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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군축 이렇게/3국 대표의 시각

    3일간의 회의를 마치고 7일 폐막된 미 스탠퍼드대 주최 한반도군축 학술회의에 대해 3국의 대표들은 『첫 만남이라는데 의의가 있으며 서로의 입장을 타진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데서 성과가 컸었다』(한국 정종욱 서울대 국제문제 연구소장),『결과적으로 이번 회의는 유익했다고 생각하며 남측도 또 미국도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회의를 계속해 서로 이해를 넓혀야 신뢰를 가지고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한 이형철 평화군축 연구소 연구실장),『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앞으로 진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모두가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존 루이스 미 스탠퍼드대 국제전략군축 연구소장)고 말하고 있다. 회의가 끝난후 가진 3국 대표들의 뉴스 브리핑 내용을 간추려 본다. ◎정종욱 한국대표/“「정치관계 정상화」등 접근방법 달라/북한측 「미군 단계철수」등 종래 입장보다 유연”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이 이뤄진후 실제 군축을 실시할 경우 어떤 대상을 우선적으로 감축할 것인지 북한측이 구체적 얘기를 한것이 있는가. ▲구체적 얘기는 없었다. 우리는 공세적 무기의 우선 감축을 얘기했지만 북한은 여기에 대한 언급없이 전체로서의 기본적 틀을 강조했다. ­북한이 제시한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을 그 개념상으로만 보면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는것 같은데 다만 그속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가 들어있고 여기엔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수락할수 없는 것인지. ▲그런 문제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이 5가지 기본틀 안에 정치적관계 정상화를 우선시킨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얘기하면 무조건 분단의 고착화를 들고나와 대화가 엇갈리곤 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주장한 내용과 북한의 5월31일 평화안을 비교하면 공통점도 상당히 있는데. ▲신뢰구축의 중요성이 조금 부각되고 군사력 감축에서도 남북한간에 합의가 된후 3단계에 걸쳐 3∼4년내에 무력을 감축키로 한점,검증얘기,미군철수가 남북한간 무력감축과 상응해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 등이 다소 융통성을 보인 대목이며 이것이 어느정도 의견접근을 보일 수 있었던 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 조치보다 군축에의 철학적 접근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의 기본적 방침은 역시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의이후 다시 이같은 회의가 열린다면 그 전망은. ▲이번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이 앞으로 북한의 정책결정에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회의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남북한간의 정치관계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을 들수 있는가. ▲북한은 점점 고립되고 있는데,지난 2년간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비쳐볼때 이같은 고립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도 서로 쓰는 용어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고 이의 조정을 위해서도 서로 만나 배울 필요가 있고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야 한다. 또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북한도 우리 입장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입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라 할수 있다. ­북한학자들의 태도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는가. ▲공격적이 아니었고 대화를 하려는 자세를 엿볼수 있었다. ◎이형철 북한대표/“남한서 미 핵 철수해야 핵 개발 중단/「통일합의 없는 신뢰구축」 분단 고착화 의도” ­북한은 불가침선언은 남북한간에,평화협정 체결은 미국과 북한간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서 굳이 3자회담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기본입장은 3자회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측이 3자회담을 구실로 대화를 거부하므로 하루빨리 대화를 재개할 생각에서 남북이 먼저 회담을 갖자는 것이며 그러다보면 미국문제가 제기돼 결국은 3자회담이 될 것이다. 두 갈래의 쌍무회담제기는 대화교착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라 할수 있다. ­북한은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에 대해 먼저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주장하는데,그러면 이같은 합의가 어떤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가. 가령 고위 당국자 회담인지 아니면 남북정상회담인지. ▲기본입장은 남북한과 미국의 3자가 만나서 얘기하면 군사 당국자간의 직통전화 개설ㆍ운영 같은 것은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무력감축이나 전면개방 같은 문제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축이라하면 좁은 의미에서의 군비감축과 넓은 의미에서 군비통제와 군비감축을 모두 합친 포괄적 군축의 2가지 의미가 있다. 북한이 얘기하는 군축은 어떤 의미인가. ▲실질적인 군비감축,영어로는 disarmament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느낀 것은 남측은 정치적 신뢰구축을 강조하고 있는데 남북한의 불신은 분열에서 생기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로 나간다는 원칙에 합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군사적으로 서로 대결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통일에 합의하지 않고 신뢰 구축조치만을 논의하자는 것은 결국 분단을 고착화 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6월15일 한국의 재야 각계 인사들은한반도군축과 평화통일 선언에서 북한에 대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고 핵안전 협정에 조인하라고 요구했는데. ▲가령 남조선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받아들여 진다면 우리도 그런 요구를 못받아 들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전제 조건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제 조건이 이뤄지지 않으면 핵안전 협정도 체결되지 않는가. ▲현재로선 그것이 조건이다. ◎존 루이스 미 대표/“다음회의 개최 합의… 성급한 기대 금물/한국ㆍ유럽 현실달라 유럽식 모델 적용 의문” ­이번 회의에서 남북한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했는데,접근한 내용이 있었는가. ▲학자적인 입장에서 같은 이슈를 놓고 이야기 한것은 사실이지만 의견이 서로 달랐으며 합의 된 것도 없었다. 학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뿐이며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모두가 앞으로 진전을 이룰 기회를 가질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같은 회의를 다시 개최하기로 합의를 했다는데. ▲다음에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기회를 열기로 한것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 ­한국 대표단은 한반도에서도 유럽식 군축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로서는 유럽식 모델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겠고 유럽에서는 그쪽 나름대로의 현지사정이 있고 한국은 유럽과는 다르기 때문에 유럽모델이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되려는지는 모르겠다. 예컨대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간에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분명히 남북한간에 전쟁을 겪었었다. ­북한은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회담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번 회의는 비록 학술회의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3자회담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가. ▲이번 회의는 각국의 학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며 이들이 대표의 자격을 띤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번 회의를 놓고 3자회담 운운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남북한간에 2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3자회담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할것도 없다. ­이번 회의의 과정과 결과를 보고 군비통제에 있어 남북한이 장단기적으로 보아 협력과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는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군비통제와 안보등의 어려운 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해결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알바니아 반체제인사 2백명/서방대사관으로 탈출

    ◎개혁거부 당국선 총격 가하며 저지 【본 AP 연합 특약】 알바니아 반체제인사 2백여명이 수도 티라나소재 서방대사관에 피신했다고 외교관들이 3일 밝혔다. 서독외무성 대변인 한스 슈마허는 티라나소재 서독대사관에 83명의 알바니아인이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티라나주재 한 서방외교관은 약 2백여명이 적어도 11개 서방대사관에 피난처를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슈마허대변인은 피신흐름이 지난 주 시작됐으며 지난 달 29일 25명이 폴란드대사관에 대피하면서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동구의 개혁을 거부해 온 알바니아 정부는 서방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알바니아인에게 총격을 가하는등 이들의 피신을 막기 위해 무력을 사용했다. 이 외교관은 『알바니아인의 석방을 위해 알바니아당국과 협상중이나현재는 교착상태』라고 전했다. 피난민들은 대사관의 벽을 넘거나 트럭등으로 벽을 돌파해 대사관 구내로 들어왔다. 슈마허는 피난민들의 동기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알바니아의 현 정치체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또 『아무도 의사에 반해 대사관 밖으로 추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독의 빌트지는 서독대사관이 알바니아 민병대에 의해 포위됐다고 전했다. 알바니아인들이 서방대사관으로 대거 피신한 것은 지난해 동독인들이 서방대사관으로 피신,국경개방으로 진전된 동독혁명의 시작과 흡사하다. 이와함께 이탈리아 정부는 지난 며칠 동안 약 20명의 알바니아 반체제인사들이 티리아에 있는 이탈리아대사관으로 들어와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2일 밝혔다.
  • 헛도는 국회 3일째… 여야의 입장과 전망

