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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피는 서울

    서울시 푸른도시국은 27일 이달 말부터 시청앞 서울광장과 주변 보도에 산딸나무와 조팝나무 60그루를 목재화분에 담아 3주간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 광장 이달 말부터 꽃나무 전시 산딸나무는 십자 모양의 흰꽃이 화사하며, 빨갛고 둥근 열매는 새와 곤충들이 좋아한다. 좁쌀 모양의 꽃이 피는 조팝나무는 한방에서 뿌리와 열매를 해열제·강장제·구토치료제 등으로 써왔으며 아스피린 원료도 이 나무에서 발견됐다. 시는 여름에는 모감주나무·자귀나무·배롱나무 등 꽃나무들을 전시하고 가을부터는 사과나무·감나무·귤나무·석류 등 과실나무를 주로 전시할 방침이다. 특히 8월15일 광복절에는 시청 주변에 무궁화 200여종,3000그루를 전시해 시민들의 나라사랑을 고취할 방침이다. ●고덕수변생태공원에서 ‘찔레나무 관찰’ 서울시 한강시민공원사업소는 강동구 고덕수변생태공원에서 ‘찔레나무 관찰’‘찔레순 맛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 프로그램은 사업소가 지난 2003년 공원 내 2000여평에 심은 찔레나무 7000그루에서 찔레꽃이 만발한 데 따른 것이다. 고덕수변생태공원의 찔레숲은 서울 시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다. 사업소 관계자는 “지금 이곳에는 하얀 찔레꽃이 만발해 있다.”면서 “부드러운 찔레순을 맛보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좋은 자연체험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계곡과 숲 가장자리에 많이 분포하는 찔레나무는 새로 자란 가지 끝에 많은 꽃이 우산꼴로 피며 열매를 볶아 약재로도 사용한다. 문의(02)426-0755.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배설 선생 숭고한 뜻 이어가자”

    “배설 선생 숭고한 뜻 이어가자”

    대한매일신보 창간자인 영국인 배설(영국명 어니스트 베델) 선생 96주기를 맞아 27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추모대회가 열렸다. 배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진채호) 주최로 열린 행사는 배설 선생의 생애와 항일 언론투쟁 활동상 회고, 경모시 낭송, 헌화 및 분향, 기념식수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종전 추모식은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열렸으나 올해에는 외국인 묘지공원 옆에 조성된 양화진 성지공원에서 진행됐다. 양화진 성지공원은 개화기때 한국에 기여한 외국인들을 기념하기 위해 최근 마포구청이 새로 조성했다. 대회장인 채수삼 서울신문사장은 양동용 서울신문 이사가 대독한 추념사를 통해 “배설 선생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겨레의 독립자존을 일깨운 횃불이었고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까지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우리 민족을 계몽시켜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채 사장은 또 “서울신문은 앞으로도 선생의 숭고한 뜻을 이어 언제나 독자와 진실편에 서서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한편, 공공 이익과 민족화합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 서울신문이다. 당초 행사에 배설 선생의 후손이 초청됐으나 일정 때문에 8·15광복절에 서울을 찾기로 했다. 배설 선생은 15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영국 크로니컬지 아시아특파원으로 일하던 중 러·일전쟁을 취재하면서 조선에 관심을 가졌다. 영·일동맹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자 크로니컬지에 사표를 던지고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고종의 후원 아래 배설 선생은 박은식·양기탁·신채호 선생을 영입, 민족주의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를 견디다 못한 영국이 일본의 탄압을 묵인해줘 선생은 한때 상하이에서 구금되기도 했다.1909년 조선에서 지병으로 숨진 뒤 고종이 마련해준 마포구 외국인 묘지에 안장됐다.1964년 한국 언론인들이 기념비를 세웠고, 196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정광태 ‘독도 노래비’ 세운다

    ‘독도는 우리땅’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노래비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길종성)와 가수 정광태씨는 광복 60주년을 기념, 국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지난 24일 울릉도 도동항 해변공원에 ‘독도는‘ 노래비를 건립했다고 27일 밝혔다. 당초 독도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문화재청 허가 여부가 미지수로, 상당 기간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판단돼 장소가 변경됐다. 높이 1.8m, 폭 1m, 무게 약 2.5t에 이르는 노래비는 정씨가 부른 ‘독도는‘의 가사를 서예가 박정숙씨가 글로 옮겼고, 이를 조각가 이용철씨가 돌에 새겨 제작했다. 길종성 위원장은 “노래비 건립으로 일본의 영유권 침탈 야욕의 망상이 사라지길 바란다.”면서 “문화재청과 협의해 노래비를 독도로 이전하는 방안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 [서울시 인사]

    ■ 서울 금천구 ◇사무관 전보△의회사무과장 조선구△감사담당관 김상권△총무과장 김찬△문화공보과장 신종일△재난환경과장 정해석△세무1과장 신승호△세무2과장 황선규△토지관리과장 유배옥△사회복지과장 임귀모△가정복지과장 고현담△산업지원과장 김운△청소과장 직무대리 이태형△주택과장 이광복△교통행정과장 전명철△교통지도과장 신봉호△보건지도과장 김정구△독산1동장 이상필△독산2동장 이영범△독산3동장 한경헌△독산4동장 배병한△시흥3동장 문만종△시흥5동장 이홍상
  • 경천사지 10층석탑 ‘移建記’ 안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0년 만에 보존처리를 끝낸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축조 경위 등을 기록한 이건기(移建記)가 26일 탑 속에 안치됐다. 이 탑은 오는 광복절 완료를 목표로 새용산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탑의 중수기(重修記)로 석탑 3층 난간석 사리공에 사리 대신 안치된 이건기에는 이 탑이 용산 새박물관에 옮겨지게 된 경위와 함께 지난 1960년 경복궁에 복원할 때 넣은 김재원 초대 국립박물관장의 재건기 내용도 함께 수록했다. 국보 제86호인 탑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 탑파로 꼽힌다. 원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 경천사 터에 있던 것을 1909년 일제가 밀반출,1918년 가까스로 반환됐으나 경복궁에 방치되다 지난 1960년 경복궁 뜰에 복원했다. 그러나 훼손이 심해 지난 95년 해체, 지금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해왔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17대 광복회장에 김국주씨

