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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6)모윤숙의 사랑과 우정

    최정희를 둘러싸고 노천명,모윤숙(毛允淑·1909∼1990) 세여인 사이를 오간 편지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이선희(李善熙)이다.함흥 출신인 그녀는 원산 루시여고를 나온(1928) 뒤 서울 이화여대에서 수학,여러 잡지사를 전전했는데,유부남인 연극인 박영호(朴英鎬)와 결혼,그리 순조롭지 못한 가정생활 때문에 이들 모임에 끼어들곤 했었다. 8.15후 월북,작품활동을 재개했으나 괴혈병으로 이내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세 여인의 서신 내용으로 미뤄보면필시 이선희의 편지도 있을 법한데 빠져 있다. 같은 함경도 출생인 모윤숙에게 이선희는 애물단지 후배였던 셈이다.최정희의 회고록에는 자신에게 편지를 가장 많이 보내기로는 노천명이라 했지만 정작 더 많은 건 모윤숙이었다.그녀의 편지는 거의 ‘렌의 애가’처럼 춘원 이광수를 향한연모의 사무침이 가져다 준 외로움의 하소연으로 차 있다. 한 여인의 사랑에 대한 집착이 이다지도 강렬하고 끈질기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일까 경이스럽기 조차 하다. “이 마음이 혹시 흩어져 제 슬픔을 흘리며 미쳐 방황할것만 같아서 나는 내 마음에 독약을 뿌려가며 눈을 감고앉았소.…언제나 당신은 이 아픔을 알아주는 따뜻한 벗이오.내가 이 아픔을 사랑하듯이 당신도 이 아픔으로 사랑해주는 이라고 믿소. 내 연령이 쇠해져서 이 아픔조차 나를떠나간다면 나는 공허해서 어떻게 살겠소.그래서 나는 이아픔 속에 숨긴 행복을 남 몰래 남 몰래 가슴에 파묻고 혼자 즐기고 혼자 눈물 지오.…오관에 감각이 모두 제 맥을잃도록 나는 슬픈 내 행복에 사로잡혀 있소.내가 생각하는고운 제단엔 언제나 아름다운 불꽃이 피고 있다오. 이게무언지도 모르오.나는 그 파란 불꽃에 타면서 타면서 한없는 쾌감을 느끼오.나의 베아트리체는 어느 빌딩에 있는 것이 아니오.내 가슴 한복판에서 제 고집대로 나를 좌우하고살아 간다오.정희! 지난 밤엔 또 못잤지.그렇게 못자는 밤이면 유난히 나는 초점 없는 상념서 벽을 쳐다보다가 유리창을 쳐다보다가 그만 날을 새고 만다오.…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장미를 피게 하려던 것이 황량한 낙엽을 안고 운다는 사실-이것이 내 성격이 만들어놓은 재앙인가 하오.불행도 행복도 다-제게 달린 게 아니오.나는 불행한 감정을 사랑하는 여성이라 그대로 나는 불행에 싸여 걸어가나 보오. 영원히 안 보(이)는 앞을! 잔인한 행복이오. 그러나 나는이 무서운 잔인을 찬미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 되었다오.” 이 글은 아마 우리 근대 문학사에서 공개된 것 중에서는메달권 안에 들만한 연애편지일 것이다.춘원에 대한 사랑의 간접 고해성사의 대행자이자,그녀의 메신저 역할도 담당했던 최정희에게 모윤숙은 속을 탁 터놓고 이루지 못한사랑을 하소연했는데,이들의 미묘한 시샘은 재밌는 일화도많이 남긴다. “모윤숙을 '다알리아'라고 하고,이선희를 '백일홍'이라고 하고,노천명을 '들국화'라고 하고,나(최정희)를 '채송화'라고 했다”(최정희 ‘조광·삼천리 시절’)는 이 네 여인 중 남자문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로는단연 모윤숙이다.1909년 원산에서 태어나 함흥에서 소녀기를 보내곤 개성 호수돈여고를 나와(1928) 이화여대를 졸업한 모윤숙은 간도 명신여학교(1932),배화여고(1933) 교사,연극과 문단활동중 춘원을 사랑하게 되어 일생동안 그의사상적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처지에서 기이하게도 모윤숙은 춘원의 중매로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안호상(安浩相)과 결혼,딸(일선)까지 얻었으나 사랑의 우상에 대한 열정은 도리어 더욱 뜨거워만 갔다.무작정 경원선 열차에 몸을 싣고친정으로 내려간 모윤숙의 속내는 최정희의 회고록에서 익살스럽게 까발려진다.“함흥 친정에 내려간 모윤숙”을 만나러 그곳엘 찾아간 최정희에게 모의 어머님이 어느 날 “너네들은 밤낮으로 니광신이 니광신이하구 지껄이니,도대체 니광신이가 뭐가?”하고 물었는데,바로 이광수의 함경도식 와전 발음이었다.어머니 앞에서도 친구와 애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만 했던 그녀인지라 편지엔들 ‘니광신'이가 빠질 수 없다.“이선생” 어쩌구 하는 건 바로 그였는데,이 무렵 춘원은 개인적으로 깊은 은혜를 입은 김성수의 ‘동아일보’를 떠나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옮겼으나(1933) 여의치 못해 이듬해에 사직,아들까지 잃은허전함을 달래느라 여행, 홍제동 소림사에 칩거 등으로 들락날락할 때였다. 모윤숙의 애타는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는 역시최정희가 전해 준다.남의 연애편지를 대신 전해 주는 게유행이었던 때라 모윤숙은 춘원에게 줄 서찰을 최정희에게 의뢰하고 초조하게 그 회신을 기다렸으나 종무 소식.저간의 상황을 최정희는 이렇게 묘사한다.모윤숙의 편지를 가지고 가던 날 밤은 산장에 달이 유난히 컸다.저녁 여덟시면 히틀러가 연설을 하니 듣고 가라면서 ‘니광신'씨는 나를 막 잡았다.기다리고 있을 모윤숙의 일이 딱했으나 한편으로는 골탕을 먹여주자는 짓궂은 마음도 있어서 나는 ‘니광신'씨의 말에 좇았다.이튿날 아침 열한 시가 넘어서 출근을 한 내게 먼저 출근해서 기다리고 있던 모윤숙은 참으로 깊은 시선을 내게 던지고 있다가 “왜 그렇게 됐수?”하고 말을 건네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까 니광신씨가 저녁을 먹고 가라는 거아냐,히틀러가 연설을 한다나,그걸 듣고 가라는 거야.”“아니 그이하구 점심을 먹구 저녁을 먹었단 말이지?”“그럼.”“밥이 넘어가?” “활갤 치구 넘어가던걸.”“어쩜!”하고 모윤숙은 말을 다시 못하고 나를 보고만 있었다.모윤숙은 ‘니광신'씨하고 밥을 마주앉아 먹은 내가 부러운 얼굴이었다.또 얄밉기도 한 모양이었다.(최정희 ‘조광·삼천리 시절’)이 대목에서 모윤숙의 애절한 사랑 말고 이광수의 뇌리에아련히 묻혀있는 파시즘에 대한 환상을 읽을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애정의 정열을 잠재우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함흥이나 원산 일대는 센티멘탈한 여성시인의 감각만으로는접근할 수 없는 역사가 고동치고 있었다.“여보! 함흥은난(亂)이 난다고 인심이 대단 불안하오.밤마다 암흑 천지요.여기가 매우 안심되지 않소이다”란 서두의 편지는 일제의 식민 철권 통치가 1930년대 중엽에 저 북녘 땅에서는강력한 도전을 받았던 것을 반증해 준다. 국내 항일운동의근간이었던 적색 농민. 노동조합의 파급과 보천보전투(1937.6)를 상기하면 함경도 지역이 지녔던 풍문만이 아닌 실체로서의 위기감을 감지할 수 있을 터이다.더욱이 중일전쟁 발발(1937) 이후 정세는 사뭇 험악했다. 그러나 불륜의 사랑에 빠진시인에게 민족의 당면 과제나역사는 먼 전설이어서 더 이상 관심도 없었을 터이다. 편지는 곧장 “아침 시가에 나가 '사슴군' 계신가고 학교로전화를 걸었으나 벌써 1주일 전에 상경하셨다니 우리가 셋이서 싸다닐 때 그는 어느 구석에서 망원경으로 다-살피지않았으리오”라는 대목을 읽게된다. 여기서 '사슴'이란 1936년 1월 20일에 100부 한정판으로 ‘사슴’이란 시집을낸 정주 출신의 백석(白石)이다.오산학교를 나와 조선일보장학생으로 일본 청산(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수학, 조선일보 출판국의 ‘여성’지에 최정희와 함께 근무하다가 나중엔 종합월간지 ‘조광’에서 일하던 그는 함흥 영생고보교사(1936-1938)로 있었다. 그의 해맑은 모습은 당대 여성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는데,낙향한 모윤숙을 찾았던 최정희와 셋이서 한 판 어울렸음을 이 대목은 증명해 준다.이때 모윤숙이 애독했던 책이‘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이었던 것도 흥미거리다.거듭 이소설을 들먹이며 예찬한 것으로 미뤄 볼 때, 정열적인 이시인이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육욕에 대한 향수 때문에 매우 감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편지를 면밀히 뜯어보면 “상경한 사슴 군을 죽기 전 상봉하여 원하던 이야기를 해 보시오”란 대목에 뭔가 냄새가 풍긴다.백석을 가운데 둔 삼각관계였을까? “사슴군이나 어서 왔으면 하오”란 구절도 나온다. 여담이지만 백석은 최정희에게 장문의 연애편지를 겸한사랑의 철학론을 보냈다.도저히 보통관계로는 볼 수 없는내용이다.사랑은 우정도 선후배도 의심하게 만든다.임옥인(林玉仁)을 만난 대목에서는 “그저 자기는 벌써부터 그이(이광수)를 존경할 수 없이 되었다고”하는데,역시 뭔가수상쩍다. 춘원을 둘러싼 이 여성들의 베일은 여전히 두껍기만 하다. 대체로 파인은 여성작가들을 집단으로 만나길 즐겼으나,춘원은 개별적으로 만나길 선호했다는 속설이 여러 정황에서사실로 굳어진다. 함흥에서 “사하라 사막의 떡장수 여편네 모양”처럼 변해간다고 투정부리던 모윤숙은 이내 상경,경성방송국에 다니며 이광수와 사상적인 보조를 맞춰 친일에 나섰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50대 국가요직 탐구] (20)법무부 검찰국장