    ◎여의도서 안걷히는 「예산전용」 난기류/사실규명보다 “정치공세 목적” 판단/정공법 자제,진상조사로 우회 반격태세 민자/3역회담 등 유리한 고지 선점 작전/지자제법처리 민자속셈 파악하려는 듯 평민 국회 대정부 질문과정에서 돌출한 87년 서울시 예산전용시비로 냉각된 정국이 어떻게 풀려 나갈지 정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여야는 지난 28ㆍ29일에 이어 주말인 30일에도 국회의 공전이 거듭됐으나 별다른 접촉도 갖지 못한채 각자의 입장들만 거듭 확인,냉각기류는 당분간 더 지속될 전망이다. 민자ㆍ평민 양당은 일요일인 1일과 주초에 총무와 당3역 등이 잇따라 접촉하는 등 대화체널을 통해 국회정상화를 모색할 것으로 보이지만 서울시 예산전용시비와 관련,이미 양측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내놓았다가 접점을 찾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극적인 합의점 도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특히 평민당측은 회담초반부터 교착상태에 빠진 민자ㆍ평민 3역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키위해 이 문제를 적극활용하고 있는만큼 민자당측으로부터 지자제법안ㆍ안기부ㆍ국가보안법 등 쟁점법안에 대한 일정선의 양보를 받아내지 않는 한 쉽사리 물러서지 않을 태세를 보이고 있다. 더구나 이번 기회를 통해 향후 당의 입지확대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평가하고 있는 지자제법안에 대해서는 보다 확실한 민자당의 속셈을 확인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국회 공전이 장기화될 우려마저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정부와 민자당은 이번 사태를 유도한 평민당의 「태도」에서 확인했듯 사실규명등 정상적인 의정활동보다는 정치공세 및 위력시위에 그들의 목적이 있었다고 판단,정공법보다는 대국민설득등 우회적으로 반격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즉 여권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조차 주지 않고 무조건 사과ㆍ시인하라며 윽박지르고 파행운영으로 몰고 가는 판깨기식의 돌격에 대해 정면대결을 자제하면서 정부의 철저한 진상조사 및 발표 등을 통해 진위여부를 국민들에게 알려 정치공세의 허구성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노태우대통령이 30일 상오 민자당의 김영삼대표최고위원ㆍ김종필최고위원과 청와대에서 긴급 회동,이번 국회사태와 관련,▲어떤 사안이든 사실을 확인하고 온당한 처리방안이 이뤄져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국회가 파행적으로 운영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도 국회운영을 방해하는 야당에게 더이상 끌려가지 않고 정상적인 국회운영을 해 나가겠다는 의미가 함축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날 회동에서 국회운영방침의 기본방향과 함께 추경예산ㆍ국군조직법ㆍ부동산관계법 등은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거듭 확인함으로써 거대 여당의 책임성을 다시한번 인식시킨 셈이다. 따라서 서울시 예산전용시비가 빌미가 돼 공전되고 있는 국회는 각종 현안처리를 둘러싸고 여야가 어느 수준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정상화 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2일로 예정된 민자ㆍ평민 양당 3역회담에서 회담의제 및 일정 등 기본사안에 대한 접근점을 찾고 서로 상대의 입장을 어느정도 살려주는 선에서 타협을 해 나가기로 인식을 공유할 경우 급랭된 여야 구조는 다소 풀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평민당은 이미 여권이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한 국회보고를 약속한 예산전용시비를 더이상 물고 늘어질 경우 국회파행의 책임을 자신들이 떠맡을 수밖에 없어 최소한의 양보선을 확인할 경우 국회운영정상화에는 동참해야 할 입장이다. 더욱이 정부의 사정활동과정에서 서울 영등포 민자역사의 상가분양등과 관련,평민당 일부 의원들이 특혜분양을 받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는 등의 보도가 나오자 국회에서 평민당이 여권의 도덕성 흠집잡기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경우 반격을 하기 위한 경고라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 상위활동과정에서 이와관련,파상공세를 펼 기회가 더 있는 만큼 국회를 벼랑끝으로 모는 파행운영은 이 정도선에서 그쳐야 한다는 주장이 평민당 내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정부측 답변준비기간중 행정위ㆍ내무위ㆍ법사위 등에서 공세를 이어 나가면서 국정조사권 공동발의등의 주장을 계속 펴 나갈 심산이다. 김대중 평민당총재가 30일 『국회보이콧등 강경투쟁으로 계속 나갈지 일단 국회운영에 참여해 시시비비를 가려나갈지는 2일 총재단회의및 의총에서 결론을 내리겠다』고 밝혀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29일의 입장에서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평민당이 다소 유화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하더라도 순조롭게 국회가 운영돼 나갈 지는 미지수다. 민자당으로서도 지난 여야 총재회담에서 확인됐듯 여권이 현안처리와 관련,더이상 평민당측에 내놓을 「선물」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간의 심각한 견해차,경제사회적인 어려움 등을 감안,내심 연내에 지자제실시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민자당은 최근 평민당이 새로운 돌파구 모색을 위해 지자제조기실시에 체중을 싣는 듯한 모습을 보여 야권이 적극공세로 나갈 것에 대비한 대응논리개발에 부심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자당의 한 당직자는 단지 부동산투기억제 특별법등 민생관련법안을 여야 공동제의 법안으로 처리하고 광주보상법안의 경우 평민당의 주장을 다소 수용하는 선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점치고 있다. 결국 이같은 양자의 입장을 고려할 때 주초 여야의 신경전을 거쳐 외견상 국회는 정상화의 모습을 회복할 것이지만 각 현안마다 격돌의 파고는 여느 국회 때보다 높을 것으로 점쳐진다. 민자당이 이번 국회에서 처리해야 될 법안은 반드시 처리해 13대초반 국회의 짐이 됐던 5공문제정리및 개혁법안완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평민당은 강격저지 등으로 선명성을 부각,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자당은 평민당이 의사진행을 방해하더라도 3일부터 상위활동에 들어가겠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평민당은 그동안 국회공전으로 소화하지 못한 경제2ㆍ사회ㆍ문화분야의 대정부질문일정을 새롭게 조정하자고 주장하고 있어 또한차례 파란이 예상된다. 집권여당으로서 그동안 약속해 온 각종 법안을 처리,책임정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정치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민자당의 고민이라면 국회초반 장을 주도했던 기세를 어떻게 이어나갈 것인지 투쟁의 수위선택문제가 평민당의 숙제라 할 수 있다.
  • 새 실록 6ㆍ25 김학준:하

