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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작된 위기 파괴되는 평화…‘신의 나라는 가라’

    ‘신의 나라는 가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한국과 중국에서 주요 현안으로대두되고 있다. 일본의 우파가 결성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쓴 교과서가 일본인들에게 집단히스테리 성향과 ‘위기의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향후 일본이 또다시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떨쳐 버릴 수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문부과학성은 주변국의 이같은 걱정을 외면한 채 왜곡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켰고,이 교과서는 4일 일본에서 전격시판에 들어갔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지식인 4명이 쓴 ‘신의 나라는 가라’는 제목의 책이 국내에서 출판돼 눈길을 끌고 있다.4장으로 구성됐으며 간사이대 강사인 우에스기 사토시의 ‘우익운동이 교과서를 만들었다’,도쿄가쿠에이대 교수인 기미지마 가즈히코의 ‘새로운 역사수정주의 비판’,가쿠슈인대강사인 고시다 다카시의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유도’,류구대 교수인 다카시마 노부요시의 ‘엉터리 교과서를 밀어붙이는 사기꾼들’등을 담고 있다. 책은 태평양전쟁에 관한 모든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깎아내리며 일본의 우경화를 꾀하는 정치운동은 장차 일본의 젊은이를 비극으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한다.저자들은 새역모의 정체,왜곡교과서의 모순점,산케이신문·출판사인 후쇼사등이 추진하는 판매운동의 실체 등을 조목조목 해부한다. 우선 새역모의 뿌리가 상당히 넓고 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새역모는 지난 94년 난징대학살사건에 의문을 품은 글을 ‘사회과교육’이라는 잡지에 발표했던 후지오카라는 사람이 95년 결성한 자유주의사관연구회가 모태라고 밝힌다.후지오카는 96년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은 역사’를 산케이신문에 연재했고 이 연구회가 97년 새역모로 확대됐다는 것이다.이어 99년 이 곳에서 이번 왜곡교과서의 초본격인 ‘국민의 역사’를 펴냈고,그 책은 교사나 교육위원회,지방의원 등에게 무료증정돼 판매부수가 70만부에 달한 것으로 기록됐다.새역모는 마침내 지난해 4월 ‘국민의 역사’의 인용부분 등을 줄여 만든 왜곡교과서를 검정신청했다. 새역모의 구성원은 2차세계대전 전의 체제를 지지하는 관료 정치가 실업가와 신도(神道)에 연결된 종교단체가 많다. 여기에 우파 문화계 인사들이 가담해 있다.대표적인 정계인사로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이타가키 세시로육군대장의 아들인 이타가키 마사르,전쟁범죄 기록을 인멸한 오쿠노 세이료 등이 꼽힌다.이들이 선거를 치를 때는 신도계의 종교단체들이 대거 동원되고 있다.책은 이어 새역모,산케이신문,후쇼사 삼자가 조직적으로 왜곡교과서 판매에나서고 있다고 주장한다. 새역모와 산케이신문은 후쇼사를 통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운동이 있다’라는 책을 따로 펴내고 책안에 새역모 입회서와 산케이신문구독신청서 등을 끼워팔고 있다는 것이다. 우에스기 사토시는 “왜곡교과서는 문명과 문화 등 기본개념조차 정립돼 있지 않아 읽을 수록 모순이 드러난다”면서 “매스컴,정치,대중을 휘모는 파시즘 양상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한길사 7,000원. 박재범기자 jaebum@
  • 美 ‘64년만의 공개사형’ 술렁

    오는 16일 미국 인디애나주 테러호트군의 연방교도소에서있을 오클라호마 정부청사 폭탄 테러범 티머시 맥베이(32)의 공개 사형집행이 미국 사회의 지대한 관심사로 대두되고 있다. 테러 희생 유가족과 취재진 등 20여명이 맥베이가 독극물주사를 맞고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고 나머지 200여명은 오클라호마 시티에 마련된 폐쇄회로TV를 통해 이 장면을 지켜볼 예정.공개 사형집행은 1936년 켄터키주 오언즈버러와 1937년 몬타나주 교수형 이후 64년 만이다. 인구 6만명 소도시 테러호트에는 16일 사형 반대론자 5,000여명이 시위를 계획,치안에 비상이 걸렸다.또 ‘희대’의 사형 장면을 보도하기 위한 취재진 1,400여명이 몰려들것으로 예정. 언론사들은 사형장 입장 제한 기자수 10명을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95년 4월19일 일어난 오클라호마시티 연방 정부청사폭탄테러 희생자는 어린이 19명을 포함 모두 168명. 그러나 범인 맥베이는 최근 출판된 자서전 ‘아메리칸 테러리스트’에서 추호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93년 텍사스주 와코에서 미 연방수사국(FBI)의 무리한 진압으로 희생된 다윗파 신도 72명에 대한 ‘정당한 복수’였다는 것이다. 맥베이의 ‘충격적인’사형 장면이 공개된 뒤 미 사회는사형집행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릴 것으로 보인다.ABC방송과 워싱턴 포스트는 3일 미국인의 사형제도에 대한 여론조사를 발표하는 등 논쟁의 토대를 조성하고 있다.여론조사 결과 미국인의 63%가 사형 제도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수정기자 crystal@
  • 5월의 독립운동가 ‘안규홍 선생’

    국가보훈처는 30일 전라도 일대에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머슴 출신 의병장 담산(澹山) 안규홍(安圭洪) 선생을 광복회·독립기념관 등과 공동으로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발표했다. 선생은 1879년 전남 보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0살때부터 20년간 머슴생활을 하다 러·일전쟁 이후 토지약탈등 일제의 침략을 절감,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고 농민을 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졌다.이후 전남 순천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투신,활동하던 중 의병장이 민폐를 끼치자 그를제거한 뒤 1908년 전남 보성군 동소산에서 토착농민과 해산군인 등을 모아 대규모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와 친일세력,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과 순천 등 전남 중동부지역에서 활동하며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거나 탐욕스러운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1909년 10월까지 1년6개월동안 일본수비대·토벌대·순사대와 26차례 전투를 벌여 파청대첩과 진산대첩 등 숱한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일제가 전남지역 의병을 상대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자 선생은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부대를 해산,고향으로돌아가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이후 대구감옥으로 옮겨져 1911년 5월5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정부는 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국내12만여 기업에 협박성 우편물

    지난 3월 미국의 소프트웨어 저작권보호단체인 ‘BSA’(Business Software Alliance)의 이름으로 불법복제를 경고하는 협박성 우편물이 국내 12만4,000여개의 기업과 기관에보내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23일 “지난 3월부터빨간 교수형용 밧줄을 목에 맨 섬뜩한 사진 등과 함께 불법소프트웨어 사용을 경고하는 내용의 우편물이 국내 기업들에 발송돼 수사에 나섰다”면서 “우편물의 출처를 조사한결과,이를 배달토록 한 업체가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한국지사인 것으로 의심된다”고 밝혔다. 경찰은 우편물을 보낸 한 업체를 조사한 결과,MS사로부터1,900만원이 입금된 사실을 확인했으며,MS사 관계자로부터상부지시로 이같은 광고문안 작성과 송부를 실행에 옮겼다는 진술을 받아냈다고 설명했다.하지만 BSA의 의뢰로 이뤄진 것인지,MS한국지사의 단독결정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덧붙였다. 한편 우편물을 받은 국내 업체들은 “불법 소프트웨어를사용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는외국 소프트웨어업체가 국내 기업들을 죄인 취급한 꼴”이라며 분노했다. 조현석기자 hyun68@kdaiㅇly.com
  • 북방의 홍콩…중국 랴오닝성 ‘다롄’

