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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 3명 서울 도착, 2명은 오늘 입국예정

    지난주 중국 선양(瀋陽)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 3명이 싱가포르를 거쳐 14일 오후 4시15분쯤 싱가포르항공 편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지난 8일과 9일 미 총영사관에 진입한 송용범(38)·차광복(36)·최광철(21)씨 등 탈북자 3명은 이날 새벽 선양을출발,싱가포르에서 잠시 머문 뒤 서울로 들어왔다. 지난 11일 베이징 주재 캐나다대사관에 진입했던 20대의 탈북자남녀 2명도 이날 저녁 베이징을 떠나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며,이르면 15일 한국에 올 것으로 전해졌다. 14일 인천공항에 도착한 송용범·차광복·최광철씨 등 탈북자 3명은 정부로부터 국내 정착지원금으로 각각 3700만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김수정기자 crystal@
  • 광복회장에 장철 경기도지부장

    광복회는 13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총회를 열고 제16대 광복회장에 장철(張鐵·80) 경기도 지부장을 선출했다.장 회장은 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후 군에 투신,육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광복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한편 광복회는 오는 17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개막식을 갖는다.
  • 최인훈 장편 개작 ‘화두’

    최인훈(66·서울예대 명예교수)이 그의 장편 소설 ‘화두’를 8년 만에 고쳐서 펴냈다. 1000쪽이 넘는 분량으로 문이재에서 두 권으로 출간했다. 저자 스스로 ‘21세기 판’이라고 할 정도로 지난 8년 동안 저자가 900여 군데를 손질하는 등 치밀한 정련을 거쳤다. ‘화두’는 지난 94년 작가가 2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발표해 화제가 됐던 장편소설.작가의 분신인 ‘나’가 서술하는 이 책은 광복 이후 북한의 초기 공산 정권 아래서보냈던 사춘기 시절,전쟁 후 제3국을 선택한 전쟁포로처럼 남북한에 모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으로서의 작가의 자화상 등을 담고 있다. 출판사 측은 “개정판은 한자어를 토박이말로 바꾸고 논리적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 문장을 다듬었다.”면서 “또 호흡을 고려해 2개의 장을 신설하고최근에 지은 시 1편을 추가했다.”고 밝혔다.문학평론가김종회 경희대 교수가 정리한 ‘최인훈,문학적 연대기’와 60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된 ‘최인훈 문학 연구현황’을 부록으로 달고 있다.각권 1만 5000원.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2)오락가락하는 대 한반도 정책

