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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문사조사관 ‘간첩전과’ 논란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민간인 출신 조사관 3명이 간첩죄와 반국가단체 가입죄 등으로 복역했던 사실이 일부 언론에 보도돼 논란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해 의문사위는 15일 “이미 수년전 사면복권된 조사관들을 문제삼는 것은 위원회의 위상을 손상시키려는 악의적 호도이며 인격권 침해”라고 반박했다. 의문사위와 검찰 등에 따르면 1기 때도 활동한 조사관 H씨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 연락국장으로 활동한 혐의로 1990년 구속된 뒤 8년간 복역하고 만기출소했다.이후 2000년 8월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L씨는 1986년 군 복무중 “군은 정권획득을 위한 수단일뿐 우리 현실에는 공산주의가 더 적합하다.”고 발언했다가 1년간 복역한 뒤 1987년 12월 사면 복권됐다. K씨는 1992년 재일간첩에 포섭돼 국내의 군사기밀자료를 북한측에 넘겨주고 공작금 60만엔을 받은 혐의로 4년을 복역한 뒤 1997년 만기출소했다.이후 1999년 2월 대통령 취임 특사로 사면,복권됐다. 이들은 군 관련 사건을 다루는 조사3과 소속으로 최근 논란이 됐던 비전향 장기수의 민주화운동 인정 사건 담당은 아니었다. 의문사위는 “3명 모두 지난해 2기 의문사위 출범 때 필기와 면접 등을 거쳐 공개 채용된 전문위원으로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의문사위 전문위원은 직급에 따라 4∼7급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현재 의문사위 조사관은 64명이며 이 가운데 37명은 민간인 출신,나머지는 검찰과 경찰 등에서 파견된 공무원이다. 한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등 5개 단체는 이날 공동 논평을 내고 “의문사위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색깔 덧씌우기”라면서 “일부 언론이 문제삼은 조사관들이 국가보안법과 프락치 공작에 의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과거사 청산과 의문사 진상규명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행태가 개탄스럽다.”고 비판했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100주년] 구국정신 독립정론으로 승화

    구한말 일제의 침략 책동에 맞서 민족 지도자들이 항일 구국의 정신으로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정신과 지령을 계승한 서울신문이 한국 언론사상 첫 창간 100주년을 맞았다.서울신문은 15일 저녁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옥 20층 국제회의장에서 김원기 국회의장과 전윤철 감사원장 등 국내외 귀빈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간 100주년 기념 축하연을 가졌다. 채수삼 서울신문 사장은 축하연 인사말을 통해 “서울신문은 항일구국의 정신으로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정신과 지령을 계승한 100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소개하고 “일제와 군사정부 치하에서 부끄러운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이 역시 100년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울신문은 영욕의 100년 역사를 되돌아보며 철저한 자기 성찰을 통해 다가오는 100년을 열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원기 국회의장은 축사를 통해 “광복 이후 지난 60년간 서울신문이 겪어 온 파란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와 다르지 않다.”면서 “사원들이 발행인을,기자들이 편집국장을 뽑는 독립언론으로서 한국 언론사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서울신문이 이 시대 언론의 정도를 선도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100년 역사의 언론계 맏형으로서 서울신문이 우리나라의 진정한 저널리즘을 확립하는 데 앞장서 달라.”고 격려했다. 김덕룡 한나라당 대표권한대행는 “서울신문은 100년 역사에도 불구,항상 젊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면서 “공익정론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더욱 깊이 있는 신문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 사랑을 보내는 신문이 돼 달라.”고 주문했다. 홍석현 한국신문협회장은 “우리나라에도 100년 된 신문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합리적 개혁주의에 바탕한 공정보도로 사회 통합에 앞장서 줄 것을 요청했다.축하연에는 이들 외에 전윤철 감사원장,이헌재 경제부총리,안병영 교육부총리,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이구택 포스코 회장 등 정·관·재계와 학계의 저명인사 5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서울신문은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23일자를 발행하면서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을 승계한 1만 3738호로 출범한 뒤 지난 1998년 대한매일로 제호를 변경했다가 올 1월1일부터 서울신문으로 새 출발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8시30분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는 서울신문 사원과 사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간 10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 [사설] 친일규명법 이번엔 제대로 입법하라

    열린우리당이 친일반민족행위자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오늘 국회에 제출한다.친일진상규명법은 16대 국회 막바지인 올 3월초 우여곡절 끝에 제정됐다.법안 심의과정에서 일부 의원들의 반대가 거세자 친일행위 조사대상을 대폭 축소함으로써 ‘누더기 입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특히 군인과 경찰은 고위간부만,위안부 등 강제동원은 전국적 차원의 활동자만 조사토록 하고 문화예술인·언론인·교육자 대다수를 제외함으로써 ‘진상규명 저지법’이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개정안은 일제시대 군수,경시 이상 경찰,소위 이상 군장교를 지낸 인사들을 조사대상으로 했다.문화·예술·언론·교육·학술·종교 등 사회 각 부문에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도 친일행위에 포함시켰다.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부 언론사주의 친일행적 시비에 대해서도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일단 터놓은 셈이다.광복 직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신체형과 재산몰수까지 규정한 것이었다.반면 이번에 추진되는 개정안은 처벌보다는 진상규명이 목표다.그렇기 때문에 조사대상을 충분히 확대하는 것이 입법 취지에 맞다.진실이 명백히 밝혀져야 용서도 하고,화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무고한 인사가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이 없도록 판정절차를 강화하는 보완조치는 필요하다.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피의사실이 무분별하게 유포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마련되어야 한다.현행법이 발효되는 9월 이전에 법개정이 완료돼야 시작부터 제대로 할 수 있다.개정안에는 한나라당,민노당,민주당 등 야당 의원도 서명했다고 한다.출범 후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는 17대 국회가 이 법 처리과정에서는 새 모습을 보여주길 촉구한다.˝
  • 이준 열사 순국 97주기 추념식

    고종황제의 밀사로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세계 만방에 알린 일성(一醒) 이 준 열사의 순국 97주기 추념식이 14일 오전 11시 서울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열사의 묘소에서 열린다.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이사장 이연길) 주관으로 열리는 추념식에는 김영욱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장,김우전 광복회장을 비롯한 광복회원과 이북5도민회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
  • [창간 100주년-창간주역 5인의 발자취] (3) 초대총무 양기탁

    대한매일신보의 대들보인 우강 양기탁 선생은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영어사전을 편찬하고 일본 나가사키상업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근무하는 등 33살 때까지의 삶은 평탄했다.능통한 영어·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정부관리(예식원 주사)와 한성전기회사 간부로 채용되는 등 출세길이 보장돼 있었다. ●배설과의 만남·20여년 망명생활 하지만 1904년 배설 선생과의 운명적 만남(34세) 이후 ‘혁명가의 길’이 주어졌다.이후 5년여 동안 대한매일신보를 통한 국채보상·신민회 운동 등을 펼쳤고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제병합되자 1910년 만주로 탈출,1918년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활동했다.1922년(52세) 임시정부 주석 등으로 활동했지만 결국 살아서 광복한 조국땅을 밟지 못했다. ●리양에서 맞은 쓸쓸한 임종 선생은 1938년 5월21일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든 중국 장쑤성 리양현 대부진 남문두 고당암에서 6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지금은 논으로 변해 버린 암자에서 중국인들에 둘러싸여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20여년 동안 중국 관내와 만주,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몸바친 그의 유해는 사후 60년 만인 1998년에야 국립묘지 임정묘역에 봉환됐다. ●우수리스크엔 담장만 남아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시간 거리인 우수리스크 자나드보롭스가야 15번지에서 그의 숨결을 만날 수 있었다.우수리스크는 러시아거주 9만여 고려인들의 절반가량이 모여사는 연해주의 여러 도시중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사료에 의하면 선생은 서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들어왔으며 고려인신문 ‘한인신보’의 편집인으로 청빙됐다.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이동휘 선생 등이 주도한 환영회가 대대적으로 열린 사실도 기록돼 있다. 1917년 5월 전 러시아 한인의 대표기구인 전로한족중앙총회가 개최된 자나드보롭스가야에서 선생은 박은식·이동휘·최재형 선생 등과 함께 사자후를 토하며 조국의 독립투쟁 방안을 논의했다.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에 사는 한인들이 러시아혁명 이후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는 독립운동을 모색하려고 연 회의였다.그러나 우강은 최초의 한인 공산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건에 반대하고 국제유대를 통한 조국독립운동을 주장,갈라서고 말았다. 1㎞ 남짓한 이 거리에는 ‘노령정부’로 알려진 대한국민의회와 그 기관지 청구신보의 사무실 등이 세들어 있었다.부자들이 모여 산 화려한 주택가로,시장의 주택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체체리나 22번지에 학교가 들어섰고 집이 있던 거리는 운동장에 편입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취재팀을 안내한 송지나(러시아 극동대) 교수는 “길 건너편에는 100년 전에 지은 오래된 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서 “도시계획에 따라 학교쪽 집을 모두 허물고 길을 넓혔다.”고 말했다. 운동장 구석 잡초 더미에서 발견된 허물다 만 오래된 집 담장이 취재팀을 상념에 빠지게 했다. ■ 특별취재팀 ●영국(런던·브리스톨) 함혜리 특파원 ●일본(고베) 이춘규 특파원 ●중국·러시아(리양·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노주석·이언탁·박지윤 특파원˝
  • [마니아] 오토? 바이바이

