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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콜롬비아 반군(FARC)/노주석 논설위원

    ‘콜롬비아의 잔다르크’ 잉그리드 베탕쿠르가 6년 6개월 동안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the Revolutionary Armed Forces of Colombia)에 의해 인질로 붙잡혀 있다가 한편의 영화처럼 탈출했다.22분 13초의 감쪽같은 구출극으로 전세계적인 스타가 된 사람은 베탕쿠르 자신이지만 상대역인 FARC도 최고의 악명을 날리게 됐다. 돌아온 베탕쿠르는 “반군은 인간이 아니다.6년 내내 목에 쇠사슬을 채워 끌고 다녔다.”고 폭로했다. 수백명이 아직 억류돼 있다고 주장했다. 남미대륙 북서쪽 끝에 위치한 콜롬비아는 우리에게 커피와 난민, 부정부패 그리고 세계 최대의 코카인 생산국으로 유명하다. 지난 44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약 30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매년 2만 5000명이 살해되고 전세계 납치사건의 절반인 3000건이 발생한다. 이 나라의 2002년 대통령 후보였던 베탕쿠르가 “인질생활을 하면서 FARC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농담한 FARC는 어떤 조직일까. 1964년 창설된 좌익 게릴라 조직 FARC는 미국이나 유럽국가들로부터는 테러조직으로, 일부 좌익세력으로부터는 합법적인 교전단체로 인정받고 있다.40년 이상 최고 지도자로 군림해온 마누엘 마루란다가 지난 3월 심장마비로 사망한 뒤 알폰소 카노가 이끌고 있다.80∼90년대 콜롬비아 마약조직과 결탁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한때 1만 7000명의 반군이 활동했다. 부패한 콜롬비아 정부에 분노한 농민들이 끊임없이 반군진영에 가담해 자리를 채웠다. 또 마약 밀거래로 한해 2억달러를 손쉽게 벌어들이고 있어 호락호락하진 않다. 이번에 베탕쿠르의 탈출로 감옥에 있는 동료들을 구출하고 교전단체로 인정받을 최고의 협상 카드를 상실했다. 외부적인 요인도 불리하게 돌아간다. 좌파의 대부격인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이나 강력한 지원자로 알려진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마저 “게릴라투쟁은 과거의 역사”라며 “무장해제와 조건없는 인질석방”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FARC는 콜롬비아 국민들을 위한 정권을 잡는 것이 전략적 목표라며 새 선거실시를 요구하고 있지만 마약을 판 돈으로 위장한 그들의 미사여구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사설] 종교단체의 평화시위 유도 평가하지만

    종교단체들이 촛불시위로 어수선한 거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있다. 주초부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시국 미사와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어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기도회에 이어 오늘은 실천불교전국승가회가 주도하는 법회가 예정돼 있다. 이런 행사들이 촛불의 심지를 돋울 게 아니라 무한 대치 정국의 매듭을 푸는 계기가 되기를 빌 뿐이다. 우리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 미사와 거리행진이 평화적으로 끝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촛불시위의 흐름을 비폭력적 양상으로 되돌린 게 다행스럽다는 뜻이다. 특히 사제들이 참가자들에게 행사 후 귀가를 권유하는 등 공권력과의 충돌을 누그러뜨린 것도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집회에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군중심리에 휘말린 시위대가 예기치 않은 불상사를 유발할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이번 주말 민주노총이 대규모 시위를 벼르고 있는 상황이다. 언로가 막혔던, 엄혹했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의구현사제단은 세상의 소금 구실을 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국민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마당에 종교단체들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정교 분리 원칙을 떠나서라도 종교인들이 어차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정책 논쟁에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식탁의 안전성 확보를 내세우며 촛불을 든 시위대뿐만 아니라 촛불시위로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하소연하는 광화문 일대의 상인들도 다 같은 국민이 다.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언급이나 “촛불 끄고 제자리로 돌아갈 때”라고 한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고언의 참뜻을 함께 새겨볼 시점이다.
  • 시민·종교·노동계 주말 ‘합동 촛불’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비폭력 촛불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오는 5일에는 서울광장 집회에 광우병국민대책회의·통합민주당 등이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시민·종교계·노동계·정치권 등이 참여하는 대규모 합동 촛불집회가 예상된다. 사제단과 시민들은 2일 서울광장에서 사흘째 시국미사를 갖고 비폭력 거리행진을 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도 경찰추산 6000명(주최측 추산 3만명)의 시민들이 참가했다. 이날 사제단은 “오늘은 여러분의 평화행진이 시험받는 날”이라면서 거리행진을 이끌지 않았고, 시민들은 침묵시위를 하면서 행진을 끝냈다. 시민들이 시청광장∼남대문∼명동∼을지로1가∼시청광장 구간을 행진하고 돌아오자 사제단은 일렬로 서서 시민들에게 준비한 꽃을 나누어주며 환영했다. ●市 “서울광장서 행사 말아달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정의평화위원회도 이날 사제단의 서울광장 천막 옆에 천막을 설치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3개 단체에 서울광장에서 종교행사를 개최하지 말아달라는 공문을 보내 향후 처리가 주목된다. 국민대책회의는 “7월5일 ‘국민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문화제에서 각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경찰 폭력을 방어하기 위한 ‘인간방패’로 나설 것이며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에 대한 경찰의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합민주당은 5일 촛불집회에 손학규 대표를 비롯해 당 지도부와 소속의원, 당직자들이 당 차원에서 참여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금속노조·건설노조·화학섬유연맹 등에서 전국적으로 13만 6000여명의 조합원이 2시간씩 파업을 벌였다. 현대자동차의 경우 판매·정비부서를 제외한 3만 5000여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노동부는 8만 8000여명이 파업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했으며, 이번 파업을 목적상·절차상 모두 불법이라고 간주하고 주동자 처벌과 함께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동구 나길회기자 yidonggu@seoul.co.kr
  • ‘비폭력 촛불’ 다시 뒤덮이나

