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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압축성장의 표본인 서울의 국적은 한국이 아닌 ‘세계’다. 도심은 일부 고궁을 제외하고는 미국 뉴욕, 일본 도쿄와 마찬가지로 빌딩군과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아파트숲으로 덮인 시 외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서울이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거의 유일한 증거는 성곽들이다. 서울성곽, 남한·북한산성 등 서울의 도심과 외곽을 아우르는 인공 유산인 성곽은 오랜 역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견딘 채 오늘도 서울 시민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안고 있다. 꽃봉오리가 제 몸을 틔우는 완연한 봄날, 역사의 숨결이 초목들과 한데 어울려 넘실대는 ‘자연 역사 박물관’ 성곽으로 연인과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자. ●도심을 품고 있는 서울성곽 서울의 성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울성곽이다. 조선 개국 뒤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석조성곽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산·남산·인왕산을 이으면서 경복궁을 에워싸고 있다. 둘레는 18.127㎞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 침략과 도시계획,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까지 거치며 거의 모두 파괴됐다. 지금은 서울 토박이도 서울성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지난 1976년부터 꾸준한 복원 결과 10㎞ 정도 제 모습을 찾았다. 원래 서울성곽의 관문이었지만 이젠 차량의 ‘섬’이 된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등에서도 성곽의 흔적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낙산을 중심으로 한 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나와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창신성곽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어 30분쯤 타락산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몽마르트 언덕’이라는 낙산공원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공원 주차장 쪽으로 내려와 이화장을 지나면 대학로 뒤쪽 혜화문(동소문)과 만나게 되고, 이어 성북지구까지 성곽이 연결돼 있다. 또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뒷길을 따라 응봉과 숙정문(숙청문)까지 이어지는 길에서도 서울성곽을 만날 수 있다. 인왕산 성곽길에서도 서울성곽의 운치를 접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나 사직공원에서 경사가 급한 인왕산길을 30분 정도 오르는 길에 기암괴석과 함께 성곽의 장중한 모습이 펼쳐진다. 자하문터널 위 창의문(자하문·북문)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이외에도 숭례문에서 남산의 백범광장과 팔각정·서울타워를 거쳐 타워호텔로 이어지는 길이나 장충체육관 뒤에서 신라호텔 뒤로 이어지는 길에도 서울성곽의 예스러운 풍치와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서울의 요충지 남한·북한산성 서울의 외곽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곽을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에 걸쳐 있다. 본성 둘레는 8㎞, 외성은 12㎞에 달한다. 성 안에서나 바깥에서 죽 돌면 남한산성 전체를 볼 수 있다. 한양을 지키던 대표적인 군사적 요충지답게 많은 문화재도 품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는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해 지어진 누각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 조선 시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물던 별궁인 행궁 등도 눈길을 잡아 끈다.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길은 송파구 마천동에서 올라오는 등산길이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출발, 공수부대를 지나 3㎞ 남짓한 등산로를 따라 1시간30분 정도 올라가면 서문에 도착한다. 혹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 성남 복정·태평사거리를 거쳐 남문으로, 광지원 등을 지나 동문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산성은 서울 은평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등에 퍼져 있다. 백제 계루왕 때인 132년에 처음 축성된 뒤, 조선 숙종 때 수도 방위를 위해 돌로 쌓여졌다. 전체 둘레는 12.7㎞, 성벽을 둘린 체성(體城)의 길이는 8.4㎞에 이른다. 현재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등의 문루가 복원돼 있다. 성곽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져 있어 북한산을 산행하면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행궁, 창고, 장대 등 많은 유적지와 사찰문화재가 산재돼 있다. 교통도 편리한 편. 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도봉산역,3호선 구파발역,4호선 길음역·수유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백제의 숨결 여전한 토성들 화려했던 백제 문화의 발상지답게 당시 성들도 송파구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 평지성 토성인 풍납리토성은 서북쪽으로 한강, 남쪽으로 성내천과 접해 있다. 성벽 둘레는 3470m로 풍납동을 감싸안고 있다. 광복 이후부터 꾸준히 발굴 작업이 계속돼왔고, 지금도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이나 8호선 강동구청역에서 내려 도보로 5분 남짓 걸린다. 또 다른 백제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은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있다. 크기는 남북 730m, 동서 540m이다. 성벽의 높이는 대부분 30m 정도로 지금은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로 조성돼 있어 운동이나 소풍을 즐기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밖에 광진구 광장동의 아차산성,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종로구 홍지동 탕춘대성도 서울 경기에서 찾아갈 만한 성곽들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서울의 성곽엔 무슨 사연이…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성곽은 역사 이래 한민족의 숨결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백제와 조선은 물론, 고려 시대의 문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무분별한 근대화라는 ‘괴물’은 전통 유산인 성곽을 제멋대로 파괴했다. 성곽이 역사교과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읍지로 출발 백제 왕성인 풍납리토성, 몽촌토성은 서울 문명의 첫 흔적이다. 이들 토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 가운데 하나인 하남위례성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풍납리토성에서는 다양한 토기 조각과 가락바퀴, 우물터, 해자 등 백제 초기 철기시대 유물 등이 발굴됐다. 몽촌토성에서도 삼족토기, 벼루, 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이곳은 비록 백제가 475년 수도를 부여로 옮긴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현재 진행중인 풍납리토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해 번성했던 백제 문명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날 전망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아차산성, 이성산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 많은 성곽들이 서울에 쌓였다.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하고 넓은 평야가 자리잡은 전략요충지로서의 서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개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고려도 지리도참설의 영향을 받아 서울을 중시,3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으로 삼았다. 창경궁 부근에 가궐이, 북한산에는 중흥산성이 지어졌다. ●일제 침략의 고통 떠안은 성곽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은 모두 조선시대 때 수도 한양의 방위를 위해 축조됐다. 서울성곽은 태조와 세종 때인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숙종 때 다시 축조됐다. 삼국시대 때 처음 토성으로 쌓여졌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각각 광해군과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곽은 구한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탈로 크게 훼손됐다. 전차와 경부선 철도, 조선신궁 등의 공사로 대부분의 성벽은 물론 동대문과 남대문을 제외한 문들도 거의 다 헐렸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성곽은 광복 후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 행정 공백기를 틈타 성곽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마구 들어섬에 따라 더욱 파괴됐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북한산성에 헌병대를 주둔시켰고, 산성 안의 시설물을 대부분 불태웠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구한말 의병운동의 거점이 됐던 남한산성도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무너졌다가 복원됐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수요모임 “그때그때 달라요”

    한나라당의 개혁·소장파들이 주축이 된 ‘새정치 수요모임’이 최근 당 안팎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요약하면 “상황이 불리해지면 말을 바꾼다.”는 혹평이다. 논란은 수요모임이 최근 재창당 수준의 조기 전당대회를 열자고 제안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들은 특히 ‘집단 지도체제’를 거론했다. 당 상임운영위 회의를 현행 ‘협의체’가 아닌 ‘합의체’로 바꿔 그곳에서 당 운영 방향을 결정하자는 취지다. 그래야 당 대표의 ‘독단’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수요모임을 이끄는 정병국 의원은 31일 전화 통화에서 “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투톱이 되는 현 체제 역시 결국 당 대표의 ‘독단’으로 흐르는 문제가 있더라.”라면서 “선출직 당직자 이외에도 다양한 의원이 상임위에 참석해 ‘실체적인’ 의사 결정을 하도록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당내 시각은 그다지 곱지 않다. 지난해 5월엔 김문수·홍준표 의원 등 비주류의 주장에 맞서 집단 지도체제를 결사 반대했던 이들이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당시 수요모임은 박 대표를 적극 지원하는 ‘주류’였기 때문에 집단 체제를 반대했다. 이런 기류는 이날 당 상임운영위 회의에서 그대로 표출됐다.4선(選)의 이규택 최고위원은 “(구한말)김옥균 등 일부 소장파가 이상적인 생각에 빠져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3일천하에 그쳤고, 조선은 쇠락의 길로 빠졌다.”고 호통쳤다. 그러자 수요모임 김희정 의원은 “충신과 매국노는 구분돼야 한다.”고 반박했다가 도리어 “누가 충신이고, 누가 매국노냐.”는 거친 소리를 들었다. 이 최고위원은 이후 “비유에 오해가 있었다.”고 먼저 사과했지만, 김 의원은 사과를 거듭 거부했다. 이에 박 대표가 “사과는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니, 우러나지 않으면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면박을 줬고, 강재섭 원내대표가 “진짜 애국·애당심이 있다면 서로 사과하라.”고 권유하자 김 의원이 “그렇다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해 가까스로 설전이 마무리됐다. 한편 정병국·남경필·원희룡·이성권 의원 등이 조기 전당대회 소집을 요구하자 유기준·김기현·김희정·김명주·박승환 의원 등은 이날 국회에서 모임을 갖고 반대하고 나서는 등 수요모임 자체가 ‘반박(反朴)’과 ‘친박(親朴)’으로 갈려 내분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2) 변산에서 만난 정감록과 미륵신앙

    ●부안행 버스 속에서 남사고는 먼젓번 내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나는 이 기회에 변산의 길지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서울서 부안까지는 고속버스 편을 이용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3시간쯤 지나 삼례를 지난다. 이 때부터 드넓은 호남평야가 눈앞에 가득하다. 지도를 꺼내 살펴보니 부안은 김제 만경평야의 서남쪽 끝에 있다. 그곳은 곡창지대이면서도 서해바다에 연해 있다. 며칠 전 우연히 부안 출신의 한학자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예부터 ‘생거(生居) 부안’이란 말이 있다고 자랑했다. 농수산물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변산(邊山)이란 명산이 있어 부안은 무척 살기 좋은 고장이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부안은 다소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변산에서 군산까지 이어질 새만금방조제 공사로 인해 생태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될 수도 있다는 염려가 적지 않다.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송기숙의 대하소설 ‘녹두장군’이 시작되는 백산이란 지역도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다. 갑자기 1984년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이 귀에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농민군들은 모두 흰옷에 죽창을 들고 있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고 했다던가? 이런 역사적 격랑의 한복판에 변산이란 길지(吉地)가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지난밤 나는 이중환의 ‘택리지’를 꺼내놓고 혹시 변산에 관한 설명을 찾아 볼 수 있을까 해서 좀 뒤적여 보았다.“노령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가운데로 파고들어간다. 서·남·북 3면은 모두 바다다. 이곳은 많은 봉우리와 허다한 골짜기로 돼 있는데 변산이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변산은 3면이 바다에 닿아 있고 봉우리와 골짜기가 유난히 많다. ●변산은 백두대간의 서자 그러나 이중환의 설명과 다른 점도 있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변산의 멧부리는 노령에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다. 백두대간의 계보를 자세히 적은 ‘산경표(山經表)’에도 변산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고지도를 보더라도 변산은 홀로 떨어진 외로운 산이다. 말하자면 백두대간의 서자인 셈이다. 정감록의 길지는 대부분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에 확실하게 능선이 닿은 적자(嫡子)들이다. 그렇다면 서자 격인 변산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어 길지로 거론된 것일까? 누구도 이 문제를 직접 거론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답을 찾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난 변산의 지리와 역사를 좀더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버스는 서서히 부안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벗어난 지 4시간 만이다. 읍내 길거리엔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남도의 봄 향기도 객을 반기는 듯하다. ●내변산 우동 정감록서 말한 길지 지인의 소개로 나는 읍내에서 지관 김철수(71·가명)씨를 만났다. 김 지관의 말을 들으니 변산은 길지에 필요한 외형적인 조건을 제법 잘 갖춘 편이란다. 변산의 산세는 용맥이 강이나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선 경우에 해당해, 이른바 산진처(山盡處)의 명당이란다. 김 지관은 서남해안 일대에는 그런 명당이 몇 군데 더 있다며 가야산과 팔령산과 태안반도를 예로 든다. 그 말이 나온 김에 나는 변산의 지세를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 지관의 대답은 이러했다.“변산의 청룡, 즉 동쪽 산세는 사창재, 노승봉(상여봉), 바드재를 건너 옥녀봉으로 이어지다가 잠시 남서쪽으로 흐르는 듯하다가 내소사의 주산인 세봉을 건너서 월명암의 주산인 쌍선봉으로 반원을 그리며 내뻗어요. 그게 학치, 청림리 삼예봉에서 끝나지요. 변산의 백호, 즉 서쪽 산세는 개암사의 주산인 우금산에서 우슬재를 거쳐 의상봉으로 이어진다고 봐야지요. 이 두 흐름을 갈라놓은 것이 그 옛날 백천이었는데, 지금은 부안호가 돼 없어졌어요. 백천의 물길은 본래 우슬재에서 시작됐거든요. 백천도 그렇지만 변산의 청룡과 백호가 그려낸 형상은 결국 산 태극, 물 태극이오. 계룡산과 같다, 이런 말씀이지요.” -그럼 ‘정감록’에 나오는 변산 동쪽의 길지는 구체적으로 어딘가요? “아, 그것은 말이지요. 일단 내변산으로 통하는 입구인 우슬재나 바드재를 좀 잘 봐야 해요. 그저 그 길목만 잘 지키면 인근의 청림리와 중계리는 참 좋은 피난처가 돼요. 거 뭐더라, 정감록에 나오는 호암을 찾으려면 상서면 통정리에서 우슬재를 넘어가면 돼요. 우슬재를 살짝 넘어가면 쇠뿔바위라고 나오지요. 그런데 이게 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의 오른쪽에 있어요. 쇠뿔바위 동남쪽을 잘 살펴보면 산비탈에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 우거하던 집이 지금도 있지. 몇 해 전에 복원됐지요. 그 산 아래 마을이 우동이야. 보안면 영전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곰소로 가다 보면 마주치는 동리인데 원래 이름은 우반동이란 말이오. 이 마을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옥녀봉이 있고 멀리 그 산 끝자락에 굴바위가 보인단 말이지요. 바위 입구가 틀림없는 호리병 모양이에요. 호암이라 이거지요! 우동은 앞이 시원하게 터진 듯하면서도 천마산이 막아주고 있어 삼태기형 명당이 분명하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난 우동이 바로 그 ‘정감록’에서 말하는 길지다, 그렇게 봐요. 안 그렇겠어요?” -김 지관님, 그런데요. 역사상으로 볼 때 길지가 있다는 내변산이 외변산보다 훨씬 더 큰 수난을 겪었습니다. 구한말이나 6·25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변산의 우동을 길지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거야 잘 모르겠소! 누가 그걸 알겠어요? 그래도 옛 말이 조금도 틀린 게 없어요. 우리가 사는 이 변산은 아주 옛날서부터 미륵님이 나타나신 땅이고, 관세음보살님의 성지요. 원효, 진표, 진묵 등 큰 스님들도 많이 오셔서 도를 닦으신 것만 봐도 이게 보통 땅이 아닌 것은 틀림없어요! 근세엔 증산교를 세운 강일순이도, 원불교의 소태산도 다 여기 변산서 도를 닦았단 말이죠. 그 분들이 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분들인데 왜 다른 명당 다 놔두고 부안을 왔겠어요? 정감록에도 길지라고 나와 있단 말이에요. 미륵님이 현신하신 곳이니까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봐요.” 김 지관의 설명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변산은 과연 미륵신앙의 발상이요, 불교의 성지였다. 왜, 그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 점이 중요하게 생각돼 난 서둘러 발길을 현장으로 옮겼다. ●변산의 옛 사찰들 부안읍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는 박재환(45·가명) 선생이 길잡이를 맡아주었다. 나는 박 선생과 함께 내변산 입구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대형 지도에서 변산의 유적지를 다시 점검했다. 변산은 제법 큰 산 덩어리여서 변산면(邊山面)·하서면(下西面)·상서면(上西面)·진서면(鎭西面)에 걸쳐 있다. 그런데 최고봉이라는 의상봉 마천대(508m)도 실은 야트막한 편이라 웅장한 느낌은 별로 없다. 이곳 사람들은 서해안을 따라 겹겹이 포개어진 산봉우리를 외변산이라 하고, 내륙으로 뻗은 골짜기와 봉우리는 내변산이라 부른다. 외변산에는 격포리(格浦里) 해안의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이 특히 유명하다. 이 두 곳의 명칭은 강이지만 실제는 해안의 바위벽이다. 채석강이니 하는 이름은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과 대문장가 소동파(蘇東坡)가 노닐던 중국 지명을 본뜬 것이다. 그만큼 경관이 수려하다는 뜻이다. 변산의 해안풍경이 그처럼 절경이라 해도 정작 변산을 전국적인 길지로 만든 것은 산속에 위치한 옛 사찰들이었다. 박 선생이 승용차로 변산을 구석구석 구경시켜 준 바람에 모든 게 뚜렷해졌다. 외변산에 해당하는 상서면 감교리의 개암사(開岩寺)는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대웅전(보물 292호)이 참으로 볼 만하다. 개암사에 딸려 있던 원효방이란 암자는 신라 때 명승 원효가 수행한 곳이라 전한다. 그런가 하면 변산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來蘇寺) 역시 신라 때의 고찰인데 대웅보전(보물 291호)·고려 동종(보물 277호)·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折本寫本 보물 278호) 등 문화재가 많다. 내소사 경내의 전나무 숲은 울창하기가 전국 최고라 하고 이 절간의 저녁 종소리는 변산8경의 하나로 친다. 내변산은 나지막한 능선을 따라 깊은 계곡이 여럿이고 나무 또한 울창해 풍광이 곱다. 그 중 산내면 중계리(中溪里)에는 신라 때 창건됐다는 월명암(月明庵)이 있다. 변산의 제2봉인 쌍선봉(498m) 중턱에 자리잡은 월명암에서 바라보는 아침 바다의 물안개는 변산8경의 하나다. 암자 뒤편의 낙조대(448m)에서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변산8경으로 손꼽는다. ●불사의방과 영산사,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 변산에는 위에서 말한 사찰들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중요해 뵈는 암자 하나가 있었다. 의상봉 꼭대기 있었다고 믿어지는 불사의방(不思議房)인데 이곳이야말로 미륵하생신앙의 진원지였다. 장차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을 불교적 이상세계로 인도할 거라는 하생신앙이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 변산이라니 신기한 느낌이 든다. 따지고 보면,‘정감록’에 약속된 새 세상도 미륵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렇게 보면 미륵하생신앙은 정감록 신앙의 뿌리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불사의방에서 미륵신앙을 체험한 승려는 신라의 진표(眞表)였다. 그는 경덕왕 19년(760)부터 3년 동안 3업(身·口·意業, 몸뚱이·언어·의지의 작용)을 닦았다. 아울러 망신참법(亡身懺法·몸을 희생시키는 참회법)에도 힘써 5륜(두 무릎, 두 손, 머리의 5體)을 바위에 마구 부딪쳐 무릎과 손이 깨져 피가 비오듯 했다고 한다. 진표의 극진한 기도에 감동한 지장보상(地藏菩薩)은 진표에게 모습을 드러내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부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수행 장소를 옮겨 더욱 정진했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진표 앞에 나타나 그의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증과간자(證果簡子·수행으로 얻은 果와 점치는 대쪽) 189개를 주었다. 진표는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셈이다. 경덕왕 21년(762), 진표는 신도들을 이끌고 금산사(전북 김제)에 16척이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조성하기 시작했다.2년 뒤 마침내 미륵상은 완성되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진표에 관한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변산에서 미륵신앙이 출범했다는 점이다. 그 뒤 우리 역사상 미륵신앙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 특히 난세에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에게 많은 위로를 줘왔다. ●월명암, 또 하나의 종교적 성지 알고 보니 변산의 월명암(月明庵) 역시 종교적인 성지로 의미가 크다. 월명암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라는데 대둔산 태고사, 백암산 운문암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영지라 한다. 월명암에 오르기 위해 나는 남여치에서 차를 내려 쌍선봉 쪽을 바라보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이 암자는 신라 신문왕 12년(692)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창건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했다. 한말엔 의병들이 월명암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과 싸웠는데 전투에 진 바람에 1908년엔 다시 잿더미가 됐다. 그 후에도 월명암은 몇 차례 심한 몸살을 겪었다. 지금 월명암 옛터에는 대웅전을 건립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월명암을 개창한 부설거사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의 행적은 ‘부설전’이란 고소설에 상세하다. 경주에서 출생한 부설은 법우(法友)인 영조·영희와 함께 구도의 길을 떠나 변산(능가산)에 들어가 묘적암을 세우고 오직 수도에만 몰두했다. 뒷날 그들 3인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길을 떠나는데, 부설원(정읍군 칠보면)에 이르렀을 때 부설은 삼생연분(三生緣分)이 있는 묘화를 만난다. 두 사람은 반드시 부부가 돼야 할 운명이었다. 환속한 부설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월명(月明)이란 딸을 두었는데 말년이 되자 변산에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이란 두 암자를 지어 아들딸에게 각기 하나씩 맡겼다. 겉으로 보면, 부설과 묘화 부부는 속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평생 남몰래 수도에 정진해 도력이 출중했다. 부설거사보다 한 수 낮았다는 묘화만 해도 환한 대낮에 조화를 부려 비나 눈을 내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때로 묘화는 빗방울이나 눈송이를 단 하나도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고 전한다. 월명암을 중건한 진묵대사도 많은 이적을 남겼다. 진묵은 조선 중기 호남의 대표적인 선승(禪僧)이었는데, 어느 날 탁발을 나갔다가 매운탕 한 솥을 얻어 마셨다. 그 다음 진묵은 물가에 가서 토해냈는데 탕 속에 들어 있던 죽은 물고기들이 전부 살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근대에는 백학명(1867∼1929)과 같은 고승이 월명암에 주석했다. 학명은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禪農)일치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참선과 농사를 같은 것으로 파악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불교를 개창한 소태산 박중빈도 세상을 구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월명암을 찾았다.1919년 소태산은 학명과 더불어 동안거를 했다. 이때 학명의 거처는 법당이었고 소태산은 그 옆방을 사용했다. 원불교의 2대 교조인 정산종사도 한때 학명의 상좌 노릇을 했다. 뿐만 아니라 증산교를 창설한 강일순(姜一淳) 역시 월명암을 찾았었다. 강증산과 소태산은 모두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부심했다고 한다. ‘부설전’을 보면 월명암에서 모두 4성인,8현자,12법사가 나온다고 했다. 월명암 스님들은 부설거사 가족 4명을 성인으로 간주한다. 옛날 이 암자에 주석했던 성암·행암·학명 스님은 3현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예정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 말대로 될지 어떨지 나는 모른다. 장차 지켜볼 일이다. 요컨대 변산은 불보살과 깊은 인연이 있어 정감록이 손꼽는 길지가 되었다. 변산의 경우에서 보듯 때로 민중의 깊은 불심은 풍수조건을 능가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자서전 ‘대화’ 낸 리영희 전 한양대교수 산행 인터뷰

