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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野는 잠깨는 룡 vs 與는 잠덜깬 룡

    野는 잠깨는 룡 vs 與는 잠덜깬 룡

    문재인 “정치 미래 위해 환영” 손학규, 오늘 지지자 모임 촉각 여권 잠룡들은 ‘눈치게임’ 열중 야권 잠룡들의 ‘대권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1일 페이스북에 “김대중·노무현의 못다 이룬 역사를 완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역사를 한 걸음 더 전진시켜 내겠다”라며 대권 도전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동안 ‘불펜투수’를 자처했던 안 지사가 정치적 스승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등판을 선언한 셈이다. 친노(친노무현)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경쟁은 물론 궁극적으로 친노 진영의 분화도 불가피하게 됐다. 지난달 30일 김부겸 의원이 “대세론은 무난한 패배의 다른 이름”이라며 도전을 공식화한 데 이어 8·27 전당대회 이후 야권의 대선레이스가 일찌감치 불붙는 양상이다. 안 지사는 이날 “동교동도 친노도 뛰어넘을 것이다. 친문(친문재인)도 비문도 뛰어넘을 것이다. 고향도 지역도 뛰어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김대중과 노무현은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분들을 사랑하는 일이 타인을 미워하는 일이 된다면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세도 아니며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는 후예의 자세도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의 못다 이룬 역사를 완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라면서 “그 역사를 이어받고 그 역사를 한 걸음 더 전진시켜 낼 것”이라고 글을 맺었다. 안 지사는 ‘김대중·노무현 정신의 적자(嫡子)’임을 강조해 왔다. 안 지사는 2일에는 야권 심장부인 광주를 방문, 특강을 갖는 등 보폭을 넓혀 갈 계획이다. 안 지사의 최측근 의원은 “안 지사의 이날 글은 그동안 고민해 온 대권 도전을 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결론과 또 무엇을 위해 도전하는지 그 방향을 명확히 밝힌 것”이라면서 “앞으로 안 지사가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말할 기회가 계속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지사와 김 의원의 대권 도전에 대해 최대 경쟁자인 문 전 대표는 측근인 김경수 의원을 통해 “환영한다. 대한민국 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반응했다. 한편 또 다른 야권 대선주자로 꼽히는 손학규 전 더민주 상임고문도 2일 광주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에서 주최하는 ‘손학규와 함께 저녁이 있는 빛고을 문화한마당’에 참석하며 정계 복귀를 가다듬을 계획이다. 손 전 고문은 지난달 28일 전남 강진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와 배석자 없이 회동을 가졌다. 반면 여권 잠룡들은 아직은 ‘눈치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남경필 경기지사, 원희룡 제주지사는 현직에서 관망 중이고,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총선 낙선 이후 재활 중이다. 그나마 김무성·유승민 의원은 민생 탐방과 강연 정치로 시동을 걸었지만 아직 ‘몸풀기’ 단계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이영준 기자 apple@seoul.co.kr
  • ‘잠룡’ 안희정 대선 출사표 “DJ·盧 뛰어넘고 모든 원한 끌어안겠다”

    ‘잠룡’ 안희정 대선 출사표 “DJ·盧 뛰어넘고 모든 원한 끌어안겠다”

    대권 잠룡인 안희정(51) 충남지사가 사실상 내년 대통령 선거 경선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안 지사는 지난달 3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동교동도, 친노(친노무현)도 뛰어넘을 것입니다. 친문도 비문도 뛰어넘을 것입니다. 고향도 지역도 뛰어넘을 것입니다”라면서 “더 나아가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여년의 시간도 뛰어넘어 극복할 것입니다. 그 시간의 모든 미움과 원한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권 도전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안 지사는 이어 “사랑은 사랑이어야 한다”면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 분들을 사랑하는 일이 타인을 미워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그 분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자세도 아니며, 스승을 뛰어넘어야 하는 후예의 자세도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나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 다 이룬 역사를 완성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나아가 근현대사 백여년의 그 치욕과 눈물의 역사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안 지사는 “그 역사속에 전봉준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김구도 조봉암도 김대중도 김영삼도 노무현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도전했습니다”라면서 “나는 그 역사를 이어받고 그 역사를 한 걸음 더 전진시켜낼 것”이라고 밝혔다. 안 지사는 오는 2일 광주를 방문해 광주교육청에서 특강이 예정돼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연평도 해상 ‘스티로폼 표류’ 北주민 구조…탈북 여부, 귀순 의사 등 조사

    연평도 해상 ‘스티로폼 표류’ 北주민 구조…탈북 여부, 귀순 의사 등 조사

    최근 서해상으로 북한 주민 3명이 귀순한 데 이어 연평도에서도 북한 주민이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구조됐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날 오전 7시 10분쯤 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해상에서 북한 주민 A(27)씨가 스티로폼을 잡고 표류하는 것을 군 관측병이 발견했다. 때마침 이 해역을 지나던 어선이 A씨를 발견하고 약 5분 만인 오전 7시 15분쯤 A씨를 구조했다. 어선 선장 이모씨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아침에 어구를 설치하러 배를 몰고 가는데 사람이 스티로폼을 잡고 표류하고 있어 끌어올렸다”고 구조 경위를 전했다. 이씨는 “북에서 왔느냐고 묻자 말을 안 했다”면서 “나중에 몇 마디 할 때 북한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보고 북한 사람인 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선장은 연평도로 귀항해 군 당국에 A씨 신병을 인계했다. 보안당국은 A씨가 스스로 탈북했는지, 해양조난사고를 당한 것인지를 조사하며 귀순 의사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지난 7일에는 북한 주민 3명이 어선을 타고 인천 해역을 지나다가 해양경찰에 발견됐다. 평안북도에서 출발한 북한 주민들은 당시 곧바로 귀순 의사를 밝혔고,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로 송치돼 귀순 경로 등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근래 수년간 서해에서는 북한 주민의 귀순이 이어져 왔다. 2011년 2월 북한 주민 31명이 어선을 타고 연평도 해상으로 남하했다가 이 중 4명이 귀순하고 27명은 북한으로 돌아갔다. 또 같은 해 11월에도 북한 주민 21명이 목선을 타고 남하해 전원 귀순했다. 2014년 8월에는 북한 주민 2명이 강화군 교동도로 헤엄쳐 넘어와 귀순했고, 지난해 10월에도 북한 주민 1명이 비슷한 방식으로 교동도로 와 귀순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 경기, 인천 등 중부지방 ‘호우경보’ 발령···외출 자제해야

    서울, 경기, 인천 등 중부지방 ‘호우경보’ 발령···외출 자제해야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5일 서울, 경기, 인천 등 중부지방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면서 ‘호우경보’가 발령됐다. 앞서 기상청은 오는 6일까지 중부 일부 지역에서 최대 150㎜ 이상의 폭우가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기상청은 이날 오전 9시 서울 지역에 호우경보를 발령했다. 호우경보는 6시간 동안의 누적 강우량이 110㎜ 이상 또는 12시간 동안의 누적 강우량이 180㎜ 이상으로 예보됐을 때 내려진다. 오전 9시 기준으로 서울의 강수량은 52.5㎜를 기록하고 있다. 앞서 서울 지역은 지난달 21일~30일 ‘마른 장마’가 이어지다가 지난 1일 108.5㎜의 장맛비가 내렸다. 지난 2일에는 4.0㎜, 월요일인 지난 4일에는 29.5㎜의 비가 내렸다. 경기 북부 10개 시·군 전역에 내려졌던 호우주의보도 호우경보로 격상됐다. 전날부터 이날 오전 9시까지 경기 북부지역인 의정부(신곡)에는 201.5㎜, 포천(가산)에는 188.5㎜, 양주에는 172. 5㎜ 등의 많은 양의 비가 내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날 오전 9시 기준으로 경기 북부지역에는 시간당 30~50㎜의 비가 내리고 있다. 기상청은 이날 오후까지 최대 130㎜의 많은 양의 비가 경기 북부지역에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인천에도 호우경보가 발령됐다. 이날 오전 9시 기준 인천 중구 무의도에는 96㎜, 강화군 교동도 95.5㎜, 옹진군 자월도 90㎜, 서구 공촌동 79㎜의 비가 내리고 있다. 기상청은 목요일인 오는 7일 오후 늦게까지 50~150㎜의 비가 더 내릴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호우경보가 내려진 곳은 서울시, 강화군과 옹진군을 제외한 인천시, 강원 양구군·인제군 산간·고성군 산간·속초시 산간·고성군 평지·인제군 평지·춘천시·화천군·철원군, 경기 가평군·남양주시·구리시·파주시·의정부시·양주시·고양시·포천시·연천군·동두천시·부천시 등이다. 기상청 관계자는 “오늘 오전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 오후에는 서울·경기와 강원에는 시간당 30㎜ 내외의 강한 비와 함께 많은 비가 오는 곳이 있을 것”이라면서 “중부지방에서는 장맛비가 장소에 따라 낮 동안 소강 상태를 보이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불법조업 中선장 등 영장…수산업법 위반 적용될 듯