    ‘고구려와 발해의 추억’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시는 한국과 인연이 깊은곳이다.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노스텔지아가 부릇부릇 솟는다.그런가 하면 안중근 의사가 최후를 맞은 뤼순(旅順)감옥이 지척이어서 우리 민족혼의 고향 같은 곳으로 느껴진다. 러시아와 일본이 오랫동안 번갈아 통치한 탓에 동·서양이혼재한 듯한 한마디로 규정하기 힘든 도시색을 지녔다. 러시아제국의 야욕을 불러일으켰던 부동항(不凍港) 다롄을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동유럽의 어느 도시를 찾은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중국 공업화를 선도해 온 다롄이 한국 관광객들을 손짓하고 있다. ●아픈 역사를 지닌 도시=부동항을 얻으려는 러시아제국의야욕은 1897년 다롄과 뤼순을 조차하기에 이르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만주의 출입구’ 다롄을 35년 동안 통치했다.그러나 45년에는 러시아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는 비운의 역사를 안겼다. 하지만 시내 중심가 중산광장에 서면 비참한 역사는 저 멀리 물러나고 10갈래로 뻗어나간 거리에 들어선 마천루들이하늘 높은줄 모른다.이 도시에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는세계적 호텔 체인만 10여곳. 중산광장 뒤편 러시아 거리에 들어서자 세트장같은 건물이지어지고 있다.러시아나 폴란드의 어느 도시를 옮겨 온 듯한 건물이다. 러시아거리 뒤편에는 일본거리,그 뒤쪽에는 조선족촌,가히동서양의 만남이라 할 만하다.그래서 다롄은 ‘북방의 홍콩’으로 불린다. ●안 의사 숨결 생생히=뤼순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동북3성 점령에 항의하는 중국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지은 것.이고색창연한 건물은 중국인에게는 개방됐지만 한국인에겐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있다. 4월 바람은 쌀쌀하다 못해 한기마저 느껴진다.중국이 공식명칭 ‘뤼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으로특별관리하는 뤼순감옥에서 안의사가 수감되었던 방 역시특별관리되고 있지만 온몸에 서리는 냉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방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건물 바깥에서 유리창을 통해들여다보니 간이침대와 책상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다.특이한 것은 안 의사의 휘호 사본이 유리창에 걸려있다는 점. 교도소측은 안의사의 업적과 그를 기리는 이유를 안내판에적고 있다.교도소 직원은 사진촬영을 제지하느라 여념이 없다. 순국현장은 안의사 특별감방 바로 맞은편에 있다.일제는 높이 90㎝,직경 45㎝의 통에 교수형당한 죄수를 뼈가 튀어나오도록 쑤셔넣어 교도소 뒤편에 가매장했다 나중에 화장했다고 하니 그 극악함에 몸서리가 처졌다. ●인천에서 1시간=인천국제공항을 떠난 지 1시간이면 다롄에 닿는다.뤼순감옥은 다롄공항에서 20분 거리에 있다.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양국 교류도 활발하다.기업인 등이 수백명거주하고 있고 조선족 5,000여명, 유동인구까지 합하면 8,000명 정도가 다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다롄에는 중국 최초의 100% 외국인 출자 골프장인 다롄 컨트리클럽이 있다.대구컨트리클럽이 투자했다.발해만에 근접한 분지여서 18홀 어디서나 바다가 바라보이는 점이 자랑거리.현지 전화 (0411)642-8899 대구 전화 (053)854-3464거이옹웨(高永偉·54) 다롄시 여유(旅遊)국장은 “서울에서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큰 이점이 있다”며 “곧 한국 관광객들에게 뤼순감옥을 개방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하 겠다”고 말했다. 또 일본인들에게만 발급하는 도착비자를한국인들에게도 주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오는 6월15일부터 인천∼다롄 항공편이 하루 2편(아침과 오후)으로 늘어나 더욱 편안한 길이 약속된다.투윈항공여행사에서 2박3일 여행상품을 판매한다.가격 59만원대.(02)518-0181임병선기자 bsnim@
  • 2001 길섶에서/ 탐험가 발보아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다며 대서양을 횡단하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뒤 스페인에서 벌어졌던 저 ‘엘 도라도(黃金鄕)광란’의 시기에 바스코 누녜스발보아라는 건달이 일확천금의 야심을 품고 신대륙으로 건너왔다.그는 “저 멀리 남쪽 땅에 진짜 ‘엘 도라도’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파나마 지협을 통과한 끝에 난생 처음 보는 대양(大洋)을 발견하고는 ‘평화로운 바다’로 명명했다. 그후 발보아는 반란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건달 아닌 ‘태평양을 발견한 탐험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아메리카대륙이나 태평양은 지구가 생성될 때부터 그곳에있었다.그런데도 그것을 백인들이 처음 ‘발견’했다니 가소로운 말이 아닐 수 없다.그러나 어쩔 것인가.서구인들의 탐험 또는 개척 정신이 결과적으로 지난 몇 세기 동안 전인류의 운명을 좌우해 왔던 게 사실이다.21세기가 새롭게 열리고있는 시점이다. 이제 우리도 ‘문명사적 신항로 개척’에 적극 나서자.새로운 사상도 좋고 첨단과학도 좋다. 장윤환 논설고문
  • 말많던 팜비치 투표기 온라인 경매

    [웨스트 팜비치 AFP 연합] 지난달 실시된 미국 대선 투표에서 ‘보조개표(Dimpled)’ ‘교수형표(Hanging)’ ‘임신표(Pregnant)’ 등 을인식하지 못해 당선자를 한달 이상 확정짓지 못하게 한 고물 투표기가 곧 경매에 부쳐진다. 미국 동남부 플로리다주 팜비치 카운티의 커미셔너(카운티의 최고행정책임자)인 버트 애런슨은 19일 한 공식 모임에 참석,“문제의 투표기를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e베이를 통해 매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 [외언내언] 젊은층 자살

    사건기자때 자살기사를 쓰면서 무척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경찰이나 가족이 말하는 대로 ‘공부압박감’‘생활고(苦)’‘실연’을 그대로 인용하긴 한다.그러나 입시 중압감에 눌리고 생활에 찌들리며 애인에 채인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흔히 드는 자살이유가 어쩐지 피상적으로 보인다.다수가 고통과 상처를 안고서도 질기게 사는데 스스로 목숨끊는 사람의 마음속은 얼마나 절박했을까.같은 요인에 더 충격받는 내적 심리공황에 심증이 간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은 ‘자살론’에서 자살유형을 세가지로 구분했다.▲사회적 통합이 약화돼 과도한 개인화를 보일 경우 나타나는 ‘이기적 자살’▲이와 반대로 사회적 통합이 높은 곳,예컨대고대사회나 군대집단 등의 지나친 사회적 기대와 의무가 원인인 ‘애타적(愛他的)자살’▲경제적 파산과 이혼 등으로 삶의 기준을 상실할때 발생하는 ‘아노미(anomy:無규제상태)자살’등이다. 실제 자살원인은 더 복잡하다.62세때 사냥총으로 자살한 소설가 헤밍웨이는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외로움이 자살의 주요 이유로 지적됐다.22세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해 분신자살했다.이스라엘이 두려워하는 팔레스타인의 자살 특공대는 ‘죽음이 신(神)과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에서 행동한다. 자살과 타살의 경계가 애매한 죽음도 적지 않다.귀양간 신하가 사약과 교수형 가운데 ‘스스로 선택’해 약을 마시고 죽는 ‘강요 자살’이 있다.가장이 일가족과 함께 죽는 동반자살은 타살에 가깝다.독재정권하의 수많은 ‘의문의 자살’은 위장 자살 의혹을 받고 있다. 늙음과 질병의 고통이나 외로움때문에 주위에서 도와줘 죽게 하는 안락사는 ‘반(半)자살,반 타살’로 불린다. 지난 9년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64.3%나 급증했다고 한다.사망률로는 노르웨이와 덴마크 수준의 반갑지 않은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특히 10,20,30대 젊은 층의 자살이 자동차 사고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사망원인으로 꼽힌 것은 충격적이다.사회적으로 자살특공대도 필요없고 분신자살할 만한 사회문제도 사라진 현재 신체 건강한 많은젊은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문제다.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행동에서는 쉽게 자살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고한다. 글과 그림 색깔에서 죽음 냄새가 나며 무덤과 죽음암시 표시도있다. 공부,왕따,가정불화,취업난,외모비관과 실연 등 어느 원인이든사회와 가정의 보다 적극적인 관심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사회 병리’차원에서 자살을 다루고 정책도 세워야 할 것같다. △이상일 논설위원bruce@
  • 9월의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

