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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영화] 투사부일체

    [새영화] 투사부일체

    어서 와서 웃겨주겠노라 큰소리 땅땅 치던 계두식이 돌아왔다. 19일 개봉한 두사부일체의 후속편 ‘투사부일체’(제작 시네마제니스)는 웃음 코드를 1편에 기대고 있는 영화다. 조폭이 학생으로 변신해 조용히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희한한 상황에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대출(대리출석), 패스포트(여권),DANGER(위험 표지), 싸이와 같은 용어들을 이용하는 것도 여전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됐다. 사범대 졸업장을 받으려 교생실습을 나간 계두식(정준호)의 반에, 계두식에게 공부를 강요했던 조직의 보스(김상중)가 학생으로 앉아있는 것. 낮에는 제자, 밤에는 보스라는 상황이 주어졌다. 그밖에 큰 변화는 없다. 무식한 대가리(정운택)와 뺀질이 김상두(정웅인)는 여전히 계두식의 양팔이다. 이런 설정이라면 1편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사건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니 영화는 물량 위주로 간다. 독특한 캐릭터들을 대거 쏟아내는 것. 가수 춘자는 정말 대가리의 부인 춘자로 나와 걸쭉한 연기를 선보인다. 양아치 학생으로 나오는 하하나 폭소클럽의 ‘떴다 김샘’으로 유명한 개그맨 김홍식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김상중의 연기가 눈에 띈다. 실생활도 묵직할 것만 같은데 영화에서는 ‘고문관’처럼 군다. 관심은 역시 2001년 1편처럼 350만 관객을 웃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장점이라면 낄낄거릴 수 있는 1편의 흥행공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데다 설 연휴에 맞춰 개봉했다는 사실. 단점이라면 웃기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너무 많은 얘기들을 밀어넣었다는 점이다. 드라마적 요소를 많이 보강했다지만 성적조작, 학교폭력, 원조교제에다 사학비리까지 얹어 놓아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습이다. 여기에다 터프한 여선생 최나영(최윤영)과 사연 많은 여고생 유미정(한효주)을 둘러싼 에피소드들도 촘촘히 엮여 있다기보다 그냥 쭉 나열됐다는 느낌이 강하다.15세 이상 관람가.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빅마마 신연아, 프랑스인과 결혼

    여성 보컬그룹 빅마마의 신연아(33)가 프랑스인 알렉산드로 보스키(29)와 3월 31일 결혼한다.2001년 신연아가 프랑스 파리 C.I.M 음악학교 재즈과 유학 당시 교제를 시작한 이들은 연애 5년 만에 한국에서 전통 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치른다.
  • 힐러리 대선가도 ‘딸의 태클’

    |워싱턴 이도운특파원|힐러리 클린턴 미국 상원의원(뉴욕 주)이 딸 첼시의 새 남자 친구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의 인터넷 잡지인 슬레이트가 전했다. 첼시의 새 애인은 전직 의원인 에드 메즈빈스키의 아들. 문제는 메즈빈스키 전 의원이 부정 혐의로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교도소에서 7년째 복역중이라는 것. 특히 첼시는 남자친구로부터 “함께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자.”는 집요한 요청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8년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는 힐러리는 딸이 부패 혐의로 복역중인 전직 정치인을 면회가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잭 아브라모프 로비 스캔들로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미 유권자의 반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에서 딸 때문에 간접적으로라도 부패 정치인과 끈이 닿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dawn@seoul.co.kr
  • 김은혜 앵커, 3월 변호사와 결혼

    MBC 김은혜(35) 앵커가 3월19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랑은 동갑내기 국제변호사 유형동씨로 미국 버클리대와 코넬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해 5월부터 교제를 시작한 지 10개월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김 앵커는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93년 MBC에 기자로 입사했다.‘뉴스데스크’ 등을 거쳐 현재 ‘MBC 뉴스투데이’를 진행하고 있다.
  • [사회플러스] 윤국방 “군종장교 업무 개선”

    윤광웅 국방장관은 23일 군종장교의 업무 제고와 관련,“기독교·불교·천주교 이외의 종교계에서도 요청이 있었다.”면서 “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해서 전향적으로 검토·개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기독교·불교·천주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단에서도 군종장교를 배출할 수 있는 데다 군내 종교행사도 다양해질 전망이다. 윤 장관은 특히 “이해 집단을 가급적 많이 참여시킨 이른바 ‘정책공동체’형태를 빌려 추진할 것”이라면서 “내년부터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의 군종장교제도를 본격 연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 [열린세상] 학교의 주인은 누구?/전상진 서강대 사회학 교수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매우 낯익은 전선(戰線)이 재차 등장했다. 개정안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전선이 이념적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이들은 개정 사학법이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학생들을 좌경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좌파’적 정책이며 따라서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세력이 그 배후에 있음을 확신한다. 개정안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기득권 수호와 개혁의 차이를 대립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개정안이 사학재단의 전횡과 비리를 통제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라고 강변한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개정안 반대자들이 제시하는 주장들이 다수의 논리적 비약과 과장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언제나 때가 되면, 특히 선거를 앞두고 나타나는 ‘국가 정체성’ 문제랄지,‘좌파’ 낙인, 아니면 학생들을 좌경세력으로 키운다는 우려 등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서 이와 같은 철지난 엄살과 협박을 제거하면 한국 학교제도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 남는다. 사학재단은 사유재산인가? 대체 누가 사립학교의 주인인가? 개정안 비판자들은 물론 학교가 사유재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정안의 핵심사안인 개방형이사제가 사유 재산권을 비롯한 ‘경영 자율권’에 대한 침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소수의 사학들이 비리를 저지르는데 모든 사학의 권한을 통제하려는 것은, 악의적 소수 때문에 선의의 다수가 피해를 입는 정당하지 못한 처사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 주장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사유재산의 가장 명확한 형태인 일반 사기업에도 사외이사가 있다. 물론 사외이사가 모든 사기업의 투명성 제고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 장치는 사유재산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 공공성을 갖는 한 통제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또한 선의의 피해자라는 주장 역시 궁색하다. 개방형이사가 언제나 사립학교의 ‘경영’을 방해하는 존재일까? 그렇다고 개정안 찬성자들의 주장이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니다. 특히 ‘학교의 주인이 학생과 교사이기 때문에 개인이 학교 운영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다. 먼저, 개인이 금쪽같은 재산을 출연하여 사학을 설립하더라도, 일단 설립된 사학재단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비영리의 공익법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무리 사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민의 교육과 관련된 이상 그것은 강한 공공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위의 주장이 타당하더라도, 이로써 학교의 주인 문제가 완전히 규명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왜 개인이 학교재단을 설립하는가? 학교 설립 의도는 재산 증식이나 보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립 주체의 고유한 교육적인 목표와 신념의 실현이어야만 한다. 물론 설립자의 독특한 교육목표는, 헌법적인 권리와 의무와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만 보장된다. 학생과 교사는 사립학교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학생과 교사는 사립학교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학교의 목표에 찬성하지 않는 학생과 교사는 그 학교를 선택하지 않아야 한다. 이에 비해 재단 설립자는 교육적 목표 자체를 선택할 권한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로 그가 학교의 주인이다. 학교의 주인이라는 권세는 교육목표를 설정할 수 있는 권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운영권에 있는 것이지 재산권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대부분의 사학재단은 사학의 교육적 목표를 ‘평준화’하려는 권위적인 국가권력에 맞서서 싸우지 않았다. 어떤 재단들은 교육권을 양도하는 대신에, 재산(보존과 증식)권은 수호했다. 오늘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신입생을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담대한 재단 책임자를 보면서 씁쓸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시 그들의 주인의식은 학교의 교육권이 아니라 재산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가.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 교수
  • [사설] 가출 청소년을 성 노리개로 삼는 사회