    불법조업 中선장 등 영장…수산업법 위반 적용될 듯

    인천해양경비안전서는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불법 조업하다가 나포된 중국 어선 2척의 선원 14명 가운데 선장 2명과 간부 선원 4명 등 6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 선원 8명은 불구속 입건하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들에게는 해경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적용하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의 외국인 어업 등에 관한 법률이나 영해 및 접속수역법이 아닌 수산업법 위반죄가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법 조업을 한 지점이 우리나라 영해나 EEZ가 아닌 내륙 안에 있는 수역인 내수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국 어선은 지난 4월 초 중국 랴오닝성 둥강에서 출항한 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한강 하구 중립수역까지 들어왔다. 이후 인천 강화군 교동도 인근 해상 등지에서 불법 조업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원들은 해경 조사에서 “4월 출항한 이후 중국 해역에서 조업하다가 6월 초에 중립수역 쪽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경은 교동도 주민들의 진술 등으로 미뤄 선원들이 4월부터 중립수역에서 불법 조업을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추가 조사를 하고 있다. 한편 외교부는 이날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중국어선들의 불법 조업과 관련해 최근 2차례에 걸쳐 추궈훙(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를 초치해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중국 측은 이 문제를 주시하고 있으며 단속 강화에 노력하고 있다면서 양국 협의 채널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자고 했다”고 전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한강 중립수역서 불법조업 중국어선 선장 등 6명 구속영장

    한강 중립수역서 불법조업 중국어선 선장 등 6명 구속영장

    인천해양경비안전서는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불법조업을 하다가 나포된 중국어선 2척의 선원 14명 가운데 선장 2명과 간부선원 4명 등 6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 선원 8명은 불구속 입건하기로 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들에게는 해경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적용하던 배타적경제수역(EEZ)에서의 외국인 어업 등에 관한 법률이나 영해 및 접속수역법이 아닌 수산업법 위반죄가 적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불법조업을 한 지점이 우리나라의 영해나 배타적경제수역(EEZ)이 아닌 내수(내륙 안에 있는 수역)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국어선은 지난 4월 초 중국 랴오닝성 둥강에서 출항한 뒤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한강 하구 중립수역까지 들어왔다. 이후 인천시 강화군 교동도 인근 해상 등지에서 불법조업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원들은 해경 조사에서 “4월 출항한 이후 중국해역에서 조업하다가 6월 초에 중립수역 쪽으로 넘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경은 교동도 주민들의 진술 등으로 미뤄 선원들이 4월부터 중립수역에서 불법조업을 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추가 조사를 하고 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중국 어선 격렬 저항…민정경찰, 전격 나포

    불법조업 철수 경고방송도 무시 퇴거작전 시작 나흘 만에 첫 사례 우리 군과 해경,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로 구성된 ‘민정경찰’이 작전 개시 나흘 만인 14일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불법 조업 중인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했다.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민정경찰이 오늘(14일) 오후 7시 10분쯤 한강 하구 중립수역 내에서 불법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해 인천 해경에 인계했다”고 밝혔다. 민정경찰이 지난 10일 중국 어선 퇴거 작전을 시작한 이후 중국 어선을 직접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한강 하구인 인천 강화군 교동도 인근 해상은 유엔군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수역이다. 지난 10일 민정경찰이 작전을 시작한 뒤 10여척이었던 중국 어선들은 수역 밖으로 도주했다가 재진입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그러다가 이날 오후 6시 50분쯤 중국 어선 8척이 다시 수역에 진입했다. 민정경찰은 이 가운데 2척을 나포했고, 나머지 6척은 수역 밖으로 도주했다. 나포된 중국 어선 2척에는 총 14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경찰은 경고방송을 통해 중국 어선의 자진 철수를 유도하려 했지만, 이들이 응하지 않고 위협 행위를 하자 민정경찰들이 어선에 승선해 직접 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경찰은 K2 소총과 K5 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사격을 하지는 않았다. 민정경찰의 고속단정(RIB)에는 유엔사 군정위 요원이 탑승해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감시했다. 중국 어선들은 15일 새벽 인천 해경에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특이 동향은 없었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민정경찰이 중국 어선 2척을 나포함에 따라 한·중 간 외교 마찰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지난 10일 민정경찰의 중국 어선 퇴거 작전에 대해 “중국은 어민 교육 강화를 고도로 중시한다”면서 “관련 국가와 어업 집법(활동)에 관한 소통과 협력을 강화해 정상적인 어업 질서를 수호하기를 원한다”고 밝혔었다. 합참은 “우리 군은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서 중국 어선이 철수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단속 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꽃게 씨 말랐는데… NLL 제집 드나들 듯” 성난 어민들 집단행동

    “꽃게 씨 말랐는데… NLL 제집 드나들 듯” 성난 어민들 집단행동

    北과 인접한 지정학적 불안 악용… 쌍끌이 조업에 치어까지 싹쓸이 휴일인 5일 오전 5시 6분쯤 해군은 레이더를 통해 서해에서 조업하던 연평도 어선 19척이 북상하는 정황을 포착했다. 이 어선들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오전 4시 50분 연평부대에 정상조업을 신고한 터였다. 정밀탐지에 나선 해군 2함대는 연평도 고속함 4척과 고속단정 3척을 급히 보내 선단의 북상을 차단하도록 조치했다. 연평도 선단은 오전 5시 23분쯤 마침내 연평도 북동방 0.5해리(0.93㎞)에서 멈췄다. 중국 선단을 뒤쫓아 가다 5척이 때마침 가박(假泊·휴식을 위해 바다 위에서 잠시 정박함) 중이던 목선 2척을 발견하곤 닻줄을 걸어 나포한 것이다. 해군은 국민안전처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이 같은 사실을 통보했다. 해경도 경비함정 2척과 연평특공대 소속 고속단정 1척을 사고해역으로 보냈다. 해경은 북상해 우리 어선과 중국 어선을 연평도 당섬 선착장으로 무사히 예인했다. 만약을 대비해 우리 어민과 중국 어민을 분리해 조사를 시작했다. 해경은 사고 경위 조사에서도 중국 어선은 물론 우리 어선의 조업구역 무단이탈과 관련해 선박안전조업규칙 등 관련 법률을 어겼는지를 캐내는 데 초동 조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천해경 관계자는 “해당 장소는 우리 어선들에도 조업을 금지한 북방한계선(NLL) 인접구역으로 군 작전지역에 속한다”며 “6일 오전 5~6시까지 중국 어선들에 대해 초동 조사를 벌인 뒤 인천 해경전용 부두로 옮겨 본격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중국 어선 2척의 선장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나머지 선원 9명에 대해선 출입국사무소를 통해 중국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해경에 따르면 중국 선원들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둥강시(東港市) 둥강항에서 출항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경은 중국 선주협회에 이들 선박의 등록증서와 선주 이름, 소속 회사, 선원들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 상태다. 인천해경은 중국 어선들을 나포한 연평도 어민들로부터 자세한 경위를 듣고 있다. 우리 어선들이 중국 어선들을 나포한 지점은 해경 레이더에 모두 기록돼 있는 만큼 설명을 들은 다음 해경 입장을 정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안전처는 또 외교부, 해양수산부, 합동참모본부 등 군 당국과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향후 재발 방지 및 연평도 근해 불법 조업 문제에 대해 긴밀히 대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태는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연평도 북방 해상은 NLL과 불과 1.4∼2.5㎞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 북한군 해안포에 노출돼 있어 우리 어민에게 허가된 어장이 없다. 이런 점을 노린 중국 어선들은 NLL과 연평도 사이 바다에서 상습적으로 불법 조업을 하다가 우리 해군이 나포 작전에 나서면 북한 해역으로 도주하곤 한다. 더구나 중국 어선들은 쌍끌이 저인망식 조업을 펴 치어까지 싹쓸이함으로써 어획량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서해5도 어민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최근 중국 어선들은 특히 NLL을 넘어 한강 하구까지 침입해 불법 조업을 일삼는다. 중국 어선끼리도 경쟁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지난 4월 말 꽃게잡이 철이 본격화하면서 거의 매일 교동도 서쪽과 북쪽 해역에 출몰하고 있다. 교동도 해안 500m 이내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우리 측이 경고 방송을 하는 경우도 잦다고 해병대 관계자가 전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북한과 가깝고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지역이기 때문에 우리 당국의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연평도 근해서 어민들이 중국어선 직접 2척 나포