    ‘비폭력 촛불’ 다시 뒤덮이나

    종교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종교단체들이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국 관련 연합집회를 잇따라 열 예정이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이같은 종교계의 움직임은 연일 계속됐던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수그러드는 추세에서 뒤늦게 불거져 촛불집회의 재확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불교계는 4일 오후 6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국민주권 수호와 권력의 참회를 위한 시국법회’를 연다. 시국법회에는 조계종 관련 단체들과 주요 사찰들이 대부분 참여할 예정이며 법회 참가자들은 조계사에 모여 법회가 열리는 시청앞 광장까지 행진을 할 계획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3일까지 촛불집회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침묵기도회를 서울 청운동 동사무소 등에서 진행한 뒤 4일 오후 4시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에서 시국기도회를 갖는다. 5일 오후 7시에는 촛불집회 기독교대책위 주관으로 ‘1000인 기독인 합창단’의 합창행사도 연다. 이에 앞서 지난 30일 서울시청앞 광장 시국미사를 연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4일까지 서울광장에서 단식농성과 촛불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종교계가 이처럼 봇물 터지듯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것은 그동안 종교의 성격상 물리적인 실력행사를 자제해 왔으나 위험수위를 넘어선 공권력의 폭력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1∼5일을 ‘경찰폭력진압에 대한 기독교 행동주간’으로 선포한 NCCK는 “신앙인의 양심으로 더 이상 이 상황을 두고 볼 수만 없으며 경찰의 폭력 진압과 강제 연행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불교계 시국법회 대책위원회도 1일 시국법회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은 국민과 한 마음 한 몸이 될 것인지 독선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며 내각의 전면 쇄신과 경찰청장 교체를 촉구했다. 특히 집회와 시위 과정에서 불거진 목사와 스님 등 성직자에 대한 폭력과 구금도 종교단체의 집단행동을 부추긴 요인. 대한불교청년회와 불교여성개발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은 지난달 25일 경복궁 역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인천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정암 스님의 연행과 구금에 강력 반발해 왔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도 지난달 23일 여의도 KBS본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 회장 박찬영 목사가 폭행을 당한 것에 대해 반발해 왔다.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권오국 사무국장은 종교계 시국 집회와 관련,“종교계가 뒷전에 앉아 국민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는 자성과 과도한 폭력에 대한 반발이 합쳐진 현상”이라면서 “종교의 자비, 사랑을 담보한 비폭력이 유지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사제단 재협상 촉구 대규모 미사

    사제단 재협상 촉구 대규모 미사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가 30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사제단 신부 198명과 수녀, 신도, 시민 등 8000여명(경찰추산·주최측 추산 10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사제단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대규모 시국 미사를 연 것은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처음이다. 정부가 촛불집회를 원천봉쇄했지만 종교단체의 시국집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적용 대상이 아니다. 시국 미사는 당초 오후 6시 열릴 예정이었으나 경찰이 음향 설비를 실은 차량을 막아 1시간30분 늦은 오후 7시30분쯤 시작됐다. 이날 미사에서 사제단은 “촛불을 지키는 힘은 비폭력이다. 비폭력 시위가 복원되길 바라고, 정부가 먼저 시민들의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며 비폭력 원칙을 강조했다. 이어 “미국 쇠고기 수입 재협상으로 국민들이 안전하게 살게 되기를 바란다.”고 기도했다. 이들은 오후 9시쯤 미사를 마친 뒤 오후 10시까지 서울광장∼남대문∼명동∼서울광장 구간을 평화적으로 행진한 후 참석자들에게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이만 집에 돌아가자.”며 귀가를 종용했다. 사제단 관계자는 “사제단 상임위 신부단 10여명은 오는 4일까지 서울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할 예정이며 같은 기간 매일 저녁 평화적 촛불시위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주교 시국미사에 이어 불교와 개신교도 시국법회와 시국예배에 나설 계획이다. 화계사 주지인 수경 스님과 불교환경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불교계 사찰 대표들과 단체들도 29일과 30일 잇따라 연석회의를 열고 오는 4일 서울광장에서 시국법회를 열기로 했다.YMCA와 NCC정의평화위원회 등 기독교계에서도 오는 3일 시국기도회를 열 예정이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시국미사 등 종교행위는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어청수 경찰청장, 한진희 서울경찰청장 등을 직권남용 등으로 고발했다.▲집회 음향 차의 운행을 강제로 막고 ▲서울광장 천막을 영장 없이 철거하고 ▲집회를 원천 봉쇄했다는 등의 이유에서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도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5일을 ‘국민승리 선언을 위한 촛불문화제’로 정한다고 밝혔다. 정은주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기고] 제2연평해전 6주년을 보내며/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기고] 제2연평해전 6주년을 보내며/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어제는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6주년 되는 날이었다. 월드컵 축구로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던 2002년 6월,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산화한 참수리357호 장병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죽는 그 순간까지도 군인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여섯 영웅들의 영전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번 6주년은 여섯 영웅들과 유가족, 그리고 참전용사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뜻 깊은 날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까지 부대 자체행사로 거행되어 오던 추모행사가 새 정부 출범 이후 희생자들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가 이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국가추모식으로 승격되었다.‘서해교전’으로 불리던 당시 전투가 지난 4월 ‘제2연평해전’으로 격상되었고, 전사자들의 흉상이 제작되어 지난 6월13일 해군사관학교에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5일에는 1999년에 발발한 제1연평해전의 전승비가 평택의 제2함대 충무동산에 세워졌다. 어느덧 제2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6년, 제1연평해전이 발발한 지 9년의 세월이 흘렀다. 목숨을 바쳐 조국을 수호한 젊은이들이 어째서 이토록 오랫동안 제대로 예우 받지 못하고 쓸쓸히 묻혀 있어야만 했는가. 그간 곯을 대로 곯은 유가족과 참전용사들의 마음이 쉬이 아물 리 만무하겠지만 뒤늦게나마 그분들의 명예가 회복되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여섯 영웅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연평도 앞 바다는 바로 270만 인천시민들의 앞마당이자 삶의 터전이다. 지금도 서해 바다에는 수시로 긴장이 고조되곤 하지만,4700만 국민이 이처럼 평화롭게 생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여섯 영웅들과 참전용사들 덕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시설들은 그들이 숨져갔던 곳과 인접한 인천이 아닌 다른 곳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힘든 군사시설 내에 있다. 이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않은 정부를 비난하기 전에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은 참수리357호의 장병들을 벌써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경북 칠곡에는 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알려진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해 1951년에 칠곡 군민들이 건립한 ‘백선엽장군 호국구민비’가 있다.1981년과 95년에 정부에서 세운 전적기념관과 충혼비가 있지만, 주민들이 정부보다도 먼저 자발적으로 건립한 것이란 데에서 이 비석의 가치가 있다.‘호국구민’이란 비석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켜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칠곡 군민들의 사례를 보며, 최근 인천자유공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맥아더장군 동상 철거를 떠올렸다. 조국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켜준 이들에 대한 마음과 태도가 어쩌면 이렇게 다른지 안타까울 뿐이다. 때문에 이참에 인천에 제2연평해전 추모비를 세워 삶의 터전을 지켜준 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인천의 월미공원이나 연안부두와 같은 접근이 용이한 곳에 세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작은 정성을 통해서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영원히 잊지 않고 감사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우리들의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상은 해군OCS장교 중앙회 명예회장·국회의원
  • 北 ‘사회불안정’ 15위

