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교수형
    2025-12-1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94
  • 나이지리아 인권운동가 9명 처형

    ◎영 연방·미·독 등 맹비난… 외교·군사 제재 돌입 【오클랜드·워싱턴·유엔본부 AP AFP 연합】 나이지리아는 10일 국제적인 구명노력에도 불구,켄 사로 위와 등 인권운동가 9명에 대한 교수형 집행을 강행했다. 형집행 소식이 전해지면서 각국 정부와 단체들의 비난이 잇따랐으며 구명운동을 주도해 온 영연방과 미국,독일등은 나이지리아에 대한 즉각적인 외교,군사적 제재조치에 들어가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이번 사태와 관련,나이지리아 주재대사를 즉각 소환하고 미국인들의 나이지리아 여행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데 이어 제재확대 방안의 일환으로 전세계적인 대나이지리아 무기금수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백악관은 이날밤 1단계로 대나이지리아 무기금수조치를 취한데 이어 성명을 통해 매들린 올브라이트 유엔주재 미대사에게 『이같은 행위를 규탄하기 위해 유엔차원의 적절한 조치들을 즉각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한편 뉴질랜드에서 정상회담을 진행중인 영연방국가들은 11일 영연방의 민주,인권 원칙들을무시하는 회원국을 제명하거나 자격정지시킬 수 있는 새로운 행동계획을 승인했다. 이 행동계획은 지난 91년 채택된 하라레 선언을 발전시킨 것으로 회원국 대표들은 이 계획에 따라 나이지리아의 자격을 정지하기로 결정했다. 【라고스 AFP 연합】 나이지리아 군사정부는 자국의 인권운동가 집단처형에 대한 제재조처로 영연방이 11일 연방회원자격 정지결정을 내리자 『불행하고 부당하며 근거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나이지리아 왜 전격 처형 단행했나/회교 지배계급 “기득권 유지” 극단 조치/오고니족 자결운동에 위협느껴 국제여론 무시 나이지리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무릅쓰면서 켄 사로 위와 등 9명에게 전격 사형을 집행한 것은 회교도가 주도하는 지배계급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극단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사로 위와가 주도한 오고니족 생존운동(MOSOP)이 그간 석유보고인 오고니랜드에 대한 영토회복과 자결권을 확보하는데 주력해왔기 때문이다. 오고니족과 나이지리아 정부의 갈등은 5년전 시작된 오고니족 영토회복 운동에서 비롯됐다.나이지리아 남동부 니제르강 삼각주 뒤편에 위치한 오고니랜드의 오고니족은 이때부터 정부에 자결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고니족은 이와 함께 오고니랜드에서 원유를 채굴하던 국제적 메이저 쉘사에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다.보상 요구의 명분은 수십년간 원유를 캐면서 땅을 황폐화시키는 한편 공해를 심화시켜 오고니족의 주업인 농업과 어업이 위협을 받게 됐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오고니족 자결 운동은 나이지리아 경제의 근간인 석유개발이 오고니랜드에서 이뤄지면서도 그 혜택이 지배계층인 북부 회교도들에게 돌아가는데 대한 반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이지리아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다.9천6백만 인구 가운데 50만에 불과한 오고니족의 자결 요구에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이들에 대한 나이지리아 특수부대의 폭력도 공공연히 자행됐다.마침내 자결 운동이 극에 달한 가운데 지난해 5월 실시된 민족제헌회의 대표 선거운동 기간중 오고니족 저명인사 4명이 무참히 살해돼 불태워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로써 오고니족 대표로 출마한 사로 위와와측근들에 누명이 씌워졌고 사로 위와는 살해를 교사했다는 혐의를 받게 됐다.국제인권단체들은 이를 두고 오고니족 탄압을 위한 정치적 조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정부가 이같은 비난을 일축,사형을 집행함에 따라 영연방 52개국이 갖가지 제재안 마련에 나서고 미국 등 기타 서방국들도 이에 동조할 움직임이어서 나이지리아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처형당한 켄 사로 위와는 누구/거대 석유회사 쉘과 맞서 소수민족 인권대변 10일 처형된 켄 사로 위와는 나이지리아의 기간산업인 석유문제에 초점을 맞춰 국내외에서 소수 오고니족의 인권운동을 전개해 온 인물.인권·환경단체들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고 지난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기구)은 그를 양심수로 규정했다. 저명한 극작가이자 풍자가인 사로 위와는 오고니족 거주지역인 니제르 삼각주 지역의 석유오염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나이지리아 전역에서 영업중인 굴지의 석유회사 쉘과 맞서 왔다. 그는 사형선고 후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내 신념을 위해 인생 모든 것을 바쳐왔으며 그로 인해 나를 비방하거나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지금 이 재판은 나와 내 동료들 뿐 아니라 쉘사에 대한 재판도 함께 치러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1년 나이지리아 리버스주의 보리에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자란 그는 일찍부터 자신을 책임지는 법을 배워야만 했으며 65년 이바단대를 졸업한 후 남동부 우무아히아의 고교교사로 재직하다가 동부 라고스의 한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사로 위와는 처형 직전인 지난 9일 가디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내가 유감스러운 단 한가지는 나이지리아에서 소수인종으로 태어난 사실 뿐』이라고 말하고 『침대 위에서 꿈꾸며 죽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 이강년 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

    ◎구한말 의병장… 「수도탈환 작전」 주도/제천·죽령서 일군 무더기 생포 “전과”/청풍전투서 잡혀 51세로 옥중 순국 「한평생 이 목숨 아껴본 바 없거늘 죽음 앞둔 지금에서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술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구한말 의병장으로 항일구국운동을 펼치다 옥중순국한 운강 이강년(1858년 12월30일∼1908년 10월13일)선생이 남긴 옥중시의 한 대목이다. 선생은 이 시처럼 일제의 국권침탈만행에 대항해 죽음을 가벼이 여기면서 싸운 애국자였다.선생은 22세 때인 1880년 무과에 급제,선전관등을 지내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했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개되자 동학군에 투신,심산유곡을 누볐으며 이 경험은 장차 의병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1894년 청일전쟁과 1895년 명성황후시해등 일련의 사건으로 의암 유인석 등이 을미의병전쟁에 나서자 선생도 1896년2월 고향인 경북 문경에서 의병모집활동을 시작했다.유인석은 유학자로서 당시 영남유림의 정신적 지주였다.선생은 우선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으고는 왜적의 앞잡이로 지목된 안동관찰사 김석중 등 3명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이어 선생은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과 함께 고성에서 일본군과 처음 전투를 벌인 뒤 제천으로 이동해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했다.유인석의병장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수안보 병참부대 공격등 많은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그러나 유인석선생이 일제와 관군에게 쫓겨 요동으로 건너가자 1897년 뒤따라 요동으로 갔다.요동에서 이주민 정착을 위해 힘을 쏟던 선생은 고국에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다시 단양으로 되돌아왔다.한동안 단양에서 충주 유림과 함께 의병전술등을 연구하던 선생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등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데 이어 1907년 조선군이 해산되자 다시 의병운동에 돌입했다. 원주에서 군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갖춘 선생은 기세를 모아 제천으로 진군,민긍호·조동교·오경묵·정대무 등 다른 의병장과 합류해 크게 전투를 펼쳤다.광무황제는 선생의 활약상을 듣고는 선생을 도체찰사에 제수하면서 『의병을 일으키는 초모장으로 임명하니 인장과 병부를 새겨 쓰도록 하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을 먼저 베이고 파직해 내쫓으라』는 내용의 밀지를 내렸다. 제천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전국 곳곳의 의병이 몰려들어 선생은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됐다.선생은 이어 충주에 근거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다른 의병장과 약속하고 진격했으나 공격시기를 놓쳐 충주공격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선생의 의병부대는 그 뒤 단양·영월등지에서 일제 및 관군과 대치,다소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펼쳤다.선생은 이 가운데 제천과 죽령에서 각각 적 2백여명씩을 생포하는등 큰 전과를 올려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그러나 겨울에 들어서면서 선생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풍기전투에서 대패,의병운동의 기세가 꺾이게 됐다.진열을 가다듬어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선생은 전국의 의병장과 함께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서울로 행군,경기도경계에서 일제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추운 날씨와 적의 거센 반격으로 서울진공에 실패한 선생은 의병부대를 강원도쪽으로 회군,1908년초부터 다시 치열한 항일전쟁을 벌였다.선생은 이해 3월12일 강원도 인제 백담사전투를 비롯,안동·봉화 등에서 일제 수백여명을 쳐부수거나 사로잡았다.선생은 그러나 같은 해 6월4일 청풍 까치봉전투에서 장마비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 된 탓에 적의 총에 발목을 맞고 사로잡히고 말았다. 「탄환의 무정함이여,발목을 다쳐 더이상 나아갈 수 없구나,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이런 수모를 받지 않을 것을」 선생은 옥중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선생은 여러차례 재판 끝에 교수형을 언도받고 51세로 의기에 찬 일생을 마쳤다.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미항모 「이」 항서 출동태세/이라크 견제

