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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 휘트니 비엔날레/서울서 사상 첫 해외전

    ◎21일 국립미술관서 “세계 정상의 현대미술제”/리히텐슈타인등 62명의 최신작품 선보여 미국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각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현대미술제 휘트니비엔날레가 사상 처음 서울에서 열린다. 31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9월8일 폐막된다. 6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휘트니비엔날레가 미국밖에서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으로,「뉴욕타임스」 등 미국의 유력지들은 지난2월 「휘트니비엔날레,사상처음으로 1만마일 떨어진 서울로 날아가다」라는 제하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지난4월5일부터 6월13일까지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올해 휘트니비엔날레에는 영화 「말콤 엑스」로 유명한 스파이크 리 감독,신디 셔먼·키키 스미스·로버트 고버등 지난2년간 가장 주목할만한 활동을 한 미국작가 82명이 참가했으며,한국계 미국작가 크리스틴 장과 바이런 김도 포함돼 있다. 1백50여점의 출품작들은 대부분이 미디어와 컴퓨터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설치작품으로 걸프사태를 보도한 CNN 방송내용을 프로젝트로 만든 작품도 있다. 역대휘트니비엔날레는 백인남성위주로 진행돼와 아시아계 작가들은 물론 여성작가들의 항의시위까지 벌어졌으나 올해는 미국사회 전반의 복합다원주의와 페미니즘 경향을 반영,휘트니비엔날레사상 가장 많은 소수민족계및 여성작가들이 참여했다. 「휘트니비엔날레 인 서울」이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서울전에는 막대한 운송비와 보험료 관계상 미국전 출품작가82명중 약3분의2가 되는 62명의 작품이 왔다. 특히 이번 서울전은 세계적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서울에서 열도록 강력히 권유,일본을 제치고 결정됐는데 일본의 한 미술관은 휘트니비엔날레 유치비용으로 3백만달러를 제의했다고. 이에 비해 서울전 유치에 든 비용은 모두 70만달러로 이가운데 백남준씨가 25만달러를 개인비용으로 부담하고 나머지는 기업등의 협찬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휘트니비엔날레는 미국 현대미술의 최신경향을 과감히 수용하여 많은 유명화가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여성미술가 조지아 오키프를 비롯,라우센버그·리히텐슈타인·재스퍼 존스등의 팝아티스트,제프 쿤스·바바라 크루거·줄리앙 슈나벨·키스 헤링·신디 셔먼등 세계화단을 주름잡는 수많은 스타급 미국작가들이 이 미술제를 통해 등단,휘트니비엔날레 출품은 미국 미술인들의 「꿈」이 되고있다. 어쨌든 이번 휘트니비엔날레의 국내상륙은 미술관계자는 물론 많은 미술학도와 애호가들에게 세계미술의 최신조류를 접하게 할수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것으로 보인다.
  • 석파란(외언내언)

    황현의 「매천야록」에 흥선대원군이 원당금정희를 좇아서 서화를 익히고 난초 그리는 것을 공부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한때는 석파란이 세상에 성행했는데 그가 중국보정부에 구금되어 갔을때 중국인들도 그가 그린 석파란을 많이 구입해갔다고 한다』.석파는 대원군의 호이니 석파란이란 그가 그린 난초를 이른다.보정부란 임오군란후 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갔던 곳이다. 석파란은 그렇게 유명했다.흥선대원군이 궁중으로 조대비를 찾아갔을때 대비마마도 묻는다. 『난초를 꽤 잘치신다지요?』 『뉘게서 들으셨습니까.무재 한흥선­무엇하나 잘하는게 있겠습니까』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 나오는 대목이다.이소설에는 당시의 권신 김병기의 집에 갔을 때의 얘기도 적혀 있다. ­『대감,난초를 잘 그리신다더군요.그런 기예는 언제 배우셨소』 병기는 이런말을 물었다.거기 대하여 흥선은 겸손하였다. 『잘그리기야 무얼 잘그리겠소.아이들 장난 같은 것이지…』 『어제도 그런 얘기가 났었는데 탈속을 한 솜씨라던데요.그런 특기를 가지셨을 줄은몰랐소이다』­ 김병기는 그러다가 난그림 한폭을 그려달라고 한다.이에대해 흥선은 일간 하나 가져오겠다고 대답한다. 흥선의 자조그대로 「호구지책」으로 그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명성이 높았으니 그의 생전에도 가짜는 나돌았다.「생전의 가짜」하면 우리도 얼마전 희한한일을 겪은바 있다.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천경자씨의 「미인도」사건.작가천씨는 자기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하는데 남들이 모여 결론짓기를『미인도는 진품』이라 했으니 그진가야말로 알쏭달쏭해지는 일이었다. 요즈음 「JP난병풍」사건으로 해서 석파란이 새삼스럽게 화제에 오르고 있다.생전에 가짜가 나돌았을 정도이니 지금이야 더 말할게 없지만 진품 「JP난병풍」은 부르는게 값인 보물.그 보물은 과연 지금 누구집 어디에 있는걸까.
  • 한국현대판화 발자취 한눈에/50년대이후 시대별 대표작 143점전시

    ◎현대미술관,26∼7월1일 한국 현대판화의 발자취를 한눈에 보여주는 판화전이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오는 26일부터 7월1일까지 제2전시실에서 꾸미는 「한국현대판화 40년전」. 이 전시회에서는 현대판화의 발아기였던 19 50년대부터 현대까지를 4기로 구분,시대별 대표작가의 작품 1백43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50년대의 대표작으로는 정규 최영림 유강렬 김정자 박수근 이상욱씨등 작고작가및 원로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며 판화의 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60년대 작가로는 김봉태 윤명로 배융 김상유 서승원씨등이 소개된다. 또 판화예술이 다양화·고도화된 70년대 작가로 이우환 김차섭 김태호 김창렬 김형대 박래현씨등이,80년대이후의 작가로 박광렬 윤동천 김상구씨등이 선정돼 각각 대표작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전시회와 함께 불경및 행실도·문자도·초상화·민화등 한국의 전통판화 작품을 별도 전시하며 판화제작 과정을 담은 VTR도 상영할 계획이다.
  • 93미술대전 비구상계열/대상에 고경호씨

    ◎우수상 이소의·정재영·서희선·박태갑동씨/구상계열과 첫 분리실시… 총 1,342점 응모/입상작 27일부터 과천 국립미술관서 전시 한국미술협회(이사장 박광진)가 주최하는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1부 비구상계열)에서 영예의 대한민국미술대상(상금 1천만원)은 조각부문 「막스 프리쉬와의 대화」를 출품한 고경호씨(33·서울 동작구 상도동 264∼164)가 차지했다. 올해 처음으로 비구상과 구상으로 나누어 실시된 이번 미술대전에서 대상다음의 부문별 우수상(상금 3백만원)은 ▲한국화 이소의(축제의 봄·서울 성북구 정릉동 402∼29) ▲양화 정재영(Like­40 11㎜·수원시 장안구 우만동 553∼16) ▲판화 서희선(감성공간 III」·서울 마포구 서교동 326∼26) ▲조각 박태동(상념·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94∼901)씨에게 각각 돌아갔다. 21일 결과가 발표된 제12회 미술대전에는 한국화 5백48점,양화 7백3점,판화 52점,조각 39점등 총 1천3백42점이 응모돼 이 가운데 한국화 1백28점,양화 1백51점,판화 36점,조각 31점 등 3백46점이 입상및 입선했다. 심사위원장 윤형근씨(서양화가)는 응모작들에 대해 『한국화부문은 서구적 발상과 기법에 경도된 경향이 많았으며,양화부문은 시대감각에 지나치게 민감,왕성한 실험정신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조각과 판화의 경우 과거에 비해 재료의 복합구성이나 선택,기법이 다양화되어 밀도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말했다. 제1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작은 오는 27일부터 5월1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다. 한편 대한민국미술대전의 구상부문은 가을에 실시된다.
  • 추상화가 유경채씨(이세기의 인물탐구:25)