    ‘아큐정전’의 저자 루쉰(魯迅)은 생전에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예찬했다.‘영국’이라는 속박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저항정신을 사랑했다. 얼마전 중국은 네티즌 13만명을 상대로 20세기 중국사회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루쉰을 1위로 꼽았다. 한국의 루쉰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 있다. 누굴까. 한국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파란과 곡절의 삶 그 자체이다. 주위에서는 ‘60% 저널리스트,40% 아카데미션’이라고 한다. 르몽드지는 ‘사상의 스승’이라고 표현했다. ●한국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이 교수와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20세기 영향력 있는 학자와 저작’에 관한 설문조사에서 국내 학자 가운데 리영희(77)씨를 가장 으뜸으로 꼽았다. 또 모언론사에서 지난 한 세기동안 가장 영향력있는 100대 인물 중 리씨가 24위로 조사됐다. 리씨는 “나의 글은 루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루쉰을 좋아한다. 흥미로운 것은 루쉰과 리씨가 해양대학 출신의 지식인이라는 점. 리씨 역시 온몸으로 ‘저항’하며 한 시대를 깨우치려 했다. 또 올곧은 사상가의 길을 걷고자 했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동의 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신분을 밝히자 “문이 열렸으니 그냥 들어오세요.”라고 했다. 안으로 들어섰다.40평쯤 돼 보였다. 리씨는 식탁에서 혼자 과일을 먹고 있었다.“점심을 지금 막 먹었거든. 조금만 기다려주게.”라고 했다. 잡안에는 조수미의 ‘새야새야’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이윽고 리씨와 마주앉았다. 이런저런 인사말이 오고갔다. 그는 “오늘 날씨도 좋은데 뒷산 구경이나 할까.”라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본의 아니게 전화내용을 듣게 됐다.“요새 글 못써. 책도 안 읽어. 스트레스 받으면 재발하거든. 뭐? 대학에서 두번 쫓겨나는 바람에 연금도 없어. 내가 언제 감투를 써봤나. 요새 책도 안팔려, 전자매체로 다 보잖아.” 문득 벽에 걸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손자손녀들과 밝게 웃는 모습의 사진도 보였다. 전화통화를 끝낸 리씨는 “가족이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해야 기억할 수 있지. 손자들은 서울 신촌에 살고 있어.”라며 노년의 외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후 마을 뒷산인 수리산 입구에 들어섰다.“이 산은 말야, 해발 489m의 야트막한 산이지. 그런데 물이 좋아. 약수물 받으러 오는 사람 많아.” 리씨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천천히 걸었다. ●이번 자서전이 마지막 글 최근 발간된 자서전 ‘대화’(한길사刊)에 대한 얘기가 먼저 나왔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직접 글을 다듬고 쓰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지. 서울대 학생이 우리집에 기거하며 정리해 주었어.2년 걸렸지. 누락됐거나 생략된 것도 많아. 살아온 76년은 한마디로 ‘야만의 시대’였지. 일제와 해방후 50년은 반인간적 생존환경이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들 돕기 위해 많은 글을 썼지. 문장으로는 꽤나 중국의 루쉰 같은 스타일로 써왔어.” 20분 가량 걸었다. 약간 힘들었는지 의자에 앉자고 했다. 푸른 소나무 사이로 새들의 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혔다. 자연이 그에겐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까.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름다운 경치야. 무심(無心)으로 걸어.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새삼 느끼지. 몸이 불편하니까, 지난날의 정열과 행동양식이 내면화되니까, 정서가 합치돼.”라면서 지나온 세월을 잠시 돌이켜본다. “참으로 우역곡절과 파란만장이었어. 어떤 장면과 국면에 가까이 안가도 될 것을, 지성인의 본질적 책임을 위해 개인의 안락보다는 사회쪽으로 시선을 돌렸지. 가정위주로 산다는 것은 배반이었어. 자식들에겐 굉장히 미안해. 또 지나칠 정도로 논증적으로 빈틈없이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었지. 정서적 내면은 철저히 억압됐어.” 이같은 고통스러운 삶으로 술은 늘 곁에 끼고 있었다고 했다. 모언론사 외신부장 시절이다. 부원들과 팔당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부원들은 정종을 마셨지만 리씨는 들고온 고량주(10홉짜리 큰병)의 뚜껑을 땄다. 안주없이 벌컥벌컥 5홉을 연거푸 마셨다.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위궤양이었다. 성인의 위두께가 보통 11㎜인데 9㎜까지 파고들었단다. 이후 15년 동안 위궤양으로 고생했다. 리씨는 인터뷰에 앞서 스트레스 받는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온국민의 관심사인 독도문제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모든 상황을 1945년 이전으로 롤백하려는 큰 구상 속에 영토문제를 꺼내고 있지. 우리는 고증과 실증을 통해 법률적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야 해. 걱정되는 것은 우리 국민의 ‘냄비’ 정서야. 항상 반응적이거든. 그러나 독도문제만큼은 영국 국민처럼 뚝심으로 대처해야 해.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은 불독처럼 말야. 여기에 일본인 같은 교묘함도 염두에 두어야 해.” ●한·일 우익들의 밀착이 문제 이어 “이번 사태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의 친일파 우익과 일본의 우익단체간에 밀착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 뒤에는 항상 미국이 있지. 김대중 정권에서도 그랬지만 노무현 정권에 와서 미국은 남한의 우익을 더욱 부추기고 있어. 기독교 인사, 전직 장관, 군부세력 등 남한의 우익단체가 더 무서워. 자기 몸속의 벌레를 찾아내야 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낀 듯 “그만두자.”고 했다. 화제를 돌렸다. 여생에 뭔가 또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한 인간으로 할 수 있는 분량이 있어.40년간 범속한 지식인의 머리로 쓴 소리도 많이 했지. 국민들에게 시대의식과 세계관을 바로잡는 데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봐. 또 우리 국가나 사회가 대체적으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 기쁘고 행복해. 이만하면 분량을 다했어.”라며 말끝을 흐린다. ●광주 배후자로 몰려 수차례 고초 그는 1929년 평북 운산에서 3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구한말 신식교육을 받은 선비형이었다.14세 때 경성의 ‘공립5학년제 갑종 중학교’에 입학한 뒤 1945년 11월 미국식 6년제가 된 고등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했다. 이때 담배말이와 성냥장사를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그러던 1946년 국비로 입혀주고 먹여준다는 말을 듣고 해양대학 1기생으로 입학해 1950년 3월 졸업했다.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에 지원해 7년 동안 전방근무를 했다. 전방 근무시절엔 권총을 잘 쏘아 명사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제대 1년전 56년 스물일곱에 하숙집 아줌마의 중매로 결혼했다. 제대후에는 합동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취직했다.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셋다 합동통신사 다닐 때 태어났다. 이후 72년 신학기부터 한양대 강단에 서면서 무섭게 글을 썼다.77년에 ‘8억인과의 대화’‘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을 한데 묶어 2년 동안 투옥된다. 수감 중에는 ‘D검사와 리교수의 하루’라는 소설을 썼다. 대학에 복직됐으나 ‘광주폭동’ 배후자로 몰려 다시 해직되는 등 수차례 고초를 겪는다. 정년 퇴임후 그는 시대적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하며 조용히 살았지만 2000년말 일흔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언어장애까지 겹쳤다. 다행히 요즘들어 건강이 다소 회복됐다. 그러나 오른손의 떨림과 손가락마비는 여전해 장마철만 되면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의 심한 고통을 느낀다고 했다. “내가 할 일은 다했다.”고 거듭 말하는 리씨. 그는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며 저녁노을을 뒤로 하고 쓸쓸히 산을 내려왔다. ■ 그가 걸어온 길 ▲1929년 평북 운산 출생 ▲50년 해양대학 1기 졸업, 경북 안동중학교 영어교사로 재직중 6·25전쟁이 나자 연락장교 지원 ▲57년 대위로 군제대 ▲57∼64년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64∼71년 조선일보·합동통신 외신부장 ▲72년 한양대 문리과대 교수 ▲76년 박정희 정권때 해직 ▲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여름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됨. ▲84년 재복직 ▲87년 미국 버클리대 부교수 초빙 ▲95년 한양대에서 정년퇴임 ▲99년 동대학 언론정보대학원 대우교수 역임 ■ 주요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74년), 우상과 이성(77년),8억인과의 대화(77), 분단을 넘어서(84년), 베트남전쟁(85년), 인간만사 새옹지마(91년) 등 k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1)전국의 길지 (하)

