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선언] 딸들을 위한 ‘안티’ 걸기
지난 4월27일 수백만의 미국 소녀들은 매우 뜻깊고 신나는 하루를 보냈다.부모나 후원자,친척이나 친구와 함께 어른들의 일터로 나가 생생한 직업세계를체험하면서 자신들의 근사한 미래 모습을 그리며 자신감과 희망을 한껏 키웠던 것이다.
이들에게 이처럼 소중한 기회가 주어진 것은 그 날이 ‘딸들을 직장에 데려가는 날’(Take our daughters to work day)이기 때문이었다.93년부터 매년4월 넷째 목요일에 실시되고 있는 이 행사는 소녀들에게 확고한 직업의식을통해 자신감과 자존심,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미즈재단에 의해 시작됐다.
11세때는 자신감에 차 있던 소녀들이 16세가 되면 혼란에 빠진다는 조사결과에 충격을 받은 재단측은 이같은 현실을 극복할 방법을 찾다가 이 행사를고안해낸 것이다.
현재 이 행사는 미국의 각 가정과 학교들,언론과 기업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거의 국가적 차원으로 확산돼 있다.올해의 경우 미국 기업의 거의절반이 소녀들의 방문을 받은 것으로 추산될 정도다.소녀들에게 특히 권장되는 일터는 과학이나 공학건축분야 등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져온것들로서,올해는 특히 미항공우주국(NASA)과 여성우주인들이 소녀들의 큰관심을 끌었다.이 행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소녀들이여,야망을 가져라!’(Girls,be ambitious!)가 될 것 같다.
야망은 이제 더 이상 남성적인 것이 아니다.소년에게든 소녀에게든 건강한야망은 세상의 지평을 넓혀주고 성에 구애받지 않는 자기계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나는 지금까지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살아왔지만 솔직히 글쓰기가 내가 지닌 능력중 최고의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신이 약하다.다른 능력들을 시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녀였을 때 정치가나 사업가나 법조인이나 과학자는 한 번도 내 가능성의 영역 안에 고려된 적이 없다.주위의 누구도 여자인 내가 그런 직업을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고 그런 긍정적인 역할모델도 없었다.
내가 글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 능력보다는 글쓰는 여자들이 몇안되는 역할모델 중에서 가장 멋지게 여겨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만약 그렇다면 내 인생은 최선의 길을 봉쇄당하고 만 셈이다.
지금의 10대 소녀들은 우리세대보다는 확실히 넓은 선택의 기회를 누리고있다.그러나 아직도 그녀들은 야망을 갖거나 실현하는데 있어 미국 소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한국여성의 한계’에 갇혀 있다.다양한 직업세계와 강력한 역할모델들을 경험하며 용기백배하고 있는 미국 소녀들 얘기를 하면서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지금 보이는 한국 소녀와 미국 소녀의 차이는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그만큼의 두 나라간 국력차이로 나타나지않을까.
2001년부터는 독일에서도 같은 행사가 시작될 예정이다.우리도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어린 딸들에게 성의 족쇄들을 풀어주고 직업세계의 야망을 고취시키는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딸들을…’ 행사의 스폰서가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갭,힐튼,IBM,뉴욕타임스 같은 기업들이라는 사실은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행히 이 땅에서도 올 봄 딸의 손을 잡고 가볼 만한 신나는 행사 하나가열린다.5월 20일에 개최되는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그것이다.‘딸들을…’ 행사의 핵심이 ‘소녀들의 외모보다는 능력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고 보면 두 행사는 소녀들을 외모 제일주의로 몰고 가는 세상에 대한 ‘안티’걸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우리의 딸들을 위한 안티 걸기-이 봄,꽃보다 예쁜 딸들을 보며 우리 어른들이 품어야 할 화두가 아닐까.
김신명숙 이프 편집위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