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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공산주의운동’ 현대사 권위자 이정식 교수 별세

    ‘한국공산주의운동’ 현대사 권위자 이정식 교수 별세

    한국 공산주의의 기원 및 발전 과정에 관한 저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널리 알려진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지난 17일(현지시간) 필라델피아 근교 시니어타운(요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90세. 193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6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대(UCLA)를 졸업하고 1961년 UC 버클리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서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 교수로 일했고 고려대 연구교수,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고인이 로버트 스칼라피노 UC 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는 1973년 미국에서 출간돼 다음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았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1986년 출간됐다. 이후 ‘한국민족주의의 운동사’(1989), ‘이승만의 청년시절’(2002),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2003), ‘대한민국의 기원’(2006), ‘여운형’(2008), ‘21세기에 다시 보는 해방후사’(2012) 등을 펴냈다. 1990년 제1회 위암학술상, 2012년 경암학술상, 2018년 인촌상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우명숙씨와 딸 영란·지나, 사위 로버트 루소, 앤드 곽이 있다. 오는 28일 오전 10시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주관의 장례식을 거쳐 필라델피아 인근 조지 워싱턴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 [정승민의 막론하고] 만약 8·15를 쟁취했다면/북유튜버

    [정승민의 막론하고] 만약 8·15를 쟁취했다면/북유튜버

    구한말부터 시작하는 대하소설 ‘토지’는 일제의 패망을 전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간도로 내몰린 주인공 최서희는 평사리의 땅과 집을 다시 샀지만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남편은 감옥에 있고 아들은 학병으로 끌려갔다. 아무리 재산을 불리고 복수를 했더라도 일왕의 신민으로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만세! 우리나라 만세! 아아 독립만세! 사람들아! 만세다!” 그 소리에 서희는 자신을 휘감았던 쇠사슬에서 풀려났다고 느낀다. 가문의 복권은 국권의 회복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8·15는 단순한 해방이 아니라 광복이다.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 정부를 수립한 일을 경축하는 뜻에서다. 그러나 반세기의 고난이 해소됐다고 생각한 순간에 억압된 원망은 좌우 분열과 대립으로 급격히 분류(奔流)했다. 예상치 못해 준비가 부족한 탓이었을까. 그때 조선 지도자나 지식인들은 일제의 연전연승 선전에 마취됐다. 친일 문인 서정주에 따르면 당시 영화관마다 맥아더가 일본군 포로가 되어 끌려다니는 영화를 상영했단다. 이럴 바에야 한민족은 내선일체로 2등 국민이라도 되는 것이 낫다며 지조를 꺾은 이들이 상당수다. 그들에게 8·15는 돌발상황이었다. ‘도둑같이’ 왔으며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선물이었고 ‘거짓말’ 같은 깜짝쇼였다. 이른바 일왕의 ‘옥음방송’이 라디오를 통해 한반도에서도 흘러나왔지만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현실에 모두가 조용했다. 서울의 침묵은 몇 시간 뒤에 깨졌다. 거리엔 태극기가 물결치고 환호성이 넘쳐 났다. 국내에 있던 일본인 80여만명은 보복을 두려워했지만 이날 이후 조선인이 살해한 일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뜻밖의 해방은 곧 분단의 시작이었다. 수십년간 강요된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난 민족의 정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혼란은 쌓여가고 갈등은 중첩됐다. 모순과 분쟁의 도가니인 정치판에서 전초전이 시작됐다. 오른쪽을 대표하는 송진우는 임시정부 추대론을 내세우며 조선총독부의 행정위원회 구성안을 거절했다. 반면 여운형은 특별한 업적이 없고 기반이 약한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하루 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소련과 미국의 분할점령이 확실시되자, 총독부는 행정권 이양 약속을 뒤집고 경찰서와 방송국을 다시 빼앗았다. 얼마 전 대선 후보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 모두 점령군이다. 포고문의 표현과 통치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럴 만하다. 왼쪽으로 기울었던 정치지형에서 적군(赤軍)은 미군보다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다. 좋은 해방군이든 나쁜 점령군이든 본질은 외세다. 미·소의 세계전략은 충돌과 절충을 거치면서 일본이 아니라 엉뚱하게 한반도를 갈랐다. 자력으로 일궈 내지 못한 민족해방은 결국 분단과 내전의 판도라 상자가 됐다. 역사에 조건문은 무의미하지만 해방을 앞둔 결정적 시기에 항일투쟁 자원을 총집결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임정이 조직한 광복군은 연대 규모에 못 미쳤다. 이승만은 아메리카의 망명객이었다. 의열단의 갈래인 조선의용군도 중국 공산당의 테두리에 속했다. 조선공산당의 책임자 박헌영은 지방의 기와공장에 몸을 숨겼고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였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어떤 인물이나 세력도 지속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한반도에서 일본과 교전한 승전국의 지위를 성취했다면 8ㆍ15는 한민족 전체의 광복으로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한 에너지는 동족끼리 투사되어 상잔으로 소진됐다. 대중이 감격하고 환희하던 76년 전 그날, 다음을 생각해야 할 지도자들의 머리가 조금만 차가웠다면 어땠을까. 국제 질서의 변화에 민감하고 민족 역량의 결집에 유능했다면 어땠을까. 쟁취하지 못한 독립과 볼썽사나운 자중지란은 전쟁이라는 괴물을 깨어나게 했다. 지금은 나아진 것일까.
  • 유인석 의병장, 2.8m 길이만큼 절절한 상소

    유인석 의병장, 2.8m 길이만큼 절절한 상소

    강원 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추진위)가 광복절을 사흘 앞둔 12일 강원 춘천시 효자동 사무실에서 일제강점기 의병장으로 활약한 의암 유인석 선생이 1896년 고종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상소문 초고를 공개했다. 가로 2.8m, 세로 30㎝ 크기의 상소문은 최근 의암 선생의 증손인 유연창 옹의 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상소문에는 “나라가 변란에 직면했으니 원수를 갚지 않으면 신하라 할 수 없사옵니다.” 등 구한말 의병을 이끈 항일운동 지도자인 의암 선생의 결의와 애국심이 담겨 있다. 춘천 연합뉴스
  • “나라가 변란에 직면했으니…” 의암 유인석 선생 항일 상소문 초고 첫 공개

