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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봉암·여운형 선생 독립운동 서훈 될듯

    조봉암·여운형 선생 독립운동 서훈 될듯

    노무현 대통령이 이념을 떠난 독립운동사 규명 필요성을 제기한 것을 계기로 국가 서훈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거론되는 좌파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또 서훈을 신청했다가 보류됐거나 사실상 거부된 면면은 누구인지,신청서에 나타난 그들의 활동상은 어떤지도 관심사항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처리됐나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은 1980년 이후부터 약간씩 정부의 서훈대상으로 올랐다.올해 광복절에는 고려공산당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결성 등에 참여한 윤자영이 독립 유공자에 선정됐다. 좌파계열 포상자의 경우 북한정권과 무관하고 광복 이전에 사망해 좌우투쟁에 개입하지 않은 인물이 대부분이다.윤자영은 나중에 소련 정부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좌파활동의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가 유보 또는 거부판정을 받거나 이를 예상하고 아예 신청을 포기한 좌파계열 독립운동가는 200명 선으로 추산되고 있다.대부분 독립운동 이후 친일이나 6·25 때 부역활동이 드러나는 등 불투명한 사후 행적이 문제가 됐다고 한다. 여운형의 경우 2002년에 이어 올해 또다시 서훈을 신청했으나 탈락하자,기념사업회 관계자가 보훈처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국회에도 선정협조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선정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공산주의 단체결성을 도운 이동휘는 김영삼 정부 시절 뒤늦게 독립유공자에 포함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주요 대상 인물 해방 이후 진보당 당수를 지낸 죽산 조봉암과 몽양 여운형,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김철수 등이 꼽힌다. 3·1운동 뒤 만주 등에서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던 김시현,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장재성,1920년대 국내 공산주의 거물인 김재봉과 권오설,1930년대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벌인 김두봉,김무정,최창익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조봉암은 3·1운동 때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1년간 옥살이를 하고 공산당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또다시 잡혀 8년간 옥고를 치렀다.해방 뒤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 부의장,대통령후보(무소속),진보당 위원장 등을 지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인 19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됐다. 여운형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장과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좌우 합작운동을 벌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1947년 7월 암살됐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열린세상] 친일이란 판도라상자를 열려면/이덕일 역사평론가

    ‘영산강 안개 속에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로 시작하는 ‘목포는 항구’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이난영의 대표곡으로서 목포를 넘어 전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이 노래의 작사자 조명암(趙鳴岩,1913∼1993)은 2003년에야 시 전집이 발간되었는데,이는 그가 광복 이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참여했다가 월북한 좌익 시인이기 때문이다.월북 부친 때문에 고생했을 남한의 유일한 혈육인 딸은 1992년 그가 해금되자 500여곡의 저작권을 되찾고 ‘꿈꾸는 백마강’,‘선창’ 등의 저작권자가 부친이라며 서울지법에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조명암의 시선집을 편저한 대학교수는 “조명암의 민족주의 성향은 만해 한용운에게서 배운 영향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민족주의 인사로 포장되기도 했다.그러나 그가 일제시대 지은 ‘지원병의 어머니’라는 가사는 ‘민족주의’ 운운하는 평가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웅변해준다. ‘나라에 바치자고 키운 아들을/ 빛나는 싸움터로 배웅을 할 제/ 눈물을 흘릴소냐 웃는 얼굴로/ 깃발을 흔들었다 새벽정거장/···/ 살아서 돌아오는 네 얼굴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며/ 용감한 내 아들의 충의 충성을/ 지원병의 어머니는 자랑해주마.’ 이 가사는 1941년 7월 오케레코드에서 간판급 여가수로 활동하던 장세정(張世貞,1921∼2003)의 노래로 음반 발매되었는데,음반 제목은 ‘애국가’였다.조명암이 작사한 친일 가사는 이뿐만이 아니다.1943년의 ‘혈서지원’에서는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네.’라고 노래하고 있다.친일파 조명암은 북한에서 평양가무단장,문화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부위원장,교육문화성 부상(차관)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죽을 때까지 김일성상(賞)계관인이란 영예스러운 칭호를 누렸는데,이는 적극적 친일파의 공통된 특성 중 하나인 ‘현실 권력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탁월한 능력’이 ‘친일파 하나는 확실히 청산했다.’는 북한에서도 괴력을 발휘했음을 말해준다. 시게미쓰 구니오라고 개명했던 신기남 열린우리당 전 의장의 부친 신상묵이 광복 후 경찰간부로 특채된 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수사했던 경력 덕분이었을 것이다.수사대상만 독립운동가에서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반대자로 바꾸면 되었던 그는 ‘현실권력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친일파의 탁월한 능력’때문인지 서남(西南)지구 전투경찰 사령관을 거쳐 자유당 시절 젊은 도경국장으로 승진한다. 신상묵이 멀쩡한 소학교 교사를 때려치우고 일본군 졸병으로 지원한 1940년,천여명 뽑는 졸병 모집에 8만여 명의 조선인이 지원했다는 ‘매일신보’의 보도는 이 무렵 친일이 권력추구 수단으로 구조화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일제가 적어도 100년은 갈 줄 알았다는 서정주의 친일의 변처럼 독립에의 전망이 부재한 시대였기 때문에 친일은 옳고 그른 윤리적 차원을 넘어 인생역전의 키워드로 구조화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후세대의 친일문제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어렵고 전문성을 요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신기남 의원이 의장직 사퇴의 변에서 “인자함과 덕망,주변에 도움을 주며 사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일제의 앞잡이로 매도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친일이라는 불행한 시대의 판도라 상자’를 열 자격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상자를 열 때 ‘가난,질병,전쟁,거짓말,고통,슬픔,미움,사기’ 등이 상대방에게만 붙으리라고 예상했다면 그 시대에 대한 공부를 한참 더 해야 한다.그런 후 판도라 상자를 열어야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은,그것 때문에 모든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열어야 하는 ‘미래를 향한 희망’을 우리 사회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16) 서귀포 보목항의 자리잡이배 테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16) 서귀포 보목항의 자리잡이배 테우

