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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봉길의사 연행 사진은 가짜”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의거직후 일본군에 연행돼가는 장면을 보도한 일본신문의 사진은 가짜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상하이 주재 한국총영사관 강효백(姜孝伯)문화담당 영사는 1일 “거사 다음날짜 현지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5월 1일자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에 실린,일본군에 끌려가는 인물은 윤의사가 아니라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다른 외국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강 영사는 “거사직후 윤의사는 일본군경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해 거의 기절한 상태였으므로 모자를 든 채 일본군들과 함께 걸어서 끌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상하이 타임스’는 “그(윤의사)는 일본군경들에 구타당하여 때려 눕혀졌다.주먹질,군화,몽둥이가 그의 몸뚱아리 위로 쏟아졌다.그가 입고 있던 회색양복(grey suit)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는데 땅바닥에 쓰러진채 아무 기척이 없었다.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모습으로놓여 있었다. …잠시후 차 한 대가 나타났다.그 한국인은 머리와 다리가 집어 들려 짐짝처럼 통채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고 당시상황을 보도했다.동일자 ‘차이나 프레스’ 역시 “25세의 윤봉길은 땅바닥에 두 번이나내동댕이쳐졌으며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다시피 운반되어 일본군사령부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들의 보도내용은 그동안 윤의사가 의거직후 모자를 든 채 걸어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도한 ‘오사카아사히신문’ 등에 게재된 사진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강 영사는 “일본측이 가짜사진을 게재한 것은 참혹한 모습을 한 윤의사의사진을 게재했을 경우 한국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데다 일본군경의 인도적 모습을 선전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강 영사는 지난해 4월 상하이 의대 정형외과 전문가팀 등의 ‘골상학적 비교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 사진의 가짜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독자의 소리/ 유아교육 지원 늘려 서민부담 덜었으면

    여섯살배기 딸 아이를 둔 나도 고심끝에 학교 병설유치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환기가 잘 되는 넓은 교실,뛰놀 수 있는 넓은 운동장,아이의 키에 맞춰진 화장실 시설,편리한 교실위치 등 아이를 맡기기에 큰 손색이 없을 것 같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병설유치원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다.좋은 외적 여건과는 달리 미비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유치원을 둘러본 결과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놀잇감과 책들이 너무 부족했다.교육부에서 지원받는 예산이 빠듯한 탓이라고 한다.그래서 학부모들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가계부담을 안고서라도 좀더 질 높은 교육을 위해 사립교육기관으로 발길을 돌리는가보다. 병설유치원에 대한 재정지원이 확대됐으면 한다.그래서 서민들의 부담도 덜어주고 아이들이 값싼 교육비로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생기기를바란다. 이견기[대구 달서구 진천청구타운]
  • [2000 美대통령 선거] 후보 TV 정치광고 분석

    [로스앤젤레스 연합] 미국 대선후보 경선자들에게 유세 못지않게 치열한 것은 텔레비전 정치광고다. TV 광고는 30초당 약 3만∼5만달러의 거액이 들어가는 ‘고비용’ 선거운동이지만 민주 15개주(미국령 사모아 제외),공화 12개주가 한날 예비선거를 치르는 ‘슈퍼 화요일’(3월7일)과 같은 경우 후보가 의존할 수 있는 선전매체는 방송광고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시청률이 높은 평일 및 주말 프라임 타임의 후보 광고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로스앤젤레스 현지 방송의 심야 뉴스쇼 광고가격은 지난 1월1일 30초당 5,000달러에서 지금 2만5,000달러로 뛰었다.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의 앨 고어부통령은 250만달러,빌 브래들리전 상원의원은 350만달러를 투입했으며,공화당의 조지 W.부시 텍사스주지사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캘리포니아에서 지난 2주간 250만∼300만달러를 지출했다. 다음은 각 진영의 대표적 TV 광고다. ◆고어 광고 타이틀은 ‘최고(best)’.부시나 매케인과는 달리 많은 단체와인사들이 고어를 지지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있다.80년대 레이건 대통령 암살기도 때 총상을 입고 불구의 몸이 된 제임스 브래디 전 보좌관이 휄체어에앉아 “작년 5월 고어 부통령이 상원에서 가부동수의 총기규제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캐스팅보트를 행사한 것은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말한다.광고는고어가 이미 교사단체인 전국교육협회(NEA)와 낙태지지단체인 전국 낙태·출산권옹호연맹(NARAL)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음을 밝힌다. ◆브래들리 타이틀은 ‘소개(intro)다.“브래들리가 이기면 여러분이 이기는 것이다.그러기 위해선 그에게 기회를 줘야한다”.사정이 급한 만큼 광고메시지가 직선적이다.로즈장학생과 미 프로농구(NBA) 스타플레이어 출신으로 18년간 뉴저지주 연방상원의원 역임,경력에서 결코 다른 3명의 후보에 뒤질 게 없음을 강조한다.공약과 관련해서는 임산부 권리보호를 위해 48시간 병원에 머물면서 민간 의료보험기관(HMO)들과 싸운 것을 비롯해 총기소지 허가제,낙태 전폭지지 등 입장을 바꾼 적이 한번도 없음을 새삼 부각시키고 있다. ◆부시 ‘한세대에 한번(Once in a Generation)’이 타이틀이다.한 세대에한번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란 뜻이다.이 광고는 주지사로서 업무 추진력이입증됐으며 비전과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새 지도자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10년간 1조억달러의 세금감면과 공립학교 재학생의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한연방정부 지원,HMO의 부당행위에 대한 환자의 제소권 부여 등 환자의 권리강화 등이 공약으로 소개된다.특히 대규모 감세안을 ‘레이건식’이라고 강조,부문 감세안으로 ‘레이건 공화당원’임을 주장하는 매케인을 견제하고있다. ◆매케인 그의 타이틀은 ‘지도자(Leader)’다.매케인을 설명하는 데 있어다른 수식어는 필요없다는 것이다.67년 10월26일 해군조종사로 베트남전에참전했다가 격추돼 73년 3월까지 5년 반동안 포로생활을 한 점을 역시 부각시켰다.특히 선전효과를 노린 월맹군의 조기석방 제의를 거절하고 구타 등갖은 고초를 겪은 점이 강조되고 있다.공약보다는 매케인 자신의 경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조종사 시절의 청년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대비시킨다.매케인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캐릭터와 용기를 갖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 [독자의 소리] 국가유공자 자녀혜택에 아들·딸 차별

