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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을 가다

    KBS 드라마 ‘서울 1945’ 촬영장을 가다

    “나는 내 꿈대로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다시 그 시대가 오더라도 그렇게 살 것이다. 실체 없는 조국이 밥 한술, 누울 자리라도 줬단 말이더냐.” 8일 오후 KBS 수원 드라마센터 스튜디오. 주말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연출 윤창범·유현기, 극본 이한호·정성희)의 촬영이 한창이다. 극중 친일파 문정관 역의 김영철이 할복에 앞서 내뱉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무릎을 꿇고 할복해 쓰러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남짓. 그러나 수차례 촬영에 임하는 그의 눈에서 친일파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1930년대 광복 전부터 1945년 해방,1950년 한국전쟁 등 현대사를 다루고 있는 이 드라마는 18일 방송되는 21회에서 ‘해방’을 맞이하며 전환기에 접어든다.20회까지 주 무대를 이룬 일제강점기가 마무리되면서 해방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념의 주인공들의 격정적인 인생과 사랑 이야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윤창범 PD는 “당시 좌파 지식인들을 다루게 되지만 이데올로기가 아닌, 그 시대 젊은이들의 생각과 소망을 말하고자 한다.”면서 “해방 이후 순수한 열정과 정의감을 활기차게 그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촬영현장에서 할복을 택한 문정관은 주인공 문석경(소유진 분)의 아버지로, 일왕으로부터 자작 칭호까지 받은 친일파의 거두. 해방이 되자 사회주의자인 동생 문동기(홍요섭 분)로부터 대국민 사죄를 요구받지만 일본의 패망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자결한다. 앞서 이뤄진 해방 신 촬영은 드라마센터 오픈세트에서 대규모 군중 신으로 이뤄졌다. 주인공 김해경(한은정 분)은 태극기를 들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며, 민족주의자 최운혁(류수영 분)은 소련군과 함께 함흥으로 들어온다. 그들을 맞이하며 태극기를 흔드는 군중 속에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온 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소련군의 함흥 진주장면은 미군보다 먼저 들어온 소련군을 환영하는, 당시 혼란스런 시대상을 보여준다. 제작진이 밝혔듯이 드라마가 해방 이후에 초점을 둔 만큼 주인공들의 앞날에 관심이 쏠린다. 아버지의 자살로 몰락하는 문석경과 그녀가 사랑하는 최운혁, 김해경을 동시에 사랑하는 최운혁과 이동우(김호진 분) 등이 엮어갈 갈등과 사랑이, 시대적 아픔과 함께 어떻게 녹아들 것인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일파·좌파 등에 대해 자칫 치우쳐 보일 수 있는 설정이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도 중요할 것 같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이번 결혼기념일에 종쳐볼까

    ‘시민 누구든지 의미있는 일 있을 때 울산대공원안에 설치돼 있는 울산대종 치며 기념하세요.’ 울산시는 9일 시민들이 주요 기념일이나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울산대종을 치며 축하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도 타종을 개방하는 내용의 울산대종 관리 및 운영 규정을 만들어 오는 6월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울산대종 타종 기준은 경축타종·시민타종·기념타종으로 구분했다. 시민타종은 시민·단체 등이 결혼기념(1·10·25·50·60주년)·기관 및 단체 창립기념·첫돌·회갑·고희·입학·시험합격·학위취득·정부포상 등 좋은 일이 있을 때 신청하면 5팀을 선정해 달마다 셋째주 토요일 하루, 낮 12시부터 한다. 팀당 사용료 1000원을 내고 7번 칠 수 있다. 이밖에 3·1절, 광복절, 울산시민의 날 등 주요 기념일에는 낮 12시에,12월31일 제야행사 때에는 밤 12시에 기념타종 33번을 한다. 울산대종은 SK㈜가 11억원을 들여 만들어 울산시에 기증해 지난해 11월 울산대공원안에 설치됐다. 무게 21t, 높이 3.78m, 지름 2.24m, 하대두께 20㎝ 규모다.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초록향기 외나로도 봉래산 삼나무숲

    초록향기 외나로도 봉래산 삼나무숲

    3월초인데도 서울에는 아직 겨울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남쪽에는 봄기운이 완연하겠지. 급한 마음에 자동차를 몰고 무작정 남쪽으로 달렸다.7시간 만에 도착한 곳이 전라남도 고흥반도.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다도해의 이름 모를 섬들. 산구비를 돌면 낯선 이방인을 맞아주는 어머니의 품 같은 포구가 따뜻하게 반긴다.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고깃배들의 힘찬 모습, 아직은 좀 차갑지만 갯냄새 가득한 바닷바람에서 싱그러운 봄의 향기가 가득하다. 전남 고흥에는 아기자기한 갯가의 바위를 비롯, 연초록 숲이 가는 곳마다 발목을 잡는다. 화려한 봄꽃이 좋다고는 하지만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봄햇살과 푹신푹신한 흙이 가득한 ‘섬속의 숲’나들이는 지금이 제철이다.멀다고 망설이지 말고 사랑하는 애마(?)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남도의 숲으로 봄냄새를 맡으러 떠나보자.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고흥반도가 관광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13번째인 인공위성 발사대가 설치되는 나로우주센터의 건립계획이 발표되면서다. 하지만 고흥에는 우주센터보다 더욱 유명한 것이 있다. 바로 ‘삼나무숲’과 ‘상록수림’이다. 도대체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바다보다 유명한 것이 숲이라니…. # 원래 이름은 나라도 고흥반도 끝자락 나로도(羅老島)는 연륙교와 연도교로 이어져 있다. 외나로도까지는 내나로도를 징검다리 삼아 두 개의 다리를 건너야만 갈 수 있는 섬 아닌 섬이다. 조선시대까지 나라에 바칠 말을 키우는 목장이 많아 나라의 섬이란 뜻으로 ‘나라도’라 불려왔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우리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정체불명의 이름인 ‘나로도’로 바뀐,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또한 나로도는 남해안에서 ‘삼치’가 가장 많이 잡히는 어장. 일제시대에는 이 곳에서 잡힌 삼치와 각종 물고기를 전량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400여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수산 자원이 고갈돼 삼치가 예전처럼 많이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풍어를 이룬다. 고흥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은 외나로도 봉래산 자락에 있는 ‘삼나무 숲’이다. # 숲속의 바다, 바다속의 숲 외나로도 봉래산은 비록 해발 410m의 낮은 산이지만 건립 중인 우주 센터를 품에 앉고 정상에 서면 사면에서 바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산이다. 또한 운이 좋으면 제주도의 한라산까지 육안으로 볼 수 있다니 정말 한반도의 남쪽은 남쪽인 것 같다. 봉래산 정상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겨우 내내 푸르름을 잃지 않는 숲이 보인다. 바로 삼나무숲이다. 일제 때 시험림으로 조성된 숲으로 무려 20만여 평에 80년 된 삼나무와 편백나무 3만 그루가 자라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경남 함양의 상림숲이나 전남 장성의 축령산보다 더욱 잘 보존돼 있다. 삼나무 숲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 첫번째가 봉래산 산행의 시작점인 통신 중계소에서 봉래산 정상, 시름재, 삼나무숲을 거쳐 다시 통신 중계소로 돌아오는 2시간 코스. 두번째가 우주센터가 건립 중인 예내리 예당마을에서 삼나무 숲만 보고 오는 30분 코스. 자신의 일정에 맞추어 선택하면 된다. # 아름다운 봄의 교향곡 예내리 예당마을에서 꼬불꼬불 산길을 10여분 승용차로 오르자 갑자기 커다란 나무숲이 눈에 들어온다. 눈이 부실정도로 아름다운 나무들이 모여 있다. 거대한 크기의 나무에 압도당해 ‘거인의 나라’에 온 것처럼 자신이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입구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확 다르다. 향긋한 나무의 냄새,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실려오는 봄꽃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멀리 온 보람이 느껴진다. 숲으로 들어서자 말그대로 자연이 빚어낸 ‘위대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파란 하늘 끝에 닿을 듯 쭉쭉 뻗은 삼나무, 봄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연촉록의 나뭇잎, 그 사이를 정신 없이 뛰어노는 청설모와 다람쥐.‘푸드덕’하며 이방인의 침입을 알리는 꿩…. 게다가 연초록의 나뭇잎을 살짝 비켜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하얗고 투명한 봄햇살. 잿빛 도시와는 전혀 다른 낙원이었다. 중간중간에 만들어 놓은 의자가 있었다. 얼른 앉아 눈을 감고 잠시 쉬었더니 온갖 자연의 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 20여분을 걸었다. 길이 환해지며 숲이 끝나고 멀리 아름다운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삼나무숲을 즐겨도 좋고 내친김에 봉래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도 권할만하다. 어르신이나 아이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산행이라기보다는 걷는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리는 그런 곳이다. 안내 표지가 만들어져 있어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 당집이 있는 나무숲 외나로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나무숲이 있단다. 궁금했다. 얼마나 멋있고 보존 가치가 있기에 숲이 천연기념물 362호로 지정되었을까. 나로도 해수욕장으로 달렸다. 바닷가에 우뚝 버티고 있는 초록의 숲에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숲이 얼마나 우거졌는지 한낮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숲속은 컴컴해 늦은 오후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상록수림은 물고기가 서식하는 알맞은 조건을 만들어 물고기떼를 해안으로 유인하는 어부림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원래 주변에도 숲이 무척이나 우거졌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약 4000평정도의 숲만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상록수림으로 난대림상(暖帶林狀)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구실잣밤나무 등 16종의 상록활엽수가 수관(樹冠·나무가 우거져 줄기 윗부분에만 가지와 잎이 달려 있는 상태)을 이루고 있다. 개서어나무 등 23 종의 낙엽활엽수와 개머루 같은 덩굴식물 등 수많은 식물이 살고 있는 식물의 보고로 손꼽히는 곳이다. 300년 넘는 나무들이 즐비한 숲은 주민들에게 신령스러운 존재로 믿어진다. 상록수림의 가운데에는 말에게 제사를 지낸 마신당과 당묘가 있다. 마신당 안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말이 있어 정초에 제를 올린다고 한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얼마나 사람들이 숲을 못살게 굴었는지 해마다 훼손이 심해 지금은 숲을 들어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보존에 힘쓰고 있다. 숲을 돌아보는 데 30분이면 충분하다. # 세월을 간직하고 있는 푸름 아름드리 거목들이 항상 푸름을 지키고 있는 금탑사의 비자나무숲은 고흥에 숨겨진 보석. 천등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금탑사는 자동차로 올라간다. 차에서 내려 산책로를 따라 가보자. 숲 바닥에 나뒹구는 갈색의 잎들 사이에서도 봄전령이라는 쑥, 냉이, 달래 등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다. 금탑사는 송광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때(7세기 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당시에 금탑(金塔)이 있어 금탑사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4년(선조 37)에 증건축했다. 금탑사를 둘러싸고 있는 비자나무숲은 사찰 창건 후 300∼400년이 지난 1700년 이후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300년 넘게 같은 자리에서 민족의 역사를 굽어보고 있던 비자나무들은 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며 잘려지고 훼손되는 수난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은 금탑사와 고흥군에서 비자림 내 모든 나무에 번호표를 붙여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이곳의 비자나무들은 높이가 무려 9∼14m, 둘레가 1m가 넘는 등 세월의 무게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비자나무림 주변의 숲에는 율곡 이이의 부친이 호환(虎患)이 두려워 심었다는 나도밤나무가 있다. 또 푸조나무, 비목 등 갖가지 나무들이 살고 있으며 참취, 나비나물, 꿩의다리아재비 등이 여러 가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 ‘꼭지점 댄스’ 추다 만세! 만세! 만세!

