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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 음란물유포 ‘위험수위’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 유포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심각한 사회문제로떠오르고 있다. 최근 여자탤런트 O씨의 성행위 장면이 나오는 동(動)영상 파일이 인터넷을타고 급속히 확산되는 등 음란물들이 마구잡이로 인터넷망을 타고 있다.특히 컴퓨터 장비와 전송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쉽게 비디오나 사진을 컴퓨터 파일로 바꿀수 있게 되면서 성인들은 물론,초·중·고생에게도 빠른 속도로 파고들고 있다. 여성탤런트 L씨가 나오는 동영상 파일은 어렵지 않게 인터넷에서 발견할 수 있고,최근에는 여성탤런트 C씨와 여성모델 L씨의 비디오가 있다는 소문이새롭게 퍼지면서 인터넷 곳곳에 이를 찾으려는 이용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 모 여자대학 화장실 내부를 몰래 찍었다는 이른바 ‘몰카’시리즈도 빠르게 유포되고 있다. 특히 서양 포르노 배우들의 사진에 국한됐던 과거의 인터넷 음란물과 달리최근에는 실감 있는 동영상 파일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한글로 된 음란사이트도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인터넷의 게시판인 ‘유즈넷 뉴스’에는 연일 음란물 정보를 알리는 글들이 떠오르고 있다. 내용도 동성애는 물론,여성을 구타하는 장면,임산부·노인 및 동물과의 성관계 등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 음란물 사이트는 방문자가 늘면서 마비되는 사례도 빈번하다.회사원朴모씨(33)는 “O씨가 나온다는 200여Mb(메가바이트) 크기의 동영상 파일을받는데 회사의 고속회선으로도 5시간이나 걸렸다”면서 “그나마 재수가 좋아서 접속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정보통신부 산하 정보통신윤리위원회나 경찰청 컴퓨터범죄수사대를 중심으로 단속에 나서고 있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일일이 검색하는 수준이어서 효율적인 단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정보통신윤리위원회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뚜렷한 대책이 없다”고 털어놓은뒤 “음란물 접속 차단 프로그램을 깔거나 부모가 자녀들에게 건전한 인터넷 활용을 유도하는게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음란물 차단책”이라고 말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www.icec.or.kr)는 음란물 접속 차단 프로그램을 배포하고 있으며 음란사이트 제보를 받고있다.(02)3415-0113
  • [뉴스 인사이드]”아내 구타는 日문화” 日총영사 국제망신

    [도쿄 黃性淇 특파원]‘매 맞을 짓을 한 아내를 때리는 것은 일본문화다’. 아내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된 캐나다 뱅쿠버 주재 일본총영사는 캐나다 경찰에 불려가 이렇게 ‘항변’했다. 당당하게 폭력을 정당화한 ‘겁없는 남편’ 시모코지 슈지(下荒地修二·52) 총영사는 그러나 불행히도 해임될 것 같다. 외무성이 “그의 행위는 외무성 규칙에 따라 처분대상”이라며 금명간 해임,귀국시킬 방침이기 때문. 사건은 16일 새벽 총영사가 부부싸움을 벌이다 일어났다.남편에게 얼굴등을 맞은 부인이 치료하러 간 병원측에서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부부싸움이국제적 뉴스거리로 커졌다. 일본대사관측은 “이유야 어쨌든 총영사라는 직위를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고 밝혔다.그러나 사건이 해외토픽으로 전세계에 보도되고 일본 국내에서조차 여성단체들이 맹반발하는 등 사건은 갈수록 확대됐다. 외무성이 결국 해임이라는 칼을 빼든 것은 고위 외교관의 폭력행위보다는폭력을 정당화하며 내세운 ‘일본문화론’으로 더욱 국제적 망신을 샀다는데 책임을 묻기로 한 때문으로 보인다. 25일 일본 국회에서조차 이 사건이 도마에 오르자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직접 나섰다.그는 “부부가 폭력으로 자기의 기분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면서 “나는 한차례도 아내앞에서 손을 올려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국회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오부치 총리는 “부부싸움은 한다.(아내의) 엉덩이에 깔리는 적도 있다”고 은근히 공처가임을 시사했다.
  • [조약돌] 드라마 속 ‘가정폭력’도 혼쭐

    ▒법무부가 TV 일일 연속극에 등장하는 ‘폭력남편’을 ‘가정폭력범죄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방송사측에 요청,대본이 수정된 것으로 밝혀졌다. 23일 법무부에 따르면 법무부 趙嬉珍 여성정책담당관은 KBS 1TV의 연속극‘내사랑 내곁에’에서 남편 봉구가 술만 마시면 상습적으로 아내 미숙을 구타하자 담당 PD에게 가정폭력법에 따라 폭력 남편을 사회봉사명령 등을 받는 내용으로 대본을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방송사측은 이에 대해 “가정폭력법을 잘 몰랐다”면서 25일부터 방영되는 내용에서는 미숙의 머리에 상처를 입힌 봉구가 사회봉사명령을 받은 뒤 새사람으로 바뀌도록 대본을 수정했다. 朴弘基 hkpark@
  • “정보기관서 인권 침해당해”탈북자 9명 국가상대 소송

    지난 94년 탈북한 許철수씨 등 ‘자유 북한인 협회’소속 탈북자 9명은 19일 정보기관의 조사과정에서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8,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다. 이들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통해 낸 소장에서 “탈북 후 ‘대성공사’라는 곳에서 구타 욕설 등 가혹행위를 당했을 뿐 아니라 보호관찰이라는 명목으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사찰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민변 林榮和변호사는 “국정원 경찰 기무사 등으로 구성된 정부 합동신문조의 인권유린 행위에 대한 증거로 원고들의 진단서 등을 제출할 계획”이라고말했다.
  • 교사의 현주소-2·3개월 연수뒤 전공 바꿔 교단에

