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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영화 ‘감각의 제국’ 日 오시마 감독 별세

    [부고] 영화 ‘감각의 제국’ 日 오시마 감독 별세

    전후 일본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오시마 나기사가 15일 오후 일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NHK 등 일본 언론이 이날 보도했다. 80세. 1959년 ‘사랑과 희망의 거리’로 데뷔한 오시마 감독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검열, 광기, 재일 한국인 차별 등을 비판한 작품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1960년 작 ‘청춘잔혹이야기’로 일본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영화 운동)의 기수로 떠올랐고 재일동포 교수형 사건을 다룬 ‘교사형’과 ‘의식’ 등 문제작을 잇달아 발표했다. 1965년에는 한국 초등학생 이윤복군의 일기를 담은 책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바탕으로 ‘윤복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그는 대담한 성 묘사로 화제가 된 1976년 작 ‘감각의 제국’으로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했다. 도쿄 이종락 특파원 jrle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선택! 역사를 갈랐다] (30) 이재순 vs 이범진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대한제국에서 추진한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가 학자에 따라 엇갈린다. 개혁의 실효성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대한제국이 부정부패로 얼룩져 근대화 사업을 주도면밀하게 추진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반대로 광무개혁을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근대화하려 한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대한제국의 다양한 평가에 앞서 한국학계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대상이 있다. 바로 대한제국의 개혁을 추진한 정치세력이다. 개혁을 주도한 정치세력에 대한 천착이 없다면 대한제국의 다양한 해석도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아관파천 이후 이재순(李載純,1851~1904)과 이범진(李範晋, 1852~1911)으로 구성된 궁내부는 고종 권력의 핵심세력이었다. ●이범진, 제정러시아 대한제국 개입 유도 1896년 2월 9일 러시아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의 내부는 긴박했다. 당시 아드미랄 코르닐로프는 제물포에 포함 보브르와 함께 정박했다. 함장 몰라스는 해군대위 흐멜레프에게 러시아 수병을 이끌고 신속히 서울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2월 10일 새벽 중위 미하일로프는 서대문에 도착해서 대위 흐멜레프를 비롯한 해병부대를 맞이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안내했다. 장교를 포함한 러시아 해병의 전체 인원은 135명이었다. 포함 보브르에서 대포 1문도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송되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는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금천교(禁川橋)→내수사전로(內需司前路)→새문고개→러시아공사관으로 신속히 피신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왕이 안방을 내주고 셋방살이를 자처했다는 아관파천이었다. 2월 11일 저녁 러시아공사관과 영사관 사이의 광장에는 청색의 천막이 설치되었다. 1개 중대의 러시아 병력이 러시아공사관의 안팎에서 경계를 시작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 내부 2개의 방을 침실과 접견실로 사용했다. 공사관 정문 앞에 있는 정원에는 대포가 설치되었고, 공사관 내부의 개조된 3개의 방에 33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영사관 내부의 개조된 2개의 방에는 62명의 해병이 거주했다. 그동안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에도 불구하고 제정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현상유지’ 외교 정책을 고수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러시아의 ‘현상유지’ 외교 정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북극곰 제정러시아를 움직인 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2월 2일 러시아공사관으로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왕세자와 같이 대궐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피신하려고 한다.”는 고종의 비밀 편지를 전달했다.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스페예르는 이범진에게 고종 피신의 위험성을 알렸다. 하지만 이범진은 “만약 스페예르가 고종의 피신을 승인하지 않는다면, 고종이 대궐에서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며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심했다.”고 답변했다. 아관파천 직전 고종은 자신의 신변안전 때문에 파천의 실행을 주저했다. 그러자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의 지원을 확인하는 한편 ‘궁중(宮中)의 여화(餘禍)가 있을지 모른다.’는 일본의 ‘고종폐위설’까지 유포하여 고종의 결단을 유도했다. 1898년 9월 11일 경운궁이 발칵 뒤집혔다. 이날 저녁 식사 전에 고종과 순종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커피의 절반을 마신 순종은 토하면서 혼절하였고, 고종은 구토했다. 남겨진 커피를 마신 내관들도 혼절하였다. ●이재순, 고종 커피에 아편 넣어 정적 제거 사건의 파장이 심각했기 때문에 신속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날 고종의 수라상에 관련된 인물은 14명이었다. 심문과정에서 김종화(種和)라는 인물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종화의 심문과정에서 전선사(典膳司) 주사(主事)를 지낸 공창덕(孔昌德)의 개입 사실이 드러났다. 공창덕에 따르면 그는 김종화에게 1000원의 사례금을 보장하면서 김종화가 고종과 순종의 커피에 ‘아편 1량’을 몰래 집어넣었다. 무엇보다도 공창덕의 심문과정에서 배후인물이 김홍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창덕에 따르면 김홍륙은 공창덕에게 협판을 보장하면서 고종의 독살을 지시하였고, 김홍륙은 자신의 처인 김소사를 통해서 공창덕에게 ‘아편 1량’을 제공하였다. 사건에 참가한 인물 중 김종화는 이재순의 추천에 의해 각감청(閣監廳)에서 일하게 되었다. 보현당(寶賢堂)의 창고지기인 김종화는 홍릉 제사 때에 비용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면직되었다. 그런데 면직된 김종화는 사건 당일 대궐에 몰래 잠입하여 고종의 독살을 실행했다. 공창덕은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고용한 요리사였다. 아관파천 이후 공창덕은 김홍륙의 추천에 의해서 전선사 주사로 임명되어 왕의 주방에서 외국요리를 관장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문을 살펴보면 첫째, 커피를 마신 사람 중 죽은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독살의 의도가 있었다면 커피를 마신 사람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야 한다. 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암살의 계획보다는 정치적 음모라는 의혹이 제기된다. 둘째, 김종화라는 인물이 이 사건에 개입한 동기가 매우 부족하다. 또한 고종을 암살하려는 인물이 쉽게 체포된 점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면직된 인물이 대궐에 잠입할 수 있는가? 1898년 4월 부임한 러시아공사 마튜닌은 독차사건이 러시아통역관 출신 김홍륙을 파멸시키려는 음모로 파악했다. 당시 러시아의 후원 아래 김홍륙은 궁궐에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정치와 인사 문제까지 깊숙이 개입하였다. 마튜닌은 러시아정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로 궁내부대신 이재순을 지목하였다. 이재순은 김홍륙이 러시아공사의 후원 아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자, 이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재순은 자신이 김종화를 추천해 사건에 간접적으로 관련되었지만 사건의 처리과정에 개입했다. 이재순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 고종의 승인을 얻었고 경무청에 조사할 것을 직접 지시했다. 이후 1898년 10월 김홍륙·공홍식·김종화는 반역 음모를 기도했다는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소속한 이재순과 이범진 계열을 적극 후원했다. 이범진은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를 구해준 인연으로 황후의 총애를 받아 민비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법부대신에 임명된 이범진은 을미사변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이재순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이범진의 지나친 권력 집중에 반발하였다. 결국 이범진은 1896년 6월 주미공사, 1899년 3월 주러공사에 임명되었다. 대한제국은 1900년까지 도쿄, 워싱턴에만 자국 공사를 주재시켰다. 당시는 의화단 사건 이후 대한제국과 만주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한 시기였다. 주러공사 이범진은 고종의 여전한 신임 아래 대한제국 외교 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친정시문과에 합격한 청안군(淸安君) 이재순은 종친 내부에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시종원경 이재순은 시위대 장교와 병사를 결집하여 고종 구출을 위한 춘생문사건을 주도했다. 그는 김홍륙의 암살시도 및 고종 독차사건의 배후였다. 궁내부대신을 여러 차례 역임한 이재순은 고종의 군주권 강화를 위해서 각종 정치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대한제국 정치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핵심인물이었다. 이재순의 인맥은 충청도 출신자, 반면에 이범진의 인맥은 함경도 출신자가 주축이었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정치세력을 형성한 이범진과 이재순 계열은 군주권의 강화를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각각 러시아·프랑스와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지지기반이 달랐지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서는 상호 연대할 수 있었다. ●고종, 충성심 자극 위해 경쟁 유발… 갈등만 낳아 대한제국 시기 고종은 군주 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자신의 정치세력을 결집시켰다. 그런데 고종은 이들을 단일한 세력으로 통합시키지 않으면서 상호간 경쟁을 유발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자극했다. 이러한 상호 경쟁은 대한제국의 신속한 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권력 독점을 향한 지나친 대립만 초래했다. 처녀지를 개간하려면 겉으로 미끄러지는 쟁기를 쓸 것이 아니라, 땅속을 깊이 파고드는 플라우(쟁기)를 써야 한다.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뚱뚱해서 못죽어” 뚱보 사형수 황당 요구