    제87주년 3·1절을 맞아 1일 전국에서 각종 기념 행사가 열렸다.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 망언’으로 시끄러웠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대한민국 광복회는 오후 2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 태각비 앞에서 3·1 만세운동에서 희생된 선열에 대한 추념식을 열었다.●사이버 의병 태극기 들고 플래시 몹 앞서 오전 10시30분 서울 인사동은 흰색 저고리와 검은 치마·바지를 입은 남녀 고등학생 500여명이 흔드는 태극기로 넘실댔다. 북제주군 조천읍, 강원도 삼척 등에서도 만세 행사가 열렸다. 경남 함안군·군북군, 전북 익산에서는 당시 일본군의 무력 진압 현장이 그대로 재현됐다. 국학원과 다음 카페 ‘사이버 의병(cafe.daum.net/cybershinsi)’ 회원 50여명은 오전 11시 청계광장에서 ‘3·1절 태극기몹, 하나되는 대한민국’이란 행사를 열었다. 몹(플래시 몹의 줄임말)이란 불특정 다수가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약속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태극기를 들고 춤추다 오전 11시11분11초가 되자 최근 영화배우 김수로씨가 유행시킨 군무 (群舞)인 ‘꼭지점 댄스’를 추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부산 부산역 광장과 대구 대구백화점 앞에서도 같은 행사가 열렸다. 대구, 광주, 화성, 제주도 등에서는 3·1절 기념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독도 수호대 고추장 받아 들고 세계 횡단 출정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릴 목적으로 ‘독도수호 세계횡단 대장정’을 떠나는 대학생 5명은 오전 11시 대학로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들은 고추장, 비타민 등을 전달받고 255일간의 대장정에 올랐다. HID특수임무 청년동지회 소속 30여명은 오전 11시 일본 대사관 앞에 윤봉길·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영정이 그려진 가로 2m, 세로 3m 크기의 간판을 부착한 차량 10대를 몰고 대사관 진입을 시도하다 경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통일연대는 낮 12시 서울 광화문 미국 대사관 앞에서 ‘3·1절 기념 2006년 자주선언대회’를 열었다. 한편 오후 6시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서울 중구 세종호텔 세종홀에서 1968년에 일어난 ‘3·1 민주 구국 선언사건’ 30주년 기념회가 열렸다. 당시 3·1절 명동성당 기념 미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등 민주 인사가 유신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가 구속됐다.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사설] 노 대통령의 변함 없는 對日 비판

    노무현 대통령이 어제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책임있고 합당한 실천을 거듭 촉구했다. 이것만이 냉랭한 한·일관계를 풀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일본이 지향하는 ‘보통국가’에 대해서도 “법을 바꾸고 군비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류의 양심과 도리에 맞게 행동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또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마음의 문제라서 타국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발언을 직접 거론하며 “국가 지도자가 하는 말과 행동의 의미는 당사자 스스로의 해명이 아니라 그 행위가 갖는 객관적 성격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의 대일 강경 비판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지난해 고이즈미 총리가 또다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한 이후 이같은 기조를 유지해 온 노 대통령이다.‘각박한 외교전쟁’‘대한민국의 광복을 부인하는 행위’와 같은 격한 표현까지 썼었다. 따라서 우리 정부의 대일 강경 기조는 올해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정한 외교행위는 있겠지만 한·일 정상회담의 개최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다만 이번 기념사에서 일본 지도층과 국민을 분리한 점은 주목할 부분이다. 우리는 냉랭한 한·일관계의 원인은 일본측에 있다고 판단한다. 노 대통령도 밝혔지만, 지난 1년간 신사참배는 물론, 역사교과서 왜곡에다 독도문제까지 일본의 태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미국 일변도의 아시아 경시 외교가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일본 지도층의 거침없는 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양안 갈등과 북핵 문제 등 파고가 높아가는 동북아 정세에서 한·일간 유대는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일본 지도자들의 각성을 거듭 촉구한다.
  • 정진석 추기경 “동포애 차원서 北지원 확대”

    정진석 추기경 “동포애 차원서 北지원 확대”