    ‘2개월 연수로 음악교사에서 윤리교사로’ ‘3개월 연수로 중등교사에서초등교사로’ 믿기 어려운 일들이 지금 우리 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다.교육부가 교원의 정년단축 등으로 인한 교사 수급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취한 조치들이다. 고등학교 가정담당 교사는 이번 겨울방학 44일 동안 32권의 책을 독파,새학기부터 윤리교사로 탈바꿈한다. 수업일수조정으로 정원을 넘는 중·고교의 음악 미술 가정 교련 교사들을다른 과목 담당으로 바꾸는 것이다. 초등학교는 정년단축,명예퇴직 등으로 부족한 교사를 메우기 위해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가 기간제 초등교 과전담교사로,또는 현 중등교사가 초등교과 전담교사로 배치될 계획이다. 일단 기간제로 채용되지만 이들은 학교 사정상 곧 담임을 맡게 되리라는 것이 초등학교측의 전망이다.이미 각 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2∼3명 있던 기존교과전담교사제를 폐지,전과목을 맡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현직 초등 교사는 “초등교육의 전문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처사”라면서 “교대 4년 동안 배워도 부족하다고 여기는데 3개월 연수로 초등교육이 가능하겠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지난 60∼70년대에도 교사 수급에 문제가 생겨 중등교사를 초등으로 전환한 일이 있었고 수년이 흐른 뒤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또 교사간의 알력도 심했다. 이같은 점을 감안하면,교사의 정년을 단축하고 젊고 유능한 교사를 투입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높이려던 당초의 목표는 달성되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다.2∼3개월 연수로 질 높은 교육을 기대하기란 무리다. 게다가 갈수록 사범대학이나 교육대학의 인기가 떨어지는 추세를 볼 때,유능한 인재의 교직 투입을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할 시점이다.가뜩이나 일부 교사의 능력 부족이라든가 촌지·구타 문제 등이 교육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있는 터이다. 고등학교 C교사(국어·3학년담임)는 “불경기일 때 교직 등 공무원이 인기가 오르기 때문에 지난해 입시에서 우수학생의 사범대 지원이 늘 것으로 기대했다”면서 “그러나 정년단축 등으로 교사의 입지가 위축돼 입시상담에서 모두들 꺼리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학부모나 학생이 교사를평가하게 하는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물론 이 제도가 교사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는 긍정적 역할을 하겠지만,근본적 대책으로는 미흡하다. 무엇보다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공급자인 교사자리에 인재가 모여들게 하고,이들 인재를 장기간 관리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 굄돌-교사의 체벌

    얼마전 고등학교 선생님이 불성실한 학습태도를 보인 학생의 뺨을 몇차례때리자 학생이 선생님을 경찰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세상에 알려지면서 체벌에 저항한 학생 사건이 사회문제화됐다.사회여론 재판은 교권에 대한 부당한 저항이라는 ‘판결’을 내렸다.교육당국은 교권수호를 위하여 교사들의 적당한 체벌행위를 합법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교사들의 학생체벌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초·중·고등학교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이다.교사와 학무모간에 학생체벌로 인한 갈등이 여러번 사회문제화돼 왔다.그 때마다 선생님의 교권을 옹호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왔다. 우리는 지금 자유와 평화를 이념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개개인의 인권을가장 소중한 가치로 믿고 살고 있다.그런데 학생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직도 학교 교실에서 잘못한 학생의 뺨을 때리거나 주먹으로 구타하고 심지어는 야구방망이와 같은 몽둥이로 때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여학생의 경우 머리채를 잡기도 한다고 한다.폭력적 체벌과 인격 모욕,폭언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이러한 폭력행위들은 설사 숭고한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이것은 교육이전의 문제라고생각한다. 필자도 체벌에 의한 교육적 효과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그러나 모든 세상이 변하고 발전한 만큼 교육방법도 발전적으로 변해야 한다. 무조건적 복종심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교육방법에서 스승의 사랑과 학생의존경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와 이해를 통한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물리적 체벌에 의존하는 전근대적 교육방법에서 과학적이고 보다 합리적인 민주교육방법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 접근금지령 어긴 남편 구속 법원명령 받고도 아내 폭행

    서울 송파경찰서는 26일 법원의 접근 금지명령을 어기고 아내를 폭행한 曺在南씨(47·목수·서울 송파구 풍납1동)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曺씨는 지난 25일 새벽 5시쯤 아내 尹모씨가 도박을 하고 늦게 귀가했다는이유로 안방에서 대변을 누고 이를 따지는 아내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曺씨는 지난 11일에도 아내를 구타,서울지법 동부지원으로부터 아내의 일터인 실내포장마차 100m 이내 접근 금지,안방 및 부엌 출입금지 임시조치 처분을 받았다.
  • 조선족, 고국서도 버림받은 재외동포

    국내 사기꾼들에게 중국 조선족들이 취업사기를 당하는 일이 계속 늘고 있는데도 뚜렷한 구제대책은 마련되지 않고 있다. 수사 공조체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데다 정부 차원의 종합적인 구제책도 나오지 않고 있다.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재외동포의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은 중국동포의 지위를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구제는 더욱 어렵게 됐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에 따르면 지난해말 조선족 사기 피해자는 1만7,000명을 넘고 피해액은 우리 돈으로 50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개인별 피해액은 우리 돈으로 100만∼1,000만원이나 된다.중국에서 근로자들의 한달 수입이 한화로 3만∼5만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큰 돈이다. 사기꾼들은 주로 현지 송출업체와 짜고 가짜 비자를 발급해 주고 돈을 가로채고 있다. 빌린 돈을 사기당한 동포들이 중국인 채권자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하얼빈에 거주하던 馬모씨(40·여)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친정에 피신했다가 지난해말 이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申모씨(51)는 피해 다니다 노모를 돌보기 위해 고향에 갔다가 채권자들에게 구타를 당한 뒤 구속됐다. 하지만 사기 피해에 대한 수사 등 정부의 대책은 미흡한 실정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매년 200여건의 피해 사례를 중국 동포로부터 우편으로받고 있지만 피해자 진술을 받는 등 조사가 어려워 해결되는 사건은 10% 미만”이라고 설명했다. 조선족이 재외동포의 지위를 얻으면 피해구제 신청이 가능하고 국내 장기체류가 가능해진다.그러나 계류중인 ‘재외동포의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은제5조2항에 외교관계에 따라 중국동포들의 재외동포로서의 법적 지위를 유보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었다.이 때문에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피해 구제를 위한 법적·제도적인 보완책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게 됐다.
  • 조약돌-70대 할머니 이혼소송 승소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70대 할머니가 이혼소송에서 승소,43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다. 제주지법 제2가사부(재판장 金容鎬 부장판사)는 15일 李모씨(70·제주시 일도2동 113의 6)가 남편 韓모씨(73)를 상대로 낸 이혼청구소송에서 “원고는피고와 이혼하고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가 일본에서 행상 등 궂을 일을 하며 어렵게 재산을 모았으나 이 재산을 독차지하려는 피고의 욕심과 상습적인 구타가 가정파탄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며 “연령과 혼인기간 등을 감안,피고는 원고에게 1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시했다.제주l金榮洲 chejukyj@
  • 부대내 각종 비리 소상히 기록/金 중위 사망전 메모 노트 발견

