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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3대장벽 조속한 제거 요구

    北, 3대장벽 조속한 제거 요구

    북한이 제17차 장관급회담에서 우리측에 몇가지 뜻밖의 요구를 하는 바람에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막판 산고를 겪었다. 특히 북측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장벽 등 이른바 ‘3대 장벽’ 제거를 내년에 해결할 문제로 요구,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졌다. 정치 분야와 관련, 권호웅 북측 단장은 14일 기본발언에서 “체제대결의 마지막 장벽들을 허물어 버리기 위한 결정적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며 크게 3∼4개의 요구사항을 내건 것으로 확인됐다. 상대측 지역을 방문하는 자기측 인원에 대한 참관지(방문지) 제한 중단,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단,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사표시에 대한 제동 및 박해 금지, 구시대적 법률 및 제도적 장치의 철폐 등이다. 구시대적 법률은 국가보안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의사표시에 대한 박해를 문제삼은 것 역시 국보법상 찬양·고무죄 적용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방문지 제한 해제 요구 역시 국보법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전 국보법 철폐 주장 등 이념 공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북측이 “쌍방 당국이 자기측 지역에서 상대방 체제와 상징에 대해 비난·공격하는 행위가 일체(일절)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 게 새로운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이는 국내 보수단체의 반북 시위까지 남한 당국이 원천봉쇄해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현실적으로 수용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군사적 장벽은 ‘외세와의 모든 합동군사연습’ 중지 요구로 과거에도 수시로 등장했던 단골 메뉴다. 북측이 경제적 장벽으로 제시한 것은 다자간 재래식무기 및 전략물자 통제체제인 바세나르협정이나 미국의 수출통제규정(EAR)인 것으로 알려졌다.EAR 때문에 개성공단과의 통신개통이 늦어진 것은 대표적 사례다. 북측 입장에서는 관심을 갖고 있는 정보기술(IT) 산업이나 하이테크 군수산업 육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경제 재건에도 제약이 되는 점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으냐.”고 말해, 사실상 미국을 겨냥한 주장이란 관측이 더 유력하다. 북측이 기조연설에서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운 것도 이례적인 움직임으로 꼽을 수 있다. 북측은 “새해부터 북남 경제협력을 정경분리의 원칙에서 핵문제나 외세의 간섭에 구애됨이 없이 우리 민족끼리의 자주적인 협력사업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남측이 정치군사적인 현안을 경협에 연계시켜선 안된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실제 지난 10월 말 11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우리측이 북측의 군사적 보장조치 지연 문제를 들어 대북 경공업 원자재 제공을 미룬 전례가 있다. 결론적으로 북측의 3대 장벽 제거 주장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이날 우리 정부 당국자가 방문지 제한 해제요구와 관련,“올해 우리측 방북자 누계가 이미 8만명이 넘은 데 반해, 북측의 남한 방문자는 1030명에 불과할 정도로 비대칭성이 심각하다.”고 했을 정도다. 서귀포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지상파DMB시대 ‘활짝’] 생활패턴 어떻게 바뀌나

    [지상파DMB시대 ‘활짝’] 생활패턴 어떻게 바뀌나

    지상파DMB가 생활을 바꿀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바꿀까라고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첨단기술임에는 분명하지만 기술변화에 맞춰 생활패턴이 어떻게 바뀔지, 또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바뀔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상파DMB 사업자들은 당연히 ‘기술의 혁신’을 열렬히 선전하고 있다. 이동성이 최대 강점이다 보니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것. 더구나 화질이나 음질은 위성DMB에서 봤듯 고화질 동영상과 CD수준의 음질을 보장한다. ●비디오등 28개채널 제공 기술적인 측면은 이미 검증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 지하철이나 야외에서 챙겨보지 못했던 드라마나 쇼도 챙겨볼 수도 있고, 뉴스는 물론 주가와 날씨 등의 실생활 정보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지상파DMB 사업자들이 제공하는 채널은 비디오 7개, 오디오 13개, 데이터 8개 채널에 이른다. 이 가운데 한 개만 골라 봐야 하는 이용자 입장에서 느끼는 ‘체감’ 채널수는 더 높다고 봐야 한다. 이 때문에 지상파DMB 6개 사업자들은 모든 서비스를 다 잘 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보다 ‘우리만이’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아무래도 지상파DMB는 매스미디어라기보다 개인미디어이기 때문이다. 또 출·퇴근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집중 공략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어떤 채널은 생활경제, 또다른 채널은 영어교육 등 특장 채널을 내세워 어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지상파DMB의 효과는 단순히 방송의 연장이라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여러 부가서비스가 기다리고 있는 것. 비디오·오디오 서비스뿐 아니라 데이터 서비스까지 본격화되면 은행업무 같은 보안성 있는 업무에서부터 음식배달과 같은 사소한 서비스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리산에 가고 싶다면 지상파DMB 단말기 하나로 방송을 통해 지리산 관련 정보를 모은 뒤, 구체적인 여행정보를 제공받고 기차표까지 예약해 결제할 수 있게 된다. ●유익한 콘텐츠 무료 서비스 여기에다 지상파DMB는 먼저 출범한 위성DMB에 비해 이용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더 많다. 지상파방송사와 같은 막강한 콘텐츠 제공자들을 등에 업고 있는데다 이용료가 무료라는 점이 결정적이다. 이 때문에 휴대전화 등 단말기 사업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붐을 조성할 것이 분명하다. 이 때문에 지상파DMB 사업자들은 내년 200만명,2010년까지는 1000만명 이상의 이용자를 확보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동시에 15조원대에 이르는 생산 유발효과와 부가가치 창출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그만 화면의 휴대전화를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들여다볼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차량용 단말기 역시 위성DMB의 전례로 볼 때 그다지 파괴력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사설] ‘한국경제 사공이 많다’