    “추기경은 교황을 보필해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한국과 한국천주교의 위상이 모두 높아진 덕택에 추기경이 된 것으로 보고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75) 추기경은 서임 후 처음으로 2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히고 앞으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뜻을 따라 아시아선교, 특히 북한선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평양교구장 겸직이 추기경 서임에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안다. 북한선교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남북문제는 일방적인 생각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광복 직후 북한에는 58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 모두 파괴됐다. 당시 활동했던 100여명의 신부와 수녀 등 성직자도 전쟁을 전후해 모두 사망하거나 실종, 현재는 단 한명도 없다. 신자들도 광복 당시 5만 5000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1000∼3000명이 존재한다는 소문만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사실상 선교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 하지만 천주교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사랑과 동포애 차원에서 북한 주민에 대한 접근과 지원을 한층 더 확대해 북한 선교에 임할 것이다. ▶추기경이 되기 전 사회문제에 말을 아껴왔다. 추기경의 입장에서도 종전처럼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삼갈 것인가. -평소 교회 밖 문제에 말을 적게 한 것은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나름대로 전문가의 능력을 살려 잘 해나가야 하고 아마추어인 내가 섣불리 간섭하는 게 맞지 않는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분명한 원칙을 세상의 국민들에게 올바로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할 계획이다. 하지만 선의를 가진 국민들은 하느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은 두 명의 추기경을 가질 만큼 천주교세를 인정받았다. 아시아선교를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이란 경제력이 세계 30위권 안에 드는 나라란 뜻으로 안다. 추기경을 한 명이라도 보유한 나라는 65개국, 두명 이상 보유국은 30개국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두번째 추기경이 나온 것은 이처럼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종교적으로 모두 인정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한국이 아시아 선교의 핵심이 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계획을 갖고 있고 이미 추진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역할 분담을 어떻게 조정해나갈 것인가. -라틴어 속담에 “노인은 지혜다.”라는 말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37년간 추기경 소임을 수행해온, 나의 스승이고 대선배이자 큰형님이다. 여러 면에서 김 추기경의 지도를 받아 배워가면서 임무를 수행해나갈 것이다.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 종교간 화합에 대한 복안이 있나. -한국은 지구상의 숱한 다종교국 가운데서도 종교간 상호존중 차원에서 흔치 않은 모범국으로 생각한다. 우리처럼 많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국민복리에 협력하는 나라는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추기경 임명 때 여러 종단에서 축하해주셔서 고맙게 생각한다. 지금처럼 평화로운 종교관계가 지속될 수 있도록 더 한층 노력할 것이다. ▶교황의 남북한 동시 방문 가능성은. -교황은 세상 여행을 많이 하는 입장이지만 대부분 신자들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신자들 다음으로 기회가 있다면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층들을 만나곤 한다. 그런데 성직자를 한 명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교황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교황 영접 등 사전에 해결할 문제가 많아 우선 당분간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교황이 북한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교황의 방북이 성사될 것으로 믿는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3·1절 발굴] 고려혁명군 2인자 최호림 연해주 항일투쟁기 ‘햇빛’

    [3·1절 발굴] 고려혁명군 2인자 최호림 연해주 항일투쟁기 ‘햇빛’

    3·1운동 87주년을 맞아 러시아 연해주 등 해외 항일무장투쟁을 기록한 독립운동가의 자필문서가 공개됐다. 이를 기록한 사람은 1920년대 독립군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최호림(崔虎林·1893∼1960) 선생으로, 그동안 사회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묻혀 있던 그의 활동상도 확인됐다. 독립운동을 하며 언론인·극작가·소설가로도 활약한 최 선생의 기록에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군 및 비밀결사단체의 활동과 조직구성이 상세히 소개돼 해외 독립투쟁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은 27일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한국학과 반병률 교수로부터 최 선생의 ‘원동변강 고려인 생활역사 초록’(遠東邊疆 高麗人 生活歷史 抄錄) 제1권을 단독 입수했다. 46배판 97쪽 분량으로 된 초록은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자필로 쓴 것으로 선생이 39세 때인 1932년 9월15일 탈고됐다. 반 교수는 지난해 8월 하바로프스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이 자료를 입수, 현재 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에 살고 있는 선생의 둘째 동생 최주옥(93) 옹을 통해 진본임을 확인했다. 초록은 1919년 3·1운동 직후 불길처럼 번진 연해주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루고 있다.1893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생은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뒤 1919년 5월 연해주 라즈돌리노예에서 허제명·박명천 등과 함께 빨치산 독립의용군을 창설했다. 선생은 당시 자신의 활동상과 함께 혈성단 강국모 군대, 우리 동무군 등 인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병력규모, 장비, 조직도 등을 초록에 기록했다. 이밖에 북한 김일성이 ‘항일 신화창조’의 모델로 삼았다는 의혹이 있는 김경천 장군의 군대를 비롯해 조맹선의 독립단 군대, 이범윤의 의군부 군대, 안훈의 자유시독립군, 한창길 군대, 황하일 군대, 최 니콜라이 군대, 김병극 군대 등 당대 연해주와 만주를 주름잡았던 독립군들의 활동상도 망라했다. 이 부대들의 일부는 1922년 8월 1542명 규모의 고려혁명군으로 통합됐으며 최 선생은 이곳의 2인자격인 군정위원장을 맡아 사상교육을 담당했다. 이청천 장군이 사관학교장, 이범석 장군이 기병대장을 맡았다. 최 선생이 직접 그린 편제안을 보면 고려혁명군은 사령부 휘하에 ▲정치부(서무과, 통계과, 통신계, 선전선동과) ▲경리부(재무국, 피복국, 재봉국) ▲치중대(전투) ▲기병대(〃) ▲특립대(〃) 등 틀을 갖추고 있었다. 선생이 이끈 ‘최호림 부대’는 처음에 부대원 35명, 장총 35정, 탄약 3000여발로 시작해 석달 만에 부대원 120명, 장총 124정, 탄약 3만여발 규모의 대규모 의용군으로 성장했으며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번 초록을 통해 연해주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로 활약했던 광복단(1911년 결성)과 철혈단(1914년)의 주요 구성원 명단도 최초로 공개됐다. 광복단은 이동휘·오주혁·장기영·백규삼·황병길·김동한·이종호·계봉우·김하석·김하구·오영선·구춘선·김립 등 13명을 발기단으로 출범, 이명순·오병묵 등이 핵심역할을 했다. 철혈단의 중요인물로는 김철훈·김진·최의수·최이준·한강일·정순철 등을 꼽았다. 선생은 1920년대 후반부터는 무장투쟁을 일단락하고 사상과 문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활동에 투신했다.1928년부터 3년간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역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한글신문 ‘선봉’의 책임주필로 활약했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러시아의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로 명성을 날렸다. 이때 가극 ‘녀자대표’와 장편소설 ‘시비리 철도행’, 우화소설 ‘숙기거는 토끼’ 등을 창작하며 작가로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소련 스탈린정부의 한인 탄압이 본격화하면서 1936년부터 3년,1941년부터 4년,1948년부터 6년 등 3차례에 걸쳐 13년간 옥고를 치렀다. 최 선생은 1960년 가족들이 강제이주된 우즈베키스탄 아쿠르간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남양유업 홍두영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남양유업 홍두영 명예회장家