    국가유공자 본인은 물론 그 자녀에게도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은 익히 알고있는 사실이다.그러나 그 혜택에도 남녀차별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유공자녀중 아들인 경우에는 나이와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평생 혜택을받지만 딸인 경우에는 결혼과 동시에 학자금 지원,취업보호,그리고 공무원임용시험에서의 가산점 부과 등 모든 수혜가 중지된다. 보훈처 관계자에 따르면 아들은 직계를 존속시켜야 하지만 딸은 결혼해 남편이 부양하므로 혜택의 적격자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상속법까지 개정된 마당에 보훈처가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이 나라에 남자 가장만 있고 여자 가장은 없다는 말인가.충효에는 남녀를 가리지말 것을 당부하면서 혜택에선 어째서 달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견기[대구 달서구 진천청구타운]
  • [독자의 소리] ‘일본해’로 쓰이는 동해명칭 바로잡아야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동해’는 국제적으로 ‘일본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삼국시대부터 불려오던 ‘동해’가 ‘일본해’로 바뀐 것은 일제시대인 지난 1929년 정부간 국제수로기구가 당시 일본의 주장만 듣고 ‘해양과 경제’라는 책자에 명기한 이후부터의 일이다.독도 영유권문제는 우리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으나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아 안타깝다. 논란수역에 대한 이름은 같이 사용(병기)한다는 세계적 추세에 따라 ‘동해’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전망이 밝아 다행스럽다.그러나 지난해말 철도청에서 간행한 홍보용 책자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것과 같은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독립국가로서 자존심이 걸린 중대한 일이다. 이견기[대구 달서구 진천청구타운 101동]
  • [집중취재/조선족 밀입국] 실태와 대책

    중국 조선족들에게 우리나라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가.밀입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고 사기를 당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고도 ‘코리안 드림’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한탕심리에 이끌린 허황된 꿈,비참한 현실 탈출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조선족 밀입국의 실태와 대책 등을 짚어본다. ■밀입국 현황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지난 96∼99년에 적발된밀입국자 수는 3,920명.97년 1,480명을 정점으로 98년 991명,99년 647명으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다.이 가운데 중국 조선족이 2,964명으로 75.6%,그 다음은 중국 한족(936명,24%)이다. 이와함께 지난해 비자기한을 넘겨 불법체류자로 전락한 외국인은 13만5,300명.이는 국내 전체 외국인 38만101명의 36%에 해당되고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 수는 6만8,700여명이다.이들은 친인척 방문 등으로 들어왔다가 ‘돈’을벌기위해 눌러앉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외국인 인권보호시설 관계자들은 “산업연수생을 포함해 국내 외국인 취업자 30여만명 가운데 15만여명이 밀입국자나 불법체류자로 추산된다”고 밝히고 있다. ■밀입국자들의 실상 지난해 5월 경북 포항의 모 식당에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로 잡힌 조선족 조모씨(35·여)가 조사를 받던 대구 출입국관리사무소 여자보호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최근에는 서울의 한 지하철 공사장에서 9개월동안 일해오던 조선족 백모씨(51)가 떨어져 숨졌다. 이처럼 밀입국자들에 대한 감시망도 어수룩하지 않고,일자리 여건도 좋을리 만무하다.이들이 종사하는 직장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3D업종이다.더욱 큰 문제는 공장이 영세한 탓으로 고용주들이 임금을 떼먹기 일쑤라는 것이다.또 ‘경찰신고’를 빌미로 상습체불에다 구타까지 하는 악덕 업주도 심심찮게 적발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밀입국자들이 받는 돈은 월 평균 60만∼70만원.중국에서 교사가 한달에 900위안(11만여원)을 번다고 볼 때 6∼7개월치에 해당되는 목돈이다.그러나 이는 계산상 그럴 뿐 이핑계 저핑계로 고용주가 덜줘도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게 이들의 처지다. 현재 밀입국자를 고용할 경우 고용기간에 따라 범칙금 500만원부터 5년이하 징역을 감수해야 한다.또 밀입국자들 틈에 중국으로 탈출한 탈북자들이 섞여 있어 대공 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밀입국 경로 주로 서·남해 해안선으로 들어온다.중국과 가까운 데다 섬이 많아 레이더 감시망의 사각지대가 많고 고기잡이 배로 위장하기 쉽다.대개공해상에서 고기잡이 배로 위장한 국내 어선에 옮겨탄 뒤 어선과 함께 묻혀연안항으로 들어온다. 지난달 28일 전남 목포항에 입항한 여객선에서 밀입국하려던 조선족 1명이숨진 채 발견됐다.비좁은 공간에서 48명이 뒤엉켜 오랜시간 배를 탄 탓에 질식해 숨졌다.해경관계자는 “목포나 고흥·완도 등은 해안선이 길고 섬이 많은데다 부산쪽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점 때문에 밀입국자들의 공략대상이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알선책 목포해경 관계자는 “국내 밀입국 알선조직이 100개는 넘을것으로 본다”며 “7∼8명으로 이뤄진 알선책이 점조직 형태여서 검거하기가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밀입국 수요가 늘어나면서 알선료도 지난해 1인당 5만∼6만위안(한화 700만∼800만원)선으로 올랐다.조선족 10명이 한국땅에 들어오면 5명의 돈은 중국모집책에게,나머지는 국내 알선책에게 건네진다. ■송환방법과 대책 단순 밀입국자들은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신병이 넘겨진다.서울과 여수에 있는 외국인 보호소에 수용한 뒤 여권과 여비를 줘서 내보낸다.다시는 국내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공항 등에 입국금지 조치를 내린다. 법무부 관계자는 “조선족 밀입국자들의 입국을 봉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조선족들에게 국내 실상을 그대로 알려 허황된 꿈을 갖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조선족 밀입국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일각에서는 조선족 국내취업을 양성화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지금과 같이 불법체류중인 조선족들이 큰 고통을 겪고 범죄조직만 이롭게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제도적으로 이들을 수용해 내국인들이 취업을 꺼리는 3D업종에 활용하는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산업연수생제도등 조선족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방법이 없지는 않지만 그 숫자가 미미한데다 조건이 까다로워 조선족들이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포 남기창기자 kcnam@ *金吉照 해경 국제과장 인터뷰 “IMF이후 한동안 감소추세에 있던 중국 조선족들의 해상을 통한 밀입국이다시 늘고 규모도 대형화되고 있습니다” 해양경찰청 김길조(金吉照)국제과장은 “국내경기 회복에 맞춰 99년 후반기부터 밀입국이 다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해상 밀입국의 일반 현황은 한·중 알선책이 공모해 조선족을 중국어선으로 공해상까지 데려온 뒤 우리 어선에 환승하는 수법이 주종을 이룬다.전에는 10∼30t급 소형 목선을 이용했는데 요즘은 중형으로 바뀌었고,척당 밀입자수도 20∼30명에서 50∼80명으로 늘어나는 등 수법이 대범해지고 있다. ■단속은 어떤 식으로 하나 밀입국 첩보가 입수되면 예상항로에 경비정을 증가배치하고 선박 입항시 100% 검문검색을 한다.해군 및 어업지도선과 합동감시체제를 구축하고 취약시간대에 함정 및 헬기를 이용해순찰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과의 협조는 지난 98년12월 중국 공안부와 해상범죄 공조협력에 관한 약정을 체결했기 때문에 수사협조가 잘 된다.밀입국으로 의심되는 선박이 출몰하면 중국 공안부가 즉각 우리측에 통보하고 자체 예방활동을강화한다.지난달 14일에는 중국 단동항에서 밀입국을 시도하던 조선족 111명을 검거한 바 있다.이는 중국 공안당국이 직접 밀입국자들을 검거한 최초 사례다. ■밀입국을 단속하는데 어려움은 없나 육지와는 달리 바다에는 통로가 없기때문에 밀입국 선박을 단속하는데 애로사항이 많다.특히 해상경비는 막대한장비와 인력이 필요하나 인력동원에는 한계가 있다.따라서 어민들의 신고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신고정신을 높이기 위해 각 항·포구에서 어선 출항시 전단을 배포하는 등 홍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인천 김학준기자 hjkim@ *목숨건 '코리안 드림' 허상 지난달 28일 여객선 냉동창고 안에 숨어 전남 목포항으로 밀입국하던 중국조선족 황모씨(38)가 질식사로 숨진 사고는 중국 조선족내에서번져가고 있는 ‘코리안 드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이후 조그만 목선에 목숨을 걸고 ‘기대의 땅’한국을 찾는 조선족들의 발길이 서·남해안 전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다. 항해도중 중간에 폭풍을 만나 목숨을 잃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으로 표류하는 일도 있지만 이들의 모험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조선족들이 몰려사는 중국 길림·흑룡강·요녕성 등 동북3성에는 밀입국을 추진중인 사람수가 21만명에 달한다는 설도 나돈다.이 가운데는 농어민뿐 아니라 교사·회사원 등 인텔리계층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밀입국 열풍’이 조선족 사회에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국에만 가면 한 밑천 잡는다는 허황된 기대감 때문이다.한국에서 2∼3년간 일을 하면 중국에서 평생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거액을 만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이 바람에 전답을 팔고 빚을 내 700만∼800만원의 비싼 알선비용을 대면서까지 밀항선에 몸을 싣는다. 이들은 하나같이 밀입국하거나 불법체류하다 적발되면 ‘내가 돈을 못벌어가면 식구들이 다 죽는다’고 눈물로 호소해 조사관계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면 밀입국자들은 우리나라에서 돈을 잔뜩 벌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돌아갈까.해양경찰청은 해상감시체계가 수년전부터 대폭 강화됐기 때문에 공해상을 통해 밀입국하는 경우 대부분 적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설사 밀입국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들에게는 고난의 연속이다. 우선 취업이 쉬운 식당이나 공장 등에서 일을 하지만 임금을 제대로 못받거나 국내 근로자보다 20∼30% 적게 받는 경우가 많다.이를 항의하면 업주가불법체류자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다. 경인지방노동청에는 지난해 조선족 임금체불 사례가 10여건 접수됐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불법체류 사실을 우려해 고발을 꺼리기 때문에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강종묵(姜宗默)근로감독관은 “조선족들이 고발을 해올 경우 불법체류는 문제삼지 않고 내국인과 똑같이 처리해주고 있지만그 수는 미미하다”고 말했다. 조선족이 같은 조선족 또는 내국인에게 사기를당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본부’에 따르면 조선족 사기 피해자가 1만7,000여명에 이르고 피해액이 500억여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12월 조선족들이 몰려사는 서울 대림·가리봉동 일대에서 조선족을상대로 위장결혼,주민등록증 위조 등을 일삼아온 ‘흑사회’로 불리는 조선족 일당 7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기꾼들은 주로 중국현지 송출업체와 짜고 허위비자를 발급해주고 돈을 가로챈다.사기당한 동포들이 중국인 채권자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중국 하얼빈에 거주하던 마모씨(40·여)는 지난 98년 말 빚쟁이들에게 쫓겨 친정에 피신했다가 채권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지기도 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 英정부 ‘체벌제한법’ 발표

