작이 된 ‘언어의 감옥에서 글쓰기’는 한유주와 최제훈의 소설이 가진 문학적 함의를 비교적 정확하고 균형성 있게 도출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에 있어서도 폭넓은 공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평론가로서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낙선한 분들께는 따뜻한 위로와 함께 다음 기회의 분발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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