    [마니아] 오토? 바이바이

    오토바이 하면 언뜻 ‘폭주족’과 ‘짱깨’(중국집 배달원을 중국어로 ‘사장’을 일컫는 ‘짱꾸이’에서 따와 붙인 말)를 떠올린다.승용차·택시·버스 등으로 꽉 차는 바람에 비좁기만 한 도심 도로의 차량 사이사이를 비집고 마치 ‘샘통이야.’라고 비웃는 듯 누비는 퀵 서비스맨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폭주족 이미지를 떨쳐내라 1997년 7월 건전한 라이더(Rider)를 기른다는 뜻에서 첫 발을 뗀 오토바이 동아리 ‘서울 모터스’는 서울·경기지역에서만 4000명 가까운 회원을 거느린 공룡조직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오토바이의 깊은 세계를 선망하면서도 신기한 듯 의견을 나누거나 대회 때 구경을 즐기는 ‘고무줄 회원’이고 마니아로 부를 수 있는 숫자는 20명 안팎이다. 단장 양영식(46·회사원)씨는 “10년 전 취미로 시작했는데 승용차 보다 안전한 데다 자연과 스포츠의 묘미를 함께 맛볼 수 있다는 매력에 푹 빠지게 됐다.”고 웃어 보였다. 회원들의 직업은 외국인회사에 다니는 경우부터 교사,의료보험공단 직원 등으로 다양하다.여성도 2명 있다.전업주부 선미희(34)씨는 김수길(36·회사원)씨와 회원 커플이며 가장 오랜 경력을 지닌 이는 20년 된다. “이따금 대회에도 나가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게 아닌 아마추어라 성적은 꼬랑지”라고 양 단장은 말했다.하지만 정영철(32·자영업)씨는 대한민국 대표로 뛰며 상위권 수준의 실력을 뽐낸다.지난해 9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랠리에 15명이 원정 가 단체전인 엔듀로(Enduro)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재미 서울 모터스는 해마다 지방 산악을 도는 장거리 투어를 5회 이상,매주 토·일요일 한 차례 경기도 북부 등 가까운 데를 다녀오는 투어를 갖는다. 오는 17일엔 강원도 인제군으로 투어를 떠난다.그냥 여행 떠나는 것처럼 산악지대를 몇 바퀴 달리는 게 아니다.인제군까지 눈에 들어오는 산(山)을 모두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린다.이유도 없이 자동차가 달리는 길에 끼어드는 일은 이들에게 스타일을 확 구겨놓는 것이다. 이번 투어에선 팔당댐 인근 예봉산·검단산,경기도 가평군 설악면과 양평군 옥천면에 걸친 유명산,강원도 홍천군 서면에 위치한 팔봉산 등을 거친다. 1박2일 코스로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다.왕복 300㎞가 넘는다. 지난 2001년 8월 13∼16일에는 북한도 다녀왔다.남북 화해무드가 짜르르 하던 때여서 평생동안 잊지 못할 짜릿한 추억을 남기게 됐다. 금강산 투어에는 회원 250명이 참가했다.광복절을 맞아 해금강 주변에서 오프로드(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일)로 30여㎞를 뛰었다. 얼른 생각할 때 오토바이 마니아 정도면 꽤 비싼 장비를 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배기량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보통 600만∼800만원대가 주를 이룬다.때로는 중고(中古)가 1000만원대인 경우도 나온다. 이는 바퀴가 둘 달린 이륜차를 말하는 것이고 한 대에 350만∼3000만원 하는 사륜차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호장비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점이다.간혹 텔레비전 같은 데서 보이는 화려한 옷차림이 특수소재로 된 것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보통 입는 옷 안에 안전을 위한 장비가 숨었다. ●바퀴 넷 달린 오토바이도 헬멧은 물론이고 무릎·허리·팔꿈치 등을 감싸는 보호대를 마련하는 데만 200만∼250만원이라는 적잖은 돈이 들어간다.초보자의 경우 달리는 코스의 위험도가 다르기 때문에 1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회원들은 귀띔한다. 오토바이 판매·수리업자인 기술고문 이기문(40)씨는 “도로에서 승용차를 몰 때는 실수로 아차 하는 순간에 최소한 중상이라지만 오토바이는 다르다.”면서 “자동차처럼 갑작스런 돌출상황을 맞닥뜨리는 일이 드물고,넘어져 봐야 찰과상 정도”라고 설명했다.그는 “아무리 전문가 수준이라고 하지만 투어를 떠났다가 변화무쌍한 산악기후 때문에 혼쭐 난 적도 있기는 하다.”고 말했다.길 없는 곳에서도 새로운 길을 뚫고 지나갈 때도 있고,뜻밖의 폭우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한참 가다 되돌아보면 ‘원위치’가 돼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보통 산 하나를 넘는 데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2∼3시간 헤매는 경우도 생긴다고 한다. 양 단장은 “처음엔 위험천만이라고 여긴 가족들이 반대하지만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신체는 물론 정신건강에도 좋다는 인식이 심어진다.”면서 “나이와 별로 상관없는 스포츠로 나중엔 동참하려는 생각이 싹터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까지 투어에 합류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생긴다.”고 거들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이경형칼럼] 창간호 없는 서울신문