    [런던 AFP AP 연합] 빅토리아여왕 시대의 법률에 따라 자녀에 대한 체벌을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합리적 징벌”로 간주,무죄로 인정해온 영국에서 어린이 체벌에 제한을 가하는 내용의 입법제안이 발표됐다. 이 입법제안의 내용은 부모가 어린 자녀의 버릇을 가르치기 위해 때리더라도 슬리퍼나 지팡이 등 다른 도구를 사용해서는 안되고 손으로만 때려야 하며 그 경우에도 눈,귀 등 머리부분은 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반한 부모들은 형사범으로 징역형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입법제안은 그동안 자녀를 구타하면서 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합리적징벌”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던 부모들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같은 움직임은 98년 유럽인권재판소가 9살난 양아들을 지팡이로 때린 사람이 “합리적 징벌” 조항을 적용받아 무죄석방되도록 한 영국의 1861년 법률이 소년의 인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함에 따라 추진되는 것으로 앞으로, 3개월간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정식 법 개정안으로 성안된다.
  • 중학생이 반친구 위협 2년간 1,300만원 뜯어

    빗나간 중학생이 급우 1명을 학교와 집 근처에서 2년간 거의 매일 위협해 1,300여만원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남 진주경찰서는 13일 같은 반 급우를 상대로 2년간 하루 2,000∼3만원까지 모두 610차례에 걸쳐 1,340만원 가량을 갈취한 윤모군(15·진주 모중학교 3년)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윤군은 지난 98년 4월쯤 같은 반 정모군(15·진주시 상봉동)을 교실과 화장실에서 마구 구타해 “빵 1,000원어치를 사오라”고 요구한것을 시작으로 같은해 7월부터는 1만∼2만원,지난해 5월부터는 2만5,000∼3만원씩 매일 돈을 뜯어온 혐의다. 윤군은 평일에는 교실로,방학중이나 휴일에는 동네 오락실로 돈을 가져오도록 한 것으로 밝혀졌다.이 때문에 정군은 지난 2년간 윤군에게 시달린 나머지 심한 우울증세를 보였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정군의 부모는 아들의 평소 행동이 이상하고 지갑과가게 금고에서 돈이 매일 없어지는 것을 이상히 여겨 정군을 추궁한 끝에 이같은 사실을 밝혀냈다. 진주이정규기자 jeong@
  • [독자의 소리] 휴대폰요금 잘못 부과해놓고 되레 큰소리

    한국통신프리텔 이동전화에 가입한 고객이다.얼마 전 한국통신프리텔 대리점을 방문했다.지난 4개월간 가입비를 완불했고 이미 핸드폰도 정지했는데요금이 계속 청구돼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였다.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알수 없어 본사와 대리점에 전화통화와 왕래를 수차례 한 뒤 결국 대리점의 실수가 밝혀졌다.그래서 잘못 부과된 요금의 환불을 요구하자 대리점은 어물쩡 계산해주는 것이었다.몇번을 다시 요구한 끝에 던지듯 돌려주는 돈에 욕까지 먹어가며 보상받아야 했다. 그런데 억울한 것은 환불 과정에서 대리점 사장에게 구타당한 일이 생긴 것이다.따귀 한 대도 아니고 바닥을 구르며 밟히다시피 했다.너무나 억울해 본사 고객상담실로 찾아갔지만 상담은커녕 자기네와 무관하다며 개인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소비자보호센터와 경찰서에서도 극히 소극적인 반응이었다.이런 폭력은 단지 나에게만 해당하는 피해가 아닐 것같아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문종훈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931의8]
  • 김영환씨 ‘민혁당’공판 증언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金永煥·36)씨가 7일 오전 북한의 남한내 전위 혁명조직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과 관련,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하영옥(河永沃·36) 피고인에 대한 5차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와 “지난해 9월 국가정보원 조사당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날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金大彙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국가정보원 조사때 관련자들의 혐의 내용을 사실대로 진술하면 무혐의 처리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나”라는 피고인 하씨의 직접 신문에 “ 국정원에서 구타와 가혹행위를 하면서 ‘혐의사실을 시인하면 피고인과 나를 포함한 관련자를 최대한 선처해주겠다’고 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진술했다”고 대답했다. 김씨는 또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라고 생각이 뒤바뀐 이유는 뭔가”라는 하 피고인의 질문에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반민주적이 고 반인도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美 고문경관에 징역 30년형

