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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美외교 50년역사 한눈에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과의 외교관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실이탄생했다. 미국주재 한국대사관(대사 李洪九)은 4일(현지시간) 주미대사관 개관 50주년을 맞아 ‘한미외교사료실’을 개관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지낸 장면(張勉)박사의 흉상 제막식과 함께 거행된 이날 개관식에는 국정감사차 워싱턴을 방문한 유흥수 의원 등 국회 통일외교 통상위원들과,학자들을 비롯한 워싱턴지역 주민 등이 참석했다. 이 대사의 노력으로 시작된 이 사료실은 흔적이 사라져가는 지난 50년 동안한·미 외교역사의 각종사료들을 힘들여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으로 앞으로이 분야의 체계적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 의회도서관에서 45년간 재직했던 양기백박사가 고문으로 활동,사료발굴과 수집·정리 등이 이뤄진 이 사료실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담당고문으로 건국과 한국전쟁 당시 대외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 등 각계인사들이 소장했던 사료를 기증받아 전시하게 됨으로써 더욱의미가 깊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옛대사관 청사인 현재의 워싱턴 총영사관 3층에 약15평규모로 마련된 이 사료실에는 구한말 이후 외교사령장과 기록들,역대 외교관 관련 서류 및 사진자료,한미 외교관련 서적,등 400여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최근 국내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장면 박사의 흉상도 건립,고인의업적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함은 물론 한미외교 시작의 의미를 새롭게 했다. 대사관측은 또 한미외교개설 50주년 기념을 기념하는 조형물도 오는 11월 설치할 예정이다. hay@
  • ‘대구라운드 세계대회’ 내일 개막

    미국을 위시한 선진·채권국 중심의 국제금융거래 질서를 타파하고 평등한세계경제질서를 모색하자는 세계 각국의 목소리가 한국에서 하나로 모인다. ‘대구라운드 한국위원회’(위원장 金泳鎬 경북대 경상대학장)는 4일 ‘대구라운드 세계대회’를 오는 6일부터 사흘동안 국내외 시민단체와 학자 등이참가한 가운데 대구 팔공산 대구은행 연수원 등에서 연다고 밝혔다. 이번 대회는 ▲국제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토빈교수가주창한,외환거래에 부과하는 관세 성격의 토빈세 신설 ▲개발도상국 외채 문제의 심각성 및 외채 탕감 ▲IMF(국제통화기금)식 구조조정의 문제점 및 IMF를 비롯한 국제기구 개혁 방안 등을 논의한다. 이번 대회에는 국제투기자본 규제운동을 주도하는 ‘금융거래과세연합(ATTAC)’과 극빈국 외채탕감운동에 앞장서는 ‘주빌리 2000(Jubilee 2000)’를비롯한 국제 NGO(비정부기구)와 참여연대 민주노총을 포함한 국내 시민단체등 100여개 국내외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참가한다. 가트(GATT)창설을 주도한 바그와티(J.Bhagwati)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국제경제론의 권위자 드 베르니스(프랑스)교수 등 세계적 석학들이 참석하고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토빈(J.Tobin)교수도 대회 격려 메시지를 보낼 예정이다. 김영호 위원장은 “투기자본의 횡포와 개발도상국의 외채 증가 등 현 금융세계화시대는 무역세계화 시대와는 달리 극히 위험해 대책이 절실하다”면서“한국이 주도적으로 세계 시민·사회단체와 연대, 투기자본의 횡포를 막고외채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대구라운드란 대구라운드는 세계 각국의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연대,개발도상국이나채무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대응논리를 발전시켜 새로운 쌍방통행형 국제금융질서를 수립하자는 목표로 창설됐다. 지난해 2월 21일 대구에서 열린 국채보상운동 91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김영호 교수가 주창해 지난 5월 ‘대구라운드 한국위원회’가 결성됐고 국제사회의 호응속에 세계대회가열리게 됐다. 한국 최초의 시민운동인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개발도상국이 건전하게 외채를 조달해 생산적으로 활용한 뒤 건전하게 갚을 수 있도록,외환위기→외채위기→대량실업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개발도상국의 위기가 세계경제위기로 이어지는 원인인 브레튼우즈 체제의 일방통행형 질서를타파해 ‘건전한 국제외채·자본질서’를 형성하자는 운동이다. 일반은행이특정기업에 대출해줬다가 회수불능 사태에 빠지면 이자는 물론 원금도 건지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채무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빠져도 채권회수를 보장해주는 IMF 덕택에 가산이자까지 붙여 대출금을회수하는 ‘면책특권’을 누려왔다는 주장이다.
  • [외언내언] 한국철도 100년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1899년 9월18일 경인선 노량진∼제물포 구간이 개통된 후 꼭 100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한국의 철도 개통은 영국 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울린 지 74년,동양에서는 인도 철도가 1853년 처음 부설된 지 46년 만의 일이었다.당시 독립신문은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고 이 문명의 이기에 경탄을 보내고있다.이 기차의 평균시속은 20㎞ 정도였다.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구한말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었다.그는 귀국하면서 철도모형을 가져왔다.그러나 민족자본에 의한 철도건설은 자금난으로 결실을 맺지 못했고 미국인 J R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이 주어졌다.모스는 다시 대륙진출 야망을 품은 일본에 철도 부설권을넘겼고 결국 일본인에 의해 우리 철도가 개통되는 기구한 운명으로 한국 철도사는 시작된다. 경인선에 이어 1905년 경부선,1906년 경의선,1914년 호남선과 경원선,1931년 장항선,1942년 중앙선이 잇달아 개통됐으며 일제는 조선 식민지 착취와침략을 위한 군사물자 수송 수단으로 철도를 이용했다.해방후 한때 철도는국가 기간수송망으로서 화물수송 분담률 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침체의 길을 걷는다.낙후된 서비스도 철도 만성적자의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철도의 대량수송기능과 안정성,정시성 등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한국 철도의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있다.눈꽃 순환열차,정동진 해돋이 열차 등 철도와 낭만을 결합시킨 테마관광열차 상품을 개발한 철도청의 새로운 시도 역시 큰 호응을 얻고 있다.세계적으로도 비행기와 경쟁하는 고속철 시대가 열리고 환경친화적 교통수단으로 철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 33.2㎞에 불과했던 총 철도길이는 현재 6,570.2㎞로 거의 200배로 늘었다.앞으로 남은 과제는 2001년 민영화,2004년 경부고속철도 개통,통일에 대비한 남북철도망 구축이다.우리 철도가 허리가 동강난 국토의한쪽 절반을 벗어나 단절된 경의선(서울∼신의주),경원선(서울∼원산),금강산선(철원∼내금강)을 잇고 더 나아가 중국 횡단철도 및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돼 대륙을 힘차게 달리는 날이 언제쯤 오게 될지 궁금하다.지난 97년 아셈회의에서 아시아 철도망 구축이 합의된 만큼 아시아 철도와 유럽 철도가 이어지는 날도 멀지 않다.‘코레일패스’(Korail-Pass) 한장으로 ‘신(新)실크로드’를 달려 유럽까지 여행하는 날을 꿈꾸며 한국 철도의 새로운 100년을 기대해 본다. 임영숙 논설위원
  • [특별기고] 경험으로 체득한 ‘진정한 자유’ 일깨워