    ‘검찰국장을 잘못 임명하면 검찰의 3년 농사를 망친다’고 한다.법무부 검찰국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단적으로보여주는 말이다.법무부와 검찰의 검사장급 30여자리 가운데서도 최고의 요직으로 꼽힌다. 검찰국장은 1,200명이 넘는 검사들의 인사권과 검찰 예산편성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사정과 공안,일반 형사 범죄의 수사를 지휘하고 정보를 수집한다.사면·감형·복권 업무도 맡고 있다.검찰국장 아래에는 검찰 1∼4과장이 있다.그중에 검사 인사와 예산의 실무 담당자인 검찰 1과장은 ‘검찰의 황태자’로 불린다. 검찰국장을 거치면 출세길이 열린다.최경원(崔慶元) 현 법무부장관과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도 검찰국장 출신이다. 최장관은 99년 6월 차관으로 있다 사시 8회 동기생인 박순용(朴舜用)씨가 검찰총장에 임명되자 용퇴했다가 지난 5월 금의환향했다.90년대 이후 역대 검찰국장 13명 가운데 김종구(金鍾求)씨도 장관에,박종철(朴鍾喆)·김도언(金道彦)·박순용씨는 총장에 올랐다. 인사와 기획 분야의 요직인 검찰국장은 수사 쪽에서 핵심보직인 대검 중앙수사부장과 비교되기도 한다.두 자리를 다거친 사람은 드물다.사시 동기생의 선두주자인 검찰국장과중수부장은 인사 때가 되면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서울지검장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 최근에는 ‘검찰국장→서울지검장’이라는 코스가 빗나가고 있다.인사 당시의 특별한 상황에 따른 차별 또는 역차별 때문이다.90년대 이후의 검찰국장 가운데 검찰국장에서 서울지검장으로 곧바로 영전한 사람은 김종구·최영광(崔永光)·최환(崔桓)씨 등 3명뿐이다.박종철·박순용씨는 대검 중앙수사부장으로 갔다가 서울지검장이 됐다. 김진세(金鎭世)·한부환(韓富煥)·김학재(金鶴在)씨 등도동기생이나 후배에게 서울지검장 자리를 양보하고 검찰국장에서 고검장으로 ‘떠밀린 승진’을 하거나 다른 자리로 옮긴 경우에 속한다.지난 5월 인사에서 서울지검장으로 거론되던 김학재 당시 검찰국장도 서울지검에 입성하지 못하고 대신 법무부차관으로 승진했다.신총장과 목포고 동문이라는 점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서울지검장은 사시 13회 동기생인김대웅(金大雄)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에게 돌아갔다. 사시 4회 동기생인 최영광(崔永光)씨와 김태정(金泰政)씨가 벌인 선의의 경쟁은 유명하다.최씨가 검찰 1과장이던 82년김씨는 중수부 3과장을 거쳐 1과장이 됐다.90년 서울지검에서 1차장과 2차장을 나란히 지낸 뒤 93년 최씨는 검찰국장에,김씨는 중수부장에 임명됐다.다음해 9월 서울지검장은 최씨가 차지했고 김씨는 부산지검장으로 전보됐다.그러나 97년 8월 김씨는 최씨를 제치고 검찰총장 임명돼 최후의 승리자가됐다. 90년대 이후 검찰국장 출신 가운데 현직에는 최장관과 신총장,한부환 대전고검장,김학재 차관,송광수 현국장이 남아있다. 한부환 대전고검장은 인사·기획과 특수수사 요직을 두루거쳤다.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재사(才士)로 알려져 있다. 목포 출신인 김학재 차관은 과묵하지만 소신이 뚜렷한 ‘선비형’.상사에겐 직언을 서슴지 않지만 부하의 의견을 존중해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경남 마산 출신인 송광수 현 국장은 김차관과 사시 동기생으로 검찰 4·2·1과장을 차례로 거쳐 일찍부터 검찰국장감으로 꼽혔었다.기획력과 추진력을 겸비했다는 평이다.바둑실력이 아마추어 최강급이다. 손성진기자 sonsj@
  • 시·도 교원 승진-전보

