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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신종 광진公 사장 “유사 공기업 합병 바람직”

    김신종 광진公 사장 “유사 공기업 합병 바람직”

    김신종 대한광업진흥공사(광진공) 신임 사장이 13일 “공사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국내 유사 공기업과의 합병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흡수합병이 쉽지 않으면 지주회사 아래 독립 사업부제를 두는 방안 등도 가능하다고 말했다.2012년까지 해외 광물생산 사업을 38개로 늘리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김 사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정부가 광진공의 법정 자본금(법적으로 정해 놓은 자본금 한도)을 지금의 6000억원에서 3조원으로 늘리기로 했지만 현실적으로 몇 년 안에 실제(납입) 자본금을 5배 키우기는 어렵다.”며 “가장 현실적 대안은 비슷한 기능의 공기업을 한 데 묶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광진공과 업무 연관성이 있는 곳은 석탄공사, 광해방지사업단 등이다. 자본잠식 상태인 석탄공사의 경우,1조원에 이르는 빚을 정부가 털어준다면 광진공과의 합병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부실 청산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김 사장은 “자본금 1조원도 안되는 지금의 덩치로는 해외 광물자원 개발 및 확보에 한계가 있다.”며 “조달청에서 상당부분 관장하는 비축광물 업무도 광진공으로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사 혁신도 예고했다. 김 사장은 “현재 33%인 해외사업 비중을 50%로 끌어 올릴 방침”이라며 “이를 토대로 지난해 말 현재 7개인 해외 생산사업을 2012년까지 38개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유연탄, 우라늄, 철, 동광, 아연, 니켈 6대 전략광물의 자주개발률이 23%에서 38%로 올라간다.2012년 세계 20위권 광업 메이저기업으로 진입한다는 프로젝트다. 필요한 재원 17조원은 정부 재정, 광물펀드, 회사채 발행 등을 통해 5조원, 민간기업 투자 유치를 통해 12조원을 각각 조달할 방침이다. 사명도 한국광물자원공사로 바꾼다. 김 사장은 “경제성이 높은 해외광산을 발굴해 국내 투자자와 연결시키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겠다.”며 “재개발 가능성이 엿보이는 50개 폐광 가운데 22개를 인수, 직접 개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폐광의 부활’에 더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84) 다시 화친을 시도하다(Ⅱ)

    1637년 1월3일, 도성으로부터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12월 그믐과 정월 초하루, 몽골병들이 도성으로 몰려들어 사람들을 붙잡아가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내용이었다.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홍타이지는 휘하 장졸들에게 군기를 확립하고 함부로 약탈을 자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시’일 뿐이었다. 더욱이 몽골병들은 무엇인가 보상을 바라고 청에 귀순했고, 또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었다. 군기를 강조하여 그들의 ‘욕구’를 언제까지고 묶어두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지켜 줄 군사도, 이끌어 줄 조정도 없는 상황에서 도성 백성들은 몽골병들의 분탕질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안쓰러웠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도성 사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칭신(稱臣) 여부를 둘러싼 고민 1월3일,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한 조정은 당장 홍타이지의 ‘조유(詔諭)’에 회답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조유를 건네받는 자리에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거부하지 못한 이상, 조선은 이제 ‘오랑캐의 신하’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인조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회답서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영의정 김류가 입을 열었다.‘나라가 살아남은 뒤에야 명분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장차 무슨 명분을 논하겠습니까?’ 김류는 자신이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다. 청에 대해 ‘칭신(稱臣)’하는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여 ‘천하 후세의 죄인’이 되더라도 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김류가 울자 인조도 울기 시작했다.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망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탄식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뒤 벌써 여러 차례 눈물을 보인 인조였다.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용상에 오를 적에만 해도, 아니 정묘호란 직후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렇게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젠 오랑캐에게 신하를 칭하며 머리를 숙여야 할 판이었다. 눈물이 잦아질 만도 했다. 이홍주(李弘胄)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상 ‘대청황제(大淸皇帝)’라는 호칭을 써야 한다고 했다. 홍서봉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지금 상황에서는 군부(君父)를 보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 저들의 지적대로 요금원(遼金元) 시절의 고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이 유일한 방도라는 주장이었다. 김신국은 두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면서도 선을 그었다. 그들에게 칭신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하더라도 인조가 직접 홍타이지를 대면하게 되는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월30일, 인조가 성을 나가서 항복할 때까지 조선 조정이 끝까지 피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문제였다. 장유(張維)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단 ‘조유’에서 홍타이지가 질책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과하되,‘칭신’ 여부는 그들의 반응을 본 다음에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식(李植) 또한 ‘대청황제’라는 칭호는 그냥 사용하되 ‘칭신’은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료들은 답서의 서식(書式)과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외로운 성에 갇혀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오랑캐’로 멸시해 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논란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황제’임을 인정하다 고민과 논란 끝에 홍타이지에게 보내는 답서를 완성했다. 답서의 맨 앞에 ‘조선국왕은 삼가 대청국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께 올립니다.’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에 보내는 서신을 ‘조유’ 운운하면서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려 했던 홍타이지와 청의 위상을 처음으로 인정한 표현이었다. 답서는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내용으로 채웠다.‘소방(小邦)이 대국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불렀습니다. 특사(特使)를 보내 정성을 드리려 했으나 병과(兵戈)에 막혀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황제께서 궁벽한 구석까지 오셨다는 소식에 의심과 믿음,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소방이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 소방 신민들의 식견이 얕고 좁아 대국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위기에 처한 조선의 고민이 형식과 내용 모두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눈앞에 닥친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되, 자존심을 최대한 살리려는 몸짓이었다.‘조유’ 속에 넘쳐나는 홍타이지의 ‘질책’ 내용을 대부분 사실로 인정하면서 사죄했다. 주목되는 것은 호칭이었다.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조선을 ‘소방’으로, 인조는 ‘조선국왕’이라 했다. 맨 마지막에는 의연히 숭정(崇禎) 연호를 사용했다.‘조선 국왕 신(臣) 모(某)’란 표현을 쓰지 않음으로써 ‘칭신’은 일단 거부했다. 또 청의 연호 대신 명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에 대한 충성 또한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담았다. 답서의 뒷부분은 홍타이지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 것이 대국의 도리입니다. 정묘년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生靈)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방에게 새로워 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여 청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홍서봉(洪瑞鳳),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이 답서를 들고 다시 청 진영으로 갔다. 황제는 만나지 못했다. 답서를 접수한 마부대는 상의한 뒤에 회답을 주겠다고 했다. ●비변사의 독주에 대한 반발 상황에 밀려 화친을 다시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우선 비변사의 몇몇 신료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화친을 추진하는 것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비변사 신료들은 과거 척화·주화 논쟁 때처럼 논란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여 적진에 보내는 문서의 초안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주고받았다.‘인조실록’의 사평(史評)에는 승지와 사관(史官)이 보지 못하도록 소매에 넣어 출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상소했다.‘우리는 참월(僭越)하게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는 오랑캐에 맞서 명나라를 대신하여 화란을 당하는 것’이니 ‘의열(義烈)에 당당하고 해와 달에 비춰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의 국서를 태워버림으로써 장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화친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답서를 보낸 다음부터 삼사(三司)의 관원들은 다시 최명길(崔鳴吉) 등 비변사 당상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에 대해, 적의 세력을 과장하고 화친을 주도하면서 나라를 치욕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류에 대해, 하는 일 없이 겁만 많아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유백증(兪伯曾)은,‘칭신’한다고 해서 포위가 풀린다는 보장이 없다며 나라를 그르친 김류와 윤방(尹昉) 등의 목을 베라고 외쳤다.‘조유’에 대한 답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격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보였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신료들 사이의 논란을 다시 방치할 경우, 화친의 시도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637년 1월 초, 청과 조선은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홍타이지의 ‘조유’와 조선의 답서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조선의 ‘꿈’은 청과의 형제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비록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를 ‘조선의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목상 ‘홍타이지의 동생’이자 ‘조선국왕’으로 남아 명과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홍타이지는 ‘조선국왕’이란 표현 대신 ‘신(臣) 이종(李倧·인조의 이름)’을,‘숭정’ 대신 자신들의 ‘숭덕(崇德)’ 연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의 꿈이 실현될지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공기업에 ‘정치인 보은 인사’ 논란 확산

    공공기관에 정치인 출신이 잇따라 선임되면서 ‘보은 낙하산’ 논란이 커지고 있다. 지난 4·9총선의 낙천·낙선자들이 공기업 수장과 감사 자리를 슬그머니 꿰차는 양상이다. 7일 기획재정부와 지식경제부 등에 따르면 전날 한국조폐공사 신임사장에 전용학 전 의원이 선임됐다. 충남 천안 출신의 전 사장은 원만한 성품과 언론인 특유의 예리함을 갖췄다는 평가다. 하지만 4·9총선 때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충남 천안갑)했다가 떨어진 전력 탓에 ‘보은 인사’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17대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회 청년본부 총괄단장 등을 지냈지만 공천(강원 동해·삼척)에서 탈락한 이이재씨는 한국광해관리공단 이사장에 선임됐다. 재공모가 진행 중인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에는 임인배 전 한나라당 의원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임 전 의원은 총선 공천(경북 김천)에서 탈락했다. 역시 공천에서 탈락한 안택수 전 한나라당 의원은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임명됐다.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은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유력시된다. 홍문표·이재웅·권오을·김광원 전 의원 등도 공공기관 수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린다. 별다른 책임이 없어 ‘꽃보직’으로 불리는 감사에도 낙천·낙선자들이 많이 입성했다. 김주완·정광윤씨가 각각 한국전력기술과 한국가스공사 감사에 선임됐다. 김 감사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정 감사는 권철현 전 한나라당 의원의 보좌관 출신이다.4·9총선 때 낙천했다. 가스공사 노동조합은 “전문성은커녕 가스산업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인사가 감사로 선임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5일째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성권 전 한나라당 의원은 코트라 감사로 선임됐다. 공공노조측은 “감사 자리는 기관장과 달리 눈에 띄지 않아 정치권 낙하산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며 “아직 감사 선임이 진행 중인 기관이 많아 낙하산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지난해 ‘이과수 관광’으로 논란을 빚었던 ‘감사포럼’ 소속 상임감사 가운데 정치권 관련자는 70%나 됐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쏟아지는 물폭탄 뼛속까지 ‘덜덜덜’