    28일은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 운석(雲石) 장면(張勉·1899∼1966)박사의 탄신 100주년이다.그는 국운이 기울던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치하에서는 교육운동과 종교운동에 헌신하였으며,해방 후에는 신생 조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유엔군의 한국전 참전을 이끌어내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자유당 독재에 맞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이 땅에 구현하는 데 신명을 바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론은 혹평과 호평이 교차하는 평가의 아노미현상을 보이고 있다.과연 그는 5·16군사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해 4·19혁명의 고귀한 이상을 수포로 돌려버린 무능한 인물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맛보여준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가인가? 현재 우리 사회가 다원적시민사회를 건설하고 민간 자율의 경제구조를 확립하며 화해와 관용정신에따른 국민통합을 지향한다면,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이러한 제도와 정신을 실천하려 했던 선각자임에 틀림없다.그가 꿈꾼 세상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이 이뤄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면 그의 삶의 궤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주는지를 정신사적 척도에 의해 평가해야 마땅하다. 돌이켜보면 장면 박사는 독실한 신앙생활을 바탕으로 자기수양과 자녀양육및 부부생활에 성공한 삶을 산,희유(稀有)의 정치지도자였다.그는 이러한 가정적 안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국가와 사회에 되돌리되 자신의 신념을 억압적 수단이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감화를 통해 전파하는 방법을 씀으로써 그를 접한 사람들의 삶에 지속적,장기적 영향을 끼친 구도자적 헌신의 일생을 보냈다.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정신적 유산 중의 하나가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가치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그에게 민주주의란 ‘지도자의질이나 정책의 내용에 대한 가치보다도 오히려 만인이 협력해 그러한 가치를 찾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그는 4·19혁명 이후 방종에 가까운시민들의 자유 구가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상황 속에서도 물리적인 힘에 의한 질서유지보다 시민들에게 자율적 각성의 시간을 주려고 했다.그는 말한다.“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며,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라고. 장면 박사가 우리에게 맛보여준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에 기반을 둔 시민사회의 경험은,어둡고 긴 군사독재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한국의 민주주의운동이 그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우리 모두가 공유한 희망의 기억이었다. 따라서 장면이라는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그 공은 장면에게 돌리고 허물은 그를 에워쌌던 당시 우리 사회 전체의 후진성 내지 미숙성에 돌려야 마땅하다고 본다./허동현 경희대교수
  • 독립운동가 10명 후손 근황

    일제하 독립투쟁에 헌신한 순국선열·애국지사의 후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대의 위업을 현창하면서 꿋꿋하게 살고 있다.더러는 독립운동가 단체에서 활동하는 후손도 있다.몇몇 후손들의 근황을 살펴본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장손 최창규(崔昌圭·63)씨는 서울대 교수 출신으로 국내 최초로 서울대에 ‘한국학’ 과목을 개설한 주인공.국회의원과 독립기념관장을 거쳐 98년부터 성균관 관장으로 재직중이다.의암 유인석 선생의 유일한 손자 유준상(柳濬相·77)씨는 광복회 정화위원회 활동을 주도한 바 있으며 교편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 현재는 은퇴,노후를 보내고 있다. 13도 의병총대장 이인영 선생의 손자 이종갑(李鍾甲·78)씨는 전직 경찰 출신으로 10여년째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조부를 비롯해 숱한 선열들이 순국한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관내 사무실에서 월간지 ‘순국(殉國)’을 발행해 오고 있다.의병장 운강 이강년 선생의 증손 이경규(李經揆·59)씨는 지난해 증조부의 의병전투상황을 기록한 ‘운강창의일록(雲崗倡義日錄)’을 공개한 바 있으며 역시 운강의 ‘작전지도’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바 있다. 초대 임시정부 주석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 이석희(李奭熙·67)씨는 대우그룹 공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통한다.서울대 졸업후 68년 대우그룹에 입사한 이씨는 그룹내 주요기업 사장·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경영일선에서은퇴,㈜대우의 상담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의 부친은 내과의사로 유명했던 이의식(李義植)씨로 해방후 반민특위 검찰관을 지냈으나 6·25때 납북됐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외아들 신수범(申秀凡)씨는 91년 작고했다.지금은 며느리 이덕남(李德南·56)씨가 단재 선생의 기념사업 활동을 하고 있다.단재의손자 신상원(申尙原·28)씨는 올해초 국가정보원에 특채됐는데 이는 단재와같은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李會榮)선생의 손자인 이종찬(李鍾贊) 국민회의 부총재가 안기부장 재직 시절 배려한 결과다. 백암 박은식 선생의 후손은 현 독립기념관장 박유철(朴維徹·61)씨로 박씨는 건설부 행정관료 출신이다.박씨의 부인 양준자(梁俊子·56)씨는 백암과 같이 구한말 항일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같이 근무했던 양기탁(梁起鐸)선생의 손녀다. 임시정부의 상징적 인물인 백범 김구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 김인(金仁)은 해방 직전 타계했으며 차남 김신(金信·77)전교통부장관이 가계를대표하고 있다.올봄 김전장관은 모친을 경기도에서 이장,효창원의 부친 묘소와 합장했으며 조모 곽낙원(郭樂園)여사와 형 김인 선생의 묘소를 대전국립묘지로 이장했다.장남 김진(金振·50)씨는 지난해 11월 주택공사 상임감사(차관급)로 부임했다.현 정권의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배려차원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유족으로는 탤런트 김을동(金乙東·54·여)씨가 잘 알려진 인물이다.장손 김경민(金慶珉·44)씨는 지난 91년 가이후 일본총리의 방한에 항의,탑골공원 맞은편 노상에서 할복자살을기도한 바 있다.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백산 지청천(일명 이청천)장군의 딸 지복영(池復榮·79)여사는 부친과 같은 광복군 출신으로 지난 95년 부친의 일대기‘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끌며-항일 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펴낸 바 있다.지여사는 해방후 교편생활을 거쳐 독립유공자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다. 정운현기자 jwh59@
  • “21세기의 횃불이 되자” 대한매일 창간95년 기념식

    오는 18일 대한매일 창간 95년을 앞두고 이를 축하하는 기념식이 15일 오전 임직원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차일석(車一錫)사장은 기념사에서 “대한매일은 지난해 11월11일 서울신문에서 제호를 바꾼 뒤로 민족정론지로 우뚝 섰다”고 평가하고 “대한매일신보가 구한말 어려운 시기에 횃불이 되었듯이 대한매일도 21세기의 횃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날 기념식에서 25년 근속한 최영기 경영지원본부제작담당 등 125명에게 근속상과 공로상이 수여됐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대한매일 95년] 역사성과 그 정신계승의 의미

    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는 구국 필봉으로 일본 침략을 규탄한 민족언론의 본산이었다.국운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기울던 시기에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민족진영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증인이면서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보려고 분투한 역사의 주체였다. 일본은 네 분야에서 한국 침략정책을 추진하였다.무력침략,외교침략,경제침략,언론침략이 그것이다. 대한매일은 이 네 가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투쟁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였다.국내의 무장항일 투쟁을 무력으로 제압하였으며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등의 국권 탈취도 무력을 앞세운 강압으로체결했다. 대한매일은 일본의 무력을 앞세운 침략을 신랄히 비판하고 항일 의병투쟁을고무,격려하였다.대한매일의 기사와 논설에 감동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의병들이 많았다.일본은 이 신문의 선동으로 항일 무장투쟁이 격렬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에 발행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외교침략에 대해서도 대한매일은 그 실상과 일본의 야욕을 폭로하고 강력히저항하였다.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였고,형식상의 조약 또는 협약을강제하여 국권을 단계적으로 강탈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미국과 맺은 태프트(Taft)­가쯔라(桂太郞)협약,제2차 영일동맹,러시아와의 포츠머스조약과 같은 조약 또는 협약으로 한반도에서의 우월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열강으로부터 한국 강점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대한매일은 이때마다 부당함을 역설하였으며 고종이 영국 특파원 더글러스스토리에게 전달한 밀서를 보도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일본은 경제침략으로 한국 경제를 파탄상태에 이르게 하였다.이에 저항하여 거족적인 민중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매일은 국채보상의연금 총합소가 되었다. 일제는 이를 와해하기 위해서 신문 제작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양기탁을 투옥하여 영·일 간에 외교마찰을 빚기까지 했다.통감부는 침략을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하였다.일제는 친일지 지원과 민족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을 쓰면서 일인들이 직접 한국에서 한국어로 신문을 발행하여친일선전을 일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한매일의 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격동 속에서 대한매일이 창간된 지 95년의 세월이 흘렀다.서울신문은 대한매일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면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다. 대한매일의 역사적 사명은 막중하다.우리의 지정학적 위치는 구한말 대한매일이 창간되던 때나 근 1세기의 세월이 흐른 오늘이나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국은 이해관계를 교차하면서 더욱 복잡미묘한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당시와 비교하면 일본이라는 하나의 침략자가 아니라 더욱 복잡한 도전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군사적으로는 분단의 고통과 동족상잔의 큰 전쟁을 치른후유증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으며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상존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IMF가 끝나지 않았고 앞날도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외교적으로는 더욱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국익의 증대와 통일을 위한 외교력의 강화는 절실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언론의 사명은 막중하다.사회적 위화감과 지역간·계층간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슬기롭게 해소하고 밝은 미래를 향해서 전진할 것인가. 대한매일은 해답을 제시하고 이를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일 책무가 있다.언론사상 가장 빛나는 민족지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 그것이다. 95년 전 창간한 대한매일의 정신을 거울삼아 민족 번영과 화합을 선도하고역사를 긍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한국 언론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에 따른 각오가 새로워야 한다. 정보양 한국외대 교수·언론학
  • 은퇴 원로목사 설문 “한국교회 기업·세속화가 가장 큰 문제”