    ◎현상의 내면 꿰뚫는 “심미안 화가”/사물의 정감·생명의 리듬을 독특하게 표출/기하학적 선·색채속 단아한 온기·향내 가득/1회 국전특선작 「폐림지근방」은 “미술입문 교과서” 평가 그의 작품에는 향기와 온기가 얼핏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화면에 반영된 서정적 시상은 극도의 세련미가 일관되어 마치 그의 초기작품인 새로운 「독백」시리즈 앞에 선 느낌이다. 유경채씨의 자연에 대한 애착심과 감흥은 하나의 대상에서 받은 자극과 충동을 작가의 내부에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가 이를 다시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언젠가 그가 말했듯이 『미란 불가사의한 것이며 짧은 인생속에서 미에 대한 정의를 쉽게 내릴수는 없지만 최소한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봐야만 미가 발견되고 성립된다』는 주장이다. 그는 맛으로도 귀로도 냄새로 모든 오감으로 미를 바라본다는 투철한 작가 정신속에서 피상의 세계아닌 모든 감각을 동원한 현상의 실상을 꿰뚫어 그 본질에 파고드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방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신동 자택2층에 위치한 화실은 언제나 1백호이상 3백호 4백호의 대작과 대결하기 때문에 남보다 배나 크고 채광이 눈부신 편에 속한다.그러나 드넓은 화실에 들어서면 우선 실내가 너무 잘 정돈된 것에 놀란다.그리고 붓이나 팔레트,이젤과 캔버스들이 여기저기 함부로 흐트러져 있지 않은데서 벌써 이 작가의 단아한 단심(단심)을 알게 된다. ○거울과 향 화실 비치 또 화실에는 거울과 향이 비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거울은 그가 들여다보면서 왜 사는지를 자주 자문하고 거울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가자신의 마음을 비쳐보는 것이며 향을 피워놓는것은 그가 타놓은 색깔에서 향내같은 것이 났으면 하는 바람과 바로 그런 마음을 모아 온통 붓에다 실을 수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너는 세상과 타협하여 자신도 모르는새 세파에 시달리고 오염되지 않았는가.또는 이정도 이뤘다는 자만으로 자칫 오만에 빠져 나태하지 않은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그 작품속에서 향기를 느끼고 싶은 화가.그래서 그의 화면은 극단적으로 추구해온 창조적 의지가 기하학적인 선과 색채로 엄연하게 도사려있으면서도 긴 명상과 사삭,끝내 온기와 화기,향기를 뿜게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누가보아도 어딘지 화가의 인상을 풍기는 화가는 아니다.베레모를 눌러쓰고 파이프를 물고 머풀러를 휘날리는 40년대식 50년대식의 낭만은 찾아볼 수 없다.오히려 자신의 어느 한구석 머리카락 한올에서 넥타이 하나에 이르기까지 예술가의 티를 풍기게 될것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폐쇄하려 든다. 물론 상대방을 들뜨게하는 웅변이나 제스처도 없다.전형적인 대학교수나 고급관리 같은 차림에 다리를 학처럼 꼬고앉아 나직나직 논리정연하게 말하는 그를 바라 보노라면 이대나 서울대등 그가 몸담았던 대학의 학생들이 「참으로 드라이한,냉철한 화가」라고 한 말이 단박 실감난다.그러나 예술을 추구하는 정신과 집념,번뜩이는 이성과 실천의지는 그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스승이며 이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화가인가도 일순간에 깨우쳐 준다.그의 주변에 수많은 제자·동료화가들이 범람해 있는 것만 봐도 알수 있다. 류경채씨 처럼 화려한 이력을 지닌 화가도 드물 것이다. 일찍이 1940년 약관 20세의 나이에 선전에 「선」이 입선,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영예의 대통령상 수상,관전제1호 최고상 작가라는 것도 특기할만 하지만 81년 제30회로 국전이 폐지되기까지 국전추천·초대작가·운영위원장으로 단 한번도 출품을 거르지않아 그의 그림으로 우리현대미술의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20세에 「선전」 입선 특히 대통령수상작인 「폐림지 근방」은 현대미술을 말할 때마다 거론되어지는 미술입문 교과서같은 작품의 하나다. 명륜동에서 성북동·인의동에서 필동등을 전전하던 셋방살이 시절,한양대 부근의 한 폐림지를 그린 이 작품은 자연의 구체적이고 외양적인 사실에 앞서 이미 주어진 상황을 「신비의 실존」으로 파악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후 나라전체가 혹독하게 가난하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닥치는대로 나무를 베어다가 땔감으로 쓰고 있었고 폐허가 된 산(산)들은 마치 일제식민지하에서 박해받던 민족처럼 황폐하고 피폐했으나 그는 폐허가 된 폐림지에도 영롱한 봄빛이 감돌아 부러진 나뭇가지에 새싹이 트는 듯한 희망을 그려냈고 이 특이한 소재와 발상이 「신선미」와 「최고미」로 받아들여져 화단의 찬사를 한몸에 모았다.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을 간결하고 제약된 색채,형상의 선적 요소를 교차된 리듬으로 고양시키면서 자연의 피상성을 박탈하여 항구적인 요소만을 표상하고 있다』는게 당시의 평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된 그의 화풍은 60년대를 앞둔 시점에서 또 한번 커다란 변환을 맞게된다. 서울의 어느 한구석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서울전체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도심지」를 그릴 무렵 캔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속에서 그는 수없는 좌절감을 체험했고 그날도 캔버스앞에 속수무책으로 앉아있다가 갑자기 그림을 뭉개고 지우기 시작했다.발작적인 행동이었다.한데 그때 화면속에서 명멸하는 여백과 제3의 공간감을 발견,문득 몸속에서부터 소용돌이치는 환희를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주어지고 결정지어진 사물의 현상에 얽매였던 구속과 틀에서 벗어나자 눈앞에서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이 순식간에 펼쳐진 것이다. 이것이 그가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그러니까 추상세계로 변환하게된 동기이며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할 것인가를 알게된 순간이기도 했다. 형상에 눈뜨고 색채에 눈뜬 그를 향해 평자들은 서슴지않고 「심미안의 화가」란 호칭을 부여했고 그도 혹한의 겨울밤, 앙상한 마른나무 가지에 벌써 봄이 움트고 봄의 화음이 교향락처럼 여울지고 있음을 감동적으로 예견할수 있게 되었다. 『샘이 깊을수록 더욱 청명한 청수를 길러낼 수 있듯이 진짜 가치있는 것은 좀더 깊은 곳에,마음속에 있었다.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남이 한것을 모방하려들 뿐,그러나 자신의 것이 아닌이상 그것은 영원히 생명이 있을수 없다』고 그때의 심정을 그는 후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끊임없는 변모 추구 다시 형과 색채를 소멸시키고 또다시 기하작적인 면과 선을 구성하는가하면 질서의 무한한 지속성을 뛰어 넘어 추상 서정적인 양상을 추구하는등 부단한 시도로 눈부신 변모를 추적해나갔다. 따라서 국전의 아카데미즘 일변도에 안주하지 않고 57년 모던아트의 기치를 내걸고 창작미협을 발족,아세아국제미술전 예술원회원전등 국내외 미술전에 다양한 신작들을 출품,한번 시작한 것은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집념으로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작품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면서도 남들이 다하는 개인전을 지난 90년 고희에나 처음 갖게 된것은 화단의 유명한 에피소드로 남게 되었다. 물론 전람회를 열지 않은 것은 그의 고집때문이다.작가는 일생동안 한번정도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작품은 제품이나 공산품은 아니며 작품은 작가의 일생에서 늘 한작품이 이뤄질때마다 단한번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람회는 한번 여는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얘기다.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고희기념전이자 첫개인전에서 이를 기획한 현대화랑대표 박명자씨에게 그는 「이작품에서 저 작품까지는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그림을 팔아선 안된다」 「절대로 비싸게 팔아서도 안된다」는 까다로운 주문을수없이 다짐하여 그때 박명자씨는 『그럼 저보고 어쩌시라는 겁니까』하고 어이없이 웃어버린 예도 있다.그처럼 자신의 작품을 철두철미하게 아끼고 부등켜 안는 작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가 훌륭한 화실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그의 그림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그러나 이는 50년초부터 그가 펴낸 초·중등 각학년 미술교과서 (교학사간)의 인세로 이루어 졌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화단에서 월전 장우성·오승우화백과 더불어 수준급의 애주가.그러나 그림을 그릴때는 우유한잔도 외면할만큼 식음전폐로 파고든다. 류경채씨는 모름지기 생명의 리듬과 사물의 정감을 서정적 추상회화로 끈질기게 추적해온 우리 화단의 선두주자의 한사람이다.그리고 그의 만년의 작품은 한층 밝고 환한 색면구성으로 「완성」을 향해 무르익어가고 있다.『미술은 자연 모방이 아니라 자연 정화를 의미하는 것이며,스스로를 위한 독자적 세계의 창출』이라는 현대 독일 예술사학자 하인리히 루츨러의 말은 바로 이 노화가의 오늘의 그림세계를 두고 한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연보 ▲1920년 9월5일(음)황해도 해주 출생 ▲1933년 관리였던 부친 유찬영씨의 전임지를 따라 전주이주 ▲1939년 전주사범 졸업 ▲1943년 일본 동경 녹음사 화학교 졸업 ▲1946∼49년 경기사범(현 서울교대)교사 ▲1951년 초중등 각학년용 미술교과서 출간 ▲1951∼52년 대구사범­진해여고교사 ▲1952∼61년 이대 미대 교수 ▲1961∼86년 서울대미대 교수(86년 정년퇴임) ▲1938년 선만학생미전 입선(전주사범2년) ▲1939년 〃 특선 ▲1940년 제19회 선전 입선 ▲1947년 조선종합미술전 입선 ▲1949년 제1회 국전「폐림지근방」특선(대통령수상)(현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소장) ▲1949∼81년 제30회 국전(최종전까지)출품(국전추천·초대작가·국전운영위원장) ▲1953년 창작미술협회창립(창단멤버 이봉상 최영재 황유엽 박창돈)현재까지 해마다 회원전개최 ▲1957년 미 뉴욕 월드하우스화랑 초대전·미 샌프란시스코 미술박물관 현대미술전 ▲1962년 문공부주최 34인 초대전 ▲1972∼84년 한·일미술교류전 ▲1973년 한국현대작가100인전 ▲1975년 역대국전대통령상 수상작가 작품전 ▲1978년 정부수립 30주년기념 초대연합전 ▲1979년 현대회화100호전 출품(신세계 미술관 주최) ▲1983년 춘추화랑초대전(원로작가 회고전) ▲1985년∼현재 서울시 미술초대전 ▲1985년∼현재 아세아 국제미술전 ▲1990년 현대화랑초대(첫 개인전)2회 도쿄비엔날레국제전,극동현대미술전,예술원회원전등 전시다수 ▲예술원부회장 회장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행사행진협의회위원역임 예술원회원 창작미협회장 아세아국제미술전람회 한국위원회회장 한국 미협고문 서울시 문화상,국민훈장동백장서훈,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한민국예술원상,3·1문화상 출간
  • 도예가 황종례씨(이세기의 인물탐구:23)

