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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깔깔깔]

    ●좋은 말이지만 해서는 안되는 말들 1. 당신은 살아 있는 부처님입니다.-목사님에게 2. 할머니, 백살까지 사셔야 해요.-올해 연세가 아흔아홉이신 할머니께 3. 당신은 정직한 분이군요.-직구밖에 못 던져 좌절하고 있는 투수에게 4. 참석해 주셔서 자리가 빛났습니다.-대머리에게 5. 남편께서 무병장수하시기를 빕니다.-매일 구타당하는 아내에게●시대별 아빠 “나 어떻게 태어났어요?” 아이:아빠 난 어떻게 태어났어요? ▲60년대 아빠:쓸데없는 건 묻지 마라. 조그만 게 별걸 다. ▲70년대 아빠:다리 밑에서 주워 왔지 뭐. ▲80년대 아빠:큰 새가 엄마 배꼽 위로 물어와서 놓고 갔지. ▲90년대 아빠:산부인과에서 안고 왔지. 그럼 2000년대는? ▲2000년대 아빠:우리 아기 인터넷으로 다운 받았지.
  • 야구방망이 진압 논란

    경찰이 성인오락실에 감금된 사람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져 경찰관 2명과 피의자 4명이 다쳤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자기들이 운영하는 오락실에 권모(37·회사원)씨 등 4명을 가두고 폭행해 1100만원을 뜯어낸 프로레슬러 출신 업주 김모(48)씨 등 4명에 대해 7일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씨 등은 검거되는 과정에서 폭력을 휘둘러 영등포경찰서 소속 민모(37) 경장 등 경찰관 2명을 다치게 한 혐의도 받고 있다. 하지만 오락실 폐쇄회로(CC) TV 화면에는 민 경장 등이 6일 오전 7시10분쯤 이들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규정에 어긋난 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과잉대응 논란이 일고 있다.CC TV 화면에는 경찰이 신분증을 제시하며 야구방망이와 당구채 등으로 김씨 등을 때렸으며 수갑을 채우고 나서도 구타를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경찰은 “피의자들이 워낙 거세게 저항하며 주먹을 휘두르다 보니 침착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내부 감찰을 통해 진상을 파악할 방침”이라고 밝혔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프로배구] ‘꼴찌의 반란’은 계속된다

    프로배구 대한항공은 그동안 시쳇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프로에 접어든 뒤 세 차례 신인드래프트에서 알토란 같은 새내기들을 쏙쏙 뽑아갔지만 성적은 만년 4위. 아마추어 초청팀 상무와 한국전력을 제외하면 ’만년꼴찌’. 그런 대한항공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다.‘상전벽해’란 옛말이 대한항공을 염두에 둔 말은 아니었을까. 3일 인천 도원체육관. 사흘 전 “일 한번 내겠다.”고 내뱉다시피 말한 뒤 디펜딩 챔피언 현대캐피탈을 격침시킨 문용관(48) 감독의 대한항공이 이번에는 겨울리그 9연패의 주인공인 ‘호화군단’ 삼성화재마저 거꾸러뜨렸다. 그것도 2세트를 빼앗긴 뒤 내리 3세트를 따낸 대역전극. 대한항공이 삼성을 이긴 건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실업 시절인 지난 2000년 1월9일 부산에서 벌어진 슈퍼리그 경기에서 3-2 승리를 거둔 뒤 무려 7년 만이다. 프로 원년 4전 전패와 지난 시즌 7연패 등 프로 11연패를 합쳐 27경기 만에 거둔 꿀맛 같은 승리다. 올시즌 첫 라운드에서 나란히 삼성과 4승1패를 기록, 프로 3년 만에 처음 2위로 치고 올라간 대한항공의 이날 승리는 ‘삼바 용병’ 보비(37점)의 힘만으로 일궈낸 건 아니었다. 사실 대한항공은 이제까지 모래알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시즌 도중 성적 부진으로 사령탑을 교체하는 등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다른 구단의 ‘구타 파문’에 덤터기로 휘말리기도 했다. 올해엔 노장 세터 김경훈까지 은퇴, 팀은 그야말로 기장에다 항법사까지 없는 ‘고물비행기’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선수들의 자포자기 플레이가 팬들에겐 더 밉보였다. 1년간 선수들의 생각을 뜯어고친 건 문용관 감독.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풍미한 뒤 인하대 감독을 거쳐 지난해 3월 차주현 전 감독의 후임으로 기장 자리를 꿰찬 문 감독은 선수들을 어르고 때론 협박까지 해가며 팀을 굳은 돌덩이로 만들었다.“초청팀 상무의 별명이 ‘불사조’지만 이제 우리가 그 별명을 꿰찼다.”고 한 문 감독의 소감은 의미심장하다. 두 차례 듀스 끝에 세트스코어 2-2를 만들어 맞은 마지막 5세트. 대한항공은 피를 말리는 접전을 펼치다 12-13까지 끌려갔지만, 리베로 최부식의 천금 같은 디그(스파이크 건져내기)에 이은 보비의 후위공격으로 13-13 동점으로 따라붙었고 신영수(17점)가 스파이크와 블로킹으로 내리 2점을 뽑아 거짓말 같은 역전 드라마를 끝냈다. 한편 현대캐피탈은 이날 상무를 3-0으로 셧아웃시켰다. 여자부에선 KT&G가 센터 김세영과 브라질 용병 루시아나 아도르노의 활약에 힘입어 초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GS칼텍스를 역시 3-0으로 잠재웠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전문가 “가정폭력 문제로 접근을”