    1985년 10월4일,제주도 화북의 해신당에서는 도항제(渡航祭)가 열렸다.‘고대 제주항로 테우 조사단’이 화북을 출발했다.원초적인 고기잡이 배 테우를 복원하여 옛 뱃길에 도전함으로써 ‘한반도~제주도’의 고대 항로를 규명해보려는 시도였다.탐라와 육지부의 교류경로,해로 변천사와 유배길 조사도 이루어졌으니,배이름도 격에 맞게 ‘물마루’로 명명되었다.노르웨이 탐험가 T 헤위에르달이 남미에서 폴리네시아군도를 향하여 전통배를 타고 떠난 콘티키(Kontiki)호의 대탐험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테우를 활용한 최초의 모험이리라.물마루호는 서귀포시 보목동에 남아 있던 여섯척 중에서 선발되었다. ●테우와 자리잡이의 원조, 보목동 8월 중순 제주도를 찾아,‘서귀포칠십리 바다사랑회’를 이끌면서 수중탐사와 환경보존에 애쓰는 이원석 회장에게 테우와 자리 조사 안내를 부탁하였더니 약속이나 한 듯 보목동으로 이끈다.보목동이야말로 테우와 자리잡이의 원조이기 때문.대부분의 제주도 포구에서 테우로 자리를 잡아왔겠지만 보목만큼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보목에서는 매년 테우로 자리를 잡는 ‘자리돔큰잔치’를 열어왔다.보목의 자리돔큰잔치는 관광객은 물론이고 인근 주민들도 사라져간 테우가 그리워서라도 몰려든단다.청년들의 보존 움직임도 활발해서 ‘보목섶섬 수중환경보호지킴이’(회장 강대환)를 조직하여 테우도 복원하고 전통어법 재현에도 힘쓰고 있다.덕분에 보목동에 가면 언제든지 테우를 볼 수 있다.그러나 한라산의 귀한 구상나무로 만들던 테우는 사라졌고 일본산 삼나무 테우들로 대체되어 조금은 안타깝다. 몇년 전의 일.제주도민들이 감귤을 들고서 북한을 집단방문한 적이 있었다.일찍이 북에 정착하게 된 제주 출신 노인 한 분을 만나게 되어 말문을 트다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무언가를 물었다고 한다.그런데 노인은 허다한 먹을거리를 제치고 ‘자리젓이 그립다.’고 하였다.초년의 입맛은 일생을 간다고 하였으니 자리젓의 아른한 향취가 50년 넘게 이어진 셈이다. 사실 ‘자리강회’,‘자리물회’,‘자리구이’ ‘자리젓갈’ 등 자리 없는 제주도 식단은 왠지 빈자리 같다.활기 넘치는 강진국 마을회장은 우리 일행에게 “자리를 좋아한다니 절반은 제주사람으로 인정해 줍세.”라고 너스레를 놓았다.자리를 모르고서 제주도 먹을거리를 논하지 말지어다! ●고향을 지키는 고기, 그래서 이름도 ‘자리’ 오키나와에서 한반도 남해안 일부에까지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아열대성 자리는 붙박이로 한군데서 일생을 마친다.서귀포 외돌개에서 보목 앞의 섶섬에 이르는 난류대를 특히 좋아한다.보목에서는 ‘겨울에 눈이 오면 개가 죽는다.’는 속담도 있다.모든 물고기가 자유롭게 먼바다를 나돌고,모든 새가 먼하늘을 나돌 것 같지만 그런 상상은 시나 노래에서나 가능하다.자리에게도 엄연히 따스한 집이 있고 그리운 고향이 있다.자리는 자신이 태어난 따스한 곳에서 가능한 한 떠나질 않는다.그래서 이름도 ‘자리’다. 보목에서는 앞의 섶섬 동쪽에 동군자리,서쪽에 서군자리,서쪽 해변에 리알자리,지귀섬의 자귀자리,쇠소각 냇물이 흘러나오는 쇠소각자리 등의 ‘자리밭’이 유명하다.어민들은 이들 자리밭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테우를 들이밀어 자리를 낚는다.경계없는 바다같지만 엄연히 바다밭이 경계를 가른다.섶섬 주변에서는 섬그늘에 모여든다면,민물이 흘러들어 기수대를 형성하는 쇠소각에서는 감미로운 민물을 마시려고 몰려든다.그래서 똑같은 바다이지만 매양 동일한 바다는 없다.문전옥답만 강조하는 육지중심 사고와 다르게 기름진 바다밭의 해양중심 사고로 바라본다면 바다마다 전혀 다른 색깔을 연출하며 다가올 수밖에 없다. 밭이 다르면 같은 배추종자도 맛이 다르기 마련.보목과 우도의 자리가 같을 수 없으며,고산의 자리는 성산의 자리와 다르다.같은 보목 내에서도 여(암초)의 상태에 따라 자리의 색감과 생김새,심지어 맛까지 다르다.절기에 따라서도 알이 찬 알찬자리,자잘한 쉬자리,산란하고 난 다음에 잡히는 거죽자리 등등 이름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조류가 센 곳에서 노는 가파도자리는 뼈가 굵어 물회용에는 어울리지 않아 구이용에 적합하다.뼈가 부드럽고 맛이 고소한 보목의 자리는 구이보다도 물회나 강회에 어울리니 같은 제주도 내에서도 제각각인 셈이다. ●더위 푸는 덴 물회, 술안주엔 구이 얼마전 경남 삼천포에서 자리구이를 맛보았다.횟집 주인 왈,“수온이 높아지니 여기까지 자리가 찾아드네요.”라고 했다.이제 자리는 차츰 북상을 하여 남해 해안가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한 것 같은데 남해안의 자리가 어떤 격식을 갖추고 있는가는 아직 감이 덜 잡힌다. 자리는 먹는 취향과 장소,시간에 따라서 맛도 다르다.복중의 더위풀이에는 시원한 자리물회가 그만인데 자리구이는 술안주로도 맞춤이다.자리젓국은 멸치젓과 더불어 제주민이 가장 보편적으로 먹는 젓갈.그런데 제주도 바깥에서는 똑같은 자리물회라도 당최 제맛이 나지 않는다.독특한 향을 내는 제피잎을 잘게 썰어넣어야 국물이 한결 시원해지는데 싱싱한 제피잎을 구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독특한 맛을 내는 제피잎 없는 자리물회는 사실 정통식이 못된다. 한때 구두미포구,서래포구,큰개머리,배개포구 등 전통적인 포구에서 25척에 이르는 테우들이 국자같이 생긴 국자사둘로 자리를 잡았다.자리만으로도 충분히 생계가 유지되었다.1명이 수경으로 물밑을 감시하면 2명이 그물을 드리워 조류에 떠들어오는 자리를 낚았다.배를 타지 않고 갯바다밭의 ‘덕’에서 자리를 잡는 덕자리사둘,동그란 모양의 사둘을 도르래의 힘으로 드리우거나 올리며 낚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어법이었던 동고락사둘도 행해졌다. ●자리잡이·해초 채취… 전천후 다목적 배 그러나 GPS로 바뀌면서 배도 발동선으로 바뀌었으니 전통 테우 자리잡이도 한폭의 사진으로만 남은 셈이다.‘자리 삽서(사세요).’라고 외치며 마을길을 나다니던 아낙들의 외침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전통어법은 사라졌으나 자리잡이의 경제적 이득은 여전히 높아서 지금도 보목의 살림살이를 살찌우게 한다. 테우는 자리잡이에만 쓰였던 배가 아니다.전천후,다목적이었으니 해초 채취에도 요긴했다.바다마을 사람들은 기름진 해초 없이는 푸석푸석한 화산토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해초 채취에 테우가 더할나위 없이 요긴했으니 해초를 그득 싣고 돌아오는 풍경 역시 화학비료에 떠밀려서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테우는 물마루호의 실험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제주민의 해상교통에 절대적인 수단이었다.탐라의 고대 대외교류도 테우에 의존하였다.삼국지동이전에 이르길,“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물건을 사고판다.”고 하였으니,테우를 이용한 교역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독일인 겐테(S.Genthe)는 ‘제주도탐험과 동해 중국에서의 표류’란 표류기에서,테우의 위력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어떤 파도에도 끄떡없는 이음새 영접하기 위해 보낸 배는 이상한 배였다.보트도 아니고,카누나 속을 파낸 통나무도 아니었다.뱃전이나 배의 구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거대한 뗏목이었다.거센 파도라는 어쩔 도리 없는 조건 때문에 적응법칙에 따라,예컨대 동인도의 마드라스 해안의 파도 때문에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게,기상천외의 물건이 만들어졌음이 이내 밝혀졌다.거칠고 격렬하게 출렁이며 크고 육중하게 굴러오는 사나운 파도가 끊임없이 그 선박을 덮쳤다.막힌 보트라면 금방 물이 가득 차서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튼튼한 이음매의 큼직한 틈새가 있어서 부딪치는 파도의 위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큼직한 통나무들로 엮어 만든 듬성듬성한 이 선대(船臺)는 어떤 경우에도 물이 차서 뒤집힐 리가 없었다. 제주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섬이다.중요 물자는 배로 움직였다.전통시대에 일주도로·관통도로가 없었음은 당연한 일.‘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도 광복 당시의 빈약한 교통로를 이렇게 말했다.“ 섬을 둘러싼 좁은 도로가 있었을 뿐이다.1940년대 당시 제주시에서 섬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가는 도로는 부설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사정은 더욱 어려웠으리라. ●맥 잇는 마을 있어 그나마 위안 테우는 사라졌어도 테우를 복원해서 끝내 이어가겠다는 마을이 있음은 일말의 위안이 된다.신혼여행객도 태우고,문화관광특구도 만들어 당찬 마을로 가꾸겠다는 결의에 가득찬 것을 보니,법고창신(法古創新)의 의연한 길을 모색하는 듯하여 감개무량이다.비록 배는 낡고 덜 효율적이지만 전통을 살려서 미래의 바다로 가꾸어 나간다는 바다살림의 의지는 바로 문화적 종다원성을 지키려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해변가로 유별나게 솟구친 가파른 ‘제지기오름’에 오르니 보목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절대보호구역인 섶섬의 자연경관적 가치에 관해서는 무엇을 더 논하랴.관광객에게는 눈요기에 불과한 섶섬이지만 자리돔에게는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붙박이 자리’임을 애써 기록하고 돌아온다.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동분서주하면서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는 도시민에게 섶섬의 자리들은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만 같다.
  • [임영숙 칼럼] 그럼에도 과거사 규명해야