    ◎예술혼 담긴 「귀얄문양」 대가/탁월한 기품·여성스런 섬세함 한획으로 표출/망망대해·일렁이는 갈대숲 등 깊은맛 일품/32세 “늦깎이” 입문… 남을 의식않고 제작에만 몰두 벽제의 하늘은 아름답다.청자의 비색처럼 영롱하다.산자락에 걸친 구름은 분청사기의 문양인듯 엇비슷 비껴있다.이곳이 바로 현대도예에서의 일인자 위치를 지키는 도예가 황종례씨의 작업실이다.절간같은 고요,사람의 기척이라곤 별로 없이 작가 혼자서 흙으로 성형하고 소성한 도예에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가 벽제에 온것은 72년 초봄이다.그때까지만 해도 진흙구덩이가 푹푹 패이는 삭막한 황무지였으나 도심에서는 가마를 가질수가 없어 일찌감치 이곳 정착을 서둘렀다. 그리고 드넓은 터에 장작을 때는 흙가마와 기름을 때는 현대식 가마를 갖추었다.그로서는 가마를 갖게된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었다.그동안 축적한 것을 이뤄나가면 그만이다. 새벽 6시면 그는 벌써 작업실로 내려온다.직접 흙을 반죽하고 까다로운 여러 공정을 거쳐 유약칠과 채식에 들어가 한 획으로 문양을 넣기 시작한다.물론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의 도예에서의 특징은 귀얄문양이다.그는 이 과정에서는 거의 몰아의 경지다.느긋하고 너그러워 호들갑스러운 데가 전혀 없으나 이때만은 비호처럼 날쌘,귀신같은 솜씨를 발휘한다.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그때도 그의 얼굴표정에는 온화한 여유가 만만하다. 처음에는 힘없는 붓이 자꾸 흙에 달라붙어 기면의 흡수에 비해 둔한 붓놀림이 따르지 못하자 유화붓을 쓰거나 강도가 센 페인트 붓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얄만으로 능란하게 그림을 구사하게 되었다. 귀얄문의 특징은 그릇의 표면이나 내면에 속도감있게 붓자국을 내며 돌리지않으면 습기있는 기면이 당장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단숨에 그릴 수 있는 기량과 기술이 필요하다.그릇의 한면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미리 구상해두었던 그림을 일순간에 성립하는 식이다. ○분청사기에서 힌트 옥색하늘이 아득히 푸르르고 망양한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숲,희미한 새벽 서광과 붉게 타는 낙조등 도예기가 보여주는 회화세계는 화선지에서와는 다른 그나름대로의 참신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안료의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절묘한 표현을 자유자재롭게 만들어 나갈수 있는 것도 한 장점이다. 물론 이런 필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그는 60년대 초부터 청전 이상범에게 붓놀림과 먹의 농담이용법,옥산 김옥진에게 사군자,오당 안동숙에게 풀 나무 산과 바위를 사사하면서 수년간 자기표현을 위한 기초적 탐색을 감행해 왔다. 그의 귀얄무늬는 물론 분청사기에서 쓴 귀얄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고려상감(상감)같은 상감을 이용한 화장법을 거쳐 분청사기의 귀얄무늬를 추상적 회화로 모색해 나갔다. 그 시절의 그런 그릇에 왜 귀얄 붓자국을 썼는가,시간틈틈이 골동품가게나 박물관을 기웃거리며 관계서적과 도록을 빌려다가 밤을 지새워 연구하기도 했다. 발이나 호·기에다 투각수법의 무늬로 부분장식을 표현하거나 단일색인 소문백자의 경우엔 부드럽게 흐르는 몸체에서 무한한 품위가 배어나왔다. 더구나 화사기에서 쓰이던 회청·회회청의 코발트색깔은 지금도 창조하기 힘든 기발한 색조임에 스스로 탄복해 마지 않았다.꽃잎흩날리는 비화문이며 풀잎 나뭇잎 얼킨 초엽문의 활달한 율동감,살얼음이 깨어진 듯한 빙렬등은 현대도예에서도 시도해 봄직한 분방한 방법임에 틀림 없었다. 황종례의 그릇의 형태는 비교적 큼직하고 대담한 편이다.쑥쑥 뻗은듯 휘어진 곡선을 지니면서 탁발한 기품과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다.너무 작아 조잡하거나 너무 우람하여 넘치지 않는다.야무진 티나 인위적인 기교는 없다.꾸미지않은 순결함속에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둔 든든한 경륜의 실력이 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안심과 환희를 안겨준다. 도예의 기물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악하자 이번엔 좀더 새로운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시도에 앞장 섰다.무한한 가능성에 비해 시간이 짧기만 했다. 몇사람 되지않는 창작도예에서 「독자성」을 두루 인정받고 있으면서도 그는 『도예의 길은 멀고 그리고 어렵다』고 말한다. ○성취가 일생 과제로 고전하여 어렵게 이룬것만큼 높이 평가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이 없는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도무지 그런 울결(울결)과 방종에서 벗어나 흔연한 자세다. 남에게 관심을 갖거나 남을 의식하지도 않는다.그런 자자분한 세상사에 눈돌릴 겨를이 없다.예술가의 자세란 작품에 밀착하여 새 세계에 도전하는 일,그리고 성취만이 평생의 과제이며 목적이다. 그는 인건비등으로 다투는등 사람들에게 시달리기도 싫어 인부들과 손을 끊고 몇년전부터는 흙만드는 일을 직접하고 있다. 12번째 개인전을 연후 수많은 해외전시에 참가,틈틈이 86년 13번째의 개인전을 앞두고 준비해온 1천여점의 작품을 하루 아침에 망친 사건이 있었다. 어느때보다 실험작품이 많아 스스로 기대에 부풀었던 그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허허!」 한바탕 웃는 것으로 이를 단념해 버렸다.이미 끝난것에 집착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원인은 간단하다.필요한 양을 정확하게 혼합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물과 흙의 분량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이를 지켜보지못한 자신의 불찰로 돌렸다.광주나 이천에 나가면 만들어진 흙을 얼마든지 사다 쓸수 있는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접만들어 쓰려다가 생긴 이 낭패가 그로서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그후론 아직 결혼전인 차남(영학씨·조각·상명여대 출강)이 어머니를 돕고 있다.엎친데 덮친격으로 같은 시기에 그의 도예일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던 부군 이진우박사(전 영동피부과 제일의원)가 몸져 눕는 바람에 한동안 간호에 매달리느라 이럭저럭 작업을 미룰수 밖에 없었다. 황종례씨는 고려청자의 재현이라는 전통도예를 가업으로 가진 황인춘씨를 부친으로 역시 원로 도예가인 황종구씨(전 이대교수)가 그의 오빠다. 어릴때 영등포 대방동에 있던 그의집 과수원속에 부친의 가마가 있었고 그는 그릇을 빚고 건조시키고 조각하고 백토칠에다 다시 이를 벗겨내고 유약등 까다로운 작업을 지켜보는 유년시절에도 하나의 사기나 파와(파와) 한쪽을 어루만지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옛 고려왕조·이조왕조의 생활이 따뜻하게 전해졌다고 기억한다. 그후 국민학교 1학년때 조선총독부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개성에 이주,일인들이 선죽교부근에 마련해준 연구소에 살면서 호수돈여고에 다녔다. 미대진학을 꿈꾸며 그림을 그리던 그에게 스승이던 유달영선생의 가르침은 「버려진 제것에 대해 눈뜨라」는 것이었고 특히 졸업을 앞두고 「청년이어 일어나라」는 교훈은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나의 일을 하겠다」는 의욕을 심어주었다. 집안형편이 극도로 어려웠으나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에 있는 이대미술학부에 진학,어릴때 손바닥 감촉으로 느꼈던 사기의 온기를 못잊어 대학졸업 9년만인 32살때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 도예를 전공했다.그때도 부군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대학원 졸업전인 61년에 첫 개인전,청자의 태토에 백토로 분장하고 그곳에 단숨에 귀얄문을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낀것은 68년 6번째 개인전때부터다. ○“독보적 존재” 평가 「청·백자의 선이 아무리 탁발하다 해도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조작적이고 기교적이 아닌,이른바 이조자기에서 볼수 있는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멋』을 담아 새롭게 선보였다. 실내장식품에 지나지 않던 도예를 널리 일상생활에 참여시킨일종의 도예의 활성화 시도였다. 『몇 안되는 창작도예를 만드는 도예가중에서 독자적인 색유사용으로 새 경지를 개척해 왔다는 점에서 황종례는 현대도예에서 단연 독보적 존재』라는게 미술평론가 박래경씨의 평이다.1천여점 작품실패로 9년간 미뤘던 13번째 개인전은 오는 13일 신세계 미술관에서 열리게 된다. 흰색으로 시작됐던 그의 귀얄문은 더욱 다양한 아름다운 색깔로 변모되었고 매끄러운 표면은 입체감과 함께 품위있는 추상회화로 조형효과를 이뤄내고 있다. 청자빛 하늘과 파도치는 바람,흩날리는 꽃잎등 조선시대의 사람의 감정과 미의식을 담은 그의 현대적도예 세계는 그의 성격처럼 온유하고 따뜻하여 번거로움과 무질서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인정과 사색,그리고 은은한 기쁨을 넉넉하게 뿌려주는 안식의 경지다. □연보 ▲1927.12.9 서울출생 개성호수돈녀고 26회 졸업 ▲1945.∼1950.5 이화여자대학교 예림원 미술학부 서양화과(학사) ▲1959.9∼1962.2 이화녀자대학교 대학원(도예전공·석사) ▲1963∼19 81 이화녀자대학교 미술대학 도예과 출강 ▲1965.3∼1966.2 상명녀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조교수 ▲1975.3∼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공예미술학과 교수 ▲1961.12 도예개인전(서울중앙공보관) ▲1963.10 도예개인전(〃) ▲1964.11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6.5 도예개인전(신문회관) ▲1967.8 도예개인전(미팔군전시장) ▲1968.8 도예개인전(일본,경도 조화랑) ▲1971.9 도예개인전(신세계백화점 전시장) ▲1975.4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78.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81.1.20 도예개인전(미국 뉴욕) ▲1982.1.29 도예개인전(미국 로스앤젤레스) ▲1984.4.24∼4.29 도예개인전(신세계미술관) ▲1961∼1983 대한민국 미술전 출품 ▲1968.7∼1981 대한산업디자인전 초대작가(디자인 포장센터)심사위원 ▲1973 한국현대도예작가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5 전국공예가 초대전(미술회관)문예진흥원 주최 ▲1976 여유도예전 초대전(신세계미술관) ▲1977 역대 국전수상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1979 한·중·일 국제도예전 초대출품(일본명고옥) ▲1979 한국도예가회 창립전(신세계 미술관) ▲1979 한국미술전람회(뉴질랜드) ▲1980.9.27 한국도예가전 회원전 2회(신세계미술관) ▲1980 국전 초대출품(국립현대미술관) ▲1980.7.10∼7.16 도예2인전 일본 매일신문사 주최(일본 동경도 대환백화점) ▲1981 한국도예가회 회원전 3회(신세계미술관) ▲1982.3.6 도예2인전(일본 구주 복강시) ▲1983 도예2인전(일본 대판시) ▲1984.3.15∼3.20 도림전 출품 ▲1981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81∼1990 현대도예전 일본 순회전(10연간) ▲1982 제1회 대한민국미술제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82 서울신문사도예공모전 초대출품·심사위원,한미수교 100주년 기념출품(미국) ▲1982 한국현대도예가 회원전 9회(신세계미술관) ▲1983 한독수교 100주년기념출품(독일) ▲1983 서울신문사 도예공모전 초대출품 ▲1968.8 국제미술교수협회 주최 도예세미나(일본,경도) ▲1975.5 한국도예특강 초대(일본 요업시험소) ▲1980.2 자유중국 교육시찰 ▲1983.8.2∼8.20 한일교류전 출품및참가(일본 구주)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주최 ▲1983.12 MBC초대전 출품(MBC별관 전시관) ▲1986.9 한국현대도예가회 일본 전시 ▲1987.6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출품 ▲1987.8 대한산업미술가협회 출품및 참가(일본 구주) ▲1987.9 서울신문사주최 도예공모전 심사및 초대출품 ▲1989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및 운영위원장 ▲1988 대한산업미술가 협회 이사장 역임 ▲1990 서울현대도예비엔날례 초대출품 ▲1991 대한민국 미술협회 부이사장 ▲1992 서울 공예대전 출품 ▲1993 벨기에 앤트워프 박물관 주최 ▲1993.3.26 한국도예문화 특별전 출품 ▷작 품 집◁ 황종례 도예작품집(미진사간) ▷수상◁ 국무총리상·국전 초대작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출강·대한미술산업가협회 회원·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이사
  • 미술원 등 4개원 준비작업/예술종합학교,자문위원 위촉