    1884년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1910년 한일합병전후까지 러시아의 대(對)한반도정책은 현상 유지(독립국가 유지)와 무력점령,38선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남북 분할점령 등 3개안을 기본으로 변화해 왔다. 그런가하면 국내외의 정치 상황과 역학관계에 따라 중립국안,완충지대안,만주 및 몽고와의 거래에 의한 양보안까지 오락가락하기도 했다.특히 일본이 1896년 처음 제기한뒤 러시아도 솔깃해진 일본과의 남북 분할점령안은 광복및 6·25전쟁과 함께 남북 분단으로 현실화됨으로써 한국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서울에서 체결한 조·러 수호통상조약문을 동봉한다.외무성은 조선과의 수교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나 정치적 상황이 여의치 못해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독일과 영국이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황제 폐하(니콜라이2세)의 윤허를 얻어 서울에베베르(전권위원,초대 대리공사)를 보내 조약을 체결했다.이 조약은 독일과 영국이 체결하지 못한 영사관 설치문제가 제2조에 명문화돼 있으며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청국 영사관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그곳에 조선영사관을 허용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1884년 10월8일 기르스 외무상이 톨스토이 내무상에게 보낸 조·러 수호통상조약 13조 전문 등23쪽에 달하는 극비문서) 이 문서는 제정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찾아낸 방대한 분량의 한국 관련 문서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앞서는 문서 중 하나로 한국과 러시아의 최초 공식 외교협정인 조·러 수호통상조약의 체결배경에 대한 러시아측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 문서를 통해 러시아의 1차적인 관심은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데 있다는 사실을알 수 있다.물론 수교불가피론의 근저에는 영국과 독일 등 열강에 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함께 남하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부동항의 획득에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러시아에 바람직한가.점령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1888년 4월26일 아무르 총독과 외무부 아시아국장의 특별회의록).러·일간 우호확립에 유일한 방해요인은 대한제국 문제이다.일본 천왕의 총애를 받는 야마가타(山縣有朋) 원수는 대한제국 분할에 관한 러·일간의 협정체결이 양국간의 우호증진을 위한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수도를 포함한 남부를 차지하고 동해안과 서해안의 항구와 대부분의 대한제국 영토를 러시아에 양보할 준비가돼 있다고 한다.그러나 이는 대한제국의 완전독립과 모순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1899년 2월9일 외상이 황제에 상주한 문서). 이들 문서로 미루어 볼 때 러시아는 1896년 로바노프 외무상과 야마가타 특사 사이에 체결된 모스크바의정서는 물론,1898년 로젠-니시협정으로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일본측으로부터 완전히 담보받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으며,남북분할점령안을 거부했지만 여전히 매력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시 일본이 주도한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과 이로 인해 촉발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아관파천·1896년)으로 곤경에 빠진 일본 대신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조야를 주무르던 때였다. 하지만 이후 러시아의 대한제국 독립국가 유지정책은 조금씩 후퇴하는 조짐을 보인다.여기에는 100만명에 달하는러시아군의 대부분이 유럽지역에 주둔하고 있어 극동지역에서의 군사력 약세를 인정하는 측면도 있었다.병력을 신속히 이동시킬 수 있는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기 전까지외교적으로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원,현상유지시키겠다는 속셈도 작용했다. 만주와 극동에서 러시아가 굳건한 기반을 확립하고 만주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25∼30년이 걸릴 것이다.만주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러시아가 일본의 민족적 자존심에 손상을 주지 않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보하는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1902년 12월 뷔테 재무상이 람즈돌프 외무상에게 보낸 러·일 협상관련 비밀문서).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아 철도 및 은행 등을 장악하는것은 무의미하다.문제는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장악해야 하는데 대한제국 남부의 점령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므로 대한제국 전역을 지배할 수 있는 기회를 엿봐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먼저 만주를 지배하지않으면 안된다(1902년 10월8일 도쿄(東京)주재 러시아 공사인 로젠 남작이 니콜라이2세에게 상주한 보고서).황제(니콜라이2세)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북쪽으로는 두만강,서쪽으로는 압록강까지점령해도 좋다는 결심을 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황제는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보하면 군사충돌을 피할 수 있다고생각한다.(1903년 6월11일 해군제독 아바자가 베조브라조프에게 보낸 전문). 로젠 공사의 보고서에 대해 파블로프 공사도 의견서를 통해 “러시아는 실제적으로 국익에 손상을 입지 않고 대한제국 문제 해결을 명분삼아 일본정부에 대한제국의 행정감독은 물론 철도,우편,전신 등에 유리한 권한을 인정하면서 재정과 군사부문까지 참여를 허용해야 하며 러시아는 만주문제에 대한 일본의 불간섭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맞장구쳤다.니콜라이2세는 문서 상단에 ‘파블로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의견을 친필로 남겼다. 니콜라이2세는 1904년 1월26일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친필서명이 든 전문을 보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는것보다는 일본이 먼저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일본이 먼저 개전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남해안 혹은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만약 38선 이북 서해안으로 상륙병과 함대가 북진해오면 적군의 첫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공격하라.”고 긴급지시했다. 러시아의 정책이 대한제국의 양보쪽으로 서서히 방향을틀고 있는 가운데 일본군이 38선 이북 서해안으로 상륙하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마지노선’을 암시하고 있다.1902년 1월 런던에서 체결된 영·일동맹은 러시아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이 시기를 전후해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이고개를 든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러시아 군부는 대한제국 전역 혹은 북부지역의 무력 점령안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러시아는 일본뿐 아니라 어떤 국가에게도영향력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러시아가 대한제국을 점령해러시아에 합병시켜야 한다(1900년 두바소프 태평양함대사령관이 니콜라이2세에게 상주한 극동의 정치상황).일본은전 병력을 만주전선에 투입했다.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 진격해야 한다.현재의 16개 부대로는 병력이 부족하다.진격계획은 8월로 연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1904년 6월 아무르 군관구 참모부에서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에게 보낸 전문). 일본군이 만주전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틈을 이용해대한제국 영토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겠다는 국지전(局地戰) 계획이긴 하지만 점령안을 지지하는 군부의 의사를엿볼 수 있다.무력점령안에 따른 진격계획은 보다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이들 부대는 러·일전쟁 당시 한반도로 진출했으며 평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쟁불사’를 외치는 군부 및 일부 외교라인의 강경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1903년 6월 여순에서 베조그라조프 등 극동정책수립에 전권을 위임받은 수뇌부가 참석한가운데 특별회의를 갖고 한반도정책의 기조를 다음과 같이 정했다. 회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전역혹은 북부 일부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점령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일본이 점령하면항의는 할 수 있으나 자국군대를 투입해서는 안된다.▲일본의 점령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만주와 대한제국은 별개의 문제임을 선언하고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1903년 7월4일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이 로젠 주일공사에게 보낸 비밀전문). 대한제국 러·일 분할점령안에 따른 중립지대(완충지대)설정에 대한 극비메모도 흥미롭다. 중립지대 설정에 대한 자료는 외무성에 없으며,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니콜라이 1세의 손자) 대공의 1899년 3월6일자 극비메모에는 아무르강 하구에서 원산만까지,그리고 서울과 제물포를 포함하고 있다(1903년 3월11일 외무상이황제에게 보낸 상주서). 다소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뒤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독립국 유지를사실상 포기한 채 이권 챙기기에 주력했음을 다음의 외무성 훈령은 보여준다. 러시아의 이해관계나 대한제국의 심각한 하소연이 없는한 일본 통감부의 지시에 가급적 관여하지 말 것.일본 당국에 대한 한인의 불만에 개입하지 말고 열강의 최혜국 국민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사수하라.열강이 영사관을 개설하는 지역에 러시아영사관 개설의 필요성 여부의 의견을 상신하라.특히 러시아제국 정부에 전폭적인 충성심과 믿음을 보인 고종이 실현불가능한 기대를 갖고 러시아에 요구를해올 때 일본과의 사이가 악화되지 않도록 어떠한 약속도자중하라(1906년 외무상이 대한제국에 부임하는 플란손 총영사에게 내린 훈령). 러·일전쟁에서 패배,일본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음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러시아의 비탄과 몸조심은 더욱 두드러졌다.플란손은 1905년 12월 작성한 비망록에서 “러시아는 지난 10년간 대한제국에서 이룩한 외교적 성공을 잃어버렸다.”고 자탄했다.니콜라이2세는 같은해 11월 고종의 계속되는 독립유지 지원 호소에 대해 “고종 황제에게 ‘패전 이후 혁명세력의 확장으로 더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전문을 보내라.”는 칙령을 외무성에 내렸다. 제정 러시아는 신흥 일본제국주의에 패배해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다.로젠 당시 미국대사는 1906년 외무성에 보낸 문서에서 “러시아가 남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국토를 확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 영향이 이제 대한제국에까지 미쳤으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30∼40년 후퇴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이같은 지적은 40년 뒤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러시아)의 38선 이북 점령으로 현실화됐다. 노주석기자 joo@ ■러 당시 외교라인 대한제국 말 러시아의 한반도정책이 오락가락한 이유는무엇일까? 가능하면 일본이나 청과의 전쟁을 피하되 대한제국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실리 위주의 외교정책에 1차적인 원인이 있지만 당시 매파와 온건파로 양분됐던 외교라인의 분열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당시 한반도정책의 최고 결정자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였다.이번에 발굴된 러시아 극비문서에 따르면 그는 1901년 파블로프 대리공사가 “서울에서 개에 물려 광견병 예방주사를 맞으러 도쿄에 왔다.”고 보고하자 “휴가를 줘 충분한 치료를 받게 하라.”는 시시콜콜한 것부터 “일본군이 서해 38선을 월선해 상륙하면 즉각 발포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내릴 정도로 모든 사안을 직접 챙겼다. 니콜라이2세가 극동관련 문제에 대해 보고를 받는 공식외교라인은 외무상의 직접 보고,극동총독의 상주서,일본·청·조선주재 공사들이 황제 또는 외무상에게 올리는 보고서 등 크게 세 가지 경로였다.이밖에 황실근위연대 기병장교출신으로 상서(명예 무임소장관)의 직위를 가지고 있던측근 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황족인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뷔테 재무상 등 비선(秘線)보고도 영향을 끼쳤다. 니콜라이2세는 모든 보고서를 빼놓지 않고 탐독한 뒤 자신의 의견을 보고서에 남겨 정책에 반영토록 했다.하지만대한제국의 독립국가 유지,일본과의 분할점령안,전역 점령안 등 상황에 따라 바뀌는 외교정책의 큰 틀에 대해서는개인적인 판단은 갔다. 다음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훈령을 통해 각국주재 공사를 통제하고 황제에게 의견을 올린 외무상이었다.기르스,로바노프,람즈돌프 등 역대 외무상들이 대체로 온건파여서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주장이 득세한 것으로 드러났다.여기에 뷔테 재무상과 쿠르파트킨 육군상 등이가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과의 일전불사,한반도 무력점령을 주장한 매파로는베조그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과 아바자 극동특별위원회 사무총장,플라베 내무상,알렉세이예프 극동총독,두바소프 태평양함대 사령관 등이 대표적이다. 알렉세예프 극동총독은 극동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903년 여순에 설치된 극동총독부는 외교권을포함,극동관련 사무의 1차적인 처리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러·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러시아의 극동정책은 외무성과 극동총독부가 공동으로 관여하는 2중구조로 돼 있었다.극동총독부의 설치와 권한부여는 당시 러시아의 신(新)극동정책을 주도한 베조브라조프 극동특별위원장의 작품이었다. 로젠 주일공사도 일본에서 한반도정책을 원격 조정하는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로젠 남작은 세 차례에 걸쳐 일본주재 공사를 역임했으며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도 일본공사였다.이후 미국대사로 승진,1905년 포츠머스 러·일강화조약 당시 러측 협상부대표를 맡았다. 노주석기자
  • 독자의 소리/ ‘나라사랑’말로만 하지말자

    지난해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와 고위 관리의 우경화 발언,일본 총리의 신사참배가 이슈가 된 뒤 맞은 광복절 당일 태극기 게양이 눈에 띄게 늘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파트 일층부터 맨 위층까지 태극기가 일렬로 게양됐는가하면 길거리에는 승용차와 택시에 단 태극기의 물결이 넘쳤다. 얼마전 미국 PGA투어 우승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골프선수 최경주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최 선수의 골프가방과 신발 뒤꿈치에 붙인 태극기가 예사롭지 않다.언어와 문화차이로 인한 고통 속에서 갖은 역경을극복하고 신화를 이뤄낸 최 선수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일상 속에 녹아있는 듯 싶다. 그는 PGA투어 무대에도 한국인이 있음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정서는 어떠한가.국경일에 태극기를 달기는커녕,국경일은 단지 하루 쉬는 날쯤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나라사랑은 교실 안에서만 강조되는 것이 아닌지 안타깝다. 황승임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 코믹영화 ‘광복절특사’ 설경구·차승원 캐스팅

