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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전대통령 「권총위협 목격」 논란

    「수경사출신 최병수씨 김광해씨 진술 반박/“당시 청와대 경비… 사건현장과는 거리”­최씨/“최씨 목격사실 부인할것” 미묘한 여운­전씨 12·12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연행재가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권총으로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알려진 최병수 당시 수경사 대위(현주베트남 한국대사관 건설관)는 12일 서울신문과의 국제전화에서 『터무니없는 사실무근』이라며 목격사실을 전면부인했다. 반면 최씨의 「권총협박목격담」을 전해 들었다고 지난주 검찰에서 진술한 김광해씨(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 보좌관)는 이날 이와 관련,『최씨에게는 전화연락이 되더라도 목격사실 자체를 부인할 것』이라고 미리부터 장담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다음은 최씨와의 일문일답. ­전씨가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12·12당시 총리공관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따라서 그같은 장면을 보지도,듣지도 못했다. ­사건당시 어디에 있었나. ▲수경사 소속으로 청와대외곽경비를 서기 위해 파견나가 있었던 것같다.청와대경비를 서면서 총리공관쪽으로 근무지를 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다시 말하지만 사건현장과는 분명히 동떨어져 있었다. ­「권총협박」사실을 공표한 김광해씨는 아는 인물인가.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봤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81년 예편하기 전에 동해경비사령부에 근무했는데 김씨도 이때 함께 근무하면서 내 이름을 익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검찰로부터 연락이 있었나. ▲아직까지는 연락이 없었다.만약 김씨의 주장에 조금이라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됐다면 귀국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겠나.
  • 최 전대통령 오늘 방문조사/「5·18」 본격 수사

    ◎「경복궁 모임」 장세동씨도 소환/주영복 전국방 등 3명 환문/계엄 전국확대 과정 등 추궁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11일 12·12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섬에 따라 5·18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검찰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아직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기초 조사 차원에서 5·18사건 피고소·고발인 가운데 핵심 관련자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이날 5·18 당시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피고소인 자격으로,김윤호 광주보병학교장을 참고인 자격으로 각각 소환·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주 전국방부장관과 이 전계엄사령관 등을 상대로 전군지휘관회의에서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의결한 과정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군의 지휘계통 및 과잉진압 경위 등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김 전보병학교장에게는 신군부측의 「시국수습방안」기획에 자문역할을 하게 된 배경 등을 신문했다. 수사본부는 또 12·12사건의 핵심 인물인 당시 보안사 대공2과장겸 합수부 수사1국장 이학봉씨와 신군부측에 체포된 육군참모차장 윤성민씨,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씨 등 3명도 불러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날 소환자중 주전장관과 이전사령관에 대해서는 철야조사했다. 수사본부는 이씨를 끝으로 이른바 「보안사 4인방」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이와 함께 이날 출석요구에 불응한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를 12일 중으로 실시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본부는 또 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석한 수경사30경비단장 장세동씨를 12일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오는 13일로 만료되는 5·18헌법소원에 대한 취하 동의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 검찰은 또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1차 구속만기일이 12일로 끝남에 따라 구속기간연장신청을 법원에 냈다. 한편 12·12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예비역 중령)씨는 이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재가를 받을 때 전두환 전보안사령관이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최모대위는 육사31기로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무관 최병수씨지만 최씨는 현재 목격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전씨에 사업자금 요청 「김광해씨 편지」 공개(조약돌)

    ○…전두환 전대통령측은 8일 보도자료를 통해 『12·12사건 당시 전씨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받는 과정에서 최규하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하는 것을 전해들었다고 진술한 김광해(김광해)씨에 대해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공격. 전씨측은 이날 『김씨는 그동안 전씨에게 수억원의 사업자금지원을 요청하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람』이라고 김씨를 폄하. 전씨측은 『제가 펴내는 월간 「택시」에 5공의 업적을 시리즈로 게재하고 무담보로 사업자금을 빌려쓸 수 있도록 도와주면 각하의 종이 되겠다』는 내용으로 김씨가 91년 5월2일 전씨에게 보낸 6쪽짜리 편지 가운데 2쪽을 언론에 공개.
  • “전씨 쓰러져도 병보석 신청 안해”/측근 이양우 변호사

    안양구치소에 수감돼 닷새째 단식하고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이양우 변호사는 7일 『만일 전씨가 쓰러지는 등 어떠한 경우에도 병보석을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변호사는 이날 『12·12군사반란 당시 합수부장이던 전씨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재가받는 과정에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했다』고 주장한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 보좌관 김광해씨(52·중령예편)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한편 전씨측은 이날 이변호사를 포함,전상석·석진강 변호사 등 3명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키로 했다고 밝혔다.
  • 최규하씨 직접 조사 배경과 내용

    ◎신군부 「군사반란·내란」 혐의 확증잡기/「정 총장연행 재가」 강압여부에 초점/「사전반란모의」 인지·묵인 등도 규명 검찰이 12·12와 5·18사건에서의 권부동향과 사태추이를 가장 잘 파악했을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방문조사를 이번주 안에 벌이기로 결정했다. 최환 서울지검장은 7일 『최전대통령측에서 검찰의 조사요청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다』면서 『우선 이번주 안으로 일방적으로라도 통보를 한 뒤 수사팀을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이처럼 최전대통령에 대한 직접조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전두환 전대통령 등 신군부측의 군사반란과 내란혐의를 밝혀내는 데 가장 결정적인 증언자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미 전전대통령을 구속하는 성과를 이루고도 최전대통령을 직접조사하지 않을 경우 군사반란 등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공소유지에 지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재수사에 대한 의미희석,불충분한 수사라는 국민과 야권 등의 비난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지난번 12·12와 5·18사건 수사와 같이 전직대통령의 예우를 고려,서면조사라는 미온적인 조사방법을 택해 답변을 듣지 못한 만큼 이번에는 방문조사라는 「정공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최전대통령의 직접 진술을 통하지 않고서는 12·12사건에 대한 반란혐의을 확증하고 12·12와 5·18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란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증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 검찰의 현상황이다. 따라서 검찰의 최전대통령에 대한 수사의 초점은 우선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 재가과정에서 신군부측으로부터 강압을 받았느냐는 데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6일 소환조사를 받은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중령예편)가 『합수부측 중대장 최모대위로부터 「전보안사령관이 재가를 받을 당시 최전대통령의 면전에서 권총을 휘두르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을 중시하고 있다. 고소·고발인들은 고소장에 『재가 당시 총리공관에서 전합수본부장 등이 권총을 휴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었다. 검찰은 이에 대해 지난해 12·12사건 발표 때 『전합수본부장 등 신군부측이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강제로 연행,정계엄사령관의 연행을 승인받은 뒤 최전대통령으로부터 사후재가를 받으면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사실만을 인정하고 총기부분에 대해서는 확인을 못했다. 따라서 검찰은 신군부측의 내란혐의를 밝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김씨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최전대통령의 진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검찰은 이밖에 최전대통령을 상대로 신군부측의 사전반란모의를 파악하고도 묵인했는지,5·17 비상계엄전국확대 재가경위와 8·16 하야 때 강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를 벌일 계획이다. 한편 검찰은 최전대통령이 지난번처럼 『재임중 공적행위에 대해 조사를 받고 해명하는 것은 후임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며 조사를 거부할 경우 별다른 방안이 없어 고심하고 있다.
  • 「반란 사전모의」 혐의자 최우선/12·12관련자 소환기준 뭔가