    ◎‘탄약 은닉’ 등 전역병 진술과 일치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金勳 중위는 지난 2월 숨지기 전 부대내의 총기분실·탄약은닉·음주사고 등 각종 비리를 메모식으로 노트에 적어두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金중위의 아버지 金拓씨(55·예비역중장)는 10일 기자들과 만나 “훈이의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는 대학노트 1권에는 부대내의 각종비리가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면서 “소대장의 위치에서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당시 군기가 문란해졌음을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노트에는 ‘총기 분실’ ‘탄(약)은닉 및 금기사건’, ‘총기장난,MP(헌병)체포’ ‘구타,동기끼리 때려’ ‘선임자 지적에, 선임자 멱살→소대 교체’ ‘초소근무지 총구 위협’ 등 군기 문란 행위가 89쪽에 걸쳐 적혀 있다. 이어 소대원들의 실명과 함께 ‘북쪽에 올라가기 12시간 전 음주’, ‘음주운전, 새벽 3시’라는 메모와 함께 ‘군복무규정을 지키지 않는 우리는 군인도 아니다. 우리는 거짓말쟁이다. 명예를 손상시켰다는 자책하는 메모가 영문으로 쓰여 있어 김 중위가 부대원들의 군기 문란 때문에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金씨는 “웬만한 비리라면 지휘관이 자신도 문책당할 수 있는데 노트에 이런 얘기들을 적어 놓지도 않았을 것”이라면서 “훈이가 부대내의 문제를 고치려고 혼자 고민하며 갈등을 빚다 반대세력에 의해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金씨는 “‘탄약은닉’이라는 메모만 봐도 ‘당시 실탄을 쏘다가 남으면 감춰두고 있었는데 어떤 때는 박스째 다량으로 보관한 적도 있었다’는 전역병의 진술과 일치한다”면서 “당시 부대 내에 많은 비리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金씨는 “훈이가 죽은 뒤 전역병들로 부터 ‘군수품을 팔아먹고 나중에 남대문시장에서 보충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군기가 엉망이었다”고 덧붙였다.
  • 軍 잇단 사고 왜 이러나/수뇌부 상황대처 안이

    ◎신변변화 지나친 관심/잇단 비리로 사기도 저하/신세대 병사 통제대책 없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목표로 추진해온 千容宅 국방부장관의 국방개혁이 초기단계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미사일 오발사고,군 영내 불발탄 폭발사고,조명탄 캡슐 민가 추락사고 등 사흘 사이에 잇따른 사고가 군의 중심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군의 기강이 총체적으로 느슨해졌다는 것이 일반의 시각이다. 군이 흔들리면 안보에도 구멍이 생긴다. 결국 강력한 안보태세 확립을 전제로 한 대북 햇볕정책도 훼손될 수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군 기강의 해이는 군 수뇌부의 안이한 상황대처에서 비롯됐다는 게 군 안팎의 공통된 시각이다. 일례로 지난 6·7월 동해안에서 잇따라 발생한 북한 잠수함·정의 침투사건과 지난달 서해안 침투 간첩선 나포 실패사건 이후 군 수뇌부는 현지 부대장 등을 문책하는 인사를 단행했지만 정작 국방부나 합참의 고위 책임자들에게는 어떠한 지휘책임도 묻지 않았다. 1·3군사령부 해체,지상군작전사령부 신설 등 대대적인 군 구조개편을 목표로 한 국방개혁안이 지난 8월 발표되면서 군 지휘관들이 신변 변화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게 된 것도 군의 기강이 느슨해진 요인으로 꼽힌다. 햇볕정책에 대한 일부 지휘관들의 인식 부족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햇별정책은 굳건한 국방력을 전제로 한다’는 정부 당국자의 거듭된 공언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침투 도발에 대한 어쩡쩡한 대응이 일선 장병들의 안보의식을 해이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이다. 군 인사에 대한 일부 지휘관들의 불만에다 국정감사나 감사원 감사 등을 통해 군내 비리가 대대적으로 드러난 데 따른 일선 지휘관들의 사기 저하도 기강해이에 한 몫을 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군 영내에서 금지된 구타나 기합을 대체할 만한 효과적인 군기 확립방안이 제시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신세대 부대원을 통제하고 지휘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일선 지휘관들의 호소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결국 흐트러진 군의 기강을 다잡아 세우는 것만이 또다른 사고를 막는 근본적인 대책이고 햇볕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토록 보장하는 지름길일 수 밖에 없다. 기강확립의 첫 단추는 사고원인의 철저한 규명 및 책임자 엄중 문책,더불어 군 수뇌부의 엄중한 자기반성과 책임의식 제고에서 찾을 수 있을 것같다.
  • 金允聖 대검공보관(인터뷰)

    ◎작은 친절로 더 가까이 있는 검찰 거듭 날터/민원인 환경개선 배려/‘도우미 벨’제도 호응얻어 “지금까지 우리 검찰은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인식돼왔습니다. 국민을 억압하고 감시·감독하는 존재로 각인됐던 것입니다” ‘검찰바로 알리기’운동을 관장하고 있는 대검찰청 金允聖 공보관(부장검사)은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서는 검찰이 되기 위해 친절운동을 펼치게 됐다고 말했다. 金공보관은 이번 운동이 구호성이나 일과성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세부실천계획을 세워 작은 친절부터 시작,검찰이 거듭났음을 알리겠다는 얘기다. 실제로 검찰은 직원들에 대해 친철교육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접촉에서의 친절’이 우선이다. 직원들이 전화를 받을 때 맨 먼저 “감사합니다”나 “안녕하세요”라고 말한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다시 안내하는 등 전화친절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金공보관은 “민원인의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원실에 각종 잡지 등 읽을 거리를 비치하는 것에서부터 민원인 전용 컴퓨터를 설치하는 등 이용에 편의를 도모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민원인이 직접 검찰 간부와 통화하여 애로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도우미벨’제도를 일부 청에서 시행,민원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얼마 전 춘천지검에서 도우미벨 제도를 적용,바로 시행한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부인을 상습적으로 구타하여 복역하던 남편이 출소,다시 폭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을 도우미벨로 접수해 그날 남편을 구속한 사례가 실제 있었다. 金공보관은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당사자들의 의식과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감찰부에서 직원들의 행동을 수시로 점검,점수를 매기는 것도 그 일환이다.
  • 軍,사병 폭행치사 은폐 의혹

    ◎사고사·자살 발표후 유족 항의에 번복 군 당국이 단순 사고사나 자살로 발표했던 사병의 죽음이 고참병의 구타에 의한 것이었음이 뒤늦게 확인됐다. 咸錫宰 의원(자민련)은 9일 국회 법사위의 군사법원에 대한 국감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군 당국이 이같은 인명 사고를 은폐·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咸의원에 따르면 육군 6사단은 지난 7월20일 소속부대 사병 朴모 일병이 근무 중 감전으로 숨졌다고 유족들에게 통보했으나 부모들과 PC통신 가입자들이 거세게 의혹을 제기하자 재조사를 실시해 朴일병이 고참인 金모 상병에게 구타당하다 전기배전반에 넘어지면서 감전돼 숨졌음을 확인했다.
  • 지면 구성(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4)

