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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의 시대별특성 조명/독립운동연,12일 학술심포지엄 개최

    독립기념관 부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택휘)는 「한국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을 주제로 제8회 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엄을 12일 상오 10시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연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정제우 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이 「구한말 국권회복운동의 특성」,윤경로 한성대교수가 「1910년대 독립운동의 특성」,이균영 동덕여대교수가 「20년대 독립운동의 특성」,김영범 서울대강사가 「30년대 독립운동의 특성」,한시준 단국대교수가 「40년대 전반기 독립운동의 특성」을 각각 발표한다.올해 주제는 독립운동의 태동과 성립,발전과 심화의 과정을 시간적 기준을 통해 조명하기 위한 것이다. 또 김상기 충남대교수와 신용하 서울대교수,이현희 성신여대교수,김호일 중앙대교수,이연복 서울교대교수가 토론자로 나선다. 이번 심포지엄은 독립운동사연구소가 「광복 50주년 기념 학술행사」의 하나로 지난 92년부터 4개년 계획으로 진행해오고 있는 것.92년에는 「한국근대사에서 일제의 침략논리와 실상」,93년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지역적 특성」을 주제로 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독립운동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독립운동과 민족통일」이라는 2개의 대주제로 나누어 대규모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0417­60­0400.
  • 1910년 남북한 총인구1,331만명/통계로본 구한말 경제·사회상

    ◎60명이던 인구밀도 작년 4백44명/일인이 판검사 74%·경찰 40% 장악/외국인수 184,237명… 93년도의 2.7배/쌀 1가마 현재돈 4만6천원·쇠고기 1근 699원/서울 수도보급률 18%… 전화가입자 6,448명 오는 30일은 갑오경장이 일어난 지 1백주년이 되는 날이다.이때를 기점으로 근대적인 문물제도가 본격도입되면서 조선왕조의 봉건적인 제도는 일대변혁을 맞는다.국가통계도 의정부에 기록국이 설치되면서 근대적 의미의 통계가 시작됐다. 통계청은 28일 이날을 앞두고 조선총독부 통계연감 등 당시의 각종 통계자료를 종합한 「개화기의 경제·사회상」이라는 책자를 펴냈다.변혁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한세기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알아본다. ▷인구◁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남북한을 합친 전국인구는 2백89만4천7백77호구에 1천3백31만3천여명.올해 남북한의 19%,남한의 30%수준이다.그러나 인구밀도는 60명(93년 남한 4백44명)수준으로 지난해 세계평균 41명보다 높아 당시에도 인구가 조밀했다.경북이 1백57만7천명으로 가장 많았다. ○외국인 90%가 일인 현재 남한인구의 4분의 1이 몰려 있는 서울은 당시 27만8천9백58명으로 전체의 2.6%에 불과,그동안의 인구집중추세를 여실히 알려준다.그동안 38배가 늘었다.당시 서울의 가옥은 초가집이 주종으로 기와집과 반기와집은 30%정도였다. 전체호구수의 84.1%가 농업에 종사했고 상업 6%,광공업 0.8%,날품팔이 0.2%였다.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양반과 유생은 2.5%였다.양반이 가장 많은 곳은 충남으로 전체호구수의 10.3%가 양반이었다.「충청도양반」이 헛말이 아닌 셈이다. 당시 외국인수는 18만4천2백37명으로 93년의 6만6천6백88명보다 2.7배나 많다.90%가 넘는 17만1천5백43명이 일본인으로 한반도쟁탈전에서 승리한 일본인들이 떼지어 밀려왔다.창기와 작부도 4천여명이나 됐다. 식수체계의 미비와 의료시설의 낙후로 수인성전염병에 의한 사망이 많아 1909년에는 인구 10만명당 12·2명이 콜레라에 감염됐고 치사율은 79.2%나 됐다.지금은 거의 사라진 천연두도 기승을 부려 1910년에는 4백45명이 이 병으로 숨졌으며 56%가 10세미만의 어린이였다.특히 이 해에는 발육 및 영양부족으로 죽은 어린이가 2천81명이나 됐다. ▷산업◁ 1909년의 농가당 경지면적은 1.03㏊로 지난해의 1.29㏊와 큰 차이가 없다.논은 전남이,밭은 평북이 가장 넓었고 전국 논밭의 43%가 관청과 향교 등에 소속돼 면세혜택을 받았다.쌀생산량은 7백45만8천섬으로 지난해의 23%수준.반면 보리·조·수수 등은 지금보다 수확량이 많아 잡곡이 주식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0년의 가축수는 소와 돼지가 각각 현재의 25%와 10%수준인 62만8천마리와 57만6천마리였다.주요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말은 3만3천마리로 지금의 6배다. 개항과 함께 근대적 형태의 공장들도 들어섰다.1910년의 공장수는 전국에 1백51개,종업원은 8천4백77명이다.한 공장에 56명이 근무한 셈이며 공장당 건평은 현재의 33%인 1백62평이다.정미·인쇄·방직·철공장이 주종이고 전국 공장의 38%가 몰린 경기도가 전국생산량의 58%를 차지했다. 상거래는 5일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다.시장수도 1908년 8백46개에서 3년 뒤 1천84개로 늘었다.농수축산물이 60%,직물이 21.7%로 거래품목의 대부분이었다. 1910년의 개인사업자는 14만여명으로 한국인 83·7%,일본인 15%였다.한국인은 음식점과 여인숙 등을 주로 했으며 일본인은 총포상과 화약상 및 고철상 등 13개 업종을 독점했다. ▷수도·철도·통신◁ 1910년까지 부산과 경성 등 4곳에 상수도시설이 갖춰지면서 1만6천여가구에 식수가 공급됐다.그러나 경성의 수도보급률은 18%에 그쳤다. ○전화 한통화에 2전 1899년 인천∼노량진 간 경인선을 시작으로 깔리기 시작한 철도망은 10년 뒤에는 1천86㎞(현재의 35%수준)로 늘어났다.하루평균 5천7백30여명의 여객을 수송했고,2천5백여t의 화물을 운송했다. 전화가입자는 1902년 3백10명에서 1910년에는 6천4백48명으로 21배가 됐다.경기(46.8%)와 경남(15.6%)이 전체의 60%를 넘었다.1구역의 전화요금은 한 통화에 2전으로 달걀 1개(1.5전)보다 비쌌다.요즘 달걀값과 비교하면 당시의 전화요금이 지금보다 비싼 셈이다. 교육·의료 보통학교도 있었지만 여전히 서당이 교육기관의 중심이었다.1910년 전국의 서당수는 1만6천5백40개로 한 서당에서 평균 9명이 배웠다.보통학교는 1백73개교로 학급당 학생은 34·3명이었다.여학생은 6%에 불과했다.결석률은 1911년의 경우 11·6%,중퇴율도 30% 가까웠으며 만학도가 많아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병원은 1백25개가 있었지만 한국인 소유는 고작 14개였다.그러나 1천7백38명의 의사 가운데 한국인이 1천3백44명으로 77%였다.의사 1인당 인구는 현재의 10분의 1수준인 7천6백60명이었다. ○목수 일당 쌀한말값 ▷물가·임금◁ 1898년 서울시장의 1등미 1섬의 가격은 8원(한가마 4원)이었다.닭 한마리는 0.2원으로 쇠고기 한근(0.12원)보다 비쌌다.요즘 화폐로 환산하면 쌀 한섬은 4만6천5백원,쇠고기 한근은 6백99원정도로 추정된다.당시 목수의 평균일당은 0.82원으로 쌀 1말정도를 살 수 있었다.요즘의 일당으로 구입할 수 있는 2.5말과 비교하면 당시 임금이 박했음을 알 수 있다.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 불과했다.공무원봉급은 격차가 더 심해 일본인이 2∼3배 많았다. ▷공공행정·치안◁ 1910년의 경찰은 5천8백81명으로 40%가 일본인이었다.특히 경찰의 고위직 대부분과 판·검사의 74%가 일본인으로 치안·사법계통을 일본인들이 거의 장악했다.다만 변호사의 경우는 한국인이 51명으로 일본인보다 20명정도 많았다. 1910년의 인구 10만명당 강도발생건수는 92년의 4배인 23.9건으로 개화기의 뒤숭숭한 세태를 반영했다. ○수입이 수출의 2배 ▷무역·금융◁ 1876년 개항이후 대외교역이 본격화되면서 교역량은 1910년까지 연평균 17%씩 늘었다.1910년의 수출은 1만9천9백원,수입은 3만9천7백원으로 수입이 2배나 됐다.엄청난 무역적자인 셈이다.일본과의 교역이 수출의 74%,수입의 60%를 차지했다.수출품은 농축산물·인삼·철광,수입품은 석탄·옥양목 등이 주종이었다. 화폐발행고는 1910년 2천16만4천원으로 8년 전보다 54.3% 증가했다. 은행예금보다 대출규모가 컸으며 금리도 1909년의 경우 예금 5∼6%,대출 11∼13%로 대출금리가 월등히 높았다. 1894년 당시 엔화환율은 1엔이 우리 돈 은화 5냥(50전) 수준이었다. ◎군예산이 전체의 25%로 최고/명성왕후 장례비 쌀4만섬값/재무예산 31% 대일채무상환/19세기말 국가예산 쓰임새 1899년의 우리나라 국고는 당시 화폐로 대략 6백40만원정도.예산편성은 지금의 재무부격인 도지부(탁지부)에서 했다.예산규모는 군부(국방부)·내부(내무부)·도지부·궁내부(청와대) 순으로 요즈음과 비슷하다.지세·가호세·관세 등으로 조달된 세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궁내부의 예산은 6만5천원.대부분 황제를 모시고 궁정을 유지하는 데 쓰였지만 제사비용도 1만5천원으로 23%나 됐다.1896년과 그 이듬해에는 일본인이 시해한 명성황후의 장례비로 농상공부 예산의 2배 가까운 35만5천원을 썼다.지금으로 치면 1백여억원규모며 당시 쌀 4만4천3백섬을 살 수 있는 돈이다. 1백30만원의 내부 예산 대부분은 지방의 행정기관과 경찰·감옥 유지에 쓰였다.서울시격인 한성부 예산이 내부 전체의 0.5%에 불과한 것이 이채롭다.창궐하던 천연두예방을 위해 종두접종을 의무화해 3천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탁지부 예산은 일본 차관금 상환여부에 따라 해마다 큰 차이가 났다.1899년의 예산은 2백여만원으로이중 대일채무상환용이 31%를 차지,가장 많았다.주로 정부의 채무를 갚는 데 예산이 집행됐다.각 도에서 징수한 세금을 서울로 운송하는 데 든 돈도 10%정도인 22만원이나 됐다.세금으로 거둔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1.8∼2㎏이나 돼 수송비용이 많이 들었다. 군부의 예산은 전체의 25%정도로 지금처럼 가장 비중이 높았다.1899년의 예산 1백43만8천여원의 90%이상이 군대유지비에 쓰여졌다.이중 대부분이 수도군의 유지비로 쓰였다.법부(법무부)의 예산이 3만8천9백여원으로 가장 적었다.지금과 달리 교도소 등 감옥이 법부가 아닌 내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 8월의 문화인물 박은식선생/일제때 민족사연구·독립운동에 헌신