    한국 개신교 교회의 은퇴 원로목사들은 교회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교회의 기업화,세속화를 꼽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또 묘지난 등으로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는 장례문제에 있어서도 예상과 달리 상당수가 부활신앙으로 인한 매장보다는 화장을 더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 11개교단의 원로목사들로 이루어진 한국교회원로목사회가 최근 은퇴한 원로목사 27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원로목사들은 ‘교회의기업·세속화’(19%)를 교회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으며 이어 ‘신앙의 퇴보’와 ‘목회자의 자세’(각각 15%)를 들었다. 이와함께 ‘교파분열’(14%),‘물량주의’(11%),‘개교회주의’(7%),‘영성훈련 부족’(6%)등을 꼽았다.구한말이나 일제때 출생,당시 핍박과 신앙적인박해로 인한 수난과 공산당의 무신론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강단을 지켜온 교회 원로들로서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원로목사들은 또 교회성장의 판단기준으로 ‘성도의 수’(51%)를 꼽았으며그 다음으로 ‘새벽기도’(20%)와 ‘선교실적’(17%)을 들었다.교회의 교인수에 대해서도 앞으로 ‘증가한다’(38%)와 ‘감소한다’(36%)를 비슷하게예상했으며 ‘같은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26%에 달해 신도수에 대해개신교회가 점차 침체 국면에 들어설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을 그대로 반영해 주었다. 이같은 시점에서 원로목사들은 한국교회의 사명 우선순위를 ‘교육’(43%)과 ‘선교’(41%)에 두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그러나 ‘봉사’는 13%에 그쳐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종교의 사회봉사에는 비교적 인색했다. 이들은 은퇴후의 생활도 계속 전도(74%)나 설교(79%),축도(82%)를 하고 있으며 매일 성경을 읽거나(82%) 기도시간(30분 이상 77%)을 갖고 있었다. 원로목사들은 또 은퇴후 자신의 재산을 교회에 헌납(22%)하거나 사회단체에기증(5%)하기 보다는 자식들에게 상속(48%)하고 있었으며 자식들에게 권고하는 직업으로 교역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편 장례에 대해서는 매장이 81%로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화장을 선호하는사람도 19%에 달했다.장지는 응답자의 41%가 ‘자신이 직접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하거나 ‘자녀(32%)나 교회(16%)가 부담한다’고 대답했지만 경제적으로 장지를 준비할 여력이 없는 원로목사(4%)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찬기자
  • [대한매일 발간 白凡 金九 全集](上) 주요내용

    백범 서거5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사가 출간한 ‘백범김구전집’은 백범의일생과 임정의 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한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본지는 ‘전집’의 주요내용과 편찬과정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를 상·하 두 차례에 걸쳐특집으로 소개한다. ‘백범김구전집’은 일제하에는 조국광복을,해방후에는 자주·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발자취를 처음으로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우선 큰 의의가 있다.‘전집’은 선생이 활동했던 구한말·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해방정국 당시의 관련자료를 포괄적으로수록하였는데 일부 판독이 어려운 자료는 현대문으로 풀거나 일문(日文) 판결자료 등은 국역,부기함으로써 자료의 활용가치를 한층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전12권으로 구성된 ‘전집’은 크게 ‘백범일지’등 선생의 저작물에 대한평가와 동학·의병운동,임시정부 활동,해방후 건국·통일운동,서거후 진상규명·추모 관련자료와 친필휘호·사진 등 총 5부로 나눌 수 있다. ■제1부(1·2권)는 ‘백범일지’와 ‘도왜실기(屠倭實記) 등 선생의 친필저작을 해독,직해본으로 부기하였다.‘백범일지’는 선생이 1926년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한 후 살아서 환국할 수 없다고 판단,두 아들(仁·信)에게 집안내력과 자신의 이력을 유서격으로 쓴 것으로 상해시절에 쓴 ‘상권’,1941년 중경에서 쓴 ‘하권’,그리고 환국후 서울에서 쓴 ‘하권의 계속분’ 등 3부작으로 구성돼 있다.‘백범일지’는 해방후 춘원 이광수가 내용중 일부를 윤문하여 1947년 국사원에서 초간본을 출간했는데 이승만정권 시절 한때 금서로 취급받기도 했다.‘전집’에는 이본·판본에 대한 해제·평가도 곁들이고 있다. ■제2부(3권)는 선생의 일생중에서 잘 알려지지않은 청년기를 다룬 부분으로 선생이 17세때 과거에 낙방한 후 동학에 입문,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내용과 청일전쟁 후 반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청나라의 요동(遼東)지역을 원정한사실을 당시 자료로 복원하였다.또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원수를갚기 위해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소위 ‘치하포사건’을 규장각 자료와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관자료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청년백범’이 질풍노도기를 거쳐 자기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해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밖에 안악·신민회사건 관련 내용은 판결문을 번역,부기하였다. ■제3부(4·5·6·7권)는 백범과 임시정부 관련자료의 집대성이다.4권은 임정의 상해(上海)시기(1919.4∼1932.4)와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의 이동시기(1932.5∼1938.11)등 임정의 20년 역사를 임시정부 일반·한인애국단·정당·군관학교 등 네 분야의 자료로 재구성한 것이다.총325건.5권은 임정이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해방때까지 활동한 기록을 엮은 것으로 당시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한국광복군 통수권자 등을 맡아 임정과 광복군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활동하였다.자료 속에는 중경시절 선생 명의로 신문·잡지 등에 발표한 글과 선생의 영문 전기(傳記)도 2건 포함돼 있다.총175건.6권자료는 한독당과 광복군 관련자료를 특화하여 편찬한 것으로 광복군 창설과 관련,중국측과의 교섭자료가 상당수 포함돼 있다.총168건.제7권은선생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총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중국측의 지원·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중국측 인사와 주고받은 공함(公函)·간찰들로 이 가운데는 임정 승인문제를 둘러싼 중국내부의 공함들도 포함돼 있다.총318건. ■제4부는 환국후 백범의 건국·통일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국내자료(8권)와 미국측 자료(9권)로 나뉘어져 있다.국내자료는 당시의 신문자료와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1945.9.3) 등 선생 명의의 성명서·연설문·담화문 등을 망라했다.미국자료는 당시 임정세력과 국내정치권에 대한 미군정과정보기관의 보고서·메모록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분석한 것이다. ■제5부는 선생의 서거후 암살 진상규명 관련자료(12권)와 추모록(10권),그리고 선생의 친필휘호·사진(11권)등을 엮은 것이다.친필휘호 가운데는 이번 ‘전집’간행을 계기로 경향각지에서 수집된,‘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등 선생의 대표적 휘호 200여 점이 수록됐으며,암살진상규명 부분에서는 서거 이후 최근까지의 관련자료가 망라됐다.부록으로는 선생의 연보·연구논저목록을 수록했다. ‘전집’에 수록된 자료는 그동안 국내·외에 산재한 백범·독립운동 관련자료를 집대성한 것으로 상당수는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국내자료는 백범기념사업회와 유족이 소장중인 자료를 비롯해 독립기념관·국사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규장각·정부기록보존소·국립중앙도서관 등 관련기관과 개인소장 자료를 모은 것으로 1925년 전후 나석주(羅錫疇)의사가선생에게 보낸 편지 7통 등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해외자료 가운데 대만자료는 총통부 당안관·중국국민당 당사위원회·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국사관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상당수가 최초공개 자료다. 미국자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하버드대 옌칭연구소·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등에서 입수한 것으로 광복군의 OSS 관련문서·사진,해방공간의 자료 등이 보완되었다.일본 외무성사료관에서는 윤봉길·이봉창 등 한인애국단 관련자료가 상당수 발견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대한매일신보 초대사장 배설 삶 영화화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구한말 국권수호와 민족정기 고양의 기치를높이 들고 항일구국 운동에 나선 대한매일신보의 초대사장 배설(裴說·영국명 베델)의 활약상이 영화화된다.한맥영화사 김형준사장은 “외국인으로서항일운동에 목숨을 바친 배설의 삶은 해외에서도 충분히 관심을 끌 수 있는소재”라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구한말의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가 없어 새천년을 앞둔 시점에서 그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는 “배설이 영국인인 만큼 영국 영화인으로서 ‘마지막 황제’를 제작한 제레미 토머스와 이 문제를 협의중”이라면서 “미국 할리우드의 쿠쉬너 락사도 영국의 제작이 확정되면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영국인이 시나리오를 쓰고 한국,영국,미국 등 3국이 합작하는 대작이 되도록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이 작품에는 대략 360억원정도가투입될 것으로 예상된다.이는 구한말의 풍경이 대부분 사라진 탓에 많은 세트를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이 작품은 이르면 2001년제작완료될 전망이다. 한맥영화사는 현재 상영중인 ‘링’을 제작했으며 ‘가슴달린 남자’‘피아노맨’‘죽이는 이야기’‘사랑하기 좋은 날’등을 만들었다. 배설은 1904년 국내최초의 민족정론지인 대한매일신보의 창간때부터 1908년 일제의 술책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옥살이를 하기 전까지 사장을 맡았다.대한매일신보는 배설사장 시절 일본제국에 진 빚을 갚는 국채보상운동을주도했고 의병활동을 집중보도해 일제의 갖은 탄압을 겪었다.당시 대한매일신보에는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선생등이 포진,우국의 기개를 떨쳤다. 배설은 옥고를 치른뒤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1909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떠났다.그는 “한국을 위해 위험을 피하지 않는 것이 나의 직책인 만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명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대로 신명을 한국에바친 영원한 한국인의 벗으로 남아있다. 그는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묘지에 안장돼있다.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이튿날인 1910년 8월30일 매일신보로 개제돼 일제의 기관지(매일신보)로전락하는 운명을 맞았다. 박재범기자 ja
  • 정동제일교회는 항일운동의 산실