    北 ‘사회불안정’ 15위

    북한의 사회불안정 수준이 세계에서 15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와 평화기금이 세계 17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해 23일(현지시간) 발표한 결과다. 정치, 사회, 경제, 군사 등 12개 분야에 걸쳐 지난 한 해 국가 불안정도를 조사, 계량화했다. 포린폴리시는 “북한이 지수집계가 시작된 이후 3년 연속 최악의 그룹인 ‘치명적’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13번째였던 지난해보다는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북한의 실패국가지수는 97.7이었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국가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였다. 지난해 1위였던 수단은 두 번째를 차지했다. 한국은 한국은 ‘치명적’,‘위험’,‘경계’,‘안정적’,‘가장 안정적’ 등 다섯 그룹 가운데 ‘안정적’ 그룹에 속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Metro] 남산 팔각정서 전통무예 시범

    서울시는 지난달 ‘하이서울 페스티벌’ 봄 축제 기간에 시범행사로 선보인 ‘전통무예 24기’를 매일(월요일 제외) 오후 3시 남산 팔각정에서 공연한다고 20일 밝혔다. 조선시대 군복을 차려 입은 ‘무예 24기’ 공연단은 24개 무예 중 기창, 장창, 월도, 예도, 낭선, 제독검, 등패와 곤방의 교전, 원앙진, 진검베기 등 10개 종류의 전통 무예를 선보인다.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열린세상] 대마도가 해답이다/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열린세상] 대마도가 해답이다/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말은 축구경기의 전유물이 아니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 해설서’의 독도 영유권 표기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신중한 판단을 당부했다고 한다. 독도는 당연히 우리 땅인데 일본정부에 강력하게 항의를 해야지 왜 ‘당부’만 하는가. 2005년 3월 경남 마산시 의회는 당시 외교통상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6월19일 대마도의 날’의 조례 제정을 가결하였다. 이 조례는 대마도(일본명 쓰시마)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며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1419년(세종1년)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대마도의 날 제정 이후 올해 초 신정부 출범 이전까지 일본의 독도관련 동향을 분석하면 2006년 10월 쓰시마시의회가 마산시의회 앞으로 항의성명의 공문을 보낸 것 이외에는 일본중앙정부차원의 독도망언의 빈도가 눈에 띄게 잦아들었음을 알 수 있다. 마산시의회가 중앙정부가 엄두도 못 내는 위업을 거둔 것으로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거둔 쾌거의 하나라고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옛 지도에 등장하는 대마도를 살펴보면 우리의 대마도 영유권주장이 일본의 독도망언에 대한 단순한 물타기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영토는 백두산이 머리가 되고 태백산맥은 등뼈가 되며 영남의 대마(對馬)와 호남의 탐라(耽羅)를 양발로 삼는다고 명기한 해동지도를 비롯, 대동여지도, 조선전도 등 조선시대 지도 대부분은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다.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일본 측이 제작한 지도인 팔도총도에도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하고 공격대상이라고 표시하였다.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3일째 되던 1948년 8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선언하고 일본 측에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 일본측이 항의해오자 우리 외무부는 이를 반박하면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1월7일에 열린 한국 최초의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도 프린스턴 국제정치학 박사이자 국제법과 외교전략의 대가인 초대 대통령은 대마도 반환 촉구를 재천명하였다. “대마도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쳐온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이를 무력 강점하였으나 결사 항전한 의병들이 이를 격퇴하였고 의병들의 전적비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는 반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같은 달 18일,31명의 제헌의원들은 연명으로 ‘대마도 반환촉구결의안’을 국회 본회의에 제출하여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것을 요구하였다.(서울신문 1949년 1월8일,1월19일자 기사 참조) 만일 후임 역대 대통령과 국회 또는 외교부장관이 그들 선배처럼 대마도 영유권을 한 번이라도 주장하였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설령 대마도를 회복하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망언을 함부로 내뱉지 못하게 하는, 억제력 상당한 카드로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으리라. 자랑할 것이라고는 가을 하늘 하나뿐이었던 건국 초기에도 그토록 당당했었는데 현직 유엔사무총장의 모국이자 세계12위 무역경제대국이 된 지금에 와서는 왜 이토록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에 기초한 수비일변도에서 웅크리고 있는지 그 내막을 도대체 알 수 없다. 한·일 축구경기에서 한국팀이 시종일관 백패스나 일삼는 수비만 하고 공이 일본 진영으로 한 번도 안 넘어 간다면 우리 관중은 얼마나 마음 졸이고 답답해하겠는가. 방패로만 맞서다가는 언젠가는 뚫리고 패배의 서러움만 남는다. 창에는 창이 제격이듯 독도에는 대마도가 해답일 수 있다. 강효백 경희대 중국법 교수
  • “죽기 전에 조국 한국으로 꼭 돌아가고파”