    기업설명회에 전혀 관심이 없는 회사, 돌다리를 몇 번씩 두들겨보고도 건너지않는 보수적 경영, 창업주 얼굴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회사…. 남양유업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자사의 우유와 유제품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라도 기업과 창업주에 대해 더 많이 알려야 한다. 하지만 이 회사의 창업주는 ‘크렘린’처럼 베일에 가려져 있다. 남양유업을 창업한 홍두영(87) 명예회장은 한국 낙농업의 대부로 통한다. 홍 명예회장은 40여년간 한국 낙농산업의 기반을 조성하고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 위한 외길을 걸어왔다. 홍 명예회장은 지난달 2일 타계한 김복용 매일유업 회장과 곧잘 비교된다. 두 기업 창업주는 나이가 비슷하고 이북 출신이라는 점 등 공통점이 많다.‘짠돌이’ 경영도 닮았다. 우유·조제분유·발효유·치즈·음료 등의 제품군도 상당히 겹치면서 ‘모방과 카피’ 논란도 많다. 연 매출액도 8000억원대로 엇비슷하다. 여러면에서 두 회사는 ‘물고 물리는’ 숙명적인 관계다. 남양유업의 대표이사 3명 가운데 한 명인 창업주 홍 명예회장은 국내 최고령 최고경영자(CEO)이다.1919년 1월7일생이다. 남양유업이 창립된 1964년 이후 43년째 대표이사와 사장, 회장, 명예회장 직위를 줄곧 지키고 있다. ●영변 지주의 장남 홍두영 명예회장은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면 서부동에서 홍재영씨와 최점숙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영변에서 손꼽히던 지주여서 어린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홍 명예회장은 일제시대인 1944년 일본 와세다 제1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와세다대에 진학, 불어불문학과를 마쳤다. 홍 명예회장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어릴적 행적이 거의 알려진 게 없다. 일본에서 귀국한 27세의 청년 홍두영은 어수선하던 광복 정국에서 고향 영변의 숭덕여자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교사 생활을 하던 1947년 5월 같은 영변 출신의 열살 아래인 지송죽(77)씨와 결혼,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김일성 정권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 엘리트 가정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홍 명예회장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가족과 홍선태(작고) 전 남양산업 대표 등 동생을 데리고 월남했다. ●배고픈 아이들 때문에 유업에 손대 홍 명예회장의 첫 사업은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종전 이듬해인 1954년 부산에서 비료를 수입하는 ‘남양상사’를 일으켰다. 회사가 안정적인 궤도에 들어서는 듯했지만 62년에 화폐개혁이란 뜻밖의 복병을 만나 8년만에 모든 재산을 날려버렸다. 일각에서는 당시의 충격이 너무 심해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소심증과 같은 마음의 병이 생겼다는 말도 한다. 남양유업 관계자는 “홍 명예회장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꺼린다.”며 “경기단체 회장직 제의도 많았지만 다 물리쳤다.”고 말했다. 첫 사업 실패 이후 홍 명예회장의 보수적 경영이 시작됐으며, 큰 아들 홍원식(56) 회장에 대한 경영수업이 다른 기업보다 일찍 시작됐다. 홍 명예회장이 사업 재기를 꾀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분유였다. 비료 수입업에 종사하던 그는 1963년 선진 외국 출장길에서 분유사업을 눈여겨 봐뒀던 것. 분유를 마음껏 먹고 있던 외국 아기의 모습을 본 그에게 한국전쟁 직후 먹을 게 없던 고국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홍 명예회장은 64년 3월 13일 남양유업을 설립했다. 당시 정부는 ‘보릿고개’를 해결하고 농민들의 소득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낙농사업에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홍 명예회장은 영변의 지주 아들이어서 낙농업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였다.1965년 11월 충남 천안에 제1공장을 짓고 자가생산 체제에 들어갔다. ●한 때는 아들, 부인까지 경영에 관여 충남 천안 공장부지가 금광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67년 1월10일 출시된 유아용 제조 분유인 남양분유는 ‘대박’을 터뜨렸다. 이어 77년에는 유산균 발효유인 남양 요구르트를 개발, 히트 브랜드 대열에 합류시켰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출연료 1억원을 주고 축구선수 차범근을 광고 모델로 내세웠다.78년 유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했다. 회사가 커지면서 가족 모두 팔을 걷어붙였다. 장남 홍원식 회장이 회사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중이던 73년부터 종종 회사에 나와 가업을 도왔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회사에 달려와 입출금 전표를 끊는 등 경리업무를 봤다.74년 기획실 부장을 시작으로 경영수업에 들어갔다.77년 이사,79년 상무,80년 전무,88년 부사장을 거쳐 지난 90년 4월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가 2003년 회장으로 물러났다. 그는 90년대에는 불가리스, 아인슈타인우유, 아기사랑秀,E-5, 위풍당당 동충하초 등을 내놓으며 남양유업이 성장가도를 달리게 했다. 회사가 성장 엔진을 필요로 하던 80년 9월 둘째 아들 홍우식(53) 서울광고기획 사장도 남양유업에 합류했다.85년 8월까지 남양유업 과장을 지냈다. 남양유업이 성장가도를 달릴 80년대 초반 큰아들 홍원식 회장과 둘째 아들 홍우식 사장이 모두 힘을 합쳤다. 홍 명예회장의 부인 지송죽씨도 한때 남양유업의 감사로 근무했다. 남양유업이 최근 곧잘 내세우는 ‘친인척 경영 참여 금지’는 그 당시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창업주 홍 명예회장은 당시 90년 4월 회사 최고경영자 자리를 홍원식 회장에게 물려주면서 회사 운영에 관해 두 가지 금기사항을 가르쳤다.‘기업인으로서 정치에 참여하지 말 것’과 ‘부동산 투기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홍 회장뿐만 아니라 기업인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항이다.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홍 회장은 30년 가까이 남양유업에서 근무한 덕분에 누구보다 회사 사정에 밝았다. 홍 회장은 지난 99년 10월 덴마크 왕실로부터 ‘영예로운 메달’을 받았고,2001년 7월 무차입 경영과 축산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25회 전국경영생산성촉진대회에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43년째 남의 건물을 사옥으로 지난 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위기 당시 대기업마저 자금난에 휘청거릴 때 남양유업은 오히려 20% 이상의 성장을 이뤘다. 대표적인 소매업종으로 불황을 잘 타지 않는 데다 기업 규모보다도 ‘브랜드 파워’가 강한 까닭이다. 게다가 98년 11월 그동안 상업·조흥·신한은행에 남아 있었던 180억원의 은행차입금을 모두 갚았다. 부채 비율을 167%에서 0%로 떨어뜨렸다. 회사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무차입(無借入) 경영의 원조’라고 공식 선언했다. 현재는 4700억여원을 확보,1만%의 사내유보율을 자랑한다. 이로 인해 상당한 금융소득도 올리고 있다. 이같은 남양유업의 성공은 창업주 홍 명예회장의 독특한 철학인 ‘4무(無)’경영에 바탕을 두고 있다.4무는 돈을 빌려쓰지 않고(무차입), 노사분규가 없으며(무분규), 친인척이 개입하지 않으며(무파벌), 자기 사옥이 없는(무사옥) 경영을 말한다. 인사에서의 투명성도 줄곧 강조된다. 오너의 친인척은 회사에 발붙이지 못하며, 파벌 형성 또한 용납되지 않는다. 홍보와 마케팅을 총괄하는 성장경 상무는 “남양유업에는 자연스럽게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사옥도 없다.43년째 남의 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다. 현재는 서울 중구 남대문 대일빌딩을 빌려쓰고 있다.1000억원이 넘는 시설투자를 하고 종업원이 3000명이 넘는 기업이지만 임원은 단 9명에 불과하다.43년간 단 한차례도 노사분규가 발생하지 않았다. 남양유업은 목장주들에게는 지독할 정도로 품질검사가 깐깐한 회사다. 그러나 원유값 만큼은 현금으로 결제하고, 결제기일도 정확하게 지키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목장주들이 거래하기를 가장 선호하는 회사로 통한다. 제품의 다양화는 추진하지만 사업의 다각화는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우유 캔을 만드는 회사나 낙농가를 위한 사료공장 등을 세우자는 내부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전공을 벗어나는 사업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게 지금까지의 방침이다. 식품 분야 세계 최고가 되기까지는 절대로 한 눈 팔지 않겠다는 창업주 홍 회장의 경영 철학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홍 회장은 지난 2003년 11월 대표이사 사장에서 물러나고 최대주주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홍 명예회장은 박건호 대표이사 부사장, 김승수 대표이사 전무 ‘3두마차’ 경영체제를 확립해 오고 있다. 홍 회장은 그러나 경영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회사에 사무실을 두고 거의 매일 출근을 하면서 중요 사항을 직접 결정할 만큼 경영에 깊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 명예회장도 가끔씩 회사에 들르곤 한다. 남양유업과 거래하는 회사의 한 관계자는 “남양유업이 1억원 이상의 경비를 지출할 때는 오너가 반드시 결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이에 따라 남양유업의 의사 결정이 경쟁 기업에 비해 많이 늦다.”고 말했다. 홍 명예회장은 부인 지송죽씨와의 사이에서 3남2녀를 두고 있다. 하지만 회사 직제상 경영에 참여하는 이는 창업주 홍 명예회장 자신뿐이다. 큰아들 홍원식 회장은 최대 주주로 남아있다. 자본금 44억 3300여만원인 남양유업의 지난해의 정확한 매출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2004년의 매출은 7729억 8400만원에 당기순익은 427억 9400만원에 이른다. 홍원식 회장은 19.44%(13만 9964주)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다. 홍 명예회장은 7.63%(5만 4907주)를, 홍원식 회장의 부인 이운경(54)씨는 0.89%(6400주)를 보유하고 있다. 둘째 아들 홍우식 사장이 0.63%(4568주), 셋째 아들 홍명식(46) 사까나야 사장은 0.4%(2908주)씩 갖고 있다. 홍두영 명예회장의 처남댁 김정선씨가 이색적으로 0.16%(1168주)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막내딸 홍영혜(44)씨는 지난해 초 장내에서 2612주를 매도, 지분율이 0.45%(3208주)에서 0.08%(587주)로 낮아진 것이 눈에 띈다. 특히 미국 투자회사 안홀드 앤드 에스 블라이흐뢰더가 15.90%(11만 4448주)를 보유하는 등 외국인들이 눈독을 들이는 회사다.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지분은 23.74%에 이른다. 남양유업의 주식 거래가 극히 부진해 한때 상장폐지 위기까지 내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소액주주를 무시하며 경영권 방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내년도 매출 목표는 1조원으로 잡고 있다. ●평범한 집안과 결혼 창업주 홍 명예회장의 자녀 혼맥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큰 아들 홍원식 회장은 지난 76년 고려해운 창업주 이학철(작고) 회장의 장녀 이운경(54)씨와 화촉을 밝혔던 것이 눈에 띌 정도다. 홍 회장은 이동찬(84) 코오롱그룹 회장 가문과도 연결된다. 이동찬 회장의 셋째딸 이혜숙(54)씨가 고려해운 이 회장의 장남인 이동혁(59) 고려해운 회장과 결혼한 까닭이다. 홍원식 회장은 부인 이운경씨와의 사이에서 진석(30), 범석(27)씨 두 자녀를 두고 있다. 이씨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을 통한 남양유업의 3세 승계가 어떻게 이어질지도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04년 말 홍 회장은 어머니 지송죽 전 감사로부터 주식 2만 108주(2.79%)를 모두 물려받았다. 이를 두고 형제간에 사이가 소원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다. 둘째 아들 홍우식씨는 남양유업을 주요 고객으로 삼는 광고회사 서울광고기획 사장을 맡고 있다. 홍 사장은 지난 71년 서울고교와 76년 연세대를 거쳐 83년 미국 산타클라라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해군 중위 출신인 홍 사장은 지난 79년 8월 한국IBM을 거쳐 지난 80년 9월부터 85년 8월까지 남양유업 과장을 지냈다. 남양유업내에 있던 광고 부문을 들고나와 부친의 우산에서 독립했다. 홍 사장은 지난 85년 8월 서울광고기획의 상무,88년 전무,90년 부사장을 거쳐 93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지난 1980년 설립된 서울광고기획은 2004년 총 취급고가 626억원으로 업계 17위였다. 주요 광고주로는 남양유업을 비롯해 태영·보령제약·보령메디앙스·BYC, 씨엠에스 천재교육·하선정종합식품 등이 있다.2005년도의 매출 목표는 900억원이지만 정확한 매출은 알려지지 않았다. 홍 사장은 지난 81년 5월 최수진(4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연년생인 자녀 인석(24), 서현(23)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지난 72년 이름을 춘애에서 수진으로 바꾼 최씨 역시 별다른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 영서(52)씨는 이교현(57)씨와 결혼, 수경·수영(25) 쌍둥이와 정호(18)군을 두고 있다. 홍 명예회장의 큰사위 이교현씨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셋째 아들 홍명식(46) 사까나야 사장은 연봉이 1억원을 웃도는 외환 딜러직을 떠나 음식점 8개를 운영하고 있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그는 서울파이낸스센터 지하 2층에 회전초밥 전문점 사까나야 등 6개의 지점을 두고 있으며, 한정식집 돈후이 등을 운영하는 외식업 사장이다. 홍 사장의 이력은 다채롭다. 용산고와 연세대를 거쳐 지난 87년 미시간대에서 MBA를 땄다.1987년부터 JP모건체이스 은행 등에서 12년동안 근무한 금융통.99년 인터넷서점 ‘예스24’를 공동 창업해 한세실업에 매각되기 전인 2003년 5월까지 부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6개 사까나야와 돈후이 등의 전체 매출액이 100억원대에 이르는 등 외식재벌 반열에 들어선 것으로 알려졌다. 외식업종으로 변경한 홍 사장은 지난해 초 인터넷 의류 쇼핑몰인 블루피치를 운영하는 김현정(40)씨와 결혼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김씨는 고려대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사장은 전처에게서 효정·희정(19) 등 일란성 쌍둥이 자녀를 두고 있다. 홍 사장은 쌍둥이 자녀 외에도 동근(13)군을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싱가포르에서 공부하고 있다. 막내딸 홍영혜씨(44)는 지난 90년 영국 웨일스개발청의 황재필(44) 한국사무소장과 결혼, 하나(17)양과 승현(11)군을 두고 있다. 영혜씨는 경희대 작곡과를 졸업한 재원. 서울 양정고를 마치고 연세대를 다니다가 미국 조지아주립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황씨는 지난 86년 주한 영국대사관 부상무관을 거쳐 89년부터 영국 웨일스개발청 한국사무소장을 맡고 있다. 황씨의 부친은 헌병차감을 지냈던 황태섭(작고)씨다. 황씨는 86년 연세대 어학당에서 홍씨와 얼굴을 익혔다. 이들은 홍씨의 올케 소개로 사귀다가 이듬해 결혼에 골인했다. chuli@seoul.co.kr ■ 우량아 선발대회 아시나요 남양의 대표적인 성장 엔진으로는 1971년 시작된 ‘전국우량아 선발대회’를 들 수 있다. 자라나는 2세의 건강과 체격 향상을 일깨워주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사회 공헌 행사였다. 첫 대회에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참가했고 아기와 엄마 등 수상자를 청와대에 초청, 오찬을 할 정도로 관심이 깊었다. 변변한 행사나 이벤트가 없던 당시로는 전 국민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으며,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이 당시 행사를 기억하고 있다. 우량아 선발대회는 창업주 홍두영 명예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아기 엄마라면 누구나 자기 아기를 우량아로 키우고 싶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토실토실한 아기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다.24개월 미만의 아기들이 지방 예선을 거쳐 결선을 겨뤘다. 제1회 전국 최우량아는 춘천에 사는 한영만 아기(69년 11월생)로 발육상황은 키 85㎝, 몸무게 13㎏, 머리둘레 50㎝, 생후 11개월부터 걷기 시작했으며 모유와 우유를 함께 먹였고 과일즙, 달걀 노른자 반숙 등을 간식으로 먹였다고 한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기의 대명사인 우량아 선발대회는 84년 제13회 대회까지 계속됐다. 이후 92년부터 임신육아교실로 바꿔 진행되고 있다. 출산율 저하를 막기 위해 새내기 주부들에게 올바른 출산 정보 전달에 힘쓰고 있다. 연간 1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전국에서 250회 이상 연다. 특히 산부인과·소아과·피부과·한방 분야의 권위있는 전문의들이 나와 임산부들에게 이해하기 쉽고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저출산이라는 사회적 숙제를 풀기 위한 남양의 또 다른 사회 공헌활동이다.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국군포로·납북자 생사 확인키로