    ◎정원·전형방법 등 구체안 마련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지난 3월초 음악원을 출범시킨데 이어 최근 무용원을 제외한 4개원의 설립자문위원을 선정,활동에 들어갔다. 자문위원이 위촉된 4개원은 미술원,연기원,영상원,전통예술원.각 원은 4∼6명의 자문위원이 이달 한달동안 각 원의 정원,전형방법,시설등 구체적인 개원 준비안을 마련하고 학교측은 이 내용을 토대로 연차적 개원에 따른 종합계획을 5월까지 세워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시키게 된다. 예술학교는 무용원의 자문위원도 조만간 위촉하기로 했다.각 원의 자문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미술원=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박관욱(서양화가·서울대교수) 오경환(서양화가·동국대교수) 김봉태(서양화가·덕성여대교수) 신현중(서양화가) 이규용(신구전문대교수) ▲연기원=김문환(서울대교수) 김우옥(연출가·서울예전교수) 최형인(배우·한양대교수) 윤정섭(문화방송) ▲영상원=권병순(서울대강사) 유연길(촬영기사) 김학천(건국대교수) 배창호(영화감독) 김문환(서울대교수) ▲전통예술원=김용진(한양대교수) 백대웅(중앙대교수) 한명희(서울시립대교수) 황병기(이화여대교수) 문일지(무용가) 한편 문화체육부와 학교측은 상반기중 이미 출범한 음악원에 이어 나머지 5개원의 연차적 설립순서를 확정짓고 하반기에는 예술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바꾸기 위한 법 개정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는 현재 학교 설립의 근거가 대통령령으로 되어 있어 「대학」과 「총장」이라는 명칭이 아닌 「학교」「교장」으로 불리고 있다.학교측은 학부모들로부터 우리나라처럼 학벌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학교 이름을 「대학」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따라 학교측은 교육법 특별법을 입법,「대학」과 「총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할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그러나 문화체육부와 학교측이 교육의 내실을 기하기보다 이처럼 명칭 등 외형의 단장에 힘을 기울이는데 대해 적지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 한국공예가/경력쌓기 해외전 많다/개인전이 72%… 미·일 등 집중

    ◎대학내 화랑 등서 열기 일쑤 한국공예가들의 해외전은 개인전이 가장 많고(72%),장소는 일본과 미국(77%)에 편중돼 있으며,장르별로는 도예전이 절반(49%)을 차지하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국내유일의 공예전문지 월간 「미술공예」4월호 「한국공예가들의 해외전」특집에서 집계됐다.미술자료전문가 김달진씨(국립현대미술관자료실)는 이 특집에 기고한 「한국공예 해외전,외국공예 국내전 20년 소사」에서 이같은 조사와 함께 해외에서 열린 한국공예전의 이모저모를 소상히 밝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금껏 해외에서 열린 한국공예 해외전은 약 2백건.이 가운데 개인전이 전체의 72%로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그룹전이 18%,공모전 입상·입선작 전시가 10%였다. 장소는 일본 46%,미국 31%,유럽 14%,기타(9%)로 대부분 일본과 미국 두나라에 집중돼 있다. 장르별로는 도예전이 49%로 해외전의 절반을 차지했으며,이어 섬유(25%),금속(18%),종합전(5%),목칠공예(3%)순이었다. 이같은 한국공예가들의 해외전은 지난 해부터 급증,90년 17건,91년18건에서 지난해에는 31건으로 두배 가까이 급증했다. 해외에서 개인전을 많이 가진 공예가는 도예가 오천학씨,섬유예술가 박숙희·정경연씨,도예가 원경환씨 순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수의 작가들이 도쿄 뉴욕 로스앤젤레스 파리등지의 한국문화원이나 대학교내 화랑등 현지 관객들의 발길이 잘 닿지않는 장소에서 경력쌓기 위주의 해외전을 갖고있어 보다 내실있는 해외전이 기획돼야할 것으로 지적됐다.
  • 강혜승(공예)·황방연씨(서예) 대상 차지

    ◎대한민국 공예­서예대전 입상자 발표 한국미술협회(이사장 박광진)가 주최하는 제8회 대한민국 공예대전과 제5회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결과가 22일 발표됐다. 대한민국 공예대상에는 염직분야에 출품한 강혜승씨(24·서울 성북구 성북동 179의 37)의 작품 「느낌」이,대한민국 서예대상에는 한문분야에 출품한 황방연씨(40·서울 동대문구 답십리2동 488의18)의 행·초서 「구봉선생 독좌시」가 각각 차지했다.또한 공예대전 우수상에는 김홍규씨의 금속작품 「희귀」,한한순씨의 도자 「꿈 그리고 기쁨」,오현성씨의 목칠공예 「태동」,조정화씨의 염직 「동경과 이륙」이 각각 뽑혔다. 올해 공예대전에는 총4백69점(금속 56·도자 2백12·목칠 81·염직 1백15·기타 5)이 응모, 이 가운데 대상1,우수상4,특선13,입선1백21점을 선정했다. 공예대전 심사위원장 김근배교수(건국대)는 『작품수준이 예년에 비해 현저히 향상됐으며 재료개발과 조형적 예술성을 강조한 흐름이 두드러졌다』고 평했다. 한편 서예대전 우수상에는 ▲한글부문 구자송씨의 「신심장」 ▲한문 송종관씨의 「왕마힐시」 ▲사군자 김구씨의 「묵매」가 각각 수상했다. 서예대전에는 총 1천4백82점(한글 2백78·한문 8백61·사군자 3백7·전각 36점)이 응모돼 이 가운데 대상1,우수상3,특선26,입선2백76점을 뽑았다.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여원구씨는 『고대서체에서 청대에 이르는 각 서체가 다채롭게 등장했으며 이들 서체를 고루 입선시켰다』고 밝히고 『사군자 부문에는 태반이 속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화제에 있어서 법서의 연마가 부족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고 평했다. 제5회 대한민국 서예대전과 제8회 대한민국 공예대전은 오는 26일부터 4월14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다.
  • 서예가 김기승씨(이세기의 인물탐구:21)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 원곡체 창안/한자명체 두루 통달… 독창적 변형경지 도달/고 최현배박사도 “한글 본연성품 표출” 칭송/성경구절 작품화 유명… 도산선생 묘비문 등 명필남겨 글씨를 이루기전 작업대앞에 선 원곡 김기승씨의 모습은 신을 향한 기도처럼 절실하고 경건하다. 눈부신 백지위에 붓길이 닿는순간 율동처럼 이어지는 묵향,어느때는 일필휘지,어느 때는 점 하나에도 혼신을 다해 멈출듯 흐느끼는 ▦황은 그 자체가 이미 통신의 경지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니라 신에 의해 움직이는것처럼 힘차게 그어내린 획마다에선 맑고도 밝은 상서로운 향기를 뿜어낸다.그리고 그 몇순간의 긴장은 폭풍전야의 정적인듯 은은히 주위를 압도한다. 원곡의 문향실은 그가 38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적선동에서 이곳 워커힐 아파트로 옮긴지 올해로 만 10년이된다. 요즘도 여전히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독교 방송을 들으면서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근처 아차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바로 작업에 임한다. 그리고 하루 2시간에서 3시간,전날 독서로 구상해두었던명언·명구를 마음속에 새겨 우러나오는 진한감동을 작품속에 담아낸다. 그는 글씨를 이루는데 있어 아름다움은 언제나 「선」이어야함을 전제하고 있다.이른바 선하지 않은 것은 미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기술이 피부라면 인격은 근골이다.티없이 청정한 피와 살과 뼈대가 합일될때만 비로소 미의 영혼이 글씨와 글속에 첩식된다는 것이다.순수한 서체에서의 체삽이나 시속기는 천착스러움의 극치다.글이 뜻하는 바를 거르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위해선 심혼의 혈서로 성자에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글씨 내재의미 중시 「초학자시 불가진형세 선상자성의 재필전」­글씨는 처음 대할때 그 형세를 알수없으니 먼저 글씨가 이루어짐을 생각하면 뜻은 쓰기전에 있게 된다,즉 원곡은 서의 진수는 글씨의 모양에 두기보다 그 내부에 내재된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다.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등 한자체에 두루 통달하여 일가를 이룬동안에도 그는 한때 중국말로 된 성경을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다.막상 이를 내놓았으나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때부터 그만의 독특한 원곡체를 창안,한문각체의 독창적 변형을 한글에 적용시킨 이 서체는 한자와의 대련 작품을 쓸때도 조화와 균형을 깨지않는것이 특징이다. 옛날 궁중에서 궁녀들이 소설을 베낄때 사용한 궁체가 부드러운 반흘림의 반행초의 실용글씨라면 원곡체는 한문보다 힘차고 남성적인 운필,구슬을 꿴듯한 우아미보다 먹물이 뚝뚝 듣는 힘의 분출이 돋보이는 서체다. 한글학자 고 최현배박사는 원곡의 한글체를 보고 『산같이 망막하고 강같이 줄기차다.우리의 한글이 제본연의 성품으로 온전히 나타났다』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그의 독창성이 지나쳐 그 자신이 스스로 「전위예술」이라 일컬었던 「묵영기법」은 서예계에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묵영기법이란 청묵의 번짐을 사용하거나 먹물의 농담으로 거듭써서 시각효과를 앞세운 일종의 회화적 서예 회화인 셈이었다. 서예계는 『전위예술,즉 묵영은 서예에서는 있을수 없다』고 발칵 뒤집혔고 심지어는 『전통을모르고 전통을 소화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예술』로 혹평되기도 했다. ○「묵영기법」 논쟁불러 이때도 젊은감각과 시대에 부응하는 예술을 지향해온 원곡으로서는 전통예술을 지키기 위해선 고루하게 전통만을 고집하기 보다 오히려 여러각도의 실험과 시도를 언해 새로운 조형언어를 발굴,전통의 소중함은 물론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평생동안 그가 써온 작품은 개인전때마다 40점에서 60점씩 32회.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평소에 아끼는 성경구절들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담아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육당 최남선의 「삼·일독립선언문」을 비롯,제갈량의 「전후출사표」는 3천자이상,아가서8장 4천여자,무위자연의 노자 「도덕경」5천여언,특히 굴원의 「이소경」의 경우는 사적고증,한자구성·암기 등으로 6개월준비,집묵만도 10일이상 걸린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랜 연륜과 우수사려가 없는 마음가짐으로 인해 그의 글씨에는 향기는 물론 불가사의한 힘이 담겨 있다. 올해나이 84세.그러나 그 음성과 행동에서 연노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또 서예계 최고 원로의 권위의식 같은것도 없다.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격의없이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한다. 1909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김정현씨와 김취옥여사의 2남중 차남으로 출생.5세때부터 조부인 동효공이 설립한 한문서당 삼언재에서 글씨와 천자문을 배웠고 홍산소년백일장에 나가 한시짓기 장원,11세때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가면서 신교육을 받게됐으나 공주고보 2학년때 일인체조교사를 배척하는 맹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바람에 서울 휘문고보로 전학,그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 문회고급중학과 상해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다녔다. 상해유학시절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입단하여 도산 안창호선생을 모신 독립운동에 가담,국내신문의 주요기사를 발췌정리하여 국내정세를 보고하거나 흥사단 행사때마다 글씨를 잘 쓴다고 해서 식순을 쓰는 일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흥사단서 독립운동 그때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경제학보다 글씨 쓰는 일에 심취하여 졸업후 고향에 돌아오자 고장의 명필인 산정 신익선선생에게 본격적으로 글씨를 배웠다. 하루종일 쓴 글씨가 집안마당에 흰눈처럼 수북히 쌓였던 기억은 지금도 그에게 불길같은 작업의지를 당겨준다고 한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전 손재형선생에게 사사.『재주는 있으나 헛 공부했다』는 혹독한 질책을 받으면서 그는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의 법첩으로 겨울밤이 지새도록 수련을 쌓아갔다. 봉천 문회고급중학교때 남경서 신학대학을 나온 백영엽목사의 영향을 받아 크리스천이 된 그는 조국에 돌아가면 목사가 되려했으나 글자 한자한자의 그 묘한 성자에 빠져 글씨쓰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그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글씨로 전한다는 의도에서 성경구절을 작품에 담게 되었고 성경구절을 쓴 작품만도 6백여점에 이른다. 새문안교회에 다닌지 45년,출중한 건강을 타고난 그는 담배나 커피·술은 입게 대지 않는다. 산부인과 의사인 부인 차인실씨(82)와는 1939년에 결혼,외아들인 명호씨(53·미앨라배마에서 병원)와 4녀가 있다. 원곡은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본다는 뜻에서 지난83년 그가 아끼던 자작품 2백87점을 골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내던날,아들 딸을 결혼시켜 내보낼때보다 더 가슴저미는 허망함과 섭섭함에 그날밤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한적이 있다. 지난 90년에는 그가 한평생동안 소장해왔던 추사 김정희의 「고시행서」위창 오세창·김구선생의 글씨,청전 이상범과 절친했던 운보 김기창,청계 정종여의 금물로 그린 「독수리」등 30억 상당의 골동서화를 아들의 모교인 연대박물관에 기증. 1958년 제1회 개인전을 필두로 신세계미술관이 주관하는 개인전이 끝나면 부인과 자녀들이 권유하는대로 이대와 고려대 중앙대등 각 대학에 작품을 나누어 보낸다. ○33회째 개인전 준비 그가 제정한 원곡서예상은 올해 16회째,오는 10월25일부터 제33회 원곡서예개인전을 역시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게된다. 도산 안창호선생의 묘비문을 비롯,수백여개의 비문과 동상문 현판글씨 시비등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글씨가 산재해 있으나 단 한글자도 그는 허트로 내놓는 일은 없다. 그의 마음가짐은 「논어」에 나오는­ 「불지명이면 무이위군자야요 불지례면 무이립야요 불지언이면 무이지인야라(천명을 알지못하면 군자가 될수 없고 예를 모르면 세상에 나서 행세할수 없고 말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를 실천하며 앞만보고 살아왔다.분한이 있으면 향기로운 글,빛을 발하는 글에 이를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대덕약곡」(큰덕은 골짜기 같아야 한다)」에서 따온 그의 아호인 원곡처럼 그래서 나를 낮추고 남을 섬기고 마음을 텅비운 맑고 깊은 골짜기,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포용하면서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정진하는 예인의 자세를 지킬 뿐이다. □연보 ▲1909년 충남 부여 홍산출생 ▲1927년 만주 봉천 문회고급중학졸업 ▲28년 흥사단 원동위원부입단 안창호 김구 이동령선생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입당 ▲1932년 중국 상해 중국 공학대학부 경제과 졸업 ▲1936년 소전 손재형선생사사 ▲1939년 조선서도 진흥회 주최 전국서도전 입선 ▲1942년 중국 상해서 전중국서화전 입선 ▲1946년 전국 서화전 이등상 ▲1949년 제1회국전 서예부 특선(문교부장관상) ▲53∼55년 국전 제2·3·4회 특선 ▲〃 대성 서예학원 설립 ▲〃 서울대·숙대·상명여대 출강(15년간) ▲56∼58년 국전 제5·6·7회 추천작가(출품) ▲58년 제1회 원곡 서예전 ▲59·60년 〃 제8·9회 초대작가(출품) ▲61∼82년 국전 제10∼30회 국전심사위원·운영위원 ▲59∼89년 원곡서예전 제2회∼29회 개최 ▲1976년 미국·유럽 미술여행 ▲78년 제1회 원곡서예상 제정 ▲79년 동아일보 주최 원곡서예 회고전 ▲79년 북유럽및 캐나다 미술여행 ▲〃 제1회 원곡 미술상 제정 시상 ▲79∼92년 제2∼15회 원곡서예상 시상 ▲83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자작 대표작(2백87점 기증) ▲84년 주일 한국 대사관 한국문화원 초대 서예전 ▲87년 봄베이·카이로등 유럽지역 여행 ▲기독교 미술인 협최 회장역임 고왕경·김강경·경천애인·시편23편·이소경·삼일독립선언문·애경·전후출사표·1오일삼성오신·불원천불우인·묵시록등 1천여점 은관문화훈장 한국서예사 원곡서문집
  • 고미술품/크리스털/모피류/고급품 전문수리점 각광