    ◎“핵투하도 불사”… 미 으름장에 DMZ설정 동의/“휴전 지체할 수 없다”… 투르먼,맥아더 해임/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 방위조약약 가조인/아이크 대통령 당선ㆍ스탈린 사망후 「정전협상」급진전 ▷제4기◁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맥아더는 과감한 보복조치를 마련했다. 그는 50년 12월30일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에 대해 ①중국해안의 봉쇄 ②중국본토의 군수산업시설 폭격 ③장개석 군의 파한 ④장개석 군의 중국본토에 대한 견제공격을 건의했다. 그는 미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전면철수한다면 중국군의 침공위협은 보다더 중요한 지역에 대해 가중될 것이며 그 결과 보다 많은 전력의 투입이 요청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합참은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 보존에 주로 유의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라』고 답변할 뿐이었다. 맥아더는 이 답변을 「명백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국련군의 전면철수를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든지,아니면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보존을 위해 한반도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51년 1월13일 『공산군의 침략행위가 시정될 때까지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침략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세계에 밝혀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최악의 경우 국련군은 제주도와 같은 남한 연안의 섬으로 철수해 전투를 계속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임에 리지웨이대장 맥아더와 본국정부 사이에 이견이 오가는 사이 국련군은 전세를 수습하고 공세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국련군은 51년 3월 초순 이후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3월30일께까지는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국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전황이 국련군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무엇보다 전전원상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이면서 국련에서는 다시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서방진영의 국가들도 국련군의 38도선 재북상에 반대하면서 만일 미군이 단독으로라도 재북상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들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마저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은 중국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휴전을 성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3월20일 맥아더에게 그러한 취지의 성명이 가까운 장래에 발표될 예정임을 통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이 결정을 좌절시키기로 결심하고 3월24일 본국정부와의 아무런 협의없이 중국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는데 중국대륙에의 전면적 확전으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트루먼이 추구하려는 중국과의 협상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이 성명에 뒤이어 맥아더는 4월5일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조세프 마틴의원이 자신에게 보낸 3월2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공개하여 트루먼을 더욱 격분시켰다. 아시아 중시정책을 강조하면서 논평을 요구한 마틴의 서한에 대한 이 답장에서 맥아더는 우선 트루먼의 유럽 중시정책을,그리고 유럽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시아를 경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결론적으로그는 『우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3월24일자 공식성명을 보고 그의 해임을 결심했던 투르먼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4월10일 라디오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한반도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제한전에 의한 제3차대전의 방지』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8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됐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휴전을 향해 움직인다는 명백한 의사의 표시였다. 한편 공산군은 51년 4∼5월 춘계대공세를 폈으나 인명의 큰 손실을 겪었을 뿐이고,이 시점에서 전선은 완전히 교착됐다. 전선이 교착된 51년 5월 중순부터 미국과 국련에서 휴전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5월17일 에드윈 존슨 미국 상원의원이 국련이 휴전을 이끌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이 제의가 소련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된 것을 계기로 휴전논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예컨대 국련에서 리 사무총장과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 외무장관 및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각각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선에서의 휴전안을 제의했다. 소련도 드디어 6월23일 국련대표 말리크의 연설을 통해 휴전에 동의했다. 통일을 염원하던 남­북의 한인들에게는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쌍방의 참전국가들의 거의 예외없이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제5기◁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의 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7월8일 개성의 중심지 북방에 있는 지난날 유명했던 유곽에서 국련군쪽과 공산군쪽의 연락장교단에 의한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어 7월10일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다. 국련군쪽의 수석대표는 미해군 극동사령관 조이 제독이었다. 리지웨이 총사령관이 직접 뽑았다. 정전회담에서 공산군 대표들이 국련군 대표들을 자극해 국련군 대표들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화를 내게 하여 회의장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충동작전」을 쓰거나 정반대로 몇시간씩 끌면서 지치게 만드는 「권태전술」을 쓸 것이라고 계산한 리지웨이는 따라서 국련군 수석대표는 어떠한 도발적 언동에 대해서도 침착하면서도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판단했다. 즉 『6시간정도 앉아 있으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줌누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협상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리지웨이에게 조이는 적임이었다. 조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ㆍ소에 “전면전”통첩 조이 수석대표를 보좌할 대표로 리지웨이는 2차대전의 베테랑들로부터 뽑았다. 유럽전선에서 보병연대를 지휘했었고 이때 미8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호지스 소장,북아프리카에서 공중전을 지휘했었고 이때 미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크레이기 소장,태평양전쟁에서 구축함전투를 대담하게 지휘해 용맹을 떨쳤었고 이때 미극동해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버크제독이 선발됐다. 한국군으로부터는 제1군단장 백선엽소장이 선발됐다. 공산군쪽 수석대표는 남일중장이었다. 남일중장을 보좌하는 북한군대표는 전선사령부 총참모장 이상조 육군소장이었다. 정전회담에서 그는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고 앉아 「강철같은 자기억제」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 한 사람의 북한군 대표는 북한 육군 제1군단 총참모장 장평산 소장이었다. 중국군에서는 사방 소장과 등화 중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 사방이 사실상의 수석대표였고 남일은 이름이 수석대표였지 실제에 있어서는 사방의 지휘를 받는 것 같다고 국련군 쪽에서는 보았다. 회담도중 그는 동료 대표들과의 상의없이 발언했고 선전적인 문구 같은 것도 사용함이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양쪽 대표단들은 신경전을 거쳐 7월26일 다음과 같은 의제에 합의했다. ①전투행위를 정지하는 기본조건 아래 양군 사이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 ②정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하여 정전을 성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들을 결정짓는 문제. ③포로에 관한 결정. ④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에 권고하는 문제. 의제에 대한 합의와 더불어 7월28일 첫번째 의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합의가 쉬울 것 같아 버크 제독 같은 이는 본국의 아내에게 『가을이 되어 사과가 익었을 때는 나는 과수원이 있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는데 회담은 길어지면서 10월25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긴다는 것 정도에 겨우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이 이렇게 길어지면서 서방 참전국들은 초조해졌다. 이점을 간파한 공산군쪽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국련군쪽 대표들에게 모욕적인 용어마저 썼다. 호지스 소장을 「거북이 알」이라고 불렀고 조이 수석대표에 대해서는 『이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수석대표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지웨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나오는 적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비단보다 강한 쇠가 필요하다』라고 본국정부에 호소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에게 『공산군쪽이 협상에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은 만주의 공산기지를 폭격하고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여 필요하다면 소련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공갈」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트루먼은 중국에 대해 핵무기를 쓰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강경한 자세를 보면서 공산군쪽은 한발 물러서 『현재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아래 앞으로 체결될 정전협정이 지정하는 시간에 쌍방은 이 분계선으로부터 2㎞씩 철수하여 그 지역을 정전 동안 비무장화 한다』는 국련군쪽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때가 52년 1월27일이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에 관한 합의가 일단 이루어졌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전체 흐름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사분계선 문제에 매듭이 지어지면서 쌍방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들에 권고하는 문제」를 다뤄 나갔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쉽게 이뤄졌다. 즉 정전회담 발효 3개월 안에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사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기로 한 것이다. 정전의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52년 5월2일 양쪽은 스웨덴ㆍ스위스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의 네 나라로써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산군쪽은 소련을 중립국이라고 우기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포함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나머지 문제는 포로교환의 문제였다. 정전이 성립되면 포로교환은 당연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이 마당에 이 문제는 빨리 매듭지어져 정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으로 기대됐다. ○2년 1개월만에 매듭 국련군쪽은 우선 「자발적인 송환」의 원칙을 제의했다. 국련군에 포로로 잡힌 공산군에게 돌아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쪽은 「자동송환」의 원칙을 내세웠다. 모든 포로들은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공산군쪽은 이 원칙을 관철시켜야 국련군쪽에 잡혀 있는 자신들의 장병들이 서방세계를 선택하지 않고 전원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오래 끌면서 공산군쪽은 국련군쪽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는 선전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사령관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이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련군쪽은 북폭을 강화하기도 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52년 11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져 「조기정전」을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이로써 53년 1월 공화당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휴전협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53년 3월 스탈린이 죽으면서 정전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정전협상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자 이대통령은 통일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실망감 속에서 6월19일 국련군에 수용되어 있는 공산포로들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5천여명을 극비의 작전을 통해 과감하게 석방했다. 이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파한했으며 이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게 했다. 한­미간의 합의가 성립됨으로써 정전협정의 체결을 위한 길은 완전히 열렸다. 그리하여 7월27일 휴전협정은 판문점의 「평화의 천막」안에서 조인됐다. 2년 1개월 여의 긴 시간동안 5백75회의 공식회의를 갖고 1천8백여만 단어를 소비한 다음에야 매듭지어진 것이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나토ㆍ바기구,재래무기 감축합의/탱크2만ㆍ장갑차3만대로 보유 제한

    ◎전투기 배치엔 이견 【빈 AFP 연합 특약】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군축협상대표들은 14일 재래식전력 감축회담에서 양진영의 탱크와 장갑차 보유대수를 각각 2만대와 3만대로 제한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프랑수아 플레상 프랑스대표는 『이번 합의는 현재 통일독일의 군사적 지위문제와 관련,소련측의 입장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유럽재래식전력(CFE)회담의 장애물을 제거해주고 다른 부분협상에도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련과 서방국가들은 CFE협상에서 중요한 의제인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의 보유대수 제한에 대해 아직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소련측은 육지에 배치돼 있으면서도 해군에 배속된 항공기를 협상에서 제외시키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나토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소련은 이같은 항공기를 1천8백내지 2천8백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발트3국의장과 오늘 회담/고르바초프 「독립문제」돌파구 모색