    ◎후세인 반체제인사 다수 처형 【텔아비브·암만 DPA AFP 연합】 이라크 핵심 권력층의 망명으로 이라크와 요르단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6일 이스라엘 항구도시 하이파에 정박,미국의 요르단 방어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와함께 이스라엘은 이라크측이 요르단을 침공할 경우에 대비,미공군기들이 요르단 방어를 위해 자국 영공을 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양국간의 공조체제를 재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항모 시어도어 루스벨트에 탑재된 함재기들은 유사시 요르단에 대한 긴급공중지원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미해군은 이날 디젤유를 싣고 걸프 해역을 항해중이던 선박 1척을 나포,문제의 디젤유가 유엔의 대이라크 금수조치를 위반했는지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해군 대변인이 밝혔다. 지난 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응징으로 단행된 유엔의 대이라크금수조치 이후 미해군이 선박을 나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은 후세인 카멜 하산 전공업장관의 요르단 망명이후 자신의 각료들에게 초법적인 인물은 아무도 없다고 경고하는 등 내부 단속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를 겸직하고 있는 후세인 대통령은 이날 내각에 『일탈위험을 사전 예방하기위해 이제부터는 법률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단호한 임무수행과 제한된 시간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비통상적인 권한을 요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후세인은 또 일부 시아파 회교단체 요원들을 교수형에 처한뒤 이들의 사체를 가족들에게 되돌려보내는 등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고 이 단체가 16일 주장했다. 테헤란에 본부를 둔 회교행동기구는 이날 다마스쿠스에서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라크 당국이 라드와니아,파딜리아,아부 가리브 감옥에 있던 반체제 인사들을바그다드 소재 카스르 알­니하야 감옥으로 보내 교수형에 처했다』고 말했다.
  • 호남일대 의병 규합 항일무장투쟁/이달의 독립운동가/전수용 선생

    ◎대동창의단 조직… 일군과 70여차례 교전/31세에 붙잡혀 순국하자 부인도 따라 자결 『어차피 한번 죽고 마는 것이니 의병에 충실하다 죽어서 끝내 좋은 이름을 차지하는 것만 하겠느냐』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활약한 해산 전수용 선생(1879년10월18일∼1910년7월18일)이 남긴 「진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선생은 이 우국시에 표현된 그대로 31년 짧은 생애를 항일운동의 제단에 기꺼이 불사른 애국지사였다. 전북 임실 출신인 선생은 24세 때인 1903년 면암 최익현등 호남선비들이 개최한 시국강연회에 참석,이들의 우국충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선생은 얼마뒤 최익현이 을사조약체결에 반대,조정에 창의토전소를 올리고 호남 유림을 규합해 창의의 기치를 높이 들자 궐기장소인 태인으로 찾아갔으나 진영이 빈약한 데 실망,일단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가 순국한 최익현의 창의는 비록 실패로 끝맺음했지만 항일운동의 선봉으로서 국민 사이에 항일의식을 용솟음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은 최익현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뒤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1908년 전북 임실에서 결성된 창의동맹단에서 참모로 처음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창의동맹당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장수·무주·남원·순창·구례·곡성등 호남 동부지역 9개군을 활동지역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이 지역에서 경찰서·헌병분견소·수비대 등을 습격하고 일군 토벌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908년3월 남원 사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데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응전투에서 다시 참패,활동이 위축되자 선생은 다른 의병부대를 찾아나섰다. 선생은 광주에 머물던중 황국시위대 참위 출신인 정원집이 수십명의 병사와 함께 찾아와 의병대장을 맡을 것을 요청함에 따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게 됐다. 『왜노는 우리나라 신민의 불구대천의 원수다.임진란의 화 또한 그렇거니와 을미 시국모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힘써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자』 선생은 이같은 창의문을 통해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포하고 일군과의 전투에 돌입했다. 대한제국군 출신·유생·농민·포수등 5백여명으로 결성된 대동창의단은 1908년8월부터 10여개월동안 맹활약,일본군과 70여차례 교전을 벌였다. 선생은 부대를 1백∼1백50여명으로 쪼개 야간에 이동하면서 투쟁하는 게릴라식 전법을 도입했다. 이들은 일군 헌병분견소나 경찰서·수비대의 움직임을 은밀히 알아낸 뒤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작전으로 여러 차례 성과를 올렸다.이들은 한때 호남 서남부지역을 완전장악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이웃 의병부대와 꾸준히 연락을 취해 서로 위기에 빠질 때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1908년 겨울 호남의병연합체인 호남동의단이 발족하자 대장에 임명됐다.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 떠오른 선생은 부대를 10개로 나눠 전남·북일대에서 일본군과 투쟁을 벌이면서 친일파 징계등의 일도 펼쳤다. 한편 일제는 끊이지 않는 의병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전국 시·읍·군·면에 산재한 성벽을 파괴,의병활동의 거점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1만1천여명의 병력을 동원,대대적인 의병토벌작전을 펼치고 1909년에는 일본본토에서 2개 여단을 파견,의병토벌에 돌입했다. 마침내 대한제국의 의병해산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1910년5월 세가 기울었음을 느끼고 부대장에서 물러나 시골로 몸을 숨기고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일제는 그러나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고 탐문에 나섰다. 선생은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고 어린이를 가르치던중 한 밀고자의 제보를 받고 달려온 일군에 붙잡혔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본래 세운 뜻이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는구나』 일제에 붙잡히면서 이같은 우국시를 남긴 선생은 광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선생이 순국하자 부인 김해 김씨는 집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선생의 절개와 부인의 지조는 충신열사의 사표로 의병활동사에서 길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싱가포르/“영화 불모지” 오명 벗는다

