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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1년만에…6·25戰때 전사 국군 2명 유해 수습해 가족 품으로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 2명의 유해가 61년 만에 가족의 품에 안겼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8일 1950년 입대해 참전했다가 전사한 고(故) 정우상·조용수 하사의 유해를 수습해 신원을 확인하고 이날 고향으로 보냈다고 밝혔다. 고인들은 1950년 추석을 불과 엿새 앞둔 9월 20일 경남 통영에서 함께 입대해 같은 소대에서 8개월간 전투에 나섰다가 이듬해 전사했다. 6·25전사에 따르면 고인들은 입대 후 북진 대열에 합류해 원산탈환 작전에 이어 국군의 선봉으로 함북 청진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4후퇴 뒤 중공군의 5월 공세에 맞섰던 1951년 5월 22일 대관령전투에서 무공을 세우고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대관령전투는 설악산을 방어 중이던 수도사단이 급거 강릉지역으로 남하해 대관령 일대에서 북한군 12사단과 중공군 27군의 진출을 저지한 전투다. 두 사람에게는 1954년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됐다. 고인들의 시신은 당시 수습되지 못한 채 강원 평창의 대관령 전투현장에 남겨졌는데, 지난 5월 17일 유해발굴감식단과 36사단 장병에 의해 인식표(군번)와 함께 수습됐다. 국방부는 인식표에 적힌 군번을 단서로 유가족을 추적하고 유전자(DNA) 감식으로 비교한 결과 두 사람이 수도사단 1연대 3대대 11중대 2소대 소속이었던 것을 확인했다. 53사단장과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이날 지역 행정기관장 및 보훈단체 회원들과 함께 유가족의 자택을 방문해 국방부장관 이름의 신원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해 수습 때 관을 덮은 태극기와 유품을 전달했다. 61년 만에 형의 유해를 찾은 정 하사의 동생 우향(68·경남 양산)씨는 “꿈에도 그리던 형님을 찾았고 이번 추석에 형님을 모시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국가보훈처와 협의해 다음 달 중 국립대전현충원에 형제를 함께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할 방침이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캠프머서 다이옥신 미검출

    화학물질 매몰 의혹이 제기된 경기 부천시 오정동 옛 미군 부대 ‘캠프 머서’(현 한국군 공병부대 주둔) 내 생활용수용 관정에서 유해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TCE)이 기준치 이내로 검출됐다. 28일 부천시에 따르면 지난 16일 캠프 머서 내 관정에서 채수해 경기도 보건환경연구원에 검사를 의뢰한 결과, TCE가 기준치(0.03㎎/ℓ)보다 적은 0.002㎎/ℓ가 나왔고 다이옥신과 테트라클로로에틸렌(PCE)은 검출되지 않았다. 앞서 지난달 30일 부대 주변 9곳의 관정에 대한 수질 검사에선 3곳에서 기준치가 넘는 TCE와 PCE가 검출됐고 나머지 6곳에선 기준치 이내로 나오거나 아예 검출되지 않았다. 9곳 모두에서 다이옥신은 나오지 않았다. 민·관·군 합동조사단은 이날 부대에서 토양 시료를 채취한 데 이어 7월 4∼8일 9곳에서 추가 채취 작업을 할 예정이다. 시료는 서울대와 한국산업기술시험원, 성균관대 등으로 보내져 분석된다. 또 7월 20일∼8월 초 오염 의심 지역에 대한 굴착 작업을 하고 8월 중순 주민들에게 그동안의 조사 상황과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유해발굴은 국민에게 진 빚 갚는 것”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유해발굴은 국민에게 진 빚 갚는 것”

    “국가가 국민에게 60년 전 진 빚을 갚고 있는 의식입니다.” 6년째 유해발굴감식단을 이끌고 있는 박신한 대령은 6·25전쟁에서 묵묵히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배들의 유해를 찾는 국방부 감식단의 업무에 대해 “국가의 이름으로 국민에게 진 빚을 갚고 있는 의식”이라면서 “조금 더 일찍 관심을 보이고 시작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국가가 의무를 요구하기 위해선 당연히 그들의 헌신과 봉사에 끝까지 책임지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며 “감식단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의미의 첫걸음일 뿐”이라고 말했다. 겸사와 달리 그의 표정에선 수년간 지속해 온 감식단에 대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동안 감식단이 발굴한 국군 유해는 무려 5000구가 넘는다. 유전자(DNA) 식별을 통해 유해를 가족의 품에 안긴 일도 있었다. 박 단장은 유해발굴 사업은 법률로 규정된 사업으로 세월이 흘러 유해 발굴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는 “돌아오지 못한 선배들의 원혼이 원할 때 비로소 저희에게 발견 되는 것 같다.”면서 “최근 2년간 엄청난 속도로 유해를 발굴하고 있지만 지금의 전문인력으론 한계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감식단은 총 170여명으로 구성돼 있지만 행정지원을 비롯해 실제 발굴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100명이 되지 않는다. 이 인원을 또다시 8개 팀으로 나눠 전국의 10개 발굴지역을 담당하고 있다. 전문인력도 현역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연기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전우 잃은 기억 떠오를까 한국 방문 주저했죠”

