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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플러스/日국립대 조선학교 학생 수험자격

    |도쿄 연합|일본의 4년제 국립대 83개교 가운데 80개교가 올봄 입시부터 재일 조선학교 출신 학생에게도 수험자격을 인정하기로 했다고 도쿄신문이 24일 보도했다.또 아직까지 방침을 정하지 못한 도야마대와 도쿄의대 치과대 등 2개교는 수험자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절차를 밟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그러나 나머지 1개교인 도쿄공업대학은 조선학교 출신 학생에게 수험자격 인정신청서를 내도록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 故전재규씨 부친 2억 서울대 기부

    지난해 말 남극 세종기지에서 동료를 구하려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고 전재규 대원의 부친 전익찬(55)씨가 전 대원의 모교인 서울대에 장학금 2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서울대는 16일 오후 총장실에서 전 대원의 부친과 정운찬 총장,김하석 자연대학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장학금 전달식을 갖는다고 14일 밝혔다. 앞서 전씨는 전 대원의 모교인 강원 영월고와 한국 해양연구원에 각각 1억원을 장학금으로 희사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
  • “내 성격은 하얀 도화지 모든 색깔 담을수 있죠”/제2전성기 맞은 ‘만능 엔터테이너’ 한성주

    그랬다.변신을 꾀한 게 아니었다.기존의 지적인 이미지도,최근 오락 프로에서 보여준 조금은 ‘망가지는’ 모습도 모두 그녀였다. “백지 도화지와 같은 ‘무색’이에요.갖가지 색깔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그녀는 자신의 성격을 색깔로 비유했다.장난기 있는 말투에 솔직함과 소탈함이 느껴졌다. ‘도대체 왜 변한거야?’곱지 않은 시선을 씻어버리니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났다. 미스코리아 출신 전아나운서 한성주(30)를 만났다.참 오랜만의 인터뷰라고 했다.지난 99년 모 재벌 회장 막내아들과 결혼한 뒤 불과 5개월 만에 이혼하는 아픔을 겪은 그녀.3년여 만에 다시 나타나 라디오 DJ와 각종 쇼·오락 프로그램의 패널 등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섹시 댄스가수요? 절대 아닙니다.” 한성주는 최근 화제에 오른 ‘댄스가수 데뷔설’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했다.“일부 언론에 보도된 것은 봤어요.어이가 없었죠.한번만이라도 제게 물어보고 기사를 썼더라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텐데….” 그녀는 “네살 때부터 무용을 배워 춤엔 자신이 있었고 몇몇 프로그램에서 그 실력을 공개했는데,그게 오해를 산 것 같다.”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에겐 다른 욕심이 있다.“기회가 주어지면 제 이름을 내 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싶어요.토크쇼도 좋고 라디오 프로도 좋아요.저만의 색깔을 펼쳐보이고 싶거든요.” 그녀는 드라마와 영화,광고쪽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화장품·전자회사 등 이미 3편의 CF섭외가 들어온 상태이며,봄철 방송 개편과 함께 드라마 출연은 물론 스크린 진출도 타진하고 있다고 매니저가 귀띔했다. ●“이젠 믿음과 신뢰를 나눌 수 있는 남자 만나고 싶어요. 원하는 남성상을 물었다.“다시 남자를 만난다면 굳이 말을 안해도 서로 믿음과 신뢰를 주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내내 털털한 말투를 보인 그녀가 수줍게 미소지었다. 이혼 후 쉬는 동안 학업에만 몰두했다고 했다.“아픔을 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여있는 물’이 되고 싶지 않았죠.평소 좋아했던 국제관계학을 마음껏 공부하니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모교인 고려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하와이대 동서문화연구소에서 공부하다 최근에는 박사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고현정’이라는 이름 석자를 언급하자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서로 만난 적도 없고 결혼한 과정도 다른데 왜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어요.들러리가 된 것 같아 억울하지만,‘후발주자’가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죠.”호탕하게 웃어 넘긴다. 학교를 다니듯 평생 어딘가에 적을 두며 살고 싶다는 그녀.그 곳은 시청자들의 마음 속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영표기자 tomcat@
  • “세속화·물신주의 버리고 공신력 되찾자” 종교계 정화운동 ‘잰걸음’

    새해 벽두 각종 선거자금 수수와 유용 혐의가 있는 정치인들이 줄줄이 구속되는 험한 상황에서 종교계가 종교 내부의 자정과 개혁을 잇따라 천명하고 나서 주목된다. 불교계는 지금까지 종교계에서 드물었던 외부감사를 자청하는 사찰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조계종 총무원장이 사찰들의 외부감사 추진을 공표하고 나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개신교도 각 교단장이 한목소리로 자정과 반성을 새해 화두로 꺼낸 데 이어 보수·진보교단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모두 신년 하례회에서 교회의 자정을 결의해 이같은 움직임이 교계 전체로 확산될 조짐이다. 종교계의 자정 움직임은 지난 연말 각 종단이 미리 발표한 신년사에서 감지됐으나 새해들어 실천 운동 차원으로 번지고 있어 관심을 끈다.비단 정치권 비리와 다툼으로 얼룩진 사회의 정화를 넘어 종교 자체의 자기반성과 개혁의 다짐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선 불교계의 외부 감사 자청은 아주 이례적인 일.현재 조계종의 경우 각 사찰들이 교구본사의 감사를 받도록 돼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 결과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었다.이에 비해 서울 송파구 석촌동 불광사(주지 지정 스님)는 교계 처음으로 외부감사를 자청해 받고 있으며 서울 강남구 양재동 능인선원(주지 지광 스님)도 다음주 중 외부감사를 신청할 예정이다. 이같은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어 종단의 부정부패를 막고 재정의 투명성을 위해 올해부터 직할사암부터 외부 감사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신교의 양대 산맥인 한기총과 KNCC가 나란히 교회 내부의 정화를 결의하고 나선 것도 이례적이다. 개신교의 경우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세확장과 담임목사 세습 등 물신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교회 안팎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보수쪽의 한기총은 지난 5일 신년하례예배에서 기독교의 자정 노력 없이는 교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으고,자숙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선한 영향을 미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이에 앞서 진보쪽의 KNCC도 지난 2일 신년예배에서 “현재의 한국교회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고 고백한 뒤 교회가 우리 사회 속에서 잃어버린 공신력을 다시 회복해 나가자고 다짐했다. 교계 최초로 외부감사를 자청한 불광사 주지 지정 스님은 “다른 사찰 주지들을 생각할 때 부담스러웠지만 가장 청빈하게 살아야 할 종교인들이 솔선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사회를 위해 바른 일인 것 같아 외부감사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4)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