    설경구와 차승원이 영화 ‘광복절특사’에 캐스팅됐다.두 명의 탈옥수가 광복절 특사 명단에 자기 이름이 끼여있음을 확인하고 감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펼치는 모험담을 그린 코미디.‘주유소 습격사건’‘신라의 달밤’의 김상진 감독과시나리오 작가 박정우씨가 호흡을 맞춘다.28일 촬영에 들어가 추석에 개봉한다.
  • [씨줄날줄] 박근혜와 김정일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11일부터 14일까지 북한을 방문한다.드러난 방북 목적은 지극히 사무적이다.재단법인 주한(駐韓)유럽연합상공회의소·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 관계자와 만나 남북간 상호협력 및 교류 문제를 협의한다고 했다.지난해 5월 유럽 24개국 주한 외교관과 상공인 등 600여명으로 구성된 재단법인이 북한 어린이에게 축구공 3만개를 보내는 등 민간 차원의 지원 활동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박 의원의 북한 방문은 예사롭지 않다.사흘이나 북한에 머물다 보면 십중팔구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만날 것이다.두 사람의 하고픈 얘기로 말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말머리는 아버지 시대로 올라 갈 것이다.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남북은 본격적인 대결 시대를맞는다.1917년생 박 대통령이나 1912년생의 김일성이 모두50세 전후로 나름대로 지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었다.박 대통령은 강인한 의지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며 부국강병 경쟁에서 김일성 주석을 압도했다. 세상 일이 선의의경쟁에서 지면 폭력을 쓰게 되나 보다.박 의원이 22살이던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어머니를잃는 쓰라림을 맞는다.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이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저격하는 테러를 자행했다.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육 여사였고 보면 박 의원의 슬픔은 원한으로 응어리질만도 했을 것이다.박 대통령의 장녀였던 박 의원은 많지 않은 나이에 어머니의 빈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자신을 돌볼겨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 의원은 독자적으로 정당을 하나 창당할 만큼 무게있는 정치인이 되었다.두 사람은 아버지들이 치열한 부국강병 경쟁을 벌이던 그 나이가 되었다.박 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조금 부풀린다면 두 사람의 역할도 엇비슷한처지다.박 의원은 어머니가 끔찍한 불행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두사람이 마주할 첫 장면이 궁금해진다.그리고 두 사람의 과거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무슨 말을 이어갔는지 나중에도 알았으면 좋겠다.꼬박꼬박 계산서를 주고 받을 수만도 없는민족 분단사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이 든다.박 의원 다짐대로 두 사람의 만남이 한반도 평화 정착에 구름판이 되기를기대해 본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부안 유천리 도요지 복원한다

    전북도는 국가 사적 69호인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도요지를 복원,정비키로 했다. 1일 전북도에 따르면 일제때 도굴과 70∼80년대 야산 개발 등으로 훼손된 유천리 도요지를 연말까지 2억원을 들여 정비하기로 했다. 도는 도요지 보호를 위해 국고 지원을 받아 오는 2006년까지 전시관과 체험관,청자 재현 연구관,청자 도예촌,판매장 등의 건립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유천리 도요지는 12∼13세기 최고 품질의 청자를 생산해고려 왕실과 귀족들에게 납품하던 곳으로 일제시대인 1939년 일본인 노모리씨가 이 일대에서 33개의 청자 가마터를확인하고 전남 강진과 함께 고려청자의 2대 생산지로 소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국립박물관이 지난 67년 발굴조사를 벌여수습한 자기파편 등을 통해 제조기법과 비색,형태 등이 강진 사당리 7호분과 같은 12세기 초·중엽의 청자 가마터로 확인했다. 유천리 도요지는 서해안고속도로 줄포 IC에서 보안면 소재지인 영전을 거쳐 곰소 쪽으로 3㎞ 거리에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
  • 윤봉길의사 의거 70주년 기념식

    윤봉길(尹奉吉)의사 의거 70주년 기념식이 오는 29일 서울과 중국 상하이에서 동시에 열린다.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회장 金德龍 의원) 주관으로 29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양재동 매헌기념관에서 열리는 서울 기념식에는 이재달(李在達) 국가보훈처장과 각계인사,광복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 상하이 기념식은 교민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루쉰(魯迅)공원에서 열린다.
  • 1876년 개항에서 광복까지 ‘서울의 어제’ 생생히

    서울의 역사와 문화,시민생활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사진으로 보는 서울 1·2권’이 발간됐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되고 사진을 통해 서울의 모습이 세계에 알려진 개항이후부터 1945년까지의 서울모습들이 망라됐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앞으로 모두 6권까지 발간될 예정인데 이번에 발간된 1·2권은 월드컵대회에 대비해 영문판으로도 만들어졌다. 제1권은 1876년 개항이후 1910년 일제강점기 이전의 시기를 대상으로 위기에 처한 구한말의 통치질서와 외세의 침략,근대화의 추진과 갈등,시민생활의 변화 등을 사진을 통해 보여주면서 그에 담긴 역사적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서술했다. 사진속에 비친 100여년전의 서울은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 많아 엄청난 변화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제2권은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45년 광복때까지를 대상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과 독립운동,그리고 파행적인 도시화의 진행과 시민생활의 변화 등을 담아 고통스러웠던 과거사를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교훈을 전달해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시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www.history.seoul.g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구입은 서울시 홍보관을 비롯해 정부간행물센터,시내 대형서점 등에서 구입(각권2만원)할 수 있다. 이동구기자 yidonggu@
  • 박은식선생 역사서 ‘渤海太祖建國誌’ 공개

    구한말 대한매일신보 주필 및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백암 박은식 선생의 실전(失傳) 저서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와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등 2권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19일 김도형(金度亨)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광복 전후기에 활동했던 한 원로사학자의 후손으로부터 지금까지 이름만 전해진 이 책들을 입수했다고 밝히고 실물을 공개했다. 두 권의 저서는 박은식(朴殷植) 선생이 한일합병 직후인1911년 만주 서간도 지역인 환인현(桓仁縣)으로 망명,훗날대종교의 3대 교주가 되는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머물면서 저술한 6권의 역사서중 일부로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와 함께 실물이 유실된 상태였다. 이번에 발굴,첫 공개되는 책은 두 저서를 합본한 것으로책 겉표지에 만주 봉천 ‘흥동학교(興東學校) 소장’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으며 서론에 이어 본문이 들어가는 첫머리에 ‘백암 박기정 저,단애 윤세복 열(白庵 朴箕貞 著,檀崖 尹世復 閱,박기정은 박은식선생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라고 필자를 밝히고 있다. 김 교수는 “이 책들은 1910년대 단군민족주의를 확립해간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을 밝히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하고 “특히 민족사의 계통을 단군과 이를 계승한고구려,발해를 중심으로 체계화하고 만주를 우리 역사 무대로 파악하는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견해를 이 책들을통해 펴고 있다.”고 밝혔다.김 교수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 전체를 영인한 내용과 이를 분석한 논문을 ‘동방학지’ 114호에 발표할 계획이다. 신연숙기자yshin@
  • 기마인물형토기 해방후 첫 발굴

    6세기 초 신라시대의 기마(騎馬)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기마인물형 토기(사진)가 해방 이후 처음으로 경주 외곽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됐다. 지난달 4일부터 경북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392의1 일대개인주택 건설현장에서 고분을 발굴 중인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은 기마인물형 토기를 비롯,돌무지덧널무덤 5기와 이형토기(異形土器),등잔형토기(燈盞形土器),금동관식,은제삼엽환두대도 등 중요 유구와 유물을 확인·수습했다고 12일 밝혔다. 신라시대 기마인물형 토기는 일제 강점기에 발굴된 금령총 출토 도제기마인물상 1쌍(국보 91호)과 출토 미상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국보 275호)이 전부이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기마인물형 토기는 출토지가 확인된 두 번째이자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발굴한 첫 번째가 된다.발굴팀은 현재 1호분 발굴만 완료했으며,다른 고분은발굴 중이다.이번 토기(높이 20㎝,길이 27㎝)는 말의 다리보다 몸통이 길게 표현돼 있으며,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모양을 하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편집자문위원 칼럼] ‘윤이상 홀대’ 유감