    오는 18일은 서울신문 창간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그런데 어떤 이들은 “웬 100년?” “100년 전에 서울신문이 있기라도 했느냐.”고 퉁명스럽게 되묻곤 한다. 얼른 듣기엔 말이 된다.그러나 서울신문 창간 제1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귀를 쫑긋 세운다.‘서울신문’이라는 제호의 신문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광복을 되찾은 1945년,그 해 11월23일 처음으로 발행되었으나,지령은 제1호가 아닌 제13738호였다.1904년 구한말,항일 구국 언론의 표상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창간호로부터 기산하여 일제에 강제 매수된 매일신보 지령까지 더했기 때문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위창 오세창 사장 등 당시 서울신문 주역들은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신보를 ‘혁신 속간’한다고 천명했다.“일제의 괴뢰였던 매일신보의 성격을 완전히 불식하고,해방 조선의 대변기관으로 새 출발한다.”고 밝혔다.초대 주필이었던 이관구는 “서울신문은 대한매일신보의 법통을 이은 적자(嫡子)”라고 규정하면서 구국 독립언론의 정신을 계승할 것임을 공표했다. 서울신문의 지령은 그 후 자유당 말기인 1959년 3월,야당 의원의 필화(筆禍)사건을 둘러싼 민족정기 논란을 계기로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 지령을 버리고,1945년 ‘혁신 속간’호부터 계산하여 새로 지령을 매겼다.그러다가 1998년 11월 제호를 대한매일로 변경하면서 매일신보 지령을 제외하고 대한매일신보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했다.총독부기관지 노릇을 한 시기의 지령을 계승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올해 1월1일자로 제호가 대한매일에서 다시 서울신문으로 되돌아왔지만,6년전 표방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정신과 지령 계승은 그대로 유지했다.제호 환원은 광복 직후 좌우 이념 대결의 해방공간에서 중립적·통합적 자세로 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주창했던 서울신문의 ‘혁신 속간’정신도 오늘에 되살리고,동시에 친근감 있고 지명도 높은 서울신문 브랜드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신문은 창간 100년을 맞으면서 비록 매일신보의 지령은 합산하지 않았지만,매일신보 시기도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서울신문-대한매일-서울신문’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있다.지난주 발간된 ‘서울신문 100년사’도 제1편 ‘아! 대한매일신보’에 이어 제2편에 독립 항목으로 ‘식민시대의 기록-매일신보’를 실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울신문은 지난 1971년과 1993년에도 ‘뿌리찾기 운동’으로 대한매일신보에서 발원한 역사를 복원하려 했으나,매일신보 시기의 편입여부 문제로 미완에 그쳤다.돌이켜보면 서울신문 100년사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만큼 명암이 엇갈렸고,굴절도 많았다.민족 전체의 수난기였던 일제 통치하의 매일신보 시절뿐이 아니다.4·19혁명 때는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사옥이 불타버렸고,독재·군사 정권 아래서는 ‘권력의 나팔수’라는 오명도 남겼다. 역사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이제 서울신문은 영욕의 역사를 반추하며 처절한 반성 위에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서울신문은 사원이 최대 주주이고,사원들이 사장을 뽑는 민영화된 신문이다.한 세기 전,한국 언론사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위상을 오늘에 되찾는 것은 결국 서울신문 구성원 전체의 몫이다. 편집제작 이사 khlee@seoul.co.kr˝
  • [열린세상] 이제는 복지정치다/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렵다고 한다.얼마 전 경제부총리가 언급한 거시경제지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세상이 점점 어렵게 되고 있다는 정서는 이미 일반화된 듯하다.이런 와중의 한편에서는 전국민복지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국민연금의 개혁을 둘러싼 소용돌이가 일고 있다.아예 국민연금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7%를 넘는 청년실업이 대변하는 어려운 경제현실이 미래의 생활보장을 내세우는 연금마저 기만적으로 느끼게 하는 국면에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이제 우리도 성장과 분배를 적당히 조화시켜 잘해보자는 정치적 수사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고난도의 정치공학이 절실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오랜 정당정치의 뿌리가 있어 국민의 욕구와 정서를 자양분삼아 다양한 복지문제들을 정치어젠다로 설정하며 선거를 통하여 국민의 평가를 받으며 해결해왔다.사민주의적 전통을 갖고 있는 영국,독일,프랑스 등의 국가들이 집권을 위하여 시장과 국가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국민정당화해온 과정이 그러했다.이미 계급정당의 노선을 많이 벗어나 국민 속으로 파고드는 영국의 노동당 정치가 그렇고 적녹연정이후 좌파적 정체성을 흐릿하게 유지하고 있는 독일이 그러하며 공화적 연대방식이 남아 있지만 취업장려금을 통하여 개인을 사회적 삶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프랑스가 그렇다.이들 국가들은 이제 노동자와 중산국민을 동시에 설득하며 국가재정과 국민의 삶에 대하여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국민의 부담을 더 올리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단계에 올라와 있다. 광복이후 남북 대치상황 속에서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이 폭을 넓히기 힘들었던 우리의 정치는 보수적 분위기 속에서 정당간 복지정책의 차별성을 정당의 역사성과 결부시키지 못하고 지역맹주의 외연적 교체만을 거듭해왔으며 집권용 또는 집권 후의 정당주조만을 반복해 왔다.자연히 복지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불가능하였고 집권시나리오도 정치체제나 지역성을 대변하는 것들뿐이었다.이에 매몰되면 집권기간이나 집권경쟁기간 내내 국민의 삶을 섬세하게 챙기는 정치를 하지 못하고 권력의 향배를 쫓아 좌충우돌하는 정치적 백시현상(white-out)만이 지속될 뿐이다.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에 이어 문민집권 3기를 맞는 참여정부가 2기에 접어들고 있다.그러나 아직 청와대와 국회의석 과반의 여당간에 정책조율의 세련미가 없으며,제1야당도 사안별 대안제시가 구체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새롭게 진입한 노동자정당의 역할도 자리가 잡히지 않아 여전히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이러한 관성이 차기 주자들의 등장시기까지 지속된다면 우리의 정치문화에 변화가 정착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루빨리 성난 국민의 정서를 깊이 파고드는 정치권의 명민한 발걸음이 요청된다.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연금제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한 대안을 마련해야 하며,‘아래로부터 위로의 재분배’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건강보험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그리고 늘 불확실한 입시제도 등 교육제도를 국민과 함께 진지하게 검토하여 국민적 확신을 이끌어내야 한다.청년실업문제도 사회구조 전체의 위기상황을 초래하기 전에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갈되어가는 장애인고용촉진기금문제에 대하여도 적극적인 대응이 뒤따르지 않으면 사각지대를 더욱 벼랑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노인문제는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늦었지만 17대 국회의 상임위도 모습을 갖추었다.이제는 위와 같은 문제에 몰두해야 한다.그것이 정치이다.이를 위한 정치,복지정치의 바른 자세를 하루빨리 취하는 정당에 국민은 미소지을 것이며 그렇지 않은 정당에는 차가운 등을 보일 것이다.헤게모니정치의 패러다임을 버리고 복지정치패러다임으로 다가가는 정당과 정치가에게 유권자들은 치명적으로 유혹당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성규 서울시립대 사회정책학 교수 ˝
  • 17대국회 상임위원장 프로필