    남북한은 23일 한국전쟁 당시와 그 이후의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확인 문제를 협의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올해 6·15공동선언 6주년을 맞아 남북에서 각 200명의 이산가족 특별상봉을 실시하기로 했다. 남북은 제7차 적십자회담 마지막 날인 이날 금강산호텔에서 수석대표 및 대표접촉을 갖고 이같은 내용의 7개항으로 된 합의문을 채택했다. 북측이 남북간 공식회담에서 전쟁 이후 납북자 생사확인 문제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측에 살아있는 국군포로는 500여명, 전쟁시기 이후 돌아오지 못한 납북자는 480여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북은 하지만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던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확인 방식에 대해서는 ‘이산가족 문제에 전쟁시기 및 그 이후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에 대한 생사확인 문제를 포함시켜 협의·해결해 나가기로 한다.’고 합의해 북측의 기존의 이산가족 방식 입장을 반영했다. 남측은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대상으로 별도의 생사확인작업을 벌이자고 요구했다. 남북은 이산가족 생사·주소확인 사업을 지속적으로 폭넓게 실시하기 위한 문제를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 아울러 6·15공동선언과 8·15 광복절을 맞아 이산가족 특별 화상상봉을 실시하기로 했다. 화상상봉 규모는 남북에서 각 60가족으로, 기존의 40명에서 늘어난 것이다. 화상상봉센터 준비와 이산가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추진하는 데 필요한 설비자재 등을 북측에 제공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실무접촉을 다음달에 갖기로 했다.8차 남북 적십자회담은 6월쯤에 금강산에서 개최된다.금강산 공동취재단·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김정일 8월 답방 ?