    ◎73년이후 동면… 91년이후 4년새 3편 제작/이달 개봉 「미폭맨」 국제영화제 특별상 받아/인구 310만명 불과… 제작비 조달 등에 어려움 싱가포르가 영화산업 불모지란 오명을 씻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91년 1편에 이어 올해 2편이 잇따라 개봉되는 등 4년사이에 3편이나 제작됐다.지난 73년 이후 18년간 단 1편도 제작되지 않았던데 비하면 3편은 엄청난 수치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싱가포르 영화계에는 비록 싱가포르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화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말레이시아계 영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활기가 있었다.그러나 말레이시아계 영화사 캐세이 케리스가 마지막으로 지난 73년 싱가포르에서 운영을 중단한 이후 그나마도 기나긴 동면에 빠졌다.이유는 홍콩과 대만의 생기있고 대중성있는 중국어 영화와 경쟁하려는 싱가포르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바뀌었다.싱가포르인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을 만들어보자는 기운이 일고 있는 것이다.최근 제작된 3편의 영화는 모두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싱가포르인들의 황량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싱가포르의 엄격한 도덕기준에 비춰볼 때 꽤나 충격적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미인대회 운영업자인 에롤 팡(53)이 91년 제작한 「살짝 익혀주세요」는 88년 교수형에 처해진 정신착란 신비연구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기괴한 작품.미국배우 도어 크라우스가 공상적인 살인마역을 맡았다. 지난5월 개봉된 「부지스거리」는 70년대의 유명한 싱가포르 홍등가를 그리면서 대담한 정사장면을 많이 담은 작품으로 여성사업가인 캐티 유가 제작했고 홍콩 양만시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가운데 베트남 여배우 히엡 티 레가 허름한 호텔 여종업원역 주연을 맡았다.요즘 매일 1만여명씩 이 영화를 보려고 줄지어 늘어선다. 이달초 개봉된 「미폭맨」은 센스가 둔한 한 국수가게 점원과 염세적인 창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 4월 싱가포르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싱가포르인들의 삶의 단편을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대담한 기획물』이란 찬사를 받았다.주연을 포함한 출연진과 호주에서 영화를 공부한 제작자 쿠(30)를 비롯한 스태프진 전원이 싱가포르인으로 구성돼 데뷔작에서 성공했다는 점이 더욱 관심을 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영화산업 여건은 아직 너무나 척박한 것이 사실이다.인구 3백10만명으로 국내시장이 적은데다가 연간 총영화 관람객수는 91년 2천1백만명에서 94년 1천8백만명으로 감소하는 등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영화제작 경험자가 적고 하부구조마저 빈약해 영화촬영후 필름을 홍콩등 외국으로 보내 마무리작업을 해야할 정도다.검열기준이 매우 엄격한 것도 문제다.정부가 영화기금을 지원하고 세금혜택을 주기는 하지만 제작비 조달은 쉽지않은 문제다.팡은 사비로 1백20만달러를 들여 적자를 봤고,쿠는 제작비를 7만달러로 맞추느라 영화촬영을 16일내에 마치고 한 장면을 세번이상 찍지 않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쿠는 『당당한 영화대국 반열에 싱가포르를 올려놓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 해외취업/비 노동자/총 3백50만명… 연 26억달러 벌이

    ◎“최대 외화박스” 조국선 영웅대접/연 70만명 출국… 현지 마찰 빈번 필리핀에서 해외취업 노동자들은 영웅대접을 받는다. 고향에 남아있는 가족은 물론 국가경제에 혈액과 다름없는 귀중한 외화를 송금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들은 장기간 해외체류로 가정붕괴와 함께 열악한 근로조건속에 학대를 당하는 이중고를 감내해야만 한다. 국내에 있어봐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수백만명의 필리핀인들은 전세계로 퍼져나간다.공식통계로는 건설노동자로 주로 취업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1백30만명이 진출한 것을 비롯,3백50만명의 필리핀인이 해외에 취업한 상태다.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보다 약 1백만명이 많은 4백50만명 선으로 추산된다.이는 필리핀 인구 6천5백만명의 약 7%에 해당한다. 필리핀의 인력송출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정부의 작품이다.지난 74년 마르코스 정부는 파산지경에 이른 경제를 회생시켜 실업자를 줄이려는 목적에서 인력수출에 손을 댔다.그러나 2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오히려 외국으로 떠나는 필리핀인은 점차 늘어 84년 연간 35만명 수준이던 해외취업자는 10년만에 근 두배로 늘어나 70여만명을 넘어섰다.하지만 마닐라의 여성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이 14.30달러에 불과한 반면 월 5백달러를 버는 홍콩 가정부로 취업한 필리핀 여성과의 임금격차는 필리핀인의 해외진출을 더욱 부추길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 이주 노동자는 필리핀의 경제가 처한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외화부족에 허덕이는 필리핀에 있어 해외 취업 노동자는 최대의 외화원천이다.은행등 공식적인 통로를 거친 외화송금은 지난해 26억달러를 조금 넘었다.1년전보다 29%나 늘어난 것이지만 민간금융기관등 다른 채널을 통해 유입된 돈을 합치면 60억달러는 쉽게 넘어설 것이라고 일부 경제학자들은 단언한다.요컨대 이주노동자들이 「쇠락한」 필리핀 경제를 떠받치는 주춧돌로 불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해외에 송출된 인력중에는 필리핀이 한국등 아시아의 호랑이 반열에 올라서기 위해 꼭 필요한 인력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필리핀이 당면한 딜레마다.홍콩과 싱가포르에 가정부로 취업한 상당수가 대졸의 고학력자라는 사실은 필리핀이 처한 암울한 단면이다.이웃 동남아 국가에서 매니저로,아니면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필리핀인들을 흡수하기엔 본국의 경제토양은 너무나도 척박하다. 93년도에 해외취업자중 전문직(2.7%),의료직(3.8%),매니저(0.1%)등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극히 낮지만 이들은 필리핀에선 금싸라기처럼 귀중한 인력이다.하지만 이들은 살인적이고 부당한 근로조건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로 취급된다. 해외취업자의 60%를 흡수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선 계약위반,근로시간 위반등 가혹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다 못해 도주하는 사례가 늘고 있으며 필리핀 여성들은 일부 지역에서 성폭행과 매춘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이같은 국민적 자긍심의 추락앞에도 필리핀 정부는 「영웅」들에겐 든든한 버팀대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가정부로 일하다 이중살인혐의로 기소된 콘템플라시온 여인을 싱가포르 정부가 교수형에 처하자 비로소 해외취업 정책에 손을 쓰기 시작했을 뿐이다. 하지만 수많은 필리핀인들에게 해외 취업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있다.저임금이 무임금보다 좋다는 생각이 장차 감내해야할 희생과 상존하는 위험의 벽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다.가족의 재상봉을 위해서는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일자리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 음주운전 처벌(외언내언)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은 엘살바도르가 세계에서 가장 엄하다.적발되면 총살당한다.불가리아에서는 초범은 훈방하지만 재범은 교수형에 처한다.이들 두나라의 경우 지나치게 가혹해 보이지만 음주운전을 뿌리뽑겠다는 정부의 단호한 의지때문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 터키의 처벌은 좀 특이하다.음주운전자를 적발하면 순찰차에 싣고 집에서 30㎞떨어진 외딴곳에 내려놓은 뒤 집까지 걸어가게 한다.3시간 남짓 걸어가는 동안 경찰관이 뒤따르며 계속 잔소리와 훈계를 해댄다.그뒤 구속된다.이처럼 중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처벌이 「신체형」인데 비해 선진국에는 벌금을 무겁게 매기는 「금전형」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핀란드는 한달 월급을 몽땅 벌금으로 뺏어간다.스웨덴에선 연간 총수입의 10분의1을 바쳐야 한다.프랑스에서 단속에 걸리면 30만프랑(약2천8백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하고 면허취소까지 당해 패가망신하게 된다.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처벌규정은 너무 관대하다. 서울경찰청은 지난 한달동안 음주운전을 단속한 결과 지난해 같은기간의 1천7백57건보다 65.4%나 늘어난 2천9백6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음주운전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는 것도 걱정이지만 적발된 음주운전자중 20∼30대의 청년층이 71%나 된다는 것,그리고 여성음주운전이 지난해보다 3배나 급증했다는 사실은 우리사회의 음주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 놓여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사회에서는 음주운전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술을 마시고 운전석에 앉는 것 자체가 사고여부에 관계없이 범죄행위이며 가혹한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처벌규정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음주운전을 너그럽게 봐준다는 것은 「달리는 흉기」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 「매미의 지혜」로 섭리를 거스르면(박갑천 칼럼)