    모든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자신의 공훈을 자랑하고 싶어 하고, 자신이 피 흘려 싸운 한국을 방문하고 싶어 할까. 18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 비에나시에서 만난 미국인 참전군인 앨 오티즈(82)는 그것이 또 하나의 편견임을 일깨워 줬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1년째를 맞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적탄에 사랑하는 전우를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공격에 적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의 비극을 논하는 것은 애당초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모습이 웅변했다. 61년 전 오티즈는 텍사스 앨파소에 사는 평범한 21세의 청년이었다.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모자 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1950년 11월 강제 징집명령을 받는다. 심경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그는 솔직했다. 오티즈는 루이지애나에서 기초 훈련을 거친 뒤 1951년 5월 일본 홋카이도에 배치됐다. 한국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위한 혹한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통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된다. 한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이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때였다. “불확실성과 두려움, 그런 감정이 지배적이었어요.” 그는 그때 감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티즈는 미 45보병사단 179연대 1소대 소대장으로 강원도 철원의 ‘포크찹 힐’(255고지) 전투에 배치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고지의 모양이 포크찹이라는 요리를 닮아서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은 익살스러웠지만, 그곳은 아군과 적군이 빼앗고 빼앗기기를 거듭한 가장 격렬한 전장 중 하나였다. 오티즈 소대는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을 받았다. “북한군은 사납고 잔인했어요. 총도 없이 호미 같은 것을 들고 우리한테 돌진하기도 했죠.” 중공군은 인해전술이었다. “마치 개미떼 같았죠. 수백명이 밀고 올라왔어요. 우리는 대포와 수류탄으로 맞섰어요. 특히 수류탄이 효과가 컸어요. 중공군도 나무로 된 수류탄을 던졌는데 우리는 그걸 다시 주워서 되던지기도 했죠.” 오티즈는 “한번은 중공군 포로를 잡고 보니 12살 정도밖에 안 되는 소년이어서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고 했다. 실탄이 떨어진 양측 사이에 육탄전이 벌어지는 것도 예사였다. 오티즈는 검지와 중지로 적의 눈을 찌른 적도 있고 칼로 적의 목을 벤 적도 있다고 했다. 전쟁은 해맑은 청년을 야수로 바꿔 놓았다. “처음엔 중공군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곁에 있던 전우가 죽는 것을 보면서 피가 거꾸로 솟구쳤죠. 점점 그들을 증오하게 됐어요.” 그는 1952년 7월 박격포 파편으로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됐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전쟁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역한 뒤 참전군인에 대한 정부 지원으로 텍사스주립대에 들어갔고, 국무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버지니아로 이사했다. 그는 결혼해서 1남3녀를 뒀다. 그에게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놀랐다.’는 답변을 겨냥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한국에 먼저 다녀온 참전용사들은 한국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뉴욕같이 변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전우들을 잃은 기억이 떠오를까 봐 두려웠어요. 내가 이끌던 40명 중에 33명이 전사했죠. 그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에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비쳤다. 하지만 부상 미군 단체(Purple Heart)의 일원이었던 그는 이 단체의 방한 요청을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2000년대 초 한국을 찾았다. 반세기 만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흘간 동료들은 판문점 등을 돌아다녔지만, 그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같은 참전용사라도 나처럼 격렬한 전투에 참여한 사람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힘들다.”고 했다. “61년이 지난 지금도 악몽을 꾸죠. 육박전에서 내가 찌른 적이 죽어가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우리가 그렇게 싸웠는데 남북한이 여전히 분단국가라는 점이 걱정”이라면서 “나는 북한이 다시 도발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도와준 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참전용사)한테 뭔가를 보답하려 한다.”면서 여러 차례 고맙다는 말을 했다. 준비해 간 질문 가운데 차마 꺼내지 못한 게 있다. ‘다시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때도 기꺼이 참전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이다. 그 질문을 준비해 간 게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글 사진 비에나(버지니아)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첨단장비 총동원… 60년전 묻힌 ‘무명용사 恨’ 풀어주다

    [한국戰 전사자 유해발굴] 첨단장비 총동원… 60년전 묻힌 ‘무명용사 恨’ 풀어주다

    지난 15일 오전 11시쯤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감성초등학교 뒤 야산. 61년 전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밀려 퇴각하던 국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한, ‘대평리 전투’가 벌어졌던 85고지다. 한낮 32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100여명의 장병들이 야산 일대를 샅샅이 파헤치고 있었다. 군사작전을 하듯 한 손에는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실시간 전달하고, 다른 손에는 금속탐지기나 삽, 곡괭이 등을 들고 산 곳곳을 물샐 틈 없이 훑어가고 있었다. ●전쟁 아픔 간직한 산의 비밀 찾아 이들은 충남 공주 일대의 향토 방어를 담당하는 32사단 기동대대 장병 100명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소속 장병들이다. 20살을 갓 넘긴 앳된 얼굴부터 쉰살을 넘겨 흰머리가 보이는 장병이 함께하고 있지만, 6·25전쟁과의 거리는 멀어 보인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그 날을 기억하듯 비장함과 함께 굳은 신념이 배어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이성현 이병은 “일주일째 발굴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면서 “힘이 든다기보다 (선배들의) 작은 (유해나 유물)하나라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냈다. ●발굴·감식 능력 세계 최고 감식단 한쪽에선 노트북을 이용해 지형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고, 다른 한쪽에서 파낸 흙을 채로 걸러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주경배 발굴과장은 “작은 치아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라면서 “자료를 노트북에 입력해 모두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의 자료 축적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국방부 상설 기구로 유해발굴감식단이 처음 설립된 미국보다 뛰어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며, 발굴 실력도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과 함께 영국, 호주의 국방 무관들도 우리 군의 유해발굴 감식 기술을 배우기 위해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낮 12시가 다 될 무렵 감식단 장병들이 산 정상의 넓은 교통호를 줄과 플라스틱 못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구역을 나눴다. 개인용 참호보다 유해나 유물이 나올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교통호를 정밀하게 탐색하기 위해서다. 얼마 뒤 무전기 너머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집합하라는 연락이 왔다. 장비를 정리해 산 아래로 내려가 32사단 장병들과 감식단 장병들이 뜨거운 태양볕을 피해 감성초교 운동장 한편에 주저앉아 식판을 들고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장병들은 발굴 현장으로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운동장으로 나온 아이들이 줄을 맞춰 이동하면서 군인아저씨들에게 장난스레 ‘충성’하며 거수경례를 했다. 이들의 발굴작업은 오후 4시까지 이어졌지만 특별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개인호 150개를 찾아 파냈을 때 유해 한 구를 찾을 수 있다는 감식단 관계자의 말처럼 무더위 속에 앞으로도 3주간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예정이다. 검게 그을린 장병들의 얼굴이 60여년 전 자유를 지키기 위해 85고지를 넘던 무명 용사의 얼굴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록으로 80%·제보로 20% 발굴 실제로 국군의 유해는 6·25 전쟁 기록에 나온 전투 지역을 유해발굴감식단이 직접 찾아 발굴하는 경우가 80%에 이른다. 지역 주민 등의 제보로 이뤄지는 경우는 20%에 불과하다. 그래서 감식단은 노출된 유해를 신고할 경우 20만원의 포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제보자 일부가 ‘유해파라치’로 변했다는 것이다. 최근 최고 70만원까지만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유해파라치는 또다시 진화해 여러 구의 유해를 나눠 신고하기도 한다. 글 연기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 전사 60년 만에 국립묘지서 만난 형제