    ◎「정 총장 불법연행」 연루자에도 비중 12·12 및 5·18사건과 관련,7일까지 검찰에 소환된 사람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포함,모두 15명에 이른다.이들의 면면과 소환 순서는 수사의 진행 방향 및 향후 수사의 흐름을 가늠케하는 잣대로서 관심을 끌고 있다. 검찰은 소환범위와 기준등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검찰 내부에서도 말이 서로 엇갈린다. 그러나 최환 서울지검장은 『지난번 수사발표 내용을 보면 소환순서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수사 실무진도 이미 정해진 수사방향에 따라 소환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수사초기 김상희 주임검사가 『군사반란의 사전모의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경복궁모임」부터 조사하겠다』고 밝힌 뒤 조홍 당시 수경사헌병단장(4일),유학성 당시 국방부군수차관보(5일),박준병 당시 20사단장(6일)등 이 모임의 주요 관련자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다. 소환자들의 면면을 통해 본 또하나의 수사 중심축은 정승화 전육참총장 불법연행과 사후재가의 강제성 여부.당시 결재 라인에 있던 노재현국방장관(4일)을 필두로 총장연행에 참가한 성환옥 당시 육본헌병감실 기획과장(5일),총리공관 장악을 지휘한 고명승 당시 대통령경호실 작전담당관(6일),구정길 당시 총리공관특별경호대장(〃),전전대통령이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협박한 사실을 간접 증언한 김광해씨(〃),정전육참총장(7일),배상기 국방장관부관(〃),한길성 보안사서빙고분실장(〃),김인선 육참총장경호대장(〃)등으로 이어지는 소환순서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결국 검찰은 지난번 수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적인 구조를 대부분 밝혀낸 이상 공소유지에 결정적인 ▲반란의 사전모의 ▲계엄사령관 불법연행 ▲대통령 재가의 강제성 등 핵심적인 쟁점을 철저히 보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반드시 기소하겠다는 의지가 부족했던 지난번 수사에서는 이를 충분히 수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6일 박준병 의원에 이어 7일 소환된 노충현 당시 20사단 참모장이다.검찰은 박의원과 노씨 등을 상대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작전에 투입된당시 20사단의 과잉진압 여부 및 명령계통 등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정승화씨 등 5명 환문/최 전 대통령에 금명 출석요구서

    ◎검찰 「12·12」 수사/전씨 2차 출장조사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7일 12·12사건 당시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씨와 정씨의 경호대장 김인선씨 등 5명을 소환,조사했다. ○오늘 차규헌씨 소환 한편 수사본부는 12·12사건 당시 경복궁 모임에 참여했던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 5명을 8일중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또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해 금명 출석요구서를 발송키로 했다. 이날 검찰에 소환된 사람은 정총장과 김인선씨 외에 당시 박준병 20사단장의 참모장 노충현씨,노재현 국방부장관의 부관인 배상기씨,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길성씨 등이다. 이와 함께 김상희 부장검사 등 수사팀 3명은 이날 하오 2시부터 10시간 가까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 전대통령에 대한 2차 출장조사를 실시했다. 검찰은 전전대통령을 상대로 12·12 때 정전총장을 강제 연행한 경위와 5·18사건을 거쳐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이른바 「집권시나리오」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집중 추궁했다. 전전대통령은 이날 조사에서 『정계엄사령관의 연행은 10·26사건과 연루됐다는 새로운 사실을 적발,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면답변서에 담겼던 내용을 거듭 주장했으며 군사반란 혐의도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정전총장을 상대로 12·12 직전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전출시키려했는지와 한남동 공관에서 보안사로 연행된 과정,공관에서의 총격전 등을 조사했다. 검찰은 또 당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장 한씨에 대해서는 정전총장의 연행 장소로 서빙고 분실을 택한 경위와 정전총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협박했는 지 등을 조사했다. 당시 20사단장 참모장 노씨에 대해서는 20사단의 병력의 이동여부,국방부장관 부관 배씨에 대해서는 노전장관이 정전총장의 연행 승인과정에서 강압을 받았는지를 신문했다. 검찰은 이와 함께 당시 하소곤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예비역 중령)가 정계엄사령관에 대한 최규하 대통령의 사후재가 과정에서 신군부측이 권총으로 위협하는 광경을 최모대위가 목격했다고 진술한 것과 관련,최씨의 신병확보에 나섰다.
  • 12·12당시 박준병·고명승씨 역할