    「요화 알라우네」라는 영화를 본 것이 50년대였던 듯하다.40년이 흐른 지금도 그때 받은 충격만은 생생해진다.독일작가 한스 에베르스의 「알라우네」를 영화화한 것이었다.1911년에 쓰인 이 작품은 인공수정에 의해 태어난 생명이 인간들에게 끼치는 재액을 그려나간다. 가지과의 유독식물인 맨드레이크의 뿌리가 만드라고라인데 이는 알라우네라고도 불린다.이 식물은 교수형 당하는 죄수가 숨이 끊기면서 흘리는 정액이 땅에 떨어져 돋아난다는 전설을 지녔다.브링켄박사는 「이상적」인 창부를 찾아내어 그 자궁에다 사형수의 정액을 인공수정한다.태어난 생명이 알라우네인데 산모가 죽는 것으로부터 재액은 시작된다.아름다운 알라우네는 양성을 함께 지녀 모든 남녀가 빠져든다.하지만 그와 관계되는 사람은 하나같이 비참한 말로를 맞는다.그를 「창조」해낸 브링켄박사까지도. 이 작품은 사람의 지혜가 섭리의 영역에까지 끼어드는 일이 얼마나 참람되고 두려운 것인가를 경고한다.하지만 인류는 그걸 무시해온다.『순리를 버리고 역리를 따름은 재앙을 부르는 원인이다』(「소학」)하는 가르침에 낯돌려온다.그래서 배자(태아로 발육되기 전의 수정란)의 복제에 성공하여 판박이인간을 만드는 길을 열어놓고 있기까지 하다.섭리만이 알아서 조절해오던 남녀출산의 비율이건만 거기 끼어든지도 오래다.그 결과 불균형문제는 심각해진다.우리의 경우 금세기 안에 6명중 1명이 신부를 못구한다는게 숫자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형편.얼마전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의원연맹(IPU)이 「생명윤리」결의안을 채택한 뜻도 그에 대한 성찰의 촉구였다 하겠으나 얼마나 받아들여질 것인지. 인지의 외람된 역리추구가 스스로 알라우네를 배출시켜 나가는건 아닐지.「장자」의 말을 한번 음미해보자.­『얕은 지혜는 깊은 지혜를 알 수 없고 명이 짧은 것은 명이 긴 것을 알 수 없다.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말라죽는 버섯은 초하루와 그믐이 있는 한달을 알 수 없고 여름에 나왔다가 가을에 죽는 매미는 봄·가을이 있는 한해를 알지 못한다.…』 섭리의 뜻에서 보자면 사람의 지혜가 버섯·매미보다 나을게 없다.하건만 사람들은 옅은지혜에 저라서 취하여 오만해져 있다.눈앞의 편익에 어두워져 해도 될 일과 안해야 할 일을 구별못한다.마침내 다다를 길이 어디일 것인고.
  • 북­싱가포르 대사소환 안팎/「가정부처형」앙금이 단교 위기로

    ◎북의 싱가포르 국기소각 사건도 불씨/총선 앞둔 라모스 여론무마용 시각도 양국 국민들간의 감정싸움 수준에 머물던 싱가포르의 필리핀 가정부 처형사건은 이제 양국 정부가 22일 대사소환이라는 외교관계 격하 조치를 취함으로써 단교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외교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외교관들은 이번 분쟁이 지난 68년 필리핀이 말레이시아 동부 사바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양국간 충돌을 빚은 이후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내에서 발생한 최악의 외교적 위기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아세안의 단결을 직접적으로 해치지는 않을 것이지만 지난 66년 이뤄진 필리핀­싱가포르 쌍무외교관계가 중단될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피델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이 사형집행 5일이 지난 뒤 대사소환,단교 위협이라는 강경조치를 취한 것은 국내용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세안의 한 관계자는 라모스의 조치가 실제로 외교관계를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 국기 소각사건까지 발생하는 등 들끓고 있는 국내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아세안 회원국 중 필리핀에 두번째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나라로 필리핀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라모스 대통령은 여론을 계속 도외시할 경우 돈 많은 싱가포르에 끌려간다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될 경우 오는 5월 총선에서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또 필리핀 외교관들은 싱가포르가 국기소각사건에 강력히 항의함으로써 오히려 라모스 대통령의 분노를 야기했으며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이번 강경조치의 배경이 됐다고 주장했다. 싱가포르는 지난 20일 필리핀 다바오시에서 발생한 싱가포르 국기소각사건 관련자들의 처벌과 이같은 사건의 재발방지를 필리핀 정부에 요청했었다. 이에 대해 로베르토 로물로 필리핀 외무장관은 21일 밤 이례적으로 탄 셍 치예 필리핀 주재 싱가포르 대사를 외무부가 아닌 대통령궁으로 불러들여 내무장관과 대통령 국가안보담당 보좌관까지 배석시킨 가운데 싱가포르측의 자세를 강력히 비난했다.이 자리에서 로물로 장관은 싱가포르가 4자녀의 어머니를 교수형에 처한 것에 대한 필리핀 국민들의 분노의 깊이를 전혀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필리핀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싱가포르의 이같은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 비­성항 자국대사 소환령/라모스,「가정부 사형」 항의 단교 경고