    [뉴욕 연합] 뉴욕시 경찰의 야만적인 고문행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온 애브너 루이마 사건의 가해자 저스틴 볼페(27)에게 13일 징역30년형이 선고됐다. 볼페는 지난 97년 8월 아이티 이민 출신인 루이마를 체포해 경찰서 화장실에서 빗자루 대를 항문과 입에 번갈아 집어넣고 구타를 하는 등 고문을 행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당시 순찰임무 중이던 볼페는 한 나이트클럽의 난투극 현장에서 루이마가뒤에서 주먹질을 한 것으로 잘못 알고 경찰서로 연행해 분풀이를한 것으로알려졌다. 브루클린 연방지방 법원의 유진 닉커슨 판사는 “고의적인 살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더 이상의 행위를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것으로 루이마는 물론경찰과 사회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해를 끼쳤다”면서 중형을 선고했다. 볼페는 선고를 앞두고 5분여에 걸친 최후 진술을 통해 “나는 루이마의 권리와내 자신을 배반했으며 죄값을 치르겠다”고 말했으나 “감옥에 가는 것은 힘든 일이며 나는 이제 27살이다”며 울먹였다. 루이마 사건은 뉴욕시경과 소수민족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경찰의 야만적 행동에 대한 시위를 촉발시켰다.루이마는 현재 뉴욕시경을 상대로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다.
  • [굄돌] 가끔은 내 것을 포기하고 싶다

    가끔은 엉뚱하게 원시사회를 상상해 본다.그때는 소유의 개념이 존재하지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넉넉했을까 싶다.내 것,네 것이 없어서 각박하지 않았을 것 같다. 공중목욕탕에서 자주 보고 또 겪는 일이다.남탕은 모르지만 여탕에서는 내자리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내가 맡아 놓은 자리인데…”하면 그 곳에서 얼마나 씻고 있었던 간에 상관없이 자리주인(?)의 요구대로 목욕하고 있던 사람은 비누거품인 채라도 바로 옮겨갈 수 밖에 없다.비어 있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을 더 낸 것도 아닌데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고,그것도 한참 뒤에 나타나 자리를 비우라는 것이다.목욕용품을 들고조금만 움직이면 될 것을 굳이 내 자리를 고집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힘들 때가 있다. 지금도 그런 지 모르지만 학창시절에는 도서관 자리 맡아 놓기가 성행했다. 벗 중 하나가 새벽에 가서 친구들의 자리를 맡아놓기 위해 있는 책을 하나씩,책의 갯수가 부족하면 외투라도 자리에 올려 놓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맡아 놓은 자리에 올 친구가 늦게 혹은 아예 안 나타나기도 한다. 혹은 자리를 맡아 놓고는 나가서 밤 늦게 돌아와 본인의 자리라고 주장하면서 그 자리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주섬주섬 책을 챙겨 다른 자리로 옮겨야 하는 모습을 떳떳하게(?) 지켜 보기도 하였다. 아주 사소한 내 것에 대한 집착이 내 자리뿐만 아니라 내 집,내 자식으로이어져 지나친 모습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약을 해 본다.내 것이기에 어떻게 해도 남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식의 모습들 말이다.내 돈이니까 내 맘대로 쓸 수 있고,내 아파트 값이 내려가지 않게 쓰레기 통이 다른라인의 현관으로 옮겨야 하고,내 자식이 다니는 학교가 장애인학교 근처에있으면 안 되고,내 식구이기에 구타하는 것도 또는 극단적으로는 죽일 수도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남의 것이 있기에 ‘내’ 것이 있고 상대방이있기에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것,‘내’ 권리를 소중히 하기 위해, 남을 배려하여 약간은 불편하더라도 가끔은 굳이 ‘내’ 것을 주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싶을때가 있다.그러면 내 자신이라도 원시사회의 넉넉함과 따뜻함을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김미경 펄벅재단 한국지부 대표
  • [발언대] 80년대 당한 고문에 아직도 후유증 시달려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 고문얘기가 많이 나온다.나는 5·18때와 구로구청사건때 별 일이 아닌데도 지나친 고문을 받고 한쪽 눈을 실명했다.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내 경우는 그래도 덜한 것 같다.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렇게 고문을 했는데 서경원씨나 김근태씨 그리고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던사람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지난 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에 가담했다며 전두환 군사정권으로부터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당시 평범한 공무원(익산시청 도시과 근무)이었던 나는 우연히 입수한 광주관련 유인물때문에 그해 7월30일 중앙정보부전주분실에 끌려갔다.그곳을 시작으로 전주 도경찰국 대공분실과 전주헌병대,광주 상무대 보안사 등 여러 관계 기관을 거치면서 직장을 잃고 처절한 인격파괴까지 감내해야 했다.1주일간 발가벗겨진 채 받은 구타는 고문의 시작에 불과했다.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다.당시 그들은 간첩혐의를 씌우기 위해 월북(越北)을 허위자백하라며 세뇌를 거듭했다.반복 질문에기계적인 대답이 되풀이될수록 ‘내가 월북했었구나’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같은해 9월 광주 상무대로 이첩됐을 때 전주MBC에선 “황씨는 고정간첩”이라고 보도했다고 한다. 광주에서의 고문은 대검으로 허벅지 찌르기까지 가해졌다.며칠동안 기절과고문이 반복됐다.결국 극심한 고문에 우측 안구망막이 파손되었으나 치료를받지 못해 시력을 잃어야 했다.간첩혐의는 씌워지지 않고 북한을 이롭게 했다며 국가보안법 7조2항 및 계엄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러야했다.출소후에 서울로 상경,본격적인 재야운동에 뛰어들었다.하지만 87년 대통령선거 당시 부정선거를 항의했다는 이유로 조직깡패에게 얻어맞고 구로구청에서 연행돼 조사과정에서 머리털이 뽑히는 등 또 다른 고초를 겪었다. 이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무겁고 어두웠던 시대는 갔다.그러나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아직도 국정원이든 경찰이든 내게는 무서운 악마들이다.시류를 거부하고 외길만을 고집한 인생이지만 내게 남아있는 것은 ‘야성 강한 운동권출신’이라는 꼬리표뿐이다.내가 아직도 창살 없는 감옥에사는 느낌이 드는 것은,고문이라는 인간정신을 말살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더러운 행위에 대항해 싸워보지 못한 분노로부터 못 벗어나고 있기 때문일것이다.그리고 ‘운동권 출신’이라고 못박으며 접근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사회에 많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세연[도서출판 청사 대표]
  • 徐 前의원 비서관 房羊均씨‘1만弗 수수’허위진술