    ◎박주병­노국방에 「정총장 연행」 결재 강요/고명승씨는 총리공관 경호대 무장해제/하나회 주요멤버·대예편 등 공통점 박준병 자민련의원(62)과 고명승씨(60)는 검찰이 12·12사건의 재수사에 착수한 뒤 처음으로 소환한 하나회의 핵심 회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준병씨는 79년 12월 12·12사건 당시 수도권인 성남 육군 종합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의 사단장이었다. 육사 12기 가운데 선두주자였던 박의원은 당시 육사 선배이자 하나회 선배였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연락을 받고 경복궁내 수경사 30경비단 모임에 참가했다. 박의원은 이어 신군부측과 육군본부측의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자신이 지휘하는 20사단 참모장에게 전화로 자신의 육성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지시하였다. 그가 지휘하던 20사단 61연대 병력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이후 서울 장충동으로 출동했었다. 박의원은 보안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총장 연행문서에 결재하라고 강요한 인사 가운데 한사람이기도 하다. 박의원은 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될 때 주요 군 지휘관회의에서 지지발언을 한뒤 5월21일 20사단 병력을 이끌고 광주로 출동해 진압 작전을 지휘,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박의원은 지난해 10월 검찰에서 반란모의 참여 및 주요임무종사·불법진퇴·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 미수·초병살해등의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박의원은 81년 7월∼84년 7월까지 국군보안사령관을 역임하고 84년 대장으로 예편,고향인 충북 옥천 영동 보은 지구에서 12·13·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지난 10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으로 옮겼다. 육사 15기인 고명승씨는 12·12사건 당시 대령으로 청와대 경호실 작전담당관 겸 상황실장이었다. 고씨는 12·12사건 당일 신군부측이 정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 결재를 받는 동안 외부의 출입을 통제했다. 그는 당시 경복궁에 주둔하고 있던 경호실 55경비대대 3개제대,101경비단 1개소대 병력을 무단 출동시켜 총리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구정길 총리공관 특별경비대장과 특별경호대 헌병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키고 총리공관을 장악하였다. 이때문에 지난해 검찰의 12·12사건 수사에서 반란 주요임무 종사죄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 고씨는 이후 80년 청와대 경호실차장,83년 백마사단장,85년 수도방위사령관,86년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요직을 두루거친 뒤 8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병석의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쓴「휠체어에 사랑을 싣고」라는 책을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92년부터 민자당 전북 부안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다. ◎당시 작점참모부장 보좌관 김광해씨 문답/“「권총위협」 작전참가 대가 들려줘”/총리공관 점령뒤 창문통해 현장 목격 12·12당시 반란군측의 총격으로 부상을 당한 하소곤 당시 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52·「12·12쿠데타진상규명위원회」간사)는 6일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뒤 『합수부측이 총리공관을 장악했을 때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이 권총을 휘두르며 최규하전대통령을 협박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일답. ­목격자의 신원은. ▲당시 총리공관 접수작전에참가했던 육사출신의 최모대위다.소속은 30경비단인지,101경비단인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으나 당시 중대장이었다. ­최대위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듣게 된 경위는. ▲동해경비사령부 정훈참모로 근무하던 80년말∼81년초 이 부대로 전입한 최대위가 찾아와 「참모님도 12·12의 피해자라고 들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목격담을 들려줬다. ­당시 최대위가 말한 내용은. ▲총리공관을 점령한 뒤 창문을 통해 전씨가 최전대통령을 협박하는 장면을 보았다며 이처럼 군의 명예가 실추된 상황에서 더이상 군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전씨가 어떻게 협박했다고 했나. ▲심하게 위협적인 행동을 했다고 들었다.자세한 것은 검찰조사에서 진술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달라.총을 사용했나. ▲군인이 협박하려면 뭘로 하겠나.최대위 말로는 전씨가 대통령 면전에서 권총을 꺼내 휘둘렀으며 대통령은 꼼짝도 못하더라고 했다. ­최대위는 지금 어디있나. ▲81년 제대해 사무관으로 임용됐다.찾으려면 찾을 수는 있으나 밝히기는 곤란하다.
  • “최 대통령에 정총장 연행 재가 강요 전씨,권총위협 했다”

    ◎“합수부 중대장이 목격”/당시 육본참모부장 김광해 보좌관 진술/“검찰 사실일땐 내란 입증 결정적 증거” 12·12사건 당시 전두환합수본부장 등 신군부측이 정승화계엄사령관 연행에 대해 최규하전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과정에서 최전대통령을 권총으로 위협했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돼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 12·12가 명백한 내란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서울지검3차장)는 6일 「12·12 쿠데타 진상규명위원회」 간사이자 당시 하소곤육본작전참모부장의 보좌관이었던 김광해씨(52·중령 예편)에 대한 소환 조사에서 이같은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80년말∼81년초 동해경비사령부 정훈참모로 근무할 때 전입해 온 최모대위로부터 「합수부측 중대장으로 총리공관을 장악했을 때 창문을 통해 전합수본부장이 최전대통령의 면전에서 권총을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김씨는 또 『최모대위는 81년 제대,사무관으로 임용됐으며 지금이라도 찾을 수는 있으나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김씨의 진술에 대한 진위를 가리기 위해 빠른 시일안에 최전대위의 신병을 확보,조사할 방침』이라면서 『김씨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나면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면서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한 내란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지난번 12·12사건 수사 때 「신군부측이 정계엄사령관에 대한 연행재가를 받을 때 권총을 차고 있었다」는 고소·고발인들의 주장에 대해 총기소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으며 강압적인 분위기였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밝혔었다. 한편 수사본부는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와 관련,『최전대통령이 지병을 앓고 있는 점을 감안해 소환조사 보다는 조만간 수사팀을 최전대통령의 자택에 보내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수사본부는 이와 함께 이날 「경복궁 모임」의 핵심인물인 당시 20사단장이었던 자민련의 박준병의원과 대통령경호실 작전담당관 고명승씨,총리공관 특별경호대장 구정길씨 등 3명을 소환,조사했다. 수사본부는 박의원을 상대로 경복궁모임에 참석하게 된 경위와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관에게 정계엄사령관의 연행에 대한 승인을 받고 최전대통령에게 재가를 받는 과정에서 총기를 휴대했거나 강요했는지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당시 주동세력에 합류,총리공관의 출입을 통제했던 고씨와 총리공관의 경호를 맡았던 구씨에게는 최전대통령에게 신군부측이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는지를 신문했다.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는 최규하 전대통령의 직접조사와 관련,『이번주안에 최전대통령측에 통보,수사팀을 보내 방문조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까지 최전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조사에 응하겠다는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서 『일단 통보를 한 뒤 조사가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수사팀을 보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 “소환자 진술 자기논리로 일관”/이 특수부장 일문일답

    12·12 및 5·18 특별수사본부 이종찬본부장은 6일 『두 사건에 모두 관련된 신군부측 인사에 대해서는 5·18에 대한 조사도 병행하고 있다』면서 『7일 전두환 전대통령을 안양교도소로 방문,2차 구류신문을 벌이기로 했다』고 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 ­최규하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 시기는. ▲당분간 결정되기 힘들 것같다.교섭중이다. ­진술을 아예 거부하나. ▲교섭중인 사항이다. ­다른 소환자들은 잘 진술하고 있나. ▲그렇다.하지만 자기 논리로 말하는게 문제다. ­소환된 유학성 당시 3군사령관,박준병 당시 20사단장 등을 상대로 5·18과 관련된 혐의도 조사했나. ▲(혐의사실이 12·12와 5·18에) 겹치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사하고 있다. ­앞으로 받을 계획은.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다. ­국세청 등 그밖의 외부기관에 자료를 요청한게 있나. ▲전혀 없다. ­요청을 고려할 생각인가. ▲노코멘트. ­고소인인 김광해씨가 최모대위를 통해 12·12 당시 전씨가 최전대통령을 협박한 사실을 들었으며 검찰에서도 진술했다던데. ▲김씨가 12·12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도 했고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 참고로 조사했다. ­전씨가 대통령에게 총을 들이댔다면 수사상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조사해봐야 결정적인지 여부가 판명난다. ­최대위를 조사하나. ▲알아보라고 했다. ­두 전직대통령은 내일 조사하나. ▲전씨를 조사한다. ­정승화 전육참총장도 곧 소환하나. ▲생각해보자.
  • 석굴암·팔만대장경·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지정 의미