    【모스크바 AP 연합 특약】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은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한 발트3국의 최고회의의장(대통령)들과 만나기로 동의했다고 리투아니아ㆍ라트비아 의회의 대변인들이 11일 말했다. 이 대변인들은 『고르바초프가 12일 대통령자문 평의회의 모임후에 발트3국 지도자들과 회담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빌나와 리가에서의 전화통화를 통해 이같이 말했다. 고르바초프가 발트3국의 지도자들과 공동으로 회담을 하는 것은 처음이며 이것은 발트3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교착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크렘린의 새로운 외교적 주도권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발트3국의 최고회의 의장들은 11일 고르바초프와의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리투아니아에서 미리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소련 정부는 리투아니아공화국이 독립선언을 지원하기 위해 통과시킨 법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리투아니아와 협상하기로 동의했다고 한 고위 리투아니아 관리가 11일 말했다. 이 관리는 리슈코프 소련 총리가 지난 8일 프룬스키에네 리투아니아 총리에게 이같이밝혔다고 말했다. 소련은 독립선언 자체의 동결이 있기전까지 협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동안 주장해 왔다.
  • 동북아 새기류… 세계의 시각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 이후 남북한의 통일등 한반도의 장래를 진단하는 많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은 이미 무너진 동독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정권의 「최악의 요소」만 갖추고 있어 체제존속이 어려울 것』이란 마이클 윌리엄스 미코넬대객원교수의 전망(8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이나 「한국 성큼 걸어 나오다」라는 제목아래 『공산국가들은 남한의 경제력으로 보아 통일한국은 남한이 지배하게 될 것』으로 분석한 9일자 영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보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두 기사의 내용을 간추린다.〈편집자주〉 ◎미교수,「상항랑데부」이후 예진/“김일성 사후 북한붕괴 가능성”/무너진 루마니아의 최악 요소만 지녀/미 인터내셔널 트리뷴 한소 관계의 발전은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만남으로써 극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이 만남이 미국 땅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더욱 뼈아픈 상처를 입게 됐다. 이번 회담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동북아 정정에 가장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이 회담은 북한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지난 50년 북한이 한국을 침공한지 꼭 40년만에 이뤄진 노ㆍ고 회담은 한국의 정치ㆍ경제적인 우위를 반영한 것이다. 이 회담은 또한 지난 48년 이후 지속돼온 북한 김일성체제가 계속 지탱할 수 있을지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노ㆍ고 회담은 한소 관계를 또다른 차원으로 올려 놓았다. 이 회담으로 한소간 완전한 국교수립과 대사의 교환은 이제 단지 시간문제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한소의 접근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지난 7일 북한은 한국 대통령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배신적인 협상」을 했다고 고르바초프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북한은 경제ㆍ군사원조의 대부분을 여전히 소련으로부터 얻고 있기 때문에 사실 소련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는 형편이다. 공산세계에서 유독 북한만이 정치개혁은 물론 경제적 변화까지도 거부하고 있다. 소련학자들은 올해 78세인 김일성의 사후에도 현북한공산정권의 존속 가능성에 대해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이미 무너진 동독과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정권의 최악의 요소만 함께 갖춘 북한정권이 존속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소 정상회담 개최로 북한이 그동안 소련과 중국사이에서 벌여온 줄타기 외교가 더이상 먹혀들지 않게 됐다. 중국으로서는 크메르 루주만큼 「국제적으로 이미지가 아주 나쁜」 북한의 유일한 지지국으로 남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보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회담이 주변지역 긴장을 완화한다는 점에서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니셔티브는 일본이 새롭게 일고 있는 대소협력물결에 합류해야 한다는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일본기업인들은 잠재적으로 거대한 소련시장에 한국과 미국이 침투하는데 대해 점차 불편한 심기를 보이고 있다. 항시 날카로운 타이밍 감각을 발휘해 온 고르바초프는 이번 방미기간 중에도 자신이 1991년에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확인했다. 도쿄는 그가 아직까지도 찾아가지 않은 유일한 세계 주요도시이다. 소일관계는 일본에서 북방영토로 불리는 쿠릴열도내 4개섬을 둘러싼 양국간의 오랜 분쟁으로 마비돼 왔다. 미소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고 모스크바 당국이 최근 한국에 접근함에 따라 소련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일본의 경제적 지렛대 기능은 크게 손상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일본의 경제원조대가로 소련이 4개섬을 반환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고르바초프로서는 한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소일 정상회담을 늦춤으로써 소련이 일본에 대해 어떤 중대한 영토 양보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계산을 해온 것 같다. ◎영 경제지,남북한의 장래 전망/“통일한반도 한국이 지배한다”/경제력 절대우위… 유엔가입 장애없어/영 이코노미스트지 한반도의 교착상태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의 노태우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상면하게 됨에 따라 일견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 문제가 탄력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들 두사람의 만남은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부시대통령과의 회담후 귀로에 갖는 것으로 짜여졌고 회담시간도 불과 1시간밖에 안되었으나 그 결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이로써 소련은 사실상 과거 동맹국인 북한을 버린 것이다. 지난 88년 12월까지만 해도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남한과 외교관계를 가질 의향이 없다고 공언했으며 그후로 북한은 공산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변화에 눈과 귀를 막고 지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의 경제적 성공을 홍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국가들에 있어서는 한국이 그들에게 줄 것이 많은 나라로 떠오른 것이다. 88년에 3억달러였던 한소 무역은 89년에 6억달러로 늘었으며 금년에도 늘어날 것이다. 공산국가들은 남한의 경제력으로 보건대 통일이 되더라도 남한이 지배할 것으로 믿고 있는 것 같다. 두나라의 경제는 서로 잘 어울리는데 소련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원료를,그리고 한국은 비교적 덜 정교하긴 하지만 소련에게는 필요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다. 한국은 서방의 대공산권수출통제기구인 코콤(COCOM)의 멤버가 아니며 코콤 또한 금지규모를 완화하려고 하고 있는 중이므로 한국과 소련간에는 괜찮은 거래가 가능한 입장이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37년이 되는 한반도의 긴장은 팽팽하다. 주로 소련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은 남한을 2대1로 압도하고 있으며 직접대화는 잘 나가는듯 하다가도 실패로 끝나곤 한다. 지난 11월 남한이 북한의 문화교류 제의를 거부한 일이 있기는 하지만 남북대화 파탄의 책임은 주로 북한측에 있다. 남한이 다음에 성취할 큰 일은 유엔회원국이 되는 일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한국의 유엔가입안을 물리치는데 소련과 중국의 거부권을 믿어왔으나 이제 소련은 더이상 거부권을 행사할 것 같지 않다. 그럼 중국은 어떠한가. 과거에 김일성은 소련이 까다롭게 나오면 중국과 포옹함으로써 소련을 협박하곤 했다. 이러한 포옹은 이제 더 이상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중국도 그동안 계산을 다시 해오고 있는 중이다. 한중간에 외교관계는 없지만 두나라의 무역거래량은 작년 경우 26억달러에 이르렀는데 이는 중국과 북한무역의 4배나 되는 것이다. 남한은 유엔가입안을 신중히 다루고 있다. 지난 4월 노대통령은 유엔주재 한국외교부를 교체했다. 정치인이며 노대통령의 측근인 현홍주 신임대사는 북경과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한 일이 있다. 남한의 무역ㆍ기술ㆍ투자 등은 중국에게는 매력적인 것들이다. 북경과의 외교관계전에 남한은 대만과의 관계를 격하시켜야 되는데 대만측이 반발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현재 극소수에 불과한 「이념국」인 북한을 버리기 전에 재고 삼고를 하고자 할 것이다.〈연합〉
  • 바기구 민주화 환영/재래무기 감축추진/나토 외상회담 폐막

    【턴베리(영 스코틀랜드)로이터 AP 연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 외무장관들은 8일 이틀간의 회의를 마치면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급진적인 민주화계획을 환영하고 나토는 유럽배치 재래식무기(CFE)의 추가감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외무장관들은 이날 폐막 공동성명을 통해 통일독일은 나토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독일의 군사적 지위와 관련한 소련의 안보 우려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장관들은 자신들은 CFE협정의 연내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하고 소련에 대해 올 여름중 주요의제에 관한 합의를 이룩하자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 CFE협정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35개국이 참가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이어 나토는 교착상태에 빠진 빈 CFE회담에 새로운 박차를 가해 금년내로 협정이 체결될 수 있도록 한다는데 합의했다.
  • 한ㆍ소 한ㆍ미 정상대좌 무엇을 남겼나