    가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각종 범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호신에 취약한 가출소녀들은 성범죄에 너무 쉽게 노출돼 국가적·사회적 보호대책을 더 이상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지경이다. 청소년을위한내일여성센터가 밝힌 ‘가출청소년 성피해 실태조사’를 보면 충격과 함께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13∼20세의 가출소녀 442명에게 물어봤더니 61%가 성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25%는 강요에 의해 성매매를 해봤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성폭력 가해자는 친구·선후배, 채팅으로 만난 사람, 원조교제자 등으로 비교적 단순하다. 가출소녀의 어렵고 다급한 처지를 잘 알아 이를 악용하는 교우들이나, 돈을 미끼로 성적 노리개로 삼으려는 못된 성인남성들이 주류라는 얘기다. 따라서 인터넷·전화 등을 통한 성매매 제안자들을 범행 전 단계에서 법으로 제재할 수만 있어도 상당부분 예방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가출소녀들이 정신적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보호시설의 대거 확충과, 예방적 상담활동 등도 보다 실효성 있게 추진돼야 할 부분이다. 물론 가출소녀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책임은 약점을 드러낸 본인에게도 있다. 그러나 책임을 묻기엔 아이들은 세상을 너무 모르고 철이 없다. 이들이 가정환경·학업문제 등의 이유로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 사회와 법이 보호막이 돼 주지 못하면 사회도 국가도 일단의 책임을 다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가출소녀들에게 내 자식처럼 관심과 애정을 보내는 따뜻한 사회가 되는 것만큼 좋은 예방책은 없을 것 같다.
  • 8개국어로 꿈꾸는 소녀

    8개국어로 꿈꾸는 소녀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를 대하면 누구나 쉽게 외국어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라틴어, 러시아어 등 8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뉴질랜드 이민 여고생 임지현(15)양이 자기 학습법을 책으로 옮겼다. 임양은 15일 롯데호텔에서 ‘외국어 8전무패’(도서출판 이미지박스) 출간 기자간담회를 갖고 “그 나라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하며, 재미있게 배우는 것이 외국어를 잘하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임양의 외국어 학습 동기는 남다르다. 옆집 일본인 아주머니 집에 놀러가 맛있는 일본 과자를 먹으며 노는 게 즐거워 일본어를 배웠고, 좋아하는 스페인계 남자친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스페인어를 배웠다. 중국어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중국인 할머니와 친해지기 위해, 프랑스어는 패션잡지를 보기 위해, 러시아어는 톨스토이의 작품을 원서로 읽고 싶어 시작했다. 외국어는 공부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 교제하고 취미생활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앞으로 독일어와 이탈리아어에도 도전할 생각이다. 그 역시 4세 때 이민을 가 영어 때문에 고통받은 적도 있었다.“내성적 성격에 영어까지 서툴러 한때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어요. 하지만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생활 자체가 바뀌는 즐거운 경험을 했죠.” 임양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 많이 말하는 것’을 첫번째 비결로 꼽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거나 문법에 자신이 없다고 흔들리기 시작하면 결코 외국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것. 그는 “공부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지 100점을 맞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그는 “하루 24시간을 50시간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시간관리를 해가며 공부하다 보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으로 꿈을 꾸게 된다.”고 설명했다. 임양의 어머니 진양경(48)씨는“지현이는 천재도 아니고 따로 영재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평범한 소녀”라고 말했다. 임양은 최근 오클랜드 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한 2005 프랑스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 중국어 말하기대회, 스페인어 말하기대회 등에서 우승했다.“국제 인권전문가가 되기 위해 미국 하버드대에서 법과 정치를 전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초등생 학부모·교사용 논술지도 자료집 나와

    서울시교육청은 13일 교사와 학부모를 위한 초등학교 논술 지도 자료집을 개발해 각 학교에 보급했다고 밝혔다. 교사용 자료집은 생활 속의 논술, 논술지도 유형·논술 평가 방법 등을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학부모용은 가정에서 지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안내하고 있다. 우선 초등 논술 지도의 기본 방향으로는 ▲논술 쓰기의 요령이나 형식적인 틀을 강조하지 말고 사고하는 방법을 지도할 것 ▲생활 경험이나 독서 체험과 관련지어 다양한 사고를 하도록 할 것 ▲일상에서 친구·어른들에게 말하듯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가 되도록 지도할 것 등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는 ▲좋은 글 골라 비슷하게 써 보기 ▲신문 읽기 ▲인터넷 용어 쓰지 말기 ▲독서노트 만들기 등을 권장하고 있다.또 ‘초등학생의 액세서리 착용은 바람직한가.’ ‘초등학생도 이성교제는 필요한가.’ ‘홍길동의 행동은 바람직한가.’ ‘내가 만약 해리포터의 변신약을 만들 수 있다면?’ 등 책과 영화 또는 일상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논제로 쟁점을 토론해 보는 연습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가정에서 논술을 지도할 때는 자연스럽고 쉬운 글이 좋은 글이라는 점을 알려줘 부담을 덜어주고, 논술을 위한 독서공책을 만들어 메모하는 습관을 들여주며, 신문의 칼럼과 같은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모방해 써보도록 도워줄 것을 권했다. 시교육청은 교사용으로 2만 6000부를 제작해 모든 교원에게 지급했고, 학부모용은 학교당 100부씩 배포했다.지역교육청별로 오는 20일까지 학부모들을 상대로 설명회도 갖는다.15일부터는 서울시교육청 홈페이지에도 같은 내용을 게재한다.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발레로 단련된 싱그러운 그녀 - 5분 데이트 (30)

    발레로 단련된 싱그러운 그녀 - 5분 데이트 (30)