    ◎한국문화재 3점 인류 문화유산으로/고대·중세·근세 것 1개씩 채택… 더욱 값져/세계 100국 440개 등재… 기술·재정지원 받아 한국의 문화재들이 4일부터 9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산하 세계유산위원회 제19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게 되었다.세계유산위원회 21개 이사국은 이번 총회 기간중 지난 7월 세계유산위원회 집행이사회 회의를 거쳐 권고된 각국 문화재의 세계유산등록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어서 우리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지난 집행이사회에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토록 권고된 우리 문화재는 석굴암(국보 제24호)·불국사(사적,명승 제1호)와 판만대장경판(국보 제32호)및 판고(국보 제52호)·해인사(사적,명승 제5호),그리고 종묘(사적제125호)등 3건.우리나라의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문화재는 고대에서 중세,근세를 망라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진 세계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록제도는 지난 72년 유네스코 제17차 총회에서 체결된 「세계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75년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그러니까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 가입국의 유산중 오늘의 인류들이 뚜렷하게 보존할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는 유산을 유네스코 세게유산일람표에 등재하는 제도다.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면 세계유산기금으로부터 기술·재정적 원조를 받을 수 있고 세계유산협약국이 매 5년마다 그 보전상태를 모니터해 보고하도록 돼있다.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보전 관리가 가능한 것이다.그리고 국내외 대상 문화유산이 있는 지역에는 관광객이 증가돼 고용기회와 수입이 늘어날 수 있다.특히 유산에 대한 국가의 자부심을 고취시켜 국가적 책임감도 형성시키는 이점이 반드시 뒤따른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계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일 것이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3백26개를 비롯해 자연유산 98개,복합유산 16개등 모두 1백개국에서 4백40개가 등록돼있다.문화유산에는 미국의 독립기념관,자유의 여신상,차코 문화국립공원이 북미에 분포되었다.이밖에 유라시아의 그리이스의 아폴로신전,델피 고고유적,아테네 아크로폴리스,로데스 중세도시,이탈리아의 플로렌스 유적도시,피사의 사탑등을 망라했다.아시아만 하더라도 중국이 만리장성,진시황릉,명청대궁전,라사폰텔라궁등 14건이 등록을 마쳤다.일본의 경우 5건,인도 21건,인도네시아 4건,필리핀 2건,태국 4건,베트남 2건등이 등록돼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88년12월 세계 1백2번째로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했다.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과 인연을 맺은지 7년째지만 아직까지 단 한건의 문화·자연 유산도 등록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번 문화유산 등록은 국가적으로 매우 뜻이 깊다.따라서 이번 세계유산 등록은 우리 문화재가 유수한 세계의 문화유산과 동등하게 평가되고 비교되는 단초가 될 것으로 기대를 한껏 모으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을 보고/우리 문화유산 사랑 계기되길/최몽룡 서울대 박물관장 우리나라의 불국사­석굴암,해인사 대장경판­장경판고와 종묘가 유네스코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좀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우리민족의 얼과 솜씨가 밴 문화재가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국사는 통일신라 서기 710년(경덕왕 10년)김대성의 발원으로 창건한 사찰이다.여기에는 다보탑(국보 20호),삼층석탑(국보 21호),연화칠보교(국보 22호),청운백운교(국보 23호),금동비로자나불(국보 26호),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과 사리탑(보물 61호)이 있다.또 19 66년 10월 삼층석탑(석가탑)의 해체 수리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한 동경,옥류와 은제사리함 등은 국보 126호로 일괄 지정받았다.그중 두루마리로 된 다라니경은 8세기경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 할 수 있다. 석굴암석굴(국보 24호)은 751년(경덕왕 15년)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후원전방의 석실이다.그안에 본존불을 비롯해 십일면관음보살,십대사천왕상,금강역사상과 팔부신중상들이 조각되어 있다.종교성과 예술성을 공유한 이들 조각은 세계적 예술품이거니와 우리조상이 남긴 걸작의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32호)은 고려 고종때 대장도감에서 1233년∼1248년에 걸쳐 판각하였는데 매수가 8만여판에 이른다.이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완벽한 대장경이다.장경판고(국보 52호)는 정면 15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홍치원년명의 기와(1488년)가 나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이 건물은 장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시설로 통풍시설 등 선조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이들 이외에도 해인사에는 고려각판(보물 206호),대장경 판본(보물 972호),목조희랑대사상(보물 999호),석조여래입상(보물 264호)과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518호)이 있어 해인사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킨다. 종묘(사적 125호)는 조선시대 역대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태조의 묘인 태묘의 정전(국보 227호)과 조묘인 영녕전(보물 821호)으로 이루어진다.이 건물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에 둔것으로 1394년(태조3)터를 보아 1546년(명종 1)에 완공되었다.그후 임진왜란때 불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증건되어 오늘에 이르른다.이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격식과 장엄함을 건축공간에 잘 표현한 조선조의 뛰어난 건축물이다. 이들 세곳은 국보와 보물의 창고로 여겨질 만큼 많은 중요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이와같이 우리나라에는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것이 아직까지 없었다.이미 등록된 중국의 14건과 일본의 5건에 비하면 우리 역대 정부의 문화정책이 빈곤했던 것도 사실이다.이들 외에도 앞으로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미·중 고위 군사회담

    【북경 AFP 연합】 조지프 나이 미국방차관보와 태광해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중장)이 15일 북경에서 회담을 가졌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날 회담에서는 미·중 군사관계의 진전 뿐만아니라 지역·국제문제도 포괄적으로 논의됐다고 이 통신은 전했다. 나이 차관보는 중국 국방부의 초청으로 14일 5일간 일정으로 북경에 도착했다.
  • 왕·왕비·왕세자 위업 새긴 도장/어보 165점 첫 공개

    ◎오늘부터 궁중유물 전시관서 전시/태조 4대조부터 순종까지 망라/폐위된 연산군·광해군것은 없어 조선시대 후대 왕이 선왕과 그 가족의 이름,위업등을 새긴 도장인 어보가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다. 문화재관리국 궁중유물전시관은 13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조선어보­5백년 종실의 상징」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의 어보 1백65개를 일반인에게 보여주는 기념전을 마련한다. 어보는 흔히 조선 왕실에서 직접 쓰던 도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당대가 아닌 후왕이 역대의 왕이나 왕비,왕세자,왕세자비,왕세손의 공적이나 이들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는 도장이며 대대로 조선 5백년 왕실의 상징으로 종묘에 모셔온 비장품이다. 어보는 10㎝ 안팎의 크고 육중한 금(도금)이나 옥제로 매우 정교한 거북 형상을 띠었으나 고종때부터는 용 조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는 목조등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부터 마지막 27대 순종때까지의 어보 모두를 보여주는데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것만 없다.그 내용은 시호와,왕과 비를 높이 기리는 호인 존호,그리고 왕비를 기리는 호인 휘호를 섞어 새기기도 했다.묘호와 문무,성효롭다는 뜻을 나타내 기린 8자씩의 시호가 나타나 있는 성종어보와 존호와 시호를 새긴 정조어보가 그같은 예다.간단히 세자,혹은 세자빈,왕비라고만 새긴 것도 있다. 어보는 시대가 흐를수록 선대를 기리는 글귀의 존호를 계속 더해 올리며 그때마다 어보가 새겨져 한 왕이나 비에게 여럿이 생겨나 10점을 넘기도 한다.순조는 12점이나 된다.자구에서도 먼저 올려진 존호까지 합해 새겨지므로 문조(23대 순조의 아들·1백16자)의 경우처럼 무려 1백자가 넘는 것도 있다. 한편 이번 전시된 어보 가운데 왕이나 비,황제,황후의 것은 보,세자나 빈은 인으로 구분하고 있고 영조의 장남으로 요절한 진종 세자와 빈은 은제,문종세자빈의 것에는 짐승조각이 없는 네모난 손잡이가 보이는등 시대와 신분에 따른 차이점도 함께 보여준다.
  • 중,대만 전담기구 확대/이붕·교석 등 고위인사 추가