    우리 경제는 민간소비의 완만한 회복과 수출의 지속적인 증가세에 힘입어 최근 서서히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 추세대로 가면 내년에는 4%대 후반의 성장도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잠재성장 동력 확충으로 이어지기에는 투자는 여전히 미흡하고, 소득 불균형의 심화로 지표와 체감경기의 간극은 커지고 있다. 경제주체, 특히 기업은 정국 불안과 차별적 규제, 정책조정 기능 미비에 따른 불확실성 때문에 투자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한국선진화포럼이 경제부총리 중심의 경제운용 등 10대 긴급 제안을 내놓았다. ‘경제운용에 경제부총리가 보이지 않는다.’‘한국 경제에 사공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대통령위원회, 국무총리실, 실세 장관 등 모두가 관여하고 훈수를 두려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책 대안은 남발되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 게다가 사공이 많다 보니 정부의 경제 인식은 국민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재경부 당국자가 포럼 월례토론회에 참석해 부처간 업무조율이 어렵다면서 “경제부총리에게 좀더 힘을 실어줘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이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맞장구쳤겠는가. 선진화포럼이 지적했듯이 내년은 우리 경제운용의 분수령을 이루는 막중한 시기다. 그러나 내년 상반기 지자체 선거를 전후해 정계의 ‘빅뱅’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치권의 소용돌이와 상관없이 정책만은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 틀이 마련돼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10대 제안 중 ‘경제활성화를 위한 정치권 대타협’은 귀기울여 볼 만한 제안이라고 판단된다. 우리는 지난 2001년 ‘여·야·정 협의회’를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주요 현안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 바 있다. 정쟁구도만 극복하면 주요 현안의 70% 이상을 합의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정부가 구상중인 ‘국민 대통합 연석회의’가 됐든 명칭에 구애받지 말고 경제와 민생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대타협은 하루바삐 추진돼야 한다. 정책의 일관성 유지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 [오일만특파원 베이징은 지금] 한·중 FTA, 먼 미래 일 아니다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는 자유무역협정(FTA)이 한·중 양국에도 ‘강 건너 불 구경’이 아닌 것 같다. 22일 베이징에서 주중한국대사관과 한국대외경제연구소(KIEP)가 공동 주최한 ‘미래의 한·중 경제협력 방향’ 세미나에서도 한중 양국의 FTA 구축 방안이 논의됐다. 눈에 띄는 것은 중국 학자들의 적극적인 ‘FTA 구애’였다. 최근 한국이 중국에 ‘시장경제지위’를 부여한 상황에서 FTA 체결이 한·중간 경제협력 구도를 보다 안정적으로 심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장샤오지(張小濟) 국무원발전연구센터(DRC) 대외경제연구부 부장은 양국 FTA 체결시 한국과 중국에 미치는 국내총생산(GDP) 순기능에 대해 시뮬레이션 분석을 내놓았다. 중국의 경우 0.44?의 GDP 성장 효과가 있지만 한국은 10배가 넘는 5.81?의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중간의 경제적 보완성이 전세계 시장에서 경쟁력 제고로 전환된다는 의미였다. 중국 상무부 산하 무역연구원 쉬창원(徐長文) 박사는 양국간 FTA 체결을 둘러싼 한국의 ‘잘못된 우려’를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중국산 농산물 수입 급증에 따른 한국 농민들의 반발에 대해 “지난해 한국의 중국산 농산물 수입은 전체 금액의 7.5?에 불과했다.”며 “한국의 농산물 산업과 중국 시장이 결합될 경우 한국 농민에게 커다란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대외경제연구소 쑹췬(宋群) 부소장은 한국의 기술·인재가 중국의 인력·내수가 결합될 경우 한국은 산업구조 고도화가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한국 학자들도 양국간 FTA 체결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중 FTA 체결을 양국 경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전세계적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지만수 KIEP 중국팀장은 “FTA 추진은 단순한 상품교역 증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양국의 경쟁력 있는 생산요소가 결합, 양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oilman@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자기도 잘 먹던 뽑기장사해서 먹고 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란 것이다.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러워 큰아들을 끌어안고 그때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인 장영신(69) 회장이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남편이 죽고 회사를 떠맡게 된 이야기를 이렇듯 생생하게 되짚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모성, 남편의 유업을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경영참여 이유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잃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3남1녀의 어머니로 살림만 하며 지내던 12년차 주부가 국내 대표 생활용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애경 창립 17년 만의 일이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웠고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부터 출근했다.1954년 6월 남편 고 채몽인씨가 5000만환으로 세운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가 현재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 가족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임원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애경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겠다.”는 말도 했다. 남편이 죽은 뒤 사장 자리를 맡고 있던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장 회장이 취임하자 회사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장 회장은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매일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공부했고, 관청에선 담당공무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는 이유로 동행했던 회사 임원으로부터 책상 밑으로 구둣발에 차이기도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는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몇시간이나 서 있다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지만 기업환경도 나쁜 것뿐이었다. 경영에 참여한 1972년 말부터 오일쇼크에 따른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그러나 장 회장은 더욱 힘을 냈다. ‘불황에 투자하라.’를 모토로 공장을 지방으로 확대 이전하는 한편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아 애경유화·애경화학·애경PNC(전 애경공업)·애경정밀화학·코스파 등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다. 비누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남편이 설립한 비누회사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품을 고도화시키는 데 집중했던 만큼 히트 상품도 꾸준히 내놓았다.1975년에는 분말 합성세제인 ‘크린업’을, 이듬해에는 액체세제 ‘써니’를,1980년 들어서는 세제 ‘스파크’를,90년 들어서는 클렌징 화장품인 ‘포인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트리오도 이름은 같지만 세척력을 높이고 공해도를 낮춰 지금까지도 1등 주방 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줍은 소녀…‘터프우먼 마담 장(張)’으로 장 회장은 어머니 고 문금조씨와 아버지 고 장회근씨의 4남4녀중 막내딸이다.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나 종로구 명륜동 1가 등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 문 여사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장 회장은 혜화동성당 유치원을 나온 뒤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자주 받았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 반장을 도맡기도 했다. 부모님의 학구열이 강한 덕에 형제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고 장윤옥씨는 일본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5국장(부이사관)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간 큰언니 장영옥(8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애경유지 사장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외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애경유지 이사를 지낸 넷째 오빠 장기돈(75)씨는 성균관대 상대 출신이다. 장 회장의 집안은 일제시대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광복 후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6·25가 터지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중이던 그는 돈 안들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교내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애경이 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의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했던 배경에는 유학 생활로 다져진 영어실력과 당시 익혔던 외국 풍습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피란시절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다.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어보면 먼산 바라보기 일쑤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탓에 장사꾼이 아닌 척한 것이다. 그러나 애경을 경영하면서 그에게는 ‘호랑이’‘터프우먼’‘마담장’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돌파구로 외국계와 합작에 집중했을 당시 그쪽에서 공동대표를 요구하면 그는 “여기는 한국 회사다. 너희가 한국에 대해 뭘 아느냐. 한국 문화를 이해할 때까지 너희들은 뒤에서 지켜봐라.”고 충고했다. 합작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달지 말라고 요구받으면 애국가 봉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진행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이런 장 회장을 놓고 ‘마담장 터프우먼’이라고 외쳤다. 사내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 때문이란 설명이다. 물론 풀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너그러우면서도 불같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과는 어릴적 이웃사촌 장 회장과 남편 채몽인씨는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고 채씨는 장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애정 공세를 퍼붓다 미국까지 따라가 무려 3년11개월 동안 구애 공세를 펼쳤다. 공개청혼으로 남편의 존재는 대학내에도 다 알려져 수녀 교수들로부터 “왜 저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졸업후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와 23세이던 1959년 6월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들(3남1녀)의 혼사는 장 회장보다 더 빠르다.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결혼을 모두 끝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연애 결혼이다.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45)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43)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부인은 1학년에 재학중인 생활미술학과 새내기. 채 부회장은 1983년 졸업후 미국 보스턴대에 MBA를 받은 뒤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마케팅부 등을 섭렵했다. 부인 홍씨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씨는 전공을 살려 현재 종로에서 갤러리 ‘사간’을 운영 중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장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 “우리 큰애(큰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정말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한다.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낸 장인 고 홍종수옹은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도 활약한 음악가다. 장 회장의 맞손녀이자 큰아들인 채 부회장의 딸 문선(19)양은 할머니의 성악 실력과 외할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 현재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채동석(41) 애경백화점 사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41)씨와 결혼해 졸업하기 전 1년 동안 학생 부부로 지내기도 했다. 채 사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현재 애경백화점,AK면세점, 수원애경역사, 평택역사 등 애경의 유통부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프랜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병문(75)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예편한 4성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큰딸 채은정(42)씨는 외숙모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안용찬(46) 애경 사장을 소개해줘 결혼한 경우다. 안 사장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씨 외숙모의 권유로 은정씨를 만났다. 은정씨도 대학 3학년때 결혼했다. 은정씨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뒤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애경 마케팅지원부문 상무를 맡고 있다. 채 부회장과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출신인 안 사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채 부회장은 “안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친구 사이여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안 사장을 알고 지냈다.”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유학을 끝낸 뒤 애경으로 꼭 와줄 것을 내가 청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에 입사하기 이전 유학을 마치고 미국 폰즈사에서도 마케팅 담당 업무를 맡았다. 통역 장교 1기 출신인 안 사장의 아버지 안상호(76)씨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 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플로 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막내 아들 채승석(35) 애경개발 부사장은 50만평 18홀 규모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 컨트리클럽을 운영하는 애경개발을 맡고 있다. 애경개발은 1987년 출발 당시부터 애경의 계열사중 유일하게 주력인 세제·화학과 동떨어진 업종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아나운서로도 활동했던 한성주(31)씨와 99년 6월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단국대 사학과 89학번인 채 부사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아 노래를 잘한다. 당초 친정에서 장 회장의 경영참여를 반대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카들도 여럿 애경에 몸담고 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의 큰아들인 장인규(53)씨는 과거 애경PNT(전 경신산업) 사장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갔고, 둘째 아들 장인원(49)씨는 계열사인 코스파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회장의 셋째 오빠인 고 장위돈씨가 낳은 3형제 중 큰아들인 우영(37)씨는 애경 화장품사업부장으로 있다. ●애경백화점에 남다른 애착 장 회장은 회사를 맡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아들 채 부회장이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한 순간 ‘마음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됐다.’고 회고했다. 애경백화점 본점인 서울 구로구점은 창업자인 남편 고 채몽인씨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비누를 만들었던 창업 터전이다.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 비누인 ‘미향’을 만든 곳으로 70년대까지 ‘트리오’ 등 세제를 만들다 공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창고로 써왔다.“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해보라.”고 맡긴 지 3년 만에 1만평 부지가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 회장은 애경백화점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금도 두 아들이 사이좋게 이 백화점 5층에서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장 회장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다녀갈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다. 장 회장은 즐기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채 부회장은 장 회장에 대해 “희생하는 삶만 사신 분”이라면서 “항상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고 남들이 취미를 물으면 ‘빨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직도 집안 일을 혼자 한다. 말년에 잠시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 어긋나는 길은 아니란 평이다.1997년 고사해 오던 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들이 기업하기 불편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1999년 민주당 신당창당 준비위원 공동대표로 영입된 뒤 백화점이 있는 구로를 텃밭삼아 16대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왜 정치를 하느냐. 이미지 버린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여성경제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뜻은 없다. ●가족간 우애는 애경의 힘 장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4년 구로동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 애경복지재단 일에 관여하며 무역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삼아 중국어를 배우고 있고, 순환기계통이 안 좋은 탓에 홍콩에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간 볼썽사나운 재산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애경가문 형제들은 함께 회사를 키워가며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채 부회장과 동생 채동석 사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채 부회장은 “인맥이랄 만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술을 먹거나 함께 어울리는 대상이 모두 형제들이다.”면서 “네 남자가 모여 술을 자주 먹는다.”고 말했다. 며느리들도 친하다. 큰동서와 작은 동서도 단짝 친구 같다.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란 지적이다. 채 부회장은 1985년 입사한 뒤 점차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며 유통업계에 뛰어든 뒤 AK면세점(2001년) 애경 2호점인 수원애경역사(2003년)로 확대했고 3호점 평택역사는 2009년 완공된다. 제주도와 함께 설립한 ㈜제주항공을 통해 2006년 6월부터 민간항공 사업도 벌인다. 채 부회장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동생 채동석 사장은 유통부문을, 처남인 안용찬 사장이 생활용품 부문을 키우고 있다.2세대에 와서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의 양축을 키워가는 한편 유통과 항공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채 부회장은 고혈압이 있어 거의 매주 등산을 즐기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명동성당에서 올린 천주교 신자이지만 산을 자주 찾는 탓에 항상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산사를 찾을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서 “애경의 힘은 형제간의 우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장회장 ‘유별난 시간개념’ 애경가(家)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유별나다. 장영신 회장은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사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면 꼭 10분 전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단 5분이라도 늦는 사람은 첫 대면부터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부하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시간관념을 하나의 척도로 삼는다. 시간 하나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은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대변한다.”(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때는 ‘나인 투 파이브’ 원칙을 지켰다.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늦어도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기상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간 신문을 읽고 그날의 주요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했다.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회의도 결재도 오전에 처리한다.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 9시 이전에는 하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을 놓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래서 애경에는 오전 8시만 되면 결재를 받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오전 9시면 그날 결재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애경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 모두 새벽형 인간이다. 채형석 부회장은 한술 더 떠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출근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구들끼리 밥을 먹기로 하거나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모일 때는 아예 30분 먼저 나갈 정도다. 채 부회장은 “식사 시간을 통해 가족 모임이 주로 이뤄지는데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바로 우리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라면서 “예컨대 6시에 모이기로 해도 식당이 문을 여는 오후 5시 30분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고 전했다. 급한 성격 탓에 식사를 시작하면 1시간내에 모두 끝내고 일어선다. 한 번은 막내인 채승석 부사장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약속한 정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미 식구들이 모두 제사를 지낸 뒤 산에서 내려오고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jhj@seoul.co.kr ■ 장영신 회장과 제주와의 인연 장영신 회장의 ‘제주 사랑’은 남다르다. 그의 제주 인연은 1970년 창업주인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더 각별해졌다. 장 회장은 남편의 조의금 전액을 제주도 재경장학회에 기증했다. 장학회는 이 돈으로 지금까지 매년 30명, 모두 1300여명의 제주 출신 대학생을 후원했다. 제주도는 고 채 사장의 고향이다. 큰아들 채형석 부회장도 최소한 1년에 세차례 이상 제주도에 간다. 선산이 모두 중문 색달동에 있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끔 간다. 채 부회장은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을 가셨을 때 동행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어 친근하다.”면서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증조 할아버지까지만 기록이 있어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회장도 제주에서 지낸 시절이 있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란가 1년간 지냈다. 장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애경은 제주도와 손잡고 내년 6월부터 도민의 숙원인 저가항공 시대 대열에 동참한다. 애경은 제주도와 합작해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을 만들었다.㈜제주항공의 왕복 비용은 기존 항공비용의 70% 수준인 11만원선.㈜제주항공의 애경 지분은 75%다. 채 부회장은 “이윤이 크게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영역이라고 보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장 회장의 제주 사랑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꼬여가는 韓·日관계