    1898년 10월29일 종로 네거리 운종가 광장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가 열리고 있었다.외세의 국권 침탈위기에 맞서기 위해 정부 대표자와 민간인 각 계층 대표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국정개혁 원칙을 민중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고,결정된 내용을 실천하기 위한 다짐을 하자는 큰 모임이었다.이 모임은 거리에서 관민이 함께 참여하여 벌이는 한국 최초의 합동토론회였다. 오후 2시.광장에는 황국협회,황국중앙총상회,순성회,협성회,광무협회,진신회,친목회,교육회,국민협회,진명회,일진회,보신사 등 각 사회단체들이 모였다.순성회 부인들,각 학교 생도들,시전상인들,맹인,승려들,백정(白丁)들,정부부처 관료 및 신사들이 청첩장 받은 순서대로 참석해 있었다. ●무어에 세례받은 백정 만민공동회 연설자로 오후 3시.대회장인 윤치호가 먼저 만민공동회의 목적을 설명하고 인사말을 했다.곧이어서 군중은 만세를 불러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한편 질서유지에 힘썼다.그런 다음 만민공동회의 개막연설자가 단상에 올랐다.회의장은 순간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졌다.연단으로 올라서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개막 연설자로 지명된 사람은 놀랍게도 백정 신분이자 새뮤얼 무어 목사한테서 세례받은 곤담골교회 박성춘(朴成春)이었다.박성춘이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이에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저 차일(遮日)에 비유컨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심히 견고합니다.원컨대 관민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적에 보답하고 국조로 하여금 만만세를 누리게 합시다.” 회중은 연설을 끝낸 박성춘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고,연단 아래 모였던 수십명의 백정들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만세를 불렀다.이 광경은 여러 날을 두고 장안의 화제였다.박성춘,그는 이날의 연설로서 독립협회 주요인물인 안창호,서재필 같은 큰 인물들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민족자립을 논의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무어 목사는 한국에 온 이듬해인 1893년 지금의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중간쯤에 있었던 곤담골에다 교회를 열고 곤담골교회라 이름을 지었다.교회에는 마을 아이들을 위한 예수교학당을 함께 열었다.무어 목사는 늘 길거리에서 한국사람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을 예수교학당에 보내라고 권했다.그 마을에 살던 박성춘이라는 백정도 무어 목사라는 사람의 진실된 성품이 싫지 않아서 그의 아들 박서양을 주일학교에 보냈다. 그후 박성춘은 발진티푸스를 앓아서 죽게 되었다.박서양은 주일학교에 나와서 아버지 병을 낫게 해달리는 기도를 하면서 울었다.이를 본 무어 목사가 그 까닭을 물었고 박서양은 아버지의 병환의 위급함을 말했다.무어 목사는 박서양을 돌려보낸 뒤 급히 다른 선교사를 만나러 갔다. 고종황제의 어의(御醫)인 에비슨(Oliver R Avison)을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황제의 전문의사에게 천민보다 더 핍박받는 계급 백정을 진료해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설혹 에비슨이 승낙한다 하더라도 그런사실을 정부 대신들이나 서울의 양반들이 알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에비슨은 무어 목사의 간곡한 청을 듣고 망설이지 않았다.무어 목사의 눈에 백정들의 참담한 생존이 가장 시급한 구원의 대상으로 비쳤듯이 에비슨의 눈에 비친 무어 목사의 행동은 천사로 비쳤기 때문이다. 두 명의 선교사들이 백정 박성춘을 찾아왔다.박성춘이 완쾌할 때까지 두사람의 발걸음은 계속되었다.박성춘은 임금님의 주치의가 자기 같은 천민을 치료해주기 위해 누추한 곳까지 와준데 깊은 감동을 받았다.완치된 뒤 그의 자식들 모두를 주일학교에 보낸 그도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어 같이 설움받고 사는 백정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그런가 하면 큰아들 박서양이 의학을 공부하여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치료해주는 삶을 살아가도록 키웠다.박서양은 결국 1899년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졸업하면서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무어 목사는 한국식 이름을 지었다.모삼열(牟三悅).소울음소리 모(牟)자를 즐겨 쓴 이유는 백정들의 애환과 고난을 자신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1895년 박성춘은 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곤담골교회는 교인 20명의 제법 뜻있는 교회로 자리잡아갔다. ●“양반전도 어렵다” 선교사들 불평·비난 받아 그 무렵 첫 차별사건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다.교회에 나오던 양반 신도들이 발길을 끊는 일이 생긴 것이다.사정을 알고보니 양반 신도들은 백정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심지어는 백정 같은 천민도 예수를 믿으면 죽은 뒤 천당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백정이 가는 천당이라면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양반 신도도 있었다.백정이 믿는 하느님과 양반이 믿는 하느님이 동일하다는 것은 곧 양반을 능멸하는 짓이며,더욱이 한 교회 지붕 밑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천당을 생각하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도 있었다. 여러 날이 지난 뒤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며 뉘우치는 이들이 생겼다.그들은 무어 목사에게 새로운 제의를 했다.자기들을 앞자리에 앉게 하고백정들을 뒷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구별해준다면 다시 교회에 나올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무어 목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그후 1904년 지금의 인사동으로 옮겨 1905년 승동교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한국 기독교사상 가장 뜻깊은 역사를 간직한 교회의 하나가 되었다. 박성춘이 교인이 된 뒤 무어 목사는 에비슨 박사와 함께 뜻을 모아서 백정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1895년에서 189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조정에 탄원서를 냈다.이들의 호소는 받아들여졌다.비로소 백정도 한국의 국민 자격을 얻어 호적에 오를 수 있었고 일반인들처럼 갓도 쓰고 두루마기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백정들은 머리에 갓 쓰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외출할 때에는 패랭이를 쓰고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디서나 한 눈에 백정 신분임을 드러내도록 했다. 2차대전 이전 독일의 유태인들이 가슴에 노랑색 별을 달고다녀야 하듯 했고,인도의 최하층 노예신분인 수드라가 항상 황토색깔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 것과 같았다.그러다가 갓을 쓸 수있다는 법령이 공포되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령을 발표했을 때 기뻐했던 흑인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도높은 기쁨이 한국 전역의 백정들을 울부짖게 만들었다.어떤 백정은 하도 좋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쓰고 살았던 이가 생겨났을 정도였다. ●‘철도공사장 노동자 인권침해' 日에 항의 이와 같은 선지자적인 무어 목사의 행동은 많은 선교사들의 불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서울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이들은,교회가 백정들의 인권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면 양반들에게 전도하기 어려워지게 되고 결국에는 교회가 성장하는데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불평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또한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양반들을 교인으로 전도해야만 교회의 위상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실익이 생길 수 있지만,백정 같은 천민들이 아무리 교인으로 많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은 별로 커지지 않는다고 했다.백정들의 인간해방 운동을 위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아무 의논도 없이 임금에게 탄원서를 낸 것은미 국무부 정책을 위반하여 다른 나라 정치와 관습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899년 12월 무어 목사는 고종황제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알렌 공사로 하여금 주선해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의 백정들에 대한 인권탄압 정책과 제도를 혁파해달라는 요구를 고종황제에게 해볼 결심으로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거절당한 뒤 할 수 없이 문제의 그 편지를 직접 고종황제에게 보냈고,그로하여 알렌 공사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무어 목사는 아내의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 1902년부터 1년 동안 미국의 고향에서 요양을 끝내고 1903년 9월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그 무렵 무어 목사는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했다.알렌 공사와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천민이나 서민들보다 양반과 부자,귀족들에게 주로 선교활동을 펴면서 백정선교에 집중하는 무어 목사를 미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행동을 한다고 비난하는데 지쳐갔다. 그는 살림도 할 수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장만하여 ‘기쁜 소식(The Glad Tidings)’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해안에 흩어져 있는 작은 어촌과 섬,그리고 한강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길은 마음 속에서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런 중에 일본 군용철도 공사장에 강제로 동원된 한국 노동자들의 심각한 인권침해 문제를 일본영사관에 제기했다.일본영사관에서 아무런 반응을 안보이자 일본군의 잔혹행위를 고발하는 성명서를 해외선교부에 보내 도와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1906년 전도여행길서 병얻어 46세로 사망 그때 무어 목사는 한국인들이 일본군인들에게 그토록 짓밟히면서도 민중봉기가 없는 것은 한국인들이 수탈과 억압에 너무 익숙해져 인간의 혼이 죽어버린 탓이 아닌가 하고 통곡했던 적도 있었다.그때부터 평양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자유사상을 고취시켜 나간다면 장차 인간의 혼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한국인을 사랑하던 무어 목사는 1906년 전도 여행길에서병을 얻어 그해 12월22일 세브란스병원에서 46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의 백정을 사랑한 인권의 은인이자 인간해방의 참뜻을 가르친 위대한 사도였다.그의 인권사상은 그가 죽은 지 16년 뒤인 1922년 백정해방운동으로 되살아났다.
  • 儒林(유림) 한자이야기

    작가 최인호씨의 연재소설의 제목 의 儒(선비 유)자는 사람 인(人)과 모름지기 수(需=須)의 결합이다. 사람들에게 모름지기 있어야 할 道(도리 도)를 닦는 선비를 뜻한다. 儒라는 한자는 집단을 뜻하는 林(수풀 림)자와 결합되어 공자 등 聖賢(성현: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經典(경전:성인의 글이나 언행을 기록한 책)과 그에 관련된 학문을 연구·실천하고 국가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어휘로는 선비의 무리를 뜻하는 士林(사림)과 道敎(도교)가 유행이었던 고려시대에 盲人(맹인)들이 杖(지팡이 장)을 짚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운수를 보아 주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해서 생긴 杖林(장림),그리고 학자 또는 文人(문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翰林(한림) 등이 있다. 유림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유학이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 조선왕조 건국이념의 기반이자 주 학문 및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특정 學者(학자) 또는 서원 및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원은 주세붕이 설립한 경북 영주에 있는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시초로 각 지방마다 세워져 사립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향교는 국가가 관장하는 일종의 국립교육기관이었다. 서원과 향교에서는 유학 경전과 유교의 儀禮(의례) 내지 행동지침을 공부하는 한편,성현들을 기리는 祭享(제향)을 통해서도 그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르는 동시에 직접 교육을 맡아 참다운 유교인을 양성하였다. 중앙의 성균관은 文廟配享(문묘배향)과 함께 국립대학의 기능을 하면서 유교교육의 중심이 되어 국가 동량을 길러냈다.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나 學風(학풍) 형성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덕을 쌓아 완전한 유교인으로서의 인격을 닦은 후 성현의 도를 국가사회에 구현한다는 면도 있었으나,출세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21년(1884) 과거제도의 폐지로 儒者(유자)들의 一身榮達(일신영달)과 현실참여의 통로가 봉쇄되면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림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일부 인사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儒學(유학)에서 중요시하는 仁(인),義(의),禮(예),智(지),名分(명분),淸廉(청렴) 등은 조선시대 내내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다.이러한 선비정신은 丙子胡亂(병자호란:丙子年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입해 일으킨 난)과 壬辰倭亂(임진왜란:壬辰年에 왜구,즉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난)때에는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의 정신적 기조가 되기도 했다. 義(의)와 名分(명분),正道(정도) 등을 중요시하다 보니 옳고 곧은 말을 서슴지 않아 유배 등의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려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전라남도로 유배(중종14년인 1519년)된 후 1개월 만에 賜藥(사약:賜 줄 사,藥 약 약,임금이 죄인에게 먹고 죽을 독약을 내려 주는 것)을 받고 죽은 조광조도 그 중의 하나였다. 박 교 선 교육부 연구사
  • [정동주 역사문학 에세이-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3)한국인을 사랑한 사람, 무어 목사