    연평도 근해서 어민들이 중국어선 직접 2척 나포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방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정박 중이던 중국어선 2척을 어민들이 직접 나포했다. 해경 측은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어선 불법조업에 흥분해 있던 어민들에 의한 돌발상황으로 보고 처리에 고심하고 있다. 5일 인천해양경비안전서에 따르면 이날 오전 5시 23분쯤 NLL 남방 0.3해리, 연평도 북방 0.5해리에 닻을 내리고 정박해 있던 중국어선 2척을 연평도 어선 5척이 로프를 걸어 연평도로 끌고 와 해경에 인계했다. 중국어선을 나포한 어선은 오전 4시 50분쯤 연평부대장의 출항허가를 받고 바다로 나간 우리 어선 19척 중 일부다. 해군은 연평도 레이더 기지에서 이들 어선이 출항한 지 30분 만에 허가된 어장을 이탈해 연평도 북방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했다. 나포된 중국어선 22t급에는 7명, 15t급에는 4명이 타고 있었다. 중국어민들은 잠을 자던 중이어서 별다른 저항 없이 나포됐다고 해경 측은 설명했다. 중국어선이 나포된 지역은 NLL과 가까워 우리 어선도 조업이나 항해를 할 수 없는 해역이다. 해경은 일단 나포된 중국어민들에 대해 불법조업과 영해 침범 여부 등을 조사하고 있다. 우리 어민에 대해서도 조업구역 무단이탈과 관련해 조사를 벌일 방침이다. 연평도에서는 2005년에도 우리 어민들이 불법조업하는 중국어선 4척을 나포한 적이 있지만 어민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갈수록 심해지는 중국어선 불법조업이 빌미가 된 것으로 보이다. 이날 새벽에도 연평도 북쪽 바다와 NLL 사이 해역에 70∼100척의 중국 어선이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해경은 파악하고 있다. 선장 진모(57)씨는 “중국 어선들이 우리 어장을 파괴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바다를 새까맣게 메운 중국 어선들을 보고 순간적으로 화가 나 어민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연평도 북방 해상은 NLL과 불과 1.4∼2.5㎞ 가량 떨어져 있는 데다 북한군 해안포에 노출돼 있어 우리 어민에게 허가된 어장이 없다. 이런 점을 노린 중국 어선들은 NLL과 연평도 사이 바다에서 상습적으로 불법조업을 하다가 우리 해군이 나포 작전에 나서면 북한 해역으로 도주하곤 한다. 더구나 중국어선들은 쌍끌이 저인망식 조업을 펴 치어까지 싹쓸이함으로써 어획량 감소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서해5도 어민들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다. 어민들이 미리 바다에 던져놓은 통발까지 깡그리 훼손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옹진군의 집계에 따르면 중국어선 탓에 매년 수십억원의 어구 손실을 보고 있다. 백령도 주민 김재흥씨는 “어두운 밤 두무진이나 장산곶 인근을 보면 시커먼 바다가 훤한데 그게 다 중국어선”이라며 “갈고리로 어구까지 싹 쓸어가 버리니 손실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했다. 연평도 박태원 어촌계장은 “어떤 때보면 중국어선들이 연평도 200~300m 접근해 고기를 잡는 등 과감하기 그지없다“면서 “그들은 우리 영해에 있는 수산물을 싹쓸이 해간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2014년 봄·가을 조업기간에는 어선 77척이 바다에 쳐놓은 통발 778틀을 잃어버렸다. 안강망 8틀, 주낙 어구 384바퀴, 닻 71개도 회수하지 못했다. 피해액 106억 5700만원 가운데 어구 피해가 14억 1700만원, 조업하지 못해 난 손실이 92억 4000만원에 이른다. 옹진군 관계자는 “피해가 워낙 광범위해 지난해 자료는 아직 통계조차 잡히지 않았다”며 “어민들이 신고한 건수를 토대로 피해 액수를 산정하는데 실제 피해는 더 클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 어선들은 NLL을 넘어 한강 하구까지 침입해 불법 조업을 하고 있다. 지난 4월 말 꽃게잡이 철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중국 어선들이 거의 매일 교동도 서쪽과 북쪽 구역에 출몰하고 있다. 교동도 해안 500m 이내까지 접근하는 바람에 이곳을 지키는 해병대가 경고 방송을 하는 경우도 빈발하고 있다고 군 관계자가 전했다. 지난해까지 중국 어선들은 주로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했지만 최근 어선끼리 경쟁이 심해지면서 한강 하구까지 밀려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해당 지역은 북한과 가깝고 유엔군 사령부가 관할하는 중립지역이기 때문에 우리 당국의 단속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연분홍 수놓은 힐링 산길… 서해 절경의 파노라마

    연분홍 수놓은 힐링 산길… 서해 절경의 파노라마

    진달래 군락 30만㎡… 압도적 규모 자랑 코스 5개… 가족·연인 등산 나들이 인기 분재 전시·화전 만들기 등 체험행사 다양 초지진·전등사 등 주변 유적·명승도 볼만 진달래는 개나리와 함께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나무다. 한국의 산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널리 퍼져 있지만, 제대로 만끽하려면 군락지를 찾아야 한다. 연분홍색 진달래꽃은 집합될수록 강력하다.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 군락지는 봄날을 환희의 아우성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하다. 수도권에서 봄철 꽃축제의 백미 중 하나는 인천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축제다. 문화재의 고장인 강화군은 축제가 많기로 유명하지만, 진달래축제만큼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전국적으로도 명성이 퍼져 매년 이맘때면 무르익어 가는 봄의 정취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올해로 8회째인 이 축제는 오는 12일부터 26일까지 고려산 일대에서 열린다. 다른 지역의 진달래축제가 대개 평지에서 개최되는 것에 비해 강화 진달래축제는 해발 436m 정상에서 열린다. 고려산 정상 앞 비탈에는 잡목이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다. 정상에서 능선 북사면을 따라 355봉까지 약 1㎞를 연분홍으로 물들인다. 마치 연분홍 안개가 피어오른 듯하다고 할까. 고도에서 꽃이 피기 때문에 더욱 진한 색깔의 잔달래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축제 기간에는 꽃의 색도나 크기가 절정을 이룬다. 도시의 복잡함과 스트레스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꽃 감상뿐만 아니라 눈을 들어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북한 개성의 송악산이 선명한 자태를 드러낸다. 진달래 군락이 배치된 형상을 보면 장소에 따라 삼각형 또는 역삼각형을 이뤄 마치 사람이 일부러 심어 놓은 듯하다. 면적도 30만㎡에 달해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에 있는 진달래 군락과 비교하면 규모에서 압도한다. 이러한 위용 덕분에 매년 축제 기간에 10만∼15만명이 다녀간다. 정상 능선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등산로가 있어 이 길을 걸으며 편하게 진달래 군락을 감상할 수 있다. 꽃을 좀더 가까이서 보려면 등산로 곳곳에 조성된 샛길을 이용하면 된다. 이곳에는 포토존도 있어 추억을 담기에 안성맞춤이다. 때문에 연인과 가족이 함께하는 봄나들이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19~21일 꽃 활짝 예상… 올해 20만명 찾을 듯 지난해 진달래축제에 참석했던 유모(36·인천 연수동)씨는 “400m가 넘는 고려산 천지를 분홍색으로 수놓은 듯해 울림이 컸다”면서 “올해도 가족과 함께 찾아가 지친 마음을 달래고 인근 관광지도 둘러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화군 관계자는 “고려산 진달래축제는 수도권 주민들이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면서 “올해는 방문객이 20만명이 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화도는 위도가 높아 다른 곳보다 진달래가 조금 늦게 피는데 올해는 오는 19∼21일쯤 꽃이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진달래 군락지로 가는 코스는 다양하다. 대략 5가지로 분류된다. 1코스는 백련사~군락지, 2코스 청련사~군락지다. 또 3코스 고비고개~군락지, 4코스 적석사~군락지, 5코스 미꾸지고개~군락지다. 빠르고 편하게 오르려면 1코스를 택해야 한다. 48번 국도변에서 출발해 백련사를 거쳐 정상에 이르는 코스로, 축제 기간에 찾는 관광객들은 대개 이 길을 택한다. 대신 교통혼잡과 포장도로를 통해 산을 오르는 밋밋함을 감수해야 한다. 번잡함을 피하려면 2코스나 3코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4코스와 5코스는 군락지까지 가는 길이 2배가량 길다. 고려산 진달래축제는 등산을 겸한다는 장점이 있다. 제대로 등산을 즐기려면 고촌4리에서 진달래 군락지로 오르는 길을 권하고 싶다. 마을회관부터 동네 길을 걷다가 인가가 드문 지점부터 시작되는 등산로를 통해 정상으로 오르면 된다. 그곳에서 진달래를 감상한 뒤 서쪽 낙조봉으로 이어지는 4㎞가량의 능선을 타면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오솔길로 된 이 등산로는 주변 경관이 아기자기한 데다, 정상 군락지만은 못하지만 길 좌우에 진달래가 풍성하게 피어 있다. 능선을 오르내리는 경사 또한 적어 마치 둘레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능선 중간에는 21기의 고인돌군(群)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 고인돌은 우리나라 고인돌의 평균 고도보다 200여m 높은 곳에 있어 이채롭다. 옛날에는 기중기 같은 중장비가 없었는데 어떻게 수톤에 달하는 돌을 이곳으로 옮겼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낙조봉에 오르면 교동도 일대의 강화 앞바다, 영종도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바다와 이어지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낙조봉에서 적석사 쪽으로 내려가면 우리나라 3대 낙조 조망대인 낙조대가 나온다. 동해안 정동진의 반대쪽에 있다고 해서 ‘정서진’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바라보는 서해 석양은 ‘강화 8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4코스에 고인돌 21기… 국내 3대 낙조 조망대도 진달래축제와 관련된 부대 행사는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공원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부터는 행사의 주관을 민간에 위탁해 다채로운 행사를 예고하고 있다. 관련 프로그램으로는 진달래분재 전시, 진달래화전 만들기, 진달래 엽서전 등의 체험전과 아마추어 밴드를 중심으로 한 버스킹 페스티벌, 먹거리장터 등이 준비돼 있다. 강화도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부스도 운영된다. 강화군은 축제 기간에 교통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임시버스를 배치하고 임시주차장 9곳도 운영할 계획이다. 진달래축제를 찾은 김에 강화도에 산재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섭렵하는 것도 또 다른 포인트다. 강화해안도로는 문화재를 끼고 형성돼 있어 드라이브 자체가 문화재 관람이다. 강화읍 대산리~길상면 섬암교 구간(21.1㎞)으로 조선 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지은 덕진진, 초지진, 갑곶돈대, 용진진, 광성보, 연미정 등을 선을 잇듯이 연결한다. 강화읍 풍물시장은 할머니들이 산에서 캐온 봄나물과 각종 농작물이 풍성해 옛날 장터를 연상시킨다. 아르미애월드(불은면 삼성리)는 강화약쑥 테마공간으로 다양한 약쑥 제품을 팔고 약쑥을 이용한 체험장, 도자기체험실 등을 운영한다. ●석모도·초지리 매화마름 군락지도 찾아볼 만 최고(最古)의 절인 전등사와 보문사도 찾아볼 만하다.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건립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절로 알려졌다. 보문사는 외포리 선착장에서 여객선으로 10여분 거리에 자리잡은 석모도에 있는데 우리나라 3대 기도성지로 꼽힌다. 강화갯벌은 독일·네덜란드 연안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평가된다. 저어새, 노랑부리백로, 검은머리물떼새 등 세계적인 희귀 조류의 서식지다. 초지리 매화마름군락지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람사르습지(3000㎡)로 멸종 위기에 처한 매화마름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조성했다. 볼거리의 궁합은 먹거리다. 강화도의 상징이 땅에서는 인삼, 순무라면 바다에서는 밴댕이다. 남쪽에서부터 연안을 따라 올라오는 밴댕이는 맛이 광어, 우럭에 뒤지지 않는 데다 값도 저렴하다. 갯벌장어는 갯벌을 막아서 만든 어장에서 생산된다. 흙냄새와 비린내가 거의 없는 데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은 양식장어와 비교할 수 없다. 자연산보다 맛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육질과 맛을 비교할 때는 소금구이로 확인해야 한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커버스토리] “김정은·리설주 사치품으로 칠갑” “백세까지 산다고 북한에 전해라~♪”