    한국전쟁 때 중국 영해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생포된 한국인 ‘켈로부대원’이 중국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에 거주하는 장근주(77)씨는 자신이 1951년 7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13개 켈로(KLO)부대 중 하나였던 호염(湖鹽)부대에 입대해 활동하다 중국군에 체포됐던 북파공작원 출신이라고 밝혔다. ●첩보활동 벌이다 체포… 中서 14년 복역 장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국군이 원산에 상륙한 직후 흥남에서 아버지(사망) 및 남동생(현재 서울 거주)과 함께 남포를 거쳐 황해도 초도(椒島)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중 1951년 7월 첩보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바로 평안북도 회도(灰島)로 이동됐으며 그곳을 거점으로 중국과 북한 등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벌였다. 장씨는 이어 상부의 명령에 따라 1952년 9월13일 동료 공작원 5명과 함께 선박을 타고 중국측 영해로 이동해 첩보수집 활동을 벌이다 이틀 뒤 중국 경비정과 어선 등에 발각돼 교전을 벌이던 중 생포돼 지금의 단둥(丹東)으로 압송됐다. 장씨는 1952년 9월10일 중국 영해를 2차례 침범해 중국과 북한 어선 등 선박 11척에 총격을 가하고 선원 1명을 부상시킨 혐의로 랴오닝성고급인민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의 확정판결을 받고 14년을 복역한 뒤 1965년 10월9일 감형, 석방됐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92년 10월까지 푸순감옥공장에서 목수로 근무했다. ●조선족과 결혼… 5년전 신장암 판정 장씨는 1967년 조선족 교포인 곽달선(69)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다.5년 전 신장암 판정을 받고 현재 자택에서 치료를 받으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장씨는 “한국을 위해 입대했던 만큼 죽기 전에 꼭 한국 국적을 회복해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선양 연합뉴스
  •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자랑스런 내 아들아 , 이제 편히 가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아. 이제 편히 가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흉상으로 영원히 남았다. 해군은 13일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교육사령부의 각 학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 고(故) 윤영하 소령과 조천형·황도현·서후원·한상국 중사, 박동혁 병장의 흉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날 제막식에는 유가족들과 윤공용 해군사관학교장,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 장병 등 500여명이 참석해 전사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렸다. 흉상 제막은 전사자들이 처음 군복을 입고 첫발을 들였던 해군 사관학교와 기술병과학교, 전투병과학교, 기초군사학교 4곳에서 잇따라 열렸다. 제막식은 고인에 대한 경과보고와 공적소개, 추모사, 제막, 헌화와 분향, 묵념, 흉상 만남 순으로 진행됐다.6주기를 맞은 이날도 유가족들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마치 교전 당시 한배를 탔던 전우들과 같이 이날 첫 제막식이 열린 해군사관학교부터 기초군사학교까지 4곳을 한가족처럼 함께 움직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전사자 가운데 유일한 사병(의무병)이었던 고 박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52)씨는 “사랑하는 동혁아 그렇게 힘들고 아프게 가더니 이렇게 오늘 또 엄마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구나.”라며 오열해 제막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김정두 해군교육사령관은 “영령들이시여, 이제 장병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어떠한 시련과 역경의 파도 앞에서도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필승 해군의 전통을 이어가게 해 주십시오.”라며 추모사를 했다. 제막식에는 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부정장으로 북한군 경비정의 포격으로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이희완(32·해사 근무) 대위 등 전우 4명도 참가했다. 전사자 등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에 실망해 2005년 4월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3년만에 귀국한 전사자 한상국 중사의 미망인 김종선(34)씨는 “전사자들의 명예가 늦게나마 회복된 것이 다행스럽지만 이같은 행사가 여전히 군대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부터 국가 차원에서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식과 행사를 갖는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29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에서 우리 해군과 북측 해군간에 일어난 교전으로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가 침몰했다. 진해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6자 회담은 동북아 안보기구 첫걸음”