    ◎면별 특화 등 근대신문 편집틀 개척/국한문·국문·영문판 1만3,256부 발행/논설­투고란 등 특색있게 꾸며/雜報기사엔 ‘4字 한문제목’ 달아 창간 이후 영문,국한문,국문 등 발간 판형을 다양화해온 대한매일신보는 지면 구성에서도 날로 근대적 면모를 갖춰갔다. 대한매일은 기사 싣는 단수를 착실하게 늘려간 뒤 마침내는 신문지 크기자체를 키운다. 영문과 한글판을 합쇄한 초창기 때는 단수가 4단이었으나 1905년 8월 국한문판을 분리해 발간한 중간(重刊) 때 6단으로 늘렸다. 2년이 채 못 되는 1907년 4월부터 7단이 되었는데 이때 타블로이드 판인 신문이 1.4배 가량 큰 대판(大版) 크기로 확장됐다. 대한매일은 국내 독자와 관련하여 한글과 한문 중 ‘독립신문’처럼 한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국한문판 발행과 함께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영·국문 합쇄의 한계를 깨닫고 분리 발행을 심각하게 고려한 중간 때 한글 아닌 한자 위주의 국한문을 선택했다. 언듯 후퇴처럼 보이는 이 결정은대한매일을 크게 전진시킨다. 대한매일은 1907년 4월 국한문 신문이 4,000여 독자를 확보해 국내 ‘最占多數’임을 알렸으며 며칠 뒤 국문판 추가 발간을 선언했다. 국한문판의 성공이 한글판을 부활시킨 셈이다. 이미 확고해진 명성은 판 추가 발행을 독자 및 사세 확장의 좋은 계기로 만들어 대한매일의 국한문판,국문판은 경쟁적으로 급성장했다. 1년 뒤인 1908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은 대한매일신보가 현재 1만3,256부 발행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국한문판이 8,200여부,국문판이 4,600여부,영문판이 400여부였다. 당시 국내 신문들의 판매부수가 1,000∼3,000부였던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중흥시킨 국한문판은 지면 구성 등과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고답적인 한문투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문발달사에서 편집체재에 근대적인 틀을 엮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매일은 제1면 제호 바로 밑에 매일 논설을 실었다.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의 주장을 담는 자리로서 대한매일의 배일,반침략,애국계몽 논조가 확연히드러나는 곳이었다. 대한매일 논설에는 익명의 필자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는 “本記者”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영국인인 본기자”란 구절로 배설의 의견임을 명확히 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가끔 국내외의 다른 신문에 난 한국관련 논설을 전재했으며 특히 보통 3면에 게재하는 ‘寄書’를 이 자리로 옮겨 논설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독자들이 신문사에 보내는 편지를 뜻하는 기서는 말이 현재의 독자 투고이지 논설 못지않게 중량감있는 내용이었다. 기서를 보낼 때 성명과 주소를 요구한 대한매일은 신문에 게재할 때는 필자의 호나 유학생이라는 등 비실명으로 내보내 보다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논설 다음에 관리의 서임과 사령에 관한 관보를 실었고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 신문 등에서 번역 소개하는 외보가 이어졌다. 2면은 관청 동정과 시정잡사에 관한 단신보도인 잡보 차지였다. 지금의 사회면 성격이 강한 잡보는 모든 기사가 “하였다더라” “說이 있다더라”로 끝맺음되고 있으며 단신이지만 글을 잇대어 써 꽤 상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통감부의 움직임과 의병활동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대한매일의 잡보는 특히 모든 기사를 4자의 한문제목으로 압축한 뒤 소개한다. 잡보는 1면 하단과 3면 상단까지 펼쳐지곤 하지만 황실에 관한 기사는 언제나 2면 맨 첫 자리에 올라있다. 반면 신랄한 풍자의 시사만평이 2면 잡보란을 마감한다. 이 풍자만평은 칼처럼 날카로운 내용을 운문체로 경쾌하게 소화하고 있어 최고의 애독란이었다. ◎인기 있었던 2면 잡보란/친일파 행각 등 신랄하게 풍자/“日人고문 초빙후 형벌 혹독 이것이 개명국의 형벌” 대한매일의 2면 잡보란 하단은 시사만평란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부정,부패,만행 등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인기를 모았다. 풍자의 주대상은 친일파와 한국에 온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풍자 기사를 몇개 골라본다. ▲어제 오후 서울 북서 누각동 뒷산 기슭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하기로 일 순사가 순검 십여인을 데리고 쫓아가 탐문한즉 모두 피서하는 사람이라 하니 요새는 일인이 무슨까닭으로 한층 의구하는지 한국 인민은 피서도 못하겠소. ▲관립 일어학교 한인 학도가 일인 교사 백정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퇴학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하니 원래 학도가 교사에게 학술만 수업함이 아니라 교사에 품행을 모방하나니 백정 같은 교사에게 무슨 품행을 본받을 것이오 퇴학하는 것이 좋지. ▲근래 일본 인민이 미국 지방에 가서 백인의 구타나 능욕을 받은 것이 날로 심하다 하니 이는 일본 인민이 한국 지방에서 한인을 압제박해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늘의 뜻은 무심치 않소. ▲경무청과 감옥서에서 일인 고문과 경부 경시를 초빙고용한 후로 죄인에게 형벌이 혹독하고 구금이 엄중하야 전일의 한국 형률보다 몇배 심하다 하니 이것이 개명국의 형률인지. ▲의주 등지에 일본군용지 내의 가옥과 분묘를 월내로 철거하라는 독촉이 심해 지역 인민이 서로 모여 호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다고 하니 인민은 어느 곳으로 이거하며 백골은 어느 곳에 옮겨 묻을 것이오 하늘의 땅에 오르는 수밖에 백계가 무책이로다. ▲일본 박람회장에 한인 남녀 2명을 2개 동물로 꾸며 넣어놓고 일반 유람자에게 완상케 하니 미주의 흑인은 노예로 팔리고 한국의 황인은 동물로 팔렸은즉 한인의 가격은 흑인 지위보다 한층 추락하였거니와 일인은 이웃나라의 동종인을 금수로 대하는구려.
  • 민주열사 열전:12/‘녹화사업’ 의문사:하(정직한 역사 되찾기)