    ◎추모세미나·강연회·관련 자료전 다양 문화체육부는 8월의 문화인물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백암 박은식선생을 선정했다. 박은식선생(1859∼1925)은 황해도 황주 태생으로,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걸쳐 민족사 연구,언론활동,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민족혼을 일깨웠다. 18 98년 이래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민족사상을 고취하고 민족고전을 보급,지도하다 한일합방 이후 19 11년 만주로 망명,고대사 연구와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대통령을 지낸 선생의 유해는 지난해 조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왕양명실기」,「대동고사론」 등이 있다. 문체부는 「박은식의 달」을 맞아 8월 한달동안 관련단체와 함께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학술세미나,관련 자료 전시회 등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각종 기념행사는 다음과 같다.(주관처) ◇강연회 및 세미나=△추모 학술 세미나:12일 하오 1시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신용하교수(서울대) 등이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과 민족주의 역사관」 등에 대해 발표(광복회,한국민족운동사 연구회)△강연회:12일 하오 3시 전북 진안군 마령면 이산묘에서 유장호 전주문화원 사무국장이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강연(전주문화원) ◇전시 및 공연=△관련 사진자료 전시회:1일부터 31일까지 독립기념관에서 선생의 영정 등 사진자료 12점 전시(독립기념관)△관련자료 전시회:1일부터 31일까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국통사」 등 10종10책을 전시(국립중앙도서관)△박은식의 달 및 광복 49년 기념 축제:14,15일 이리역 광장에서 사물놀이,관현악 연주 등 공연(예총 이리지부)
  • 탈냉전시대의 동북아 안보(사설)

    아세안의 제1차 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하고있는 한승주외무장관은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그리고 남북한을 포괄하는 동북아 다자안보 협의체(NEASD)창설을 공식 제의했다.탈냉전이후 불확실의 유동상태를 지속하고있는 동북아및 한반도 안보환경 개선을 위한 우리정부의 주도적 외교이니셔티브다. 우선은 국방백서 교환토의,재래무기 자료제공,국방관계자회의 정례화,군관계자및 군함 교환방문등 덜 민감하고 기초적인 협력에서부터 시작해 안보면에서의 상호 이해와 신뢰를 증진시켜 나간다는 구상이다.장기적으로는 ARF와의 보완협력을 통해 유럽군축및 평화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한것으로 평가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아시아판 안보기구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옛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개혁및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상대적 후퇴,그리고 일본의 적극적인 정치·군사대국화 지향 등으로 탈냉전이후의 아시아,특히 동북아시아 안보상황은 질서재편의 과도기적 공백상태를 노출하고 있다.특히 중국과 일본의 21세기를 겨냥하는 아시아패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새로운 질서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반도는 바로 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구한말의 과도기적 새질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강들에게 압도당함으로써 망국과 분단및 전쟁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가 감수해야 했던 민족적 손실과 낭비,겪어야 했던 비극을 생각하면 이제 또다시 시작되고있는 새질서형성에 적극 참여하고 주도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구한말과는 달리 우리는 지금 정치·경제적으로 우리 환경을 어느정도는 우리 뜻대로 주도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능력도 갖추고 있다.잘만 하면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설수 있고 미국과 러시아를 활용할 수도 있는 중심적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문제는 그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혜롭게,그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느냐라고 생각한다.NEASD창설제창은 그런 의미의 노력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관계의 차원에서도 그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구상일 수 있다.사실 동북아안보의 핵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에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리고 NEASD는 남북한의 안보에 대한 국제적 보장장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북한이 체제안보 수단으로서의 핵개발을 포기할수 있는 대안의 하나로서도 효과적일 수 있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북한의 참여는 핵문제가 해결된 이후 논의할 방침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북한은 하루속히 핵투명성을 보장하고 NEASD같은 기구를 통한 체제안보의 국제적 담보를 확보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 덕수궁/월산대군사저… 임란후 궁으로/궁궐:8(서울6백년만상:45)