    “대황제 폐하께,나 새뮤얼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만약에 황제폐하께서 폐하의 신하들과 함께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신다면 저를 불러주시길 황송한 마음으로 바라옵니다.” 한글로 적힌 이 편지는 겉봉에다 ‘코리아의 황제,서울시(The Emperor of Korea,City)’라 적고 그 안에 넣어져 우체통에 있었다. 이 편지는 고종황제께 전달되지 않고 내무부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그 관리는 편지를 보낸 이가 그즈음 한창 한국의 백정(白丁)들에게 설교하는 일로하여 미국선교단과 서울 주재 외교관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새뮤얼 무어라는 사람임을 알았다.그 관리가 보기에 무어 목사는 불손하기 그지없었다.감히 일개 외국선교사가 사사로이 고종황제에게 편지질을 한 것은 크게 비난받을 무례한 짓이라는 공식 불평과 함께 그 편지를 미국 공사 알렌(H,N,Allen)에게 다시 보냈다. ●“무어는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 같다” 편지 겉봉의 수신인은 ‘코리아의 황제’,수신인의 주소를 ‘서울(City)’이라고 적은 것은 우습기도 하고 기발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편지를 검토한 알렌 공사는 미 국무부에 보낸 공문서에서 “이런 겉잡을 수 없고 무례한 선교사는 공사관 영창에 가둬야 옳다.”고 했다.그의 어머니께 보낸 편지에서는 “무어라는 괴짜 선교사 한 사람을 감금시키겠다고 협박할수밖에 없다.”고 했으며,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Ellinwood)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무어 목사는 가장 어렵고 귀찮은 사람이며 내가 언젠가 그를 ‘미친인간’으로 보지 않으리라 장담 못하지만 그의 행동은 분명 ‘정신이 건전치 못한 사람’같다.”고 썼다. 또한 “무어 목사가 고종황제를 만나겠다는 것은 그의 백정들(his butchers)을 인정받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며,‘정신 상태가 건전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서 공사관에 관계된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의 보호뿐만 아니라 무어 목사같은 괴짜들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선교사 거류지를 차라리 부산,인천,원산과 같은 개항지로제한하는 것이 좋겠다.”고 까지 썼다. 알렌 공사는 1900년 가을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서,앞으로 무어 목사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알렌 공사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 재한 미국인 거류민으로서 어울리는 행동을 하겠다는 서약을 받도록 했다.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는 회의록을 미국공사관에 전달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무어 목사는 이 통고를 받은 뒤 몹시 괴로워하다가 “내가 미국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에 대하여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하여 나의 상관에게 매우 버릇없이 말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는 사과편지를 알렌 공사에게 보내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알렌 공사의 말대로라면 “무식한 토박이 글쟁이가 썼기 때문에 무례한 글”이었으나 무어 목사는,“그 편지는 지도를 받아 가장 존대하는 말로 썼으며,편지 겉봉의 표기가 잘못되어서 불손하다는 항의를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본의가 아니고 이 나라의 관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며,불손한 의도는 전혀 없었고 다만 황제폐하와 그가 다스리시는 나라의 현재와 영원한 복락을 염원해서 쓴 것이었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비단 이 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민 계급의 대명사이자 가장 탄압받고 사는 백정들에게 기독교를 통하여 인간의 존엄과 평등의 참뜻을 깨닫게 하기 위한 선교활동으로 인하여 알렌 공사와 무어 목사 사이에는 비난과 해명의 편지가 여러 차례 오고 갔다. ●1900년 서울 외교관들 화제의 주인공 무어 목사는 참기 어려운 마음의 괴로움을 선교본부 엘린우드 총무에게 편지로 토로했다.“나와 같은 사람을 파괴시키기 위해 알렌은 그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느껴집니다.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증오한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알렌에게 품었던 미워하는 감정은 몇 주간이었고,그 폭풍은 벌써 지나가버렸습니다.아마 누군가가 특별히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라고. 1900년 한해 내내 서울의 외교관들 사이에서 단연코 화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던 무어 목사는 그때 40세였다. 새뮤얼 무어(Samuel F.Moore,한국 이름 모삼열·牟三悅)는 1860년에 태어나서 1906년에 이 세상을 떠났다.그가 한국에 온 것은 1892년 9월19일 제물포를 통해서였다.시카고 부근 그랜드 리지(Grand Ridge)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1889년 몬타나대학(College of Montana,현재 이름은 RoCky Mountain College)을 마치고,매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1892년 봄에 졸업했다. 대학 시절부터 남다른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대학시절 학교 근처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렬하게 외쳤고,신학교 시절에는 경찰서 유치장의 죄수들을 찾아다니며 인간의 행복에 대해 설교하기도 했다.그해 9월 로즈 엘리(Rose Elly)와 결혼하여 미국 북장로 선교사가 되어 두 달 뒤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15년동안 한국에 살면서 아들 셋,딸 하나를 모두 한국땅에서 낳아 길렀다.딸은 무어 목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내의 복중에 있어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죽은 뒤에도 한국땅에 묻혀서 우리와 함께 살지만,그가 떠난지 10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한국인은 그토록 그가 차별받은 사람들을 붙들고 절규했던 인간평등과 사랑을 많이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다. ●3년만에 한국말로 완벽하게 설교 그는 한국에 온 뒤 빨리 한국말을 익히기 위하여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그 당시 선교사들은 정동이나 연동에 모여 살았다.신변의 안전과 가정생활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한국인 마을에서 서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빼어난 언어감각으로 한국이 온지 반년이 채 못지나서 한국말로 주기도문을 유창하게 외웠고,간단한 기도는 거뜬히 할 수 있었다. 3년 뒤 그는 수원의 한 교회에서 한국말로 설교를 했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한국 서민이 사용하는 말로 교인들을 감동시킨 나머지 한 교인이 미국에서도 목사들이 한국말을 쓰는지 묻는 바람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한국사람이 양복만 입은 것 같다는 한국인들의 그에 대한 칭찬은 그의 한국말 솜씨가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의 생활 대부분이 한국인들과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 그의 말은 서민들의 생활언어여서 서민이라면 누구하고도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그즈음 미국의 선교사위원회에서는 선교활동을 돕기위하여 선교사들에게 ‘한국어 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있었다.그런데 그토록 한국말을 잘하는 무어 목사는 그 시험에서 늘 낙제점수를 받았다.이유는 사뭇 엉뚱했다.그 시험에서는 서울 양반계층들이 사용하는 유식하고 고급스러운 말들만 물었기 때문에 무어 목사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선교위원회에서는 무어 목사에게 양반의 고급 교양어를 배우도록 권고했다.무어 목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민중을 가르치려면 민중과 호흡해야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기고 싶은 것은 평범하고 진실된 한국 서민들이며,그들을 위하는 길은 양반들의 고급스러운 말을 이용한 성경운동 보다는 그들의 가난하고 낮은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그들의 마음이 되어서 그들의 눈과 가슴으로 인간이 평등해야 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자유를누리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그들의 사용하는 말을 쓰는 것 보다 현명한 것은 없다고 했다. 감리교의 초기 선교사였던 아펜젤러(H.G.Appenzeller) 목사는 어느날 무어 목사가 어느 교회앞 길거리에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한국말을 자유롭게 구사하면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동적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그는 민중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민중의 습속을 생활하면서 민중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이런 그의 진지하고 애정어린 태도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갖게 했고,향기롭게 새겨진 그의 인상은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남아 있다. 그의 집은 늘 한국 서민들로 북적거렸고,항상 그는 길거리에서 서민들을 만나 세상사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좋은 이웃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그의 집을 인의예지가(仁義禮智家)라 칭송했다. 오늘,같은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저 천하에 몹쓸 지연,학연,혈연이 만든 질병앞에서 나는 다시 한번 무어 목사를 그리워한다.
  • [씨줄날줄] 아름다운 기부