    ●운영위원장 천정배 학교 성적이 늘 1등이던 ‘목포 수재’.원칙주의자인 반면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평.비즈니스위크의 ‘2004년 아시아 스타 24인’에 선정되기도.부인 서의숙(49)씨와 2녀. ▲전남 신안(50) ▲서울대 법대 ▲변호사 ▲15~17대 의원 ▲원내대표 ●법사위원장 최연희 검사 출신이며 9년째 법사위를 지킨 ‘터줏대감’.99년 ‘옷로비 청문회스타’로 꼼꼼한 업무 처리가 강점.부인 김혜동(56)씨와 1남1녀. ▲강원 동해(60) ▲서울고·서울대 법대 ▲대검 공안2과장 ▲청와대 사정·민정비서관 ▲한나라당 사무부총장 ▲15∼17대 의원 ●정무위원장 김희선 재야 운동권 출신이며 광복군 김학규 장군의 손녀.17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입법을 주도 중.남편 방국진(63)씨와 1남1녀. ▲평남 평원(61)▲대전여상 중퇴 ▲여성의 전화 초대원장 ▲국민회의 여성위원장 ▲16·17대 의원 ●재경위원장 김무성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 출신으로 김창성 전 경총 회장이 형,현정은 현대 회장의 모친인 김문희 씨가 누이. 부인 최양옥(47)씨와 1남2녀. ▲부산(53) ▲한양대 경영학과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 ▲내무차관 ▲15∼17대 의원 ●통일외교통상위원장 임채정 해직기자 출신의 4선 의원.8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정계 입문했으며,지난 대선 뒤 대통령직인수위원장으로 활동.부인 기영남(62)씨와 2남. ▲전남 나주(63) ▲고려대 법대 ▲국민회의 정세분석위원장,정책위의장 ▲14~17대 의원 ●국방위원장 유재건 재미 인권변호사 출신의 3선 의원.세련된 매너로 ‘영국신사’란 별명을 지닌 미국통 외교분야 전문가.부인 김성수(59)씨와 2남1녀. ▲서울(67) ▲연세대 정외과 ▲미국 변호사 ▲MBC시사토론 사회자 ▲14~16대 의원 ▲한ㆍ미 의원외교협의회장 ●행자위원장 이용희 17대 국회의 최고령 의원.김대중 전 대통령과 ‘내외문제연구소’를 설립했으며 6대 총선부터 6차례 낙선,4차례 당선.부인 유정순씨와 3남2녀. ▲충북 옥천(73) ▲건국대 ▲9·10·12·17대 국회의원 ▲평민당 부총재 ▲국민회의 부총재 ▲열린우리당 상임고문 ●교육위원장 황우여 법조계 출신으로 등원 이후 줄곧 교육위에서 활동.성품은 부드럽지만 일처리는 꼼꼼하다는 평.부인 이선화(49)씨와 1남2녀. ▲인천(57) ▲제물포고·서울대 법대 ▲서울지법 부장판사·헌법재판소 헌법연구원 ▲감사원 감사위원 ▲한나라당 정책위부의장 ▲15∼17대 의원 ●과기정위원장 이해봉 정통 행정관료 출신으로 아홉살 때 부모님을 여읜 뒤 대학 때 학비가 없어 휴학을 거듭하며 행시에 합격.사법연수원 부장판사인 부인 이선희(55)씨와 2남. ▲경북 달성(62)▲서울대 법대 ▲경북지사 ▲대구시장 ▲체육청소년부 차관 ▲15~17대 의원 ●문화관광위원장 이미경 열린우리당 유일의 여성 3선 의원.15대 국회 때는 한나라당 소속이었으나 동티모르 파병동의안에 반대해 제명당했다.남편 이창식(58)씨와 2녀.▲부산(54) ▲이화여대 영문과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민주당 제3정책조정위원장 ▲15~17대 의원 ●농해수위원장 김광원 소신과 반골 기질이 강한 정통 내무관료 출신.서울대 법대 재학 당시 ‘4·19 제2선언문’을 기초한 주역.부인 박해숙(55)씨와 2남1녀. ▲경북 울진(65)▲행시 10회 ▲강릉·포항시장 ▲경북 부지사 ▲한나라당 사무부총장 ▲15∼17대 의원 ●산자위원장 맹형규 뉴스 앵커 출신으로 온건합리파이며 설득력이 뛰어나다.대변인을 거쳐 99년 이회창 전 총재의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핵심측근으로 부상,기획위원장 등 요직을 거쳤다.6·5재보선 공천심사위원장도 지냈다.부인 채승원(58)씨와 2녀 ▲서울(58) ▲연세대 정외과 ▲15~17대 의원 ●보건복지위원장 이석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노총각 3선 의원.97년 8월 자신의 명함에 ‘남조선’이라고 적었다가 ‘명함 파동’을 겪기도. ▲전북 익산(53) ▲서울대 법학과 ▲민추협 기획위원 ▲14·15·17대 의원 ▲새천년민주당 제2정조위원장 ▲환경관리공단 이사장 ●환노위원장 이경재 해직기자 출신으로 김영삼 전 총재 공보특보로 정계 입문.솔직한 편이며 지난해 ‘여자 안방’ 발언으로 설화를 겪기도.부인 성신자(44)씨와 1남2녀. ▲경기 이천(63) ▲강화고·서울대 사회학과 ▲동아일보 정치부장 ▲청와대 공보수석 ▲공보처 차관 ▲15∼17대 의원 ●건교위원장 김한길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선거기획을 총괄했던 기획통.95년 김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탤런트인 부인 최명길씨(42)와 2남. ▲일본 도쿄(51) ▲건국대 ▲15~17대 의원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정보위원장 문희상 노무현 대통령의 ‘복심(腹心)’.‘털털한 외모 덕에 ‘겉은 장비(張飛)’이지만 ‘속은 조조(曹操)’라는 평가.부인 김양수(58)씨와 1남2녀. ▲경기 의정부(57) ▲서울대 법대 ▲연청 중앙회장 ▲14·16·17대 의원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참여정부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 ●여성위원장 김애실 여성으론 국내 최초의 경제학 박사이며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정계 입문.남편인 박동운(63)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와 1남1녀. ▲평북 강계(58) ▲경기여고 미국 하와이대 경제학과 ▲한국외국어대 사회과학대학장 ▲한국여성경제학회장 ▲17대 의원 ●예결특위위원장 정세균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쌍용그룹에 입사,18년간 근무한 뒤 정계에 입문.96년 당진제철소 건설과 관련해 한보그룹 로비자금을 거절하기도.부인 최혜경(52)씨와 1남1녀. ▲전북 장수(54) ▲고려대 법대 ▲15∼17대 의원 ▲민주당·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 ●윤리특위위원장 김원웅 공화당 사무처 공채 출신으로 노무현 대통령과는 꼬마민주당 창당,통추 활동으로 인연.지난 17대 대선때 한나라당을 탈당해 유시민 의원과 개혁당을 이끌었다.강성 개혁주의자로 통한다.부인 진옥선씨와 1남2녀 ▲중국 충칭(60) ▲서울대 정치학과 ▲14·16·17대 의원 ˝
  • [CEO 칼럼] 주 5일 근무 단상/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사람이 일주일에 엿새 일하고 하루를 쉬는 형태의 이른바 주6일 노동이 시작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구약성서에 보면 엿새 동안은 열심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 쉬도록 하라는 주6일 개념이 십계명에 있지만,그것이 주6일 근무의 기원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이 체력유지에 적당해 신체·생리적으로 자연스럽게 1일 3식이 보편화된 것처럼,기계가 아닌 인간의 육체는 일정시간의 노동 후에는 적정한 휴식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또한 자연스럽게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노동 형태가 정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주6일 근무제도 80년대에 들어 고소득을 누리게 돼 개인의 여가생활을 통한 행복추구권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구미 선진국들을 필두로 주5일 근무제가 점차 도입되기 시작하더니,90년대 이후에는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웃도는 국가의 대부분이 주5일 근무제를 채택하고 있다.이제는 국제적인 추세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일부터 공기업과 금융·보험업,1000명 이상 고용 사업장을 대상으로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단축함으로써 본격적인 주5일 근무시대가 열렸다. 법제화 과정에서 시기상조 등의 논란은 있었으나 우리나라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떨어지는 중국도 이미 지난 95년 주5일 근무제를 법제화했으니 우리의 경우는 주5일 근무제가 그리 빠른 것도 아닌 듯싶다. 중요한 것은 일하는 시간이 아니라 일의 효율과 능률일 것이다.개발시대인 70년대와 고도 성장기였던 80년대에 가장 활발한 직장생활을 했던 필자와 동년배라면 공통적으로 느끼겠지만,사실 필자에게는 아직 주5일 근무가 낯설고 생소하다. 특히 평생 건설인으로 살아오며 혈기 왕성했던 30,40대 대부분을 국내와 해외 현장에서 정신없이(?) 보낸 필자로서는 격세지감까지 들지 않을 수 없다. 현장 근무시절에는 주6일 근무에 일요일 격주 휴무는 기본이고,그나마 공기에 쫓기다 보면 일요일 반납은 다반사였다.심지어 철야근무도 적지 않았으니 실제 일한 시간으로 환산해 보면 ‘주8일 근무’를 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본사 근무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현장 지원업무 때문에 현장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법정 공휴일도 8월15일 광복절 하루만 쉬고 식목일,어린이날,제헌절 등의 공휴일은 정시 출근,정시 퇴근했다.‘정시’는 근무시작이 아침 8시고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진 것이 없었다. 이달부터는 대다수 건설회사들도 주 5일 근무를 실시하고 있다.국내와 해외에 많은 사업장을 가지고 있는 건설회사의 특성상 시행에 어려움이 없지 않을 것이나 ‘질과 효율의 시대’에,이 주5일 근무제는 실보다 득이 많은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웰빙’이 화두인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다.필자처럼 일이 몸에 밴 세대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주5일 근무가 아직 익숙지 않지만 우리 회사의 젊은 세대들은 반기는 분위기다.양보다는 질과 효율을 중시하는 시대이고 보면 주5일 근무도 빠르게 정착될 것이다. 주5일제가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만큼 이제는 빨리 주5일 근무에 적응해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업무에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이끌어내 ‘일의 질’도 함께 끌어올리는 것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 [이것이 궁금하다]‘서울시’ 의 위상 수도로서 지위