    우리 근대사에서 교회는 기독교전파 이외에도 서구 근대문명 도입과 일제하애국계몽·항일운동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특히 정동제일교회는 구한말 외교 중심가였던 정동(貞洞)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양대 선구세력이었던 기독교세력과 민족세력을 규합,근대 한국 지도자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지난달 30일 정동제일교회(담임 조영준 목사)는 제1회 아펜젤러 학술강좌를열고 정동제일교회 관계자들이 3·1의거와 상해 임시정부수립 등 독립운동에적극 가담한 사실에 대한 학술평가모임을 개최했다. 조영준 담임목사는 주제설교를 통해 이 교회의 최초 한인 담임목사를 역임한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1858∼1927)목사의 충군·애국사상을 소개하면서 “탁사 선생은 한국 최초의 비교종교학자로 토착신학을 통해 한국 감리교의 기초를 닦은 주인공으로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이 땅에 기독교 문화의꽃을 피운 분”이라고 평가했다. 배재학당 교사시절 선교사들과 교분을 쌓은 인연으로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가 된 탁사는 이 교회 부담임목사로재직중아펜젤러가 순직하자 이 교회의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탁사는 특히 국권상실기에 교회내 엡윗청년회를 중심으로 ‘을사조약’반대운동을전개하였으며 협성회,독립협회,황성기독청년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또 애국강연과 언론활동으로 동포들의 애국혼을 일깨우기도 했으며 1922년 은퇴 후에는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주로 강의하였다.이밖에 신소설 ‘성산명경(聖山明鏡)’,천주교와 기독교를 최초로 비교분석한 논문 ‘예수·천주 양교변론(兩敎辨論)’ 등을 저술하였다. 탁사에 이어 제5대 담임목사를 지낸 현순(玄楯·1880∼1968)목사,6대 담임목사를 지낸 손정도(孫貞道·1872∼1931)목사 등이 모두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민족지사.현목사는 3·1의거 당시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에 밀파되어 임시정부 수립에 깊이 관여하였다.임정 수립후 외무·내무차장을 역임한 현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 서리에 추대돼 외교활동을 펴기도 했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는 3·1의거 참가후 상하이로 망명,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애국지사.2부 발표에서 발제자로 나선 이현희(李炫熙) 성신여대 교수는 ‘손정도 목사와 상해임시정부’라는 논문을 통해 “손목사는평소 혈전으로 독립을 쟁취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주땅에 대한민국 독립정부를 세우고자 했던 분”이라고 말했다.이교수는 1918년 손목사가 신병을 이유로 정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한 것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현목사,의친왕 이강공(李堈公)과 함께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고 밝혔다.최근 발굴된 ‘현순 자사(玄楯 自史)’에 따르면 당시 손목사는 입정(立丁),현목사는 석정(石丁),최창식(崔昌植)은 운정(雲丁)이라는 암호명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이강공을 중심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면서 각자 역할분담을위해 사용했다는 것.즉 立丁(손정도)은 ‘丁’(고종의 밀명)을 立(세운다)한다는 뜻으로 그 바탕은 石丁(현순)이,심부름은 雲丁(최창식)의 몫이었다는것이 이교수의 해독법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역사속으로’내고장 탐방교실 붐

    자치구들이 주민의 애향심 고취와 일체감 조성을 위해 경쟁적으로 마련한내고장탐방 프로그램들이 주민들로부터 대인기다.학생들에게는 산교육 실현의 장으로서 더할나위 없이 적합하고 부모들로서도 자녀의 교과과정에 도움이 될뿐더러 스스로 역사의식을 키울수 있는 요긴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강서구의 ‘정보문화투어’는 자치구 탐방 프로그램의 인기를 실감하게 해주는 대표적 사례.참가신청을 받은지 닷새만에 1,000여명의 초등학생이 몰려 6월말(30차분)까지의 마감이 끝났다.매주 2차례 실시하는 횟수를 늘려달라는 의견이 쇄도,관계자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투어에 참가한 학생들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은 양천향교와 겸재 정선(鄭敾)이 즐겨 찾던 소악루,동의보감 집필자 허준(許浚)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구암공원,양천 허씨의 발원지로 알려진 허가바위 등을 둘러보게 되며 향교에서는 성균관 소속 유생들로부터 직접 생활방식과 예절교육도 받는다. 양천구의 ‘우리고장 알기’ 탐방교실은 역사교육 뿐아니라 환경교육에도신경을 쓴 것이특징.양천자원회수시설을 방문해 쓰레기 반입장과 투입장,중앙감시시설 등을 둘러보고 쓰레기문제의 심각성과 해결책,분리수거의 타당성을 배운다.또 신월정수사업소를 찾아 정수과정과 중앙제어실 등에서 하는 일을 둘러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게 된다. 문화유적지가 한데 몰려있는 중구 역시 초·중학생을 대상으로 탐방교실을마련,신청받은 결과 11월까지의 정원(1,215명)이 이미 동났다. 중구에서 문화재관리를 담당했던 변형식(邊亨植)씨가 강사를 맡아 경복궁,창경궁,덕수궁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왕궁과 숭례문,남산골 한옥마을 등유명 문화재와 안중근의사 기념관,백범광장 등을 돌아보며 유구한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종로구는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도 참가하는 역사문화 탐방코스를 개발했다. 지난 28일 시작한 탐방교실은 향토사학자 이홍환(李弘煥)씨의 설명과 안내로 종묘,창경궁,운현궁,북악팔각정 등을 견학한다. 앞으로 인사동 전통문화의 거리,세검정길,구한말 역사현장,백제의 옛자취등 다양한 탐방코스를 개발,운영해나갈 계획이며 방학중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견학코스를 구상중이다. 강서구 관계자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느낄 수 있는데다 현장실습 위주로전환하고 있는 학교교육과도 잘 맞아떨어져 탐방교실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 특별기고-방치되는 인재관리