    ‘사람만이 희망이다.’는 시인의 말도 있었지만 한국 사회의 희망과 저력은 역시 ‘보통 사람’에 있는 것 같다.지난 세밑 불우이웃돕기 성금 접수결과 부자동네로 소문난 서울 강남권 주민들의 모금액이 서울에서 하위권으로 나타났다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발표가 나와 쓴웃음을 짓게 하더니 새해 벽두에는 평범한 이웃들의 아름다운 사연이 보란 듯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어 하는 얘기다. 재산가치 400억원대의 병원을 16년 동안 가꿔 직원들에게 환원한 여수 성심병원 명예이사장 박순용(61)씨.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상업고와 전문대를 나와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경영인이다.숱한 실패를 겪었으면서도 “사회가 나를 믿어줘 성공했으니 세상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며 평소에도 달동네 주민 돕기 등을 해오다 이번엔 병원을 통째로 내놓았다.삶의 희망이었던 외아들 전재규씨를 남극 기지에서 잃은 아버지 전익찬(55)씨의 사연은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한다.가난한 과학도로서 학비를 벌고자 극지근무를 자원한 아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여행보험금,조의금 등을 모아 아들의 모교인 영월고교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한 것이다.어떻게 보면 적은 돈일 수도 있지만 아들의 생명과 맞바꾼 ‘천금’일 수도 있는 돈을 후학들에 돌림으로써 그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있다. 사회상층부의 솔선수범을 뜻하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프랑스어가 있다.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나라에는 내로라하는 명망가보다 자수성가하거나 어려운 이들의 기부 소식이 더 자주 들린다.지금까지 거액을 쾌척했다는 이들은 삯바느질 할머니,행상 아주머니,국밥 장수 등이 대부분 아니던가.혹자는 사회 상층부의 정통성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문화자본이 결핍된 천민적 졸부들이 사회적 의무를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는 ‘보통사람’들의 ‘아름다운 기부’행위가 설명되지 않는다.텔레비전 프로그램의 ARS모금에 답지하는 온정 현상은,모든 국민은 이미 마음은 ‘노블레스(귀족)’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문제는 성숙한 일반 국민의 수준을 못 따라 주는 우리 사회의 상층부이다.‘아름다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우리의 한심한 정치인,기업인들을 떠올리며 분노하게 되는 것도 다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신연숙 논설위원
  • “아들의 꿈 후배들이 이뤄주길”故전재규씨 부친 장학금 쾌척

    “아들이 못다 이룬 꿈을 후배들이 이뤄주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지난해 말 남극 세종과학기지 조난사고로 숨진 고(故) 전재규 대원의 부친 전익찬(55·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씨는 5일 아들 모교인 영월고등학교 총동창회 장학회에 장학금 1억원을 희사했다.이날 오전 영월고 교장실에서 장학금을 전달한 전씨는 “삶의 전부였던 아들도 없는데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그동안 아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위해 노력해 준 영월고 선·후배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전씨가 희사한 장학금은 고 전재규 대원이 남극으로 떠나면서 가입한 여행보험금,조의금 등 하나뿐인 생명과 바꾼 전부인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더욱 숙연케 했다. 영월고는 고인의 남극도전의 꿈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흉상 건립 등 추모동산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영월고 문병완 교장은 “전재규 대원이 간직했던 꿈과 열정 그리고 선·후배들이 함께 흘렸던 눈물은 우리 모두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영월 조한종기자 bell21@
  • “교육틀 바꾸려면 대안학교 키워야”/‘교육개혁 외길’ 43년… 풀무학교 홍순명 대표교사

    누구나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고 앞다퉈 목소리를 높인다.그러나 아무나 선뜻 발벗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충남 홍성에 자리잡은 대안 학교인 풀무학교 전공부(2년제 대학)의 홍순명(사진·66) 교사 대표.지난 1957년 춘천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교직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3년 뒤 풀무학교로 옮겨 지금까지 43년간 교육 개혁을 향해 묵묵히 걸어왔다. “아이들을 그저 ‘빨리 그리고 대량으로’ 가르치는 현 학교 교육은 산업화 시대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지금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독창적 판단력이 중요한 이 시대에 지식 암기 위주의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교육을 바꾸기 위해서는 대안 학교를 양성해야 합니다.규모가 작고 유연성을 갖췄기 때문에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개성 살려주는 교육이 중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교육 개혁을 주장하는 홍 대표는 아이들 개성을 살리는 교육이 결국 우리 사회를 살린다고 말한다. “성적에 따라 진로를 선택했다가 결국 적응하지 못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손해 아니겠습니까.” 그는 무엇보다도 전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학교 교육이 ‘더불어 사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경쟁만을 부추기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정경 유착하는 사람들이 어디 지식 교육이 부족해서 그렇겠습니까.지식 교육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암기 능력이 아닌 건전한 판단력입니다.” 전인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하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홍 대표는 “전인 교육이 진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장애 요인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풀무학교 졸업생 100%가 대학 진학을 하고 있다. “몇몇 아이들은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가기도 합니다.하지만 명문대 가는 것이 목표라면 굳이 저희 학교 입학을 권하지는 않습니다.” 1937년 강원도 횡성서 태어난 홍씨는 17세 되던 해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군 제대 후 원래 다니던 춘천농업고등학교로 복직하는 것을 포기했다.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대안 학교가 있다고 해서 풀무학교로 가기로 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수직적인 데다가 입시 교육을 하는 기존 학교에 크게 실망했습니다.그러던 차에 풀무학교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달려갔습니다.” 풀무학교는 1958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대안학교.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손자 이찬갑씨와 주옥로씨가 문을 열었다. 규모가 작고 전인 교육을 중시하며 개성을 존중하는 ‘새 교육상’을 실천하겠다는 사람들이 만들고 가꾼 학교다. 홍씨도 그 중 한 사람.1987년부터 정년 퇴임한 지난해까지는 교장을 맡았다. 지금은 2001년 세워진 대안대학인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땀을 흘려서일까.지금 풀무학교는 꽤 인기다.5년여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온 아이들이 문을 두드려 경쟁률이 3대1 정도나 된다. 이만큼 학교가 자리 잡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10여년이면 안정될 줄 알았던 학교가 20,30년이 돼도여전히 어려웠다.‘생활을 통해 배운다.’는 원칙하에 학생들과 함께 밭을 일구고 공동 생활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예산 문제도 늘 고민거리였다. 이에 비하면 생계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넉넉하진 않았습니다.하지만 생계는 주관적인 것 아니겠습니까.전 삶의 보람에 초점을 맞춰 살았고 그래서 ‘정신적인 수입’이 많아 풍요롭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감각에 맞춰 전래동화 다시 써 그는 얼마 전 책을 냈다.심청전,춘향전 등 전래 동화를 새롭게 쓴 ‘들풀들이 들려주는 위대한 백성 이야기’.퇴임을 앞두고 간접적으로나마 아이들에게 수업할 방법을 찾다가 책을 쓰게 됐다. “전래 동화가 아이들 심성을 기르는 데 큰 역할을 하는데,아무래도 오래된 글이다 보니 요즘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그래서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래 동화는 서민의 덕을 옹호하고 평등을 지향한다.이런 점들은 받아들이되 가족 이기주의,남녀 차별주의 등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돼제일 먼저 한 건 민생 안정 이런 게 아닙니다.연적을 제거하는 것이었죠.춘향만 해도 그렇습니다.‘여자의 미덕은 순종’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데 이는 양성 평등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홍 대표가 새로 쓴 ‘흥부전’에는 마법과 같은 박이 없다.흥부는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를 심고 자라난 박으로 호박엿을 만들어 돈을 번다.‘대박’을 꿈꾸는 시대에 대한 경계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두 명의 고3학생이 홍 대표를 찾아왔다.졸업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보며 홍 대표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풀무학교 학생 이야기를 해달라고 청했다.“고위 공무원이나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답이 먼저 돌아왔다. “모두 두각을 나타내기보다는 더불어 살 줄 알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제겐 모두 소중합니다.세상엔 주연 못지 않게 조연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글 사진 홍성 나길회기자 kkirina@
  • ‘날인없는 유언장’ 500억 법정공방

    날인 없는 유언장을 놓고 500억원대 법정공방이 벌어지게 됐다. 연세대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1월 숨진 김운초 전 사회개발연구원장이 학교에 예금 120억원을 포함,전재산을 증여하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작성했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 돼 유족과 법적인 공방을 벌이게 됐다.”고 밝혔다.연세대는 “97년 작성된 유서는 고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고,우리은행 대여금고에 보관됐다가 최근 유족이 예금을 인출하려는 과정에서 공개됐다.”면서 “고인이 학교에 증여할 뜻을 밝힌 만큼 예금에 대한 권리는 학교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연세대는 김 전 원장의 유족이 낸 예금청구소송과 관련,최근 서울지법에 ‘독립당사자 참가’ 신청을 냈다.‘독립당사자 참가’란 타인끼리의 소송에 제3자가 당사자로 소송에 참가하도록 한 민사소송법 조항이다. 김 전 원장의 유족은 “유언장에는 고인의 서명 날인이 없어 법적인 효력이 없으며,유족에게 1차적인 상속권한이 있다.”며 은행을 상대로 서울지법에 예금반환 소송을 냈다. 연세대가 이날 밝힌 김 원장의 예금은 우리은행 97억여원,외환은행 23억여원 등 120억여원이다.연세대는 김 전 원장이 보유했던 부동산 등을 포함하면 총 자산규모는 5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김 전 원장은 세계기독교봉사회 최수열 선교사와 함께 지난 85년 서울 화곡동에 그리스도신학대를 설립했고,모교인 강남대에 3억원을 쾌척하는 등 사회사업에 큰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연세대 관계자는 “고인이 기여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기독교계 대학인 연세대가 세계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큰 돈을 선뜻 기부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박지연기자 anne02@
  • 주5일시대 달라지는 삶의 질/종교계 다양한 이벤트