    ■경남도교육청 ◇초등교장(승진·전보·전직) △창원사파김계순△〃평산 이진호△〃토월 정봉조△〃사화 최규옥△〃소답 윤덕한△마산무학 이성윤△〃용마 조양래△〃상일 정연춘△진주남강 류덕춘△〃미천 정원효△〃안간 허 간△〃한평 김우양△통영한려 강대영△사천노산 박종옥△〃용산 하용기△〃용현 이기진△〃선진 하수종△김해삼성 한종수△〃활천강방호△밀양예림 민병룡△양산양산 박경진△의령용덕 박우일주△산청생초 강우조△〃단계 황명헌△함양위림 박판언△거창가조 곽인섭△합천초계 허종만△창원평산 이진호△〃유목 박정숙△〃중앙 이정자△〃북면 심재학△〃내동 이정길△〃일동 하재우△〃용지 김길부△〃온천 정정길△〃신월 제봉갑△〃대산 윤종명△마산월영 하현천△〃중리 김일수△〃진동 김필태△〃용마 조양래△〃봉덕 윤만수△〃우산 신상철△진주봉원 류상수△〃이반성 강신웅△진해경화 오정환△〃중앙 배석일△〃대양 강경옥△〃용원 백승종△사천문선 김정주△〃신수도 제이부 △〃사천 허태봉△〃삼성 정기섭△〃축동 신홍철△〃서포 이한승△김해임호 박정홍△〃주동 서덕상△〃합성 배종언△〃신천 이택윤△밀양산내남명 조한무△거제장목 윤병문△〃중곡 표강문△함안유원 조용진△고성동광 김판세△〃상리 서능수△〃하이 진경근△〃대흥 하근식△〃하일 이태호△〃철성 김남인△하동진정 정의자△〃양보 박희균△경남은광 이현식 ◇초등교장 승진·전보·전직△의령정곡박종은△함양마천 정봉근△남해삼동 이인원△양산원동 남봉식△남해고현 진현복△진해안청 이상영△의령부림 임원길△통영사량 이종규△거제외간 이부기△양산백동 조규환△양산웅상 민상식△밀양산외 이철근△거제칠천 정재영△창녕남곡신영균△밀양산동 차한규△밀양초동 이희호△양산어곡 안종봉△창녕남지 우무호 △창녕장천 류경자△창원신방 강수복△마산가포 강재호△진주장재 김삼석△〃반성 박원부△김해동광 이상복△양산영천 강홍희△함안예곡 김용화△고성삼산 이정찬 ◇장학관 승진·전보·전직△경남교육청 초등교육과 김진영 강상렬△통영교육청 조수강△함양〃 김의환△창원〃 문현주△사천〃 류명철△창원웅남 강수효△〃용남 박굉부△하동옥종 김영준△마산교육청 박동수△경남〃 초등교육과장 강국일△거창〃 이정수 ◇초등교감 승진·전보·전직△창원 하재립 김춘자온재윤 신헌기 김덕고 박종실 신원범△마산 김석조 박필묵 정정규 김강환 이무경△진주 서원근 하기언 이동원 최윤락 조현석△진해 주영돈 김영찬△통영 조기제△사천김미준 박현옥△김해 조훈제 하옥진 정진효 정연길 정문득박훈규△남해 박재명 이희규△산청 박우근△함양 조명관△밀양 이병흔 제정식 박기대△창녕 이준형 서점균 갈향숙△합천 류홍식 손봉호△함안 박득자 하현숙△양산 서천석 신홍재정태식 김형규 심재상 서정배△의령 강대룡△거제 옥완석 김성철 김성열 박성욱 ◇교육전문직 전보·전직△경남교육청서일옥 박근제 김태문△진해〃 박석렬△초등교육과 변민석안국태 심영돈△경남교육연수원 이경옥 김옥신△하동교육청정순곤△진주〃 윤갑석△사천〃 박찬옥△남해〃 장재원△진주〃 권유현△고성〃 조찬래△양산〃 이상준△함안〃 이종규△산청〃 서영순△하동〃 황진상△양산〃 김동진△통영〃 김주수△양산〃 임일규 ◇중등교장급 승진·전보·전직△거제교육청교육장 서 철△덕유교육원장 강병준△경남교육청 체육보건교육과장 김일랑△〃 중등교육과 윤맹기△〃 초등교육과 박경석△거창산업과학고 박종락△마산여고 노원섭△진해여고 정홍신△하동교육청 주종돈△진해〃 윤동석△진주남중 박대섭△김해건설공고 최태은△거창여고 이무진△도산중 이수웅△서상상고 강충수△진해동중 이시백△법수중 안수중△상리중 김동환△하일중 최정부△남해정보산업고 심명섭△야로중 류승휴△통영고 강대진△거제중앙고 주우진△양산중 홍가호△거제해양과학고 최부안△진서고 이기순△사파중 심현섭△하동중앙중 고원석△상남중 박창옥△욕지중 오 출△생초고 조작택△물건중 이영진△경남혜림학교 김태준△김해교육장박찬봉△경남교육청 교육정보화과장 강인섭△마산교육청 조현덕△대곡고 박호기△신반정보고 고영환△마산용마고 변정섭△진주기계공고 정찬화△삼천포공고 임수섭△진해고 김구영△단성고 박덕희△함양제일고 이차권△봉림중 이원희△밀양공고 박성달△신월중 이경문△창북중 박종관△합포중 성환기△진전중 최윤길△내서중 이철녕△동진중 차해숙△진해여중 류영숙△서포중 김찬두△옥종중 차복권△합천중 허성구△합천고 류동열 ◇중등교감급 승진·전보·전직△사천중 김갑동△합천중 지광수△고성중 진상봉△통영중 허 영△산청중배현규△통영여고 조헌주△의령중 이우례△진해중 김충지△초계종고 김명재△거제여상 김 홍△남해수고 김종국△남해중 김용조△경남항공고 이우식△거제해양과학고 최정린△남해중 이희구△거창중 김윤태△거제중 최무경△거제중 조정웅△창원중앙고 허황도△고성여고 김용성△마산고 강주순△마산가포고 하영식△마산중 도성진△김해고 양상수△김해경원고이삼영△창원중 박숙희△김해중 김병식△진주중 강대진△진주중 안영수△진해중 이상근△진해고 김성일△밀양중 정용대△함안중 이영호△진해여고 안태정△야로고 장수근△경남교육청 교육정보화과 조용익 최옥준△마산교육청 김동환△경남교육연수원 최환호△창원교육청 김경미△산청〃 이창곤△김해〃 김선동△덕유교육원 의령분원 추문갑△마산교육청 박숙경△덕유교육원 의령분원 이두용△경남〃 중등교육과 조대현△창원〃 조현종△경남〃 중등교육과 문창권△합천〃 백종철△함안〃 강경윤△밀양〃 허철회△양산〃 이윤이△경남교육과학연구원 이주희△양산교육청 김남익 ◇일반직(사무관급)△경남교육청 감사담당관실 옥영신△〃 초등교육과 허민도△〃 교육정보화과 정동식△〃 평생교육과 진병구△〃 기획예산과 문순돌△〃 학교운영지원과 진인수△〃 학교운영지원과 이수한△〃 재무과 정소용△〃 시설과 김덕화△덕유교육원의령분원 오덕영△진주교육청 관리과장 도봉섭△양산교육청관리과장 정인호△의령〃 〃 정용복 △〃 〃청교육청 관리과장 정윤자 △거창교 정수현△합천〃 〃 조종래 △창원중앙고 황의달△창원명지여고 김광수△마산여고 김대일△합포고 장순규△진주고 김종수△경남체고 김동수△진주기계공고 정부권△김해건설공고 정의휘△김해여고 김홍순△거제교육청 김희환△산청〃 하상국■경북도교육청 ◇초등전문직△안동교육청 교육장 이광욱△칠곡〃〃 정원준△울릉〃 〃 전병목△성주〃학무과장 강문일△구미〃 〃 이욱화△문경〃 〃 허부조△의성〃 〃 김상호△청송〃 〃△초등교육과 장학관 이종목△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관 김용달△교육연수원 〃 김인하△초등교육과 장학사 이경희 엄원배△과학산업교육과 〃 이금옥△평생교육체육과 〃 박세진△포항교육청 〃 권귀연△칠곡〃 〃 박영철△의성〃 〃김원진△영주〃 〃 장태덕△영천〃 〃 전창섭△군위〃〃 권도현△울릉〃 〃 이종현 이돈열△교육연수원 〃 최순실 ◇초등교장 승진·전보·전직△포항대흥 이상원△포항항도김동암△자명 권기태△흥해남산 박상진△기계 박희목△황성류용태△모량 김건현△강동 김홍순△김천서부 전길종△농소이계석△안동서부 권시환△영남 조광세△일직 이유일△풍천김순환△길주 김대영△복주 류중영△영가 권영길△남후 최병종△영주 박수명△청통 함일홍△대창 이 호△사벌 정운석△상주동부 손정균△은척 이정훈△중모 박병철△호서남 이응혁△산북 장주순△경산서부 김항구△부림 김태호△단촌 김영규△옥전 박동욱△초전 박문대△수륜 신태식△장곡 민태식△관호 김동극△안동용상 김항동△대도 김창주△대잠 서강홍△흥무 윤주익△용강 이영호△안동 남정치△풍산 김철한△원호권국웅△영천동부 권순태△상산 우동진△상주중앙 조민구△문경 윤영노△하양 윤상홍△청천 이상설△이서 유창학△성주 황원득△북삼 최병일△약목 황춘길△단북 권종환△야성 김병창△온정 윤성식△오릉 김진규△속암 황찬호△곡송 강타관△산성 권기맹△능치 이근형△연안 권영구△전촌 이희춘△석보 김정환△천부 김개문△태하 장상윤△계당 전준수△신동류재식△장수 최호창 ◇초등교감 승진·전보·전직△포항교육청 윤광태 오성환 이규호 김성호△경주〃 박희서 이정찬김기현 임창영 황태주△안동〃 송인록△영천〃 김경환△상주〃 윤상희△문경〃 이재기 권오준 △경산〃 이태조△예천〃안윤환 구정애△봉화〃 박원근△김천〃 박정우 권재룡 이원태 조용석 이창모△청송〃 서정애△영양〃 김임순△울진〃이명복 진낙연△구미〃 유달선 ◇중등전문직△문경교육청 교육장 이신길△청송〃 〃 김미재△봉화〃 〃 지길순△과학산업교육과장 성병길△교육연수원장 류용원△경주교육청 학무과장 김우현△고령〃 〃 이기선△안동〃 〃 이재완△울진〃〃 두도자△중등교육과 장학사 권기덕 이훈도 김인한△과학산업교육과 〃 김찬식 정영한△평생교육체육과 〃 이세호△감사공보담당관실 〃 이희욱△포항교육청 〃 김영민△구미〃 〃 이헌희△봉화〃 〃윤형식△영주〃 〃 권영원△영천〃 〃 김수현△문경〃 〃 황석우△의성〃 〃 박지구△울릉〃 〃김의기△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류하국△교육과학연구원 〃백주하 김주한△화랑교육원 〃 임경화 박경종△교육정보화과 〃 박지애 ◇중등교장 승진·전보·전직△경북과학고 김무헌△구룡포중·종고 김도의△김천중앙고 이영식△안동고 박정웅△영주여고 김욱연△경북체육중·고 배석호△군위여중·고 이근수△대도중 현종훈△송도여중 허유철△포항여중 최붕열△양학중 김정호△송라초·중 서병진△농남중 홍순홍△안동중 이재일△북후중 박만강△공검중 김달홍△화산중 오수현△우보중 최봉수△옥산중 조찬영△예천여중 송성렬△금오공고 임성광△영주부석중·고 김진희△산북중·정보고 황영해△강구상고 김진수△소천중·고 김인옥△평해중·공고 이배식△울릉종고 우중근△소수중 김동정△낙운중 박성원△동로초·중 박종만△축산중 조주환△재산중 이한무△물야중 김종구△강구중 이희영△울진중 정종현△울릉중 윤종국△울릉서중 이창호△우산중 김학봉 ◇중등교감 승진·전보·전직△포항여고 김원석△경북외고 방종수△경북생활과학고·해평중조명래△영천여고 권전탁△군위중·고 민경건△청도전자고정석화△포항고 황수범△경주디자인고 강학기△안강전자고왕영문△문경공고 임재동△문경정보산업고 정재림△의성여고 이일배△다인종고 오호칠△고령여종고 김영기△양북중·고김연호△중모중·종고 이문희△영덕종고 서위태△풍양중·고 강우석△용궁중·상고 배용호△울진고 김영복△매화중·종고 이 환△울릉종고 오재덕△안동교육청 류동춘△구미〃 황무길 정해승 안계수△경주〃 김창연 전후곤△예천〃 이희대△문경〃 우병구△영덕〃 박헌식 배영근 고중석■대구시교육청 ◇초등전문직△ 달성교육청 교육장 이상남△초등교육과장 백춘실△초등교육과 장학관 이순희△서부교육청 학무국장 김명구△남부교육청 초등교육과장 서효섭△교육연수원장 권경철△교육연수원 기획부장 권경희△초등교육과 장학사 김성문△달성교육청〃 김형경△동부〃 〃 남진수△남부〃 〃 안창섭△서부〃 〃 한중열 ◇초등교장 승진·전보·전직△비슬 김수봉△종로 신이견△동덕 유정실△효동 김영길△서촌 이종관△칠성 박상옥△봉덕 박동일△동곡 양병림△황금 김우진△복명 안국환△복현 이성규△신매 김재창△동천 권은조△구암 김휘영△가창 이승환△동성 송인규△파호김세형△북대구 박수웅△신암 이경옥△입석 장병출△대산 위순복△지산 배부성 ◇초등교감 승진·전보·전직△범어 권용우△해안 박길수△해서 박무근△비봉 한성호△관천 류재규△태전 신현돈△인지 송승면△대산 정기형 ◇중등전문직△서부교육청 교육장 이천우△과학평생교육과장 송인덕△중등교육과 장학관 이병옥 이상호△체육보건교육과 〃 김정호△달성교육청 학무과장 신보연△중등교육과장학사 이희웅 한원경송춘근△체육보건교육과 〃 서인수 △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한홍기 박재규 현준우△교육과학연구원 〃 정동도 김우기이맹환 유대만△서부교육청 〃 강병국 나수영△달성〃 〃 남채원△동부〃 〃 이용도 여상인△남부〃 〃 김영탁△과학평생교육과 〃 신탁범 ◇중등교장 승진·전보·전직△서부중곽 태△경덕여고 김대일△신당여중 이희태△침산중 강대식△대명여중 김현수△대구북중 이을룡△덕화여중 김명묵△서부여중 전영명△본리중 김우홍△대구공고 류춘기△수성여중 이경택△성서중 곽태현△시지여중 권길영△복현중 윤정대△대구외국어고 노영옥△대구과학고 최재문△도원중 최윤정△대곡중 곽사영△대구중 이영일△대구여고 김정자 ◇중등교감승진·전보·전직△다사중 허남두△경북여고 김해룡△구지중 신영호△대구고 박창엽△성서고 신명식△경북기계공고 박종명△덕화여중 이숙정△대구여중 김득순△복현여중 이태옥△도원중 박해흥△경상중 정병표△상인중 황성욱△경서중 이덕민△논공중 박영원
  • 을지연습이 이어준 의·약·정 화해