    서경원(徐敬元) 전 의원 비서관인 방양균(房羊均)씨는 18일 “서전의원 밀입북사건 수사 때 당시 안기부 수사국장이었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게 직접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방씨는 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1만달러 수수 부분은 안기부 조사 때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던 내용”이라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입답. ■1만달러 수수는 검찰수사 때 밝혀진 내용 아닌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안기부 수사 때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다.안기부와 검찰이 ‘김대중평민당 총재 죽이기’ 차원에서 함께 조작한 것이다.안기부는 서전의원이 1만달러를 솔 담뱃갑 2개 크기로 포장해 김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진술을 강요했다. ■정형근 의원에게 고문을 당했나. 당시 대공 수사국장이던 정의원이 직접구타했다.정의원은 수시로 수사실에 들어와 안기부 직원 특별채용을 약속하며 수사에 협조하라면서 김대중 총재만을 겨냥한 질문을 주로 했다. ■검찰에서도 고문을 받았나. 1만달러 부분을 자백할 시점에 사흘간 잠을자지 못했다.수갑을 채우고 포승에 묶인 채 밥을 먹고 대·소변을 봤다.22일간 주임검사였던 안모 검사에게 안기부 조사내용이 조작됐다고 하니까 ‘왜죽을려고 하느냐.사형을 면해줄 테니 시인하라’고 회유했다. ■고문증거가 있나. 당시 재판과정에서 신체감정을 신청,서울대 이정빈 교수가 작성한 신체감정 소견서가 있었다.그러나 지난 12일 조사받는 데 검사가 오히려 나한테 (소견서가)있느냐고 물었다.당시 기록에 첨부돼 있지 않다는 얘기다.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서전의원의 밀입북 사실을 얘기했다고 허위진술한 부분도 기록에 없더라. ■안기부에서 고문을 주로 맡았다는 김모 수사관은 누구인가. 내게 처음으로 1만달러 부분의 허위 자백을 받아낸 인물로 정의원의 총괄지휘를 받아 수사했다.30년간 대공수사에 몸담아오다 지난 93년 퇴직해 경기도 양평에서 살고있다.그는 만일 검찰에 나가게 되면 진실을 얘기하겠다고 했다. 이종락기자
  • 김원기씨가 밝힌 사건진상

    지난 89년 서경원(徐敬元) 전 의원의 밀입북 사건 당시 평민당 총무였던 국민회의 김원기(金元基)상임고문은 16일 “사건발생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서 전 의원으로부터 1만달러를 받았다는것은 조작치고는 아주 유치한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어 “이 사건은 개인의 실정법 위반사건이 정권의 필요에 의해 공안정국으로 발전된 것”이라며 ‘공작 의혹’을 제기했다. 김 고문이 밝힌 사건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김대중총재 및 평민당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문익환(文益煥)목사 방북사건과 동의대 사건,임수경양 방북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서경원 방북사건을 왜곡,날조해 김총재와 평민당을 탄압하고 나아가 여소야대 정국 반전용으로 발전시켰다.문목사 사건 이후 서의원은 자신의 방북사실을 극히 일부에게 언질했고 이 사실을 이길재(李吉載·당시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의원이 나에게 알려왔다.이 사실을 접하고 지체없이 김총재댁으로 찾아가보고했다. 김 총재는 기막힌 사건이라고 하면서 서의원으로부터 직접 사실을확인한 후 자수시키라고 지시했다. 김총재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당시 안기부장이었던 박세직(朴世直)의원에게 직접 자수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이에따라 내가 박부장에게 곧바로전화를 걸어 ‘중대 사안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으나 박부장은 출장중이라며 2∼3일 후에 만나자고 했다.그후 남산 공관으로 서의원을 데리고 가 박부장을 직접 만났고,서 의원은 방북 경위를 설명했다.박 부장은 이에 대해 김대중총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현역의원이고 자수했기 때문에 불구속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안기부는 공관에서 며칠 지난뒤 수사관을 시내 호텔로 보내 서 의원과 만나게 해 수사를 진행했다.이때 ‘김대중 총재 친서 전달설’ ‘밀입북 자금전달설’ 등 날조한 사실을 공안세력이 유포했다.그로부터 김총재와 평민당을타깃으로 해 국민에게 각인된 반공 이데올로기를 악용,용공으로 몰아갔다.1만달러 수수설은 당시 전세를 구할 돈도 없어 의원회관에서 숙식하던 서의원의 경제상태에 비춰볼 때 상상조차 힘들다. 박찬구기자 ckpark@ * 서경원 밀입북사건 쟁점 뭐가있나 ‘서경원(徐敬元) 밀입북사건’을 둘러싼 명예훼손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발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그러나 당사자들이 당초 검찰의 수사기록을 번복하는 진술을 하고 있어 진상규명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1만달러 수수여부 이번 사건의 최대 핵심 사안이다.검찰은 89년 수사발표에서 서의원이 88년9월초 여의도 평민당 총재실에서100달러짜리 지폐 100장을 흰종이에 싸 김총재에게 건넸다고 실토했다고 밝혔었다.서의원이 받은 5만달러 중 1만달러를 제외한 4만달러는 처제에게 3만9,300달러를 맡겼고 나머지 700달러는 본인이 사용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서 전 의원은 최근 검찰조사에서,강압에 못이겨 당시 김총재에게 1만달러를 줬다는 허위자백을 했다며 진술을 번복했다.서 전 의원은 이와함께문제의 1만달러 가운데 2,000달러는 88년9월5일 귀국 당일 당시 김용래 보좌관을 통해 환전했다고 진술했다.김보좌관도 서 전 의원과 같은 진술을 했으며 당시 환전을 담당한 조흥은행 안양정씨도 이를 검찰에서 확인해 줬다. 만약 김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서 전 의원이 이미 2,000달러를 환전해 간 사실이 맞다면 많아야 8,000달러밖에 남지 않아 김대통령에게 1만달러를 줬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이럴 경우 1만달러 수수설은 뒤집어질 가능성이크다. ■불고지 김대통령이 서 전 의원을 방북사실을 보고받은 시기가 ‘4월’이냐‘6월’이냐이다.검찰은 서의원이 89년4월쯤 김총재에게 밀입북한 사실과 한겨레기자와 인터뷰한 사실을 보고하자 김총재가 보도를 중단하도록 지시한 점을 시인했다고 밝혔다.그러나 국민회의 김원기(金元基) 상임고문(당시 평민당 원내총무)은 “서 전 의원의 방북보고를 이길재(李吉載) 당시 대외국장으로부터 들은 것은 6월”이라면서 “이를 총재에게 곧바로 알렸으며 총재가신고하라고 해 당시 박세직(朴世直) 안기부장에게 알렸다”고 말했다. ■고문 여부 검찰은 당시 서의원을 결코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밝혔다.그러나 서 전 의원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안기부뿐 아니라 검찰에서도 구타하고유도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향후 수사전망 검찰은 김대통령의 1만달러의 행방이 이 사건의 결정적인단서라고 판단,당시 서 전 의원이 환전한 영수증과 은행직원 증언 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진술이 엇갈리는 만큼 물증확보가 관건이라는 판단이다. 검찰은 주변조사와 함께 당시 검찰의 수사기록을 정밀히 분석하고 있으며필요하다면 당시 수사검사 등도 소환한다는 내부방침을 세워두고 있다. 주병철기자
  • 徐敬元 前의원등 3명 참고인조사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의원의 ‘빨치산식 수법’ 등의 발언에 대한 명예훼손 고발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공안1부(丁炳旭 부장검사)는 11일 오전 서경원(徐敬元)전의원과 비서관이던 방양균(房羊均·44)씨 등 3명을 소환,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서전의원 등을 상대로 정의원이 지난 4일 한나라당 부산집회에서 서전의원의 밀입북 사건과 관련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진위 여부를 조사했다. 서전의원은 검찰 조사에서 “지난 89년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당시 정의원이 직접 수사를 하면서 2주동안 잠을 안 재우고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면서“북한 허담(許錟)에게 받은 공작금 5만달러 중 1만달러를 당시 김대중(金大中)평민당 총재에게 전달했다는 진술도 고문·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서전의원 등이 지난 4월 자신들을 ‘고정간첩’으로 표현했다며 정의원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한 사건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서전의원은 평민당 의원 시절이던 지난 88년 8월 2박3일간 밀입북,북한 김일성(金日成)과 허담을 만나고 공작금 5만달러를 받아 온 혐의로 89년 8월구속기소된 뒤 징역 10년형을 확정받아 8년여를 복역하고 지난해 특사로 석방됐다. 이종락기자 jrlee@
  • [의열 독립투쟁] (10)田明雲·張仁煥 의사