    쏟아지는 물폭탄 뼛속까지 ‘덜덜덜’

    폭염이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끈적거리는 무더위를 한 방에 날려 버릴 비책을 찾는다면 폭포가 좋은 대안이 된다. 폭포수에 몸을 맡기면 더위쯤은 어느새 남의 일이 되고 만다. 내 나라 안에 폭포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물을 맞을 수 있는 폭포는 흔하지 않다. 이름난 대형 폭포들은 대부분 폭포수가 수면으로 직접 떨어지거나 깊은 물 웅덩이를 안고 있기 때문에 출입할 수가 없다. 전국의 유명 물맞이 폭포들을 모았다. 혹서와 짜증, 불쾌지수 불가침 지역들이다. ●물맞이 폭포 1번지 수락폭포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던 예전엔 어떻게 무더위를 이겨냈을까. 선조들은 절기에 맞춰 폭포에서 물맞이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옷날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목욕을 하면 무병하다 하여 ‘단오물맞이’를 했고, 칠월칠석에도 ‘칠석물맞이’라 해서 산간계곡의 폭포를 찾아 목욕을 하는 물맞이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 지리산 자락의 수락폭포는 ‘물맞이 폭포 1번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낙수 지점의 공간이 넉넉해 어른 10명 정도가 동시에 물을 맞을 수 있는 것이 자랑거리. 폭포와 이어지는 계곡 또한 크고 넓어서 많은 관광객을 품을 수 있다. 주차장에서 계곡길을 따라 100m 정도 올라가자 우렁찬 파열음이 들린다. 물 떨어지는 소리다. 옆으로 입술이 파래진 채 아래턱을 덜덜 떨며 지나는 관광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나같이 팔로 몸을 꼭 감싸안은 모습이다. 물맞이가 더위를 피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구례군청 박미연(35) 문화관광해설사는 “의학적 근거는 없지만 낙수의 안마 효과를 보기 위해 수락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신경통이나 관절염, 특히 산후통이 있는 여성들이 물맞이를 즐긴다.”고 설명했다. 경기도 성남시에서 온 이상훈(43)씨도 “처음엔 물줄기가 따가웠지만,5분 정도 지나자 통증이 사라지고 스트레스도 씻겨나가는 듯했다.”며 말을 보탰다. 많은 사람들이 쉼없이 폭포 아래를 오가며 20여m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로 ‘자연 마사지’를 즐기고 있다. 하지만 폭포 밑이 사람으로 넘쳐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래 머물 수 없기 때문에 자리가 쉽게 나는 편이다. 찬물을 뒤집어쓴 다음, 폭포 아래 발을 담근 채 시원한 수박 한쪽을 먹는다. 무더위가 끼어들 틈이 없는 풍경이다. 수락폭포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진다. 폭포 원줄기가 떨어지는 곳은 남녀가 함께 물을 맞는 ‘혼탕’이다.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곳. 워낙 물살이 세 모자와 옷을 갖춰 입어도 2분 이상 버티기 어렵다. 원줄기 왼쪽은 별도 물줄기로 만든 ‘여탕’이다. 물에 젖은 몸의 실루엣을 보이기 부끄러워하는 여인들이 주로 찾는다. 약 30m 윗쪽은 남자들을 위한 공간. 여성들의 시선을 피해 좀 더 ‘과감한’ 모습으로 물맞이를 즐긴다. 폭포 아래쪽으로 갈수록 계곡수가 완만하게 흐르며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맞춤한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박 해설사에 따르면 차로 15∼20분가량 떨어진 지리산 온천랜드와 수락폭포를 번갈아 이용하며 냉·온탕을 오가는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 폭포에서 물맞이를 하려면 머리에 뒤집어쓸 수건이나 모자, 두툼한 비닐봉투를 반드시 가져가는 게 좋다. 주의할 점 한 가지. 폭포수를 맞을 때 윗도리는 바지 바깥으로 빼놓는 게 좋겠다. 세찬 물살에 속옷이 드러나는 낭패를 피하려면 말이다. 구례군청 문화관광과 061)780-2255.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간고속도로→함양 분기점→88고속도로 광주방면→남원 나들목→19번국도 구례방면→밤재터널→산동→수락폭포 ▶맛집:산동면 탑정리 은행나무집(781-6006)은 염소고기 수육(3만 3000∼5만 5000원)을 잘하기로 소문난 집 ▶주변 볼거리:산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사성암과 조선시대 양반 가옥인 운조루, 지리산 화엄사 등이 대표 볼거리. 어린이와 함께라면 농업기술센터를 찾아도 좋겠다. 장수풍뎅이 애벌레 분양, 봉숭아 꽃물들이기(23일까지) 등의 행사를 벌이고 있다.780-2551. /ci0000 ●청도 8경 낙대폭포 청도의 진산, 남산 중턱에 있는 높이 30여m의 폭포다. 기암괴석과 울울창창한 숲이 어우러진 가운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와 깊은 계곡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할 정도. 청도군청 문화관광과 (054)370-2372. ▶가는 길:경부고속도로→신대구∼부산간고속도로→청도 나들목→우회전→청도군청→남산 등산로→낙대폭포 ▶맛집:청도는 추어탕이 유명한 곳. 청도추어탕(371-5510), 역전추어탕(371-2011) 등이 잘한다. ▶주변 볼거리:▲화양읍 송금리 와인터널은 내부온도가 항상 13∼15℃내외를 유지해 여름철 피서지로 제격인 곳. 현재 감와인 숙성저장고와 와인카페로 사용하고 있다. 입장은 무료. 간단한 와인 시음도 할 수 있다.▲운문면 운문사는 ‘청도의 눈’으로 불리는 명찰. 대웅보전 등 7점의 문화재와 천연기념물 180호인 처진소나무 등이 있다.▲화양읍 유등리 유등연지는 8월 중순까지 연꽃이 절정을 이룬다./ci0000 ●남녀의 애절한 사랑 깃든 만연폭포 예로부터 한여름이면 신경통 환자들이 제집 드나들듯 했다는 유명한 물맞이 폭포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만석이와 연순이가 폭포 아래로 함께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높이는 10여m. 수량이 많아 소리만 들어도 더위가 가실 만큼 물소리가 우렁차다. 화순군청 문화관광과 (061)370-1227. ▶가는 길:호남고속도로→동광주 나들목→지원 나들목→광주광역시→너릿재터널→화순읍→아파트단지 사거리→만연폭포 방향 좌회전→큰재→수만리→만연폭포 ▶맛집:달맞이 흑두부는 검정콩으로 빚은 흑두부에 돼지고기를 얹은 보쌈이 맛있는 집.372-8465. 영벽정 식당은 메기매운탕으로 소문났다.372-1210. ▶주변 볼거리:▲중국 양쯔강 적벽에 비유되는 ‘화순적벽’은 동복호로 흘러드는 창랑천을 따라 늘어선 노루목적벽, 물염적벽 등을 합쳐 부르는 말.▲운주사는 천불천탑(千佛千塔)으로 유명한 절집이다./ci0000 ●바다와 마주한 제주 소정방폭포 서귀포시 소정방폭포는 돈내코계곡의 원앙폭포와 더불어 제주도의 대표적인 물맞이폭포로 꼽힌다. 물맞이와 해수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 높이는 7m쯤 된다. 특히 물마사지가 신경통에 곧잘 듣는다는 입소문을 탄 이후 여름철만 되면 ‘아줌마 부대’가 대거 찾는다. ▶가는 길:정방폭포 주차장→파라다이스 호텔 옆 오솔길→소정방폭포 ▶맛집:보목리 보목항은 제주도민들이 즐겨찾는 자리돔 생산지. 자리돔 물회 등을 파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주변 볼거리:▲쇠소깍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 곳.▲천지연폭포와 인근 삼매봉 등은 야경과 함께 산책을 즐기기 좋다./ci0000 ●찬바람 나오는 얼음골도 있어요 바위틈에서 차가운 바람이 품어져 나와 더위를 식혀주는 ‘천연 에어컨’ 풍혈도 무더위를 피하기 딱 좋은 곳. 경남 밀양시 산내면 천황산 자락의 얼음골이 대표적이다. 한여름에도 찬바람 때문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얼음이 얼기도 한다. 이 밖에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의 빙혈, 충북 제천시 수산면 수레골 동굴, 경북 청송 얼음골 등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얼음굴이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풍혈냉천과 강원 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한골, 경기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풍혈 등은 여름 내내 찬바람이 불어나오는 곳이다. 글 사진 구례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집유’ 이건희 前회장 항소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항소했다. 23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항소 기한 마지막날인 이날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 전 회장과 함께 조세포탈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집행유예 및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 최광해 전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장도 항소했다. 이 전 회장의 변호인인 이완수 변호사는 “사기 등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포탈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과 벌금 액수에 대해 항소심의 판단을 받아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앞서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이 전 회장 등에 대한 1심 선고 하루 뒤인 지난 17일 항소장을 낸 바 있다. 보험금 미지급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 횡령한 혐의로 기소됐다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황태선 삼성화재 전 사장도 이날 항소장을 제출했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이건희 前회장 집행유예 5년·벌금 1100억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과 조세 포탈,증권거래법 위반 등 3개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전회장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5년,벌금 1100억원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민병훈 부장판사)는 16일 이 전 회장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차명 주식거래를 통한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일부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이같이 선고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면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조세포탈 행위는 조세 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시키고 국가 과세권을 침해했으며 유죄로 인정된 포탈 세액이 456억원에 이른다.”며 “다만 시세차익을 노렸다거나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부정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앞서 이 전 회장과 이학수 전 부회장 등 핵심 임원 8명은 에버랜드 CB를 이재용씨 등에 편법으로 증여하고 삼성SDS BW를 저가로 발행한 혐의 및 차명계좌로 계열사 주식을 매매해 1120여억원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대해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에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었다. 재판부는 이학수 전 부회장에 대해 확정 판결시점을 기준으로 2003∼2004년도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 및 벌금 140억원을,2005∼2007년도 조세포탈에 대해서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벌금 600억원을 각각 선고했다. 한편 김인주 전전략기획실 사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740억원,최광해 전전략지원팀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400억원을 선고받았다.에버랜드 CB 사건으로 기소된 현명관 전 비서실장 등 2명은 무죄,삼성SDS BW 사건으로 기소된 김홍기 전 삼성SDS 대표이사 등 2명은 면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에버랜드 CB 편법증여 의혹과 관련 “CB 3자배정 발행 여부가 쟁점인데 이는 CB 인수권이 주주에 실제로 주어졌느냐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며 “이사회 결의 및 주주통지 등 절차 흠결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인수권을 줬다고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전했다.이어 “법인주주들의 경우 경영자들의 실권 결정이 해당 법인에 손해를 입히는 구조로 배임죄 성립 가능성이 있고 피고인들도 공동정범이 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는 해당 법인주주에 대한 배임행위와 관련된 것이라 사건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없어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삼성SDS BW 저가발행 의혹에 대해서는 “신주인수권 행사가를 낮게 설정해 임무를 위배했느냐를 판단했을 때 BW발행 직전 주식거래 가격이 (특검 기소대로) 5만 5000원이라는 것은 인정되지만 유통량·가격 왜곡 가능성이 적다.”며 “5만 5000원이 객관적 교환가치를 반영한다는 특검측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반면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규정이 신설된 1999년 이후의 경우에는 양도차익의 목적이 아니더라 입출금 거래 내역 등을 종합하면 부정한 행위로 봐야 한다.”며 일부 유죄 판결했다. 글 /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이건희 전회장 ‘조세포탈’ 집유5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과 조세 포탈,증권거래법 위반 등 3개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삼성그룹 전회장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5년,벌금 1100억원이 선고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민병훈 부장판사)는 16일 이 전 회장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차명 주식거래를 통한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일부 유죄 판결을 내리며 이같이 선고했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면소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조세포탈 행위는 조세 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시키고 국가 과세권을 침해했으며 유죄로 인정된 포탈 세액이 456억원에 이른다.”며 “다만 시세차익을 노렸다거나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부정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앞서 이 전 회장과 이학수 전 부회장 등 핵심 임원 8명은 에버랜드 CB를 이재용씨 등에 편법으로 증여하고 삼성SDS BW를 저가로 발행한 혐의 및 차명계좌로 계열사 주식을 매매해 1120여억원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에 대해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에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었다. 재판부는 이학수 전 부회장에 대해 확정 판결시점을 기준으로 2003∼2004년도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 및 벌금 140억원을,2005∼2007년도 조세포탈에 대해서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5년,벌금 600억원을 각각 선고했다. 한편 김인주 전전략기획실 사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740억원,최광해 전전략지원팀장은 징역 3년에 집유 4년 및 벌금 400억원을 선고받았다.에버랜드 CB 사건으로 기소된 현명관 전 비서실장 등 2명은 무죄,삼성SDS BW 사건으로 기소된 김홍기 전 삼성SDS 대표이사 등 2명은 면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에버랜드 CB 편법증여 의혹과 관련 “CB 3자배정 발행 여부가 쟁점인데 이는 CB 인수권이 주주에 실제로 주어졌느냐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며 “이사회 결의 및 주주통지 등 절차 흠결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인수권을 줬다고 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라고 전했다.이어 “법인주주들의 경우 경영자들의 실권 결정이 해당 법인에 손해를 입히는 구조로 배임죄 성립 가능성이 있고 피고인들도 공동정범이 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이는 해당 법인주주에 대한 배임행위와 관련된 것이라 사건 공소사실과 동일성이 없어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삼성SDS BW 저가발행 의혹에 대해서는 “신주인수권 행사가를 낮게 설정해 임무를 위배했느냐를 판단했을 때 BW발행 직전 주식거래 가격이 (특검 기소대로) 5만 5000원이라는 것은 인정되지만 유통량·가격 왜곡 가능성이 적다.”며 “5만 5000원이 객관적 교환가치를 반영한다는 특검측의 입증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반면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서는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에 대한 과세 규정이 신설된 1999년 이후의 경우에는 양도차익의 목적이 아니더라 입출금 거래 내역 등을 종합하면 부정한 행위로 봐야 한다.”며 일부 유죄 판결했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이건희 前삼성회장 징역7년 구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과 조세 포탈, 증권거래법 위반 등 3개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징역 7년이 구형됐다.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10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민병훈) 심리로 열린 이 전 회장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에 벌금 3500억원을 구형했다. 이 전 회장과 함께 특경가법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에게는 각각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발행 사건으로 기소된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과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을 주도한 김홍기 전 삼성SDS 대표이사와 박주원 전 삼성SDS 경영지원실장에게는 징역 3년씩을 구형했다. 이 전 회장의 차명주식을 관리,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의 공범으로 기소된 최광해 부사장에게도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조 특검은 의견진술에서 “이번 사건은 대주주인 총수가 경영지배권을 행사하는 구조에서 비서실을 이용해 일가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고 조세포탈과 계열사에 손해를 입히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라면서 “구조적 불법행위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단죄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검 쪽은 에버랜드·삼성SDS 사건에서 전략기획실 주도로 처음부터 지배권 이전을 목적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남매에게 배정하기로 정해놓고 CB와 BW를 발행했으며, 주주총회 결의 등을 거치지 않은 절차적 불법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변호인단은 에버랜드·삼성SDS 사건에 대해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니라 주주의 손실이 이 전무의 이득으로 이어진 것”이라며 배임 혐의를 부인했다. 이 전 회장은 “회사 주식이 자식에게 넘어가는 문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 것은 내 잘못이 크다. 법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모든 책임을 내가 지는 것이 마땅하니 아랫사람들은 선처해 달라.”고 말했다. 이 전 부회장은 “책임질 일이 있으면 내가 질 것이니 건강이 좋지 않은 회장님은 선처해 달라.”고 호소했다. 선고 공판은 16일 오후 1시30분에 열린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은 그룹 차원의 논평은 내지 않았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중형이 나올 줄 몰랐다.”며 침통해했다.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에게 돌려줘 애정 갖게 하는 것”