    지난 3월8일 개막된 ‘2002 통영 국제음악제’를 대한매일은 3월9일자 19면(사람 일 사람)에 일곱줄짜리 단신기사로 처리했다.이 음악제는 경남 통영 태생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을 기리기 위해 2000년에 ‘통영 현대음악제’로시작되어,올해는 이를 국제음악제로 격상시킨 첫 해이다. 윤이상이 누구인가.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이며,남북을 하나로 생각하고 행동한 몇 안되는 예술가 중의 하나이며,이로 인해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 극심한 핍박을 당한인물이다.스위스의 저명한 지휘자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창원시향이 윤이상 작품 ‘서주와 추상’을 연주한개막 시간이 이날 오후 7시30분이었다.9일자 조간신문이상세히 보도할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사진 한 장 없이(연합뉴스가 사진 서비스를 했는데도) 행사의 구체적 내용이나 9일간의 일정 소개도 없이단신으로만 취급한 건 이해되지 않는다.물론 행사 닷새를앞둔 4일자 문화면(18면)에 전체적인 의미와 내용을 소개한 박스를 다루었다.그러나 정작 행사 시작 이후엔 현장분위기를 읽을기사나 사진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아무래도 소홀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선 김근태 의원의 ‘정치자금 고백’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대한매일은 3월5일자사설에서 김 의원의 고백에 대해 “공정하고 투명한 경선을 실천하는 일대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도 실정법 위반 사실관계의 선관위 조사를 주장하고 “만약 명확한 법위반 사항이 드러나면 당연히 검찰에 고발해야 한다.”며‘처벌’쪽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3월6일)에는 대한매일이 참여연대와공동으로 벌이고 있는 캠페인 ‘양심의 호루라기를 불자’의 일환으로 이를 다루면서 1면에 ‘제2의 김근태 나와야’,3면 ‘정치관행 깬 내부고발’등으로 김근태 후보의 고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하루사이의 변화이다.독자들을어리둥절하게 한다.왜 처음부터 그 성격을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는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3월5일자 26면에 실린 ‘대학 장학금 지급 멋대로’기사는,대학들이 신입생 모집요강에서 상위 성적 3∼10% 이내합격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고 밝혀놓고는 복수합격으로다른 대학에 등록한 학생 몫의 장학금을 차순위 학생들에게 지급하지 않아 비난을 사고 있다는 내용이다.합격자가최종 확정된 뒤 예고된 범위 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되는 게 당연한 데도 대부분의 대학들이 ‘최초 합격자에한한다.’며 발뺌하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서울 어느 대학의 경우 이러한 편법으로 지급되지 않은 장학금이 4억 6000만원이나 된다고 하니 전국적으로 집계하면 수십억,수백억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대학들의 ‘장삿속’을 잘 꼬집어 주었다. ‘친일파 명단발표’를 둘러싸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비가일고 있는 가운데 대한매일은 ‘친일청산-부끄러운 과거와 현재’를 연재물로 게재했다.5회에 걸쳐 언론의 문제점,친일파 청산운동,광복 후 친일파 득세 등을 주제로 다뤘다.‘친일파 명단발표’가 자칫 일과성으로 그쳐 버릴지도모를 상황에서 그 후속 시리즈를 기획한 것은 매우 적절했다. 홍의 언론지키기 천주교모임 대표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5)전문가 대담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 발표 이후 고조됐던 친일청산에 대한관심이 ‘우려대로’ 시들해지고 있다.1949년 반민특위 와해후 53년간 잠들었다 깨어난 친일청산 문제가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 보다 미래지향적인 청산작업이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이에 명단 발표후의 진행과정을점검하고 앞으로의 청산 방향을 짚어보는 대담을 마련했다.이번 명단 선정과정에 광복회 및 의원모임 자문위원으로참여했던 김삼웅(金三雄) 대한매일 주필과 의원모임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던 조동걸(趙東杰) 국민대 명예교수가 자리를 함께했다. [김삼웅주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발표후 우리 사회에친일파 청산이 화두로 떠올랐습니다.하지만 본질은 실종되고 특정 신문사 사주문제가 거론되면서 엉뚱하게 정쟁화양상을 띠고 있습니다.또 점차 화제에서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조동걸교수] 언론은 지금에서야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발표되고,친일청산 문제가 제기된 것,그 의미와 역사성 등을보도했어야 한다고 봅니다.그런데 명단에 추가된 16명에대한 기사만 가득했어요.본말이 전도된 것이지요. [김주필] 일부 언론은 마치 광복회 자문위원회에서는 넣지않은 16명을 의원모임이 정치적 목적으로 끼워넣은 것처럼 보도했습니다.광복회의 자문회의를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리지만 692명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고,17명에 대해 찬반이 엇갈려 의원모임으로 넘긴 겁니다. 친일 정도가 수괴급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서 함께 포함시키기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교수] 의원모임으로부터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받고 광복회에서 성안한 것에 혹시 착오나 없나 하는 검토차원의 자문인 줄 알고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그게 아니었어요.심의완료된 692명과 미결된 17명 모두를 검토해 달라는 거예요.언뜻 보아도 692명에 빠진 인사가 많았어요.하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릴것 같아 그냥 넘기고 미결된 17명에 대한 검토만 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친일행적이 뚜렷한 지식인들이었지요.692명중엔 지식인이 거의 없었는데 이들을 빼면 친일파중 지식인은 없단 의미가 돼버려요.그래서 개항기 행적이 문제가된 1명만 시기적으로 부적절해 빼고 나머지는 포함시켰습니다. [김주필] 의원모임 자문회의에서 물론 문화예술언론인들을과연 친일파 수괴들과 같은 레벨에 넣을 수 있냐는 신중론도 나왔지요. 나라를 판 매국노와 밀정,고위관료에 비해 친일 정도가 덜하다는 논리였습니다.8명의 위원중 두 분이 신중론을 제기했었지요. 그러나 결국 명단에 포함시키는 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조교수] 예,그래서 신중론이 있었다는 점을 적시한 검토결과를 의원모임에 건네주게 됐지요.즉 ▲16명을 포함시켜발표한다 ▲두사람의 신중론이 있었다 ▲16명과 같은 문화계 인물이 그외에도 있으니 다음 기회에 발표하기 바란다▲692명에도 정운복 이익홍 홍사익 등 친일반민족행위가역력한 인사가 누락됐으니 다음에 발표하기 바란다 ▲자세한 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중인 ‘친일반민족인명사전’에 소개될 것이라는 점을 발표해 달라는 등 5개항을담았습니다. [김주필] 이젠 이 문제를 어떻게 더 발전시키고 진척시킬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의원모임은 심의위원 확대,친일청산을 위한 특별법 제정,모임 확대,교과서 개편 등의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으로봅니다. [조교수] 친일파 명단 발표는 49년 6·6사태(반민특위 습격사건)의 반민족성을 선언한 셈이니까 그 자체로 친일청산목표의 반은 달성했다고 봅니다.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 등의 사업을 하면서 반민족적 행위를규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데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면 이러한 분위기가 크게 확산될 것입니다. 언론도 그런 방향으로 보도해 분위기 조성에 기여해야 합니다. [김주필] 지금도 전국 도처엔 친일파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나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둘러 철거하고 독립운동가 공적비로 대체하는 운동이 활성화돼야 할 것입니다. [조교수] 물론입니다.반민족행위자의 이름으로 주는 학술상,문화상을 거부할 수 있는 풍토도 조성돼야 합니다.거부한 사례들이 이미 있습니다. 또 이번에 명단에서 빠진 친일인사도 꼭 보충해야 합니다. 특히 만주에서 군인,관료,교육가,언론인 등으로 친일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빠졌는데 다음 명단 발표엔 반드시 포함돼야 합니다. [김주필] 이번 발표가 유야무야되지 않기 위해선 특별법 제정이 시급합니다.일부에서는 소급법 제정을 위헌이라고 주장하지만 5공청산 등 소급입법을 한 선례가 있습니다.이번 기회에 완전히 마무리하고 더 이상 친일파 문제가 거론되지 않도록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아울러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하수인 세력을 청산하는 것도 친일청산작업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조교수] 49년 당시 반민족행위 기준은 식민지 시기에 한정됐지만 이제는 친일청산작업을 와해시킨 6·6사태 관련자들도 포함시켜야 합니다. [김주필] 그 해 이승만 대통령이 AP통신과의 회견에서 본인이 강제해체를 지시했다고 한 기록을 최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경우도 반민족자 리스트에 넣어야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조교수] 평면적으로 보면 포함시켜야 하겠지요.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통치행위’라는 용어가 있듯 논란이 있을수 있습니다.어쨌든 6·6사태의 행위자,강원도 반민특위관계자의 피격사건 관련자,반민특위 관계자 암살계획 관련자 등도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김주필] 이번 기회에 민족반역자들이 남긴 각종 자료나 기록,그들로 인한 피해자들의 자료나 증언을 모아 자료관을지어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조교수 역사를 정리한다는 평범한 의미에다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단이란 점에서도 의미있는 일입니다. 새로 지을 수도 있지만 독립기념관에 부설하거나 독립기념관의 일제침략자료전시관을 보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리 임창용 황수정기자 sdragon@
  • [대한광장] 친일행위 진상규명 입법화를