    “뚱뚱해서 못죽어” 뚱보 사형수 황당 요구

    몸무게가 218㎏에 달하는 미국의 한 사형수가 자신이 뚱뚱하다는 이유로 집행일자를 연기해달라고 요구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CBS뉴스, 벤쿠버 선 등 해외언론의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1983년 살해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30년 가까이 복역 중이며, 내년 1월 사형이 집행될 예정인 로날드 포스트(54)는 청원서에서 “예정대로 사형을 당한다면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질질 끄는 죽음을 맞을 것”이라며 집행날짜를 연기해달라고 요구했다. 포스트는 자신의 체중과 과도한 지방으로 인해 정맥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 우울증 등의 원인으로 사형 집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지난 14일(현지시각) 연방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그는 이 청원서에서 뚱뚱한 자신의 몸 때문에 사형집행에 쓰이는 의자도 견뎌내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법원 기록에는 포스트가 다이어트를 시도한 바 있지만 허리와 무릎의 상태가 좋지 않아 운동이 어렵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다. 현지 법원은 이에 대해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형수의 몸무게가 사형집행 전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벤쿠버 선에 따르면 2007년 미국 오하이오의 사형 집행부서는 120㎏의 사형수에게 독극물을 주사하려 했으나 정맥을 제대로 찾지 못해 2시간을 소비해야 했고, 1994년 워싱턴 주에서 집행된 180㎏의 사형수는 교수형에 처하면 체중 때문에 목이 부러질 수 있다고 주장, 결국 3번의 재판을 통해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사진=벤쿠버선(로날드 포스트)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사설] 일본 전쟁범죄 국제공조로 해결하자

    일본 정부가 역사 망각이라는 집단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일제가 강제동원한 ‘일본군 성노예(위안부)’의 증거를 대라며 앞장서자 겐바 고이치로 외무상이 뒤를 받쳤다. 마쓰바라 진 국가공안위원장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를 했던 1993년 ‘고노 담화’의 존폐 여부를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명백한 역사적 사실도 눈감아 버리는 그들의 맹목성에서 2차 대전 시 가미카제(자살 특공대)가 연상된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아시아·태평양에서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여성들을 끌고가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이용한 것은 물론 만주 주둔 731부대의 생체실험, 필리핀 바탄에서의 전쟁포로 죽음의 행진 사건 등 부지기수다. 성노예 희생자에는 한국, 중국, 필리핀, 타이완, 태국 등의 여성이 포함돼 있다. 1990년에는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 여성까지 끌려갔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731부대는 산 사람을 대상으로 무기와 세균의 성능을 실험하고 장기까지 해부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가스 학살 못잖은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주역들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도조 히데키 등 내각과 일부 군인들이 교수형에 처해졌을 뿐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유럽에선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이 전승국이자 피해자여서 독일을 단죄했지만, 아시아에선 한국·중국·필리핀 등 피해국이 배제된 채 전승국 미국 주도 하에 재판이 이뤄진 탓이다. 2차 대전 참전 책임이 큰 히로히토 일왕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난징 대학살이나 731부대 사건도 상징적 인물에 대한 처벌만 이뤄졌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범죄 진상규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2005년 8월 중국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대상자 명단 1463명을 발굴, 공개했다. 여기에는 한국인 6명도 포함됐다.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피해국들은 일본의 역사 역주행에 서로 힘을 모아 함께 대응해야 한다. 전쟁범죄 피해사례를 공동 연구하고 자료를 공유하는 것은 물론 미국, 유럽, 유엔 등 국제사회에 꾸준히 알려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 전쟁범죄와 역사 왜곡에 대해서 공동대응하는 협약을 맺어 일본이 또다시 역사를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서울광장] 일본의 죄, 친일 윤 군수의 죄/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일본의 죄, 친일 윤 군수의 죄/육철수 논설위원

    나치 비밀경찰 출신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유대인이주국을 총괄했던 관료로서 600만명 학살 현장을 지휘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이스라엘 요원에게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다. 그는 모든 행적을 순순히 자백했지만, “한 사람도 직접 죽여본 적이 없고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까지도 반성이나 후회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나치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여성 철학자 해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이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는 저서에서 아이히만에겐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으며, 자신에게 떨어진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무사유(無思惟)가 단순히 ‘생각이 없다’는 데서 더 나아가 ‘저지른 행위에 대한 반성 불능이나 거부’이며, 이것이 악의 본질이라고 했다. 보름 전, 친일인사의 손자라고 밝힌 독자 윤석윤(55)씨가 사죄의 편지를 서울신문사에 보내와 관심있게 읽어보았다<서울신문 8월 15일 자 1면 보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일제 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할아버지의 이름과 한 문단 분량의 행적을 확인하고 마음이 착잡했다고 한다. 윤씨는 “할아버지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각자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일제의 앞잡이였다니 실망이 컸다.”고 했다. 이어 “할아버지가 공직을 그만두지 못한 걸 궁금해하던 차에 아렌트의 ‘무사유’를 읽고 그 해답을 찾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대다수 친일파들은 조직에 순응한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그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무사유의 죄’를 지었고, 할아버지의 죄도 바로 그것”이라고 썼다. 그는 “독립유공자와 순국선열,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친일파의 손자가 가슴 깊이 사죄한다.”며 편지를 마무리했다. 이런 가족사를 밝히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양심적이라 가슴 뭉클하다. 윤씨는 “할아버지가 남긴 재산이 없어 할머니가 산파 일을 하면서 아버지 형제들을 어렵게 키웠다.”고 했다. “생전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판단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친일 사실이) 다가오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할아버지의 친일 기록은 민족적·국가적 차원에서 다뤄졌고,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한 미안함이 오히려 나를 더 짓눌렀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참담한 고통을 안겼던 일제와 그 후손들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그제는 노다 요시히코 총리까지 나서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는 없다.”며 또 망언을 했다. 일본 정가에서는 이젠 아예 전직 총리들이 마지못해 표명한 사과까지 모조리 뒤집어 엎을 태세다. 아렌트의 지적처럼 저들은 여전히 ‘반성 불능’이요, ‘반성 거부’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작 ‘무사유의 죄’를 따진다면 마땅히 일본에 먼저 묻는 게 순서일 것이다. 친일 후손 윤씨의 사죄가 돋보이고 연민을 자아내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친일인사들을 감싸안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호구책으로 일제의 하수인이 됐거나, 항거할 용기가 없어 순종한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게다. 일제 치하의 항일·반일은 총칼 앞에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었다. 식민세대에게 깊은 사유와 성찰이 없었다는 지적은 너무 모진 질책일지도 모른다. 죄가 있다면 나라 잃은 죄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침 오늘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지 102년째 되는 날이다. 요즘 벌어지는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망동과 동북아 신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렌트의 ‘사유의 책무’를 다시 떠올려 본다. ycs@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길을 품은 우리 동네] (9) 정읍·고창·부안 동학로