    ◎‘염세 자살’로 매도된 의문의 죽음들/이윤성­신검없이 징집… 제대 8일 앞두고 죽어/김두황­운동권 리더… ‘애인변심 자살’ 軍 강변/한영현­늑막염 앓아 軍면제 판정 불구 끌려가/최온순­가족 항의로 재수사해 자살 오명 벗어/한희철­새벽 4시 사망… 녹화사업중 고문 의혹 대학생들의 강제징집과 이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었던 녹화사업은 80년대초 연세대생 정성희를 비롯한 여섯명의 죽음과 결부되어 계속 거론되고 있다.대부분 염세 자살이라는 군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인권단체들과 가족들은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의 강제순화·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 이들 의문사의 직간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다섯명의 의문사를 차례로 알아본다.(정성희는 10월15일자 녹화사업 첫회에 보도) ▷이윤성◁ 81년 성균관대 역사철학 계열에 입학한 이윤성은 유복한 가정환경이었지만 사회·역사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었다고 한다.2학년 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동아리의 회장직을 맡았다.82년 11월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에 참가, 여러 학생들과 함께 경찰서로 연행됐다.조사 과정에서 동아리 회장이란 것이 밝혀져 11월7일 새벽 신체검사도 없이 군에 끌려갔다. 그는 부친이 60세가 넘은 고령인 3대 독자인데다 시력마저 나빠 상식대로 하자면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83년 1월10일쯤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면회갔을 때 이윤성은 건강한 모습으로 “내가 여기서 짬밥을 제일 잘 먹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는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뒤늦게 가정환경이 참작돼 5월말 의가사 제대가 결정되었다.제대가 8일밖에 남지 않은 5월4일 이윤성 부모는 아들이 이날 새벽 자살했다는 군당국의 통보를 받았다.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 자료에서 ‘이윤성은 군 수사기관의 조사기간 중에 사망했으나 이 조사는 학원소요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국감 자료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이윤성은 83년 4월19일 소속대 인근에서 북괴가 살포한 월북용 안전보장증 등 불온전단 2매를 습득,본인의 철학개론 책자 속에 보관하다가 4월30일 소속대대 보안담당관 중사에 의해 관물함에서 적발됐다.5월3일 당시 지역 보안부대 대공계장 상사가 월북 용의성 및 전단휴대 경위 등을 조사하고 취침에 들도록 했으나 4일 새벽 2시 반경 용변본다고 밖으로 나가 부대 정구장 심판대에 군화끈 및 요대를 사용해 목매 자살했다.가족 입회 아래 부검을 실시했으며 구타 등의 타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지금도 그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84년 국방장관의 국회보고와 마찬가지로 이 국감 자료도 이윤성이 자살할 당시 제대가 8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김두황◁ 80년 고려대에 입학해 경제학과 과대표와 경제학 동아리 회장을 맡은 김두황은 학내활동의 활성화와 민주화를 주도한 고대 운동권 리더의 한명으로 알려졌다.4학년이 된 83년 3월초 학내 학회,동아리 회장들과 호국단 선거,4·19행사 등을 논의하던 중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1주일간 조사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곧 부모와 함께 다시 경찰서로 불려온 뒤 어쩔 수 없이 자원입대서에 서명했으며 즉시 군대로 끌려갔다. 3월18일 입대한 김두황은 3개월 뒤인 6월18일 밤11시 30분 자살했다고 가족들에게 통보됐다.그간 외출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군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훈련 성적이 우수해 사단장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시신은 두부가 없어진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군 당국은 가족들에게 “동료 2명과 경계 근무를 서던 중 ‘소변보러 간다’고 한 후 잠시 있다가 총성과 함께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군은 가족들에게 사인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각서와 화장동의서를 받아낸 뒤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84년 국회에 보고할 때 국방부는 김두황의 사망 원인에 대해 ‘내성적인 성격으로 전방부대에 배치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내무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군복무에 염증을 느껴왔으며 애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고심하다가 자신의 소총으로 자살’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그의 고대 학우들은 김두황의 적극적이고 쾌활한 성격 등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관제’ 사망원인이라고 반박해 왔다. 같이 강제징집된 뒤 죽음의 공포감이 엄습하는 녹화사업을 겪었던 친구 양창욱씨는 “두황이가 고대 운동권에서 차지했던 비중을 생각하면 나보다 훨씬 심한 녹화사업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한영현◁ 81년 한양대 기계과에 입학한 한영현은 민속문화연구 동아리와 야학활동에 참가하던 중 83년 1월 부천 야학선배의 경찰조사 과정에서 이름이 나와 성동경찰서로 연행됐다.경찰서 조사후 4월1일 수원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늑막염으로 병종 판결,군대에 갈 수 없는 처지였다.그러나 이튿날 경찰서 출두명령을 받고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으며 보름 후 그의 옷이 집으로 우송되자 가족들은 비로소 강제로 군에 끌려간 것을 알았다. 그는 입대후 훈련소에 가지 않고 4월10일부터 18일까지 군 수사기관에서 그간의 활동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고 뒤에 말했다.6월18일 포상휴가를 나왔는데 그의 팔에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한 피멍이 선명했다고 한다.휴가중 그는 “정신력으로 모든 환경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되나 자신이 없다” “기관의 어느 사람을 만나면 의가사로 10월이면 제대가 가능할 수 있지만 죄책감이 너무 크다”는 등의 말을 했다고 전한다. 귀대한 지 얼마 안되는 7월2일 부대로부터 전보로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불침번 근무중에 분대장의 탄입대에서 실탄 1발을 절취한 뒤 2일 아침 9시 경계근무를 서다 M16 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이다.국방부는 84년,88년 관련보고에서 모두 한영현의 ‘불우한 가정환경’을 강조했다.‘한영현은 모친이 부동산투기로 가산을 탕진하여 부친이 사우디 취업중 귀국해 불화 끝에 모친을 토막살해한 죄로 무기형 복역중이고 형도 소아마비인 것을 고민해 세상을 비관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마치 그의 아버지 사건이 당시에 일어난 것처럼 발표했지만 실은 3년 전인 고3 때의 일이며 한영현은 이 와중에서도 한대 기계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대학 학우들도 그의 학교생활이 아주 건강했다고 말한다. ▷최온순◁ 83년 동국대 사대 수학교육과 3학년이던 최온순은 시위예비 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돼 1주일 간 조사를 받은 후 3월29일 강제징집 되었다. 4개월이 조금 지난 8월14일 군에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로 가보니 그는 벌써 새벽 4시경 숨을 거둔 뒤였다.헌병대에서 나온 사람이 자살이라고 통보했으나 가족들이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강력히 항의하고 영안실의 사체를 며칠간 지키면서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했다고 한다.이에 군 수사대가 재수사를 하여 그 결과 고참병과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는 수정 통보를 얻어내 최온순은 자살이라는 오명을 벗고 대전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공식 군 수사기록은 가족의 항의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가운데 철책선에서 같이 복초를 서던 고참 상병이 ‘최온순의 자살을 주장했으나 17일 밤부터 18일 새벽까지 추궁하자 그의 우발적 살인 범행을 자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84년 국회 보고서는 ‘최온순은 복초근무중 잠을 자다가 고참인 상병이 주의를 주자 이에 반항해 소총으로 가해하려다 상병이 소총으로 위협한다는 것이 잘못돼 오발로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강제징집된 뒤 최온순과 함께 훈련받았던같은 대학의 최석민씨는 “한대 때렸다고 해서 고참에게 총을 겨누기엔 그는 너무 밝은 성격이었다”고 아직도 못믿어 한다. ▷한희철◁ 빈한한 가정에서 79년 철도청 장학생으로 서울대 공대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으며 4학년말인 82년 12월1일 군에 자진입대했다.서울대 가톨릭학생회와 성남 대학생연합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등 운동권 성향을 보이자 지도교수가 장학금을 주지 않겠다고 해 일단 휴학을 했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군 생활에 잘 적응해 포상휴가를 두번이나 받았고 83년 10월14일 보름간의 첫 정기휴가를 나왔다.친구들에게 “늦어도 한달 후에는 의가사 제대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귀대한 지 한달 쯤 지난 12월11일 자살했다는 연락이 왔다.84년 국방부 사망원인에 따르면 ‘평소 가정빈곤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음을 비관했고 입대전 의식화 동아리에 가입했으며 정기휴가 때 학원소요와 관련해 도피중인 친구의 주민등록 갱신을 위해 방위병인 다른 친구에게 용지를 훔칠 것을 부탁한 사실이 적발돼 조사를 받고 훈방된후 평소 불만과 주민등록증 절취모의 탄로로 고민하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사망 당시 군 당국의 설명에 의혹을 떨구지 못한 부친 한상훈씨가 끈질기게 알아본 결과 한희철은 12월6일 당시 보안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10일 귀대한 것으로 드러났다.부친은 이때 전기고문이 가해졌고 주민등록증 용지 건뿐 아니라 심한 녹화사업 취조가 행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그의 11일 새벽4시 사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 ‘李會晟씨 조사’ 공개돼 검찰 당혹/銃風수사 이모저모