    ◎홍콩연합보 보도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 중앙은 당내 대만관계 최고위기구인 「중앙대 대만영도소조(조장 강택민)」를 대폭 확대 개편해 날로 복잡해지고있는 대만문제를 전면적으로 처리키로 결정했다고 홍콩 연합보가 25일 북경발로 크게 보도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 이붕총리,전인대(의회)에서 교석상무 위원장(국회의장),인민정치 협상회의에서 이서환 주석,인민해방군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인 유화청·장진 등 모두 5명이 새로 이 소조에 포함됐다. 당중앙의 이같은 결정은 대만문제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당은 대만문제를 최중대사로 삼기 시작했다고 이 신문은 말했다. 지금까지 대만영도소조는 강택민 당총서기,전기침 외교부장,왕도함 해협양안관계협회 회장,왕조국 당중앙통일전선공작부장겸 국무원대만사무판공실 주임,고춘왕 국가안전부장,웅광해 해방군 총참모부 부장조리(조이)등 6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거물급들을 대거 포함한 확대개편으로 11명이 된 새 영도소조에서는 해방군 대표가 중앙군사위 주석 강택민까지 합쳐4명으로 가장 많다.
  • 21세기는 「물전쟁 시대」라지 않은가(박갑천 칼럼)

    집안에 명사가 있건만 30년을 모르고 지낸다(가유명사삼십년불지)는 말이 있다.『머슴살이 삼년에 주인성 묻는다』는 속담 그대로 가까운 것일수록 잊고 지내기 쉽다는 뜻으로 쓰인다. 병자호란때 청군을 이끌고 침범해온 선봉장은 용골대와 마부태였다.그 용골대는 『광해군때 평안감사 박엽의 부하였던 조선사람인데 박엽이 억울하게 사형당하자 청나라에 투항한 인물이라는 전설이 있다』(이선근 「한민족의 국난극복사」) 박엽에 대해서는 「응천일록」이나 「속잡록」등에 음란하면서 백성들 오갈들리는등 곤댓짓이 심했다고 적어놓고도 있다.그러나 그가 북방을 지켰을 때는 청나라가 감히 국경을 넘보지 못했다고 말하여진다.그래서 그가 처형될때 『스스로 너의 만리장성을 허문단 말이냐』(괴여만리장성)고 고함치면서 죽은 송나라 명장 단도제의 고사를 들먹이며 발을 구른 사람도 있었다 한다.용골대 또한 항복하러 삼전도(삼전도)로 자닝스럽게 끌려가는 인조에게 가까운데 있는 인재를 죽인 옰으로 이렇게 버력입는다면서 흉하적했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렇다.사람들은 너무 가까우면 귀한 줄을 모른다.고마움을 잊는다.어버이은혜를 잊듯이 공기의 고마움과 햇볕의 은혜를 당연시한다.물의 귀중함,물의 고마움을 잊고 사는것도 그것이다.이승의 모든 목숨 있게 하는 물.지난번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젊은 여성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때도 물은 화제가 된바 있다.3백77시간을 물 한모금 안 마시고 어떻게 버텨낼수 있었느냐면서.그런 물이다. 하건만 사람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문명화·산업화라는 이름아래 더럽히면서 함부로 헤피쓴다.『가벼운 물을 마시면 탈모증이 생기고 무거운 물을 마시면 종기가 나며 매운맛나는 물을 마시면 등창병이,쓴맛나는 물을 마시면 곱사둥이·난쟁이가 난다』고 했다(여씨춘추 3권).2천여년전에 한말이다.한데 독성화학물질 섞인 물을 마시면 어찌 되겠는가.그 물마저도 달려 물부족은 이제 지구촌의 심각한 고민거리로 되고 있다(한국수자원공사 발행 「물길따라 내려온 물이야기」).얼마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 물 심포지엄」이 21세기는 「물 전쟁시대」가 될것이라고 한 경고를 건성으로 들어넘겨서는 안되겠다. 가까운 은혜를 잊을때 찾아오는건 말없는 징벌이다.물에 입이 없으니 게정거리진 않는다.하지만 이젠 사람이 알아차려야 한다.물을 물쓰듯 해서는 안된다.깨끗이 하는데 온갖 지혜를 모아야 한다.
  • 소설가 강신재(이세기의 인물탐구:67)