    ●호남의 길지 호남엔 여느 도 못지않게 길지가 많다며, 성질 급한 독자들은 내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런 줄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정감록’의 길지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모태로 삼는 까닭에 그 두 산부터 설명을 시작해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대시킨 것뿐이다. ‘남격암’에 가장 먼저 언급된 호남의 길지는 무주(茂朱) 덕유산(德裕山)이다. 덕유산 아래서도 무풍(舞豊) 북쪽에 있는 동굴 옆 음지가 으뜸이라 했다. 그곳은 어떠한 환난도 피할 수 있는 명당이라 한다.‘피장처’에선 약간 다른 곳을 지적해, 덕유산 남쪽의 원학동이야말로 숨어 살기 적당하다 했다. ●덕유산 부자마을 한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덕유산의 성격을 흙산이라 보았다. 지리산과 성질이 같은 것으로 본 것인데 남격암과 마찬가지로 산의 북쪽에 있는 무풍에 주목한다. 이중환은 바로 그 옆의 설천(雪川)도 길지로 간주한다. 그는 남사고가 무풍을 복지(福地)로 파악했던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덕유산의 미덕을 이렇게 말한다.“무풍의 바깥쪽은 온 산이 비옥해 부자 마을이 많다. 이는 속리산 이북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사고는 내게 보낸 편지에서도 덕유산의 장점을 장황하게 설명했다.“과연 그렇다네. 실로 덕이 넉넉한 산이 덕유산이요, 풍요로움을 기꺼워하다 못해 저절로 춤이 나오는 곳이 무풍이라네. 우리나라 12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덕유산. 그 주산은 향적봉(香積峰·1614m)이요, 산세의 흐름이 유장해 무풍의 삼봉산(1254m)에서 흘러내린 용맥이 수령봉(933m), 대봉(1300m), 덕유평전 (1480m), 중봉(1594m), 무룡산(1492m) 삿갓봉(1410m), 남덕유(1508m)까지 무려 100리를 굽이쳐 흐르며 영호남을 갈랐다네. 충청, 경상, 전라 3도를 굽어보는 향적봉에 한번 올라보게. 가까이는 북으로 적상산을 발치에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을 바라보네. 서쪽을 둘러보게나. 운장산, 대둔산이 버티고 서있어. 남쪽은 어떠한가. 남덕유를 코앞에 걸어두었네. 지리산 반야봉도 가물거리네. 동쪽을 어찌 빠뜨릴쏜가. 저 멀리 가야산과 금오산이 보이지 않나? 향적봉 정상에서 흘러내린 옥 같은 샘물줄기가 한참을 흐르다가 구천동 33비경을 만들어 놓았도다. 요즘은 북사면에 무주 리조트가 있다지. 서남쪽의 칠연계곡도 큰 장관일세. 봄의 덕유산은 칠십 리 깊은 계곡에 붉은 철쭉꽃이 불타오르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이 온 산을 적시네.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꼬까옷을 입히지. 겨울이면 설화를 피운 고목이 고요한 은세계를 더욱 빛낸다네. 참 아름다운 곳이야! 길지란 대부분이 이렇게 아름답고 고즈넉하며 은근히 풍요로운 곳에 있기 마련이네.” 덕유산에 대한 남사고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나는 이쯤에서 줄이기로 했다. ‘남격암’은 호남의 명산 내장산(內臧山)도 길지로 손꼽는다. 이른바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라는 내장산은 가을 단풍 하나로만 전국에 유명하다. 이 산의 단풍은 30여종의 나무들이 토해낸 붉고 노란 빛깔이 어우러진 전원 교향악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풍에만 혹할 뿐이나 실은 난세를 피할 길지로서 이만한 곳이 무척 드물다. 임진왜란 때는 전주 사고(史庫)에 소장돼 있던 왕조실록이 내장산에 옮겨져 잠시 화를 피했다. 그 때 만일 내장산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왕조실록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내장산은 과연 길지로다.‘피장처’는 내장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담양 추월산도 숨을 만한 곳이라 추천한다. 추월산은 전남 담양군 용면과 전북 순창군 복흥면 사이에 걸쳐 있는데, 구한말 호남의병운동의 한 거점이었다. ●길지 변산에 웬 도둑 떼가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호남 굴지의 길지는 부안의 변산(邊山)이야.” 남사고는 그렇게 주장한다.“내 책 ‘남격암’을 살펴보게나. 부안엔 호암(壺岩)이 있고 그 아래 변산 동쪽은 몸을 숨기기에 정말 적합하구나라고 했지. 만일 제주도가 다른 나라 땅이 되고 말면 일은 그릇된다고 했어. 이는 왜 그런가? 제주에서 배를 타고 북상하면 전남 강진, 영광, 또는 전북 부안에 곧장 뱃길이 닿을 테니 위험할 수밖에. 어쨌거나 내 생각은 그래. 기왕 변산을 찾았다면 그 동쪽 계곡까지 들어가라. 하지만 그 산을 빠져나가지는 말라! 언제는 속리산 이북으로 가지 말랬다가 이젠 또 변산 동쪽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니, 자네들이 좀 헷갈리겠군. 내 말의 뜻은 그만큼 속리산 이남이 길하고 변산이 좋다는 말이야. 다른 뜻은 전혀 없다고!” 참 이상한 노릇이지만 좀 조사해본 결과 문학속의 변산은 도둑의 소굴이기도 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보면 주인공 허생이 변산의 도둑 떼를 인솔해 무인도로 떠나간 걸로 돼 있다. 어떤 연구자는 이를 두고 영조 때 일어난 ‘무신난(戊申亂·1728년)’ 무렵 변산의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본다.‘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도 불리는 무신난의 주체는 남인(南人)·소론(少論)·소북(少北)의 연합세력이었다. 그들은 당시 집권층인 노론(老論)을 몰아내려고 난을 일으켰고 거기에 전국 각지의 도둑들·서얼·상민·천민들이 상당수가 가담했다. 호남 여러 고을의 빈농들과 변산의 도적들도 무리 가운데 끼어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빈농은 자칫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살다 보면 자연히 도적 무리에 포섭되었다. 허생전에 나오는 변산의 도둑 떼는 허생의 영도 아래 각자 배우자와 소 한 마리씩을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 곳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 외국과 무역에 종사 하는 등 유족한 삶을 누린다. 변산 도둑들의 입장에서 볼 때 허생은 다름 아닌 ‘진인’이었다. 혹자는 허생이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 이상향으로 도둑들을 이끌고 숨었다며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현실에 순응하며 합법적인 개혁을 꿈꾸던 연암 박지원에게서 허생 이상의 주인공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닐까? 그야 어쨌거나 허생전에 변산이 도둑의 소굴로 설정된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변산은 골짜기가 깊고 사방으로 뻗어 있어 은신에 적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변산이 길지로 손꼽혔다. 하지만 도둑 떼들이 이러한 자연 조건을 적극 이용한 결과, 조선 후기엔 그들의 요새로 둔갑하기도 했다. 남사고는 말하기를,“변산이 중요한 까닭은 그 산세에 국한된 것이 아니야. 좀더 깊은 연유가 있었지.”라며 매우 의미심장하게 운을 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도의 기회를 마련해 경청하기로 한다 ●조계산의 ‘십팔공’ ‘남격암’은 전라도의 또 다른 길지로 조계산(曺溪山·887m)을 예로 든다. 전남 승주군에 있는 이 산엔 고찰(古刹) 송광사(松廣寺)가 있어, 산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절에서 동북쪽으로 10여리를 올라가면 천자암(天子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이 암자의 오른편에 곱향나무 두 그루(천연기념물 제88호)가 우뚝하다. 높이가 12.5m, 가슴높이쯤에서 둘레가 3∼4m나 되는 거목인데, 나무에 얽힌 유래가 특이하다. 지금부터 800여년 전 이 절에 머물던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중국에 건너가 황후의 불치병을 고쳐준 다음 그 인연으로 왕자 하나를 제자삼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한다. 천자암에 오른 그들은 나란히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것이 살아나 차츰 거목으로 자랐단다. 보조국사 일행의 도력도 만만치 않지만, 조계산의 지력도 여간 왕성하지 않은 모양이다. 워낙 명산에 자리잡은 까닭에 송광사의 “松”자는 길한 예언을 담고 있다. 그 글자를 해체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돼,18명의 국사가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조국사를 비롯해 모두 16명의 국사가 나왔다 한다. 앞으로 2명이 더 나오게 돼 있는데 그때가 되면 모든 중생에게 불법이 바로 전해져 용화세계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유추되듯, 조계산은 최고수준의 길지라 미륵세상의 도래를 약속하는 곳이 된다. 소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곧게 뻗어 내린 용맥이 서해바다를 눈앞에 두고 멈춰선 곳에 한 길지가 있다.‘남격암’이 말한 월출산(月出山)이 그곳이다. 전남 영암군과 강진군의 경계에 불쑥 솟아오른 월출산은 단순히 많은 큰 산의 하나가 아니다. 산 이름 그대로 달맞이하는 산이라서, 이 산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달 신앙의 대명사로 우뚝 솟았다. ●왜적도 못 들어온 팔령산 월출산에서 좀더 남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남단의 길지 팔령산(八靈山)이 웅자를 드러낸다.‘남격암’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나라의 지세를 논할 때 섬이 바라보이는 남쪽은 절대적으로 피할 일이다. 다만 한 예외가 있어 팔령산이 바로 좋은 산이다.” 남사고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소백산 줄기가 고흥반도 동쪽까지 내려오다 끝맺음을 한 것이 바로 이 팔령산이야. 정상의 봉우리가 모두 8개인 산이지. 팔영산(八影山)이라고도 부른다네. 예전엔 팔전산(八顚山), 팔형산(八兄山), 팔봉산(八峰山)으로도 불렸어.‘택리지’에서 이중환은 이 산이 마치 섬처럼 바다로 깊숙이 들어가 있다고 했어. 일찍이 내가 복이 있는 땅이라고 기술했다고도 썼어. 기특한 내 후배 이중환은 늘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말을 곧잘 인용한단 말이야! 아는 대로 임진왜란 때는 왜선이 고흥반도를 타고 침입하려고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어. 이게 다 팔령산의 지기(地氣)에 힘입은 거야. 고흥의 옛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팔령산의 넷째 봉우리인 사자봉이 대단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치닫는 형상이라고 할까. 사자봉의 혈(穴)은 국왕의 옥쇄인데 마지막 봉우리에서 그만 미완성으로 끝나 여간 아쉽지 않아. 일제시기 그 놈들이 조선의 맥을 끊어버리려고 팔봉에다 큰 쇠막대를 깊이 박았어. 그 놈들은 한국 사람들을 미신적이라고 비웃었지만, 그래도 뒤가 켕겼는지 갖은 못된 짓을 다했어. 이제 와선 멀쩡한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섬이라고 주장하지를 않나. 가소롭기 짝이 없어! 한데 말이야, 당시 그 놈들이 혈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바람에 그 뒤 고흥선 진짜 장군이 나왔다고들 하지.” 팔령산이 명산이란 소문은 진작 전국에 널리 퍼졌다. 각지의 무당이 몰려와 무속신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고, 난리가 닥치면 산 속 깊이 은신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다. 삼십년 전엔 어느 사이비 종교단체가 이 산에 본거지를 두고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경기도의 길지 “나는 주로 속리산 이남인 하3도(충청, 경상, 전라)에서 길지를 찾았지. 속리산 이북인 중부지방엔 별다른 길지가 없다고 보는 편이야. 영산인 태백산에 가까운 강원도 남부지역에 한두 군데 있을까 말까. 그 외엔 사실 주목되는 곳이 하나도 없는 셈이야. 정감록에서도 말했을 걸. 오대산 이북은 몹시 흉하다고 말이야.” 그러나 ‘피장처’와 ‘두사총비결’엔 중부지방의 피난지가 다수 언급돼 있다. 우선 ‘피장처’에 따르면 양주 산내촌에서 북쪽으로 80리를 들어가면 길지가 있다 했다. 또한 양근 소설촌의 북쪽 40리쯤에서 좀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가장 은밀한 곳에 숨은 길지가 있다고도 했다. 요새 설곡리(雪谷里)라 불리는 곳 말인데 고려 말 임제종(臨濟宗)을 개창한 명승 보우(普愚)가 설곡리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여주의 사전촌에선 장수와 정승이 나온다고 했고, 광주 율평 동쪽에 있는 동굴은 난리 때 여덟 성씨가 함께 숨어 살 곳이며 장차 56대 동안 장수와 정승이 출생할 곳이라고 했으니 굉장한 명당이다. 또한 ‘피장처’엔 이천 북면의 광복동, 가평의 대아, 도성 등도 피난할 만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인천의 영종도 역시 복지라 했다. 오늘날은 국제비행장이 들어선 영종도는 고려 말부터 단 한번도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무사했다는 것이다. ●중국 지관 두사총이 손꼽은 길지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중국에서 왔다는 지관(地官) 두사총이 쓴 비결로 알려진 ‘두사총비결’에도 경기도의 길지가 두어 군데 언급된다. 그 중 하나는 화약산이다. 가평에서 363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산이 바로 그 산인데 부근엔 집다리골 휴양림도 있어 쉬어 갈 만하다. 그밖에 포천의 도성산도 길지로 말해진다. 도성산은 길가에 가까워 산세가 얕다는 평을 듣지만 전쟁의 기운이 미치지 않고 간사한 기운도 침범하지 못한다고 믿어진다. 고려가 망했을 때 어느 선비는 도성산 밑으로 들어가 시냇가에 대(竹)를 심고 충절을 맹세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 선비가 지조를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도성산의 지기 덕분이라 한다. ‘두사총’은 강화의 마니산(467m)도 길지라 일컫는다. 인천시 강화군(江華郡) 화도면(華道面)에 있는 이 산은 강화섬에서 가장 높다. 마니산은 한반도 남쪽의 한라산, 북쪽의 백두산까지 거리가 똑같아 주목된다. 마니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마리란 머리를 뜻한다. 이 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이름이 그렇게 됐다. 마니산이 길지로서 특별한 위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塹星壇·사적 제136호) 때문이다. 참성단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높이 5m의 자연석을 포개어 만든 이 단의 기단부는 원형이며 그 상단은 네모꼴이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이란 고대 동양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 단이 축조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멀리 고려 때부터 국가가 제관을 파견해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고 전한다. ●황해도의 길지 북부지방엔 길지가 없다는 게 ‘정감록’의 근본 주장이다. 이와 달리 ‘피장처.’는 황해도 곡산의 명미촌을 길지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명미촌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해 희령과 잇닿은 경계 지점에 숨으면 어떤 난리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남격암’은 “수양산(首陽山·899m)은 백미(白眉)의 난을 당하면 물 마른 개울의 물고기처럼 되느니라.”라고 했다. 수양산이 좋긴 해도 눈썹 흰 사람이 난리를 일으키면 도리어 흉하다고 경계한 것이다. 수양산은 황해남도 벽성군(碧城郡)과 해주시(海州市)에 걸쳐 있다. 이 산은 남격암이 거론한 서북지방의 유일한 길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교수가 된 마지막 황손 이석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교수가 된 마지막 황손 이석

    노래가 있다. 집을 잃은 방랑자의 한이 담겨 있다. 화합과 행복을 그리워한다.‘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지어요/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산새들 노래 즐거운 옹달샘터에∼’ 영화 ‘마지막 황제’(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가 문득 생각난다. 어린 세 살에 청나라 황제가 된 푸이의 파란곡절의 삶…. 말년에는 식물원의 초라한 정원사가 된다. 그는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지 28년 만인 1995년 청나라의 황릉으로 이장되면서 황제로 복권된다. ●떠돌이 생활 접고 전주에 둥지 최근 프랑스의 AFP통신은 다음과 같이 눈길 끄는 보도를 했다. “이석(63)씨는 고종의 손자로 태어났다. 하지만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어 가수 군인 방랑자, 알코올 중독자, 수도승 등으로 전전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씨 조선의 본향인 전주에서 안착하게 된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은 마치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삶을 옮겨놓은 듯하다.” 통신은 “그의 존재는 한국의 과거 역사와 현재, 전쟁과 가난, 풍요와 산업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국내에 남아 있는 ‘마지막 황손’ 이씨. 외신 보도처럼 떠돌이 생활을 완전히 접었다. 지난해 10월부터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에 있는 승광재(承光齋·광주 항쟁의 뜻을 이어나가자)에 머물면서 ‘황실보존’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이제는 대학강단에 섰다. 황손이 교수가 됐다는 사실 자체만 보더라도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그의 첫 강의가 궁금해진다.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지난 8일 오전 9시. 전주대학교 백마관 110호. 남녀 학생 50여명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강의실 뒤쪽에는 학교 관계자들이 서 있었다. 이씨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역사적인 순간, 그는 감개가 무량한 듯 창밖을 잠시 응시했다. 이윽고 준비된 슬라이드 자료를 펼쳐보이며 “딱딱한 강의로 듣지 마시고 살아있는 역사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칠판 쪽으로 돌아선다. 자신의 할아버지(고종)부터 내려오는 가계(家系)를 그린다. 글씨를 잘 못쓴다며 애써 겸손해했다. “저의 할아버지는 26대 고종 임금입니다. 이후 큰아버지 순종을 27대 임금으로, 그리고 작은아버지 영친왕을 28대 임금에 책봉했지요. 그러나 영친왕은 열한살 때인 1907년 일본에 인질로 잡혀갑니다. 일본에서 강제로 일본식 군대교육을 받았고 별셋(육군 중장)을 답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한국에 오지 못하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허락으로 귀국했지만 7년 동안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지요.” ‘잃어버린 황실의 삶’을 재현하는 자리여서 그런지 학생들 사이에는 묵직한 침묵이 흐른다. 이씨 역시 이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순종 임금은 커피를 많이 마셨습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몰래 커피 속에 자꾸 아편을 탔지요. 그러다 49살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한일합방에 도장을 절대 안 찍었습니다. 을사오적이 찍었지요.” 이씨는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어릴 적 추억담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강의 노트는 ‘황실의 추억’ “저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사동궁(寺洞宮)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친왕이 예순두살에 저를 낳았지요. 사동궁은 구한말에 지은 서양식 건축으로 많은 상궁, 나인, 손님, 청각씨(궁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섞여 살았지요. 궁궐의 대문에는 일본 순사들이 칼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 달에 한번씩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라는 일본인이 까만 넥타이 정장 차림으로 아버님 의친왕께 큰절로 문안드리며 생활비를 주는 것을 봤지요.” 하얀 분필을 들고 칠판에 써내려가는 그의 ‘강의노트’는 많은 세월의 기다림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의 회상은 계속됐다. “아침 일찍에 나이 많은 영감님들이 아버님 침전에서 ‘전하, 기침하셨습니까.’하고 여쭈면 ‘에헴.’하고 대답하셨지요. 그러면 상궁들이 아버님 조찬(깨죽, 잣죽)을 준비해 올려드렸습니다. 다 드시고 난 후에 저를 말 앞에 태우시고 마당을 돌며 운동하셨지요. 저는 어릴 적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도 못 들어가고 엄한 궁중의 예절을 학습했습니다. 조금만 뛰어도, 천둥벼락이 쳐 놀라는 기색이 있어도 상궁들은 금세 달려와 ‘애기마마, 아니되옵니다. 절대 뛰시면 아니되옵니다.’라고 엄한 눈초리를 받고 살았습니다. 또 어두워지면 상궁 나인들이 옆에서 ‘컴컴한 곳에 가면 망태할아버지가 나온다.’며 겁을 주어 못가게 했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학생들이 웃었다. 강의실 분위기도 한껏 고조된 느낌이었다. “저의 아버지는 저녁마다 양주 조니워커를 마셨지요. 한번은 술에 취해 데라우치가 찾아오자 권총을 꺼내 “내가 죽어야지.”하면서 방바닥을 마구 쳤습니다. 데라우치는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또 3·1운동 직전에 이완용이 의친왕의 김상궁을 독살하자 손병희를 불러 ‘오호 통재라.’라며 무척 슬퍼했습니다.” ●올 겨울 무료 콘서트 열 계획 그는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올 겨울에는 ‘비둘기집’‘베사메 무쵸’ 등을 부르며 콘서트를 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주 시민이 자신을 받아주었기에 공짜로 하겠단다. 아울러 “자신의 꿈은 이 나라가 잘 사는 것”이라면서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보다 한살 밑이며 이 나라가 뭉치지 않으면 중국한테 빼앗긴다. 역사가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강의를 들은 홍연정(20)양은 “배울 점이 많았다. 앞으로 역사공부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피력했으며, 박세진(20)양도 “새로운 사실을 알아서 좋았다. 감회가 새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씨는 매주 화·목요일 두 차례씩 구한말 이후의 황실가족사(사학과 교양강좌 3학점)를 강의한다. 그는 59년 의친왕이 사망하면서 떠돌이 생활로 전전긍긍한다. 종로 음악다방에서 DJ일로 학비를 충당하고 대학(외국어대 서반어과) 재학 시에는 미8군에서 노래를 불렀다.66년 6월 이등병을 달고 베트남전에 참전했으며 69년 맹호부대에서 병장으로 제대했다. 제대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빌딩청소, 가게점원 등 온갖 궂은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이씨는 슬하에 2녀1남을 두었다. 맏딸 이홍(28)씨는 영화배우 한영광씨와 결혼해 딸(3)을 낳았다. 둘째딸 이진(25)양은 경희대 도예과를 졸업한 뒤 캐나다 유학 중이다. 한국 황실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윌리엄 데이빗(49·언론인·캐나다 거주)이 학비를 대주고 있다고 이씨는 귀띔했다. 그리고 막내인 이정훈(24)군은 최근 육군으로 만기제대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이달말 미국 롱아일랜드에 사는 바로 윗형(이해룡·68)을 서울에서 20년 만에 만난다.”면서 “둘째형은 히로시마에서 원폭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승광재 거실벽에 걸린 의친왕의 친필 ‘제1강산(第一江山) 인(忍)’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km@seoul.co.kr
  • [기고]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폐지해야/권문용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서울 강남구청장