    |도쿄 이춘규특파원 김수정기자|한·일 양국관계가 심상치 않다. 새롭게 외교사령탑에 오른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은 노무현 대통령이 12월 방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노 대통령과 APEC기간 중 가진 회담에서 노 대통령에 대해 방일 초청 의사를 언급하지 않았다. 특히 일본측이 지난 18일 이날 정상회담 브리핑에서 야스쿠니신사참배에 대해 “한국에 대한 도전”이라고 노 대통령이 발언한 것처럼 발표, 일본내 여론도 심상치가 않다. 야당인 마에하라 세이지 민주당 대표도 20일 노 대통령의 영토나 역사교과서 같은 문제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shallow)’이라며 노 대통령을 비판했다. APEC을 계기로 해소될까 기대했던 양국관계가 더욱 경색된 형국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거듭된 연내 셔틀 정상회담 희망 표시에도 불구, 확답을 않는 것으로 역사문제와 정상회담을 사실상 연계시켜왔다. 아소 다로 외상은 19일 기자회견에서 당초 다음달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의 일본방문에 대해 “다음달 만나지 않는다고 양국 관계가 단절 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해 이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는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일본이 어떤 것을 양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어떤지….”라고 언급, 양보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아소 외상은 우리 정부가 요구해온 야스쿠니신사를 대체하는 새로운 전몰자 추도시설의 건립 방안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일련의 발언은 한국과의 향후 외교에서 양보나 온건노선 전환이 없을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풀이됐다. 고이즈미 총리도 19일 APEC 수행기자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한국과 중국이 비판하는 데 대해 “하나의 의견이 다르다고 전체의 관계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종전과 같은 억지주장을 되풀이했다. taein@seoul.co.kr
  • 빠블로 네루다/애덤 펜스타인 지음