    탤런트 이민영-이찬(본명 곽현식) 커플의 폭행 사건에 대한 진실 공방이 연초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와 시민들은 이 사건을 진실 공방이라는 세간의 흥밋거리가 아닌 ‘전형적인 가정폭력’ 문제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진단했다.●진실공방 2라운드 파경을 둘러싼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양측은 2일에도 진실 공방을 이어갔다. 서울 강동성심병원에 입원 중인 이민영(사진 왼쪽)씨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결혼 전에도 사소한 말다툼 끝에 언제나 주먹이 날아왔다. 지난달 19일 차안에서 머리와 얼굴을 수십차례 때리고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운전한 뒤 발로 차서 차밖으로 내동댕이쳤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 때문에 유산됐나.’라는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상습 폭행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이유에 대해서는 “매번 집으로 찾아와 몇 시간이고 사죄했고, 결혼 뒤에는 사람이 달라지리라 믿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치 3주의 코뼈 접합수술을 받아 코에 보호대를 하고 있었고 양쪽 눈에 붉은 멍자국이 선명했다. 이민영씨의 법적 대리인 김재철 변호사는 “형사고소를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찬(오른쪽)씨도 이날 여의도 수&영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민영씨 측의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이찬씨는 “지난달 19일 다투다 이민영씨와 따귀를 7∼8대 서로 때린 것은 사실이지만 발로 배를 걷어차 아이를 유산시켰다는 건 거짓”이라고 말했다. 이찬씨는 또 이날 배포한 A4용지 6장 분량의 반박자료를 통해 “되레 이민영씨의 어머니가 ‘민영이 때문에 유명해졌으면서 어딜 때리느냐.’며 내 뺨을 2∼3대 때리고 이민영씨의 오빠는 내 머리를 주먹으로 20대 정도 때렸기 때문에 조만간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면서 “이민영씨가 지난달 21일 ‘1시에 수술을 하려고 한다. 어제 자궁을 넓히는 약물을 넣었다.’는 전화를 했다.”고 덧붙였다.●핵심은 진실공방이 아닌 가정폭력 강동성심병원 의료진은 “코뼈 및 비중격 골절과 함께 눈이 붓고 멍도 심했으며 좌측 무릎 찰과상이 있었고, 오른쪽 새끼 손가락도 다쳐 있었다.”고 이민영씨가 병원을 찾은 지난달 30일 당시 상태를 전했다. 이어 “구타라고 단정해 말할 수는 없으나 경험상 둔탁한 물체에 맞은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했다. 의료진은 “유산 여부는 외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으로 처음 왔을 때 산부인과와 관련된 이야기는 안 했다.”면서 “코뼈는 수술 후 3주 정도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비중격 만곡증이 생길 수 있어 재수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음가정폭력상담소 김관수 소장은 “남성 가해자가 ‘상대방이 맞을 짓을 했다.’며 폭력행위에 대해 자기 합리화하고 여성 피해자가 ‘결혼하면 나아지겠지.’라며 인연을 끊지 못하는 전형적인 가정폭력 사례”라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맞을 짓’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남성이 우월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인식을 가진 가해자가 ‘아내가 사회적으로 더 유명하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대중에 알려진 연예인들은 외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사적인 관계에서 풀려고 하기 때문에 심리상담 등을 받지 않으면 이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폭력성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지적했다.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軍 구타 법으로 금지

    구타나 가혹행위, 언어폭력을 군대에서 근절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병 상호간에도 권한이 부여된 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명령이나 지시, 간섭도 금지된다. 집단으로 상급자에게 건의 내지 항의하는 행위도 금지된다. 국방부는 1일 군인의 권리와 의무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군인복무기본법안’을 입법예고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 가혹행위 및 언어폭력 등 사적 제재를 가해서는 안된다. 병 상호간에도 ▲지휘계통상 상관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거나 ▲사수, 조장, 조교 등과 같이 편제상 직책을 수행할 경우 ▲기타 법령이나 내규에 의해 명령과 지시 권한이 부여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병에게 어떠한 명령이나 지시, 간섭을 할 수 없다.국방부는 앞으로 이 규정을 어긴 군인에 대한 상세한 처벌 규정을 시행령에 명기할 계획이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후세인사형 파문] 후세인 출생부터 사형까지

    [후세인사형 파문] 후세인 출생부터 사형까지

    전쟁광인가, 아랍 민중의 영웅인가. 세상을 떠난 세계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30일 사형이 집행된 사담 후세인도 이중적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복잡한 아랍 정세를 차치하더라도,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 학살을 비롯, 그의 손에 묻은 ‘피’의 양은 아랍권 패권을 손에 쥐려 한 냉혈 독재자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저항자’란 뜻을 지닌 사담은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50㎞ 떨어진 티크리트시 외곽의 오우자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됐는데, 양부로부터 구타를 당하며 자랐다는 말이 있다. 그를 길렀다는 외삼촌이 구타를 일삼은 양부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외삼촌은 반(反) 영국 투쟁을 하던 군 장교였다. 18세 때 바그다드로 상경, 학생운동에 참여하다 1956년 바트당에 입당, 핵심분자로 성장한다. 그해 이라크 국왕 파이살 2세 제거를 노린 불발 쿠데타에 참여했고,3년 뒤 왕정붕괴 후 집권한 압델 카림 카셈 대통령 암살모의에도 개입했다가 시리아·이집트로 도피생활을 했다.1963년 바트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그의 정치적 위상은 자리를 잡는 듯했으나,9개월 뒤 정권이 바뀌면서 1966년까지 수감되기도 했다. 1968년 쿠데타로 바트당이 재집권한 뒤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급속히 부상하던 후세인은 마침내 1979년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의 뒤를 이어 이라크 지도자의 자리에 섰다. 십자군 전쟁에서 기독교 연합세력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영웅 살라후딘의 이름을 따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주 이름을 살라후딘주로 개명한 그는 1980년 9월 이란·이라크전을 일으켰다. 이 사이 후세인은 1983년 두자일 마을 주민 148명을 학살했고,1988년엔 쿠르드의 마을에 생화학가스를 살포,5000명을 사망케 했다. 8년 전쟁 이후 후세인은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핵 기술 등 군비증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또 전쟁 부채를 벗기 위해 1990년 8월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유엔 안보리 제재를 받았고,1991년 1월 미군 주도의 걸프전에서 패퇴했다. 그러나 후세인은 폭압정치로 1995년 10월과 2002년 10월 대선에서 100%에 가까운 찬성표를 얻어 권력을 강화했다. 유엔의 경제제재와 미·영의 군사적 압박 속에서도 권력을 유지해온 후세인은 결국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의 ‘예방전쟁’ 명분속에 공격을 받고 몰락했다.2003년 12월 고향 티크리트의 한 농가 토굴에서 생포된 그는 지난 2004년 미군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돼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주도’ 혐의로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의해 기소됐다. 재판관과 그의 변호사 2명이 피살되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법원은 “총살형을 받겠다”고 말했던 후세인에게 교수형을 확정 선고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시론] 군 의문사 진실고백 기대한다/이재승 전남대 법대 인권법 교수

