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이제 내신의 덫을 치우자/황성기 논설위원
교육인적자원부와 대학들간의 내신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봉합은 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살아 있다. 어르고 달래고 내신을 30%라도 반영시켜 보려는 교육부, 어떻게든 전형에서 내신 비중을 줄이려는 대학들이 있는 한 주머니에 잠시 감춰둔 송곳 같은 문제다. 일본은 우리만큼이나 대학입시에 성장통을 앓았다. 그래서 일본의 교육 정책이 선진적인지, 후진적인지 판단은 미뤄두고 한번쯤 내막을 들여다 볼 만하다.
2000년 문부과학성의 대학심의회는 ‘대학입시의 개선에 대해’라는 정책보고서를 내놓는다. 심의회는 “고등학교, 대학교 쌍방의 다양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신입생 선발은 각 대학의 교육 이념과 자주성에 기초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어 대학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뽑기 위해 다양한 선발방법을 강구하라고 촉구하되, 선발은 어디까지나 대학의 자율임을 강조한다.‘대학의 자주성’,‘대학의 이념과 특색에 맞는’이라는 표현은 보고서에 수없이 등장한다. 이런 정책방향을 전후로 해서 일본의 대학에선 국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본고사나, 센터시험(수능시험), 논술, 면접, 조사서(학생부) 등의 요소를 활용한 갖가지 전형 방법을 내놓는다.
학생부만 보더라도 실질반영비율을 몇%로 하라는 가이드라인 같은 것은 없다. 올해 3053명을 전기(2729명)와 후기(324명)로 나누어 신입생을 뽑은 도쿄대를 보자. 두 전형 모두 지원자가 문·이과 학부별로 모집인원의 3∼5배를 넘어서면 센터시험 성적으로 1차 합격자를 가려낸 뒤 도쿄대가 출제하는 주요 과목 학력시험으로 합격자를 판정한다. 지원자가 모집인원의 3∼5배에 미달하면 센터시험과 학력시험 성적을 1대4의 비율로 환산해 합격을 가린다. 학생부는 제출해야 할 서류이지만 합격 여부를 가린다기보다 ‘판정에 필요할 경우 고려하는 일이 있다.’라고 활용을 극히 제한하고 있다.
사립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센터시험을 반영하지 않는 게이오대학은 학부별로 전공 이수에 필요한 과목별 시험 혹은 소논문을 추가해 기초학력을 측정한다. 대부분의 학생을 이렇게 뽑고 나머지는 계열 고등학교에서 추천받거나 혹은 어드미션 오피스(AO)라는 자기추천 방식으로 선발한다. 그렇지만 학생부 성적을 주요 배점으로 삼지 않는다. 상당수 사립대들은 ‘이치게(一藝)입시’라는 전형의 예처럼 뭐든 하나에 능통하면 입시 관문을 통과할 수 있는 길도 열어 두고 있다.
고등학교가 5400개 있는 일본에서 학교마다 들쭉날쭉인 내신을 획일적으로 30%라도 반영하라고 정부가 요구하면 대학들은 어떤 혼란을 겪을까. 입시지옥 시대를 거치면서 교육 기회의 불평등 논란, 학교간 학력격차 문제를 겪어온 일본이 결국 택한 길은 대학 특성을 살린 전형 요소로 자율적인 학생선발을 하도록 맡긴 것이다.
서구의 대학평준화를 이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참 머나먼 얘기다. 내신 하나로 어느날 갑자기 대학평준화가 생겨날 리도,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묘약이 될 리도 없다. 정책 빈곤만 드러낼 뿐이다. 접점을 찾아야 한다. 입시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우리 대학들은 일본보다 훨씬 다양한 전형 방법을 개발해 놓고 있다. 그런데도 내신의 덫에 걸려 소모적 공방과 교실의 혼란이 반복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입시정책을 틀어쥐고 이리저리 흔들어서는 다양성 시대의 대학 자율은 요원한 일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