    ◎「젊은 느티나무」로 60년대 낭만주의 새바람/주제설정 명확하고 작중인물 심리파악에 민감/오페라 가수가 아리아 부르듯 혼신의 창작작업/“언제나 깨어있는 작가”… 최근엔 역사재조명 작업 전념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아니,그렇지는 않다.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1962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문단은 한동안 「젊은 느티나무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당시 카뮈 사르트르의 반항과 부조리문학에 감염되어 기진하고 황폐하던 젊은이들에게 이 한편의 명편은 푸르른 낭만과 사랑의 절제를 심어줬으며 「비누냄새」는 지금까지도 싱그러운 젊음의 상징으로 대변되고 있다. 강신재소설은 현대적 감각과 단편소설만의 「영롱한 완벽성」을 추구하면서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섬의 문체가 특징이다.그의 글은 독자에게 긴장된 추적을 강요하지 않는다.난해한 관념을 함축하기보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설명해낸다.사랑에 빠진 한 소녀가 상대방 청년에게 느끼는 미묘하고도 애틋한 감정을 「그에게서 비누냄새가 난다」고 표현한 것이 그 예다. ○천분의 재질 갖춘 작가 일찍이 월탄은 그의 소설을 향해 『주제설정이 명확하고 작중인물의 다면적·복합적 심리파악에 특히 민감하다』고 했고 남의 작품평에 까다로운 박화성도 『인물들의 개성을 신기에 가깝도록 그려내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평론가 김윤식은 그의 첫장편소설인 「임진강의 민들레」에 이르러 『천분의 재질로 황홀한 경지를 이룩한 작가』임을 전제,『만일 불모성을 향한 소멸의 미학이 사랑이라면 한국문학은 이 작가에 의해 종종 양식에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을 예고했다. 작가자신은 「언제나 깨어 있는 작가」이기를 원한다.그리고 작품을 쓸 때마다 자신의 슬픔이나 기쁨을 『마치도 오페라가수가 전심전력을 기울여 아리아를 부르듯,혹은 해변의 빛과 볕에 마음을 그을리듯』 그렇게 함몰된 상태에서 혼신을 다했다고 말한다.이런 투철한 문학정신으로 63년 「현대문학」에 연재한 「파도는 노소층을 막론한 이례적인 절찬을 모았고 그후 20여개에 이르는 신문연재소설도 일과성이 아닌 문학작품의 범주에서 독자의 수준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사회기구의 힘을 어떻게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으며 그것의 포악과 비정과 어리석음을 작가로서 어찌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시대상의 아픔을 가족사나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작품의 진실과 완벽성에 천착할 뿐 이리저리 가꾸어 맵시나게 만들자는 생각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그런 만큼 「감각적」이라거나 「아름다운 수채화」란 말을 듣기보다 「이지적인 필치」「냉정한 태도로 대상을 간파한 문학작품」이란 평을 들을 때 그는 비로소 작가로서의 긍지를 느낀다. 그에게선 시류에 휩쓸리거나 감정에 복받치거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환시키는 속물근성은 찾아볼 수 없다.불가근불가원으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세상을 냉철하게 정시하고 어떤 소설에서든지 적시에 삶의 진실과마주치는 필연을 제시해나간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따뜻한 표정은 실은 무한히 다정할 것 같지만 은근히 까다롭고 은근히 고집과 자존심이 세어서 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60년대말 조선일보에 「유리의 덫」을 연재할 때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던 선우휘가 그에게 연재소설을 부탁했고 『원고료는 작가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 대접해드리겠다』고 단서를 붙였다.그러나 연재 한달만에 붙여온 고료는 결코 섭섭지 않게 대접하겠다는 약속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그는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일년동안 쓰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지키겠다.그러나 원고료는 보내지 말라.이번에 보낸 고료도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이 전화를 받은 선우휘는 혼비백산하여 사정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백배사죄한 후 그의 부군인 서임수씨를 만나 『서선생,애 많이 잡숫갑시다』했다는 것이다.「그처럼 까다로운 여류작가를 부인으로 모셨으니」 부군으로서 참으로 고달프리라는 우려였다. ○남편의 식사는 손수준비 그러나 실은 그는 누구보다 가정적인 여류로 유명하다.번거로운 모임이나 단체에 관여하지 않고 어쩌다 문단모임에 나와서도 시간이 되면 소리없이 빠져나가 부군의 식사를 손수준비한다.미식가이며 특히 무청과 배추줄거리를 좋아하는 부군을 위해 새벽마다 시장에 나가 채소상이 길에 버린 무청을 거둬들이자 시장사람들이 오죽하면 『집에서 토끼를 기르시나보다』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그런 그를 문단에서는 「쌀쌀이」란 별명을 붙이고 있지만 낯모르는 후배가 책을 출간하여 증정하면 잘 받았다는 축하카드와 함께 반드시 문학의 정진을 격려하는 글을 써서 보내준다. 언젠가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강신재가 있으면 장미꽃밭처럼 화사하고 향기롭다』고 말한 적이 있다.원로·중진들이 엄숙하게 모여앉은 자리에 그가 나타나면 무겁고 지루하고 낡아보이던 모든 것이 금가루를 뿌린 듯 금세 현란해진다는 것이다.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타고난 미모탓일 수도 있다.지금도 여전히 섬연하여 만모의 기색이나 비풍이 없이 사람을 반기고 감싸면서 그가 쓴 「레이디 서울」처럼 만년숙녀의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한다. 그는 지금의 남대문근처인 용산구 어성동에서 태어났다.부친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 강태순씨이고 어머니는 숭의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풍금·피아노가 있는 환경에서 비바람을 모른 채 곱게 성장했다.경기고녀에 다닐 때는 영미문학에 심취했으나 일본인 교사가 『귀축미영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영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상이 불건전해 보이기 쉽다』고 경고하여 이전 가사과에 가게 되었다.그러나 염색이니 자수·재봉은 체질에 맞지 않아 대학재학중에 만난 서임수씨와 결혼,우연히 써본 단편소설을 손소희를 통해 김동리에게 보였고 과찬의 추천사와 함께 문단에 등단했다. ○아직도 청랑의 미모간직 그가 소설을 쓰기까지는 서임수씨(남성해운 이사)의 보이지 않는 외조를 빼놓을 수 없다.서임수씨는 경향신문부사장·국회의원·국민대학장등을 지낸 저명인사로 그는 소설집필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책들을 일일이 구입해주어 서재에 산적해 있는 수천여권의 장서중작가의 손으로 산 책은 한권도 없을 정도다.자녀(건축가 기영씨와 피아니스트인 타옥씨)는 결혼후 따로 나간 지 오래이고 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옥수동 한남 하이츠빌라에서 부부가 새벽산책과 음악과 미식을 즐긴다. 그에게도 어쩔수없이 세월이 스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이제는 청랑의 미문이나 감각의 번뜩임을 휘두르기보다 「육성에 닮아 있을수록 문학이 우수하다」는 것을 지키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하던 소설이며 소설은 존재할 수 있던 역사』라는 공쿠르의 말에 공감하여 최근에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조명하는 작업에 계속 전념해 있다.지난해말 아홉번째 역사소설인 「광해의 날들」을 펴냈고 이번 겨울 조선조말을 무대로 하는 다음 작품의 구상을 끝냈다. 별은 딸 수 없는 물건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웃고 울고 생각하는 인간의 행위는 이후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그리고 그런 행위에 많은 시간과 힘을 바치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별빛 같은 화섬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비쳐줄 것이다. □연보 ▲1942년 경기고녀 졸업 ▲1944년 이화여전 중퇴 ▲1949년 「문예」지 소설「얼굴」「정순이」추천 ▲1958년 단편집 「희화」(계몽사) ▲1968∼82년 문협 PEN이사 ▲1982년 한국여류문학인 회장,한국소설가협회 분과위원장 ▲1992년 소설가협회 대표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단편집 「여정」(중앙문화사 59년)「젊은 느티나무」(대문출판사 72년)「황량한 날의 동화」(삼중당 76년) 장편집 「청춘의 불문률」(여원사 60년)「임진강의 민들레」(을유문화사 62년)「이 찬란한 슬픔을」(신태양사 64년)「그대의 찬손」(신태양사 65년)「오늘과 내일」(을유문화사 66년)「신설」(대문출판사 67년)「숲에는 그대 향기」(대문출판사 69년)「유리의 덫」(삼성출판사 70년)「파도」(대문출판사 72년) 강신재대표작전집 8귄(삼익출판사 74년)「레이디 서울」(선일문화사 75년)「서울의 지붕밑」(문리사 76년)「그래도 할말이」(서음출판사 77년)「마음은 집시」(태창문화사 77년)「밤의 무지개」(청조사 77년)「천추태후」(동화출판사 78년)「불타는 구름」2권(지소림 78년)「우연의 자리」(명서원 78년)「모험의 집」(범조사 79년)「사도세자빈」3권(행림출판사 81년)「사랑의 묘약」2권(중앙일보사 86년)「신사임당,문정왕후 아수라」(한벗 87년)「간신의 처」(문학세계사 89년)「명성황후」3권(세명서관 91년)「광해의 날들」(창공사 94년) 수필집「사랑의 아픔과 진실」(중앙문화사 66년)「모래성」(서문당 74년)「거리에서 내마음에서」(평민사 76년)「무엇이 사랑의 불을 지피는가」(나무사 86년) 한국문협상 여류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원상
  • 서울시장:상(서울6백년만상:65)