    ◎고종퇴위후 거주… 전기·전화 최초가설/일제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 덕수궁은 궁궐이라기보다는 공원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정도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 현존하는 3대궁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우선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세종대왕동상이 앉아있고 분수대가 물을 뿜고 있으며 매점등 편의시설이 즐비하다.점심시간대에는 인근 회사원들에게 산책 코스로 각광을 받고있는 여느 도심공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단지 대한문을 필두로 중화전 즉조당 함녕전등 몇 안되는 전각들과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우리 가락이 이곳이 궁궐이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덕수궁은 원래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정궁이 된 배경은 임진왜란과 을미사변등 국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임진왜란의 발발로 신의주까지 피란갔다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타버려 어쩔 수 없이 덕수궁에 거처를 정했다. 이때는 궁궐의 이름도 없이 그저 정릉동행궁이라 불리다 광해군이 즉위 3년만에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고 지어 처음으로 궁궐의 반열에 섰다.그러나 불과 7년만에 인목대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해군이 대비를 이곳에 유폐하면서부터 경운궁은 서궁으로 격하됐다. 광해군을 이어 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경운궁을 명례궁으로 부르다 1623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덕수궁은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2백70여 성상이 흐른 광무 원년(1897)을미사변의 와중에서 러시아공관으로 파천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에 칩거하면서부터 궁의 이름에 고종의 존호를 사용,덕수궁이라고 불렀다. 고종이 이곳으로 옮긴뒤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축조공사로 함녕전 보문각 선원전 중화전 관명전이 새롭게 태어나 궁의 모습이 일신됐다. 이때 덕수궁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대한문은 원래 중화전의 문인 대안문을 옮겨놓았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년뒤에 중건,대한문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수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원래는 경희궁(옛 서울고자리)과 연결돼 있을 정도로 규모가 방대했으나 열강들의 각축이 벌어지면서 조금씩 떼어내 외국공관으로 사용케 해 규모가 줄어들다가 고종이 승하한뒤 빈 궁궐로 남아 있자 일제가 기다렸다는 듯이 궁의 서쪽 선원전을 통과하는 도로를 뚫은뒤 1933년 시민공원으로 개방했다. 지금의 대법원과 새문안길을 잇는 이 길이 바로 60∼70년대 서울의 연인들이 낭만을 즐겼던 「덕수궁 돌담길」이다. 일제는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 나간 궁궐의 전각들을 헐고 경기여고를,그리고 도로 동쪽 제사준비소터에 덕수국민학교를 세웠다.또 동쪽 언덕을 밀어내고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국을 지어 궁궐이 반쪽으로 줄어들었다. 광무10년(1902)궁내에 발전소가 완성돼 전기가 들어오고 궁내부전화가 설치되는등 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기도 했던 덕수궁은 구한말 격동의 시기에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며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다.
  • 김옥균 삶 통해 구한말 역사 조명/오석태연극제 대미 장식

    ◎극단 목화레퍼토리 「도라지」 공연 우리 근대사의 풍운아인 김옥균의 삶을 통해 구한말 역사의 격랑을 그린 작품「도라지」(오태석 작·연출)가 「오태석 연극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극단 목화레퍼토리는 12일부터 31일까지 3주동안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이 작품을 올린다.특히 이번에 선보이는 「도라지」는 지난 92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연극연출가회의에서 워크숍형식으로 잠깐 소개된 적은 있지만 전체로서 공연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주목된다. 무대는 지금으로부터 1백10년전인 18 84년 서울.약관 34세의 김옥균이 고종의 앞에서 개화기 정세를 논하면서 막이 오른다.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이내 역적이 되어 도피의 길에 오른다.일본 곳곳을 전전하던 김옥균은 고종의 밀명을 받은 홍종우의 총에 죽고 시신은 능지처참을 당한다.시간은 흘러 조선은 일본의 속국의 길을 걷고 일본의 미움을 산 고종은 급기야 양위를 하게된다.소녀들이 부르는 도라지 동요가 조곡처럼 깔리며 조국의 운명은 점차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간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오태석씨가 각본을 새로 쓰고 연출도 직접 맡은만큼 이번 무대는 일본공연과는 내용면에서 한층 차별화된 모습을 띨 것으로 보인다.인간 김옥균의 개인사에 초점을 맞췄던 전공연과는 달리 구한말 개화기 전체를 무대화,격동의 역사에 대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는 것. 연출자 오태석씨는 『한·일간의 어쩔수 없는 숙명의 끈을 나름의 연극방식으로 보여줄것』이라며 『연극적 재미를 살리는 쪽으로 역사를 해석,무미건조한 연대기적 사실주의극에 머물지 않도록 하겠다』고 연출의도를 밝혔다.김옥균역의 정진각을 비롯,정원중 홍원기 심규만 등 극단 목화레퍼토리의 주요단원을 총망라한 30여명의 배우가 출연,자유소극장 사상 최대의 인원이 무대에 선다.평일 하오7시30분,토·일요일 하오3시·7시 공연.
  • “구한말∼일제 농촌 변화과정 생생”

    ◎구례 지주 유씨가의 일기 농촌경제연서 분석/할아버지와 손자가 85년간 쓴 농업일기/당시 작목구조·농사방식 연구에 큰 도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기간 우리 농촌경제의 변동과정이 할아버지와 손자에 걸쳐 쓰여진 85년 동안의 일기를 통해 연구됐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이두순 부연구위원과 박석두 책임연구원은 「한말·일제하 양반 소지주가의 농업경영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의 지주인 유씨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일기와 각종 문서를 이용해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것이다. 연구에 이용된 일기는 유제양(1846∼1922년)이 1851년부터 1922년까지 모두 72년 동안 쓴 「시언」과 그의 손자인 유형업(1886∼1944년)이 할아버지의 권유로 13살 때부터 1936년까지 쓴 「기어」.또 금전출납부인 「당용록」과 연도별 소작료 수취부인 「추수책」,노동력 사역부인 「전가일기」 및 「농가일기」,식량소비를 기재한 「양미책」 등 농가경영요소가 망라된 가전문서들이 분석됐다. 연구에 따르면 유씨가는 17 93년쯤 논·밭을 합쳐 8백83두락(22만3천4백여평)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1백년뒤에는 분할상속과 매각 등으로 1백62두락(2만5천평) 정도로 줄어들었다.이후 19 00년에는 1백두 미만으로 축소됐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친족의 방탕이나 횡령 질병등으로 인한 매각 때문이었다. 당시는 조선이 일제의 강제농정에 휩쓸린 시기였다.일제는 조선을 일본이 필요로 하는 식량 및 원료농산물의 생산기지로 만들려 농업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꿀 것을 강요했다.이에따라 유씨가의 작목구조와 농사방식도 크게 바뀌었다.「군청에서 양뽕나무 150그루를 보내 1백10그루를 뒷 채소밭에 심었다」(1911년 3월25일)는 일기에서 보듯 일본산 뽕나무로 종자를 개량했고 이어 재래면의 재배를 금지함에 따라 면화재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조선총독부는 일본 쌀시장에서 인기높은 품종을 강압적으로 보급했다.미곡증산사업의 목표가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신품종이라는 미모의 종자가 여러 군데에서 얼어 죽었다」(1931년)는 기록처럼 일본품종은병해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가 재래종보다 휠씬 심했다. 농사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씨가가 화학비료를 처음 구입한 것은 1930년이다.일본 괭이와 왜낫을 산 것은 1912년이었으며 1916년에는 탈곡기구를 샀다.또 1937년부터 벼를 도정할 때는 물레방아 대신 동력 정미기를 썼다. 유씨가는 한해 2백∼4백50명의 노동력을 외부에서 조달했다.노동력 조달 방법은 호역와 매고·머슴의 세가지로 크게 구분됐다.호역은 농토를 빌려주고 지대로 춘추 각 4일의 노동을 제공받는 것이며 매고는 호역으로 충당되지 못한 노동력을 현금 또는 현물을 주고 쓰는 것이다.유씨가는 1900년대 초에는 호역으로 대부분의 농사일을 하고 부족노동력을 매고로 보충했으나 1920년쯤에는 소작으로 전환했다. 농촌경제연구원은 이 연구에 쓰여진 유씨가의 문서를 이용해 앞으로 「류씨가의 수입지출구조 및 생활실태」「토지소유 및 지세의 변화에 관한 연구」「오미동의 사회구조와 사회조직」 등을 연차적으로 연구해 갈 계획이다.
  • 양기탁선생 묘소를 찾기까지/백범이 남긴 약도로 사후56년만에 확인