    6·25전쟁 당시 열아홉살의 나이로 형을 따라 국군에 입대한 뒤 전사한 동생이 60년 만에 형의 곁에서 영면하게 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지난해 10월 말 강원 양구군 방산면 백석산에서 발굴된 고(故) 이천우 이등중사(병장)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6·25전쟁 당시 자신보다 4개월 전에 전사한 형 이만우 하사의 묘 바로 옆에 안장될 예정이다. 그동안 발굴된 전사자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해 왔지만 국방부는 관례를 깨고 함께 참전한 형제의 영면을 위해 서울현충원에 안장키로 했다. 경북 청도 농부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이 이등중사는 낙동강전투의 막바지인 1950년 9월 초 형이 입대한 지 한달 만에 홀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원 입대했다. 그는 입대에서 전사하기까지 1년여 동안 서울 수복에 이은 북진의 대열에 서서 평양탈환작전 등에 투입됐다. 하지만 1951년 9월 25일 백석산 탈환을 눈앞에 두고 인근 ‘무명901고지’ 부근 능선에서 전사했다. 형인 이만우 하사는 1950년 8월 1사단에 입대해 낙동강전투와 평양탈환전투에 참여했고 1951년 5월 봉일천전투에서 전사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국방부는 이날 육군 53사단장과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을 유가족 자택으로 보내 신원 확인 통지서와 위로패, 유품 등을 전달했다. 유가족들은 먼저 전사한 형 이 하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사실도 모르고 지내오다 이 이등중사의 발굴로 두 형제에 대한 소식을 모두 확인하게 돼 감격은 더 커졌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해병대사령관 “100배 1000배로 갚아주겠다”

    해병대사령관 “100배 1000배로 갚아주겠다”

    “우리 해병을 죽고 다치게 한 대가를 반드시 저들이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100배, 1000배로 갚아 주겠다. 현역과 예비역 모두 뼈에 새기게 반드시 복수하겠다.” 지난 27일 경기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러진 ‘연평도 전투 전사자’ 고(故) 서정우(22) 하사와 문광욱 (20) 일병의 합동영결식은 ‘영원한 해병’의 넋을 기리는 애도로 가득했다. 해병대장으로 치러진 영결식에는 유족과 군·정·관계자 등 1000여명이 참석했다. 서 하사와 문 일병의 약력이 소개되자 유족들은 흐느끼기 시작했고, 참석자들의 어깨도 슬픔으로 들썩였다. 유낙준 해병대사령관은 조사에서 “해병대의 자랑이었던 그대들에게 북한은 어찌 이리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나. 우리 해병대는 두번 다시 참지 않을 것이다.”라고 애도의 뜻과 응분의 대가를 천명했다. 서 하사의 동료 한민수 병장도 추도사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 너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반드시 복수해 주마, 사랑하는 정우야, 광욱아. 서북도의 수호신이 되어 연평도를 지키는 우리들에게 힘이 되어 주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며 애통해했다. 서 하사와 문 일병의 유가족들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눈물을 닦았다. 헌화와 분향에서도 유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굳은 표정이었다. 영결식이 끝나고 시신이 식장을 빠져 나가려는 순간 해병대전우회 양평군지회 김복중(해병 440기)씨가 운구행렬을 멈춰 세웠다. 그는 “고인이 즐겨 불렀던 영원한 해병가를 선창하겠습니다.”며 해병대가를 선창했고, 식장을 메운 해병 장병과 전우회원들은 떠나가도록 합창해 주변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해병 장병과 전우회원들은 못내 아쉬운지 한번 더 해병대가를 합창했다. 시신이 식장을 빠져나와 운구차에 실리자 유족들은 관을 부여잡고 발을 구르며 다시 한번 목놓아 울었다. 서 하사의 부모는 관을 두드리며 “우리 정우 어떡해, 엄마야 엄마야. 이놈아, 아빠다. 정우야. 가지마.”를 외치며 안타가워했다. 문 일병의 유족들도 “우리 광욱이 불쌍해서 어쩌나.”라며 관을 놓지 않아 영결식장은 다시 울음바다가 됐다. 영결식을 마친 두 전사자의 시신은 성남 화장장으로 운구됐고 유족들은 화장로로 관이 운구되자 참았던 눈물을 또 쏟았다. 1시간여 만에 한줌의 재로 돌아온 두 용사의 유해는 대전 국립현충원 사병묘역에 나란히 묻혔다. 천안함 46용사가 함께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곳이다. 서 하사의 아버지는 차마 아들의 유해 위에 흙을 덮지 못한 채 잔뜩 찌푸린 하늘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며 눈물을 삼켰고 어머니도 발을 구르면서 “어떡해”를 되뇌이며 오열했다. 문 일병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유해를 향해 “아이고, 우리 아들”을 목놓아 불렀다. TV로 영결식과 안장식을 지켜본 국민들도 눈물을 흘리며 두 용사가 편히 잠들기를 기원했다. 꿈많던 영원한 해병은 이렇게 영원히 하늘나라로 갔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사설] 탈북 국군포로 6개월 방치 말이 되나