    갑오년(1894년) 음력 1월 고부(지금의 전북 정읍시) 봉기로 발발해 같은 해 12월 전봉준 등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막을 내린 미완의 혁명. 그 정신이나 사상에 대해서는 1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는 곡조에는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민초들에게 두고두고 양각으로 아로새겨진 이 기억은 그러나 권세가들에게도 특별했긴 매한가지다. 무수한 세도가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했고 머리를 조아렸던 혁명이다. 그 정신을 오롯이 기리고 있는 전북 정읍·고창·부안의 동학로를 찾았다.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끝자락에 있는 황토현 전적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곳이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 위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 즉, ‘폭정을 없애고 나라를 보존하여 인민을 안정하게 한다’라고 쓰여 있다. 동학농민군은 갑오년 음력 4월 7일 이곳에서 정규 정부군인 전라 감영군과의 전투에서 최초·최대 승리한 것을 이렇게 기념했다. ●과거 권력자들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 1963년 10월 3일 제막식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석했다. 여기서 박 의장은 “동학혁명은 부패·당파싸움·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에게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 그 정신은 길이 계승돼야 한다.”면서 “5·16혁명도 이념면에서는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진윤식(69) 고창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은 “5·16군사쿠데타를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려는 꼼수였다.”고 비판했다. 또 같은 목적으로 전두환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황토현 기념관·전봉준 장군의 동상 등을 세우도록 했다. 하지만 1980년 5월 당시 야당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읍농고에서 열린 13회 동학문화제에 참석한 이후 이를 막지 못한 책임으로 기념사업회장을 구속하고, 정읍군수·경찰서장을 직위해제했다. 박대길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선양팀장은 “군부정권이 행한 ‘정화사업’은 정치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적비 뒷산인 두승산에 오르면 동쪽으로 배들평야, 서쪽으로는 부안군 백산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동학로 끝에서 황토현로, 말목장터로를 따라오면 배들평야 끝으로 만석보터가 있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동진강이 만나는 곳에 새로 만석보를 만들어 군민들에게 물세를 물렸고, 이에 전봉준 등이 주동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자 사발통문을 쓰고 농민들과 함께 관아를 습격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잘사는 사회”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라면, 고창은 동학농민군의 조직·사상이 잉태된 곳”이라고 고창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이, 갑오년 음력 3월 20일 고창지역에 있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무장현에서 봉기를 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이 충청도는 물론 경상·강원·황해도 등 전국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손화중은 당시 최시형과 함께 양대 동학접주 중 하나였다. 이런 점에 주목한 고창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길은 전봉준로, 녹두로와 함께 동학농민군로, 손화중로 등으로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인민은 나라의 근본이요, 그 근본이 깎이면 나라가 잔약해진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지 않고 바깥으로는 고향집만 꾸미고 오직 제 혼자 온전할 방법에만 힘쓰면서 녹봉과 벼슬자리만 도둑질하니 어찌 다스려지리오’ 동학농민군로가 끝나는 지점인 전남 영광과 접한 무장현 봉기 장소에 있는 기념비에는 당시 만들어진 이 포고문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정부관료들에게 훈계해도 될 법한 글귀다. 농민이기도 한 진 소장은 “무장포고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저임금은 서푼어치라도 매년 오르지만, 쌀값만은 십수년째 16만원 내외로 같은 값이다. 정부는 전 국민을 먹여 살리는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을 경시하고 있다.”면서 “농민도 성실히 일하면 국민평균소득 정도는 벌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118년전 동학농민군이 이루고자 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회모습”이라고 강조했다. ●민란 아닌 혁명인 이유는 ‘인권중시사상’ 과거 고부군에 속했고 지금은 부안군에 속한 백산(白山). 이곳에서 열린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 중 하나다. 해발고도 47m에 불과한 낮은 산인 백산은 사방이 평야지대에 홀로 솟아 시야 확보가 쉽고, 호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정읍 배들평야 쪽에서 이곳 백산까지가 동학로라 이름 붙여졌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갑오년 음력 3월 25~26일 1만명 가까운 농민군이 모였다. 전봉준 장군을 총대장으로 조직이 재편됐고 호남·호서 일대에 격문이 나붙었다. 백산에서 농민군 군율인 4대 명의·12조 기율도 제정된다. 왜 동학농민혁명이 ‘민란’이 아닌 ‘혁명’이었는지, 이 군율에 나타난다. 4대 명의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는 내용이, 12조 기율에는 ▲항복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한다 ▲곤궁한 사람은 구제한다 ▲굶주린 사람은 먹여준다 ▲도주하는 사람은 쫓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진휼한다 ▲병든 사람은 약을 준다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때 집결한 농민군은 한 달 뒤 조선왕조의 본향이자 전라도 수도인 전주성 점령까지 승승장구했다. 이런 백산에서의 기억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부안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직접 계승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남았다. 정재철 백산고 국사교사는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부안에 저항정신·애향심으로 남아 있다.”면서 “그 힘으로 2003~2005년 2년 2개월여 전 군민의 방폐장 반대 시위를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세 지역 중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가 가장 활발한 곳도 역시 부안이다. 상서면 호암수도원에는 천도교 교구가 설치돼 있고, 주기적으로 집회가 열린다. 민관이 함께 통치하는 집강소를 세우는 등 새 시대를 열어가던 동학농민혁명군은 갑오년 음력 11월 충청도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크게 패하면서 급격히 쇠퇴한다. 한 달 뒤 전봉준은 옛 친구의 밀고로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고, 이듬해 을미년 음력 3월 교수형을 당한다. 이런 안타까운 결말에 민초들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가보(甲午·1894년)세. 가보세. 을미(乙未·1895년)적 을미적 병신(丙申·1896년)되면 못 가보리’ 혁명이 성공했다면 달랐을까. ‘동학로’라 이름붙여진 서로 다른 길들은 한결같이 가난한 농촌길이었다.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좋아 이 지역 쌀 생산은 전국 최고지만, 농민들의 소득은 여전히 밑바닥이다.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10회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 약수로를 소개합니다.
  • 총살·교수형·자살… 독재의 끝은 비참했다