    ‘유적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출입을 막고 보존하기보다 활용방안을 세워 시민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경기도 고구려 유적 보존과 정비를 위한 심포지엄’에 나서는 주제발표자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 경기도 지역 고구려 유적의 보존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이 심포지엄은 10일 경기 수원시 경기문화재단 다산홀에서 열린다. 경기도의 고구려 유적은 서울시 광진구 및 중랑구와 맞닿은 구리시의 아차산보루와 용마산보루, 망우산보루를 비롯하여 모두 63곳에 이른다. 고양 고봉산성과 의정부 사패산보루, 양주 천보산보루, 파주 덕진산성, 연천 호로고루, 포천 성동리산성 등 경기북부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475년부터 이 지역을 백제에 다시 내준 551년을 전후하여 집중적으로 세워진 군사시설이다. 미리 공개된 발표문에서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는 대부분 전망 좋은 등산로에 위치하여 지속적이고 심각한 훼손 위험에 직면해 있다.”면서 “하지만 등산로를 폐쇄하여 접근을 막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활용을 전제로 하는 현대적인 유적의 보존 개념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각의 보루를 하나의 역사 유적으로 통합하는 공원 개념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면서 “발굴조사가 끝난 홍련봉1보루는 복원하고 이웃에는 유적전시관을 건립하여 ‘고구려 유적 수학여행 및 역사유적 답사코스’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김홍식 명지대 교수는 “임진강 유역의 군사요새인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당포성, 은대리성은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서 “특히 뱃길로 세 유적을 이어 고구려가 임진강·한탄강 일대에 군사시설을 세운 이유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허미형·신명종 경기문화재단 전통문화실 연구원은 “양주지역에는 29곳의 고구려 보루가 있지만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고, 산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어 접근도 쉽지 않다.”면서 “하지만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만큼 안내판을 세우고 등반지도에 유적의 위치를 표시하는 한편 문화관광해설사를 배치하여 고구려 변방의 군사유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허미형 연구원은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사유지에 위치하고 있고, 비지정문화재여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보호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시민들이 즐겨찾을 수 있는 활용방안이 마련되어 유적에 애착을 갖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본격적인 예산지원도 뒤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인사]