    지난 83주년 3·1절은 예년과 달리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광복회와 학계의 자문을 근거로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오랜 작업 끝에 3·1절을 하루 앞두고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708명명단 공개는 큰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생각해 보면 초기 이승만 정부는 바로 48년 제정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에 근거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스스로 경찰력을 동원하여 활동을 중단시킴으로써일제 식민지 역사 청산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큰 역사적과오를 범하였다.그 결과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팔아 넘기고,그후 일제권력에 편승해 부와 권력을 누렸고,뿐만 아니라 동족을 괴롭히고 한국청년을 일본제국주의 전장에 몰아넣는 등 반민족적·반인도적 범죄행위를 한 인사가 과거 죄과를 전혀 반성하기는커녕 해방 직후에는 냉전 분위기에 편승하여 재빠르게 미국에 붙어 반공인사로 둔갑, 또다시 건국정부의 권력과 부를 계승하는 기득권의 대열에합류했다. 그러다 보니 초기 대한민국정부는 이들 친일인사의 철저하고치밀한 방해로 인해 우리 사회의 민족정기와 역사를올바르게 세우지 못했다.그리고 한·일 양국에서 일본의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 반민족세력이 권력의 중심세력이되고 야합해 일본의 불법행위를 명확하게 명시하지 못한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동조했다.그 결과 현재까지도 한·일관계에서 정신대 문제를포함해 과거청산이 법적으로 철저하게 정리되지 않는 후유증을 남겼다. 나아가 과거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던졌던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생활고는 물론이요정신적 충격과 절망감으로 일생을 고통 속에서 보냈다.반면 친일세력들은 반공·친미세력을 기반으로 해방 이후 올바른 역사를 세우고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양심적인 인사를 모두 색깔론으로 매도했다.그런 가운데 93년 문민정부의출범과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역량 증대와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계기를 주었고,이로 인해 역사를 바로잡자는 인사들의 목소리가 국민적 힘을 받는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우리가 일제식민지 역사청산을 강조하는 이유는 반민족적 행위를 한 인사를 보복적 차원에서 처벌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들의 해방 후 공적을 완전히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다만 자라는 미래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서 선배들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고,우리 사회에 민족정기와 사회정기가 항상 살아 있다는 자긍심을 심어주는 데 있다.그래서 이 땅에 민족정기와 역사적·시대적 양심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수가 증가하고 이들이 도덕적 용기를 잃지 않게 올바른 역사적 교훈을 주자는 데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일부 해당자와 연계된 기득권 일각에서는 반성은 고사하고 강한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원컨대 지금도 늦지 않으니,반민족적 행위자와 그 연루자는 국민과 역사 앞에 겸허하게사과하고,역사 바로 세우기와 민족화해협력에 적극적으로앞장서주기 바란다. 우리는 708명의 친일인사를 발표한 여야 국회의원들의 용기에 적극적 지지를 보낸다.아울러 ‘민족정기를 세우는의원모임’도 708명의 선정기준과 그 과정을 소상하고 투명하게 밝혀 한 점의 의혹이 없도록 해주길 바란다. 해당자에게 소명의 기회는 물론 의문사항에서는 구체적 자료로 답변하는 사후관리에도 철저해주길 바란다.이 사업은 정치적으로 결코 악용되어서는 안된다.여타 국회의원들도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제안한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을 적극 지원하여 입법화하는 데 협조해주기 바란다.이번 친일인사명단 발표가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고 이 땅에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살아 있다는 바른 역사정립의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이러한 올곧은 역사의 정립은 우리가 바른 통일국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이장희 한국외대 법과대학장 평화통일시민연대 공동대표
  • [실패 대탐구] 제3부 실패자산을 공유하자 (8)춤추는 대학입시정책