    서울을 특별시,우리나라의 수도(首都)라고 말한다.신행정수도 건설이 논란이 되면서 이런 서울의 위상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한다.특별시는 다른 광역시와 무엇이 다른지.또 ‘수도’라는 말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지위를 갖는지.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불린다.조선시대부터 수도로 발달해 온 서울은 8·15광복 후 1946년 9월28일 군정법령(軍政法令)에 의해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서울특별자유시가 됐다. 49년 8월15일 지방자치법이 시행되면서 서울특별시로 개칭됐다.62년 2월1일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당시 내무부 직속의 다른 도와는 달리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었다.중앙 각 부처의 지휘·감독권을 제한하여 수도 행정의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91년 5월31일 제정·공포된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에는 “서울특별시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되 이 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수도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2조)고 규정하고 있다.이에 근거해 서울은 다른 도시와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정희윤 박사는 “서울은 수도로서 국방·안보·외교·교육·문화·건설 등 모든 분야에서 고려되고 보호 또는 규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부산은 63년도에 직할시로 승격돼 95년부터 대구·대전 등과 함께 광역시로 불리게 됐다.현재 6개의 광역시는 경기도 등 도단위 행정조직과 법상 지위는 같다.수도인 서울시와는 다른 지위에 있는 것이다.박명균 행정자치부 자치제도팀장은 “광역시와 도를 구분하는 법적 요건은 없다.”며 “통상적으로 인구 100만명이상이면 설치 가능하나 지리적 여건,주민동의,재정능력,교통,지역개발 등 모든 것이 망라된 정치적 합의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Seoulites]“習射無言” 374년 명맥 석호정 국궁

    [Seoulites]“習射無言” 374년 명맥 석호정 국궁

    흔히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고 말한다.서울 남산 기슭에서 만난 ‘21세기 활잡이’의 말처럼 활쏘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는 지도 모른다. 4세기 전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내려받은 이들이 1000만의 도시 서울,그것도 도심 한복판인 중구에 있어 눈길을 모으고 있다.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지난달 30일 오후 3시 장충동 2가 산 14의 21 국립극장 뒤편에 자리한 석호정(石虎亭)에서는 시민 8명이 더위를 손부채로 쫓아가며 활을 쏘고 있었다.앞마당에 선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는 돌 표지판은 활쏘기 하나에도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충고를 담고 있는 듯했다. 살포시 앉은 어머니의 치마폭인 양 폭 꺼진 지형에 정자 하나가 우뚝 서 있었고,앞마당 저 멀리로 과녁 3개가 눈에 들어왔다. 석호정은 원래 조선 선조 때인 1630년 도성 아래대(下村),오늘날 장충단 뒤편에 들어선 활터다.아들의 아들,손자의 손자를 거쳐 후손들 힘으로 어언 374년째 꿋꿋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외국 침략과 전쟁으로 몇 년간 명맥이 끊긴 적도 있긴 하다.1894년 갑오경장 때 옛 풍습이라는 이유로 폐쇄됐다가 1899년 고종 지시로 부활했다.1940년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다시 폐쇄됐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재건,회장 격인 사두(射頭)를 지명하며 얼을 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석호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활쏘기에 얽힌 옛 얘기와 맞닿아 있다.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큰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 적중시켰다.가슴을 쓸어내리며 가까이 가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다고 한다.의문이 들어 다시 활을 쐈으나 이번엔 화살이 튕겨나왔다는 데서 교훈을 얻었다.매사에 신경을 써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깨달음이었다.심혈을 기울이면 바위도 움직인다는 뜻이다. 요즈음 말로 동아리 회원을 이들은 사원(射員)이라고 부른다.여성 10명을 포함해 10대에서부터 86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60여명이 뜻을 모았다.매일 적어도 7∼8명은 꼭 이곳에 들러 연습에 매달린다.신수진(75) 고문은 “90세 된 사원도 있는데 움직이기 어려워서인지 근래엔 잘 나오지 않는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 강동구 천호동에서 산다는 사원 호미숙(42·여)씨는 어떤 점에서 좋으냐는 물음에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게 이미 결정나는 것처럼,인생살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활쏘기에서 배운다.”고 답했다.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세가 완벽하지 않으면 결과는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호씨는 “IMF 때 사업에 어려움이 닥쳐 남편과 함께 정신건강에 좋겠다고 여겨져 수소문한 끝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곳을 찾았다.”고 덧붙였다.양궁은 조준기나 진동방지 장치가 달린 기계식 경기인 반면,국궁은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하는 싸움이라고 예찬론을 늘어놓기도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사원은 “활시위를 당길 때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근육발달에도 이 이상 없을 것”이라면서 활을 잡고 시늉을 해보이는 방문객에게 엉덩이에 힘을 ‘확’ 주라고 활짝 웃어 보였다. ●첫째도 예의,둘째도 예의 사대(射臺)에 나란히 올라선 호씨 등 사원들의 팔뚝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가 했더니 작은 점으로 떠 날아간 화살이 145m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소리가 ‘딱’ 하고 들려왔다. 전통방식에 따르면 과녁을 맞혔다는 소식은 건너편 시동(矢童)이 수신호로 알려온다.실패해도 빗나간 방향으로 빨간 깃발을 흔들어 조준 기회를 준다.그러나 석호정도 세월을 못 이긴 듯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옛날엔 시동이라는 이름에서 엿보이는 대로 심부름꾼이 화살을 일일이 날랐으나 지금은 ‘컨베이어 벨트’가 대신한다. 광복 뒤 부활해 올 21대 사두로 뽑힌 김태우(63)옹의 말에서 물질만능인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꼬장꼬장함’이 드러난다.“무엇보다 예의범절이 중요합니다.절대 다른 사람을 겨누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대에 서지 않는 이상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으면 자격 박탈감이죠.” 국궁은 2000년 역사를 지녔는데 옛날 사냥을 하든,전쟁 때 적군을 겨냥하든 적당한 힘으로 화살이 다다를 수 있는 적정거리가 200보(步)였다는 데서 145m가 규정거리로 됐다고 귀띔했다.화살은 길게는 최고 400m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사원들은 개인연습에는 제한을 받지 않지만 매월 한차례 토요일 낮 12시30분부터는 자체 대회인 삭회(朔會)를 갖는다.사원이 되고 싶으면 2개월 동안의 훈련 뒤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전통 활쏘기 터는 전국에 320여곳 있다.회비가 한 달에 3만원이며 가입비는 남자 20만원,여성 10만원이다.(02)2273-2061.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Seoulites]“習射無言” 374년 명맥 석호정 국궁