    “나라가 변란에 직면했으니…” 의암 유인석 선생 항일 상소문 초고 첫 공개

    “나라가 변란에 직면했으니 원수를 갚지 않으면 신하라 할 수 없사옵니다.” 일제강점기 의병장이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의 항일정신이 담긴 상소문 초고가 공개됐다. 강원도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추진위)는 제76회 광복절을 사흘 앞둔 12일 강원 춘천시 효자동 사무실에서 의암 선생이 1896년 고종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상소문 초고와 유품을 공개했다. 상소문은 최근 의암 선생의 증손 유연창 옹의 집수리 과정에서 발견돼 후손들이 추진위에 전달한 것으로, 고친 흔적이 있어 상소를 올리기 전 초고로 분석된다. 가로 2.8m, 세로 30cm 크기의 상소문은 의암이 구한말 의병을 이끈 항일운동 지도자로서의 결의와 애국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따른 고종의 단발 등 국운이 기울자 전국 각지 의병들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다음 해 쓰였고, 의암 선생의 각오와 의병운동의 당위성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의암은 상소문에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해 ‘재앙을 당하셨다’라고 적었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 발표된 단발령에 따라 황제가 단발을 시행한 것을 두고 ‘치욕을 받으셨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또 이 같은 상황을 ‘나라가 금수와 같은 지경에 빠졌다’고 판단하고 ‘나라가 변란에 직면하였으니 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신하라 할 수 없으며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처단해야 한다’는 결의를 강변했다. 의암의 증손 유연창 옹은 춘천시 남면 가정리 자택을 수리하던 중 상소문 초고를 발견해 이날 추진위에 기탁했다. 남귀우 추진위 사무국장은 “이날 공개한 상소문 초고본은 조선 말 큰 학자가 바라본 나라의 위기와 그 속에서 의병 운동을 일으켜 싸워야 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귀한 사료”라면서 “이를 기꺼이 기탁해준 유연창 옹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추진위는 앞으로 건립될 강원도독립운동기념관에 상소문 초고본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의암 유인석 선생은 구한 말 대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던 중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붓 대신 칼을 잡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의병 3000여 명을 지휘하는 의병장이 된 의암은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일본 앞잡이가 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고 중국 요동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산과 들을 누비며 목숨을 걸고 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해 최후 저술인 ‘도모편’을 저술하다 74세 나이로 생을 마쳤다.
  •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800여 점 공개

    구한말 선교사 알렌이 남긴 문서 3800여 점 공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구한말 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이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기록한 문서 3869여 건을 데이터베이스(DB)로 구축해 공개한다고 10일 밝혔다.이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건양대학교 김현숙 교수 연구팀에 3년간 연구비를 지원해 정리한 것으로, 의료 선교사로 알려진 알렌의 활동이 의료분야를 넘어 문학, 경제, 외교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보여준다.미국인 의료 선교사 알렌은 개항 초기인 1884년 9월부터 1905년 6월까지 조선에 체류했다. 그는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 경제인, 외교관, 정부 고용인, 고종의 참모, 번역가, 작가 등 여러 직업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에 관여했다. 이때 생성된 다수 문서를 ‘알렌 문서’라고 부른다.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관의 전권공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고종의 최측근으로 정권핵심에 있으면서 주미한국공사관 설치, 춘생문 사건, 아관파천, 독립협회, 하와이 이민 등 한국 근대사의 핵심적인 사건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번에 공개하는 문서는 알렌이 1924년 뉴욕 공립도서관에 기증한 자료를 전량 수집해 연구자나 일반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DB로 만든 것이다. 주한미국공사관 서류, 각종 공문서와 지도, 사진, 신문 기사 등을 비롯해 알렌의 일기와 서신, 메모, 원고 등 개인 문서도 포함돼 있다. 백두산 천지와 동암금광 사진, 평안도 운산광산 채굴권 수정 계약서, 미국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고종에게 알렌의 귀국을 지시한 사실을 알리는 서신, 저서 ‘한국에 대한 기록(Notes on Korea)’ 등을 볼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측은 “그가 남긴 방대하고 세세한 자료는 한국 근대사의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동시대 서양인이 남긴 자료 중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또한 주제의 다양성 측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우수한 컬렉션이다”라고 평가했다. 해당 자료는 한국학진흥사업 성과포털 누리집(waks.aks.ac.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 서울시의회 지식재산 특위, 시민 교육·소상공인 지원 주력

    서울시의회 지식재산 특위, 시민 교육·소상공인 지원 주력

    서울특별시의회 지식재산 특별위원회(위원장 추승우, 더불어민주당·서초4)는 지난 4일 제1차 간담회를 갖고 KAIST 지식재산전략 최고위과정 박진하 운영위원 등과 함께 서울 시민의 지식재산 개발 및 보호를 위한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이날 간담회 모두 발언에서 박진하 운영위원은 “선진국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함께 15년 전부터 지식재산이 부를 창출하는 주요 수단으로 인식되어 그에 대한 투자·지원·교육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는 데 반해, 한국은 아직 지식재산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서울시의회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지식재산 활성화에 나선 것은 구한말 쇄국정책에 맞서 독립협회를 결성한 것만큼이나 혁신적인 활동”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후 토론 과정에서는 지식재산 활성화를 위해 서울시 차원에서 진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이 제시되었고, 추승우 위원장은 지식재산 특위의 주요 활동 방향으로 “입법 차원에서 소상공인 상표권 등록 지원 조례 제정, 교육 차원에서 특허청장, 특허법원장 등 전문가 초청강연을 중심으로 하는 포럼 개최, 제도개선 차원에서 시민교육 활성화를 위한 지식재산 교육센터 설립 및 지식재산위원회의 지식재산처 격상 건의에 집중하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날 간담회에는 추승우 위원장, 이동현 부위원장(더불어민주당·성동1)을 비롯해 박기열(더불어민주당·동작3), 박순규(더불어민주당·중구1), 양민규(더불어민주당·영등포4), 임종국(더불어민주당·종로2), 채유미(더불어민주당·노원5), 황인구(더불어민주당·강동4, 이상 가나다순) 의원이 참가했으며, 지식재산 특별위원회는 2021년 7월 2일부터 2022년 1월 1일까지 6개월간 활동할 예정이다.
  • [문소영 칼럼] ‘추월의 시대’ 대통령은/논설실장

    [문소영 칼럼] ‘추월의 시대’ 대통령은/논설실장

    유권자는 선거에서 선택지가 많아야 좋다. 즉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훌륭한 후보를 경쟁 속에서 골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년 대선 예비후보는 풍년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 정세균 전 총리 등 후보가 6명이다. 국민의힘에는 외부 영입인사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2강을 형성한 가운데 내부에서는 홍준표 의원·유승민 전 의원, 구원투수설이 나도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있다. 국민의힘과 합당 문제로 힘겨루기를 하는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살아 있는 카드다. 아직 무소속인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도 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주권자의 뜻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대리인의 문제가 제기된 탓에 현대정치에서는 정치 신인이 높은 프리미엄을 얻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정치신인이었다. 현재 대선주자 중에는 윤 전 총장과 최 전 원장, 김 전 부총리 등은 ‘정치 신인’이고, 이 지사를 제외하면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두 명의 사정기관장 출신이 중도 사퇴 후 대선에 뛰어들었는데, 군복을 벗자마자 대통령이 된 사례도 두 차례나 있는 점을 고려하면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그보다는 정치 신인인데도 낡아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산업화·민주화를 거쳐 고속도로를 잘 닦아 놓았더니 검은 매연을 뿜어대며 도로를 역주행하는 것이다. 선진국을 뒤쫓던 추격의 시대를 마치고, 선진국 추월의 시대를 개척하는 한국의 유권자들은 최소 이류는 되는 듯한데, 정치는 여전히 삼류의 때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이 유권자를 따라잡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은 심각하다. 역주행의 대표주자는 대선후보 선호도 1위 윤 전 총장이다. 그는 “(돈)없는 사람은 부정식품보다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가 부정식품과의 전쟁을 벌였고, 이명박 정부가 없는 사람들이 살기 좋도록 생필품 52개 품목의 가격관리를 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그의 발언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주의가 의문의 일패를 당했다고나 할까. 페미니즘과 저출산을 엮은 발언이나, 코로나19 초기에 대구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민란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발언, 주 120시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쉬자는 발언 등도 추월의 시대라는 시대정신과는 크게 어긋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최 전 원장도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고 규정하고 지역적 차이를 주장했는데 부적절하다. 가물가물하겠으나 ‘최저임금 1만원’과 같은 정책은 2017년 대선에 출마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를 포함해 주요 후보가 내놓은 대선공약이었으니 심각한 후퇴가 아닐 수 없다. 유 전 의원의 ‘여성부 폐지’ 주장도 대통령직인수위 시절에 여성부 폐지를 추진하다고 포기한 이명박 정부를 떠올리게 했다. 여권 대선주자 1위를 달리는 이 지사의 발언들도 유감이다. 이 전 대표의 선전을 기원하는 차원이었다고 해명했지만, 망국병인 지역주의를 연상시키는 ‘백제 발언’은 곤란했다. 지역주의 극복은 20년이 넘은 어젠다가 아닌가. 또 이 지사 측은 최근 백제 발언을 보도한 언론을 고발한다는데 5공화국 시절도 아니고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막으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압축성장 탓에 한국의 유권자가 지지하는 가치는 다양한 편이다. 구한말을 사는 분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개발독재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 주요국 20(G20)시대에서 G7+3국 시대까지 펼쳐진 탓이다. 그러다 보니 비록 시대퇴행적 발언을 하더라도 특정한 시대에 갇힌 유권자 20만~30만명의 열렬한 환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유권자는 그 발언에 지지를 철회하거나 스윙보터로 전환할 것이다. 대선은 정당에서는 정권 획득이겠으나 유권자에게는 한국의 미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떤 내용을 담아 전진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정책과 아이디어들이 경쟁하는 공간이자 선택의 시간이다. 대통령이 되고자 한다면 마땅히 정치·경제·사회적 양극화를 완화할 정책을 제안해야지, 현 정부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를 겨냥한 비판만으로는 크게 부족하다. 선진국을 따라잡던 패스트 무버의 시대는 끝났다. 추월의 시대에 한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긍정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경선 통과에 열을 내다가 본선에서 유권자로부터 영원히 외면받을 수 있다.
  •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은밤 흐르는 자작나무 숲, 속세 비킨 접신의 땅, 신록 예찬 시인의 숲