    “북핵 6자회담은 동북아지역 안보기구 제도화의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이 밝혔다. 이른바 ‘동북아 지역 안보포럼’이다. 라이스 장관은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이스’ 7·8월호에서 “북한 핵문제로 동북아 안보와 평화에 큰 위협이 있었지만 6자회담을 통해 한국,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새로운 협력의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핵 문제는 동북아 국가간의 충돌이나 미국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었지만 한반도 비핵화 노력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북핵문제가 협력과 조화의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라이스 장관은 북한의 핵실험 당시 6자회담 5개국이 신속하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이뤄낸 것을 ‘협력과 조화’의 예로 들었다. 그는 “5개국은 이미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서 신속하게 결의에 이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6자회담)당사국들이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를 구축해 이런 협력을 제도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창규기자 nada@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다. 압록강 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싸울 경우, 설사 패하더라도 피해의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 또한 운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관들이 들고일어나 최명길을 처벌하라고 외쳤다. ●尹煌과 鄭蘊의 결전론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파의 거두 윤황(尹煌)이나 정온(鄭蘊)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대사간 윤황은 1636년 8월에 올린 상소에서 인조에게 척화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백성과 장졸들을 분기(奮起)시키려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요구했다. ‘임금과 종사(宗社)를 안전한 곳에 모신 뒤에야 국사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인심이 흩어져 나라가 망할 위기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황은 강화도에 배치한 병력을 모두 평안도로 보내고, 강화도에 지어놓은 행궁(行宮)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정온은 윤황보다 더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인조에게 결전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도원수를 의주로 보내 압록강을 방어하고, 의주에서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는 용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실시하여 결사대를 뽑고, 인조도 개성에 진주하여 장졸들을 진두지휘하라고 촉구했다. 정온은 결전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까지 제시했다. 그는 조선의 사수(射手)와 화포병(火砲兵)을 ‘천하 무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을 활용하면 후금군 기병의 돌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가 벌어질 곳에 먼저 진을 칠 장소를 정합니다. 포수 4000명을 4대로 나눠 2000명은 앞에 진을 치고,2000명은 지형을 살펴 좌우에 진을 칩니다. 포수 뒤에는 사수를, 그 뒤에는 살수(殺手)를, 그 뒤에는 편곤군(鞭棍軍)과 기사병(騎射兵)을 각각 배치합니다.(중략) 적이 학익진(鶴翼陣) 형태로 공격해 오면 아군의 전대(前隊) 1000명이 먼저 조총을 쏩니다. 쏜 뒤에는 앉아 화약을 장전하고 후대 1000명이 다시 쏩니다. 적이 만약 장사진(長蛇陣)으로 공격해 오면 좌군(左軍)이 전대가 했던 방식처럼 먼저 쏘고, 적이 40∼50보 안에 들어오면 사수들이 포수가 쏘던 방식대로 화살을 발사합니다. 그러면 포성이 그치지 않고, 화살은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이니 비록 저들의 견갑철마(堅甲鐵馬)라 할지라도 어찌 궤멸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계책은 병자호란 무렵 제기된 결전론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청군에 지레 겁을 먹고 ‘천하 무적’의 궁수와 포수들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이 이들과 다른 점은 ‘결전에 돌입하기 전에 한번 더 심양으로 사람을 보내 청의 속내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제 최명길의 주장이 나온 직후인 1636년 9월8일, 비변사는 심양으로 역관 권인록(權仁祿) 등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자고 주청했다.‘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나라 감군 황손무(黃孫茂)의 충고도 비변사의 주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갈팡질팡하는 인조 인조는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였다.‘결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자 수찬 오달제(吳達濟)와 헌납 이일상(李一相) 등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황손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며 인조가 ‘우리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사자(使者)가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황손무에게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일상 등은 더 나아가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위로는 명을 배반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대부분의 삼사 소속 언관(言官)들이 비변사를 비난하는 와중에 사간 정태화(鄭太和)는 소신을 내세웠다.‘옛날부터 교전(交戰) 중이라도 사자를 왕래시키고 국서를 교환했다.’며 비변사의 주청은 일리가 있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조는 정태화의 주장에 힘을 얻은 듯 비변사의 반간책(反間策)을 받아들였다. 역관 박인범(朴仁範)과 권인록을 심양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자 인조와 비변사는 다시 동요했다. 박인범 등에게 압록강을 건너지 말고 일단 의주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언관들과의 논의가 아직 결말을 맺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보다못해 다시 나섰다. 그는 먼저 연소한 언관들이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개탄한 뒤, 정묘호란 때 일부 언관들이 ‘야간에 적을 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앞으로는 국가를 위한 대사를 대신과 밀의(密議)하여 결정하되 승지와 내관들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인조가 비변사 중심의 주화론과 언관 중심의 척화론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공격의 화살은 최명길에게로 날아들었다. 오달제는 최명길이 기필코 중론(衆論)을 배척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조빈은 더 강경했다. 그는 ‘우리의 국시(國是)는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인데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며 인조반정의 명분까지 거론했다. 그러면서 ‘청에 다시 사자를 보내면 반란을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실을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사실상 인조에 대한 협박이었다.‘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아낸다.’고 했던 인조반정 당시의 명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조의 입장을 자극하는 주장이었다. ●‘秦檜보다 나쁜 최명길’ 1636년 9월27일 사간원의 언관들은, 최명길이 중론을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밀실에서 추진하려 했다며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언관들을 비난하고 최명길을 두둔했지만 11월6일, 최명길은 판윤(判尹)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11월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최명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임진년에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신종(神宗) 황제의 구원 덕분에 조선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며 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내세워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나라를 망치려 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1090∼1155)보다도 나쁜 자라고 매도했다. 진회는 남송(南宋)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금(金)과의 화의를 주도하여 세폐를 바치고 명장 악비(岳飛)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이후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간신의 전형’이자 ‘매국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인물이었다.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자고 주장했던 최명길은 이제 관인으로서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와 비변사는 논란 끝에 역관들을 심양으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선 역관들을 퇴짜 놓았다. 심양을 정탐하고 돌아온 역관 일행은 청의 분위기를 보고했다.‘군대를 일으키려는 기미도 보이지만 우리와 꼭 절교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헷갈리는 내용이었다. 비변사는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다. 삼사의 언관들은 저들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다시 반대했다. 1636년 12월 초, 인조는 다시 사신을 출발시켰다. 사신이 심양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귀환시킬 것을 요구하는 언관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그러나 이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는 11월 25일, 신료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을 고하는 제사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 메드베데프 러 대통령 中 방문

    |베이징 이지운특파원|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신임 러시아 대통령이 23일 중국 쓰촨(四川) 대지진 이후 외국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국빈 방문,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난 7일 취임한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첫 해외방문국으로 카자흐스탄과 중국을 선택했다. 베이징의 한 외교전문가는 이날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이번 방중은 특별한 현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취임 이후 주요국 순방 차원에서 이뤄진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들은 회담에서 두 나라를 잇는 송유관 건설 문제와 핵협력, 군사기술 교류, 환경보호, 관광증진, 금융협력 등 경제교류 활성화 방안을 논의했으며 이란 핵문제 등 국제문제에 대한 협력 증진 방안을 협의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1박2일 방중 기간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자칭린(賈慶林)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도 만날 계획이다.24일 오후 3시(현지시간)부터 중국중앙방송(CCTV)으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베이징대학에서 특별강연도 갖는다. 경제력이 급성장하고 있는 두 나라는 지난 수년간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고위급 대화를 강화하는 등 미국 단일 패권에 맞서 ‘다극화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노력해 왔다. 앞서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22·23일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에너지 협력 등 양국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jj@seoul.co.kr
  • 외교부 “교전 발생 수단 여행자제”