    ◎훼손 그림 약품처리­수정 통해 복원/이 빠진 샴페인잔 곱게 갈아 광택내/헌모피코트 새것처럼 디자인·손질 가보로 내려오는 고서화,큰 마음먹고 구입했던 그림처럼 가치가 있는 물건,혹은 혼수로 마련한 크리스털 그릇등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들이 못쓰게 상해버린 경우.차마 버릴 수도 없고 그대로 구석에 처박아 두자니 안타까운 마음뿐이지만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분명히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일반적인 곳에서는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들을 새것처럼 고쳐주고 치료해주는 전문수선점들을 소개한다. ○수리기간 1주일 ▷크리스털제품◁ 크리스털 그릇은 맑고 투명해 멋스러움을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품목이다.때문에 혼수로 장만해 가기도 하며 선물로도 자주 선택되고 있다.그러나 다른 유리제품처럼 이가 빠지거나 금이 가면 쓸 수 없게 된다.회현지하상가에 있는 포룸파카크리스털(778­4803,776­2427)은 이처럼 못쓰게 된 크리스털제품들을 모아 전문기술자에게 보내주고 있다.두산에서 생산되는 파카크리스털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이지만 고객서비스 차원에서 중간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 현재 못쓰게된 크리스털제품을 전문적으로 손봐 주는 곳은 두산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기술자의 공방이 유일하다.이가 빠진 경우 부위의 깊이만큼 다이아몬드파우더에 곱게 갈아 광을 내면 감쪽같아진다.금이 간 브랜디잔이나 샴페인잔은 그만큼 잘라내고 나면 보석함이나 아이스크림잔으로 쓸 수 있게 된다.밑 부분은 잘라서 곱게 갈아 여러개의 반지를 보관할 수도 있다.원상복구는 안되지만 훌륭한 생활용품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리폼된 제품에 크게 불만이 있을때엔 다른 물건으로 바꿔주기도 한다. 수리기간은 보통 일주일정도.비용은 컵 한개에 2천5백원,화채볼이나 화병의 경우 4천∼5천원선.그밖에 유명 백화점의 크리스털전문매장에도 수선을 맞기면 공방에 보내준다. ○30만∼50만원선 ▷고미술품◁ 우리나라는 사계절의 기후변화가 심해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림이 쉽게 상한다.특히 고온다습한 여름 장마철을 몇해 지내고 나면 아까운그림들에 곰팡이가 슬고 얼룩이 생긴다.표구전문가들의 모임인 표구협회(736­0303)에서는 작품의 종류와 상한정도에 따라 전문수리인들을 연결해 준다.또 대부분의 유명 표구점이나 화랑에서는 이처럼 상한 고미술품의 원형을 되살려 주는 작업을 해주고 있다.인사동에 있는 동문당(732­40 74)도 그 가운데 한곳.작품이 귀해서 손대기 조심스럽거나 상한 상태가 심한 경우 전국의 화랑들이 수선을 의뢰하는 곳이 고산방(739­40 53)이다.이곳에서 작품의 재질에 따라 특수 화학약품 처리로 곰팡이자국,얼룩,낙서등을 빼고 그 다음 수정전문가의 손에 의해 파손된 부위가 제모습을 찾게 된다.물에 담가 약품을 제거하고 다시 복원상태에 따라 여러차례에 걸쳐 약품처리를 하고 수정작업도 배접후에 재수정을 해야하기 때문에 기간을 좀 여유있게 잡아야 한다.고화의 경우 처리기간은 약2개월정도.40호 전지크기의 근대화는 12만원,10폭 병풍도 30만원가량에 원형을 되살릴 수 있다.고화는 30만∼50만원,고화 병풍이 50만∼60만원 ○변형그림도 복구 ▷서양화◁ 유화를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곳은 인사동 수도약국2층에 위치한 그림보존연구소(732­44 25)한곳.국립현대미술관 보존과학실에서도 유화복원작업을 하지만 일반인들의 소장품을 취급하진 않고 있다.지난 89년 문을 연 그림보존연구소(소장 최명윤)는 화방이나 표구사에서 사용하는 갖가지 도구들외에 물감의 화학적 성분을 알아내는 분석기등을 갖추고 유화의 복원과 보존작업을 해준다.그림은 자연상태에서 진동,습도,빛,온도에 의해 훼손되거나 인위적으로 파손되기 쉽다.이곳에서는 먼지와 불순물로 훼손된 그림을 닦아내는 작업,귀한 작품을 변형되지 않도록 보강해주는 작업,그림에서 물감 부분만을 남기고 캔버스와 틀을 교체해 주는 작업,틀보다 줄어든 그림을 원래대로 늘리는 작업등이 가능하다.과학적인 분석자료를 참고로 하긴 하지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경험적인 것이 토대가 된다는 것이 최소장의 설명이다.복원 및 보존처리 기간은 훼손상태에 따라 달라 길게는 몇개월씩 걸리는 경우도 있다.황변 벗겨내기와 같이 간단한 작업은 5만원이면 할 수 있다.○자사제품 무료로 ▷모피류◁ 가장 값비싼 의류의 하나로 꼽히는 모피도 관리 소홀로 좀이 슬거나 유행이 지나면 결국 옷장신세가 된다.모피코트류는 작은 조각들을 이어 만들기 때문에 충분히 리폼이 가능하다.근화나 진도등 유명 모피회사는 자사 제품의 경우 무료로 리폼작업을 해주고 있다.깃의 크기를 줄이거나 길이를 자르고 안감을 교체해 주는등 사이즈를 늘리는 것을 제외하고 원하는대로 수선할 수 있다. 상표가 불분명한 국외제작 모피는 압구정동 한양아파트35동 건너편에 있는 오경자모피점(546­99 33)에서 전문적으로 해결해 준다.깃 모양을 바꾸거나 소매,길이를 줄이는 작업부터 원래의 디자인을 해체시켜 완전히 다른 모양으로 깔끔하게 처리해준다.수선비용은 얼마나 손을 대는지에 따라 6만원부터 60만원선으로 비싼 편이지만 새로 구입할 경우를 생각하면 투자해볼만하다는 것이 이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의 의견이다.
  • 움직이는 미술관/전시·이론 교육병행… 기능확대 주력