    지난해 의약분업 시행과 의료계 파업으로 감정의 골이 깊었던 의·약·정(醫藥政)이 을지연습 때문에 화해의 실마리를찾아가고 있다. 보건복지부와 의사협회,약사협회 등은 지난해 의료계파업으로 서로 등을 돌린 뒤 지난 7월부터는 건강보험재정 안정화대책을 둘러싸고 다시 반목이 깊었었다. 하지만 지난 20일부터 25일까지 실시중인 을지연습 기간 동안 의료계 간부들이 잇따라 철야 비상근무를 하는 복지부 직원들을 위로방문,의약분업 이전의 훈훈한 인정을 재연하고있다.을지연습이 시작된 첫날인 20일 오후 7시쯤 나석찬(羅錫燦)회장 및 사무총장 등 병원협회 관계자들이 을지연습 상황실을 찾았다.대한의사회도 한광수(韓光秀)회장과 부회장등이 수박과 떡을 들고 찾아왔다. 대한약사회는 원희목(元喜睦) 부회장 등 부회장단이 22일밤 떡 4말과 귤 3박스를 들고 복지부를 찾아 직원들을 격려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대한한의사회도 24일 밤에 복지부를 방문하기 위해 떡·수박·통닭·음료수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사회 원 부회장은“한때 감정의 골이 깊었지만 복지부는 우리 국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부서이기 때문에 위로차 방문했다”면서 “이번 일을 계기로 의약정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용수기자 dragon@
  • 車·PC 4명중 1명…통계로 본 세계속 한국

    우리나라 인구 2명중 1명 이상이 이동전화를,4·2명당 1명꼴로 자동차와 개인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선박 건조량은 지난해 처음 일본을 앞질러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통계청은 22일 국제기구와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통계자료를 수집해 우리나라와 비교·분석한 ‘통계로 본 세계속의 한국’을 발표했다. 급증 지난해 인구 100명당 이동전화가입자수는 57명으로 세계 21위였다.96년 7명에서 99년 50명으로 매년 증가해 왔다.인구 100명당 자동차와 개인컴퓨터 보유대수는 각각 24명으로 4.2명당 1명꼴이었다. 지난해 선박건조량은 1,221만여G/T으로 세계 총건조량의 39.1%를 차지했다.지난 99년까지 1위였던 일본을 처음 앞질렀다.자동차 생산량은 311만여대로 세계 5위,쌀 생산량은 719만여t으로 12위였다. 세계 12위권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4,574억달러로 세계 12위,1인당 GDP는 1만달러에 근접한 9,675달러였다. 12∼13위권 수출규모는 지난해 1,722억달러로 세계 12위,수입은 1,604억달러로 세계 13위였다.99년관광수입은 68억달러로 세계 17위,관광지출은 39억달러로19위였다. 평균근로시간 감소 지난해 제조업 근로자의 주당평균근로시간은 99년의 50시간에 비해 0.7시간이 줄어든 49.3시간이었다. 선진국보다 적어 98년 기준 의사수는 인구1만명당 13명으로 이탈리아(59명), 독일(35명), 프랑스(30명),미국(27명)등에 비해 적은 수준이었다. 사망원인중 간질환과 간암·위암 사망률은 99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20∼24명으로 다른 나라보다 높은 편이다. 박정현기자 jhpark@
  • ‘사상 통제’의 무기 禁書의 역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통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대표적으로 중국 진나라의 경우 ‘분서갱유’를 들 수 있으며,청나라 역시 공식적으로 무려 3,000여종이나 되는 책을 금지처분했다.일본 역시 17∼18세기경 민간의 뉴스매체랄 수 있는 요미우리(讀賣)를 금지시켰고,천주교 서적 역시 매매 금지대상이었다.이같은 통제는 서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로마 가톨릭은 한때 금서목록을 작성하여 종교(사상)통제를 실시했다. 우리역사에서 있어왔던 금서(禁書)의 역사를 한 권으로정리한 ‘책의 운명’(이중연 지음,혜안)이 최근 출간됐다. 대상시기는 조선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를 편년체식으로다뤘다. 금서는 단순히 책 ‘한 권’의 문제가 아니라 그시대의 지배사상·질서의 유지와 연관된 문제라는 점에서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조선초기 숭유억불정책을 펴는 과정에서는 도교·불교관련 서적이 탄압의 대상에 올랐으며,정권교체기나 개혁시기에는 수구 또는 급진적 사상을 담은 서적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금서처분됐다.실제로 신분제를 위협하는 내용을 담은‘홍길동전’이나 조선왕조체제를 부정하는 ‘정감록’등도 한때 금서로 지정됐다.반면 유년기의 아동들이 학문 입문서로 처음 접하는 ‘소학(小學)’ 역시 한 때 금서목록에 포함돼,허균의 아버지가 스승으로부터 남몰래 배우기도했다는 기록도 있다.이는 조광조가 개혁정책을 펴던 당시‘소학’이 요즘 표현으로 치면 급진운동권의 이념서로치부됐던 탓이다.같은 책도 시대와 해석여부에 따라 의미가달라짐을 알 수 있다. 봉건왕조시대에 이어 우리역사상 금서조치가 가장 횡행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1910년 ‘한일병합’이 발표된후 일제는 조선의 문화·역사말살을 위해 출판통제를 대폭강화했다. 대한제국기에 출판,발매된 서적에 대해 대대적인 발매금지·압수조치와 사전검열을 실시,애국적 출판물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나섰다.조선총독부는 1909년 제정한 출판법에 의거,1910년 51종,1911년 4종,1912년 14종,1913년 29종,1914년 1종,1915년 5종,1916년 10종,1917년 6종,1919년 1종 등 1910년대에만 120여종에 이르는 서적을 발매금지·압수하였다.이들 서적 가운데 ‘풍속괴란(壞亂)’이 문제가 된 것은 거의 없다.대부분이 ‘치안방해’ 혹은‘안녕질서 방해’,즉 민족적 내용이나 표현이 문제가 됐었다. 일제의 출판물 검열기준은 한마디로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다.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도입된 후 일본에서는 버젓이 유통되는 서적이 조선에서는 발매금지처분을 받았으며,동아일보에 연재된 후 1933년 한성도서에서 단행본으로 출간한 이광수의 ‘흙’이난데없이 발매금지·압수처분을 받기도 했다.이유는 ‘널리 읽힌다’는 것이었다.당시 ‘흙’은 한번에 2,000부를찍어낼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당시 경무국은 “검열기준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시세의 변천에 따라 당연히 변할 수 있다”며 궤변을 둘러댔다.고서점 ‘통문관’ 주인 이겸로옹은 “사흘이 멀다하고 발매금지시킨 책명을 적은 유인물을 각 서점에 배부하곤 했다”고 회고한 바있다. 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를 정리하는 작업과정에서 금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저자는 “의외로 그동안 이에 대한논의가 그다지 없었다는데 놀랐다”며 3년여에 걸친 작업끝에 1차 성과물로 이 책을 내놓았다.조만간 저자는 해방후 금서의 사회사를 추가로 선보일 계획이다.2만원. 정운현기자 jwh59@
  • 故 임종국선생 ‘친일문학론’ 재발간