    아직은 애인보다 여자 친구가 더 좋다는「미스·청춘1번지」박혜경양. 만 20세. 얘기할 때마다 두 손이 입언저리를 감싸며 오르내리고 온몸을 뱅그르르 돌리는 등 수줍어하는 몸짓 하나만도 충분히 율동적이다. 계성여고 때부터 익혀온「발레」에서 비롯된 몸짓이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무대에도 몇 번 올라 봤지만「발레리너」로 대성할 자신은 없었단다. 차라리 관심과 취미가 모리는 것이라면「패션·디자이너」. 그래서 덕성여대 의상과를 졸업했지만 집에서는 시집 타령이 성화같아 졸업한지 두 달 만에 선을 세 번이나 봤단다. 『집에서 중매 드는 사람은 서른이 넘은 사람들이니 무서워서…』 「무섭다」는 의미는 세대 차이가 주는 몰이해가 두렵다는 것이려니 웃어 넘겼다. 맞선을 보고 마음에 안들 때 발뺌하는 법을 물었더니 두 번 만나고 마음에 안들면 두 번 거절하고 두 번은 숨는단다. 『좋은 듯 싫은 듯 아리송한 태도보다는 적당히 끊어주는 게 좋지 않아요』 오이를 씹는 듯 싱그러운 20대 전반기의 교제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연분홍빛 고운 피부, 겁을 먹은 듯 커다란 눈에서 아직은 철이 없는, 그래서 귀여운 소녀려니 했던 첫인상은 헤어지고 난 후 여인의 여운을 남길 줄도 아는 철든 20세여서 씻어졌다. 1남 4녀 중 맏이인데 동생 보살피며 귀여워하는 것이 취미인양 즐겁단다. ※ 뽑히기까지 발랄한 20대의 젊은 이들이 즐겨 참여하는「선데이 서울」「청춘1번지」의 광장에서 꼭 한 사람 표지의 주인공을 찾고 싶었다. 늘 푸른 젊음을 화창한 봄날의 표정으로 삼고 싶어서다. 혼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박혜경양을 주위의 몇몇 젊은이들이 추천. [ 선데이서울 69년 4/27 제2권 17호 통권 제31호 ]
  • 여학생 사귀면 안되나요 - Q여사에게 물어보셔요 (30)

    사연 : 여학생 사귀면 안될까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의 남학생입니다. 얼마 전에 교회의 학생회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고 1학년 여학생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과 어머니는 1류 대학에 가려면 이성교제는 끊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자꾸 만나고 싶고 공부에 지장이 있을 리는 없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만일 1류 대학에 못 가게 된다면 그것은 큰 일이에요. 형님들, 일가 아저씨들이 모두 건실한 1류 대학 졸업생들이어서 두고두고 집안에서 구박을 받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여학생과 사귀면 공부를 못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서울 종로구 사직동 李> 의견 : 감정을 정리해 보셔요 여자 친구와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나면 공부할 의욕이 무럭무럭 일어난다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고등학생 나이라고 해서 연애감정이 생기는 데도 무조건 억압하는 것은 오히려 나쁘다는 심리학자도 있습니다. 진실한 연애라면 하는 편이 낫다는 견해조차 있을 지경이에요. 그 여학생을 어째서 좋아하는지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단지「이성」이기 때문입니까?「여성」이라는 것 이외에 그녀만이 지닌 좋은 점이 따로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감정을 잘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속소설의 주인공처럼『못잊어』를 외치는 것은 현대적이 못됩니다. 대학 입학까지 연애대상으로「로맨틱·무드」를 만들어가면서 만나지는 마세요. 친구로서 좋은 사이를 두고 만나는 것은 아마 해롭지 않겠죠. 예를 들면 교회에서나 집에서 여러 사람(어른들도)이 함께 갖는 좌석 따위를 말예요. <Q> [ 선데이서울 69년 4/27 제2권 17호 통권 제31호 ]
  • “30분간 욕할권리 팝니다”

    ♥“30분 동안 마음대로 욕할 수 있는 권리를 팝니다.”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온갖 ‘화풀이’를 다 받아준다는 상품이 등장했다. 지난달 30일 경매사이트 옥션(www.auction.co.kr)에 등록된 이 상품의 시작가는 1000원, 즉시 구매가격은 5만원이다.1일 현재 입찰자는 1명이다.판매자는 서울 모 대학의 휴학생 김모(28)씨. 화풀이 대상이나 대화가 필요한 사람, 성공에 대한 고민이나 이성교제가 힘든 사람, 주식투자로 화가 난 사람들에게 30분의 시간을 제공한다. 그 시간 동안 고객의 모든 욕설과 화풀이를 다 받아주고 고민을 상담한다는 상품이다. 경매 낙찰이 되면 1주일에 1회씩 전화로 화풀이를 하고 2차례에 걸쳐 서비스가 제공된다. 화풀이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낙찰 금액은 전액 환불하기로 했다. 단,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고객은 전문의 상담을 받도록 권유하고 있다. 김씨는 “경매를 통해 번 돈은 전문 코칭(상담사) 교육을 이수하는 학비로 쓸 계획”이라고 말했다.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10년 ‘셔틀콕 궁합’ 백년가약