    교육은 국가와 개인의 미래를 좌우하는 백년대계(百年大計)이다.교육정책은 백년 앞을 내다보는 미래지향적 관점에서국민을 끌어가야 한다.그럼에도 우리의 교육정책은 변덕스러운 국민여론에 휘둘려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교육인적자원부와 교육전문가들은 21세기 무한경쟁시대의 미래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교육정책은 그때그때상황논리에 따른 즉흥적 임기응변에 그치고 있다.국민을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 우리교육정책의 현실이다.국민여론의 향배에 따라 춤추는 교육정책의 중심에 대학입시정책이 있다. ■인기영합주의로 흐르는 대학입시제도. 대학입시제도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항상 도마위에 올라홍역을 치르곤 한다. 대입 정책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 크게14차례나 바뀌었다.작은 개편까지 따지면 무려 36차례나 된다. 입시제도가 자주 바뀐 것도 문제이지만 그 변화의 방향이 일관성 없이 상황논리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 더욱 큰 문제로 지적된다. 새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불만이 커지면 새 정권은 이를 해소하기 위해 칼질을 해댔다.이때 정권의 속성상 국가장래를 설계하는 장기비전보다는 당장의국민불만을 잠재우고 인기에 영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국민들의 조급증에다 정치권의 인기영합주의가 더해져 끝없이표류해온 것이 우리의 대학입시제도 변천사였다. 지난 80년 7월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내놓았다.이른바 ‘7·30 교육개혁안’이다.학부모들의 원성을 자아낸 과다한 사교육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본고사를 폐지하고 학력고사를 도입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내신 성적에 의한 입학 전형도 처음 등장했다.물론 과외는 전면금지됐다.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고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 중의 하나인 입시정책을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고 말했다. 노태우(盧泰愚)정부에서는 암기식 위주의 학력고사를 창의력과 사고력을 중시하는 수능시험체제로개편했다.김영삼(金泳三)정부는 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제한적으로 확대하는2002학년도 새 대입제도의 토대를 마련했으며,김대중(金大中)정부는 이 제도를 시행했다. ■제도변경의 후유증은 학생·학부모의 몫. 해마다 70만∼80만명의 수험생이 치르는 대학입시제도가바뀔 때마다 그 파장은 컸다.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도입된 입시제도에서 시행 첫해의 수험생들은 항상 혼란을 겪어야 했다.수험생이 ‘시험용 모르모트’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94학년도의 수능시험 연 2회 실시였다. “겨울에 시험을 치르면 연탄가스 중독 등의 불미스러운사고가 발생,응시 기회를 갖지 못하는 학생들이 나올 수 있다.두차례 치러 좋은 점수로 대학에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좋겠다.”라는 말이 당시 청와대측에서 나왔다.곧이어 교육부는 수능시험을 8월과 11월에 두번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하지만 계획과는 달리 1차시험의 평균득점이 49.2점(100점만점)인데 비해 2차시험이 너무 어렵게 출제돼 평균득점이5점 가까이 낮아지는 바람에 큰 혼란이 빚어졌다. 난이도조절의 실패는 즉흥적인 정책결정에 따른 결과였다.연 2회시행 방침은 여론으로부터 집중타를 맞고 좌초했으며 다음해부터 다시 연 1회로 바뀌었다. ■대학입시정책은 대학 자율에 맡겨야. 요즘 교육부에서는 입시정책에서 손을 뗐으면 좋겠다는 푸념섞인 말도 나온다.교육부 학술학사지원과 신문규 서기관은 “입시정책의 큰 축은 대학의 자율성 존중”이라고 강조했다.문제는 입시부정 등 자율화에 따른 부작용도 대학이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문제가 터졌을 때 대학의공정성과 투명성을 따지지 않고 정부의 지도·감독을 탓하는 풍토는 대학입시 자율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양대 정진곤 교수는 “정부의 입시 정책은 고교 교육의정상화와 맞물려 세워지고 있다.”면서 “대학도 자율권을갖기 위해 성적 이외의 다양한 선발기법을 개발하는 등 사회적·교육적 책임을 함께 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특별취재반 yeomjs@ ■“고교 추천권 강화를 학교 선택권 도입도”. “공급자 위주의 현행 체제에서는 정부와 대학을 제외한학생·학부모·고교 모두가 피해자입니다.”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이현청(李鉉淸)사무총장은 대학입시정책을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총장은 수요자 중심의 입시정책의 세부방안으로 대학의선발권보다 고교의 추천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고교가 주도권을 쥘 때 초·중·고교의 교육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대학의 입시처럼 학생들은 학교 선택권을,학부모들은 자녀들의 학습 방법 등을 골라 학교를 고를 수 있는 교육 위탁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총장은 “이같은 수요자 중심의 입시정책은 쉽지 않다. ”면서 “하지만 고교생이 줄어들어 상당수의 대학들은 학생들을 손수 모집하러 다녀야 할 상황이 되면 고교가 추천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별취재반. ■수능 난이도조절 대안. 해마다 되풀이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난이도 조절 실패는 입시정책에 대한 사회적 불신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94학년도부터 도입된 수능시험의 난이도는 해마다 달랐다.수능시험을 총괄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의 난이도에 대한 예상치는 번번이 빗나갔다. 이에 대해 평가원이나 직접 출제를 맡은 위원들은 해마다수험생의 학력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난이도의 적정선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그러나 대학입시 전문가들은 난이도 관리 시스템을 보완하면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당국도 혼란에 빠져 있다] 2002학년도의 경우 난이도 조절실패는 평가원측의 어설픈 방침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김성동 평가원장은 지난해 3월 이후 “수험생 상위 50%의 평균점수를 84.2점에서 77.5±2.5점으로 낮춰 수능 난이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지나치게 쉽게출제됐던 전년보다 약간 어렵게 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67.5점으로 전년보다 평균 16.7점이나 낮아져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같은 차질은 영역별 수능성적의 비중을 높이고 총점을내지 않는 새로운 수능체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됐다.대학에서 총점이 아닌 영역별 성적을 따지는 만큼영역별 평균을제시했어야 했다. 입시제도가 워낙 자주 바뀌다 보니 정책당국마저도 혼란에빠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당시 출제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수능체제가 바뀌어 난이도 조절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선행지표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출제방식이 원시적이다] 해마다 70만∼80만명이 매달리는수능시험을 관리·감독하는 평가원에 수능시험의 출제·분석 등에 관여하는 책임자는 1명뿐이다.당연히 수능시험의문항 개발이나 난이도 분석,학력측정 방법 등을 연구하는데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평가원측도 “대입 관리는 원시적”이라면서 “현체제 및 출제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시인했다. 출제운영본부가 수능시험 1개월전에 구성되는 것도 문제다.박도순 고려대 사범대학장은 “상설기구가 없는 상황에서해마다 새로 구성되는 출제위원들이 짧은 시간에 수험생들의 학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점이 목표 난이도와 실제 난이도가 빗나가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대안] 평가원에 수능출제만을 전담하는 상설기구를 두고전담 요원을 보강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교육인적자원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출제 경험이 많은교수들로 인력풀제를 운영하거나 계약제 재택 출제위원을두어 문항의 타당도와 난이도를 미리 검증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중등교원들의 출제위원 참여폭을 늘리는 것도 필수적이다.수능 모의평가를 실시하고 가채점 결과를 일선 학교에 제공해 학생 스스로의 성적과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부 통계학 전공 교수들은 소수점 이하까지 내는 현행 원점수제를 폐지하고 토익이나 토플에서 활용하는 표준점수제를 도입하면 혼란의 상당부분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특별취재반.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3)해방후 친일파 득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저서 ‘한국의 해방과 미국정책’을 통해 해방직후 미군정 통치기간 동안 군,관료,정치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전에 일본인이 해놓은 임신을 성공적으로 결말짓는 산파 역할만 했다고 미국을 비판한바 있다.해방된 한국이 직접 자손을 보도록하는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이 말은 1945년 9월12일 출범한 주한미군정(USAMGOK)의 친일 인사의 등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군정청이 당시 선발한 60명의 장교 가운데 40명이 일본군 출신이었고 경찰 조직도 간부의 53%,하위직의 25%가 일본경찰출신이었다. 이처럼 친일파들은 지탄과 단죄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전락하기는커녕 미군정기부터 식민지시대 못지않은 국가 및 사회 파워그룹 참여의 헤택을 부여받았고 근대화와독재시대를 거쳐 파워를 몇배나 증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사회적,경제적으로 우월한 상황에 있던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대전환기였던 해방이후의 한국 역사에서 다른 국민보다 더 빨리 출세하고,더 많이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에 비해 피식민,피점령의 역사에서 막 벗어난 대부분의 나라들은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한 인적 단죄가 철저하게이뤄졌고 참회와 화해도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2차대전 독일점령 시절에 독일에 협력한 인사들을 ‘비국민’으로 규정,공직사회 진출을 금지시켰다. 부역자들의 재산은 압류됐고 2000여명이 사형,4만여명이징역형에 처해졌다.벨기에 네덜란드도 5만여명이 징역형을 받았다. 다소 성격이 다르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 역시 국가정체가 바뀌면서 30년동안 9만명을 기소,5000여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승전한 연합국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통해 나치전범을 처단당했던 독일은 이후 스스로 나치 부역자에 대한 추적과 재판을 시작해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반민특위에 의한 단죄가 집행유예 5인,실형7인,공민권 정지 17인에 그쳤고 그나마 실형을 받은 7인도 50년 봄 재심청구로 모두 풀려났다. 이처럼 친일 세력들이 해방후 단죄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과 국민을 철저하게 괴롭힌 공산주의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공산주의와 세계패권 다툼을 벌이던 미국은 이런 목적에 금방 써먹을 수 있는 친일파를 등용했고,친일파들은 반공의 절대적 기치 아래 매카시즘의수법으로 친일청산을 거론하는 반대파를 성공적으로 제거해왔다.수십년이 지나면서 이들 후손들은 한국 사회의 기득층과 파워그룹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했다.친일 부역자들은 정통성을 따질 겨를이 없는 과도기를 통해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연스럽게 부상했고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진것이다. 친일세력은 법조계부터 정계 문화예술계 등 모든 분야에서 엘리트 세력으로 위용을 부리고 있으며,‘황국사관’을 지키고 있는 많은 강단사학자들은 교과서에서까지 친일의 흔적을 지우려 애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친일세력들의 득세는 한국 사회 부조리와 비정상의 근본 뿌리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반면 독립 유공자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선대의 자기희생적 활동 결과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해해방후 대격변기에 빈곤층으로 계층하락하고 말았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엄혹한 일제시대의 두려움이 해방후 현실화한 것이다. 광복 5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언어 및 사회생활구석구석엔 일제의 잔재가 엄존하고 있다.이는 자각되지못한 국민 탓도 있지만 친일 부역자들이 줄곧 사회지도층으로 득세하고 있는 데 따른 당연한 현상일 수 있다. 냉철한 역사적 평가를 통해 친일파에 대한 인적 청산이 요청되는이유인 것이다. 김성호기자 kimus@ ■친일청산특별법 연내 제정. 국회의원들의 친일파 명단 발표 후 앞으로 친일 청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국민들의 관심이 크다. 이번 발표를 주도한 김희선 의원측에선 일단 ‘친일 청산의 당위성’을 논의의 장에 올리고 국민적 관심을 끄는 데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자체평가하고 있다.따라서고조된 국민적 관심이 식기 전에 예정된 작업을 서둘러야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친일청산 작업은 앞으로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친일 반민족행위자와 관련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설치,그리고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다.이를 위해‘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은 이달부터 두차례 정도 공청회를 가질 예정이다. 위원회는 민족문제연구소 등 친일문제 연구단체의 성과를 토대로 이미 발표한 명단에 대한 검증작업,앞으로 추가로 발표할 친일인사에 대한 친일행위 규명작업 등의 일을 맡게 된다. 또 친일 반민족행위 선정 기준에 대한 보강도 시급하다. 첫 발표 때는 광복회가 반민법을 기준으로 발표한 명단에16명을 추가한 정도지만 추가 발표 때는 보다 강화된 기준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이는 반민법에 애매한 문구가 적지 않아 실제 적용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친일파 명단 발표를 토대로 잘못된 국민적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다.이를 위해 교과서 개정 및 연구단체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작업 지원 등의 작업이 이어질 예정이다. 김 의원은 “친일이 확실히 청산될 때까지 작업을 계속해야겠지만 우선 올해 안에 특별법 제정 및 특위 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 [친일청산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 1. 언론의 문제점