    국권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운 1908년 3월23일 이른 아침.미국 샌프란시스코페어몬트호텔 앞에서 한 한국 청년이 몸을 숨기고 호텔 안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이 시각 한 대의 승용차가 호텔 정문에 정차하자 일본인 관리로 보이는,실크 모자를 쓴 두 사나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더니 트렁크 몇개를 들고나와 승용차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이 한국인 청년은 급히 인근 페리 정거장으로 향하였다.그는 오전 9시30분 정각에 발차하는 미국 대륙횡단열차와 관련해 ‘볼 일’이 있는 듯했다.이윽고 9시 15분경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역 구내 한 쪽에 모인 일본인 무리에서 ‘반자이(만세)’ ‘반자이’하는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그들은 한 미국인의 전송차 나온 일행들이었다. 함성소리에 싸여 한 미국인이 탄 승용차가 정거장 앞에 멈추어서자 샌프란시스토 주재 일본총영사 고이게 조소(小池張造)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뒤따라 내린 미국인은 얼굴에 상처투성이였다.9시20분 개찰이 시작되자 승객들이역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미국인도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서자 이때 철탑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국인 청년이 품에서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첫 발은 불발이었다.다시 두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 역시 ‘찰칵’소리만 날 뿐 불발이었다.자신의 권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한국인 청년은 권총을 거꾸로 고쳐잡고 차에 오르려는 미국인을 맹타하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미국인이 몸을 피해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첫 발은 한국인 청년의 오른쪽 어깨를 빗맞고 지나갔고 두번째,세번째 탄환은 미국인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쓰러진 미국인은 친일파 스티븐스과 한국 청년 전명운(田明雲·1884∼1947)의사였다.총을 쏜 사람은 또다른 한국 청년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사였다.이른바 ‘스티븐스 처단의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의 애국청년들이이국 땅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전명운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일찍 양친을 여의고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가업인 포목전을경영하던 장형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전 의사는 약관 20세인 1904년 2년제 신식학교인 한성학원을 수료하면서 시국과 개화에 눈뜨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맹투사로 소문나 있던 전 의사는노상에서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모욕하는 일본인들을 응징한 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신부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다시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 화물선 스타피시호의 취사장 인부로 고용된 전 의사는 대만·일본 등을 거쳐 그해 9월 하와이에 도착했다.이곳에서 1년간 농장 인부로 일하던 전 의사는 이듬해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철로공사장 노동자,채소 행상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민노동자와 몇몇 유학생,우국 망명가들이 모여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기관지 ‘공립신보’를 통해 교민들의 세력을 규합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전 의사 역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3월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이자 친일파인 미국인 스티븐스가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다는 정보가 교민사회에 입수되었다.스티븐스의 귀국은 대외적으로는 일제가 다년간의 공로를 인정,특별휴가를 준 것으로 돼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띤 귀국이었다.당시 미국 내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격운동이격화돼 미 의회에서 관련 법 제정을 추진하자 일제가 그를 긴급 파견,미 국회의원과 유력자들을 만나 법안 제출·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3일 요코하마를 출발해 귀국 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선상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3월20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등 친일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내용은 미국 신문에 보도돼 재미교포 독립운동가들의 격분을 샀다. 공립협회 회원들은 스티븐스가 머문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발언내용 취소를 요구하며항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응징했다.이날 저녁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은 스티븐스 구타 경과보고를 겸한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는데 이자리에서 전 의사는 자신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장인환 의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전·장 두 의사는 23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가는 대륙철도를 타려던 스티븐스에게 세 발의 탄환을 날렸다.피격 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긴급 치료를 받았으나이틀 뒤인 25일 복부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3월27일 전 의사는 병상에 누운 채 살인미수 혐의로,장 의사는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교민사회에서는 두 의사의 무죄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호소하는 한편 변호사 비용 등 경비 모금에 나섰다.공립협회 회원이자 두 의사 후원회 임시서기인 송종익(宋鍾翊)은 현지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의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이라고 밝히고 재판 과정을 독립전쟁의과정으로 인식해줄 것을재판부에 호소하였다. 3차에 걸친 예심을 마치고 6월27일 전 의사는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장 의사는 8개월 동안의 재판 끝에 12월23일 ‘애국적인 발광(發狂) 환상에의한 2급 살인죄’로 판정,극형은 면하고 이듬해 1월2일 열린 언도공판에서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장 의사는 1919년 1월17일 가출옥으로 석방됐으며1924년에는 자유의 몸이 됐다. 전 의사보다 8세 연상인 장인환 의사는 1876년 평양 출신으로 장 의사 역시 조실부모하고 청소년기를 불우하게 보냈다.각지를 전전하며 상점점원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잡화상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평양에 살면서 청일전쟁을직접 체험하였다.1904년 하와이로 이민,사탕수수 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 1906년 캘리포니아로 옮겨 노동자생활을 하던 장 의사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국권을 박탈하자 ‘대동보국회’ 가입을 계기로 항일 대열에동참하였다. 한편 전·장 두 의사의 의거는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의 성과로기록되고 있다.우선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국내 민족진영에활기를 불어넣어 일시 수세에 있던 의병투쟁을 공세로 전환시켰다.또 두 의사의 의거·재판을 모두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국내외에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의거 이후 전 의사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현지에서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교유한 적이 있는데 전 의사의 의거 이듬해인 1909년 안 의사의 이토(伊藤博文) 처단은 전 의사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미국인 친일파를 처단,한국 청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두 의사는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의거 후 재판에서 무죄 석방된 전 의사는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의 압박감에서 이름마저 ‘맥 필드’로 바꾸고 9월 연해주로 일시 망명했다가 191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그때 부인과 양자로 입양한 조카를 만났으나 두 사람 모두 1927년 사망해 두 딸을 어렵게 길렀다.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노년까지 항일활동을 하던 전 의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7년 11월18일 63세로 LA 노인아파트에서 타계해 갤버리 천주교묘지에묻혔다. 94년 전 의사의 유해는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 의사는 전 의사보다 비극적인 노년을 보냈다.1919년 1월 가석방된 후 실의와 병고를 이기지 못한 장 의사는 1930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묻혔던 장 의사의 유해는 75년 국립묘지로 이장돼 사후 45년 만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됐다.두 의사는 모두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田·張의사가 처단 스티븐스는... 전명운·장인환 두 한국 청년이 처단한 미국인 스티븐스는 어떤 인물인가. 처단될 당시 일제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는 1852년 미국 오하이오 태생으로 19세때 오버린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학 법리과·외교학과를 졸업했다.처음 미 국무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1년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 인연을맺게 됐다. 이듬해 이곳을 사직한 그는 주미 일본영사관의 서기관으로 변신하였고 이듬해 다시 일본 외무성고문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일제의 침략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그가 한·일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2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체결때이다.일본측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따라 내한한 그는 이노우에를 뒤에서 자문한 공로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드 강화조약에서 일본이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4년 한·일간 체결된 ‘외국인 고문에 관한 규정’에 근거,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초빙됐다. 그는 ‘몸’은 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일본을 위하는 자였다.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는 물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이후 그는 한국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고 전·장 두 의사에게 처단될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한 그의 사체는 4월2일 이 병원을 출발,6일 워싱턴에 도착됐다.장례는 8일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워싱턴 온비루묘지에 묻혔다.이튿날 거행된 추도식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조화와 일황의 조전 및 조화,그리고 200여명의 조문객이 참여한가운데 거행됐다. 일본 정부는 장례식에서 스티븐스에게 훈1등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족에게조의금으로 15만원을 전달했다.사후 발견된 그의 예금통장에는 2만6,000여원의 거금이 입금돼 있었는데 이 돈은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친일 대가로 받은것이었다. [정운현기자]
  • [대한광장] 민족의 안녕·행복·품위를 위해