    주5일 근무제와 관련해 종교계가 갖고있는 인식은 ‘위기이자 기회’라는 것이다.휴일이 하루 늘어나면서 기존의 신행(信行)패턴에 큰 변화가 생겼고 탈도심 현상으로 인한 성당이나 교회,도시사찰에서의 썰물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추세.이같은 상황에서 종교계는 특성을 살린 이벤트며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대책을 세우고 있지만 이런 시도들이 아직까지 생활 속에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불교의 경우 휴가철에만 실시하던 수련회며 사찰체험을 연중 진행하는 등 탈도시 인구를 흡수하려 애를 쓰고 있지만 이들에게 불교적 가치와 세계관을 알리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게 내부적인 평가다.특히 내적 성찰과 정신적 행복에 대한 요구가 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적극적인 대처가 미진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주5일 근무제 확산으로 인한 썰물현상은 개신교가 가장 심한 편.최근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대표회장 옥한흠 목사)가 목회자 29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주5일 근무제 시행에 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72.4%가 주5일 근무제가 한국 교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응답했고 80% 이상이 대책마련의 필요성을 인정했다.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수련원이나 전원·주말교회를 운영하거나 금요 저녁예배를 진행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지나치게 신도들의 휴가의식에 타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따라서 교인들을 신앙적 성숙으로 이끌고 영적 만족을 줄 수 있는 가정사역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면서 신도들의 영적 성숙도와 소속감을 높이기 위한 봉사활동 확대가 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천주교의 경우 주5일 근무제가 생활화된 유럽의 교회들이 더 이상 신자들을 성당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 대신 신자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견지하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주목한다.신앙적인 뒷받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아무리 좋은 프로그램과 사업을 전개한다 해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따라서 천주교는 ‘우리 교구 우리 본당 신자’의 개념을 넘어서 주말이면 도심을 벗어나게 될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끈을 놓지 않도록 유도하기 위해관광지역 교구와 본당과의 긴밀한 협조체제 구축을 중점과제로 삼았다. 김성호기자
  • 주5일시대 달라지는 삶의 질/‘파격’ 시도한 갈릴리교회

    서울 구로구 구로5동 신도림역 부근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갈릴리교회(당회장 인명진 목사)는 주5일근무제와 관련,파격적인 조치를 통해 개신교계 안팎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지난해 7월5일 한국 개신교 사상 처음으로 금요 저녁예배를 연 이후 지금까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오고 있다. 갈릴리 교회도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형식에 따라 매주 일요일 세 차례의 주일예배를 열어왔으나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주일예배 중 저녁예배를 금요일 오후 7시30분으로 옮긴 것.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예배 참석자가 고작 20∼30명 정도였으나 지금은 매회 100여명을 넘는다.전체 신자 수가 700명인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교회측에 따르면 예배 참석자는 20∼30대의 젊은 신자가 주를 이루지만 점차 중장년·노인층이 늘고 있으며 다른 교회 신자들의 참석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다.최근에는 다른 교회로부터 벤치마킹 차원에서 잇따라 문의를 해오고 있다. 갈릴리교회가 금요예배를 시작한 동기는 인명진 당회장의 철저한 신념에 따른것.지난 86년 현재의 장소에서 갈릴리교회를 개척한 인 목사는 줄곧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목회의 으뜸정신으로 삼아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개혁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목사·장로·권사들에 대한 시무투표제를 실시해 교회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한 것이나 인근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토요일 네차례에 걸친 외국인 예배를 열고,헌금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기독교인터넷방송 C3TV를 설립한 게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측이 금요예배 실시이후 보수적인 교회와 신자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다.주일성수(主日聖守),즉 일요일인 안식일 예배를 지켜야 한다는 교리를 무시한데 따른 비난과 항의를 감수해야만 했다.그러나 금요예배에 대한 갈릴리 교회의 입장은 분명하다.주일성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정상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기회를 한 번 더 주는 ‘적극적인 목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지는 않다.금요예배 참석자가 늘면서 신자들의 다양한 욕구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이시급하다.그래서 외부 인사 초청 강연이나 가족단위의 프로그램을 시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김성호기자
  • 주5일시대 달라지는 삶의 질/배낭메는 ‘信行’ 신앙생활도 즐긴다