    우리 군 당국이 8일 재개한 대북 확성기 방송의 내용은 주로 김정은 체제의 실상을 고발하고 남한의 자유로움을 홍보해 북한군 신세대 장병들의 동요를 일으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 군은 특정 시간을 예측할 수 없게 불규칙적으로 방송하는 ‘치고 빠지기식’ 전술로 혼란을 극대화한다는 방침이다. 이날 방송된 대북 심리전 프로그램 ‘자유의 소리’ 방송에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문란한 사생활과 여성 편력을 폭로하는 내용의 라디오드라마 ‘호위 사령부 25시’가 포함됐다. 이 드라마에서 김 위원장은 권력을 이용해 부하의 아내를 뺏는 호색한으로 묘사된다. 특히 방송에 포함된 탈북자와의 대담 프로그램에서는 “독재자 김정은, 리설주 부부는 최소 수만 달러가 드는 사치품을 온몸에 칠갑하고 다닌다. 김정은의 딸을 위해 독일산 분유를 수입하고 심지어 애완견용 샴푸까지 프랑스에서 사 온다”는 등 김씨 일가 사생활에 대한 폭로를 여과 없이 내보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북한 동포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싫은 비밀이라는 게 있죠? 하지만 독재국가에서는 그런 인간의 본능까지도 통제하는데요”와 같이 북한을 개인의 사생활을 무시하는 독재국가로 묘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중부전선의 한 대북 확성기에서는 이날 “북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새해를 맞아 건강을 위해 금연을 결심한 분들 계실 텐데요, 최근 금연 결심을 더 굳게 해 줄 소식이 있습니다”라며 북한의 높은 흡연율을 빗대 방송을 시작했다. 군 당국은 특히 세상 물정 모르고 갓 입대한 북한 신세대 장병들을 동요시키는 데 남한의 최신 가요도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 방송에는 ‘~라고 전해라’라는 노랫말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애란의 ‘백세인생’을 비롯해 걸그룹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 에이핑크의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등의 노래가 포함됐다. 반면 북측이 이날 북한군 장병들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듣지 못하도록 내보낸 교란 방송은 스피커 성능이 떨어져 남측에서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군은 북한과 불과 2.5㎞ 떨어져 있어 포격 도발 시 우리 측 주민 피해가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서부전선의 교동도 지역에는 이날 방송을 틀지 않고 방송 횟수도 최소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韓국방 “유출된 내부 문서 개인 작성… 김관진 실장과는 그런 관계 아니다”

    8일 국회 국방위원회의 종합 국정감사에서는 지난해 외부로 유출된 국방부 문건<서울신문 10월 8일자 1면> 가운데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보내진 인사 관련 투서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군 내부 동향을 담은 정보보고 문서가 포함됐다는 언론 보도가 논란을 빚었다. 한 장관은 국감에서 “김 실장이 비선을 통해 한 장관의 동향을 보고받았다는 기사가 났는데 사실이냐”는 새누리당 송영근 의원의 질문에 “실장과 저 사이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라며 “외부로 유출된 정보보고 문서는 군인이 아니고 정책보좌관 명함을 가진 일반인이 그렇게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 권은희 의원이 “해당 문건을 비롯해 비밀자료나 보안자료가 유출됐으나 일부만 조사한 것 아니냐”고 지적한 데 대해서는 “군에서 생산한 비밀자료나 보안자료는 조사했지만 조사 안 한 문건은 개인이 작성한 사견에 불과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과 관련해서는 방위사업청의 늑장 보고 논란과 청와대 책임론이 제기됐다. 장명진 방사청장은 “미국이 4개 핵심기술 이전 거부를 지난 4월 방사청에 통고했음에도 6월에야 청와대에 보고됐다”는 새정치연합 윤후덕 의원의 지적에 “대안 마련에 시간이 필요해 보고가 늦어졌다”고 해명했다. 같은 당 진성준 의원은 “차기 전투기가 미국 보잉의 F15SE로 유력시됐다가 당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의 ‘정무적 판단’으로 탈락한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면서 “한국형 전투기 사업 위기의 주범은 청와대”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 장관은 “당시 F35를 선택한 게 잘못된 결정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한 장관은 “북한이 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뭔가 쏘겠다고 예고했는데 징후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북한이 (장거리 로켓 발사장이 있는) 동창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단거리 발사체를 발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상훈 해병대사령관은 새정치연합 안규백 의원의 관련 질의에 “최근 북한 민간인 1명이 귀순했다”면서 “대공 용의점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은 지난달 말 북방한계선(NLL) 인근 강화 교동도 앞바다로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강윤혁 기자 yes@seoul.co.kr
  • 국내여행 | 숱한 시간의 흔적 교동도