    국가보훈처는 구한말 전남북 지역에서 항일의병투쟁을 벌인 죽파(竹坡) 오성술(吳成述·1884∼1910)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전남 광산군 출신인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최익현 선생의 구국 의병항쟁을 주창하는 강회에 참석,의병창의를 결심하고 귀향했다.선생은 곧바로 동지 200여명을 규합,1907년 2월 광주용진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이 이끈 의병은 호남의병부대 연합군인 ‘호남창의회맹소’에합류,전북 고창의 문수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고창읍성과 전남 영광 법성포를 탈환하는 등 큰 전공을 세웠다. 1908년부터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대대적 탄압작전이 시작되자 선생은 전남 광산군 석면산 전투,함평 대명동 전투,고막원 헌병분파소 습격,나주 거성동 전투등 전라도 지역에서 수많은 유격전을 전개했다. 1909년 7월까지 유격전을 중심으로 항일의병 활동을 벌이던 선생은나주 용문산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세우고 일본군 영산포 헌병대와 결사항전을 전개하다 그해 8월 체포됐다.강도죄와 살인,방화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은 뒤 1910년 9월15일 대구감옥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지난 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노주석기자 joo@
  • 칸 국제영화제 폐막…황금종려상 ‘어둠속의 댄서’

    21일 폐막한 제 53회 칸 국제영화제는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도그마영화의 주창자로 유명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덴마크)의 뮤지컬 비극 ‘어둠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로 돌렸다.미국으로 이민온 체코 여성의 신산한 인생역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한 아이슬랜드 가수 비요르크는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또 남우주연상은 ‘화양연하’의 토니륭(양조위)에게,대상과 감독상은 중국 지양 웬 감독의 ‘귀지 라이 러’와 ‘하나둘’의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에게 각각 돌아갔다. 최근 국내 개봉된 ‘백치들’의 감독이기도 한 라스 폰 트리에는 1996년 ‘브레이킹 더 웨이브’로 심사위원 대상(그랑프리)을 받은 전적이 있는 인물. 1995년 “현재의 모든 영화들은 죽었다”는 주장과 함께 인공장치를 배제한영화만들기의 10계명을 담은,이른바 ‘도그마 선언’을 통해 실험적 작품들을 선보여왔다.인위적 조명을 거부한 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며 배우들의즉흥연기에 비중을 두는 그의 작법은 ‘백치들’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수상작 ‘어둠속의 댄서’는 디지컬 캠코더를 사용하되 현장 사운드와 폭력·세트 배제 등 대부분의 도그마 규율을 깬 작품이다.이는 영화를 일찍부터 칸의 화제작으로 띄워올리는 데 한몫했다.체코 난민으로 할리우드 뮤지컬 스타를 꿈꾸다 억울하게 교수형 당하는 여인사(史)를 그린 수상작품은화려한 노래와 춤에 유려한 영상이 어우러진 뮤지컬 형식.비극을 환상적 미학으로 포장해내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한편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본선 경쟁부문에 진출해 기대를 모았던 ‘춘향뎐’을 비롯,초청작으로 나갔던 국내 작품들은 수상 성적을 내지 못했다.칸 행을 겨냥해 영화의 17분을 새로 편집하는 정성을 쏟았던 ‘춘향뎐’의 제작사태흥영화사측은 “작품의 독창성과 예술성으로 상당한 호평을 받아 막판까지감독상이나 심사위원 특별상쯤은 기대했었는데, 결국 세계 거장들의 작품과 나란히 어깨를 겨뤘다는 데 의미를 찾아야 할 것같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칸을 다녀온 한국영화들이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다는 게 영화가의 평가다.영화진흥위원회와 강제규필름,미로비전,CJ엔터테인먼트,시네클릭,미로비전 등이 개설한 부스에는 외국 바이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그 과정에서 판매성과와 함께 역량있는 국내 감독들이 세계적 주목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수정기자 sjh@
  • 안중근의사 순국의 현장

    *뤼순감옥의 안중근과 신채호. 안중근의사 순국일인 3월 26일 중국 요령성 뤼순시 향양가 139호 원호방에자리한 뤼순감옥은 90년전 동양천지를 진동한 의사(義士)의 죽음을 아는지모르는지 이날따라 많은 중국인 참관자들로 하루종일 붐볐다. 봄기운 완연한 따사한 햇살아래 사위가 붉은 벽돌 담벽으로 둘러싸인 고색창연한 뤼순감옥은 일제에 저항한 수많은 중국애국자들의 수난의 장소지만지금은 역사관광지가 되고있다. 워낙 큰사건 큰인물이라 안의사가 순국한 날까지 갇혀있던 ‘특설감방’은의사가 5개월동안 머물면서 사용했던 지필묵과 몇가지 유품이 전시되고 벽에는 휘호 두점이 걸려있었다. 의사 순국 90주년을 맞아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이사장 박보희)간부들이 안의사의 흔적이 깃든 감방에서 간소한 추념식을 갖고 서울에서 만들어온안내판 현판식을 거행했다. 뤼순감옥은 중국정부가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관리하고 있다. 공식 명칭은 ‘여순일아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진열관’이다. 50여만명의 중국 항일정치범과 사상범그리고 일부 한국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옥살이를 하고 상당수는 처형되거나 옥사했다. 일제는 ‘국사범’또는 ‘회유’의 차원에서 일반 재소자의 감방이 아닌 간수사무실 바로 옆에 특별감방을 만들어 안의사를 수감했다. 이것을 근년에복원하여 요즘 ‘특별관리’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안의사의 인격과 거사를높이 평가하여 외국인 중에는 유일하게 ‘안의사감방’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선생도 이곳에서 옥사 뤼순감옥은 뤼순시의 역사와 함께 제국주의 침탈의 고난의 사력(史歷)을 간직한 곳이다. 원래 러시아제국이 1902년 동북3성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감하고자 신식감옥을 신축한 것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확장공사를 하여 1907년에는 감방 253칸, 중벌수형자용 독감방4칸 등 2천여명을 수용하는 대규모 감옥을 만든것이 오늘에 이른다. 우리가 뤼순감옥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안의사의 순국과 함께 신채호선생이 이곳에서 8년 옥고끝에 옥사당한 사유때문이다. 단재는 안의사가 순국한지 18년이 지난 1928년 5월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 수상서원에게 체포되어 이곳에 수감되었다. 대련(大連)법정에서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뤼순감옥으로 압송되어 복역한 것이다. 단재는 죄수번호 411번으로 붉은 수의를 입고한많은 옥살이를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이른바 위채(爲채)사건으로 그와함께 수감된 임병문은 26세로 재판과정에 고문으로 숨지고 이지영 ·이종원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감옥살이 8년만에 단재는 건강이 심히 악화되었다. 형무소측의 병보석 출감회유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단호히 거절하다가 1936년 2월 18일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옥사한 것이다. 유해는 곡절끝에 충북 청원군 향리에 모셔졌다. 애국자들의 혼령 깃든 곳 뤼순감옥 수인묘지 어딘가에 묻혀있을 안의사의 유해는 순국 90주년이 지난지금까지도 찾을 길이 막막하다. 1986년 7월 북한에서 유해발굴단이 수인묘역을 샅샅이 뒤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채호선생이 8년동안 옥고를 치룬 감방은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제가 쫓겨가면서 모든 자료를 불사른 때문이다. 다행이 진열관의 낡은 서류철에서 찾은 뤼순감옥에 입감할 때 찍은 퇴색한 한장의 사진이 그나마 ‘존재증명’이랄까. 옛날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인 뤼순의 언덕받이에 자리한 감방에서 남다른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투철했던 안의사와 단재 선생 그리고 무명지사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역에서 몸을 불살랐을까. 안의사의 유해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현지에서 새삼 절감했다. 중국측의 태도도 아직은 미지수다. 그렇지만 더 늦기전에 남북이 협력하여 중국정부를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단재 선생이 옥고를 치룬 감방의 위치라도 알아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서. 뤼순에서. kimsu@. *인근 거주 중국인 증언. “안중근(安重根)의사의 유해는 뤼순감옥에서 동쪽방향으로 500∼600m 지점에 있습니다, 최근 일본전문가들이 발견한 지도에 나온 뤼순감옥 동남쪽 300m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200~300m 더 가야 합니다” . 중국인 탄충쿠이(潭忠魁·79)씨는 “안의사께선 순국당시여순 고등법원에서 동북쪽 방향으로 800m 지점에 묻히셨다”고 증언했다. 안의사의 순국추모식이 열렸던 지난 26일.기자는 뤼순감옥 부근에 살고있는탄 노인을 만나 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그는 일제(日帝)때부터 뤼순감옥 주변 마을인 위엔바오지에(元寶街) 56호에 살아온 이곳 토박이.그 역시안의사의 순국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감옥 관계자,당시 지역 노인,일본인관계자들로부터 안 의사의 묘지 위치를 여러차례 확인해 지금까지 기억하고있다고 밝혔다. □45년 당시 상황은. 일제가 패망하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감옥과 일반 묘지에 대한 파괴행위는없었다.다만 일본인 납골당과 군인 묘지는 폭파시키고 떠났다.한국인과 중국인 수감자들의 유해는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안의사의 유해도 마찬가지다. □이후 훼손됐을 가능성은. 일제 패망직후 소련군이 진주해 점령했지만 훼손 행위는 없었다.1970년이후이 지역의 개발이 가속화됐지만 유해가 묻혀있는 지역은 포함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다렌(大連)의 일본학교를 졸업한뒤 지난 1942년부터 조선은행에서 일하면서 많은 조선사람들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으면서 안중근을 존경해 왔다.일본패망전에 일본인들로부터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묘소와 관련한 다른 정보는. 지난 85년 판우충(潘茂忠)뤼순감옥 전시관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를 표시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당시 미국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손자들이 감옥전시관에 전달해온 자료였다.판 연구원의 일본어 선생인 나는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많은 토론을 나눌 수 있었다. □안의사 유해발굴에 대한 북한의 관심은. 지난 86년 북한의 당정(黨政)대표단이 방문,안의사의 유해의 위치를 확인한적이 있다. 판 연구원은 안의사의 묘지 표시도를 근거로 북측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유해발굴에 북측도 높은 관심을 밝혔었다. 뤼순 김삼웅 주필@kdaily.com. *뤼순감옥은 어떤곳. 한민족의 비통과 투쟁의 숨결이 담긴 뤼순(旅順)감옥.50여년의 풍상속에서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뤼순시 외곽 위안바오방(元寶房)지역에서 지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민족의 스승인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과 안중근 의사가 의로운 삶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총 면적 22만6,000㎡.감옥주위에는 높이 4m ,둘레 725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회색 벽돌건물은 러시아가 지은 것이고 붉은 벽돌건물은 일제가건축했다.감방수는 253칸.한 칸이 가로 5.6,폭 2.7m였다.일제말기 감독원만120명 가량됐다. 각종 고문도구와 고문실,햇볕이 통하지 않는 암실 등도 발견됐다.교수형을 집행하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1939년부터 일제에 의해 ‘여순 형무소’라고 불렸다. 제정러시아가 얼지않는 항구를 찾아 남하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19세기말부터의 역사를 담고 있다. 1898년 3월 차르 황제의 러시아제국이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조차한뒤 이곳에 관동주(關東州)총독부를 설치했다.그뒤 1902년 식민지배를 위한감옥을 건설한다. 러·일전쟁이후 이곳을 점령한 일제는 러시아가 지어놓은 85칸의 감옥을 257칸으로 늘리고 ‘관동도감부 감옥서’(關東都督府 監獄署)라고 불렀다.그뒤1920년에는 관동청 감옥(關東廳 監獄)으로,1926년에는 ‘關東廳 형무소’ 로,1934년 ‘관동 형무소’로 개칭한다.일제의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형무소가 커지고 수형자에 대한 탄압도 강화됐다.
  • 안중근의사 순국 90주기/ 安의사 의거와 ‘대한매일신보’