    ◎국립현대미술관서 3년째 시행… 올 추진사업을 보면/문화소외지역 중심,강원 등 11곳 순회/광주·전주 등서 소장품전시회도 함께/임영방관장,“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파고들도록 심혈” 지난해 연말로 시행 3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이 전국민의 미술문화 향수권 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에따라 국립미술관은 올해는 「움직이는 미술관」운영의 폭을 문화소외지역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단순 미술전시뿐 아니라 이론교육과 시청각교육을 병행해 미술관기능 확대에 더욱 주력할 방침이다. 올해 「움직이는 미술관」이 찾아나설 지역들은 수도권의 중소도시 4곳을 비롯하여 강원도 2곳 충청도 1곳 경상도 3곳 전라도 1곳등 모두 11개 지역.「움직이는 미술관」과는 별도로 전국 대도시에서 미술관 소장품 순회전시를 병행,미술관을 방문하기 힘든 전국의 미술애호가들에게 수준높은 소장품을 접할 기회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소장품전시회는 부산과 광주 전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펼치게 된다. 지난90년도 문화부 발족과 더불어 출범한 「움직이는 미술관」은 미술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국내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갖고 전국의 문화소외계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운영됐다.92년도의 경우 한햇동안 이 미술관은 74일간 전국 25개지역을 찾아 25회 전시회를 가졌으며 관람인원은 16만3천9백명을 동원했다.한국화 서양화 조각등 각 장르를 망라하여 1백30여점의 작품을 갖고 학교등 학생대상지역과 산업현장 의료기관과 기업체및 은행,공공기관등을 찾았다. 미술관측의 이같은 이동전시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대단히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현장을 찾은 7백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4%가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대답했으며,82%가 생활과 미술에 움직이는 미술관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반응을 보였다.또 이들은 작품기호조사에서 1위로 한국화를 꼽은데 이어 수채화 사진 조각 양화 영상비디오등을 차례로 선호하고 있었다. 응답자들은 또 이 미술관의 문제점도 지적했는데,군단위지역까지의 운영확대,초보자를 위한 작품설명,국내외작품 동시전시,한국추상작품과 지방작가의 참여확대등을 희망했다.이같은 문제점외에도 미술관 관계자들은 전시기간이 2∼4일밖에 안돼 자주 움직이는데 대한 고충과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개선할 부분들로 스스로 지적하고있다. 한편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복제품을 보급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한해만도 유명작가의 복제품을 국내에 9백65점,국외에 2백65점을 보급한 바있다.국내의 경우 미술품생활화에 기여한 한편 외국 교포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조그마한 선물의 역할을 해낸 것으로 평가됐다. 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장은 『움직이는 미술관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미술관이 되기위해 심혈을 기울이고있다』고 말했다.관장은 『그리고 많은 국민이 일상생활속에서 그림을 감상할수있는 여유를 주기위해 효율적인 미술관 운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앞으로의 운영계획을 털어놓았다.
  • 서양화가 도문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3)

    ◎신선한 감각으로 원색의 미 묘사/변화에의 열정으로 새 조형방법창출 온힘/「정적질서」 보다 동적 유동세계 표출 돋보여/부친 도상봉화백 그늘벗어나 독자적 예술세계 추구 그림속의 꽃들은 모든 꽃이 활짝 피어 꽃바다를 이룬다.캔바스의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벌판에 얼마든지 펼쳐진 채 꽃들은 꽃이 파리 바람에 흩날리듯 꽃향기 퍼뜨릴 듯 꽃마다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화가 도문희의 회화세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랑의 필치로 원근법과 사실적기법을 적절하게 원용하면서 큐비즘과 포비즘의 요소를 포함시킨 새로운 조형방법에 능란하게 반응하고 있다」는게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의 말이다. 「언제나 신선한 속도감과 힘을 머금고 있는 그의 화면은 정적인 질서의 세계가 아닌 동적인 유동의 세계를 절제와 생략으로 탐구하면서 격동속에서 미의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고. 도문희씨는 과연 몸속으로부터의 열망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힘의 화가다. 그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잠시도 한군데 오래 머물지 않는다.서울에 있는가하면 뉴욕에 샌프란시스코에 콜로라도나 산타모니카 라구나 비치에서 또는 괌도나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서 화사하고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의 흐름에 따른 경쾌하고 격렬한 사색적인 붓놀림이 그치지 않는다.자신의 예술의지와 방법을 위해 그는 자극적인 체험을 얻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줄기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그 빛은 물체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 르노아르의 방법처럼 도문희는 꽃이면 꽃이라는 대상을 공간이동시키 듯이 생명감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화면속에 옮겨놓고 있다.그래서 그의 꽃은 어느때는 무복을 입고 회전동작을 하는 발레리너처럼 생기발랄한 율동적터치로 음악에서의 비오렌토와 알레그리시모의 리듬감을 팔팔하게 되살리기도 한다. ○생명감 화면에 담아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그는 될수록 그림과 연관시킨 일들 속에 참여하고 있다.그래서 공식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자리보다연극이나 영화 한편 아르튀르 랭보의 「갈증의 희극」을 읽는 것이 그림에 대한 감동을 유발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없는 도문희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클래식뮤직에서 디스코나 록뮤직,흘러간 닐다이아몬드나 젤리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신들린 감흥에 물들여지기를 원한다. 아니면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한 황혼,달빛아래 사슴과 노루들이 뛰어노는 멕시코국경,크라이드강변의 성곽과 끝없이 불어오는 북풍 속에서 어디선가 「히드크리프!」를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 경탄과 감탄의 탄성이 절로 질러지는 눈부신 풍광을 찾아 또하나 새로운 여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기에는 동양화에서의 삼원법과 같은 느낌으로 색채와 형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물이나 꽃의 표현에서 몰골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를 승화시켜 감각화된 화면효과를 과시해 보이고 있다. 이런 심적충만을 위해 그는 시간과 정열을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캔버스와의 오랜 대결끝에 빛이 공간속에 흐르듯 몸속에 정제돼 있던 예술에너지를 이끌어 조형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도문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랐다.나혜석의 불우하고 외로웠던 말년의 생애를 뺀다면 그의 화려함과 정열과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창조의식은 초기의 나혜석을 연상시키는 구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초기의 나혜석 연상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선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바로 도상봉화백이다. 부친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화가로서의 열망·야망이 꿈틀거리는 순간 그는 그림으로 향하는 두껍고 높은 벽을 스스로 힘차게 꿰뚫었다.물론 한사람의 여성으로서의 행복이 아닌 화가로서의 대성을 목표로 정하자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는데 그는 주저가 없었던 것같다.고통없는 성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상봉화백의 그늘은 예상외로 넓고 컸다.동경미술학교 출신인 부친은 국전창설멤버에다 대한미협위원장 한국미협이사장 예총회장 문총최고위원 예술문화윤리위원 위원장 등등 화단의 중책을 두루거친 거봉으로 도문희는 언제나 「도상봉씨의 딸」로 불리워야했다.그는 부친의 이 후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격도 특성도 다른 작품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혜화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발레리너를 꿈꾸면서 송범무용연구소에 넘나들다가 엄격한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경기여고 때 그림을 시작했다.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부친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김인승씨에게 그림을 사사,「화가지망」을 굳게 결심하고 정확한 데생,탄탄한 기본실력을 닦아 나갔다. 그때는 동아음악궁전이며 종로의 쎄시봉·르네상스음악실에서 하루종일 살다시피 했고 클래식판 수집광에다 블라맹크와 칸딘스키 루오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본래부터 화려하고 솔직한 성격이어서 그는 무슨일에든 쉽게 좌절하거나 좌절해도 실망하지않았다.결과가 안좋을땐 「좋은 경험」으로 돌릴만큼 낙천적인 편이다. 그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한 부친은 막상 그에게 붓한번 바로잡아준적이 없었다.오히려 대학재학중 국전에 출품하기위해 열심히 그려논 그림위에다 가위표를 해논적이 있을 뿐이다.도문희는 국전에 출품하고 싶었다.자신의 작가적 재능과 자질을 인정받을수 있는 미술관문이었으나 부친이 심사위원·운영위원·고문등으로 연루되어있어 작품을 자유롭게 낼수없는것이 불편했다.3학년과 4학년때 부친몰래 가명으로 출품해서 연2회 입선했을때도 주변에서 「부친의 후광」으로 아는 것이 억울해서 아예 국전출품은 포기하고 말았다.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다면 어릴때부터 아틀리에가 있는 분위기에서 아버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는 것뿐.오히려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인 어머니 나상윤씨가 『나는 아버지때문에 그림을 포기했지만 너만이라도 나대신 열심히 하라』는 배려의 힘이 더 컸다고 할수있다. ○예술적 분이기서 성장 대학졸업후 대한미협과 이대출신그룹의 녹미회를 중심으로 그룹활동을 펼치면서 환상과 기억속의 사물들을 거칠고 대담한 야수파적인 축제분위기로 이끌어 화단의 주목을 한데 모았다. 그러나 기왕에 주어진 화가로서의 과정을 답습하는 형식에서 벗어난다는 차원에서 69년 첫번째 개인전을 연후 그는 미련없이 모든것을 떨쳐버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영국과 독일을 거쳐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여 그는 북구의 바다와 하늘의 변화표현에 현혹된 시기를 보냈다. 남청·담청·군청·감청·선록 보라와 옥색에 이르기까지 서로다른 수백가지 청색으로 출렁이는 바다와 천사의 날개 같은 구름의 흐름에 홀려 그는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케하는 청색조 시기를 이곳에서 거쳤다. 「시간따라 바람따라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단 한장면도 같은 색조,같은 표정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것과 「줄이엣의 푸른얼굴,로미오의 푸른눈매」머리카락과 머리에 장식한 액세사리까지도 굵고 짙은 푸른 선묘로 보여준것이 그시기의 작품들이다. 터질듯한 원색이 분방하게 펼쳐진 그 아름다움이 독특하여 독일의 벰버그 스코틀랜드 그린옥등 지방신문들은 「푸른 잎에 매달린 빗망울처럼 투명한 기쁨이 깃든 경관등으로 크게 취급한바 있다. 그의 부친이 딸의 그림을 칭찬한것은 77년 조선화랑 초대전때다. 그때 전시오프닝에 왔던 여러 화가 평론가들이 도문희 그림의 「축제분위기」를 호평하자 단지 한마디 『마치 이 세상이 천국임을 아는것같다』고 했었다.같은해 도상봉씨는 타계했고 도문희로서는 그때 그 말이 부친에게 들은 유일한 「촌평」이 된셈이다.서울에서는 지난 30년동안 끊임없는 우정의 교분을 갖고있던 선화랑의 김창실씨(화랑협이사장)와 진화랑의 유진씨의 초대전에 응하고 있다. 누구보다 도문희의 신선한 감각과 번뜩이는 젊음의 화면을 아끼는 김창실씨는 도문희의 「장미를 곧잘 「살아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하탄과 하화가없는 그러나 화치의 극치」의 작가라고 말한다.화단의 대선배인 천경자씨는 「그의 식을줄 모르는 정열」도 정열이지만 무엇보다 「화가의 얼굴을 하고있는 화가」라는데 호감을 갖기도한다. 그는 여전히 무엇에 구애되지도 소속되지도 않는다.자신이 한일을 후회하지않는다.서울에 오면 이제는 다자란 딸과 아들과 친구처럼 어울려다닌다. 그는 화려한 치장을 즐기고 여러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교분을 트고있지만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안하는것 가리는것 투성이다.자유분망과는 상관없이 「맥주 한모금」등에는 남의 눈치를 보는 면이 있다. 뉴욕에서는 소호를 중심으로 일릭 드라곤루드 그레고리비치 조각가 스티븐 래등과 작품활동을 펼치고 그중 일릭 드라곤은 오는 5월 조선화랑 초대전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는 지금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게해준 부친께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보이는 그에게 누군가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었을때 그는 오히려 『슬픔과 아픔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축복받은듯 활짝 핀 그의 꽃들은 아마도 남이 모를 아픔과 시련을 딛고 피어난 것이기에 보는이에게 보는것만으로도 진한 감동의 빛을 전달해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 빛의 힘은 조금도 퇴색하는 기색없이 더욱 영롱하고 선명하게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바람의 흐름에 실려 그의 화면속에서 기쁨의 빛으로 용해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출생.서양화가 도상봉씨(77년 타계)와나상윤여사(87)의 1남 2녀중 막내 ▲57년 경기녀고졸업 ▲59·60년 국전입선 ▲61년 이화녀대 미대 서양화과졸업(김인승·이준·유경채·심형구사사) ▲80년 뉴욕 그래픽 버딘스 아카데미 ▲69∼72년 유럽체류(영국·옥일·스코틀랜드) 그린옥 아트갤러리·스코틀랜드 글래스코우 아트랠러리·렌프레쉬어 아트갤러리 등 개인전시 ▲73년 서울개인전(미술회관) ▲74년 아시아 련대작가전(일본 도쿄) ▲76년 세계여류미술전(인도네시아) ▲77년 서울 조선호텔 갤러리 초대개인전 ▲79년 진화랑초대 제4회 서울개인전 ▲80∼81년 미국체류(뉴욕맨해턴·버지니아 우드빌리지) 80년 비스비(Bisbe)전참가 ▲81∼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벰버그(Bemberg)풀다(Fulda)빌트프릭켄(Wildfricken)개인전 ▲87년 서울선화랑 초대「장미」개인전 ▲89년 〃 진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선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정화랑〃 〃 ▲92년 MBC후원 부산호텔 미술관·아천미술관초대전 ▲93년1월 LA 앤드루 셔(Andrew Shire)갤러리 초대전 ▲한국미협·녹미회 회원 ▲작업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국립현대미술관 간 한국서양화대관(작품수록)
  • 광주시립미술관/새 문화명소로 각광