    ◎「2+4구도」의 통일외교시대 열다/“한반도 긴장완화” 새 역학기류 형성/북한이 「신사고」 적응할 여건 조성 긴요 노태우대통령의 이번 한소,한미 연쇄정상회담은 동북아에서의 평화구축의 시작과 한소 관계발전의 시작,그리고 통일시대의 시작이라는 「3가지의 시작」을 선언하고 있다. 이번 연쇄회담을 부시ㆍ고르바초프의 미소 정상회담,2주전 노ㆍ가이후의 한일 정상회담과 연계시켜 보면 이같은 시작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일본과는 역사를 정리했다면 소련과는 역사를 시작했고 미국과는 역사의 계속성을 다졌다. 우선 동북아 평화정착의 시작은 노ㆍ고르비회담이 국제정치적으로 갖는 의미때문이다. 전후 냉전체제의 상징이 되어온 분단 한반도의 배후장본인인 소련의 정상과 고통의 당사자인 한국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냉전체제의 얼음이 깨져 녹기 시작했다』고 선언한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신사고」에 의한 소련의 개방ㆍ개혁,동구의 변혁,미소의 화해 등 세계적 변화의 물결이 아시아로,한반도로 넘어오는 결정적 돌파구를 노ㆍ고르비회담이 마련한 것이다. 또 한소 정상회담에서 제기된 동북아의 탈냉전,한반도의 평화정착은 미국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밝혔듯이 적극 지지키로 했고 일본이 우리와의 협력을 긴밀히 해나가기로 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서서히 가속력이 붙게될 것이다. 한반도주변 4강가운데 중국은 아직도 변화에 멈칫거리고 있지만 이번 가을 북경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우리와의 관계변화를 촉진시킬 가능성이 없지않다. 따라서 한반도주변 4강은 한국과의 관계를 축으로 해서 동북아에서의 평화구도를 점차 형성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한소관계의 시작은 이번 노ㆍ고르비회담으로 구한말 러시아와의 관계단절이후 계속된 86년간의 공백과 분단 45년간의 적대관계,동족상잔 전쟁의 배후로서의 불행했던 과거를 일순간에 뛰어넘고 역사의 새 장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소관계의 시작은 「실질적인」 의미와 「법률적인」 의미로 일단 구분하여 이해해야 한다. 정상회담이 일반적으로 의사결정의 신속ㆍ명료성ㆍ포괄적인 타결성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미수교국가간인 한소의 정상이 만나 서로의 문제를 논의한 것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양국은 수교상태와 다름이 없다는 해석이다. 반면 정상회담은 치밀성ㆍ절차성 측면에서 취약한 것이 사실이라면 법률적인 면에서의 한소수교는 앞으로 몇가지의 변수에 따라 그 시기가 결정될 것이다. 노대통령이나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서둘거나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수교시기가 일반의 관측처럼 7∼8월에 당장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며 북한의 반발,한소경협의 속도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셋째 통일시대의 시작은 서울­평양의 직선통행로가 북한의 폐쇄노선으로 막힌 상황에서 서울­모스크바­평양이라는 우회로가 가동됐기 때문인 것이다. 더욱이 동북아 평화정착의 기류가 미ㆍ일ㆍ소로부터 뿜어지고 있어 지금까지 통일의 장애요소,분단교착구조로 작용해온 한ㆍ미ㆍ일 대 북한ㆍ중ㆍ소의 대결도식이 붕괴하고 있다. 북한을 지금까지 에워싼 기류가 변하면 그 자신도 이제는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그들의 폐쇄ㆍ경직노선은 한계의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한소ㆍ한미ㆍ미소ㆍ한일 등 일련의 연쇄정상회담으로 앞으로 한반도주변의 국제정세는 상당한 속도로 변화할 것이다. 한소간의 법률적인 수교는 다소 시차가 있을지 모르나 실질적으로는 관계가 긴밀해지고 이에따라 북한은 단기적으로 소련과 불편한 관계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대소관계의 보완책으로 중국쪽에 정치적인 경사가 기울어지겠지만 군사적ㆍ경제적 대소의존성을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변화압력을 서서히 수용해 가면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이같은 한반도 주변제국의 관계변화는 「2(남북한)+4(미ㆍ일ㆍ중ㆍ소)의 상호관계속에서 변화를 이뤄나갈 것이며 경우에 따라 4강의 남북한 교차승인이라는 평화공존의 국제환경이 조성될 가능성이 없지않다. 또 이러한 가운데 집단안보체제와 세력균형이 매우 정교하게 이뤄져 한반도에서의 군축문제가 본격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소경협은 양국의 지리적 근접성,상호 보완적 요소때문에 몇년안에 1백억달러규모의 교역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소비재뿐 아니라 선박ㆍ자동차ㆍ기계수출ㆍ생필품공장 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이며 소련의 원자재ㆍ자원수입ㆍ기초과학ㆍ첨단기술의 도입도 수출ㆍ투자와 상응하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한국이 미소와의 연쇄정상회담을 통해 이뤄놓은 동북아 평화정착의 기수로서 국제적 위상을 드높여 나가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의 확보와 함께 이같은 한반도주변 기류변화에 대한 국민적인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또 북한이 지금 급변하고 있는 국제조류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여건조성도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북한이 고립감과 소외감을 최소한도로 줄이고 그들이 미일 등과 관계개선을 도모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줄 때 통일시대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 여야,한ㆍ소 정상회담 논평

    ◎“한ㆍ소 협력의 새시대 진입 남북관계 개선에도 큰획” 여야는 5일 노태우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의 정상회담과 관련한 논평을 각각 발표했다. ▲박희태 민자당대변인=한소수교의 첫장이 열린 것이다. 해빙의 물결이 동서해에 넘치고 대륙과 반도에 가교가 놓여 협력의 새시대로 진입하는 감격적 순간을 목격하였다. 이제 우리는 모스크바를 통해 우리의 종착역인 평양에 도착,민족통일의 환희를 노래하고 자손만대에 평화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해야한다. ▲김태식 평민당대변인=한국과 소련이 조속한 수교에 합의한점에 환영하며 약속대로 실현되기를 바란다. KAL기 피격사건사과요구등 우리가 해야할 말들을 다못한 점에 대해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 ▲장석화 민주당(가칭)대변인=한소정상회담에서 조속한 국교정상화와 한반도 정세안정을 위한 대북한개방공동노력 등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룬것은 한소간의 장래와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개선에 큰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 북한을 지나치게 고립화시키지 않는 신중하고 일관된 북방외교추진을 촉구한다.
  • 미ㆍ소 정상,대결시대 종식 선언의 의미

    ◎아태지역 새질서 구축의 “청신호”/“북한개방이 평화정착 열쇠”판단/소도 냉전구도 청산을 강력 희망/크렘린,한ㆍ일 등과 경협 확대… 긴장완화 추구 미국과 소련의 두 정상은 3일 양국정상회담을 마무리짓는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정상회담으로 미소양국의 대결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회담의 구체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평가들이 있겠지만 이번 회담으로 전후냉전체제를 이끌어온 두나라는 대결시대를 마무리하고 상호협조의 터를 다지는 하나의 이정표를 마련했다. 통일독일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입문제에 대해 양측의 이견이 아직 좁혀지지 않았으나 지난 6개월여 계속돼온 동유럽의 변화는 이번 미소의 만남으로 사실상 마무리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이제 세계의 관심은 한반도를 비롯,중국ㆍ베트남 등 마지막 남아 있는 아시아공산국들의 변화여부에 모아지고 있다.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도 3일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미와의 새관계를 바탕으로 앞으로 태평양권에도 새질서를 발전시키겠다』고 말해 다음의 외교목표를 아시아지역에 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고르바초프는 이 계획의 일환으로 아태국들과의 경제협력체 구성을 위해 내년초 일본방문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노태우대통령과의 전격적인 한소정상회담 합의와 대한수교의사는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정책의 구체적인 첫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고르바초프 집권이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새 질서모색을 위해 정기적으로 여러 제안들을 내놓았다. 지난 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에서 중국과의 화해를 천명한 것을 비롯,그해 11월에는 아태지역의 비핵화 등 군축을 제의한 「뉴델리 선언」,그리고 88년에는 이 지역국들의 경제협력과 집단안보 구상을 골자로 한 크라스노야르스크선언을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프가니스탄과 캄보디아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이뤄졌고 89년 5월과 금년 4월 두차례에 걸쳐 중국과의 수뇌회담이 성사돼 양국 국경의 병력감축 합의가 발표됐다. 그동안 동유럽에서는 소위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페지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일대 변혁이 진행됐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등 아시아 공산국들은 좀체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이들도 80년대 들어 정치체제를 고수하면서 경제적인 변화만 추구한다는 소위 「위로부터의 개혁」방식을 도입,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했지만 그 정도는 너무 미약했다. 정치와 경제체제를 한꺼번에 바꿔버린 동유럽의 변혁물결이 일자 이들은 결국 체제안보를 위해 변화시도 자체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6월 북경의 천안문 사태가 그 단적인 예이다. 북한은 동유럽 각국에서 유학생들을 불러들이고 남북대화를 교착상태에 빠지게 했다. 소련으로서는 아시아지역에서 유럽에 상응하는 군축,그리고 시베리아를 포함한 극동지역 개발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변화노력을 이곳에서 펼칠 때가 된 것이다. 아시아에서 동서대결구도가 청산되지 않는한 북한이 가지고 있는 전략적인 가치를 소련은 포기하기 어렵다. 북한은 주한미군과의 대치지역이고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발진한 소태평양함대가 태평양으로 빠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소양국은 한ㆍ미ㆍ소 3국이 북한을 설득,개방을 촉진함으로써 남북한 대화와 미ㆍ북한관계개선 그리고 이 지역의 군축에 진척을 가져오고 궁극적으로 한반도에서의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한다는데 합의를 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과의 수교를 단기적으로 북한에게는 충격이겠지만 결국 이지역의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게 소련의 판단인 듯하다. 북한의 충격완화를 위해 일시적으로는 주한미군철수,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대체 등 북한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소련이 한반도에서 바라는 것도 결국은 독일식의 해결방안일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북방4개섬 반환문제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아시아지역의 새질서 구축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일본과의 본격 협력시대를 열어 새 아태협력체를 구성시키겠다는 것이 소련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는 북한ㆍ중국을 포괄하는 구상이다. 고르바초프의 내년 방일은 이런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동유럽의 변혁물결과 본격화될 소련의 아시아정책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유럽대륙에서와 같은 화해의 새바람이 불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오는 9월 북경아시아게임을 고비로 중국도 대외개방과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란 전망들이 있으나 아직은 뚜렷한 변화조짐이 없다. 노대통령은 3일 한소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면서 출국인사를 통해 『우리의 분단상황은 결코 21세기로까지 이어질 수 없다』고 말했다. 10년안에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남북한과 미ㆍ소ㆍ중ㆍ일 등 관련국이 무엇보다 먼저 할일은 이 지역의 긴장완화와 대결구도 청산일 것이다. 남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인들에게 주는 이번 미소정상회담의 의의는 바로 이런 노력의 첫발을 내딛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 신 데탕트시대의 이정표 마련/부시­고르바초프회담 결산