    서울 노량진에 사는 불교신자 김모(37·직장인)씨는 요즘 주말이 기다려진다.주말이면 집 가까이에 있는 흑석동의 사찰을 홀로 찾곤 했지만 얼마전 해남 대흥사의 주말 ‘새벽숲길 걷기’행사에 참석한 뒤 마음이 바뀌었다.답답한 도심을 떠나 자연 속에 안기는 넉넉함에 신앙생활을 겸할 수 있는 매력에 푹 빠진 것이다.많은 사찰들이 이같은 신행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어 이씨는 주말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할 프로그램을 물색하곤 한다. 충북 제천시에 사는 천주교 신자 이모(50·공무원)씨는 요즘 일요일 아침마다 마음이 설렌다.얼마전부터 부인,초등학교 6학년생인 딸과 함께 인근 배론성지의 행려자 복지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에서 원생들의 나들이며 각종 행사에서 길잡이 봉사를 하고 있는 일이 여간 보람스러운 게 아니다. 주5일 근무제의 확산과 맞물려 종교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무래도 닫힌 공간에서 열린 곳으로,개인에서 가족 혹은 집단중심으로의 신행(信行)변화다.주말 도심을 떠나는 종교인구가 늘면서 각 종교가 이들의 발길을 잡으려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마련하고 나선 가운데 종전 사찰,성당,교회 중심의 신행 패턴이 신자 위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를 대하는 종교계의 입장은 크게 엇갈리는 편.‘최대 수혜자’인 불교가 제발로 찾아드는 탈도심 행렬을 여유롭게 맞아들이는 반면 개신교와 천주교는 교회와 성당을 빠져나가는 예사롭지 않은 썰물현상에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다.주로 명승지 등에 위치한 사찰들은 불교체험 중심의 다양한 수련회를 열어 대응하고 있는 반면 교회들은 주말·전원교회와 ‘사이버교회’를 만들 채비를 하고 있다.성당들 역시 관광사목과 가족피정 등 관광지에 위치한 성당과 본당을 열결하는 가정신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종전 휴가철에만 실시하던 수련회를 연중 상시 행사로 확대한 큰 사찰들은 화장실 등 시설을 현대식으로 증개축해야 할 만큼 혜택을 보고 있다.주말 ‘새벽숲길 걷기’행사를 지속하고 있는 해남 대흥사의 경우 신청자가 밀려 선착순 접수를 받을 정도이며 템플스테이로 인기가 높은 강화도 전등사,경북봉화 청량사와 전남 해남 미황사의 주말 프로그램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일성수(主日聖守)교리를 따르는 개신교 교회의 경우 기본적으로 주5일 근무제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대세를 피할 수 없는 실정.토요일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가정사역프로그램 확대,주말 가족캠프 등 도시·농어촌 연계 프로그램 개발,수양관 등을 활용한 1박2일 수련예배 등 교회밖 프로그램과 소그룹 활동 등 다양한 시도에 나서고 있다. 사랑의교회가 안성 수양관에서 운영하는 주말교회에는 예배 참석자가 평균 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인천순복음교회가 강화도에 대규모 수련관을 세운데 이어 서울교회도 내년 파주에 대형 수련원을 세울 계획이다. 천주교는 다른 종단에 비해 대처가 늦은 편이지만 각 교구별로 가족단위 주말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관광사목에 치중하는 분위기.주일미사 토요미사 평일미사 혼인미사 등 다양한 미사를 통한 서비스를 하고 있는 대천 요나성당과 트레킹,계곡 물놀이,김장하기,메주만들기 같은 이벤트에 미사를 병행하고 있는 평창 대화성당이 눈에 띄는 곳들이다. 그러나 최근 종교계에서 시도하는 이같은 프로그램들은 ‘신도 발목잡기’에 급급한 나머지 종교적 특성을 살리지 못한 채 일회성 여행·관광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신도들을 신앙적 성숙으로 이끌고 영적 만족을 줄수 있는 수준높은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김성호기자 kimus@
  • 미 대선 판세부석/부시 상승기류 VS 딘 경선독주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빠른 감이 있으나 올해 미 대선은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민주당 내부에서는 누가 딘 후보의 ‘러닝 메이트’가 될지에 더욱 관심이 쏠릴 정도다.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생포 이후 급상승하면서 외교·안보 부문에서 취약한 딘 후보가 민주당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높다. ●지지도 59%까지 높아진 부시 내년 재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겼던 두 가지 쟁점에 청신호가 켜졌다.적어도 경기가 회복되면서 경제 문제로 고배를 마신 아버지 부시의 전철은 되밟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5% 후반의 실업률 등 노동시장이 불안하지만 원래 고용사정은 경기가 회복된 뒤 6개월에서 1년이 지난 뒤에 나아지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는 게 자체 분석이다. 이라크 문제는 후세인 생포를 계기로 비난 여론이 가라앉고 있다.이라크 저항세력의 반발이 계속되고 미군의 사상자 수가 늘지만 이라크 정책을 바라보는 미 유권자들의인식은 ‘불안’보다 ‘기대’가 높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정책에 60%가 지지했다.전쟁이 가치있다는 응답도 59%로 다소 높아졌다.대통령의 직무수행 지지도는 59%로 8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부시의 선거진영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세력이 45대45로 엇갈려 내년 선거 역시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선거일이 다가올수록 무소속인 부동표를 잡는 게 관건이며 특히 백인 유권자를 중심으로 한 공화당원의 결속이 중요하다고 본다.따라서 광우병 등 현재의 쟁점에 민감히 반응하기보다 당원 등록 등 조직관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앨 고어·공무원 노조 지지받는 딘 민주당 예비선거를 앞둔 대부분의 주에서 딘 후보가 크게 앞서고 있다.워싱턴포스트의 전국 여론조사에서 딘 후보가 31%의 지지를 얻은 반면,리처드 게파트 하원의원과 조지프 리버맨 상원의원은 각각 9%,존 케리 상원의원 8%,웨슬리 클라크 전 나토사령관은 7%에 그쳤다.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에서 실시된 최근 조사에서도 딘은 26%와 24%를 얻은 반면,2위인 클라크 후보는 15%와 21%에 그쳤다.다른 후보들은 기껏해야 9%를 받았을 뿐이다.1월19일 첫 코커스(당원대회)가 열리는 아이오와와 27일 예비선거가 열리는 뉴햄프셔에서도 딘은 선두자리를 한 차례도 내주지 않았다. 의회 내의 지지도도 높아지고 있다.하원 대표를 지낸 게파트 후보가 의원 34명의 지지를 얻어 1위이지만 딘 후보도 의원 29명의 지지를 얻었다.케리 상원의원이 22명,리버맨 상원의원이 14명,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이 8명인 것에 비하면 의회에 진출하지 않은 딘 후보로선 대단한 성과다. 특히 앨 고어 전 부통령이 딘 후보 지지를 선언한 뒤 의회뿐 아니라 중앙 정치무대에서 동조하는 세력들이 느는 추세다.전통적으로 노조의 후광을 업은 게파트 의원을 제치고 딘 후보가 공무원 노조 등의 지지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부시-딘의 대결에서는 부시가 압도 딘 후보가 부시 대통령에 맞설 민주당의 ‘대안’인가에는 의문이 일고 있다.외교정책의 ‘문외한’인데다 군 경력이 없어 특히 안보 문제에 취약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그 때문에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는 딘 후보가 부시 대통령의 ‘적수’가 아니라는 점이 줄곧 제기되고 있다. 베트남 참전영웅이자 외교정책 전문가인 케리 상원의원은 지난 12월27일 매사추세츠에서의 연설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이 보도자료에 의해 명확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딘 후보가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뒤늦게 보도자료를 내고 말을 바꾼 것을 꼬집은 것이다. 앞서 여론조사에서 부시 대통령과 딘 후보가 나설 경우 부시를 찍겠다는 응답은 55%인 반면 딘 후보 지지는 37%에 그쳤다.특히 이라크전쟁을 지지한 대통령 후보에 투표하겠다는 대답이 57%로 나와 ‘반전의 기치’로 인기를 모은 딘 후보가 본선에서 불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 안팎에선 딘 후보가 예비선거의 바람을 타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약점을 보완할 러닝 메이트를 골라야만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1차적인 후보로 클라크 후보가 거론됐으나 본인은 부통령에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남부의 지지를위해 노스 캐롤라이나의 존 에드워즈 상원의원이 자천·타천으로 오르내렸으나 그 역시 부통령에는 ‘노’라고 거절했다. 반면 부시의 선거진영은 딕 체니 부통령을 러닝 메이트로 재지명한다는 데 아직 이견이 없다.그러나 공화당 일각에서는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체니 부통령의 정경유착 비리가 선거 과정에서 불거지면 다른 인물로 바꿔야 한다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또한 취업이민 확대와 대형 프로젝트 사업의 발표로 민주당 성향의 표를 잠식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mip@ ■딘 후보는 |워싱턴 백문일특파원|‘정가의 이단아’에서 가장 유력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하워드 딘 전버몬트 주지사는 1948년 11월7일 뉴욕에서 태어났다.증조부는 현 시티그룹 계열사인 스미스바니 증권의 창업자로 가문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부친도 월가의 투자은행인 딘 위터의 최고 경영자다.상류 지식층 가문을 대변하는 존 케리 상원의원이나 부친이 트럭운전사 출신으로 노조에 어필하는 리처드 게파트 하원의원과 같은 ‘정치적 이미지’가 그에게는 없다.부친은 딘 후보가 월가의 투자가로 크기를 바랐다.영재 학교인 뉴욕의 브라우닝 스쿨과 로드 아일랜드의 조지스기숙학교를 보낸 것도 부친이다.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졸업하기 1년 전이자 존 케리 상원의원이 졸업한 1년 뒤인 1967년 예일대에 들어갔다. 딘 후보는 정치과학을 전공했으나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고 책벌레도 아니었다.다만 많은 사람들을 사귄 정도였다.1971년 졸업과 동시에 그는 콜로라도 아스펜에서 1년간 접시닦이와 막노동으로 시간을 보내며 스키를 즐겼다. 부친의 압박에 못이겨 이듬해 뉴욕 월가에서 3년간 투자자의 길을 걸었으나 콜롬비아대 의학부에 등록했다.부친에 대한 반발감이 크게 작용했다.이어 뉴욕의 앨버트 아인슈타인 의대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이민온 유대인 가문 출신의 주디스 스타인버그를 만나 결혼했다.그의 모친이나 부인은 딘 후보가 당연히 평생 의사의 길을 걸을 것으로 여겼다.버몬트에 정착한 것도 정치적 동기가 아니라 유일하게 버몬트 의대가 내과 레지던트로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그는 1980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재선 캠프를 도운 게 인연이 돼 버몬트 한 카운티의 민주당 의장직을 맡았다. 이후 1982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됐고 1986년 부지사에 당선됐다.그는 부지사에 당선되고도 내과의사 활동을 계속했다.인구 60만의 버몬트에서 부지사직은 파트 타임으로도 가능했다.1991년 공화당 출신의 리처드 스넬링 주지사가 사망,당시 환자를 돌보던 딘 후보가 주지사 자리를 이어받았다. 딘 후보는 12년간의 주지사 경력을 바탕으로 부시 행정부의 각종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대테러 전쟁이 미국의 고립을 부르고 인종별·성별 차별정책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게 출마의 변이다.일각에서는 레지던트 시절 한살 아래 동생인 찰리가 라오스에서 실종돼 죽은 뒤 잠재했던 반전감정이 대테러 전쟁으로 되살아났다고 보기도 한다. ■美대선 어떻게 치러지나 |워싱턴 백문일특파원|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는 직접과 간접의 혼합형이다.유권자가 선거당일 투표한다는 측면에선 직접선거지만 대통령 후보가 아닌 정당의 ‘선거인단’을 선택한다는 차원에선 간접선거다. 내년 대선은 11월2일에 치러진다.선거인단의 수는 총 538명으로 하원 435석과 상원 100석,워싱턴 DC 대표 3석 등을 합쳤다.메인과 네브래스카주를 제외하곤 각주에서 이긴 후보가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하는 ‘승자독식방식(winner take all)’ 시스템이 적용된다.2000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처럼 총 득표율에서 앞서고도 선거인단이 많은 주에서 져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투표로 뽑힌 선거인단은 12월 둘째 수요일을 지난 다음주 월요일 주 의회에서 자신의 정당 후보에 투표한다.선거 개표 결과 사실상 대통령이 확정되지만 의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전통에 따른 일종의 요식 행위이다. 각 당의 대통령 후보는 전당대회에서 공식 지명된다.공화당은 내년 8월30일∼9월2일 뉴욕에서,민주당은 7월26∼29일 보스턴에서 열린다.그러나 앞서 1월부터 열리는 예비선거를 통해 3월 중순이면 각 당의 대통령 후보가 내정된다.예비선거는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대의원을 뽑는 절차이다.미국의 대통령은 1차례 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첫 4년 임기를 지낸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도 나선다.따라서 공화당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후보로 정해졌다.다만 부통령은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가 다른 사람을 지명할 수 있다.민주당은 1월19일 아이오와에서 열리는 코커스(당원대회)를 시작으로 6월8일까지 예비선거를 치른다.예비선거는 등록된 당원만 참여하는 ‘코커스’와 주에 등록된 모든 유권자가 참여할 수 있는 ‘프라이머리’를 통틀어 말한다.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대의원 수는 역대 선거에서 각 당의 후보에 대한 지지율과 인구비례에 따른다.민주당의 대의원 수는 4318명,공화당은 2066명이다. 민주당의 경우 800여명은 민주당 전국위원회가 지명한다.민주당은 15% 이상 득표한 후보간의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 수를 배분하지만 공화당은 ‘승자독점방식’과 비례배분 방식을 혼용하고 있다. 민주당은 대의원 수가 가장 많은 캘리포니아(441명)와 뉴욕(284명)의 예비선거가 치러지는 3월2일 이후에는 후보가 사실상 확정될 전망이다.
  • [편집자문위원 칼럼] 다시 난 ‘서울신문’에 바란다