    광복회는 24일 정기총회를 열고 광복군 출신인 애국지사 김국주(81) 선생을 제17대 광복회장으로 선출했다. 다음달 1일 3년 임기의 광복회장에 취임하는 김 신임 회장은 1944년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8월 광복군 제3지대 제2지구대장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광복군 동지회장, 광복회 부회장, 독립기념관 이사,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 [정치플러스] 한센병환자 피해 보상입법 추진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춘진 열린우리당 의원은 24일 한센병 환자가 과거 격리수용 과정에서 겪은 인권침해의 진상 규명과 보상근거를 담은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피해자 생활지원법’ 제정안을 올 정기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가 각종 폭행과 강제노역, 단종시술 등의 인권침해를 당했다.”면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보상, 생활지원을 위한 장치를 법안에 담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법안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를 설치, 지난 1945년 광복 이후 63년 격리수용 정책이 폐기될 때까지 피해 사례의 수집, 분석을 입법 이후 2년 동안 실시하는 내용을 담을 것으로 알려졌다.
  •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재일동포 60년, 왜 귀화하는가

    [세계인-우리는 이렇게 산다] 재일동포 60년, 왜 귀화하는가

    광복 60주년인 올해가 60만 재일한국인들에겐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광복 이전부터 일본에 살았던 ‘재일동포’ 1∼1.5세와 그 가족 47만 1756명(2003년말 현재)은 더욱 그렇다. 일본에선 한국·조선인으로, 모국에선 일본인으로 취급당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오늘도 식민시대 멍에를 고스란히 지고 살아가고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재일동포들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부터 일본에 거주한 특수영주권자다. 그런데 매년 1만명 정도의 재일동포들이 줄어들고 있다. 차별을 견디기 힘들고, 조국에 대한 기대도 사그라지는 현실에서 일본인으로 귀화하기 때문이다. 한 일본 중견 언론인이 “지난해 한류열풍은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몰려다니면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어이없게 말하는 것에서 재일동포들의 ‘한(恨)’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차별과 푸대접의 60년 도쿄 시내 한복판의 재일본 대한민국민단중앙본부에서는 23일에도 일본 우익들의 확성기 비난이 그치지 않았다. 도쿄 시내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중앙본부도 우익들의 공격을 우려, 삼엄하게 경비한다. 이게 광복 60년을 맞는 재일동포들의 현주소다. 한때 70만명까지 이르렀던 재일동포들은 매년 감소추세로 현재 40만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외국인등록증을 언제나 갖고 다녀야 하고, 일상 생활에서 받는 각종 차별은 여전하다. 특히 2002년 북·일 정상회담 이후 일본사회가 급격히 우경화되면서 조선국적 동포들의 피해는 막심하다. 조총련중앙본부 동포생활국 진길상 부국장은 “취직을 하고자 할 때 한국국적 동포가 5곳에서 거절당하면 조선국적 동포는 10곳 가까이서 거절당한다.”고 지적했다. 민단측은 지방참정권이라도 실현되면 귀화가 줄 것으로 보고 참정권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 귀화절차 간소화를 통해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실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단 중앙본부 정몽주 사무총장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 징병제를 도입하면 귀화한 재일동포가 모국에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끔찍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지금까지 귀화자는 27만명이고, 그들의 자녀는 40만명이라고 덧붙였다. ●여전히 갈라서 있는 민단과 조총련 민단과 조총련이 광복 60주년인 올해에도 중앙 차원에서 합동 기념행사를 갖지 못하는 것은 동포사회의 분열을 웅변적으로 대변한다.1990년대 초반 탁구 남북단일팀 공동응원이나 2002 월드컵축구 공동응원 등은 옛 이야기다. 민단 정몽주 총장은 “1991년부터 중앙·지부 단위에서 총련과 교류를 해오고 있다.”면서 “지금도 지부 단위서는 적극 교류가 있지만 중앙 차원은 (정치상황 때문에)의견접근이 어렵다. 신뢰회복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조총련 중앙본부 통일운동국 조선오 부장은 “몇년 전 오사카에서는 양쪽 동포 3만명이 공동행사를 하는 등 좋은 분위기도 있었지만 민단 중앙과는 여러 면에서 최근 2∼3년간 좋지 않았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지방참정권 문제에 대해서도 민단과 조총련은 입장차가 확연하다. 민단은 유럽쪽에서 인정하는 외국인 지방참정권을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조총련은 참정권에 소극적이다. 일본에만 요구하는 게 무리라는 이유에서다. ●국적포기 사연도 제각각 동포 3,4세대들은 1,2세대와는 국적에 대한 자세가 다르다.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처럼 자신들은 한국 국적을 유지할 필요성이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가 유언 등으로 “한국적을 포기하지 말라.”고 해 유지하고는 있지만 계기만 되면 포기하겠다는 동포들이 적지 않다. 일본 언론사 기자인 30대 초반 H모씨는 한국이름으로 일본 언론에 취직했지만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는 “80대인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바로 한국적을 포기할 예정”이라고 고백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올해 34세인 조선 국적의 김모씨는 명문 사립대를 졸업했다. 졸업 뒤 100여 군데의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지만 50곳은 한국식 이름이라는 이유만으로 거절당했다. 결국 유수의 일본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10년만에 그만두고 가업(식당)을 잇고 있다. 그는 국적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귀화 후가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배철은 민단신문 편집장 등은 “귀화하면 동포사회에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완전히 일본인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면서 “귀화한 뒤 후회하거나 돌아오는 사람도 일부 있다.”고 소개했다. ●우익·야쿠자 많다는 것은 왜곡 재일동포들은 각 분야에서 활동 중이다. 교수 등 교원도 2000여명이다. 의료보험기술자도 4300여명이고, 관리직 직업종사자는 1만 7000여명이다. 사무종사자도 5만여명이고, 비교적 차별이 덜한 연예인이나 프로야구선수도 많다. 정몽주 총장은 “광복 뒤 귀국선을 타기 위해 간사이 지역으로 많은 동포들이 몰려갔다가 국내 정정이 불안하고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주저 앉았다. 그분들이 재일동포의 뿌리”라고 소개했다. 당시 180만여명이 귀국했고,60만여명이 남아 동포사회를 이뤘다는 것이다. 그는 “이후 3D 업종 등에서 영세업자가 된 동포들을 일본의 야쿠자들이 텃세를 부리며 괴롭히자 자위 차원에서 동포 젊은이들도 조직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야쿠자 관련 부분을 적극 해명했다. 재일동포에 야쿠자나 우익이 많다는 것은 취직이 안되던 30여년 전의 일이란다. 차별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공식적인 일자리가 적지 않아 야쿠자나 우익이 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이다. taein@seoul.co.kr ■ 재일 대한민국청년회 조수융 회장 |도쿄 이춘규특파원|‘재일본 대한민국청년회 중앙본부’의 조수융(33) 회장은 재일동포 3세다. 부친은 경상도, 모친은 전라도 출신으로 현재 한국말은 거의 구사하지 못한다. 두 누나는 현대자동차 미국법인과 일본 무역회사에 다니고 남동생은 청년회 간부다. 조 회장은 일본의 왜곡 역사교과서 채택반대 운동에 열심이지만 “한국의 국회의원들이나 운동권이 일본에 건너와 항의 퍼포먼스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그럴 경우 재일동포가 불이익을 받게 되고, 그것이 무엇보다 싫다.”고 말했다. 그는 부친이 “일본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일본식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한국인임을 잃지 말라.”고 교육한 탓에, 민족의식이 넘친다. 현재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 가와사키다이시고교 사회과 교사인 조 회장은 어려서부터 뼈저리게 민족차별을 체험했다. 초·중·고교와 대학 모두 일본학교를 나왔다. 그런데 고교 때까지는 한국식 이름을 쓰지 못하고 일본식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다.19세 때부터 겨우 조수융 하나만 썼다. 집단 따돌림을 당할 것이란 우려가 가장 큰 이유다. 동포 7000여명이 모여사는 가와사키시에서 이 정도니 동포들의 집단거주지가 아닌 곳은 짐작할 만하다. 일본에서 공무원이나 공립학교 교사 등은 한국인이 되기 어려운 직업이다. 하지만 그는 각고의 노력끝에 공립고교 교사가 됐다. 한국에는 16세 때 민단 모국방문단으로 처음 가봤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 한국은 어두운 이미지만 있었다. 웃지 않는 사람들만 사는 걸로 알았다. 일본 미디어에 한국의 어두운 면만 전해졌기 때문이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올해처럼 양국이 독도·교과서문제 등으로 충돌할 땐 정말 곤혹스럽다. 일본인들은 자신을 한국인이라 꺼리고, 한국에서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보는 것 같아 서럽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일본 국민들을 나쁘다고 비판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taein@seoul.co.kr
  • [씨줄날줄] 자이니치/이용원 논설위원