    [시론] 군 의문사 진실고백 기대한다/이재승 전남대 법대 인권법 교수

    의문사는 그 원인이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 의문사가 군대, 정보기구, 전투경찰과 같은 조직 안에서 발생했다면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조직적 은폐와 비호로 인해 죽음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의문사가 과거 어두운 시대에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으므로 진상 규명 활동은 과거 청산 작업에 해당한다. 이미 2001년 진실 규명의 여망을 안고 발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의문사에 대해 조사활동에 착수하였다. 위원회는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사건, 장준하 선생 사건, 삼청교육대 전정배씨 사건에서 상당한 결실을 거뒀다. 위원회는 특히 보안사 녹화사업과 군의문사에도 주목했다. 그러나 허원근 일병 사건에서 보듯이 군의 압력과 반발, 관련자들의 증언 번복, 언론기관의 정치 공세로 인해 위원회의 조사활동은 빈번히 한계에 봉착하였다. 의문사위원회는 성과도 냈지만 많은 사건들의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채 활동을 종결해야 했다. 이에 군의문사 유가족들은 끈질긴 투쟁을 통해 2005년에 군의문사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개별사건의 진정을 받아 사건 조사를 결정하고 결정후 1년 이내에 조사활동을 종결해야 한다. 위원회는 이제 막 시작단계이지만 현재까지 10여 차례 공식회의를 통해 100여건 정도의 사건에 대해 조사결정을 내렸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사망한 김훈 중위 사건도 조사대상에 포함되었다. 김훈 중위사건에 대해 이미 대법원도 초동수사가 매우 부실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위원회는 과거 군당국에 의해 자살로 처리된 두 건의 의문사가 구타사고였다는 진실을 밝혀냈다. 위원회는 의문사의 진실이 규명된 때에는 국방부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요청할 수 있고, 조사결과에 따라 가해자를 고소 고발할 수 있다. 검사가 기소하지 않을 때에는 재정신청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사후 조처는 성공적인 조사활동에 달려 있다. 위원회는 현재 군사망사건과 관련해 제보를 기다리고 있다. 사망자의 옛 동료들은 시민적 용단을 발휘할 때이다. 가해자들도 스스로 진실을 고백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군의문사법은 고백한 자를 위해 ‘황금의 다리’를 가지고 있다. 군의문사위원회는 실상 과거 청산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군내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대체로 부대원 전원이 입을 맞추어 은폐하고 지휘관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고원인을 자살로 둔갑시켰다. 이제 독립적인 전문기구의 신중하고도 철저한 사인조사, 사망자에 대해 적절한 배상이나 보상을 부여하고 국립묘지 안장과 같은 예우도 제공해야 한다. 심지어 사인이 순전히 비관자살이라고 할지라도 군인에 대하여 국가가 포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군의문사도 군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체제를 확립하는 문제이다. 최근 국방부는 다행스럽게 군인권의 강화를 위해 다양한 직책을 신설하여 인권교육프로그램을 운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당국자들에게 선행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군인은 그저 지휘권의 객체가 아니라 시민이자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군의문사나 삼청교육 희생자에 대한 처리방향은 인권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이재승 전남대 법대 인권법 교수
  • 먼 데서 온 치과 손님

    먼 데서 온 치과 손님

    처음 개그맨이 되었을 당시엔 형편이 그리 좋지 못해, 방송국 가는 날이 아니면 틈틈이 치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기도의 모 치과에서 진료를 하던 어느 날,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었는데 외국인 한 사람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들어왔다. 자신을 파키스탄에서 온 근로자라고 소개한 그는 일하다 실수로 넘어져 앞니가 깨졌다며 당장 안 아프게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칼퇴근은 아르바이트의 철칙이지 않은가? 나는 당장 퇴근하고 싶어 하는 직원과 어떻게든 치료를 해줬으면 하는 외국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직원에게 살짝 윙크하고 진료준비를 해달라고 했다. 너무 아프다고 하여 우선 신경치료를 해주고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앞니가 깨진 환자들은 대부분 넘어졌다고 말하지만, 사실 구타나 폭행으로 깨진 경우가 많다. 이 환자도 고용주인 한국 사람한테 맞은 듯했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하소연할 데도 없이 어떻게든 안 아프게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건강보험증도 없었지만 치료비는 보험 진료했을 때와 같은 비용만 받았다. 마지막 진료 때에는 이를 씌워야 하기 때문에 진료비가 비싼데, 돈이 없다고 해서 치아색으로 티 안 나게 때워주었다. 나중에 돈 벌면 예쁘게 씌우라고 하고 치료비 대신 특별한 제안을 했다. ‘좋은 한국 사람이 훨씬 많다’고 열 번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상한 치료비였지만 그는 내 제의에 흔쾌히 응하며 기쁜 얼굴로 돌아갔다. 며칠 뒤 치과를 그만두는 날, 그가 불쑥 찾아왔다. 자신은 김치공장에서 일하는데, 나한테 선물하기 위해 잘 익은 김치를 가져왔다고 했다. 난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까만 피부의 외국인에게 김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내 생애의 큰 이벤트 같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우리를 대신해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지금이라도 연락되면 앞니를 더 예쁘게 씌워주련만.
  • “산 사람은 살아야”… 진실은폐 악순환