    일부 국회의원이 최근 지역구의 자치단체장 공천과 관련,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후보 공천과정에 돈이 오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는 매관매직에 해당한다. 작년에도 여러 지역에서 시장·군수 후보가 5억∼7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공천헌금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공천헌금과 같은 매관매직의 폐해는 구한말 유학자 황현이 매천야록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나라와 국민을 불행하게 한다.21세기에 또 다시 매천야록을 써야 하는가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온 국민은 깨끗한 정치를 원한다. 지방정치만이라도 깨끗해지려면 자치단체장에 대한 중앙당의 ‘정당공천제’를 하루빨리 없애야 한다. 일각에서는 정당의 책임정치를 위해 정당공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군·구는 지역현안이 저마다 다르다. 농수산물 판매가 주요 시책인 지역이 있는가 하면, 기업을 유치해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일이 우선적인 곳도 있다. 관광 활성화나 교통난 해소 등 전략이 다를 수밖에 없다. 결코 한 정당이 모두 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져서도 안 된다.234개 시·군·구 단체장에게 그 책임을 맡겨야 한다. 정당의 책임정치는 명분보다는 그 폐해가 더 크다. 지난번 서울에서 구청장 보궐선거가 있어 유세장에 가보았더니 양당의 중진들이 다 몰려 나왔다. 구청장 선거이니 당연히 주변하천을 맑게 한다든지 공원 조성이나 주차난 해소 등의 논의가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증발해 버리고 양당 중진은 지역의 현안과는 관련이 없는 햇볕정책의 옳고 그름만을 가지고 공방을 주고 받았다. 이 것은 정당의 책임정치와는 거리가 먼 지방정치의 중앙정치화다. 또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회의원 대신 당원이 직접 뽑는 경선제가 채택되지 않았느냐.”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선제처럼 그 허명만 높은 것도 없다. 지난번 경선에서도 큰 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많은 후보들의 하소연이다. 또 경선에서 정치인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이 후보들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그러니 경선제는 산속에서 살쾡이를 피하려다 늑대를 만나는 꼴이다. 경선제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세계에서 인터넷을 가장 잘 활용하는 국민이다. 다시 말해 정보를 스스로 취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당연히 ‘누가 더 대표로서 적합한가.’하는 것은 이제 시민이 직접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공천헌금으로 왜곡될 수 있는 정당추천보다 시민들이 더 잘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후보자는 자기 정당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누가 제일 나은 사람인가를 선택하는 일은 반드시 시민에게 맡겨야 한다. 일본에서도 이런 이유 때문에 시장·군수·구청장의 98%가 무소속이다. 그리고 미국도 81%가 무소속이다. 며칠 전 정당공천제를 없애자는 안에 대해서 전국적으로 인터넷을 통해 500명의 의견을 조사했더니 찬성률이 무려 91%에 달했다. 중앙과 지방할 것 없이 정치분야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시장·군수·구청장의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권문용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서울 강남구청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8) 계룡산과 원불교

    ●신종교의 개벽사상엔 정도령이 숨쉰다 이십일 쯤 전 나는 뜻밖의 전자우편을 받았다. 정감록 산책을 빠짐없이 읽고 있다는 원불교 교무 김정원(가명 53세)씨의 글이었다. 그 뒤 우리는 수십 차례 전자우편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는 사이 나는 김 교무가 계룡산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오늘은 김 교무와 주고받은 글을 대화체로 편집해 원불교와 계룡산의 관계를 정리해볼까 한다.‘교무’란 물론 원불교의 성직자다. 전자우편에서 나는 김 교무에게 이렇게 물었다.“원불교는 동학 및 증산교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신종교입니다. 그런데 제가 원불교의 경전 ‘대종경’을 읽어본 바로는 다른 신종교들에 비해 신비적, 주술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원불교의 그런 특성은 계룡산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나타나겠지요?” 김 교무의 답은 이랬다.“먼저 우리 원불교에 대해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불교의 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교조) 선생과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증산교조) 선생과 한 가지로 구한말 일제하라는 그야말로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대에 민중을 이끄신 분입니다. 이 분들이 세운 민족종교는 개벽사상(開闢思想)을 공유합니다. 개벽의 주체는 한국이요, 장차 세계의 도덕적·문명적, 그리고 정치적 중심지가 될 나라도 한국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교대하는 시기입니다만 곧 묵은 시대 지나가고 새 세상이 돌아옵니다.‘정감록’에서 말한 정도령 시대가 옵니다. 우리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는 새 시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바야흐로 동방에 밝은 해가 솟으려 하는 때이니, 서양이 먼저 문명함은 동방에 해가 오를 때에 그 광명이 서쪽 하늘에 먼저 비침과 같은 것이며, 태양이 중천에 이르면 그 광명이 시방 세계에 고루 비치게 되나니 그 때야말로 큰 도덕 세계요 참 문명 세계니라.” 우리가 좀더 수련해야 될 이유가 바로 거기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서양이 우리보다 나아 뵈지만 결국 동서양은 한가지입니다. 미국에 대해 기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백:교무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벽사상이란 것은 원불교 고유의 사상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 예부터 전해온 미륵신앙 즉, 미륵불이 세상에 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을 연다는 그 신앙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미륵신앙은 ‘정감록’의 등장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 것도 같습니다. 정감록에선 정도령이 계룡산 아래 새 세상을 펼친다고 했는데, 정도령이 바로 미륵 아닌가요? 많은 신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미륵불 또는 정도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륵과 정도령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김:그건 옳은 판단이라고 봐요. 증산만 해도 후천개벽을 선언한 분인데 그 제자들은 증산을 미륵불로 보거든요. 그러나 우리 원불교의 입장은 다릅니다. 미륵불과 용화회상에 대해 소태산은 전혀 다르게 설명합니다.“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다.” 미륵불이란 특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진리가 크게 밝혀져 곳곳에 부처가 가득 찬 세상이 용화세상입니다. 원불교의 2대 교조 정산종사는 ‘근실(勤實)한 세상’이 바로 용화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백:착실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바로 용화회상이라고요? 그렇담 원불교에선 정감록에 나오는 진인왕을 무어라 설명할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원불교에선 정감록 자체를 엉터리라며 근원적으로 부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불교는 신비적·초월적인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것 같으니까요. 김:정감록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만 원불교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소태산은 정도령을 鄭씨 성을 가진 특정인물이 아니라 ‘바른 지도자’라고 보았어요. 정도령과 함께 전개될 이상세계란 것도 새 왕조는 아니고 ‘밝은 세상’이라고 했어요. 정감록의 예언은 장차 참되고 바른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움직이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백:교무님 말씀을 듣고 자료를 좀더 찾아봤습니다. 정산종사는 계룡산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했더군요.“계룡산에 정씨 왕이 난다는 것은 닭이 울면 날이 새고 바른 법이 나타난다는 뜻이다.”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정산이 말하는 ‘바른 법’은 무엇일까요? 종교를 가리킨 것 같지요. 정산의 주장대로라면 민중이 염원한 계룡산 정진인은 바른 종교의 등장이고, 바른 종교란 원불교란 말씀입니까? ●‘불종불박(佛宗佛朴)’의 예언 백:교무님이 답을 안 하시는군요. 전 사실 이렇게 짐작했습니다. 원불교에선 미신이나 이적 같은 것을 조금도 안 믿는 것 같으니까, 계룡산 같은 것은 원불교의 입장에서 무의미할 것이라고요. 원불교 교리에 따르면, 착실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밝은 세상이 바로 미륵의 용화회상, 개벽된 세상 아닙니까? 그렇담 계룡산이든 지리산이든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생각되는 거죠. 김:백 소장님은 이런 얘기 혹 들어보셨나요? 1936년 4월21일 소태산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찾으셨는데 그 때 각석(刻石) 하나가 화제가 됐습니다. 신도안 대궐 터에 있던 이상한 바위인데 기이하게도 ‘불종불박(佛宗佛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이태조가 신도안에 대궐 터를 닦으면서 운반해 놓은 것이라 하고, 거기 새겨진 글씨는 무학대사의 필적이란 전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귀를 이렇게 해석합니다.“장차 불법이 주도하는 세상이 되는데, 그 때 주세불(主世佛)은 박씨”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본다면 신도안은 정치적 의미의 새 도읍이 아니라, 새 불국토의 중심이 될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원불교에선 계룡산 신도안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백:소태산은 자신을 그 전설의 주인공으로 보았던 게 아닐까요? 그가 신도안에 수도 도량을 지으라고 명령했다면 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네요. 김:소태산의 속성(俗姓)이 박씨여서 저희들은 그 바위를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계룡산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선배 교무는 이렇게 말했어요.“지구의 축이라는 계룡산, 일찍이 무학대사가 이곳에 도(道, 종교)의 도시(都市)가 열릴 것이라 예언했던 세계의 수도 계룡산, 그래서 그런지 지명조차 갑사(甲寺), 신원사(新元寺), 상도리(上道里)가 있는 계룡산. 그 곳에 원시반본(原始反本)하여 상원갑(上元甲)의 시대가 예고된 곳이 아닌가.” 계룡산은 세계의 수도, 지구의 축이 될 것입니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새 세상이 펼쳐질 곳, 세계종교의 중심으로 예정된 성지가 계룡산입니다. ●“어서어서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백:조사를 해봤더니 1959년 10월 정산종사의 주도로 당시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64번지 신도안 대궐터의 불종불박 바위 뒤에 있던 초가 1동을 원불교 측이 매입했더군요. 거기서 2㎞ 떨어져 있던 원불교 남선교당도 아마 그 곳으로 옮겨졌지요. 김:그건 그랬어요. 정산종사가 신도안 ‘불종불박’ 땅을 매입하라고 하셔서 그리 된 것입니다. 사실 원불교의 어른들은 모두 신도안에 다녀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산종사는 직접 다녀오신 일이 없었지만 신도안의 역사를 환히 꿰뚫고 계셨습니다.1961년 10월 정산종사가 열반에 앞서 3대교조가 될 대산종사에게 “지체 말고 어서 어서 신도안에 들어가 터를 잡아라.” 하셔 대산종사는 신도안에 정양을 하며 삼동원의 터를 닦았습니다. 백:제자들에겐 신도안으로 들어가라, 명령했지만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는 교무님 말씀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정산은 신도안을 그저 하나의 상징으로만 생각했을 뿐 실지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요? 김:전혀 잘못된 추측입니다. 정산종사는 신도안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어요. 어느 땐가 풍수에 밝은 제자를 보내 신도안의 지세를 살펴보고 오라고도 했습니다. 신도안을 한 바퀴 돌며 살펴본 제자가 돌아와 보고했습니다.“제가 계룡산 상봉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신도안은 천하제일의 귀(貴)한 터였습니다. 정상에 올라 신도안을 굽어 보니 그 산세가 만조백관이 조공을 바치는 형국이었습니다. 다만 너무도 아쉽게 시루봉 하나가 휙 돌아서 있어 어떤 사람들은 역적봉이라 부릅니다. 시루봉을 싫어봉이라고도 합니다. 자세히 따져 보면 신도안은 농사도 잘 안 되고, 천하에 빈(貧) 터입니다.” 이 말을 정산은 몹시 못마땅해 했다고 합니다. 정산은 계룡산이 명산 중의 명산임을 굳게 믿으셨어요. 그래서 3대 교조 대산종사는 계룡산을 가리켜 정산의 높은 덕을 상징하는 산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정산은 구도 수행하던 시절 가야산에서 ‘격암유록’의 갑을가를 얻으셨다 해요. 그 가운데 “상도(上道)에 가야 큰 스승을 만난다.”는 구절이 있는데 그 상도란 지명이 계룡산에 있어요. 상도는 지명이자 진리의 시작이며 진리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대산은 그런 내력을 다 알아 계룡산과 정산종사를 연계시킨 겁니다. 백:저도 글에서 읽었습니다만 대산의 계룡산 사랑도 대단했더군요.“싫어봉이니 역적봉이니 그런 소리 당최 하지 마라. 성인을 맞이하려고 돌아선 형국이 아니냐. 영성봉(迎聖峯)이라 하거라.”라고 했다고요? 김:1962년 7월 대산종사는 계룡산 상봉을 오르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억조창생개복처(億兆蒼生開福處) 천불만성발아지(千佛萬聖發芽地)” 즉, 계룡산은 억조창생의 복을 여는 땅이니 천명의 부처, 만명의 성인이 나올 곳이란 뜻입니다. 원불교에선 큰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신도안 경영에 힘쓴 결과 1970년대 원불교의 신도안 삼동수양원은 5만 8000평 정도로 규모가 확대됐습니다. ●불교부흥을 예언한 정감록 백:이쯤에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태산 대종사 이래 원불교의 지도자들은 계룡산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이유는 계룡산이 장차 불교 부흥의 성지가 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고요. 김:맞습니다. 불교부흥은 ‘정감록’ 예언의 핵심입니다. 정산종사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정감록에 이런 말이 있다. 왕씨는 나를 벗 삼고(王氏我友), 이씨는 나를 노예 삼고(李氏奴我), 정씨는 나를 스승 삼는다(鄭氏師我) 하였는데 이는 불교를 두고 한 말이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친불, 조선은 억불이었는데 다가올 세상은 숭불(崇佛)이란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정산종사는 정감록이 예언한 미래 세상을 불교 세상으로 보신 겁니다. 또 이런 말씀도 남기셨어요.“도교가 하늘이라면 불교는 땅이며 유교는 사람이다. 지금은 땅에서 올라오는 세상이다. 불교 세상이다.” 앞으론 불교가 세상 도덕의 중심입니다. 백:원불교에선 신도안에서 대규모 선교사업을 펼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야학을 운영해 생활 개선, 문맹 퇴치, 미신 타파 운동을 했고, 그에 대한 지역사회의 반응도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기에 따라선 마치 원불교가 신도안을 접수하려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접수라뇨? 나쁜 뜻으로 볼 일이 아닙니다. 원불교는 신도안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새 운수가 되기만을 기다리는 정감록 신자들을 깨우치려 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미신이고, 그런 미신으론 밝은 세상을 절대 일으키지 못합니다. 생활이 우선 근실해야지요. 신도안 주민 가운데 무려 850명이 처음 7년 동안 원불교의 야학에서 올바른 가치를 배웠습니다. ●“계룡대 옮기면 우린 다시 들어간다” 백:그러나 원불교도 결국 신도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1983년 7월27일 제5공화국 정부는 신도안의 전주민에게 이 지역에서 철거하라는 통고를 했지요. 이른바 ‘6·20사업’이었습니다. 신도안 일대에 군사기지 ‘계룡대’가 들어서기로 확정됐습니다. 그렇다면 신도안이 세계종교의 중심이 될 거란 정감록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간 것 아니겠습니까? 김:매사를 그렇게 성급하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1959년 정산종사가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앞으로 30년 후에는 신도안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과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89년,‘6·20사업’으로 신도안 주민들은 모두 철수했고 육·해·공군 참모본부가 들어섰습니다. 실제로 엄청 변한 거지요. 백:요컨대 원불교가 신도안에 건설한 삼동원의 꿈은 백일몽이 된 거죠. 김:성인의 말씀을 범부의 안목으로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계룡산 신도안에 원불교도들의 염원이 실현됩니다. 천하를 뒤흔드는 권력의 위세도, 지금 여기 살아 숨쉬는 육신도 수명에 한계가 있으나 소중한 꿈은 한계를 벗어납니다.5공 정부의 무모한 계획으로 삼동원을 포기할 당시 원불교는 조건부로 매매계약에 서명했습니다. 언젠가 군사시설이 철거될 때 최우선 순위로 원불교 측에 반환해 달라고 명시했습니다. 백:신도안 땅은 이를테면 특정한 공간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거기 너무 집착하는 것도 일종의 미신이 아닌가요? 김:서산에 해가 지면 동산에 달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미륵불의 용화 세상에 대한 염원을 포기하지 않는 한 신도안의 꿈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제 통일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냉전시대의 음해와 대립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저 하늘에 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부처님의 원만한 정법이 이 세상을 평화로 이끌 것이고, 계룡대도 물러날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백:계룡산 신도안이 정법을 상징한다, 정말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한때는 그저 새 왕조의 도읍터로 인식됐고, 그러다가 대한독립의 상징, 나아가 세계 중심국가를 향한 염원, 후천개벽의 근원지로 풀이되던 신도안. 현실적으론 중요 군사시설이 위치한 곳인데 이곳을 원불교에서는 용화세계의 구심점으로 보는군요. 원불교에 이르러 정감록에 관한 해석은 그야말로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여겨집니다. 참, 요즘 계룡대를 이전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는군요. 부디 성불하십시오. (푸른역사연구소장)
  • 학계 일부 ‘脫 민족주의 수용론’ 눈길