    ‘슈퍼 커플’이 깜짝 탄생했다. 셔틀콕 슈퍼스타 김동문(30)과 나경민(29)이 새달 25일 오후 3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백년가약을 맺는다. 지난 10년 가까이 찰떡 호흡을 맞추며 배드민턴 혼합복식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김동문(삼성전기)-나경민(대교눈이)이 셔틀콕이 아닌 인생의 동반자로 새 여정을 함께하는 것. 이들은 갑자기 결혼 날짜를 잡는 통에 아직 허니문 일정과 신혼 집조차 정하지 못했다. 김동문이 대한체육회의 지원으로 내년 1월 서둘러 미국 연수를 떠나기 때문. 둘은 오랜 기간 국가대표팀과 소속 팀 감독과 코치 등의 눈을 감쪽같이 피해 연애를 해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을 이미 감지한 주위 사람들은 적지 않다. 나경민은 “교제를 시작한 것은 3년 가까이 된다.”면서도 “워낙 오래 함께 있다보니 오빠가 언제 정식 프로포즈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동문과 나경민의 첫 만남은 악연이었다.1996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결승에서 김동문은 길영아와, 나경민은 박주봉과 짝을 이뤄 ‘적’으로 맞붙은 것.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이었지만 김동문조의 금메달로 끝났다. 이듬해 김-나는 한국의 간판 혼복조로 재탄생했다. 이른바 ‘적과의 동침’이었다. 둘은 이후 10년 가까이 세계 무대를 호령하며 무적 행진을 펼쳤다. 하지만 김-나는 기대를 모았던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중국의 장준-가오링조에 어이없이 무너졌고,‘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라던 지난해 아테네올림픽에서도 뜻밖의 선수에게 일격을 당해 올림픽의 불운을 이어갔다. 김동문은 하태권과 남복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나경민의 비운에 기쁨을 드러낼 수 없었고, 이런 아픔은 둘을 더욱 튼실히 묶었다. 이후 나경민은 태극마크를 반납하고 소속팀 코치로 활약중이며, 김동문은 연수를 떠나게 됐다.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 김동문과 셔틀콕 여왕 나경민이 코트 밖에서 연출할 인생이 자못 궁금하다.김민수기자 kimms@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자기도 잘 먹던 뽑기장사해서 먹고 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란 것이다.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러워 큰아들을 끌어안고 그때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인 장영신(69) 회장이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남편이 죽고 회사를 떠맡게 된 이야기를 이렇듯 생생하게 되짚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모성, 남편의 유업을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경영참여 이유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잃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3남1녀의 어머니로 살림만 하며 지내던 12년차 주부가 국내 대표 생활용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애경 창립 17년 만의 일이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웠고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부터 출근했다.1954년 6월 남편 고 채몽인씨가 5000만환으로 세운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가 현재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 가족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임원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애경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겠다.”는 말도 했다. 남편이 죽은 뒤 사장 자리를 맡고 있던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장 회장이 취임하자 회사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장 회장은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매일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공부했고, 관청에선 담당공무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는 이유로 동행했던 회사 임원으로부터 책상 밑으로 구둣발에 차이기도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는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몇시간이나 서 있다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지만 기업환경도 나쁜 것뿐이었다. 경영에 참여한 1972년 말부터 오일쇼크에 따른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그러나 장 회장은 더욱 힘을 냈다. ‘불황에 투자하라.’를 모토로 공장을 지방으로 확대 이전하는 한편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아 애경유화·애경화학·애경PNC(전 애경공업)·애경정밀화학·코스파 등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다. 비누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남편이 설립한 비누회사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품을 고도화시키는 데 집중했던 만큼 히트 상품도 꾸준히 내놓았다.1975년에는 분말 합성세제인 ‘크린업’을, 이듬해에는 액체세제 ‘써니’를,1980년 들어서는 세제 ‘스파크’를,90년 들어서는 클렌징 화장품인 ‘포인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트리오도 이름은 같지만 세척력을 높이고 공해도를 낮춰 지금까지도 1등 주방 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줍은 소녀…‘터프우먼 마담 장(張)’으로 장 회장은 어머니 고 문금조씨와 아버지 고 장회근씨의 4남4녀중 막내딸이다.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나 종로구 명륜동 1가 등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 문 여사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장 회장은 혜화동성당 유치원을 나온 뒤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자주 받았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 반장을 도맡기도 했다. 부모님의 학구열이 강한 덕에 형제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고 장윤옥씨는 일본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5국장(부이사관)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간 큰언니 장영옥(8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애경유지 사장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외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애경유지 이사를 지낸 넷째 오빠 장기돈(75)씨는 성균관대 상대 출신이다. 장 회장의 집안은 일제시대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광복 후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6·25가 터지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중이던 그는 돈 안들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교내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애경이 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의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했던 배경에는 유학 생활로 다져진 영어실력과 당시 익혔던 외국 풍습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피란시절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다.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어보면 먼산 바라보기 일쑤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탓에 장사꾼이 아닌 척한 것이다. 그러나 애경을 경영하면서 그에게는 ‘호랑이’‘터프우먼’‘마담장’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돌파구로 외국계와 합작에 집중했을 당시 그쪽에서 공동대표를 요구하면 그는 “여기는 한국 회사다. 너희가 한국에 대해 뭘 아느냐. 한국 문화를 이해할 때까지 너희들은 뒤에서 지켜봐라.”고 충고했다. 합작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달지 말라고 요구받으면 애국가 봉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진행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이런 장 회장을 놓고 ‘마담장 터프우먼’이라고 외쳤다. 사내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 때문이란 설명이다. 물론 풀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너그러우면서도 불같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과는 어릴적 이웃사촌 장 회장과 남편 채몽인씨는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고 채씨는 장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애정 공세를 퍼붓다 미국까지 따라가 무려 3년11개월 동안 구애 공세를 펼쳤다. 공개청혼으로 남편의 존재는 대학내에도 다 알려져 수녀 교수들로부터 “왜 저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졸업후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와 23세이던 1959년 6월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들(3남1녀)의 혼사는 장 회장보다 더 빠르다.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결혼을 모두 끝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연애 결혼이다.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45)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43)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부인은 1학년에 재학중인 생활미술학과 새내기. 채 부회장은 1983년 졸업후 미국 보스턴대에 MBA를 받은 뒤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마케팅부 등을 섭렵했다. 부인 홍씨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씨는 전공을 살려 현재 종로에서 갤러리 ‘사간’을 운영 중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장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 “우리 큰애(큰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정말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한다.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낸 장인 고 홍종수옹은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도 활약한 음악가다. 장 회장의 맞손녀이자 큰아들인 채 부회장의 딸 문선(19)양은 할머니의 성악 실력과 외할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 현재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채동석(41) 애경백화점 사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41)씨와 결혼해 졸업하기 전 1년 동안 학생 부부로 지내기도 했다. 채 사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현재 애경백화점,AK면세점, 수원애경역사, 평택역사 등 애경의 유통부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프랜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병문(75)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예편한 4성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큰딸 채은정(42)씨는 외숙모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안용찬(46) 애경 사장을 소개해줘 결혼한 경우다. 