    인간의 생활과 역사는 창조와 혁신에 의해서 발전해온 것이다.창조와 혁신이 없으면 항상 남의 흉내만 내기 바쁘다.21세기는 창조와 모방이 숨가쁘게 진행될 것을 예상한다.거기에 맞추어 가자니 우리도 각 방면에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다.그것도 한꺼번에 고치자니 고치기도 어렵고 말썽도 많다.교육개혁에 말썽이 많은 것도 그 때문으로 안다.어떻게 해야 올바른 지식을 개발할수 있는 교육이 될수 있는가.올바른 인간상을 어떻게 하여야 키울수 있는가.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그런데 정부로서 각 분야에 대한 종합계획을 세운 것으로 아는데 지식관리에 대한 ‘백서’는 없다.국어연구소는 문화부에 있고,국사연구소는 교육부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옛날 전통시대 지식관리의 하나로 과거제도가 있었다.과거제는 958년에 실시하여 1894년 폐지할 때까지 근 1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따라서 그영향은 각 방면에 심각하게 미쳤다.운영의 잘 잘못은 두고,우선 인물을 객관적으로 선발할 수 있었고,시골에 묻혀 있는 인재까지 등용할수 있었다.그러므로 서울에 모여 살 필요없이 시골에 살아도 공부만 하면 과거를 통하여 출세할수 있었으니까 문화의 지방화가 촉진되어 문화공간을 전국으로 확대시켰다.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지방마다 문화의 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과거제 내용이 중국문자와 중국역사와 사상을 시험하는 것이었으므로 중국문자와 문화의 발달을 촉진하였다.그리하여 한자가 우리 문자라는 말까지 하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그리고 서울에 앉아서 지방까지 통할하는 중앙집권적 전통이 서게 되었다.그래서 지방분권적 봉건국가 형성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그리고 무엇보다 수험생의 창의적 지식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중국 고전에 관한 것을 시험했다.중국고전을 시험하여 한국관리를 뽑았다는것 자체가 넌센스였지만,고전을 시험한다는 것은 지식을 고전에 묶어 둔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러니까 구한말에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해오는데도 그의대처 논리를 고전속에서 찾았다. 고전을 성전시하여 변용하지도 않았으므로 새 시대에 맞지도 않는 고전시대 국가관계에서 해결책을찾았다.고전을 변용하다가 보면 자칫 ‘사문난적’으로 몰려 생명을 잃을 위험이 있었다.고전을 변용하자면 고전을 비판할 수있어야 하는데 감히 비판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그러다가 보니 지식의 생명인 창조와 혁신을 지식을 통해서 얻기 힘들게 되었다. 오늘날의 시험제도에는 그럴 염려가 없는가.오랫동안 끌어오던 대학 입학시험을 보자.교과서 범위 안에서 출제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그럴 이유가 무엇인가.수험생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그러니 그것이 오히려 수험생전체를 시험지옥에 묶는 결과를 가져왔다.교과서 내용의 사소한 것까지 기계적으로 외우게 강요하는 것이 정말 시험지옥이다.그것은 교과서 이상의 창의적 사고를 키우지 못한다.교과서를 기본으로 하더라도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 얻은 지식을 시험한다면 오히려 시험지옥에서 해방할수 있다.또 그런 지식이어야 창조와 혁신의 힘을 생산할 값있는 지식이 될수 있다.입시제가 없어진다지만 각종 시험에서 유의할 점일 것이다. 다음에 학문적으로는 기초학문을 발달시켜야 한다.창조와 혁신을 낳을수 있는 지식은 기초학문에서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기초과학이라야 먼저 창조능력을 키울수 있고,창조능력이 있어야 혁신도 꾀할수 있다.그렇다면 창조와혁신의 동력을 발휘할 기초학문을 발달시킬 책임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그것은 대학이다.그래서 대학을 지식이나 진리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대학에서 구조개혁이라고 해서 교육과정을 고치고 있는데 듣자 하니 스스로 지식의 전당을 무너뜨리고 있다.구조개혁의 기준을 기업체처럼 돈에 두고 있는 것이다.학점을 줄이고 강좌목을 줄이고 교수인력을 줄이고 있다.줄이는 가운데 희생되는 학문은 소속 성격이 약한 기초학문이다.그리하여 대학이 직업훈련소로 변하고 있다. 전문학교를 모두 대학이라고 부르기로 했으니까 대학의 의미는 옛날과 달라졌다는 것은 안다.이름이야 어떻게 해도 좋으니 그렇다면 ‘대학원 대학’이라도 설치해서 대학 본연의 모습을 지키는 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그래서 학문의 길과 직업훈련의 길을 분간해 두는 것이 좋다.어떻게 하든지 간에정부가 있다면 지식관리의 종합적 백서라도 나와야 하지 않는가.오늘날 ‘신지식인’이라는 것은 어떤 지식을 말하는지도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사학
  • [정직한역사되찾기]연재를 마치며-자료제공·격려해준 독자에 감사

    작년 8월14일자로 첫회 연재를 시작한 ‘친일의 군상’은 연재 8개월만에 34회로 나래를 접는다.이 연재물은 본지가 과거 ‘서울신문’의 구각을 벗고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뿌리를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한 야심작이었다. 한국언론사에서 일간지 사상 처음으로 시작한 이 연재는 시작 전부터 학계와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해방후 반민특위의 좌절로 친일파 문제는 ‘역사의 미라’처럼 썩지 않은 채 논란의 여지로 남겨져 왔다.그러나 언론계는 물론 역사학계조차 정치적 상황을 이유로 한동안 이 문제를 외면해왔다.오직 재야사학자 임종국만이 외로운 길을 가며 평생을 이 분야 연구에바쳤을 뿐이다.이 연재는 그가 뿌린 씨앗이 싹 하나를 움틔운 것이라고 할수 있겠다. 본사가 이 연재를 시작한 취지 중의 하나는 금세기에 발생한 역사적 문제는 금세기에 마무리하고 넘어가자는 역사적 사명의식에서였다. 수년전 모 일간지에서도 이같은 내용의 연재를 시도한 적이 있다.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그때만 해도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했던 탓인지도 모른다.따라서 이번에 본지가 이 연재를 기획,실행에 옮길 수있었던 것은 50년만의 정권교체와 같은 우리사회의 대변혁이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연재기간중 자료제공과 함께 편지나 전화로 격려해주신 독자여러분께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특히 자신의 부친이 연재대상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자료제공과 함께 호의를 베풀어주신 파인 김동환의 자제 김영식 선생에게 특별히 감사드린다.본 연재물은 대상인물을 일부 추가하여 조만간 단행본으로선보일 예정이다. 정운현기자
  • 고종황제 侍醫 獨분쉬박사 일기·편지모음 출간

    ‘한국 여인의 해산을 도와준 대가로 참외 한 개를 받았습니다.’고종황제의 시의(侍醫)로 일하던 독일인 의사 리하르트 분쉬 박사가 1902년 부모님에게보낸 이러한 편지 내용은 100년전 우리 사회가 지금과 얼마나 다른 세상이었나를 전해준다.20세기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급속한 변화의 시대였지만 20세기 초 생활상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너무 낯설다. 구한말의 낯선 사회상과 열강들의 각축 상황 등을 서양인의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기록한 ‘고종의 독일인 의사 분쉬’가 학고재에서 나왔다. 이 책은 1901년 11월부터 4년 남짓 한국에 머물었던 분쉬 박사의 편지와 일기를 그의 사후 65년 만에 딸인 게르트루트 클라우센­분쉬 여사가 1976년독일에서 출판한 ‘동아시아의 의사’중에서 한국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번역한 것이다.(김종대 옮김 9,000원). 이 책을 읽어나가면 분쉬 박사의 눈에 비친 궁핍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의편린들이 부패한 정치와 열강들의 야욕 속에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분쉬 박사는 궁핍한 생활로 민중들은 고통받고 많은도둑이 들끓고 있다고쓰고 있다.“도둑맞는 일이 워낙 흔해서 엄청난 손해만 입지 않으면 다행입니다.특히 날씨가 추울 때는 땔감창고나 석탄창고를 잘 지켜야 합니다.”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도 국가는 무기력하고 관료들은 부패하여 부당이익만 챙기다는 그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아프게 되새겨야할 교훈이다.“황제는 항상 생명에 위협을 느껴 궁을 떠나지 않습니다.모든 행정기구가 불안정하고 신용도 없고 아졸들이 고관에 줄을 대어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부당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분쉬 박사가 기록으로 남긴 부패한 정치와 열강들의 경쟁 속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은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그는 황실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외교관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부패한 정치의 실상과 열강들의 미묘한 알력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물포항은 전함으로 빽빽합니다.영국·미국·러시아·일본의 전함들입니다.일본은 비밀리에 군대를 도시에 주둔시키고 일이 터지면 즉각 대처하려고 노동자처럼 평상복을 입고 시내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은 당시에도 많은 파티를 즐겼으며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더 많이쓰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의료행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지금과 전혀다른 그 당시 사회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한국인들은 진료받는 것을마치 자선을 베푸는 것같이 생각하며 진료비를 내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게다가 국민의 신앙심에 어긋난다 하여 해부를 금지하고 있습니다.”李昌淳 cslee@
  • [특별기고]’바다 정치학’을 일으키자