    흔히 “세월이 화살처럼 빠르다.”고 말한다.서울 남산 기슭에서 만난 ‘21세기 활잡이’의 말처럼 활쏘기에는 인생이 담겨 있는 지도 모른다. 4세기 전 선조들의 정신을 오롯이 내려받은 이들이 1000만의 도시 서울,그것도 도심 한복판인 중구에 있어 눈길을 모으고 있다. ●남산타워가 손에 잡힐 듯 지난달 30일 오후 3시 장충동 2가 산 14의 21 국립극장 뒤편에 자리한 석호정(石虎亭)에서는 시민 8명이 더위를 손부채로 쫓아가며 활을 쏘고 있었다.앞마당에 선 습사무언(習射無言)이라는 돌 표지판은 활쏘기 하나에도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충고를 담고 있는 듯했다. 살포시 앉은 어머니의 치마폭인 양 폭 꺼진 지형에 정자 하나가 우뚝 서 있었고,앞마당 저 멀리로 과녁 3개가 눈에 들어왔다. 석호정은 원래 조선 선조 때인 1630년 도성 아래대(下村),오늘날 장충단 뒤편에 들어선 활터다.아들의 아들,손자의 손자를 거쳐 후손들 힘으로 어언 374년째 꿋꿋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외국 침략과 전쟁으로 몇 년간 명맥이 끊긴 적도 있긴 하다.1894년 갑오경장 때 옛 풍습이라는 이유로 폐쇄됐다가 1899년 고종 지시로 부활했다.1940년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으로 다시 폐쇄됐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재건,회장 격인 사두(射頭)를 지명하며 얼을 이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석호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활쏘기에 얽힌 옛 얘기와 맞닿아 있다.중국 한나라 문제(文帝) 때 이광(李廣)이라는 장군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큰 호랑이를 보고 활을 쏴 적중시켰다.가슴을 쓸어내리며 가까이 가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다고 한다.의문이 들어 다시 활을 쐈으나 이번엔 화살이 튕겨나왔다는 데서 교훈을 얻었다.매사에 신경을 써서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깨달음이었다.심혈을 기울이면 바위도 움직인다는 뜻이다. 요즈음 말로 동아리 회원을 이들은 사원(射員)이라고 부른다.여성 10명을 포함해 10대에서부터 86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60여명이 뜻을 모았다.매일 적어도 7∼8명은 꼭 이곳에 들러 연습에 매달린다.신수진(75) 고문은 “90세 된 사원도 있는데 움직이기 어려워서인지 근래엔 잘 나오지 않는다.”고 말꼬리를 흐렸다. ●“요행을 바라지 말라” 강동구 천호동에서 산다는 사원 호미숙(42·여)씨는 어떤 점에서 좋으냐는 물음에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게 이미 결정나는 것처럼,인생살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활쏘기에서 배운다.”고 답했다.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자세가 완벽하지 않으면 결과는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호씨는 “IMF 때 사업에 어려움이 닥쳐 남편과 함께 정신건강에 좋겠다고 여겨져 수소문한 끝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곳을 찾았다.”고 덧붙였다.양궁은 조준기나 진동방지 장치가 달린 기계식 경기인 반면,국궁은 오로지 정신력 하나만으로 하는 싸움이라고 예찬론을 늘어놓기도 했다. 옆에 있던 다른 사원은 “활시위를 당길 때 몸 전체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근육발달에도 이 이상 없을 것”이라면서 활을 잡고 시늉을 해보이는 방문객에게 엉덩이에 힘을 ‘확’ 주라고 활짝 웃어 보였다. ●첫째도 예의,둘째도 예의 사대(射臺)에 나란히 올라선 호씨 등 사원들의 팔뚝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가 했더니 작은 점으로 떠 날아간 화살이 145m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소리가 ‘딱’ 하고 들려왔다. 전통방식에 따르면 과녁을 맞혔다는 소식은 건너편 시동(矢童)이 수신호로 알려온다.실패해도 빗나간 방향으로 빨간 깃발을 흔들어 조준 기회를 준다.그러나 석호정도 세월을 못 이긴 듯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옛날엔 시동이라는 이름에서 엿보이는 대로 심부름꾼이 화살을 일일이 날랐으나 지금은 ‘컨베이어 벨트’가 대신한다. 광복 뒤 부활해 올 21대 사두로 뽑힌 김태우(63)옹의 말에서 물질만능인 현대사회의 변화에 대해 못마땅해하는 ‘꼬장꼬장함’이 드러난다.“무엇보다 예의범절이 중요합니다.절대 다른 사람을 겨누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사대에 서지 않는 이상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으면 자격 박탈감이죠.” 국궁은 2000년 역사를 지녔는데 옛날 사냥을 하든,전쟁 때 적군을 겨냥하든 적당한 힘으로 화살이 다다를 수 있는 적정거리가 200보(步)였다는 데서 145m가 규정거리로 됐다고 귀띔했다.화살은 길게는 최고 400m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사원들은 개인연습에는 제한을 받지 않지만 매월 한차례 토요일 낮 12시30분부터는 자체 대회인 삭회(朔會)를 갖는다.사원이 되고 싶으면 2개월 동안의 훈련 뒤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전통 활쏘기 터는 전국에 320여곳 있다.회비가 한 달에 3만원이며 가입비는 남자 20만원,여성 10만원이다.(02)2273-2061.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한나라 “국민속에서 ‘딴나라당’ 오명 씻자”

    “딴나라를 버리고 국민 속으로….” 한나라당이 ‘딴나라당’‘부자당’ 등 그간의 나쁜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최근 자신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언론으로 꼽혀온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 매체에 ‘딴나라는 드뎌 사라진다.’는 문구의 배너광고를 게재하는 등 지금까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줬다.특히 그동안 말로만 외쳐대던 ‘뜬구름 잡는 변화’와는 거리가 먼 ‘행동하는 변화’를 모색중인 것 같다. 이같은 변화는 국민 속으로 파고들지 않으면 정권 창출은 고사하고 정당으로서의 존립기반마저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소장파 “마오쩌둥식 하방(下放)” 초·재선 소장파 중심의 ‘수요조찬모임’은 ‘마오쩌둥식 하방(下放)’에 나서기로 하고 구체적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하방은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문화대혁명(1965∼1974년) 당시 자신은 물론 친위세력까지 대거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인민의 뜻’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던 일을 말한다. 원희룡·김명주·김기현 의원은 최근 회동을 갖고 의원 개인의 관심 및 전문 분야에 따라 다양한 ‘민생 현장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로 했다. 이들은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쌀 개방 대책의 실효성을 점검하기 위해 호남지역에서 미래 지향적인 대안농업을 경험하는 등 농촌활동도 벌이고 광복절을 맞아 독도 방문 일정도 잡아 놓았다.또 군부대내 복지 실태를 점검하기 위해 해병대 입소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장애 체험,농수산물 경매 현장 체험 등도 갖기로 했다. 원 의원은 “일반 시민들도 참가하고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도록 제안했고,대부분 의원들이 이에 공감했다.”면서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닌 정책적 측면에서 접근해 의정활동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3선·중도그룹,“금강산으로,백두산으로” 3선그룹을 중심으로 한 ‘국가발전연구회(발전연)’와 중도성향 의원모임인 ‘국민생각’도 나름의 프로그램에 따라 금강산과 백두산으로 각각 떠난다.발전연 소속 의원 20여명은 2일 금강산으로 떠난다. 이 모임은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실익 없는 일방적 대북 퍼주기’라며 정면으로 비판해온 이재오·김문수·홍준표 의원 등 대여 강경파들이 속한 모임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강경파들이 앞장서 대북·통일문제의 전향적 변화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중도성향의 의원들로 구성된 ‘국민생각’ 소속 의원 10여명도 조만간 백두산으로 ‘독립기행’을 떠난다.이들은 올 여름 연구과제로 ‘독립운동’을 상정하고,백두산을 비롯해 항일 전적지가 산재한 만주지역을 돌아볼 계획이다.친일진상규명특별법이 국회에 계류된 상황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추진해 적지않은 관심을 끌고 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이것이 궁금하다]‘서울시’ 의 위상 수도로서 지위