    평생을 친일문제연구에 바친 고 임종국(林鍾國) 선생이한일협정 체결 이듬해인 지난 66년 발간한,그의 대표저서인 ‘친일문학론’이 재발간된다.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 준비위(위원장 한상범·민족문제연구소장)는 21일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국제적비난을 사고 있고,국내에서도 친일문학인을 찬양·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어 이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재발간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친일문학론’ 재발간은 문학평론가 임헌영씨(중앙대 겸임교수)가 맡아 원본 ‘친일문학론’을 기초로 국민들이 ‘친일’문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다시 풀어쓸 계획이다. ‘일제암흑기의 작가와 작품’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친일문학론’은 이광수·김용제·김동환·백철·모윤숙 등 50여명의 친일문학인과 그들의 작품의 친일성에 대한 해석과 함께 식민지시대 정치·사회적 배경,일제의 문화통치기구,각종 친일단체의 활동 등을 담고 있다.이번에 재발간되는 ‘친일문학론’은 모두 3권으로,1권은 영인(影印) 기념소장본,2권 ‘풀어쓴 친일문학론’은 고등학생 정도의눈높이에 맞춰 연말쯤 나올 예정이다.또 3권 ‘속(續)친일문학론’은 그동안 연구되지 않은 부분들을 중심으로 대학생 및 지식인들을 독자층으로 겨냥해 내년 3월 1일쯤 발간할 계획이다. 임 교수는 “친일문학론은 당시만해도 일종의 금기였던‘친일’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 한국 현대 지성사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으며,현재도 친일문제 연구에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친일문학론’은 한때 임종국 선생과 같은 출판사에 근무했던 허창씨의 평화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초판 2,000부가운데 절반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80년대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로 부각되면서 이후 수 차례 재판발행을 거듭해 왔다. 정운현기자 jwh59@
  • [민선2기 3년 단체장에 듣는다] 노현송 강서구청장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우리 강서지역은 문화 불모지나다름없었지만 멀지않아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향기 그윽한 고장으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노현송(盧顯松) 구청장은 3년전 민선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 강서구의 열악한 문화인프라에 큰 충격을 받았다.아파트만 빽빽이 밀집해 있을뿐 주민들은 막상 여가를 보낼만한 문화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내세울 정도로 활성화된 전통문화도 없었다. 노 구청장은 곧바로 ‘재정형편은 어렵지만 문화적 욕구에 목마른 주민들을 배려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문화강서’ 가꾸기에 들어갔다. 먼저 주민들이 공연을 보고 취미도 즐길 수 있는 공간 만들기에 나서 99년 12월 화곡5동에 공연장과 체력단련실 등을 갖춘 지하1층,지상5층 규모의 강서문화센터를 열었다. 지난해 말에는 기존 구민회관을 완전히 뜯어고쳐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미고 이름도 ‘강서문화예술회관’으로 바꾸었다. 또 지난해 10월엔 등촌동에 수영장과 헬스장 등을 갖춘복합체육시설 ‘올림픽체육센터’를 개관,주민들의 건강증진에 크게기여하도록 했다. 이와함께 요즘은 동기능 전환과 맞물려 각 동사무소 2∼3층에 ‘문화의집’과 ‘정보센터’를 마련하는 작업이 한창이다.현재 화곡6동에 문화의집 1곳이,가양3동과 염창동에 정보센터가 각각 문을 연 상태다. 강서만의 색깔과 향기를 발하는 ‘전통문화 가꾸기 사업’도 활발히 전개중이다. 노 구청장은 “강서는 구암(龜岩) 허준 선생의 출신지”라며 “허준 선생과 한의학을 테마로 한 굵직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올해안에 허준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허준기념관’ 건립에 착수할 계획.가양동 3,000여평에 건립될 기념관엔 허준선생 관련자료를 선보이는 전시관 및 한의학연구소,한약재전시관,기념탑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한의학 체험타운’을 마곡지구 인근에 조성,관광명소화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이 타운이 세워지면 한방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관광수입도 적지않게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화인프라 구축과 함께 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한 문화소프트웨어 개발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먼저 허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구암축제를 99년부터 개최중이다.이 축제엔 구청 뿐만 아니라 양천허씨 종친회,대한한의사협회,강서문화원 등에서 대거 참여하고 있고 구민들의 참여열기도 뜨거워 2년만에 성공적인 지역축제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초등학생들에게 강서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체험하도록 해주는 ‘정보문화투어’도 알짜배기 문화교육 프로그램으로 뿌리를 내렸다.올해부터는 관내 초등학교 교사들을 위한 ‘향토문화탐방’ 프로그램도 마련,지난 17일첫 나들이를 가졌다. 노 구청장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구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풀기 위해 예산을 99년 36억원,지난해 52억원,올해 115억원 등 매년 2배 가까이 늘리고 있다”며 “주민들의 반응도 아주 좋다”고 말했다. ●김포공항 터 활용 어떻게. “공항 이전을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삼겠습니다.” 김포공항 국제노선이 인천국제공항으로 옮겨가면서 노현송 강서구청장을 비롯한 공무원과 주민들은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항공기 보유에 따른 재산세 등 100억원 가까운 세수 손실이 불가피하고 유동인구 및 공항종사자 이전으로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항 이전후 이러한 걱정은 점차 불식되고 있다. 오히려 공항 이전이 지역경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노 구청장은 단기적인 세수 손실은 어쩔 수 없지만 엄청나게 넓은 공항부지를 활용할 경우 장기적으로 그 이상의세수확보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우선 옛 국내선 자리에는 대단위 쇼핑·위락단지가 들어설 것으로 전망된다.이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주차장이 ^^어 대단위 쇼핑타운 부지로 최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현재 공항공단에서 이같은 방향으로 부지 활용방안을 검토중에 있다. 공항종사자 이전 문제도 기우에 불과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공항 이전후 오히려 타지역에 거주하던 종사자들이 인천공항 출퇴근이 편리한 강서구로 이주하는 현상이벌어지고 있기 때문.여기에 비행기 소음감소 효과까지 겹쳐 최근 공항 인근 아파트들의 매매가와 전세가가 꾸준히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구청장은 “당초의 우려와 달리 공항 이전이 오히려지역발전의 디딤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며“부지활용계획 추진을 최대한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4)식민지 저항적 지식인