    ‘민족정기를 세우는 여야 국회의원 모임’의 친일파 명단 발표를 계기로 ‘친일파 청산’ 문제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해방후 50여년 내내 친일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의 교활한 방해공작으로 친일이란 부끄러운 역사는 여태껏 현재진행형의 과거로 남아 우리 민족의 혼을 갉아먹어 왔다.이에 일부 언론의 친일파 명단발표 보도 문제를 비롯 반민특위 실패,친일파 득세와 친일 청산운동의 계속된 좌절 등을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뒤늦게나마 발동이 걸린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역사적 정죄(定罪)’추진력에 힘을 보태고자 한다. ***친일파 보도 소모적 논쟁 흐른다. 83돌 삼일절을 맞으며 불거져 나온 ‘친일논쟁’이 일부언론의 강력한 반발과 맞물려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있다.‘부끄러운 역사 청산’이라는 의미는 뒷전인 채 몇몇 인사의 친일파 선정과 관련된 문제로 신문이 도배질되고 있는 것이다.또 의원들간 정쟁의 대상으로 몰고 가려는 듯한 불순한 의도도 엿보인다. 지난 달 28일 여야의원들의 모임인 ‘민족정기를 세우는국회의원 모임’의 친일파 명단 발표후 조선·동아일보는 두 신문사 창업주를 포함한 16인의 추가에 대해 ‘의원몇몇의 자의적 선정’‘정치·감정적 의도’ 제목과 함께시비를 걸고 있다. 이후 두 신문의 기사는 왜곡 및 과장보도는 물론 ‘초점흐리기식’보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이에 다른 상당수 신문들도 명단 발표 첫 날엔 ‘명단발표의 역사적 의미’쪽에 초점을 두고 보도하다가 이후엔 두 신문이 제기한 문제점에 덩달아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이러다간 헌정사상첫 현역 국회의원들의 친일청산 노력이 자칫 소모적 논쟁으로 흐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는 1일자 1면 머릿기사에서 ‘광복회,‘“정치적·감정적 처리”’,‘친일명단에 16명 임의추가 물의’란제목에서 보듯 16명 추가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다.3면에선 윤경빈 광복회 인터뷰 기사에서 ‘광복회가 선정한 명단,의원들 거부’‘친일행위엔 경중 따져야’ 등 의원들이 광복회 의견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막상 윤 회장은 다른 신문들과의 인터뷰에서 “발언이 왜곡됐다.단지 ‘친일파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선 안된다.’는 입장을 말했을 뿐 16명 추가와는 관련이없다.”고 말해 조선일보의 ‘광복회,“정치적·감정적 처리”’란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과장됐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됐다. 조선일보는 또 발표를 주도한 ‘민족정기모임’ 소속 의원들중 기자회견에 참석한 의원과 참석하지 않은 의원,광복회 심의위원과 민족정기모임 자문위원 명단을 구분해 실어 ‘편’을 가르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겼다. 동아일보는 1일자 1면에 ‘광복회 “자의적 선정” 유감표명’이란 머리기사를,3면에 ‘공 무시-과 부각’ ‘끼워넣기’란 해설기사와 윤경빈 광복회장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또 ‘민족정기모임’소속 일부 의원들의 입을 빌려 이단체가 공정성을 놓고 내부마찰을 빚고 있는 양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특히 인터뷰기사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 등반민특위의 명단에 없었던 사람을 포함시킨 것은 문제 아닌가?”라고 질문,“부통령을 지내고,최고훈장을 받은 사람을 친일반역자 명단에 포함시키면국체를 부인하는 꼴”이란 답변을 받아내 창업주(김성수)변호에 지나치게 집착하려는 듯한 태도를 드러냈다. 또 2일자 1면에 ‘공개반대 의견 묵살당해’‘일부의원“서명 안했는데 이름 도용” 주장’이란 기사를,‘누가친일파인가?’란 사설,3면에 ‘친일명단 작성 참여자 명의도용 시비’ 및 ‘김희선-서상섭의원 명단발표 주도’ 등의 기사를 실었다.모두 이번 명단발표를 두고 의견을 달리했던 몇몇 자문위원들과 국회의원들의 말을 발려 분란과갈등을 조장하려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기는 기사들이다. 대한매일 한겨레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은 1일자에선 친일명단 공개 내용과 의미 등을 1면를 비롯한 3∼4개면에 상세히 보도했다.특히 대한매일과 한겨레는 708명 전원의 명단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으며,한국일보는 사설을 통해 ‘친일 행위의 역사적 단죄’를 적극 주장했다.그러나 2일자에선 ‘친일 공개 왜곡 논란’(대한매일),‘“조선·동아보도 사실과 다르다.”’(한겨레),‘“정치적 선정이라고말한 적 없다.”’(경향신문),‘윤경빈 회장 “일부 언론서 왜곡보도”’ 등 모두 조선 동아의 보도에 대한 반박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한편으론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번 명단 발표는 광범위한 친일실태를 밝히는 1차 신호탄에 불과하다.”며 “따라서 언론은 일부의 반발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친일파 청산의 의미 조명과 함께 이번에 빠진 친일파의 추가 문제,친일인사들이 오히려 ‘민족선각자’로 잘못 인식돼온 것을 교과서 개정등을 통해 바로잡는 작업 등을 고민하고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창용기자 sdragon@ ■佛 나치 협력자 숙청때…언론 더 가혹하게 처벌. 일부 언론들이 국회의원들의 ‘친일명단’ 발표에 대해‘공(功)은 깎아내리고 과(過)만 부각한다.’‘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두 언론사 창업주가 포함된 데 대한 신경질적 역습이다. 그러나 2차대전후 프랑스의 반역자 숙청 실상을 보면 언론이야말로 반민족 행위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후 프랑스의샤를 드골 대통령은 99만여명의 나치 협력자를 투옥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회 지도층,특히 언론인을엄하게 다스렸다. 종전직후 나치협력 언론인을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올렸으며,법원은 ‘히틀러의 나팔수’를 자임했던 파시스트 언론인보다 독일 점령후 뒤늦게 나치 선전원으로 전락한 ‘매춘 언론인’을 더 가혹하게 다루었다. 신문 ‘오늘’의 사장 쉬아레스,‘신시대’신문의 장 뤼세르 사장 등 6명이 처형됐으며,관련 언론사도 모두 문을닫아야 했다.900여개 신문·잡지 가운데 649개가 폐간되거나 재산을 몰수당했다. 드골은 훗날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고,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죄를 물었다.”고밝혔다. 임창용기자.
  • [김삼웅 칼럼] 친일파심의에 참석한 소회