    ◎초대 성석린이후 1천4백18명 거쳐가/판한성부사·한성부윤 등으로 명칭 10번바꿔/평균재임 5개월… 광해군때 오억령 “최장14번”/정도초기 정2품… 특별시 승격후 장관급으로 서울은 국방분야만 빼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가 집중된 「작은 정부」다. 때문에 서울시장 자리는 도읍지라는 비중에 걸맞게 기라성같은 인걸들이 거쳐갔다. 이성계가 조선 개국과 함께 도읍을 삼은 한성의 부사직은 정2품이었다.정부 수립후 특별시가 되면서는 장관급이 됐지만 예나 지금이나 직급을 초월할만큼 요직이며 영향력이 대단했다.그래서 통치자들은 항상 자신이 신임하고 촉망받는 인사들을 중용해 왔다. 내년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로 시민이 직접 뽑은 시장이 등장하면 그 위상은 한층 높아질 것임이 분명하다. 이같은 비중때문에 역대 서울시장 자리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상황이나 통치자의 성향에 따라 수많은 부침과 영욕을 겪어야 했다. 서울시장의 직함은 판한성부사·한성부윤·한성판윤·한성부윤·관찰사·한성판윤·한성윤·경성부윤·서울시장·서울특별시장 등 6백년동안 10번이나 바뀌었다. 서울의 첫 시장은 정도 이듬해인 1395년 6월13일 판한성부사에 임명된 성석린이다.그후 6백년간 연임·중임을 포함,현 이원종시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1천4백19명이 명멸했다. 조선시대의 서울시장중에는 태종때의 황희를 비롯,맹사성·서거정·유자광·이언적·최명길·이완·박문수·채제공·박영효·김홍집·민영환·지석영 등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 그러나 통치자의 미움을 사거나 모함을 받아 하루를 못넘기고 관직을 박탈당하는 수도 허다했다.특히 시대의 격변기나 민족의 수난이 있을 때는 한달새 5명이 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울시장중 최단명은 구윤옥(영조)·이돈영(헌종)·김좌근(철종)·임응준(고종)·김익용(고종)등 5명이다.아침에 임명돼 자리에 채 앉기도 전인 해질무렵에 해임된 「반나절 시장들」인 것이다. 2일에 그친 경우도 오재순(정조)등 10명이고 3일 시장도 성덕조(정조)등 11명이나 된다. 시장을 가장 많이 갈아치운 왕은 고종이다.재위 43년동안자그마치 3백87명을 임명,1년에 9명꼴로 시장을 경질했다. 조선시대에 가장 자리를 오래 지킨 시장은 오억령으로 광해군 2년(1610년)3월부터 인조 원년(1623년)7월까지 13년4개월간 재임했다. 또 효종때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대장은 효종에서 현종때에 이르기까지 18년간 7번이나 한성판윤 자리에 올라 역대 시장중 가장 많은 중임기록을 갖고 있다. 일제 36년간은 18명의 일본인이 경성부윤으로 재임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광복후 첫 서울시장은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임명된 김형민씨로 역대 시장중 최연소인 39세였다.서울특별시장으로는 49년 8월15일 관제개편과 함께 이기붕씨가 처음으로 취임했다.초창기 이기붕·윤보선·허정씨 등 거물급 정치인을 거쳐 4·19 직후에는 헌정사상 유일한 민선시장인 김상돈씨가 등장했고 5·16쿠데타와 함께 현역 육군소장 윤태일씨가 「군복 집무」를 하기도 했다. 정도 이후 서울시장을 거쳐간 1천4백18명의 평균 재임기간은 5개월이었다.
  • 무악재/고개:하(서울 6백년 만상:61)

    ◎길마재·모래재·추모현으로도 불려/서울 서쪽관문… 이활의 난땐 관·반군격전지/중구사신 맞던 영은문자리에 「독립문」 우뚝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과 홍제동을 잇는 무악재는 왼편에 안산,오른쪽에 인왕산을 끼고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고개다. 지금은 여러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고갯길이 35m로 넓혀지고 높이도 훨씬 낮아졌지만 예전에는 서울 서쪽 관문의 좁은 길목이었다.명나라 사신 동월은 『천길 이어진 그 기세가 어찌 천군만 누를 수 있으랴.서쪽을 바라보니 좁은 길이 있는데 말 한필 겨우 지나 갈 수 있다』고 당시의 고개를 묘사하고 있다. 서울 시민들에게는 무악재 또는 홍제동고개로 더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길마재·추모현·모래재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길마재는 고개 왼편에 있는 안산의 한자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 산의 형상이 「길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또 모래재는 고개가 흙이 아닌 모래로 덮여 있어서이고 추모현은 영조가 명릉(숙종릉)의 역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이 고개에서 능을 바라보며 추모했다고해서 얻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무악이라는 명칭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위해 지금 경복궁·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과 인왕산등과 함께 도읍의 주산을 다투면서 안산을 무악산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 실학자 이수광이 쓴 지봉류설에는 『아이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을 한 부예암(북한산 인수봉)이 밖으로 뛰쳐 나온 형상이므로 이를 어미산 즉 모악』이라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적고 있다. 재의 이름이 다양한 만큼이나 이 고개엔 조선왕조의 참담했던 수많은 역사들이 그대로 숨쉬고 있다. 인조 2년(1624)이괄의 난때는 관군과 반군이 맞선 격전지였다. 당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하는데 앞장섰던 이괄은 중신들의 견제로 말미암아 평안병사로 쫓겨가 분을 삭인다.조정에서는 역모의 조짐이 있다고 해서 이괄의 아들을 볼모로 불러들였으며 이괄이 이에 반발,인조 2년 정예병력 1만2천여명을 이끌고 서울에 난입한 변란이 바로 이괄의 난이다.백성들이 인왕산과 남산 성벽을 따라 빼곡히 들어서 구경을 하는 가운데무악재에 진을 친 금남 정충신등이 이괄이 이끄는 반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전승지이면서 내환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이 고개는 또 초입에 버티고 있던 모화관과 영은문이 말해주듯 중국사신들이 거드름을 피우고 드나들고 조선처녀들이 진상이라는 이름으로 울고 넘던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이 묶던 모화관은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독립문 바로 앞에 서있는 영은문을 떠 받치고 있던 두개의 커다란 석주는 오늘날까지 역사의 잔영으로 남아있다. 고종 32년(1895)민족의 수치였던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자주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이 건립되면서 무악재는 민족의 희망이 숨쉬는 고개로 다시 태어나게 됐다. 고개 밑으로 지하철 3호선이 통과하고 출퇴근길이면 서울의 보통고개들처럼 차량행렬이 홍수를 이루지만 재를 넘어 이어진 국도1호선은 통일로로 내달린다. 조상들이 중국의 5백년 속박에서 벗어나던날 이곳에 독립문을 세웠듯이 민족의 소망을 담은 통일문이 이 고갯마루를 시작으로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 정자:하(서울 6백년 만상:58)