    ◎개관 6개월만에 관람객 4만명 돌파/고 허백련·오지호 유작 전시실 큰 인기/올부터 국립미술관과의 작품교류전도 추진 광주시립미술관(광주시 북구 운암동 산34의 1)이 예향 광주의 새 명소로 각광을 받고있다. 문을 연지 반년만에 관람객이 4만명을 넘어섰고 방학인 요즘에는 하루평균 5백여명이 찾고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이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8월1일 개관한 광주시립미술관은 지하3층 지상2층에 연건평 4천1백19평규모로 모두 4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지난해 11월2일 「광주시민의 날」을 맞아 문을 연 4백37평규모의 2층 상설전시실은 연일 관람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우리나라 동서양화단의 두 거목이었던 고 의재 허백련화백과 오지호화백의 유작을 관람하기 위해서이다. 한국화의 은은한 멋을 접할수 있는 허백련기념관에는 미망인 성연옥여사가 기증한 「매·란·국·죽」과 「미완성 산수도」등 고인의 작품 16점이 전시돼 있다. 호남화단을 대표하는 남종화의 대가인 의재는 1891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에서태어나 23세때부터 운림산방을 드나들며 남농 허건의 부친인 미산에게 사사하며 타고난 재능위에 필력을 다듬었다. 광주시 동구 운림동 춘설헌에서 여생을 보낸 그는 지난77년 작고했다. 또 의재기념관 바로 옆에 자리한 오지호기념관에는 미망인 지양순여사가 기증한 추경,항구,설경,자화상등 오화백의 대표작 5점과 두아들인 승우 승윤씨의 서양화4점등 모두 9점이 함께 전시돼 있다. 오화백은 1905년 전남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태어나 23세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모임인 「녹향회」를 조직하는등 서양화의 이론정립과 후진양성에도 큰 족적을 남긴 대표적 인물이다. 지난8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유작 1백50여점을 모아 회고전을 가진데 이어 이곳 광주시립미술관에 그의 작품 상설전시관이 마련돼 그의 예술세계를 아껴온 이들을 흐뭇하게 하고있다. 이들 허·오화백의 이같은 상설전시관의 탄생은 특히 이고장 출신 원로화백들이 두 대가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꾸준히 설립을 추진해온 결실로 더욱 값지게 평가된다. 미술관의 2층 상설전시실에는 두화백의 유작말고도 이고장 원로작가들의 서양화59점 한국화36점 서예19점 조각9점등 모두 1백48점의 작품이 함께 전시돼 있다. 이와함께 4백11평규모의 1층 기획전 제1전시실에서는 지난해 12월10일부터 전남대 신경호교수의 서양화전이 열린데 이어 새해에도 볼만한 기획전들이 개막을 기다리고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조광영전시계장은 『이곳 시립미술관의 개관으로 이 지역 미술애호가들의 욕구충족과 함께 예향 광주를 널리 알리는데 한몫을 하게 됐다』며 『올해부터 국립현대미술관과 소장작품교류전을 추진하고 세미나개최,미술정보지발간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립현대미술관장 임영방씨(92문화계 주역:11·끝)

    ◎우리미술 국제화에 앞장/문화에 대한 인식전환,선진화절실/그림의 불합리한 가격구조 시정돼야/화랑가 침체… 우수한 젊은작가 발굴노력엔 다행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미술시장을 휘어잡고 문화패권주의적 자만에 빠진 미국 유명미술관장들과 입씨름을 많이 했어요.우리미술과 문화를 무시하는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니까 울분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 초순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미술관장회의에 다녀온 국립현대미술관 임영방관장(63). 팔팔한 성격대로 그들과 심한 논쟁까지 서슴지 않았던 임관장은 우리 미술의 국제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을 아직도 곰곰히 하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가 돼서는 안됩니다.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됐습니다.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경제선진화의 길에 접어든 시점에서는 문화선진화의 노력도 뒤따라야 합니다』 지난5월 제13대 관장으로 취임한 그는 한국미술의 요람인 국립현대미술관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도 어려웠지만,이번 여행을 통해 더 큰 어려움을 만났다고 했다.그것은 한국미술의 국제화인데,문화에 대한 인식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순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의 중요한 이슈말입니까? 미술품 양도소득세문제로 화랑들이 홍역을 치르다가 3년 유예를 얻어낸 것도 그 하나가 되겠지요.그리고 미술시장이 심한 불황에 허덕였다는 것과 미술관및 박물관법 개정안이 시행된 일도 꼽을 수 있어요.백남준 회갑기념 회고전이 대규모로 열린것도 큰 수확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일부 문제에 대한 임관장의 견해는 일반 미술계의 시각과는 조금 다른 나름대로의 생각을 갖고있다. 『올해 미술인들은 양도소득세 문제때문에 미술계가 심한 침체에 빠져 들었다고 난리들이였지요.하지만 언젠가는 시행돼야할 법이라면 무조건 뒤로 미루는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또 과세당국과 거기에 맞선 미술계도 합리적인 과세원칙을 찾아내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됩니다.사람들은 또 올해 극심한 미술계불황을 그 양도세문제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그간의 미술시장 구도로 볼때 올것이 온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가 「올것이 온것」이라고 한 대목은 지난10여년간 우리 그림값이 국제미술시장과는 관계없이 지나치게 고가로 형성돼 왔다는 데서 찾아진다.일부 화상과 작가들이 그 이득을 너무나 충분히 챙겨왔다고 지적했다. 『외국에 전혀 인식이 돼있지 않은 몇명의 그림이 세계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가들의 그림값과 같은 수준을 받아서는 안됩니다.호당 수천만원이나 억대를 호가한 것은 너무 불합리한 것이었습니다.더구나 미술품수입 자유화시대가 열리고 국내 문화애호가들의 국제적인 안목이 높아가고 있는 시대입니다.그러니까 잘못 형성된 고가의 국내그림들이 안팔릴수 밖에….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올해 국내 미술계 전반을 불확실했던 시대로 평가한 젊은 작가들의 가능성있는 작품에 눈을 돌리면서 거기에는 다행스런 측면이 엿보였다고 했다. 『30대 작가군 가운데 국제무대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우수한 인물들이 20명가까이 보이더군요.기성세대가 이들을 크게 격려해 줘야 우리미술의 앞날이 있을 것입니다』
  • 세밑 화랑가 3가지 이색전 눈길