    “나는 힌두이다.나는 모슬렘이다.나는 크리스천이다.무엇보다도 나는 인도인이다.” 간디의 말이다.종교와 이념의 분열을 막고 한 민족으로 독립국가체제를 유지하려던 그의 부르짖음이다.그는 과격 분열주의자의 총에 죽는다. “신이 한 인간에게 이렇게 고상한 정신을 내려준 예가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송사(頌詞)다.그의 비폭력,독립의 성취,인도주의는 인류 역사에 살아 남는다. 남북간 전쟁과 불행을 예견해 남한의 단독선거와 반쪽 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화해 통일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김구는 한 자객의 총에 죽는다.그의 정신은 민족사에 빛나고 있다.사람은 극적으로 타살돼야만 또는 사지(死地)에 몰려가야만 이념이 더욱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일까.시저·이순신·안중근·링컨·루터 킹·박정희·만델라….그리고 격이 같진 않지만 특히 예수. 송도 3절(三絶).경관도 수려한 박연폭포,박식 심오한 도학자 화담(花潭) 서경덕,기생이면서도 애절한 시작품으로 국문학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명월 황진이. 그녀는 자기를 사모하다죽은 한 총각의 한(限)에 큰 충격을 받는다.정을주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그래서 그는 남녀의 사랑을 섬세한 감각으로 느껴헤아린다.자기를 원하고 자기가 원하는 남녀의 사랑에 투철한다.그녀가 지은 정한(情恨)의 시를 우리는 애송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명월이 만 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타여 보내고 그리난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남북관계를 남녀관계에서 본다.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남자는 상대에게 용서받지 못할 상처를 주었다.그는 진정 잘못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각오와 순수한 애정으로 결혼을 간청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믿지 않는다.또 속이고 결국은 버릴 것이라고 믿는다.무슨 소리를 하든 그건 속임수고 적화통일 노선은 불변이라고 믿는다.50년이 지난다.남자는 죽는다.그래서 황진이는 나섰다. 북은 1960년 남북연방제를 제안했다.그리고 80년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방안을 제안했다.서로 상이한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고 각각의 정부와 군대를 유지하되 병력은 10만명으로 줄이자고 했다.통일된 체제와 국가는 다음 세대에 맡기자고 했다.중국과 홍콩의 예도 들었다.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안기부 해체,주한미군 철수 등 단서를 달았다.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북한은 공식적인 대외 수사(修辭)와는 달리 여러차례 의미있는 발언을 했다.김일성,김영남,이삼로,북·미 장성회담 대표 이찬복중장 등.“주한미군의 지역안정 역할을 인식한다.남북통일에 방해되지 않는다면 미국이 원하는 만큼 계속 주둔해도 된다.” 한국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89년),민족공동체 통일방안(94년),김대중(대통령)의 3단계 통일방안(95년) 등을 제안했다.그러나 양측은 한번도 서로의통일방안을 놓고 책임자끼리 진지하게 논의한 적이 없었다.조평통의 허담 위원장은 지난 85년 필자에게 “남북이 제안한 통일안은 공통점이 많다.서로진지하게 상의하고 양보해 통일을 이룩하자”고 했다. 미국은 지난 9월17일 늦게나마 94년 북한과 제네바합의에서 약속한 경제제재 완화의 일부 조치 그리고 국교정상화 의향을 발표했다.페리는 남북통일을 바란다며 남북 자체의 문제라고 했다.북의 곤경에 인도적인 동정을 표명했다.우리 정부의 총괄적 타결 주장과 설득을 미국·일본이 수용한 결과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식량·자원 부족,이념·종족 분쟁,환경오염 등 격변의 21세기를 앞둔 지금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이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남의 멸시와 조소를 받지않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분단의 낭비와 비극을 하루속히 종결시켜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을 제창했다.국가연합·연방단계를 거쳐 완전통일의 3단계다.김대통령의 높은 뜻과 목표가 임기중에 달성될 것을 간곡히기대·기원한다.진정한 포용정책과 세계화는 “나는 친북이다.나는 친일이고 친미며 친중이며 친러이다.나는 세계 모든 국가와 인민에게 우애를 견지한다.나는 무엇보다도 이 민족의 안녕과 행복과 품위를 위해 일한다”일 것이다. 손장래 전말레이시아 대사
  • 아내 남편상대 이혼소송 70% 증가

    ‘이혼도 우먼파워(Woman Power) 시대’ 이혼 풍속도가 달라지고 있다.10여년 전만 해도 부인이 남편을 상대로 낸이혼소송은 전체의 30∼40%에 불과했으나 최근에는 60∼70%로 크게 늘었다. 이같은 현상은 이혼소송에 재산분할(민법 839조)과 면접교섭권(민법 387조·이혼 뒤 양육권을 뺏긴 배우자에게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이 도입된 91년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여자가 이혼을 해도 재산분할로 경제력을 가질 수 있고,양육권을 빼앗겨도 아이들을 만날 수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최근 법원은 부인의 재산분할 몫을 ▲가사·육아등 살림에 전념했을 때는 30% ▲맞벌이일 때는 50% 정도 인정해주고 있다. 반면 부인의 사소한 잘못을 트집잡아 남편이 낸 ‘뻔뻔한’ 이혼소송은 더이상 법원에서 인정되지 않는다.지난해 C씨는 “자식과 시댁에 소홀하고 낭비를 일삼아 더이상 살 수 없다”며 부인 D씨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다.그러나 서울가정법원은 지난 14일 “D씨가 다소 돈을 낭비한 점은 있지만 가정파탄의 주된 책임은 생활비도 주지 않고 구타를 일삼은 C씨에게 있다”며 “D씨에게 위자료 등 3,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재산분할과 면접교섭권 제도는 이혼소송에있어 여권(女權)신장의 획기적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상록기자 myzodan@
  • [21세기는 여성시대] 1. 정치지도자(상) 여왕‘대통령