    “2006년에는 아마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이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최근 일본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발언이다. 정 의장은 통일부 장관 시절인 지난해 6·17 면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을 빨리 하자.”면서 적극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 위원장과의 합의를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남북 정상회담이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 열린다면, 내년보다는 올해가 적기일 수 있다. 내년에는 대선전에 접어들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올해 열린다면 6·15 정상회담 6주년,8·15 광복절 등이 계기가 될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촉매제가 될 것으로 관측됐던 DJ의 방북이 4월에서 6월로 연기되면서 8·15 광복절에 무게가 더 실리는 듯하다.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은 북한이 시기를 판단할 일이라면서 겉으로는 느긋한 표정이다. 청와대는 정 의장의 발언에 대해 즉각적으로 “정 전 장관이 지난해 방북시 그런 입장을 설명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긍정적 이해를 표한 것, 그 이상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의례적이고 원칙적인 얘기였다는 것이다.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상황판단을 해서 전략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승계한 참여정부로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할 경우 남북관계를 업그레이드시키지 못한 정부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물러난 전 청와대의 외교안보분야 고위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답방약속은 북한에는 금과옥조이기 때문에 정상회담을 하려고 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상간 만남에 남북 모두 절박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막후에서 정상회담이 거론되고 있거나 거론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기 위한 주변 여건은 6년 전과 사뭇 다르다. 우선 북한과 미국의 관계가 경색돼 있고,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금융제재가 풀리지도,6자회담 재개의 모멘텀이 생기지도 않으리란 관측이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한 당사자는 물론이고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이 참여할 만큼 한반도는 주변국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주변국의 이해와 적극적 지원이 남북정상회담 성사의 필요조건이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흩어져있던 임시정부 자료 ‘한눈에’

    흩어져있던 임시정부 자료 ‘한눈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13일이 아니라 4월11일? 광복 60년이던 지난해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가 발족시킨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회’(위원장 김희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8권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임정의 헌법·공보물은 물론, 임시의정원 문서, 한·일관계사료집, 독립신문 등까지 모아 펴냈다.2009년까지 모두 50권을 낼 예정이다. 이 가운데 오늘날 국회 속기록격인 임시의정원 문서에 임정 수립일이 4월11일로 기록된 것이 눈에 띈다. 지금처럼 임정 수립일이 4월13일로 지정된 것은 일본측 자료에 근거했다.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뒤 일본은 임정 사무실을 덮쳐 수많은 문건을 압수했다. 지금 현재 찾을 수 있는 것은 압수물 등을 기록해둔 목록뿐. 여기에 4월13일이 임정 수립일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확인된 임시의정원 문서에는 임정 주요 간부들이 4월11일을 임정수립기념일로 삼아 자축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번 자료집에는 중문판 독립신문도 발굴, 수록했다. 독립신문은 임정이 상하이 등에서 발행한 기관지로, 한국사람을 위한 국한문 혼용도 있지만 중국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중문판도 있다. 중문판은 중국인에게 알릴 내용이 있다고 판단했을 때마다 국한문판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발행했다. 이 때문에 200호 남짓 발행된 국한문판과 달리 40호 정도 냈다고 추측만 할 뿐 정확한 분량과 내용은 여태껏 잘 알려지지 않은 자료다. 특히 이번 자료집은 모든 자료의 영인본뿐 아니라 조판본까지 함께 실어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김희곤 위원장은 “조선왕조실록처럼 DB화해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찾아볼 수 있도록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임정은 1919년 3ㆍ1운동을 이어받아 처음으로 ‘민국’을 내세워 27년여간 독립운동을 벌였던 기관이다. 그동안 임정 자료는 몇차례 정리됐지만 각 기관별로 흩어져 있거나 개인소장품이 많아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독도지키기’ 예산없어 지지부진

    ‘독도지키기’ 예산없어 지지부진

    ‘우리는 과연 독도를 지켜낼 의지가 있는가?’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 조례 제정 1주년(22일)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하는 등 일본의 도발이 구체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의 독도 영유권 강화 대책은 지지부진해 허점이 노출되고 있다. 독도 분쟁 1년이 되도록 이에 필요한 예산 등의 뒷받침없이 1회성 이벤트 행사로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독도 지키기 종합대책 독도를 관할하는 경북도는 시마네현 의회의 지난해 3월16일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맞서 영유권 강화를 위한 독도 지키기 종합대책을 수립했다. 주요 전략은 ‘독도는 지키되 울릉도는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도는 이를 위해 독도 관련 18개 사업과 울릉도 5개 등 모두 23개의 개발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여기에는 총 사업비 7719억원(독도 지키기 2549억원, 울릉도 개발사업 5170억원)이 투입된다. 독도 지키기 사업은 ▲관광객 불편 해소 및 선박 대피를 위한 물량장 확충(800억원) ▲독도 해양·생태·수산자원 연구(550억원) ▲독도 관리선 건조(40억원) ▲독도 정보통신시설 확충(60억원) ▲독도 안전 및 편의시설 설치(10억원) ▲독도 탐방로 시설정비(30억원) 등이다. 울릉도 개발사업은 ▲대표적 숙원사업인 일주도로 유보구간 개설(4.4㎞,1500억원) ▲사동항의 종합항 개발(760억원) ▲경비행장 건설(2790억원) ▲독도 전망대 설치(10억원) 등이 있다. ●추진 실적 경북도는 지난해 3월말 독도 지키기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총 16개 사업 7597억원(도비 및 민자 7개 사업 122억원 제외) 규모의 국가 예산지원을 정부에 요청했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반영된 것은 ▲한국해양연구원 동해 연구기지 설치(97억원) ▲경북 해양·생명·환경산업 지원센터 건립(202억원) ▲독도 경비 관련장비 보강(69억원) ▲독도 탐방로 시설정비(16억원) ▲독도 경비대숙소 등 리모델링(21억원) ▲독도 영유권 공고화(3억원) 등 7개 사업 총 413억원이 고작이다. 전체 사업의 5.4% 진척도이다. 이 때문에 독도 지키기 사업이나 실효적 지배를 위한 울릉도 개발계획 자체가 흐지부지되고 있다. ●문제점 독도 종합대책은 예산 및 사업추진의 실효성 확보나 정부와의 사전 협의없이 여론에 밀려 선언적으로 한 것이 적지 않다. 울릉 경비행장 건설 및 일주도로 유보구간 개설, 독도 동∼서도 물량장 확충 등 7개 사업 총 6515억원은 예산과 사업 타당성 문제를 놓고 정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국해양연구원 동해 연구기지 설치와 경북 해양·생명·환경산업 지원 센터 건립은 정부가 지난 2003,2004년부터 각각 추진해 오던 사업이어서 전시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도 독도분쟁 1년이 되도록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한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책 경북도는 독도 지키기 종합대책 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중앙정부에 지속적인 예산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관련 민간단체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정부도 뒤늦게나마 지난해 11월 시행에 들어간 ‘독도의 지속 가능한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오는 3월중 관련 기본계획을 수립,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에는 독도 생태계 보전과 해양·수산자원의 합리적 관리이용 등에 관한 사업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계획에는 경북도와 달리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위한 울릉도 개발사업이 빠져 있어 국비사업으로 계속 추진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한편 경북도는 22일 독도에서 각종 행사를 갖기로 했다. 이의근 지사는 이날 독도의 유일한 주민인 김성도(66)·김신열(69)씨 부부가 사는 서도 어업인숙소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20번지 김성도·김신열’을 새긴 문패를 달아준다. 또 지난해 독도에서 개최한 광복 60주년 행사때 국·내외에 밝힌 ‘독도사랑, 평화의 메시지’가 든 액자를 독도경비대에 전달한다. 대구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인간시대] 5대째 아차산자락 토박이 ‘아차산지킴이’ 박정분 회장