    옛날옛적 대한민국에 ‘BYC’가 있었다. 오지의 대명사였던 경북의 봉화·영양·청송을 아울러 이르는 표현이다. 이 지역의 영어 표기에서 앞글자만 따 만들었다. 옛날옛적엔 오지의 동의어가 ‘낙후’였다. 요즘엔 다르다. ‘청정’이 동의어다. 숨막히는 도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의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오지에도 사람은 산다. 풍경도 깃들어 있다. 그 풍경이 무척이나 오지다. ‘BYC’의 가운데 고을, 영양으로 가는 길이다. 여정의 모토는 ‘끝까지 본다’이다. 영양에서도 한발 더 들어간 오지가 목적지다.나라 안에 ‘전설적인’ 오지 이야기들이 꽤 많이 전해온다. 그 가운데 영양 수비면은 ‘오지 이야기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하지 싶다. 보통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거나,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혹은 조선시대에 관군을 피해 숨어 살던 곳 정도로 표현한다. 영양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수비면 끝자락의 오무마을 사람 하나가 설렁설렁 장 보러 나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사실을 알게 됐단다. 이전까지는 전쟁 난 것도 모르고 지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사실과 허세가 헷갈릴 지경이다. 설령 전쟁 터진 걸 알았다 해도 이 정도의 오지였다면 남의 동네 싸움박질 정도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자작나무 숲으로 ‘핫 플레이스’가 된 죽파리가 바로 그 수비면에 속한 마을 중 하나다. 죽파리 자작나무 숲은 아주 넓다. 검마산의 능선 두엇이 자작나무 일색이다. 숲의 면적은 발표하는 곳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양군에서 ‘자작나무숲 권역 관광자원화 계획’에 포함시킨 면적은 약 31ha다. 산자락에 축구장 40개 크기 정도의 자작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숲은 1993년에 조성됐다. 이 일대가 솔잎혹파리 공격을 받아 황폐화되자 대안으로 자작나무를 심었다. 그 덕에 나이(평균수령 30년)도, 크기(평균 높이 20m)도 비슷한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게 됐다. 자작나무 숲은 차분하면서도 화사하다. ‘자작자작’한 하얀 수피와 ‘초록초록’한 이파리들이 동화 속 세계를 펼쳐 놓았다. 숲에 들면 휴대전화가 먹통이 된다. 그러니 오래전 한 통신사의 광고 카피처럼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 두셔도 좋겠”다. 자작나무 숲 하면 흔히 강원 인제의 원대리 자작나무 숲을 떠올린다. 모양새로만 보면 사실 둘은 매우 비슷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이 덜 개발됐고 더 불편하다는 정도다. 수도권 접근성에서는 원대리가 앞선다. 한데 죽파리엔 이를 상쇄할 강력한 자원이 하나 더 있다. 들머리에서 자작나무 군락지로 이어지는 2㎞ 정도의 숲길과 계곡이다. 숲길은 가파르지 않다. 동네 뒷산을 걸어도 이보다는 더 숨이 차지 싶다. 나무들이 빼곡한 숲길엔 만지면 묻어날 듯한 초록빛이 한가득이다. 길 아래 계곡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시원의 골짜기다. 수량은 많지 않아도 탁족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영양군에서 앞으로 이 일대에 힐링센터, 전기차 등 친환경 시설들을 들이겠다는데, 부디 최소한에 그치길 빈다. 이곳은 ‘불편’이 더 잘 어울린다.자작나무 숲에서 수하계곡 쪽으로 가면 ‘국제밤하늘보호공원’이 나온다. 국제밤하늘협회로부터 ‘은밤’(Silver Night) 등급을 받은 곳이다. 사막처럼 특수한 환경을 제외하고, 육지에서 가장 투명한 밤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곳이란 의미다. 오래전 표현 방식으로는 ‘별들의 고향’쯤 되려나. 이 일대는 빛 공해가 거의 없다. 모든 조명들은 낮게 땅을 비추고 가로등의 조도도 현저히 낮다. 그 덕에 은하수, 유성 등 밤하늘에 펼쳐지는 별들의 쇼를 관측할 수 있다. 여름철은 은하수의 시간이다. 뜨는 시간이 빨라져 관측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밤하늘보호공원 가운데엔 반딧불이천문대가 있다. 우리 은하계 행성은 물론 멀리 심연의 ‘딥 스카이’까지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을 갖췄다. 장비 없이, 그저 근처 풀밭에 누워 봐도 된다. 천문대의 박찬 연구원은 “사실 별은 맨눈으로 관찰 할 때가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이라고 말했다. 한데 날씨가 변수다. 날이 흐려 별들을 볼 수 없을 때는 반딧불이를 보면 된다. ‘형설지공’의 주인공이자, ‘개똥벌레’라는 애칭으로 흔히 불리는 녀석이다. 단언컨대 반딧불이는 인공의 빛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단 ‘1’의 소리도 없이 연둣빛 불빛을 반짝이며 제 반쪽을 찾아 비행하는 녀석의 모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큼 서정적이다.칠흑같이 어두운 숲에서 반딧불이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검은 하늘에 뜬 초록별이 저와 같을까. 아쉽게도 이번 여정에선 많은 반딧불이와 조우할 수 없었다. 절정의 혼인비행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낱마리라도 개똥벌레가 주는 위로의 힘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보통 초여름에 관찰되는 애반딧불이는 6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볼 수 있다. 한데 올해는 꽃이 그랬듯, 반딧불이 출현 시기도 당겨졌다. 혹시 애반딧불이를 못 만났다면 늦반딧불이를 기대하시길. 8월 중순∼9월 중순에 또 한번 이 일대를 초록별의 세계로 만든다.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가 널리 알려진 반딧불이 관찰 ‘포인트’다. 천문대 바로 앞에 있다.밤하늘공원 일대엔 밀밭이 많다. 장수포천 등의 물줄기를 따라 누렇게 익은 밀밭들이 주르륵 이어져 있다. 박목월의 시구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밀밭 끝엔 ‘비지미골’이 있다. 오래전에 베를 길러 길쌈을 많이 했다는 마을이다. 물론 지금은 흔적도 없다. 그저 대여섯 집 정도만 남은 상태다. 비지미골엔 투방집 ‘김대준 가옥’이 남아 있다. 안내판은 이 투방집에 대해 “200년을 훌쩍 넘긴 집”이라고 적고 있다. 한데 영양군청 누리집엔 1875년 이전에 처음 지어졌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둘 사이에 50년 정도의 간극이 있는 셈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수세대를 이어 온 집인 것만은 분명하다. 