    ◎서울대병원서 한·장씨 MRI·CT검사 등 진행/장씨 혈변 주장 따라 내과 신체감정도 추가 ‘판문점 총격요청사건’과 관련한 안기부와 구속된 吳靜恩·張錫重씨 사이의 ‘가혹행위’ 공방이 14일 서울대병원의 추가 신체감정으로 새 국면을 맞았다. 안기부는 이와 관련,“적법한 절차를 밟아 수사해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법정에서 제시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오전 서울지법 424호 법정에서 열린 韓·張씨에 대한 신체감정에서 심리를 맡은 형사31단독 韋賢碩 판사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비공개로 진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신체감정은 당초 신경외과 정형외과 방사선과 등 3개과만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張씨가 현재 혈변을 보고 있어 내과도 병행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변호인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내과 신체감정이 추가됐다. ○…韓·張씨는 법정에서 감정인신문이 끝난 뒤 1시간여 동안 가혹행위를 받은 과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韓씨는 “안기부 수사과정에서뿐 아니라 서울지검 1144호 조사실에서도 심하게 구타당했다”면서 “특히 서울구치소의 한 관계자가 재소자들에게 ‘韓씨에 대한 가혹행위를 물으면 모른다고 답하라’고 지시한 것을 전해들었다”고 주장했다. ○…법정을 나온 韓·張씨는 곧바로 서울지검 청사로 옮겨 정형외과와 내과의 신체감정을 받았다.이어 오후 2시30분쯤 서울대병원으로 가 MRI(자기공명영상)검사와 CT촬영(컴퓨터단층촬영),초음파촬영 등 신경외과와 방사선과 등의 정밀 신체감정을 받았다. ○…검찰 관계자들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의 동생 李會晟씨를 지난달말 대검에서 조사했다는 사실이 공개되자 곤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검 중수부는 아침 브리핑에서 대선자금 불법모금과 관련,李씨를 지난달말 호텔에서 조사했다고 공식 확인했다.하지만 ‘총풍(銃風)사건’도 조사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언급을 회피했다.
  • 민주열사 열전:11/‘녹화사업’ 의문사:상(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제순화·프락치 강요에 ‘비극적 저항’/정 烈士 시위현장서 곧바로 징집… 의문의 죽음/5공 군당국 부모에 ‘이의제기 포기’ 각서 간청 광주학살 등 폭력을 자행한 5공화국의 全斗煥정권은 80년대 초 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면서 독재정권의 기반을 다졌다.공포의 경찰국가 같은 상황이었지만 대학의 ‘반독재 반군사정권’ 시위와 함성을 막을 수는 없었다.5공 정권은 대학 시위를 막기 위한 특별조치를 강구하기에 이른다.그중 하나가 대학생 강제징집과 ‘녹화(綠化)사업’이다. ○대학생 477명 강제징집 녹화사업은 강제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밝혔으나 그 과정에서 여섯명의 의문사(死)가 나왔다.본래 군대갈 나이가 됐더라도 대학에 다니고 있으면 퇴학·휴학 등의 학적변동이 없는 한 신체검사와 입영이 연기된다.아울러 신검과 입영은 각각 20일,30일 전에 통지서와 영장이 송달된 뒤에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그러나 5공정권은 81년 11월부터 시위저지책의 하나로 학생들을 강제징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버젓이 대학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됐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와 구타와 함께 조사한 다음 집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곧바로 군부대로 끌고 갔다.병역법상의 사전통지 조항을 정면으로 무시했고 대학생 입영의 필수요건인 학적변동도 대부분 사후에 이뤄졌다. 6공이 들어선 88년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5공정권은 83년 말까지 2년 동안 이같은 강제징집으로 447명의 대학생을 억지로 군대에 보냈다.자진 휴학 등 정상적으로 학적이 변동되어 입대하는 경우와는 다른 이 ‘특수 학적변동’ 입대자들 가운데는 정상적인 신검을 받았을 경우 입대할 수 없는 신체상 결격사유나 가정환경의 학생들이 상당수 포함됐다.연령 미달자도 있었고 소아마비로 신체가 불편한 사람과 3대독자도 끌려갔다. ○장애자·3대 독자도 끌어가 강제징집은 강제징집으로 끝나지 않았다.당시 군 보안사령부가 입안한 ‘녹화사업’이 기다리고 있었다.‘녹화사업은 병역법에 의거,학원소요 관련 학사징계로 83년 11월까지 입대조치된 자 447명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88년 국정감사에서 밝혔다.문제학생들의 급격한 입대 증가 추세로 좌경의식의 군내 유입이 우려돼 보안사에서 이 ‘녹화사업’ 계획을 수립,많은 의식화 오염자들에게 올바른 시각을 갖게 했다고 이때 국방부는 덧붙였다. 그러나 강제징집되어 군에서 녹화사업에 동원된 학생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그들은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빼내고 이를 탄압하기 위해 보안사가 펼친 강제순화 및 관제프락치 공작활동이라고 주장해 왔다.녹화사업은 정신적인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 작성으로 시작된다.의식 상태를 면밀히 심사하고 체제를 긍정하도록 하는 의식 개조작업이 뒤따른다.소속 군부대 및 서울 보안사 분실에서 행해진 운동권학생들의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은 보름에서 두달간 이뤄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녹화사업은 그러나 ‘순화됐다’는 맹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순화’된 학생에게 이를 입증할 관제프락치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다.대개 휴가 형식으로 사회에 내보낸 뒤 대학 선후배 등을 만나 활동상황,특이 동향의 정보를 수집,보안대에 보고하도록 강요한다.갑자기 군에 끌려온 학생들은 이같은 녹화사업으로 심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다. 84년 초 강제징집된 6명의 대학생이 보안사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학원가에 돌았고 곧 정치·사회문제화됐다.84년 6월 당시 尹誠敏 국방장관은 국회에 나와 ‘학적 변경과 관련한 입대자 중 81년이후 군에서 사망한 인원은 자살 4명(정성희 이윤성 김두황 한영현),군기사고 1명(최온순) 등 5명이며 자진휴학 지원입대해 자살한 1명(한희철)을 포함하면 모두 6명’이라고 밝혔다. ○선후배 활동상황 보고 강요 尹관은 이같은 인명 손실은 학원사태 관련 군입영자에 대한 차별대우로 야기된 결과가 아니라고 강조했다.물론 ‘강제징집’ ‘녹화사업’이란 말도 쓰지 않았다. 녹화사업이 82년 9월부터 84년 11월까지 265명에 실시됐다고 밝힌 88년 국감 때도 국방부는 의문사에 대해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다만 녹화사업이 정치문제화함에 따라 84년도에 녹화사업 업무를 중단하고 보안사 전담부서를 폐지했다고 밝혔다.관련 자료도 3년 보존기간이 지나 폐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단체와 가족이 제기하는 녹화사업 의문사는 심증만 있을 뿐 진상을 알기가 극히 난망한 실정이다.여섯명의 의문사 중 ‘강제징집 사망1호’인 정성희씨의 경우를 먼저 살펴본다.(나머지 5명은 다음 회에서 보도할 예정이다) 81년 연세대 영독불문학 계열에 입학했던 정성희는 대학생활 8개월 만인 11월25일 교내시위 현장에서 20여명의 교우와 함께 연행됐다.이중 15명이 강제징집당했다.연행 3일 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군에 강제로 입대한 그는 82년 6월8일 첫 휴가를 나와 친구,가족들에게 보안대의 감시 등을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졌다.귀대한 지 달포 후인 7월23일 아침 갑자기 사망통보가와 가족이 전방으로 달려가자 이날 새벽 0시10분 철책근무 중 목에 M16소총 4발을 발사해 자살했다는 설명이었다. ○사망현장 답사요구 묵살 군당국은사고현장이 민간인 통제구역의 최전방이므로 현지답사가 불가능하다며 간단한 도면설명과 함께 자살임을 믿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부모로부터 부검포기서와 화장동의서,그리고 사망사인에 이의없고 이후 법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사체를 처리했다.유서는 없고 ‘백양로를 한번 더 걸어보고 싶다.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등 8줄 정도의 낙서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84년 국방부가 국회에 보고한 사망원인에 따르면 입대해 평소 사회제도에 불만을 토로했으며 사고 당일 전방교육 실습차 입소한 대학생 1명과 복초근무를 하면서 “순수한 철학도의 소원을 이루지 못해 안타깝기만 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는 것이다.88년 국감자료는 보안사 정훈교육 이전 사망자로 염세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정성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정성희와 다른 5명의 의문사는 민주화를 열망했던 학생들의 독재정권에 대한 비극적 저항이었다. □정성희 열사 연보 ▲1962년 인천 출생 ▲81년 부평고 졸업 연세대 영독불계열 입학 ▲81년 11월25일 학생시위로 연행 ▲81년 11월28일 강제징집 ▲82년 7월23일 사망 ◎당시 고려대생 양창욱씨 ‘녹화사업’ 회고/1주일간 심한 구타뒤 ‘감옥’‘군입대’ 택일 강요/보안대 조사땐 ‘감쪽같이 죽을수도’ 공포 엄습 현재 부천에서 ‘어린이 과학실험교실’을 내고 있는 양창욱(38)씨는 고려대 4학년 때인 83년 3월 문과대 시위주동자로서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다.다음은 그의 녹화사업 회고. 경찰서에서 1주일간 심하게 두들겨맞은 뒤인 3월7일 갑자기 부모를 불러오더니 ‘감옥에 보내겠느냐,군대에 보내겠느냐’며 양자택일을 강요했다.부모들이 군입대 각서에 서명한 직후 춘천 보충대로 가서 요식적인 신검을 치렀다.불러주는 대로 받아적는 서류작성에 불과했다. 동해에 있는 훈련단에 보내져 6주 훈련에 들어갔다.보름 만에 부친상을 당해 휴가를 나왔는데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슬픔도 슬픔이지만 해방감에 당황할 정도였다. 3개월쯤 지난 뒤인 6월 초 배치된 철책 초소에서 강릉 사단사령부 보안부대로 소환됐다.하룻밤을 묵으면서 행정고시 출신이라는 모 중위로부터 친구,학내 동향과 관련해 심문을 받았다.구타는 없었다.얼마 후 같이 강제징집된 친구 김두황의 죽음을 우연히 전해들었다. 10월 사단 보안대의 그 중위와 함께 서울 세운상가 뒤 아파트로 이동,녹화사업을 받았다.아파트 안은 오직 책상 하나와 백열등뿐이었고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조사가 진행됐다.1주일간 이곳에 혼자 갇혀 있으면서 16절지 300장에 달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다.옆 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구타나 고문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순화교육이 끝났다는 표시로 태극기 아래서 사진을 찍더니 8일간의 휴가를 주면서 학교,서클과 관련해 몇몇 정보를 얻어 아파트로 다시 라는 프락치 임무가 주어졌다.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정보 몇개를 가지고 갔더니 미진하다며 3일간의 추가 ‘프락치 휴가’를 주었다. 사흘 후 다시 가자 정보를 더 물어오라고 하지는 않았으나 ‘그동안있었던 일을 일절 입밖에 내지 않겠으며 이후 보안사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이같은 조사는 제대할 때까지 두번 다시 없었으나 사단의 중위가 3개월마다 직접 부대에 와 점검했다.
  • IMF와 가정폭력/孫淑 연극인(서울광장)