    구한말 구국항일지 ‘대한매일신보’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다음날부터 관련기사를 대서특필,민족지로서의 면모를 한껏 과시했다.특히 안 의사의 사형언도일인 1910년 2월 14일을 전후해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공판내용을 보도했다.또 안 의사의 옥중소식이나 가족근황 등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보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안 의사 의거 다음날인 10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한글판)는 하얼빈발 26일자 전보를 인용,이토가 하얼빈역에서 ‘한국사람’에게 총을 맞은 사실을 보도하였다.같은 날짜 ‘잡보’에서는 ‘조선일일신문’의 호외보도를 인용,이등박문이 26일 아침 암살당하였다고 보도하였다.11월 21일자에서는 일본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보도를 인용,안 의사가 예심에서 밝힌 이토를처단한 이유 15항을 실었는데 그 내용은 1.명성황후 살해 2.을사조약 체결,… 5.군대해산 등이다.이 해 12월 5일부터는 뤼순감옥에 수감중이던 안 의사의 동정을 변호인 등 면회자들의 입을 통해 ‘뤼순통신’이란 제목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1월 29일자 ‘시모시자(是母是子)’라는 기사에서는 안 의사의 어머니 조(趙)마리아 여사가 “중근은 러일전쟁 이후로 줄곧 위국헌신 사상을 가지고있었으며 국채보상금 모집때도 아내의 패물을 기꺼이 내놓았다”며 아들을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을 두고 조 여사의 인간됨이 한국에서 드문 인물이라고보도하였다. 한편 안의사에 대한 재판이 본격 시작된 이듬해 2월부터는 공판내용을 연일지면의 절반 가량을 할애해 보도하기 시작했다.안 의사에게 ‘살인죄’로 사형이 언도된 14일을 전후해 12일자부터 대한매일신보는 10회에 걸쳐 이를 보도하였다.15일자에서는 안 의사가 최후변론에서 “나는 일개인의 자격이 아니라 의군(義軍)의 참모중장으로 이 거사를 한 즉 의전(義戰)의 포로이니 보통 형사피고인으로 처리함은 불가하다”고 진술한 내용을 상세히 보도했다. 순국 하루전인 3월 25일자에는 안의사가 변호인을 통해 한국동포에게 보내는 유언을 실었다. “한국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그 목적을달성치 못하고 여기서 죽노니 2천만 형제자매들은 분발하여 학문을 면려하고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유지를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나는 아무런유감이 없다” 이밖에도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가 옥중에서 작성한 편지 6통을 남긴 사실도 보도하였다.이 편지들은 안 의사가 사형언도 당일 어머니와 부인 앞으로쓴 2통과,홍(洪)신부,아우 명근(明根),민(閔)주교,숙부 등 4명 앞으로 쓴 4통 등 모두 6통이다.천주교 신자인 안 의사의 편지 첫머리는 모두 ‘야소(耶蘇,예수)를 찬미합니다’,‘아멘’ 등으로 시작하고 있다.특히 부인 앞으로보낸 편지에서 안 의사는 “이슬과도 같은 허망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배필이 되고 다시 주(主)의 명(命)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의 은혜로 천당영복의 땅에서 영원(靈源)에 모이려 하오…장남 분도는신부가 되게 하려고 마음에 결정하였으니 잊지말고 천주께 바쳐 신부가 되게하시오”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대한매일신보는 안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당일 이를호외로 보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실물은 전하지 않고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安의사 유해발굴 70년대부터 추진. 우리 정부는 지난 77년부터 안의사의 유해 발굴작업을 추진해 왔으나 아직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중국과 수교 이전에는 현장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데다 그 이후도 중국이 북한을 의식,적극적인 협조를 보이지 않고있기 때문이다. 안 의사 유해발굴작업은 80년대 중반부터 정부차원에서 본격 추진됐다.86년12월 정부는 외무부(현 외교통상부)·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중국 당국에 협조요청을 한 바 있으며,88년에는 중국을 방문한 학자들을 통해 조사를 의뢰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89년 안의사 의거 80주년 기념 학술회의 참가차 당시보훈처 관계관이 뤼순감옥을 처음 답사했으나 묘소위치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2년 뒤인 91년 중국지역 독립운동관련 사적지 답사차 방중한 학자 및 관계공무원 일행은 뤼순감옥 뒷편의 공동묘지가 모두 발굴된 후 일반건물이 들어섰으며,안 의사 묘소의 이장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특히 이들은 북한측에서도 수 차례 안 의사 묘소를 방문,조사를 벌였으나 묘소위치 확인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들었다. 92년 안 의사 유가족과 안의사숭모회 관계자 등이 현지 방문조사를 벌였으나 특별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93년 8월 한중외무차관 회의시 우리정부는다시 협조요청을 하였으나 중국측은 묘소확인의 어려움과 안 의사가 북한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했다. 이 해 11월 정부는 광복50주년행사의 일환으로 범국민적 차원에서 일본내자료수집과 관련자 면담 등 다각적인 노력을 벌였으나 이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94년 방한한 중국 문화부 장관은 조사결과 근거자료가 없어 묘소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우리정부에 공식 전달한 바 있다. 한편 북한은 지난 7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의 특별지시와 중국당국의 특별협조를 얻어 뤼순감옥 기록 등을 검토하고 감옥 주변을 조사했으나 유해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의사 90주기 행사 참석을 위해 최근 방한한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손자인 안웅호(安雄浩·67·재미)씨는 방한기간중 안 의사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될 경우 안 의사 유해 진위확인에 필요한 DNA검사 등을 위한 혈액·머리카락 등의 채취에 참여할 계획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최근 도쿄에서 공개된 자료를 입수,검토하여 유익한 자료로 판단될 경우 정부차원에서도 묘소발굴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특별제언/ 安의사 유해 찾아 판문점에 모시자. 그날 중국 뤼순(旅順)은 흐린 날씨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찌 하늘인들천하 대장부, 만대 의사가 가는 길에 무심하겠는가. 안중근의사는 모친이 새로 지어 보낸 한복(상의는 백무지, 하의는 흑색)으로 갈아입고 얼굴에 희색을 띠며 형장으로 향했다. 한점 흐트러짐이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달리 유언할 아무것도 없지만 원래 나의 거사는 오로지 동양평화를 위한성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바라건데 오늘 임검한 일본관헌도 행여 나의뜻을 양지한다면 피아의 구별없이 합심협력하여 동양평화를 기도하기를 절망(切望)할 뿐이다. 덧붙여 내 요망은 죽음을 앞두고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싶다”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의 마지막 소원도 거부하고 형을 집행했다. 교수형이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15분, 당시 안의사는 32세,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지 5개월 되는 날로서 생을 접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였다. 집행전날 면회온 두 동생이 슬퍼하자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꼭 죽는 법, 죽음을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삶은 꿈과 같고 죽음은 영면하는 것, 조금도 어려운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동생들을 달랬다. 사마천은 일찍이 사람은 한번 죽지만 그 의의는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기러기털보다 가벼울 수도 있다고 했다. 정의를 위한 죽음은 태산보다 중하지만 불의한 장수는 기러기털보다 가벼운 것, 안의사의 속령 32세를 어찌 짧다고 하겠는가. 안의사의 순국을 청국의 원세개(袁世凱)는 이렇게 찬양했다.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圖生非丈夫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歲死千秋 평생 벼르던 일 이제야 끝냈구나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아니고 몸은 한국출신이지만 이름 만방떨치니 백년못사는 인생 죽어 천년을 가리. 순국 5분후 안의사의 관은 백포(白布)에 쌓여 뤼순감옥 성당에 안치되어 우덕순·정도광·유동하 3동지에게만 마지막 예배를 시키고 오후1시 감옥묘지에 매장되었다. 안의사는 동생들에게 “유골은 하르빈공원묘지에 묻었다가국권회복 후 고국으로 반장하라”고 일렀다. 기록마다 ‘고국’또는 ‘고향’으로 표기가 다르다. 백암 박은식은 거사 후에 쓴 ‘안중근전’에서 ‘국권회복이 반장고토(國權回復而返葬故土)’라 하여 ‘고토’라고 표시했다. 안의사의 고향이 황해도신천인 관계로 북한이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어 유언의 내용은 중요한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디로’모시느냐가 아니라 유해를 찾는 작업이 급선무다. 유해를 찾게되면 판문점이나 휴전선에 남북함께 안의사기념관을 짓고 그곳에 봉안했다가 통일후 고향에 안장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건국이래 처음으로 안의사의 유해발굴문제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때마침 안의사 유골발굴위원회 도교(東京)사무국에서유해 매장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어유해발굴 가능성을 높이고있다. 안의사 순국 90주년, ‘국권회복’55년만에 이제야 의사의 유해발굴에 나선것은 남북한 7천만 동포의 부끄러운 일이지만, 새천년 벽두에 남북이 함께참여하여 유해발굴이 성사된 다면 민족적 경사가 될것이다. 안의사는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형집행으로 완성하지 못하고 서론 부분만 집필했지만 그의 사상과 활동의 연관성을 어느정도 보여준다. 그는 동양평화를 실현하고 일본이 자존(自存)하는 길은 한국의 국권을 되돌려 주고 만주와 청나라에 대한 야욕을 버린 뒤 서로 독립한 3국이 동맹하여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고 나아가 개화의 역(域)으로 진보하여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고 했다. 90년전 안의사의 주장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양 3국은 ‘구주와 세계각국’과 더불어 세계평화를 위해 진력해야 할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통일되어 한·중·일의 ‘독립한 3국’이 정립하여 아시아 평화와공존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안의사 순국 90주년의 의미이며 그의 유지(遺志)이기도 하겠다. 김삼웅 주필 kimsu@