    ◎유족들,제자와 함께 정확한 위치 찾아/“유해봉환위해 정부차원 지원 있어야” 『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산과 골이야 아무리 깁허도 우리마음은 당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물과 불이야 아무리 겁나도 우리마음은 해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달과 놀이야 아무리 발거도 우리마음은 빗칠수 없누나/대한사람에 우리들은요­총과 칼이야 아무리 무셔도 우리마음은 뚜룰수 없누나/…』(양기탁 「아해들 노래」 중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문인이자 언론선각자로 평생을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한 우강 양기탁선생(1871∼1938)의 묘소가 중국 강소성 율양현의 한 시골마을에서 후손들에 의해 발견됐다. 상해에서 내륙쪽으로 7시간 이상 버스로 달려가는 강소성 남부의 작은 마을 대부진 남문두에는 아직도 우강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우강이 기거하던 고당암터와 묘소터를 확인할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해서 7기간 거리 우강은 구한말 대한매일신보(서울신문 전신)를 창간하여 외세의 침입에 항거,「행동하는 필봉」으로 민족자존의 횃불을 드높였다.또 일제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만주와 중국대륙을 무대로 민족적 자각과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이번에 그의 묘소가 사후 56년만에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오는 7월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 90주년을 앞두고 더욱 뜻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확한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가족들은 물론 애국선열들의 유해봉환을 추진해오고 있는 정부와 뜻있는 이들의 애를 태워왔다. 우강의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은 백범 김구선생이 해방후 유족들에게 건네주었던 묘소의 약도였다.백범은 우강과는 5년 연하로 신민회 활동에 이어 상해 임시정부등에서 함께 활동해와 남다른 교분을 갖고 있었으며 해방후 우강의 유족인 장남 효손(6·25때 납북)에게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보라며 현장의 위치를 그려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이 약도는 우강이 말년에 기거하던 고당암과 주변의 뽕나무밭,묘소위치등을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3월 이 약도를 들고 묘소를 찾아나섰던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는 『납북된 남편의 뜻을 40여년만에 이루게돼 여한이 없지만 어서 유해를 모셔와 고국에서 편안하게 영원히 쉬시게 하는 일이 남아있다』며 울먹였다. ○농지개선작업때 이장 우강의 묘소를 찾는 작업은 독립운동가 박은식선생의 손자이자 최씨의 사위인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가 4∼5년전부터 모친(최윤신·77)의 중국에 사는 친척들을 통해 수소문하면서 시작됐다.그 결과 대략적인 위치가 파악됐으며 이번에 박씨가 모친·장모와 함께 현장을 답사,백범의 약도와 비교해보고 생존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된것이다. 우강의 묘소는 원래 고당암 앞의 뽕나무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60년대 모택동이 대대적으로 전개한 농지개선작업때 4∼50ⓜ 남쪽으로 이장했으며 오늘날에는 밭 한가운데 거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게 방치돼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이 이 마을에서 만난 제자이자 이장을 역임했던 번정재씨(79·농업)는 『선생은 키가 크고 하얀 얼굴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학문이 높고 기공의 경지가 높아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선생이 기거하시던 고당암에는 늘 기공을 연마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덧붙였다. 우강의 유족측은 올 가을쯤 다시한번 강소성의 묘소를 방문,구체적인 유해봉환을 위한 절차를 현지정부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내년까지는 반드시 유해봉환이 이뤄질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도 관심을 기울여 줄것을 강력히 촉구했다.◎양기택선생의 항일 족적/대한매일신문 창간… 국권회복 앞장/신민회 결성… 독립군 양성 등 무장투쟁 말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돼가던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태어난 우강은 소년시절 한학을 배운뒤 15세때 상경,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25세때 부친과 함께 미국인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그 과정에서 일본 미국등을 다니며 선진문물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어서 1898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개혁당 당원으로 활약하는등 활발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을 맡기도 했다. 우강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할권을 내세우는등 침략을 노골화하자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교육시키기 위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따라서 당시 영국 데일리뉴스의 임시특파원으로 서울에 와있던 어니스트 베델(1872∼1909)을 사장으로 하고 자신은 총무를 맡아 새신문을 창간했던 것. 국한문 혼용의 국내용 신문과 별도의 영문판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잔혹한 통감정치 하에서도 전국각지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다루고 국채보상운동을 펴는등 국운이 쇠하여가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끝까지 민족에게 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심어 국권회복운동의 불씨를 재우지 않으려 노력했다. 우강은 또 안창호·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대한매일신보 사무실내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벌이던 신민회는 1909년 전국대회를 열고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어서 한일합방을 앞둔 1910년 3월에는 신민회가 만주 망명을 결정하고 서간도에 기지를 마련,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치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이같이 신민회의 활동이 해외거점을 확보하자 일제는 1911년 7월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날조,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하고 신민회를 해체해버렸다.이어 13년에는 총독암살사건(일명 「105인사건」)으로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4년만에 감형으로 출소한 우강은 16년 주거제한지인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를 탈출,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했다.그러나 2년뒤 18년에 천진에서 일본경찰에게 다시 체포돼 국내로 압송,전남 거금도로 유배됐다. 20년 4월 유배를 끝나고 서울에 와있던 우강에게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가 고문및 편집감독으로 추대를 제의해 왔지만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그는 거절했다. 34년 제26회 의정원 회의에서 우강은 김규식 조소앙과 함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그러나 그는 주석직도 얼마 가지 않아 사임했으며 모든 관직을 떠나 강소성 율양현으로 들어가 선도에 몰입하다 38년 4월,67세로 이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우강은 이같은 공로로 62년 독립유공자중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수여받았으며 86년 독립기념관의 독립유공자 임정위원 42인에 추대됐다. ▷연보◁ △1871 평남 평양 소천출생 △1885 한성외국어학교 영어수학 △1895 게일의 영어사전편찬 도움 △1900 나가사키 유학 △1904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 신민회 조직 △1913­5 「양기탁 보안법 위반사건」 및 「105 사건」등으로 투옥 △1916 만주로 탈출 △1918 전남 거금도 유배 △1922 만주에서 의성단 조직 △1926 임정 국무령 추대,거절 △1934 임정 주석 선출 △1938 강소성 담양현 고당암에서 선도연구중 사망
  • “항일필봉” 양기탁선생 묘소 찾았다

    ◎유족들,중국 강소성 율양현서/“유해봉환 곧 보훈처와 협의” 중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우강 양기탁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민족적 자각을 일깨운 언론인으로 또 일제 강점기 무장항일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우강선생의 묘소가 최근 중국 강소성 율양현 현지를 방문한 유족들에 의해 확인됐다. 그동안 우강의 묘소는 정부가 유해봉환을 추진중인 해외안장 독립유공자 87위 가운데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66위중의 하나로 분류돼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유족들을 안타깝게 해왔다. 중국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우강의 자부 최선옥씨(76)와 손녀사위 박유철씨(56·건설공무원교육원장)등 가족들은 26일 『그동안 강소성 담양현 길당암 부근에 안치됐을 것으로만 추정해오던 우강선생의 묘소 위치를 해방직후 김구선생이 그려주신 약도와 현지에 생존해 있는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고 밝히고 『유골수습및 봉환등 구체적인 절차는 국가보훈처와 협의해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 한국근대 유교 개혁운동사/유준기 지음(화제의 책)

    ◎구한말 유림들 유교 개혁운동사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인 구한말에 선각적인 유림들이 국가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유교개혁운동을 벌인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하나로 엄연히 존재했던 유교개혁론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한 민족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는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지은이는 이를 위해 박은식·이승희·이병헌등의 유학자와 강화학파를 분석,이들이 전통유교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해 공자교·대동교등의 종교적 형태를 갖춘 뒤 이를 통해 국가의 중심사상을 재정립하고 민족의식을 고양하려는 과정을 보여준다. 총신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 몰두해온 지은이의 역작이다. 삼문 9천원.
  • 홍등가:상(서울 6백년만상:29)