    ‘자이니치(在日)’는 일본 땅에 사는 외국인, 곧 재일 외국인을 총칭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재일 한국·조선인을 한정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된다. 그만큼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서 번역, 출간한 재일동포 김태영 후쿠오카교육대 교수의 책 ‘저항과 극복의 갈림길에서’(지식산업사 간)를 보면 자이니치 사회도 최근 몇년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일 한국·조선인은 1978년 말 65만 9000여명이었으나 2003년 말 현재 61만 30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수치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그 구성비를 들여다 보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1978년도 인원은, 일제강점기와 광복-6·25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과 그 후손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 견줘 2003년 말 인원에는 최근에야 일본에 장기거주하게 된 ‘뉴 커머(new comer)’가 14만명이나 포함돼 있다. 결국 역사의 산물인 이민 1세대와 그 후손은 이미 47만명쯤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 원인은 분명하다. 일본으로 귀화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귀화자 수는 연간 3000∼4000명, 많아야 5000명대 수준이었는데 1995년에 이르러 1만명을 넘어섰고 2003년에는 1만 1778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조선인끼리 결혼하는 비율도 아주 낮아져 지금은 열명에 아홉명꼴로 일본인과 혼인한다. 따라서 일본 귀화는 더욱 가속도를 탈 것이다. 일본에 사는 동포에게 우리 국적을 ‘사수’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힘들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국적을 유지하건, 일본으로 귀화하건 뿌리가 한국임을 자각하고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적지 않다. 장기적으로는 전세계에 퍼져 사는 우리 동포를 하나로 아우르는 한민족공동체를 결성하는 일이요, 단기적으로는 각 동포사회가 겪는 어려움을 정부가 나서서 외교적으로 풀어주는 일이다. 일본 동포사회에도 지방선거 참정권을 비롯해 현안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다음달 열리는 한·일 정상회담에서 자이니치 문제 역시 주요 이슈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이용원 논설위원 ywyi@seoul.co.kr
  • “일본인 100만명에 한국음식을”

    |도쿄 이춘규특파원|광복 60주년을 맞아 재일교포 1∼1.5세에게 위로의 식사를 대접하고 일본인 100만명에게 한국 음식을 맛보게 해주는 ‘우정의 잔칫집’ 행사가 오는 9월부터 4개월간 일본에서 열린다. ‘광복 60주년 한·일 우정의잔치 조직위’(위원장 이창복) 주최로 열리는 행사에서는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20개 도시 2000여개 한국 식당에서 삼계탕 대접상이 차려진다. 민단과 총련이 선정한 재일교포 1∼1.5세 노인 8만여명과 주일 한국기업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인, 일본 시민단체 회원 등 2만여명이 초청 대상이다. 이들에게 1200엔짜리 삼계탕과 교환되는 초대권이 발송된다. 초대권 매입은 주일 한국기업들이 협찬한다. 행사 기간에 도쿄와 오사카 등 일본 3대 대도시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일본의 서울클럽이 각각 선정한 양국 신세대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우호·교류의 장도 마련된다. 잔칫상을 차린 2000여 식당들은 행사기간 내내 음식값을 30% 가량 할인하고 한국음식을 홍보하는 이벤트를 개최해 일본인 100만명이 한국 음식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 한류붐 지속과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일본에는 고깃집 3만여개를 포함해 총 3만 8000여개의 한국식당이 있다.80% 가량을 재일교포가 운영하고 있으며 주요 식자재는 한국의 농식품이다. 조직위 관계자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한국식당의 붐이 일어나면 한국 농식품의 대일수출 기반이 탄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taein@seoul.co.k
  • ‘5%의 자부심’ 서울토박이