    빠블로 네루다/애덤 펜스타인 지음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해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미 칠레에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 빠블로 네루다(1904∼1973)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꼬리표보다, 대중과 함께 숨쉰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된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그의 시는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며,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까지 우리에게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대중과 함께 숨쉰 아름다운 시인 네루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된 평전 ‘빠블로 네루다’(애덤 펜스타인 지음, 김현균·최권행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가 나왔다. 이미 1960년대에 100만부 이상 발행된 시집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를 비롯,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이를 원작으로 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일 포스티노’ 등으로 국내에서도 그는 친근하다. 네루다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시인일 뿐만 아니라 민중 앞에서 낭송하고 연설하기 좋아한 활동가였다. 또 굳은 정치적 신념을 갖고 부패한 정권을 비판해 오랜 세월을 지하생활과 망명생활로 보내기도 했다. 저자는 네루다가 시인의 꿈을 키웠던 유년기부터 보헤미안적인 삶에 탐닉했던 학창시절, 외교관으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유럽을 유목했던 시절, 안데스를 넘어 망명길에 올랐다가 3년5개월만에 귀국한 뒤 노벨상을 받고 눈을 감은 마지막 순간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좇는다. 또 네루다가 만난 사르트르·미스트랄·피카소 등 작가·예술가는 물론, 체게바라·마오쩌둥·카스트로·스탈린·히틀러 등 정치적 인물들도 함께 등장, 당대 역사의 지형도를 볼 수 있는 묘미도 제공한다. ●김수영 등 한국작가에게도 큰 영향 네루다는 한국문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작가는 동갑내기 월북작가인 상허 이태준. 상허는 네루다를 “칠레 광산노동자들 속에서 시를 쓰며 세계평화를 위해 싸워온 시인”으로 소개했다. 김수영은 ‘창작과 비평’에 네루다의 시 9편을 번역, 싣기도 했다. 김수영의 대담한 전위주의, 시인의 양심과 타락한 현실의 충돌에서 오는 자의식과 비애는 네루다와 닮았다.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국내에 더욱 활발하게 소개된 네루다는 시인 김남주, 정현종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정현종은 네루다의 시를 번역하면서 “역자 자신이 쓴 것처럼 으스대고 싶기도 하다.”는 말로 네루다의 작품세계를 높이 샀다. ●다채로운 연예편력 문학적으로 일관된 성공과 호평을 거둔 것과는 달리, 네루다의 사생활은 모순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열성적인 스탈린주의자였지만 정치적 신념에 구애받지 않고 스탈린의 적수들과 보수파, 독실한 기독교 신자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관계로 자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또 두 여성에게 동시에 구혼했다가 모두에게 거절당했던 청년기, 아내와 연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그들과 잇달아 결혼했던 장년기, 세 번째 부인의 조카딸과 사랑에 빠졌던 노년기 등 다채로운 연애편력도 소개된다. 말년까지 여성의 틈바구니에서 사랑의 감정을 시에 담아냈던 그는 “내가 쓴 시를 합하면 7000여쪽쯤 될 것이다. 그런데 정치를 주제로 쓴 것은 4쪽도 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사랑을 더 자주 노래한다.”고 했다. 열정적인 지성인 네루다의 삶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는 책.2만 5000원.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儒林(46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儒林(46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자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순경(荀卿:순자)은 조나라(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50세에 이르러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다. 그때 제나라에는 추연(騶衍)이 있어 그 학술은 허하고 크면서도 넓었으며, 추석(騶奭)의 문장은 실용성이 없었으나 훌륭하였으며, 또 순우곤(淳于)은 오래 함께 있으면 명언을 쏟아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칭찬하기를 ‘하늘의 일을 얘기하여 탕탕망망한 추연, 용을 새기는 것과 같이 실용에 맞지 않는 추석, 수레의 심대를 불에 그슬려서 기름이 다 함이 없이 흐르는 것과 같은 지혜가 많은 순우곤’이라 하였다. 이들 전병(田餠)의 무리는 이미 제양왕 때 모두 죽었다. 그 중에 순경이 가장 연장인 늙은 선생이었다. 제나라는 열대부에 결원을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세 번이나 좨주(祭酒:열대부의 최장로)가 되었다. 누군가 순경을 무고한 자가 있었으므로 순경은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은 순경을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앉혔는데, 춘신군이 죽자 면직되고 내쳐져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와 나라를 망치는 문란한 임금이 계속해 나오고, 왕도가 행해지지 않고, 무당, 점쟁이에 미혹되어 길흉화복을 믿고, 되지 못한 선비들이 작은 일에 구애하며, 장자의 무리가 고담방론하며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유가, 묵가의 도덕의 행실과 흥패를 연구하여 수만언을 저술하였다. 죽어서 난릉에 장사되었다.” 순자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을 통해 순자가 대략 기원전323년경에 태어났음이 추정된다. 왜냐하면 사기에 기록된 순우곤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두 번이나 맹자와 설전을 벌였던 당대 최고의 세객이었으므로 순경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고, 그 무렵에는 그들이 이미 다 죽어 순경이 세 번이나 좨주에 뽑혔다.’ 는 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략 순자는 맹자보다 50년 뒤에 태어난 인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순자의 원이름은 황(況)이며, 열다섯 살 때부터 수재라 일컬어졌다 한다. 제나라의 직하학궁에는 사기에 기록된 대로 추연, 전병, 순우곤 등 이름난 천하의 선비들이 몰려들어 학문을 연구하였으므로 맹자도 이곳에 빈객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순자도 50세 때인 제나라 민왕(王) 말년에 그곳으로 가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 순자가 어째서 유가의 법통을 이은 대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유학으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비롯된다. “이사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이사(李斯). 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역. 이 악역의 주인공이 순자의 제자라는 것은 스승인 순자에 대한 모독(冒瀆)이었던 것이다.
  • ‘사랑의 세레나데’ 생쥐도 부른다

    수컷 생쥐가 암컷에게 구애를 할 때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고 영국 가디언이 2일 보도했다. 미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학의 팀 홀리, 종셩 궈 박사 연구팀은 암컷 생쥐의 오줌에 들어있는 성(性) 페로몬(체외 분비성 물질) 냄새를 맡으면 수컷이 노래처럼 들리는 독특한 소리를 낸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들의 연구 내용은 미국 공공과학생물도서관 회지 최신호에 실렸다. 신문은 “지금까지는 새와 고래, 돌고래, 일부 영장류 정도만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생쥐들도 이들 클럽에 끼게 됐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이같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수컷 생쥐가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고음파로 노래를 부르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수컷 생쥐의 뇌가 암컷의 성 페로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다가 우연히 이들의 노래를 발견, 녹음한 뒤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주파대를 4옥타브 낮췄다. 그 결과 이들이 보통 때와 달리 노래처럼 규칙적인 박자를 갖고 뚜렷한 음절을 가진 소리를 내는 것으로 확인됐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사설] ‘도청 공모’ DJ정부 국정원장들