    【마닐라·싱가포르 AFP 연합 특약】 라모스 필리핀대통령은 22일 이날부터 필리핀 여성들의 싱가포르 가정부 취업계약을 전면금지한다고 발표하는 한편 싱가포르주재 자국대사를 소환했다. 싱가포르도 수시간 후 외무부 성명을 발표,필리핀주재 자국대사를 소환한다고 밝혔다. 【마닐라 AP AFP 연합】 피델 라모스 필리핀대통령은 22일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처형된 필리핀인 가정부가 필리핀측 진상조사위원회에 의해 부당하게 처형된 것으로 판명될 경우 싱가포르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라모스대통령은 이날 군의 날 기념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있지만 이번 사건이 부당하게 처리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언제든지 싱가포르와의 관계를 단절할 준비가 돼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필리핀에서는 싱가포르 당국이 수차례 형의 집행을 보류시켜 달라는 필리핀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국출신 가정부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되자 싱가포르에 대한 반감이 광범위하게 일고 있다.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처형된 가정부 콘템플라시온이 죄가 없는 것으로 믿고 있다. 라모스 대통령은 그러나 한편으로 자체 조사결과 처형된 가정부가 유죄인 것으로 밝혀진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잘못해왔음을 세계에 인정하는 아량도 필리핀인들은 가져야한다고 지적했다.
  • 「공연예술의 메카」나윤도특파원 현장리포트(브로드웨이“새바람”:4)

    ◎맨해튼을 거닐며/트라이베카선 드니로 등 명우쉽게 만나/역사의 인물 헤일·그릴리·프랭클린동상 우뚝/구정때면 차이나타운에 용춤 행렬 장관/프랭클린가엔 테디 시어터 등 소극장 많아 『태양은 모든 것을 향해 밝게 빛난다(The Sun it shines for all)』 브로드웨이 280번지,챔버 스트리트와 교차 지점에 있는 시청 부속건물의 외벽 모퉁이에서 브로드웨이 쪽으로 돌출해 있는 작은 시계 「선 클록」(Sun Clock)에 새겨진 이 글귀는 브로드웨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한면이 50㎝ 정도에 불과한 정육면체의 청동주조물에 8각의 로마숫자판으로 된 이 시계는 스스로 태양이고 싶은 뉴요커들의 심정을 은연중에 대변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래 이 글귀는 19세기 중반 창간돼 1917년에 이 건물로 옮겨왔던 신문 선(The Sun)의 모토였다.뉴욕시청 바로 뒤에 떡 버티고 서서 격동기 미국 현대사의 감시자 역을 맡았던 선은 뉴욕 최초의 페니 페이퍼(한 부 값을 1센트 정도로 정해 누구나 쉽게 사 볼 수 있게 한 신문)로 모든 뉴요커들에게 따뜻한태양 역할을 자청했던 신문이다. 그후 1952년 이 신문이 폐간되고 한동안 선 클록도 멈춰 있었으나 이 시계를 사랑했던 부근의 시청 직원들과 각회사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보수해 놓았다.결국 선은 없어졌어도 선 클록은 뉴요커들의 희망의 목소리로 그자리에 남아 있다. ○남북 6개블럭 연결 남쪽으로 세인트 폴 교회가 있는 풀턴 스트리트로부터 북쪽으로 챔버 스트리트까지 여섯 블록에 이어지는 브로드웨이의 맞은편은 시빅 센터(Civic Center)라 불리는 곳으로 넓은 시티 홀 파크 공원을 중심으로 시청과 각종 부속건물,시경,각급 법원 및 연방사무소 등 뉴욕의 모든 관공서들이 모여있어 뉴욕의 심장부를 형성하고 있다.1870년 최초로 이 공원을 따라 머레이 스트리트에서 워렌 스트리트간 약1백m에 뉴욕의 첫 지하철이 튜브식 공법으로 시험 건설되었다. 이 지역의 브로드웨이는 2백여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을 위한 환영의 거리,축제의 거리이자 데모의 거리,상업의 거리로 발전해왔으며 자연적으로 미국 자유언론의 전통을 탄생시킨 신문의 거리를형성해 왔다. 특히 1811년 완공된 시티홀 앞 광장은 식민지 시절 뉴욕을 방문하는 영국왕을 위한 환영퍼레이드를 벌이던 전통에서 최근에는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홈팀 선수들의 환영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축제가 벌어져 왔다.그뿐만 아니라 1865년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이틀 동안 시신이 안치됐을 때는 6만여 뉴요커들이 조문을 위해 장사진을 치기도 했던 곳이다. 오늘날 이 거리의 역사는 세사람의 동상이 대변해주고 있다.워싱턴 장군의 부하였던 네이선 헤일(1755∼76)과 언론인 호러스 그릴리(1811∼72),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1706∼90)이 그들이다. ○19개 신문가 옮겨가 시청 서쪽의 헤일 대위는 예일대 출신 교사로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워싱턴 장군의 군대에 합류,맹활약하다 1776년 9월 영국군에 잡혀 바로 다음날 교수형을 당했다.그가 죽기 전 『내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나의 목숨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하고 남긴 말이 영원히 기념되고 있다. 동쪽 브루클린 다리를 향해 서있는 뉴욕 트리뷴창간자 그릴리는 남북전쟁 시대의 개혁가로 노예제도를 공격하고 여성의 참정권 허용, 노동조합 장려 등을 강력히 주장했다.그는 특히 서부 공략을 주장한 『서부로 가라,젊은이들이여(Go West,Young men)』라는 글이 유명하다. 공원 옆 페이스 대학 앞에 있는 미국 정치가의 대부이자 언론인,과학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은 새정부 수립시 펜실베이니아 대표로 참석,각 주간 이해 대립 조정자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했으며 자신이 창간한 신문 펜실베이니아 거제트를 한손에 들고 서있다.그 동상 옆에는 헝가리 태생의 조셉 퓰리처가 신문왕국의 발판으로 삼았던 뉴욕 월드 옛사옥이 있다. 이렇듯 시티 홀 파크를 사이에 두고 브로드웨이와 파크로 거리 일대에는 19세기 말 19개의 신문사가 밀집해 있을 정도로 번성한 신문의 거리를 이뤘다.이들은 이 지역에서 1733년 뉴욕 위클리 저널을 창간,영국의 식민통치에 과감히 투쟁하던 존 피터 젱거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워나갔다.그러나 오늘날 상당수는 없어지거나 더 북쪽으로 이전해 신문의 거리는역사적 이름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이 거리에는 또 근대 상업의 발상지인 브로드웨이 233번지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아 있는 울워스(Wool worth)빌딩이 있다.1879년 이 지역에 새로운 형태의 소매점포를 차린 세일즈맨 프랭크 울워스는 5센트·10센트 균일점이라는 다양한 물품을 박리다매로 판매하는 형태로 운영했다. 순수한 소매업만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은 울워스는 1913년 당시 높이 2백40m,60층의 사옥을 완공시켜 세계 최고의 높이뿐 아니라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더욱이 그는 공사비 1천5백만달러를 은행빚 하나없이 현금으로 지불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이 건물은 17년간 세계최고의 기록을 보유했으며 아직도 울워스사의 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지역을 지나 챔버 스트리트 북쪽으로 올라가면 브로드웨이의 스카이라인은 마천루 숲을 이루던 남쪽과는 큰 대비를 이룬다.5∼6층 정도의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여기저기 중국어 간판이 눈에 들어오면서 브로드웨이는 북쪽의 커낼 스트리트까지 차이나타운의 한부분을 이룬다. 브로드웨이를 서쪽 끝으로 하여 이스트 리버의 맨해튼 브리지까지 넓게 펼쳐진 차이나타운은 구정을 맞아 연일 각종 민속행사가 한창이다.부리부리한 눈에 형형각색의 꽃술이 달린 커다란 두마리의 용이 가게마다 찾아다니며 폭죽을 터뜨리며 1년 동안의 복을 비는 신비한 중국인들의 민속행사들도 브로드웨이의 한부분이 돼 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의 가장 큰 매력은 역사와의 만남보다도 민속과의 만남보다도 예술과의 만남에 있다.동쪽으로 시빅 센터와 차이나타운을 이끌어온 브로드웨이의 서쪽 일대를 차지하고 있는 트라이베커는 사실상 브로드웨이 예술기행의 출발점이다. ○예술의 감칠맛 더해 「운하 아래 삼각형 모양의 땅」이라는 뜻의 이곳은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들의 창고지역으로 얼핏 보기에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차분히 들여다보면 광맥을 찾듯 빨려들어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내놓고 보여주기보다는 더듬고 들여다보고 찾아야 가까스로 조금 보여주는 절제된 아름다움은 브로드웨이 예술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요소가되기도 한다. 브로드웨이 예술의 또하나의 매력은 화제 인물의 체취를 직접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어빙 벌린이 성장한 맨해튼 로어 이스트사이드에서 듣는 노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다르듯이 트라이베커에서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를 만나는 것은 뉴욕에 대한 새로운 입문이 된다.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염세주의적인 월남전 공훈 택시 운전사로 만난 니로와 「뉴욕,뉴욕」에서 사랑에 성공한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니로와 이곳 그리니치 스트리트 375번지 트라이베커 필름센터에서 만나는 니로는 사람도 다르고 뉴욕도 다른 뉴욕이다. 이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허드슨 스트리트 110번지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 트라이베커의 터줏대감인 니로는 옛 커피창고를 개조해 만든 이 필름센터를 스티븐 스필버그,론 하워드,퀸시 존스 등과 함께 사무실겸 작업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밑에는 트라이베커 그릴이라는 찻집도 공동운영,영화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화이트 스트리트 38번지에는 네온 미술가 루디 스턴의작업장이자 갤러리인 「네온이 있게 하라」(Let there be Neon)가 있고 웨스트 브로드웨이와 프랭클린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는 자유의 여신상 크라운을 쓰고 있는 테디 시어터,원 드림 시어터 소극장 등 구석구석 창조의 공간들로 채워져 있다. 『자유여,상큼한 자유여(Oh,Liberty,Sweet Liberty)』 프랭클린 스트리트의 한벽면을 장식한 이 글은 브로드웨이의 영원한 모토이기도 하다.
  • 휴위트와 「변사또」(송정숙칼럼)