    한국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간 지 1년이 가까워 오고있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이 여러 부문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국 여성의 전화’에 접수된 변화다. ‘한국 여성의 전화’는 최근 가정폭력과 IMF와의 상관관계를 상담사례 중심으로 분석했는데 그 내용 중 너무도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다. 올 2월부터 경제위기와 관련된 상담내용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IMF를 핑계댄 가정폭력 상담이 가장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경제위기를 핑계로 이루어지는 폭력은 대개가 구타 한가지로 나타나지 않고 구타와 함께 외도,도박,의처증,알코올중독 등이 같이 겹쳐 얽히는 형태라고 한다. 부부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가족간 의사소통이 활발한 가정은 위기를 오히려 사랑으로 극복해 더 단단한 가족관계를 이룰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다. ○알코올중독·의처증 겹쳐 실제로 IMF로 인한 구타 중에서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인 경우는 5건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상습적인 구타를해온 경우인데 구타횟수가 늘어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IMF가 폭력 남편들로 하여금 아내 구타를 합리화하고 부추기는 또 하나의 구실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남편은 아내를 때리는가. IMF로 인한 실직이 네 탓이다라는 이유,또 남편이 실직 후 노름을 하면서 그 빚을 아내에게 갚으라고 강요하고 거부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의심하는 경우,돈을 벌어오지 않는다고 때리는 경우,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내가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지 않는다고 구타하는 경우,살림도 못하고 물건값도 못 깎는다고 때리는 경우 등 참으로 말같지 않은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맞고 사는 아내들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 한 취업주부는 동료들은 해고됐는데 계속 일을 다니게 되자 남편이 사장과의 사이를 의심해서 구타를 했다고 하는 등 어이없는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IMF가 구타를 위한 새로운 핑계로 등장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IMF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많다. 알뜰하게 살림해라,남편의 폭력과 학대도 견뎌라,남편 기도 살려라…. 도대체 어디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됐다 해도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여성은 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나마 제도와 인습 때문에 알아도 선뜻 법에 호소하기가 쉽지 않다. 여성 권리는 요원하고 IMF 체제하의 경제위기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한국 여성의 전화’측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 검찰 수사 쟁점별 중간 점검/北에 총격요청은 사실로 판명