    검찰은 김대중(DJ)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국내담당 2차장을 지낸 김은성씨를 기소하면서 임동원, 신건 국정원장 등과 ‘공모’하여 광범위한 도청을 자행한 것으로 공소장에 적시했다. 또 김씨를 구속할 당시 밝혔던 민주당 소장파 의원들과 진승현 게이트 관련 인물들에 대한 도청 외에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미국방문 관련 대화, 자민련, 민국당, 최규선 게이트 관련 인물 등 7건의 불법 감청사실을 범죄사실에 추가했다. 매일 7∼8건의 감청내용을 보고했다는 도청담당 부서 관계자들의 진술로 미뤄볼 때 고위층의 관심 사안에 대해 무차별적인 도청이 이뤄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DJ정부 시절의 도청 전모는 임·신 전 원장 등 공모 관련자에 대한 추가 조사 등을 통해 드러나겠지만 지금이라도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이 국가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인사의 도리라고 본다. 도청사실을 몰랐다거나 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한다고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김씨처럼 “국익과 통치권 보호 차원에서 했다.”며 잘못된 판단에 대해 용서를 구한 뒤 담당 실무자들의 선처를 호소하는 것이 역사 앞에 책임지는 모습이다. 도청 수사의 최종 지향점은 잘못된 권력 남용의 재발을 막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찰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배제하고 법과 원칙에 입각해 수사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정치권의 일희일비에 구애받지 말라는 얘기다.DJ정부가 출범 직후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독려했듯이 검찰은 항상 정의와 국민의 편에 서서 검찰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래야 검찰이 산다. 도청 공포를 영원히 잠재울 책임은 검찰에 있다.
  • [윤여춘의 풀코스 준비 이렇게] (1) 대회 2주를 앞두고

    [윤여춘의 풀코스 준비 이렇게] (1) 대회 2주를 앞두고

    지난 19일까지 16주 동안 마라톤 도전기를 연재했던 김성수 기자가 새달 13일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합니다. 이에 따라 풀코스 마라톤 도전을 앞둔 ‘달림이’들의 준비를 돕기 위해 마라톤 전문가 윤여춘(49) MBC해설위원의 조언을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전 마라톤 국가대표 상비군 감독을 지냈고 순천대학교 사회체육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윤 위원은 풀코스 도전 2주전,1주전, 당일로 나눠 마무리 훈련법과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 준비법을 조언할 예정입니다. 대회출전을 코 앞에 뒀다면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셈. 그동안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온 사람이 있는 반면, 훈련이 미흡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훈련에 대한 만족 또는 아쉬움에 연연할 필요없이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준비하면 된다. 먼저 LSD(Long=오랫동안,Slow=천천히,Distance=거리를 달리는 것) 트레이닝을 해준다. 대개 대회 3주전에 실시하는 것이 이상적인데 아직 준비가 안된 사람들은 2주전이라도 대체훈련으로 시간주(2시간30분 가량)를 실시한다. 속도나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다가 마지막 20분을 남기고는 80∼90% 강도로 강하게 달려준다. 오랜 시간 달리기 때문에 무릎 관절 등에 무리가 가지 않게 솔(쿠션)이 두꺼운 신발을 신어주고 보폭을 작게, 리듬감을 느끼면서 뛰어줘야 한다. 심장기능을 강화시켜주는 중요한 훈련 가운데 하나인 인터벌 트레이닝도 병행해준다. 일정한 거리와 시간을 정해 놓고 달리고 쉬는 것을 반복해서 하는 훈련으로 주로 트랙이나 도로에서 실시하는데 2주전이라면 2차례 정도 (400m나 800m) 실시하는 것이 좋다. 속도나 횟수는 자신의 레벨이나 당일 컨디션에 따라 적절하게 정한다. 평소에 훈련을 게을리하다가 대회에 임박해서 무리하게 실시하는 트레이닝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으므로 가볍게 운동한다. 적응되지 않은 강한 트레이닝은 부상을 초래할 수가 있고, 에너지를 빼앗길 수 있어서 오히려 컨디션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식이요법도 중요하다. 마라톤 선수들은 대회를 앞두고 글리코겐 증량이라는 식이요법을 많이 실시한다. 이는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글리코겐을 우리 몸 안에 최대한 저장시키는 과학적인 방법이다. 글리코겐을 저장하는 식이요법은 경기 출전 7일전 3일 동안은 근육 속의 글리코겐을 고갈시키기 위해 거의 지방질과 단백질만을 섭취한다. 즉 8끼니 식사를 육식과 생수만을 섭취하고, 나머지 4일은 지방질과 단백질을 제외하고 탄수화물 위주로 섭취한다. 이는 글리코겐을 완전히 고갈시킨 뒤 다시 축적되는 과정에서 더 많은 글리코겐이 축적되는 현상을 이용한 방법이다. 이러한 음식 섭취로 글리코겐을 정상치 보다 2배까지 증가시킬 수 있지만 아마추어 마라토너들은 급하게 따라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 식사 때 평소보다 지방과 단백질 섭취량을 늘리다가 대회 4일을 앞두고 탄수화물 위주로 식사를 바꾸면 레이스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MBC해설위원 marathon0527@yahoo.co.kr
  • 세기의 우정과 경쟁/잭 플램 지음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장, 마티스와 피카소. 피카소는 밤에 그림을 그리고, 마티스는 낮에 그림을 그렸다. 이는 그들의 본질적인 측면을 반영한다. 피카소는 자신 안에 감지한 어둠속에서 한껏 빠져 들면서 심연에 매료됐다.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렸던 마티스는 오히려 자신 안의 어둠을 쫓기 위해 빛을 추구했고, 심연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다. 낮에 작업하는 마티스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직시,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는 일상의 사물들에게서 의미를 짜냈다. 반면 피카소는 거의 전적으로 상상력과 기억에 의존한 채, 종종 사진을 이용해 작업을 했다. 이들은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반목, 견제하고 영감을 주고받으며 마침내 영적인 동지가 된 사이다. 반 고흐와 고갱 못지않게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다. 마티스는 자제심이 강하고 프라이버시를 중시, 예의 바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피카소는 사회 규범과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극적인 기질과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이름 높다. 단정하고 절제된 행동의 마티스는 ‘교수님’으로 불렸고, 피카소는 예술가 집단의 우두머리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어릿광대’로 표현했다. 직접적이고 서사적인 피카소의 작품에 비해 마티스의 그림은 단순한 형상에도 불구, 상대적으로 심원하고 난해하다는 평을 받는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외양, 삶의 방식, 그림의 스타일 등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루었다.‘세기의 우정과 경쟁’(잭 플램 지음, 이영주 옮김, 예경 펴냄)은 이들의 교차하는 삶과 작품을 체계적으로 조망하고 있다.2만 2000원.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MBA 꼭 외국가야 한다는 편견 버리세요