    6개월 전 고향 땅에 묻히려고 병든 몸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은 여든네 살의 국군포로가 있다. 중국의 한국영사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국귀환의 날을 손꼽아 기도하고 있다. 2008년에 이은 두 번째 탈북이었다. 국군포로 김모 이병은 24살의 꽃다운 나이로 강원도 인제 가리봉 전투에 투입됐다. 총상을 입고 전사처리됐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60년 동안 한시도 귀환의 꿈을 접지 않았다. 북한 땅에 사는 가족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탈북하기 전 사망신고까지 했다. 비운의 국군포로가 참다 못해 최근 대한민국 국회와 국방장관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지난 세월의 역경과 귀환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담겨 있는 21장짜리 사연을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편에 전하면서 국회에서 편지 전문을 낭독해 달라고 부탁했다. 국군포로 김씨가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적극적으로 공개키로 결정한 데에는 까닭이 있을 법하다. 6개월을 질질 끄는 한국 정부의 외교력 부재에 희망을 잃었고, 중국 측의 비협조와 북한 측의 집요한 강제북송 요청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난해 두만강을 필사적으로 헤엄쳐 탈출했다가 중국 공안에 붙잡힌 지 6개월 만에 북한으로 북송된 여든한 살 국군포로 정모씨의 일이 생각났을 듯하다. 앞서 2007년 1월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한 국군포로 일가족 9명이 우리 영사관의 업무처리 미숙으로 북송된 사례가 새삼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정부의 소극적이고 안이한 외교력과 대중국 저자세 외교가 몇 명 남지 않은 국군포로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다. 1994년 제1호 국군포로 조창호 예비역 중위를 시작으로 79명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이후 생존 추정 국군포로는 모두 560명이다. 모두 여든 살이 넘은 고령자이다. 중국은 일본과의 영토분쟁이 벌어지자 전방위 압박을 가한 끝에 자국 선장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클린턴·카터 전 대통령을 차례로 북한에 특사로 보내 북한법을 어긴 자국민을 귀환시켰다. 미군은 한국전쟁 때 숨진 미군의 유해를 찾으려고 지금도 한반도 전역을 수색 중이다. 제 발로 탈출한 국군포로 한 명 데려오지 못하는 우리 외교부는 뭐 하는 조직인지, 왜 필요한지 묻고 싶다.
  • [사설] 생활고 6·25 참전용사, 우리 사회가 외면 말아야

    6·25전쟁 60년을 맞아 어제 해외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국전쟁기념재단’ 출범식이 열렸다. 이 재단은 해외 참전용사 후손 중 가정 형편이 어려운 초·중·고등학생들에게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하고 한국으로 유학을 오면 장학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예비역 대장인 백선엽 이사장은 “유엔 깃발 아래 모인 21개국의 젊은 참전용사들의 희생으로 오늘 한국의 자유가 있다.”면서 “우리가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그들이 흘린 피와 땀에 보답해야 한다.”고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이역만리에 있는 한국의 자유를 지키려고 희생된 해외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우리가 보답하는 것은 당연하다. 해외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보답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참전했거나, 자원해서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와 그 후손들에 대해서도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보답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보훈교육원이 6·25 참전용사 19만 7056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월 평균 총소득은 37만원에 불과했다. 올해 1인 최저가구 생계비(5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참전용사의 경우 무공훈장을 받았으면 ‘무공 영예수당’으로 월 15만원을, 참전 사실만 인정되는 참전 유공자는 ‘참전명예수당’으로 월 9만원을 각각 받는다. 상이군경과 무공수훈자는 국가유공자 혜택을 받아 자녀 수업료와 병원비가 면제되고 자녀들은 특별 고용된다. 저리로 대출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전 유공자는 혜택이 별로 없다. 참전 유공자의 84%는 “6·25 참전이 자랑스럽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이 보답을 바라고 6·25전쟁 때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는 이들과 후손들에게 어느 정도 보답할 의무가 있다. 국민의 의무만 강조하고 국가의 의무는 소홀히 한 게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지난해 수출 9위, 국내총생산(GDP) 16위로 성장한 것은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했다. 보훈(報勳)은 말 그대로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 국가보훈처는 있지만 참전용사의 공훈에 보답하는 노력은 미흡했다. 금전적으로 참전용사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 것과 함께 정부는 국군포로 송환과 전사자 유해를 찾는 데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애국심은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다.
  • [19일 TV 하이라이트]

    [19일 TV 하이라이트]