    총살·교수형·자살… 독재의 끝은 비참했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21일 무아마르 카다피처럼 전제 권력을 휘두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세계 각국의 독재자 15명을 정리해 보도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등 아직 집권하고 있는 독재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4)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24)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법정 스님이 가장 사랑했다는 책, ‘월든’! 우리는 흔히 그 책을 나이 지긋한 은자의 기록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막상 책을 펼치면 도처에서 마주치는 신랄한 풍자와 전투적 문체 때문에 깜짝 놀란다. 그러나 이상할 건 없다. 우리가 ‘월든’에서 만나는 주인공은 높은 이상과 패기만만한 열정 이외는 아무것도 없었던 불과 스물여덟의 젊은 청년이기 때문이다. 고작 2년 동안의 숲 생활로 ‘월든’을 쓰고, 단 하루의 감옥 경험으로 ‘시민불복종’을 썼던 자. 그러나 단 두 권의 이 책들로 전 세계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친 사람. 바로 헨리 데이비드 소로! (1817~1862) ●스물여덟살 청년의 독립선언 19세기 초 미국, 하느님의 영광은 자본주의의 영광이 되었다. 고작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은 “호수에서 헤엄을 치거나 그 물을 마시는 대신 호수의 물을 수도관으로 마을까지 끌어와 설거지를 할 생각”이나 하고, 철도는 “귀가 찢어질 듯 비명 소리를 마을 구석구석까지 울리고” 있었다. 또한 사람들은 각종 ‘비즈니스’를 통해 돈 벌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인디언의 땅 콩코드에서 나고 자란 소로. 어디에서나 인디언의 기억과 전통이 배어 있는 부싯돌과 화살촉을 발견할 수 있던 평원에서 여섯 살부터 암소를 몰고 맨발로 쏘다닌 소로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은 어리석거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왜 야생딸기를 직접 먹는 대신에 사람들은 딸기를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자가 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 아닐까. 그런 산발적 질문을 체계적 사유로, 나아가 글쓰기로 인도한 것은 소위 ‘초월주의 운동’을 통해 미국의 문예부흥을 이끈 19세기의 대표적인 지성, 랄프 에머슨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직업이 필요하다. 소로 스스로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업’으로 자기 자신을 학교 교사, 가정교사, 측량기사, 정원사, 농부, 페인트공, 목수, 석공, 날품팔이 일꾼, 연필 제조업자, 사포 제조업자, 작가 또는 삼류시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소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 자신을 가장 나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생자연에 대한 탐구를 유일한 ‘비즈니스’로, 산책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살자! 1845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 모든 사람들이 축포와 성조기로 ‘미국이여 영원하라’를 외치며 찬양하던 그날, 소로는 신이나 돈 혹은 국가가 아니라 완전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기 위해 숲으로 간다. 스물여덟의 독립 선언! 그리고 ‘가장 단순한 삶’에 대한 위대한 실험이 시작된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이유는 깨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은 정말로 소중하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체념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깊이 있는 삶을 통해 삶의 정수를 모두 빨아들이고, 굵직한 낫질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을 짧게 베어버리고 삶을 극한으로 몰아세워, 최소한의 조건만 갖춘 강인한 스파르타식 삶을 살고 싶었다.” 그가 월든 숲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거처인 오두막을 손수 짓는 일이었다. 대부분은 혼자, 가끔씩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락방과 벽장이 갖춰져 있는 오두막을 완성했다. 오두막에 쓴 비용은 단돈 28달러. 그리고 침대 하나, 식탁 하나, 책상 하나, 의자 셋, 거울 하나, 냄비 하나, 프라이팬 하나, 국자 하나, 세숫대야 하나, 나이프와 포크 두벌, 접시 세 개, 컵 하나, 스푼 하나, 기름단지 하나, 당밀단지 하나와 램프가 그의 전 살림목록이었다. ●삶의 목적은 삶, 그 자체이다 그의 눈에 사람들이 필수품이라 생각하는 물건들은 언제나 “너무” 많았다. 그걸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스스로 자신의 노예감독관이 되어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쉴 새 없이 물건을 구입하러 다닌다. 비교적 작은 시골마을 콩코드에서도 그랬다. 농부들이 집을 장만하게 되면 부유해지기보다 더 빈곤해진다. 그가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집이 그의 주인이 된다. 오우, 가련한 하우스 푸어들! 삶의 모든 곁가지들을 들어내자.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살자. 먹는 것은 쌀과 거칠게 간 옥수수 가루와 감자가 전부였으나, 필요하다면 숲에서 잘 익은 월귤을 따서 먹을 수 있었다. 다소 거칠지만 실용적인 옷을 입고 살면 입는 데는 거의 돈이 들지 않았다. 살고 있는 집은 어찌나 단출한지 집안 청소를 위해서는 모든 가구를 밖에 내놓고 오두막에 물을 뿌려 박박 닦은 후, 햇볕과 바람에 집을 말리기만 하면 청소 끝이었다. 그리고 산책과 노동! 매일 아침 숲을 산책하고 모든 관목과 야생 열매와 새와 동물들, 그리고 호수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리고 땅을 갈아 콩, 감자를 심고 가꿨다. 첫해의 수익은 고작 8달러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돈이 더 필요하면 그때마다 마을에서 날품을 팔면 그뿐이었다. 대신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느낌, 더 많은 감정, 더 많은 만족감을 얻었다. 점점 더 생활의 달인이 되어가는 소로. 그는 걷고, 뛰고, 수영하고, 배를 젓는 데 전문가였고, 거리와 높이를 발과 눈으로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으며, 무게를 손으로 정확히 달 수 있었다. 심지어 커다란 통 속에 있는 연필을 한 번에 열두 개씩 꼬박꼬박 집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척도-되기! 동시에 점점 더 신비해지는 소로. 그는 어떤 사냥개보다도 더 냄새를 잘 맡을 수 있었고, 인디언처럼 땅에 귀를 대지 않고서도 먼 곳의 희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시맨-되기! 이제 숲 속의 오두막은 그의 거처일 뿐 아니라 숲 속의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의 거처가 된다. 두 해 후 소로는 월든을 떠난다. 물론 오두막에서의 삶은 자족적이고 충만하였다. 그러나 소로에게 오두막은 마치 외투나 모자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입을 수도 있고 벗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때에 맞춰 무르익는 것! 완전히 무르익은 곡식이 열매를 맺고, 완전히 자란 나무의 열매가 떨어지듯, 그렇게 자신의 삶의 완벽한 자연스러움을 얻는 것. 그것이 소로가 원하는 절대자유, 어떤 공리적 목적도 없는 일체무위의 삶이었다. 소로는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가 머무는 곳이 자연이 되길 바라면서. ●나는 정부의 통치를 거부한다 1846년 미국은 멕시코 전쟁을 통해 단 1500만 달러로 텍사스,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양도받았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전쟁을 지지하였다. 물론 대부분이 노예제도 지지자였다. 소로는 다른 많은 당대의 개혁가들처럼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는 이런 전쟁과 노예제도는 결단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말로 하는 반대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소로의 선택은? 세금납부 거부! 소로는 6년간 인두세를 내지 않았고 결국 체포되고 투옥된다. 단 하루 동안! (소로의 동의 없이 가족이 세금을 납부했기 때문에 소로는 하루만에 풀려난다) 그리고 감옥에서 더 절실히 깨닫는다. 감옥 안에는 국가가 없으며 감옥은 결코 자유로운 정신을 가둘 수 없다고. 소로는 면회를 온 에머슨이 “자네, 왜 그곳에 있는가?”라고 묻자 “선생님은 왜 밖에 계십니까?”라고 응수한다. 그리고 그는 그 하루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년 후 ‘시민불복종’을 집필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국가란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들이 상호 공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편의적인 체제’이다. 그런데 그런 편의적인 체제가 갑자기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워 부당한 질서에 모두를 굴복시키려 한다면? 그때 ‘저항’은 의무이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 부당한 국가의 작동을 멈추게 해야 한다. 누가? 바로 내가! 1859년 노예해방론자인 존 브라운이 노예를 도망시키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에 직면했을 때 존 브라운을 옹호하는 첫 번째 공개강연을 한 것도 소로였다. 아마 소로는 존 브라운을 실질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소유한 생명력과 힘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가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게 소로의 생각이었다. 월든을 떠나 온 후 소로는 주로 글쓰기와 강연을 하면서 살았다. 물론 생계를 위한 측량기사의 일을 꾸준히 하면서 말이다. 살아 생전,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나 자비 출판한 첫 책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은 초판 1000권 중 700권이 반납되었다. ‘월든’ 역시 그가 살았을 때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여전히 소로는 간결하고 평화롭게 일상을 살았다. 너무 일찍 찾아온 병마 때문에 마흔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회한은 없었다.” 어떤 것들은 끝마치는 것이 당연히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2년간 주로 편지로 소로와 교류했던 신학자 해리슨 블레이크는 소로가 죽은 지 30년 가까이 지난 후에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때때로 그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곤 한다. 그의 글을 거듭 읽으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도 하고, 전보다 더 강력한 가르침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여전히 개봉되지 않았고, 아직 나에게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으며, 어쩌면 내가 죽기 전까지는 도착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서신들은 거기에 담긴 진정한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발송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소로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의 부박한 일상 속에서 ‘월든’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각자 물을 일이다. 이희경 문탁네트워크 연구원
  • “에비타가 나치 전범들을 아르헨티나에 숨겼다”

    아르헨티나의 전설적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애칭 에비타)이 2차대전 후 재물을 받는 대가로 다수의 독일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것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메일은 2일 에비타와 그녀의 남편인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이 같은 행적을 담은 책이 출간됐다고 보도했다. 즉 레안드로 날로치와 듀다 텍세이라가 공동으로 쓴 ‘라틴 아메리카로, 정치적으로 잘못된 안내’라는 책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에비타는 2차 대전 후 연합군의 전범 재판소 회부를 피해 도망나온 나치 전범들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는 것을 묵인했다. 그 반대급부로 유태인을 학살하던 시기에 돈많은 유태인들로부터 나치 정권이 빼앗은 재물을 받았다는 얘기다. 이 때 아르헨티나로 숨어든 대표적 나치 인사가 아돌프 아이히만과 요세프 맹겔레. 히틀러의 나치 정권의 강제수용소 운영을 관할한 아이히만은 독일 패망 후 아르헨티나로 피신한 뒤 가명으로 메르세데츠-벤츠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1960년 이스라엘 비밀첩보기관인 모사드에 의해 납치돼 1962년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까지다. 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악명높은 생체실험을 자행해 ‘죽음의 천사’란 악명을 떨쳤던 멩겔레 또한 아르헨티나로 비밀리에 망명했다. 이후 67세로 죽을 때가지 남미에서 살았다고 한다. 책의 저자들은 생전의 에비타가 나치 전범들로부터 받은 펀드와 귀중품들을 감춰두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의 은행에 적어도 한 구좌 이상의 비밀 계좌를 개설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에비타는 남편이 대통령으로 재임 중일 때 유럽순방에 동행하면서 스위스를 잠시 방문한 비화를 소개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에비타’의 실제 주인공인 에바 페론은 지금도 아르헨티나 일부 계층으로부터 ‘빈자(가난한 사람들)의 성녀’로 추앙받고 있으나, 전체 국민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남편인 페론 전 대통령과 함께 온갖 포퓰리즘(대중 인기영합주의) 정책으로 아르헨티나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는 평가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nownews@seoul.co.kr
  • 카다피 정권 몰락 계기로 본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카다피 정권 몰락 계기로 본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역사 속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자들의 말로를 되돌아본다. ●차우셰스쿠 등 도피중 처형 22년간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하며 김일성을 모방해 우상화 작업에 혈안이 돼 있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대통령은 1989년 카다피처럼 반정부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평소 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군은 총부리를 차우셰스쿠에게 돌렸고, 북한으로 도망치려다 붙잡힌 그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연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따라 도망쳤던 베니토 무솔리니 전 이탈리아 총리 역시 유격대에 붙잡혔다.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페타치와 함께 처형당한 무솔리니의 시신은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매달렸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도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숨어지내다 미군에 체포된 지 3년만인 2006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모사 부자, 암살도 대물림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전 니카라과 대통령은 20년 독재 후 1956년 암살 당했다. 그 자리를 두 아들이 잇따라 차지, 소모사 일가는 1979년까지 62년간 니카라과를 지배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형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도 1980년 암살당해 권력뿐 아니라 죽는 방식까지도 대물림했다. 독립 이후 정권 전복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조제프 카빌라 현 대통령은 아버지 로랑 카빌라가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가였으나 변절, 독재를 하다 2001년 쿠데타 과정에서 암살됐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전 칠레 대통령이 17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정치적 이유로 살해된 이들이 공식적으로만 3197명이고, 1000여명은 여전히 실종상태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지 8년 뒤인 1998년 영국 런던에서 체포됐지만 건강상 이유로 석방돼 귀국했다. 칠레에 돌아와서는 가택연금됐고 2006년 심장마비로 숨졌다. ‘20세기 가장 부패한 지도자’로 꼽히는 수하르토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재직 중 부패혐의로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물러난 뒤 10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빼돌린 돈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피노체트·밀로셰비치 감옥행 ‘발칸의 도살자’라 불렸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연방 대통령은 2000년 실각한 뒤 2001년 4월 세르비아에서 체포됐다. 1999년 구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에 의하여 전쟁범죄와 학살죄, 반인도적범죄 혐의로 기소돼 같은 해 7월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송됐으며 재판을 받던 중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프리카의 히틀러’로 불리는 이디 아민 전 우간다 대통령 역시 망명 생활 중 사망했다. 집권 기간 동안 전체 1000만명 인구 중 정적 등 최소 30만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79년 반군에 쫓겨 리비아로 도피했다가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갔다. 죽는 날까지 우간다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의 엄청난 낭비벽으로 더욱 유명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1986년 2월 부정선거가 발목이 잡혀 집권 21년 만에 하와이로 쫓겨났다. 3년 뒤 가족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8) 치밀한 남편 ‘전류반’은 못 숨겼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8) 치밀한 남편 ‘전류반’은 못 숨겼네