    한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그래서 바다를 좋아하고 바다와 얽힌 이야기가 많다.그 때문에 바다로 뻗어나가야 한다는 국가경영론이 대두하고 있다.그런데 이번 한·일 어업협정의 체결 과정을 보면서 그것은 아득한 꿈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다.정부를 보나,국회를 보나,수협을 보나 바다에 우리의 국력을 심는다는 것은 꿈도 꾸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느꼈다. 파도가 넘실대는 넓은 바다는 사람에게 낭만도 안겨주지만 넓은 포부와 용기를 북돋워 준다.그래서 항구에는 시와 예술이 넘치고 변혁기에는 혁명의선두주자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이탈리아 통일전쟁때의 사르데냐,미국 독립혁명때의 보스턴,프랑스혁명때의 마르세유,한국 4·19혁명때 마산 시민의경우가 그랬다.지리결정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그 좋은 바다가 지금 우리에게는 원망스러운 존재가 되고 있다.고기를 잡으러 나갔지만 정치인들이 물 위에 그어놓은 어로선 때문에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형편이다. 삼국시대만 해도 ‘바다정치’라는 것이 있었다.그래서 신라 문무왕은 바닷속에 자기의 무덤을 썼고,장보고는 동북아시아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왕륭은 바다를 경략한 후 호족으로 성장하여 아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기초를 닦았다.그런데 그 후에는 바다정치가 점점 쇠퇴해갔다.삼별초군이 진도와 제주도에 해상왕국을 건설할 꿈을 불태웠던 것이나 임진왜란때 이순신의업적은 어쩌면 돌연변이와도 같은 이야기이다.그러기에 이순신의 업적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쇠퇴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대한 봉금정책을 썼다고 해야 할 것이다.그것이 독도에 대한 공도(空島)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정부가 바다를 방치하면 해적이나마 득실댈 터인데 해적의 이야기도 없다.중국이나 일본 해적에 눌려 없었다고 할는지 모르나,그렇다면 송사리 해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어찌된 영문인가.그러느라고 바다는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져 갔다. 그리하여 중앙박물관에 가도,혹은 민속박물관에 가도 바다의 유물은 별로없다.일본 오사카의 민족박물관 전시와 비교가 된다.바다 경영의 유물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는 생활과 무관했다는 이야기가 된다.그러다보니 바다에 대한 관심은 멀어져 갔고 ‘바다의 정치학’이 없게 되었다. 구한말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했던 때도 해상의병이 있기는 했으나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하였다.그래서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 그를 빙자하여 해안에 망루를 설치했는데 동해안에20여개를 설치했다.그리하여 바다는 모두 점령되고 말았다.그때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1913년 춘천헌병대장(강원도경찰국장)이 발행한 ‘강원도상황경개(江原道狀況梗槪)’라는 책을 보면 동해와 동해안이 진작부터 일본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것은 1908년 일본인의 손으로 편찬한 방대한 책인 ‘한국수산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때는 그때라고 하자.지금은 왜 그런가.신문마다 어업협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쌍끌이조업,복어채낚기어장,활오징어어장,독도문제,남해 대륙붕어장문제 등이 잘못되었다고 한다.협상 진행중에 사무관 경질로 차질을빚었다는 말이,말이 되는가 말이다.큰소리치던 추가협상도 잘못되었다고 한다.잘못된 이유는 방심한 것,준비 부족,통계가 없었다는 것 등이었다.해양수산부는 무엇을 했고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수산업협동조합은 무엇을 하는 기관인가. 추가협상 전인 지난 2월23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서 독도문제를 포함하여 어업협정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이 있었는데,정부측 답변은 협정에 반대한 학자는 3명뿐이었다고 했다.지난해 9월 대통령이 도일할 때 지식인 100명이 신중한 대일 교섭을 건의했고,그래도 안되어 국회 비준에 앞서 비준 부결을 위하여 교수 700여명이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는가 하면,문화인 707명과 역사학 교수 333명이 비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청와대,정부,국회와 국회의원 각자에게 그 성명서를 전달했는데 반대자가 3명뿐이라니 무슨 말인가. 그럴 정도면 준비가 있고 없고가 문제되지 않는다.국가경영이 서툴더라도정성이나마 쏟아야 하지 않는가.어민도 이제는 부디 자기 세계를 개척하기바란다.어민총연합회를 크게 키우자.그리고 ‘바다 정치학’을 일으키자.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사학
  • [제2공화국과 張勉] (6) 尹潽善과의 갈등(上)/장면·윤보선