투방집은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쌓아 만든 집이다. 영양의 산골마을 주민들이 흔히 살던 가옥 형태다. 벽은 흙 등으로 보강했고 지붕은 짚이나 억새, 굴피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로 덮었다. 김대준 가옥은 ㄱ자형 안채, ㅡ자형 사랑채와 헛간 등으로 이뤄졌다. 건립 당시의 원형이 잘 유지된 상태다. 이 투방집의 안주인이었던 김통분 여사에 따르면 안채의 정지(부엌) 옆은 소가 살던 외양간이었다고 한다. 정지의 온기를 함께 나눌 만큼 소와 사람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이 집의 구조가 말해 주고 있다. ●수하계곡 끝자락 ‘오무마을’ 천문대 앞으로는 수하계곡이 흐른다. 계곡이 많은 영양에서도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으로 소문난 계곡이다. 수하계곡 끝자락에 그 ‘오무마을’이 있다. 오무마을은 고립무원의 마을이다. 사람도 차도 이 마을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온 길을 그대로 달려가는 건 물길밖에 없다. 수하계곡 맑은 물은 산자락을 몇 굽이 돌아 울진 땅의 왕피천과 연결된다. 예전엔 4륜구동 지프로 물길을 몇 번 건너야 마을에 이를 수 있었다. 요즘은 오무마을 앞까지 도로가 나 있다. 예전 같은 불편함은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길이 끊긴 건 마찬가지다. 영양군이 울진 왕피리마을까지 이어진 옛길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환경 당국의 반대를 뚫고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무속인들이 ‘접신(接神)의 땅’이라 여기는 일월산 자락에 주실마을이 있다.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마을 입향조가 살던 호은종택, 지훈문학관 등 볼거리가 많다. 마을 어귀엔 주실 숲이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이 숲을 이룬 곳이다. 주실마을 숲은 ‘시인의 숲’이라고도 불린다. 조지훈의 시비가 이 숲에 있어서다. 만지면 묻어날 것 같은 연둣빛이 일품이다.영양읍에서 가까운 삼지마을은 비단조개를 닮은 독특한 형태가 일품인 마을이다. 마을 앞에 연못 3개가 있다 해서 삼지(三池)마을이다. 마을이 비단조개 모양을 하게 된 건 물길의 변화 때문이다. 옛 삼지마을은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 등과 같은 물돌이동이었다. 한데 물길이 변경되면서 물돌이동엔 더이상 물이 돌지 않게 됐고, 습지를 거쳐 서서히 육지가 됐다. 이를 우각호라 부른다.●산자락에 꽁꽁 숨은 삼지마을 모전석탑 삼지마을에 들면 모전석탑부터 찾아야 한다. 모전석탑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일컫는다. 아름답기로는 산해리의 봉감모전석탑이 가장 앞설 테다. 국보로 지정됐으니 당연하다. 한데 삼지리 모전석탑도 독특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현 탑저리, 탑밑못 등의 지명도 이 전탑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삼지리 모전석탑은 마을 산자락에 꼭꼭 숨어 있다. 이정표가 부실한 데다, 오르는 길도 경사가 급하고 비좁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전탑은 삼국통일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3층이었는데 현재는 2층만 남아 있다.전탑이 독특한 건 기단이 기반암이기 때문이다. 전탑이 선 곳은 절벽 끝자락의 햇살이 스며드는 자리다. 바위 하나가 기반암과 분리돼 있고, 전탑은 그 바위를 기단 삼아 세워졌다. 주변 풍경도 독특하다. 사방이 붉은빛 감도는 바위다. 붉은 절벽 아래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여기서 샘이 솟는다. 이 자리가 바로 신령스런(靈) 동굴(穴)이란 뜻의 영혈이다. 신라시대엔 이 자리에 영혈사(靈穴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연대암이란 작은 암자와 관음전 등이 그 자리에 들어서 있다. 8월이 되면 삼지마을 연못엔 법수홍련이 핀다. 가야시대부터 전해져 온 토종 연꽃이다. 3㎞ 길이의 탐방로를 따라 연꽃을 감상할 수 있다.●구한말 김도현이 사재 털어 쌓은 검산성 이제 검산성을 방문할 차례다. 구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벽산 김도현(1852~1914)이 사재를 털어 세운 성이다. 검산성은 청기면 검산(劒山) 자락을 끼고 들어섰다. 바위 절벽이 있는 동북쪽을 ‘배수의 진’으로 삼고, 나머지 삼면을 성벽으로 둘러쳤다. 읍성이나 산성처럼 오랜 기간 거주하며 농성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기보다는, 여차하면 일본군과 동귀어진하려는 최후의 결전장으로 조성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성의 규모는 작다. 현재 서쪽 200m가량과 남쪽 일부만 남아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성’이라기보다 ‘성터’에 가깝다. 성벽을 따라 길이 나 있다. 그리 알려지지 않았고, 굳이 알릴 생각도 없었던 듯, 성 안은 웃자란 띠 등의 잡초와 밤꽃 향기만 무성하다. 어지간한 산성보다 더 외진 느낌이다. 번다한 곳을 피해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딱일 듯하다. 성 아래 마을에 벽산생가가 있다. 아, 검산성 가는 길에 청기면 소재지는 꼭 둘러보시길. 아주 작은 마을인데도 숭조고택, 청계정 등 볼만한 고택들이 4채에 이른다. 영양의 전통술인 초화주를 만드는 공장도 이 마을에 있다. ■여행수첩 →죽파리 자작나무 숲을 가려면 내비게이션에서 장파마을회관을 찾으면 된다. 죽파마을회관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이다. 여기서 서낭당을 끼고 돌아 1㎞쯤 오르면 바리케이드가 나온다. 차는 여기에 대고 걸어가야 한다. →영양 생태공원사업소(www.yyg.go.kr/np)에서 반딧불이천문대 부근 캠핑장과 수련원, 펜션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천문대 체험 예약도 할 수 있다. →승우여행사에서 영양과 울진 등 경북의 오지마을을 돌아보는 ‘한여름의 시원한 영양·울진 1박 2일 여행’ 상품을 운용하고 있다.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과 반딧불이생태공원,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십이령길) 등을 돌아본다. 봉화군 봉성리의 숯불돼지구이 등 맛집들도 일정에 포함됐다. 특히 봉성 희망정은 숯불돼지구이뿐 아니라 곁들여 내는 반찬도 정갈하고 맛있다. 7월, 8월 두 달간 1·3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각각 출발한다. 승우여행사 누리집(www.swtour.co.kr) 참조.
  • 美서 돌아온 대군주보 등 고종 국새 4점 보물 된다