    ◎전략무기감축ㆍ무역협정은 큰 성과/통독문제등 평행선… 신뢰회복 미흡 미소정상은 2일 캠프 데이비드회담을 끝으로 4일간의 공식회담 일정을 모두 마쳤다. 이번 정상회담은 8년여 끌어오던 전략핵무기감축협상(START)의 예비협정,화학무기 80%감축,무역협정 등 몇가지 주요성과를 남겼다. 그외에 양국간 장기곡물협정,대학생교류확대 등 부수적인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초 회담 시작전의 기대에는 크게 못미쳤다는 느낌이다. 우선 관심을 모았던 통일독일의 나토가입문제에 대해 전혀 의견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은 통일독일의 군사위상이 궁극적으로는 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떠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체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반면 미국은 나토잔류를 주장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회담 시작전부터 양국간 신경전이 계속되온 리투아니아사태에 대해서도 쌍방의 입장차만 확인했을 뿐이다. 2일 조인된 무역협정은 소련입장에서 보면 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로 꼽을 수 있다. 물론 이 협정이 조인됐다고 해서 소련경제의주름이 당장 펴지는 것은 아니고 앞으로 투자보장,최혜국대우 부여 등 기술적인 면에서의 후속조치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생필품부족등 경제난에 시달리는 소련국민들로서는 큰 선물이 된 셈이다. 소련은 미국과 무역협정을 맺음으로써 앞으로 IMF(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으로 부터의 원조요청에 한결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미의회측이 무역협정의 이행과정에서 발트 3국 독립문제,이민법제정등 소련국내문제들과 연계시킨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이 후속조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질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한 상태이다. 지역문제에서도 유일하게 에티오피아 원조문제만 합의를 보았을뿐 아프간ㆍ캄보디아ㆍ중동문제등에 대해서는 구체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심을 모았던 한반도문제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군축문제에서의 합의로 START와 교착중인 빈 재래무기감축협상등이 연내 타결돼 조인될 것으로 보이고 이는 동서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의 의의는 역시 구체사안에서의 합의보다는 양국이 앞으로 상호협력해나갈 이해의 바탕을 튼튼히 했다는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고르바초프는 이번 정상회담의 의의를 2차대전 당시 『미소를 포함한 연합국측이 나치에 대항해 연합전선을 만들때의 정신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껏 전후 얄타체제를 이끌어온 양국이 이념차를 극복하고 군축ㆍ무역ㆍ문화교류ㆍ지역문제에 대해 공동이해를 넓혔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몰타에서 양국정상은 「전후 새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바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 새 시대의 본격가동을 알리는 하나의 이정표의 의미를 지닌다.
  • 동북아에도 「신데탕트 바람」분다/한ㆍ소 정상회담의 파장

    ◎모스크바­북경­평양은 어떻게 보나/북한에 개혁압력 부수효과 기대 모스크바/신중한 반응속 새 기류 관망자세 북경/대소 의존 고려,대항조치 없을 듯 평양 오는 4일 하오 4시(한국시간 5일 상오 8시)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는 사상 최초의 한소정상회담이 냉전후의 세계재편을 가속화 시키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직 국교조차 없는 한소양국의 정상이 이처럼 전격회담을 갖는 것은 냉전후 재편성되는 국제정세의 급전개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필연적으로 아시아 태평양의 장래에 새로운 개혁의 물결을 초래하리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한다. 노태우­고르바초프 회담은 동북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일본의 언론과 외교소식통들이 분석한 동북아시아 관련국가의 표정을 정리해본다. ▷모스크바◁ 한소 정상회담에 관해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소련의 한 관계자는 31일 워싱턴에서 『이것은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말하고 국교정상화를 중심으로 경제협력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협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 회담에 관해 『소련과 북한간의 사전협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주목할만한 발언을 했다. 이 관계자는 한소 정상회담이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논평을 회피했으나 소련측에는 한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일방적으로 진척시킴으로써 북한에 개혁을 촉구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 소식통은 또 『이니셔티브는 한국측에 귀속한다』고 밝혀 이번 정상회담이 한국측의 적극외교에 의해 성사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아사히(조일)신문은 1일자 모스크바 특파원발신 기사에서 『한소정상회담이 갑자기 실현되는 배경에는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이룩함으로써 한반도정세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의 외교공세를 본격화 하겠다는 소련측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고 전했다. 또 소련이 지금까지 대한 관계개선에 신중한 방식을 취해왔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이번 일거에 수뇌회담으로 비약한 것은 그동안 「장애」가되어온 북한의 대응에 하나의 단호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동시에 유럽을 무대로 진행되고 있는 서방측과의 협력관계에 있어서 대공산권 수출통제위원회의 규제완화문제등 생각대로 본격화 되지 않고 있는 현재의 상황타개를 노린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소련의 한반도문제 전문가들도 미소 수뇌회담에 맞춰 노태우­고르바초프회담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소련에 있어서는 아시아에 대한 외교정책의 흐름의 일환이다.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기 때문에 「다음은 한국」이 라는 논리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르바초프 정권의 대아시아정책은 86년 7월 아시아의 안전보장체제 확립을 호소한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에서 시작됐으며,88년 9월에는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행한 연설에서 직접적으로 대한관계에 언급,한소접근의 흐름이 본격화 했다. 그를 위해서는 남북분단ㆍ대립이 계속되는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불가결하며 대공산권과의 교류를 확대하는 북방정책을 표방한 노대통령과생각의 일치를 보았다고 아사히신문은 지적했다. 모스크바의 동양학연구소 한반도문제 전문가나 프라우다지의 저명한 정치평론가도 노­고르바초프 회담소식에 『전혀 들은 바 없다,정말인가』라고 되물었으며 외무성 정보국도 묵묵부답이었다고 전했다. 그만큼 이번 회담은 전격적이며 고도의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이 신문은 말했다. ▷북경◁ 한소 정상회담에 관해 중국측은 일응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다. 31일 이 문제에 관해 논평을 요청받은 중국 외무부대변인은 『그것은 그들 양쪽(한국과 소련)의 일이다』라고만 답변,중국과는 관계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중국공산당의 강택민총서기도 이날 일본 창가학회 이케다(지전) 명예회장과의 회담에서 한소 정상회담의 평가에 대해 『중국은 남한과 경제ㆍ무역을 중심으로 민간 왕래를 계속하고 있다. 한소 정상회담은 미묘한 문제이나 우리는 북한과의 관계에 유의하고 있다. 역사적인 관계가 있고 통일이 중요하다. 남북통일을 바란다』며 직접적인 논평을 피하고 중국의 원칙적 입장을 밝히는 데 그쳤다. 그러나 중국이 내심으로는 한소접근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고 일본언론들은 분석한다. 정경분리라는 명목하에 실질적으로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적 파이프는 굵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소련처럼 한국을 정치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중국의 약점이다.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외에 지난해 천안문사건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돼버린 중국에 있어서 북한은 일당독재를 견지하는 극소수의 맹우이다. 한국을 인정하는 쪽이 경제적으로는 유리하다는 것은 알면서도 외교ㆍ국방ㆍ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볼때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중국의 일반대중이 북한을 보는 눈은 따뜻하지 않다. 중소논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중국편에서 서지 않고 『배반했다』라고 대중은 보고 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고 있으나 북한정권의 「세습」을 강력히 비판한다. 중국국민의 기분은 북한보다는 남한쪽에 기울어 있다. 소련의 한국접근이 어디까지 이루어질 것인가. 그 결과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중국지도부는 그것을 신중히 지켜보고 있다. 그 결과에 따라 중국의 앞으로의 한반도정책에 영향이 나올 것이라고 일본에서는 보고 있다. ▷평양◁ 한소 정상회담의 실현은 한국외교의 승리이며,북한에 있어서는 믿었던 한쪽 기둥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본언론들은 지적한다. 요미우리(독매)신문은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경제적ㆍ군사적 원조를 받고 있는 이상 소ㆍ북한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대항조치를 취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앞으로 북한은 중국에 더 한층 기울어져 소련을 견제함과 동시에 대미ㆍ대일정책에서는 점차 융화적인 자세를 보이며 한국에 대해서는 남북대화에 관한 제안공세 등으로 쫓기고 있는 국면의 타개를 꾀할 것이라고 일본에서는 전망하고 있다.
  • 이라크에 정상회담 제의/이란 대통령