    외교통상부는 12일 정부군과 반군 간 교전이 발생한 수단에 대한 여행자제를 당부했다. 외교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수단은 정정이 불안해 이미 지역별로 여행경보 2단계(여행자제)나 3단계(여행제한)로 지정돼 있다.”면서 “이번에 발생한 교전으로 하르툼 등 일부 지역에 통행금지가 내려지는 등 상황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니 여행을 자제해 달라.”고 밝혔다.외교부는 “수단 내에 머물고 있는 우리 교민 98명의 피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 “현지에 체류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도 이동을 자제하고 공관을 통해 안전정보를 수시로 확인하는 등 신변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고 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6) 원불교 연지교당 원성제 부교무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6) 원불교 연지교당 원성제 부교무

    전북 정읍의 원불교 연지교당(정읍시 수성동 1020-4). 법회 출석 교인이 고작 70명 남짓한 작은 교당이지만 원불교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달려 있어 여느 원불교 교당과는 사뭇 다르게 활기차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청소년 법회를 이끄는 네팔 포카라 출신의 원성제(29·본명 케삽 사르마 파우렐) 부교무.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엄격한 네팔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 집안 출신으로 원불교에 귀의해 성직자의 길을 걷는 인물이다. 원불교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불교와 한국문화를 배우러 한국에 왔다가 출가, 고국 네팔 사회의 차별없는 삶과 발전을 늘상 가슴에 새기며 사는 독특한 신앙인이다. 대각개 교절은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가 구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불교 최대의 축일. 이 대각개교절 사흘 뒤인 지난 1일 오후 연지교당에서 원성제 교무를 만났다. 연이은 기념행사 끝이어서일까 조금은 피곤한 기색. 하지만 환하게 기자를 맞는 원 교무의 눈빛은 녹록지 않았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4년과 대학원 2년을 마치고 원불교 귀의겸 출가식을 가진게 지난해 12월. 한달 뒤인 올해 1월 교무 발령을 받아 첫 부임지인 이곳에서 주임교무를 돕고 있다. 원불교 성직자 생활이 채 5개월도 안된 신참인 셈이다. 한국에 사는 원불교 유일의 남성 외국인 교무 원성제. 그에게 한국은 무엇일까. 원불교 교단에서조차 눈여겨볼 만큼 독특한 외국인 교무이니, 응당 원불교에 닿은 인연과 출가 서원이 예사롭지 않았을 터. 지레짐작으로 섣부른 물음표를 찍었다. 한데 돌아온 것은 “속아서 원불교를 알게 됐다.”는 생뚱맞은 대답. 원불교가 무엇인지, 이름조차 알지 못한 채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 네팔 최고계급인 브라만 출신 장·차관급 고위관리들이 수두룩한 브라만 계급의 독실한 힌두교 집안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난 원성제 교무, 아니 케삽. 그는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다. 국비 장학생으로 해외유학을 한 뒤 고위관리로 최고급 대우를 받으며 사는 작은아버지가 대학진학 때까지 ‘인생의 모델´쯤으로 서있었던 것 같다. “공부 잘해서 유학 다녀와 고위관리로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었고, 실제로 공부도 꽤 잘했습니다. 그런데 일종의 계획된 작전에 인생이 바뀌었어요. 돌이켜 보면 거스를수 없는 인연이지만…” ‘일종의 계획된 작전´이라. 알듯 모를듯한 말에 고개를 흔들자 웃으며 자초지종을 들려 준다. 원광대 교수인 김범수 화백이 작전의 장본인이자 인연의 씨. 불교미술에 관심많은 김 화백이 네팔을 자주 드나들던 중 케삽의 외삼촌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원불교 교도였던 김 화백에 감화된 외삼촌은 한국에 들어와 광주보건대를 졸업하고 귀국, 지금은 네팔에서 관광사업을 하고 있다. “9살 때 외삼촌 집에서 김 화백을 처음 만났는데 아주 편안하고 재미있는 분이었어요.1년에 두 번씩 외삼촌 집에서 만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원불교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요.” 카트만두 트리부번 대학에서 수학·물리를 전공하던 2학년때 결국 김 화백과 외삼촌의 “한국에서 불교와 한국문화를 공부해 보라.”는 권유에 넘어가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힌두교 신자였지만 부처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불교가 강한 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진로를 바꿨는데, 원불교 성직자가 되어 있네요.” 한국에 들어와 원광대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우면서도 원불교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5개월쯤 지나 당시 원불교 광주전남 교구장인 박성석 교무와 이야기하면서 비로소 ‘원불교 공부를 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것이다. “법당에서 원불교 상징인 일원상을 처음 보고 많이 놀랐어요. 불교는 뭐고 원불교는 무엇인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네팔 외삼촌에게 전화를 해 심하게 항의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원불교가 좋아졌다. 그중에서도 마음이 끌린 것은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세상 곳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하는 일마다 불공을 드리는 정신으로 정성들여 살자는 ‘사실불공´의 정신이 가슴에 콕 박혔다. “힌두교에는 33억의 신이 있다고 해요. 이 33억의 신 대신 부처님을 놓으면 바로 처처불상이지요. 힌두교 신자이면서 거부감 없이 원불교에 빠져들 수 있었던 핵심인 셈이지요.” 말을 이어가는 원 교무의 입을 쫓다 보니 개혁 성향이 짙다. 실제로 그는 힌두교 신자이면서도 지나치게 소를 숭배해 받드는 네팔의 힌두교 신앙행태를 좋아하지 않는다. 네팔에 있을 때부터 ‘무조건 높여서 숭배하는 게 아니라 대상에 맞춰 공을 들이는 평등한 신앙´을 생각했다고 한다. 원불교의 인과(因果)며 평등 같은 교리에 빠져들다 보니 카스트의 신분 구분과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네팔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브라만 집안의 ‘귀한 아들´이 사람들의 차별과 종교의 평등을 놓고 고민이 컸다니 신앙의 근기가 예사롭지 않다. “전체 인구의 80%를 힌두교인이 차지하는 네팔은 여전히 카스트의 나라입니다. 법적으로 계층과 계급을 규제하진 않지만 결혼은 물론 교육, 취업 같은 일상생활에서 카스트의 계급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요.” ● 원광대 입학… 정전·대종경을 네팔어로 번역 원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자는 생각끝에 원광대 원불교학과와 대학원을 차례로 마쳤고 원불교 성직자가 됐다. 대학시절 주말과 방학때면 전국을 돌며 이주노동자들의 취업과 원만한 한국정착 돕기에 매달렸다. 연지 교당에 ‘외국인센터´를 마련한 것도 그 연장이다. 어느 순간 고국 네팔을 향한 원불교 신앙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 목표는 한결 같다.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논문 제목이 ‘힌두교와 원불교의 비교고찰´이고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제목이 ‘원불교 정전의 네팔어 번역´이다. 말할 것 없이 모두 원불교 선교, 특히 네팔 선교를 염두에 둔 고심의 흔적들. 원불교 전서 가운데 교전, 즉 기본교리인 정전과 대종경을 네팔어로 번역해 놓기도 했다. 한국에 머문 지 8년새에 제법 많은 것을 일궜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 “친 형님과 사촌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불쑥 꺼낸다. 대학을 졸업하고 네팔에서 3년째 대우좋은 경찰생활을 하던 형과, 대학 3학년이던 사촌동생을 자신이 걸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원불교에 귀의케 한 것이다. 형은 원광대 원불교학과를 마친 뒤 대학원 재학 중이고 사촌동생은 원광대 원불교학과 3학년. 자신 때문에 원불교에 귀의, 한국에 사는 둘의 모범이 되기 위해서도 똑바로 살아야 한단다. “처음 원불교를 알게 됐을 때 몹시 당혹스러웠지만 이젠 네팔을 떠난 때부터 출가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원 교무. 그는 한국말 가운데 ‘지금´, ‘여기´라는 두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서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말. 바로 ‘처처불상 무시선(處處佛像 無時禪)´이다. “내가 먼저 사람답게 살아야 고국 네팔의 평화와 발전도 있지요.” 끊임없는 마음공부야말로 나와 남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며 대종사 법문으로 기자를 배웅한다.“다른 사람을 바루고자 하거든 먼저 나를 바루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거든 먼저 내가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은혜를 받고자 하거든 먼저 내가 은혜를 베풀라.” kimus@seoul.co.kr
  • 탈레반, 아프간 대통령 공격