    美서 돌아온 대군주보 등 고종 국새 4점 보물 된다

    미국과 일본에서 환수한 구한말과 대한제국 국새 4점이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2019년 미국에서 돌아온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와 1946년 일본에서 되찾은 대한제국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국새 4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8일 밝혔다. 국새(國璽)는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되는 도장으로,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인 어보(御寶)와 구별된다. 지금까지 보물로 지정된 국새로는 ‘국새 황제지보’ 등 4점이 있다. 1882년(고종 19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는 높이 7.9㎝, 길이 12.7㎝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가 달렸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하는 데 사용됐다.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됐다. 1897년(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한 문서 또는 임명장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문화재청은 “외세로 인해 혼란했던 시기에 국가의 운명과 수난을 함께 겪은 역사 상징물이자 희소성이 크다는 면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 미국·일본서 환수한 국새 4점 보물 된다

    미국·일본서 환수한 국새 4점 보물 된다

    미국과 일본에서 환수한 구한말과 대한제국 국새 4점이 보물이 된다. 문화재청은 2019년 미국에서 돌아온 고종의 ‘국새 대군주보’와 1946년 일본에서 되찾은 대한제국 ‘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 등 국새 4점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8일 밝혔다. 국새(國璽)는 외교문서나 행정문서 등 공문서에 사용된 도장으로, 왕실 권위를 상징하는 의례용 도장인 어보(御寶)와 구별된다.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국새로는 ‘국새 황제지보’ 등 4점이 있다. 1882년(고종 19년) 제작된 ‘국새 대군주보(大君主寶)’는 높이 7.9cm, 길이 12.7cm 크기로 은색의 거북이 모양 손잡이가 달려 있다. 외교, 고위 관원 위임장, 사령장, 대군주의 명으로 반포되는 법령 등에 날인하는 데 사용됐다.‘국새 대군주보’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19세기 말 급변하던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조선왕실의 고민이 담겨 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고종은 국가의 상징물인 국기(國旗)와 국새를 함께 만들도록 명했다. 당시 총 6점의 국새가 만들어졌지만 ‘국새 대군주보’만 지금까지 유일하게 전한다. 재미교포 이대수씨가 1990년대 말 경매 사이트에서 매입해 소장해오다 2019년 12월 기증했다.‘국새 제고지보’, ‘국새 칙명지보’, ‘국새 대원수보’는 모두 대한제국기(1897~1910)에 제작됐다. 1897년(광무 1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백성에게 알리기 위한 문서 또는 임명장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한일강제병합 6개월 후인 1911년 약탈돼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던 것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이 환수해 총무처로 인계했다. 당시 미군정은 6점을 넘겼으나 6·25전쟁 와중에 모두 유실됐다가 1954년 경남도청 금고에서 이들 3점을 발견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겼다. 문화재청은 “외세로 인해 혼란했던 시기에 국가의 운명과 수난을 함께 겪은 역사 상징물이자 희소성이 크다는 면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 ‘투자왕’ 조준호/ 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일제강점기 ‘투자왕’ 조준호/ 손성진 논설고문

    서울 명동에 사보이호텔이라는 1급 호텔이 있다. 작은 호텔이지만 64년의 역사를 가진 국내 최초의 민자 호텔이다. 이 호텔의 설립자는 조준호(1903~1967)라는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에 ‘투자왕’으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옆 광고를 보면 조준호(趙俊鎬)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준호는 구한말 관료이자 갑부였던 조중정의 맏아들로 일본 주오대를 졸업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1925년 말 경영이 어렵던 일간지 시대일보에 사재를 투자, 발행인으로 취임해 살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후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남미 등지로 여행을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귀국한 조준호는 1930년 조선윌사석유회사에 이어 이듬해 동아이발기구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4년에는 동아증권을 창립해 주식 투자와 중개로 큰돈을 벌었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전략이었다. 투매장에서 주식을 대거 사들여 회복되면 파는 식이다. 코로나 폭락장에 투자한 사람들이 큰 수익을 올린 것과 같다. 2·26사태(1936년 일본 장교들의 쿠데타)로 주가가 폭락하자 한 해에만 20만원(현재 가치 약 200억원)을 벌었다고 한다. 동아증권은 통신망을 잘 갖추고 일본 주식시장 시세를 빨리 전달해 일본 업체들을 물리치고 주식 거래 시장을 장악했다. 1932년 조선취인소(증권거래소)가 설립된 후 광복 때까지 전체 매매고의 10% 이상을 동아증권이 중개했다. 조준호는 인천에 기미취인점(期米取引店)을 열어 쌀 투기를 병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식과 함께 쌀도 투기 대상이어서 선물거래도 할 수 있었다. 광고에 보이는 ‘기미’(期米)는 주식 투자처럼 장기 거래를 목적으로 매매되는 곡물을 뜻한다. 조준호는 1935년 기미취인점을 차려 2년 후 인천 미두(米豆) 시장의 60%를 점령했다. 조준호가 거둬들인 총수익은 300만원(현재 가치 3000억원 이상)을 넘어섰다. 이는 당시 논 6만 마지기(약 1200만평)를 사들일 수 있는 거액이었다. 조준호는 여간첩 김수임의 연인이었고 월북해 북조선 인민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낸 남로당 이강국의 처남으로 이강국의 영국 유학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투자 수익으로 거액을 거머쥔 조준호는 광복 후 부동산투자개발·건설회사인 ‘조선기업’을 설립하고 벽돌 공장을 운영하면서 부동산 업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그 돈으로 유학 시절 보았던 런던 사보이호텔에서 이름을 따 1957년 사보이호텔을 창업했다. 이 호텔은 아들 조원창 회장을 거쳐 손자인 조현식 대표가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사보이그룹은 현재 부동산개발업, 호텔·외식, 문화·콘텐츠, 교육 분야에 10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 안철수, 이준석 당선에 “정치변화, 시대정신이 됐다”

    안철수, 이준석 당선에 “정치변화, 시대정신이 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13일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 당선에 대해 “정치 변화는 시대정신이 됐다”고 평가했다. 지난 11일 이 대표가 당선된 지 이틀 만에 낸 첫 공식 입장이다. 안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경기 남양주의 다산 정약용 생가를 방문한 사진을 올리면서 국민의힘 6·11 전당대회 결과와 관련해 “분명한 것은 기성 정치의 틀과 내용을 바꾸라는 것이고 대한민국이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변화의 요구일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변화의 시작은 제1야당에서 시작됐지만, 변화가 성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은 여야 정치권 모두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며 “정치권 전체가 비전과 혁신 경쟁에 나섬으로써 이번에 분출된 역동적 정치 에너지를 잘 살려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글에서 조선 후기 실사구시를 추구한 실학 운동이 당시 기득권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상황도 200여년 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념·진영 논리에 매몰된 탓에 나라가 퇴행했다고 주장했다. 안 대표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념이 아니라 과학기술의 진보”라며 “낡은 정치체제와 사고를 고집하며 변화와 대전환의 시대에 선제적으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구한말 비운의 과거를 되풀이할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실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이념과 진영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이념과 진영 논리에 함몰돼 냄비에서 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의 운명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실용과 과학기술의 정신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로 대전환을 이룰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1932년 신흥만몽박람회 축하 광고