    “동료대원들의 양심선언으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이나마라도 풀려 다행스럽다.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해서는 안 된다.” 1996년 강원도 모 교도대에서 자살한 박모(당시 21세) 이교(이등병에 해당)의 아버지는 12일 이 짧은 두 줄의 말로 지난 10년간 한결같이 품어온 한을 달랬다. 이날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박 이교 사건과 함께 1982년 강원도 제1야전군사령부에서 복무 중 사망한 김모(당시 20세) 하사 사건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진실을 드러낸 것은 부대 관계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사망원인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군의문사위는 김 하사의 동료로부터 부대 인사계 간부인 B상사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자.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함구하고 있어라.”고 말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당시 군수사기관이 김 하사의 사망에 대해 심도있는 조사를 벌이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 이교의 자살에 대해서도 “부대 관계자들이 김 하사가 구타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암묵적으로 침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군의문사위는 밝혔다. 결국 처벌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묵인하는 ‘관행’이 처벌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함으로써 갈수록 폭력을 일상화시키는 악순환 구조를 형성하는 셈이다. 군의문사위는 박 이교 사건에 대해 법무부에 순직 처리를 요청하게 된다. 법무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박 이교는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가족에게 보상금과 함께 유족 연금이 지급된다. 하지만 법무부가 군의문사위 결정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법률상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군의문사위 관계자는 “군의문사위의 결정에는 법적 강제력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면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순직처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하사 사건의 경우는 사망 당시 이미 순직처리됐다. 하지만 군의문사위는 국방장관에게 사망원인에 대한 재심의를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두 사건의 경우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돼 가해자의 형사처벌은 불가능하다. 다만 민사적으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위자료를 받을 수는 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日연예계 먹이사슬 폭로 파문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톱 여배우 이시하라 마리코(石原眞理子)가 자국내 연예계 상류층의 성희롱과 성적 괴롭힘을 폭로한 ‘어울리지 않는 비밀’이라는 자서전을 내 파문이 일고 있다. 15년 동안의 미국 생활 끝에 말문을 연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과 관계했던 13명의 남성 연예인 실명을 거론했다. 게다가 연예계의 검은 사슬을 폭로, 당사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고 가디언 인터넷판이 11일 전했다. 이시하라는 이 책에서 과거 연인을 ‘내 인생의 구세주’라고 표현하고 영문 이니셜로 처리했지만 나머지는 성(姓)을 그대로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에는 한국에도 알려진 인기그룹 ‘안전지대’ 리더인 다마키 고지도 포함돼 있다. 이시하라는 또 촉망받던 신인 시절인 21세때 만나 결혼한 다마키가 자신을 종종 구타했다고 털어놨다. 그녀는 “그가 폭력을 휘두르면 나는 남성이 거칠게 취급하는 데 익숙해지는 게 여자의 역할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남편 다마키의 끊임없는 폭력과 악명 높은 일본 타블로이드 언론의 집중 공세를 못이겨 이시하라는 한 때 자살도 기도했다. 현재 이 책은 출판된 직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초판 2만부가 매진됐고 3만부가 추가 인쇄 중이다.연합뉴스
  • ‘단순死 2건→구타사망’ 첫 규명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벙커에서 권총상(傷)을 입고 숨진 채 발견돼 자살이냐, 타살이냐의 논란을 빚었던 김훈 중위의 사망원인에 대한 진상규명 작업이 다시 이뤄진다. 또 올 1월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위원장 이해동)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과거 군 수사당국에서 단순사망으로 처리했던 의문사건 2건이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정정됐다. 군의문사위는 11일 김훈 중위 사건과 관련,“당시 군 수사기록 등을 검토한 결과, 권총의 출처 같은 기초 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살로 단정해 언론에 발표하는 등 의혹제기 이유가 상당해 조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김 중위의 부친 김척(64·예비역 중장)씨는 올해 5월24일 아들의 사인을 밝혀달라며 군의문사위에 진정을 냈다. 유엔군사령부 조사단은 당시 사건 발생 직후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상부에 보고했으며, 한·미 군당국과 육군 검찰부도 1998년 4월29일과 11월27일 각각 권총 자살로 결론을 내렸었다. 군의문사위는 이와 함께 1982년과 1996년 각각 복무 중 사망한 김모(당시 20세)씨와 박모(당시 21세)씨의 사인을 조사한 결과 선임자의 구타로 숨진 사실을 규명했다고 이날 밝혔다. 의문사위에 따르면, 사망 당시 육군 제1야전군사령부 예하 전방부대에서 하사로 근무한 김씨는 선임자의 구타로 숨졌으나 당시 군 헌병대는 김씨가 술을 마시고 자던 중 토하는 과정에서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한 부대원이 24년간 가슴앓이를 해오다가 올해 초 의문사위에 당시 사건 정황을 제보, 진실 규명의 단서가 됐다는 것이다. 또 전환복무자로 강원도의 한 교도소에서 복무한 박씨(당시 계급 이교·이등병에 해당)는 여러 명의 선임자로부터 구타와 심한 욕설 등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소속 기관에서는 박씨가 우울증을 앓았고 소심한 성격으로 자살했다고 유가족에게 통보했으나, 의문사위는 “조사 결과 해당 기관에서 사망원인을 축소 은폐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말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Book Review] 레비가 자살한 까닭을 말한다

    “낙관적인 이야기를 한참 나눈 후, 집으로 가서 가스를 틀어놓거나 마천루에서 뛰어내리는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이 있다.”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의 글에 등장하는 이 기묘한 낙관주의자들은 유대인이다. 극도의 빈곤, 목숨을 건 밀항,‘불법체류자’로서의 오랜 도망생활, 몇차례에 걸친 사업의 실패와 같은 숱한 어려움을 이겨냈다. 겨우 환갑을 지난 나이에 옛 친구들을 술집으로 불러 기분 좋게 한잔 하고 집으로 가던 중 다리에서 목을 맸다. 마음 약한 죽음을 택한 이는 재일조선인 1세였다. 유대인과 재일조선인들은 유랑과 고향 상실의 비애를 공통적으로 겪었다. 저자 서경식씨는 유대인 쁘리모 레비의 묘를 찾아 한겨울 이탈리아로 떠난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펴냄)는 재일조선인 2세가 한 유대인의 삶을 반추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쁘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다.‘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책으로 잔혹한 정치 폭력을 증언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학가였다. 하지만 1987년 아파트 4층 난간을 넘어 아래층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서경식씨는 현재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국내 체류 중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등이 있다. 그는 책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언어인 조선어를 지킨 채 목숨을 잃었지만, 나는 이미 자신의 언어를 잃은 채 지배자의 언어인 일본어를 모어로 삼고 자랐다.”고 적고 있다. 어머니를 1980년, 아버지를 1983년 교토 교외에 묻은 뒤 저자는 세계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죽은 자의 무덤 앞에 섰다. 그들은 20세기의 역사에 내몰리고, 고향이나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야 했으며, 뿌리째 삶을 강탈당했던 이들이었다.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세계대전의 피해자들이었다. 저자의 큰형인 서승씨와 작은형 서준식씨는 서울대에서 사회학과 법학을 공부하다 ‘학원에 침투하여 박정희의 3선 저지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의 스파이’란 명목으로 1971년 검거된다. 이들은 레비가 인간지옥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것에 버금가는 구타와 물고문을 광주교도소에서 당했다. 형들을 감옥에 보낸 저자는 무력하게 레비의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를 읽고 있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잔혹한가, 인간은 어떻게 이 잔혹함을 견디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가슴속으로 외치면서 말이다. 저자는 레비가 자살한 현장에서도 그가 자살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의 죽음은 불안·공포·실의·절망 혹은 권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그리고 ‘증인’으로서 마지막 일을 완수하기 위한 조용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다. 저자의 말대로 냉혈이나 잔혹은 지금도 세계를 덮고 있다.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저지른 폭력이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유대인 쁘리모 레비와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의 대화’인 이 책은 한국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이다. 지난 시대의 폭력을 탈 역사화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레비의 죽음을 통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1만 3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게임기 구입 전쟁