    근대 여성작가 중 가장 치마폭이 넓었던 최정희는 유파와연령을 초월하여 문우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소중한 것으로는 국제 입찰에 부칠만한 중량급 서간문도 포함되어 있다. 바로 김사량(金史良,본명 時昌,1914∼1950)의 편지이다.일본에서 더 유명한 김사량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했던가를 일깨워 준 근대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한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평양에서 1914년에 태어난 그는 평양고보 재학 중 배속장교와 일본인 교사 및 그들에 동조하는 조선인 교사 배척을 위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처분을 받고는 형 시명(時明,교토제대 법학부 졸업 후 사법·행정 양과 합격,홍천·평창 군수,조선인 최초의 전매국장,8·15 후에는 중앙산림조합연합회 이사장 등을 지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학창시절에는 연극에 관심이 많아 신협(新協)극단과 연계,장혁주(張赫宙)가 각색한 ‘춘향전’의모국 순회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치다 여러이유로 경찰에 자주 구금 당했다. 결혼 직후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도쿄제대 독문학과를졸업(1939)한 그는 잠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서울의 하숙집에서 출세작 ‘빛 속에서’를 썼다.이 무렵에 아마 서울의 잡지사와 문인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것인데,최정희와의 인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도쿄제대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은 그는 6월 아내와 도일,일본과 한국 문단을 잇는 가교 역할을 맡게 된다.편지에서 김사량은 매우 조심스럽게 최정희의 ‘지맥’을 추천했으면 싶었으나,이미 일본의 다른 출판사(赤塚書房)가 추진하고 있던조선문학 선집에 관여하는 장혁주가 손을 댔기에 ‘흉가’로 하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몇 차례 오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편지는 최정희가 자신의 소설을 일본에 소개되기를 희망한데 대한 답신 내용이 대부분이다. 장혁주는 누구였던가.김사량보다 먼저 등단한 그는 잡지사,문인 등을 후배에게 소개시켜 주는 역할을 했던 재일조선인 문단의 대선배였다.1905년 대구에서 출생한 그의 본명은 은중(恩重),창씨개명은 노구치 가쿠주(野口赫宙,첫 창씨명은 野口이었음)로,불륜사건에 연루되어 도일,본처와 이혼,일본여자와 재혼,8·15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해 버린 인물이다. 그는 초기의 민족적인 성향과는 달리 친일화 정도가아니라 아예 혈통까지도 일본인화 해야된다는 각오로 일본여자와 결혼을 감행한 친일문학인 가운데서도 발군의 활약을 보여주었다.1952년 10월,6·25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변장한 채 일본 ‘부인구락부’ 특파원 신분으로 입국하여 취재활동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한국을 힐난하는 글을 써서 당시 문학단체가 법석을 떨게 했던 장본인이다.그는 아예 일본문학보국회에 가입하여 활동에 열을 올렸던 인물로한국을 영원히 등진 조국상실자가 되었다. 최정희의 ‘지맥’은 평론가 한식(韓植)이 번역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며,편지에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김사량은 ‘모던 일본’에다 이광수의 ‘무정’을 번역했는데,아마 이 사실은 고의로 언급하지 않은 것 같다.김사량은 ‘조광’에장편 ‘낙조’(1940.2∼1941.1)를 연재하면서 모국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겸허하게 최정희의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사실 그는 ‘양국어 작가’로 손색이 없었다.그가 ‘삼천리’에 발표한 글로는 잡문 ‘조선문학과 언어문제’(1941.1)와 소설 ‘지기미’(1941.4)인데,이 두 사실을 편지에 대입해 읽으면 그와 최정희의 교유가 대략 1939∼1941년임을 알 수 있다.중요한 사실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자.‘문예춘추’는 1935년 일본최고의 아쿠다가와 (芥川)문학상을 제정했는데,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사량이 이 상의 후보작으로 뽑혀 일약 일본문단의 유망주가 되었다(1940.2).1941년12월 9일 새벽 진주만 기습에 따른 사상범예방구금법으로감금당했고,유명세만큼 그에게 부하되는 역사적인 책무도커서 친일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했다. 일본 문학인들의 구명운동으로 이듬해 1월29일 석방된 그는 이내 귀향,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강제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이효석(1942년 작고)이 있었던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사가 된 건 1944년 4월.강제 친일에 동원되면서도 일본문인들과의 술자리에서 격렬하게 식민통치를 비판하던 이투사는 1945년 2월 조선출신학도병 위문단으로 중국에 파견,일정을 마친 뒤 탈출,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하여 떳떳하게 해방을 맞았다.이때의 탈출 투쟁기는 ‘노마만리(駑馬萬里)’란 제목으로 남아있다. 1945년 11월 서울에서 그의 희곡 ‘호접’이 단성사에서 공연되는 등 광복 후 한국 좌익문단의 정화에 일조했던 그는이듬해 평양으로 돌아가 6·25때 종군작가로 참가,후퇴 도중 원주 부근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낙오된 채 행방불명된 게 그의 최후다(안우식 지음,심원섭 옮김 ‘김사량 평전’ 참고).김사량은 자신의 친일행각이 강제에 의한 것임을 문학인들에게 공공연하게 실토했던 점과 모험을 무릅쓴 극적인 탈출로 민족해방투쟁에 나섰던 문학인이었다는 점에서식민지시대 저항적 지식인의 전형으로 세계 저항문학사에손색이 없는 작가이다. 극적인 생애는 한설야(韓雪野)도 마찬가지다.기생 이름 같은 낭만적인 필명과는 달리 1900년 함주(함흥)에서 태어난그는 1976년 북한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욕을 두루 겪은 비극적인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인물인데,유명한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의 제자로,홍범도(洪範圖)등의 의병활동을 무마시키라는 일제의 강요를 거절코 고향을 떠나 피신했다.한설야는 경성제일고보에다니다가 서모(庶母)와 불화로 귀향,함흥고보로 전학,3·1운동에 관련되어 구금 체험을 한다.중국,일본 등지를 떠돌거나 유학 한 뒤 ‘조선문단’으로 등단한 그는 서울에 머물렀다가(1925∼1926),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자 중국 동북지방으로 이주했다가 이듬해(1927) 귀국하여 카프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문학과 사상 연구회,‘한설야 문학의 재인식’).한설야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32년경인데 함남지역에 특파됐다가 본사에 왔을 때는 경영권 문제로 매우 복잡 미묘할 때였다.창간 초기부터 경영진의 시국 순응 성향과 편집진의 민족의식 지향이 갈등관계를 유지했던조선일보는 계속 사주가 바뀌면서도 반일논조 때문에 정간과 필화가 잇따랐다.신간회(新幹會)운동으로 안재홍(安在鴻)사장이 구속되는 등 혼란을 틈타 고리대금업을 하던 채권자 임경래(林景來)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주장하여 조병옥(趙炳玉)·주요한(朱耀翰)의 정통 편집팀과 대결,두 개의 조선일보 발행이라는 희극이 연출되다가 방응모(方應謨)가 참여,부사장을 거쳐 발행인이 된 것이 1933년 7월(사장은 조만식).이 혼란 속에서 한설야는 학예부에 근무하며 노동 현장소설의 신기원이란 평가를 받은 이북명(李北鳴)을 발굴하여 ‘질소비료공장’을 연재 중단 당하는 등 카프노선에 충실한 언론인으로 활동한 것 같다. 당시 정황을 한설야는 단편 ‘세로(世路)’에서 너무나 자세히 언급하여 한국언론사의 충실한 증인 역할을 해주고 있다.소설은 자신이 회사로부터 해직 통고서를 받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왜 그렇게 됐는가에 대한 자초지종을 회상하고있다.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지만 사정상 이니셜을 썼는데,쉽게 알만한 인물들이 그대로 나온다.새 경영진은 기구와인사 개편을 통하여 그때까지 신문사의 주류였던 M일파(투옥 경력자 등으로 묘사)를 약화 시키는데,이 과정에서 인간적인 배신감과 사회적인 공분이 폭발한 한설야는 술자리에서 변절한 동료의 뺨을 후려친 게 화근이 되어 권고 사직을 당했다. 조선일보 사사(社史)에 의하면,1934년 1월 1일자로 대폭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는데,특히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된 M(문석준)의 좌천도 바로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미뤄 볼 때 한설야의 퇴직도 이 무렵일 것이다.이 문석준은 1943년 함흥에서 한설야와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한설야는 1944년 5월 석방) 당하는 주인공이다.1934년은 그에게 매우 불행한 한 해였다.해직 후 8월 그는 카프 2차사건으로 구속됐기 때문이다.달필인 한설야의 편지는 함흥에서보낸 것인데,아마 1941∼2년초 경 ‘삼천리’가 ‘대동아’로 개제하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최정희가 한설야에게 잡지에 재수록할만한 짧은 작품을 추천해 달라는 청탁에 대한 회답 형식인 이 편지에서 그는 ‘강아지’와 ‘능금’을 천거했다.앞의 작품은 ‘한설야 단편집’에 실려 있는데,그게 1941년 7월에 나왔으며,뒤의 것은 1940년 간행 단편집 ‘귀향’에 게재된 것으로 볼 때,그리고 ‘대동아’개제가 1942년 3월부터였음을 감안하면 이 편지가 씌어졌던 시기는 밝혀질 것이다.이 무렵 그는 함흥에서 서점·극장·인쇄소 등에 손을 대는 등 생업과 창작에 전념하면서 해방의 날을 준비하고 지냈다.여담이지만 한설야는 광복 후북한에서 ‘김일성장군 전기’를 비롯한 여러 작품을 쓴 한편 소련(1947),평화옹호 세계대회 참석차 프랑스(1949) 등지를 방문하는 등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1962년 비판당한 후 불행한 최후를 마치고 작품도 판금,아직도 전면적인 해금이 안된 상태에 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정부, ‘클린 월드컵’ 지침 만든다

    정부는 14일 내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클린(깨끗한) 월드컵대회'로 치르기 위해 이달 중 자동차 덜타기 및불필요한공(空)회전 금지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친환경적 대기오염방지 지침을 제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주재로 정례 국무회의를 열어 이같이 결정하고 월드컵 대회의 경제적 파급효과 극대화,관광문화 월드컵을 위한 방안등을 집중 논의했다. 이연택(李衍澤) 월드컵 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은 “10개 경기장의 평균 공정률이 96%”라면서 “올해말까지 모두 완공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진념(陳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경제적 파급효과를 높이기 위해 스포츠 관련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재경부차관을 단장으로 하는 ‘전담기획단'을 운영해 성과가 가시화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김명자(金明子) 환경부장관은월드컵 대회 최초로 경기장내 금연을 실시하겠다고 보고했다.이를 위해 이달중 ▲자동차 부제운행 적극 참여 ▲대중교통 이용하기 ▲불필요한 자동차 공회전 금지 등 친환경적 대기오염방지 지침을 제정,범국민운동으로 실천하도록하겠다고 말했다. 또 천연가스 버스의 획기적 보급을 위해 이동식 충전시설을 확보 등 특별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은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다음달 시·도별 관광수용태세를 종합 점검하고 월드컵 개최 때까지 166회의 월드컵 문화행사를 개최하겠다고 보고했다. 최광숙기자 bori@
  • 시인 김정환의 ‘내 영혼의 음악’

    13일 저녁 서울 시내 한 호프집에서 조촐한 출판 기념회가 열렸다.르네상스적 교양을 지닌 ‘전천후 예술가’ 김정환이 낸 ‘내 영혼의 음악’(청년사 펴냄)을 축하하기 위한자리였다. 평론가 황광수 정호웅 정과리 등 문우들이 저자의 새 ‘아기’에게 덕담을 던졌다.평론가 하응백은 시인 신경림의 모친상가에 들른다고 먼저 자리를 떴고 소설가 조성란이 들어와서 “선생님 너무 멋진 책인 것 같네요”라며 기쁨을 나누었다. 이 책은 지난 98년 5월14일부터 대한매일에 연재한 글들을 모태로 하면서 그 뒤에 계속한 시인의 ‘음반 여행’을 묶은 것이다.연재 초기 많은 독자들로부터 ‘독특한 음반 평’이란 평가를 받았는데,그 힘은 아무래도 저자 문체가 빚는 ‘시적 호흡’에서 나온다.간결,단명한 문체로 발랄하게 이어지는 음반 산책은 독자로 하여금 한편의 시를 읽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그의 음반 여로(旅路)를 따라가다 보면 역시 김정환의 본업이 천상 ‘시인’일수 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소설,역사서,공연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이리 저리 뛰고있지만 그바닥엔 늘 그의 ‘시’가 배어있다.이미 ‘황색 예수전 1·2·3’,‘기차에 대하여’와 근작 시집 ‘해가 뜨다’ 등에서 보여준 언어 가꾸기의 저력이 든든한 힘이 되고 있다.어떤 형식의 글을 쓰든 그것은 김정환식의 ‘시어(詩語)’로변신하여 단번에 읽는 이를 빨아들인다. “시를 쓰는 내내 음악을 틀었다.음악은 내 상상력의 자양분이다.음악을 듣는 것 못지 않은 느낌을 주도록 썼다”라는 토로에서 음반 여행과 그의 시가 지닌 함수를 짐작할 수 있다.음악을 듣다가 감동하면 작곡가 연주가 악기 등 관련 자료를 모조리 뒤져 질릴 때까지 듣고 추리고 하면서 엮었다.하다보니 5,000여장의 음반이 쌓였고 시중에선 구하기힘든 음반 등을 중심으로 150개를 골랐다. 두번째 이정표는 지은이가 포기할 수 없는,역사 의식이다. 책 곳곳에 그 ‘정신적 도도함’은 드러난다.질곡의 시대를 몸으로 건너온 저자는 가벼워만 보이는 세태,더 나아가 저자의 말을 빌자면 “갈수록 천박해지는 진보 진영”에 “품위 좀 갖추자”고 은근히 시비 걸고 있다.저자가구 소련출신의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구 동독의테너 페터 슈라이어 등에 유달리 애정을 쏟은 이유도 이와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 진지함에서 우러 나온 무거움은 르네상스 시대의 연주법을 그대로 재현한 영국 정격 음악 지휘자 앤드루 패럿에대한 섬세한 조명으로 넓어진다. “150개 음반중 가장 애정이 가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니 곰곰 생각하던 지은이는 “모두 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애정을 담았다.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쇼숑 ‘포엠’ 라벨 ‘치간느’를 연주한 지네트 느뵈 연주곡집은 작곡가의 작품보다 연주자의 해석 때문에 선정되기도 했다.3만8,000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옆에 앉아 있던 정성현 청년사 대표는 “들인 공에 비하면 전혀 비싸지 않다”고거들었다. 이종수기자 vielee@
  • [대한광장] 친일파 논쟁을 보면서