안 사장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씨 외숙모의 권유로 은정씨를 만났다. 은정씨도 대학 3학년때 결혼했다. 은정씨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뒤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애경 마케팅지원부문 상무를 맡고 있다. 채 부회장과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출신인 안 사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채 부회장은 “안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친구 사이여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안 사장을 알고 지냈다.”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유학을 끝낸 뒤 애경으로 꼭 와줄 것을 내가 청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에 입사하기 이전 유학을 마치고 미국 폰즈사에서도 마케팅 담당 업무를 맡았다. 통역 장교 1기 출신인 안 사장의 아버지 안상호(76)씨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 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플로 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막내 아들 채승석(35) 애경개발 부사장은 50만평 18홀 규모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 컨트리클럽을 운영하는 애경개발을 맡고 있다. 애경개발은 1987년 출발 당시부터 애경의 계열사중 유일하게 주력인 세제·화학과 동떨어진 업종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아나운서로도 활동했던 한성주(31)씨와 99년 6월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단국대 사학과 89학번인 채 부사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아 노래를 잘한다. 당초 친정에서 장 회장의 경영참여를 반대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카들도 여럿 애경에 몸담고 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의 큰아들인 장인규(53)씨는 과거 애경PNT(전 경신산업) 사장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갔고, 둘째 아들 장인원(49)씨는 계열사인 코스파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회장의 셋째 오빠인 고 장위돈씨가 낳은 3형제 중 큰아들인 우영(37)씨는 애경 화장품사업부장으로 있다. ●애경백화점에 남다른 애착 장 회장은 회사를 맡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아들 채 부회장이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한 순간 ‘마음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됐다.’고 회고했다. 애경백화점 본점인 서울 구로구점은 창업자인 남편 고 채몽인씨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비누를 만들었던 창업 터전이다.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 비누인 ‘미향’을 만든 곳으로 70년대까지 ‘트리오’ 등 세제를 만들다 공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창고로 써왔다.“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해보라.”고 맡긴 지 3년 만에 1만평 부지가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 회장은 애경백화점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금도 두 아들이 사이좋게 이 백화점 5층에서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장 회장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다녀갈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다. 장 회장은 즐기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채 부회장은 장 회장에 대해 “희생하는 삶만 사신 분”이라면서 “항상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고 남들이 취미를 물으면 ‘빨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직도 집안 일을 혼자 한다. 말년에 잠시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 어긋나는 길은 아니란 평이다.1997년 고사해 오던 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들이 기업하기 불편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1999년 민주당 신당창당 준비위원 공동대표로 영입된 뒤 백화점이 있는 구로를 텃밭삼아 16대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왜 정치를 하느냐. 이미지 버린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여성경제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뜻은 없다. ●가족간 우애는 애경의 힘 장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4년 구로동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 애경복지재단 일에 관여하며 무역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삼아 중국어를 배우고 있고, 순환기계통이 안 좋은 탓에 홍콩에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간 볼썽사나운 재산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애경가문 형제들은 함께 회사를 키워가며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채 부회장과 동생 채동석 사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채 부회장은 “인맥이랄 만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술을 먹거나 함께 어울리는 대상이 모두 형제들이다.”면서 “네 남자가 모여 술을 자주 먹는다.”고 말했다. 며느리들도 친하다. 큰동서와 작은 동서도 단짝 친구 같다.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란 지적이다. 채 부회장은 1985년 입사한 뒤 점차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며 유통업계에 뛰어든 뒤 AK면세점(2001년) 애경 2호점인 수원애경역사(2003년)로 확대했고 3호점 평택역사는 2009년 완공된다. 제주도와 함께 설립한 ㈜제주항공을 통해 2006년 6월부터 민간항공 사업도 벌인다. 채 부회장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동생 채동석 사장은 유통부문을, 처남인 안용찬 사장이 생활용품 부문을 키우고 있다.2세대에 와서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의 양축을 키워가는 한편 유통과 항공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채 부회장은 고혈압이 있어 거의 매주 등산을 즐기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명동성당에서 올린 천주교 신자이지만 산을 자주 찾는 탓에 항상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산사를 찾을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서 “애경의 힘은 형제간의 우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장회장 ‘유별난 시간개념’ 애경가(家)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유별나다. 장영신 회장은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사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면 꼭 10분 전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단 5분이라도 늦는 사람은 첫 대면부터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부하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시간관념을 하나의 척도로 삼는다. 시간 하나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은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대변한다.”(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때는 ‘나인 투 파이브’ 원칙을 지켰다.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늦어도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기상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간 신문을 읽고 그날의 주요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했다.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회의도 결재도 오전에 처리한다.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 9시 이전에는 하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을 놓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래서 애경에는 오전 8시만 되면 결재를 받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오전 9시면 그날 결재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애경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 모두 새벽형 인간이다. 채형석 부회장은 한술 더 떠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출근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구들끼리 밥을 먹기로 하거나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모일 때는 아예 30분 먼저 나갈 정도다. 채 부회장은 “식사 시간을 통해 가족 모임이 주로 이뤄지는데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바로 우리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라면서 “예컨대 6시에 모이기로 해도 식당이 문을 여는 오후 5시 30분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고 전했다. 급한 성격 탓에 식사를 시작하면 1시간내에 모두 끝내고 일어선다. 한 번은 막내인 채승석 부사장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약속한 정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미 식구들이 모두 제사를 지낸 뒤 산에서 내려오고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jhj@seoul.co.kr ■ 장영신 회장과 제주와의 인연 장영신 회장의 ‘제주 사랑’은 남다르다. 그의 제주 인연은 1970년 창업주인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더 각별해졌다. 장 회장은 남편의 조의금 전액을 제주도 재경장학회에 기증했다. 장학회는 이 돈으로 지금까지 매년 30명, 모두 1300여명의 제주 출신 대학생을 후원했다. 제주도는 고 채 사장의 고향이다. 큰아들 채형석 부회장도 최소한 1년에 세차례 이상 제주도에 간다. 선산이 모두 중문 색달동에 있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끔 간다. 채 부회장은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을 가셨을 때 동행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어 친근하다.”면서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증조 할아버지까지만 기록이 있어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회장도 제주에서 지낸 시절이 있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란가 1년간 지냈다. 장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애경은 제주도와 손잡고 내년 6월부터 도민의 숙원인 저가항공 시대 대열에 동참한다. 애경은 제주도와 합작해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을 만들었다.㈜제주항공의 왕복 비용은 기존 항공비용의 70% 수준인 11만원선.㈜제주항공의 애경 지분은 75%다. 채 부회장은 “이윤이 크게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영역이라고 보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장 회장의 제주 사랑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8)일본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8)일본의 차 문화