    [근대광고 엿보기] 1932년 신흥만몽박람회 축하 광고

    1851년 5월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박람회가 열린 이후 구한말 국내에서도 경성박람회 등의 박람회가 개최됐다. 한일병합 후 일제는 식민 지배를 선전하고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박람회를 수시로 열었다. 일제를 미화하는 선전장이자 민중을 현혹하는 이벤트였다. 박람회 말고도 품평회, 물산회, 공진회 등 다양한 명칭이 붙었다. 조선물산공진회(1915), 조선부업품공진회(1923), 조선박람회(1929), 신흥만몽박람회(1932), 조선대박람회(1940) 등이다. 조선물산공진회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려 농업·광업·임업·수산 품들이 임시 건물에 진열됐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개회사에서 “조선 민중에게 신정(新政)의 혜택을 자각하게 하겠다”고 떠들었다. 이 박람회를 열면서 일제는 조선의 왕이 살던 국가 통치시설인 경복궁을 의도적으로 난도질했다. 전체 전각의 3분의2인 4000여칸을 일본 기업가들에게 팔아 치웠다. 세자가 쓰던 비현각은 요정의 별장, 조선의 인재 산실이던 홍문관은 기생집이 됐다. 홍화문, 용성문, 협생문이 헐려 나갔다. 공터가 된 경복궁 앞쪽에는 1926년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세워져 남산에 있던 총독부가 옮겨 왔다. 14년 후 똑같은 시기에 조선박람회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한반도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만주와 중국으로 세력을 확장하겠다는 일제의 정치적 의도를 보여 준 선전장이었다. 원예품, 축산품, 가공수출품, 미술품 등이 비치됐다. 경회루에는 매점과 음식점을 만들고 밤에도 관람객을 받아 경복궁을 유원지로 바꿨다. 더욱이 축사를 지어 소, 닭, 돼지를 전시해 경복궁을 동물 우리로 만들었다. 일제가 만주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직후에 열린 신흥만몽박람회에는 ‘만몽’(滿蒙)이라는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만주에서 더 나아가 몽골까지 지배하겠다는 군사적 야욕이 담겨 있다. 중일전쟁 이후 개최된 조선대박람회와 함께 박람회의 목적이 정치·군사적인 곳을 향해 나아갔음을 보여 준다. 신흥만몽박람회장은 경복궁이 아닌 성동 훈련원두, 즉 광복 후에도 ‘성동 원두’로 불리던 옛 동대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개막 전날인 1921년 7월 21일자를 12면으로 증면, 이 박람회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박람회장을 비행기에서 찍어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실었다. 박람회 축하 전면광고를 실은 광고 속의 선일제물주식회사는 경성일보,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신문용지를 공급하던 제지 회사였다. 광고 상단 오른쪽에는 일장기를, 왼쪽에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상징한다는 만주국 국기가 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토 히로부미 글씨 새긴 한국은행 머릿돌, 안내문 세워 보존키로

    이토 히로부미 글씨 새긴 한국은행 머릿돌, 안내문 세워 보존키로

    한반도 식민지화에 앞장섰다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처단당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정초(定礎)’ 글씨를 새긴 한국은행 본관 머릿돌이 안내문과 함께 보존된다. 26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 근대분과는 최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서울 한국은행 본관’ 정초석(머릿돌) 관리 방안을 심의해 머릿돌을 그대로 두고 머릿돌에 관한 설명문을 담은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했다. 한국은행은 앞서 머릿돌 관리 방안으로 머릿돌 보존과 안내판 설치, 머릿돌을 석재로 덮어씌우는 복개, 머릿돌 철거 후 독립기념관 이전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머릿돌 보존은 결정됐지만, 안내판 문안과 크기는 별도로 소위원회를 꾸려 논의하기로 했다”며 “안내판은 머릿돌 주변 화단에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문화재청이 지난해 12월 만 18세 이상 국민 1000 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머릿돌을 역사적 기록으로 보존하고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52.7%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47.3%였다. 예전부터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으로 거론됐던 한국은행 머릿돌은 지난해 10월 12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토 히로부미 글씨가 새겨졌다는 내용의 사료가 제시되는 등 그 연원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나오면서 본격적으로 처리 방안이 논의됐다. 이에 문화재청은 서체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단 조사를 통해 같은 달 21일 머릿돌 글씨가 이토 친필이라고 발표했다. 일제의 조선 경제 침탈 보여주는 역사적 흔적한국은행 머릿돌의 ‘정초’ 글씨를 이토가 쓴 것이라는 주장은 예전부터 전해졌고 2016년에도 문제가 제기되다가 한 사료가 발견되면서 근거가 명확해졌다. 당시 제시된 간행물은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이 1918년 발간한 영문잡지 ‘조선과 만주의 경제 개요’(Economic outlines of Chosen and Manchuria)로, 현재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 버클리) 도서관이 소장 중인 이 책 6쪽에 ‘이 건물의 정초석은 이토 공작의 친필로 만들어졌다’는 설명이 담겨 있다. 구한말 조선에 진출해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던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은 을사조약 이후 관련 업무를 대한제국의 ‘구(舊) 한국은행’으로 이관했고, 한일 강제병합 이후 구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것이 해방 후 1950년에 설립된 대한민국의 한국은행의 전신이다. 한국은행 본관 건물은 1907년에 착공해 1909년 정초 후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된 건축물이다. 일제는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구 한국은행→조선은행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들 은행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경제 침탈을 자행했다. 광복 후인 1950년 대한민국의 한국은행이 설립된 뒤에도 이 건물은 본관 건물로 계속 쓰이게 됐다. 이후 1987년 신관이 건립되면서 현재는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서울광장] 한미 정상회담과 국익 극대화/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한미 정상회담과 국익 극대화/오일만 논설위원