    MBA 꼭 외국가야 한다는 편견 버리세요

    ‘MBA(경영학석사)’ 라고 하면 ‘유학’을 떠올리기 쉽다. 일반적인 학문 탐구의 학위라기보다는 실무능력 개발을 강조하는 학위과정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생소했고, 주로 외국에서 MBA를 받아 오는 것이 당연히 여겨졌었다. 그러나 지난 1996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에 처음으로 미국식 전일제 과정이 도입된 이후 국내에도 알찬 MBA 과정이 속속 개설됐다. 전일·야간·주말·온라인 등 다양한 MBA 과정의 특징과 장단점을 알아봤다. MBA는 직무능력 향상과 경력 개발, 인적 네트워크 확장을 위해 특화된 과정이다. 때문에 1960년대부터 일반대학원 경영학과에서 ‘경영학석사’를 배출하긴 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MBA라고 보기는 어려웠다.1996년 전일제 MBA과정이 도입된 이후,2003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이 처음으로 세계경영대학협회(AACSB) 인증을 받았다. 또 지난 8월 고려대 경영대학원도 같은 인증을 받는 등 세계적 수준에도 손색없는 MBA 과정이 생겨나고 있다. 실력을 갖춰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위기 의식 때문에 MBA 진학을 생각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그러나 MBA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만큼 각자의 커리어 목표에 맞는 학교를 선택해 열심히 공부해야 원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다. ●MBA 다양한 과정 국내 MBA 과정은 전일제, 야간제, 주말반, 온라인으로 나눌 수 있다. 전일제는 보통 직장 경력 2∼5년차 정도를 대상으로 재무, 회계, 마케팅의 실무를 강도높게 가르친다. 영어 강의를 하는 곳도 있고, 프로젝트와 인턴십을 통한 실무 기회도 풍부한 편이다. 때문에 재취업 때 재학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하는 곳이 많다.2년∼2년반동안 40∼60학점을 이수하며 학비는 한학기 300만∼900만원이다. 야간·주말·온라인 과정은 직장생활과 병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교육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받기는 힘들다. 교육 기간과 이수 학점은 전일제와 비슷하지만 학비는 학기당 300만∼600만원으로 조금 낮다. 최근에는 직장 경력 10년차 이상을 대상으로 하는 EMBA(Executive MBA) 과정도 개설됐다. 최고경영자가 될 임원급들에게 경영마인드와 조직 관리 실무를 가르치며, 학비는 학기당 1500만원 내외에 이른다. ●해외 vs 국내 MBA 장단점 국내 MBA의 장점은 무엇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MBA를 받는데 보통 2억원 이상이 드는 데 비해, 국내에서는 5000만∼1억원이면 가능하다. 최근에는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국내 MBA를 전보다 눈여겨 보는 추세다. 해외 MBA 졸업자의 경우 외국인들과 비즈니스 정보를 공유할 정도의 친밀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영어조차 서투른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 국내 MBA 출신들은 교수 및 동문들과 빠른 정보공유가 가능하고 산·학·연 프로젝트 등으로 실무 능력도 풍부하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단 영어와 국제감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점은 단점으로 지적된다. ●학교별로 10∼11월 모집 국내 MBA 과정은 대부분 10월 중순부터 11월까지 모집한다. 가장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은 금융공학, 경영정보MBA 등 특화된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54∼56학점을 이수해야 하며 강의의 절반 정도는 영어로 진행된다. 다양한 경력 개발 프로그램과 인턴십 기회가 있으며 최근 몇년 동안 취업률 100%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개설된 EMBA 과정은 대기업 임원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다. 역시 전일제인 aSSIST(서울과학종합대학원)는 70여명의 전·현직 CEO가 교수진으로 활동하는 국가경영MBA와 미국 조지워싱턴대 교수들이 참가하는 금융공학MBA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국가경영은 50% 정도, 금융공학은 100%를 영어로 강의한다. 성균관대 s-MBA 과정은 재무, 마케팅, 인사 등을 포괄하는 전일제 일반MBA 과정이며, 미국 MIT와 공동으로 설립한 SKK GSB 과정은 MIT와 동일한 학사과정으로 진행된다.KDI 국제정책대학원은 외국인 학생 비율이 25% 정도로, 국제경영 MBA 과정을 전과목 영어로 강의한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전통의 야간 MBA 외에 특화된 과정을 마련하고 있다. 연세대는 국내에서 1학기를 공부하고 미국 워싱턴대에서 1년을 수료하는 글로벌 MBA 과정을 1998년부터 개설하고 있으며, 고려대는 기업 중역급을 대상으로 2003년부터 E-MBA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세종대에는 미국 시라큐스대와 협력한 SS MBA 과정이 있으며, 아주대는 온라인 MBA가 있다. 한국외대는 2006학년도부터 세계경영대학원과 경영정보대학원을 통합해 정보기술과 글로벌마인드를 겸한 MBA 과정을 운영한다. 중앙대와 인하대도 5학기 과정의 야간 MBA 과정을 운영해 직장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졸업생이 말하는 국내MBA 장점 지난해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업은행 리스크관리부 계장으로 근무하는 이택호(31)씨는 MBA를 통해 엔지니어에서 금융전문가로 경력전환에 성공했다.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LG전자에서 일했던 그는 2년 만에 그만두고 MBA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외 MBA를 생각했지만 1억 5000만원에 이르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국내 과정을 택했다. 테크노MBA를 전공하면서 금융MBA 전공 과정을 틈틈이 청강했고, 방학에는 나이스채권평가와 기업은행에서 인턴십을 했다. 리스크관리팀에서 파생상품 관리를 했던 인턴십 경력이 도움이 돼 원하던 금융권에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었다. 이전 직장에서 3000만원 정도를 받았던 연봉은 4000만원대 초반으로 뛰었다. 이씨는 “프로젝트 중심의 수업 자체가 실무 연습이었다.”면서 “투입 대비 산출의 측면에서 국내 KAIST 과정을 택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역시 KAIST에서 올해 초 MBA를 마친 권윤희(29·여)씨는 경영마인드와 전체를 보는 시야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을 최대 성과로 꼽는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LG CNS 공공사업부에서 일했던 권씨는 2년 만에 휴직하고 공부를 시작했다.MBA를 하면서 재무, 마케팅, 생산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었고, 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실무 능력도 익혔다. 과정을 마치고 CJ인재원에서 대리로 일하고 있는 권씨는 “해외 MBA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 없을 정도로 알찬 과정이었다.”고 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시간 부담스런 직장인에 온라인 MBA 인기 경영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지만 시간과 비용 때문에 부담스러운 직장인들이 많다. 이 때문에 비록 학위는 받지 못하지만 4∼7개월 동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저렴한 비용으로 실무 과정만 배울 수 있는 비학위과정 온라인 MBA도 인기를 끌고 있다. 2003년 처음으로 온라인 MBA를 개설한 ‘매경-휴넷 MBA 온라인’은 경영학 이론과 실무 사례를 중심으로 단기간에 MBA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7개월 과정에 180만원이며, 오프라인 특강 20시간이 포함된다. ‘휴넷 MBA 베이직’은 신입 및 대리급 사원의 기본 경영지식을 가르치며 5개월 과정에 100만원. ‘IMI 온라인프로그램’은 경영의 핵심 분야를 온라인·오프라인으로 교육하고, 선진 사례에 대한 연구 및 토론으로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인재 양성을 특징으로 내세운다. 마케팅, 경영전략, 재무회계 등을 4개월 동안 교육하며 비용은 120만원이다. ‘EBS-MS MBA’는 사례 중심의 교육이 특징이다. 바쁜 직장인들에게 살아있는 경영 지식을 배양하는 것을 목표로, 수료생간의 상호 교류를 통한 네트워크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인사조직관리, 전략경영, 회계 등을 5개월간 교육하며 학비는 180만원이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인맥보다 능력” 팀원 모시기 전쟁