    [임영숙 칼럼] 그럼에도 과거사 규명해야

    열린우리당의 신기남의원에 이어 이미경의원의 아버지가 일제시대 헌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신 의원이 부친의 친일경력과 관련된 부적절한 처신으로 의장직을 사퇴한 이후 겨우 일주일만이다.인터넷에는 또 다른 의원들에 관한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정치인의 가족사 들추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런 상황은 과거사 규명 논의가 시작되면서 이미 우려됐던 것이다.경제가 어려운데,미래를 보고 달리기에도 바쁜데,과거사에 매달릴 시간이 있느냐는 비판도 많다. 그럼에도 과거 청산의 당위성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한다.지금 과거사 규명작업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친일문제 등 왜곡된 과거사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과거사 규명은 밀린 숙제인 셈이다. 경제살리기가 더 급하다는 주장은 광복후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는 과정에서도 나왔다.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위험하고 우리 경제에 주름살을 줄 것이라는 우려는 지난해 여름 불법 대선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나왔다.그러나 반민특위의 해체로 친일청산 작업이 좌절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천추의 한’이 됐고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한국 정치의 투명화를 앞당겼다. 이제 서둘러야 할 일은 과거사규명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이 위원회의 구성방식,권한,조사범위 등을 둘러싸고 여야가 아직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위원회 설치 원칙이 교집합으로 추출된 만큼 마냥 줄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조사범위도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는 부분부터 시작하면서 계속 논의해 가면 될 것이다. 위원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현실적 접근이 바람직하다고 본다.즉 과거사 청산의 성공적 사례로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염두에 두는 것은 환상이 될 수 있다.이 위원회를 탄생시키고 이끈 만델라 대통령이나 투투 주교처럼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도덕성을 인정 받고 존경을 받는가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참여정부는 3당 합당을 한 YS의 문민정부나 DJP연합으로 근본적 한계를 지녔던 국민의정부보다 과거사 문제를 다루기에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한나라당은 과거사 규명이 박근혜 대표를 겨냥한 정략이라고 의심한다. 그런 점에서 여야 모두 미국의 이른바 ‘9·11조사위원회’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정식명칭이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 국가조사위원회’인 이 위원회 설치를 야당인 민주당이 제안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그러나 여론에 밀려 공화·민주 양당 합동 발의로 위원회 설치법이 상원을 통과했다.의회 밖 독립기구로 설치된 위원회는 현직 정치인을 제외한 비당파적 인물 10명으로 구성됐다.양당의 상원 의석 비율대로 5명씩 동수로 추천한 것이다.위원회 산하에는 각계전문가 80여명이 상근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위원회가 전·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19개월의 조사끝에 최종보고서를 지난 7월 발표했을 때 9·11테러 희생자 유족들은 대체로 만족했고 부시 대통령은 ‘매우 건설적’이라고 평가했다. 과거사 규명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여야가 상대방 흠집내기 등 정략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조사활동이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위원회가 어떻게 구성되든 독립적이면서도 강력한 조사권한과 충분한 예산의 뒷받침을 받아야 할 것이다.한나라당의 박 대표도 과거사 규명에 대범하게 참여하는 것이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적인 유산을 청산하고 자신의 정치력을 새롭게 인정 받는 기회가 될 수 있다.한 개인이든,민족이든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극복함으로써 성숙할 수 있다. 주필 ysi@seoul.co.kr
  • 좌파 독립운동가 포상 ‘물꼬’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를 세우려는 세력과 미국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이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김구,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통합세력은 패배하고 분열세력들이 득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4월 한 주간지에 기고했던 내용이다.노 대통령은 같은 해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훈 청원서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으나,서훈은 2002년에 이어 올해에도 거부됐다. 친일행적이 있는 자,광복 이후 공산주의 활동을 한 자는 제외한다는 국가보훈처의 내부지침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여운형 선생은 해방전 독립운동을 했으나 1947년 숨지기 전까지 노동인민당을 창당하는 등 좌익활동을 했다. 노 대통령은 이념의 벽을 넘어 과거사 진상규명 의지를 밝히면서 “프랑스 같은 나라는 불과 4∼5년 동안 30만명이 정부로부터 레지스탕스로 공식 인정받고 포상을 받았지만 우리는 1만명 밖에 포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했다.이같이 포상자가 적은 까닭이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하다. 이에 따라 과거사 진상규명의 폭과 범위는 이념의 벽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노 대통령은 이와 함께 두가지 메시지를 던졌다.정쟁거리로 삼을 생각이 없다는 언급은 야당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노 대통령은 “명색이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이런 중차대한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다른 메시지는 경제를 핑계댄 발목잡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노 대통령은 반민특위 같은 때도 경제와 안보를 핑계대서 회피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86∼88년 어수선한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두자릿수 경제성장을 했다고 강조했다.이는 ‘과거사보다는 경제살리기’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당내 일부 의원 등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盧대통령 “좌익 독립운동도 사실대로 규명”

    盧대통령 “좌익 독립운동도 사실대로 규명”