    【니코시아 AP 연합 특약】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이 휴전이래 교착상태에 놓여 있는 이란ㆍ이라크 평화회담을 위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직접 회담을 가질 수 있다고 메디 카루비 이란 국회의장이 29일 밝혔다. 만일 양국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88년 8월20일 휴전이후 첫 양 정상 직접회담이 된다. 테헤란 라디오방송은 메디 카루비의 말을 인용,이란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으로부터 2통의 편지를 받았으며 1통에 대해서는 이미 답신을 보냈고 곧 두번째 편지에 대해서도 답신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카루비는 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나 서한이 「포괄적인 평화」를 촉구했다고 전했다.
  • 북방외교 전담팀/박 전정무 맡을 듯

    정부는 최근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재개시키고 북방정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정부의 각 부처 관계자및 관련인사들로 구성된 전담팀의 설치를 검토중이다. 이 전담팀에서는 24일간의 외국방문기간중 북한및 소련관계자들과 접촉하고 지난 19일 귀국한 박철언 전정무1장관이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 “체증 심해 수입 적다”… 이직 급증/택시운전사 “구인난시대”

    ◎기사없어 3천여대 “주차장신세”/회사마다 보상금주며 “유치작전”/무자격자도 마구 고용… 사고위험 부작용도 전국택시노련 서울시지부가 교착상태에 놓여있는 사업주측과의 임금협상에 불만을 품고 21일 저녁 대규모 차량시위를 감행하려는 가운데 택시운전사의 부족현상이 심각해 갖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택시운전사의 부족현상은 날로 심화되고 있는 대도시의 교통체증에 따라 운행수입이 격감하면서 운전사들의 이직률이 높아진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내만 하더라도 2백72개 업체 2만2천39대의 택시 가운데 12%가량인 3천여대가 운행을 못하고 서있는 상태이며 택시회사들은 이들 택시를 운행할 운전사를 구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다 쓰고 있다. 택시회사측은 소속 운전사를 총동원해 다른 택시회사나 버스회사 운전사를 스카우트하면서 다른 회사의 운전사를 데려오는 경우 한건에 3만∼5만원씩을 보상금으로 지급하는가 하면 택시운전사로 첫 취업하려는 사람들이 한달에 두번 교육을 받는 교통회관과 양평교육장 주변에 매일 20여개회사 간부들이 몰려가 점심을 대접하고 교통비를 대주는 등 선심공세를 펴고있다. 택시회사들이 이곳 등지에서 하루벌이 일당만 받는 떠돌이 운전사를 고용하는 경우 운전경험미숙 등으로 사고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승객들이 갖가지 횡포를 당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도봉구 수유동 S상운 상무 김모씨(52)는 『택시들 가운데 10%가량이 떠돌이 무자격운전사에게 맡겨지고 있다』면서 『차량을 언제까지나 세워놓을 수 없는 형편때문에 운전솜씨가 웬만하면 차를 내주게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당수 택시회사들이 노사분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월급제대신 도급제를 도입,자격유무를 따지지 않고 운전사와 개별계약을 맺어 난폭운전ㆍ승차거부ㆍ합승강요 등 부당행위를 부채질하고 있다. 운전사 도급제는 기본월급 없이 소형택시의 경우 하루 6만∼7만원,중형택시는 7만∼8만원만 회사에 입금시키고 나머지수입을 운전사가 모두 갖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수입을 높이기 위해 온갖 부당행위를 일삼게 되고 회사측도 운전사를 바로바로 교대시키기 때문에 차량정비에 소홀하게 돼 사고의 위험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전국택시노련은 이같은 운전사 도급제가 소형택시의 10%,중형은 50%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같은 운전사 부족현상에 대해 성북구 장위동 Y교통 상무이사 김중호씨(47)는 『규모가 큰 택시회사 가운데는 하루 50여대가 운행을 못하는 곳도 있다』면서 『실제 가동률은 80%를 밑돈다』고 말했다.
  • 동독,「유럽안보련」창설 제의/마이치레총리/나토ㆍ바기구 각료로 구성

    ◎동독군 추가감축 검토 【동베를린 로이터 연합】 로타르 데 마이치레 동독총리는 17일 후속 일방적 병력감축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독군의 감축이 단행될 경우 통일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소련의 우려를 진정시킬 좋은 소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데 마이치레총리는 이날 세계경제포럼에서 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 각료들을 망라하는 범유럽안보연합의 결성을 제의했다. 그는 동서독의 통합이 유럽의 군축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밝히고 『이런 이유로 동독은 서독정부 및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과 협의하에 후속 일방적 병력감축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방 관리들과 군사전문가들은 모스크바가 통일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우려때문에 유럽배치재래식병력(CFE)에 관한 빈협상을 교착시키고 있다면서 동독이 병력감축을 실시하면 소련에 대한 감미료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진전없는 야권통합에 “승부수”/통합파의 「중재안」 제시 안팎