    학계 일부 ‘脫 민족주의 수용론’ 눈길

    최근 학계 논란의 중심에는 탈민족주의가 있다. 이 논란은 단지 학문적 논쟁에만 그치지 않는다. 논리의 순수성과는 별도로 ‘현재 정치’에 접속되면 보수주의와 뚜렷한 친화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핵심은 DJ정부 이래 집권한 ‘민족주의 좌파’에 대한 위기감과 반감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크게 다루는 자칭 ‘민족지’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논의 역시 비중있게 다루는 어색한 풍경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에서 다시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비판했다. 지난해 여름호부터 이어지고 있는 논쟁의 연장선상이다. 조 교수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임 교수가 박정희체제의 특수성을 외면한다는 데 있다. 서구의 몇몇 파시즘을 일반화한 뒤 박정희체제를 끼워맞추는 것은 ‘지적 종속’의 한 형태다. 이는 임 교수가 좁은 맥락의 비슷한 점에 집착, 역사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부시-빈라덴’은 적대적 공범관계다. 하지만 ‘제국적 질서와 권력구조’를 놓치면 일면적인 해석에 그친다. 임 교수의 논지라면 구한말 위정척사파와 일본제국주의는 똑같다.‘반근대적 성격’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과거청산문제도 비슷하다. 나치재판을 마무리한 뒤 ‘몇몇 전범만 처벌해 독일 국민은 면죄부를 얻은 게 아니냐.’는 독일의 경험에서 뒤의 것만 임 교수가 따오고 있다는 것이다. 법적 제도적 과거청산마저 안 된 우리 상황은 지워져 있다. 조 교수가 “현재의 과거청산이 실패한다면 (임 교수 주장은)학문적 연구로 끝나버린다.”고 비판하는 까닭이다. 조 교수는 그러나 각주를 통해 박정희체제의 헤게모니를 과도하게 강조했다고 시인하는 등 임 교수의 논의가 지나친 좌파적 해석에 대한 ‘해독제’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릴 ‘한·중·일 3국의 근대사인식비교’ 학술대회에서도 최근 다시 일기 시작한 식민지근대화론 주장 가운데 일부분이 수용될 조짐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신주백 책임연구원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일제시대 서술이 지나치게 ‘한국수탈론’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지주제 발달 등 한국의 대응이 빠진 데다 한국의 수탈만 있을 뿐 타이완과 만주의 사례는 없다. 도쿄대 마쓰모토 다케노리 교수 역시 식민시대 서술에서 수탈론 외의 서술은 찾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근대성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기존 역사연구에 대해 실증적 연구없이 ‘일제=악’이라는 도덕론으로만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이에 비춰볼 때 일제시대 중국의 피해상황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중국 사회과학원 롱웨이무 부주간의 발표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삼겹살·순대 맛에 푹 빠졌어요”

    3년 동안 한국의 고교에서 우리 교과과정을 배웠던 외국 유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했다. 경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서울산업대에 합격한 9명이 그들로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출신이 각각 3명씩이다. 서울시교육청의 초청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이들은 지난 2002년부터 한국에서 살며 배우고 있다. 이미 지난 98년부터 선배 31명이 한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9명 전원이 대학에 진학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최고 18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이들의 한국행은 그야말로 행운이다.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고교는 물론 대학에서도 기숙사가 제공된다. 경기기계공고 추교수 교사는 “모두 그 나라에서 엘리트로 꼽히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이들에게 한국 생활은 낯설고 힘들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쇼핑을 하러 갔는데 대부분이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 hina)’라서 한번, 그러면서도 가격이 비싸서 또 한번 놀랐죠.” 중국에서 온 둥밍(董明·20)은 대뜸 이렇게 말한다. 둥밍은 “신문 보도가 자유롭고 드라마나 음악은 물론 영화 같은 문화산업이 발달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우즈베키스탄과 러시아 학생들에게 한국 생활은 ‘문화적 충격’이라 할 만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아브로르(20)는 “처음엔 학생들이 직접 교실을 청소하고 선생님들이 예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삼겹살, 순대의 맛에 푹 빠져 있다. 중국 출신 류린(劉琳·19)은 “한국 음식 만드는 것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9명중 4명은 한국인 조상을 둔 ‘고려인’이다. 러시아에서 온 양 이고르의 할아버지는 서울 출신으로 구한말 사할린으로 이주했다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를 당한 아픈 가족사를 지니고 있다. 늘 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서 공부해보고 싶었다는 이고르는 “서울의 친척들을 만나게 돼 정말 기쁘다.”며 웃었다. 고려인 학생들에게도 한국어 익히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려인 3∼4세인 이들은 우리말을 모른 채 한국에 왔다. 한국어학원을 다니고 학교 생활을 3년이나 했지만 아직도 우리말은 서툴다. 2일 대학 입학식을 갖는 이들이 사뭇 기대하고 있는 것은 ‘소개팅’이나 ‘미팅’이다. 하지만 이성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공부에 대한 욕심을 앞지르진 못한다.“석사, 박사까지 따 양국 교류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것”이라는 이들에게서 대학 새내기의 풋풋한 꿈이 읽혀진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기고] 망언·망발과 역사전쟁/박석흥 대전대 문화사학과 겸임교수·명예논설위원

    3·1절을 앞두고 주한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다. 외교관의 단순한 망언이 아니다. 중국 정부가 고구려·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발표한 음모와 비슷한 충격적인 발언이다.‘한국 침략’을 ‘진출’로 바꾸고 종군 위안부, 대학살, 경제 수탈 등 일본의 침략 사실을 축소·삭제했던 2001년 일본 ‘신편 교과서 파동’에서 한걸음 더 나가, 침략을 미화하는 일본 극우 세력의 ‘자유주의 사관’과 국가주의가 만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 전쟁 도전에 안팎곱사등이가 됐다. 중국은 한국 고대사의 시원인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 주장 등 한국 근·현대사를 날조해 한국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고 있다. 중국·일본이 도발한 역사 전쟁은 단순한 과거사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 한·중·일 관계사를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망언이 나올 때마다 항의나 하는 미봉책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2005년은 을사국치 100년, 광복 60돌이 되는 해다. 중국·일본과의 역사 전쟁에 앞서서 치욕과 영광이 겹쳐진 이 100년의 역사 정리는 민족의 새 진로 설정을 위해서도 서둘렀어야 할 과제다. 건국 후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과거사 정리와 한국사 체계화가 시도되긴 했으나 전통문화와 현대사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사건 중심으로 접근, 혼란만 가중되고 중국·일본의 역사 전쟁 도전에 무방비 상태가 됐다. 한국 역사에 관한 의도적인 왜곡과 망언은 이제 극우 일본 정치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한일본대사가 언론회관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만한 틈새를 한국 정부·학자·지식인이 보여 주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을 수탈만이 아니라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보자는 경제학자의 망언을 비롯하여 정신대에 관한 경제사학자의 망언, 고구려사는 중국동북아사라는 동양사학자의 망언, 일본의 작위까지 받은 구한말 고관대작과 일제 밀정의 후손까지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나서는 망언 등 망언이 만발하고 있다. 최근 경제사학계에는 한국의 근대화가 일본의 한국 지배 침략기에 깔아 놓은 경제성장의 연장이라는 일본학자의 중진자본주의론이 무시못할 학설(?)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한국 사학계는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기도 전에 일본 극우파 학자들의 식민지배 미화론에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정치인들의 일제 침략이후의 한·일 관계사에 관한 무지와 적절치 못한 발언까지 남발돼 참으로 딱한 형국이다. 1998년 한·일 공동 파트너십 선언에 앞서 가진 양국 정상회담에서 한국 대통령은 “일본의 침략 문제는 이제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제 침략의 실체와 친일 세력의 죄악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나온 한국 대통령의 통큰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에서는 한국 침략사를 왜곡한 ‘신편교과서’가 정식 교재로 채택되었고 일본 총리가 2차대전 전범들의 위패를 안치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일본의 이런 후안무치한 작태를 방조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한 정치인의 발언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시혜론에 동조하는 친일 인사들의 증가다. 광복 후 한국 역대 정권의 문화 정책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일본·중국의 한국사 왜곡을 바로잡아줄 학술원·국사편찬위원회·한국학 중앙연구원·독립기념관 등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27년전 국학 연구 총본산으로 출범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총리나 장관 등 여권 중진들의 퇴임 후 보직처로 전락했고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건립된 독립기념관도 한·일 역사 전쟁 논의에서 비켜서 있다. 국학 관련 중요 기관을 설립 목적보다 정치 목적으로 운영해온 파행 행정이 중국의 역사 전쟁 도발에 또 하나의 연구소를 서둘러 만드는 모순을 드러냈다.2005년 일본 교과서 검인정 작업을 둘러싸고 더욱 첨예화될 일본의 한국침략사 왜곡을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걱정이다. 박석흥 대전대 문화사학과 겸임교수·명예논설위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7) 계룡산과 신종교들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주체적 근대화운동은 함수관계 ‘정감록’과 나의 만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을 꺾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느냐 하는 화두에서 비롯됐다. 이 문제를 풀려고 나는 서양의 종교사, 중국의 태평천국, 백련교 등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암중모색을 하던 중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주체적 근대화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됐다.“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다양한 농촌운동을 전개한 천도교의 경우에서 보듯 신종교는 근대화운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뭉뚱그려 말하면,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은 동학·증산교 및 원불교 등 한국의 대표적인 신종교들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들 신종교는 성리학에 대항한 새 이데올로기일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위한 대안의 구실도 할 만했다.19세기 말부터 이들 신종교는 민중의 입장에서 ‘제생의세’(생명을 살리고 병든 세상을 치료)와 ‘해원상생’(원한을 풀어 서로를 살림)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평민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상사의 큰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종교들이 기성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한국 사회는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기독교,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을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새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사회세력들은 신종교를 일괄 매도하는 경향이 심했다. 그들은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했다. 비유컨대, 수입상품을 팔아먹으려고 토산품에 대해 흑색선전을 펴는 격이었다. 간혹 일부 신종교 단체들이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 그것으로 신종교 전체를 매도해서 될 일인가. 참고로 말하면 일제시기 신종교 단체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나 천주교보다 수십 배 신도 수가 많았다. 우리는 더 이상 냉혹한 비판자의 편향된 시각에서 신종교 단체들을 홀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수십년 전 수백만 민중의 지지를 받던 신종교는 ‘정감록’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런 점 때문에 ‘정감록’을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히 신종교를 말하게 되고, 신종교를 논의하면 당연히 정감록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정감록이 신종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부분은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대목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신종교마다 일치하지 않아 여러 형태로 구별된다. 나는 편의상 그 형태를 청림교형·보천교형·원불교형 등 3가지로 구분해 부르겠다. 이들의 차이점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정감록, 대항 이데올로기, 신종교 그리고 자주적 근대화운동의 상관관계라는 큰 주제에 접근하는 내 나름의 방법이다. ●전통적 정감록 신앙에 근접한 청림교형 신종교 단체들 가운데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정감록 신앙에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는 것을 나는 청림교(靑林敎)형이라 한다. 엄밀히 말해, 청림교가 늘 그랬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단지 1932년에 발생한 이른바 청림교 사건에서 드러난 그 교단의 모습에서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취 없이 사라진 청림교지만 본래 1920년 동학에서 갈라져 나올 때만 해도 그 세가 만만치 않았다. 교당이 만주와 지린에까지 세워져 한때 신도 수가 30만명을 오르내릴 정도였다. 청림교는 항일운동에도 열심이어서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고 하는데 마침 1932년 2월 말에 터진 청림교 사건이 결정적인 탄압의 구실이 됐다.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상상하던 정감록과 신종교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사건의 내용을 개관해 보자.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정감록’을 빙자해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하는 신종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언론에 밝혀진 사건의 상당 부분은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봐야 한다. ●자하도 진인이 보내온 만병통치약 1932년 2월27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청림교주 태두섭을 비롯한 30명을 긴급체포했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에게 금품을 갈취해 사복을 채운 혐의로 붙들려온 이 교단의 간부 11명에게는 결국 실형이 선고됐다. 청림교측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고 한다. “바야흐로 계룡산에 신국가 건설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정감록’에 약속된 대로 곧 진인이 나와 국권을 손에 쥘 것이다. 진인은 이미 청림교 간부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 단계에 있는데 남해 자하도라는 무인도에 숨어 있는 칠성관이 바로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이다. 누구든지 청림교를 제대로 믿기만 하면 이 다음에 크게 벼슬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도 아무 걱정하지 마라. 청림교에는 자하도에서 몰래 가져온 신약이 있다. 이 약만 복용하면 만병이 통치되고 불로장생한다.” 청림교에서 말한 자하도와 칠성관은 물론 가공의 섬, 가공의 인물이었다. 다만 ‘정감록’에 남해의 어느 섬에서 진인이 나와 계룡산에 도읍한다고 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서 많은 정감록 신봉자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고 본다. 청림교측은 진인의 실체를 칠성관으로 파악하고 있던 데다가 진인이 머무는 남해의 섬을 자하도로 정확히(?) 밝혔고, 또 그 진인과 이미 왕래를 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바람에 그럴싸하게 들렸던 것이다. 또한 청림교측은 진인이 직접 조제했다는 선약(仙藥)을 시판하기도 했다.‘정감록’에는 진인이 약을 만든다는 말이 전혀 없다. 그렇긴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구하러 나올 진인이라면 그 정도 능력쯤이야 있을 법하다고 믿었다. 진인이란 용어가 본래 도교적인 데다 도교는 장생술(長生術)을 추구하므로 진인과 선약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밀접해 보였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미뤄 볼 때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청림교측이 파는 선약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일 식민지 경찰의 수사 결과가 사실이었다면, 청림교 간부들은 이런 ‘황당한’ 거짓말로 ‘어리석은’ 농민들을 속여 사기행각을 거듭했던 셈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제가 발표한 청림교 사건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이 사건은 청림교를 탄압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고, 수사 과정에 혹독한 고문이 있었다. 따라서 사건에 관한 보도 가운데도 일경의 왜곡과 조작이 섞여 있을 수가 있다.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 형태 어쨌거나 청림교 간부들의 언동에는 조선 후기에 널리 퍼져 있던 정감록 신앙의 원초적인 모습이 재발견된다. 계룡산 천도설의 주인공인 진인의 능력을 빌미로 신도를 끌어들이고 조직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방법 말이다. 비슷한 일이 18세기 정조 때도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진인이 해도에서 몰래 군대를 기르고 있다며 군인들이 입을 군복을 마련한다는 빌미로 금품을 거둔 사례가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해도에 있는 진인에게 물어 미래의 운세를 봐주겠다며 의뢰인에게서 복채를 챙기기도 했다. 묘향산 등지에 머무는 진인에게 부탁해 액막이를 하겠다며 제수용품조로 거금을 제공받은 이도 있었다. 청림교 사건에 투영된 신종교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이 단계의 신종교는 아직 기성 이데올로기에 대항할 만큼 뚜렷이 정제된 이념을 갖지 못했다. 그 단체의 수장은 스스로를 진인이나 새 세상을 건설할 주역으로 제시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정감록에 언급된 진인을 내세워 교단의 조직을 보강하고 운용자금을 거두는 정도다. 이들 신종교는 그저 ‘정감록’을 시세에 맞춰 풀이해 현세적 이익을 도모하는 정감록 신앙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일제시기 계룡산에 난립해 있던 신종교 단체는 대체로 그 수준이었다. 각지로부터 계룡산에 이주해온 정감록 신봉자들 중에는 일인교단(一人敎團)에 머문 경우도 많았다. 계룡산을 처음 찾았던 1980년대 후반에도 나는 이런 형태의 정감록 신자들을 많이 보았다. ●국가적 차원에서 천지개벽을 바라본 보천교형 그와 다른 차원에서 정감록의 계룡천도설을 수용한 신종교 단체들도 있었다. 정연한 교리체계를 갖추고 국가나 민족의 입장을 내세운 경우인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보천교(普天敎)를 손꼽는다. 지금은 그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일제시기 보천교는 위세당당한 신종교였다. 보천교는 1911년 증산교에서 독립됐다. 창립자는 차경석(車京石·본명은 輪洪)으로 그는 증산교와 동학의 교리를 녹여내 나름대로 새 세상을 준비했다. 인의(仁義)의 실천을 기본교리로 정했고 경천(敬天)·명덕(明德)·정륜(正倫)·애인(愛人)을 4대강령으로 삼아 상생(相生)·대동(大同)을 강조했다. 한데 이 신종교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교주 차경석이 ‘정감록’을 적극 원용한 점이다. 그는 천지운도(天地運度·새 세상)를 열 사람은 자기뿐이라며 진인을 자처했다. 새날이 오면 한국은 세계 종주국가가 된다던 차경석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말 보천교는 동아시아가 한세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지만, 보천교의 본래 모습은 그렇게 친일적인 것이 아니었다. 보천교 신도들은 일본 상품을 철저히 배격했고 토산품 자급자족운동을 했다.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끝난 뒤 허탈감에 빠져 있던 민중은 이런 보천교의 민족적인 성격에 호응해 교세가 급속히 팽창했다.1920년대 중반은 보천교의 전성기로 간부 수가 55만명을 헤아렸고 신도는 6백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곧이듣기는 어렵지만 1920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기독교 신자 총수 32만 3574명과 비교해 볼 때 보천교의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보천교는 기독교의 20배쯤 되는 신도 수를 자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감록’을 인용해 대한독립이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므로 일제는 보천교의 일거수일투족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세가 워낙 큰 데다 교주 차경석의 카리스마가 절대적이어서 감히 교단 해체를 명령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유하면 당시 보천교는 구한말 동학이 누렸던 민중종교의 위상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당국이 보천교의 활동을 방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설에 따르면 일경에 체포돼 곤욕을 치른 보천교 신도가 3만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는 보천교를 반국가적 ‘음모단체’로 규정해 놓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보천교의 ‘음모’는 대한독립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었고 그 핵심이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이었다.‘정감록’에 “계룡산의 돌이 하얗게 되고, 초포에 배가 다닐 때 세상일을 알 수 있다(鷄龍白石 草浦行舟 世事可知).”는 구절이 항상 문제였다.‘세상일을 알’ 거란 문구를 보천교측은 교주 차경석의 등극으로 풀이했다. 그런데 마침 1924년은 육십갑자가 새로 시작되는 갑자년이라 보천교 신도들은 그 해를 신국가 출범 시기로 보았다. 이른바 지상낙원인 후천세계(後天世界)가 시작될 갑자 원년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종교적 카리스마가 막강했던 차경석은 일반인들 사이에도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은 동양을 지배할 권력자라는 의미로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비웃음을 담아 그렇게 부른 경우도 적지 않았을 테지만. 1929년 낙성된 보천교의 본부 건물 십일전(十一殿)은 보천교의 교세를 반영한다. 전북 정읍에 건립된 이 건물은 지붕을 덮은 기와가 황금빛을 뿜었으며, 경복궁 근정전보다 무려 2배나 컸다.1924년 등극설이 무위로 끝났기 때문에 보천교측에선 바로 그 십일전에서 기사년(己巳年·1929년) 기사월(己巳月) 기사일(己巳日)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즉위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기(己)와 사(巳)는 글자의 생김이 서로 비슷한데, 두 글자는 10간과 12지의 중간으로 최상의 양기를 상징한다. 특히 뱀을 뜻하는 巳는 용(辰)과 더불어 성인(聖人) 즉 임금을 가리킨다. 따라서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이라면 보통 임금이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 만큼 지도력이 강한 왕이 등장할 시점으로 해석된다. 이 소문으로 수백만 보천교도들은 대한독립의 임박을 믿었고, 그러자 식민지 당국자들은 행여 큰 소요라도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차경석은 왕이 되지 못한 채 1936년 병으로 죽었다. 조선총독부는 그 소식을 환영했고 보천교 분쇄공작에 나섰다. 졸지에 지도자를 잃은 보천교는 사분오열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죽은 뒤에도 보천교 신도의 상당 수는 여전히 ‘정감록’의 계룡산 도읍설에 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신왕조의 수도로 예언된 계룡산에는 후천개벽의 기운이 넘친다. 머지않아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할 정진인은 차경석의 손자 정동영이 틀림없다.” 일부 신도들은 이런 말을 퍼뜨리며, 차경석의 어머니가 이웃의 정모라는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해 차경석을 낳았기 때문에, 그의 실제 성은 정씨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폈다. 1930년대 후반 총독부 관변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쓴 조사보고서를 읽어 보면, 당시 차경석의 손자는 행방불명이 되고 없었다. 그 점에 대해 신도들의 설명은 달랐다.“차천자의 손자 정동영은 깊은 산속에 숨어 밤낮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있다. 이제 정동영이 다시 나타난다. 새 세상에선 정동영을 받드는 사람들이 신양반이 돼 요직을 차지한다.” 성폭행설까지 조작해 자기네 교주의 성까지 바꾼 것은 억지스럽고, 교주가 ‘천자’에 즉위한다고 했던 점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천교의 주장엔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 있다. 그들은 정감록 신앙을 대한독립, 지상천국인 후천세계의 관념과 결부시킴으로써 일제에 저항할 원동력을 제공했고, 단순히 항간에 떠도는 예언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탈바꿈시켰다. 비록 엉성하긴 했지만 큰 변화였다. 한편 원불교에선 계룡산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하는 문제는 따로 살펴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6) 신도안은 대한독립의 소망