    노무현 대통령은 25일 “독립운동 시기에 선열들이 가졌던 이념과 사상이 어떤 평가를 받든 간에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있는 사실 그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김우전 광복회장 등 독립유공자와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한 자리에서 “좌우대립의 비극적인 역사 때문에 독립운동사 한쪽은 일부러 알면서도 묻어두고 있는 측면이 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노 대통령의 이같은 언급은 몽양 여운형 선생 등이 사회주의 운동전력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점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이에 따라 앞으로 사회주의 운동 경력을 가진 독립운동가에 대한 진실규명과 독립운동가 포상작업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최근 논란이 됐던 여운형의 독립운동 여부에 대한 재조명도 하나의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기본 방향을 언급한 것이지 구체적 사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노 대통령은 “내년이 광복 60돌인데 포상마저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라며 “지금부터라도 마음먹고 챙겨서 역사적 사실을 다 발굴하고 공로있던 분들,특별히 희생·헌신하신 분들에게 반드시 포상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노 대통령은 “포상 대상이 아니더라도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서 공식화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겠다.”고 약속했다. 노 대통령은 “정권은 유한하지만 이같은 일은 고귀하고 소중한 일로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임기 동안 지속적으로 역사를 찾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토대를 만들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진상 규명을)정쟁거리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명색이 대통령인 사람이 이런 중차대한 일을 꺼내서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과거사 진상규명은 국가적 사업이기 때문에 몇개 정부기관이 스스로 나서서 나름대로 다 밝히고 정리했다고 할 일은 아닌 것 같다.”면서 “국회에서 만든 새로운 기구에서 조사를 하면 그 조사가 원활하게 되도록 충분히 준비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해서 일의 효율성을 높여 나가도록 하겠다.”고 정부기관·부처 차원의 과거사 규명작업의 방향을 제시했다. 노 대통령은 “반민특위 좌절의 역사로 시대를 거꾸로 살아온 사람들이 득세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냉소하는 역사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한 행위,역사적 범죄는 꼭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시론] 과거 청산과 인권/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시론] 과거 청산과 인권/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과거사를 둘러싼 논쟁이 정계를 시끄럽게 달구고 있다.과거 청산의 본질은 과거의 일을 정확히 조사하여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일각에서는 국가가 나서지 말고 학계가 이 일을 맡으라고 하지만,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과거사’란 지금까지의 보통의 방법으로는 밝힐 수 없었던 일들,우리 역사의 일부를 구성하면서도 역사학적으로는 규명할 수 없었던 일들을 말한다.규명할 수 없었던 이유는,누구나 알듯이,진실 규명이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진실 규명을 방해한 것은 권력이다.일제시대의 친일반민족행위는 광복 후 그와 관련된 집단이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좌우익의 이념대립과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학살이나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은 당시의 집권세력이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규명할 수 없었다.방해받지 말고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과거 청산의 시작이므로,이 일은 정치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계만이 과거사 청산을 감당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작업이 학문 영역에 속하는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학계는 진실 규명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과거 청산은 학문적 대상일 뿐 아니라 민족적 대상이고 정치적 대상이다.과거사는 역사의 영역에 속하지만,정계가 이토록 시끄러운 것은 과거 청산이 정치적 행위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그렇다.과거 청산은 현재의 정치권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청산하려는 의미에서 정치적 행위이다. 그러나 과거 청산을 단지 정치 행위에 머물게 해서는 그 의미가 반감된다.과거 청산은 기본적으로 인권의 차원에 속하는 일이다.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고 살해당한 자들에 관한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의무이자 역사적 책무이며,무엇보다도 인권의 존귀함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본다면,과거 청산은 당면 과제임이 분명하다.이제 어떻게 조사하고 평가하느냐 하는 방법이 문제로 남아 있다.정치권은 국회 밖에 독립기구를 설치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그러나 국가기구로 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다시 대립하고 있다.기능 수행의 면에서 볼 때,누구로부터도 간섭을 받지 않고 중립적 입장에서 실사구시의 태도로 조사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는 국가기구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국회와 정부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고 행·재정적 지원만 하면 된다. 조사 범위도 논란 대상이지만,그것은 과거 청산의 목적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다.과거 청산의 목적이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반인간적 행위와 반민족적 행위를 가리는 것이므로,그 대상은 스스로 명확해진다.가까운 시기부터 본다면,고문과 치사 등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각종 인권 유린 행위,좌우 대립시기와 한국전쟁 과정에서의 집단 학살 등 반인간적 행위,그리고 일제시대의 친일과 반민족행위가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친북용공행위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그 행위는 인권과 직접 관련된 사항이 아니다.오히려 친북용공행위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사건이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그것은 대개 위의 세 범주에 포함된다. 이제 과거사 청산은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물결을 타고 있다.광복 이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다.이 기회를 살려 과거의 끈을 과감하게 단절하고,진실의 발판 위에 민족 정기와 화해의 기치를 높이 세우고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세상으로 나아가자. 안병우 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 이승만정권 칼날에 희생된 농민들

    이승만정권 칼날에 희생된 농민들

    KBS 1TV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 ‘열린 채널’은 27일 오후 11시20분 ‘잊어버린 이름 국민보도연맹’편을 방송한다.이 프로그램은 지난 4월 제작자인 구자환씨가 경남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취재를 계기로 지역의 보도연맹 학살지 발굴과 유족들의 증언,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다. ‘국민보도연맹’은 광복 후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한 관변 단체.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명에 달했다.그러나 회원 대부분은 사상과는 전혀 상관없이 농기구를 준다는 말에 속아 가입한 농민들이었다.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무차별 검속과 즉결처분을 단행하는 등 최초의 집단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현재 인터넷방송국 ‘민중의 소리’ 경남지국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구자환씨는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계곡이 당시 피해자들의 피와 한이 맺힌 장소라는 사실을 현지 지역민 대부분이 모르고 있었다.”면서 “국민보도연맹 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조명해 국민들에게 잊혀진 역사의 한 부분을 되돌아보게 하고 싶었다.”고 제작 동기를 밝혔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원혜영 “쓸어담기식 포괄조사 불필요하다”

    원혜영 “쓸어담기식 포괄조사 불필요하다”