    법무부 ◇전보 △서울남부지검 사무국장 이태섭△서울북부지검 〃 김광수△인천지검 〃 성형섭△청주지검 〃 이상혁◇승진(4급)△법무연수원 기획과 곽명규△광주고검 사건과장 현재우△서울북부지검 검사직무대리 임성일△의정부지검 집행과장 이재철△인천지검 마약수사〃 이건방△춘천지검 사건〃 이무중△〃 집행〃 장동진△〃 수사〃 김창규△청주지검 사건〃 배병관△〃 집행〃 권상주△창원지검 조사〃(검사직무대리) 황학모△광주지검 사건〃 홍근식△〃 집행〃 이성복△제주지검 총무〃 서무완△〃 사건〃 강팔성△〃 집행〃 손영섭◇전보(4급)△법무부 국가송무과 고인권△〃 검찰과 양승각△법무연수원 일반연수과장 이운연△대검찰청 범죄정보기획관실(서울중앙 검직) 유승준△〃 디지털수사담당관실(대전지검 검직) 남궁기운△〃 수사기획관실(대구지검 검직) 석기환△〃 감찰2과 김동준△서울고검 관리과장 김환영△〃 소송사무제1〃 류남진△〃 소송사무제2〃 손대익△대구고검 사건〃 허익환△부산고검 사건〃 박상욱△서울중앙지검 집행제2〃 경인현△〃 피해자지원〃 이훈호△〃 조직범죄수사〃 유문희△〃 마약수사〃 이경섭△〃 검사직무대리 김진우 김중학△서울동부지검 사건과장 김용대△〃 집행〃 고만상△〃 조사〃 박성순△〃 공판〃 허기준△서울남부지검 총무〃 신준호△〃 사건〃 정연익△〃 공판〃(대검찰청 파견) 김영헌△〃 조사〃 유영린△서울북부지검 총무〃 이재관△〃 사건〃 장기화△〃 집행〃 이순노△〃 조사〃(대통령실 파견) 최원식△〃 수사〃 전홍섭△서울서부지검 총무〃 문현철△〃 사건〃 천득현△〃 집행〃 박유수△〃 조사〃 선시홍△〃 검사직무대리 장영관△의정부지검 총무과장 서원석△〃 사건〃 박동현△〃 수사〃 강태식△인천지검 총무〃 이원형△〃 집행〃 김정옥△〃 조사〃 정금성△〃 수사〃 신종교△〃 공판송무〃 팽지현△〃 검사직무대리 양상섭△수원지검 총무과장 성용균△〃 사건〃 김희공△〃 집행〃 김복수△〃 수사〃 이종운△여주지청 사무〃 김규△평택지청 사무〃 정춘조△안산지청 사무〃 안창환△춘천지검 총무〃 정덕량△강릉지청 사무〃 조동길△대전지검 사건〃 위용수△〃 조사〃 최연식△홍성지청 사무〃 박일진△서산지청 사무〃 최준영△천안지청 사무〃 박상희△청주지검 총무〃 양태호△〃 수사〃 임건상△충주지청 사무〃 손벽수△대구지검 사건〃 서수길△〃 조사〃 이제훈△〃 수사〃 설진웅△〃 공판〃 도계록△대구서부지청 사무〃 김형동△안동지청 사무〃 서인환△부산지검 사건〃 강영길△〃 집행〃 지창호△〃 기록관리〃 김홍수△〃 범죄정보〃 원용인△〃 조직범죄수사〃 안교열△〃 검사직무대리 권태수△부산동부지청 총무과장 이돈주△〃 수사〃 노봉근△울산지검 총무〃 이종대△〃 사건〃 진철규△〃 집행〃 김경도△〃 수사〃 김두명△창원지검 총무〃 엄익삼△〃 사건〃 이종성△〃 집행〃 안민태△〃 수사〃 김지태△통영지청 사무〃 이명우△광주지검 집행〃 김현동△〃 수사〃 이득수△순천지청 사무〃 최창래△전주지검 총무〃 백상현△〃 사건〃 박성구△정읍지청 사무〃 최석봉△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상심의위원회 파견 장진건△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 김정△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 현병기 식품의약품안전청 △생물진단의약품과장 신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전보 (사무국)△미래교육전략특보(상근전문위원) 류호두△조직본부장 김경윤△학교교육지원〃 박남화△교육정책연구소장 한재갑△기획조정실장 박충서△조직국장 권영백△대외협력〃 정동섭△교원연수〃 이헌구△현장교육지원〃 강병구△정책교섭실장 김항원△정책지원팀장 신정기△총무국장 김수홍△미래교육전략팀장 김무성(한국교육신문사)△사장 이찬우△편집출판본부장 이석한△경영기획실장 서상국△출판국장 박영옥△마케팅전략〃 김종식△교육복지〃 김정호△교육문화팀장 이웅기 서울경제TV △마케팅본부 광고부국장 김창겸 우리은행 ◇단장대우 △우리금융지주사(파견) 김종운 ◇영업본부장△서울시청 김국서△본점영업부 정대식 ◇수석부장△시너지추진실 조용흥△우리금융지주사(파견) 김경완 ◇부장△개인영업전략부 이광구△카드상품개발부 장우석△카드영업지원부 이익기△카드마케팅부 조신일△카드업무지원부 송회용△직원만족센터 김석민△홍보실 박강석△ 우리금융지주사(파견) 김현수 강환복 정영진 최정 오강훈 남기명△시너지추진실 강병모△우리아메리카은행 권광석 ◇기업영업지점장△트윈타워기업영업본부 김형찬 나득수△중부〃 최종석△여의도〃 김범수 김문환△강남〃 김진△경수〃 이길영 이기회 채현식△부산경남〃 김종원 ◇지점장△가락남부 박상식△강남구청 이재철△강동구청 안길수△개롱역 김민성△개포남 김광만△건대역 신홍식△공덕동 채우석△금천구청 김인환△길동 김준환△논현남 유이환△당산역 김호철△대림3동 박용중△목동중앙 신하섭△무교 허연욱△사당북 노경상△삼릉 소주영△상도남부 김용남△성균관대학교 김치식△수송동 이해철△신길서 김용태△신림남부 정윤석△신압구정 성한주△암사동 안학식△영동중앙 김학수△오류동 유옥△오장동 윤몽룡△왕십리역 이병선△자하문 조수형△잠실서 정진국△장위동 최광호△종로 신창호△창동 박성동△청계8가 김성률△청구역 이돈남△청량리중앙 강영수△홍은동 탁병온△가좌공단 장철일△용현동 이홍현△과천중앙 황수영△구성 김명주△내손동 원종진△동의정부 이종칠△매탄동 신재덕△발안 김형식△분당정자 변형근△산본역 최창걸△수내역 김재국△신장 이두한△안산남 한윤태△여주 이동희△의왕 정한수△인계동 황성길△일산풍동 유홍일△일산호수 김성록△평촌 임종호△대덕테크노밸리 임경옥△용문역 강동은△대천 김기성△아산배방 김근인△청주 조규송△기장 손성동△녹산공단 허명수△덕천동 이춘삼△망미동 김재열△메트로시티 채규영△서면 김광해△용호동 최재용△대구 김경화△동산동 배상협△평리동 김영배△경산 구명수△구미 이영환△인동 최점동△유동 이윤재△여수 최상용△군산 엄재완△김제 이영구△영등동 강영숙 ◇법인장△홍콩우리투자은행 최정훈△러시아우리〃 최기성 ◇개설준비위원장△가산벤처지점 오길환△성내역〃 조남석△송파역〃 염정옥△향남〃 박대용△군장공단〃 이훈재△콸라룸푸르사무소 박경훈 ◇수석검사역△검사실 노치환 이원덕 ◇수석심사역△중기업심사부 이형호 ◇수석부부장△트레이딩부 신현창△홍보실 신명혁 ◇수석부지점장△뉴욕지점 정운기
  • 민선4기 기념식 대신 자원봉사

    민선4기 기념식 대신 자원봉사

    지방자치단체마다 민선4기 2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인 가운데 관악구가 자화자찬식 기념행사 대신 모든 공무원이 참여하는 일일 자원봉사에 나서 눈길을 끈다. 2일 관악구에 따르면 출범 2주년 기념일인 지난 1일 민원부서의 필수 근무인력을 제외한 직원 1000여명이 4시간 남짓 지역 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직원들이 찾아간 곳은 지역 내 경로당과 어린이집, 사회종합복지관 등 20여곳. 시설정비는 물론 이불세탁과 물청소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구슬땀을 흘려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김효겸 구청장은 일일 문화관광해설사로 나서 낙성대공원을 찾았다. 김 구청장은 “고려 명장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당시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해 낙성대란 이름이 붙었다.”며 낙성대의 유래와 관악구가 펼치는 강감찬 장군 추모행사에 대해 설명했다. 김 구청장의 일일 해설에는 서울대 규장각의 ‘청소년 내고장 문화재 바로알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학생 80여명이 동행했다. 정광진 홍보전산과장은 “행정 수요자인 주민들에겐 민선4기가 2주년을 맞았다는 게 큰 의미가 없다.”면서 “주민 속에서 땀을 흘리며 공복(公僕)의 마음가짐을 다잡자는 차원에서 기념행사를 봉사활동으로 갈음했다.”고 설명했다. 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78) 남한산성의 나날들 Ⅱ