    “거기 119, 119죠? 저, 저희…어머니가 목을 매셨는데….” 2006년 5월 25일 새벽 4시 경기 시흥시 신천동의 한 아파트. 119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사망자는 당시 56세의 주부 A씨. 그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안방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목을 매 숨진 이를 처음 발견해 바닥에 눕힌 것은 남편 B씨(56)였다. “1시간쯤 전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작은방 문에 목을 매 죽어 있더라고요. 손자들 놀라고 달아 놓은 그네용 철봉에 끈을 묶었더군요. 목 뒤 가운데에 매듭이 있었고 두 발이 공중에 5㎝ 정도 떠 있었어요.” 급히 줄을 끊어 안방에 눕혔는데 한밤에 시신과 함께 있자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불을 덮어 놓고 분가한 아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차분하게 상황을 증언했다. 아내의 자살 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남편은 “나한테 맞은 게 분해서 자살한 것 같다.”고 했다. 남편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건 발생 몇 시간 전인 5월 24일 오후 10시쯤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이 과정에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막대기로 아내를 때렸다. 그러고는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가 새벽 3시쯤 돌아와 보니 아내가 숨져 있었다고 했다. 집 안에는 길이 50㎝ 남짓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부인이 목을 맨 낡은 나일론 끈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나일론 끈은 집에서 보던 게 아니라고 했다. A씨의 목 주변에는 끈 자국이 뚜렷했다. 턱 아래부터 시작된 자국은 목덜미와 턱을 따라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부인의 얼굴에는 심한 울혈이, 양 눈꺼풀에는 많은 일혈점이 보였다. 전형적인 질식사의 흔적이었다. 얼굴, 목, 팔 등에서는 붉은색을 띤 타원형의 크고 작은 상처가 발견됐다. 남편 진술대로라면 부부싸움 때 막대기로 맞은 상처였다. 모두 18곳. 하지만 사인으로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다. 검안의는 일단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1차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있을 대반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타살된 것이고 범인은 남편이었다. # 완전의사에선 없어야 할 울혈과 일혈점 억울한 죽음이 자살로 묻혀버릴 뻔한 것을 막아준 사람은 부검의였다. 그는 시신의 상태와 정황이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신 속 일혈점과 울혈에 주목했다. “목격자(남편)는 목을 맨 부인의 발이 허공에 5㎝ 떠 있었다고 했죠. 매듭은 목 뒤에 걸려 있었고…. 근데 이상해요. 이렇게 교수형 당하는 사람처럼 죽으면 질식사와 달리 울혈이나 일혈점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거든요.” 법의학에서는 A씨처럼 정확하게 목을 매 죽는 것을 ‘전형적·완전의사’(縊死)라고 말한다.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막히는 데다 몸 전체가 공중에 떠 하중이 온전히 목에 걸려 시신의 얼굴 부위가 창백하게 변한다. 피가 쏠리지 않으니 당연히 일혈점도 울혈도 나타나지 않는다. 부검의는 몸에 남은 상처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막대기에 맞아서 생긴 상처는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화상이나 탕상(湯傷·물이나 증기에 데인 상처)에 가까워요.” 수사진의 시선은 남편을 향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진술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다그치려면 뭔가 물증이 있어야 했다. 수사진은 아파트 인근을 이 잡듯이 뒤졌고, 그 노력은 이내 결실을 맺었다.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집에 있던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한 것. 집에서 나온 막대기나 나일론 끈과 절단면도 정확히 일치했다. “가만 있자, 남편은 막대기를 이곳 공터가 아닌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서 목맬 때 쓴 나일론 끈까지 발견되고….” 일반적으로 목을 매는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살을 결심한 아내가 한밤 중 칠흑같이 어두운 공터까지 와서 어렵사리 끈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형사와 남편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이 이어졌다. 조사 8시간째. 심리적인 불안감을 내비치는 남편 앞에 경찰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증거를 내밀었다. 공터에서 발견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이었다. 남편은 고개를 떨궜다. # 전기도 흔적 남기는 걸 몰랐던 남편 사건은 엽기적이었다. 불행의 씨앗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남편의 망상증이었다. 남편은 증세가 차츰 심해지더니 급기야 ‘아내가 밥에 독을 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심했다. 범행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는 헤어드라이어 끝을 잘라 빼낸 전선과 나무막대기 등으로 간이 전기 충격기를 만들었다. 과거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했다. 범행에 쓸 나일론 끈과 플라스틱 막대기도 준비했다. 막대기는 전기 충격 때문에 아내 몸에 생길 상처를 맞아서 생긴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날 밤 남편은 TV를 보는 아내 뒤로 다가가 모두 9차례 전기 충격을 가했다. 아내가 기절하자 나일론 끈으로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15분 후 아내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살인의 흔적을 지운 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게 밝혀진 것이지만 부인의 몸에 남은 상처는 전류반(電流斑)이었다. 데인 상처와도 비슷한 이 자국은 최초 전기가 몸에 들어오고 나온 곳에 각각 흔적을 남긴다. 피부 가장자리가 올라와 있어 마치 분화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전류의 세기가 약하거나 몸에 물기가 있다면 반점처럼 작은 자국만을 남긴다. 특히 남편은 상처를 닦아냄으로써 경찰의 감식을 한층 어렵게 했다. 이렇게 흔적이 약할 때는 피부에 철 등의 금속성분이 묻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전된 피부에는 순간적으로 금속 성분이 녹아서 눌어붙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의처증 남편, 아내 몰래 헤어드라이어 꺼내더니…