    ‘5%의 자부심’ 서울토박이

    “낚싯대가 따로 없어 나무막대 끝에 끈 매달아 쇠로 만든 낚싯바늘을 묶었어. 반세기 전만 해도 청계천에서 가물치도 건져올렸지, 아∼암.” 청계천 쪽인 서울 중구 장교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순형(69·한국건강관리협회 회장) 전 서울의대 학장은 청계천 얘기가 나오자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이렇게 지난 날을 돌아봤다. ‘서울토박이 중앙회’ 부회장인 그는 할아버지 세대 이전부터 서울에만 살아온 그야말로 진짜 토박이다. 뿐만 아니라 1960년 신도시로 개발됐던 불광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청계천 근처에만 살아온 ‘청계천 토박이’이니 청계천 복원공사와 최근 일련의 사태를 바라보는 눈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처음만나 사랑맺은, 내 고향 서울은 아름답고 건강한 도시 ‘눈 뜨고도 코 베어간다.’는 곳이기도 하지만, 서울은 회원들에게 가슴 뭉클한 그 무엇을 안겨주는, 어머니 품속과 같은 고향인 것이다. 이 속담 아닌 속담도 “600여년 전부터 타향에서 몰려든 8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고향을 지키려는 방어의식으로 생긴 얌체짓 탓”이라고 회원들은 그럴 듯한 해석을 내놓는다. 역시 서울토박이인 강동구 김종구(58) 기획재정국장은 “어릴 적 한강에서는 뜰채로 참복어도 엄청 많이 걸려 올라왔다.”면서 “그 맛이 요즈음 말로 짱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국장은 “이따금씩 강물 위로 시체가 떠내려왔는데, 미군부대 꿀꿀이죽이나 기껏해야 수제비국으로 연명했을 정도로 너무나 가난했던 시절에 생긴 변고였다.”며 사연을 들려줬다. “불그런 색깔을 띤 복어 알이 둥둥 떠내려오면 가뜩이나 굶주린 눈에 얼마나 먹음직스러웠는지 모른다.”면서 “복어 알인 줄 꿈에도 모르고 뜰채로 덥석 건져올려 먹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것”이라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 고향은 지금 국립현충원이 있는 자리인데 현충원 분수대 쪽은 당시 콩밭이었다.”면서 “50년 전만 해도 50가구 남짓 모여 살았다.”고 덧붙였다. 동작동 248번지라는 사실도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향에 대한 흔적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한강으로 다이빙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필 바위에 닿는 바람에 생긴 상처라고 왼쪽 다리를 보여줬다. 서울토박이 중앙회 임기완(65) 상임부회장은 “7대째 210여년이나 서울에만 살고 있다.”면서 “현재의 서대문구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터가 바로 선조들이 처음으로 둥지를 튼 고향마을이었다.”고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소개했다. 사도세자 생모인 영빈 이씨의 무덤도 이 자리에 있었는데, 참봉(종9품·무덤 관리자) 벼슬을 지낸 증조부 이래 1969년 세브란스병원이 증축될 무렵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으나 비석은 아직 백양로에 남았다고 집안 내력을 보탰다. ●“서울을 노래하자.”…판박이 활동 벗어나 야심찬 회원 배가운동 임 부회장은 “토박이 모임은 인증서까지 주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밟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현재 ‘선조가 1930년 이전부터 현 서울시 행정구역내에 정착한 시민으로, 서울시 행정구역 안에서 계속 주거해온 사람과 신청 1세대의 자손’이라는 가입자격 규정을 뒀다. 현재 인증받은 사람은 2500여가구에 1만여명. 3대 이상 거주자 5만가구 20만명으로 늘리는 게 1차 목표다. 어느 시민은 최근 “제가 충북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으나 출생 1년 전후로 서울에 올라와 할머니, 아버지와 40년 가까이 살았는데 토박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문의해왔다. 서울토박이 중앙회는 가입을 희망하는 시민들이 신청서 1부와 부친, 또는 조부의 재적등본 1부(자치구 발행), 반명함판 사진 2매를 내면 심사를 거쳐 인증서를 발급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란, 서울을 고향으로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슬로건처럼 젊은이들도 많이 들어와 서울 가꾸기에 동참할 것을 바라고 있다. 서울을 아끼는 만큼이나 수도이전 등 삶의 구조를 크게 바꿔놓을 사안에는 어느 모임에 못잖게 똘똘 뭉친다. “모이자, 서울광장으로…. 깨자, 우리 고향을 깨려는 검은 무리들….” 지난해 6월 29일 수도이전반대 범시민 궐기대회에 참가한 토박이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중앙회는 수도이전 반대 성명서까지 냈다. 최근 정부의 행정중심복합도시 발표 때 한 회원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는데도 혈세 10조원 이상을 들여 서울을 여기저기 분산시키려 한다.”면서 “12부,4처,3청을 옮긴다는데 토박이들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졌다. 중앙회에는 초등학생부터 90세가 넘은 장성기(95·성북구 정릉2동)옹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가입해 있다. 중앙회 산하에는 중랑·서대문·강북·송파·관악·중구지회가 따로 짜여졌다. 이 부회장은 “전해 내려오는 선조들 말씀에 따르면 족보가 불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최소한 10대까지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되뇌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몇해 뒤인 1950년대 중반에만 해도 지금의 수색 근처에 조상들의 묘가 위로 10대까지 있었다.”고 했다. 서울토박이 중앙회 (02)2274-3291.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3대이상 거주해야 ‘성골’ 대접 3대째 내리 서울에서 살고 있는 토박이는 100명 중 5명 정도로 추산된다. 또 서울에서 태어난 시민 가운데 31%는 서울을 고향으로 여긴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 따르면 서울시민 가운데 조부모 세대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토박이는 2004년 말 현재 4.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2003년말 조사된 6.5%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수치다. 시정연은 시내 2만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2004년 서울 서베이’ 결과 시민들 가운데 63.9%가 본인 세대부터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부모 세대부터 거주한 비율은 30.9%로 나타났다.2003년 본인 세대부터 57.2%, 부모 세대부터 33.6%와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서울토박이가 가장 많은 자치구는 전년과 같이 종로구(8.1%)로 나타났다. 원남동, 안국동, 궁동, 청운동, 삼청동 등 비교적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보이는 탓도 있다. 반면 서울토박이가 가장 적은 곳은 광진구(2.8%)로 조사됐다. 서울시민 전체에서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비율은 67%,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시민은 33%였다. 서울시민 고향인식도는 2003년도 63%보다 상승한 수치다. 서울을 고향으로 여기는 비율을 권역별로 보면 도심권(종로·용산·중구)이 75.9%로 가장 높았다. 자치구별로는 용산 81.6%, 광진 77.2%, 중구 75.4%, 강동 72.4%, 동대문 70.9%, 성북 70.5%였다. 반면 아파트 중심 주거문화 지역인 도봉구(58.4%)와 금천구(59.6%)는 매우 낮아 정체성 확립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원조토박이들이 말하는 서울사람 “우리 토박이들을 업신여기니 청계천 사고가 일어나지….” 18일 서울 중구 수표동 56의 17 청계천 3가 골목길에 자리한 건물 4층 서울토박이 중앙회 사무실에서 만난 자칭 ‘4대문 원조 토박이’ 10명은 고향에 대한 애정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참된 서울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은데 끼워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사뭇 배어 나왔다. “프랑스에선 파리지앵, 일본에서는 에도코(江戶)라고 불리는 수도의 토박이들이 있습니다. 이들 도시에서는 도심 건물을 헐 때나 나무 한 그루를 잘라낼 때도 토박이들과 의논합니다.” “서울시가 서울만의 문화를 보존한다, 수도를 지킨다느니 하면서 토박이들에겐 관심도 없는데, 일을 잘못하면 우리가 나서서 혼쭐을 내야 합니다.” 이날 모임에는 회장단 13명 가운데 일정이 겹친 3명을 빼고 모두 찾아와 모처럼 얘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전통음식 등 서울문화를 들먹거리면서도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 몰라도 정작 대대로 살아온 우리들 말은 듣지도 않고 활약하는 단체도 더러 눈에 띄더라고요, 참….” 각 지방 사람들의 성격이 식습관에서 유래한다며 음식 얘기로 돌아갔다. 서울 사람들은 맵고 짠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이는 음식을 만들 때 실고추를 위에 얹는 관습에 잘 나타난다고 입을 모은다. 고춧가루 쓰는 일이 적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나타난 성격이 악착같지 않다는 점이다. 원래 살던 고향이라고 당연히 여기다 보니 아등바등 살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고의구(71) 부회장은 “내 분수만큼만 행세하지, 절대 남의 것은 쳐다보지 않는 성격”이라면서 “서울 깍쟁이라는 말도 남들에게 불필요하게 손을 벌리지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주지도 않는 성격 때문에 나온 것”이라며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서울 사람들이 자존심 강하기로 치면 어느 정도냐 하면 말이지.‘맹추’라는 소리를 들었지. 예를 들어 일본인들이 광복 뒤 헐값에 처분하거나 버리고 도망간 집이 많았는데, 셋방에서 버틸지언정 들어가 살지는 않았어.” 그는 서울사람 대신 발빠른 외지인들이 집을 차지해 내로라하는 부자로 성장한 사례가 많았다고 소개했다. “나서려고 하지 않는 특유의 성격 때문에, 가뭄에 콩 나듯 하는 부자 가운데서도 섣불리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한다.”는 하소연도 쏟아졌다.“다른 향우회에서는 서로 나서지 못해 안달인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오후 2시 시작해 6시까지 이어진 이날 자리에서 그들은 서울토박이로서의 자랑 아닌 자랑도 늘어놓았다. “산업화 물결로 갑자기 서울 인구가 엄청 늘면서 누구나 사투리를 쓰지 않으면 서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서울 사투리도 있어서 누가 토박이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했걸랑요’ 등 ‘요’로 끝나는 말을 많이 쓴단다.‘다’로 마치는 말과 달리 여성스러운 말투여서 다른 지방 사람들로부터 ‘간지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웃었다. 중앙회 출범 10주년이던 지난해 11월에는 효재학교 동창인 이원임(여), 이상용, 박영한(이상 81) 회원들이 70여년 만에 우연히 한 자리에 모여 추억을 되새기는 뜻 깊은 만남을 가졌다. 이들은 “토박이 모임을 만든 덕분”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월화드라마 전쟁 재점화