    새해부터 대한매일이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고 하니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든다.하나는 대한매일이란 제호로 표방해 온 강소지(强小紙)와 독립신문으로서 이미지의 퇴색이다.즉,보수적 신문들과 차별되는 성격을 표방하던 신문이 예전의 정부기관지적 성격으로 원대복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물론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보다 인지도에서 앞선다는 조사도 있고,복귀해서도 대한매일의 정체성을 계승하겠다는 다짐도 있지만 대한매일이 표방해 온 프랑스의 르몽드와 같은 성격의 신문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는 서울신문으로의 복귀는 최근 언론산업 변화의 판도를 잘 읽은 판단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신문사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우리 언론이 앞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바로 특화된 신문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어떤 신문은 성격이 보수적이고,어떤 신문은 정보가 많은 신문이고,어떤 신문은 진보적일 수 있는 만큼,또 어떤 신문은 정부관련 정보를 가장 많이 전달하는 신문으로 기능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언론산업,특히 신문산업의 경우 ‘모델링 이론’이 적용된다.즉,큰 신문사가 어떤 경영형태나 편집방향,그리고 내용의 성격을 결정하면 후발주자인 작은 신문사들은 이들 큰 신문사들을 모델로 삼아서 유사한 형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작은 신문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색을 유지하면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생존의 근간이 된다.왜냐하면 신문이 비슷비슷한 경우 독자들은 대개 부수가 많은 신문을 찾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새로운 서울신문이 좀 더 친근한 내용으로 채워졌으면 한다.무엇보다도 ‘독자의 소리’란이 확대개편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지난주 대한매일의 경우 많아야 하루에 2건 정도,그리고 아예 안 실리는 날도 있었다.이는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없거나 반응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의 소리에 신문이 너무 귀를 기울이지 않은 태도 때문인지도 모른다.신문의 성공여부는 결국 ‘충성스러운 독자를 얼마나 확보하는가’ (retain loyal customers)가 관건이라는 점에서 어느 쪽이든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서울신문이라 하면 여전히 딱딱한 느낌이 든다.따라서 인간적 냄새가 느껴지는 기획을 많이 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최인호의 소설 ‘유림’과 조정래의 칼럼,박완서의 산문,그리고 종교인들이 쓰는 칼럼은 발 빠른 기획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 같다.이와 더불어 정치,경제,사회와 같은 하드 뉴스보다는 주변의 환경감시적 정보를 많이 전달하고 계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특히 무심코 넘기다가 대형사고로 발전하는 위험성을 미리 점검하고 이에 대한 대책의 미비점과 문제점들을 지적해 주어야 할 것이다. 결국 서울신문으로 거듭 태어나는 대한매일은 정부관련 정보 등 공적인 정보를 여타 언론보다 많이 다루면서도 한편으로는 친근함이 느껴지는 정보들을 균형 있게 전달해야 하며 주변의 안전점검 장치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이를 위해 참신한 기획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며 독자들이계속 충성스러운 고객으로 남아있도록 이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재 진 한양대교수 신문방송학
  • 사고/종교인 4명의 희망 메시지 명상칼럼 ‘토요일 아침에’

    대한매일이 새해부터 서울신문으로 새 출발하면서 ‘토요일 아침에’라는 새로운 모습의 명상 칼럼을 싣습니다.새 칼럼은 번잡한 일상의 쳇바퀴 돌리기에서 벗어나 삶을 관조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내용의 글로 꾸며질 것입니다.경제적 고통과 정치적 혼돈의 와중에 힘겨운 삶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희망의 내일을 열어줄 것입니다.물질적 욕망의 늪에 빠져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마음이 넉넉한 행복의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토요일 아침에’ 필진은 여연(55) 대흥사 일지암 주지,박종화(58) 경동교회 담임목사, 유흥식(52) 천주교 대전교구 주교,권도갑(54) 원불교 도봉교당 주임 교무 등 네명의 종교인들입니다.여연 스님은 무비판적으로 서구문명에 빠지는 세태에 맞서기 위해 한국차 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우리 고유의 온전한 가치와 정신을 찾고 있습니다.독일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박종화 목사는 99년부터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맡아오며 마음의 평화에서 오는 참행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교황청의 라테란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유흥식 주교는 대전 가톨릭대 총장을 거쳐 2003년 8월부터 천주교 대전교구 부교구장으로 있습니다.원광대 원불교학과와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한 권도갑 주임 교무는 10여년 전부터 ‘행복을 여는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열어오고 있습니다.매주 토요일 독자들을 찾아갈 ‘토요일 아침에’서 세파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마음의 위로를 받기 바랍니다.
  • [2003 사건속 인물](끝)새만금 3보1배단

    “환경과 생명,그리고 평화는 결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세상의 모든 생명이 결국 하나인 만큼 작은 생명 하나라도 모두 소중히 생각하는 데서 평화는 출발합니다.” ‘환경과 공해연구회’와 환경기자클럽이 각각 수여하는 ‘올해의 환경인’과 ‘올해의 환경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새만금 삼보일배단’.‘새만금 개펄을 살리자’는 대명제 아래 종교를 초월해 모인 이들은 뼈를 깎는 고행을 통해 생명존중과 평화의 사상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전파한 인물들이다. 환경운동연합,녹색연합 등 시민·환경단체들의 모임인 ‘새만금생명평화연대’를 중심으로 결성된 삼보일배단은 3월28일 간척지인 전북 부안의 해창개펄을 출발,5월31일 서울시청 앞에 도착할 때까지 처절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삼보일배(三步一拜) 수행을 계속하며 새만금간척사업의 부당성을 알렸다.세 번 걷고 한 번 절하기를 반복하는 ‘삼보일배’의 고행은 무려 65일간 350㎞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36만여 걸음에 12만여 배가 올려졌다.그 힘겨운 대장정의 중심에는 수경(55) 스님,문규현(58) 신부,김경일(50) 교무,이희운(42) 목사 등 네명의 종교인이 있었다 “새만금 개펄을 살리려고 애쓴 모든 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개펄의 생명들에게도 조금은 체면이 선 것 같고요.하지만 새만금이 살아나는 것보다도 더욱 반가운 것은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생명과 환경에 관한 의식이 싹텄다는 겁니다.”(수경 스님). 삼보일배 순례기간 내내 묵언으로 일관했던 이들은 과천 남태령을 넘어 서울에 입성하는 날 서로 부둥켜 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서울 입성 전날 탈진해 잠시 병원 신세를 져야했던 수경 스님은 휠체어에 탄 채 링거를 맞으면서 순례의 대미를 함께 장식했다. 이들의 역정은 국내외의 큰 반향을 일으켰고 마침내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7월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한 집행정지결정을 내려 사업이 중단되는 전기를 맞았다.그러나 머지않아 방조제 사업을 계속한다는 정부의 입장이 나왔고 삼보일배 고행을 함께 했던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이희운 목사,김경일 교무 등 네 사람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새만금 사업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간척사업을 찬성하는 이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개발 이익과 정치적 욕심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주민들을 속여온 위정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현재 정부는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를 예정대로 완공하겠다는 기본입장에 따라 현지 점검을 실시하는 등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고 환경단체들은 이를 놓고 새만금 사업 재추진을 위한 ‘수순밟기’라며 반발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행동에 나설지는 모르겠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대결하거나 세를 모아 힘겨루기를 하는 형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삼보일배처럼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는 것이 될 겁니다.” 김성호 기자 kimus@
  • ‘환상의 생명체’ 모빌의 진수/美조각가 알렉산더 칼더 展