    ●신도안 사람 김씨 김철호(가명) 노인(78세)을 다시 만난 것은 금년 초였다. 옛날 신도안 사람들의 생활이 궁금해 거기 살던 이를 수소문하던 참에 그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1988년 봄, 먼지가 풀썩거리는 시골길을 따라 소형차를 몰고 간 곳이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였다. 나는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신도안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부남리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유독 김씨가 기억에 가장 오래 남았다. 차분하면서도 다부진 말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집안 내력도 독특했다. 김철호씨는 3대째 신도안에 살고 있는, 이를테면 신도안 토박이였다.19세기 말 그의 조부 김병선이 평안도 정주에서 문전옥답을 다 처분하고 식구를 인솔해 들어온 곳이 바로 부남리였다. 밥술이나 먹던 김씨의 조부가 하루아침에 고향을 등진 것은 ‘정감록’의 예언을 좇아서였다.‘머지않아 난리가 난다.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계룡산에 들어선다.’ 김씨의 조부는 신도안에 들어가면 난리도 피하고 새 세상에서 벼슬도 할 수 있단 말에 귀가 솔깃해 마침내 고향을 등졌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고, 각종 민란과 갑오동학농민운동 등으로 사회가 몹시 혼란했다. 그 시절에 신도안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본격화됐던 것인데 이주민 중엔 수 백 년 동안 지역차별에 희생됐던 서북 출신이 많았다. 본래 살림살이가 유족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정감록’이 처음 출현한 곳도 서북지역이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김철호씨의 조부는 전형적인 초기 이주민이었다. 신도안의 토착인구는 19세기 초까지 수십 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이주민이 점증한 결과,1918년 말 총 584호에 남녀 2667명으로 불어났다. ●신도안의 여러 뜻 ‘정감록’의 신봉자들은 누구나 새 도읍지를 신도안이라 믿었다. 이 태조가 대궐 터를 닦던 곳이고 계룡산에서 가장 빼어난 명당이기 때문에 거기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 신도안이란 지명엔 흥미로운 유래가 있다. 신라 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계룡산에 왔는데, 그는 신라 사람들이 계룡산의 정상인 천황봉 아래 있는 제자봉(帝字峰)을 제도(帝都)라 일컫는 사실을 알고 격노했다. 엄연히 중국에 황제가 있는데 신라같이 작은 나라에 제도(帝都)란 말은 당치 않으니 당장 바꾸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제도’의 ‘제(帝)’ 자에서 양편 획(劃)을 떼 신(辛)자로 고쳐 ‘신도(辛都)’라 불렀다 한다. 신도안이란 지명을 둘러싼 해석은 제각각이다.1988년 조사 당시 내가 현지서 만난 계통불명의 어느 신종교단체 교주는, 새 세상을 가져다줄 구세주가 도읍할 곳이므로 ‘신도안(新都案)’ 즉, 신도읍 예정지라고 했다. 단군을 모신다는 어느 신종교단체의 사제는 이곳은 신정(神政)이 베풀어질 곳이라 ‘신도안(神都案)’이라 해야 옳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동학 계통의 어느 신종교인은 정감록에 예정된 정씨(鄭氏)의 도읍인 때문에 조선왕조의 도읍은 아니라는 뜻이 있어 ‘新都안’이라고 했다. 그는 ‘안’은 아니라는 부정의 뜻이라고 재삼 강조했다. 김철호 씨를 비롯한 현지 주민들은 ‘새로운 도읍지의 안쪽’ 즉, 신도내(新都內)로 이해했다. 이번에 다시 만났을 때 김씨는 21세기엔 드디어 신도안 시대가 열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될 거라 했다. 그는 아직도 3대를 품어온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명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랐지만 신도안이 장차 일대변화를 불러올 중심지여야 한다는 믿음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정감록’의 신봉자들은 세상이 그냥 이대로 지속돼선 안 된다, 뭔가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듯하다. 따지고 보면 이런 믿음은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이른바 모든 고등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정감록’ 신봉자들은 질적 변화의 진원지를 신도안이란 구체적인 장소로 못 박은 점이다. 신도안의 지리적 범위를 묻는 내 질문에 김철호씨는 이렇게 답했다.“계룡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암용추와 숫용추 두 폭포가 있어. 바로 그 아래 한 자락이 신도안이지. 충남 논산군 두마면 부남리, 석계리, 용동리, 정장리에 대덕군 진잠면 남선리를 더한 5개 마을이 신도안이란 말이여. 일제 때부텀 행정구역으론 그랬어.” 지도를 펴놓고 보니 대략 동서 6㎞, 남북 7㎞ 정도 공간이었다. ●3·1운동으로 조성된 신도안 열풍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도안을 향한 이주 물결이 한층 거세졌다. 엄밀한 의미로 독립만세운동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고 식민당국도 무단통치를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수십만 명이 일경의 체포, 구속, 구타로 시달림을 겪은 터라 후유증이 몹시 컸다. 상당수 민중은 일종의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심리적 위안을 받는 일이 시급했다. ‘정감록’이 그 문제를 떠맡았다. 알다시피 정감록은 현재의 평안과 미래의 성공을 기약하는 길지(吉地)를 선사했다. 정감록을 믿었던 민중은 가족을 거느리고 이주대열에 섞였다. 무엇보다도 신도안이 가장 인기 있는 길지였다. 거기서 기도하면 소원성취 할 수 있다, 암수 폭포수가 흐르는 신도안 개울물에 서식하는 올챙이를 복용하면 만병통치 효과가 있다는 소문까지 들렸다. 김씨가 부친 김연수에게 들은 바로,1920년쯤 3·4월이면 올챙이를 잡으러 개울가로 몰려드는 인파가 수천 명이나 됐단다. 김씨도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올챙이를 꽤 많이 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1919년 이후 4∼5년 동안 신도안의 인구는 급성장했는데 이 점은 통계로도 입증된다.1923년 말 1570호에 7008명으로 5년 전인 1918년에 비해 3배가량 늘어났다. 신도안은 이미 사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 주변 마을로 이주민이 몰려들 지경이었다. 그들은 대개 ‘정감록’을 신봉하는 신종교단체들에 속했다. 아예 그런 신종교단체가 수백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금강교가 그랬다.‘금빛 병풍 산기슭에 만 명이 살 수 있다’는 ‘정감록’의 구절을 근거로 금강교도들은 신도안에 근접한 충남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터를 잡았다. 하루아침에 100호도 넘는 큰 마을이 들어섰다. ●신도안에서도 꺼지지 않는 대한독립의 꿈 나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점이지만, 신도안 이주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맞물려 있었다. 이미 1910년대 중반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증산교의 일파인 음치교와 태을교 측은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간다. 정진인이 한국 출신 장교를 거느리고 독일편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세계전쟁이 끝나면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 인류가 모두 사멸하게 돼 있으나 음치교나 태을교를 믿는 신도들만은 재난을 면한다. 어쨌거나 세계전쟁을 마무리지은 정진인은 대한독립을 이룬 다음 계룡산에 도읍한다. 이때가 되면 음치교나 태을교 신도들은 신앙심과 포교성적에 따라 관직을 상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흥미롭게도 그들 신종교단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점쳤고, 그 이유를 정진인에게서 찾았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심정적으로나마 독일편을 들었다고 풀이된다. 음치교나 태을교도 그랬지만 신종교의 대부분은 정감록을 믿었다. 그들은 진인왕의 등극을 기다렸는데 그것은 나라의 독립을 뜻하기도 했다. 진인왕은 어떤 경우에도 일본의 꼭두각시일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허황된 예언이었지만 신종교 단체가 퍼뜨린 유언비어에는 대체로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마음이 얼마간 담겨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부터 민중은 국가의 독립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일단 나라를 되찾아야 개인의 평안과 출세도 가능하다는 인식이었다. 식민지 당국은 이들 ‘위험한’ 신종교단체를 탄압했다. 일제는 그런 단체들에게 사기, 폭력, 금품 갈취, 음란행위 따위의 죄목을 씌워 마음대로 탄압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들 단체의 특징이었던 민족주의 성향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빌라도 총독이 신종교 지도자 예수를 처형할 때 파렴치범과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도 그 비슷한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1920년대에도 신도안 이주를 부추기는 유언비어들이 계속해서 나돌았다.1921년쯤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에는 다음과 같은 소문이 유행했다.‘정감록’에 왜왕(倭王) 3년을 지내고 가도(假都) 3년이 되면 참된 정씨 왕이 나타나 계룡산 신도에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왜왕 3년이란 총독 삼대(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요, 가도 3년은 상해임시정부 3년이다. 요컨대 1921년쯤 계룡산 신도안에 임시정부가 도읍을 세운다는 예언이었는데, 그 말이 퍼지자 신도안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1921년 한 해 동안 모두 610호에 2443명이 신도안에 정착했다. 김철호씨는 고향마을 선배 중에도 그 때 이주해온 집안이 적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경기도 교하 지방에도 조선독립에 관한 유언비어가 널리 퍼졌다. 계룡산 바위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었다.‘음력 2월15일은 독립을 외치는 날이다.10번을 외치면 일가를 보존하게 되며,20번을 외치면 독립을 회복한다. 이 취지를 쓴 종이 두 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자기 한 몸이 보존되고,8장을 전하면 충신 효자가 된다. 만일 이를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주술적 효과를 가진 종이 쪽지가 계룡산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느덧 계룡산은 독립을 실현해 줄 희망의 등잔이요, 신도안은 그 불꽃이 타오를 심지가 됐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느덧 신도안은 민족의 성지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신도안의 명물 칠성교의 ‘지푸라기 북’ 1920년대 민중의 관심사는 신도안이 과연 언제 도읍이 되는가, 달리 말해 나라가 독립될 시기를 점쳐 알아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24년 신도안 사람들은 지푸라기 북(草鼓) 하나를 만들었다. 그 북은 김철호씨의 고향 부남리의 칠성각에 안치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을에 있던 칠성교란 신종교의 보물이었다. 부남리에 관한 일이라 나는 김씨에게 그 북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김씨의 부친과 평안도 박천에서 내려온 부친의 친구 분이 모두 칠성교를 믿었다고 한다. 김씨 역시 어린 시절 부모의 손에 이끌려 칠성교당에 다녔단다. 1928년 그 북을 쳐 만약 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국 종교계의 우두머리로 삼는다는 소문이 원근에 파다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몰려든 구경꾼만 해도 무려 2만 5000명이었다. 당황한 식민지 경찰은 서둘러 지푸라기 북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민중의 아쉬움은 수그러지지 않아 2년 뒤 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지푸라기 북이 소리를 낼 리는 없다. 하지만 ‘정감록’ 속의 정진인이 나온다면 그 정도 기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민중의 믿음이었다. 1989년 김씨를 포함한 신도안 주민들은 신도안에서 쫓겨났다. 이른바 6·20 사업으로 신도안 일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제5공화국의 시퍼런 서슬에 누구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알고 보면 신도안의 ‘정감록’ 신봉자들은 1970년대를 거치면서 신앙이 약화되었다. 상당수는 생계의 어려움과 자녀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이나 부산 등 대도시로 떠나갔다. 김씨는 고집스럽게 신도안에 눌러앉았지만 그의 두 자녀만 해도 이미 오래 전에 서울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지푸라기도 북도 없고,‘정감록’의 예언에 목을 매는 이들도 많지 않지만 때로 간절한 소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다. 팔순을 바라보는 김철호 씨가 아직 신도안 시대를 꿈꾼다 해도 그 허망함을 탓하기만 해야할지 모르겠다.(푸른역사연구소장)
  • [책꽂이]