    ‘이 때를 기다렸다.’ KBS와 MBC가 내심 미소짓고 있다. 훈훈한 감동과 재미로 20%를 훌쩍 뛰어넘는 시청률을 자랑했던 경쟁사 SBS의 ‘불량 주부’가 이번 주 막을 내렸기 때문. KBS는 가수 강타와 김민선을 내세워 여 선생님과 남자 제자 사이의 사랑을 그린 ‘러브 홀릭’을 이달 초부터 내보내고 있지만,‘불량 주부’의 아성에 밀려 시청률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등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다. KBS가 ‘미안하다 사랑한다’ ‘쾌걸춘향’ ‘열여덟 스물아홉’ 등으로 월·화 강세를 이어온 것을 감안하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KBS는 탤런트로 변신한 강타가 날이 갈수록 어색한 모습을 털어내고 있고, 또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두 주인공 사이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본격화되기 때문에 상승세를 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MBC도 사정은 마찬가지. 환생을 주제로 여러 연출가와 여러 작가를 투입한 옴니버스 형식 드라마 ‘환생-넥스트’를 이번 주부터 편성했으나, 역시 시청률은 한 자릿수에 그쳤다. 그나마 ‘못된 사랑’ 파동으로 준비 기간이 짧았던 점을 고려하면, 시간을 넘나드는 독특한 구성과 설정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편이다. 다음주부터는 현대에서 조선으로 날아가, 대하 역사극 형식으로 주인공들의 전생에 대한 실타래가 풀릴 예정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SBS는 ‘불량 주부’의 후속으로 메가톤급 드라마 ‘패션70s’를 마련, 쉽게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광복 60주년 특별 기획 드라마라는 거창한 수식어도 달았다. 이요원 등 남녀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다룰 초반 3회에서 장대한 규모의 한국 전쟁 장면과 포화 속에 피어난 패션쇼 모습 등으로 기선을 제압, 시청자들을 라이벌 드라마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재점화된 지상파 3사의 월·화 드라마 전쟁에서 과연 누가 승리의 기쁨을 맛볼지 주목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물개 가족’ 독도 물살 가른다