    ‘여성성(性)의 회복’이 21세기의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전쟁과 폭력과 살상으로 점철돼온 20세기의 인간성을 지배해온 것이 ‘남성성(性)’이었다는데서 오는 자성의 소리가 높기 때문이다.“20세기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여성해방의 시작과 남성우위의 붕괴”라고 에리히 프롬도 일찌기 설파했듯이 21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새로운 성(性)패러다임의 변화임을 예측하기어렵지 않다.대한매일은 이 새로운 성패러다임의 예측을 위해 20세기 각분야에서의 전현직 세계여성지도자들의 소개와 여성운동의 현주소 등을 시리즈로기획,‘여성성’의 실체를 다양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이해심,인내심,공평성 등 대부분 모성애의 특성으로 표현되는 여성성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분야로는 정치분야가 꼽힌다.20세기 인류사회에 저질러져온 전쟁과 폭력과 살상의 대부분이 바로 정치적 결단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상 200여개의 국가 가운데 여왕이나 여대통령을 국가수반으로 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7개국,2차세계대전 이후로부터 따지면 모두 44명에 달한다.한편 여성총리는 모두 22명이고 그 가운데 현직은 3명이다. 이같은 수치는 2차대전 이후 세계 정치지도자의 총 수가 1,200여명 이라는통계와 비교해볼때 0.5%의 지극히 미미한 비율이다. 수반이 아니더라도 국회의원 등 일반 정치인의 비율에 있어서도 여성 비율은 현저하게 떨어진다.1998년을 기준으로 여성의원 비율이 가장 많은 국가는 스웨덴으로 40.4%,다음은 노르웨이 39.4%로 대부분 북유럽 국가들이 높은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12.6%,필리핀 11.5% 등 아시아국가들은 현저하게 낮고 민주주의의 선도국인 미국도 12.6%에 불과하다.한국의경우는 더욱 떨어져 3% 정도 수준이다.따라서 유엔개발계획(UNDP)이 계량화한 여성세계화지수 순위가 한국은 정치·경제발전에 훨씬 못미치는 73위에머무르고 있다. 현직 여성 국가수반 가운데 그 상징성이나 영향력이 가장 큰 인물은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73).52년 2월 부친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윈저가의 네번째 왕으로 즉위한 그녀는 15개 영연방국의 상징적 국가원수이며 세계 최장수 여성 국가원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59)는 72년 즉위 이래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부친 프레데릭 9세의 뒤를 이은 그녀는 옥스포드 고고학박사이자 화가로 다재다능함을 뽐내고 있다. 네델란드 여왕 베아트릭스(61)는 80년 4월 어머니 줄리아나 여왕에 뒤이어등극했으며 1890년에 등극한 외할머니 빌헬미나 여왕 등 3대 여왕으로 유명하다. 현직 여성대통령으로는 스리랑카의 찬드리카 쿠마라퉁가(54),아일랜드의 매리 매컬리스(48),라트비아의 바이라프라이베르카(62),파나마의 미레야 아리아스(53) 등이 있다. 쿠마라퉁가는 어머니 반다라나이케가 현직 총리로 있어 모녀정치인으로 유명하며 88년 야당당수 이던 남편 암살 이후 정계에 투신했다.매컬리스는 매리 로빈슨전대통령의 후임으로 최초로 여성끼리의 지도자교체 사례를 남겼다. 프라이베르카는 의학·심리학 박사학위와 5개 외국어를 구사하는 석학인 동구 최초의 여성대통령.지난 9월1일 취임한 아리아스 대통령은 사망한 전대통령 아르눌포 아리아스의 미망인으로 올 연말 미국으로부터 파나마 운하를 이양받는 대역사를 앞두고 있다. 라윤도 국제팀장 ranuma@ * 여성해방 운동사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권리찾기에 나선 것은 20세기가 다되어서였다. 그 이전까지 여성의 지위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남성에 예속된 신분이거나 아니면 소외된 계층,그 자체였다.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한 페미니스트 운동의 결정적 동기부여는 여성들의 참정권과 함께 재산권 획득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실제 서양 여성운동사에서 페미니즘의 기원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을 경험한 중산층 여성들이 자유주의적 신념을 자신들의 권리신장과 연결시키기시작한 1840년대를 기점으로 한다. 재산권의 평등한 향유라는 목적으로 시작된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스트 운동은 이후 공창(公娼)제도 폐지,반음주,반폭력 등 가정내 여성을 위협하는남성적 악의 척결이라는 사회정화 페미니즘 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미국에서 1839∼98년 사이 금주령을 투표로 통과시키기 위해 여성들이 참정권 획득의 캠페인을 광범위하게 벌였던 사실은 대표적인 예이다. 참정권 문제가 지상최대의 과제였던 19세기 후반의 여성운동은 영국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단식투쟁을 벌이고 창문을 부수는 등의 폭력성을 띨 정도로 과격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영국은 20세기초인 19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미국 역시 1920년에야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서구 각국에서는 여성의 투표권 획득을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법적평등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이를 정점으로 페미니즘 운동도 서서히 침체국면에 들어가면서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대공황기때인 1930년대는 여성들이 남성들의 일을 훔쳤다는 원망까지들으며 미국 등지에서는 반(反)페미니즘 분위기가 팽배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진보적 여성해방운동’ 또는 ‘전투적 페미니즘’ 이름으로 새로운 여성운동이 일기 시작했다.특히 래디칼 페미니즘을 주도한 미국의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강간,아내구타,어린이 성폭력,낙태 합법화,동성애 등을 여성해방운동의 주제로해 또다른 차원의 여성권리를 앞세웠다. 20세기말,확대된 여성해방운동의 이념은 이제 정치·경제 영역뿐 아니라 사회 각 영역의 대안적 사유방식으로 자리잡으며 서구뿐 아니라 제3세계까지도확대되고 있다. 이경옥기자 ok@ * 세계 여성해방운동 주요연표 ▲1848 세계 최초의 여성권리대회 미국 세네카 폴즈 개최.▲1903 영,여성 사회정치연합(WSPU) 창설.▲1918 영,여성 참정권 획득.▲1923 미,전국 여성당헌법 수정안(남녀 평등권) 의회 제출.▲1936 미,산아제한 합법화.▲1949 프,시몬 드 보봐르 ‘제2의 성’ 출판.▲1950 미국의 여성취업률 30%.▲1960 미,식품의약국(FDA)산아제한용 피임약(필) 인가.▲1963 미,여성운동의 어머니베티 프리던 ‘여성의 신비’출판.▲1964 미,시민권리법안 제정-EEOC(고용평등기회위원회)설립.▲1966 미,최대의 여성조직인 ‘NOW’ 베티 프리던에 의해 조직.▲1968 미,‘뉴욕급진여성’단체 미스 아메리카대회 반대 데모.▲1973 미,대법원 임신중절권 합법화.▲1988 바버라 해리스 신부,최초의 성공회여성주교로 서품.▲1995 제4차 베이징 세계여성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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