    필자는 월간중앙 8월호에 임정 국무위원 김승학 선생이 작성한 친일파 명부에 해제를 붙이면서 이 문제가 아직도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느낄 수 있었다. 1945년 8월15일,일본 ‘천황’이 떨리는 음성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을 때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수많은 국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어디에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알 수없는 태극기가 새 하늘에 펄럭였다. 반면 친일파들은 믿었던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한 순간에 뒤바뀐 세상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운명은 사형,장기구금,재산몰수로 구체화될 민족의 심판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1944년 8월25일,불과 5년간의 나치 치하에서 해방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대대적인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나섰다.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나치하의 비시 정권의 총리를 지낸 라발 총리 등에게 사형을 선고 집행했고,일반법원은 6,76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779명의 사형을 집행했다.지방법원은 4,783명에게 사형을 선고해 그중 약 3,000여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보다 수십배의 나치 협력자들이 종신 강제노동형 등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 이광수와 최남선을 비롯한 일부 친일지식인들이서둘러 반성문을 쓴 것은 프랑스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한 공포감도 작용한 것이다.이런 지식인들보다 더욱 공포에 떨었던 일단의 반민족 행위자들은 일제 고등계 경찰들과 친일 검사·검사보들이었다.이들은 실제로 독립운동가를 직접 체포,고문한 독립운동가 사냥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포가 안도의 한숨으로 바뀌고 다시 독립운동자 박해에 나서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효용성과 반공을 내세워 이들을 다시 등용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박해하게 한 것이다. 48년 국회가 개원하면서 설치된 반민특위는 온 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는 친일 경찰들에게 특위 사무소가 습격당하는 등 수난을 겪다가 문을닫고 말았다.그리고 이 땅에는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고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담까지 생겨나는 가치관의 혼돈이 난무하게 되었다.이런 점에서 친일파 명단을 작성했던 김승학 선생이 64년그의 마지막 유고가 된 한국독립사 서문에 쓴 글은 아직도 심금을 울린다.“무릇 한국가를 창건하거나 중흥시키면 가장 먼저 유공자를 논공행상하고 반역자를 엄격하게 치죄하는 것은 후세 자손들에게 유공자의 우국충정을 본받게 하고 반역자의 그 죄과와 말로를경계케 하여 국가주권을 길이 반석 위에 놓고자 함이다…건국이래 이 국가 백년대계의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반역자를 중용하는 우거를 범한 것은 광복운동에 헌신하였던 항일투사의 한 사람으로서 전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시정(施政)중 가장 큰 과오이니 후일 지하에 돌아가 수많은 선배와 동지들을 대할까 보냐.이 중대한 실정으로 말미암아 이 박사는 집정(執政)10년동안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의 적(的)이 되었었다” ‘이 중대한 실정’의 과오가 오늘까지 이어져 대다수 국민들이 창씨개명했으니 모두가 죄인 아니냐며 친일행각을 두둔하는 가치전도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지하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자손들이 살아야 할 이 나라가 ‘항상 악이 승리하는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친일파 문제를 둘러싼말장난만큼은 즉각 중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후안무치한 말장난에 분개하는 것은 지하의 독립운동가들만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세계 도자기엑스포 어제 개막

    ‘세계 도자기엑스포2001 경기도’ 개막식이 9일 오전 10시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설봉공원 주행사장에서 열렸다. ‘흙으로 빚는 미래’를 주제로,일반공개(10일)에 하루앞서 열린 이날 개막식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내외와 김한길 문화관광부장관,임창열(林昌烈) 경기도지사,토니 프랭크스 국제도자협의회(IAC)회장 등 초청인사 2,000여명이참석한 가운데 90여분간 진행됐다. 경기도립무용단과 경기도립 팝스오케스트라의 식전행사와함께 개회식을 알리는 팡파레가 울려퍼졌고 이어 엑스포영상홍보물 상영,대회사,도자불씨 봉정,전시물 관람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지난 1월1일 설봉산에서 채화돼 도예꿈나무와 도예인 서광수씨에 의해 김 대통령 내외에게 봉송된 ‘영원한 도자의 불’은 토야불씨대에 안치됐다.이 불은 앞으로 80일동안 행사장을 지키게 된다.한편 광주·여주행사장은 10일개막식과 함께 일반에 공개된다. 성남 윤상돈기자 yoonsang@
  • 정지용 친일논쟁 새국면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鄭芝溶)시인을 둘러싼 친일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충북 옥천 일대에서 지난 5개월동안 펼쳐지던 ‘정지용 친일논쟁’에 최근 학계까지 적극적으로 ‘의견’을 밝히면서, 논쟁의 무대가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 시인의 친일시비가 일어나게 된 것은 ‘안티조선운동’때문이다. 지난해 8월 옥천에서 안티조선모임인 ‘물총닷컴’이 활동을 시작하면서 부수감소 등 타격을 입은 최영배(47) 조선일보 옥천지국장이 던진 한마디가 논쟁을 촉발했다. 최씨는 지난 3월 인터넷신문 ‘피알한닷컴’과 가진 인터뷰에서 “친일한 것이 조선일보 뿐이냐.동아일보도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할 수도 없었다.그렇게 보자면 이 지역 대표적 인물인 정지용도 친일파였다”며 정지용 시인을 거론했다. 최씨의 이같은 발언 이후 옥천 출신 인사들이 정지용의 친일여부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면서 문제가 날로 확대됐다.문학평론가 김성장씨(42·옥천상고 교사)는 옥천신문에 글을기고하고 “친일시로 지목된 ‘이토(異土)’는 이광수·서정주등의 노골적인 친일성향의 시들과 비교해 볼 때 친일시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김씨는 “정지용 시인의 친일시비에 대해 명확히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글을 썼다”고말했다. 정지용 친일논쟁이 이같이 꾸준히 진행되자,친일문학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헌영씨(중앙대 겸임교수)는 최근 ‘문학사상’ 8월호에 ‘정지용 친일론의 허와 실’이라는 글을 싣고,“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이토’는 친일시로 보기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런 시 한편을 남겼다고그를 친일파로 몰아붙인다면 이는 전국민을 친일파로 몰아친일논의 자체를 ‘물타기’하려는 일각의 음모”라고 풀이하고 “정지용을 친일파로 몰아서 이런 훌륭한 시인도 친일파니까 아예 이 문제는 넘어가자는 속셈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최씨는 3일 “단정적으로 정 시인이 친일파라고 말한적은 없다”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탄생 100돌 문학정신 기린다

    우리 근대문학을 살찌운 문인 중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맞는 이들이 유달리 많다. 김동환 이상화 박영희 최서해 심훈 박종화 등. 대산문화재단과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공동으로 다음달 하순 이들의 탄생 100주년에 담긴 뜻을 되새기기 위해 ‘근대문학 갈림길에 선 작가들-탄생 100주년 기념문학제’란심포지엄을 열고 이들의 문학정신을 살펴본다.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문화사업팀장은 “문학이 갈수록 소외되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이 행사를 갖게 됐다”면서 “문학이 대중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월간 문학사상도 8·9월호에 이들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문학사상은 8월호에 시인편(김동환 이상화 박영희)을 특집으로 실었고 9월 호에서는 소설가편(최서해 심훈 한설야)을 게재한다. 김동환의 유족은 이런 행사와는 별도로 학술세미나 자료전 시화전 가곡의 밤 등을 준비중이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씨는 “1901년 태생의 작가가 많은 이유는 3·1 운동 후 일제의 유화국면 전환에 따라 많은 지식인이 배출된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면서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문인들이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경향을 공통분모로 하고 있는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문화계 인사들은 “문학이나 예술작품이 현실과 완전히유리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면 이들의 작품세계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근대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격동기를 헤쳐온 문학 정신과 만남으로써우리의 현재를 점검하고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게되기를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종수 기자 vielee@. ◎문학 대표작가 6인 업적. ●심훈 30년 이후 해방의 염원을 담은 시 ‘그날의 오면’과 항일 투쟁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 ‘동방의 애인’ 등을 발표한 작가.대표작은 장편소설 ‘상록수’이다.이광수와 함께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브 나로드’ 운동에앞장섰다. ●이상화 초기엔 프랑스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 ‘나의 침실로’ 등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썼다.1924년을 기점으로 민족의식을 중시하게 되며 카프의 일원으로서 농민이나 노동자의 삶을 그린다.‘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저항의식을 표출했다. ●최서해 신경향파의 선두주자.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탈출기’‘기아와 살육’ 등에서 간도 유민이나 빈농의 생활상을 그렸다.계급 갈등을 탁월하게 묘사한 카프파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박영희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에 가입해 무산자문학의 대표적 이론가로 활약하다 1934년 카프를 탈퇴하면서 신문에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것은 예술 자신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이후 운동보다는 문학에 열성을 쏟았으며 일제말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친일행위를 벌였다. ●김동환 ‘북청 물장수’라는 작품으로 익숙한 시인. 30년대 말부터 친일문학으로 변절했다는 오점을 갖고 있으나 근대문학사에서 그가 끼친 영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국경의 밤’과 같은 장편 서사시를 통해 민족주의를 고취했다.또 전래 민요의 형식과 내용을 살린 민요시를 창작,전통성을 이어 가려고 노력했다.향토색 짙은 시를 많이썼다. ●박종화 초기엔 ‘백조’동인으로 활약하면서 낭만주의시를 썼다.주로 3·1운동 후의 암담한 민족 현실을 노래했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지배적인 풍토에서도 민족주의 문학을고수했다. 일제말까지 변절하지 않고 한국 역사와 고전 연구에 몰두했다.‘금삼의 피’‘홍경래’‘세종대왕’ 등역사소설을 많이 썼다.
  • 의료계 파업 주도‘유죄’