    한미 정상회담이 21일 워싱턴에서 열린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한미 정상 간 전화 통화와 기후정상회의에서의 화상 회담은 있었지만 대면은 처음이다. 한미 정상회담 테이블에 오를 의제는 한반도 비핵화와 한미동맹 강화, 코로나19 백신 협력, 쿼드(Quad) 참여, 반도체·배터리 공급망 구축 협력 등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된다. 모두 국내 정치·경제적 상황은 물론 동북아 정세, 나아가 미중 글로벌 패권 경쟁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대 사안들이다. 초미의 관심사는 한반도 평화와 직결된 한미 대북정책의 조율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시각은 과거 행정부의 대북 접근이 북한의 핵개발만 진전시켰다는 문제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런 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대북정책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외교와 함께 제재와 압박을 병행한다는 것이 큰 틀이다. 미국은 이를 세심하게 조정된 실용적 접근법(calibrated practical approach)이라고 명명했다. 북한이 핵폐기를 위한 특정한 조치에 상응해 단계적 제재 해제를 고려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관련 조치들을 하나씩 쪼개 접근하려는 북한의 ‘살라미 전술’에 대한 대응법이다. 새 대북정책의 얼개는 과거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와 트럼프의 일괄타결 중간쯤에 위치하는 느낌이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이 새 대북정책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북한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특별한 반응은 없는 이유다.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 이후에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자체가 좌초 상태다. 새로운 대북정책 역시 북한의 반응 여하에 따라 전략적 인내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전향적인 분위기도 있다. 미국은 최근 ‘북한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CVIA’(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포기)를 언급하는 등 다소나마 대북 유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싱가포르 선언을 계승하면서 실용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외교적 협상 및 단계적 접근을 강조하는 정책 기조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일부 반영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오바마ㆍ트럼프 등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더 구체적인 대북정책이 필요하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적극적 대화 유인책을 담은 대북정책이 도출돼야 한다. 북한도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ㆍ화성15형) 시험발사 이후 약 3년 6개월 동안 핵실험과 ICBM 시험을 중단한 상태다. 추이를 관망하는 북한이 대화와 대결의 변곡점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북한은 적대시 정책 철회의 징표로 제재 완화나 최소한 한미 군사훈련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대화의 출발점을 위해 종전선언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은 아직까지 완강한 태도다. 북한은 지금 장기간 유엔 대북 제재와 코로나19 사태가 겹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려스러운 것은 바이든 행정부 내에 매파의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북한이 새 대북정책에 반발하면 단기 붕괴론에 입각한 대북 ‘고사작전’의 유혹에 빠져들 수도 있다. 북한은 이미 문을 걸어 잠그는 자력갱생의 전략을 수립했고, 중국과의 밀착 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비하는 듯하다. 미중 패권전쟁이 가속화할수록 북한의 전략 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도다. 비핵화 이외에 이번 백신 수급과 쿼드 참여 문제도 초미의 관심사다. 비핵화와 코로나19 백신 공급에서 미국과의 공조는 필수적 요소다. 반면 미국은 대중국 견제를 위해 쿼드 참여 등 한국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인 중국은 우리의 최대 무역국이란 점에서 참으로 복잡한 고등함수나 다름없다. 한미동맹 지상주의나 과도한 중국 공포증, 모두 국익을 위해선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10대 경제대국이자 세계 7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다. 구한말 주변국에 휘둘렸던 약소국이 아니다. 우리의 국익에 부합된다면 당당하게 요구하고 설득하는 능동적 자세가 중요하다. 국익 극대화 관점에서 어느 한쪽에 편승해 다른 한쪽을 적대시하는 것은 하책이다. 우리의 요구 사안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접점 찾기가 필수라는 의미다. 중국 견제 성격이 짙은 쿼드에 거리를 두는 대신 코로나19 백신 협력과 기후변화 대응 등 글로벌 현안 분야에서 협력하는 쿼드 전문가 그룹에 참여하는 절충선을 택할 필요가 있다. oilman@seoul.co.kr
  • “조선 독립 나선 고종 외교고문 데니, 관저 터에 표석이라도”

    “조선 독립 나선 고종 외교고문 데니, 관저 터에 표석이라도”

    “데니 고문이 머물렀던 관저 자리에 작은 표석이라도 세워 그의 활동을 기억하면 좋겠다. 데니 태극기와 조선 외교 상황에 대한 역사 찾기 의미도 있다.” ●미국인 변호사 데니, 청나라 내정 간섭 비판 송명호(70)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35년 전인 구한말 고종의 외교자문을 맡았던 오언 데니(1838~1900) 고문이 조선에 거주했던 ‘관저’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인 변호사인 데니는 1886년 3월~1890년 4월 18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조선을 떠날 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2008년 태극기 중 처음 국가등록문화재(제382호)로 지정됐다. 데니는 청나라가 천거했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는 ‘청한론’을 저술했고 1888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자주 독립에 나섰다가 파면됐다. ●송 위원, 기록에 없던 135년 전 관저 첫 발견 송 위원은 각종 자료를 통해 고종이 데니를 가까이했고, 4년간 조선에 거주했는데 어디에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궁금증을 갖고 나홀로 조사에 나섰다. 각종 문헌과 미국인이 기록한 데니 관련 문서에도 관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히 1981년 데니 태극기 기증 당시 후손들이 우리 정부에 보낸 편지와 동봉한 낡은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해소됐다. 송 위원은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복원한 결과 관저가 경희궁 끝자락에 위치했고 주변에 국기 게양대도 설치돼 있었다”며 “궁내 숙소를 제공한 점에서 데니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저와 게양대는 귀국 후 일제가 총독부 관사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송 위원은 당시 관저 위치가 서울 종로 새문안로3길 15 동원빌딩 자리로, 게양대는 새문안로5길 19 로얄빌딩으로 추정했다. 그는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것보다는 구한말 조선의 외교 전면에 섰던 이방인을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구한말 고종 외교자문 데니 관저 자리에 표석이라도…”

    “구한말 고종 외교자문 데니 관저 자리에 표석이라도…”

    “데니 고문이 머물렀던 관저 자리에 작은 표석이라도 세워 그의 활동을 기억하면 좋겠다. 데니 태극기와 조선 외교 상황에 대한 역사 찾기 의미도 있다.”송명호(사진·70)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35년 전인 구한말 고종의 외교자문을 맡았던 오언 데니(1838~1900) 고문이 조선에 거주했던 ‘관저’를 최초로 확인했다고 공개했다. 미국인 변호사인 데니는 1886년 3월~1890년 4월 18일 고종의 외교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조선을 떠날 때 고종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2008년 태극기 중 처음 국가등록문화재(제382호)로 지정됐다. 데니는 청나라가 천거했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비판하는 ‘청한론’을 저술했고 1888년 조러수호통상조약 당시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자주 독립에 나섰다가 파면됐다.송 위원은 각종 자료를 통해 고종이 데니를 가까이했고, 4년간 조선에 거주했는데 어디에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궁금증을 갖고 나홀로 조사에 나섰다. 각종 문헌과 미국인이 기록한 데니 관련 문서에도 관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우연히 1981년 데니 태극기 기증 당시 후손들이 우리 정부에 보낸 편지와 동봉한 낡은 사진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궁금증이 해소됐다. 송 위원은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복원한 결과 관저가 경희궁 끝자락에 위치했고 주변에 국기 게양대도 설치돼 있었다”며 “궁내 숙소를 제공한 점에서 데니에 대한 고종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저와 게양대는 귀국 후 일제가 총독부 관사를 지으면서 사라졌다. 송 위원은 당시 관저 위치가 서울 종로 새문안로3길 15 동원빌딩 자리로, 게양대는 새문안로5길 19 로얄빌딩으로 추정했다. 그는 “보물이나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것보다는 구한말 조선의 외교 전면에 섰던 이방인을 기억하자는 취지”라고 밝혔다. 태극기 연구가인 송 위원은 태극기의 아픈 역사를 강조했다. 국기가 제정·공포된 것은 1883년이지만 당시 국기 제작 방법을 명시하지 않아 다양한 형태의 국기가 사용됐다. 현재의 태극기는 1949년 10월 15일 ‘국기 제작법 고시’를 통해 정해졌는데 당시 파악된 태극기만 48종에 달했다. 송 위원은 “일제가 국기 사용을 막다 보니 국민들이 듣기만 했을 뿐 태극기를 본 적이 없어 발생한 현상”이라며 “태극기 역사를 알릴 박물관이 필요하지만 6·25전쟁 등을 거치며 많은 유물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구한말 첫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 출생지는 경기 구리”