  • 의열 독립투쟁(2)-강우규 의사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 가운데서 의사(義士)라고 하면 흔히 20∼30대 열혈청년을 떠올리는 것이 보통이다.실제로 윤봉길(尹奉吉)·조명하(趙明河)의사는의거 당시 24세였고,이봉창(李奉昌)의사는 32세, 김상옥(金相玉)의사는 33세,그리고 나석주(羅錫疇)의사는 36세였다. 1924년 일황의 궁성 정문 앞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金祉燮)의사가 의거 당시 44세로 드물게 40대에 속하는 정도다. 그런데 환갑이 넘은 60대 나이로 의거를 행한 의사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지.그러나 실제 우리 의열투쟁사에는 60대 노(老)투사의 의거기록이 있다. 1919년 9월2일 오후 5시경.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역(현 서울역) 주위에는 일본 군경이 삼엄한 경계를 펼친 가운데 어느 고관의 도착을 기다리는 준비가부산하게 진행되고 있었다.이윽고 5시가 되자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신임 총독 일행을 태운 열차가 플랫폼으로 도착하였다.사이토 총독 내외와 일행은출영나온 내외 인사·신문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이내 귀빈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사이토가 귀빈실에서나와 입구에 마련된 쌍두마차에 오르려 하자인근 한양공원(현 남산공원)에서는 그의 부임을 축하하는 21발의 예포(禮砲)소리가 울려퍼졌다.예포가 끝나고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는 순간 사이토가 탄마차 인근에 폭탄 한 발이 굉음을 울리며 작렬하였다.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병을 비롯해 신문기자 등 30여명이 일순간 현장에서 고꾸라졌다.폭탄이 떨어진 곳은 사이토가 탄 마차로부터 불과 7보(步)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3·1의거 후 격앙된 조선민족의 감정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문화통치’라는 허울을 내걸고 부임한 신임 총독 사이토.그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후 받은 첫번째 선물은 ‘폭탄세례’였다.이날 신임 총독이 부임하는 자리에폭탄을 던져 조선인의 기개를 만천하에 드높인 의사가 바로 강우규(姜宇奎)의사다.강 의사의 그때 나이는 64세,이미 환갑이 지난 노인이었다.일제하 숱한 의·열사 가운데 강 의사는 가장 고령에 속한다. 1855년(철종 6년) 평안남도 덕천(德川)에서 태어난 강 의사는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모두 보고싶지 않은 사람,보고싶지 않은 물건”이라며 이듬해 봄 가솔(家率)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만주길림성에 정착하여 신흥촌을 건설하고 동광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진력해온 강 의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만주·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에 참가,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키로 작정한 강 의사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으로부터 러시아 돈 50원을주고 영국제 폭탄 한 개를 구입한 후 6월1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배를타고 원산을 거쳐 8월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국내로 들어와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머물면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운 강 의사는 마침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 이어 사이토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남대문역에서 그를 처단키로 결심했던 것이다. 9월2일 의거 당일 강 의사는 폭탄을 명주수건에 싸 허리춤에 차고 그 위에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걸쳐 입었다.또 시골영감 티를 내기위해 파나마 모자에 가죽신을 신고 양손에는 양산과 수건을 하나씩 들고 남대문역으로 향했다.이런 강 의사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역 구내 다방에서 군중 틈에 끼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강 의사는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그러나 강 의사가 던진 폭탄은 투탄거리가 불과 6∼7m 정도에 그쳐 사이토가 탄 마차에는 미치지 못한데다 폭탄의위력이 약해 사이토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사이토는 폭탄의 파편이 혁대를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고 같이 부임한 정무총감 미즈노(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그러나 성과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총 37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이 가운데 스에히로(末弘又二郞) 경기도 경시(警視)는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어 9일 후인 9월11일 사망하였다.또 ‘대판조일(大阪朝日)신문’의 다치바나(橘)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를 뚫고 들어가 11월1일 사망하였으며야마구치(山口諫男)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고 결국 팔을 절단 하였다. 한편 사건 직후 일경·헌병들은 남대문 일대에 비상령을 선포하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돼 수색을 벌였다.그러나 60대 노인인 강 의사는 별다른 검문도받지 않은 채 무난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며칠간의 수소문 끝에 투탄자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일경은 의거 보름 만인 9월17일 가회동 하숙집에서강 의사를 체포했다. 강 의사를 체포한 사람은 조선인 경찰 가운데 애국지사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태석(金泰錫)이었다. 강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의연함과 당당한 기개를 잃지 않아 일본인 재판장이 ‘영감님’ ‘강선생’으로 호칭하였다고한다.고등법원의 항소가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자 강 의사는 면회온 장남중건(重健·작고)에게 “사람은 한번 나면 죽는 것이다.네가 나의 사형을 슬퍼한다면 내 아들이 아니다.나는 내가 우리 민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이루어놓지 못하였음을 슬퍼할 뿐이다.내가 이때까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것은우리나라 청년들의 교육이다.내가 이번에 죽어서 우리 청년들의 가슴에 어떠한 감상과 인상을 주게 된다면 그 이상 보람 있는 일이 없겠다…”고 하고는그 뜻을 전국 13도의 각 학교와 교회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노 투사는 최후까지 조국을 걱정하였다.1년간의 옥고를 치른 강 의사는 이듬해 11월29일 오전 9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그때 나이 65세였다. 교수형이 집행되기 직전 형 집행자가 “유언이 없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사세시(辭世詩) 한 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斷頭臺上) 춘풍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요(豈無感想) 강 의사의 유해는 처음에는 현 은평구 신사동 소재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54년 수유리로 이장됐다가 67년 다시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로 이장됐다.1962년 정부는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다.강 의사의 의거현장인 서울역 역사(驛舍) 앞에는 강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기념표지석이 오가는 행인들의 눈길도 끌지 못한 채 쓸쓸히 서 있다. 한편 강 의사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긴 상태다.장남 중건씨는 연해주에서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친손녀 영재(榮才)씨도 수년 전 작고했다.영재씨의부군은 도쿄제대 출신의 농학자로 수원농사시험장장을 지낸 최병석씨.현재강 의사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는 조카 항렬의 강영복(姜榮福·72·서울 거주)씨로 강씨가 강 의사의 훈장과 훈장증을 보관하고 있다.그러나 직계 후손이 아니어서 연금수령은 못하고 있다.강 의사의 제사는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에서 매년 순국일인 11월29일 지내고 있다.변변한 일대기 한 권도 없고 그흔한 추모사업회,기념사업회 하나 없는 것은 대가 끊겨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이다.강 의사가 살아서보다 죽어서 더 고적(孤寂)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南北 안중근 의사 유해 찾자(金三雄 칼럼)