    남한산성을 공략하려는 청군 지휘부의 계책은 치밀했다. 그들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미 1631년 홍타이지가 명의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략할 때 사용했던 전술이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히 격리시켜 그야말로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여 돈대(墩臺)와 성첩(城堞)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게 된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명장 조대수(祖大壽)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던 그 전술이 남한산성에서 재연될 판이었다. ●김류, 인조의 탈출을 건의하다 청군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데, 구원군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립된 산성에 갇힌 인조와 신료들은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소식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했다. 청군 진영을 다녀온 사절들이 들고 온 소식에 조정의 분위기는 극과 극을 달렸다. 능봉수 일행이 ‘이제 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을 논의할 수 없다.’는 소식을 가져오자 조정의 분위기는 다시 침울해졌다. 화친이 물 건너가고 말았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화친이 불가능하다면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산성의 방어 태세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1636년 12월17일 도체찰사 김류는 성첩(城堞)을 지킬 병력이 부족하다며 상을 내걸어서라도 병사들을 빨리 모집하라고 촉구했다. 병사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 도원수 김자점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도대체 그 많은 병력을 이끌고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와 산성 방어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 아닌가? 인조는 답답했다. 급히 두 사람에게 교서(敎書)를 보냈다.‘거가(車駕)가 바야흐로 포위된 성안에 있는데 안으로는 믿을 만한 형세가 없고 밖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화사(和事)는 이미 끝장났다. 경은 속히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구원하라.’ 하지만 김자점 등은 오지 않았다. 초저녁 무렵 김류를 비롯한 중신들이 인조에게 뵙기를 청했다. 김류는 인조에게 이제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날랜 병사들을 뽑아 적을 기습하여 길을 열고, 인조가 옷을 갈아입고 탈출하자는 복안이었다. 인조는 반대했다. 적이 도성에 들어와도 화살 1발 제대로 쏴보지 못한 처지에 탈출 작전이 가능하겠냐고 반문했다. 김류는 남송(南宋) 고종(高宗)의 고사를 들고 나왔다. 고종은 1126년 금군(金軍)이 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유린했을 때(정강의 변), 탈출에 성공했던 강왕(康王) 조구(趙構)를 가리킨다. 당시 포로가 되어 금으로 끌려갔던 휘종(徽宗)의 아홉째 아들이었던 그는 이후 제위에 올라 양자강 남쪽에서 송의 종사를 잇는 데 성공했다. 김류는 고종의 고사를 강조하면서 인조의 결단을 촉구했다. ●주화, 척화 논쟁이 다시 가열 인조는 다시 난색을 표했다. 청군의 복병이 곳곳에 깔려 있어 섣불리 시도할 경우 위험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자 장유(張維)가 화친을 다시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청군이 ‘왕세자 운운’ 한 것은 그들에게 화친할 의사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낙관론을 폈다. 화친을 포기하면 고립된 성에 앉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장유도 이제 공공연히 주화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장유의 발언을 계기로 대신들의 분위기가 다시 바뀌는 조짐을 보였다. 김류는 인조에게 종사를 위해 화(禍)를 완화시킬 계책을 빨리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조는 “위로는 종사를 위하고 아래로는 백관들을 위해 내가 할 일은 이미 다했다. 이제 대책은 경들에게 달렸다.”고 응수했다. 마치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인조가 다시 대책을 묻자 장유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일’이 있다고 했다. 왕세자를 인질로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김류는 ‘인질을 보내는 것은 예로부터 있던 일이고, 설사 세자를 적진에 보내도 심양으로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인조는 한숨을 내쉬며 신하들의 뜻이라면 세자를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왕세자 입송론(入送論)이 제기된 뒤 홍문관과 시강원(侍講院) 신료들이 인조에게 달려왔다. 이시해(李時諧)는 적은 지구전을 획책하려 들지 결코 화친을 꾀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인조를 만류했다. 그러면서 딴생각하지 말고 성을 지키며 적과 싸울 의지를 다지라고 촉구했다. 신료들은 왕세자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라고 주장한 자를 색출하라고 촉구하며 일제히 통곡했다. 그들은 예로부터 간신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은 화의(和議)에서 비롯되었다며 주화론자들을 다스리지 않으면 국사를 망칠 것이라고 극언했다. 인조는 홍문관과 시강원 신료들이 물러간 뒤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인조는 울음을 터뜨렸다.‘재덕이 변변치 못한 내가 본래는 잘해 보려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며 인조반정을 언급했다.‘아, 폐조(廢朝) 시절에도 없었던 일을 당하고 말았구나! 나라의 윤기(倫紀)가 사라졌을 때, 여러 어진 이들과 함께 반정하여 보위에 오른 지 이제 14년인데 끝내는 견양금수(犬羊禽獸)의 지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변변치 못한 나 때문에 망극한 일이 벌어졌으니 경들은 어찌할 것인가?’라며 울먹였다. 김류를 비롯한 신료들도 같이 통곡했다. ‘폐조’란 광해군 시절을 가리킨다.‘명에 대한 의리를 외면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양단을 걸쳤다.’는 것을 빌미로 광해군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인조였다. 그런데 이제 ‘패륜아’라고 매도한 광해군조차 겪지 않았던 ‘견양금수의 늪’에 자신이 빠지게 될 줄이야? 인조가 무엇보다 뼈아파했던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감정이 북받친 인조는 척화신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연소한 자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과격한 논의로써 끝내 이같은 화란을 부른 것이다. 당시에 만약 저들의 사자를 박절하게 배척하지 않았더라면 화란의 형세가 이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시에는 자신도 척화신들의 주장을 정론(正論)으로 여겼으니 누굴 원망하겠느냐며 말끝을 흐렸다. 인조의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인조 “왕세자 보낼 수 있다” 인조는 홍서봉에게 청군 진영에 가서 적장을 만나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전날의 일을 사과하고, 청군이 조금 물러나면 왕세자라도 보낼 수 있다고 제의하라고 했다.‘왕세자를 보낼 수도 있다.’는 인조 발언을 계기로 화친론이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성구(李聖求)가 인조를 찾아왔다. 그는 다른 입장을 제시했다. 사방의 근왕병을 불러들여 적과 결전을 벌일 태세를 갖춰야 적도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 말로만 화친을 청할 경우 오욕이 있을 뿐이니 군신 상하가 결사항전의 태세부터 갖춰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상헌 또한 결전이 없이는 화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동조했다. 맞는 말이었다. 고립무원에 군량마저 고갈되어 가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청군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었다. 이성구 말대로 이쪽에서 적을 위협할 만한 최소한의 ‘카드’가 있어야만 적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은 ‘무장들이 화의에 미혹되어 군량 걱정만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러면서 이미 부귀가 극에 이른 무장들에게 적진을 함락시키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질타했다. 12월17일 조정의 입장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적이 성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음에도 조선군은 발포하지 않았다. 어쨌든 화의를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적진에 갔던 홍서봉 일행이 돌아와 화의를 추진하기가 어렵겠다고 보고했다. 이어 청군이 증강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자 인조는 그만하라고 역정을 냈다.“방바닥이 너무 차서 늙고 병든 자들이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인조의 짜증처럼 산성의 하루하루는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26) 활쏘기를 연습하는 사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26) 활쏘기를 연습하는 사연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서 활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활쏘기는 출셋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정에서 활을 쏘는 사람을 한량이라 한다. 활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다. 김홍도의 ‘활쏘기’는 활쏘기를 연습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왼쪽에는 한 무관이 시위를 당기고 있는 사내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사내는 한쪽 눈을 감고 화살이 굽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앞에 놓인 것은 화살을 넣는 전동이다. 화살에는 종류가 퍽 많지만, 대개 연습용 화살은 유엽전이란 화살을 많이 쓴다. 유엽전은 화살촉이 버드나무 잎처럼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아래의 사내는 쪼그리고 앉아 활에 힘을 주어 교정을 하고 있다. 활은 사용하지 않을 때는 시위를 얹지 않고 풀어두고, 사용할 때 시위를 건다. 이때 힘을 주어 자신이 쓰기에 알맞게 형태를 잡아 주는 것이다. 강희언의 ‘활쏘기’는 활 쏘는 장면에 집중하고 있을 뿐 김홍도의 그림과 대동소이하다. 그림 속의 활을 쏘는 장소는 활터, 한자말로 하자면 사정(射亭)으로 아마도 조선시대 서울 곳곳에 있던 사정 중 하나일 것이다. 땅값이 금값이 된 지금 누가 활을 쏠 너른 터를 그냥 두겠는가. 근대 이후 서울의 사정은 멸종을 하고 말았다. 겨우 남아 있는 것이 인왕산 기슭의 황학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산보 삼아 찾아가 볼 것을 권한다. 황학정은 고종의 명으로 경희궁 안에 지어진 것인데,1922년 일제가 경희궁을 헐 때 지금 장소로 옮긴 것이다. ●활쏘기는 무과 급제의 제1덕목 서울에는 사정이 많았다. 나라에서 세운 사정은 대개 군사 훈련용이다. 동대문 운동장은 조선시대에 군사를 훈련하던 훈련원 터다. 따라서 당연히 사정이 있었다. 또 충융청과 같은 군영에도 자체 사정이 있었다. 창경궁 후원의 춘당대도 사정이다. 하지만 사정은 민간에 더 많았다. 서울은 인왕산 기슭의 서촌(우대),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일대를 하촌(아래대)라 하는데, 전자에는 풍소정·등룡정·등과정·운룡정·대송정의 오정이 가장 유명하였고, 아래대에는 석호정·좌룡정·화룡정·이화정 등이 있었다. 이 외에도 곳곳에 사정이 있었다. 황학정은 등과정이 있던 터에 세운 것이다. 이들 사정 사이에는 서로 시합을 하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편사놀음’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메달이 걸린 활쏘기 시합이란 양궁 일색이다. 전통적 활인 국궁은 일반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불과 일백 수십 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활은 국궁이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서 활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활쏘기는 출셋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정에서 활을 쏘는 사람을 한량이라 한다. 소과에 응시하는 자를 유학이라 한다. 문인으로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 소과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을 유학이라 하듯, 무반 쪽으로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 무과에 합격하지 않은 사람을 한량이라 하였다. 활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무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다. 무과의 과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활쏘기였기 때문이다. 무과 초시의 시험과목은 ‘경국대전’에 의하면, 목전(木箭)·철전(鐵箭)·편전(片箭)·기사(騎射)·기창(騎槍)·격구(擊毬)였다(영조 때 만들어진 ‘속대전’에 오면, 기사·기창·격구가 기추(騎芻)·유엽전(柳葉錢)·조총·편추(鞭芻)로 바뀐다). 복시도 목전·철전·편전·기사·기창까지는 동일하고 격구가 병서(兵書)를 잘 알고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강서(講書)로 바뀔 뿐이다. 마지막의 전시는 기격구(騎擊毬)와 보격구(步擊毬)가 시험 과목이 된다. 일별하여 ‘전(箭)’ 자 그리고 ‘사(射)’ 자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활쏘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과목이었다. 무과는 문과처럼 간지에 자·오·묘·유가 들어가는 해, 즉 식년에 치르는 정기시험인 식년시가 있고, 문과처럼 증광시·별시·알성시 등의 비정기시험이 있다. 식년시를 중심으로 무과를 간단히 개괄해 보자. 무과도 문과처럼 초시·복시·전시가 있다. 초시는 식년 한 해 전에 서울의 훈련원과 각 도의 병마절도사 관할 하에 치른다. 훈련원에서 70명, 각 도에서 모두 120명을 선발한다. 이 190명을 그 이듬해 서울의 병조와 훈련원에서 병서와 무예 시험을 보여 28명을 선발한다. 이것이 무과 복시다. 그리고 28명을 다시 등수를 정한다. ●숙종때 만명씩 선발… 조선 붕괴 빌미 하지만 이것은 법률상의 원칙일 뿐이다. 무과는 훨씬 많은 사람을 선발했다. 오죽 했으면 무과를 만 명을 뽑는다 하여 만과(萬科)라고 했을까. 무과가 무질서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란 미증유의 전쟁 때문이다. 