    영국 다이애나비의 염문이 책이 되어 나오는 바람에 「신사의 나라」영국이 들끓고 있는 모양이다.초판 7만5천부가 출간된 날로 다 팔렸고,남성들이 일제히 나서서 휴위트를 비난하는 소란 속에 있다. 아닌게 아니라 휴위트의 행위는 비겁하다.결국 돈의 유혹에 넘어가 승마같은 전통적인 신사경기의 왕실 교관이 너무 파렴치한 짓을 한것이다. 우리에게는 「변사또」라는 악당상이 있다.그는 우리의 대표적인 고전 러브스토리인 춘향전에 등장하는 고을 원님으로 「신사답지 못한 전형」으로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변사또」는 그렇게 비겁한 남자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는 했을망정 완력으로 정복하지는 않았다.어마어마한 형구를 동원하여 훼절위협은 했지만 의연히 『아니오』를 지키는 춘향을 강제로 함락시키지는 않은 것이다.본인의 의사를 굽히려고 강압을 했을 뿐 강행하지는 않은 셈이다. 침략한 나라의 여인들을 집단으로 데려다가 나라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군대 위안부를 삼은 이른바 일본군의 「정신대」가 일본 남성의 신사성을 영원히 먹칠해 버린 것에 비하면 우리의 변사또는 훨씬 떳떳하다.『죽일지언정 욕보이지는 않는』 대접을 여인에게도 한 것이다. 법도와 금기와 남편의 배신에 짓눌려 숨막혀 있는 왕실의 지고한 신분의 여인과 나눈 은밀한 사랑이야기를 돈에 팔아버린 휴위트는 변사또에 비하면 너무 파렴치하다.게다가 춘향은 그 시절의 여인치고는 양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천한 신분인 기녀의 딸로 태어나 그 자신 준기녀쯤 되는 신분이었고 실제로 관기의 명부에도 등록되어 있었다.그런 여인이지만 『수청을 들겠느냐』추궁하고 아니하겠소 하면 태형을 가하고 『내말대로 하면 호강시켜주마.그래도 아니 듣겠느냐』고 꾀어보다가 그래도 아니들으니까 칼을 씌워 하옥해 버렸다. 그렇기는 하지만 영국이 신사의 나라 흔적을 아직도 충분히 지니기는 한것같다.여론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신사답지 못한 폭로」를 한 휴위트를 비난하는 것을 보면.『채찍에 맞아도 될 비열한 인간』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14세기의 「반역법」대로 휴위트를 교수형에 처해야한다는 강경론도 나오고 있다. 그 저자가 하필이면 「닥터 지바고」를 써서 얼어붙은 전체주의 소련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던 보리스 파르테르나크의 종손녀라고 하는 것도 아이러니다.구 사회주의 국가 출신 노벨문학상 작가의 혈육이 영국 왕가의 여인을 할퀴어서 거금을 움켜쥐게 된 형국이니까.영국인들 마음이 헷갈리게도 되었다. 어쨌든 이런 비열한 인간에게 틈을 주어 영국 왕실을 곤혹속에 몰아넣고 신사나라 영국의 위신에 먹칠을 한 다이애나비의 행실을 탄핵하거나 비난하는 일에 앞서 휴위트의 신사답지 못함에만 열을 올리는 영국의 여론이 신기하다.아마도 그런 일이 우리 고장에서 일어났다면 모든 비난과 우세는 당사자에게로 혹독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아시아에는 똑같이 「군대 위안부」문제를 가진 나라들이 있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것이 이미 「옛날의 비극」으로 화석이 되었는데 우리에게서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않고 「오늘의 비극」으로 남아있다고 말하는 연구자가 있다.마치 그런 불운이 당사자의 처신에 의한 흠이기라도 한 것처럼 여성에게 가혹한 일면이 우리에게는 있다. 옛날왕실에서도 우리는 비빈이 잘못을 저지르면 폐해버리면 그 뿐이었다.남자문제를 일으키는 따위는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투기를 했다든가 하는 따위 아주 작은 허물로도 폐위를 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14세기 영국의 반역법으로는 왕세자비와 정을 통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중대한 범죄이기때문에 그 상대 남성이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오늘날에도 그런 법이 살아있는 것은 아니므로 휴위트가 비록 사형은 당하지 않더라도 「목숨만큼」소중한 명예를 잃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정작 찰스 왕세자를 진퇴양난하게 만드는 일은 이나라의 법도때문인 것같다.영국의 왕위계승법에 의하면 왕세자가 이혼을 할 경우에는 왕위에 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합법적으로 결혼한 여자와 이혼하는 일은 그에 합당하게 엄중한 보상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신사나라의 명예를 유지하자면 치러야 할 여러가지 보상이나 대상의 제도를 장치했어야 했던 것의 흔적이 이런데 남아 있는 셈이다.이 일이 있은뒤 크게 실망하고 울기만 하고 있다는 다이애나왕세자비의 진짜 슬픔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왕세자비에서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왕위계승을 둘러싼 이기적 이유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변사또보다 파렴치한 휴위트가 잃은 「명예」사건도 사람들은 곧 잊게될 것이다.지구상에는 날마다 별일이 다 일어나니까.
  • 성항,마약밀수 화란인 사형/국제사면위 구명운동 무위