    “국민의 염원을 담아 독도까지 헤엄쳐 가겠습니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사진 가운데·55)씨가 오는 8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상 처음으로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수영으로 물살을 가를 예정이다.MBC ESPN이 마련한 독도 지키기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특히 이번 도전은 다음달 말 해군 특수부대 UDT에서 제대 예정인 맏아들 성웅(왼쪽·24)씨와, 대를 이어 국가대표 수영 선수로 뛰고 있는 둘째아들 성모(오른쪽·20)씨가 함께한다. 조씨는 19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독도는 분명히 우리 땅이며 우리가 지켜 후손에게 물려줄 자산이라는 것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면서 “두 아들과 같이 나서게 돼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조씨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3㎞ 바닷길을 삼부자가 교대로 쉬지 않고 헤엄친다면 24시간 이내에 주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태풍이 한반도에 다가오는 시기와 조류, 수온 등을 고려해 구체적인 도전 날짜(8월 예정)를 잡을 예정이다. 조씨는 “사실 지난 2월부터 대한해협 횡단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이후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마음을 바꾸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결코 실패는 없을 것이며, 독도를 지켜내고자 하는 국민의 의지를 이번 과정에서 담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조씨는 지난 80년 부산 다대포 방파제를 출발해 대마도 북서부 소자키 등대에 13시간16분 만에 도착, 한국인 최초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기록을 세우며 기염을 토했다.82년에는 도버해협을 건넜고,2003년에는 한강 700리(240㎞)를 주파해 건재를 과시했다. ‘물개 가족’의 독도 도전 과정은 MBC ESPN이 ‘조오련 삼부자의 독도 아리랑’이라는 14부작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7월1일부터 매주 2회씩 방영한다. 새달 제주도 훈련부터 촬영에 들어가며, 도전 당일에는 24시간 생중계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들에게 물어봐] SBS 새드라마 ‘패션70s’

    [★들에게 물어봐] SBS 새드라마 ‘패션70s’

    신세대 ‘불량’을 복고풍 ‘빠’으로 잇는다. SBS TV가 광복 60주년 기획으로 1970년대 한국 패션계를 담은 월화드라마 ‘패션 70s’(연출 이재규·극본 정성희·제작 김종학프로덕션)를 23일부터 내보낸다. 폭발적인 인기 속에 막을 내린 ‘불량 주부’의 후속이다. 어떤 드라마일까. ●패션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한국 전쟁부터 출발하는 이 드라마는 70년대 패션계를 주름잡았던 두 여인의 삶과 사랑을 장대한 스케일로 담아낸다. 한국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져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한 천재형 디자이너 더미와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부잣집 양녀로 자라나며 패션감각을 익히는 수재형 고준희가 주인공. 밀로스 포만 감독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라이벌 구도를 따와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 불리는 최경자씨 등 실존 인물의 삶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이요원 vs 김민정 결혼과 출산 등으로 연기 활동을 접었던 이요원이 2년여만에 돌아왔다. 김종학프로덕션에서 만들었던 대하사극 ‘대망’ 이후 처음이다. 올여름에는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로 스크린에서도 팬들과 만나게 된다. 더미역을 맡은 이요원은 “예전에 보여주지 못했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면서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카메라 앞에 서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MBC ‘아일랜드’의 김민정이 라이벌 준희로 나온다. 독특한 화법과 캐릭터를 지닌 에로배우로 인기를 끌었던 잔상을 털어버리겠다는 각오. 최근 드라마 캐스팅 가운데 최고의 황금 라인업을 짠 셈이다. 이들 두 주인공의 일과 사랑이 대통령 보좌관 김동영(주진모)과 다이버 장빈(천정명)dp 얽혀지au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폐인’ 또 탄생하나 특히 이 드라마가 눈길을 끄는 이유는 이재규 프로듀서의 작품이기 때문. 지난해 ‘다모’를 통해 종래 TV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영상미를 자랑하며 골수팬들을 양산했다. 그가 ‘연타석 홈런’을 칠지 자못 기대되는 부분이다. 그 때 그 시절의 맛을 살리기 위해 경기도 파주에 20억여원을 들여 오픈세트도 세웠다. 특히 미술적인 면에 세세한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이 PD는 “다시 시대극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소재가 마음에 들었다.”면서 “기존 영상과는 색다른 느낌을 주도록 노력하겠다.”고 설명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이현세의 만화경] 만화 같은 인생이라면…