광해군 12년에 처음으로 무과 만과를 베풀었다. 내용은 자세하지 않으나,‘변경 방어’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만과는 적지 않은 문제를 낳았다. 시험장에 가지 않았는데도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경우가 있었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합격자에게 어사화와 합격증서인 홍패지(紅牌紙)를 마련하게 하는가 하면, 차사(借射) 대사(代射)로 부정을 한 사람이 많아 처벌 대신 무명 100필씩을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만과는 한마디로 조선의 국가제도가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다. 숙종 1년 10월19일조의 ‘실록’을 보면 환관이 무과에 응시한 것을 계기로 하여, 모의장(毛衣匠) 등의 공장(工匠)도 무과 응시를 요구하였다. 숙종 2년에 윤휴 등의 건의로 만과를 베풀었는데, 응시자가 너무 많아 서울에서 치지 못하고 중신을 각도에 보내어 선발하게 하였다.2만명에 가까운 합격자가 나오자 발령 낼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합격자는 모두 서울에 몰려들어 벼슬을 바라지만 벼슬자리 자체가 모자라니, 원망이 없을 수 없다. 서울의 쌀값도 이들 때문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들을 군대에 졸병으로 집어넣자 아니나 다를까 반발했고 그로 인해 민심까지 흉흉해졌다. 북벌을 외쳤던 이완 대장은 당시 만과를 이렇게 비판했다.“우리나라는 조총이 장기인데, 만일 만과를 베풀면 사람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활을 택할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총의 위력을 경험했으면서도, 조선조 말까지 조총이 별달리 개량되지 않았고, 군대가 총포를 위주로 편성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무과가 활쏘기란 시험과목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후기 과거의 문란에 대해서는 알려질 만큼 알려졌지만, 대개는 문과에 대한 것이지 무과에 관한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무과는 문과보다 더 타락했다. 숙종조의 명상 남구만은 이렇게 말한다.“문과는 3년 동안 33명이 합격하는데 이것은 단지 먼 시골의 글을 못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도구일 뿐이다. 무과는 화살 한두 발이면 합격하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가 전후로 이어져 그 끝을 모를 정도다.” 문과 무과 모두 비판한 것이지만, 사실상 무과가 더 심했던 것이다. ●도심 유흥계도 장악… 한량 노는 것 연상 이것은 조선후기 내내 그러하였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계하면 무과 합격자는 문과 합격자의 10배나 되었다. 하지만 관직의 수는 무과가 문과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였다. 숙종조의 재상 최석정은, 현재 무신 당상관의 자리는 300개인데, 전직 당하관이 약 1000명에 가깝고, 무과에 합격해 아직 벼슬길에 들어서지 아니한 사람이 수천 명이나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사람들의 원망이 어찌 없겠느냐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대책은 서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정조의 치세를 보자.1784년에 세자 책봉을 경축하는 경과(慶科)를 쳤는데, 합격한 무사가 무려 2676명이었다. 정조는 이들 중 선전관으로 발령을 낼 사람을 지방 사람이라 차별하지 말고 골고루 지시한다(‘정조실록’ 8년 11월18일). 선전관은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며 호위하고 임금의 명을 전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무반의 요직이다. 선전관을 거쳐야만 무신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전관청의 정식 선전관은 20명, 겸직 선전관이 50명이니, 그 많은 합격자 중 극소수만 무반으로 출셋길을 잡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합격증만 안고 살아야 할 뿐이다.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을 한량이라 부른다. 그런데 19세기 자료에 의하면 “아무런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을 무한량(武閑良)”이라 하였다(조재삼의 ‘송남잡지’). 사정에 활을 쏘러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하는 일 없이 놀러 다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이들은 서울 시내의 유흥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였다. 한량이라 하면 노는 것을 연상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77) 남한산성의 나날들 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했다. 건강이 여의치 않은데다 주요 길목을 청군이 모두 봉쇄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강화도 행을 시도하다가 청군에게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 강화도 행을 계속 고집할 경우, 산성을 지키는 장졸들의 사기가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12월15일, 도체찰사 김류가 인조에게 계속 강화 행을 채근하고 있다는 소식에 산성에 모여든 병사들이 수성(守城)을 거부하며 술렁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 죽으나 사나 남한산성에 운명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인조, 군량 부족한데 지구전 계획 지시 당시 남한산성에 있던 병력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최소 1만 2000에서 최대 1만 8000 정도로 추산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비교적 훈련이 잘 된 어영군(御營軍)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광주(廣州), 수원, 여주, 양주(楊州) 등지에서 끌어 모은 병력이었다. 조선 침략에 동원된 청군 병력은 대략 12만 정도로 보고 있다. 조선군은 이제 외로운 성에서 거의 10배 가까이나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 운명이었다. 비록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들이 많았지만, 농성 초기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이 컸던 와중에도 산성의 형세가 몹시 험준하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험준한 산성을 굳게 지키며 근왕병을 기다리다가 여의치 않을 경우 성을 등지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자.’라는 주장도 분명히 있었다. 12월15일, 인조는 장수들에게 방어할 지역을 할당했다.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에게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호위대장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에게 북성(北城)을, 수어사(守禦使) 이시백(李時白)에게 서성(西城)을 맡겼다. 문제는 군량이었다.1637년 1월8일, 관량사(管粮使, 군량 담당관) 나만갑(羅萬甲)은 ‘애초 군량이 6000 석 정도였는데 이제 2800여 석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인조가 입성한 다음날인 12월15일 아침부터 계산하면 24일 동안 대략 3200여 석의 양곡이 소비되었다. 하루 평균 130석가량의 군량이 없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12월15일을 기점으로 따져볼 때,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45일 남짓이었던 셈이다. 물론 갑자기 격변이 생겨 청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는 사태나, 외부로부터 군량을 끌어올 수 있는 상황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 말이다. 군량이 고갈될 날짜를 빤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며 지구전을 펼치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나만갑도 인조에게 보고할 때 그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인조는 “군량을 담당하는 자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고 지구전을 벌일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군량을 이어댈 방도가 여의치 않았던 나만갑의 속은 새까맣게 타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명길 등은 다시 화친을 모색 남한산성에 들어온 직후부터 최명길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산성과 청군 진영을 오가면서 꺼져가던 화의(和議)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부심했다. 무악재 부근에서 최명길을 만났을 때, 마부대 등은 강화를 다시 맺으려거든 왕의 동생과 대신(大臣)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최명길의 보고를 들었을 때, 조정은 종친 능봉수(綾峯守) 칭( )의 품계를 군(君)으로 올려 인조의 아우로 칭하고 형조판서 심집(沈 )에게 대신의 가함(假銜)을 주어 적진으로 보내기로 했다. 임기응변이었다. 하지만 너무 안이하고 위험한 대처 방식이었다. 홍타이지는 심양을 출발하기 전에 내린 유시에서 ‘정묘년에 화약을 맺은 이후 조선이 자신들을 속였다.’는 것을 침략 명분으로 내걸었다. 실제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에도 가짜 왕자를 내세워 자신들을 속인 것 때문에 조선을 불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정에서는 ‘가짜 왕제(王弟)’와 ‘가짜 대신’을 보내는 것의 위험성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다. 남한산성 농성 초기, 조정에는 ‘청군은 화약만 맺으면 곧 철수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져가고 있었다.12월16일, 심집 일행은 청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심집은 임기응변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청군 진영으로 가기 전 “나는 평소 말을 신실하게 해왔으니 오랑캐라고 해서 속일 수는 없다.”고 자신의 ‘소신’을 말한 바 있다. 실제 마부대가 왕제와 대신의 진위(眞僞) 여부를 물었을 때, 겁먹은 심집은 숨기지 못하고 자신과 능봉수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능봉수는 자신이 왕제라고 강변했지만 청군 지휘부는 믿지 않았다. 심집의 실토는 예기치 않은 희생과 부작용을 낳았다. 당시 역관 박난영(朴蘭英)이 청군 진영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마부대는 박난영에게 ‘심집의 말이 맞느냐.’고 물었다. 박난영이 ‘능봉수의 말이 맞다.’고 하자, 뒤에 속은 것을 깨달은 마부대는 박난영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박난영의 비명횡사는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광해군 말년부터 조선과 후금을 수없이 오가며 양국의 입장을 조율했던 ‘베테랑’ 역관이자 외교관이었다. ‘가짜 왕제’ 때문에 격분한 청군 지휘부는 심집 일행을 퇴짜놓았다. 놀란 조선 조정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청군 진영에 보내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내겠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강화도에 있으니 미처 보낼 수 없다.’고 다시 제의했다. 역시 임기응변 책이었다. 그러자 청군 지휘부가 역공을 취했다. 마부대는 ‘이제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없다.’고 했다. 혹을 떼려다 더 큰 혹을 붙인 격이었다. 조선은 봉림대군 등이 강화도에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청군 지휘부가 ‘왕자 카드’를 접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소현세자(昭顯世子) 카드’를 빼들었다. 섣부른 임기응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선 조정은 다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청군은 삼남지역 길목까지 차단하고 왕세자를 보내라는 청군 지휘부의 요구는 ‘화친이 곧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하고 낙관적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더욱이 12월16일 청군은 산성을 포위했고, 일부는 판교(板橋)까지 나아가 삼남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차단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화친이 물 건너간 듯이 보이는 상황에서 청군이 산성을 포위하자 이런저런 추측과 대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청군 진영을 다녀온 윤휘(尹暉)는 청군의 행태와 관련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의문점을 인조에게 토로했다.“신이 생각건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오랑캐의 성품은 몹시 탐욕스러운데 어찌 된 일인지 피란민들의 물건을 일절 약탈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대오는 아주 잘 정돈되어 있고, 전마(戰馬)는 멀리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피곤해 보이지 않습니다. 참으로 괴이하고 흉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윤휘는 다른 신료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화이론(華夷論)의 입장에서 청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론의 눈으로 보면 청군은 당연히 ‘탐욕스럽고 야만적인 오랑캐답게’ 행동을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대오도 정제되어 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 신료들이 화친을 다시 추진하는 와중에 이경석(李景奭)은 적과 결전을 벌일 것을 강조했다. 상놈 가운데 적의 목 1개를 벤 자는 양반으로 삼고 은 20냥을 주고, 목 10개를 벤 자에게는 첨사(僉使) 벼슬을 주자고 했다. 영의정 김류가 당장 제동을 걸었다.‘고립된 성의 얼마 되지 않는 약졸(弱卒)들로써 싸움을 걸었다가 패할 경우 대책이 없다.’는 이유를 내걸었다. 김류는 이어 최명길, 장유(張維) 등과 함께 인조에게 ‘세자를 적진으로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청했다. 소식을 들은 예조판서 김상헌이 비변사에 나타나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호통을 쳤다. 인조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과연 누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가? 남한산성에서의 사흘은 정신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Local] 하동, 관광현장 바로알기 투어