    ◎네덜란드,강력한 불만 표시 【싱가포르 AP AFP 연합】 싱가포르는 23일 마약밀수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네덜란드인 요하네스 반 다머(59)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고 싱가포르주재 네덜란드 대사관이 발표했다. 싱가포르 창이교도소의 교도관들은 이날 상오 6시(한국시간 상오 8시)반 다머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됐다고 대사관측에 알려왔다고 대사관의 한 대변인이 밝혔다. 반 다머는 싱가포르의 강력한 마약퇴치법에 따라 사형이 집행된 첫 서방인으로 네덜란드정부는 그동안 다각적인 경로로 그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지만 싱가포르정부는 구명요구를 거부하고 사형집행을 강행했다. 전날 네덜란드대사관의 루크 실링스 일등서기관은 반 다머의 변호인 에드문트 페리에라가 신청한 『구명요구가 거부됐음을 확인한다』고 발표했으며 페리에라도 『사형의 집행을 유예해 달라는 요구가 거부됐다는 것을 싱가포르대통령실로부터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반 다머는 91년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헤로인 4.3㎏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지난해 11월 사형이 확정됐었다. 앞서 왕정창 싱가포르대통령은 네덜란드정부,그리고 유례가 드문 베아트릭스 네덜란드여왕의 구명호소를 거부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도 싱가포르정부에 자비를 호소했지만 무위로 끝났었다. 반 다머는 헤로인 봉지가 자신의 가방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한 나이지리아인의 요청으로 이 가방을 들어줬을 뿐이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왔다. ◎외교단절 조치 안해 【헤이그 로이터 연합】 네덜란드정부는 23일 싱가포르정부가 자국인 요하네스 반 다머씨(59)를 마약밀수혐의로 사형시킨데 대해 강력한 불만의 뜻을 표시했다. 한스 반 미엘로장관은 네덜란드가 싱가포르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이냐는질문에는 『분노를 표시할 필요성은 있겠지만 외교관계 단절같은 조치들은 이같은 충격을 다루는데 있어 적절하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방법』이라고 답변했다.
  • 남아공 흑인들 살해 혐의/극우백인 6명 사형 선고

    【요하네스버그 AP 연합】 지난해 4명의 흑인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남아공 신나치 극우단체 회원 6명이 11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프리카너 저항운동(AWB) 일원인 이들 6명은 지난해 요하네스버그 서쪽의 한 도로변에서 흑인들을 살해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또다른 한명은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남아공에서 사형은 보통 교수형으로 집행되는데 만델라 대통령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사형제도에 반대입장을 천명한 바 있어 집행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 전과자(외언내언)

    얼마전 미국의 「3스트라이크 아웃법」이 화제가 됐었다.캘리포니아주정부가 야구의 「스리 스트라이크 아웃」규칙을 본떠 만든 법률이 그것.두차례이상 중죄를 저지른 범인이 또다시 중죄를 범할 경우 25년동안 집행유예를 허용하지 않고 종신형에 처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상습누범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정은 무의미하고 흉악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위해서는 「격리수용」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데서 이법률이 채택됐다.전과자문제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의 경우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고 경국대전은 전한다.절도를 3차례 한 자와 재범자는 모두 교수형에 처해 사회와 격리시켰던 것이다.이같이 예나 지금이나 또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과자들이 말썽이 되어온 것을 알 수 있다.지난 1일 발효된 「성폭력 특별법」이 성폭행 피의자를 중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도 성폭력범죄가 그만큼 많아 사회문제화돼 있기 때문이다.중형으로 다스리지 않고서는 성범죄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그 전과자범죄가 해마다 급증하고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전과자대책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나 심각한 상황으로 서둘러야한다는 것이다.전국교도소의 기결수 가운데 60%가 전과자이고 누범비율은 80년 27.5%에서 90년 45.1%로 급격한 상승세다.이처럼 많은 범죄가 전과자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데도 대책은 형벌및 보호감호처분 이외에는 뾰족한 게 없다는 데서 문제가 된다. 이래서는 안된다.우리가 미국의 「3스트라이크 아웃법」을 도입할 수 없다면 교화행정을 꾸준히 필 수 밖에 달리 방법이없다고 본다.교정분야에 집중투자가 있어야한다.교정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우선 문제다.교정전문가에 대한 처우가 좋아야하고 교정행정이 과학적이고 체계적이어야한다.또 현행 보호감호제도 운영의 개선이 있어야하겠다.수형자를 보다 세분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범법행위를 미리 막는 노력 못지않게 재발을 방지하는 전사회적인 조치가 절실한 때이다.
  • 3년만의 재기… 한·뚝심의 여걸/파키스탄총선 승리 부토(뉴스인물)

    지난 6일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차기 파키스탄총리직을 맡게된 베나지르 부토여사(40)는 한마디로 한과 뚝심으로 대표되는 여걸 정치인. 24세때인 77년 부친인 줄피가르 알리 부토총리가 지아 울 하크장군의 군사쿠데타로 실각하고 2년후 교수형을 당하자 부친의 한을 풀고 유지를 잇기 위해 정치에 투신.이후 하크 군사정부에 대항,투쟁을 벌여 투옥과 망명을 거듭했으며 하크대통령이 비행기사고로 사망한 후인 88년 마침내 총선에서 승리,회교권 최초의 여성총리가 됐다. 총리재임중엔 무소불위의 군부및 관료주의의 병폐때문에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며 부패스캔들로 취임 20개월만인 90년 이번 총선에서 맞대결한 나와즈 샤리프에게 권좌를 내줬다. 이번의 승리로 권토중래는 했지만 자신이 이끄는 파키스탄인민당(PPP)의 의석이 총 2백17석중 86석에 불과한데다 피폐해진 경제,높은 문맹률,마약 만연등 난제가 산적해있어 정치적 장래는 불투명한 실정이다. 미하버드대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공부했으며 이번 총선에서 PPP소속으로 당선된 남편과의 사이에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 회교과격파 7명 교수형(지구촌단신)

    【카이로 AP 연합】 이집트는 8일 회교과격파 7명을 정부전복 기도죄로 교수형에 처했으며 회교과격단체 단원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암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 컴퓨터 가정교사(미리가보는 21세기:8)