    ◎탈당등 집단행동 으름장,수용 요구/김총재,“불순행동” 간주… 제재 시사 평민당측의 「흡수통합론」과 민주당(가칭)측의 「김대중 2선후퇴론」이 첨예하게 맞서 양당의 공식 야권통합협상이 난항을 겪자 양당내 통합파의원들이 통합중재안을 제시하고 나서 야권통합이 난기류를 타고 있다. 이들 통합파의원들은 양당의 2차에 걸친 통합협상회담이 당대표경선과 관련한 지분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선대표경선 후조직책선정」을 골자로 한 제3의 통합방안을 들고 나와 양당지도부에 이 안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 통합파의원들은 자신들의 통합방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서명운동재개·소속당탈당 등 집단행동도 불사할 태세여서 이들의 다음 단계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양당지도부 특히 평민당측은 이들 통합파의 움직임에 대해 벌써부터 「해당행위」로 몰아붙이는 등 못마땅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어 다음주초부터 통합파 의원들의 후속움직임이 가시화될 경우 한차례 당내 파란이 일 조짐이다. 이들 통합파의원들이 현재 논의중인 절충안은 ▲양당이 수임기구를 구성해 먼저 합당을 선언한 뒤 ▲이 수임기구를 통해 양당 동수의 지구당(예컨대 80대80)을 선정해 동수의 대의원을 뽑고 ▲이들 대의원들로 창당전당대회를 열어 당대표를 경선한뒤 ▲전당대회 이후 3개월 이내에 양당동수로(5대5) 조직강화특위를 구성,인물위주로 조직책을 선정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 안을 성안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상수의원(평민)은 17일 『민주당측이 주장하는 대표경선시 투표권의 동등성 뿐만 아니라 통합신당의 지분을 50대50으로 못박지 않음으로써 현역의원수가 우세한 평민당의 향후 위상도 고려한 통합방안』이라면서 『조직책선정을 대표경선이후로 미뤄 통합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양당 원외지구당위원장들의 반발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이의원이 제시한 이 중재안은 양당 통합파의원들간에 깊숙한 논의를 거쳐 성안된 것이 틀림없다. 평민당의 노승환국회부의장·이상수의원과 민주당의 박찬종·노무현·장석화의원·장기욱전의원등 통합파들은 17일 저녁 서울서교동 백조음식점에서 회동,이 중재안을 놓고 막바지 토론을 가졌다. 이에앞서 평민당의 이상수ㆍ이해찬의원과 민주당의 이철ㆍ노무현의원 등도 지난 13일 저녁 마포에서 모임을 갖는등 수시로 접촉해 왔으며 17일에는 이상수의원과 이철의원이 회동,양당 지도부가 이 안을 거부해 통합이 사실상 불가능해질 경우 밟을 「수순」을 놓고 깊숙한 얘기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 안을 다음주초 당공식기구를 통해 제기하기전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는데 당대표경선을 위한 지구당수를 몇개로 선정하느냐를 놓고 고심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해찬의원등 일부 의원들은 이상수의원이 지난 17일 사견으로 제시한 지구당수 80대80을 명시할 경우 평민당의 현지역구조직책 가운데 절반이상이 탈락하게 되는데 과연 이들 탈락원외지구당위원장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통합파들의 의지대로 민주당창당(6월10일)직전 통합선언→6월중순쯤 통합수임기구 구성등 통합스케줄이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이유는 이 안이 갖고 있는 방법상의 문제점에 있기 보다는 평민당지도부가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이들 통합파의원들은 자신들의 중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범야권통합기구」결성을 추진해 이 기구를 바탕으로 통합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으로 전해졌다. 3당통합 이후 거여의 자충수로 인한 반사적 지지가 평민당보다는 민주당쪽으로 쏠리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에서는 통합이 안돼도 평민당에 비해 잃을 것이 적다는 계산이다. 따라서 평민당의 흡수통합론 보다 민주당의 「경선에 의한 김대중총재 2선후퇴론」에 보다 근접한 이 중재안에 대해 평민당 보다는 민주당쪽이 호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평민당측 야권협상 대표단장인 김원기의원은 평민당내 통합파의원들이 중재안을 마련,서명작업을 통한 통합지지세력을 규합할 움직임에 대해 『그 사람들 중재안이라는 게 민주당안의 재판』이라고 불쾌감을 표시했고 익명을 요구한 한 당직자는 통합파의 움직임에 대해 『몸은 평민당에 귀속돼 있는데 주장은 저쪽 논리』라고 비난했다. 또 통합논의 과정에서 자신의 2선후퇴론이 제기되고 있는데 대해 침묵을 지켜왔던 김대중총재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10주년 기념식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한 공작정치를 통해 야권통합을 방해하는 움직임이 있다』면서 『그에 대한 확고한 정보와 증거를 갖고 있다』고 말해 경우에 따라 서명파의원들의 움직임을 「불순한 행동」으로 간주,제재를 가할 뜻을 시사했다. 평민당내 주류와 통합파의원들의 통합을 둘러싼 불협화가 「출혈」이 예상되는 내분으로 번질지 아니면 「찻잔속의 폭풍」으로 그칠지는 다음주초로 있을 것으로 보이는 통합파의원들과 김총재와의 면담결과에 따라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 요시다ㆍ구보타ㆍ후지오…/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사명대사에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여쭈되 『조선에 보물이 있습니까』하니 스님이 『보물은 일본에 있을 뿐 조선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고 묻자 『지금 조선에서는 당신의 목을 베기만 하면 천금의 상을 받게 되므로 당신의 머리가 곧 보물인 것이다』라는 호통이 나왔다. 가토는 간담이 서늘했다. 조선 선조 27년(1594년)4월에 사명스님이 울산 서생포에서 왜장가토를 만났을 때 얘기다. 허균이 지은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 석장비명으로 전해 온다. 이승만은 생래적으로 반일주의자였다. 1952년말 한일회담이 교착상태에 들자 도쿄의 미군당국은 중재를 해줄양으로 이승만을 도쿄에 초대했다. 당시 일본총리는 노회하기로 소문난 요시다 시게루(길전무)였다. 먼저 미국대사 머피가 마련한 오찬에 요시다가 불참하는 결례를 저질렀다. 이어 다음날 미군사령관 클라크가 초대한 만찬에서 두 노인은 냉랭한 표정으로 만난다. 요시다가 묻고 노대통령은 대답했다. 『듣건대 산자수명한 한국엔 아직도 호랑이가 많다던데요』,『한국엔 이제 호랑이가 없소』『그럴리가…. 예로부터 백두산 호랑이가 유명하지 않습니까』『당신들 일본사람이 마구 잡아 가죽까지 벗겨간 터에 이제 호랑이는 씨가 말랐소』 한일간에 가로놓인 넓은 강과 깊게 드리운 그늘의 연원이 역사적으로 대개 이러하다. 요시다가 이어 한일간 지난날에 언급,『우리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고 하자 드디어 이승만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귀하는 군국주의자들에 책임을 돌리지만 그런말은 아직도 한국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과 그 시도를 의심하는 한국인들에게 확신을 줄지 모른다』고 쏘아붙인 것이다. 요시다는 대답대신 묘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한일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다. 증오와 불신감 또한 뿌리깊다. 양쪽의 여론조사는 언제나 서로를 「가장 싫어하는 국가군」속의 첫째로 꼽고 있다. 최근에도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첫 인상은 「간사하다」로 나타났고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대표적인 느낌은 「감정적」이라고 지적됐다. 40년의 강점과 식민수탈을 단 한마디 「불행했던 과거」라는 표현으로 호도하고 「유감」을 표할지언정 결코 시인 사과는 하지 않는 그들이다. 그런 일본은 요즘 안팎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는 소련을 배울 필요가 있다. 소련은 얼마전 지난 1940년의 카틴숲 학살사건이 당시 그들 내무인민위원국(NKVD)의 주도아래 저질러진 범죄라고 시인하고 폴란드 정부에 사과하는 곰의 재주를 부렸다. 43년 소련을 침공한 나치독일이 스몰렌스크 동쪽 카틴 숲속에서 4천3백구의 유해를 찾아냈을 때 소련은 시침을 뗐었고 지금까지 그랬다. 소련이 과거의 전쟁적 범죄를 시인하고 사과하는데 50년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며 사실은 영원히 사실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지난 37년 중국군이 완강하게 버티던 남경시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부녀자 겁탈과 약탈은 물론 닥치는 대로 학살한 양민이 30만을 넘는다. 한국에서의 경우도 그러하다. 태평양전쟁기간중 39년부터 45년까지 6년동안 일본 등지에 노무자로 끌려간 한국인은 1백37만명,국내에서의 강제노역4백50만,군인 군속 소위 여자정신대 등으로 연행된 37만 등 모두 6백만명이 일제에 의해 동원되거나 학살됐다.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유감」표명만으로는 절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당국은 연전에 교육용으로 일본역사상 10명의 「위인」을 선정한 바 있다. 그중 근대편에는 길전송음ㆍ서향륭성ㆍ이등박문 등 조선침략의 원흉들이 망라됐다. 군국주의 잔재에 젖어 있는 일본 지도층의 의식의 단면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오래전에 「일본의 한국병합」이라는 책을 쓴 야마베 겐타로(산변건태랑)는 이들 소위 근대화주역들의 행적을 분석한 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시대에 따라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언제나 정한론이었다』고 갈파했다. 바로 그것이다. 53년 한일회담 당시 일본대표였던 구보타(구보전관일랑)는 『한일평화조약이 체결되기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라고 흥분하더니 끝내는 한술 더 떠 조선통치를 「시혜」라고까지 망발을 해 한일관계사에 이른바 「구보타 망언」을 남긴다. 『이등박문의 길을 따라 우리는 한국에 뿌리를 심어야 한다』고 말한 자는 요시다였고 마지막 수석대표였던 다카스기(고삼진일)는 『일본이 한국을 20년은 더 지배했더라면…』하고 아쉬워했다. 30년후인 86년 당시 문부상이던 후지오(등미정행)는 『식민지지배니 하고 떠들어 대지만 일본은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고 근성을 드러냈다. 섬나라 지도층의 한국에 대한 착시와 오만이 이와 같다. 지금도 일본 도처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요시다,구보타,다카스기,후지오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이 일본에 임한 기본자세는 정신적이며 도덕적이었다. 「정신적 화해」였기도 하다. 반면 일본은 법적ㆍ실무적이었고 경제동물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지금 막강한 부와 힘을 갖고 있다. NTT(일본전신전화) 한 회사의 주를 팔면 서독의 전 회사주식을 살 수 있고 도쿄를 처분한다면 그 돈으로는 미국 하나반을 살 수 있다. 미국의 핵우산을 빌려 쓰고 풍요를 구가하는 그 사회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이 대두된 지는 오래다. 급기야는 군국일본과 일왕찬미의 상징이었던 일장기와기미가요의 사용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패전후엔 그토록 믿었던 힘을 버리고 조심조심 부지런하기 30년만에 졸부가 된 그들이 이제 다시금 축적된 힘에 대한 자신과 오만을 갖고 그것을 활용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전쟁범죄와 관련된 피해보상문제와 재일동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교하고 이중적이고 인색할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는 한일에 가로놓인 강과 그늘은 영원히 걷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그들의 앞날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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