    ◎기생 떠돌며 몸팔던 「양수척」서 유래/미모와 춤솜씨로 벼슬아치와 어둘려/한말 관기폐지후 조합결성,권번으로 이태조 개국 연회에서 정승 배극렴이 당시 명기였던 설매에게 말한마디 잘못 건넸다가 조소를 받은 얘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대취했던 배극렴은 『너는 아침에는 동쪽 집에서 먹고 저물면 서쪽에서 자니,나와 하룻밤을 지낸들 어떠랴』고 설매를 희롱했다.그러자 설매는 『동가식 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왕씨의 신하 노릇하다가 이씨의 정승 노릇하는 대감과 하룻밤을 ,봇지낼 것이 있겠습니까』고 응대했다. 오늘날 유흥업소 호스티스 격인 기생의 연원은 멀리 정도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우리나라 기생의 종류는 본래 떠돌이 유민인 양수척에서 유래해다』고 기술하고 있다.유민들은 호적도 부역의 의무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매춘행위를 하다가 양수척이란 신분이 됐다.양수척이란 관기의 또다른 별명이며 이들몸에서 남아가 태어나면 노비로 삼고 여아가 출생하면 기생으로 만들었다.구한말에는 일본의 창녀들이 서울에 몰려들어 양수척과 마찬가지로 매음하고 다녔다. 이런 경로로 등장한 기생이란 새로운 신분계급은 음악과 무용의재능을 연마하는데 열중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궁중의 연회에 동원되는 여악의 기능도 갖게 됐다.또한 이들은 미모와 춤솜씨등으로 왕실과 벼슬아치들의 사랑을 받아 태조 같은 임금은 총애하던 기생 칠점선을 옹주로 봉하기도 했다. 태종에 이르러 음란한 풍속이 더욱 심해져 왕이 이를 폐지하려고 했으나 정승 허조가 반대했다.그의 의견은 『남녀의 성욕은 인정의 자연인데 만일 이를 금지하면 청춘의 자제나 그밖의 유력자가 도리어 양가의 부녀를 오욕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어서 폐지를 면했다. 기생에는 「1패·2패·3패」로 구분돼 있었다.1패는 어전에서 가무를 하는 최고급 기생이고 2패는 각 관가나 재상집에 출입하는 기생을 말한다.3패는 지금으로 치면 창기로 아무에게 몸을 파는 그런 기생들이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은 있게 마련이다.기생과의 연애(?)는 몇번 만나서는 안되므로 계속 요릿집을 드나들었다.돈을 물쓰듯 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았다.지주의 아들이 놀아나면 반드시 한달 1할변으로 돈을 대주는 자가 있었고 심한 자는 「부사후출급」이라는 증서를 내고 돈을 썼다.아비가 죽은 뒤에 돈을 내겠다는 탕아의 짓이다. 동기로 있을 적에 돈을 쓰고 그 「처녀성」을 사는 것을 『머리 얹는다』고 말했다.정보를 바치는 대신에 남자로부터 옷에서 장롱·패물에 이르기까지 일체를 받고 댕기를 쪽으로 바꾼다. 기생제도는 구한말 서양문물이 물밑듯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회제도의 개혁과 더불어 흔들리기 시작한다.1907년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서울에 기생들의 조합인 한성 기생조합이 탄생하게 된다. 기생조합은 1914년 권번이란 일본식 이름아래 서울시내에는 한성·다동·조선등 10여개의 군소 권번이 생겨났다.이것이 기생들의 집단적으로 생존경쟁을 하게 된 계기가 됐으며 동시에 기생을 데리고 유흥하는 장소가 요정으로 옮겨지게 됐다.
  • 「신미양요 대포」 미서 돌아온다/구한말 미해군이 강화도서 탈취한것

    ◎방한 싱그러브 전유엔군참모장 밝혀 1871년 신미양요때 미해군이 강화도에서 탈취해 간 대포 한문이 반환될 것 같다. 한국전및 월남전 기념교육관의 설립을 협의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싱글러브 전주한유엔군참모장은 19일 청와대로 김영삼대통령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해군사관학교에 전시중인 2문의 대포 가운데 한문을 한국에 돌려주는 방안을 자신이 추진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싱글러브씨는 『강화도에서 가져간 대포 두문 가운데 한문을 한국에 가져오는 대신 한국이 모조품 한문을 만들어주는 방안을 사관학교측과 협의하고 있다』면서 사관학교측이 사실상 이에 동의했음을 시사했다.
  • 서재필·전명운 선열의 환국(사설)

    평생을 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바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의 유해가 4일 미국으로부터 서울에 도착한다.지난해 8월 중국 상해로부터 임정요인 다섯분 영령의 봉환에 이어 두번째로 이루어진 애국선열 영령의 환국이다.내년이면 벌써 광복 50주년,이제야 멀고먼 이국땅에서 숨진 선열들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 안장함은 때늦은 송구함이 없지않으나 그나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재필박사는 개화기의 독립운동가로,사상가로,언론인으로 우뚝한 자취를 남겼다.국운이 기울어가는 시기에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독립문을 세우는등 애국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18 9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국언론사의 새장을 열었다.우리 언론이 제정한 「신문의 날」4월7일은 바로 독립신문 창간기념일이다.서박사는 일제때 미국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힘쓰다 19 51년 영면하였다.구한말 개화기부터 광복을 맞기까지 그는 현대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거목이다. 일반에겐 다소 생소한 전명운의사는 19 08년 미 샌프란시스코부두에서 대한제국의 미국인 외교고문이던 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했던 독립운동가.『일본의 한국통치는 한국인 모두가 바라는 바』란 망언을 거침없이 해댄 스티븐스는 당시 한국인의 공적이었다.전의사의 권총은 불행히 불발에 그쳤으나 또 한사람의 한국인 장인환의사의 저격으로 스티븐스는 목숨을 잃는다.대한남아의 통쾌한 기개가 미국땅을 뒤흔드는 순간이었다.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성과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전의사 역시 47년 이역에서 눈을 감았다. 서박사의 유해는 필라델피아의 한 공동묘지 납골당에서,전의사는 LA 갈보리 천주교공동묘지에서 각각 모셔오게 된다.타계한지 40여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다. 정부는 이영덕부총리를 위원장으로 「봉환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따로 집행위원회를 조직하여 범정부적으로 유해봉안행사를 갖기로 했다.두분의 안장식은 8일 하오2시 국립묘지 광장에서 엄숙하게 거행된다.이역땅에서 외롭게 숨진 순국선열들의 유해 환국은 민족정기를 선양한다는 점에서 그 뜻이 크다.또한 현대사의 복원이란 점에서 높이 평가될만한 일이다.우리 민족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이들 선열들의 수난과 희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새 문민정부는 해외에 묻혀있는 선열들의 유해찾기 조사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내년 광복절까지 복원되는 중경임시정부청사의 복원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두분의 환국을 맞으면서 다시한번 우리 모두 역사앞에 한점 부끄러움 없는 국민이 되기를 다짐해야 할 것이다.
  • ’94 전통문화축제 7일 화려한 팡파르/내고장 향토문화제 꽃피운다