    ●병영체험 진짜 사나이(KBS1 오전 10시30분) 조종사 구조 및 민간인 인명구조 임무를 맡고 있는 최정예 공군 특수부대 제6탐색구조비행전대. 연기파 배우 유태웅이 대한민국 공군 0.1% ‘항공구조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권투를 통해 슬럼프를 극복하고 신인왕 타이틀까지 거머쥔 그가 극한의 훈련을 이겨내고 민간인 최초로 항공구조사 명예수료장을 거머쥐었다. ●결혼해주세요(KBS2 오후 7시45분) 고향 친구들과 생일잔치 중 언제나처럼 자식 자랑에 신이 난 종대. 특히 최근 교수가 된 맏아들 태호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지만 자랑과 달리 정작 생일상은 초라하기만 하다. 자식 셋은 모두 각자의 일로 바빠 참석하지 못하고 아내 순옥과 며느리 정임, 동생 종남만이 그의 생일을 축하해 준다. ●민들레 가족(MBC 오후 7시55분) 노식은 지원과 명석의 대화를 녹음하고, 명석은 정말 지원이 자신을 버리려 한다는 걸 깨닫는다. 상길의 건설현장을 찾아간 숙경은 상길이 힘들게 일하는 모습에 화를 내고, 여자가 있다는 의심까지 하게 된 숙경은 상길과 말다툼을 벌인다. 한편 효동은 필남이 보고 싶은 마음에 필남의 집 앞을 서성인다. ●스타 주니어쇼 붕어빵(SBS 오후 3시20분) 진품명품 왕종근, 이번엔 ‘고자질’이다. 그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사연은 무엇일까. 독설대왕 김구라, 알고 보니 엄살도 ‘세계 대왕급’. 조금만 아프면 아들 동현군에게 질리도록 하는 소리가 있다는 데 그것은 무엇일까. MC 김국진, 8살 지웅군에게 당하다. 그를 당황하게 만든 사건은 무엇일까. ●돌아온 판관 포청천(OBS 오후 10시20분) 두위의 연락을 받고 간 당진은 드디어 숨겨 놓은 곡식을 확인한 후 포두 주강을 하옥시킨다. 포청천이 제련소에서 돌아오면서 정원에게 주강을 넘기자 모두들 의아해한다. 한편 마한은 제련소 주변에서 시체 40여구를 발견한다. 불안감을 느낀 정원은 방태사에게 서신을 보낸 후 이곤에게 급히 달려간다. ●김수로(MBC 오후 9시45분) 자객에게 암살당한 조방이 죽기 전 수로에게 친아들이 아니라는 말과 수로가 지녔던 청동목걸이를 전한다. 부상을 입은 도치는 이바가와 정견비에게 천군후사의 습격을 알리고, 이진아시와 아효는 흑표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한편 정견비는 구간들을 회유해 이진아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 ●한국전쟁 3부 폭풍(KBS1 오후 8시)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한국군은 제대로 방어할 새도 없이 무너졌다. 북한의 기습, 미아리 방어선 붕괴, 한강교 폭파. 6월28일 새벽 5시 인민군의 서울 입성. 개전 3일 만이었다. 북한은 한 달 만에 경상도의 일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장악했다. 인민군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남하할 수 있었을까.
  • 추락 링스헬기 실종자 홍승우대위 시신 발견

    지난달 15일 전남 진도 해상에서 추락한 링스헬기 실종자 홍승우(25) 대위의 시신이 발견됐다. 해군 3함대는 2일 오전 11시13분쯤 헬기 동체가 발견된 지점(진도군 독거도 동남쪽 약 10㎞) 인근 해저 37m 지점에서 조종석과 함께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홍 대위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수색 작업 중이던 해군 소해함 고창함은 소나(바닷속 물체를 탐지하는 음향장치)를 이용해 조종석을 확인했으며, 구조함 광양함의 해난구조대(SSU) 잠수사들이 동원돼 홍 대위의 시신을 확인하고 인양했다. 홍 대위의 유해는 전남 함평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된 뒤 화장 절차를 거쳐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진도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문성근 “작은 연못에서 한국영화 미래 봤다”

    문성근 “작은 연못에서 한국영화 미래 봤다”

    문성근(57)은 미안하다고 했다.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제대로 역할을 해냈는지 항상 가슴이 쓰리다고 했다. “후배들을 볼 면목이 없다. 우리 영화판을 지켜내는 데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담배 한 대를 꼬나물고 긴 한숨을 내쉰다. 새달 15일 개봉하는 영화 ‘작은 연못’으로 돌아온 문성근을 만나봤다. 무엇이 그를 고개 숙이게 만들었을까. ●작은 연못은 전쟁 그 자체에 대한 반성 작은 연못. 전쟁 영화다. 1950년 7월. 한반도 허리에 있는 충북 영동군 산골짜기 대문바위골. 미군이 패하면서 전선은 읍내까지 내려오고 마을에 피란령이 내려진다. 주민들은 피란길에 오른다. 미군이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7월 땡볕 아래 꾸역꾸역 남하하는 사람들. 하지만 믿음과 달리 그들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고 병사들은 이들을 향해 난사를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총구가 왜 자기들에게 향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쓰러져 간다. 한국 현대사의 씻을 수 없는 상처 ‘노근리 학살 사건’이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던 우리 농민들. 하지만 그들은 피를 흘려야 했다. 그렇다. 전쟁은 끔찍했다. 종족 싸움이든, 종교 분쟁이든, 이권 혈투이든, 이데올로기 대립이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성근은 말한다. “충돌이 일어나면 민간인이 가장 많이 죽는다.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정당성은 없다. 그게 작은 연못의 메시지다.” 문성근은 원래 노근리 참사에 관심이 많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AP통신 기자는 “노근리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은 동료 기자(AP통신 기자)가 왜 한국에서 노근리 참사를 다룬 영화가 나오지 않는지 의아해하더라.”고 전했다. 때마침 이상우 감독이 노근리 영화를 만든다고 했다. “이 감독 자신도 실향민이라 그 누구보다 분단의 현실에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거라 믿었다.” 노근리 유족들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다. 참사 때 눈이 먼 할머니 이야기, 부모를 다 잃고 혼자 살아온 사람의 사연….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화를 찍었다. 송강호, 문소리, 유해진 등 특급 스타들이 출연료를 받지 않고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동지애였다고 했다. “제작비가 부족하다 보니 도움이 절실했다. 자연히 배우들도 찾기 어려웠고. 뜻밖에 충무로를 이끌어가는 간판 배우들이 나서줬다. 특히 출연배우 중의 한 사람인 김뢰하의 공이 컸다. 자신의 친정인 대학로 연극계에 ‘좋은 영화를 만든다. 도와달라.’고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모두 흔쾌히 와 줬다.” 영화가 ‘반미’(反美) 느낌이 난다고 슬쩍 찔렀더니 문성근은 이내 진지해진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라더니 “정말 그렇다면 그 사람은 편협한 관점을 지닌 것”이라고 점차 목소리를 높인다. “공격하는 미군들도 고민한다. 그들도 평생 무거운 짐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문제는 전쟁이다. 총을 쏜 사람이 중국군이든, 북한군이든 뭐가 달라지나. 누구를 대입해도 똑같다. 그 잔혹성을 말하고 싶었다.” ●송강호·문소리 등 톱스타들 노개런티 자진합류 문성근은 지금의 영화판에 아쉬움이 크다. 책임 의식도 느낀다. 1999년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재탄생했을 당시 그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어떻게 하면 한국 영화산업을 부흥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까지 한국 영화가 전성기를 누렸을 당시, 그 전성기의 좋은 산업 구조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후배들에게 못내 미안하다. “대형 배급사가 밀려 들어오자 영화인의 힘이 약해졌다. 이걸 막지 못했다. 결국 영화인은 계약 관계에서도 항상 약자가 돼 버렸다. 산업구조 안에서 하부구조로 전락해 버렸다. 힘의 균형이 무너져 버린 거다.” 그는 항상 영화인들이 뭉쳐 그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영화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배급사가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했다. 하지만 잘 안 됐다. 영화인들이 안주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대형 배급사의 힘이 너무 강했다. “결국 그 문제점이 지금 드러나고 있다. 영화계의 다양성이 죽어가고 있지 않나. 영화인들은 이런 현실에 질려 버렸다. 그래서 다들 힘이 빠졌다.” 하지만 문성근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문성근은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가는 과정 속에서 한국 영화의 미래를 봤다고 했다. 영화인들의 구애 속에 국내 최고의 컴퓨터그래픽(CG) 회사인 ‘모팩 스튜디오’에서 무보수로 작업을 해줬다. 물론 개봉 뒤 수익은 흥행성적에 따라 나눠 갖는다. 촬영장비 업체들도 선뜻 나섰다. 덕분에 40억원 규모의 영화를 10억원에 해결했다. “작은 연못을 찍을 때 후배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좋은 대본을 가지고 영화인들 스스로 투자를 받고 이렇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우리가 집단으로 붙어보자. 무슨 영화인들 못하겠냐.’고 말하면서.” ‘4대강 사업’ 반대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문성근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은 많다고 했다. “정부를 믿고 싶다. 하지만 더 시급한 사안이 있지 않을까. 아직도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무상급식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다. 그걸 먼저 생각해 주길 바랄 뿐이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한국전쟁 60년 이산가족의 아픔과 치유