    탈레반 무장세력이 27일(이하 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열린 전승 기념식 행사장을 공격해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이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AP,AFP통신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40분쯤 카불 시내 가지스타디움에서 열린 옛소련 침공 격퇴 16주년 기념식 도중 괴한들이 귀빈석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로켓추진 수류탄을 투척했다. 괴한들은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아프간 국가 연주가 시작될 즈음 행사장 맞은편 건물에서 총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의원 1명을 포함한 8명이 부상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공격이 일어나자 카르자이 대통령은 경호원에 둘러싸여 검은색 SUV차량을 타고 대통령궁으로 황급히 피신했다. 아프간 국방부는 성명을 통해 “대통령을 비롯해 행사에 참석한 주요 각료들과 윌리엄 우드 미국 대사를 비롯한 현지 주재 외교관들은 무사하다.”고 밝혔다. 이날 공격으로 참석자 수백명이 대피하는 등 행사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생중계되던 TV방송도 중단됐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사건 직후 국영TV에 출연해 “자신은 괜찮다.”면서 “보안군이 재빨리 용의자를 검거해 상황이 마무리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공격의 주동자들을 아프간의 적이라며 맹비난했다. 파키스탄 군과 경찰은 괴한과 교전 뒤 일부를 현장에서 사살하고 1명을 검거했다. 아프간 정보당국은 100여명의 용의자들을 조사 중이다. 사건 발생 직후 탈레반은 이번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히드는 AP, 로이터통신에 “AK-47 소총과 BM-12 수류탄, 자살폭탄 조끼로 무장한 6명의 대원들을 보내 카르자이에게 발포했다.”면서 “우리 대원 3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2001년 임시대통령을 거쳐 집권 중인 카르자이 대통령은 탈레반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해 지난 2002년과 2004년에도 암살공격을 받은 바 있다. 한편 한국대사관측은 사전 테러 첩보를 입수하고 행사장에 참석하지 않아 피해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日, 식량위기 아프리카에 1억弗 지원