    열린우리당 과거사 진상규명 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은 원혜영 의원은 24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친북·용공세력’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한 것과 관련,“원론적으로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원칙적인 수용 의사를 밝혔다. 원 의원은 2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협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마냥 배타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박정희 전 대통령도 남로당 핵심 당원이었는데,조사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 의원은 과거사 문제를 다뤄나갈 ‘로드맵’에 대해 묻자 “모법으로 ‘과거사 정리를 위한 포괄 기본법’(가칭)을 만들어 조사의 원칙 등을 정리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이미 활동이 완료됐거나,상당히 독자적으로 진척된 조직의 활동을 중단시키고,포괄해서 과거사특위로 모두 쓸어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원 의원의 구상은 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포괄적이고,체계적인 과거사 진상규명을 국회에 요청한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원 의원은 이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가 통합적이고 전면적이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제기했는데,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고 소신을 피력했다.그는 “이미 많은 문제가 해결됐다.”고 전제하면서 “친일문제는 친일진상규명법을 개정함으로써 사실상 광복 이전은 다 끝났고,현대사의 각종 의문사 및 인권침해는 1·2기 의문사진상조사위를 통해 대부분 밝혀져 과거사특위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원 의원은 또 “친일문제는 9월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을 통해 독자적으로 진행하고,3기 의문사진상 위원회 발족은 과거사특위 발족과 병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9월22일 친일진상규명법의 발효를 앞두고 개정안을 제출하는 시기가 과거사특위 발족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으로는 민생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여당이 50∼60년 전의 ‘과거사’에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냐는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느껴졌다.그는 그러나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친일을 포함해 유신독재 시절까지 과거사 정리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약 60%가 필요성을 느낀다고 답했다.”면서 “이같은 국민적 정서 때문에 한나라당도 열린우리당의 제안을 무시하고 가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과거사 시대구분에 대해선 “광복 이전 일본 제국주의 강점시대,6·25 한국전쟁을 포함한 광복 이후,5·16군사쿠데타 이후 등 3단계로 나눌 것”이라고 구상을 밝혔다.조사 대상에 대해서는 개개의 사건을 거론하지 않고 “집단적이고,명백히 증거가 있으며 고문 등으로 목숨을 잃었던 사건들이 포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빨갱이 사건’이라면 여순반란·인혁당·조봉암 암살 사건 등이 떠오르는데,여순반란 사건을 제외하면 문제가 안 되겠느냐.”고 덧붙였다. 가족들이 탄원해 올 경우 ‘김형욱 실종사건’이나,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주장하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도 조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원 의원은 “과거사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피해자가 속출할 수도 있다.”면서 신기남 전 의장의 낙마를 그 사례로 꼽았다. 그는 “신 전 의장 선친의 친일행적이 사적인 영역에 남아 있다가,신 전 의장도 모르는 사실들이 느닷없이 밝혀져 낙마한 것 아니냐.그런 점에서 신 의장도 피해자다.”고 주장했다.그는 “사석에서 신 의장은 아버지가 공비 토벌대장이었다고 해서 으레 일제쪽 경력이 있겠거니 짐작했는데,정작 본인은 몰랐던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원 의원은 “과거사 진상규명은 미래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면서 “한·중·일 협력이 중요한 시대지만,일본은 신사참배하고,중국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니까 국민 감정이 악화돼 협력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한나라당 박 대표에 대해선 “유신 때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정치행위에 관련된 부분은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사진 오정식기자 oosing@seoul.co.kr
  • [씨줄날줄] 중국의 북한 때리기/오풍연 논설위원

    ‘조·중(朝中)친선’에 난기류가 흐르는 것일까.북한과 중국은 광복 이후 지금까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실제로 중국은 김일성 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자 세습체제를 인정하고 이들을 극진히 대접해 왔다.노동신문 등 북한 언론매체들도 “전통적인 조·중친선은 두 나라 영도자들이 마련한 불패의 친선”이라며 “대를 이어 공고히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당과 정부의 시종일관한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2003년 3월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가 들어선 뒤 상황변화가 조금씩 감지됐다.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으로부터 권력을 승계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대내적으로는 ‘친민정치’(親民政治),대외적으로는 ‘평화적 발전’(和平堀起)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북·중간 이견이 발생할 소지가 커진 것이다.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에 반대하면서 핵문제를 북한이 주장해 온 북·미 양자대화가 아닌 6자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목도 그렇다.최근 중국 내에서는 지난 1961년 맺은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 중 자동군사개입조항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압박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김 국방위원장이 지난 4월19∼21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듯하다.앞서 2000년 5월과 2001년 1월 중국 방문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예고했었다.이번 세 번째 방문은 중국 신지도부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던 것 같다.그가 후진타오 주석,장쩌민 중앙군사위주석,원자바오(溫家寶) 총리,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잇따라 면담한 데서도 읽혀지고 있다.중국 최고지도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급기야는 북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중국 국책연구소의 논문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톈진(天津) 사회과학연구원 왕중원(王忠文)은 “북한이 세습통치를 위해 인민을 박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면서 북한의 핵개발 등을 조목조목 비판한 뒤 “중국은 북한을 지지할 책임이 없다.”고도 말했다.중국마저 등을 돌린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완전 외톨이가 될 것이다.남북 당국간 대화를 조속히 재개하고,6자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만이 북한의 탈출구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與 “5000년만의 첫 기회” 강경

    與 “5000년만의 첫 기회” 강경

    과거사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강공 기류가 심상치 않다.선친 문제로 신기남 전 의장이 물러나면서 예견된 일이지만 수위(水位)가 예상을 웃돈다.약속이나 한 듯 주요 당직자들이 앞다퉈 과거사 규명을 외치고 나섰다. 20일 열린우리당에선 천정배 원내대표의 발언에 나타나듯이 ‘5000년 역사에서 첫 기회’라고 과거사 청산의 의미를 한껏 부여하면서 강공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이부영의장 “軍프락치사건도 조사” 이부영 의장은 취임 첫날인 이날 ‘과거사 규명’과 ‘언론개혁’을 자신의 ‘과제’로 내세웠다.박정희 전 대통령을 ‘군 프락치 총책’‘변신과 배신의 달인’이라고 맹비난하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압박하기도 했다. 이 의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박 전 대통령은 초등학교 훈도(교사)를 하다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 뒤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 육사에 들어가 일본군 중위라는 엘리트 장교를 했다.”면서 “이후 변신을 해서 광복군 제4지대에 합류했다가 또다시 공산주의자로 변신,군내 프락치 총책으로 있다가 김창룡 방첩대장에게 붙잡히자 자신이 포섭했던 동료들의 이름을 모두 불어 죽게 한 뒤 자신은 풀려났다.”고 주장했다. ●박前대통령 맹비난… 朴대표 압박 그는 “박 전 대통령 한 분 때문에 과거 청산을 막으려는 것이 과연 온당하냐.한 나라의 리더가 변신과 배신을 통해 많은 사람을 희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대통령에) 오른 것이 옳은 일인지,앞으로 그런 사람이 다시 등장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얘기해 보자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의장은 동아일보 기자 시절 해직된 뒤 재야 운동권으로 지내던 전력을 상기시키며 “나는 우리의 얼룩진 과거사가 온 몸에 상처로 남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평가했다. 오후 중앙위원회의에 참석한 신기남 전 의장은 “정치인은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하며,연좌제는 법에 없지만 도덕의 세계,정치의 세계에서는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자신의 사퇴가 선친의 친일 행적에 책임을 지는 성격임을 분명히 한 것이자,박근혜 대표를 최대한 압박하려는 의도로 비쳐진다. 천 원내대표 등 당 중진들은 이 의장의 강경 발언에 ‘힘 실어주기’를 계속했다.과거사에 보다 ‘올인’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내부적으론 당의장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계파간 갈등을 봉합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불교계 조·태분쟁 재연되나