    ●한국현대사강좌(양호민 등 지음) 8·15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현대사 보고서. 남북한 관계와 북한 사회주의 건설과 좌절, 한국 정치사, 한미동맹사 등을 5권에 나누어 담았다. 각권 1만 5000원. ●살아있는 우리 헌법 이야기(한상범 지음, 삼인 펴냄) 헌법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지은이가 진보적 시각에서 우리 헌정사와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 권력기구 및 정치기구, 미국과 일본의 헌법 사례 등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썼다.1만 8000원. ●마리아(자크 뒤켄 지음, 고선일 옮김, 빗살무늬 펴냄) 역사학과 신학을 토대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덧씌워진 왜곡된 이미지의 실체와 그 배경을 밝힌 책. 마리아를 둘러싼 교리와 그녀의 부모와 자녀들, 아들 예수와의 관계 등에 감춰진 의혹 등을 담았다.1만 1000원. ●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김재영 지음, 한얼미디어 펴냄) 4년 동안 연해주에서 생활한 자원봉사자 부부의 고려인들의 삶에 대한 기록. 구한말 가난과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와 갖은 역경을 겪으며 살아온 고려인들의 모습을 그렸다.1만 2000원. ●폭군들(다니엘 마아어슨 지음, 임경민 옮김) 네로, 이반, 스탈린, 히틀러, 후세인 등 역사상 대표적인 폭군 5인의 은밀하고도 기이한 사적 이야기. 그들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고, 무엇이 그토록 잔인하고 기이한 성격을 지닌 폭군으로 만들었는지 등을 흥미롭게 풀어냈다.1만 5000원. ●노영심의 보이지 않는 선물(노영심 지음, 열림원 펴냄) 피아니스트 노영심이 선물과 사람, 인생에 관해 그려낸 맑고 향기로운 이야기 모음집. 진정한 선물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생각하는 마음, 일상을 끌어안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결국 인생 자체가 커다란 선물이라는 성찰을 전한다.1만원. ●인재 포석의 명인(이기홍 등 지음, 동아일보사 펴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박태준 전 포철 회장, 남덕우 전 총리, 임권택 영화감독, 김성근 야구감독, 방준혁 CJ인터넷 사장 등 인재를 잘 고르는 명인 11인의 노하우를 담았다.9800원. ●생각하는 경영(헤르만 시몬 지음, 장혜경 옮김) 생존과 성장이라는 전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기업에 절실한 것은 단기적 방편이 아니라 깊이 있는 전략임을 강조한다. 숙고, 고민, 창의성, 역발상 등 경영자에게 끊임없이 생각이라는 화두를 제기한다.1만 3000원.
  • 45~50년도 서울신문 한눈에 본다

    해방공간의 서울신문 등 4개 신문의 영인본 발간 사업이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는 LG상남언론재단(이사장 안병훈)의 기념사업으로 추진된다. 재단이사회는 27일 제10차 이사회를 열어 광복 직후부터 한국전쟁 직전(1945∼1950)까지 발행된 본지를 비롯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4대 종합일간지의 영인본을 올 안으로 발간키로 하고, 언론인 해외연수와 해외언론인 한국전문기자 양성 프로그램인 ‘서울대·LG프레스 펠로십’사업 등 총 15억원 규모의 언론지원사업계획을 확정했다. 재단측은 올해가 광복 60주년이 되는 해로, 이번 영인본 발간 사업은 좌우 이념이 대립하던 해방공간의 한국 언론사를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특히 구한말 대한매일신보를 계승하여 광복 직후 혁신 속간된 서울신문은 해방공간에서 중립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족 단결과 국가 건설을 주창했다. 서울신문은 4·19 당시 사옥 전소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으며, 지금까지 영인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현재 본사는 전국의 도서관에 산재해 있던 당시 서울신문을 마이크로 필름으로 보관하고 있다. 채종규 DB팀장 jkc@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진인왕, 한국판 전륜성왕?

    요즘은 ‘우담발라’가 꽤 자주 피는 것 같다. 연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도 충북 단양군청과 충남 논산 성불사에 우담발라가 피었다고 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법화경’에 보면 우담발라는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 같은 성인이 출현할 때만 핀다고 한다.3000년에 겨우 한 번 필까 말까 한다는데 생물학자들은 그것이 실상 풀잠자리알 또는 곰팡이에 불과하단다. 어쨌든 우담발라가 피어 있는 성불사의 금륜 스님은 상서로운 징조라며 “을유년에는 평화와 번영, 남북통일을 기원하고 싶다.”고 했다. 우담발라. 작디 작은 몇십 송이 꽃인가, 곰팡이에 스님은 참 크고 묵직한 기원을 매달았다. 그런데 나는 우담발라가 피면 등장한다는 전륜성왕과 ‘정감록’의 진인왕 사이에서 비슷한 점을 발견한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세속적 모습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불경을 결집한 아소카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심이 깊고 태평성대를 실현할 왕이 바로 전륜성왕인데 민중은 진인왕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기대했다. 정감록의 진인은 무엇보다 현실의 고난을 헤쳐 간 민중의 꿈을 형상화시킬 의무를 졌다. 진인왕은 조선왕조의 기득권층인 양반을 벌주고 신분구조를 뒤엎으며, 서구열강과 그들의 종교를 물리치고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할 민중의 구세주였다. ●진인은 못된 양반을 생지옥으로 1785년 정조 9년 또 한 차례 정감록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들은 나라가 셋으로 쪼개진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유씨, 장씨, 김씨가 삼국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 뒤 나라를 통일할 진인(眞人)은 제주 700개 섬 가운데 어딘가 숨어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사건의 주모자들은 그 진인이 마음대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이미 서씨와 정씨 두 사람이 진인의 명에 따라 사람들의 허물을 낱낱이 기록한 일종의 ‘선악적(善惡籍)’을 작성중이라고 했다. 18세기말 민중이 진인의 출현에 걸었던 기대가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우선 주목되는 게 그 ‘선악적’이란 장부다. 딱히 양반의 허물만 기록한다고 명기돼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평민을 못살게 구는 양반들의 악행을 기록하는 데 그 중점이 있다고들 여겼을 것이다. 진인은 민중의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바뀌어도 무식한 아랫사람들로서야 당장 무슨 벼슬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저 양반놈들 망하는 꼴 좀 보자.’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였다. 여러 지방에서 양반들은 동약(洞約)이나 향약을 실시해 장부를 비치해두고 말 안 듣는 하층민들을 기록해 뒀다가 벌을 줬다. 윗사람을 몰라본다, 불효한다, 형제간에 불화한다는 등의 죄명이 양반들의 ‘선악적’에 기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인이 민중의 편에서 선악 장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은 진인의 인기를 더욱 높였을 법하다. 통상적으론 양반 편에서 작성하는 것인데, 양반을 벌줄 수 있는 선악적이라니 얼마나 통쾌하랴. 진인의 상벌은 현세에서 시행된다는 점도 민중으로선 무척 달가운 일이었다. 자기들은 별다른 죄도 없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데 약자들을 괴롭히며 놀고먹는 양반, 놀부 같은 그들이 밉고 싫었을 것이다. 민중은 자기들 눈앞에서 그런 못된 양반들이 생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지옥이란 말을 꺼낼 때마다 자연스레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옥(범어 나라카·Naraka)은 사후세계란 뜻인데 그 참혹한 광경은 ‘목련경’에 자세하다. 석가모니의 큰 제자 목련존자의 지옥방문 이야기는 민간에 널리 알려졌다. 문맹인 사람들도 지옥도란 종교화를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불교의 지옥은 종류도 많아서 각기 8대 열지옥(뜨거운 지옥)과 한지옥(추운 지옥)이 있고, 그 아래 또 32개 소지옥이 있다고 한다. 진인은 선악 장부에 기록된 악인을 문자 그대로 생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했다. ●푸른 옷(靑衣)은 천주교 신부요, 서구열강이다 진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또 있었다. 어찌 보면 좀 뜬금없는 소리 같기도 한데, 진인은 서양 종교인 천주교도 퇴치해야만 했고 서구열강도 물리쳐야 했다. 물론 이런 기대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의 사신일행이 거기 와 있던 예수회 신부를 알게 된 것은 이미 17세기부터였으나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어 본격적인 신앙운동이 벌어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조정은 잔뜩 긴장하여 천주교를 엄금하였지만 그 세력은 제법 급속하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층민들의 일부는 천주교의 문을 두드렸지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정의 ‘계몽’도 한몫했지만 천주교에서 조상의 제사를 금지한다는 게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민중의 반발과 두려움은 정감록에도 감지된다.1923년판 정감록의 일부인 ‘무학비결(無學秘訣)’에서 푸른 옷이 남쪽에서 쳐들어오는데 ‘스님 같되 스님은 아니라’고 한 부분이 눈길을 끈다. 여태 한반도엔 없었던 새로운 부류의 성직자 즉, 신부들이 침략자란 것이다.‘푸른 옷’은 본래 좀더 먼저 쓰인 ‘도선비결(道詵秘訣)’에서만 하더라도 미지의 외부인으로 해석될 뿐이었다.‘푸른 옷을 입고 남쪽에서 오니 오랑캐도 아니요, 왜적도 아니다.’라고 했다. 하필 왜 푸른 옷인지를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가 천주교의 국내 활동이 심각성을 띠게 되자 푸른 옷은 어느덧 서양신부로 비화됐다. 19세기 초에는 서양 함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천주교 신자 황사영의 편지가 발각되어 여론이 비등했다. 연달아 천주교박해사건이 터졌으며 국내에 잠입한 프랑스 신부도 처형되었다.19세기 중반에는 그 여파로 프랑스 함대가 공격했고 설상가상 통상문제로 미국함대도 쳐들어 왔다. 그러자 이제는 서구열강 자체가 침략의 장본인으로 부상했다. 이런 변화를 기록한 것이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이다.‘푸른 옷과 흰 옷이 서쪽, 남쪽에서 동시에 침략한다. 이때 정씨가 바다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 역사란 아이러니요, 거기서 나는 또 정감록이 갖는 현실 적응력을 본다. 서양선박의 출몰을 계기로 17세기 후반에 해도진인설이 등장했었는데(연재3호 참고),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엔 거꾸로 해도진인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서양함대요, 서양신부였으니 말이다. ●동학의 최제우 새 세상 구현할 진인으로 1859년 최제우는 서학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동학’이란 이름의 새 종교를 만들었다. 그 뒤 1894년 동학은 서양과 일본을 물리치고 탐관오리를 내쫓아 백성을 구하겠다며 갑오동학농민운동을 벌였다. 한 마디로 동학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내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외세란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 바탕 위에 동학은 새 세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그것이 이른바 ‘후천개벽’이다. 최제우의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에게서 진인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에게 최제우란 존재는 새 세상을 구현할 초인이었다. 진인은 서양세력의 위협에서 민중을 구해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가져다줄 구세주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진인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방씨, 두씨 및 곽씨 성을 가진 3장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각각의 성씨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활약상이 ‘토정가장결’에 나와 있다. “곽장군이 요동의 군사를 이끌고 방씨, 두씨 장수와 함께 왜적과 서남 오랑캐를 무찌른다. 청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돕는다. 정씨를 돕고 이씨를 공격한다. 그러면 이씨는 제주로 들어갈 것이나 4∼5년간의 운수에 지나지 않는다.” ●진인은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다 두어 줄밖에 안 되지만 숨가쁜 격변, 그것도 국제적인 변화를 예언한다. 하층민중이 국제정세에 민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그들 나름의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과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조선의 이씨왕조를 무너뜨린다고 한 점이다. 먼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를 극복하고 그런 다음 비로소 내부문제에 착수한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다. 다 아는 대로 일·청 두 나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한국을 괴롭힌 장본인으로 수백 년이 지난 뒤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19세기말 한국에 진출, 내정을 간섭하고 경제적으로도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런 까닭에 대다수 민중은 진인이 나타나 그들 두 나라도 없애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멸망에 대한 기대가 커, 일본 정벌론까지 등장하게 된다. 정감록의 한 파트인 ‘서계이선생가장결(西溪李先生家藏訣)’엔 호랑이해부터 뱀해 사이 진인이 일본을 쳐서 항복을 받는다고 했다. 호랑이는 섬나라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이며 뱀은 용과 더불어 성인, 또는 왕을 상징한다. 구한말 한반도 지도를 그릴 때도 한국 사람들은 이를 호랑이로 인식했다. 일본 사람들은 일본이 포항과 장기 앞바다에 등대를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기도 했다. 그곳은 호랑이의 꼬리에 해당하는데 등대가 세워지면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른 셈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를 죽이려는 계략이라며 등대를 당장 허물라고 했다. 웃고 넘어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막강한 일본을 이기려면 그런 주술에라도 호소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언서에 언급된 일본정복설은 허망한 소망에 불과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해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산 미곡을 수입했고, 값싼 면직물을 한국으로 대량 수출했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민중은 전례 없는 쌀 부족에 시달렸다. 값싸고 품질 좋은 수입산 면직물을 당해낼 길 없어 일반 농가의 면포(綿布) 생산은 위축돼 갔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른 뒤 한국을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예언서에는 그런 역사적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던 민중의 열망이 표현돼 있다. ●진인왕과 보양법, 밀교 그야말로 초인적인 업적을 이룰 진인왕에 관해 정감록의 일부인 ‘동차결’은 이렇게 점치고 있다.‘태조의 성은 정(鄭), 이름은 홍도(紅桃), 자는 정문(正文), 무오생이다. 섬 가운데 평실에서 나와 계룡산에 건국한다.’ 정진인의 이름 ‘홍도’(붉은 복숭아)는 도교적이다. 복숭아는 수명과 성적 능력을 상징한다. 특히 그 빛이 붉다면 복숭아 중에서도 일품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름은 ‘정문’, 문(文)을 바로잡는다고 돼 있다. 통치 질서와 윤리도덕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진인은 유교적 덕성을 겸비한 존재다. 무오생이라 함도 의미가 있다.10간의 5번째인 ‘무(戊)’와 12지의 7번째인 ‘오(午)’는 각기 중간의 홀수, 즉 중양(重陽)이다. 진시황의 생일도 단오 또는 중양이었다. 이런 남성은 불세출의 영웅이라 한다. 진인왕은 도교적 성격이 강한 만큼 도교서적에 나오는 진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 도교에선 양기, 성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면 절로 진인이 된다고 본다. 그것이 양생법이다. 불교의 분파인 밀교에도 거의 똑같은 가르침이 있다.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이 지은 ‘방중보익(房中補益)’을 보면, 정액을 잃지 않고 93명의 여성과 성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다. 몸에 내재한 이성성(二性性)을 살리게 돼 진인이 된다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지만 밀교는 물론 힌두교에서도 다 그렇게 봤다. 정액을 몸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변화시켜 뇌로 보낼 수만 있다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다. 유사종교의 지도자들은 이를 빙자해 간음 사건으로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들로서는 진인 될 수행을 했다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1937년엔 백백교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주 전해룡은 간음과 범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해 무려 350명의 남녀신도를 살해했다고 한다.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 진인왕이 다스릴 새 세상의 특징을 ‘동차결’은 이렇게 적어놓았다.‘여러 대를 두고 내려오던 양반은 상사람이 되며, 상사람은 오히려 양반이 된다.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 인재를 뽑아 쓴다.’ 짧은 내용이지만 정감록을 믿던 민중에겐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목이다. 진인왕이 평등사회를 실현한다고 볼 순 없지만, 조선사회의 신분질서를 뒤엎고자 한 민중의 의지가 뚜렷이 드러나 있다. 상사람이 양반되고 양반이 상사람 된다고 하였으니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진인왕은 유불선 삼교합일의 바탕 위에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불교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재를 불교에서 구할 리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여기서 나는 조선후기 민중이 성리학적 지배 이념에 반발해 불교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음을 본다. 조선말의 혁명가 김옥균도 불교신자였으며, 이동인과 같은 개화승려도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를 융성시킬 진인왕은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한다. 불교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은 모두 4명이다. 공교롭게도 예언서에서 진인왕에게 왕업을 도울 세 아들이 있다고 한 것과 맞아떨어진다. 신라의 진평왕도 아들의 이름을 동륜, 금륜 등으로 불렀다. 그 역시 스스로를 전륜성왕으로 봤다는 증거다. 전륜성왕 가운데 첫 왕은 철륜왕인데 진인왕이 그에 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동륜왕·은륜왕·금륜왕이 차례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다. 불교신자로서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은 진인왕의 협력자인 세 아들에게도 당연히 그런 역할을 기대한다. 전륜성왕이 출현할 때 우담발라가 핀다고 했다. 서두에서 말했듯 이미 우담바라는 피었다. 과연 전륜성왕은 오는 것일까. 전륜성왕이 가진 7개의 보물 중 하나인 거사보(居士寶)는 고아, 노인, 병자 등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더러 전륜성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예언서 속의 진인왕은 서양열강, 중국, 일본을 평정하고 동아시아에 새 질서를 구축한다고 했다. 정감록은 당대 민중의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대안이었다. 그 예언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했느냐는 별개 문제다. 대안이란 점에서 정감록은 예언서로서 생명력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보러갑시다]