    늦가을과 초겨울 하늘은 참으로 투명하고 맑다. 마치 가을걷이를 위해 풍성하게 들어차 있던 들판이 텅비어 버린 것 같이 아름답고 맑아서 눈이 아프도록 시리다. 코발트빛 밤 하늘은 또 얼마나 깊고 청순한지 모른다. 너무 높아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눈썹위 이마에 얹고 쳐다봐야 하는 밤하늘은 마치 술이 술술 익어가는 시골의 마을처럼 우리의 애잔한 삶을 살포시 위로하는 길손같이 정겹기만 하다. 하늘에 떠있는 별은 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가. 천목(天目) 즉 하늘의 눈 같은 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중생들에게 혜안(慧眼)의 살림살이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가로등 같은 것이다. 산에 뜨는 달 또한 마찬가지다. 산에 뜨는 달은 등불이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는 마치 관현악의 장중한 울음 같다. 그림자 가득한 뜰을 지나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홈통을 타고 졸졸 밤새도록 울어대는 유천의 물을 발우에 담는다. 발우에는 달이 담기고 별이 담기고 영원한 적막이 흐른다. 푸른 돌솥에 찻물을 담아 차를 달여 마신다. 차의 살림살이는 차인의 마음에 따라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자신이 속한 일상속에서 잠깐 마음의 눈을 돌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고즈넉한 시간을 갖게 한다면 차는 내 삶속에 뜨거운 용광로처럼 피어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웰빙적인 측면에서 단순한 음료로 기능한다면 그 삶은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메마르고 강파를 것이다. 일본다도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큐 소우준 선사는 주광문답(珠光問答)에서 차의 살림살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일미청정(一味淸淨)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하니 조주선사는 이를 체득했지만, 육우는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사람이 다실(茶室)에 들어가면 겉으로는 남과 나의 구별을 떨쳐버리고 , 안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을 함양하며, 서로 간에 교제함에 있어서는 삼가고(謹), 공경하고(敬), 사념을 품지 않고(淸), 평온해지며(寂) 결국 온 세상이 평안해진다.” 이큐선사의 근, 경, 청, 적은 후일 센리휴에 의해 화(和), 경(敬), 청(淸), 적(寂)으로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일본다도의 핵심사상이 되고 있다. 이큐선사 이전에 일본에는 ‘다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 전해진 음차풍속의 일환인 ‘투차(鬪茶)’가 성행했을 뿐이다. 일본에 맨 처음 말차를 전한 사람은 에이사이스님으로 천태산 만년사에 주석하며 5가7종 가운데 1파인 황룡파의 선을 배우고 귀국하면서부터로 말하나 그같은 것은 현상적인 측면이 강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으로 많은 스님들이 유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선가에서는 선수행과 더불어 다양한 음다법이 성행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말차법은 중국에서 귀국한 많은 유학승들에 의해 시작된 문화의 공통분모 같은 것으로 봐야 한다.12세기 일본 사찰에서는 좌선때 애용된 말차가 단순한 음용의 수준을 떠나 하나의 다례로 정착됐다. 당시 일본의 선종사찰에서는 중국 선종사찰에서와 같이 생활규범으로서의 청규가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사찰에서 대규모의 차회가 열릴 정도로 끽다법이 일반화됐다고 보여진다. 그같은 선종사찰의 말차법은 현재도 행해지고 있는 건인사의 경우에서 보면 확연해진다. 건인사에서는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네머리의식(四頭·요쓰가시라)’을 진행한다. 그 다례를 살펴보면 맨 먼저 향을 피우는 헌향, 다과(茶菓)와 함께 말차가 들어간 천목이 배치되는 행잔(行盞), 그리고 스님이 정병을 가지고 손님이 천목(찻잔이름)에 끓은 물을 붓고 차를 저어 돌리는 행다(行茶)순으로 되어 있다. 일본교토 상국사에도 사두재연이라는 말차법이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선종사찰에서 말차법에 의한 다례가 일상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마쿠라시대를 거쳐 아시가가 시대에는 송나라로부터 ‘투차’의 풍속이 전해졌다.‘투차’풍속은 일본무사들의 정신적인 성향과 맛물려 당시 사회지배계층의 전형적인 음차문화로 자리잡았다.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일본의 다도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서원차(書院茶)’로 불리는 당시 차문화는 값비싼 차와 다완을 자랑하는 등 외형적인 화려함에 치우쳐 차의 정신이나 형식보다는 차의 품격, 다완의 가격 등 사회적인 부의 수준에 따라 그 차회의 품격이 정해질 정도로 사치스러워졌다. 서원차는 화려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귀족적인 차회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서원차를 주도했던 무가(武家)와 막 꽃피기 시작한 상업자본가들의 외형적인 자기과시욕 때문이었다. 사무라이들의 근엄하고 권위적인 취향과 상업자본가들의 자기과시욕의 결합은 심지어 차가 도박으로까지 발전할 정도로 지배계층 내부의 극단적인 정신적 사치를 불러왔을 정도다. 서원차의 병폐는 사회경제적 균등을 통해 안정적인 사회의 구축을 이루려는 집권막부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갔다. 일본 다도의 창시자랄 수 있는 무라다 주코와 이큐 소우준 선사의 만남은 이때 이루어졌다. 주코의 스승인 이큐선사는 고코마쓰일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린시절 사찰로 보내졌다. 어린시절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낸 이큐선사는 조주의 끽다거를 갈파해낸 탁월한 선승이었다. 조주의 끽다거의 공안을 깨쳤던 그는 왕실 막부의 투차의 화려함을 대신해서 원오극근선사의 ‘다선일미’를 다도의 근본형식으로 이끌어냈다. 이큐는 그의 나이 60세 때 30살의 주코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라출신인 주코는 11살에 출가하였으나 그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지 못해 환속, 이곳 저곳 떠돌며 ‘투차’나 여러곳의 ‘다사(茶事)’를 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코는 우연히 이큐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 문하에 다시 입문하게 된다. 주코를 조주차의 깨달음으로 이끌었던 이큐선사 일화 한토막을 소개해본다. 이큐는 주코가 ‘끽다거’의 공안을 깨칠 수 있도록 각고의 수행을 주문했다. 천재였던 주코에게도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이큐선사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선수행중인 주코를 이큐선사가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끽다거”. 그러나 주코는 이큐선사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이큐선사가 차탁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담아 주코에게 건넸다. 주코가 그 찻잔을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이큐선사는 “끽다거”하며 찻잔을 깨트려버렸다. 공안이 익을 대로 익어 있던 주코는 이큐선사의 벽력같은 소리에 단박에 깨칠 수 있었다. 