    ‘불교계의 조·태분쟁 재연되나?’ 최근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에 있는 사찰 봉서사에서 조계종과 태고종 승려들이 사찰 점유를 둘러싸고 충돌해 조(조계종)·태(태고종)분쟁이 재발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일고 있다.봉서사는 조계종과 태고종 양 종단의 승려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두 살림을 해오던 기형적인 사찰이다. 태고종측은 지난 14일 밤 10시쯤 조계종 스님 30여명과 민간인 20여명이 봉서사에 무단 침입하여 대웅전 등 건물 일부를 파괴한 채 무단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계종측은 “봉서사는 엄연히 조계종단이 임명한 광복 스님이 주지로 있는 사찰로,태고종측 스님들이 지난 13일 먼저 무단침입해 사찰을 접수(점거)한 것을 광복 스님을 비롯한 신도들이 밀어내고 원상회복한 것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소유권과 사찰 운영을 각각 태고종과 조계종이 나눠 행사하고 있어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이번 분규가 다른 사찰로 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봉서사의 경우 본 사찰은 현 주지 광복 스님을 중심으로 한 조계종이 운영하고 있으며,봉서사와 길을 마주하고 있는 태고종 영산작법 교육관에는 태고종측 승려들이 거주하는 가운데 양측 사이에 사찰 소유·운영과 관련한 소송이 진행 중이었다. 현재 봉서사처럼 소유권과 운영권이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나뉘어 있는 사찰은 전국에 걸쳐 60여곳.지난 1962년 현재의 통합종단(조계종)이 출범하면서 분종한 태고종 스님들이 기존에 점유하고 있던 사찰을 종전대로 운영해 왔지만 그 소유권은 조계종에 있는 모순 때문에 문제를 빚고 있는 사찰들이다.그 대표적인 사찰이 전남 순천 선암사와 서울 신촌의 봉원사.선암사와 봉원사는 모두 법원에서 조계종의 소유권을 인정받았으나 현재 태고종이 운영하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관계자는 “봉서사와 비슷한 성격의 사찰들에서는 언제든지 분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잠재한다.”면서 “그러나 양 종단이 전향적인 입장을 갖고 한걸음씩 양보해 통합 재단이사회 등을 구성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다음핫이슈 토론] 과거사특위 찬48.5%·반48.8%

    [다음핫이슈 토론] 과거사특위 찬48.5%·반48.8%

    |미디어다음 정환석기자|노무현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회내 과거사진상규명특위’ 설치를 제안한 것에 대해 네티즌들의 반응은 찬성과 반대로 팽팽하게 갈렸다.핫이슈토론에서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국회내 과거사진상규명특위’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총 참여자 1만1468명중 48.8%(5597명)가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반면 48.5%(5563명)는 찬성 의견을 보였다. 찬성측 네티즌들은 “과거사 진상규명은 누구를 처벌하고,보복하려는 게 아니라 적절한 보상과 명예회복 등으로 국민을 화해시키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것”이라며 “경제를 건설하는 일과 민족정신을 세우는 일은 별개가 아니라 동시에 추진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반대측은 “노 대통령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국내의 과거사 들추기에만 나서고 있다.”며 “시급한 경제,역사 문제에 매진해 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과거사 청산 방침에 동참하기로 한 가운데 한나라당은 과거사의 포괄적 조사가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여당과 의견을 같이했지만 형식과 범위 등에 이견을 보이고 있어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 100자 의견 ●국민의 단합 대한민국님 일제 36년 동안 살아 남으려면 앞잡이를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오십보백보의 차이거늘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역사에 묻어두고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국력을 기르는 것이 우선이다. ●과연 다 끝난 과거의 일일까??? 바이러스님 친일파의 자식들이 아비의 손에 죽어간 민중들의 핏값으로 얻어진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호의호식하며 양당의 대표라는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거나 군림하고 있는데.다 끝난 일이라고? ●과거 정리와 경제는 dugylee님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다.지난 50년간 우리가 정리하지 못한 것은 청산 대상자의 힘이 더 컸기 때문이다.이제는 청산할 수 있는 국민 역량이 향상되어 가능하다. ●미래 창조를 위한 정치를… mjh님 과거사를 들춰내어 국론분열을 유발하기보다는 수출증대를 통한 경제살리기 운동에 적극 앞장서 훌륭한 대통령이 되어주시길.
  • [Seoulites]서울의 鎭山 삼각산 제이름 찾기 본궤도

    [Seoulites]서울의 鎭山 삼각산 제이름 찾기 본궤도

    ‘북한산’으로 불리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삼각산’이 김현풍(63) 서울 강북구청장에 의해 제 이름을 찾아가고 있다. 초선의 김 구청장은 2002년 취임과 동시에 ‘삼각산 이름찾기’를 주장하며 차근차근,그러나 꾸준히 자료를 모으고 문화재청 등 관계기관에 북한산의 개명을 요구하고 있다.일제에 의해 잃어버린 우리의 문화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김 구청장은 “고려때부터 불려오던 삼각산이란 명칭이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잃어버렸다.”며 “산이름,지명 등을 되찾는 것은 우리 문화를 찾는 첫 걸음이다.”라고 말했다. ●인수봉,만경대,백운대는 국가 문화재로 김 구청장은 지난해 문화재청에 강북구에 위치한 북한산의 3대 봉우리인 백운대(836.5m)·인수봉(810.5m)·만경대(799.5m) 일대 27만 3000㎡를 국가지정문화재로 보호해 줄것을 요청해 명승 제10호로 지정받았다.이와 더불어 이 일대를 ‘삼각산’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공식화하는 데도 성공했다.따라서 종전 북한산의 3대 봉우리는 공식적으로는 ‘삼각산에 위치한 봉우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됐다. 김 구청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건설교통부,서울시 등에 북한산 전체를 원래의 이름인 삼각산으로 개명해 줄 것을 줄기차게 건의하고 있다. ●지명위원회 검토유보 김 구청장은 지난 3월11일 서울시지명위원회(위원장 원세훈 행정1부시장)에 ‘북한산 명칭을 삼각산으로 변경해줄 것’을 요청했다.10명의 심의위원들은 “파급효과가 커 신중히 검토해야 된다.”는 이유를 들어 심도있는 논의 자체를 유보했다. 만약 김구청장의 제안이 지명위원회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같은 산자락에 위치한 인근의 경기도 고양시와 협의가 필요한 만큼 시·도지사협의회에서도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이 과정을 거치면 개명작업은 건교부의 중앙지명위원회로 넘어가 최종 결정된다. 김 구청장은 개명작업이 최소 1∼2년은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자료확보 등 체계적인 준비작업을 펼치고 있다. 서울시 지명위원회는 “북한산이란 이름이 반드시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 수 도 있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하지만 김 구청장은 “북한산이란 명칭이 일제시대(1912년)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지명을 개정하는 와중에 생긴 출처불명의 지명인데도 광복이후 정부가 북한산국립공원이란 명칭을 사용하면서 삼각산이 북한산으로 불리게 됐다.”고 주장한다. ●학술대회 준비등 철저한 고증 이에 따라 김구청장은 보다 정확한 역사적 사료를 찾고 학술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조만간 ‘삼각산 학술대회(가칭)’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 현재까지 확보된 역사적 사료에는 ‘고려사’ 서희전에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라는 표현이 있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여지도서’,‘증보문헌비고’,‘북한지’,‘대동지지’ 등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한결같이 삼각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 구청장은 “현재에도 경동·서울고 등 서울지역 46개교의 교가에도 북한산이 아닌 삼각산으로 불리고 있다.”며 흥미로워했다. ●내부문서 등 각종 기록 삼각산으로 표기 김 구청장은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청내 내부문서나 각종 기록,주민 행사 등에 ‘삼각산’으로 표기토록 하고 있다.구민을 대상으로 ‘삼각산 부르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지난 4일부터 오는 10월27일까지 ‘삼각산 해설가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역 고유의 삼각산축제,삼각산 국제산악문화제 등 각종 축제에도 ‘삼각산’이란 명칭을 사용토록 하고 있다.삼각산을 이용한 다양한 문화행사를 통해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지역의 문화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의지다. 김 구청장은 “문화가 역사를 주도하고 경제를 생산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며 “내고장만이 간직한 고유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찾아내고 이를 계승발전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동구기자 yidonggu@seoul.co.kr
  • [메트로 의회]‘독도 지킴이’ 자부심 의정·시민운동 앞장