    한국전쟁 60년 이산가족의 아픔과 치유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린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새달 3일부터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막을 올리는 ‘포옹 그리고 50년’은 1979년 창단한 극단 춘추가 선보이는 100번째 정기공연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이산가족의 아픔과 그 아픔을 가족의 사랑으로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작품은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남자가 50년 만에 탈북해 남한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전쟁으로 헤어진 아내는 그를 잊지 못한 채 새로운 남편과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한다. 극은 역사의 희생양이 된 세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각자 내면에 잠재된 갈등이 표출되면서 절정을 맞는다. 극단 춘추의 김영무 작가와 문고헌 연출이 호흡을 맞췄다. 영화 ‘기막힌 사내들’, ‘할렐루야’, ‘한반도’ 등에서 친숙한 이미지로 사랑받은 최종원을 비롯해 정진, 서권순 등 드라마와 영화, 연극무대를 오가며 활동해온 관록 있는 중견배우들이 출연한다. 40~50대 중·장년층 관객들이 갖고 있는 리얼리즘 연극에 대한 향수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대장치도 전통적인 수법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해 편안함과 예술적인 만족감을 높였다. 문고헌 연출은 “비극적 역사 속에서 희생당해야 했던 세대가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어떻게 극복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자 했다.”면서 “외적인 풍족함만을 추구하는 요즘 시대에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휴먼 드라마를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5월2일까지. 1만 5000원~2만원.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신기하軍! 시대상 반영한 전문주특기병 ‘눈에 띄네’

    신기하軍! 시대상 반영한 전문주특기병 ‘눈에 띄네’

    국군수도병원에 근무하는 이선호(21) 이병은 지난해 말 입대했다. 그의 주특기(번호 2112)는 ‘영현등록병’이다. 수도병원 내 단 2명만 갖고 있는 것으로 군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병과다. 이들은 군에서 사고나 질병 등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면 매장과 화장, 소지품 기록 업무 등을 담당하는 이른바 ‘장의 전문병’이다. 이 이병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사회에서 절대 해 볼 수 없는 일이란 생각에 영현 등록병에 지원했다.”면서도 “장의업무가 남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몰라 가족들에게만 진상을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이 이병처럼 우리 군에는 알려지지 않은 특이한 주특기를 갖고 근무하는 현역병이 많다. 특히 전문 주특기들은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면서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 병사는 주특기 번호 1524의 ‘땅굴탐지병’이다. 대학에서 지질학과 등 관련 전공 3년 이상 수료자가 지원할 수 있다. 6·25 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관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유해발굴기록병’이 생기기도 했다. 이들은 대학에서 고고학과나 고고미술사학과, 고고인류학 등을 2년 이상 수료하고 유골 발굴 3개월 이상의 경력도 갖고 있어야 지원이 가능하다. 군내 비리척결을 위한 수사 전문병도 있다. 수사전문병은 분야별로 특화가 되어 있다. 회계수사병, 건축 및 설계수사병, 마약수사병, 사이버수사병, CC(폐쇄회로)TV 등 영상자료 수사병이 그들이다. 온라인 게임의 활성화로 공군은 ‘e-스포츠병’을 뽑았다.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테란의 황제로 불린 임요환 선수다. 또 ‘동아리 지도병’은 이른바 ‘B-Boy병’으로 최근 세계적으로 춤실력을 인정받은 우리나라 춤꾼들을 특기병으로 뽑고 있다. 공군에는 과거 관제탑에 공중감시기록병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2000년 이후 사라졌다. 관제체계가 전자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이 직책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6·25전사자 추정 유해 3구 낙동강 격전지 함안서 발굴