    日, 식량위기 아프리카에 1억弗 지원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이 보다 확실하게 ‘아프리카의 마음’ 사로잡기에 나섰다. 천연자원의 보물창고이자 개발 여력이 풍부한 아프리카를 저변에서부터 공략하기 위해서다. 일본 정부는 25일 가격 급등으로 식량위기를 맞은 아프리카를 위해 1억달러를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금은 다음달부터 8월까지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수단·우간다·중앙아프리카 등 식량난이 심각한 곳에 쓰일 예정이다. 아프리카의 쌀 증산을 위한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나아가 오는 7월 홋카이도 도야코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도 아프리카의 식량 문제를 의제로 상정, 논의를 주도해나갈 방침이다. 특히 정부는 다음달 28일부터 30일까지 요코하마에서 개최될 제4회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를 최대한 활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에는 아프리카 53개국 가운데 40개국 이상이 참석할 예정이다. 회의에서는 아프리카의 식량원조를 비롯, 도로 건설·교육, 경제협력 등 전반적인 현안을 다룰 전망이다. 자원 확보를 위한 외교전략이자 투자, 세계에서의 지위 향상 등 다목적 전략인 셈이다. 최근 아프리카 자원외교에 적극적인 중국에 대한 경쟁의식과 견제가 다분히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고무라 마사히코 외무상은 지난 23일 도쿄에서 열린 교육관련 국제회의에서 “아프리카에 앞으로 5년간 1000개의 초등학교를 세워 40만명의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아프리카 수학·과학교육 교사 30만명에 대한 연수도 추진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아프리카 유학생 유치 및 직업알선 확대 방안 등 종합대책도 준비 중이다. 고무라 외무상은 지난 1월 탄자니아 방문 때 아프리카의 난민구호와 식량원조 등을 위해 2억 6000만달러를 무상 지원하겠다고 밝힌 적도 있다. 일본은 최근 가나·앙골라·나이지리아 등 천연자원이 많은 3개국에 대한 엔차관을 공여키로 결정, 일본의 엔차관을 받는 아프리카 국가는 24개국으로 늘었다. 오는 2013년까지 아프리카에 대한 공적개발원조(ODA)의 규모를 지난해 17억달러의 3배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hkpark@seoul.co.kr
  • [김달진 문학상] 김달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김달진 문학상] 김달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월하(月下) 김달진 시인은 생전 평생을 한결같이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며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요 한학자다. 세속의 명리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긴 시인의 삶은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사표(師表)가 되기에 충분하다. 1907년 2월 경남 창원군 웅동(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난 월하는 항일 민족 기독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했다.1926년 서울 경신중학 재학중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세계 추구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교 계광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雜詠數曲)’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인은 ‘시원’‘시인부락’‘죽순’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유점사를 찾는 길에’‘나의 뜰’‘샘물’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항일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계광보통학교가 폐교되자 민족 현실에 절망한 시인은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매진했다. 시인은 1936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불경 연구의 길을 걸었다.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시집 ‘청시(靑枾)’를 발표했다. 유점사로 돌아간 시인은 1941년 ‘불령선인’이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을 때려 눕히고 중국 용정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소설가 안수길을 만나 그가 발간하던 잡지 ‘싹’에 ‘향수’ 등 시를 게재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서울을 떠나 창원 남면중학교 교장, 해군사관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73년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에 ‘한국선시’‘법구경’‘금강삼매경론’ 등 불교서적도 번역했고 ‘장자’‘한산시’ 등 동양고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시작 활동은 뜸해져 문단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역경 작업에 몰두하던 시인은 1967년 ‘임의 모습’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재개한 이후 ‘벌레’‘속삭임’‘낙엽’‘포만’ 등을 발표했다.1983년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碩德)으로 추대된 시인은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와 장편 서사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등을 펴냈다.1989년 6월 ‘한국 한시’(전 3권)의 완간을 앞두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달진 시인은 일제시대부터 제도권 문단의 편입을 거부하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이 시 속에도 오롯이 녹아들어 그만의 순수한 시적 영토를 지켰다. 시인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에도 편벽되지 않고 자연 본연의 모습을 질박한 언어로 담아냈다.“여기 한 자연아(自然兒)가/그대로 와서/그대로 살다가/자연으로 돌아갔다./ 물은 푸르라/해는 빛나라/자연 그대로./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비명(碑銘)’) ●동양고전·한시·불교서적 번역에도 힘써 시인의 시어는 평이하다. 하지만 청아한 정신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하는 시인의 도저한 시적 상상력은 끝간 데가 없다. 시인의 작품은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리는 이 시대에 인간 본연의 순정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마력의 힘을 발휘한다. 시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관조와 종교적 초월의 경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곧 우리 시사(詩史)에 면면히 이어져온 순수 서정시와 동양적 미학을 접목,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려는 몸짓이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의 전개, 그것이 바로 월하 시의 요체다. 김달진문학상 운영위원인 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시인은 “월하의 시세계는 서구의 이미지스트적 감각과 한국의 토속적인 자연, 동양사상의 합일로 요약된다.”면서 “시인의 작품들이 은둔생활에 가까운 생활로 대부분 묻혀 있는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려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유물로 깨닫는 ‘불법의 세계’

    유물로 깨닫는 ‘불법의 세계’

    불교중앙박물관 개관 1주년 특별전시인 ‘법보(法寶)전’이 29일부터 6월 29일까지 불교중앙박물관 전시실에서 열린다. ‘법보’전은 불교중앙박물관이 기획한 불·법·승 삼보(三寶) 시리즈 가운데 두 번째 행사. 불법을 주제로 한 유물 162건 197점(국보 9점, 보물 25점)이 나오는데 불교전래 이후 조선시대까지 간행된 주요 경전의 전적과 목판·사경,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인 화엄경·법화경 관련 불교미술,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조탑경인 무구정광다라니경과 대표격 복장유물이 들어 있다. “2007년 개관 특별전의 ‘불’전시가 지혜와 자비로 나투신 부처님의 실재를 깨닫게 하는 전시라면 이번 ‘법’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박물관측은 설명한다. 전시는 크게 ‘부처님의 실재’(중앙전시실)와 ‘법의 전래와 법보’(제1전시실),‘경전미술’(제2전시실),‘부처의 몸 안에 내재된 법보와 법의 장엄’(제3전시실)으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 중앙전시실에 전시될 경주 황룡사지 출토 부처님 진신사리와 ‘황룡사 찰주본기’(국립경주박물관),‘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제13’(삼성출판박물관)‘초조본아비담비파사론 권16’(호림박물관) 등의 초조대장경, 보협인다라니경인 ‘보광사복장유물’(불교중앙박물관)이 눈길을 끈다. 이 가운데 황룡사지 출토 진신사리는 자장법사가 선덕여왕 12년(643)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와 봉안한 사리. 황룡사 구층탑과 태화사탑, 통도사 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던 불사리 100과중 일부이다. 황룡사 찰주본기는 벼락을 자주 맞았던 황룡사 구층탑의 두 번째 수리(872∼873년)내역을 담은 기록. 탑 중수 사실과 9세기 후반 신라의 정치적인 상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 민간에서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황룡사 사리 이운과 고불식 및 사리 친견은 23일 오전 10시 조계사 대웅전에서 있으며 개막식은 28일 오후 3시에 열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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