    [메트로 의회]‘독도 지킴이’ 자부심 의정·시민운동 앞장

    “독도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희망의 땅입니다.” 최재익(49·중랑2) 서울시의회 의원은 의정활동 못지않게 독도 지킴이 역할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2002년 제6대 시의회에 뛰어들기 전부터 독도 관련 시민단체 활동으로 이미 알려졌다. 독도수호 전국연대 대표의장을 맡은 것도 의정활동을 통해 독도 문제를 널리 알리려는 뜻이 담겼다.휴대전화 연결음으로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로 시작하는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를 입력해 놓은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독도를 사랑하는지 엿보게 한다. ●3代 독도로 호적옮기고 ‘이장’ 뽑혀 최 의원이 독도 문제에 관심을 보인 계기는 1999년 1월 국회에서 ‘신 한·일 어업협정’ 체결이 통과된 뒤부터.이 협정으로 독도는 EEZ(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제외되면서 한·일 중간수역에 포함돼 사실상 경제권을 잃게 됐다.일본 정치인들의 ‘독도 소유권’ 망언은 이 때부터 잦아졌다. “정부에선 나름대로 애쓴다고 하지만 외교적 입장이 미묘하다는 이유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민간이라도 나서야 한다는 데 생각이 닿았습니다.” 이에 따라 최 의원은 같은 해 12월30일자로 자신과 부친,아들 등 3대에 걸쳐 가족 6명을 독도의 행정상 주소인 경북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30번지에 상징적인 뜻으로 호적을 옮겼다.이어 이듬해 3월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대한민국 독도향우회’ 창립행사를 가졌다. 한반도 침략에 대한 역사왜곡,교과서 날조,위안부 망언 등 일본 정부의 오만을 꼬집는 규탄대회도 계속해오고 있다.전국 초·중·고교를 돌며 ‘독도 사랑 웅변대회’도 열었다. 그는 지난 2월 ‘독도 이장’으로 뽑힌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독도에 호적을 둔 20세 이상 성인 139명이 투표에 참여해 단순 명예직 이장을 선출한 것이다. 이장이라는 직함이 현실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독도에 대해 우리 국민이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행정력이 미치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현재 독도에 호적을 둔 국민은 830여명이다. ●동료의원과 의기투합 ‘독사모’ 결성 “비록 행자부나 경북도에서 행정적 규정을 들어 끝까지 독도이장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그렇다고 의미가 퇴색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최 의원은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한창일 때 누가 허가해준 것도 아닌 임시정부가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이름뿐일지라도 ‘이장’의 상징성은 크다고 자랑한다.일본을 둘러보니 국민 전체가 ‘독도’에 대해 정신무장이 된 느낌이라는 말도 했다. 최근엔 시의원 30여명을 포섭(?)해 ‘독도사랑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지난 광복절 때는 일본에서도 대표적 진보정당인 사회민주당에 과거사 문제 논의를 위해 만나자는 제의도 해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지난 일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한국과 일본사람이 자주 만나 진솔한 얘기를 많이 나눠야 한다.”면서 말문을 닫았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박근혜 “과거사규명 제대로 하자” 정면승부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과거사진상특위 제의에 대해 말을 아끼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장고(長考)를 마치고 “이왕 할 테면 제대로 해보자.”고 정면 승부를 선언했다. 박 대표는 19일 상임운영위가 시작되자마자 준비된 메모지 1장을 꺼내들었다.그리고는 과거사 문제를 주된 소재로 해서 이례적으로 11분 동안 긴 연설을 했다.작심(作心)의 수위를 읽게 해준 대목이다.박 대표는 이날 여권의 과거사 규명 요구를 조건부로 수용했다.그 ‘조건’으로 조사 대상에 용공과 친북활동도 포함시킬 것을 제시했다.일제 때와 해방정국에서의 좌우대립 문제,광복 이후 친북 활동 등도 규명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장인의 빨치산 전력 논란을 빚은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비쳐졌다.박 대표는 자신을 겨냥한 독화살을 피하지 않겠으니 여권에도 똑같은 수준의 검증을 요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박 대표는 그러면서 “5·16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공(功)은 무엇이고,과(過)는 무엇인지도 모두 따져 보자.”고 강조했다.그동안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해 수비적인 자세를 공격적으로 급선회한 것이다.박 대표의 전격적인 역공에 당 일각에서는 다소 놀라는 기류도 없지 않다.또 다른 한편에서는 현 여권 관계자들 가운데는 본인 또는 가족들이 간첩,월북,빨치산 활동 등에 관계된 인사들이 포함돼 있다는 소문 내지 첩보들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하지만 박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던 비주류측도 환영하고 나서는 등 당내에서는 박 대표의 역공이 힘을 받는 분위기다. 홍준표 의원은 이날 “현명한 결정”이라면서 “과거사 문제를 수세적으로 피해가기보다는 정정당당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고,박 대표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권영세 의원은 “과거사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게 사회적 분위기라면 박 대표의 결단은 현명한 처사”라면서 “그러나 정치적 목적의 역사 왜곡도 우려되는 만큼 객관적이고 공정성 있는 제3의 기구에서 정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씨줄날줄] 赤旗歌/손성진 논설위원

    KBS 1TV ‘미디어포커스’가 북한의 혁명 찬양가인 ‘적기가(赤旗歌)’를 내보내 사과하는 해프닝을 벌였다.외주제작업체의 실수로 넘기기에는 너무 어이없는 일이다. ‘적기가’를 실제 들어보면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의문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민경찬 교수가 ‘미디어 오늘’에 실은 글을 보면 풀린다.민 교수가 설명한 대로 적기가는 중학생 때쯤 불렀던 이라는 ‘소나무’와 리듬이 흡사하다.‘소나무’는 현행 중학교 음악교과서에도 ‘전나무’라는 원제목으로 수록된 독일 민요다. 어떻게 이 노래가 북한의 혁명가요가 됐을까.민 교수에 따르면 ‘전나무’를 영국에서 ‘레드 플래그(The Red Flag)’라는 노동가요로 고쳐서 불렀으며 이것을 일본인이 ‘아카하타노 우타(赤旗の歌)’라는 민중혁명가로 번안해서 불렀다고 한다.가사는 1889년 영국의 사회주의자인 짐 코넬이 만들었다.이후 이 노래는 대표적인 공산혁명 투쟁가가 돼 세계에 보급됐다.1945년 8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대승했을 때 영국 하원에서 불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 노래가 일본을 거쳐서 북한 지역과 만주에 유포된 것은 1930년대로 빨치산들이 ‘레드 플래그’를 옮긴 ‘아카하타노 우타’의 가사를 그대로 번역해 불렀다.광복 이후 좌우가 충돌했던 남쪽에서도 널리 불려졌지만 정부 수립 이후 금지곡이 됐다.북한에서는 6·25전쟁 때 인민군의 군가로 사용되다 지금은 혁명과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최고의 선동가요가 됐다. 한국 영화 최초로 1000만명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운 영화 실미도에서도 ‘적기가’가 두번 나온다.주인공 인찬이 강간하던 동료를 죽이고,버스 속에서 자폭하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됐다.북한의 혁명가를 공영방송이 이라크 파병과 관련된 프로그램에서 내보낸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잘못된 일이다.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북한군의 군화에 짓밟혔던 세대에겐 다시 듣기 싫은,비극을 품은 노래이기 때문이다. 손성진 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우리당 ‘원톱’ 시스템으로…辛의장 19일사퇴