    1960년 8월19일 오후 1시24분 ‘張勉총리 인준’투표를 막 끝마친 민의원 본회의장에는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두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은 장면이 인준에 성공해 취임할 것인가,아니면 그마저 실패해 정국이 계속 표류할 것인가. 1시37분 郭尙勳 민의원의장이 결과를 발표했다. “총투표수 225,가(可)에 117,부(否)에 107,기권 1.가가 정족수인 과반수이상이므로 가결된 것을 선포합니다.”4·19가 일어난 지 딱 4개월 만에 민주혁명 수행의 대임(大任)이 장면에게맡겨지는 순간이었다.총리가 된 장면은 곧바로 그를 지명해준 尹潽善대통령을 청와대로 찾아가 취임인사를 한다. 장면과 윤보선의 이날 만남은 유쾌해야 마땅한 자리였다.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한 지 5년 만에 ‘李承晩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새 정치의 주역이 된 두 사람이었다.같은 당의 오랜 동지인 총리와 대통령은 ‘4·19정신’을현실정치에 구현하고자 서로를 격려하고 협조를 다짐했을 법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어색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했다.‘총리 지명’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당 신·구파간 갈등이 앙금으로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진 뒤 정권을 맡을 정치세력으로는 민주당이유일했다.민심도 이를 인정해 7월29일 치른 민의원·참의원(상원)선거에서민주당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민의원 219개 선거구에서 민주당은 무려 172석(78.5%)을 차지했다. 문제는 민주당 신·구파가 우열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팽팽한 의석 분포를이룬 사실이었다.따라서 신·구파 모두 내각책임제에서 국정을 실질적으로책임지는 국무총리를 차지하려고 암투에 들어갔다. 그즈음 민주당 지도층의 면면을 보면 장면이 단연 으뜸이었다.그는 56년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됐고,‘3·15선거’에서는 자유당의 부정 탓에 낙선했지만 민주당의 대표주자였다.게다가 59년 11월부터 당수인 대표최고위원을맡아왔다. 반면 구파쪽은 조병옥 서거 후 명확한 리더가 없었다.당시 구파였던 高興門(국회부의장 역임,98년 작고)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조병옥이 없는 민주당은 곧 신파인 장면의 천하가 될게 분명해 보였다.민주당 내에서 국민적 인기로 보아 그에 맞설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평소 말이 없는 윤보선과 고집이 센 金度演이 있었으나 장면의 맞수는 아니었다.”국민 여론이나 당내 인식이 이같았는데도 구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김도연을 총리로 밀어 두 자리를 독점한다는 전략을 세웠다.그 까닭은 국회 부의장선거에서 표대결로 신파를 누른 적이 있어 자신을 가진 데다 구파 내 세력이 윤보선·김도연으로 양분돼 양쪽을 함께 배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파는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해 구파에게 일단 한 자리를 준 뒤 총리는 자파의 장면이 차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8월12일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은 208표(재석 259명)를 얻어당선된다.이제 관심은 윤대통령이 누구를 총리로 지명할 것인가에 쏠렸다.신파의원들이나 국민 대다수는 ‘설마 구파가 총리까지 차지하겠느냐’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고 구파 내에서도 鄭憲柱·閔寬植의원 같은 이들은 정치 도의를 내세워 독점에 반대했다. 8월16일 윤대통령은 김도연을 총리로 지명한다.통보를 받은 민의원의장 곽상훈은 장면을 지명하리라는 믿음이 깨지자 즉시 청와대로 쫓아가 항의한다.윤대통령의 해명을 들은 그는 “아마 김도연씨는 안 될거요” 라고 말하고는물러나와 김도연의 총리 인준을 적극 방해한다(회고록에서 발췌). 김도연은 다음날 총리 인준 투표에서 정족수보다 3표 모자라게 득표해 인준에 실패한다.8월18일 윤대통령은 장면을 총리로 2차 지명했고 장면은 다음날 인준을 받는 데 성공한다. 60년 8월 민주당의 선택은 마땅히 장면이어야 했다.그런데도 당내 파벌의 이익을 앞세워 김도연을 1차로 총리 지명하는 바람에 신·구파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렇다고 신·구파 갈등이 장면총리와 윤보선대통령에게 그대로 옮겨갈 이유는 없었다.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당적(黨籍)을 떠나 국내정치에 초연하게끔 자리매김돼 있었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이후에도 구파의 지도자처럼 행세하며 장면총리와 팽팽한긴장관계를 유지한다.그리고 그 긴장은 정치불안의 주요소로 작용한다. 이용원- 張勉과 尹潽善 장면과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총리와 대통령으로 만날 때까지 외형상 비슷한 삶을 살아온 듯 보인다.둘 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해외유학을 다녀오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차근차근 위상을 높여나간다.그러나 그같은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장면은 인천세관 간부인 張箕彬의 맏아들로 출생해 21살때 카톨릭측의 주선으로 도미,뉴욕 맨해튼대에서 교육학·종교철학 등을 공부한다.귀국해 잠시카톨릭 평양교구 일을 보다 서울 동성상업학교에서 교직을 시작,그 학교 교장으로서 광복을 맞는다. 윤보선은 구한말 중추원 의관을 지낸 尹致昭의 장남으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다.본인말고도 6촌 이내에 집권당 당의장서리,장관,서울대총장 등 장·차관 이상만 13명이 나온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이다.영국 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을 배웠다. 둘은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장면만 당선된다.윤보선은 54년 3대 의원 선거때 비로소 국회에 진출한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장면은 UN총회 한국수석대표,초대 주미대사,제2대 국무총리를 잇따라 하며 건국의 기초를 닦는 데 큰 공을 세운다.이 기간 윤보선은 4대 서울시장,2대 상공장관을 지내지만 각각 재임기간이 1년도 안돼 물러난다. 두 사람은 55년 출범한 민주당에서 한식구가 된다.장면은 처음부터 최고위원 5명 가운데 하나였고 신파의 지도자였다.56년 부통령으로 당선된 데 이어 59년 전당대회때는 대통령후보 경쟁에서 조병옥에게 지지만 대표최고위원 선출에서는 조병옥을 누른다.윤보선은 이 대회에서 조병옥의 구파 몫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최고위원이 된다. 60년 8월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정치적인 경력에서 장면은 단연 윤보선을 앞선다.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장면은 삶의 어느 시점에서 무슨 일을 했건 ‘성실하고 근면했다’는 점에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반면 윤보선은 달랐다.이는 66년에 발표한 회고록(‘사실의 전부를 기술하다’에 수록)에서 스스로 밝힌 심경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윤보선은 상공장관에 취임해 “업무를 거의 파악한 서너달 후엔 벌써 입맛이 떨어져 버렸다”고밝혔으며,국회에 진출해 원내총무를 맡고는 “사임을 해도 안받아줘 병 난 것을 기화로 부산에 내려가 요양하며 겨우 수리시켰다”고 회상했다.심지어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찾은 민원인들로부터 들은 여러가지 하소연 내용을 설명하고는 “이같이 되풀이되는 고통은 하루빨리 청와대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만 굳혀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러던 그가 5·16쿠데타 후에는 애매모호한 태도로 열달 동안 대통령직을유지한다.청와대를 떠난 뒤 반(反)朴正熙 투쟁의 선봉에 서지만 박정희 사후 또 한차례 변신한다.全斗煥정권을 인정하고 87년 대선에서 盧泰愚를 지지한 것이다. 이같은 윤보선의 정치역정을 두고 학자들은 ‘명사(名士)정치’의 한 행태로 풀이한다.劉載一 대전대 정외과교수는 “명사정치의 특징은 시대적 과제를고민하기 보다 권력 획득,품위유지에 더 집중하는 데 있다”면서 “따라서명사 정치인들은 종종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비슷한 궤적을 걸은 듯한 장면과 윤보선의 삶에는 이처럼 본질적인 차이가있었다.이는 제2공화국 붕괴의 책임을 재조명할 때 필히 고려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이용원
  • [특별기고]의식전환론

    구한말 괴질이라 부르던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장안을 휩쓸고 있을 때 예방이나 치료가 무방비였던 탓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괴질이 북쪽에서 내려왔다고 여긴 평안감사는 다음과 같은 영(令)을 내렸다.“이 괴질은 만주 쪽에서 오는 것이니 그 길목에 장승을 세워라.띄엄띄엄 한 길을 가로질러 개골창을 파서 괴질이 오다가 빠져죽게 하라” 평양성을 다스리던 최고관리의 수준을 짐작케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평양주재 선교사였던 마펫은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날것을 먹지 마십시오.설익은 참외도 먹지말고 물은 반드시 끓여서 먹어야 합니다.또 옷은 깨끗이 빨아입고 집 안팎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그러나 장승문화에 세뇌된 당시 관료들이나 백성들의 호응은 냉담했다. 삶의 질을 높이고 민주 사회의 역량을 발휘하려면 시민의식의 전환이 요청된다.장승을 세우고 개골창을 파 번지는 괴질을 막겠다는 의식수준이라면 한참 뒤처진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염원했던 민주주의만 해도 그렇다.이 땅에 민주주의의 꽃을 만개시키려면 거기에 걸맞은 민주시민 의식의 전환이 선행되어야 하고 민중을 계도하는 지도계층의 자질과 수준도 향상되어야 한다. 1899년 전차가 서울 장안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을 무렵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점쟁이들은 쇳덩어리로 만든 괴물체가 장안을 휘젓고 다니기때문에 비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퍼뜨렸고,시민들은 곱지 않은 눈으로 전차를 바라보았다고 한다.그 때 그 사람들이 21세기 정보통신혁명의 현란한 현장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이라 말했을까 궁금하다. 생활의 과학화라든지 삶의 질을 높이려는 일련의 사회적 노력은 거기에 걸맞은 의식의 전환이 전제돼야 한다.그런 면에서 전통문화와 미신행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전통문화의 전승이나 보존이라는 이유로 미신행위를 조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후진 사회화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크메르가한창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일식이나 월식때가 되면 크메르병사들은 해와달을 향해 수천발의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이유는 귀신이 해와 달을 삼키고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흔히 민주주의 근간을 자유와 책임이라고 말한다.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목숨과 자유를 바꾸기도 했다.그러나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방종과 탈선이라는 노폐물을 양산하게 마련이다.책임이란 곧 질서있는 행위를 의미한다.최대한의 자유는 곧 최대한의 책임을 수반할 때만 보장되는 것이며 자유와 책임은 마차의 두 바퀴처럼 함께 할 때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질서란 작은 것들이 모여 사회질서를 이루고 국가질서를 형성하게 된다.휴지 한 장,담배꽁초 하나,줄서기와 차례 기다리기 등 작은 질서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사회 질서나 국가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그리고 법과 질서를 파행으로 이끌어간 장본인들이 공공질서와 국가의 법질서를 논한다는 것도 그 자체로서 난센스가 아닐수 없다. 또 건전한 음주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는 발상으로 단란주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 생겨났다.가족이 함께 가서 술을 마시는 음주문화를 정착시키자는 뜻에서였다.그러나 가족이 술을 마시려면가정에서 오붓하고 단란하게마시도록 하라는 것이 바른 계도였을 것이다.아들 며느리,손자 손녀가 어우러져 술을 마시라고 허가해준 그 단란주점은 이미 본뜻이 바뀌고 말지 않았는가. 의식개혁이라고 해도 좋고 의식의 전환이라 해도 좋다.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선진사회로 진입하려면 의식개혁작업이 선행돼야 한다.정치하는 의식,학문하는 의식,기업경영의 의식,그리고 종교인들의 의식도 전환되어야 한다.의식의 대전환이 없는 한 우리들의 높이뛰기는 제자리로 내려서는 널뛰기와 다를바 없게 될 것이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서의 한구절이 새삼 떠오른다. 박종순 서울 충신교회 목사
  • [정직한 역사 되찾기] (26) 민족대표 33인중 1인 李甲成