    [이현세의 만화경] 만화 같은 인생이라면…

    얼마전 고우영 선생이 타계하셨다. 어릴 때 고우영 선생이 그린 ‘느티나무 도둑’이라는 만화를 보고, 이렇게 문학적이고 예술성이 강한 만화라면 세상이 만화를 경멸하든 말든 나도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비록 선생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나를 만화계로 이끈 몇 분 안 되는 작가 중 한 분이시다. 선생을 보내고 난 다음날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있다 보니 이래저래 마음이 울적했다.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성장한다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영원한 삶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고 유한의 삶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도 탄생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죽음은 슬픈 일이다. 산다는 것은 눈이 시리도록 눈부신 것이지만 또한 눈물겹도록 슬픈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끔 터무니없는 얘기를 두고 ‘만화 같은 얘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인생이야말로 만화 같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만화는 꿈처럼 황당한 이야기일 뿐이고 인생은 현실의 삶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세상살이는 만화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실제로 만화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소재가 무엇이든 간에 만화가 주로 다루는 이야기는 성장 드라마이다. 주인공이 소림사에 가 있든, 안드로메다 성운에 가 있든, 또는 암흑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태초의 전설 속에 가 있든 그 주인공은 갖은 역경과 고난을 뚫고 성장해 나간다. 그 성장드라마 속에 빠지지 않는 성공의 요소가 우정과 야망, 사랑과 승리이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요소를 눈물과 분노와 웃음으로 버무려 나가는 것이 만화다. 만화 속의 주인공은 어떤 역경 앞에서도 카리스마와 웃음을 잃지 않고 어떤 적과 분노 앞에서도 슬픈 눈을 잃지 않는다. 고우영 선생의 삶은 한편의 만화다. 광복 전에 하필이면 옛 고구려의 땅인 만주에서 태어난 것도,6·25때 피란오면서 온 가족이 남이냐 북이냐의 생사의 갈림길을 선택해야 했던 것도, 일찍 요절한 천재 만화가인 형을 따라 만화계에 뛰어든 것도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다. 시대보다 작품이 앞질러 가서 어린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던 선생은 젊은 날을 고독하고 치열한 삶으로 보냈다. 이런 삶이라면 마땅히 외롭고 지친 모습을 보여야 했을 테지만 선생은 웃음보따리였다. 누구보다 낙천적인 성품에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누구든지 만나면 단번에 허물허물하게 만들어버렸다. 거기다 스포츠라면 무엇이든 만능이었으니 선생이야말로 어떤 역경 앞에서도 카리스마와 웃음을 잃지 않는 만화 속의 주인공이었다. 이렇듯 해학과 풍자의 대가였던 선생은 1980년대 스포츠신문에 성인만화 ‘임꺽정’을 연재하면서 한국 성인만화의 장을 열었고 불같은 열정으로 눈을 감기 전까지 작품을 발표했다. 고우영 선생은 가장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으로 가장 만화 같은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다. 그래서 선생의 삶에서는 따라하고 싶은 유혹의 향기가 있다. 어차피 인생이 허구가 아니라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라면, 고우영 선생처럼 온갖 매력으로 무장한 만화의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의 인생을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멋지게 채색된 만화 같은 인생을 산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모든 것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내 끝은 언제쯤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다 보니 30년 만화가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누구나 그렇듯이 분명 내 인생도 싫든 좋든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이제부터다. 엔딩이 좋으면 드라마는 성공한다.
  • 남측 “6자회담 北복귀땐 중요한 제안 할 것”

    남측 “6자회담 北복귀땐 중요한 제안 할 것”

    남북 차관급회담에 참석중인 남한측 대표단은 16일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북핵문제의 실질적인 진전을 위해 ‘중요한 제안’을 마련할 것”이라면서 6자회담 조기 복귀를 촉구했다. 남측 수석대표인 이봉조 통일부차관은 이날 개성 자남산여관에서 열린 회담에서 “남북이 지난 1992년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민족공조도, 남북화해도 불가능하다.”면서 “(중요한 제안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관련국과 협의해 밝힐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제안내용 힐차관보에 전달 정부는 ‘중요한 제안’의 내용을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로 방한 중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전달했으나 미측의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수석대표는 또 “북한측이 핵보유를 주장하고 영변 5㎿ 원자로 가동 중단과 핵연료봉 인출 등 상황을 악화시켰다.”면서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 보유는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북한측 대표단장인 김만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은 정면 대응하지 않고 경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측은 또 제15차 장관급 회담을 6월에 서울에서 개최하고,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해외 민간단체의 6·15 통일대축전에 당국 대표단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비료지원과 관련, 남한측은 예년 수준인 20만t 규모로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를 웃도는 규모에 대해서는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추가로 논의할 것을 제의했다. 앞서 남북은 오전 전체회의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대축전에 남북한 당국 대표단을 파견하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대표단 구성을 비롯한 절차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이 수석대표는 “다음달 중 장관급회담을 개최한 뒤 순서대로 당국간 회담을 재개해야 한다.”며 남북관계 정상화를 거듭 촉구했다. 이와 관련, 양측은 장관급회담 재개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했으나 구체적인 협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산가족면회소 조속착공도 제의 남한측은 또 6·15 공동선언 5주년을 맞아 경의선·동해선 도로연결 개통식을 갖자고 제의하는 한편 광복 60주년을 맞아 제11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갖고 이산가족 면회소를 조속히 착공할 것을 제의했다고 이 수석대표는 전했다. 그는 “북한측은 김일성 조문불허와 충무계획, 작계 5029 등에 대한 재발방지와 국가보안법 철폐,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한편 힐 차관보는 이날 송민순 한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대북 비료지원은 인도적 차원의 지원이라는 점에서 필요한 곳에 적정하게 지원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특히 북한이 차관급회담을 통해 6자회담에 대한 확신을 갖는 한편 남북관계 진전이 6자회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개성 공동취재단·서울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과거사 청산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과거사 청산