    “구한말 첫 여성 의병 지도자 윤희순 출생지는 경기 구리”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의병 지도자인 윤희순(1860∼1935년) 선생이 경기 구리시 수택동 검배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경기 구리시는 6일 구리문화원이 최근 진행한 윤희순 출생지 관련 연구 결과를 근거로 이같이 주장했다. 윤 선생의 출생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그동안 출생지가 각종 기록에 구리와 서울로 양분되어 있었다. 다만 상당수 자료가 구리를 출생지로 인정하고 있으며 일부는 서울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구리문화원은 지난해 말부터 문중 자료 분석과 종친회·후손 면담 등의 방법으로 윤 선생의 출생지를 연구했다. 이를 통해 선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택동 검배마을에 살았던 것을 확인했다. 구리문화원 향토사 연구진은 “조선 말기 시대적 상황으로 미뤄 윤 선생의 정확한 출생지는 검배마을로 봐도 무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 자문위원인 황선익 국민대 교수는 “해주 윤씨 문중 세거지와 세보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어 조사 결과에 상당한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으며 향토사 연구 차원을 넘어 학계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윤 선생은 1876년 16살 때 결혼해 시댁인 춘천에 살았으며 1895년 전국적인 항일운동인 을미의병 때 시아버지인 유홍석 의병장을 따라 독립운동에 나섰다. 선생은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당시 가사만 전담했던 여성에게 구국운동을 일깨우고 항일운동 참여를 독려하는 데 앞장섰다. 1907년에는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을 조직해 취사와 세탁 등을 지원하거나 탄약제조소를 운영했으며 때로는 남장하고 정보 수집에 나서기도 했다. 국권을 강탈당한 1911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 선전, 독립자금 모금, 민족학교 설립 활동 등을 펼쳤고 1915년에는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 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했다. 국내외에서 40년간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그는 일본 헌병에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5년 숨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안승남 시장은 “이번 연구 보고서를 통해 윤희순 의병장의 출생지를 근거 자료를 통해 밝힌 것은 항일 의병운동과 독립투쟁으로 나라를 되찾은 자랑스러운 역사를 빛내기 위한 역사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암흑시대 견딘 민족정신 4월 1일, 오늘 깨어난다

    암흑시대 견딘 민족정신 4월 1일, 오늘 깨어난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4월 1일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강당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이 열렸다. 1918년 발족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단체 서화협회가 우여곡절 끝에 3년 만에 개최한 첫 전시회이자 공공을 대상으로 한 근대적 미술전의 시초였다. 서화협회는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을 비롯해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위창 오세창,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등 13인이 뜻을 모아 창립했다. 첫 서화협회전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취지에 따라 안평대군,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작품들과 서화협회 회원 및 비회원 작품 등 100여점이 출품됐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조선미전보다 1년 앞선 새로운 시도에 세간의 관심이 쏟아졌다. “만자천홍(萬紫千紅·온갖 빛깔의 아름다운 꽃)”, “꿈속에 있는 조선 서화계를 깨우는 첫소리”라는 언론 호평이 이어졌고, 전시 사흘간 관람객 2300명이 다녀갔다. 암흑의 시대 속에서도 전통서화의 맥을 잇고, 이를 후대에 계승하고자 애썼던 100년 전 민족 서화가들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예화랑에서 1일 개막하는 ‘회(洄)-지키고 싶은 것들’이다. 서화협회 발기인들과 서화협회에서 그림을 배운 이당 김은호, 소정 변관식 등 서화가들의 작품 38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어려운 시기에 서화계의 발전과 후진 양성에 매진했던 서화협회 13인의 열정을 기억하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먼저 눈길을 끄는 건 안중식이 1910년대 중엽에 그린 수묵담채 ‘성재수간’(聲在樹間)이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소리가 들린다’는 뜻이다. 바람소리에 책읽기를 멈춘 선비의 그림자가 미닫이 문에 비치고, 마당에 나와 선 동자는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는 이 그림에 감명받아 1993년 ‘밤의 소리’를 작곡했다. 전시장에 흐르는 가야금 선율이 바로 그 곡이다. 그림과 음악이 한 공간에서 공명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고사(古事)에 등장하는 여덟 마리 준마를 소재 삼은 조석진의 ‘팔준도’는 세필선으로 묘사한 말들의 움직임이 생생하다. 1909년 대한민보에 시사만평 삽화를 연재한 한국 최초의 만화가 관재 이도영이 부채에 그린 선면 산수화 ‘도원문진’은 이상향을 묘사한 작품이다. 조석진·안중식·김응원·김규진·이도영이 나눠 그린 10폭 병풍과 나수연·김응원·김규진이 합작한 8폭 병풍은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하나인 듯 어우러지는 조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이번 전시에는 사진가 이상현이 현대미술 작가로 유일하게 참여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기록 사진을 바탕으로 진실과 허상을 뒤섞은 미디어아트와 사진 작업 8점이 소개된다. ‘조선의 봄’은 1906년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가 함경도 길주에서 촬영한 산골장터 흑백사진에 분홍색 복사꽃을 덧입힌 작품이다. 국권을 침탈당한 조선의 엄혹한 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미디어아트 ‘낙화의 눈물’은 조선총독부가 촬영한 경복궁 강녕전 사진과 이난영의 노래를 결합했다. 100년의 역사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이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전시는 오는 24일까지.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온양온천 ‘신정관’ 개관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온양온천 ‘신정관’ 개관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경주, 해운대와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던 온양온천의 역사는 약 1300여년 전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남 온양은 백제시대에는 탕정(湯井),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 조선시대에는 온창(溫昌), 온천(溫泉)으로 불렸다. 조선 태조는 승려들을 시켜 원(院·임시 행궁)을 지었고 세종도 1433년 행궁을 짓고 안질과 피부병을 치료했다. 지명이 온양으로 바뀐 것은 세종이 이곳을 찾은 1442년이다. 그 후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의 임금이 이곳을 찾아 목욕과 치료를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 있다. 악성 피부병을 앓던 세조가 이곳을 찾은 1464년 행궁 뜰에서 차고 맑은 샘물을 발견하고 신정(神井)이라 명명했고 성종은 신정비(神井碑)를 세웠다. 정유재란 때 왜군에게 소실된 행궁은 현종 때 재건됐다. 처음에는 흙으로 계단을 만들 정도로 소박하게 지었다가 효험을 본 후 둘레 533m나 되는 큰 규모로 다시 지었다. 내정전이 16칸, 외정전이 12칸, 탕실이 12칸이었다. 왕을 수행한 인원이 900~7500명이나 됐으니 부대시설도 클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일제는 다시 행궁에 손을 댄다. 1904년 예종석이라는 인물과 결탁한 일본인들은 불량배들을 동원해 행궁을 탈취, 관광지로 개발했다. 아미토 도쿠야 등 일본인들은 온양관이라는 일본식 목욕탕을 지으며 행궁 전각을 철거했고 그 자재들을 건축에 썼다고 한다. 1926년 사설 철도회사인 조선경남철도주식회사가 온양관을 인수해 유원지로 개발했다. ‘겨울 모르는 온양온천…’이라는 제목의 광고에 나오듯이 조선경남철도는 1928년 11월 새 건물을 지어 개관하면서 ‘신정관’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광고에는 경성에서 부산행 열차를 타고 환승 없이 온양온천역에 도착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경성에서 온양온천역까지 3시간 40분이 걸리는 것으로 돼 있다. 광고를 보면 당시 신정관은 가운데에 3층 건물이 있고 주변에 일본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광복 이후 온양온천과 신정관의 소유권은 우리 정부로 넘어왔다. 당시 교통부 육운국은 신정관을 온양철도호텔로 바꾸어 운영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호텔은 파괴됐고 1953년 민간으로 이양돼 1956년 양식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그 뒤 여러 차례 개축을 한 뒤 오늘날의 특2급 온양관광호텔이 됐다. 신정비는 충남 문화재자료 제229호로 지정돼 호텔 안에 지금도 남아 있다. 온양관광호텔 앞에는 8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신정관 온천탕이 있다. 오래전 목욕탕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신정관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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