    연말에 새로 출시된 일제 게임기를 사려는 사람들로 지구촌 곳곳이 한바탕 난리를 피우고 있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PS3)’과 닌텐도의 ‘위(Wii)’ 신제품이 잇따라 선보인 매장에는 며칠씩 밤을 새운 고객들이 장사진을 이루면서 총격 등 폭력사태까지 빚어졌다.●품귀현상 노리고 되팔려는 목적도 19일 미국 뉴욕의 완구전문점 ‘토이저러스’ 앞에는 닌텐도의 새 게임기 ‘위’를 사려는 고객 1500여명이 밤을 꼬박 새웠다. 물량이 충분하다는 닌텐도측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을 먼저 손에 넣으려는 열혈팬들은 천막을 치고 영하의 추위를 견뎠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위의 대당 가격은 250달러로 소니의 PS3 500∼600달러, 마이크로소프트의 X박스 400달러에 비해 저렴하다. 이틀 전 북미시장에 내놓은 소니 PS3는 비싼 가격임에도 한정수량 탓에 광풍이 불었다. 첫 출시는 40만대, 연말까지 100만대로 한정돼 가게마다 물량이 몹시 달렸다. 수백m 줄 선 이들은 게임 마니아나 청소년이 대부분이지만 ‘이베이’에서 되팔려는 장사꾼도 많았다. 품귀현상이 빚어지면서 경매 사이트에서 벌써 가격이 너덧배 치솟았다. 새치기 다툼에 구타 사건이 비일비재한 가운데 게임기를 노린 강도 사건도 곳곳에서 터졌다. 미국 오하이오, 캘리포니아주에선 게임기 상점이 무장강도에 털렸고 인디애나, 펜실베이니아, 메사추세츠주에선 게임기를 구입한 사람들이 잇따라 강도를 당했다. 코네티컷주의 한 월마트 앞에서 기다리던 고객 한 명은 총격을 입고 쓰러져 중태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앞서 지난 11일 일본에서 출시될 때도 이같은 현상은 예견됐다. 중국인 상인들까지 가세한 열풍은 노숙자들을 동원, 매점매석하는 사태로 번졌다.10만대가 몇 시간 만에 매진됐다.●열풍 반작용… 보란 듯 게임기 부수기도 캐나다의 10대 2명은 이같은 열풍을 비판하려는 듯 밤샘 구입한 게임기를 망치로 부숴버렸다고 토론토 선이 보도했다. 고교생 빅토 무코토프(17)는 친구와 함께 새 게임기 PS3를 광장에서 부수고는 “쾌감이 짜릿하다.”면서 “군중의 반응을 관찰하려는 사회적 실험”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2대를 구입했는데 나머지 1대를 비싸게 되팔면 ‘시위’ 비용을 보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 세계 300억달러 규모의 콘솔 게임기 시장을 놓고 벌인 빅3의 각축전으로 성탄절 시즌이 갖가지 소동으로 얼룩지고 있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삼청교육대 死因조작 의혹도

    “몸에 새를 그려 놓은 문신이 있으면 새를 잡는다고, 호랑이 문신이 있으면 호랑이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몽둥이로 집중적인 구타를 당했다.” “한겨울 새벽에 연병장에 알몸 상태로 집합시켜 물 묻힌 빗자루로 물을 뿌린 뒤 움찔거릴 때마다 몽둥이 구타가 이어졌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동료를 서로 세워놓고 나쁜 사람으로 평가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 목사)가 10일 밝힌 삼청교육대사건 조사결과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인권유린과 가혹행위가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태도불량자로 찍힌 입소자들은 낮뿐만 아니라 새벽 취침시간에도 1시간30분마다 강제로 일어나 가혹행위를 당해야 했다. 특히 여성들은 돌이 많은 연병장에서 머리를 땅에 박는 ‘원산폭격’을 하다가 정수리가 터진 경우가 많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계엄사령부는 ‘입소 직후 3∼5일간 공복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반발과 저항력을 감소시키라.’는 교육계획을 하달했으며, 식당에는 ‘돼지보다 못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소보다 못하면 소고기를 먹지 말자.’는 구호를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6만 755명 중 전과가 없는 경우가 35.9%에 달했다.”며 “불량배 소탕이라는 명분과 달리 다수의 억울한 피해자가 포함됐다.”고 밝혔다.또 입소자 중에는 중학생 17명을 포함해 학생이 980명이나 끼어 있었고, 여성들도 319명이나 끌려갔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의 재가를 받아 집행된 삼청교육 기간 중 사망자는 총 54명으로 집계됐다. 조사결과 자살로 발표된 김정호씨의 경우 1980년 8월7일 폭행치사로 최초 보고됐으나 5일 뒤 보고서에는 자살로 변경되는 등 36명의 사인에 상당한 의혹이 있다고 과거사위는 말했다. 그러나 삼청교육 기간(1980년 8월4일∼1981년12월5일)에 숨진 54명 외에 추가 사망자는 없으며 실종자 대부분은 퇴소 후 가출 또는 사망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삼청교육 피해자 단체가 주장하고 있는 한탄강변의 시체처리소각장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 중 훈방·재판 조치된 경우를 제외한 3만 9742명 가운데 현재까지 4644명(11.6%)만이 보상신청을 했다고 밝혔다.신청이 저조한 이유는 피해자가 보상 실시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삼청교육 전력이 알려지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국내 첫소개 SF화제작 多본다

    경기도 안산에서도 올해부터 영화잔치가 열린다.SF·디지털 영화제를 표방하며 16일부터 18일까지 CGV안산에서 열리는 안산국제넥스트영화제(ANeFF·집행위원장 강한섭)이다. 개막작은 프랑스 누벨바그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 억압적 권위에 대항하는 개인의 모습을 SF의 상상력과 트뤼포 특유의 철학적 사유로 그렸다.‘닥터 지바고’의 줄리 크리스티가 주연한다.SF 마니아들에겐 고전으로 통하지만 국내에선 처음 상영돼 화제다. 이 영화제는 올해 ▲SF클래식 ▲충무로 뉴 웨이브 ▲아이 디렉터(I.DIRECTOR) ▲넥스트 필름 어워즈 등 4개 섹션과 특별상영, 부대행사 등으로 짜여졌다.‘기막히게 줄어든 사내(The Incredible Shrinking Man)’와 ‘금단의 혹성(The Forbidden Planet)’ 등 국내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SF화제작들이 나온다.‘가족의 탄생’‘구타유발자들’‘다세포 소녀’‘피터팬의 공식’‘천하장사 마돈나’ 등이 충무로 뉴웨이브 섹션에서 소개된다. 가장 참신한 섹션은 ‘아이 디렉터’. 영화감독이 아닌 문화계 인사들이 자신의 디지털 영상작품을 선보이는 부문으로, 올해는 만화가 이우일씨의 작품이 선보인다. 자신이 직접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아 10여분 분량의 영상물로 다듬었다. 비경쟁 영화제인 ANeFF는 올해는 쇼케이스 형식으로만 선보이고, 내년 6월 본격적인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www.aneff.org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철권 독재자에서 오욕의 사형수로’