    이른바 ‘과거사법’으로 불리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안’이 지난 3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과거사법은 일제 강점기 이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주요 과거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4대 개혁법안의 하나로 지난해말 타결 직전까기 갔다가 조사범위와 조사위원회 구성, 조사위원 자격조건 등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는 바람에 국회 통과가 미루어져 오다 극적인 타결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법이 암울했던 과거의 의혹들을 풀어줄 수 있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 때 국민들을 탄압했던 인권침해 사건들의 진상이 규명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여야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반쪽자리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인혁당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없는 법이라며 발효도 되기전에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사법의 내용 과거사법이 규정하고 있는 진실규명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일제 강점기 또는 그 직전의 항일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등의 해외동포사 ▲광복 이후 한국전쟁 전후의 불법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광복 이후의 헌정질서 파괴행위나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폭력·학살·의문사 ▲위원회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 ▲진실규명 범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도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하되, 위원회가 의결한 재심의 사유가 있는 사건 등이다. 이와는 별도로 지난해 말 통과된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에 따른 친일진상조사위 활동과 국가정보원 등이 자체적으로 진행중인 진실규명위원회 활동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번에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됨으로써 ‘올바른 과거사 되찾기’가 궤도에 오르는 셈이다. 하지만, 얼핏 조사 대상이 광범위해 보여도 여야의 생각이 달라 대상 선정을 놓고 대립하고 다투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 과정에서 좌우 대립 또는 색깔 논쟁이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당은 좌익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조명과 발굴, 김구 선생 암살사건, 장준하 선생 의문사, 유서대필 등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김신조 간첩 사건이나 이승복 어린이 사건, 이한영 피살사건 등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국가정보원과 경찰, 검찰 등 국가기관의 과거사건 조사활동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뒷탈 많은 과거사법 특히 여당과 민주노동당의 일부 의원들은 이 법안이 지도부의 막판 타협으로 ‘누더기 법안’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제정 철회, 또는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인권 침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다는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경우는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되, 조사위원회가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때에만 재조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이다. 민·형사소송법의 재심 조건이 매우 엄격해 사실상 확정판결이 난 사건은 재조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혁당 사건이나 5·18 민주항쟁 등은 재조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또 조사 범위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등’을 포함한 조항은 국가보안법이 애매한 규정으로 민주화운동가를 탄압했던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위증을 검증하고 처벌할 제도적 장치인 청문회와 진상규명을 위해 필수적인 압수·수색 규정이 빠진 점, 위원 자격을 변호사·공무원·교수·성직자로 못을 박은 점, 교수의 경우 ‘전임 10년 이상’이라고 제한해 특별법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교수 대부분이 배제된 점 등도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강경파 의원들은 이에 따라 이번 법이 ‘당리당략의 산물’‘밀실 논의로 만든 법’‘민주인사를 부관참시하려는 입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표결에서도 여당 의원 122명 중 59명만이 찬성한 반면, 한나라당은 109명 참석에 92명이 찬성 표를 던지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여당 지도부들 사이에서도 찬반표가 엇갈리는 등 여당의 당론이 분열됐다. ●과거사 청산 어떻게 볼 것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과거사 청산은 왜 필요한가.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고서는 공공질서를 올바르게 작동시킬 수 없다. 역사는 한번 묻어버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을 밝히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과거를 밝히는 것은 미래를 위한 역사 바로세우기인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망언과 교과서 왜곡을 볼 때 과거를 올바로 정립하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가 큰 제약을 받는다. 잘못된 과거를 덮어두는 사회는 정의가 없는 사회로서 구성원 통합이 어려워진다. 또 역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사회적 규범을 확립하고 재발을 방지한다. 가해자의 책임을 밝혀 침해받은 인권을 회복하고 피해자와의 진정한 화해를 유도하는 것도 목적이다. 그러나 조사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 사회가 과거사를 놓고 갈등을 겪고 대립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연연함으로써 정치적 공방을 확대시키는 것의 폐해 또한 분명하다. 실제 과거청산이 독재세력에 의한 반대파의 숙청 수단으로 쓰였던 예도 적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국민들이 갖게 된다는 점, 초법적인 여론재판을 부른다는 점도 과거청산 작업이 초래할 수 있는 폐단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같은 폐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는 신념 아래 과거사법을 제대로 운용해야 한다. 당리당략의 도구로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아서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국민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과거를 청산하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1000억대 국유지 사기극 덜미

    일제시대 일본인 소유였다가 광복 후 국가에 귀속된 땅을 자기 조상의 것으로 속여 가로채려 했던 일당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서울 북부지법 형사1단독 황병하 판사는 15일 구청에서 호적을 빼내 고친 뒤 법원에 소송을 내 1000억원대의 국유지를 가로채려 한 김모(59)씨등 6명에 대해 공문서 변조 등 혐의로 징역 1년에서 10년을 선고했다. 서울 종로에서 10년 가까이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김씨는 2002년 일제시대에 서울에 살았던 에가시라 운페(江頭運平)라는 일본 사람의 땅이 광복 뒤 국가에 귀속된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누나(62), 동생(53)과 함께 구청 민원봉사실을 찾아가 호적 열람을 신청했고 아버지 기록 부분을 몰래 빼내 에가시라로 바꿔 적었다. 호적을 고친 김씨 일당은 아버지가 에가시라로 창씨개명한 것처럼 속여 2002년 국가에 귀속된 땅을 돌려달라며 서울지법에 소송을 냈다. 이들은 2003년 11월 법원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은 뒤 지난해 8월까지 에가시라의 땅이었다가 국가에 귀속된 토지에 대해 6건의 민사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에서 패한 국가가 법원에 항소하면서 사기극이 탄로났다. 국가측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한 서울고검이 이들이 법원에 증거물로 제출한 서류가 변조된 것으로 보고 일선 지검에 수사를 지시했다. 황 판사는 “국가 소유 토지를 마치 자기 조상의 땅인 것처럼 속이려 공문서를 변조했으며 재판 승소를 위해 문서감정사까지 돈으로 매수해 범행을 저지른만큼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밝혔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 “반목 거두고 화해해야”

    ‘부처님 오신날’ 봉축 법요식 “반목 거두고 화해해야”

    불기 2549년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는 봉축 법요식이 15일 서울 조계사를 비롯한 전국 2만여 사찰에서 일제히 봉행됐다. 조계종(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이날 오전 서울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에서 10만여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법요식을 갖고, 부처님이 오신 뜻을 되새겼다. 법장 총무원장은 봉축사에서 “이념과 종교, 빈부와 인종을 넘어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본성을 가졌음을 깨달아 반목(反目)을 거두고 화해하며,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며, 독점하지 말고 나누며, 전쟁을 평화로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종정 법전 스님은 “자성(自性)에서 부처를 찾을지언정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설했다. 법요식에서는 헌화·헌등과 함께 불교의 위상을 드높인 공로를 인정받은 현대아산 김윤규 부회장과 산악인 박영석씨, 축구선수 박지성씨에게 불자대상이 수여됐다. 이어 중앙종회 의장 법등 스님이 남북 불교도 대표들이 채택한 공동발원문을 낭독했다. 남북 불교도는 발원문에서 “광복 60주년,6ㆍ15공동선언 발표 5주년을 맞이해 남과 북이 한마음 한뜻으로 이 땅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거두어내고 하나된 민족이 되도록 보살펴 주시길 부처님께 기원한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금강산 시계사 등 각 사찰에서 법요식이 열렸다. 법요식에는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이명박 서울시장 등 각계 인사가 참석했다. 태고종·천태종·진각종 등 각 종단들도 신촌 봉원사, 충북 단양 구인사 등에서 일제히 법요식을 갖고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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