    6·25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의 격전지로 꼽히는 경남 함안군에서 국군 장병으로 추정되는 유해 3구가 발굴됐다. 육군 39사단은 10일 함안군 대산리 동지산과 소포리 일대에서 6·25 전사자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과 정강이뼈, 팔뼈 등 부분 유해 3구를 지난 9일 발굴했다고 밝혔다. 지난 2일 개토식을 하고 올해 유해발굴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발굴한 것이다. 국방부 유해 발굴감식단은 유해와 함께 소총탄, 수류탄, 지뢰, 철모, 전투화 등 유품 123점도 찾아냈다. 발굴감식단은 유품 등으로 볼 때 아군 유해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정밀감식을 해야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발굴된 유해는 39사단 함안대대내 유해보관소에 안치됐다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으로 옮겨져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다. 39사단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제2작전사령부 발굴팀은 지난 2일부터 함안군과 창녕군 일대의 6·25 전쟁당시 낙동강 전투 격전지에서 유해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만남보다 원칙… 前정권과 차별화

    만남보다 원칙… 前정권과 차별화

    이명박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속도조절’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다. 회의가 끝나갈 즈음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요즘 남북 정상회담 관련 얘기들이 언론에 나오는데, 물어볼 수밖에 없다.”면서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바라봤다. 그러자 이 대통령이 “통일부 장관이 답변할 정도로 진행되는 것이 없다.”면서 대신 말을 꺼냈다. 이 대통령은 최근 관측성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뒤 “남북정상회담은 원칙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지난달 29일 BBC 인터뷰에서 “아마 연내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고 밝힌 뒤 이르면 3~4월쯤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오자 서둘러 ‘진화(鎭火)’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일부의 시각도 경계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는 정상회담이 필요하지만, 조급한 모습을 보이면 역이용 당할 우려가 있는 만큼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원칙’은 정상회담 의제에도 적용된다. 핵심인 북한 핵문제는 물론이고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국군유해 발굴 등이 의제로 다뤄지지 않으면 굳이 김 위원장과 ‘만남을 위한 만남’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원칙 없는 남북정상회담은 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일관된 대북정책과도 맥을 같이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는 있을 수 없다.”고 명확하게 못박은 대목이다. 지난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일부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뒷거래’ 논란 등 회담의 대가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만큼 이 같은 전례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청와대 박선규 대변인은 “과거 남북정상회담의 이면(裏面)이 나중에 공개된 것을 보면 뒷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면서 “정상회담을 조건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식으로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대북 옥수수지원 등 인도적인 지원은 지금도 이뤄지고 있는 만큼 정상회담과 인도적인 지원은 별개의 사항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이날 외신기자 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이 연내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한 것과 관련,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을 얘기한 것”이라며 “(정상회담이) 반드시 연내에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실질적으로 북핵문제에서 구체적 진전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바람직한 정상회담은 북핵문제와 인도적 문제, 즉 국군포로·납북자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성수 김정은기자 sskim@seoul.co.kr
  • [이대통령 신년연설] ‘남북 상시대화기구’ 마련 제안

    이명박 대통령이 4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한층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 주목된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국정연설에서는 “북한은 더 이상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구태를 벗고 협력의 자세로 나와야 한다.”면서 대북 경계심을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데 그쳤다. 반면 올해는 1982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 처음 거론된 이후 현재까지 표류 상태인 ‘남북 상시 대화 기구 창설’, 2007년 2차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합의한 뒤 남북관계 악화로 이행되지 못한 ‘국군 유해 발굴 사업 추진’ 의사 등 남북 간 협력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 대통령이 올해 예년과 달리 남북관계 부분에서 적극적인 입장을 표명한 데에는 올해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경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올해 북핵 문제 흐름이 긍정적으로 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고, 북측도 이미 신년공동사설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라고 분석했다. 특히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조건이자 회담의 의제로 북핵 문제와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를 꼽고 있기 때문에 향후 국군유해 발굴 사업 추진에 북한이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할 경우 정상회담 개최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방부도 이날 이 대통령의 연설 이후 남북관계 진전 등 여건이 조성되는 대로 국군 유해발굴 사업을 우선적으로 북측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북한의 조속한 6자회담 복귀를 촉구했는데, 이는 6자회담 재개가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필요조건’ 중 하나임을 북측을 향해 분명히 밝힌 것이란 분석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李대통령 “남북관계 새 전기 만들어야 북한내 국군유해 발굴 추진”

    李대통령 “남북관계 새 전기 만들어야 북한내 국군유해 발굴 추진”

    이명박(얼굴) 대통령은 4일 “올해에는 북한과 대화를 통해 북한에 묻혀 있는 국군용사들의 유해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진 신년 국정연설에서 “올해는 6·25 60주년이 되는 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 대통령은 “올해에는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전기(轉機)를 만들어 내야 한다.”면서 “남과 북 사이에 상시적인 대화를 위한 기구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상시적인 기구란 이 대통령이 2008년 4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 제안했던 서울과 평양에 각각 두는 연락사무소를 뜻한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제안은 북한이 새해 들어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우회적으로 밝히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성사여부가 주목된다. 이 대통령은 연설 후 기자실을 방문, 간담회를 갖고 “(남북이) 서로 욕 안하는 것만 해도 오래간만이다. 긍정적 변화의 일부분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남북정상회담이 북한에서 개최될 수도 있느냐.’는 질문에는 “콘텐츠(내용)가 문제이지, 나머지는 협상하기에 달린 것”이라며 “(그동안) 남북정상회담은 늘 우리쪽에서 목을 매 하던 상황이었으나 (북한이 적극적인 것으로) 바뀌었으니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교육개혁과 관련, “새해에는 교육개혁이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국민들에게 믿음이 가는 교육개혁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경제살리기에 대해서는 “2010년 이명박 정부의 첫번째 국정과제는 누가 뭐라 해도 경제를 살리는 것이고 그 핵심은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며 “상반기에는 비상경제체제를 끝내고, 하반기에는 서민들도 경제회복의 온기를 체감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정치선진화 개혁과 관련해 “행정구역 개편은 이미 일정에 오른 만큼 자율통합에 나선 지방자치단체는 적극 지원할 것”이라면서 “선거제도 개혁도 올해 반드시 완수해야 할 과제”라고 밝혔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김정일-원자바오 회동] 北 中우호 2차 핵실험前으로 복원