    올해로 ‘3·1 만세의거’ 80주년이다.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전민족 차원의독립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는 ‘3·1의거’는 4월 하순까지 조선 8도에서 모두 1,214건의 시위에 참가자는 110만명에 달했다.또 당시 만세시위에 나섰다가 일경의 총칼에 목숨을 잃은 자가 7,500여명,검거된 자는 4만7,000여명에달했다. 구한말 의병항쟁 이후 일제말기의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항일대열에 참가한애국지사는 수십만을 헤아린다.그러나 이들 가운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받은 사람은 99년 2월 현재 8,524명이다.아직도 상당수 애국지사들이 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보훈당국이 야박해서만은 아니다.독립운동 공적은 인정되나 훈장급에는 미치지 못하거나 독립운동을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거증자료를 찾지 못한 때문이다.독립진영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사람들의 경우 증거자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자료찾기가 어려운 것은 일제의 비밀요원인 ‘밀정’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93년 5월 국가보훈처는 역대 독립유공자 가운데 재심사 대상자 8명의명단을 국회 비공개회으에서 공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3·1의거’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이갑성이 포함돼 있었다.그에게 씌어진 혐의는 ‘밀정’으로 요샛말로 하면 일제의 스파이노릇을 했다는 것이다.광복회장까지 역임하면서 81년 사망 당시 사회장이 치러졌던 그가 ‘변절자’였다는 의혹은 62년 이래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그동안 제기된 의혹과 논란을 통해 그의 친일혐의를 추적해보자. 연당(硏堂) 이갑성(李甲成)은 1889년(명치 2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대구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세브란스의전(醫專) 약학과 3학년 재학중 중퇴하였다.이 해부터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남강 이승훈(李昇薰)의 권유로 기독교계 대표로 3·1의거에 참여하였다.당시 민족대표중 가장 어린 나이였던 그는 외국인및 학생측과의 연락,독립선언서 배부,해외연락 업무를 맡아 의거를 성공으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의거 당일 태화관에서 일경에 체포된 그는 재판과정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않았다고 한다.또 감옥안에서도 3·1의거 기념 만세를 주동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이 가출옥한 뒤인 22년 5월 뒤늦게 출옥했다.출옥후 이듬해 세브란스 의약회사 지배인으로 재직하던 그는 그 해 11월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에서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전국을 돌며 민립대학 설립의 필요성을 선전·강연하다가 체포돼 다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24년 11월 이승만이 주도한 ‘동지회’의 서울지부격인 ‘흥업구락부’의간사로 피선된 그는 2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현 YMCA) 이사로 피선돼 활동했다.그는 또 좌우(左右) 민족운동세력의 통합체인 ‘신간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직후 ‘신간회사건’으로 6개월간 복역하였다.출옥후 30년경 경성공업주식회사 지배인으로 있다가 이듬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그를 둘러싼 친일의혹은 그가 상해행에 오른 후 37년 일경에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될 때까지 7년간의 행적이다.생전에 그는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편 이갑성에 대한‘친일논쟁’은 62년 그가 건국훈장을 수훈할 무렵 불거져 나와 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한 직후,그리고 81년 그의 사망직후 한 잡지에서 그가 일제때 사용하였던 명함을 공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됐었다.그의친일경력을 처음으로 공식 거론한 사람은 임시정부 서무국장 출신의 임의탁(林義鐸·건국훈장 독립장)씨.그는 ‘대한일보’(67.5.11)에 게재한 광복회비상총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솔선하여창씨개명을 한 점 ▒상해에서 임정에는 출입을 못하고 상해 조선인거류민회회장이자 유명한 친일파인 이갑녕(李甲寧)만 접촉한 사실 ▒총독부 산업국장의 주선으로 일본 미쯔비시(三菱)회사 신경(新京)출장소장으로 임명된 사실▒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촉탁을 지냈다는 주장 등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하였다. 또 유관순(柳寬順)열사의 오빠로 3·1의거에 참여했던 유우석(柳愚錫·건국훈장 애국장)씨는 이갑성이 “일제말기 일본인도 하기 어려운 경성공업사(군사공업)의 중역을 지냈다”고 증언하였다.두 사람 모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애국지사들로 이갑성의 친일문제와 관련,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을 증언하고 있다.독립유공자 가운데는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의 증언만으로도 훈장을 받은 사례도 있다.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은 사료(史料)가치를 인정받고있다. 한편 임·유씨의 증언에 대해 이갑성은 반박성명을 통해 두 사람의 증언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그러나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보면 이갑성의 반박은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선 창씨문제.이갑성은 자신이 이와모토(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한 사실(호적서류 참조)을 두고 당시 자신은 해외에 있어서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창씨는 호주(戶主)만이 할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호주였던 그가 자신의 창씨 사실을 몰랐다는 얘기는 말이안된다.33인 가운데 그를 포함해 정춘수(鄭春洙,禾谷春洙),최린(崔麟,佳山麟)등 3명이 창씨개명을 했다. 다음으로 이갑성이 미쯔비시회사의 신경출장소장을 지냈다는 주장.현재로서는 확인된 바는 없다.그러나 그가 ‘주식회사 일만산업공사(日滿産業公司)전무취체역’을 지낸 사실은 확인됐다.(명함사진 참조) 또 이갑성이 상해 임정에 출입을 못했다는 주장.이에 대해 임정 총무과장 출신 K씨는 “당시 이갑성은 임정요인과 교류가 없었으며 임정 청사에 출입을 못했다”고 증언한바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金聖壽·건국훈장 독립장)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어 이갑성이 상해에서 제중(濟衆)약국을 경영하면서 밀정행위를 했다고 사망직전에증언한 바 있는데 이갑성이 약국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우선 그가 약학을 공부했고,서대문형무소 수감시절 일경이 작성한 자료에 그가 상해로 도피하여약종상(藥種商)을 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그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촉탁을 지냈다는 주장도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이밖에도 그가 친일을 했다는 증언은 수없이 많다.독립운동가 사회에서는 그의 ‘친일’이 공공연한 비밀로 돼 있다.다만 그가 생전에 역대 정치권력과 깊은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가 사회의 상징적인 인물로 행세해왔기 때문에 나서서 언급하기를 꺼려왔을 뿐이라는 것.해방 직후부터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한때 이승만을 추종하던 그는 1961년 5·16이 발생하자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크게염려하던 군인들에 의한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은 다행한 일로…군사혁명 정부가 완전히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깊이 협조해 주기를…’ 호소하였다. 이듬해 62년 그는 해방후 첫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으며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발기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65년에는 초대 광복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3·1동지회 고문,이준열사기념사업회총재 등 민족단체의 대표적 인물로 활동하였다.또 63년 그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에도 참여하였는데 당시 이름만 써내면 훈장을 주었다는,소위 ‘백지사건(白紙事件)’에 그가 깊이 관련돼 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이갑성의 일제하 행적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수 있다.33인 출신으로 일제당국에 신분이 노출된 상태에서 어떻게 상해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또 거기서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37년 국내에 압송돼 와서 1년만에 가출옥한 배경이나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된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33인중 최후의 생존자로 매년 3·1절이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이갑성은 81년 3월 타계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그의 공과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진실규명 차원에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자료조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鄭雲鉉 jwh59@
  • [화제의 책] 백범 김구 연구I

    백범 김구선생의 정치활동을 집중 연구한 ‘백범 김구 연구Ⅰ-정치활동과정치이념’이 최근 신지서원에서 출간됐다.부산 동의대 정경환(鄭京煥)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신지서원의 기획물 ‘한국인물총서’의 첫 권으로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독립운동가 김구’보다는 ‘정치인 김구’에 초점을 맞춰 구한말부터 해방정국까지의 전과정에 걸쳐 백범의 정치역정(歷程)을 분석하고 있다. 백범은 임시정부수립과 한국광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광복군 조직·활동을 둘러싸고 중국 국민당정부와 외교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백범은 중국측과 한중동맹군을 조직,일제를 타도해야한다는이른바 ‘한중연합론(韓中聯合論)’을 펴기도 했는데 당시 중국측 자료를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해방공간과 남북분단 과정에서 ‘정치인 김구’의 역할은 시대적 사명이었다. 친일파 처리·토지개혁·신탁통치·좌우합작운동 등 당시의 시국현안에 대한 백범의 인식·대응전략을 당시 자료를 통해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백범의 정치이념을 ▒민족주의론 ▒민주주의론 ▒경제평등론 ▒문화국가론등 크게 네 갈래로 나누고 있는 저자는 “백범은 소년기부터 조선조 사회의신분계급구조와 인간불평등에 강한 의문을 가졌던 인물”이라며 “정치활동전 과정에서 그는 독재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정치를 신봉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저자는 6월초 후속작업으로 ‘백범 김구 연구Ⅱ-정치사상의 재조명’을 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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