    ‘철권 독재자에서 오욕의 사형수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양 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반대자에 가차없는 권력의 화신, 한때나마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이라는 두 얼굴이 혼재한다.난폭한 스타일은 유년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생후 몇 개월 뒤 부친을 잃고 계부에게 폭언과 구타를 당했다는 대목이 자서전에 나온다. 후세인은 중학생 때 바그다드로 상경, 바트당에 들어가 1958년 쿠데타에 참가한다. 당시 아랍민족주의를 탄압하던 친영(親英) 정권의 압둘 카림 카셈 장군을 암살하려다 실패,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68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이번엔 2인자로 등극한다.32세 때의 일이다. 혁명지휘위원회 부의장으로 사회간접시설을 깔고 문맹퇴치에 앞장서면서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한 이란과는 달리 근대주의자로 비쳤다. 하지만 권력을 잡자 곧바로 이란과 전쟁을 벌이는 등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그를 만난 한 정치인은 “침실 옆에 12켤레의 구두와 스탈린 책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그후 8년간 전쟁에서 50만명을 희생시켰고 쿠르드족엔 화학무기를 퍼부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던 그가 좋아한 영화는 ‘대부’. 쿠웨이트 침공 실패와 걸프전 패배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끈질김도 보였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WMD)를 숨기고 알 카에다를 도왔다는 이유로, 조지 부시 대통령과는 9·11 이후 한 지구촌에서 살 수 없는 ‘운명’이 된다. 2003년 고향 티크리트 인근에서 마을주민의 밀고로 지하벙커에서 생포된 그는 쑥대머리의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이후 재판정에서 보여준 호통은 한편의 소극. 신분을 밝히라는 재판부에 첫 마디가 “나는 이라크 대통령이다. 당신은 이라크인인데 나를 모른단 말이냐. 당신이야말로 누구냐.”였다. 그후 꺼진 마이크를 붙잡고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호소하기도 여러 차례. 이제 시선은 또 다른 ‘악의 축’ 지도자에 쏠린다. 미국의 전략대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등이 ‘뜨끔’할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박정경기자 olive@seoul.co.kr
  • 아는 만큼 웃기는 이야기

    아는 만큼 웃기는 이야기

    다음 음담도 약간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아는 만큼 웃기는 이야기다. 한 선비가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많은 냇물을 말을 타고 건너가려다가, 마침 스님 한 분을 만났다. 선비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대가 글자를 아느냐? 알면 한 수 짓는 것이 어떠하냐?” 스님이 말했다. “소승은 무식하여 시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선비는 먼저 “溪邊紅蛤開 시냇가 홍합이 열렸다.” 라고 읊고는 재촉했다.“넌 빨리 대구를 맞추렷다.”스님이 말했다. “생원님께서 읊으신 것은 고기여서 산에 사는 이 사람은 감히 대구를 맞추지 못하겠으니, 죄송하지만 나물로 대구를 하여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스님이 먼저 옷을 걷더니 개울을 건너가서 읊었다.“馬上松栮動 말위의 송이가 움직인다.”-《어수신화》중 <마상송이> (본문 115쪽)양반이 스님에게 반말을 하면서 멋대로 시를 짓고 응대할 것을 강요한다.사실 조선시대 양반과 스님사이네는 엄격한 위계가 있었고, 양반은 종종 승려를 괴롭혔다.못된 양반들은 승려를 구타하고 절의 기물을 빼앗거나, 기생들과 어울려 절간에서 유흥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맥락 속에서 보자면 이 우스개의 양반 역시 시를 못 짓는다는 승려를 괴롭힐 요량으로, 먼저 시 한구를 지어놓고는 닦달하는 것이리라. 이 우스개는 조선시대 양반과 승려의 관계에 대한 지식 외에도, 한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오래된 웃음의 숲을 노닐다 中에서
  • [생각나눔] 피의자가 “음료수 들라”며 200만원 빈 책상에 뒀다면…

    [생각나눔] 피의자가 “음료수 들라”며 200만원 빈 책상에 뒀다면…

    경찰이 피의자로부터 받은 뇌물을 되돌려 준 형사는 발빠르게 표창하면서 정작 그 뇌물을 준 사람은 처벌하지 않아 물의를 빚고 있다. 자기 식구들에 대해서만 포상 잔치를 하고 불법에 대해서는 너무 관대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건 지난달 26일 새벽 3시쯤. 광고회사 간부 이모(40·서울 성동구 금호동)씨는 강남구 청담동 R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려다 만취한 카페 주인 유모(35·여)씨로부터 구타를 당했다. 다짜고짜 하이힐을 들어 얼굴을 내려치는 바람에 안경이 부러지고 입술이 터졌다. 이씨와 유씨는 강남경찰서 폭력2팀 이모(26) 순경에게 2∼3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고 유씨는 곧 경찰에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문제는 이 때 유씨가 술집 여종업원을 시켜 음료수 상자에다 현금 100만원짜리 돈 다발 2개를 넣어 형사과 책상에 놓고 가게 했던 것. 뒤늦게 현금이 든 상자를 발견한 이 순경은 같은 팀 김모(30) 경장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 경장이 술집에 찾아갔을 땐 문이 이미 잠겨 있었다. 결국 이들은 청문감사실에 신고했고 감사실은 유씨를 불러 현금을 돌려줬다. 경찰은 이틀 뒤 이 순경에게 서울경찰청장 표창을, 김 경장에게 강남서장 표창을 주기로 결정하고 지난 26일 시상식을 가졌다. 하지만 경찰은 뇌물을 공여한 유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피해자 이씨는 “사건 이후 언론을 통해 유씨가 뇌물을 준 사실을 알았지만 유씨가 처벌받지 않고 계속 영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뇌물까지 줘 가며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 유씨를 봐주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순경은 이에 대해 “형사과에서도 뇌물 공여와 관련한 수사는 하지만 사건을 청문감사실에 넘긴 터라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남서 청문감사실 관계자는 “유씨가 ‘고생하는 형사들에게 음료수나 사주라.’는 지시를 잘못 따른 여종업원이 한 일이라고 진술한 데다 직접 형사에게 돈을 건넨 게 아니라 팀 책상에 두고 갔기 때문에 제공 대상도 모호해 뇌물공여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한변호사협회 하창우 공보이사는 “자신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경찰공무원에게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재화를 제공하는 행위는 사건 무마에 실패하거나 돈을 돌려 받았다해도 명백한 뇌물공여 미수 혐의에 해당하기 때문에 경찰이 당장 입건해야 한다. 교통경찰관에게 봐 달라며 1만원짜리 한 장을 건네도 뇌물 공여가 되는데 200만원이라는 증거가 있음에도 입건하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비보이 그것이 알고 싶다