    [인간시대] 5대째 아차산자락 토박이 ‘아차산지킴이’ 박정분 회장

    평생을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있다.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4H운동’.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 1980년대에는 한·일 민간인 친선운동. 1990년대 이후에는 친환경 운동과 저소득층을 위한 자선 활동. 굴곡 있는 대한민국 반세기의 봉사 활동 역사를 구구절절이 이야기할 수 있는 박정분(70) 할머니. 할머니는 5대째 광진구에서 살아온 서울 토박이다. 봉사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매주 일요일마다 아차산을 찾아 청소를 하는 ‘아차산 지킴이’의 대표를 맡아 봉사 활동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체험으로 얻은 박 할머니의 봉사 활동 철학을 들어보자. 글 사진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내 평생을 광진에 봉사하며 살았다오. 인생의 황혼에서 칠십 평생을 돌아보니 후회는 없어. 다만 요즘 사람들이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서 세상 모든 것이 귀한 줄 모르는 게 슬퍼.” ●14살부터 각종 활동… 봉사역사 산증인 배고프고 못사는 서러움 많았던 대한민국 반세기를 이어오는 동안 광진구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할머니가 있다. 지금은 ‘아차산 지킴이’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정분(70·광진구 광장동)씨가 그 주인공이다. 박 할머니가 평생 참여한 봉사활동 단체는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다.1945년 광복과 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4H운동’에, 개발시기인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 일본과 교류가 절실했던 80년대에는 한·일 민간인 친선운동,90년 이후부터는 친환경 운동과 저소득층을 위한 자선 활동 등에 투신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각종 봉사 활동에서 손을 놓았지만 박 할머니는 대한민국 봉사활동의 산증인인 셈이다. 박 할머니가 어린시절부터 봉사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 것은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아차산 자락에서 5대가 터를 일구고 살아온 광진 토박이인 박 할머니는 6·25전쟁 중인 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을 떠난 것 외에는 평생을 광진에서만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박 할머니의 나이는 열네살. 폐허가 된 고향을 재건하자는 4H운동이 일었을 때 당시 소녀였던 박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돼지를 나눠주고 키우는 법을 직접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박 할머니의 봉사활동은 스물 한살에 결혼한 뒤에도 계속됐다. 33년 3개월 동안 공직 생활을 하고 지난 92년 성수2가 1동장으로 퇴임한 남편은 박 할머니의 봉사 활동을 평생 지원해준 든든한 후원자였다. ●표창장 셀 수 없을 정도 70년대 새마을 운동은 물론이고 성동광진 농심회 광진구 회장,80∼91년 한·일 친선협회 부회장,90년대 아차산 어머니산악회 회장, 아차산 지킴이회 회장으로 활동하다보니 한 평생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박 할머니는 요즘은 매주 일요일에 아차산 지킴이들과 아차산에서 만나 쓰레기를 줍고 주변을 정리하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박 할머니 자택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부터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의 표창장이 즐비하다.‘자랑스러운 구민상’ 수상 경력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평생을 봉사 활동하며 살아온 이유를 묻자 박 할머니는 “팔자라니까. 그냥 좋아서 했어.”라며 웃는다. 그 시대에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 일 이루셨을 것이라는 기자의 말에 할머니는 “전쟁 통에 배운 게 있어야지. 우리 세대가 고생만 하고 참 애매한 세대라니까. 나는 봉사 활동하는 게 마냥 좋았으니까 됐어.”라며 웃는다. ●요즘 사람들 물건 귀하게 여길 줄 몰라 하지만 박 할머니가 평생을 광진에서 봉사 활동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5대가 한 장소에서 살았다는 박 할머니는 마을의 길 하나, 나무 한 그루, 동네 이름 하나까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소중한 역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어딨어. 요즘 아파트 한동을 한 시간만 돌아보면 1년 내내 써도 좋을 버려진 물건들이 넘쳐나. 그런게 모두 우리가 지켜야 할 역사인데 요즘 사람들은 간직하고 귀하게 여길 줄을 모르고 너무 쉽게 버려. 그러니까 내가 봉사 활동하면서 그런 것 지키고 싶었던 거야.”라며 박 할머니는 평생을 봉사 활동에 투신한 소신을 담담히 밝혔다. 세 아들은 출가시키고 남편과 단출하게 살아가고 있는 박 할머니는 “새벽 5시에 일어나도 여기저기 부르는데로 따라다니며 봉사 활동하면 하루가 너무 바빠.”라며 노년의 즐거운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사설] ‘반기문 유엔 총장’ 총력 지원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어제 차기 유엔 사무총장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한국인이 유엔 총장 선거에 출마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우리 외교사의 일대 사건이며 따라서 국가적 중대사로 규정지을 만하다. 대외적으로 유엔을 대표하는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헌장 97조에 나와 있듯이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 등 모든 회의에 참석해 국제 현안에 대한 협의와 권고, 분쟁 예방을 위한 조정 및 중재역을 맡는다. 한마디로 세계평화외교의 사령탑인 셈이다. 그렇기에 반 장관이 유엔 총장에 선출되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한껏 올라감은 물론 북핵문제 해결에도 긍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분단국에서 유엔 총장이 배출될 경우 세계평화에도 일조하는 일이 된다고 본다. 무엇보다 한국은 광복 후 정부수립에서부터 한국전쟁 및 전후 복구과정, 그리고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에 이르기까지 유엔과 특수한 인연을 맺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탄생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한다. 외교부에서 ‘해볼 만하다.’는 분석을 내놨고 40년 가까운 외교경력과 경륜을 지닌 반 장관의 상품성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유엔 총장선거 자체가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간의 미묘한 입장차로 언제나 엎치락뒤치락해 왔기 때문이다. 총장 당선이 국익을 위해 그렇게 좋다면 국가적 차원의 총력 지원이 마땅하다고 본다. 유엔 경험이 있는 인사들을 망라한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팀을 꾸리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때맞춰 나온 여야의 초당적 지지 약속도 시의적절했다는 판단이다. 문제는 총장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적 접근이다. 우선 5개 상임이사국의 개별적인 지지를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느 한 국가로부터도 거부감이 생기지 않도록 ‘줄타기’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란 점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방어논리 개발을 확실히 해둬야 한다. 또 유엔 개혁이 최대 쟁점인 만큼 반 장관의 개혁성과 추진력에 초점을 맞춘 인물론 전략도 필요하다.
  • 시골 작은역 어쩌다 ‘사고역’으로

    시골 작은역 어쩌다 ‘사고역’으로

    ‘고모역을 아시나요.’ 경부고속철도 동대구역과 경산역 사이에 위치한 미니역. 열차가 정차하지도 않고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직원이래야 역장을 포함해 고작 3명. 이곳이 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입구 위에 붙어있는 이름표 뿐이다. 그래도 대구시 수성구 고모동 고모역은 일반인에게 꽤 알려져 있다. 열차를 타고 이곳을 한번 지나보지 않은 사람도 고모역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다름 아닌 잇따른 사고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1925년 영업을 시작한 고모역은 1970년대 가장 활기를 띠었다. 아침 통근열차는 늘 만원이었고 역 앞에는 통학생들의 자전거가 즐비했다. 당시 연인원 5만 4000여명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비 내리는 고모령’의 작곡가 박시춘씨가 이곳에서 형제봉을 바라보며 영감을 얻어 곡을 지었다고 한다. 고모령은 대구 파크호텔 뒤편에서 팔현마을로 진입하는 구간을 말한다. 이 노래의 기념비가 1991년 호텔 진입로에 세워졌다. 고모령에서 2㎞쯤 가면 고모역이 나온다. 최근 그린벨트가 해제됐지만 아직 개발의 기계소리가 들리지 않는 대구속의 시골마을이다. 이 역은 광복의 혼란 속 1949년 불타 새로 지어진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9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대구 칠성시장이나 번개시장 등지로 농산물을 팔러나가던 동네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다. 그러나 점차 승객이 줄면서 지난해 10월 일반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간이역으로 추락했다. 박윤환(39)고모역장은 “동대구에서 부산과 마산을 가는 통근열차가 하루 4차례 운행됐으나 하루 1명꼴도 기차를 타지 않아 일반열차의 정차가 폐지됐다.”며 “지금은 군부대 화물을 실은 화물열차만 하루 1∼2차례 들렀다 갈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인근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승객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고모역이 폐쇄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열차사고의 ‘블랙홀’인가 1981년 5월14일. 부산을 출발해 경산역을 통과한 특급열차가 매호건널목(서울기점 335.4㎞)을 지나다 오토바이와 충돌한 뒤 사고처리를 위해 후진하다 뒤따라오던 부산발 대구행 보통급행열차가 뒷부분을 들이받았다. 승객 50여명이 숨지고 240여명이 크게 다쳤다. 2003년 8월8일. 서울발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역을 통과한 직후 서울기점 337㎞지점에서 선로에 정차해 있던 화물열차를 추돌,2명이 숨지고 90여명이 부상했다. 고속철(KTX) 개통 직후인 2004년 5월25일. 부산발 서울행 KTX가 고모역 통과직전에 객차 위쪽 전차선에 낀 이물질 때문에 단전이 일어나 20여분간 완전히 멈춰섰다. 지난 12일 오전 5시15분쯤에는 고모역 대구선 철로위에서 강릉을 출발, 동대구역으로 가던 4513호 무궁화호 임시관광열차 2량이 탈선했다. 탈선된 2개 차량에는 승객 32명이 타고 있었으나 열차가 서행중이어서 사상자는 없었다. 사고는 역으로 들어오려던 동대구∼포항 정기열차를 먼저 통과시키기 위해 관광열차를 대피선로로 보내는 과정에서 선로변환기 작동이 지체돼 발생했다. ●사고 왜 잦은가 사고원인은 ‘인재’가 대부분이다. 1981년 사고는 기관사가 임의로 후진하다 엄청난 사고를 냈다. 2003년 사고도 사고구간에서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열차 2대를 함께 진입시키지 않아야 하는 데도 화물열차 진행중 여객열차를 진입시킨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지난 12일 사고는 열차가 예정시각보다 30분 일찍 고모역에 도착하면서 이날 오전 5시20분 동대구역을 출발, 포항으로 향하는 무궁화 2109호 통근열차와 대구선(단선 선로)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예정에 없던 선로변환 작업이 이뤄지면서 탈선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방치하나 대구 시민들 사이의 유행어 가운데 ‘또 대구냐’ ‘또 고모역이냐’가 있다. 잇따른 대형사고에 대한 불안함을 반영한 것이다. 유상철(48·대구시 수성구 사월동)씨는 “사고가 반복되면서 주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휘동(53·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씨는 “고모역 사고가 ‘인재’라는 데는 수긍을 한다.”고 지적한 뒤 “그러나 철로 선형에도 상당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모역에서 경산역까지 6.8㎞구간의 철로 선형이 S자여서 기관사가 열차를 운행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있다는 것이다. ●대책은 없나 철도공사측은 이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이재철(56)철도공사 기관사선임지도팀장은 “고모역에서 경산역까지 철로의 곡선반경은 600m정도”라며 “이는 경부선 새마을열차가 시속 최고 110㎞까지 달릴 수 있는 구간이며 곡선 반경이 400m인 지점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크게 경사가 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KTX운행에 대비해 지난 2003년 경사도를 많이 줄이는 선형 개량공사를 했다.”며 “고모역 주변에서 사고가 많이 난 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모역에 가면 어머니의 눈물이 보인다’로 시작하는 이 시처럼 고모역 직원들은 고모역이 더 이상 사고역이 아니라 어머니의 향수를 떠올릴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기를 바라고 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15일 ‘신간회’ 79주년 기념식