    “인맥보다 능력” 팀원 모시기 전쟁

    “자네 나와 함께 일해 볼 생각 없는가.” 보건복지부 사무관 A씨는 전에 같이 근무했던 상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상관이 앞으로 맡을 팀에 지원해 달라는 부탁이었다.A씨는 다른 여러명의 상관으로부터 같은 전화를 받았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A씨는 결단을 내렸다. 그 상관이 맡고 있는 팀이 아니라 자신이 근무해 보고 싶은 저출산고령사회정책본부 산하 팀에 지원키로 한 것이다.‘인맥’보다는 일을 택한 셈이다. ●이메일로 호소하고 직접 설득하고… 17일 복지부가 55개 팀장에 대한 인사를 하면서 팀원 스카우트에도 불이 붙었다. 팀장은 자신의 팀에 지원한 직원 중에서만 팀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매칭시스템’이 처음 도입되면서 생겨난 신풍속도다. 우수한 팀원을 뽑기 위해서는 일단 자신의 팀에 능력있는 팀원들이 지원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정책본부 소속 팀을 맡게 된 팀장 B씨는 공개적인 구애작업에 나섰다. 직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팀에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이 맡고 있는 팀의 구체적인 업무와 향후 전망도 제시했다. 대략적인 팀 운용방침도 피력했다. 팀장 C씨는 직접 직원들을 만나 설득작업에 나섰다. 능력이 있다고 본 직원들을 청사 밖으로 불러내 저녁을 먹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거둔 팀의 성과를 설명했다. 또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조만간 성과를 낼 것 같다면서 은근히 ‘당근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복지부 청사 주변과 인근 식당에서는 팀장이 직원을 스카우트하려는 소모임이 활발해졌다는 것이 복지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사무관은 “5급 이하 직원들이 원하는 팀에 지원하는 이번주 말까지는 팀장의 스카우트전은 계속될 것 같다.”면서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고 능력도 있는 팀장을 선택할지, 팀장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가 정말로 원하는 팀에 지원할지 고민”이라고 심경을 털어놨다. ●팀장보다 업무를 고르는 추세 복지부 인사관계자는 이번 매칭시스템 도입으로 학연과 지연에 따른 인사는 사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 팀장은 인맥에 따라 직원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제는 팀이 성과를 내려면 능력있는 팀원을 받을 수밖에 없다.”면서 “직원들도 팀장 개인보다는 팀의 업무를 보고 지원하는 추세”고 말했다. 강충식기자 chungsik@seoul.co.kr
  • ‘광명 음악밸리축제’ 성공 이끈 음악평론가 박준흠씨

    ‘광명 음악밸리축제’ 성공 이끈 음악평론가 박준흠씨

    지난 주말, 경기도 광명시는 음악에 흠뻑 취했다. 강렬한 록 비트와 감미로운 포크 선율이 하루종일 광명의 하늘에 넘실거렸다. 전국에서 모여든 20만 관객들은 30여년을 아우르는 한국 음악의 성찬 앞에서 내남없이 한데 어울렸다. 척박한 음악환경에서 피어난 한송이 꽃이라고나 할까. 광명을 ‘음악도시’로 색칠한 광명음악밸리축제를 이끈 주인공은 바로 음악평론가 박준흠(39)씨다. 음악팬들에게 ‘전설’로 남아 있는 대중음악전문지 ‘서브’의 편집장이자 웹진 ‘가슴’을 이끌고 있는, 국내에 몇 안되는 음악평론가다. 이번 축제의 예술감독으로 기획과 진행 등을 도맡으면서 대중음악사를 새롭게 썼다. ●20만명 음악축제에 빠지다 광명음악밸리축제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대중음악계로서는 ‘기이’하면서도 ‘축복’ 같은 행사였다.‘음악도시 광명 3일간의 음악축제’라는 부제로 7일부터 사흘동안 ▲싱어송라이터 전문 음반사인 하나뮤직 스페셜과 밸리초이스 ▲인디뮤직 10년사 ▲민중음악 30년사라는 큰 줄기로 치러졌다. 출연진은 우리의 대중음악 역사를 모두 아울렀다. 한국 포크의 역사 한대수·조동진과 민중음악의 뿌리깊은 나무 노래를 찾는 사람들, 기타리스트 이병우, 인디밴드 허클베리핀 등 80개 팀이 함께했다. 전국에서 모인 20만명의 다양한 관객들은 이에 화답하듯 인근 찜질방을 전전하면서 주무대가 있던 광명시민운동장을 매일 가득 메웠다. 이번 축제의 부제는 ‘한국 음악창작자의 역사’다.‘좋은 음악창작자는 좋은 앨범을 만든 사람’이라는 당연한 명제가 통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아프게 반영한다. 박씨는 “존중받아야 할 음악가들이 걸맞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한 자리에 모셨다.”면서 “음악인들도잘 모르는 노동음악가 연영석씨의 노래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을 보고 ‘진정성 있는 기획은 통하는구나.’라는 교훈을 얻었다.”고 떠올렸다. ●지역 문화축제의 모범 이번 축제는 음악 외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부산국제영화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와 더불어 지역 문화축제의 모범이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광명을 음악도시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건 백재현 광명시장의 의지도 큰 몫을 했다. 광명음악밸리축제는 대공연장과 음악 유통·교육·기획시설, 클럽 등을 갖추게 될 광명의 ‘음악밸리’ 사업을 알리는 행사다. 이 목표는 이미 달성됐다. 이번 축제를 통해 광명이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르던 사람들도 광명시의 ‘팬’이 됐다. 더구나 하이서울페스티벌 등의 행사비용보다 적은 5억원밖에 들지 않았다.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 수가 아닌 행사의 질로 승부하는 도시 이미지 마케팅을 경험하지 못한 시의회와 관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 “‘민중음악이나 인디음악을 하루종일 공연하면 누가 오겠냐.’는 비난이 많았다. 지역 예술단체를 앞세워야 한다는 ‘외압’도 있었으며, 예산 문제로 심야 음악영화제를 열지 못한 것도 아쉽다. 그러나 문화기획의 전문성에 대한 주위의 신뢰가 있었기에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음악은 삶을 위로할 수 있어야 박씨의 이력은 음악애호가에서 전문가로 변한 전형이다. 음악을 좋아하던 형과 누나를 둔 덕분에 초등학교 때부터 록의 ‘세례´를 받았다. 광운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것도 음향 엔지니어를 꿈꿨기 때문. 결국 LG정보통신연구소, 케이블TV 등을 거쳐 95년 음악기획자 겸 평론가로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한 고교 시절은 암흑의 80년대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회의식에 민감했던 그에게 음악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박씨는 “독재정권과 억압적인 학교 시스템을 견디는 창구가 음악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삶의 일부다. 때문에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창작행위도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번 축제 때 일반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공공미술 프로그램 등을 포함시킨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일상을 외면한 음악은 장식물에 불과하다. 나 역시 ‘왜 이렇게 생계가 힘들까.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구나.’라는 위기의식을 느낀다. 음악은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척박한 우리나라를 정상적으로 바꾸는 데 일조해야 한다. 훈장처럼 과거의 경력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허클베리핀이나 연영석의 노래를 듣고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화려한 생활만을 노래하는 ‘엔터테이너’들이 점령한 가요판을 비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인디음악을 이번 축제의 중심인 토요일에 배치했다. 작품성과 삶에 대한 진정성을 겸비한 인디음악의 1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다는 신념에서다. 최근 물의를 일으켰던 펑크밴드 럭스를 공중파에 추천한 것도 그다. 앞으로의 목표는 음악 배급, 행정, 정책 등 제작인력을 키우는 것. 한국 음악계는 ‘산업’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낙후돼 있다. 박씨는 “문화정책은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 “음악인프라 구축과 함께 대중음악이 바람직하게 성장할 수 있는 문화시스템 기획자로 계속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광명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66년 서울 출생 ▲85년 광운대 전자공학과 입학 ▲95년 LG정보통신연구소, 케이블채널 GTV 등에서 근무하다 음악평론가로 전업 ▲98년 1월∼99년 3월 대중음악 전문지 서브 편집장 역임 ▲99년 8월 음악전문서 ‘이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교보문고) 출간 ▲99년 10월 대중문화 비평 전문웹진 ‘가슴’ 창간 ▲2000년 3월∼2002년 1월 인터넷방송국 쌈넷 방송국장 역임 ▲2005년 3월 광명음악밸리축제 음악감독 취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 “남북정상회담 조속 개최를”