마침내 조주차의 근원을 알게 된 주코는 이큐선사의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극근선사의 묵적을 전수받았다. 이큐선사의 인가를 받은 주코선사는 당과 송에서 전해진 투차의 차 문화를 대체하는, 즉 차와 선이 하나인 일본화된 품차의 정신을 만들어냈다. 주코를 통해서 차가 선이며, 선이 차이며, 끽다가 참선이고 참선이 끽다인 ‘다선일미’를 구현해냈다. 이같은 주코의 차도는 다케쇼오를 커쳐 센리휴에 의해 완성된다.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이었던 다케쇼오는 주코의 제자로부터 다도를 배웠다.36세 때 사카에로 돌아온 다케쇼오는 20세나 아래인 센리휴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다케쇼오는 일본이 다도를 통해 민족적인 정신을 눈뜨게 했다. 교토에서 와카와 다도를 함께 배운 다케쇼오는 와카를 다도에 접목시켰다. 그는 주코의 다도를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선가의 기풍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와카를 표구해 차실에 걸어놓아 일본다도에 민족적인 정신을 심어냈다. 사카에 상인 가문 출신이었던 센리휴는 주코와 다케쇼오의 차 정신을 완성해냈다. “여름에는 차실을 시원하게 하고 겨울엔 차실을 따뜻하게 하며 연료를 찻물이 잘 끓게 넣고 차는 맛있게 우려내는 것이야말로 차정신의 비결”이라고 말한 센리휴는 다다미 스무장 넓이의 넓고 화려한 서원차의 차실 대신 두세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겨우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이른바 초암차실을 완성했다. 센리휴는 전국시대의 최고의 무장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차 시종을 거쳐 일본을 천하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시종관이 되었다. 센리휴가 일본차계에 그 이름을 떨친 것은 1587년 히데요시가 주관한 천하통일 기념차회와 기타노 신사에서의 차회에서다. 센리휴는 이 차회에서 원나라 때 화가 옥간의 ‘원사만종’을 걸고 최고급 차합과 쌀 4천만섬의 가치가 있다는 ‘송화(松花)’라는 아름다운 다관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서원차의 극치를 보여준 차회였던 것이다.1589년 기타노 신사의 황금차실은 그같은 호화로운 차회의 극점이었다.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황금차실과 8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차인들의 참석은 ‘거처는 비가 새지 않으면 되고 음식은 배가 부르면 충분하다.’는 센리휴의 생각과 정 반대가 되는 것이었다. 센리휴는 일단 작은 차실을 선호했다. 그리고 중국에거 전래한 천목찻잔이나 청자완보다는 조선서민들이 사용했던 막사발(이도다완)을 즐겨 사용했다. 모양이 고르지 않고 검은 빛을 띠며 무늬가 없는 막사발을 센리휴는 최상의 다완으로 쳤다. 이같은 다도를 통해 센리휴는 마침내 주코의 ‘근경청적’의 정신을 ‘화경청적’으로 완성해낸 것이다. 일본차의 정신은 흔히 ‘와비차’로 표현된다.‘와비’란 이른바 ‘한적(閑寂)’하다는 말로 정신성이 강한 차예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차의 첫 번째 목적은 심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차와 선이 상통하는 점은 바로 정신적 경지의 정화와 승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차를 마실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맛을 음미한다. 참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선을 할 때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끊어야 한다. 다도(茶道)와 깨달음은 그것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의 맑고 고요한 근원적인 감각에 치중한다. 연차, 자차, 점차, 음차 등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며 윤회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다일미라는 것이다. 다도는 또 근원성의 문화라는 점에서 깨달음과 일치한다. 다도의 완성은 일종의 무형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신이 표현해내는 근원적인 문화양식인 것이다. 다도는 무형의 근원에 도달한 자신의 외재적 표현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또다른 문화양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위대한 선사들이나, 다도를 완성한 차인들은 이미 또다른 문화를 창조한 문화의 창조인들인 것이다. 센리휴선사는 이렇게 말한다.“물을 긷고, 땔감을 하고, 물을 끓이고, 차를 따르고, 부처께 올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이 마시고, 삽화분향하는 것 모두가 불법을 수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차와 선의 문화는 그런 점에서 인류 미래문화의 진보를 앞당기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지암 암주 ■ 日 茶界 최고보물 ‘다선일미’ 묵적…中 송나라때 원오극근선사가 전해 일본차계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이도다완’으로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 송나라때 선승으로 유명한 원오극근선사가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묵적이다. 서원차와 투차의 화려하고 권위적인 차 문화를 선과 결합시켜 내 ‘다선일미’라는 일본의 차도를 창조해낸 주코가 그의 스승인 이큐선사로부터 차도의 인가증서로 원오극근선사의 묵적을 전해받은 것이다. 이큐선사로부터 묵적을 물려받은 주코는 그것을 다실 안에서 가장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위치인 벽감속에 걸어 두고 사람들이 그의 다실을 드나들 때마다 무릎꿇고 예를 행하여 경의를 표하게 했다. 일본 경도 대각사에 소장되어 있는 ‘다선일미’에 대한 일화는 아주 재미있다. 원오극근선사가 어느날 중국 성도에 있는 소각사에서 설법을 하였다. 원오극근선사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일본 제자를 불렀다. 그리고 직접 그 제자에게 ‘다선일미’라는 네자를 써주었다. 그 제자는 그 글씨를 큰 대통에 담아 귀국하는 배를 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도착한 그 스님이 탄 배가 항구에서 전복되고 만 것이다. 그 대통과 글귀는 이사람 저사람 손을 전전하다 마침내 이큐선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큐선사는 그 대통에 든 글귀를 보고 오랫동안 참문을 하였다. 출중한 선승이었던 이큐선사는 마침내 원오극근선사가 쓴 ‘다선일미’의 오의를 깨쳤다. 그리고 그 정신과 묵적을 자신의 수제자였던 주코에게 차도의 인가증으로 전해준 것이다. 주코는 교토에 주광암을 개원했다. 그리고 선종의 중흥조인 육조혜능선사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선지를 바탕으로 차를 마심으로써 ‘초암다풍’을 형성한 것이다. 주코는 “차실에 들어가면 밖으로는 남과 나의 구분을 모두 잊고 안으로는 유화의 덕을 쌓으며 서로 응대함에 있어서는 근경청적하고 궁극적으로는 천하태평에 이른다.”고 말한다. 주코는 선을 통해 일본의 다도를 철학이자 종교로 승화시켜낸 것이다. 청담스님은 차의 진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차의 맛이 지닌 진수는 어디까지나 술처럼 교만하지 않고, 커피처럼 자만하지 않으며, 코코아처럼 천진한 기취와는 달리 엄절한 청정미에 있다. 그러기에 다도는 미를 발견하고도 오히려 환희를 감추려는데 묘미를 느끼는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선을 실행하고도 그 공덕을 숨기는 윤리이자 참을 체득하고도 오히려 빛을 묻는 종교이다.”
  • 축구스타 최성국, 새달 24일 결혼