    비보이 그것이 알고 싶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요즘 대중문화판을 점령하다시피 한 ‘비보이(B-Boy·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춤꾼)’가 딱 그렇습니다. 한국 비보이계의 선두주자인 ‘익스프레션’이 결성된 1997년만 해도 일탈 청소년들의 뒷골목 문화쯤으로 철저히 무시당했던 비보이가 지금은 차세대 한류상품으로 치켜세워지며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으니까요.CF계에서 시작된 비보이 바람은 퍼포먼스 공연, 드라마, 영화, 온라인 게임 등 먹성좋은 괴물처럼 인접 장르들을 마구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길거리나 빈 공터를 전전해야 했던 비보이 춤꾼들은 이제 기업의 프로모션 행사에서부터 정부가 주관하는 축제의 게스트까지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은 인기 스타가 됐고요. 그런데 잠깐, 여러분은 비보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고난도의 현란한 기술로 수년째 세계 대회를 휩쓸고 있는 그들, 하지만 여전히 ‘배고픈’그들 세계의 빛과 그늘을 비보이 붐업의 주역 팝핀현준(27·본명 남현준)을 통해 들여다봅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비보이(B-boy)라는 용어는 1960년대 말 미국 뉴욕의 한 DJ로부터 전파됐다. 파티 중간 브레이크타임(음악을 틀다가 비트만 나오는 구간을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것)에 “비보이들 나와.”라고 소리치면 춤꾼들이 나와 브레이크댄스를 춘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여자 춤꾼은 ‘비걸(B-girl)’로 불린다.DJ,MC, 그래피티아트와 더불어 힙합문화의 4대 요소로 꼽히는 비보이는 춤 스타일과 기술에 따라 수백가지의 종류로 나뉜다. 머리를 땅에 대고 도는 헤드스핀, 풍차처럼 팔과 다리를 돌리는 윈드밀, 몸의 관절을 튕기듯 끊어주는 파핑, 허공에서 몸동작을 순간적으로 정지하는 프리즈 등 기본동작만도 수십가지이고, 여기에 춤꾼에 따라 자신만의 스타일을 섞어 새로운 춤을 만들어낸다. ■ ‘비보이 코리아’ 총안무 팝핀현준 그를 만난 곳은 대학로의 한 연습실이었다.‘난타’의 제작사 PMC프로덕션이 세계 시장을 겨냥해 야심차게 준비 중인 퍼포먼스 ‘비보이코리아’의 연습이 한창인 그곳에 그가 있었다. 힙합리듬의 비보이를 국악 장단과 결합시키는 것이 ‘비보이코리아’의 컨셉트. 언뜻 생뚱맞아 보이는 이 조합을 매끄럽게 잇는 것이 팝핀현준, 그의 임무다. 각종 CF와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영화 ‘플라이 대디’등 댄서는 물론 가수, 연기자까지 팔방미인으로 활동 중인 팝핀현준은 이번 공연의 총안무를 맡았다.“평소 발라드와 국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비보이를 응용하는 걸 즐겼다.”는 그는 “국악인 조통달 선생님과 여러차례 공연하면서 국악 장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만큼 안무를 짜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특히 비보이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출연 이후 주가가 한층 치솟고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비보이 춤꾼으로 그가 걸어온 길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어릴 적, 마이클 잭슨의 브레이크댄스를 따라추며 일찌감치 춤에 소질을 보였던 팝핀현준은 고교 1년때 자퇴하고, 백댄서 오디션을 봤다. 무작정 춤이 좋았던 그는 선배 댄서들의 구타를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연습에 매달렸다. 그러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주노에게 발탁돼 ‘영턱스클럽’의 백댄서로 참여했고, 이후 비보이 춤꾼으로 명성을 쌓았다. “지금은 좀 달라졌지만 90년대 초반엔 어땠는지 아세요. 힙합 바지만 입고 있어도 택시가 안 잡혔어요. 레게머리 때문에 파출소에 끌려간 적도 있고요. 대놓고 양아치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지요.” 그런데, 세상이 변하긴 변했나보다. 그는 “요즘은 초등생 아이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오는 부모들도 많다.”며 웃었다. 기업체에 협찬을 요청하러 갔다가 문전박대당한 것이 불과 2∼3년전. 지금은 오히려 기업들이 나서서 협찬을 해주겠다며 줄을 선다. 비보이가 뜨면서 춤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은 점차 늘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 이면의 뼈를 깎는 혹독한 수련 과정에 기겁을 하고 내빼는 이들이 대다수다.“비보이들은 대개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해요. 밥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14시간씩 연습한 적도 있어요. 그러니 10명에 1명도 버티기 힘들지요.” 예전에 비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대중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지만 여전히 비보이의 삶은 고단하다.“10년 전 백댄서의 방송 출연료가 5만원이었는데 지금도 똑같아요. 가수나 다른 연예인들보다 턱없이 낮은 대우지요. 비보이팀이 늘다 보니 출연료를 덤핑하는 경우도 있어서 더 힘듭니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비보이들을 ‘불량 청소년’쯤으로 여기는 세간의 선입견을 바꾸는 일도 쉽지 않다. 그는 “비보이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활용되는 것에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이 있지만 대중성을 발판삼아 비보이 고유의 정신을 살린 공연들이 확산될 것”이라면서 “발레나 현대무용처럼 비보이도 무용의 주류 장르로 당당히 대접받는 날이 곧 오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힙합·국악 결합등 다양한 변화 모색 비보이 공연은 찰흙같다.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자유자재로 변모할 준비가 돼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20분 안팎의 길거리 공연은 비보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1시간이 넘는 극장 공연에서는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비보이가 전통무용, 인형극, 국악, 코미디 등 이웃 장르와 적극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모색하는 이유다. 지난 9월 공연된 ‘더 코드’는 전통무용가 백향주와 비보이 그룹 ‘T.I.P’의 만남으로 많은 화제를 뿌렸고, 이달 중순 막내린 ‘마리오네트’는 줄인형극인 마리오네트에 브레이크댄스를 가미한 새로운 형식의 댄스극으로 관심을 모았다. 현재 제작 중인 비보이 공연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작품은 ‘난타’제작사 PMC프로덕션이 만드는 ‘비보이 코리아’와 ‘점프’제작사 예감의 ‘피크닉’이다.‘비보이 코리아’는 비보이 댄스에 사물놀이와 드라마를 가미한 퍼포먼스로 11월18일 정동 스타식스 전용극장에서 오프런으로 무대에 오른다. 일본 최대 엔터테인먼트사인 아뮤즈사와 탤런트 배용준이 대주주인 키이스트로부터 제작투자를 받은 ‘피크닉’은 코미디와 비보이를 결합해 전 연령대의 공감대를 노리고 있다. 내년 4월 초연 예정이다. 지금까지 무대에 오른 비보이 공연들은 가능성과 동시에 한계를 드러냈다. 현란한 춤 테크닉은 훌륭한 볼거리였지만 엉성한 구성과 아마추어적인 연기력은 온전한 문화상품으로 인정받기에 불충분했다. 한 공연 관계자는 “춤으로만 보여줄 수 있는 20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비보이공연의 숙제”라고 지적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 (14) 호남 첫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멀리 유달산이 바라보이는 전남 목포의 구시가지인 양동 127 언덕배기에 오똑하니 서있는 석조건물 양동교회(담임 목사 정기대·등록문화재 제114호).1910년 신자들이 유달산의 돌을 옮겨다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다. 