    우리당 ‘원톱’ 시스템으로…辛의장 19일사퇴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19일 의장직을 사퇴한다.새 의장은 당헌당규에 따라 다음 순번의 이부영 상임중앙위원이 승계할 것으로 보인다. 선친의 친일(親日)행적 파문에 따른 신 의장의 사퇴로 여야의 과거사 진상규명 공방은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열린우리당은 지금까지 신기남 의장-천정배 원내대표의 ‘투톱’ 시스템으로 운영돼 왔으나 앞으로는 천 원내대표 중심의 ‘원톱’ 시스템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신 의장 비서실장인 김부겸 의원은 18일 “신 의장이 사퇴 결심을 굳혔고,19일 공식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부친 문제로 사퇴하는 것은 문제라는 당내 의견도 있으나 신 의장은 자신의 거취가 과거사 규명에 걸림돌이 돼선 안 된다는 생각”이라며 “이같은 뜻을 중진을 비롯한 당 소속 의원들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이로써 신 의장은 지난 5월17일 정동영 전 의장으로부터 의장직을 승계한 지 석달여 만에 낙마하게 됐다. 신 의장은 이날 오후 여의도 광복회관으로 김우전 광복회장을 찾아가 “선친 문제로 독립유공자께 심려를 끼쳐 매우 죄송하다.”고 부친의 친일 행적을 사과했다. 신 의장은 광복회 방문 직후 이부영 위원을 만나 사퇴의 뜻을 밝히고 향후 당 운영방안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권파를 중심으로 당 내부에서는 “신 의장 사퇴를 계기로 천정배 원내대표 중심의 원내정당으로 당을 운영해야 한다.”며 지금의 ‘당 의장-원내대표’의 투톱체제 대신 원내대표 원톱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 신임 당 의장과의 관계설정이 주목된다.한편 신 의장의 사퇴를 계기로 여권은 친일진상규명특별법 개정 등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어서 이를 둘러싼 정치권의 논란이 한층 격화할 전망이다.열린우리당은 이날 국회에서 ‘과거사 진상규명 추진을 위한 태스크포스’ 첫 회의를 열어 과거사진상규명기본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과거사 진상규명특위 구성 작업에 착수했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선친 친일’ 辛의장 기나긴 2박3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18일 오후 2시 김부겸 비서실장,김희선 의원과 함께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을 찾았다.김우전 회장과 김유길 사무총장 등 임원들에게 “돌아가신 선친 문제로 독립 유공자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죄한 뒤 “친일진상규명 노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머리를 숙였다.신 의장이 거듭 용서를 구했지만 김 회장은 끝까지 ‘용서’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으면서 “앞으로 민족정기를 세우는 데 앞장서겠다니 마음이 뿌듯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날 방문은 당 의장으로서 사실상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땀을 뻘뻘 흘리며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이제라도 용서를 빌 수 있어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신 의장의 표정 역시 ‘기나긴 2박3일의 장고(長考)’ 이후 의장직 사퇴를 결심했음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신 의장 선친의 친일행적 파문이 불거진 것은 지난 16일 저녁 6시30분쯤.경남 창원지역 공단을 둘러본 뒤 부산으로 향하던 버스에서 신 의장은 김형식 부대변인으로부터 한 시사 월간지의 ‘선친 친일 행적’ 보도 사실을 전달받았다. 잠시 얼굴이 굳어졌지만,다시 냉정을 되찾은 듯 기자간담회를 열라고 지시했다.그리고 꼼꼼한 성격의 ‘메모광’답게 버스 안에서 기자간담회 내용을 메모했다.그리고 기자들 앞에서 선친의 일본군 헌병 복무 사실을 시인했다.그는 17일 울산 방문과 일본 민주당 의원 간담회 일정을 소화하는 등 버티기에 들어갔다.이날 한 라디오에 출연,“당 의장으로서의 거취문제는 절대 가볍게 처신할 일은 아니다.”고 즉각 사퇴 거부 의사도 밝혔다.천정배 원내대표 역시 긴급 원내대표단 회의를 갖고 “연좌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김희선 의원 역시 ‘사퇴 불가론’을 펴며 지원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신 의장은 그날 오후와 밤 문희상 의원,김부겸 비서실장 등 가까운 의원들을 잇따라 만나 대책을 논의한 뒤 대구·경북 방문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그리고 밤새 통음한 것으로 알려졌다.한 측근 의원은 “당의 앞날과 친일진상규명법의 연착륙을 위해 (사퇴를)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아테네 2004] 올림픽 8강 도전史

    [아테네 2004] 올림픽 8강 도전史

    ‘5전6기’ 한국축구는 올림픽본선 8강에 오르기까지 무려 56년 동안 5차례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했다.본선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은 광복의 흥분이 남아 있던 1948년.그해 5월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한국은 3개월 뒤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수들은 흥분했다.조별리그가 없던 당시 16강 토너먼트 첫 상대로 멕시코를 만난 ‘원조 태극전사’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울분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골퍼레이드를 펼치며 5-3으로 이기고 8강에 진출했다.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8강전에서 강호 스웨덴에 0-12로 대패하면서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16년 만에 다시 참가한 도쿄올림픽에서는 조별리그 3전 전패를 당했다.3경기에서 단 한 골을 넣고 무려 20골을 내주며 체면을 구겼다.4년 뒤 멕시코대회 본선행에 실패한 한국은 일본이 동메달을 따는 것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당시의 충격으로 한국은 오랫동안 올림픽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24년 만인 1988년 개최국 자격으로 ‘무임승차’한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러시아 미국 아르헨티나 등 강호들과 만나 2무1패의 괜찮은 성적을 내면서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올림픽 단골손님이 됐다.그러나 이번엔 조별리그 통과가 ‘하늘의 별따기’였다.1승에도 목말랐다.될 듯 될 듯하면서도 매번 주저앉았다.96년 애틀랜타대회에선 가나를 상대로 48년 만에 승리를 추가했지만 역시 예선 탈락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가장 아쉬운 대회였다. 조별리그에서 2승1패의 역대 최고의 성적을 냈지만 골득실에서 밀려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절치부심한 한국은 6번째 도전인 아테네올림픽에 ‘올인’했다.2002한·일월드컵 4강 진출도 자극제가 됐다.결국 한국은 8강 진출의 1차 목표를 이뤘고 이제 메달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박준석기자 pj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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