    의처증 남편, 아내 몰래 헤어드라이어 꺼내더니…

    “거기 119, 119죠? 저, 저희…어머니가 목을 매셨는데….” 2006년 5월 25일 새벽 4시 경기 시흥시 신천동의 한 아파트. 119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사망자는 당시 56세의 주부 A씨. 그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안방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목을 맨 시신을 처음 발견해 바닥에 것은 남편 B씨(56)였다. “1시간쯤 전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작은 방문에 목을 매 죽어 있더라고요. 손자들 놀라고 달아 놓은 그네용 철봉에 끈을 묶었더군요. 목 뒤 가운데에 매듭이 있었고 두 발이 공중에 5㎝ 정도 떠 있었어요.” 급히 줄을 끊어 안방에 눕혔는데 한밤에 시신과 함께 있자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불을 덮어 놓고 분가한 아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차분하게 상황을 증언했다. 아내의 자살 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남편은 “나한테 맞은 게 분해서 자살한 것 같다.”고 했다. 남편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건발생 몇시간 전인 5월 24일 오후 10시쯤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이 과정에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막대기로 부인을 때렸다. 자기는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가 새벽 3시쯤 돌아와 보니 아내가 숨져 있었다고 했다. 집안에는 길이 50㎝ 남짓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부인이 목을 맨 낡은 나일론 끈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나일론 끈은 집에서 보던 게 아니라고 했다. A씨의 목 주변에는 끈 자국이 뚜렷했다. 턱 아래부터 시작된 자국은 목덜미와 턱을 따라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부인의 얼굴에는 심한 울혈이, 양 눈꺼풀은 많은 일혈점이 보였다. 전형적인 질식사의 흔적이었다. 얼굴, 목, 팔 등에서는 붉은색을 띤 타원형의 크고 작은 상처가 발견됐다. 남편 진술대로라면 부부싸움 때 막대기로 맞은 상처였다. 모두 18곳. 하지만 사인으로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다. 검안의는 일단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1차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있을 대반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타살된 것이었고 범인은 남편이었다.   ■ 완전의사에선 없어야 할 울혈과 일혈점 억울한 죽음이 자살로 묻혀버릴 뻔한 것을 막아준 사람은 부검의였다. 그는 시신의 상태와 정황이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신 속 일혈점과 울혈에 주목했다. “목격자(남편)는 목을 맨 부인의 발이 허공에 5㎝ 떠 있었다고 했죠. 매듭은 목 뒤에 걸려 있었고…. 근데 이상해요. 이렇게 교수형 당하는 사람처럼 죽으면 질식사와 달리 울혈이나 일혈점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거든요.” 법의학에서는 A씨처럼 정확하게 목을 매 죽는 것을 ‘전형적· 완전 의사(縊死)’라고 말한다.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막히는 데다 몸 전체가 공중에 떠 하중이 온전히 목에 걸려 시신의 얼굴 부위가 창백하게 변한다. 피가 쏠리지 않으니 당연히 일혈점도 울혈도 나타나지 않는다. 부검의는 몸에 남은 상처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막대기에 맞아서 생긴 상처는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화상이나 탕상(湯傷·물이나 증기에 데인 상처)에 가까워요.” 수사진의 시선은 남편을 향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진술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다그치려면 뭔가 물증이 있어야 했다. 수사진은 아파트 인근을 이잡듯이 뒤졌고, 그 노력은 이내 결실을 맺었다.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집에 있던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끈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한 것. 집에서 나온 막대기나 나일론끈과 절단면도 정확히 일치했다. “가만있자, 남편은 막대기를 이곳 공터가 아닌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서 목 맬 때 쓴 나일론끈까지 발견되고….” 일반적으로 목을 매는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살을 결심한 아내가 한밤 중 칠흑같이 어두운 공터까지 와서 어렵사리 끈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형사와 남편의 피말리는 두뇌게임이 이어졌다. 조사 8시간째. 심리적인 불안감을 내비치는 남편 앞에 경찰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증거를 내밀었다. 공터에서 발견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이었다. “모두 공터에서 찾은 겁니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 “부인을 살해한 건 당신이죠.” 남편은 고개를 떨궜다.   ■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사건은 엽기적이었다. 불행의 씨앗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남편의 망상증이었다. 남편은 증세가 차츰 심해지더니 급기야 ‘아내가 밥에 독을 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심했다. 범행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는 헤어드라이어 끝을 잘라 빼낸 전선과 나무막대기 등으로 간이 전기충격기를 만들었다. 과거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했다. 범행에 쓸 나일론끈과 플라스틱 막대기도 준비했다. 막대기는 전기충격 때문에 아내 몸에 생길 상처를 맞아서 생긴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날 밤 남편은 TV를 보는 아내 뒤로 다가가 모두 9차례 전기충격을 가했다. 아내가 기절하자 나일론 끈에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15분 후 아내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살인의 흔적을 지운 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게 밝혀진 것이지만 부인의 몸에 남은 상처는 전류반(電流斑)이었다. 데인 상처와도 비슷한 이 자국은 최초 전기가 몸에 들어오고 나온 곳에 각각 흔적을 남긴다. 피부 가장자리가 올라와 있어 마치 분화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전류의 세기가 약하거나 몸에 물기가 있다면 반점처음 작은 자국만을 남긴다. 특히 남편은 상처를 닦아냄으로써 경찰의 감식을 한층 어렵게 했다. 이렇게 흔적이 약할 때는 피부에 철 등 금속성분이 묻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전된 피부에는 순간적으로 금속 성분이 녹아서 늘어붙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전도체와 맞닿은 부위는 마치 도금을 한 것처럼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서울신문의 주간연재 기획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에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4월 16일 시작된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는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베테랑 현장기자의 생생한 경험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서울신문의 특화기사입니다. 그동안 연재돼 온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크랩해 두시면 한편의 현장 과학수사의 사례집으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부인을 죽인 건 오열했던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죽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 4) 목졸려 죽은 시신의 ‘마지막 증언’ 운전석 아내 목졸라 살해하고 차는 낭떠러지로…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남성의 사연 6) 긴장한 범인이 현장에 남긴 대변이 결정적 증거를… 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7) 여성 유린 위해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혈흔 속 性염색체로 ‘악마의 姓’ 찾아내다 9) “왜 그날 조폭은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급성 수분중독으로인한 사망사건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물 많이 마시면 생명 잃는다 11)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 생활반응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그녀가 아들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찾기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그녀가 성형수술만 안했더라도…” 광대뼈 축소술, 동거男에 목졸린 백골의 한 풀다 15) 연쇄살인범에 당한 20대女…6년만의 대반전 연쇄살인 택시기사, 274만개의 눈 CCTV가… 16) 죽은 여성이 남긴 데스노트…살인자를 지목하다 찢어진 장부가 범인을 증언하다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살인자를 가리키다 바다에서 건진 토막시신의 신원찾기
  • ‘피고’ 무바라크 “난 무죄”… 그는 끝까지 뻔뻔했다

    30년 철권통치 끝에 시민혁명으로 물러난 호스니 무바라크(83) 전 이집트 대통령이 퇴진 6개월 만에 시위대 유혈 진압과 부정 부패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섰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아랍권에서 전례 없는 전직 통치자의 재판에 중동은 물론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퇴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홍해 휴양지인 남부 시나이반도의 샤름 엘 셰이크 병원에 입원해 있던 무바라크는 3일 오전(현지시간) 군용기를 타고 수도 카이로로 이동해 경찰학교에 임시로 마련된 특별법정에 출두했다. 지난 2월 11일 퇴진한 뒤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다. ●두 아들과 철창속 3시간 재판… 15일 속개 무바라크는 흰색 죄수복을 입고 이동 침대에 누운 채로 입장해 두 아들(알라, 가말)과 하비브 알아들리 전 내무부 장관, 6명의 고위 관료와 함께 금속 창살 안의 피고인석에서 인정신문을 받았다. 무바라크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의식은 또렷했고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무바라크는 시민혁명 당시 유혈 진압 지시를 내리고, 통치 기간 중 공공 재산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의 시민혁명 진압 당시 840명의 시민이 숨졌다. 혐의가 사실로 입증되면 무바라크는 교수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무바라크와 두 아들은 이날 “모든 혐의를 전면 부인한다. 무죄다.”라고 주장했다. 오전 10시 정각에 개정된 재판은 3시간 남짓 진행됐다. 시민혁명 희생자의 가족과 외신 기자 등 600여명이 법정을 가득 메운 채 역사적인 현장을 지켜봤으며 이집트 국영방송은 TV로 이를 생중계했다. 무바라크는 재판이 끝난 뒤 재판부의 명령에 따라 샤름 엘 셰이크가 아닌 카이로 인근 군 병원으로 옮겨졌다. 재판장을 맡은 아메드 레파아트 카이로 형사법원장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건강 상태를 점검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신들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1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전했다. 무바라크에 대한 재판은 오는 15일 속개된다. 알아들리 전 장관과 고위 관료 등 7명은 4일 재판을 다시 받는다. 이집트 시민들은 이번 재판이 독재자를 응징할 기회라고 반기면서도 한편으론 과거의 부정부패를 얼마나 일소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했다. 시민혁명 이후 정권을 장악한 이들은 무바라크 재임 당시 임명된 인물들로 무바라크 기소에 미온적 태도를 보여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언론들 시시각각 중계 BBC는 중동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민주화 시위 당시 정부군의 진압으로 22세 아들을 잃은 여인 하산 라우프는 재판정 바깥에 설치된 대형 TV 스크린을 통해 재판 모습을 지켜보며 “이제야 내 아들의 영혼이 안식에 들 수 있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름 밝히기를 거부한 또 다른 시민은 “30년의 부패 끝에 드디어 정의가 행해지는 것을 보게 됐다.”고 흥분했다. 반면 무바라크 지지자들은 “우리의 대통령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찰학교 인근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바라크의 지지자와 반대자 수백명이 투석전을 벌였고, 방패와 헬멧으로 무장한 군경이 이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빚어졌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주말 영화]