    ‘모빌(Mobile)’이란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만들어 본 경험이 있고 요즘은 상품화돼 있기까지 하다.가느다란 철사나 끈으로 연결,기류의 움직임에 따라 하나가 흔들리면 다른 것들도 연달아 흔들리게 만든 조각이 바로 모빌이다.이 모빌은 원래 미국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렉산더 칼더(1898∼1976)가 1930년대부터 제작한 ‘움직이는 조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칼더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근교 론턴에서 조각가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1923년 뉴욕의 미술학교인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들어가 미국 화가 조지 룩스와 존 슬론의 지도를 받았다.칼더가 기계공학과 물리학의 지식을 예술에 적용해 만든 움직이는 조각은 1931년 칼더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마르셀 뒤샹에 의해 ‘모빌’로 명명됐다.그리고 같은 해에 조각가 장 아르프는 이 ‘모빌’과 대비를 이루는 칼더의 움직이지 않는 조각에 ‘스테이빌(Stabile,정지된 조각)’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알렉산더 칼더’전(내년 2월7일까지)은 희극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칼더 조각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칼더의 작업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로 꼽히는 30,40년대 모빌 작품과 함께 50년대 이후의 다양한 실험조각들도 소개돼 의미를 더한다.대표작 ‘무제’(1938년)를 포함해 29점의 모빌과 스테이빌,7점의 드로잉이 나와 있다. 칼더는 색채를 3원색과 흑백으로 제한하고 기하학적 형태의 상호균형을 추구하는 네덜란드 화가 몬드리안의 화면에 큰 감명을 받았다.1932년 뒤샹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더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밝히기도 했다.이것은 칼더가 기하학적 형태를 활용하는 추상미술로 전환하면서 작품에 ‘움직임’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칼더는 초기 작품에는 모터를 사용했지만 1934년부터는 동력을 쓰지 않는 모빌을 만들었다.자체의 중력에 따라 아주 미미한 대기의 흐름에도 흔들리게 했고 움직임에 의해 생기는 다양한 빛의 효과를 활용한 것이다.칼더는 이런 작품들을‘4차원의 드로잉’이라 불렀다. 칼더는 움직임을 주된 요소로 하는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로 기록된다.뒤샹이나 러시아계 미국 조각가 나움 가보 등이 이끈 키네틱 아트의 개념을 구체화한 것이 칼더의 ‘모빌’이다.그러나 칼더 이후의 많은 키네틱 예술가들이 세심하게 계산된 움직임을 실현시키고자 한데 비해 칼더는 자연에 근거한 우연성과 즉흥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구분된다. 칼더는 기계와 산업적인 재료에 매료됐지만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결코 자연과 인간적인 요소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늘 살아있는 생명체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02)735-8449. 김종면기자 jmkim@
  • ‘하자센터’ 작업장교육 졸업생과 어머니 이야기/“문제아라고요? 꿈 일찍 찾은거죠”

    해마다 전국 5만여명의 중·고등학생이 학교를 떠난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학교를 떠난 아이들은 ‘중도탈락자’란 불명예로 기억된다. 여기, 학교를 떠났지만 자신의 꿈과 일을 찾아낸 아이들이 있다.대안학교‘하자센터(서울시 청소년 직업체험센터)’내 ‘하자작업장학교’가 바로 그곳으로,18일,첫 졸업생 3명을 배출한다.더욱이 이들 뒤에는 “더 빨리 학교를 그만두게 했더라면…”이라고 후회할 만큼 자녀를 믿고 격려하는 어머니가 있다. 졸업식 행사기획과 준비에 한창 바쁜 졸업생들을 12일 저녁 8시,하자센터에서 그들의 어머니와 함께 만났다. 학교가 몸에 맞지 않았던 아이들의 ‘학교만들기’프로젝트라 이름한 하자작업장 학교의 첫 졸업식 주인공은 원,남이,제리 등 3명. 처음 하자센터 문을 열면서 부터 ‘함께 했던’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를 만들었고,배우고 싶은 것을 정해나갔을 뿐아니라 관심분야의 교과목을 개설해 학생인 동시에 가르치는 역할도 해냈다.세 사람은 졸업식을 자신의 학습여정을 보여주는 전시장이자 공연장이자 토론장으로 꾸밀 계획이라 했다. ●학교를 떠난 아이들,어떻게 변했을까 원(21)은 영화를 만들기 위한 꿈을 위해 고1때 학교를 떠났다.그후 하자센터의 개관과 함께 10대를 위한 자치회의,포럼,파티 등을 기획했다.‘학교는 아버지다’‘왜 다시 학교인가’등 교육문화에 대한 첨예한 비판과 대안학습에 대한 자기고민을 담은 글을 썼다.영상작업자(감독)로 첫 데뷔한 작품 ‘바다를 간직하며’는 여성영화제,전주영화제 등에서 상영됐고 졸업프로젝트인 단편퀴어영화 ‘헬멧’이 인디비디오페스티벌에서 상영 중인 영화감독이자 칼럼니스트다. 남이(20)는 입시미술이 미술의 전부인 줄 알고 절망하다가 진로를 바꿔 하자센터에 왔고,그후 ‘파티기획자’로 경력을 쌓았다.교복파티,가면파티 등 컨셉트가 있는 파티를 준비하고 만들어가면서 오히려 디자이너에 대한 동기와 욕구를 발견했다. 하자센터내 10대들이 운영한 명함회사에서 시각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을 쌓은 이래 좀더 본격적이고 섬세한 디자인 수업을 위해 올해삼성아트디자인학교(SADI)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전공에 진학,두 개의 학교를 동시에 다녀왔다. 제리(20)는 천부적인 엔지니어로 각종 자격증을 갖고 있다.하자센터에 들어온지 3주만에 인턴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제리넘버원’이란 개인잡지를 두권 발간했다.팔레스타인 평화연대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대안학습경험을 쓴 단행본을 준비중이다. ●아이는 소유물이 아닌데… 원의 어머니 오숙희(44)씨는 “용감한 어머니”로 불린다.물론 ‘용감’이란 말은 ‘이상하다’는 속뜻을 감추고 있음을 오 씨는 잘 안다.“원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유난히 좋아하긴 했지만 공부도 소홀하지 않았어요.인천 간석여중 3년동안 장학생이었는데 아이가 학교 안가겠다고 한다고 덜컥 중퇴시켰다는 사실이 아직도 다른 어머니들 사이에선 이상하게 이야기될 정도지요.물론 저도 말렸죠.혹시 성적이라도 나빴으면 아깝지나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고,아무래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도 못했구요.” 그러나 오 씨는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하지만 작업장학교를 만들면서 영화 일을 해온 딸 원의 학습여정을 지켜보면서 “학교 그만두길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한단다.게다가 한 발짝 더 나아가 “진작 학교 그만두게 했을 것을,괜히 부모 욕심때문에 아이 고생시킨 것같아 가슴아프지요.부모가 아이에 대한 신뢰만 갖는다면 아이들은 절대로 잘못되지 않아요.”라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리의 어머니 양춘화(48)씨도 고교를 중퇴한 아들에 대해 “너무 작업에만 마음이 팔려서 건강을 잃을까 염려될 뿐,아무 걱정없다.”고 만족감을 표했다.초등학교 저학년때부터 유난히 컴퓨터를 잘 만졌고,중학교때부터 음향엔지니어로도 활동해 돈을 벌기도 했을 만큼 남달랐기 때문에 기대도 컸던 아들에 대해 부모욕심을 내세우지 않은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한단다.“누나들처럼 착하고 무난하게 지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지만 제리가 작업장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놀랐어요.정말 이렇게 교육이 바뀌어야겠구나 생각하기도 했구요.” ●누구나 학교를 떠날 수 있다 원은 “제가 엄마를 설득하면서,혹은 저 스스로 했던 말이 ‘실망시키지 않을 거야.’였어요.하지만 이런 제 마음도 모두 강박적임을 발견했어요.자퇴하니까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보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젠 즐겁게 작업을 하고,내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같아요.”라고 말했다. 하자센터에서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제리는 교사들과도 적잖이 부딪히며 지냈다.마음이 열린 교사들과 스태프들로서는 최대한 편하게 서로를 대했으나 그는 잘못된 것은 자신이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단다.“하지만 제가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겁이 없었나 돌아보게 되지요.그만큼 제가 성장한 겁니다.작업장 학교에서요.” 하자센터의 조한혜정 교장은 아이들과의 지난 4년을 ‘시대적인 실험’이었다고 설명하면서,“이 아이들을 통해 10대가 답답해보여서 도와주고 싶어도 그들이 물어오기 전에는 알려주면 오히려 부작용이 난다는 것,그리고 10대들은 머리로는 알고있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으니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그리고 ‘석·박사학위를 받은 제자를 내보낼 때보다 덜 걱정이 된다.’고 이들의 새출발을 격려했다. 허남주 기자 hhj@ ■작업장 학교는? ‘하자센터’는 서울시가 연세대에 위탁,운영하는 청소년직업센터로 99년 12월에 서울 영등포에 개관했다.‘스스로 업그레이드 하자’‘하고 싶은 일하면서 먹고 살자’‘자율과 공생의 원리’등을 모토로 하는 곳으로,대안적인 공교육 체제의 교육모델을 제시할 것으로,일찌감치 기대의 대상이 됐다. 2001년 9월,하자센터안에 만들어진 작은 실험학교 ‘하자작업장 학교’는 ‘탈학교’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아닌 학교’다.‘작업장학교’ 즉 production school로 기존의 학교가 틀에 박힌 교과과정을 주입시키느라 스스로 생산적인 일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곳이란 인식하에 이곳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산하는 것을 장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젝트를 통해 배우는’아이들은 한 학기에 15∼20명선,3년제로 전체학생은 100명을 넘지 않는데 졸업도 정해진 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준비가 되면 졸업하는 형식이다.즉 스스로의 경력과 학력을 만들며 준비를 끝낸 아이들이 ‘산’을 내려갈 때를 정하는 것이 졸업이라 했다.올 12월에 이어 내년 2월에도 몇 사람이 졸업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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