    서울을 특별시,우리나라의 수도(首都)라고 말한다.신행정수도 건설이 논란이 되면서 이런 서울의 위상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한다.특별시는 다른 광역시와 무엇이 다른지.또 ‘수도’라는 말은 어떤 의미이며 어떤 지위를 갖는지. 서울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특별시로 불린다.조선시대부터 수도로 발달해 온 서울은 8·15광복 후 1946년 9월28일 군정법령(軍政法令)에 의해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서울특별자유시가 됐다. 49년 8월15일 지방자치법이 시행되면서 서울특별시로 개칭됐다.62년 2월1일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당시 내무부 직속의 다른 도와는 달리 국무총리 직속으로 지위가 승격되었다.중앙 각 부처의 지휘·감독권을 제한하여 수도 행정의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91년 5월31일 제정·공포된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에는 “서울특별시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되 이 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수도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2조)고 규정하고 있다.이에 근거해 서울은 다른 도시와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정희윤 박사는 “서울은 수도로서 국방·안보·외교·교육·문화·건설 등 모든 분야에서 고려되고 보호 또는 규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가의 정체성과도 직결된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부산은 63년도에 직할시로 승격돼 95년부터 대구·대전 등과 함께 광역시로 불리게 됐다.현재 6개의 광역시는 경기도 등 도단위 행정조직과 법상 지위는 같다.수도인 서울시와는 다른 지위에 있는 것이다.박명균 행정자치부 자치제도팀장은 “광역시와 도를 구분하는 법적 요건은 없다.”며 “통상적으로 인구 100만명이상이면 설치 가능하나 지리적 여건,주민동의,재정능력,교통,지역개발 등 모든 것이 망라된 정치적 합의에 의해 정해질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우리 동네 이야기] 서울 중구 小公洞

    [우리 동네 이야기] 서울 중구 小公洞

    환락가에 꼭 숨어있는 동사무소를 아시나요? 조선호텔과 롯데백화점,프라자호텔을 비롯, 대형 빌딩 30여개가 즐비한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인 소공동.행정동의 자격으로 소공동이 관할하는 지역은 소공동 외에도 북창동,태평로2가,남대문로2가,남대문로3가,남대문로4가,서소문동,정동,순화동,의주로1가,충정로1가,봉래동 일부 등 면적 0.95㎢이다. 이 일대는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50여만명이며 백화점 세일기간이나 주말에는 무려 60만∼70만명이 몰린다.하지만 상주 인구는 고작 1100명을 넘을 뿐이다.통반 조직도 6통 31반에 불과해 동사무소에 북적이는 사람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행정서류를 발급하려는 외지인들뿐이다. 유영청 소공동장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류를 떼가려는 직장인들이 하루에 수백명씩이나 된다.”면서 “동사무소의 상근인원은 직원 14명과 공익요원 2명에 불과한데 유동인구가 많아 청소 등 민원은 산더미”라고 말했다. 북창동 중앙길에는 새벽 5∼9시까지 인력시장이 열린다.하루치기 일거리를 찾으려는 서민 400∼500명이 이 곳에 모인다.경기불황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일용직 노무자들이 줄담배만 피워 동사무소는 청소 수요만 늘었다고 푸념이다. 소공동은 소공주동,작은공주골의 줄임말로 조선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가 살던 궁의 일대에서 유래한다. 소공동 동사무소가 자리한 ‘유흥 1번지’ 북창동은 조선시대 선혜청의 북쪽창고가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서울성곽 8문의 하나인 서소문에서 서소문동의 이름이 유래됐으며 정동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는데서 비롯됐다.순화동은 광복후 순청동의 ‘巡’자와 화천정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붙였다. 행정동이 소공동인 주민들의 대부분은 순화동에 모여산다.대다수 서민들이며 원주민들이 주류이다.최근 중앙일보 주변에 주상복합 건물과 오피스텔 등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1∼2년전만 해도 1400여명에 달하던 인구가 1100여명 안팎으로 크게 줄었다. 시는 도심의 상주 인구를 늘리는 방안으로 최근 주상복합 등에 한해서 용적률과 높이의 규제를 완화한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시민단체가 크게 반발했으며 아직 도심의 ‘인구 역류현상’은 요원한 상태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우리 동네 이야기] 서울 중구 小公洞

    환락가에 꼭 숨어있는 동사무소를 아시나요? 조선호텔과 롯데백화점,프라자호텔을 비롯, 대형 빌딩 30여개가 즐비한 서울의 대표적인 도심인 소공동.행정동의 자격으로 소공동이 관할하는 지역은 소공동 외에도 북창동,태평로2가,남대문로2가,남대문로3가,남대문로4가,서소문동,정동,순화동,의주로1가,충정로1가,봉래동 일부 등 면적 0.95㎢이다. 이 일대는 하루 평균 유동인구가 50여만명이며 백화점 세일기간이나 주말에는 무려 60만∼70만명이 몰린다.하지만 상주 인구는 고작 1100명을 넘을 뿐이다.통반 조직도 6통 31반에 불과해 동사무소에 북적이는 사람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행정서류를 발급하려는 외지인들뿐이다. 유영청 소공동장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류를 떼가려는 직장인들이 하루에 수백명씩이나 된다.”면서 “동사무소의 상근인원은 직원 14명과 공익요원 2명에 불과한데 유동인구가 많아 청소 등 민원은 산더미”라고 말했다. 북창동 중앙길에는 새벽 5∼9시까지 인력시장이 열린다.하루치기 일거리를 찾으려는 서민 400∼500명이 이 곳에 모인다.경기불황으로 일거리가 줄어들자 일용직 노무자들이 줄담배만 피워 동사무소는 청소 수요만 늘었다고 푸념이다. 소공동은 소공주동,작은공주골의 줄임말로 조선 태종의 둘째딸인 경정공주가 살던 궁의 일대에서 유래한다. 소공동 동사무소가 자리한 ‘유흥 1번지’ 북창동은 조선시대 선혜청의 북쪽창고가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서울성곽 8문의 하나인 서소문에서 서소문동의 이름이 유래됐으며 정동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는데서 비롯됐다.순화동은 광복후 순청동의 ‘巡’자와 화천정의 ‘和’자를 따서 순화동이라 붙였다. 행정동이 소공동인 주민들의 대부분은 순화동에 모여산다.대다수 서민들이며 원주민들이 주류이다.최근 중앙일보 주변에 주상복합 건물과 오피스텔 등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1∼2년전만 해도 1400여명에 달하던 인구가 1100여명 안팎으로 크게 줄었다. 시는 도심의 상주 인구를 늘리는 방안으로 최근 주상복합 등에 한해서 용적률과 높이의 규제를 완화한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시민단체가 크게 반발했으며 아직 도심의 ‘인구 역류현상’은 요원한 상태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서울광장] 극과극만 있는 사회/손성진 논설위원