    │베이징 박홍환특파원│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방북을 계기로 중국과 북한의 우호관계가 북한의 제2차 핵실험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회복된 양상이다. ●지난 5월 핵실험후 관계 악화 중국은 지난 5월 북한이 제2차 핵실험을 실시하자 강력한 비난과 함께 고위급 교류를 중단,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으며 북한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결의안에 찬성한 중국을 비난하는 등 북·중 관계는 전례없이 악화됐었다. 우호관계의 복원은 원 총리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극진한 환대가 방증한다. 김 위원장은 4일 오전 평양 순안공항으로 직접 영접을 나간 데 이어 오후에는 함께 자신이 직접 각색을 지시한 북한판 ‘홍루몽’을 관람했다. 원 총리에게 활짝 웃으며 먼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5일 오후에도 함께 집체극 아리랑을 관람한 뒤 단독으로 만나 북핵문제 등을 논의했으며 만찬도 함께했다. 이틀간 모두 다섯 차례나 한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중국 측도 적극적으로 북한을 끌어안는 모습이다. 중국은 5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 원 총리 등 서열 1~3위 지도자 공동명의로 북한의 김 위원장 및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일 내각총리와 북·중수교 60주년 축하 서한을 주고받았다. ●김·원총리 5차례나 ‘한자리에’ 후 주석 등은 서한에서 “양국의 앞 세대 지도자들이 손을 맞잡고 만들어 키워낸 선린우호협력 관계를 중단없이 전진시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대 규모의 방북단을 이끌고 있는 원 총리도 큼지막한 선물 보따리를 내놓았다. 북한 측과 ‘경제원조에 관한 교환문서’, ‘경제기술협력협정’, ‘교육기관간 교류협조 합의서’, ‘중국 관광단체의 조선관광 실현에 관한 양해문’ 등을 체결했다. 단둥의 랑터우항과 남신의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압록강대교 건설 합의가 특히 눈에 띈다. 중국으로부터 매년 수십억달러 규모의 석유와 식량 등을 무상원조받고 있는 북한 입장에서는 원조 규모 및 교역량 확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당초 신압록강대교 건설은 동북지방 개발에 나선 중국 측이 몇년전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북한이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었다. ●北도 中 지렛대 삼아 원조 기대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이 같은 양국 간 해빙무드와 관련, “중국 지도부가 몇달 동안 북한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했지만 결국 끌어안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 같다.”며 “북한과 미국의 직접대화 움직임 등 정세변화도 중요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북한 입장에서도 중국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움직이면서 중국의 원조를 챙기는 두가지 효과를 노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원 총리는 방북 이틀째인 이날 오전 평남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를 찾아 헌화함으로써 북측에 오랜 혈맹관계임을 상기시켰다. 평양 동쪽 90㎞ 거리에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열사묘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 등 134명의 중국군 유해가 묻혀 있다. stinger@seoul.co.kr
  • “北과 대화위해 원칙 훼손 안된다”

    “北과 대화위해 원칙 훼손 안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1일 북핵 문제와 관련,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와 원칙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입장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충남 계룡시 계룡대에서 열린 제61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우리 군이 강하고 대응태세가 확고할 때 오히려 남북대화와 평화는 앞당겨질 것”이라면서 이같이 말했다. ●비효율·무사안일 과감히 버려야 이 대통령은 “북한은 2012년을 ‘강성대국 완성의 해’로 내세우고 핵 문제 등으로 한반도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며 “우리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군은 한반도 안보 수호는 물론 성숙한 세계국가, 글로벌 코리아를 뒷받침하는 ‘고효율의 다기능 군’으로 발전해야 한다.”며 “변화하는 세계와 안보 환경에 적극 대응하는 노력을 잠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이어 “비효율과 낭비, 무사안일과 같은 낡은 관행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또 “우리 군은 굳이 싸우지 않고도 전쟁을 억지할 수 있는 태세와 능력을 갖춰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리 군은 ‘강한 군대’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은 ‘강한 군대’의 기본 요건으로 ▲엄정한 군 기강 확립 ▲공정하고 투명한 병역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병영문화 등을 꼽았다. ●6·25 참전용사 4명에 무공훈장 이 대통령은 “정부는 전쟁 희생자의 유해발굴을 계속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릴 것이며 전공을 세운 분들도 계속 찾아내 그 공훈을 기릴 것”이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에 대한 예우에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이날 국군의 날 행사는 ‘선진강군! 국민과 함께 미래로 세계로’를 주제로, 이 대통령 내외와 백선엽 예비역 대장 등 창군 원로와 국가유공자, 장병대표, 시민, 주한미군 등 3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 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무공을 세우고도 훈장을 받지 못했던 예비역 육군 이등중사 도연청(78)옹 등 참전용사 4명에 대한 충무 및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식후행사에서는 특전사의 특공무술 시범과 집단 전술강하, 한·미 장병과 일반 스카이다이버 동호회원이 함께하는 고공강하가 펼쳐졌다. 코브라(AH-1S), 블랙호크(UH-60) 등 21대의 헬기와 T-50으로 새로 단장한 블랙이글스 및 KF-16 등 전투기 31대의 축하비행도 진행됐다. 이종락 안동환기자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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