    축구스타 최성국(22·울산 현대)이 새달 2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곽선혜(22)씨와 웨딩마치를 울린다. 최성국은 지난 2003년 후배 소개로 곽씨를 만나 3년 가까이 사랑을 키워왔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리게 된 최성국은 “흔들림없이 운동에만 전념하고 싶어 빨리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고 말했다. 최성국은 2003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열린 세계청소년(U-20)선수권 일본과의 16강전(1-2패)에서 선제골을 성공시킨 뒤 ‘SK LOVE SH’라는 문구가 적힌 속옷을 내보이며 세리머니를 펼쳐 교제 사실을 깜짝 공개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신동파 선수가 저를 울려요

    신동파 선수가 저를 울려요

    한국대표 농구「팀」의 명「포드」신동파(申東坡)를 사칭한 사기한이 나와 숱한 여인들을 울렸다. 멀리 자유당 시절의 가짜「귀하신 몸」에서부터 최근에는 가짜 판사, 가짜 영화감독, 배우까지 등장, 바야흐로 가짜가 판을 치는 판국에 이제는 가짜「올림픽」선수마저 나타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세태의 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후리후리한 키에 균형잡힌 몸매. 말쑥한 차림에 좋은 언변으로 서울 한복판을 누비는 가짜 신동파가 처음 나타난 것은 약 1년 전이었다. 지난해 3월 중순의 어느 날. 일본「야하따(八幡)」「팀」과의 친선경기를 끝내고 피로한 몸을 집에서 쉬고 있는 신동파에게 어떤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미스」구(具)라는 것이었다. 자기를 모르겠냐는 것이었다. 신동파로선 전혀 모를 여인. 다방에서 만났다. 역시 모를 여인이었다. 여인도 자기가 알던 신동파가 아니라고 당황했다. 여인은 신동파라고 사칭하는 사기한과 두 달 동안을 사귀어왔다. 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옆자리에 운동선수 차림의 건강한 청년 3, 4명이 앉아 잡담을 하는데 친구들이 한 청년을 가리켜 신동파라고 떠들어댔다. 잠시 후 가짜 신동파가 여인에게 다가왔다. 감쪽같이 신(申)선수로 알고 원정(遠征) 간다기에 돈줬더니 이렇게 알게 된 두 사람은 그 뒤 자주 만나게 됐다. 그들은「미도파」앞 M다방에 자주 들렀다. 다방의「마담」,「레지」들이 신동파 선수 왔다고 야단들이었다. 어떤 때 가짜 신동파는 약속시간에서 20~30분 정도 늦게「트레이닝」바람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연습하다 잠시 빠져 나왔다면서 오늘은 연습 때문에 시간이 없으니 다음날 만나자 하고는 돌아갔다. 다음날은 말쑥한 양복을 차려 입고 양복 깃에 태극「배지」를 달고 나타났다. 양복 안쪽에 신동파라는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명동 D음식점에서도 마찬가지. 주인은 그를 진짜 신동파로 믿고 있었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외상조차 먹고 다녔다. 하루는 그가 여인에게 곧 일본원정을 떠나게 됐다면서 원정비가 모자라 큰일이라 했다.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10만원을 주었다. 돌아올 때 선물을 사다 달라고 2만원을 따로 보탰다. 일본으로 떠난다면서 굳이 비행장에는 타오지 말라고 했다. 3, 4일이 지났다. 여인이「라디오」를 트니까 장충체육관에서 육군「팀」과「야하따」「팀」의 대전 실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일본에 갔어야 할 신동파가「게임」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이상히 여겨 농구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일본에 원정한 사실이 없다는 대답. 여인은 곧 신동파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신동파라고 하다 김무현(金武鉉)으로 둔갑도 앉아서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에 어리벙벙한 채 정신을 못 차리는 신동파에게 다시 두 번째 피해자가 나타났다. 역시 같은 수법이었다. 7만여 원을 사기당했다. 신동파는 하도 어이가 없어 동료선수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 뒤 가짜 신동파는 같은 육군「팀」의 백문철(白文哲)에게 덜미를 잡혔다. 백문철이 부대로 들어가기 위해 흑석동 집을 나오는데 담배가게 앞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담배가게 주인과 웬 키 큰 청년의 싸움. 담뱃값을 10원 더 내고 덜 냈다는 다툼이었다. 『여보시오. 내가 담뱃값 10원을 덜 낼 놈같이 보이오? 나도 유명한 사람이오. 내가 신동파요!』 백문철은 며칠 전 신동파에게 들은 사기한이 바로 이놈이구나 생각하고 뒤를 밟았다. 합승에 뒤따라 올라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저 혹시 신동파 선수 아닙니까?』 그는 시치미를 떼고 그렇다고 했다. 백문철은 신선수「팬」이라면서 어디까지 가시냐고 물었다. 중앙청 쪽으로 간다는 대답, 내려서「택시」로 모시겠다면서「택시」에 잡아 넣었다. 멱살을 잡고 사기꾼이라고 호통쳤다. 가짜는 연기를 시작했다. 눈물을 금방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다. 백문철은 그의 능란한 말솜씨에 홀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파출소에 차를 대고 내리면서 순경을 부르는 순간, 가짜는 잽싸게 백문철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가짜 신동파가 한 달쯤 전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의 피해자는 답십리에 사는 이(李)모양. 이양의 동생은 D중학 농구선수였다. 연습을 끝내고 돌아가는데 3, 4명의 청년들이 나타나 D중학을 졸업하면 좋은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겠느냐고 꾀었다. 그 중의 한 청년이 자기는 신동파라고 했다. 이군은 농구장에서 신선수를 보아 알고 있었다. 신동파가 아니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더니 사실은 김무현(기업은행 소속)이라고 돌려댔다. 이양 경우는 부모도 속아, 사위 삼으려고 백만원 줘 가짜 김무현으로 둔갑한 사기꾼은 이군의 부모를 만났다. Y고교 진학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부모들은 이군의 진학을 염려하던 터라 고마웠다. 이양을 만나게 됐다. 그 능숙한 솜씨로 이양에게 접근했다. 이군의 진학을 위해 교제비가 필요하다고 손을 내밀었다. 훈련비가 모자라 큰일이라고 울상이었다. 이양의 집에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돈을 내주었다. 나중엔 그와 이양의 약혼 얘기까지 나오게 됐다. 양복을 세 벌이나 해줬다. 시계도 사주었다. 화곡동에 집도 마련해 주기로 하고「오토바이」도 사주기로 약속했다. 한 달 동안에 가짜가 털어낸 돈과 패물은 근 1백만원어치. 이름을 사기당한 진짜 신동파는 한심한 세태에 가슴이 아프다고 술회했다. 『저를 사칭하고 사기를 일삼는 그 친구도 나쁘지만 피해를 입는 여자들도 한심합니다. 이름 석자에 홀려 앞뒤를 재지 못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정신들을 차려야겠습니다』 한국 제1의「골·게터」신동파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유홍락(劉洪洛) 기자> [ 선데이서울 69년 3/30 제2권 13호 통권 제27호 ]
  • “박정희는 고교교장 노무현은 대학총장”

    이백만 국정홍보처 차장이 정부정책 홍보사이트인 국정브리핑에 박정희 전 대통령을 ‘고등학교 교장’, 노무현 대통령을 ‘대학교 총장’에 비유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이 차장은 지난달 31일 국정브리핑에 게재한 ‘노무현 패러다임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교장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학교’의 총장 격”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초일류 학교였고 교장 선생님은 입시에 관한 한 최고의 엘리트 교장이었던 반면 ‘대한민국 대학교’는 개교한지 몇 년 되지 않아 일류 대학이 될지, 삼류 대학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총장은 이런 환경에서 대학교를 운영해야 한다.”면서 “교수, 학생 등 구성원 모두의 건전한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박정희 모델이 고등학교 때의 대학 입시공부라면 노무현 패러다임은 대학 때의 전공공부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또 “입시공부는 획일적 주입식 공부에 효과적이지만 이성교제는 물론 취미활동이나 교양활동도 극도로 제한한다.”면서 “대학의 전공공부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며 다양성과 자율성이 보장된다.”고 강조했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로스 D. 파크 지음

    아이들의 지적 발달에 있어 아버지의 영향은? 실험 결과 아버지가 없는 가정의 아이들이 시험과 지능 점수에 있어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 아이들의 인지 발달에 필요한 격려, 자극이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있는 가정에 비해 적었기 때문이다. 반면 자주 칭찬하고 도움을 주는 아버지를 둔 남자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버지를 둔 남자 아이보다 지능과 어휘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는 자녀의 성장 발달에 미치는 아버지의 고유한 영향력인 ‘아버지 효과’(Father Effect)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다.‘아버지만이 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로스 D 파크 지음, 김성봉 옮김, 샘터 펴냄)는 아버지의 역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 분만실에서 아이의 탄생을 지켜보는 젊은 아빠들이 늘고, 양육 휴가를 내는 열성 아빠들도 생겼지만 여전히 자녀 교육은 어머니 몫이라는 분위기에 경고를 보낸다. ●딸들의 이성교제에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 아버지의 영향은 단지 아동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기와 성인기에 있어 딸들의 남자관계는 어머니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후에 여자들이 이성애 형성에 문제점을 계속 드러내는 이유를 살펴보면 아버지들이 무관심했거나, 양육에 관여하지 않고 딸들을 적대적으로 취급했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딸들의 여성다움은 아버지가 딸들의 모델로서 어머니를 인정하고 있는가, 혹은 여성적인 활동에 대한 아버지의 따뜻한 격려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변화하는 아버지의 역할 이혼과 재혼 등으로 새로운 가족 형태를 구성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달라진 가족관계에서 아버지는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여자 아이들보다는 남자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으로 더 많이 고통을 받는다. 사회성과 남성다움 등을 아버지로부터 배우는 만큼 더 타격을 받는 것. 이혼한 가정의 남자 아이들은 이혼 가정의 여자 아이들이나 일반 가정의 아이들보다 더 공격적이고 충동적이며 어머니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혼한 이후 아이들과 정서적인 양육관계를 계속 가져야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아이들에게 가장 끔찍한 상황은 어머니의 재혼한 가정에서 사랑받기 위해 친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계부는 아이에게 친 아버지를 사랑하도록 허용, 권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친아버지 또는 계부가 아이의 사랑을 독점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두 아버지와 모두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있으며, 결국 두 아버지 모두 아이의 발달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다.8000원.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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