    ◎창덕궁 후원엔 아직도 15개 정자 그대로/부용정·관람정 등 다양한 형태로 보존/부암동 석파정,대원군 별장으로 유명 정자의 보고인 창덕궁 후원에는 지금도 관람정·애련정·승재정·능허정·청심정등 무려 15개의 정자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자리잡고 있다.방형·육각형·다각형·부채 모양의 다양한 정자는 연못,그리고 누각등을 배경으로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전체면적이 약 9만여평에 이르는 창덕궁 후원은 북악에서 내려뻗은 완만한 언덕과 여기저기에 맑은물이 흐르는 개천이 있어 연못과 정자를 꾸미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태종때 창건됐다가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창덕궁에 이처럼 많은 정자가 지어진 것은 후원의 대규모 조성공사가 벌어진 광해군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원 중심에 있는 연못인 부용지 남쪽에는 사방에 창살문까지 꾸며진 부용정이 마치 물위에 뜬 형상으로 있고 북쪽에는 연회장으로 유명한 주합루가 자리잡고 있다.또 한반도 모양의 연못 반도지 동쪽에는 우리나라 유일의 부채꼴형 정자인 관람정이,남쪽에는 육모지붕의 존덕정이,연못 반대편 언덕위엔 마치 절간같은 승재정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임금들이 산책을 하는 도중 들러 정사로 복잡해진 심신을 식히거나 대소신료와 외부 손님을 불러들여 연회를 베풀기에 정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였다.또한 조정 중신들이 한가한 시간을 틈내 독서를 하거나 강론을 펴는 곳으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이등박문등 일본의 대신들을 접견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자하문터널을 지나 세검정으로 가는 길목인 부암동동사무소에 인접한 종로구 부암동 316의1에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유명한 석파정이 있었다.석파정은 본래 철종때의 권신인 김흥근의 별장이었는데 대원군이 이 별장을 빼앗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철종이 승하한 뒤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등극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대원군은 그동안 수모를 주었던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골몰했으며 특히 그 권문의 한 사람인 김흥근을 미워했다.대원군은 주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의 물이 맑아 그야말로 별천지인 석파정을 김흥근으로부터 빼앗기로 하고 꾀를 냈다. 일단 자신의 부인 병요양을 핑계로 임시로 석파정을 빌려쓰던 대원군은 어느날 『대궐에만 갇혀 계시니 좀 갑갑하시겠냐』며 고종을 석파정으로 초청했다.고종이 도착한뒤 저녁 무렵이 되자 대원군은 대전 내시를 통해 상감께서 오늘밤 이곳에서 유숙하기로 했다는 담화문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국왕이 한번 유숙한 곳은 민간인의 소유를 금하는 국법을 이용해 김흥근으로 하여금 석파정을 포기케 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사연을 지닌 석파정은 대원군 사후에도 계속 왕실에 세습돼 오다 일제때는 총독부 소유로 변했으며 6·25 직후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이 터를 잡기도 했다. 지금 석파정에서 세검정쪽으로 2백m 내려간 홍지동 125에는 옛날 석파정의 일부였다가 떨어져 나온,「대원군별장」으로 불리는 사랑채 하나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석파정은 서울시 지정문화재 26호로,대원군별장은 23호로 지정돼 개인들이 관리하고 있다.
  • 압구정/한명회가 은퇴 앞두고 지어/정자:상(서울 6백년만상:56)

    ◎한강 보이는 절경에 자리… 풍류객 줄이어/세검정은 총융청 군인 여가용으로 세워 「산수가 좋은 곳에 놀기 위해 지은 집」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같이 정자는 우선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고 생활의 여유를 형이상학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었다. 정자에서 선비들이 술잔을 나누거나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는 것은 요즘 사람들이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서울에는 옛날부터 많은 정자가 있었다.남산과 북한산의 계곡은 물론이고 한양의 남쪽을 흐르는 한강변에 많은 정자가 지어졌으며 이곳에서 시인·묵객들은 경치를 즐기면서 많은 시가를 남겼다. 오늘날 서울의 지역이름으로 유명한 압구정과 세검정은 이러한 정자 명칭에서 비롯되었다. 강남구 압구정동은 조선초 유명한 권신인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에서 유래되었다. 성종때 정계은퇴를 앞둔 한명회는 명승지를 찾아 풍류로 세월을 보내기 위해 지금의 압구정동 산 310의3 부근 언덕에 압구정을 지었다. 압구정이 위치한 곳은 지금의 압구정동 456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로 잠실쪽에서 흐르는 한강줄기가 서남쪽으로 꺾어지는 모습이 내려다보이고 닥나무가 무성했던 저자도가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의 땅이었다.압구정이란 「오리·갈매기와 사귀는 정자」라는 뜻으로 세속의 일을 잊어버리고 갈매기를 벗삼아 남은 생애를 조용히 보내겠다는 뜻을 담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자이름과는 달리 권세와 명리에 밝은 한명회가 권력을 놓을 생각을 않자 성종때의 문신 최경지는 압구정을 지나면서 『임금의 은총 깊으니 정자가 있어도 와서 즐길 시간이 없네.가슴속에 공명심만 없어진다면 오리·갈매기와 사귈 수 있으리』라는 시를 지었다. 주인이야 어떻든 조선 말기까지 많은 명사·시인들이 찾아와 풍류를 즐기고 명시를 남겼던 압구정자리에는 지금 고층아파트들만이 숲을 이루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와는 달리 자하문밖 종로구 신영동 사천계곡옆에 6각형 모양으로 지어져 오늘날에도 모습을 볼 수 있는 세검정은 오히려 그 유래가 분분하다. 1623년 인조반정때이귀·김유 등이 광해군 폐위를 논하면서 이곳에서 칼을 씻었다는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으며 연산군이 유흥을 위해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년)에 북한산성의 수비를 맡던 총융청 군인들이 군영 부근의 경치좋은 곳을 택하여 여가를 즐기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세검정 일대는 북한산 남쪽기슭과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냇물을 이루고 뒤에는 북한산의 연봉이 아늑하게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등 산수풍경이 절정을 이뤄 계절에 관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물이 워낙 맑아 역대 왕들의 실록이 완성되면 그 실록 초고를 이곳에서 세초해 기록을 없애고 종이는 재생하여 썼다고 전해진다. 임금들은 실록을 완성한 뒤 이곳을 찾아와 연회를 베풀었으며 물이 불어날 때는 도성사람들이 몰려와 물구경을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세검정은 1941년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 화재때 불타 없어졌으나 지난 77년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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