    경남 하동군은 2004년 10월 이후 임용·발령된 공무원 189명을 대상으로 17일부터 다음달 3일까지 5기로 나누어 ‘하동관광 바로알기 필드투어’를 한다고 16일 밝혔다. 군내 주요 역사·문화 현장을 체험하면서 현장 행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광 마인드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청학동, 악양 평사리, 차 시배지, 쌍계사 등 군내 주요 관광지를 돌며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듣는다.하동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한전·수출보험公 등 사장후보 압축

    지식경제부 산하 주요 공기업 기관장 후보가 압축됐다.13일 지경부와 업계에 따르면 한국전력 임원추천위원회는 면접심사를 거쳐 이원걸 전 한전 사장과 곽진업 전 한전 감사, 박희갑 전 남동발전 사장, 윤맹현 한국원자력원료 사장, 정태호 동서발전 사장 등 5명을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사장 후보로 추천키로 했다. 공공기관운영위는 이들을 대상으로 심사를 실시해 최종 후보 3명을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추천할 예정이다. 수출보험공사 사장추천위도 서류심사를 통과한 6명에 대한 면접을 거쳐 강원구 현 부사장과 이동훈 전 상공부 차관, 이찬호 전 LG필립스 부사장 등 3명을 인사권자인 지경부 장관에게 추천했다.코트라는 지원자 49명을 대상으로 서류심사를 벌여 조환익 전 수보 사장과 이환균 전 건설교통부 장관, 정순원 로템 고문, 김인식 킨텍스 사장 등 8명을 선정해 17일 면접을 할 예정이다. 한국석유공사도 17일 3배수를 확정할 계획이다. 한편 지경부는 “석탄공사와 지역난방공사, 전기안전공사, 광업진흥공사, 에너지관리공단, 광해방지사업단, 요업기술원 등 7개 기관장에 대한 공모에는 71명이 응모했다.”고 밝혔다.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75)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Ⅱ

    1636년 12월10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렇다 할 저항이 없었다. 그들은 곽산(郭山)과 정주(定州)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홍타이지는 투항해 온 곽산과 정주의 군민들을 해치지 말라고 유시하는 한편, 그들의 머리를 깎아 치발(髮)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버일러 두도(杜度)에게 정예병을 뽑아 철산(鐵山)과 가도, 운종도(雲從島) 일대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15년 동안 목에 걸린 가시처럼 청을 배후에서 위협했던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동요하는 조선 조정 청군이 이미 안주를 지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김자점의 장계가 조정에 들어온 것은 12월13일이었다.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영의정 김류는 경기 일대의 군사를 빨리 불러모아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자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청군이 깊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김류가 다시 재촉하자, 인조는 신하들 가운데 늙고 병든 사람들을 먼저 들여보내라고 지시했다. 청군의 철기(鐵騎)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인조의 판단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무슨 근거로 적이 깊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우선 청군의 침입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지 않은 도원수 김자점의 책임이 컸다. 또 청군 침입 직전, 격렬하고 지루하게 이어졌던 척화·주화 논쟁을 거치면서 인조의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튿날 청군 철기가 이미 개성을 지났다는 보고가 다시 날아들었다. 다급해진 인조는 원임 대신 윤방(尹昉)과 승지 한흥일(韓興一)을 시켜 종묘에 모셔진 역대 선왕들의 신주(神主)를 수습하고, 빈궁(嬪宮)과 왕자들을 호위하여 강화도로 들어가게 했다. 한성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檢察使)로 삼아 강화도의 민정과 방어 문제를 책임지게 했다. 또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강화도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선박의 관리와 왕실 인척들의 배행(陪行)을 맡도록 조처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던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인조 일행이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청군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양철평은 지금의 은평구 녹번동 부근이다. 인조 일행이 당황하고 있을 때 마부대(馬夫臺)가 이끄는 청군 선봉은 이미 홍제원(弘濟院)을 지나고 있었다. 인조는 숭례문 문루로 올라가고 훈련대장 신경진(申 景 )을 시켜 모화관(慕華館)으로 나아가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청군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도성은 그야말로 공황 상태로 빠져 들었다. 인조 이하 신료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와중에 피난하려는 백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최명길의 용기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청군 선봉이 시시각각 도성을 향해 옥죄어 오고 있는 데다 강화도로 이어지는 뱃길도 이미 차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지로 점찍어 준비해 왔던 강화도였다. 상당한 양의 식량과 화약도 비축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조는 정작 가장 절실했던 순간,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허망한 일이었다. 당시 강화도까지 가려면 대략 이틀 정도가 걸렸다. 인조가 김자점의 장계를 받자마자 강화도행을 시도했으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면 전쟁의 양상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청은 병자호란을 도발하기 전부터 조선을 깊이 연구했다. 그들은 유사시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문룡(毛文龍)이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서 약을 올리고 있었음에도, 수군과 전함이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정묘호란 당시에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져 버렸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에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바로 그때 최명길이 나섰다.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나아가 담판을 벌이겠으니 그 틈을 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는 최명길에게 강화(講和)를 청하면서 시간을 벌어 보라고 지시했다. 절박한 위기의 순간, 인조는 다시 주화론 쪽으로 돌아섰다. 적장을 만나 시간을 벌겠다고 자청했던 최명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는 분명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막 무악재를 넘어서려 하고 있던 마부대 일행에게 최명길의 출현은 ‘시간 끌기’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적진으로 나아갔고, 그가 마부대와 담판을 벌이는 사이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화친으로 나라를 망친 자’라고 매도당했던 최명길이지만, 위기의 순간 신하로서 그가 보인 용기와 충성심은 참으로 대단했다. 최명길은 마부대에게 청군이 깊숙이 침입한 까닭을 물었다. 마부대는 ‘조선이 까닭 없이 맹약을 어겼으므로 새로 화약을 맺기 위해 왔다.’고 둘러댔다. 조선을 안심시키고, 자신의 배후에서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포석인지도 몰랐다. 한편 인조가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처연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것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의 뒤를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구리재(銅峴)를 넘어 수구문(水口門)으로 이어지는 파천 길에는 어가 행렬과 백성들의 피난 행렬이 서로 뒤엉켰다. 인조를 호위하던 군사들부터 갈팡질팡하여 대오가 흩어졌다. 혼란의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버린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넘쳐났다. 빨리 적을 피해야만 하는 황망한 상황에서 말이 제대로 준비될 리 없었다. 신료들 가운데는 말이 없어서 도보로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날은 어두워지고, 기온은 더 떨어지고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강화도로 가자는 논의가 다시 등장하다 인조 일행은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산성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영의정 김류는 인조에게 강화도로 가자고 다시 강청했다. 홍서봉(洪瑞鳳)과 이성구(李聖求)도 김류의 의견에 동조했고, 이홍주(李弘胄) 등은 위험하다고 반대했다. 김류는 강화도로 가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산성은 고립되어 양식과 말먹이가 부족하다. 강화도는 우리에게는 편리한 곳이나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다. 또 청의 본래 의도는 명을 치는 데 있으니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강화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김류는 청군이 공유덕(孔有德)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청군이 함선을 갖고 있고, 수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던 공유덕 등이 이 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화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인조는 김류의 제안에 귀가 솔깃했다. 인조는 귓속말로 김류에게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물었다. 김류는 수행 인원을 단촐하게 줄여 과천과 금천(衿川·시흥)을 경유하면 강화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대제학 이식(李植)은 일단 인천까지 가서 배를 타자고 했다. 병력과 군량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남한산성의 상황이 불안했던 것일까? 인조는 김류 등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밀실에서 파천론이 다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삼사의 언관들이 격렬히 반대했다. 1636년 12월15일 새벽,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향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고 비탈진 산길은 얼어붙었다. 말들이 미끄러지면서 어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길이 국왕을 알아 볼 리 없었다. 인조도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졌다. 신료들은 놀라 어가를 다시 돌렸다. 날씨마저 철저히 인조를 외면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쌍용양회공업등 시멘트 3社 동강시스타에 100억원 투자