    국내여행 | 숱한 시간의 흔적 교동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걸까?소곤소곤 들려오는 교동도의 옛 향기에 차분히 집중했다.디디는 발걸음마다 애틋해진다.비로소, 한 발 더 가까이 멀게만 느껴졌던 교동도가 가까워진 지 벌써 1년이다. 섬에 들어가기 위해 강화도에서 배를 타야만 했던 불편이 지난해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해소되는 듯했다. 하지만 교동도는 연백평야까지 불과 3.2km인 민통선(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속한다. 자국민일지라도 신분증을 검사받는 등 군부대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외부인은 일출 전 30분부터 일몰 후 30분까지만 교동대교를 통행할 수 있었다. 반가운 소식은 지난 6월부터 방문객에게 교동대교를 자정까지 연장해 개방한다는 것. 비로소 교동도에 한 발 더 가까워진 셈이다. 주민들에게 24시간 통행이 허용된 것도 지난 6월 초부터였으니 교동대교의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구름에 뜬 섬’이라는 뜻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다. ‘하늘에 닿을 새’라는 의미로 달을신達乙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강화 나들길의 교동코스 중 하나인 ‘다을새길’은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의 이름을 따서 탄생했다. ‘나들길’이란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으로 1906년, 화남 고재형 선생이 강화도의 유구한 역사와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며 걸었던 강화의 끊어진 길을 연결했다. 총 19개의 코스, 20개 구간으로 310.5km에 이른다. 이 중 교동도에는 2개의 코스, ‘다을새길’과 ‘머르메 가는 길’이 있다. 월선포를 출발하여 교동향교, 화개사, 화개산 정상, 석천당, 대룡시장, 남산포, 교동읍성, 동진포를 둘러보는 9코스(교동 1코스)는 약 16km. 장장 6시간이 걸리는 걸음이었지만 애틋하기만 했던 교동도 이야기.화개산 아래로 보이는 시간의 흔적 비가 제법 잦아들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해발 259.6m로 비교적 낮지만, 교동도에서는 가장 높은 화개산을 오르기에 선선한 날씨다. 오르는 내내 눈에 들어오는 푸름과 중턱에서 보이는 교동도의 모습이 정상을 더욱 기대하게 한다. 다소 가파르지만 속도가 더디어도 곳곳에서 소곤소곤 들리는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화개산 약수터, 화개산성의 외성과 내성의 북벽이 교차하는 지점인 북벽망루北壁望樓, 자연숭배 신앙의 흔적으로 보이는 성혈바위 등 볼거리가 쏠쏠하기 때문.정상에 다다르자 한 장의 정지된 사진을 보는 듯 모든 것이 멈춰 있는 풍경과 마주한다. 드넓은 교동평야 뒤로 섬들과 산이 교차하여 내다보인다. 교동도에는 논이 약 2,640만 평방미터, 밭이 660만 평방미터로 모두 3,300만여 평방미터의 농경지가 자리한다. 간척사업을 통해서 농경지가 마련된 것으로 강화도에서 경작지 면적이 가장 넓고, 호당 경지면적도 가장 넓다. 동쪽 교동대교를 시작으로 오른쪽으로 조금씩 눈을 돌리면 석모도, 상주산, 남산포, 기장섬, 주문도, 미법도, 서경도를 차례대로 음미할 수 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지도상의 ‘말도’는 눈으로 짚어지지 않았다. 반대쪽으로 발길을 돌리다 보면 서북쪽 휴전선 너머로 너무 가까워 믿기 힘들 정도의 거리에 황해도 연백평야가 뿌옇게 펼쳐져 있다.교동도는 연산군 유배지로 유명한 섬이기도 하다. 고려 희종,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폐비 류씨, 익평군, 영선군, 은언군 등 이곳으로 많은 왕과 왕족, 귀족이 유배됐다고 한다. 교동도는 ‘돌아오지 않는 섬’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있는데, 유배당한 이들 대부분이 이곳을 빠져나오지 못해 얻은 호칭이다. 하지만 옛날 사적은 물론 유배지도 분명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아 전설과 추정으로만 전해지고 있다.조선시대 선조들도 찜질방을 즐겼던 걸까. 연산군 유배지로 추정되는 화개산 서쪽 자락에는 돌무덤으로 보이는 한증막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만들어져 1960년대까지도 간간이 사용했을 거라 추정된다고 한다. 화개산은 이 모든 역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인 셈이다.그 많던 제비는 대룡시장에 있었다 옛것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 있다고 소문나면 너도나도 그 모습을 담아 오려고 애쓴다. 교동대교가 들어서기 전 대룡시장은 그런 이들에게 호기심과 정복의 대상이었다. 1960~70년대의 영화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 같은 골목은 옛것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물들지 않은 역사 그대로의 모습이다. 연백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는 연백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으로 활기도 잃고 촌스럽지만 정겹고 순박하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실향민들 때문인지 아련한 공기가 감돈다. 그나마 몇 개 남지 않은 점포들이 있는 시장을 둘러보려면 10분도 넉넉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을 느리게 또 느리게 둘러본다. 2명이 오갈 수 있을 법한 좁은 골목도 한산하다. 관광객보다 주민을 마주치는 일이 더 어려울 정도로 적막하다. TV를 통해 그나마 낯익은 교동이발관, 동산약방, 거북당이 외지인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뿐.고요함을 뚫고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제비다. 애잔한 실향민들의 보살핌으로 매해 둥지를 틀었나 보다. 처마 밑 곳곳에 제비집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운 좋게 새끼 제비들이 있는 둥지를 찾았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담자니 미안한 마음이다. 새끼 제비가 불안하지 않게 거리를 유지해 주어야 할 것 같다.최신식으로 보태어 꾸미지 않아 더욱 소중했고 어디를 둘러봐도 옛것 그대로의 교동도다운 모습을 담아 올 수 있어서 뜻깊다.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교동도에서는 따스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학문적인 지식은 조금 흘려 지나도 괜찮다. 멈춰 있는 시간에 다가갈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있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는 자연이 기다리고 있으니.▶travel info 교동도인천유형문화재 28호 교동향교 가장 오래된 향교 중 하나인 교동향교喬桐鄕校는 고려 인종5년(1127년)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17년(174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고려 충렬왕12년(1286년) 당시, 안유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을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제사와 교육의 공간이 결합해 있는 향교에서는 매년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기 위한 ‘석전제釋奠祭’ 행사가 펼쳐진다. 8월 말까지 교동향교 내 전통건축물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인천기념물 23호 교동읍성화개산 남쪽의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은 조선조 인조7년(1629년) 수영이 설치되었을 때 축조된 것으로 도읍 전체를 둘러싸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아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 높이는 약 6m로 동, 남, 북에 3개 성문이 있었다. 현재는 반원 형태의 남문인 홍예문만 남아있다.교동 정미소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삼선리 교동 정미소는 부부가 20년 넘게 운영하는 교동도에서 가장 오래 된 방앗간이다. 대룡시장의 모습처럼 옛 자취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평균 350가마를 찧는데, 쌀이 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모두 지켜볼 수 있다. 전기 대신 아직도 기름으로 모터를 돌려 쌀을 찧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교동도는 섬임에도 불구하고 논과 밭이 많고 벼농사가 발달했다. 축산농가가 없어 맑고 깨끗한 농업용수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북로 183 삼선리정미소 032 932 1887강화 교동 나들길 여행상품DMZ와 접경지역 10개 시·군을 대상으로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DMZ관광주식회사(대표 장승재)에서 교동대교 1주년 기념으로 출시한 교동도 당일여행 관광상품. 나들길 화개산과 연계한 교동문화 중심의 A코스와 역사 문화 농촌 관광자원 중심의 B코스로 운영될 예정이다. 7월부터 매주 주말 출발하며 단체의 경우 주중 출발도 가능하다.02 706 4851 www.dmztourkorea.com 3만3,000원에디터 손고은 기자 글·사진 Travie writer 유리취재협조 DMZ관광주식회사 www.dmztourkorea.com☞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침묵을 깨고 마주하라 그날의 역사적 진실을

    침묵을 깨고 마주하라 그날의 역사적 진실을

    A는 길가에 핀 들꽃 앞에 발걸음을 멈춰 바라보며 꽃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다. 집에서 기르는 다친 오리에게 “많이 아프지? 미안해”라고 손주에게 말하도록 가르치는 시골 마을의 순박해 보이는 촌부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늘 기도를 올리며 경건한 삶을 유지한다. 다만 50년 전 ‘그 사건’에 대한 질문 앞에선 다른 사람이 된다. 때로는 껄껄대며 신나게 그 추억을 재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청이 높아진다. B는 안경사다. 마을을 다니며 눈이 나쁜 노인들에게 안경을 맞춰 준다. 그는 ‘그 사건’으로 형 ‘람리’가 죽은 뒤에 태어났다. ‘그 사건’의 충격과 공포는 아버지의 기억을 과거로 돌려놨고, 어머니는 늘 형을 그리워했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형의 죽음에 대해 의문과 슬픔,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가슴속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억누르는 데 더욱 익숙하다. 50년 전 군인이었거나 ‘프레만’으로 명명되던 마을의 폭력배였던 A는 중씰한 늙은이가 됐거나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A는 한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현재 시장이고, 주지사고, 정부의 장차관이고, 신문 발행인이고, 학교 교사다. B-람리의 동생 ‘아디’-는 A를 찾아다니면서 안경을 맞추고 시력을 교정해 주며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묻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영화 ‘침묵의 시선’이 다루고 있는 ‘그 사건’은 인도네시아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1965년 10월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노동조합원, 소작농 협동조합원, 지식인, 화교 등이 학살의 주된 대상이었다. 람리는 그때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는 여전히 대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만 있을 뿐이다. 가해자의 처벌 혹은 사과 등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피해자의 가족들로서는 사실관계에 대해 궁금증을 품는 것 자체가 결연한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낯설지 않은, 기시감 가득한 풍경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친일파가 반공투사로 포장돼 숱한 악행을 정당화하며 기득권을 유지해 왔고, 피해자는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워 피해 사실조차 쉬쉬하며 숨죽여 흐느껴 왔다. 1950년대 3만명이 학살된 제주도가 그랬고 경남 거창, 충북 영동군 노근리, 강화 교동도, 전남 구례, 경북 경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공을 이유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진실의 일단이 밝혀진 건 십수년 전 일이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같은 사건을 다뤘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으로 전 세계 국제영화제에서 70여개 상을 수상했다. ‘침묵의 시선’ 역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것을 비롯해 40여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전작이 뒤틀린 역사 뒤에 남겨진 인간들의 윤리 가치 체계가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를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를 섞어서 보여 줬다면, ‘침묵의 시선’은 폭력이 남긴 깊은 흔적을 대면하는 각기 다른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영화는 가해자들의 형해화한 도덕에 주목한다. 그때 목을 어떻게 졸랐고, 칼을 어떻게 찔렀는지 말하다가 “그런데 왜 자꾸 그런 것을 묻지?”라며 피해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저 묻어 두라는 얘기를 이내 이어 간다. “100만명이 죽었지만 그렇게 큰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 “공산주의자는 죽일 수밖에 없었지”, “지금이 그때라면 자네는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지난 일은 잊어요. 그때를 교훈 삼아 잘 지내면 되죠” 등등. 피해자들 역시 진실과 마주 보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사유는 다르다. 그들의 뒤에는 각각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여전한 공포가 남아 있다. 개봉을 앞두고 지난주 방한한 오펜하이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며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다거나 그만하라고 하지 말고 내 작품을 계기로 계속해서 질문하고 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가 모두 끝난 뒤 엔딩크레디트에 표기된 조연출, 공동 제작, 촬영, 장소 협조 등 제작 관련 스태프들의 이름은 거의 대부분이 ‘익명’(anonymous)이다. 공포는 현재진행형이다. 3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반공’이란 명분아래 100만명이 학살된 사건의 진실은?