    역사는 느린 듯하지만 정도를 향하여 꾸준히 진행된다. 광복회와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일제 강점기에친일 활동을 한 주요인사 명단을 발표한 것도 역사가 옳은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례의 하나이다. 비록 해방 반세기가 훨씬 지난 시점이고 여전히 막강한 비호세력이 온갖 트집과 왜곡을 일삼고 있지만 반민족행위자들의 죄상을 더이상 덮어둘 수는 없다. 진실은 반드시 허위의 껍질을 깨고 생명력을 찾는다고 하지 않던가. 필자는 광복회와 의원모임의 자문위원에 위촉돼 친일파 심의활동을 하면서 방응모 전 조선일보사장과 김성수 전 동아일보사장의 힘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강고한가를체득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심의’가 두 사람 앞에서는 ‘일단 멈춤’에 걸리고 우회하거나 침묵 또는 불참의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울 수 없는 그들의 친일행적을 두고도 현실적인 위력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거대 언론사에 찍히거나 밉보였다가는 불이익을 당하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학자와 국회의원들의 용기를 지켜보면서 역사의 힘과 진실의 위대성을 느끼게 된다. 우리사회의 작은 희망을 찾기에 충분하다. 몇가지 밝혀둘 일이 있다. 광복회의 심의과정에서 유보된16명은 친일파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수괴급’에넣기에는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서 국회쪽의 심의로 넘긴 것이다. 반민법 4조11항 규정에 따른 문화·예술·언론부문에서 그들을 빼서는 안된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의원모임측에 참석한 자문위원 전원이 광복회에서 확정하지 못한 문화예술계 인사 16명을 친일파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한 분이 신중론을 폈지만 반대의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일부 신문이 3대 3으로 찬반이 갈린 것처럼 보도한 것은잘못이다. 필자는 두 곳 회의에서 특히 김성수씨의 경우 친일행위와는 별개로 애국의 공적이 적지 않고 이로 인해 정부에서 훈작을 받은 만큼 이런 경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나치청산 과정에서 관리나 기업인보다 언론인 등문화예술분야를 훨씬 가혹하게 처단한 사실을 강조했다. 독립운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 친일,후 반일’은 용납하지만 ‘선 반일,후 친일’은 용서하지 않는다.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항일인사와 애국의 길에서 훼절한 반민족 친일행위자가 된 사람이 똑같이 대접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강요’되거나 ‘먹고 살기 위해’ 친일한 문화예술인들은 그들이 남긴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제외시켜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런 원칙을 적용한다면 친일파는한 명도 남지 않는다. 친일파 명단이 발표된 후에 나타난 사회현상은 심히 우려된다. 동참 의원 중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발을 빼거나 절차상의 문제 등을 들어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늘 그랬듯이 음모론이 제기되고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우리사회는 어떤 사안이 정쟁화되면 양비론으로 흘러 흐지부지되고 만다. 이번에도 그럴 공산이 크다. 친일파 청산 문제를 정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신중하게’란 황희 정승식 발언으로 망각의 무덤에 매장할 수는없다. 반세기도 모자라얼마를 더 기다리자는 것인가. 국회는 특별법을 제정하여 제헌국회가 못다한 친일파 청산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현대사의 업보,만악의 근원인 친일파 문제를 역사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우리가 친일파 척결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까닭은 과거청산과 함께 잘못된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사회 일각의 반역사적도전에서 미래지향의 국가발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 국가위난기에 반민족행위자들의 범죄를 역사 앞에 폭로함으로써 애국자와 비애국자,정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바른 가치관이 생기고 사회정의가 수립된다. 이제 국회는 심의위를 확대하여 이번 명단에서 빠진 악질친일파를 찾아내고 정부는 친일파 자료관을 지어서 그들의죄악상을 전시하는 결단을 보여야 한다. [김삼웅 주필 kimsu@
  • 친일파명단 발표 이후/ 정·법·시민단체 공동 입법추진단 구성키로

    지난달 28일 친일·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金希宣 민주당 의원)이 후속조치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후속 움직임] 의원 모임은 이번주 내 전체회의를 열어 지난번 친일파 708명의 명단 발표에 대한 자체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활동방향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는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실무작업을 위해 모임 소속 율사(律士) 출신 의원 및 법조계 인사 등 사회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입법추진단을 구성할 계획이다.모임은 또 이 법안을 오는 4월 임시국회에 제출한다는 목표 아래 2∼3회에 걸쳐 공청회를 가진다는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모임은 이와 함께 현재 29명으로 구성돼 있는 모임의 외연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우선 이번 발표에 참여한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김홍신(金洪信)·이부영(李富榮) 의원 등을 대상으로 모임 참여를 권유하는 한편,광복회 등 사회 각계단체와의 연대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김희선 의원은 “친일파 추가 발표나 친일인명사전 발간 및법 제정을 위해선 뜻을 같이하는 단체간의 결속이 필요하다. ”며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해 광복회·민족문제연구소등 사회단체들과 계속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조사활동을 계속해 친일인사들을 추가로 발표하고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동시에 현재 500원 주화에 세겨져 있는 학(鶴)문양을 독립유공자 흉상으로 교체하는 방안 추진도 검토 중이다. [여진] 모임 소속 의원들의 개인 홈페이지에서는 친일파 명단 발표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K씨는 김희선 의원의 홈페이지에 “과연 진보적인 성향을가진 몇몇 의원들의 기준에 의해 16명을 친일파라고 급조해발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묻고 싶다.”며 “훗날 역사가정말 이러한 행위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H씨도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삼가주기 바란다.”며 “무덤을 파헤쳐 친일파 낙인 찍는 짓이 이 시대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비난했다.A씨는“당신이 그런 자격이 있느냐.”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홈페이지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이번 발표를 적극 찬성하거나 격려하는 내용이었다.J씨는 김원웅 의원 홈페이지를 통해 “앞으로도 혼탁한 정치판에서 시원스러운 청량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소시민’이란 ID를 사용한 사람은 “한국 정치의 희망과 미래를 발견했다.”며 “단돈 1만원씩이라도 매달 보내드리겠다.”고 격려했다.K씨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사람들에게 계속 훈계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홍원상기자 ws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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