    쌍용양회공업, 현대시멘트, 아세아시멘트 등 시멘트 3사가 강원도 영월의 폐광대체사업인 동강시스타에 100억원을 일괄투자했다. 서두원 양회공업협회 부회장은 29일 영월군청을 방문, 영월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멘트 3사를 대신해 투자금을 전달했다. 시멘트 3사는 최근 모임을 갖고 당초 3사가 100억원을 모아 분할 투자하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지역경제 살리기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일괄 투자를 결정했다. 동강시스타는 영월읍 일대 폐광 부지에 들어서는 대규모 종합리조트법인으로 2010년 개장 예정이다. 호텔형 콘도와 동굴·계곡 스파 등 휴양시설과 대중 골프장, 테마공원 등이 들어선다.2006년 5월 자본금 500억원으로 설립됐다. 광해방지사업단(39.92%), 영월군(30.13%), 강원랜드(29.95%) 등이 출자했다. 총 사업비는 1500억원 규모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병자호란 다시 읽기](73)최후의 주화-척화 논쟁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斥和)하여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면 ‘공세적’으로 하자는 내용이었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미적거릴 경우, 청군의 철기(鐵騎)를 조선 영토 깊숙이 불러들이게 되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을 우려한 계책이었다. 압록강 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싸울 경우, 설사 패하더라도 피해의 범위를 줄일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 또한 운신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언관들이 들고일어나 최명길을 처벌하라고 외쳤다. ●尹煌과 鄭蘊의 결전론 최명길의 주장은 척화파의 거두 윤황(尹煌)이나 정온(鄭蘊)의 생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대사간 윤황은 1636년 8월에 올린 상소에서 인조에게 척화를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백성과 장졸들을 분기(奮起)시키려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생각부터 버리라고 요구했다. ‘임금과 종사(宗社)를 안전한 곳에 모신 뒤에야 국사를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인심이 흩어져 나라가 망할 위기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윤황은 강화도에 배치한 병력을 모두 평안도로 보내고, 강화도에 지어놓은 행궁(行宮)마저 태워버림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정온은 윤황보다 더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인조에게 결전을 벌이라고 촉구했다. 그는 도원수를 의주로 보내 압록강을 방어하고, 의주에서 효사수성과(效死守城科-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키겠다는 용사를 선발하는 과거)를 실시하여 결사대를 뽑고, 인조도 개성에 진주하여 장졸들을 진두지휘하라고 촉구했다. 정온은 결전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 계획까지 제시했다. 그는 조선의 사수(射手)와 화포병(火砲兵)을 ‘천하 무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들을 활용하면 후금군 기병의 돌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투가 벌어질 곳에 먼저 진을 칠 장소를 정합니다. 포수 4000명을 4대로 나눠 2000명은 앞에 진을 치고,2000명은 지형을 살펴 좌우에 진을 칩니다. 포수 뒤에는 사수를, 그 뒤에는 살수(殺手)를, 그 뒤에는 편곤군(鞭棍軍)과 기사병(騎射兵)을 각각 배치합니다.(중략) 적이 학익진(鶴翼陣) 형태로 공격해 오면 아군의 전대(前隊) 1000명이 먼저 조총을 쏩니다. 쏜 뒤에는 앉아 화약을 장전하고 후대 1000명이 다시 쏩니다. 적이 만약 장사진(長蛇陣)으로 공격해 오면 좌군(左軍)이 전대가 했던 방식처럼 먼저 쏘고, 적이 40∼50보 안에 들어오면 사수들이 포수가 쏘던 방식대로 화살을 발사합니다. 그러면 포성이 그치지 않고, 화살은 비 오듯이 쏟아질 것이니 비록 저들의 견갑철마(堅甲鐵馬)라 할지라도 어찌 궤멸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온의 계책은 병자호란 무렵 제기된 결전론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논리 정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청군에 지레 겁을 먹고 ‘천하 무적’의 궁수와 포수들을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는 점이었다. 최명길의 주장이 이들과 다른 점은 ‘결전에 돌입하기 전에 한번 더 심양으로 사람을 보내 청의 속내를 파악해 보자.’는 것이었다. 실제 최명길의 주장이 나온 직후인 1636년 9월8일, 비변사는 심양으로 역관 권인록(權仁祿) 등을 보내 청의 내부 사정을 탐문하자고 주청했다.‘오랑캐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나라 감군 황손무(黃孫茂)의 충고도 비변사의 주청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갈팡질팡하는 인조 인조는 비변사의 주청을 받아들였다.‘결전’ 운운하면서도 실제로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러자 수찬 오달제(吳達濟)와 헌납 이일상(李一相) 등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황손무의 충고를 따르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동이라며 인조가 ‘우리는 이미 오랑캐와 절교하여 사자(使者)가 통하지 않으니 간첩을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황손무에게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이일상 등은 더 나아가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는 것은 위로는 명을 배반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대부분의 삼사 소속 언관(言官)들이 비변사를 비난하는 와중에 사간 정태화(鄭太和)는 소신을 내세웠다.‘옛날부터 교전(交戰) 중이라도 사자를 왕래시키고 국서를 교환했다.’며 비변사의 주청은 일리가 있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조는 정태화의 주장에 힘을 얻은 듯 비변사의 반간책(反間策)을 받아들였다. 역관 박인범(朴仁範)과 권인록을 심양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삼사(三司)의 언관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자 인조와 비변사는 다시 동요했다. 박인범 등에게 압록강을 건너지 말고 일단 의주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언관들과의 논의가 아직 결말을 맺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명길이 보다못해 다시 나섰다. 그는 먼저 연소한 언관들이 군사 기밀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개탄한 뒤, 정묘호란 때 일부 언관들이 ‘야간에 적을 습격하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앞으로는 국가를 위한 대사를 대신과 밀의(密議)하여 결정하되 승지와 내관들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촉구했다. 인조가 비변사 중심의 주화론과 언관 중심의 척화론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공격의 화살은 최명길에게로 날아들었다. 오달제는 최명길이 기필코 중론(衆論)을 배척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조빈은 더 강경했다. 그는 ‘우리의 국시(國是)는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것인데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겨났다.’며 인조반정의 명분까지 거론했다. 그러면서 ‘청에 다시 사자를 보내면 반란을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구실을 줄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사실상 인조에 대한 협박이었다.‘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했기 때문에 쫓아낸다.’고 했던 인조반정 당시의 명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인조의 입장을 자극하는 주장이었다. ●‘秦檜보다 나쁜 최명길’ 1636년 9월27일 사간원의 언관들은, 최명길이 중론을 무시하고 국가 정책을 밀실에서 추진하려 했다며 파직하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언관들을 비난하고 최명길을 두둔했지만 11월6일, 최명길은 판윤(判尹)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11월8일, 부교리 윤집(尹集)이 최명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임진년에 나라가 망할 뻔했는데 신종(神宗) 황제의 구원 덕분에 조선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며 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그러면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내세워 재조지은을 배신하고 나라를 망치려 하는’ 최명길은 진회(秦檜,1090∼1155)보다도 나쁜 자라고 매도했다. 진회는 남송(南宋)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금(金)과의 화의를 주도하여 세폐를 바치고 명장 악비(岳飛)를 제거하는 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이후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간신의 전형’이자 ‘매국노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던 인물이었다. 청에 사자를 다시 보내자고 주장했던 최명길은 이제 관인으로서 최악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와 비변사는 논란 끝에 역관들을 심양으로 보냈다. 홍타이지는 조선 역관들을 퇴짜 놓았다. 심양을 정탐하고 돌아온 역관 일행은 청의 분위기를 보고했다.‘군대를 일으키려는 기미도 보이지만 우리와 꼭 절교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헷갈리는 내용이었다. 비변사는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도모하자고 했다. 삼사의 언관들은 저들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다시 반대했다. 1636년 12월 초, 인조는 다시 사신을 출발시켰다. 사신이 심양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도 귀환시킬 것을 요구하는 언관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그러나 이미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는 11월 25일, 신료들을 모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을 공격하겠다는 결심을 고하는 제사였다.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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