    ‘반공’이란 명분아래 100만명이 학살된 사건의 진실은?

    A는 길가에 핀 들꽃 앞에 발걸음을 멈춰 바라보며 꽃향기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다. 집에서 기르는 다친 오리에게 “많이 아프지? 미안해”라고 손주에게 말하도록 가르치는 시골 마을의 순박해 보이는 촌부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늘 기도를 올리며 경건한 삶을 유지한다. 다만 50년 전 ‘그 사건’에 대한 질문 앞에선 다른 사람이 된다. 때로는 껄껄대며 신나게 그 추억을 재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동자가 흔들리고 목청이 높아진다. B는 안경사다. 마을을 다니며 눈이 나쁜 노인들에게 안경을 맞춰준다. 그는 ‘그 사건’으로 형 ‘람리’가 죽은 뒤에 태어났다. ‘그 사건’의 충격과 공포는 아버지의 기억을 과거로 돌려놨고, 어머니는 늘 형을 그리워했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형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슬픔, 분노를 품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가슴 속 감정을 드러내기보다는 억누르는 데 더욱 익숙하다. 50년 전 군인이었거나 ‘프레만’으로 명명되던 마을의 폭력배였던 A는 중씰한 늙은이가 됐거나 더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A는 한 사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현재 시장이고, 주지사고, 정부의 장·차관이고, 신문 발행인이고, 학교 교사다. B-람리의 동생 ‘아디’-는 A를 찾아다니며 안경을 맞추고 시력을 교정해주며 ‘그 사건’의 진실에 대해 묻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영화 ‘침묵의 시선’이 다루고 있는 ‘그 사건’은 인도네시아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1965년 10월 반공을 명분으로 100만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노동조합원, 소작농 협동조합원, 지식인, 화교 등이 학살의 주된 대상이었다. 람리는 그때 같은 마을사람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는 여전히 대학살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리만 있을 뿐이다. 가해자의 처벌 혹은 사과 등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피해자의 가족들로서는 사실 관계에 대한 궁금증을 품는 것 자체가 결연한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낯설지 않은, 기시감 가득한 풍경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친일파가 반공투사로 포장돼 숱한 악행을 정당화하며 기득권을 유지해왔고, 피해자는 빨갱이로 몰릴까 두려둬 피해사실조차 쉬쉬하며 숨죽여 흐느껴왔다. 1950년대 3만명이 학살된 제주도가 그랬고, 경남 거창, 충북 영동군 노근리, 강화 교동도, 전남 구례, 경북 경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공을 이유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진실의 일단이 밝혀진 건 십 수년 전 일이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같은 사건을 다뤘던 전작 ‘액트 오브 킬링’으로 전세계 국제영화제에서 70여개 상을 수상했다. ‘침묵의 시선’ 역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것을 비롯해 40여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다. 전작이 뒤틀린 역사 뒤에 남겨진 인간들의 윤리 가치 체계가 어떻게 전복될 수 있는지를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를 섞어서 보여줬다면, ‘침묵의 시선’은 폭력이 남긴 깊은 흔적을 대면하는 각기 다른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영화는 가해자들의 형해화한 도덕에 주목한다. 그때 목을 어떻게 졸랐고, 칼을 어떻게 찔렀는지 말하다가 “그런데 왜 자꾸 그런 것을 묻지?”라면서 피해자를 빤히 쳐다본다. 그리고 그저 묻어두라는 얘기를 이내 이어간다. “100만명이 죽었지만 그렇게 큰 죄는 아니라고 생각해.”, “공산주의자는 죽일 수밖에 없었지.”, “지금이 그때라면 자네는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몰라.”, “지난 일은 잊어요. 그때를 교훈삼아 잘 지내면 되죠.” 등등. 피해자들 역시 진실과 마주보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사유는 다르다. 그들의 뒤에는 각각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믿음이 있거나 여전한 공포가 남아 있다. 개봉을 앞두고 지난주 방한한 오펜하이머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면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다거나 그만하라고 하지 말고 내 작품을 계기로 계속해서 질문하고 진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가 모두 끝난 뒤 엔딩크레디트에 표기된 조연출, 공동제작, 촬영, 장소협조 등 제작 관련 스태프들의 이름은 거의 대부분이 ‘익명(anonymous)’이다. 공포는 현재진행형이다. 3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문화 유랑기] ‘악정’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창경궁-마포-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문화 유랑기] 연산군의 마지막 길 48번 국도 ‘창경궁-신촌-마포-통진-강화-교동’

    -4박 5일 동안 간 연산의 마지막 행로 연산군 하면 당장 떠오르는 단어 하나가 ‘폭군’이다. 조선조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 군왕은 광해군과 연산군 둘뿐이다. 특히 연산군은 광해군과는 달리 무엇 하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것이 없는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조선의 네로라고나 할까.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대로 믿을 것이 못되는지,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 동네에 일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이 열아홉에 보위에 오른 연산이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하루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는데, 창경궁에서 출발, 강화를 지나 교동도의 적소(謫所)로 들어가기까지 한 인간의 극적 반전의 전모를 보여주는 4박5일 마지막 행로를 따라가본다. 연산은 악정으로 인심을 잃었다. <조의제문> 사건과 연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의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고,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자신을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자신은 팔도의 미녀들을 흥청이란 이름으로 뽑아올리게 하여 주지육림 속에 나날을 보냈다. 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경복궁을 접수, 거사를 성공시켰다. 이후 거사의 마무리 수순이 진행되었다. 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무기제조창. 현 프레스센터 자리) 앞에서 목을 베었다.”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는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나뉘어 각처로 귀양갔다가. 9월 24일 모두 사사되었다.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진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도 있었다. 이날 연산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그는 먼저 박원종의 반정군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당했다. 곧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하라는 영이 떨어졌다. 위리안치란 가시울이 쳐진 집안에다 죄인을 가두고 밥만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그런 연유로 위리안치처는 '산 자의 무덤'이라 했다. 폐주는 궁궐에 하룻밤도 머물 수 없는 법.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야 했다. 귀양길에 오르기 위해 연산은 갓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은 모습으로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특별히 임금의 은혜를 입어 무사히 가게 되었습니다.” 연산은 시인이었다. 모두 125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무려 108편이 집권 마지막 3년 동안에 씌어졌다.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쓴 것 같은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아침만 해도 왕으로 눈을 뜬 연산이지만,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도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라, 얼굴은 백짓장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자신의 생사관은 돌보지 못한 모양이다. 부인 신씨는 남편의 유뱃길에 따라나서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세력은 허락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가시 집으로 해는 서녘으로 기울고 있다. 서산낙일이다. 교동이라면 나라땅의 서쪽 끝이다.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서 머물 수 없다. 해가 설핏할 무렵, 연산이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타고 창경궁 동남문인 선인문을 나올 때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거리에 몰려나온 백성들이 다투어 손가락질하며 폐주를 욕했다. 그날은 이미 저물어 먼 길을 떠날 수 없는 터라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하기로 한다. 연산이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다. 거기서 하룻밤 보내는 연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루아침에 왕좌에서 내쫓기고 어린 자식들을 다 사지로 몰아넣은 회한에 거의 실성하지 않았을까. 연산의 유배 행로를 추측해보면, 연희궁을 떠난 평교는 마포로 접어드는 길을 따라가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의 한강은 서강(西江) 또는 서호(西湖)라고도 하며,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으로서는 참 사연 많은 양화나루인 셈이다. 이 서강을 건너 그 다음 짚어갔을 노선은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대체로 지금의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네 명의 교꾼이 메는 평교는 그리 속도를 못 내 이튿날 밤은 김포에서 유숙하고, 다음은 통진, 강화에서 각각 묵었다. 4박 5일의 여정이다. 통진에서는 관아에서 묵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진에서 묵은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가 빤히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이다. 구 강화대교가 있는 자리다. 이름은 강이나 기실은 해협이다. 폭은 좁으나 물살이 세어, 고려를 침공했던 몽고군도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이다.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연산의 평교는 어느 길을 따라 교동도로 들어가는 배를 탔을까? 교동으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이다. 연산의 평교도 틀림없이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놓이기 전 교동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그룻배를 탔다. 그날은 특히 파도가 사나워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차라리 연산에겐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4박5일 동안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을 짚어 교동 고을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땅에 엎드린 채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탱자나무 울타리가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가옥 안에 갇혀졌다. 작은 문 하나로 음식만 들일 수 있을 뿐, 해를 구경할 수 없는 감옥이다. 적소에 안치되기까지 연산의 모습을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안치한 곳에 이르니, 위리한 곳이 몹시 좁아 해를 볼 수 없었고, 다만 한 개의 조그마한 문이 있어서 겨우 음식을 들여보내고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연산군을 비롯해 세종의 3남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이처럼 왕족들을 주로 교동에 유배시킨 것은 도성에서 가까워 감시하기가 좋다는 점, 그러면서도 사나운 조류로 인해 완전한 격리가 가능하다는 이점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동도의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에 자리한 유배지는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 곳이었다. 위치가 산의 서사면이어서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막한 감이 드는 여기서 연산은 그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이다.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적소의 산봉과 바위들은 아마 그때 시녀들의 호곡소리와 연산의 고음을 들었을 것이다. -유폐 두 달 만에 숨져 연산의 귀양살이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리안치된 지 두 달 만인 11월 6일, 물도 못 마시고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중전이 보고 싶구나.” 연산이 역질로 죽었다는 데 대해 의문을 갖는 사람도 없지 않다. 11월(음력)이면 겨울인데 무슨 역질인가, 필시 독살이다는 의혹이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왕좌와 처자식들을 모두 잃고 31살 나이에 가시울타리 집안에 갇힌다면 독을 먹지 않아도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의 시신은 교동땅에 묻혔다가 몇 년 후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지금의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되었다. 반정으로 남편과 두 아들, 두 오라비를 모두 잃어버린 신씨는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살아 있을 때 그토록 많은 여인들을 거느렸건만, 죽어서 끝까지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한 사람이었다. 숨지기 전 연산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가 마침내 자기 옆에 유택을 마련해 들어왔을 때, 지하의 연산은 생전의 부인 모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되뇌어 보지나 않았을까.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人生如草露)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會合不多時)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軍도 ‘가뭄과의 전쟁’