    ◎李 총재 개입·對北지원 의혹/‘고문 조작’ 주장 새 이슈화 지난해 대선 당시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비선 조직원’이 북한측에 판문점 총격을 요청했다는 검찰과 안기부의 수사발표로 정국이 엄청난 회오리에 휩싸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은 韓成基(39·포스데이터 비상임고문)·張錫重씨(48·대호차이나 대표) 2명이 지난해 12월10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측 관계자 3명에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총격전을 일으켜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는 당국의 발표와 피의자들의 진술이 일치한다. 모의에 가담한 吳靜恩(46·전 청와대 행정관)는 이와 별도로 대선 관련 보고서를 李會昌 후보측에 15차례나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李會昌 총재나 측근이 ‘총격전 요청’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가 논란의 핵심이다. 여기에 안기부 커넥션의 실재 여부,수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이 고문을 받았는지 여부 등도 관심의 대상이다. 검찰과 안기부의 수사내용과 피의자들의 주장을 쟁점별로 짚어본다. ▷李會昌 총재측 인지 여부◁李會昌 총재의 동생 李會晟씨가 지난해 대선 당시 吳씨와 韓씨를 수십 차례 접촉했고 韓씨가 베이징으로 갈 때 500만원을 건넸다는 것이 안기부의 발표다. 검찰은 會晟씨가 ‘총격전 요청건’에 대해 미리 보고를 받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일부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吳씨 등은 지난해 11월 초부터 12월 초까지 주 3∼4회 정도 모임을 갖고 대선 관련 보고서를 李총재측에 15차례 제출했다. 특히 吳씨는 李후보의 출근때 승용차에 동승해 직접 보고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李총재는 이에 고맙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韓씨는 특히 신한국당 朴燦鍾 고문이 대선과정에서 신한국당과 국민신당을 놓고 저울질할 때 李會昌 후보가 직접 朴고문을 만나 당 잔류를 설득해야 한다며 會晟씨에게 李會昌·朴燦鍾 면담 주선을 자처한 뒤 지난해 12월 초 吳씨와 함께 李후보를 만나 朴고문 집으로 안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韓씨 등은 자신들이 李후보의 비선조직이 아니며 會晟씨로부터 여비를 받았다는 것도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韓씨는 변호인과의 면담에서 대선 당시 진로 張震浩 회장의 권유에 따라 金大中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朴燦鍾씨를 국민신당에 입당시키기로 했고 이를 위해 張회장이 준 20억원을 朴씨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영국에 체류 중인 朴씨는 그러나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안기부 개입 의혹◁ 전직 안기부 고위관리 등에 따르면 張씨는 안기부가 관리해 온 공작원으로 암호명은 ‘아미산’이었다. 그렇더라도 張씨 등이 군사작전을 요청하면 북측이 이를 받아들일 정도로 비중을 인정받았겠느냐는 것이 의혹 가운데 하나였다. 상대방인 북한측 관계자의 격(格)도 의문의 대상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張씨 등은 독자적으로 북측 관계자와 접촉한 것이 아니며 안기부 관계자의 협조 또는 묵인 아래 거래할 수 있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지난번 북풍공작 수사 때 옛 안기부 간부 등이 옷을 벗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안기부의 개입의혹에 대해서도 수사 중이다. ▷고문 의혹◁ 張씨의 동생 錫斗씨와 韓씨의 변호인은 이들이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사과정에서 무릎을 꿇은 채 구타를 당해 무릎에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사무실 등에서 촬영한 신체 사진을 증거로 제시했다. 고문이 사실이라면 張·韓씨의 진술은 증거 효력을 잃게 된다. 안기부는 이에 대해 張씨 등이 구치소에서 통증을 호소하거나 진료를 받은 사실도 없다는 점 등을 들어 거짓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7일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은 張씨가 수사관과 저녁식사를 하고 노래방까지 갔다며 언론에 이 업소를 공개했다. 張錫斗씨는 그러나 “안기부 관계자가 형에게 ‘독한 술을 먹고 자면 멍이 풀린다’고 해 억지로 술을 마시고 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대북 커넥션 의혹◁ 검찰은 96년 4·11총선 직전 판문점 무력시위 이후 재미교포 金양일씨가 중간에 나서 현대그룹을 통해 3만t 가량의 밀가루를 북한에 전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선거를 6일 앞둔 4월5일 판문점에서 발생한 무력시위의 배경에도 모종의 ‘뒷거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여당은 139석 획득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당시 현대측은 金泳三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돈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의혹의 핵심은 북풍사건에 연루된 재미교포 金양일씨가 우리 정부 누구의 지시로,무슨 이유 때문에 북한에 밀가루를 보내는데 앞장섰느냐는 점이다.
  • 말聯 안와르 ‘구타’ 주장/美 국무부,진상조사 촉구

    【워싱턴·콸라룸푸르 AFP 연합】 미 국무부는 29일 안와르 이브라힘 전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구금상태에서 실신할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말레이시아 정부의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왼쪽 눈두덩이 붓고 오른 팔에 멍이 든 채로 이날 재판에 출석한 안와르 전 부총리는 경찰에 연행된 지난 20일 밤 심하게 얻어맞아 “다음날 아침까지 사실상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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