개항기 선교사들에 의해 기독교 전진기지로 부각된 목포에서도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호남의 중심적인 신앙유산. 지금은 목포 신시가지가 번성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중심도 자연스레 옮겨갔지만 100여년간 원래 자리에서 옛 모습을 잃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해온 양동교회의 신앙적 자부심은 여전하다. 개항기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포에 기독교 신앙의 씨앗을 뿌린 것도 역시 선교사였다.‘양동교회 100년사’ 등 기록에 따르면 1893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 몇몇이 호남지역 선교기지를 낙점하기 위해 군산 무안반도 등지를 오가며 전도활동을 한 것이 이 지역 개신교 전파의 시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당시 들불처럼 번진 동학혁명의 기세에 잠시 활동을 멈췄지만 세상이 안정되면서 전남 나주를 선교기지로 만들기 위해 배유지·하위렴 목사를 파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나주는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세력이 강했던 곳. 당연히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닥쳤고 선교사들이 나주 신앙터 건립을 위해 사들였던 부지를 팔아치우고 옮겨온 곳이 바로 목포다. 당시 목포에는 이미 바깥에서 들어온 신자들이 퍼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활동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97년 지금의 양동교회 자리인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양동교회의 시작이다.1년 만에 신자가 30여명이나 생겨났으며 1906년에는 당회를 구성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었다. 신앙의 씨앗을 뿌린 배유지 선교사는 1905년 광주로 떠나 양동교회의 건립은 보지 못했다. 지금의 양동교회 건물을 세운 것은 1909년 당회장으로 청빙된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신학교 졸업생 윤명식 목사. 조선인 목사가 담임 목사를 맡은 것은 당시 한국 전체에서 네번째, 호남지방에선 처음이었다. 윤 목사는 당시 돈 7000원을 들여 그 이듬해 마침내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106평 규모의 교회를 세워놓았다. 신앙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인 목사와 신자들이 직접 올려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인 것이다. 교회 본당 건물의 주춧돌과 외벽 석재들은 모두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직접 날라다 썼다고 한다. 교회에 들어서면 정면 오른쪽에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986년 처음으로 목포지역 교회가 모두 모인 가운데 드린 부활절 연합예배후 선교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선교기념비다. 함석 지붕을 인 교회 본당은 원래 사방의 크기가 똑같은 정방형으로 세워졌으나 1982년 교회 정문 앞에 있던 종각을 헐고 본당 정면에 종탑을 들이는 바람에 앞쪽 공간이 조금 늘어나 125평의 규모가 되었다. 종탑 머릿돌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경(이사야 56장)구절이 새겨져 있다. 본당 출입문도 원래는 양측에 두 개, 정면에 두 개가 있었는데 종탑을 세우면서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다. 네 개의 문을 만든 것은 남녀 신자들이 각각 다른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 이 출입문의 위쪽 부분이 모두 태극 문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이하다. 등나무 넝쿨이 태극 문양을 가리는 바람에 일제 경찰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신자들은 귀띔한다. 당시 교회를 세운 목사와 신자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신자는 300명 정도. 양동에서 대를 이어 사는 고령층 교인들이 많지만 신앙처를 바꾸지 않은 채 오래도록 적을 두고 있는 인근 지역의 신자도 상당수에 이른다. 신자 수와 교세를 감안할 때 목포 지역 350개 교회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은 20위 정도에 해당한다고 한다. 양동교회 제21대 담임 정기대(44) 목사는 “초기와 달리 양동교회의 역할이 분산됐지만 목포 주민들과 교인들 사이에선 한국인 목사를 담임으로 모신 호남 최초의 자립교회이자 신앙 중심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kimus@seoul.co.kr ■ 목포의 3·1운동… 그 중심에 선 교인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때 목포에서도 20일과 4월 8·9일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4월8일의 이른바 ‘4·8 만세운동’은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며, 이 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양동교회가 있었다. 당시 청년·시민들의 시위 움직임에 호흡을 맞춰 3월1일 이전부터 별도의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해온 기독교인들은 바로 양동교회의 주요 신자들. 장로였던 곽우영을 비롯해 집사 서기견·서화일, 정명여학교(양동교회가 세운 미션스쿨) 한문교사였던 강석봉이 그들이다. 당시 매일신보 등 기사에 따르면 정명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한 기독교인들은 이날 새벽부터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집집마다 돌린 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가지에서 일제히 시위를 시작했다. 시가가 순식간에 사람들로 뒤덮였고 시위에서 체포된 80여명이 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특히 양동교회 집사 서기견은 시위 현장에서 일경의 칼에 맞은 상처와 혹독한 고문 탓에 출감 직후 사망했다. 검거된 시위자 중 40명이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1∼3년의 징역을 언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일 오후 1시15분쯤에 목포 창평정 근처에서 별안간 4명의 야소교학교 여생도가 몰려나오며 손에 한국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것을 경관이 잡아 본서로 인치하였는데….”(4월11일자 매일신보)/“8일밤에 야소교 경영의 여학교 졸업생 약 40명이 운동을 개시하였으나 관헌이 출장하여 제지하고 주모자를 잡았다더라.”(4월12일자)/“목포는 지난 8일 이래로 불온한 형세가 되어 각 상점은 오전 중에 철시하고 그 이튿날 9일에도 오전중 폐점하였는데, 양일간에 관헌의 활동으로 선동자 20여명을 포박하고 일변 군대가 오는 등….”(4월14일자) 특히 20일자 기사는 “금월 8일 이래로 소요사건에 관계된 남궁혁·김영주·곽우영·서화일·배치문…외 32명은 경찰서 취조를 마치고 17일에 검사국으로 넘어왔는데, 당일은 조선인 군중이 약 1000명이나 재판소에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검사국 취조를 마치고 감옥으로 넘어갈 때에는 울음소리가 자자하며 일시 목불인견의 비극을 이루었더라….”라고 기록해 당시 시위사건과 관련한 목포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양동교회에 가해진 일제의 탄압과 그로 인한 교인·가족들의 희생과 고난도 당연히 비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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