    ●싸이코(EBS 토요일 밤 11시) 마리온(재닛 리)은 애인 샘(존 개빈)과 결혼하고 싶어 하지만 샘은 빚을 갚을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말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 사장이 은행에 입금하라고 맡긴 돈 현금 4만 달러를 챙겨서 차를 몰고 도주를 한다. 돈을 가지고 샘을 만나러 간 그녀는 차 안에서 노숙을 하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지만 무사히 넘긴다. 다행히 아직 사장이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돈을 횡령한 사실이 점점 두려워지면서 혹시나 모를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차량을 교체한다. 그리고 심한 비를 피하기 위해 도로변에 있는 낡은 모텔에 들어선다. 그곳 모텔의 주인인 노먼 베이츠(앤서니 퍼킨스)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신의 사무실로 초대해 빵과 우유를 대접한다. 그리고 자신은 모텔 바로 뒤쪽 빅토리아풍의 큰 저택에서 몸이 불편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해 준다. 마리온은 노먼의 친절이 고맙기도 하지만 새 박제로 가득한 그의 사무실이 어쩐지 불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얼마 후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던 중 누군가의 칼에 난도질당하며 죽고 만다. ●데스노트 엘(OBS 일요일 밤 11시 20분) 엘(마쓰야마 겐이치)의 최후 23일간의 이야기와 새로운 사신(死神)과의 대결이 시작된다. ‘데스노트 엘’은 엘이 자신의 이름을 데스노트에 적기 시작한 시점에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23일을 다룬 속편이다. 마지막 결전을 앞둔 천재 명탐정 엘에게 거대한 사건이 주어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실현시키려는 ‘전인류 말살 프로젝트’를 막아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사신의 목적은 악으로 찌든 현 인류를 모두 제거하고 새로운 인류를 형성해 이상적인 신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키라 라이토(후지와라 다쓰야)와의 대결까지 남은 시간은 23일밖에 없다. 전인류의 운명이 걸린 대결이다. 오직 엘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데…. ●OK목장의 결투(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치과의사였던 닥 할리데이는 서부에서 가장 빠른 총잡이에 떠돌이 도박사로 변한다. 형의 복수를 하겠다고 대들던 악당 한 명이 닥한테 죽음을 당하고, 닥은 그렇게 살인죄로 갇힌다. 주민들이 닥을 교수형시키려고 하자 마침 이곳을 찾아왔던 전설적인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의 도움으로 피신한다. 한편 은행 강도범들이 다지 시티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은 와이어트는 닥과 합세해서 강도범들을 처치한다. 그리고 와어어트는 툼스톤 마을의 보안관인 동생 버질의 긴급지원 요청을 받고, 닥과 함께 툼스톤에 도착한다. 악당 클랜튼 일당이 멕시코에서 훔친 수천 마리의 소를 몰고 툼스톤을 통과하려고 하자, 그들을 막기 위해 버질이 와이어트에게 지원 요청을 한 것이다.
  • [깔깔깔]

    ●마지막 소원 한순간의 실수로 살인자가 된 최불암. 사형집행을 앞두고 집행관이 물었다.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 “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까?” “그래, 그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면 마지막 소원이니 제가 원하는 방법으로 죽여주십시오.” “네가 원하는 방법이 무엇이냐? 전기의자? 가스실? 교수형? 아니면 총살?” “아니요. 저는 늙어서 죽는 게 소원입니다.” ●참새 최불암 참새와 최주봉 참새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때마침 나타난 포수가 그 둘을 보았다. 포수는 둘 중 못생긴 참새를 쏴서 잡기로 했다. 그래서 최불암 참새를 총으로 쐈다. 그러자 최불암 참새가 하는 말. “좀 있으면 이주일이 올 텐데….”
  • [공직사회는 지금] 근절대책은

    투서는 조직을 와해시키는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면서도 투서는 근절되지 않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투서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 투서한 사람을 엄한 벌로 다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태조 때에는 “투서를 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투서한 자를 체포한 사람에게는 은 열 냥을 준다.”는 내용이 있다. 그래도 투서가 끊이지 않자, 숙종 때는 투서를 보고 불태우지 않는 자를 귀양보내는 형벌이 추가됐다. 정부의 강력한 공직비리 척결 분위기에 맞춰 중앙부처와 자치단체들은 잇따라 집안 단속에 나섰다. 투서 근절은 깨끗한 공직자의 자세에서 나온다며 행동강령 등으로 직원들을 옥죄고 있다. 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은 전 직원에게 “공정사회라는 새로운 잣대로 볼 때 과거의 관행이었던 것이 전부 문제가 되고 있다.”며 관행 근절을 선언했다. 이와 함께 전 직원 행동 준칙으로 ▲산하기관 협회 등 외부기관은 물론, 직원들끼리도 밥값을 각자 계산하고 ▲골프와 과도한 음주의 무기한 금지 등을 천명했다. 환경부도 조직 내부 행동강령을 별도로 마련 중이다. 강운태 광주시장은 투서나 음해성 제보를 조직의 화합을 저해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독버섯으로 규정하고, 근거없는 투서는 발본색원하겠다고 밝혔다. 강 시장은 최근 간부회의에서 조직 내 음해성 투서가 있다는 언론보도와 관련, “누구든지 시장에게 조직발전을 위한 생산적 건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소통을 위한 창구를 마련하겠다.”면서 “어떤 형태든 투서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신 시장과의 대화 창구로 ▲비서실장을 통한 면담 신청 ▲시장 이메일 활용 ▲우편이용 등을 제시했다. 이런 자구책 마련에 공무원들도 자숙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지만, 한편으론 모두 비리로 매도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제기한다. 국토해양부의 한 공무원은 “부처 직원 모두 비리가 있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라면서 “따가운 시선 때문에 동창 모임도 나가기가 꺼려진다.”고 토로했다. 한편 최근 공직자의 각종 비리가 잇따라 적발되는 것은 하반기 대규모 기관장 교체를 앞두고 기강잡기에 나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올해 하반기 임기가 끝나 교체되는 기관장은 모두 94명에 이른다. 전체 297개 공공기관 중 3분의1 이상이 수장이 바뀌는 셈이다. 정부의 한 사정 관계자는 “부처 목금 연찬회 등에 대한 향응 제공 비리 등을 적발해 발표한 것은 현 정부 후반기 공직사회에 긴장감을 주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밝혔다. 유진상기자 jsr@seoul.co.kr
  • “무바라크 발포명령 확인 땐 사형될 것”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이 지난 시민 혁명 과정에서 시위대를 사살하라고 명령한 것으로 드러나면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이집트 법원 고위 관계자가 주장했다. 반면 무바라크는 “나는 시민들에게 발포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며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아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최근 부정부패와 유혈진압 혐의로 두 아들과 함께 15일간 구속됐다. 카이로 항소법원의 자카리아 샬라쉬 법원장은 15일 현지 유력지인 알아흐람과의 인터뷰에서 “무바라크가 시위대에 발포명령을 내렸다면 교수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혐의로 앞서 기소된 하비브 알아들리 전 내무장관은 “무바라크가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도록 경찰에 명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이에 대해 검찰 조사에서 시위자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걸프 데일리 뉴스’가 보도했다. 그는 “거리로 나온 시민을 보호하고 안정시키라는 명령만 군부대에 내렸다.”면서 “만약 내무부 책임자들이 내가 연루됐다고 말했다면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책임을 회피했다. 알자지라 방송은 무바라크가 오는 19일 카이로 법정에 출두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개혁·미국적 시각” 국가개발의장 지내