    지난해 사상 초유의 의료계 파업을 이끈 대한의사협회 지도부 9명에 대해 모두 유죄가 인정됐다. 서울지법 형사2단독 염기창(廉基昌)판사는 31일 의료계 집단폐업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된 전 대한의사협회장 김재정(61) 피고인과 의권쟁취투쟁위원장 신상진(45) 피고인에 대해 독점규제법 위반죄 등을 적용,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의협 부회장 한광수(61) 피고인과 의쟁투 중앙위원 최덕종(51) 피고인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의쟁투상근 운영위원 이철민(51) 피고인 등 5명에게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염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의사폐업이 개별 의사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자율적 참가에 의해 이뤄졌다고 주장하지만 피고인들이 집단 휴·폐업에 의사들이 참가토록 사실상 압력을 행사했고 전공의들의 파업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줘 대형 병원의 업무를 마비시킨 점 등이 모두 인정된다”면서 “피고인들이 일반 국민과 환자 및 보호자들에게 심대한 고통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보건의료 개혁에 기여하려했다는 점 등을 참작,형의 집행은 유예한다”고밝혔다. 염 판사는 보건복지부의 업무개시 명령은 휴업신고에만 적용되지 폐업신고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에대해 “피고인들 중 일부가 폐업신고한 뒤 별도의 개업신고 없이 고용의사들을 통해 다시 영업을 개시한 점 등으로 볼 때 폐업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며 기각했다.김 피고인 등은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 방침에 반발,지난해 6월부터 의사 집단폐업을 주도해 구속기소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
  • 김종명 프로 첫 정상 등극

    무명의 김종명이 생애 첫 승을 거뒀다. 김종명은 27일 전남 승주CC(파72)에서 벌어진 스포츠서울 호남오픈골프대회 마지막 4라운드에서 버디 4개 보기 1개로 3언더파 69타를 치며 합계 14언더파 274타를 기록,김완태 박노석과 동타를 이룬 뒤 연장 첫번째 홀에서 4m짜리행운의 버디를 낚아 우승컵을 안았다. 이로써 99년 프로 데뷔 이후 별다른 성적 없이 중하위권을 맴돌던 김종명은 프로 첫 승의 감격을 누렸다. 역시 87년 데뷔 이후 15년 동안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김완태는 연장 첫홀에서 파에 그쳐 물러났고 지난해 랭스필드컵 챔피언 박노석도 아깝게 파에 머물러 시즌 첫 승이좌절됐다. 전날 공동선두로 뛰어올라 시즌 3승째를 노리던 최광수는2타를 줄이는데 그쳐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4위에 그쳤다. 3라운드까지 최광수 김완태와 공동선두를 이뤄 챔피언조에서 마지막 라운드를 맞은 김종명은 첫홀(파4)부터 기분좋은 5m짜리 버디퍼팅을 성공시키며 출발한 뒤 4번과 7번홀(이상 파4)에서도 거푸 2∼5m 거리의 롱 퍼팅을 컵에 떨궈 단숨에 단독선두로부상했다. 9번홀(파5)에서 뜻밖의 3퍼팅으로 보기를 범해 잠시 주춤한 김종명은 이후 차분히 파 세이브 행진을 거듭하다 13번홀(파3)에서 티샷을 홀 2m거리에 붙여 침착하게 버디퍼팅을 성공시켜 연장으로 몰고 간 뒤 첫홀에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곽영완기자 kwyoung@
  • 최광수 공동선두 도약…스포츠서울 호남오픈골프 3R

    남자골프 시즌 2관왕 최광수(코오롱)가 스포츠서울 호남오픈골프대회(총상금 2억원) 3라운드에서 공동선두에 합류했다. 최광수는 26일 승주CC(파72)에서 계속된 대회 3라운드에서버디 5개 보기 2개로 3언더파 69타를 치며 합계 11언더파205타로 김종명(카스코) 김완태(나이센)와 함께 공동선두로뛰어올랐다. 첫홀(파4)에서 버디를 잡아 출발이 좋았던 최광수는 6번(파4)·8번홀(파3)에서 거푸 보기를 범해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으나 9번홀(파5)에서 버디를 낚아 전반을 이븐으로 마쳤다,후반 들어 자세를 가다듬은 최광수는 보기없이 10번·15번·17번홀(이상 파4) 등 3개 홀에서 버디를 기록하는 상승세로 라운드를 마쳐 시즌 3승에 한발 다가섰다. 첫날부터 선두권을 달린 김종명과 김완태는 나란히 버디 3개 보기 1개로 2타씩을 줄이며 간신히 공동선두를 지켜 생애 첫 승 가능성을 남겼다. 한편 93년 한국오픈 우승자 한영근(브리지스톤)은 버디만6개를 골라내는 완벽한 플레이로 이날 3타를 줄인 박노석과함께 선두그룹에 1타 뒤진 공동4위로 뛰어올랐다. 곽영완기자 kwyoung@
  •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시작

    예산문제로 그동안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던 ‘친일인명사전’ 발간문제가 전기를 맞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한상범) 산하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는 지난 20일 편찬위원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워크숍을 갖고 사전 편찬일정과 주요 내용 등을 토의했다. 준비위에 따르면,친일인명사전은 총론(5∼7권),인명사전(2∼3권),자료집(10권 내외) 등 총20권 분량의 ‘친일파총서’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단순히 친일파 명단만 사전으로 펴내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지배정책과 친일파 육성정책,친일파들의 구체적인 활동내용,해방후 친일파 청산실패 및 재등장등을 망라해 친일파문제를 ‘집대성’하려는 것이다. ‘총서’ 가운데 핵심은 친일인명사전이다.편찬위는 자체적으로 설정한 기준에 따라 근거자료를 토대로 대략 3,000명안팎을 인명사전에 담아낼 계획이다.편찬위는 해당인물의 친일행적 정도,근거자료의 확보 정도에 따라 A·B·C 3등급으로 나눠 서술할 방침이다.예를 들어 춘원 이광수처럼 친일행적도 분명하고 관련자료도 풍부한A급은 100매 정도,B급은 50매,C급은 20매 정도 분량으로 다룰 계획이다.이밖에 구체적인 인적사항 확인이 곤란한 경우에는 ‘자료집편’에서 조선총독부와 각종 관변·어용 친일단체 관련자 명단수록으로 대신한다. 사전 편찬의 1차적인 관건은 관련자료 수집이다.그동안 관련자료를 수집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당시 발행된 각종신문,총독부 관보 및 직원록,각종 인명사전,개인회고록,문집 등을 수소문하여 분야별,지역별로 데이터베이스화를 진행해 왔다.자료 가운데 문학·음악·미술 등 예술분야와 행정관료들은 이미 DB구축이 완료된 상태다.그러나 관료 가운데서도 경찰·군인 등은 자료접근 자체가 어려워 아직 상당수가미비한 실정이다.해외 친일자료의 경우 현지 연구소나 연구자와 자매결연을 맺고 공동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한 예로만주 친일파 관련자료는 중국 연변대 민족연구소가 도맡아작업중이다.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실장은 “예산과 인력이 뒷받침될 경우 자료수집·가공작업은 그리 큰 문제는아니다”고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소문이 나돈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그러나 아직 이렇다할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른 사회적 비판도 없지 않았다.한상범 소장은 “올해중 1차로 ‘총론’의 일부를 출간한 뒤 국민적 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운현기자 jwh59@
  • 김종명·김완태 ‘산뜻한 출발’…호남오픈골프 1R 공동선두

    김종명(카스코)과 김완태(나이센)가 제2회 스포츠서울 호남오픈골프대회(총상금 2억원) 첫날 공동선두를 달렸다. 99년 프로로 데뷔한 이후 별다른 성적이 없는 무명의 김종명은 24일 승주CC(파72)에서 열린 대회 첫날 이글 1개 버디5개를 묶어 7언더파 65타를 기록, 버디만 7개를 골라낸 김완태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라 생애 첫 승에 도전하게 됐다. 첫홀(파4)부터 버디로 출발한 김종명은 3번(파5)·7번홀(파4)에서 버디를 추가한뒤 9번홀(파5)에서 이글을 엮어내전반에만 5타를 줄이며 일찌감치 선두로 뛰어올랐다. 후반들어 14번홀까지 버디 사냥 없이 잠잠하던 김종명은15번·18번홀(이상 파4)에서 거푸 버디를 낚으며 기분좋게 라운드를 마쳤다. 87년 프로에 입문하고서도 역시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한중견 김완태는 2번·6번(이상 파4)·8번(파3) ·9번홀(파5)등 전반 4개홀에서 버디를 잡은뒤 후반 들어서도 3개홀에서착실히 타수를 줄여 모처럼 선두권에 이름을 올렸다. 시즌 2관왕 최광수(엘로드)는 버디만 6개 낚아 선두그룹에1타 뒤진 3위에 랭크됐고곽유현(브리지스톤) 등 3명이 67타로 공동 4위를 달렸다. 지난해 우승자인 박남신(서든데스)은 1언더파 71타로 마감,공동 28위에 처졌다. 곽영완기자 kw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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