    軍도 ‘가뭄과의 전쟁’

    해병대 제2사단 장병들이 11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급수차를 이용해 가뭄 피해를 겪고 있는 논에 긴급 급수지원을 하고 있다. 해병대는 이날 급수차 5대와 병력 30명을 동원했다. 해병대 제공
  • [新국토기행] (15) 인천 강화군

    [新국토기행] (15) 인천 강화군

    ■ 한민족의 ‘지붕 없는 박물관’ 인천 강화군은 섬 도처에 역사문화재가 있어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최대 고인돌군이 있을 뿐 아니라 고려시대 몽골 침입에 항전하고 조선 말 무력으로 개화시키려는 외세를 온몸으로 맞닥뜨린 곳이어서 선사시대부터 중·근세까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게다가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가면 푸른 바다와 멋진 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점, 남도 못지않게 다양한 향토음식, 문화재를 끼고 도는 도로망 등은 강화를 수도권 최대의 문화관광지로 인식시키는 데 부족함이 없다. ●강화산성·해안순환도로… 북녘 땅까지 보이는 연미정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둘러싼 석성으로 1232년 고려가 몽골 침입에 대비, 만든 뒤 개·증축을 거듭했다. 북산에서 시작해 동쪽의 견자산으로 연결되는 7.12㎞의 산성이다. 해안순환도로는 강화읍 대산리~길상면 섬암교 21.1㎞ 구간으로 해안 군사시설인 덕진진, 초지진, 갑곶돈대, 용진진, 광성보, 연미정 등과 연결된다. 덕진진은 강화 외성의 요충지로 1656년 지어져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연미정은 조선과 청이 형제의 맹약을 맺어 병자호란까지 이어진 비운의 역사를 안고 있다. 이 정자에 오르면 북한 개풍군이 한눈에 들어온다. ●5일장 열리는 풍물시장·아르미애월드(강화약쑥특구) 강화읍 풍물시장은 2, 7자가 들어가는 날에 5일장이 열려 할머니들이 뒷산에서 캐온 나물이며 각종 농작물이 풍성하게 나와 옛날 장터를 연상시킨다. 가격 흥정하는 재미와 강화해역에서 잡은 싱싱한 회를 즐길 수 있다. 외곽으로 옮긴 뒤에는 사실상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아르미애월드는 강화약쑥 테마공간으로 불은면 삼성리 농업기술센터에 5만 2976㎡ 규모로 조성됐다. 다양한 약쑥제품 등을 팔고 약쑥을 이용한 체험장, 도자기체험실도 운영한다. ●最古의 절 전등사·보문사 전등사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건립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절로 알려졌다.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있는 전등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역사가 압축된 전통의 보고와 같다. 1678년부터 조정의 실록을 보관하면서 사고(史庫) 기능을 담당했으며 보물 178호 대웅전과 179호 약사전, 393호 범종 등 문화재도 많다. 보문사는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서 20여분 여객선을 타고 석모도로 가면 낙가산 서쪽 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있다. 우리나라 3대 기도성지로 꼽힌다. 절 뒤편에 마애석불이 있으며 그 앞으로 보이는 서해 풍광도 일품이다. ●때묻지 않은 교동도 교동도는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이 보존돼 있다. 지난해 7월 강화도를 잇는 3.4㎞의 연륙교가 개통돼 자동차로 갈 수 있다. 군부대 검문을 거쳐야 하고, 통행시간이 제한되는 불편이 있지만 청정지역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북한 모습이 코앞에 펼쳐진다. 대룡시장은 1960∼70년대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장이 서게 됐다고 한다. TV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에 소개돼 조금 유명해졌다. ●세계 5대 갯벌 강화갯벌·습지 강화갯벌은 독일·네덜란드 연안 갯벌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평가된다. 저어새, 노랑부리백로, 검은머리물떼새 등 세계적인 희귀 조류의 서식지다. 인천시 연구자료에 따르면 강화갯벌 1㏊의 경제적 가치는 1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지리 매화마름군락지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람사르습지로 3000㎡ 규모다. 경지 정리로 멸종 위기에 처한 매화마름을 보호하려고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민을 설득하고 성금을 거둬 확보했다. 꽃은 물매화를 닮고 잎은 붕어마름을 닮아 매화마름이란 이름이 붙어졌으며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한 수생식물이다. ●영험한 마니산·함허동천 마니산(472m)은 국내 산 중 기가 가장 센(?) 산으로 알려져 새해 첫날 새벽에는 기를 받으려는 행렬이 이어진다.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높이 6m의 돌로 된 제단으로 단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고려 이전이란 설도 있다. 마니산 서쪽 기슭에 있는 계곡 함허동천은 길이 200m에 달하는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는 데다 수풀이 우거져 경관이 빼어나다. 특히 유명한 야영장은 계곡을 따라 500여m에 걸쳐 있는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바다가 널러 보이는 등 경관이 좋고 한적하다. 텐트를 300개가량 칠 정도로 규모가 크고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사시사철 인기다. 입장료는 1500원, 1박에 1만 8000원이며 선착순이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해산물·인삼 등 먹거리의 보고 ●광어·우럭에 뒤지지 않는 맛 밴댕이 강화도 상징이 땅에서는 순무, 인삼이며 바다에서는 밴댕이다. 남쪽에서부터 연안을 따라 오르는 밴댕이는 5월 중순부터 6월까지 강화 앞바다에서 잡힐 무렵이 가장 맛이 좋고 영양가도 풍부하다. 회로 먹으면 고소한 맛이 광어·우럭에 뒤지지 않는 데다 값도 저렴하다. 잘 토라지는 사람을 ‘밴댕이 소갈딱지’라 부르는 것은 밴댕이의 특성에서 비롯된 말이다. 워낙 성질이 급해 뭍에 오르기도 전에 그물에서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젓갈로 담가 먹었으며 뱃사람들만 회로 먹었다. ●민물·바닷물 만나 장어 유명 갯벌장어는 강화갯벌을 막아서 만든 어장에서 생산된다. 서·남해안의 양식장에서 작은 장어를 구입해 75일 이상 길러 자연산화시킨다. 강화도는 한강·임진강·예성강의 하구에 있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으로 예로부터 자연산 장어산지로 유명했다. 갯벌장어는 흙냄새와 비린내가 거의 없다. 고소한 맛과 담백한 맛은 양식장어와 비교할 수 없다. 자연산보다 맛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육질과 맛을 비교할 때는 소금구이로 확인해야 한다. ●생육조건 뛰어난 청정미 강화쌀 강화쌀은 오염되지 않은 토양과 농업용수, 지리적 여건 등이 복합 작용해 생산된 청정미로 밥에 윤기가 돌고 맛과 영양가가 뛰어나다. 강화쌀이 맛과 저장성 등에서 명성을 날리는 가장 큰 요인은 쌀의 생육여건이 다른 지역보다 특이해서다. 산성비 오염도가 전국에서 제일 낮은 데다 오염되지 않은 농업용수만 사용한다. 강화지역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큰 산이 없어 일조량이 많다. 사시사철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고 간척지 농토에서 재배돼 건강요소 함량이 높다. 마그네슘과 미네랄이 풍부, 밥이 쫀득쫀득하고 식어도 맛있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 쑥보다 약효 높은 사자발약쑥 강화 곳곳에서 자생하다 1990년대 말부터 농가에서 소득작물로 키우기 시작해 290여개 농가, 58㏊에서 재배한다. 생김새가 사자 발 모양이어서 사자발약쑥이라 부른다. 해풍과 해무를 맞고 강화 특유의 사질황토(모래가 섞인 황토)에서 자라 일반 쑥보다 약효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뇨, 비만을 방지하고 암세포 증식을 억제하고 고지혈증·위장병 개선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잎과 뿌리, 줄기는 각각 다른 효능을 가진 성분이 함유돼 쑥뜸, 쑥차로도 애용된다. 봄에 캐 3년간 숙성시킨 게 가장 약효가 좋다고 한다. ●비타민 함유량 높은 순무 강화순무는 예로부터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해서 ‘밭의 화장품’이라 불렸다. 맛이 고소하고 비타민 함유량이 높아 소화 촉진 효과가 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이뇨와 소화에 좋고 눈·귀를 밝게 하며 황달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기록됐다. 순무를 그냥 먹으면 다소 맵지만 김치를 담그면 매운맛이 사라지고 일반 무김치보다 아삭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강화에 가면 순무로 만든 김치를 거리에서 직접 판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도 소문난 강화인삼 효능 강화인삼은 중국에서조차 가장 품질이 좋은 인삼으로 쳐주는 고려인삼의 맥을 잇는다. 강화는 해풍이 깃든 특수한 기후와 풍토 등으로 인삼 재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때문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6년근이 재배되며, 육질이 단단하고 향이 강한 데다 인삼의 주성분인 사포닌이 풍부하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교동도는 은둔의 섬이었다. 