    ◎프랑스 사진의 어제와 오늘전/압구정동­유토피아/디스토피아전/이시대,우리의 건축전/19C이후 독특한 사진미학 소개/「프랑스」/TV 등 대중매체 활용 문명비판/「압구정」/건축의 문화적 한계성극복 탐색/「이시대」 평소 접하기 힘든 색다른 전시회 3가지가 연말 화랑가를 장식,문화애호가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프랑스 사진의 어제와 오늘전」(12∼30일),갤러리아미술관의 「압구정동­유토피아/디스토피아전」(12∼30일),동숭동 인공갤러리에서 열리는 「이 시대,우리의 건축전」(12∼24일). 순수미술에서 소외돼있는 사진과 건축,그리고 한가지 장르를 꼬집기 힘든 여러 장르를 혼합전으로 구성한 이들 세 전시는 상업성이 앞선 화랑문화에 염증난 관객들에게는 청량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프랑스문화원이 공동 주최한 「프랑스 사진의 어제와 오늘전」은 세계사진사의 초기인 19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의 초상화 풍경 누드 의상 삽화 및 건축사진 등을 망라했다.마네에서 보들레르에 이르는유명예술가와 명사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은 최초의 사진가 펠릭스 나다르의 작품부터 70년대 파리의 컬러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작가 13명의 작품 2백20점이 소개되고 있다. 작가들은 피카소와 막스 에른스트,이브 몽탕이나 에디트 피아프와 같은 화려한 연예계의 스타들을 독특한 사진미학으로 화면위에 생생하게 떠올렸다.또 파리의 옛모습,히피축제,대중오락의 장면들이 즐겁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이 전시는 시대변천에 따라 흑백에서 천연색으로 변화돼가는 빛과 색의 절묘한 관계,그리고 한 문명의 이기가 어떻게 사람과 기계의 눈을 결합해 오묘한 영상을 낳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서울 압구정동거리 중심부에 있는 갤러리아미술관에서 열린 「압구정동­유토피아/디스토피아전」은 흔히 「욕망의 해방구」로 불리는 압구정동의 문화풍속도를 조명하고 있다.화가 사진작가 건축가 평론가 시인 비디오아티스트 디자이너등 여러분야 예술인들이 함께 준비한 이 행사는 새로운 개념의 다장르의 문화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형태를 취했다. 흥미위주의 시각이나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주목돼온 압구정동문화를 본격적 문화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자리로 다양한 방식의 전시작 1백여점이 소개되고 있다.김복진 김환영 박불똥 서숙진 신지철등 화가와 건축가 정기용,디자이너 박혜준등 12명이 출품한 이 작품들은 대부분 TV와 광고등의 대중매체를 메시지 전달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압구정동문화를 문명비판적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는 이들은 물질로서의 미술품이나 권위와 신화에 의존하는 미술개념을 철저히 거부한다.이들은 곧 일반대중의 문화적 욕구가 상업적 이미지와 일반대중 매체로 채워지고 있음을 압구정동의 문화해부를 통해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숭동의 분위기있는 전시공간인 인공갤러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대,우리의 건축전」은 국내 건축인들의 모임인 「4·3그룹」의 회원전이다.지난90년 결성된 「4·3그룹」은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14명의 건축가들이 20세기 마지막 10년의 한국현대건축을 주목하기 위해 모인 젊고 건강한 건축인그룹.출신학교와 지역에 대한 편견이나 구분없이 우리시대의 문화와 건축,사회상황에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도하기위해 모인 이들은 매달 세미나를 갖고 토론으로 건축의 문화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탐색해 왔다.그룹결성이후 회원들의 첫 작품발표 자리가 되는 이번 전시는 「한국의 건축가가 규방의 건축에서 벗어나 현대건축의 그 어떤 문제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중요한 기점으로 삼겠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 중립 현대미술관 야외조각장 상공/삭도설치 공사 경관 크게 훼손

    ◎우회진입차도 꼬불꼬불 곡예길/직선거리 900m 4.5㎞나 돌아/시·미술관 직선도로요청 외면… 관람객 편의만 중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통하는 우회 원거리 진입로는 차량을 이용한 관람객에게 오랫동안 불편을 주어왔다.이에따라 미술관은 여러차례에 걸쳐 서울시에 직선도로 사용을 요청했으나 이를 계속 거절한 가운데 서울대공원 동물원 관람자의 편의를 위해 미술관 야외조각장위를 통과하는 가공삭도노선공사를 착공,문화공간 분위기를 더욱 흐려놓고 있다. 미술관 진입로 문제는 지난 86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이후 최대숙원사업.직선으로 가면 고작 9백m밖에 안되는데도 서울시가 길을 내주지 않아 외곽도로를 우회하여 4.5㎞나 돌아가는등 차량을 이용한 미술관 관람자들이 골탕을 먹고 있다.더구나 이 길은 급회전 커브길이 15군데나 돼 차사고 가능성이 높은데다 미술관이 대형컨테이너로 작품을 운송할 경우 큰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이다.특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미술관을 찾았을때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아 들어가는 이유를 물어오면 대답이 몹시 궁색해진다는 것이 관광업체의 주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러한 애로사항을 고려,지난 6년동안 서울시에 3차례 협조공문을 냈으나 번번이 불가하다는 회신을 받았다.최근 열린 호주현대미술전 개막식에서 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장이 이상배서울시장에게 진입로문제를 직접 정중히 거론했으나 단호히 묵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이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시에 요청한 개선안 내용은 서울대공원 주차장에서 미술관 앞에 까지 나있는 직선도로 노폭(50∼70m)가운데 10m만 미술관용 차선으로 할애해달라는 것으로 돼있다.그러나 대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1㎞정도면 미술관에 닿는다는 이유와 함께 차로 미술관을 찾으려면 산길을 도는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해왔다. 이렇듯 미술관의 편의가 외면된 가운데 서울시는 이달 들어 야외조각장 위를 통과하는 삭도설치공사를 착공했다.서울대공원과 연계한 놀이문화만을 지충한 가공삭도노선공사는 결국 수십억원을 들여 조성해놓은 야외조각장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결과를 빚게됐다.이 공사가 완공되어 삭도가 연속 운행할 경우 미술관 경관을 해치는 것은 물론 야외조각장 조형무대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연과 문화행사도 많은 지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협의도 없이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 삭도의 신설노선을 변경해 줄것을 당국에 요청했으나 이미 미술관 이웃 산에는 철근지주를 박는등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영방관장은 『진입로문제의 경우 서울시는 차를 타는 관람객을 크게 배려하지 않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승용차인구를 인정하지 않고는 국립미술관은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러면서 문화예술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삭도공사도 재고돼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 국제조형협 서울총회 26일 개막

    ◎27개국서 3백여명 참가 「예술가 지위향상」 주제토의/북한은 불참… 30일부터 대규모 국제전도 미술올림픽이라 일컬어지는 국제조형예술협회(IAA)제13차 정기총회및 대표자회의가 26일부터 12월1일까지 서울 올림픽파크호텔에서 열린다.1954년 창립이래 지난 66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이후 동양권에서는 두번째가 되는 이번 행사에 세계27개국의 미술인 3백여명이 참가한다. 한국미술협회(이사장 박광진)가 IAA한국위원회 역할을 맡아 운영하는 이번 총회의 주제는 「예술가 지위에 대한 유네스코 권고안」.즉 예술가의 지위향상을 위해 유네스코권고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놓고 전세계 미술인들이 자료와 정보,의견을 교환하는 자리다.그러나 이번 총회는 IAA한국위원회측이 예상했던 북한미술인 초청이 수포로 돌아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지난 89년 마드리드총회에서 북한측이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한데 따라 우리측은 올초부터 꾸준히 그들의 참가를 요청해왔으나 냉담한 반응끝에 불발로 끝나 버렸다. 한편 이번 총회와 함께 행사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대규모 국제전을 오는 30일부터 12월6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개최한다.여기에는 참가국 60개국의 대표작 60점과 국내작가 작품 3백30점이 전시된다. 또 한국을 찾은 각국 미술인들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천안아라리오미술관등을 들러보게 함으로써 한국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국제조형예술협회는 유네스코본부에 사무국을 두고있는 세계유일의 비정치적 미술단체로 회원국은 87개국.3년마다 회원국을 순회하며 총회를 열고 임원개선및 세계미술의 당면문제를 토의하고 있다.
  • 서울현대도예공모전 개막/대상영예 오서운씨등에 시상/서울신문사 주최

    제12회 서울현대도예공모전 개막식및 시상식이 20일 하오5시 서울신문사 1층 서울갤러리에서 베풀어졌다. 이 자리에서 서울신문사 윤형섭사장은 『서울현대도예공모전은 앞으로 도예문화 창출과 도예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계속 발전시키겠다』고 말하고 『작가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게 하는 내실있는 공모전으로 운영하겠다』고 약속했다. 개막식및 시상식에는 올해 대상수상자 오서운씨등 1백여명의 입선자와 가족·친지,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원로도예가 황종구씨,심사위원장 권순형교수(서울대),공모전을 후원해온 한국도자기주식회사 김동수회장등 관계인사들이 참석했다.
  • 미술관 앞마당서 음악·춤의 향연

    ◎국립현대미술관,문화의 달 기념 야외무대축제/가곡·오페라·현대춤의 밤 등 프로 다양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10월 「문화의 달」을 맞아 종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지난 89년부터 한국페스티벌앙상블과 함께 「여름야외무대축제」를 열어온 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는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다양한 공연예술행사를 집중적으로 준비한 것. 「92 가을야외무대축제」는 9일부터 11일까지 하오6시30분에 열린다.지난 여름 완성된 야외조형무대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이 무대를 만들어 기증한 한국페스티벌앙상블이 주최한다. 9일은 「성악의 밤」으로 우리 가곡과 귀에 익은 오페라 아리아가 불려지며 10일은 「금관의 밤」,11일은 「재즈의 밤」으로 가을밤의 정취를 더한다. 최청자툇마루무용단의 「현대미술과 현대춤의 만남」은 10일 하오5시 야외조각장에서 펼쳐진다. 국내 최초로 조각이 무대장치로 등장하는 「무언가 잃어버린 너」는 『내적 허무감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을 조각과 자연공간을 배경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는 안무가 최씨의 작품 설명.이밖에 「시간이 머무는 곳에」와 「아침이슬」이 공연된다. 「슈베르트와 슈만의 사랑노래」를 주제로 한 「작은 음악회」는 17일 하오4시 대강당에서 열린다. 바리톤 김관동이 신수정의 피아노반주로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전곡을 부르며 메조소프라노 김신자는 슈만의 연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전곡과 슈베르트의 「바위 위의 목동」을 부른다.「바위 위의 목동」에서 클라리넷은 김동진이 맡는다.공연문의는 503­9671,7125 국립현대미술관 섭외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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