    ◎진해군항제 시작으로 11월까지 전국 7곳서/정인원 3천명 참가… 전토예술 세계화 역점/의상·소도구등 2만점 동원… 예산 총4억원 투입/서울신문사·금성 공동주최 「94 향토문화축제 지원사업」의 첫번째 결실인 「충무공 승전행차행렬」이 오는 7일 군항제가 열리는 경남 진해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올해로 5회를 맞는 「향토문화축제 지원사업」은 서울신문사와 금성사가 우리의 전통축제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지역문화를 육성하기 위해 지난 90년부터 시작한 것.KBS의 후원아래 회를 거듭할수록 지역민의 폭넓은 호응을 얻고있는 이 축제는 이제는 전국 각 지역 향토문화제의 대표적 행사로 뿌리를 내렸다.올해는 특히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지역축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방침으로,행사진행도 단순행차행렬 일변도에서 벗어나 가·무·낙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무대를 꾸미는데 역점을 둘 예정이어서 한층 관심을 모은다. ○「축제예술」이 진행 올해는 전국의 대표적인 향토문화제 기간중 각 지역의 특색과 전통이 담긴 일곱차례의 축제행사를 펼친다.이벤트전문기획사인 「축제예술」(대표 허규)이 연출·진행을 맡은 이번 행사에는 4억여원이 투입됐으며 출연할 총인원은 3천여명,의상·소도구·장비등 예상 소요물품도 2만점에 이르는 등 완벽을 기해 어느해보다 알찬 축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주최측은 전통축제행렬을 해당지역의 역사적·문화적 특성을 살린 축제로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현지의 민속놀이및 민요와의 연관성을 고려,내용을 재구성했다.또 각 지역의 문화예술인·향토사가등 지역문화 담당자들과의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축제의 완성도를 높인 것도 올해의 특징.이밖에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향토문화제의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지역유지등 현지주민과 관계저명인사등을 중심인물로 출연케 할 예정이다. 전국을 신명난 축제의 마당으로 만들게 될 이번 행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본다. ▷진해 군항제◁ 충무공의 기개가 어린 충절의 고장 진해에서 벚꽃 만발한 가운데 펼쳐질 군항제가 7일 우렁찬 팡파르를 울린다. 올해로 32회를 맞는 군항제는 이충무공호국정신선양회가 주최하는 종합향토예술제.「충무공승전행차」는 경축식이 열리는 진해 공설운동장에서 필승로∼충무공시비∼진해역을 거쳐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2·5㎞구간에서 펼쳐진다. 경축식은 충무공의 안골포해전 승리를 알리는 파발마가 폭죽과 연막탄이 터지는 가운데 식장으로 달려 들어오며 시작된다.이어 충무공이 취타대의 주악속에 입장하면 최초의 승리를 알리는 장계가 낭송되고 승전무와 검무·사물놀이등 축하공연이 펼쳐진다.경축식이 끝나면 사물놀이패와 충무공의 영정을 앞세운 승전행차행렬이 출발한다.행렬에는 거북선과 판옥선이 등장해 충무공의 기개를 드높인다.또 시내중심가에서는 축포속에 판굿을 벌이는등 풍성한 볼거리를 마련,주민과 관광객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축제분위기의 절정을 이뤄낸다는 계획이다. ▷진도 영등제◁ 전남 진도군 회동마을 신비의 바닷길 현장에서 「영등살놀이」가 다채롭게 펼쳐진다.25·26일 이틀간 진행될 이번 공연은 전남 진도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영등살」에 얽힌 설화와 이 지방의 민속예술을 축제극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25일 영등제의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에 이어 흥겨운 신뱃노래 연주속에 서울가무악예술단의 신장기춤이 펼쳐진다.본행사날인 26일에는 길놀이와 씻김굿을 통해 「영등살」설화의 주인공인 「뽕할머니」를 모셔오고 진도의 풍속에 따라 재액을 쫓고 바다의 수호신을 맞아들이는 무속의식도 선보인다.한편 영등살은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마을 사이 2.8㎞에 이르는 바다가 매년 음력 3월초 간만의 차로 바닷길을 이루는 현상으로 외국에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잘 알려져있다. ▷남원 춘향제◁ ○국악의 문화상품화 판소리의 고향인 남원고을에서 열리는 춘향제는 정절의 상징인 춘향의 얼을 부각시키고 한국여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리기 위해 춘향문화선양회가 마련한 향토축제.64회의 연륜을 자랑하는 행사답게 실속있는 내용으로 꾸며진다.5월18일 광한루 특설무대에서 펼쳐질 「춘향전」(이몽룡 타령)은 올해가 국악의 해인 만큼 「국악의 문화상품화」에 무게중심을 둔 것이 특징.이에 따라 단순한 행렬위주의행사 대신 인간문화재 박동진·오정숙·은희진·박후성씨등 국내 정상급 명창들이 대거 참여,지금은 사라진 협율사창극을 재현해내는 이색무대로 꾸민다.이번에 선보일 춘향전은 구한말 전문창극단체인 협률사에서 공연되었던 창극을 오늘에 다시 본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부여 백제문화제◁ 올해로 40회를 맞는 백제문화제가 오는 10월2일 백제의 고도인 부여 구드레공원에서 열린다.「백제의 영광」을 내세운 이번 행사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58호인 줄타기와 경서도 소리를 위주로 꾸민다.축제의 압권은 환상적인 울림이 돋보이는 가무악 「다스림」공연.특히 이 춤무대는 백제선현의 원혼을 달래고 인간의 화합과 전진을 다짐하는 내용의 검무가 물결처럼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해낼 예정이어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경주 신라문화제◁ 오는 10월9일로 예정된 신라문화제는 신라문화선양회가 찬란했던 신라의 문화를 보전·계승하기 위해 주관하는 향토축제.국악대제전·미술대전·궁도대회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된다.이번 문화제에서도 「태종무열왕 행차행렬」을 재현한다.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을 중심으로 김유신장군과 화랑의 행렬을 편성,민족의 숙원인 통일의 사명감을 고취시킨다는 방침.태종무열왕을 앞세운 행렬은 취타대·농악대등을 포함,4백여명으로 편성할 예정이다. ▷충주 우륵문화제◁ ○충효사상 재조명 신라의 악사 우륵을 기리는 우륵문화제는 올해 24회로 오는 10월12일 충주 공설운동장과 시내일원에서 열릴예정이다.이번에 마련된 「임경업장군 출진행렬」은 금나라와 싸우기 위해 전장에 나서는 임경업 장군의 장렬한 모습을 행렬로 재현한 것.안으로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밖으로는 왜적을 물리치려던 장군의 기개와 국난극복 의지·충효사상을 재조명한다는 것이 기획의도다.장군을 모시는 청신과정을 통해 장군의 혼을 받드는 제의식이 서두를 장식한다.이어 태껸시연등으로 흥을 돋우며 취타·화관무등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위안잔치가 벌어진다.행렬은 공설운동장에서 시작,시청∼제1·2로터리를 거쳐 중앙공원에 이르는 3㎞구간에서 펼쳐진다. ▷진주 개천예술제◁개천예술제는 경상남도가 해마다 거도적으로 벌이는 종합예술제이다.오는 11월4일 선보일 「김시민 목사행렬」은 진주성을 죽음으로 지킨 선현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기리고 진주의 역사적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김시민 목사를 중심으로 민·관·군이 한덩어리가 되어 왜적을 물리친 사실을 행렬화한다.특히 이번 행렬은 진주 검무 및 진주 오광대·쾌지나칭칭나네 민요와 민속연희등 특징적인 군무의장형식을 도입해 「고수사전지계」의 투철한 정신을 살린 것이 특징. 전도와 취타대·대고·목사 및 군사·의병·민속연희단의 순으로 진행되며 모두 4백여명이 호흡을 맞춘다.
  • 두번째 「힘의 속성」 개인전 유근택씨(인터뷰)