인천 강화도를 거미줄처럼 잇던 도로들도 바다 너머 교동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 데도 그랬다. 요즘엔 달라졌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 교동대교가 놓였다. 그 덕에 여행 목적지도 북녘땅 가까운 곳까지 한껏 확장됐다. 다리가 놓이기 전, 외부 세계와 단절되다시피 했던 교동도엔 그 간극만큼이나 남아 있는 보물들이 많다. 낡고 수수한 풍경을 따라 겨울 볕 즐기기 딱 좋다. ●도로가 닿지 못하던 곳… 대교 생기며 뭍에 편입 강화도 서쪽 끝. 걸어서는 갈 수 없었던 곳으로 다리가 놓였다. 길이 3.44㎞에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대교다. 이 다리 덕에 바다 너머 교동도가 자연스레 뭍으로 편입됐다. 예전엔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교동도로 들어와야 했다. 그나마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는 서너 시간씩 배 운항이 정지됐고, 물이 덜 찼을 땐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까지 15분이면 닿을 뱃길을 1시간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섬이 교동도였다. 교동대교 앞에 서면 강 양쪽으로 철조망이 펼쳐져 있다. 북녘땅이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다. 교동도 서단의 말탄포에서 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까지는 직선거리로 2㎞ 정도에 불과하다. 바다 폭이 좁으니 북한 주민이 헤엄쳐 넘어와 귀순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지난여름에도 북한 주민 2명이 그랬다. 이처럼 북한과 가깝다 보니 교동도 전체가 민통선 지역이다. 당연히 출입절차도 마련돼 있는데,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출입신청서와 신분증만 제출하면 된다. 다만 출입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기준이다. 검문소 초병은 “오후 6시 30분 이전에 나와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익일(다음날) 오전 6시 30분 이후에나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말은 그렇다지만, 설마 늦었다고 섬에서 나오는 걸 막으랴. 한데 초병의 다부진 자세로 미뤄보건대,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생각했다간 꼼짝없이 하룻밤을 묵는 낭패를 당하지 싶다. ●‘철새 놀이터’ 고구저수지·교동읍성 등 명소 교동대교를 건너면 길은 곧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고구리, 왼쪽은 읍내리 방면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고구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섬을 한 바퀴 도는 게 일반적이다. 다리 건너 만나는 첫 번째 명소는 고구저수지다. 수도권 낚시인들 사이에서 ‘대물터’로 입소문 난 곳이다. 겨울이면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도시 사람들은 흔히 섬사람들이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갈 것처럼 생각한다. 한데 교동도는 넓다.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특히 삼선리 일대 개시미벌을 보면 생각이 싹 바뀐다. 들녘이 어찌나 너른지, 꼭 전북 김제의 만경평야를 보는 듯하다. 지금은 강화군에 딸린 면소재지로 전락했지만 옛 교동도는 독립된 군현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교동현(喬桐縣)이었다가 인조 7년(1629)엔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다. 강화군에 완전히 병합된 건 일제강점기인 1914년이다. 교동도 남쪽의 남산포엔 삼도수군통어영도 있었다. 경기, 황해, 충청도의 해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한반도가 두 동강 나지 않았다면, 사실 수군의 중심지가 되기에 적합한 위치가 교동도다. ●근대사 풍경, 밀려든 관광객에 얼마나 지켜질지 교동도에 들면 시간이 묻혀 있다는 걸 단박에 느끼게 된다. 가까운 근대사와 옛 고대사가 뒤섞여 있는 느낌이다. 교동대교가 세워진 이후 주말에만 4000여대의 차량이 쏟아져 들어 온다는데, 이런 낡고 투박한 풍경이 얼마나 더 지켜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래된 역사를 되짚자면 교동읍성을 먼저 찾는 게 순서다. 도읍인 한양을 지키는 성이 도성이고, 지방 고을 읍에 세워진 게 읍성(邑城)이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쌓은 석성이다. 동·남·북 세 개의 문 가운데 현재 남문(유량루)의 홍예문만 남았다. 아치형 돌문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그 자태가 아름다우면서도 견고하다. 한데 폐허 위에 서면 깊은 한숨만 나온다. 주변 성벽은 허물어졌고 돌들은 사라졌다. 출처와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사금파리 조각들도 홍예문 위쪽에 널려 있다. 하지만 홍예문 주변엔 사람의 접근을 막는 펜스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들고나기 쉽지 않은 섬이었을 테니 성벽을 이루던 돌들도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리고 돌들이 여전히 민가의 담장을 이루며 남아 있다는 거다. 교동읍성 주변에 황색 대룡이 나타났다는 황룡우물, 경기수영 터, 연산군 유배지(추정) 등 볼거리가 많다. 시간 너머의 흔적을 따라 찬찬히 둘러보길 권한다. 교동읍성에서 바다로 향하다 보면 길이 끊겼을 법한 곳에서 난데없이 작은 포구가 나온다. 동진포다. 고려시대부터 뭍과 교동도를 이어주던 나루였다는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나루터는 교동읍성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 한양과 인천, 해주 등을 오가는 관문 노릇도 담당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먼저 교동도로 와서 바닷길의 일기 등을 살핀 후 출항했다고 한다.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이라는 객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이 제법 장관이었다는데, 이 장면이 바로 교동팔경의 하나인 동진송객(東津送客)이다. 조선시대엔 각종 조운선과 화물선 등이 오갔고, 한국전쟁 때도 수많은 배들이 들락날락했다던 동진포지만 지금은 배 한 척 없는 썰렁한 나루터로 남았다. 시멘트 포장 아래 조선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11명 ‘왕족의 유배지’… 한국전쟁 피란민 집결지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신하들과 달리 왕족은 가까운 곳에 격리시켰다. 늘 그들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한양과 가까우면서 조류가 급해 유배지로서 최적지였다. 고려 21대왕 희종, 조선시대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가운데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읍내리에 연산군 적거지가 조성돼 있다. 대룡시장은 근대의 시간들이 갇혀 있는 공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로 날아간 듯한 낡은 풍경과 만날 수 있다. 후줄근한 간판과 낡은 유리문, 옛 포스터 등을 보자니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향수가 현재로 소환되는 듯하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계란 푼 쌍화차 얻어 마실 수 있는 다방도 여태 남아 있다. 대룡시장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의 집결지였다. 전쟁 끝나면 얼른 돌아가려고 고향과 가까운 대룡리 일대에 진을 쳤다. 하지만 닫힌 문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열리지 않았고, 고향 그리던 이들은 대부분 생을 마감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리를 떴다. 골목은 짧다. 채 500m도 못 된다. 하지만 더께로 쌓인 시간은 도무지 방문객의 발걸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여행수첩 <지역번호 032>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48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교동대교가 나온다. 교동도 출입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교동도에서 숙박하지 않을 경우 교동대교 앞 군 검문소에서 나오는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교동면사무소 932-5001.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도까지 운행하는 18번 버스가 신설됐다. 선진버스 933-6801. → 맛집 대룡시장 쪽에 먹거리가 풍성하다. 해성식당(932-4111)과 대풍식당(932-4030)이 그중 알려졌다. 오래된 ‘다방’도 두 곳 영업하고 있다. → 잘 곳 대룡시장에 교동파크(932-4164)라는 작은 모텔이 있다. 강화여인숙(932-4067) 등 오래된 숙박업소도 있다. 고구저수지 인근 고구촌펜션민박(933-8668), 난정저수지 주변 수정민박(934-8929) 등 민박집도 운영 중이다. 글 사진 강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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