    오는 10월26일은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한지 89주년이다. 흔히 ‘10·26’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안기부장에게 암살된 날로 기억하지만 항일투쟁사에 길이 빛나는 안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날이다. 안의사는 의거 이듬해인 1910년 3월26일 일제 형법에 따라 불법적으로 중국 뤼순(旅順)감옥의 형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이때 定根·恭根 두 아우를 통해 남긴 유언이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안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것 이다. 우리는 안의사가 순국한 지 88주년, ‘국권이 회복’된 지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당일 오전 10시15분 교수형으로 순국하여 5분 후 백포(白布)에 싸인 관은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오후에 시 감옥 묘지에 매장되었다. 우리 항일 투쟁사에 으뜸가는 애국자 안의사는, 중국 袁世凱가 안의사 서거를 슬퍼하여 지은 “몸은 삼한 땅에 있었지만 이름은 만국에 빛났고/생은 백보가 못 되었지만 죽음은 천추에 남을 것이다”란 시 그대로 겨레의 스승이다. ○남북정부 유해발굴 나서야 남북한 정부는 ‘국권회복’ 53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의거일을 맞아 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안의사 유해를 찾아야 한다. 안의사의 유해는 뤼순의 시 감옥 묘지에 묻혀 그후 돌보는 이 없다가 현장의 개발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다.지난 8월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 동포 및 재일교포 몇 분이 안의사가 수감돼 있던 동(東)수감동 앞뜰에 추모비를 세우고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에서 가져간 무궁화 10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뜻있는 분들의 추모사업도 필요하지만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고국에 봉환하는 일이 중요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해방 반세기가 지난이때까지 안의사의 유해를 해외에 방치해온 것은 한민족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금이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통절한 사죄’를 함으로써 안의사를 죽인 죄업에도 사죄를 받게 되었으며, 안의사가 이루고자 했던 ‘동양평화’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새정권의 수립과 함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조금씩 화해의 서광이 보인다. 이럴때 남북에서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인물’로 꼽히는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 일을 양쪽 정부가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화해와 통일을 위해 값진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남북의 눈치를 보면서 안의사의 유해 확인에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주 출신인 안의사의 유해에 대한 북한의 ‘연고권’ 주장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남북한과 국교를 갖게 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데 협조할 터이다. 문제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유해만확인되면 남북합의에 따라 판문점 부근에 기념관을 지어 모시고 통일의 상징으로 삼으면 어떨까. ‘연고권’ 문제는 안의사를 욕뵈는 일이다. 안의사의 유언을 실행하자. 정부는 즉각 북한에 제의해주었으면 한다. 정부 레벨이 안되면 민간차원이라도 나서자.
  • 바보들 순교자들 반역자들/레이시 볼드윈 스미스 지음(화제의 책)