    일제 강점기 국내 최대의 항일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의 창립 79주년 기념식이 15일 오후 3시 서울 YMCA 대강당에서 사단법인 민세 안재홍 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다. 이번 기념식은 1931년 신간회 해체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는 것이다. 기념식엔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김국주 광복회장 등이 참석한다. 신간회는 1927년 총무간사로 핵심역할을 담당했던 안재홍 선생을 비롯해 신채호·박헌영 선생 등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진영 인사 34명이 창립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4년만에 해체됐었다.
  • [사설] 혼혈관심 ‘냄비성’으로 끝나선 안돼

    미국 슈퍼볼의 영웅 하인스 워드와 그의 오늘이 있게 한 어머니 김영희씨에 대한 열광과 찬사가 연일 쏟아지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들의 효성이 일궈낸 인간승리는 어떤 드라마도 흉내낼 수 없는 감동적 요소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워드는 “엄마는 나의 모든 것” “반은 한국인 반은 미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라고 했다. 그런 인간적 면모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한국혈통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일부에서는 워드에게 명예시민증을 주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몇달 뒤 그들 모자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기업들은 서로 모시기 경쟁에 나섰다는 소문도 들린다. 그러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현실로 차분하게 돌아와 보자. 워드는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 인종차별과 냉대를 이겨내고 반듯하게 자라나 성공한, 보기드문 사례일 뿐이다. 따라서 지나친 미화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영희씨는 인터뷰에서 “한국 사람들이 흑인을 사람 취급했느냐.”면서 “잘 되면 쳐다보고 그렇지 않으면 쳐다도 안 보는 게 한국 풍토”라고 했다.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냉대가 유별난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문제를 던진 것이다. 국내에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태어난 ‘혼혈 1세대’가 5000명, 한국인과 아시아인 사이에 태어난 ‘2세대’가 3만명에 이른다. 혼혈인은 피부와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교육·군입대·취업의 제약은 물론이고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국력신장의 틈바구니에서 아시아·아프리카·남태평양 등 나라 밖에도 버려진 한인2세들이 많다고 한다. 세계적 교류의 확대로 혼혈은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의식은 순혈주의에 갇혀 인종의 다양성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혼혈인에게 마음을 열고 따뜻한 손길을 내밀자. 정부가 뒤늦게나마 혼혈인에 대한 차별적 제도와 관행을 적극 개선하겠다고 나선 점도 바람직하다. 국내외 한인2세들에게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 관심을 보이고 지원하는 것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서 당연한 소임이다.
  • [부고] 애국지사 장용담선생

    광복군으로 항일운동을 벌인 애국지사 장용담(張龍淡) 선생이 10일 별세했다.82세.1924년 11월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한 선생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해 중국 화북(華北)지구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3묘역. 발인은 13일.(02)3430-0457.
  • [주말화제] 강진 후생의원 김옥경 원장

    [주말화제] 강진 후생의원 김옥경 원장

    “항생제가 몸에 안 좋아 안 쓰는 게 아니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전남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5일장터 인근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 자리한 후생의원의 김옥경(79·여) 원장. 김 원장은 10일 왜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쓸 필요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김 원장이 운영하는 후생의원은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전국 병·의원의 2005년 3분기 감기약 항생제 처방률 현황에서 항생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병원으로 나타났다. 항생제 오남용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처방률 0’을 기록한 셈이다. 김 원장은 팔순의 나이에도 감기약 처방은 물론이고, 직접 주사도 놓으며, 상처를 꿰맬 정도로 정정하다. 환자는 하루 평균 20∼30명, 장날이면 40여명으로 늘어난다. 김 원장이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는 “병원에는 신경통과 관절염 등 노인성 질환자가 대부분이고 별로 큰 환자가 없어서 처방전을 쓸 때 항생제를 자연스럽게 안 쓰게 된다.”면서 “자랑거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원장은 그러나 “난 구식이어서 항생제가 없던 옛날 식으로 처방한다. 시골이라서 공기도 좋고 환자들도 나이가 많은데 굳이 항생제를 처방할 이유가 있느냐.”며 특유의 지론을 펼쳤다. 김 원장은 이어 “감기 환자가 와서 약을 잘 듣게 해달라고 주문해도 ‘기침이 안 나오게 하면 되지.’ 하면서 외면하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도시에 있는 병원 등에서는 염증 재발방지 등 항생제 처방을 할 때는 해야 한다.”면서 “나도 젊었을 때는 항생제 처방을 했다.”고 말했다. 무조건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병영면사무소 직원 신환석(36)씨는 “얼마 전 손에 찰과상을 입어 병원에 갔었다. 할머니 원장이 직접 상처를 꿰매 주었는데 잘 아물었다.”며 웃었다. 인근 슈퍼마켓 주인은 “건물 1층은 병원이고 2층은 살림집으로 쓰면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만 빼고 문을 연다.”며 김 원장의 노익장을 칭찬했다. 김 원장은 광복 전 선친을 따라 일본에서 공부하다 귀국,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를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에 졸업했다. 의사 경력만 올해로 56년째인 셈이다. 당시 전라도 함평으로 피란 와 1952년 함평보건지소장을 맡은 뒤 내리 15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1967년 상경, 서울과 일산 등에서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열기도 했다. 그는 1995년 조용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어 선친의 고향인 강진군 병영면에 내려와 둥지를 틀었다.10여년 전 남편과 사별했으며, 출가한 1남3녀 가운데 큰딸이 어머니 일을 돕고 있다. “시골 병원이 언론에 알려지는 게 부담이 된다.”며 나서기를 꺼리는 김 원장은 “노인 환자를 동무 삼아 지낸다.”고 근황을 전했다. 또 “늙어서도 건강하게 같은 또래 환자들을 치료해 주는 데서 큰 보람을 느낀다.”면서 “자식들이 말리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강진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경북도 대대적 독도행사

    경북도는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독도)의 날(22일)’ 조례 제정 1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있는데 맞서 독도 영유권 공고화를 위해 학술대회와 특별전 등 다양한 행사를 연다. 10일 도에 따르면 오는 16일부터 24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전시실에서 ‘역사와 의식, 독도진경특별전’을 연다. 이 특별전에는 국내 화가 60여명으로 구성된 문화의병대가 광복 60주년을 맞아 지난해 9월 독도에 들어가 그린 독도 풍경화 60여점을 전시한다. 독도사진 패널과 독도 축소모형도 함께 전시돼 관람객의 눈길을 끌 것으로 기대된다. 또 오는 22일 경북도청 강당에서 관련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독도·울릉도의 자원과 미래’란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그 뒤에는 ‘울릉도·독도 발전연구회’도 창립총회가 있을 예정이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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