    “남북정상회담 조속 개최를”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이 13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남북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와 열린우리당과 북한 조선노동당의 교류, 그리고 선거제도 개선을 위한 여야 정당대표회담을 제안했다.‘개혁’과 ‘통합’의 정신으로 낡은 관행과 질서를 바꿔나가야 한다는 취지였다. 문 의장은 “6자회담 타결은 참여정부가 추진해온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신구상을 본격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북측은 시기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2차 남북정상회담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남북간 상호 신뢰와 평화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조선노동당의 당대당 교류·협력과 남북 국회회담도 주장했다. 문 의장은 또 “민족적 과제의 성사를 위해 북한 방문을 추진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문 의장은 연설에서 “산업간·기업간·계층간 양극화가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국회 차원에서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양극화 대책 특별위원회’를 조속한 시일 안에 구성해 대안을 마련할 것을 호소했다. 사회안전망 확대 차원에서 신빈곤층을 위한 긴급 지원책도 마련하겠다고 강조했다.‘위기 상황에 처한 자에 대한 긴급복지지원법’을 제정, 차상위 계층에 속하는 18세 미만 아동과 임산부, 장애인 등 16만여명에게 의료 급여를 확대하고, 현행 3%인 영세민의 전세자금 대출금리를 낮추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정치부문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선거제도를 바꿔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역구도에 기생하는 정치적 기득권 타파가 핵심”이라며 국회 내 선거제도개선 특위 설치와 이를 위한 정당대표회담을 제의했다. 지역주의 극복과 선거제도 개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며 방점을 찍기도 했다. 이밖에 문 의장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고령사회 대책의 핵심인 국민연금 개정안, 국제사회의 약속인 쌀 협상 비준 동의안, 교육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립학교법 개정안,8·31부동산 대책의 후속 입법안 등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며 정치권과 관련 당사자에 이해와 협조를 당부했다. 야당의 반응은 신랄했다. 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은 “정당으로서 가치가 훼손된 조선노동당과 교류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정부 여당의 정체성이 의심되는 제안”이라고 논평했다. 선거제도 개편 주장에는 “민생살리기에 나서야 할 때 여야 의원을 밥그릇 싸움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도 “남북정상회담의 조기 개최 주장은 내년 지방선거에 이를 이용하려는 의도”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박찬구기자 ckpark@seoul.co.kr
  • 儒林(45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7)

    儒林(45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7)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7) 심도자의 말을 들은 양자는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 본래 자맥질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지, 물에 빠져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도 그 결과의 차이는 이처럼 심하다. 그러니 그대가 물었던 유가를 배운 앞의 세 형제 중에 누가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듣고 심도자는 조용히 물러나왔다. 그러자 함께 따라갔던 맹손양은 몹시 궁금해서 심도자에게 물었다.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생님께서 자신의 것도 아닌 하찮은 양 때문에 왜 하루 종일 말도 안하시고 그처럼 근심스러운 표정이 되셨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심도자가 한심한 얼굴로 후배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아직도 선생님의 속마음을 모르겠단 말인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심도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네. 곧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또 학문은 원래 근본은 하나인데, 그 말단(末端)에 와서 이처럼 달라지고만 것이다. 따라서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이라네. 자네는 선생님의 문하에서 자라나 선생님의 도를 익히 접하였으면서도 어째서 아직까지 그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했는가.” 그제서야 맹손양은 양자의 속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고사에서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성어가 태어난 것. ‘다기망양’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양을 놓치고 만다는 의미인 것이다. 원래 학문의 길은 하나인데, 너무 지엽적으로 갈라지고, 분파를 이뤄 그 본래의 진리가 다방면에 걸쳐 나뉘어져 오히려 그 말단적인 것에 구애될 수밖에 없어 학문의 목표인 진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맹자의 사상적 양심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인 것이다. 양자는 백가쟁명의 전국시대를 ‘여러 갈래의 길로 나누어진 다기(多岐)의 난세’로 보았으며, 진리를 ‘잃어버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 역시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고 선언하고 제자를 부를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라고 비유함으로써 양자의 고사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과 ‘자맥질하는 어부’의 비유와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러한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양자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혹은 쾌락주의자라는 후대의 평가는 결코 옳은 것이 아니며, 여러 갈래의 길로 사라진 잃어버린 양, 즉 학문의 진리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던 백가쟁명의 난세 속에 타오르던 또 하나의 횃불이라는 점일 것이다.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대법관 1명 축소 될 듯

    대법원이 오는 10일 퇴임하는 유지담·윤재식·이용우 대법관의 후임 인선작업에 본격 착수하는 한편, 대법원의 구조개혁에도 시동을 걸었다. 대법원은 오는 5일부터 11일까지 후임 대법관 3명의 후보 추천을 받기로 했다. 이번 인선으로 이용훈 대법원장이 이끌 사법부의 운영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대법원 구성 다양화 이 대법원장은 “대법관 구성을 다양화하기 위해 기수와 성별·연령, 출신 직역 등에 구애받지 않겠다.”면서 “보수, 진보 등 대법관의 성향보다 합리적인 판단과 법률지식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선 법원의 반발 탓에 기수 파괴의 폭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법원 내부 인사로는 사법고시 13∼17회 출신이 유력하다. 이흥복 부산고법원장·김황식 법원행정처 차장·이홍훈 수원지법원장·민형기 서울고법 수석부장·김지형 대법원 비서실장 등이 후보에 꼽힌다. 조무제 전 대법관 이후 지역법관 출신이 없고,10월 퇴임 후 남아 있는 대법관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라는 점에서 지역과 출신학교를 안배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외부 인사 중에는 최병모·문흥수·박시환·박원순 변호사 등이 거론된다.●대법원 구조개혁 시동 대법원은 오는 11일까지 후보자 추천을 받은 뒤 17일쯤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를 열고 대통령에게 제청할 후보자들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인사청문회나 임명동의안 처리 기간 등을 감안하면 11월 중순쯤이 돼야 인선이 마무리된다. 대법원은 인선이 끝날 때까지 재판 등 대법원 업무·운영의 차질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대법원의 구조를 바꿀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현재 법원행정처장을 맡고 있는 손지열 대법관이 재판부에 복귀해 빈 자리를 줄이고 재판을 담당하는 소부 구성인원을 4명에서 3명으로 줄이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장을 대법관이 아닌 법원장급이 맡게 할 방침이다. 그렇게 되면 전체 대법관 수가 14명에서 13명으로 줄어들게 돼 인선 부담을 덜게 된다. 이와 같은 법원조직법이 순조롭게 개정되면 11월 중순쯤 충원되는 신임 대법관 3명으로 공석인 대법관 2명과 11월 말에 정년퇴임하는 배기원 대법관의 후임 인선까지 해결된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TG삼보 매각 막판 진통

    두 달 가까이 끌어온 프로농구 명가 TG삼보의 매각작업이 최종 타결을 앞두고 마지막 진통을 겪고 있다. TG삼보컴퓨터의 법정관리인인 박일환(전 삼보컴퓨터 사장)씨와 인수 당사자인 동부화재측은 큰 틀에서는 일찌감치 합의를 봤지만 인수 가격을 놓고 40억원 안팎에서 막판 산고를 치르고 있는 것. 양측은 미묘한 신경전이 한창이다. 최근 TG삼보의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에서 “50억원선에서 사실상 타결됐으며 발표시기를 조율하고 있다.”는 말이 새어나오자 동부그룹 고위관계자는 28일 “50억원 타결설은 값을 높이기 위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양측은 한달째 10억원 정도의 가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05∼06시즌 개막(10월21일)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아 조기타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빠르면 이번 주, 늦어도 다음주까지는 타결될 전망이다. 협상주체인 TG 법정관리인과 동부화재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담당판사의 승인을 거쳐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묻게 된다. 산업은행 기업구조실 관계자는 “프로농구 발전을 위해 새 주인을 찾는 것이 시급한 만큼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대승적 견지에서 동의할 것”이라고 밝혔다.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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