    ◎역사 바꾼 인물들의 삶·죽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물음에 대한 답은 많다. 하지만 그 대답은 한결같을 수 없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수많은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책에는 숱한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교도의 침략으로부터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죽은 마카베오 형제들,노예해방을 위해 광기를 부린 존 브라운,히틀러 암살을 시도하다 교수형을 당한 디트리히트 본회퍼 목사,원자폭탄의 비밀을 팔았다는 혐의로 전기의자에서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테마로 묶여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스미스는 이 책에서 “순교자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는 그 시대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역사의 관점에서 해석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문호 옮김 지호 전2권 각권 1만2,000원.
  • 反民특위 강제 해체/‘6·6사건’의 의미(정직한 역사 되찾기)

    ◎친일파 ‘미완의 단죄’로 민족사 굴절/제헌국회,48년 반민족처벌법안 통과/화신재벌 朴興植 등 검거 재판대 세워/본격 활동 앞두고 李承晩이 강력 제동/조사대상 30%만 기소… 결국 흐지부지 일제 강점기 친일 행각을 벌인 반역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다.그러나 이 특위는 李承晩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로 활동에 제약을 받아오다가 마침내 이듬해 6월6일에는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반민특위 활동의 미완성은 이후 49년 동안 우리 현대사 굴절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왔다. 1949년 6월6일 아침 8시.서울 남대문로에 위치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경찰을 가득 태운 2대의 드리쿼터가 들이닥쳤다. 습격대 지휘자는 尹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尹을 비롯한 40여명의 경찰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출근하는 특위 직원들을 연행했다.반민특위 金尙德 위원장과 金相敦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항의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金부위원장은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트렸다.검찰총장 겸 특별검찰관장 權承烈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그 역시 안하무인의 경찰에게 권총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지휘권자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호통도 소용없었다. 연행된 사람은 모두 35명.특경대원 24명,직원 및 경호원 9명이었다.직원을 면회온 민간인 2명도 엉뚱하게 같이 끌려 갔다.연행자 중 22명이 입원할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날의 ‘6·6사건’은 해방후 우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분수령이었다.경찰력이 제헌국회가 설치한 반민특위를 사실상 해체,李承晩 독재의 길을 열었다.친일파 제거에 실패함으로써 헌정사 왜곡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입법부가 행정부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순간이기도 했다.반민특위가 구성된것은 48년 9월29일.올해가 50주년이다.반민특위가 친일파를 제대로 정리했다면 李承晩 독재는 물론,이후 군사정권도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제헌국회는 48년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시켰다.반민특위 위원은 각도 출신국회의원 중 선임됐다.金相敦(서울) 趙重顯(경기) 李鍾淳(강원) 朴愚京(충북) 金明東(충남) 吳基烈(전북) 金俊淵(전남) 金尙德(경북) 金孝錫(경남) 金庚培(제주·황해) 등이었다.金炳魯 대법원장을 재판관장으로 하는 특별재판부,權承烈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하는 특별검찰부,李元鎔 총무과장이 이끄는 중앙사무국이 각각 구성됐다.진용을 갖춘 반민특위는 49년 1월5일 공식업무를 시작했다.특위는 1월8일 화신재벌 朴興植을 검거하는 것을 필두로 전광석화같이 친일파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출범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일제 경찰 출신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이들 출신으로 추산된다.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李承晩도 반민특위가 눈엣가시였다.李承晩은 盧德述 崔燕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6·6사건’에 이르게 된다. 결국 특위는 49년 8월31일 조사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하는 것으로 활동을 끝냈다.이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나머지 7명도 형집행정지 등으로 석방됨으로써 친일파 단죄는 흐지부지 넘어갔다. ◎다른 나라의 사례/佛,나치협력 3만∼4만명 처형/시민법정 설치… 9만5천여명 시민권 박탈/中·대만 정부 친일파 漢奸 색출 상당수 처벌 2차대전 직후 독일과 일본의 전범처리가 있다.뉘른베르크재판에서는 22명의 1급 전범이 기소되어 나치군 원수 괴링 등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됐다.7명이 종신형∼10년의 금고형을 받았다.도쿄재판에서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7명의 전범에게 교수형이 내려졌다.기도 고이치(大戶幸一) 등 18명에게는 종신형∼금고 20년이 선고되었다. 우리의 친일파 문제와 비슷한 것은 유럽국가의 나치협력자 숙청과 중국·대만의 한간(漢奸·친일파)재판이다. 프랑스의 드골은 나치멸망 직후인 44년 6월부터 11월에 걸쳐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4개의 훈령을 내렸다.이 훈령에 따라 조사받은 인원은 150만∼200만명.드골은 회고록에서 1만842명이 나치협력자로 처형됐다고 밝히고 있다.드골은 작가,언론인,학자 등 나치에 협력한 지식인들도 엄히 다스렸다.현대사가 로베르 아롱은 “3만∼4만명이 재판에 의했든지, 그렇지 않든 간에 민족반역자로 사형당했다”고 추정했다.프랑스는 형사재판권이 없는 시민법정도 설치,9만5,000명을 ‘비국민’으로 판정해 시민의 권리를 박탈했다. 덴마크는 1만4,000명,네덜란드는 4만명,벨기에는 5만명, 노르웨이는 2만명의 나치협력자를 각각 민족반역자로 무기에서 유기징역형에 처했다. 중국과 대만정부도 2차대전이 끝난후 친일파 제거에 나섰다.한간재판은 중국공산당 정부와 장제스(蔣계石)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46년 4월부터 48년 9월까지 따로 진행되었다.중국·대만정부에 의해 한간으로 판명된 상당수 인사들이 처형됐지만 개별처리 사실만 알려질뿐,전체적 통계는 아직 집계되지 않고 있다. ◎특위 총무과장 역임 李元鎔옹/“민족정기 바로서는 날 두눈 감기전 보았으면” “金大中 대통령이 명실공히 역사를 바로잡아 민족정기를 되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반민특위 총무과장과 조사관을 역임했던 李元鎔옹(78)은 국민의 정부에 거는 기대가 컸다.반민특위에관계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타계한 현실에서 그는 당시 특위의 고위 중앙요원으로는 유일한 생존자다.서울 공대 전신인 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48년 10월 반민특위 구성때 민간인 신분으로 행정실무를 주도했다.다음은 李옹과의 일문일답. ­현재의 심경은. ▲오늘 이 땅위에 사는 구세대 치고 일제의 학정과 인간 이하 대우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일본의 관헌에게 우리 조국광복을 위해 신명을 바치던 애국지사를 밀고,또는 체포해 넘긴 반역자가 있었습니다.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피가 역류하는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두 눈을 감기전 바르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반민특위가 소기의 목표를 달성 못한 이유는. ▲국내사정에 어두운 李承晩 대통령이 친일파들의 간계에 현혹되어 경찰력을 동원,하루 아침에 반민특위를 와해시켰습니다.제헌국회의 결정에 따른 헌법기관이 불법적으로 무너짐으로써 헌정사에 크나 큰 오점을 남기게 됐지요. ­친일파 청산의 현주소는. ▲金泳三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 바로 세우기를 기치로 내걸어 혹시 하며 기대했습니다.그러나 실효없이 용두사미격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현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지금이라도 관계 각료나 관련 인사들이 모여서 기구를 만들어 과거에 처단치 못한 민족반역자를 처벌해야 합니다.그래야 이 나라의 기초가 탄탄해집니다.金대통령은 해박한 경제관과 탁월한 국제 외교력을 겸비했습니다.조국광복을 위해 순국하신 많은 선열들의 넋을 위로해주는 데도 힘써주실 것으로 믿습니다.그것이 경제 등 다른 난국의 극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반민특위 활동 일지 ▲48년 8월5일=제헌국회,‘반민족행위 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 ▲9월7일=‘반민족행위 처벌법’ 국회 통과 ▲9월29일=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반민족행위 조사특위(반민특위)’구성동의안 국회 가결 ▲10월1일∼11일=반민특위 10명 조사위원 선임 ▲10월23일=반민특위 1차위원회 ▲49년 1월5일=반민특위 사무실 개소,업무 개시 ▲1월8일=화신재벌 총수 朴興植 1호 체포 기록 ▲1월13일=崔麟 검거 ▲1월25일=盧德述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검거 ▲2월7일=崔南善 李光洙 검거 ▲2월15일=李承晩 대통령,반민처벌법 개정 필요성 특별담화 ▲3월28일=李琦鎔 朴興植 등 반민자 첫 공판 ▲5월하순∼6월초=정부,1·2차 국회 프락치사건 발표 ▲6월6일=경찰,반민특위 습격,조사요원 불법체포,특경대원 무장해제 ▲6월26일=金九 선생 암살 ▲8월31일=반민특위 공식해체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도쿄재판과 전범미화 영화(金三雄 칼럼)