    김선일씨 사망과 파병 문제를 주제로 한 방송사의 심야토론은 예상대로 결론없이 끝나고 말았다.사회자의 말처럼 의견차는 극명했다.파병이야 보내느냐,보내지 않느냐의 양단의 문제이긴 하지만 칼로 자른 듯한 극단의 주장만이 존재하는 현실을 또 한번 보여주었다.다른 논쟁에서도 양쪽 끄트머리에서 당길 줄밖에 모르는 극과 극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행정수도 이전,아파트 원가공개,경제위기론,성장과 분배,편파방송 논란까지 다 그렇다.하나같이 중요한 문제들인데도 아직 합의점에 도달한 것은 없다.사회가 심하게 이질화돼 있다는 증거다.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극과 극의 논리만이 지배하고 있다.그런 현실에서 토론은 물에 기름 섞기밖에 되지 않는다. 극심한 시각차의 배경에는 보수와 진보의 논리가 있다.모든 문제를 보수와 진보의 틀로 재단하려 하는 것이다.보수,진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될 문제에까지 이념의 갈등은 깊숙이 침투해 있다.어째서 찬성하고 반대하는지에 대한 이론적인 논거는 없다.진보이니 찬성하고 보수이니 반대한다는 그릇된 외곬만 있을 뿐이다.그러니 어떤 문제이든 합의점을 찾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보자.언제 한번 본격적으로 수도이전의 이해득실을 이론적으로 따져본 일이 있는가.줄기차게 자기 주장만 펴왔다.진지한 고찰은 없고 논리적 포장과 미화만 있었다.그 흔한 공식 여론조사서나 용역조사서는 한장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이런 극단적 논쟁에 얽매인 모습이다.노 대통령 자신도 밀어붙이기만 하다 보니 과거에 ‘수도이전 문제에 대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고 한 발언조차 잊어버려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고 만 것이다. 당위성을 설명할 이론적 근거에 대한 설명보다는 주장만 관철시키려 한 탓이다.언론 또한 편가르기의 주범중의 하나다.도무지 상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옹고집 같은 태도로 억지 논리 개발에만 열중해 왔다.노 대통령이 언론개혁과 수도이전 문제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 것도 그런 언론에 대해 극대 극으로 부딪친 결과다. 한국의 보수,진보 논쟁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다.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에 수정주의가 가미된 지도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사회주의의 몰락을 예견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이후 국제적으로 보수와 진보는 투쟁이 아니라 보완 관계로 발전하고 있다.프랑스의 좌우 동거 정부나 영국의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의 공존 노력이다.우리는 어떤가.광복 이후에 격렬했던 이념 분쟁이 때가 아니게 ‘악의 꽃’을 피우려 한다.소모적인 이념 논쟁이 휩쓸 때 사회는 병든다.극단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설 곳이 없다.그래서 끊임없이 어느 한 쪽에 설 것을 강요당한다.일종의 정신적인 희생이다.국민들은 지치고 있다.사회가 다시 건강해지려면 소모적인 논쟁은 중단해야 한다.대신 산적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투명한 절차를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남은 힘을 결집해야 한다.그렇게 해서 내려진 결론은 누구라도 수용하는 것이 옳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보나 보수라고 생각하는 양측은 적대감을 버리고 상대방을 인정하는 양보심이 필요하다.그것이 톨레랑스,즉 관용이다. 나만이 옳다는 독선에서 벗어나고 내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톨레랑스 정신이다.우리는 ‘상생’을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그러지 않고서는 언제까지나 줄다리기만 하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정체 위기에 빠질지 모른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베델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 열려

    대한제국의 국권이 꺼져가던 시절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운동에 앞장선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한국이름 배설·裵說) 선생을 추도하는 ‘베델 선생 서거 95주년 기념대회’가 24일 오전 11시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공원에서 열렸다. 베델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가 주최한 이날 행사에는 크리스토퍼 로빈스 주한영국대리대사,김유전 광복회장,이문원 독립기념관장과 독립운동가 유족,그리고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을 계승한 서울신문 채수삼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 등 150여명이 참석했다. 대회장으로 추대된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은 “베델 선생은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과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고 한국민의 가슴에 독립운동정신을 새겼다.”고 추모하면서 “선생은 단순한 언론인이 아닌 우국지사로 칭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수삼 사장은 추념사에서 “선생이 트리뷴지 특파원을 도와 고종의 밀서를 영국에 보낸 결과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만방에 알린 것은 한 편의 드라마”라면서 “서울신문은 뿌리가 되는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100주년을 맞은 올해 구국 독립 정신을 되살리는 데 노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업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일제의 억압 아래서도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정론을 설파한 선생의 뜻을 기릴 것”이라면서 “올해 안에 태평로 서울신문 사옥 앞에 선생의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날 기념대회에서는 베델선생기념사업회가 95주기를 맞아 위촉한 ‘베델찬양가’를 대한독립군가 선양회 합창단이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 반주로 불러 눈길을 끌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남인수의 ‘서귀포 칠십리’

    남인수의 ‘서귀포 칠십리’

    서귀포를 노래한 대중가요는 많다.‘서귀포 사랑’,‘서귀포를 아시나요’‘안개낀 서귀포’‘서귀포 나그네’‘서귀포 달밤’‘서귀포 칠십리’등.그러나 많은 서귀포 관련 가요중에서 서귀포라는 이름을 전국에 알린 노래라면 단연 ‘서귀포 칠십리’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진주캐던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서귀포 칠십리에 별도 외롭네. 노래를 부른 요절가수 남인수의 미성과 가창력은 서귀포 해안 절경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져 이 노래는 격동기인 40년대를 풍미하고 금지→개사→해금 등의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아직까지 계속 애창되고 있다. 월북 작곡가인 조명암(趙鳴岩·본명 趙靈出·1913∼1993)이 가사를 만들고 박시춘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그저 나온 게 아니다.충남 아산출신으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시인이자 연극인인 명암이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이 당선되자 OK레코드사 이철(李哲)사장이 그의 등단을 축하하면서 이해 6월 함께 제주에 여행왔다.서귀포 해안절경에 매료된 명암이 이틀 밤 내내 고심한 끝에 탄생하게 됐다. 당시 명암이 본 서귀포구는 천혜의 자연 포구였다.동으로 정방폭포·소남머리 단애에서 서쪽으로는 남성동 절벽과 외돌개 기암에 이르기까지 절경 아닌 곳이 없고,그 앞에 범섬·새섬·문섬·섭섬이 미려하게 자리잡은 사이로 통통배와 고깃배가 오가고,여기에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까지 가미된 해안 풍광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었을 것이다.그래서 천재화가 이중섭도 한국전쟁 중 서귀포에 피란와 바다그림을 그리며 6개월 동안 머물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조명암은 광복 이후 미 군정이 진보적 작가들을 탄압한다는 이유로 본명인 조영출,이가실,금운탄,이부풍이라는 다양한 필명을 사용하다 1948년 자진 월북했으며,‘서귀포 칠십리’도 그의 월북과 함께 ‘구금’에 들어간다. 박시춘은 이 노래가 없어질 것을 걱정한 나머지 작사가인 반야월에게 개작을 의뢰했고 억지 개사된 ‘서귀포 칠십리’는 남인수가 지병중임에도 다시 불러 두번째 탄생했으나 2절 가사 중의 ‘미역따던 아가씨’가 ‘머리빨던 아가씨’로 바뀌는 바람에 “바닷물에 머리를 빠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놀림 아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서귀포 칠십리’도 93년 ‘금지가요 해금’조치로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됐으며 급기야 일본에서 활동중인 이성애가 일본어로 취입,오사카(大阪)등지의 나이 많은 제주출신 재일동포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최고의 노래로 자리잡았다. 서귀포시는 서귀포의 대표적 가요인 ‘서귀포 칠십리’와 작사자인 조명암을 기리기 위해 지난 97년 외돌개 해안 동쪽 구릉에 조각가 이영학이 제작한 무쇠 노래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난해 9월 불어닥친 태풍 ‘매미’로 부서지고 말아 시는 다시 5000만원을 들여 이달 말 천지연폭포 북쪽 절벽위에 김혜숙씨의 작품인 가로 3m,세로 2m 크기의 화강암 노래비를 세울 계획이다.버튼식 음향장치까지 설치해 버튼만 누르면 누구나 ‘서귀포 칠십리’등 서귀포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 서귀포는 ‘서귀포 칠십리’로 더 낯이 익다.그래서 “서귀포 해안 길이가 칠십리(七十里)나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다. 이에 대해 서귀포시는 1653년 발간된 ‘탐라지’내용을 근거로 과거 정의현청(旌義縣廳)이 자리했던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에서 서귀포항까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칠십리는 제주 사람들에게 단순한 수치나 거리개념이 아니다.면면히 이어져온 향토성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서귀포의 이상향이고 피안이다. 서귀포시가 최근 각종 축제나 스포츠대회 명칭에 ‘서귀포 칠십리’를 붙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귀포 칠십리 축제’‘서귀포 칠십리 전국 남녀궁도대회’‘서귀포 칠십리 건강달리기대회’‘서귀포 칠십리 70경’등이 그것이다.심지어 ‘서귀포 칠십리 건축대상’‘서귀포 칠십리 감귤’이라는 브랜드도 나왔다. 조명암이 다녀간 지 어언 70년.그가 거닐었던 서귀포구는 이제 형형색색의 유람선과 관광잠수함이 드나드는 관광항구로 변했다. 제주국제자유도시 프로젝트의 하나로 ‘서귀포 관광미항 개발계획’까지 마련돼 호주 시드니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국제적인 관광 미항으로 등장할 날도 머지않았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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