    ◎“역사화로 평가받고 싶다”/태극기·유적 등 소재 26점 선보여 지난 82년 당시 고교2년 재학중 국전에 입선,연령미달로 당선이 취소돼 화제가 됐던 유근택씨(30)가 두번째 개인전을 29일부터 금호갤러리에서 열고 있다. 오는 4월6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에서 유씨는 그동안 치중해온 「힘의 속성」을 첫 전시회보다 좀더 구체화한 수묵채색과 모필소묘작품 22점과 함께 목판화 4점을 선보이고 있다. 『작품속에서의 힘은 단순히 사물을 그린다거나 옮겨놓는 작업보다는 체험을 통해서 구체화할때 그 이미지가 생생하게 살아난다고 봅니다』 일상속에 내재돼있는 사건들을 역사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치중하고 있는만큼 자신의 작품을 역사화로 인정받고 싶다는 유씨는 역사화가 현실과 맞물려있을때 힘을 발휘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따라서 3년전 첫 전시회가 주로 할머니의 대화등 단순히 시간성을 지닌 소재만으로 힘을 표출했던데 비해 이번 전시회는 정원 태극기 유적 물결등 역사의 흐름과 맞물리는 일상속의 구체적인 대상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아직까지 역사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차츰 확신을 갖게된다』고 말하는 유씨는 앞으로 구한말 명성황후와 관련된 일들과 역사상의 죽음등 과거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대상으로 삼겠다고 작품계획을 밝힌다. 충남 아산태생인 유씨는 중학2학년때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고교시절 미술부를 창단해 개인전을 열기도한 인물로 홍익대 입학후부터 예술속에서의 힘에대한 속성에 꾸준히 집착해오고 있다.
  • 교통수단:상(서울 6백년만상)

    ◎1899년 종로에 40인승 전차 등장/하루 3만명 수송… 60년대말 사라져/인력거 일 상인이 들여와… 기생 애용 1899년 5월4일 역사적인 개통 테이프를 끊은 전차는 운행 20여일만에 선로에 자빠진채 불길에 휩싸이는 예기치 못한 수모를 당한다.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당시 전차의 개통을 전후로 서울은 물론 전국적으로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아 민심은 크게 흐트러졌으며 사람들 대부분은 전차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전차가 공중의 물기를 빨아먹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얘기가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퍼졌다.공교롭게도 사건 당일 아침 9시쯤 동대문에서 서대문쪽으로 달리던 전차가 파고다공원앞에서 5살난 아이를 치어 죽인 끔찍한 사고까지 겹쳤다.이 장면을 목격한 군중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리던 전차를 세워 엎은뒤 불을 질렀다.당시 이 사건의 수습을 위해 한성판윤 이채연이 사표를 제출했지만 전차에 대한 적개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전차는 지난 60년대말 이땅에서 사라질때까지 서울시민들과 애환을 함께 한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종로선으로 명명된 서대문∼청량리간 전차길에 이어 종로네거리∼남대문·용산을 잇는 2개노선이 잇달아 개설됐다.개통초기 40인승 8대가 하루에 나른 전차 승객의 수는 무려 3만명에 달했다.노선이 단선이어서 군데군데 대피소를 마련,운행했다.물론 초기에는 일정한 정류소도 없었다.승객이 아무데서고 손을 들면 멈추었으며 내리고 싶은 곳 어디서든 내렸다. 사람이 끄는 인력거는 1894년 최초로 일본상인에 의해 서울에 들어왔다.1911년 전국에는 4천8백11대의 인력거가 있었다.이때만해도 고관이나 귀족·상류계층의 자가용으로 널리 쓰였다.기생제도가 권번제도로 바뀌면서 인력거는 기생이 애용하는 승용물이 되기도 했다. 정도이래 구한말까지 고관대작들이 주로 타던 가마에는 앞뒤 2명씩 4명이 메는 큰가마 또는 쌍가마와 앞뒤 한 사람씩 2명이 메는 외가마가 있었다.판서가 나들이 할때의 빛바랜 사진에서 볼수 있듯 앞뒤 6명씩 12명이 멘 12인교까지 있었다.요즘 승용차들의 배기량이 클수록 고급승용차이듯 당시에는 가마꾼이 많을수록 권위가 비례해서 커졌던 것을 알수 있다. 차편이 보편화되기까지 가장 널리 애용되던 교통수단은 말이었다.자가용이라 할수 있는 자가마,관용차인 관마,그리고 고을마다 수시로 이용할수 있는 택시인 대마도 있었다.때문에 모든 주막이나 여인숙에는 「현대판 기사식당」과 유사한 마방이 별도로 마련됐었다. 한국 말의 체구는 대체로 작지만 운송수단으로서의 효용성은 대단히 높았다.특히 8할이 산이요,모든 마을이나 고을이 산밑이나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어 교통수단으로서의 말은 「속도」보다 「안전」을 보다 중요시했다.크고 빠른 말보다 작고 느린 말이 우리 지형에 적합했다.그래서 과하마라는 조랑말이 우리 고유의 교통수단으로 이어져왔다. 조선초부터 교통수단의 대종이었던 기마풍습도 대중화됐다.그러나 기마에도 일정한 제한이 가해져 상중인 사람,중·서인등은 서울 도성안에서 말을 타고 다닐수 없었다. 서울의 발전은 교통수단의 발달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금세기초만 해도 고작 가마·소달구지나 인력거가 다니던 종로거리는 지금 차량의 홍수로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그만큼 「탈것」과 뗄려야 뗄수 없는 오늘의 「서울살이」는 집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교통수단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는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 거리:하(서울 6백년 만상:17)

    ◎80년대 유행창조 압구정로시대 개막/고급 의류상가 밀집… 젊은층문화 선도/대학로 문화예술거리­이태원 환락가로 서울의 역사를 거리기준으로 본다면 정도이후 구한말까지가 종로시대였고 해방후 80년대 중반까지는 명동시대,그 이후는 강남의 압구정로시대로 크게 나눌수 있다. 종로는 1894년 갑오경장이후 외국의 값싼 상품이 밀려오면서 구역별로 기능을 떠맡는 거리분화현상이 일어난다.관청가인 육조앞거리(세종로)와 상업가인 종로가 T자로 교차하는 청진동일대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관리들에게 향응을 베풀면서 이른바 요정이 들어서며 고급 환락가가 형성된다.고급 환락가 뒤편 골목길에 있던 목로주점들은 서민들이나 하급관리들이 즐겨 찾으면서 「해장국집」으로 변신,오늘날 청진동 해장국 골목의 씨앗을 싹틔웠다.종각앞에는 근대 백화점의 효시인 화신·신신백화점이 86년까지 자리잡았다.종로 2가의 명물은 역시 1908년 처음 3층높이로 세워진 YMCA건물.6·25때 불에 타 67년 지금의 8층건물로 재건된 YMCA를 중심으로 청소년들이 많이 몰려 자연스레 학원가가 형성됐고 서점들도 뒤따라 문을 열었다.그러나 종로2가의 학원가 명성은 80년 7월 과외및 재학생학원수강 금지조치가 발표되면서 빛을 잃고 남아 있는 몇몇의 대형서점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탑골공원에서 종로3가까지의 뒷골목은 조선시대부터 색주가로 널리 알려졌다.이곳 창기들의 반일 성향이 짙은 탓에 항일운동가들의 단골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이른바 「종삼」은 68년 시행된 종로정비사업으로 5백74년의 오명에 종지부를 찍게됐고 그 이후 종로는 제1의 상권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됐다. 종로시대에 이어 진고개로 통하던 명동 거리가 활기를 띠었다.이곳은 구한말까지만해도 권문세도가들이 거주하던 북촌과는 대조적으로 몰락한 양반이나 벼슬길이 막힌 선비들의 삶의 터전이었다.토착민들의 세가 약한 탓에 늘 외세에 시달렸다.임오군란이후 청나라 사람들이 이곳을 공략했고 한일합방이후 일본인들도 그랬다.일본상인들은 명치정이라고 지명까지 바꿔 상권을 형성해갔다.특히 1912년 한국은행자리의 조선은행을 필두로 저축은행(구 제일은행본점),조선신탁은행(구 한일은행본점)이,26년에 조선호텔,34년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백화점등이 잇따라 세워져 명동가가 활기를 띠었다. 시인,소설가,가수,배우등 문화·예술인들이 명동의 충무로일대를 드나들어 훗날 영화의 메카로서 충무로의 명성은 시작됐다.예술·유행의 메카로 그리고 금융가로서 하루 1백50만명이상의 인파가 출렁거렸던 명동도 70년중반이후 강남개발붐에 힘을 잃었다. 강남개발붐이 낳은 대표적인 거리는 압구정로로 부와 유행,소비의 최첨단지대로 부상한다.특히 「오렌지족」이라는 부유층 자녀들이 몰려 다른 지역과는 전혀 이색적인 젊은이 풍속도를 그려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국내 패션유행을 이끌어가는 로데오거리도 눈길을 끈다.갤러리아백화점 사거리에서 강남구청까지 3백m의 가로변으로 미국 베벌리 힐스의 세계적인 패션거리 「로데오 드라이브」를 본떠 붙여진 이름이다.세조때 한명회가 갈매기를 벗삼아 한가롭게 노닐던 땅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 것이 고작 75년이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고사성어가 새삼 실감난다.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네거리에 이르는 1.1㎞의 대학로는 젊은이들의 무대이다.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기면서 문화예술단체및 시설들이 대거 들어서자 서울시가 85년 5월 젊음의 거리로 조성했다.무대공연,전시회,연주회가 끊이질 않는 대학로는 옛 정취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문화예술의 메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태원도 6백년 애환이 깃든 거리중 하나다.콜터장군 동상이 서 있던 반포로4거리에서 옛 한남동 면허시험장에 이르는 1.4㎞의 이 거리는 62년 직업군인출신인 황모씨가 「세븐클럽」이라는 미군전용 술집을 열면서 비롯됐다.70년대 미8군 121후송병원이 미8군영내로 옮겨오면서 유흥음식점외에 의류상등 1천2백여곳의 상가가 들어섯으며 88년에는 상가수가 1천8백여곳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는다.압구정일대가 제1의 거리가 될것이라고 아무도 알수 없었듯 압구정이 언제 또 서울의 제1거리 자리에서 물러설지 모를 일이다.
  • 삼일절 아침에…/백남치 국회의원·민자당(굄돌)