    리비아 반군 임시정부를 이끌 마무드 지브릴(59) 총리는 국제무대에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1987년 아랍 최초로 리더십 양성에 관한 회의를 주최했고, 리비아 국가계획위원회 대표와 국가경제개발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서방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전략계획과 의사결정’으로 박사학위를 따고, 이곳에서 강의를 해온 까닭에 서구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영어에도 능통하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문서에서는 지브릴 총리를 ‘개혁적 마인드의 소유자’, ‘미국적 시각을 가진, 진지한 협상 상대’라고 평가하고 있다. 리비아 사태가 터진 뒤 반군의 거점인 벵가지에서 결성된 국가위원회의 비상위원장을 맡으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지난 10일에는 파리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국가위원회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지지와 승인을 이끌어냄으로써 외교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반군의 의회기구인 국가위원회의 무스타파 모하메드 압델 잘릴(59) 위원장은 카다피 정권의 관료 출신이다. 압델 잘릴은 반정부 시위 이전에도 카다피 정권 내 가장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 받아 왔다. 지난달 21일 카다피 정권의 반정부 시위대 유혈진압을 비난하며 법무부 장관직을 사임했다. 최근에는 1998년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발생한 미국 팬암 여객기 폭파사고가 카다피에 의한 것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압델 잘릴은 반정부 시위 전부터 정부 내에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죄수들을 마구 잡아들여 가두는 행태에 대해 비판하고, 이들의 석방을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 동부의 법무행정을 맡았을 당시 정권이 무고한 시민을 교수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부한 적도 있었다. 온건하고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알려진 그는 사임 직후 반군의 구심체인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됐고 현재 카다피 정권에 의해 50만 디나르(4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 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하)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위기의 한국교회, 종교개혁 현장서 길을 묻다] (하) 한국 교회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존 티한 미국 뉴욕 호프스트라대 종교학과 교수는 개신교건 이슬람교건 유대교건 가톨릭이건 유일신앙을 갖고 있는 종교들은 믿음의 체계 자체가 배타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이미 폭력적이라고 규정지었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일부 몰지각한 신도들의 그릇된 행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종교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라는 얘기다. 가혹하다. 이러한 학술적 연구에 현실 속 부패와 타락, 세속적 권력에 대한 욕망의 이미지까지 덧대어지니 도대체 이성적 영역에서 한국 교회가 빠져나갈 탈출구가 없다. 하지만 세속적 권위가 아닌 신앙과 진리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종교의 몫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을 2011년 한국에서 다시 되새겨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을 근거지 삼아 로마 교황청과 한창 싸우던 즈음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활약했다. 루터와 같으면서도 달랐던 츠빙글리는 종교사적으로 유명한 ‘빵과 포도주의 성만찬’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루터와 갈라진다.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은 루터나 츠빙글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터는 공재설(共在說·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에 예수도 함께한다는 주장)을 취했지만, 츠빙글리는 루터의 입장조차 비판했다. 츠빙글리는 1524년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문구에서 ‘~이다’를 ‘상징한다’로 해석하며 빵과 포도주는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한다는 ‘상징설’을 내놓았다. 스위스는 물론 독일 남서부 몇몇 도시들은 츠빙글리 주장 쪽으로 기울며 루터교로부터 이탈하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이성으로 부정한다.’면서 루터가 펄쩍 뛰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종교개혁지 답사 일정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대성당을 찾았다. 이곳은 40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종교전쟁인 카펠전쟁에서 숨지기까지 츠빙글리의 열정과 개혁 의지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던 곳이며 스위스 종교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1932년 성당 내부에 만들어진 자코메티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보러 오는 이들로 붐빈다. 내부에서는 사진 한장도 찍지 못하게 하는 씁쓸한 상업성만 앞선다. 어쨌든 츠빙글리로부터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종교개혁 1세대들의 허리를 딛고 2세대의 대표주자 칼뱅이 등장한다. ●평신도 칼뱅,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끌다 장 칼뱅은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사제도, 신부도, 목사도 아니었다. 그저 인문주의를 체현하고 진지하게 인문학과 법학을 연구한 평신도였다. 하지만 가톨릭의 박해로 프랑스를 떠나 독일 등으로 옮겨 다녀야 했던 그는 종교개혁 사상가들과 교유하며 사상을 벼린다. 그리고 1536년 8월 스위스 제네바에 잠시 머문 뒤 제네바 종교개혁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고 주도하며 스스로 큰 산맥이 된다. 제네바 관광객들이 78㎞ 둘레의 레만호만큼이나 많이 찾는 곳이 제네바대학 근처 바스티옹 공원이다. 이른 아침 공원을 찾았다. 커다란 부조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상징하는 인물인 칼뱅을 비롯해 파렐, 베제, 녹스 4명을 조각해 놓았다. 이와 함께 1917년에 완성된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칼뱅, 츠빙글리 등 10명의 종교개혁가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공원에서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칼뱅이 제네바 종교개혁의 근거지로 삼았던 상 피에르 교회가 있다. 제네바에서 첫 설교부터 마지막 설교까지 진행됐던 곳이다. 교황청에 대항한 루터가 종교와 세속의 분리를 바탕으로 추진했던 종교개혁은 오히려 교회의 법이 세속 사회를 이끄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는 일종의 교회 감독 법원을 만들어 시민들을 통제하며 엄격한 신앙생활과 실천을 요구했다. 시민들의 사치와 방종을 규제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제네바를 이른바 ‘하나님의 도시-성시(聖市)’로 만들겠다는 의지였지만 더욱 근본적인 것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는 칼뱅의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엄격한 신정(神政)을 추구했기에 칼뱅의 이름으로 드리워진 그늘도 짙다. 칼뱅은 제네바를 종교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3~4년의 짧은 시간 동안 수십명에 이르는 사람을 오로지 종교적 이유로 교수형, 참수형, 화형시켰다. 예정설을 비난하거나 세례를 거부했다는 등의 이유였다. 종교개혁적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이들은 제네바에서 추방하기까지 했다. ●엄격한 신정 속 참형… 칼뱅주의 그림자 분쟁과 비방, 사기나 절도, 화려한 복장과 사치 등 시민들의 삶에 대해 엄격히 규제했던 만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강요된 폭력이었다. 칼뱅은 한국 개신교의 뿌리로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계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는 칼뱅주의를 받아든 스코틀랜드의 존의 녹스(1514~1572)로부터 비롯됐다.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짜인 직제에서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공동체의 질서를 관리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성직자들의 독단을 견제하며 교회 내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 탓에 한국 교회가 칼뱅이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은 실종된 채 형식의 엄격함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진다. 이성덕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요즘 개신교가 사회적 책임 역할을 잘 못해서 여러 비판과 함께 본래의 신앙을 망각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면서 “종교라는 것이 처음에 새롭게 시작하더라도 시간이 흘러가면 굳어지고 타락하는 게 일반적인 만큼 교회 개혁은 끝없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종교 본연의 역할이 포기된 채 세속적인 힘과 금권 등의 권력에만 탐닉하고 있다.”면서 “성직자나 교권주의자들이 스스로 자정하기는 어렵고 깨어 있는 일반 신도 등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개혁을 시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외부의 자극을 촉구했다. 칼뱅은 평신도였다. 루터 역시 교회를 민중의 것으로 돌려줬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 세속 권력과 유착이 극심할 때 나선 것은 민중이었다. 500년 전 종교개혁이 한국 교회 안팎에 슬그머니 던져준 훈수다. 글 사진 제네바·취리히·루체른(스위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씨줄날줄] 사막의 라이언/박홍기 논설위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오마르 무크타르(1862~1931)다. 무크타르는 1910년 제국주의 이탈리아에 맞서 싸운 구국의 지도자다. 이탈리아가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미명 아래 침공하자 반목을 일삼던 부족들을 결집시켜 20년간 이탈리아를 상대로 항전했다. 서구세력의 팽창에 맞선 비서구권, 이슬람권의 응전이었다. 이탈리아는 1911년 트리폴리에서부터 벵가지에 이르는 리비아 지역을 전격적으로 점령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20년 동안 무크타르가 이끄는 원주민들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혀 교착상태에 빠진다. 무크타르의 영웅담은 1981년 할리우드의 아랍계 감독 무스타파 아키드에 의해 영화 ‘사막의 라이언’으로 되살아났다. 감독 아키드는 “서방에 살면서 이슬람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밝혔다. 3500만 달러의 오일머니가 투입됐다. 카다피가 가장 큰 투자자로 나섰다. 영화 속에서 리비아인들은 유목민족 베두인의 후예답게 말을 타고 이탈리아 탱크부대와 처절하게 싸운다. 무크타르는 중과부적으로 이탈리아군에 패해 포로가 된 뒤 정복자의 논리에 따라 ‘식민정부에 대한 반역’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무크타르는 공개 교수형에 앞서 “나는 절대 항복하지 않는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다. 투쟁은 다음 세대, 다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영화는 이탈리아에서 상영금지됐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리비아 공사 수주 등과 맞물려 1981년 12월 개봉됐다. 카다피는 2009년 이탈리아를 방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만나는 자리에 보란 듯이 무크타르의 사진이 가슴에 새겨진 제복을 입고 나왔다. 베를루스코니가 65년 만에 식민지배를 사과하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데 대한 화답으로 이탈리아를 찾았을 때다. 리비아 10디나르 지폐에 새겨진 초상화도 무크타르다. 카다피가 원하는 이상인 셈이다. 카다피는 유엔에 의해 인권을 유린한 독재권력으로 낙인찍혔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다국적군은 유엔 결의에 따라 ‘국민보호’를 목적으로 리비아 공격에 나섰다. 벌써 3차례 폭격했다. 카다피는 다국적군의 공습을 ‘십자군 침공’, ‘식민전쟁’으로 규정해 이슬람권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나아가 “마지막 총탄이 다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항전의 의지를 불사르고 있다. 국민의 뜻과는 달리 마치 ‘사막의 라이언’이라도 되는 듯이.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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