    ◎컴퓨터와 학생이 대화 나누며 학습/개인교수·토론형 등 수업 재미까지 요즘 과외가 다시 허용되면서 학부모들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돈 많은 가정에서야 과외비가 별 것 아닐수 있지만 대부분 많은 가정들이 몇만∼몇십만원의 사교육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학습이 보편화되면 컴퓨터 가정교사가 이런 근심을 말끔히 씻어 준다.게다가 1대1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니 교육효과도 클 것이다. 컴퓨터 가정교사란 컴퓨터 보조학습(CAI)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즉 학습용 프로그램을 이용해 컴퓨터와 학생이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학습을 진행한다. CAI에는 반복연습형,개인교수형,모의실험형,게임형,토론형 프로그램 등이 있다. 반복연습형은 암기를 목적으로 반복학습하는 것이고 개인교수형은 컴퓨터가 교사를 대신해 질문을 던지면서 학생의 이해도를 파악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개별 수업을 하는 것이다. 모의실험형은 일상 생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컴퓨터를 통해 배우도록 한다.예를 들어지구의 운동처럼 직접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을 실제와 비슷한 상태로 컴퓨터에 담아 가르친다. 오락형은 전자오락과 같이 게임식으로 학습과정을 진행하거나 퀴즈식으로 재미있게 꾸며진 프로그램이다.또 토론형은 교사와 학생들의 컴퓨터를 근거리통신망(LAN)으로 연결,서로 의견을 주고 받거나 교사가 학생에게 학습내용을 지시한다. 이같은 교육용 프로그램은 집에서 학생들 스스로 학습을 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 구태여 많은 돈 들여 과외교사에게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나라는 현재 한국통신과 한국교육개발원 등에서 CAI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또 보조학습용 프로그램이 주제별로 저장된 「학습용 정보은행」과 학생의 컴퓨터가 연결되면 언제 어느때라도 필요한 과목의 과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세르비아 강경지도자 단죄 처리/유엔 결의 「유고전범재판소」 기능

    ◎전세계 분쟁지 인권유린도 심판/신병확보가 난제… 실효 미지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22일 유고내전 전범 처벌을 위한 국제전범재판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한 것은 세계 분쟁지역에서 자행되고 있는 잔혹행위에 철퇴를 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국제전범재판소설치는 비단 옛유고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곳에서나 반인륜적 잔학행위를 자행한 책임자들에게도 적용될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이번 전범재판소설치는 제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후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의 도쿄에 설치된 전범재판소와는 판이하게 다른데다 그후 처음으로 승전국이 아닌 유엔결의를 통해 설치된 것이어서 더욱 주목되고 있다. 미국·프랑스등 서방국가들이 주축이 돼 채택된 이번 전범재판소 설치결의안은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에게 전법재판소의 기능에 관한 세부적인 제안을 60일 이내에 마련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제안이 마련돼 다시 안보리의 승인을 얻게 되면 구유고연방의 인종청소,강제수용소,조직적인 강간행위및 대량학살에 책임이 있는자들을 심리대상으로 하게 된다. 현재까지 유엔전범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지목한 전범은 없지만 미국무부가 지난해 12월 전범으로 지목한 인물들은세르비아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주민 지도자 라도반 크라드지치,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사령관 라트코 몰라디치와 7명의 세르비아계및 크로아티아계 민병대 지휘관,그리고 포로수용소장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전범재판에서 내려진 형벌은 교수형이나 종신형이 대부분이었다.2차대전에서 잔악한 행동으로 악명높았던 나치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뉘른베르크국제군사재판에서는 레지스탕스와 유태인등 4천명을 학살한 리옹의 백정 클라우스 바르비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유태인 6백만명을 학살한 나치의 친위대당 아이히만등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또 패전국 일본에서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가 개설한 군사재판소에서는 관동군 사령관으로 남경학살의 주역을 담당했고 총리대신을 지낸 도조 히데키등이 사형을선고받았다. 그러나 2차대전이후에는 전범에 대한 단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과거 「킬링필드」라 불리는 캄보디아의 폴 포트정권이 자행한 대량학살도 국제재판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했다. 2차대전이후 처음으로 본격적인 전범재판을 하겠다고 나선 유엔의 이번 결의가 유고내전종식에 얼마나 도움이 되고 세르비아측에 과연 정치적인 타격을 안겨줄지는 미지수다. 전쟁직후의 군사재판과는 달리 유고전범재판은 실제 재판소설치까지 수개월이 걸릴뿐더러 인권유린의 당사자를 가려내는 문제와 전범자의 신병확보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번 결의가 냉전이 붕괴된이후 잔혹한 인권유린을 일삼고 있는 지역에 더이상의 범죄행위를 예방하고 억제하는데는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 핀란드지,탈출 안혁·강철환씨 인터뷰 게재

    ◎“북한 강제수용소 비하면 영화 「파피용」 감옥은 낙원” 핀란드의 타나안신문은 핀란드의 정보기관인 IS측이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뒤 최근 한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안육씨(24)와 강철환씨(24)를 서울에서 인터뷰했다고 밝히고 함흥에서 약60㎞ 떨어진 여덕의 제15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각각 3년과 15개월동안 공포의 생활을 했던 이들의 경험과 목격담을 2일자 지상에 보도했다. 이 신문은 약20만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는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들이 대부분 구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만들어진 「굴라그」체제를 바탕으로 삼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고 북한에서는 두번째로 큰 여덕 수용소의 수감자 약5만명은 사형선고를 받은 경우와 석방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의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했다. 타나안지가 북한 강제노동수용소의 경험자로서는 처음으로 서방으로 망명한 북한인임을 강조한 안씨와 강씨가 전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여덕의 제15 수용소의 기상시간은 새벽 5시이다.하루 식사는 밥 한 그릇과 약간의 옥수수 그리고소금이 전부다.우리는 매일 13시간씩 돌과 나무를 나르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김일성의 교시를 학습해야 하며 쉬는 날이라고는 1년에 한번인 김정일의 생일 때 뿐이다. 수감자들은 높이가 낮은 감방에 구부리고 앉아 있어야 하며 날마다 간수들로 부터 구타를 당한다.심지어 몸에 붙은 벼룩을 떨쳐내려고만 해도 때린다. 간수들이 칼로 임신 8개월 된 여인의 낙태수술을 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 여인이 살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수감자들의 출신배경은 학생·노동자·학자 등 다양하다.우리가 있던 수용소에는 전직 리비아 주재 대사,전해군사령관,비밀정보기관의 경제담당 책임자가 끼어있었고 국제회의장에서 외국인들과 너무 오래 대화했다는 이유로 들어온 몇몇 기자들도 있었다.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전부 집합하는 것은 공개처형이 있을 때 뿐이다.이 처형은 탈출을 기도했거나 간수들에 대한 태도가 불량한 수감자가 대상이며 그 방법은 총살 또는 교수형이다. 처형이 끝나면 다른 수감자들은 시체를 향해 돌을 던져야 하며 보통 가장 큰돌을 던지는 자는 간수들로부터 한동안 특혜를 받는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어느 누구도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설령 담을 넘어 수용소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깊은 도랑이 기다리고 있고 굶거나 얼어 죽기가 십상일 것이다. 결국,우리 모두가 짐승이었다.수감자들은 모두 생존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기 때문에 동료 수감자들은 간수들과 똑같이 위험한 존재이다. 서울에 온 후 본 영화 파피용(남미의 한 프랑스감옥에서 탈출하려는 두 죄수의 이야기가 주제)에 나오는 감옥은 우리가 있던 강제노동수용소와 비교할 때 낙원과 같다.단 한가지 공통점은 우리 역시 살아남기 위해 바퀴벌레를 잡아 먹었다는 것 뿐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