    ‘데드 바이 행잉(Dead By Hanging)’­1948년 11월12일 오후, 도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웨브 재판장은 2년 반 계속된 일본전범재판의 마지막 순서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도조는 이날 히로다 등 6명의 A급 전범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12월23일 이른 아침 스가모 구치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한 줌 이슬로 사라졌다. 도조는 처형 직전에 “이제는 그만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彌陀)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란 유언시를 남겼을뿐 결코 참회하지 않았다. 도조는 1937년 관동군 참모장, 1940년 육군 대신, 1941년 총리대신이 되어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인류를 전화에 몰아넣었다. 도조 정부가 전쟁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자행한 정신대 노무자 지원병 학도병 공출 등 8백만의 희생과 수탈의 만행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맥아더 원수는 전범들에 대한 형의 집행을 명령하면서 “나는 전지전능의 신이 이 비극적인 죄상 소멸의 사실로써, 인류의 최악 최대의 죄인 전쟁이 전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모든 선의의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나아가서는 모든 국가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시킬 때까지 상징으로서 전언되기를 희망한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형집행 당일은, 나는 일본 전국의 종교단체 회원들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하지 않도록, 이 세계를 평화 속에 유지할 수 있도록, 가호하고 인도해 주도록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고 ‘평화의 기도’를 일본 국민에게 당부하였다. 전범들이 처형되던 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평화의 기도’라는 사설에서 “우선 반성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우리 국민 사이에 이 재판의 비극적 종말로 인하여 과거에 있었던 일본의 잘못이 완전히 보상되고, 국민은 일체의 책임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안이한 생각은 없는가, 또 이를 모면하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실종된 ‘평화의 기도’ 만일 이 기회에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용기가 없이,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대로 내버려둔 국민성의 나약함과 도의적 책임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일곱 피고의 처형도 도쿄재판 자체도 그 의미의 태반을상실하고 말 것이다”라고 일본 국민의 책임과 반성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반세기의 시간이 지난 오늘, 일본에서는 ‘평화의 기도’ 정신과 반성은 사라지고, 도조를 미화하는 「프라이드­운명의 순간」이란 영화가 일본열도를 복고의 열기로 휘몰아넣고 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일본 일본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15억엔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든 이 영화가 지난 23일부터 일본의 145개 극장에서 일제히 개봉되어 일본인은 물론 그들의 침략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이웃나라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까짓’ 영화 한 편을 두고 과잉반응을 할 이유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전범들이 묻힌 묘역을 일본정부 각료들이 성역화하여 참배하면서 물의를 일으켜온 전례에서 보듯이 ‘영화 한 편의 일’로 묵살하기에는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A급 전범 중에서도 원흉인 도조를 미화한다는 것은 바로 침략전쟁 자체를 미화하려는 ‘음모’의 연장선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재판이 끝날무렵 필리핀의 이브닝 크로니클이 사설에서 “히틀러무솔리니가 죽고 도조가 처형되더라도 다른 자가 그들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보장은 되지 않는다. 침략전쟁을 행하는 능력은 한 나라의 지도자에게 있다기보다도 그 나라의 국민성과 그들이 사는 환경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일본과 독일 두 국민의 성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 지적은 오늘의 일본을 투시하는 탁견이다. 우리의 경각심이 요구된다.
  • 민주화 운동 희생자 재조명­왜 필요한가

    ◎왜곡된 진상 규명 명예회복해야/개인적 희생 정당한 평가 받아야/특별법 제정·합동묘역 조성 추진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을 이룬 5·18 광주민중항쟁은 이제 우리 역사 속에 바르게 자리매김 되고 있다.그러나 해마다 5월이 오면 아직도 명예회복을 못한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들은 저며오는 가슴을 가누지 못한다.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민주화를 달성한 우리의 역사속에 여전히 이들이 설 자리는 없는가.金大中 대통령은 최근 월간 ‘말’지와의 회견에서 “그 분들의 헌신과 공로에 상응하는 조치를 반드시 취할 것”이라면서 “무엇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킬 것이며 필요하다면 입법조치도 해야한다”고 밝혔다.이들의 명예회복은 어디까지 와있는가.민주화운동 희생자 특집을 꾸며본다. ▷진상규명◁ 60년대 이후 군사독재 시대가 30여년간 이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됐다.4·19나 5·18처럼 집단화된 희생의 명예회복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그러나 개인적 희생은 지금도 제대로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개인적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되려면 먼저 진상이 규명되어야 한다. 민주화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유형은 다양하다.분신,투신,할복,음독,고문,사고,폭행,총상,익사,병,교수형 등이다.이들을 죽음에까지 이르게한 가해자는 주로 공권력으로 추정된다.안기부(중앙정보부),기무사,대공분실 등이 의혹의 대상이다. 가해자가 권력을 쥔 쪽에 있었기에 진상규명이 안된 경우가 많다.金學喆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기획국장은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이지만 가해자처벌은 추후 생각해볼 문제고 일단 진상규명이 이뤄져야한다”고 강조했다.그는 민관합동의 민주화희생자 진상규명특별위 설치를 제안했다. ▷명예회복◁ 진상규명과 동시에 추진되어야할 것이 민주화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다.이를 위해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시급한 것은 희생자 합동묘역 조성.현재 마석 모란공원묘지,망월동 구묘역,부산 솥밭산공원묘지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 묘지를 한곳으로 모아 성역화해야 한다는 것이다.기념관도 만들어 유품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기념탑이나 위령제를 개최해야 한다.교과서에 이들의 활동을 수록하고 기념일도 제정,역사의 교훈으로 남기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일제시대 독립지사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듯 민주열사들도 유공자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게 관련 단체들의 희망이다.‘민주유공자예우법’을 만들고 ‘열사공적사항심사위’를 설치,객관적 평가에 따른 대접을 하자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특집기획팀=羅潤道 팀장.李昌淳·李穆熙 차장.金聖昊·任昌龍 기자
  • 유타주 19년만에 강간살해범 총살/미 사형제도 또 논란

    ◎“생명 박탈권 없어” 반대단체들 비난/범죄 갈수록 흉포화… 설득력은 미미 미 유타주가 최근 19년만에 처음으로 한 강간살해범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한 것을 계기로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미국에서 다시 일고 있다.유타주는 26일 새벽 0시7분(현지시간) 89년 유타주 오그덴에서 11살짜리 여자어린이 찰라 니콜 킹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유죄평결을 받은 뒤 유타주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존 알버트 테일러(36)를 총살형에 처했다.이는 77년 같은 교도소에서 게리 길모어를 총살집행한 이래 처음이다.미국에서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주는 유타와 아이다호 2개주 뿐이다. 미국내 사형제도 반대단체들은 인간이 인간의 범죄를 처벌할 수는 있으나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형제도의 즉각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이들은 특히 51년 집행된 한 총살형에서 사수들이 두번이나 사형수의 심장을 명중시키지 못해 총살집행을 3번씩이나 거듭하는 잔인한 사태도 발생한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그러나 날로 잔인해지는 범죄로 사형제도반대단체들의 호소는 설득력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테일러는 법정에서 무죄를 주장했으나 자신의 무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변호사를 해고하고 항고를 포기하면서 사형을 자청했다.유타주는 사형수들에게 집행방법을 선택토록 하고 있는데 그는 독물주사로 자신이 처형되는 것을 도마 위에 오른 물고기 신세에 비유하면서 총살형을 요청했다.그러나 유타주법에 따라 총살형 집행을 위한 사수들은 5명이 있어야 하는데 지원자가 없자 유타주는 지난해 12월 중순 전국에 사수를 모집한 끝에 간신히 10명을 모을 수 있었다.이를 두고 사형제도 반대단체들은 테일러가 유타주 사법부를 농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면서 주정부측의 총살집행 강행처사를 비난하고 있다.유타주 총살형 집행은 5명의 사수들중 1명에게만 실탄을 장전시키고 나머지 4명에게는 공포탄을 줘 누가 쏜 총에 사형수가 목숨을 잃었는지 모르게 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현재 미국내 50개주 가운데 사형제를 채택하고 있는 주는 38개주에 이른다.이들 주정부들은 사형집행 방법으로 독물주사,교수형,전기의자 집행,총살형,독가스 집행 등 5가지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독물주사 방법을 실시하는 주가 모두 32개주로 가장 많고 전기의자 집행은 11개주,교수형이 4개주,독가스 집행은 7개주이다. 뉴욕시등 일부 대도시에서 최근 범죄율이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범죄의 양상이 흉폭화·조직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범죄와의 전쟁」 고삐를 늦출 수 없는 미국이 사형제도를 쉽게 폐지하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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