    며칠전 2개의 대조적인 신문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정신대로 끌려가 지금껏 태국에 살고 있는 노수복할머니와 친일인사들의 행적을 연구한 이화여대 박은경씨의 논문에 관한 기사였다. 강제로 끌려가 해방후에도 이국 땅에서 여생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노할머니의 사연은 나라 잃은 민족이 겪는 설움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희생자인 그 할머니가 최근 우리 정부로부터 받은 5백만원의 정착금을 태국의 한인2세 장학사업에 기부했다는 기사 내용이었다.노할머니는 이전에도 태국의 한인학교 설립을 위해 3만바트(약90만원)를 기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50여년동안 이국 땅에 머물게 된 사무치는 한과 동포에 대한 무한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인 박은경씨의 논문에 관한 기사는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다.그에 따르면 구한말의 공직자 3천6백여명 가운데 일제하에서도 계속 관리노릇을 했던 사람이 무려 2천4백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를 지켜야 할 위치에서 본분을 못했던 그들이 나라가 망한 후에도망국에 대한 자책은 커녕 자신의 명리를 유지하며 노할머니 같은 사람에게 한숨과 눈물을 뿌리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다. 역사학자 카(E.H.Carr)는 역사는 이끌어 가는 사람과 이끌려 가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 했다.그런데 우리 과거사는 역사를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본분을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비탄속에 살 수 밖에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의 뒤편에 있었던 노할머니 같은 이들의 작은 몸짓들이 지금에 와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들이 보낸 아픈 인생은 진정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우리앞에 놓여진 역사적 과제앞에 자신있게 설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옷깃을 여미고 자신들을 한번씩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 반환돼야할 약탈문화재(사설)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 가운데 1천수백여점이 약탈문화재인 것으로 밝혀졌다.문화체육부가 1차로 공개한 약탈문화재는 일본에 7백46점,프랑스에 3백78점 등이 소장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들 문화재는 국력이 기울어가던 구한말에서 일제식민지통치기간동안에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들이다.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해외유출문화재는 6만4천여점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10만점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산이다.따라서 약탈문화재의 숫자도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훨씬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가장 많이 유출된 것은 일제강점기간중 문화재의 대약탈이 감행되었기 때문이다.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라는 미명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구성,전국의 고분과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그것은 발굴조사가 아니라 유물에만 눈독을 들인 「보물캐기」식 유적파괴였다.1920년대이후 경주를 비롯 가야문화권인 창령,낙낭과 고구려의 유적이 밀집된 평양근교 등에서 야만적인 발굴이 성행하였다.이들 지역에서 수습된 귀중한 유물들은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을 빌려 일본으로 반출되었다.일본의 대학들도 이에 가세,문화재약탈을 도왔다.국권이 상실된 식민지상태에서 자행된 유물의 발굴및 반출은 명백한 약탈행위에 해당된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때(1866)강화도에서 외규장각도서 2백97책을 가져간 것도 전쟁중의 약탈행위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해외에 불법유출된 문화재가 약탈에 의한 것임이 확인된 이상 그것은 원소유국에 반환되어야 마땅하다. 인류문화의 유산인 문화재는 그 문화의 창조자인 출처국에 소재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통념으로 되어 있다.문화재의 약탈과 불법반출을 방지하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0년 「문화재 불법반출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를 위한 협약」을 채택,『불법반출된 국가문화재는 원래의 소유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또한 문화재 원산지반환을 위한 정부간 협의회도 구성됐고 1983년 유엔총회는 문화재반환 촉구결의안을 채택했다.국제법상에도 약탈문화재의 반환은 이행규범으로 공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해 9월 한·불정상회담에서 미테랑대통령이 우리측의 반환 요청에 동의했고 그중 1권이 상징적으로 전달된바 있다.프랑스정부의 이같은 약탈문화재반환조치에 비해 일본의 냉담한 무관심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일본은 우리 문화재의 일본내 전시에서 출토지조차 일부러 밝히지 않는 옹졸함도 보이고 있다.식민지지배기간동안에 약탈해간 문화재는 구체적 실증을 거친뒤 당연히 한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그것이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도리다.
  • 선열의 3월(외언내언)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잃고 그토록 많은 압정에 시달리는 작은 나라 조선이긴 하지만 최후의 희생이 승리를 가져오고서야 끝나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오히려 버리지 않고 있다』님 웰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에서 주인공 김산이 한 말이다. 동북아의 한귀퉁이에 매달려 운명의 불행을 처절하게 지탱하며 세기말의 세계사에서 가물가물 잊힐뻔한 조국을 끌어안고 여전히 독립의 꿈을 버리지않았던 선렬들의 열정이 3월에는 진하게 배어있다. 개방압력을 새로운 시련으로 만나 무한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형편이 구한말의 조선이 처해있던 환경과 너무 흡사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그래도 그토록 암울하던 시련의 터널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분들의 용기를 되새겨봄직하다. 「3·1절」의 달 3월은 각급 학교의 새학기가 시작되기도 하고 새 회계연도가 시작되기도 하는 달이다.그리고 3월은 대지가 잉태한 봄을 싹틔우는 달이다.계절의 신비함따위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게된 메마르고 거칠어진 오늘의사람들은 거의가 무심하지만 그래도 봄은 아름답고 위대하다.우리 안에는 봄이면 일깨워질 수 있는 신선한 혼과 힘이 내재해 있다. 우리앞에는 당장에도 알찐거리는 골칫거리들이 숱하다.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치듯 추락하는 국가경쟁력,다락같이 치솟고싶어 몸살하는 물가,날이 갈수록 황폐해져서 남에게는 한없이 가혹하고 자기에게는 관대해진 사람들,여전히 가랠수 없는 이웃으로 애를 먹이는 북쪽 이웃이 우리의 일상을 에워싸고 있어서 계절같은 것에는 무감한 우리에게 여전히 노여움도 안타고 찾아와주는 봄이 벌써 저만큼 와있다. 우리가 이달의 특성인 열정과 새로움의 감수성을 복원하여 그 값어치를 찾아 지닌다면 한해가 탄탄하게 영글 수 있을 것이다.빛나는 달 3월을 차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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