    클래식 ■ 앙상블 예전 정기연주회 23일 오후3시 금호아트홀(02)586-0945. ■ 리처드 스톨츠만 클라리넷 독주회 21일 오후8시 금호아트홀(02)6303-1919. 어린이 ■ 줄인형 콘서트 30일까지 동영아트홀(02)569-0696.40개 인형들이 1시간 20분동안 펼치는 쇼쇼쇼. ■ 그림일기 속의 내 친구들 23일까지 소극장축제(02)741-3934. 또래 친구 고복이와 화영이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가족 뮤지컬. ■ 내친구 플라스틱2 2월6일까지 대학로 컬트홀(02)382-5477. 빈 병, 플라스틱통 등 재활용품들이 빚어내는 상상의 세계. ■ 우리는 친구다 26일까지 학전블루 소극장(02)763-3233. 수준 높은 라이브 음악과 전개되는 민호·슬기 남매와 뭉치의 우정쌓기. ■ 넌 특별하단다 2월6일까지 연우소극장(02)745-0308. 맥스 루카도의 세계적인 그림동화가 뮤지컬로. ■ 커다란 책 속 이야기가 고슬고슬 23일까지 대학로 상명아트홀 1관(02)977-4856. 정도령 설화를 재구성한 닥종이 인형극. 무 용 ■ JUST 26·27일 오후7시30분 국립극장 해오름극장(02)3141-1770. 현대인의 심리적 병리현상을 다룬 안애순무용단의 신작. ■ 수묵 21일 오후7시30분,22·23일 오후4시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1588-7890. 조선의 미와 현대발레의 만남. 장선희발레단. 콘서트 ■ 이적 콘서트 20일 오후 8시,21·22일 오후 7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1544-1555. ■ 김용우 콘서트 21∼23일 오후 8시 정동극장(02)751-1534. ■ 왁스 부산 콘서트 22일 오후 7시30분 부산KBS홀(051)627-6161. ■ 플라워 콘서트 22일 오후4·7시30분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032)657-3007. ■ 스완 다이브 콘서트 21일 오후 7시 홍대 롤링홀(02)3142-2981. 미 술 ■ 기생전 2월 13일까지 서울옥션센터(02)395-0331. 시·서·화의 재능과 지조를 갖춘 교양인으로서의 기생의 역사적 발자취를 조명. ■ 안병석 개인전 3월 3일까지 박영덕화랑(02)544-8481.‘바람결’시리즈 등 자연의 서정을 느끼게 하는 대표작 20여 점. ■ 천성명 작품전 2월 4일까지 갤러리 상(02)730-0030.92. 삶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우화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설치작품. ■ ‘미술과 영화 시각서사(視覺敍事)’전 2월 26일까지 사비나미술관(02)736-4371. 미술과 영화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각체험의 비디오·조각작품 ■ ‘조화(調和) 화조(花鳥)’전 30일까지 가나아트센터(02)720-1020. 새와 꽃을 소재로 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50여점. 박수근·김환기·천경자 등 출품. ■ ‘선현들이 남기신 묵향’전 27일까지 우림화랑(02)733-3738.15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서예가 156명의 서간 200여점. ■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2월 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02)2124-8947.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놀이의 본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해석하는 미디어 예술축제. ■ 근대조각 3인-로댕·부르델·마이욜전 2월6일까지 로댕갤러리(02)2014-6552. 로댕 ‘지옥의 문’, 부르델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마이욜 ‘드뷔시를 위한 기념비’등 서구 근대조각을 이끈 작가들의 대표작. ■ ‘예림을 걷다-시대와 함께, 작가와 함께’전 2월23일까지. 서울올림픽미술관(02)410-1060. 이종상 천경자 김형대 이만익 전혁림 민복진 백문기 전뢰진 최종태 등 원로작가 14명의 그룹전. 뮤지컬 ■ 아이 러브 유 30일까지 연강홀(02)501-7888. 한진섭 연출, 남경주 이정화 정성화 오나라 출연. 이 땅의 모든 커플들에게 바치는 뮤지컬. ■ 하드락 카페 무기한 대학로 폴리미디어 씨어터(02)3141-1345. 이원종 작·연출, 양소민 이정열 주원성 박준면 출연. 하드락 카페에서 잃어버린 꿈을 찾다. ■ 노틀담의 꼽추 2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02)577-1987. 김철리 연출, 이진규 정선아 허준호 김성기 출연.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디즈니의 옷을 입었다. ■ 마리아 마리아 23일까지 한전아트센터(02)593-0901. 유혜정 작·성천모 연출, 윤복희 강효성 이소정 김현성 출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창작 뮤지컬. ■ 모스키토 2월6일까지 백암아트홀(02)763-8233. 김민기 번안·연출, 김희원 민대식 출연. 청소년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가상 상황을 바탕으로 교육과 정치현실을 풍자. 연 극 ■ 오!발칙한 앨리스 30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02)765-7890. 김나영 작·오유경 연출, 김영옥 서상원 민윤재 서현성 출연.‘야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사춘기 소녀 앨리스의 유쾌한 성(性) 이야기. ■ 삼류배우 2월6일까지 대학로 발렌타인극장(02)3674-5555. 김순영 작·연출, 최승일 박기산 정슬기 출연. 평생 단역을 전전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연극배우의 고달픈 삶. ■ 늙은 부부 이야기 23일까지 소극장축제(02)741-3934. 오영민·위성신 작·위성신 연출, 오영수 이혜경 출연. 애틋해서 더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 ■ 아트 3월13일까지 동숭아트센터소극장(02)764-8760. 황재헌 번안·연출, 오달수 권해효 이남희 이대연 조희봉 유연수 출연. 그림 한점으로 남자들의 우정이 시험에 들다. ■ 차력사와 아코디언 2월6일까지 인켈 아트홀2관(02)741-3934. 장우재 작·연출, 김준배 윤상화 염혜란, 황영희 출연. 집 나간 아내와 새로운 사랑을 찾아 정처없이 떠도는 차력사와 약장수 이야기. ■ 청춘예찬 27일까지 블랙박스 씨어터(02)762-0010. 박근형 작·연출, 김영민 고수희 출연. 남루한 일상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청춘에 대한 예찬.
  •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말 알아듣는 꽃’ 기생들의 삶 한눈에

    “소설과 시기(詩妓)의 것에는 감정을 거짓한 흔적이 없습니다. 만일 공자의 사무사(詩無邪)라는 시에 대한 평이 옳은 말씀이라면 이 점에서 아낙네들의 노래는 낙제이고 기생의 시는 급제외다.” 시인 김억의 말대로 유교사상으로 무장한 조선사회에서도 진솔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시어로 노래한 이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기생이다. 말을 알아듣는 꽃, 그래서 해어화(解語花).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슬픈 시였다. 널리 알려진 황진이나 그와 쌍벽을 이뤘던 매창, 강릉기생 홍장, 경성기생 홍랑, 평안도 성천 기생 부용 등 옛 기생들은 문학을 비롯해 음악, 춤 등 못하는 게 없었던 당당한 예인이었다. 이들은 신분은 비록 천인이었지만 당대의 전문직 여성으로 상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기생조합을 거치면서 이들의 삶은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만 왜곡·폄하돼,‘기생’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센터 전시장에 마련된 ‘기생’전은 시·서·화의 재능과 지조를 갖춘 교양인으로서의 기생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색다른 전시다. 기생과 관련된 문학이나 인물 중심의 에피소드는 많지만 시각예술 차원에서의 해석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게 현실.(주)서울옥션이 주최한 이번 기획전은 기생이라는 단일 주제로 열리는 최초의 전시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전시작품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제작된 엽서와 원판사진 500여 장과 평양 명기 소교(小橋)의 ‘묵죽도’와 죽향이 그린 ‘묵란도’, 초상화가 동강 권오창이 그린 기생 초상, 성행위를 묘사한 동경과 향갑노리개, 비녀, 뒤꽂이 등 장신구와 화장구들로 이뤄졌다. 엽서와 사진들 속에는 담배를 피우며 바둑을 두는 기녀의 모습이나 수업을 받는 모습 등이 담겨 있어 당대 풍속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기생의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도 눈길을 끈다. 기생방에서 촬영한 알몸의 여성의 사진 위에 한복연구가 김혜순의 기생한복 이미지를 입힌 사진작가 배준성의 ‘화가의 옷-기생Ⅰ’이 대표적인 작품. 논개의 충혼을 달래주는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12호)와 관련된 영상, 운보 김기창이 신윤복의 그림을 패러디한 ‘청록산수’, 윤석남의 설치조각 등도 나와 있다.2월 13일까지.(02)395-0331.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보러갑시다]

    [미 술] ■ ‘조화(調和) 화조(花鳥)’전 30일까지 가나아트센터(02)720-1020. 새와 꽃을 소재로 한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 50여점. 박수근·김환기·천경자 등 출품. ■ 안병석 개인전 3월 3일까지 박영덕화랑(02)544-8481.‘바람결’시리즈 등 자연의 서정을 느끼게 하는 대표작 20여 점. ■ ‘미술과 영화 시각서사(視覺敍事)’전 2월 26일까지 사비나미술관(02)736-4371. 미술과 영화 장르를 넘나드는 독특한 시각체험의 비디오·조각작품 ■ ‘선현들이 남기신 묵향’전 27일까지 우림화랑(02)733-3738.15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서예가 156명의 서간 200여점. ■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2월 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02)2124-8947.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게임과 놀이의 본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해석하는 미디어 예술축제. ■ A R 펭크 작품전 15일까지 필립 강 컬렉션(02)517-9092. 독일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의 대표작. ■ ‘예림을 걷다-시대와 함께, 작가와 함께’전 2월23일까지. 서울올림픽미술관(02)410-1060. 이종상 천경자 김형대 이만익 전혁림 민복진 백문기 전뢰진 최종태 등 원로작가 14명의 그룹전. [콘서트] ■ 양방언 콘서트 14·15일 오후 8시 정동극장(02)751-1500. ■ 에브리싱글데이&리페어 콘서트 15일 오후 6시 대학로 퀸라이브홀(02)313-7777. ■ 이승환 대구 콘서트 16일 오후 6시 대구전시컨벤션센터(053)422-4224. ■ 풍경 콘서트 15일 오후 4시·7시30분,16일 오후 3시·6시30분 클럽 사운드홀릭(02)3142-4203. ■ 패티 김 콘서트 14일 오후 7시,15일 오후 3시·7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02)783-0114. ■ 포플레이 콘서트 16일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02)3443-8838. [어린이] ■ 사랑의 피아노 16일까지 샘터 파랑새극장(02)763-8969.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로미오와 줄리엣. ■ 줄인형 콘서트 30일까지 동영아트홀(02)569-0696.40개 인형들이 1시간 20분동안 펼치는 쇼쇼쇼. ■ 그림일기 속의 내 친구들 23일까지 소극장축제(02)741-3934. 또래 친구 고복이와 화영이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가족 뮤지컬. ■ 내친구 플라스틱2 2월6일까지 대학로 컬트홀(02)382-5477. 빈 병, 플라스틱통 등 재활용품들이 빚어내는 상상의 세계. ■ 우리는 친구다 26일까지 학전블루 소극장(02)763-3233. 수준 높은 라이브 음악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민호·슬기 남매와 뭉치의 우정쌓기. ■ 넌 특별하단다 16일부터 2월6일까지 연우소극장(02)745-0308. 맥스 루카도의 세계적인 그림동화가 뮤지컬로. [뮤지컬] ■ 브로드웨이 42번가 무기한 팝콘하우스(02)766-8551. 박해미 전수경 출연. 코러스걸의 스타 탄생기를 그린 탭뮤지컬. ■ 사랑하면 춤을 춰라 16일까지 메사팝콘홀(02)2128-7616. 최광일 연출, 함태영 박성준 출연.100분간 쉴새없이 펼쳐지는 춤의 향연. ■ 아이 러브 유 30일까지 연강홀(02)501-7888. 한진섭 연출, 남경주 이정화 정성화 오나라 출연. 커플들에게 바치는 뮤지컬. ■ 판타스틱스 2월27일까지 씨어터일(02)762-0010. 김달중 연출, 조승룡 한성식 서현철 권유진 출연. 감미로운 뮤지컬 넘버를 타고 흐르는 젊고 순수한 사랑. ■ 하드락 카페 무기한 대학로 폴리미디어 씨어터(02)3141-1345. 이원종 작·연출, 양소민 이정열 주원성 박준면 출연. 하드락 카페에서 잃어버린 꿈을 찾다. ■ 노틀담의 꼽추 2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02)577-1987. 김철리 연출, 이진규 정선아 허준호 김성기 출연.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작품이 디즈니의 옷을 입었다. ■ 해피엔드 2월6일까지 한양레퍼토리씨어터(02)764-6460. 도로시 레인 작·김대현 번안·박경일 연출, 서태화 윤희영 김보영 출연.1996년 한국서 초연됐던 번안 뮤지컬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 ■ 마리아 마리아 23일까지 한전아트센타(02)593-0901. 유혜정 작·성천모 연출, 윤복희 강효성 이소정 김현성 출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창작 뮤지컬. [클래식] ■ 서울페스티발 심포니오케스트라 신년가족음악회 19일 오후7시30분 영산아트홀(02)586-0945. ■ 클래식 기타 트리오 연주회 16일 오후7시30분 금호아트홀(02)545-2078. ■ 신년 가곡의 향연 17일 오후7시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02)737-1530 [연 극] ■ 오!발칙한 앨리스 30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02)765-7890. 김나영 작·오유경 연출, 김영옥 서상원 민윤재 서현성 출연.‘야한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사춘기 소녀 앨리스의 유쾌한 성(性) 이야기. ■ 늙은 부부 이야기 23일까지 소극장축제(02)741-3934. 오영민·위성신 작·위성신 연출, 오영수 이혜경 출연. 애틋해서 더 아름다운 노년의 사랑. ■ 아트 3월13일까지 동숭아트센터소극장(02)764-8760. 황재헌 번안·연출, 오달수 권해효 이남희 이대연 조희봉 유연수 출연. 그림 한점으로 남자들의 우정이 시험에 들다. ■ 차력사와 아코디언 2월6일까지 인켈아트홀2관(02)741-3934. 장우재 작·연출, 김준배 윤상화 염혜란, 황영희 출연. 집 나간 아내와 새로운 사랑을 찾아 정처없이 떠도는 차력사와 약장수 이야기. ■ 청춘예찬 27일까지 블랙박스 씨어터(02)762-0010. 박근형 작·연출, 김영민 고수희 출연. 남루한 일상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청춘에 대한 예찬. ■ 버자이너 모놀로그 14∼23일 우림청담시어터(02)516-1501. 최진아 연출, 서주희 출연. 여성의 성기에 관한 대담하고 솔직한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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